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을 다룬 1985년 런던정경대 박사논문과 이를 발전시킨 1990년 저서가, 남예멘 사회주의 국가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 연구다.
사이먼 프레더릭 피터 핼리데이(1946~2010)는 아일랜드 더블린에서 태어난 작가이자 국제정치·중동 연구자다. 옥스퍼드 퀸스 칼리지에서 정치·철학·경제학을, 런던대학교 동양아프리카연구원에서 중동정치 석사를 마쳤고, 1969~1983년 『뉴 레프트 리뷰』 편집위원을 지냈다. 런던정경대에서 1985년 남예멘 대외관계 연구로 박사학위를 받았으며, 그때부터 2008년까지 이 대학 국제관계학 교수로 재직했다. 남예멘 인민민주공화국의 성과와 한계를 평가할 때 인용되는 대표적 연구자다.
1981년 3월 19일 비드고슈치에서 농민 연대의 합법화를 요구하던 그는 진압대에 의해 구타당해 병원으로 이송되었다.
로만 바르토슈체는 독립 농민노조의 합법화 투쟁을 민주화 이후의 농민정치로 이어나간 폴란드의 농민·반체제 지도자였다. 1981년 비드고슈치 점거농성을 이끌어 농민 연대의 등록을 관철했고 계엄 시기에는 구금되었으며, 1990년 부활한 폴란드 농민당의 초대 대표가 되어 그해 대선에 출마했으나 이듬해 지도부 경쟁에서 물러난 뒤 보수 성향의 소규모 농민 정당을 창당했다.
낙원이 아니라 헌법을 위한 혁명. 반(反)유토피아적 혁명. 유토피아는 단두대와 굴라크로 이어지기 때문이다.
공산주의 가정에서 자랐으나 1968년 위기로 투옥되며 반체제 인사가 되었다. 노동자방어위원회(KOR)와 연대노조의 전략가로 활동하고 1989년 원탁회의에 참여했으며, 《가제타 비보르차》 초대 편집장으로서 '당신들의 대통령, 우리의 총리' 구상을 제안해 평화적 권력 이양을 설계했다. 이후 정계에서 물러나 언론인으로 남아 자유민주주의를 옹호했다.
에이미 나이트는 소련과 러시아를 연구하는 미국 역사학자로, 《뉴욕 타임스》로부터 "서구 최고의 KGB 학자"라는 평가를 받았다. 1993년 저서 《베리야: 스탈린의 제1부관》은 영어권 최초의 본격적인 라브렌티 베리야 학술 전기로, 새로 개방된 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활용해 가학적 비밀경찰 우두머리라는 캐리커처 너머의 복합적 인물을 드러냈다: 스탈린 사후 권력 공백 속에서 흐루쇼프에게 제거되기 전까지 소련 체제의 자유화를 추진했던 인물이라는 역설이다. 나이트의 작업은 키로프 암살 사건부터 푸틴 시대의 정치적 살인까지 아우르지만, 굴라그의 설계자가 잠시나마 개혁의 목소리를 냈다는 베리야 역설이 그녀의 결정적 학문적 기여로 남는다.
상세 이력 보기
1977런던정치경제대학(LSE)에서 러시아 정치학 박사학위 취득
1977–1995미국 의회도서관 소련·러시아 전문 분석관
1993《Beria: Stalin's First Lieutenant》 출간
1993–1994우드로 윌슨 국제학술센터 펠로
2017《Orders to Kill: The Putin Regime and Political Murder》 출간
폴란드 충격요법의 설계자. 1989년 마조비에츠키 내각의 재무장관 겸 부총리로 임명되어 '발체로비치 계획'을 주도했고, 초인플레이션을 진압하고 가격 자유화와 통화 태환을 단행하며 동구권 최초의 급진적 시장 개혁을 실행했다. 개혁은 폴란드를 유럽에서 가장 빠르게 성장하는 경제로 전환시켰으나 20%의 GDP 하락과 대량 실업을 동반했고, '발체로비치는 물러가라'라는 구호로 상징되는 격렬한 사회적 반발을 낳으며 1989년 체제전환의 약속과 현실 사이의 간극을 대표하는 인물이 되었다.
'메르카데르의 얼음도끼가 트로츠키를 끝내지 못했다면, 내 책이 그러길 바란다'는 말로 자신의 트로츠키 전기를 소개했다.
로버트 서비스는 영국의 소련사 연구자이자 역사가로, 혁명부터 스탈린 사망까지의 정치사를 폭넓게 다뤘다. 레닌·스탈린·트로츠키 전기를 통해 개인의 선택과 혁명 국가의 구조를 함께 해석했다. 베리야 처형을 그의 범죄뿐 아니라 전후 개혁 구상을 둘러싼 권력투쟁으로 읽은 그의 서술은 역사해석 논쟁을 촉발했다.
"소련 경제는 대개 실패로 치부된다. 그러나 나는 소련 경제가 훌륭히 작동했다고 주장한다. 일본은 20세기 가장 성공한 개발도상국이었지만, 소련은 바로 그 뒤를 이었다."
옥스퍼드대학교 경제사학자 로버트 앨런은 2003년 저서 『농장에서 공장으로: 소비에트 산업혁명의 재해석』에서 소련의 산업화가 20세기 가장 성공적인 개발 사례 중 하나였다고 주장했다. 그의 추계에 따르면 1928년부터 1937년까지 1인당 소비는 약 30% 증가했으며, 이는 기존 연구(버그슨·채프먼)의 소비 감소 결론을 정면으로 뒤집는 결과였다. 그는 계량모형을 바탕으로 집단화 없는 NEP 지속 경로가 GDP 성장률 면에서는 실제 성과와 비슷했을 것이라는 반사실적 시뮬레이션도 제시해, 소련 산업화의 비용과 성과를 둘러싼 논쟁의 핵심 참조점이 되었다.
프랭크는 원자폭탄이 천황을 움직여 항복을 시작하게 했지만 「소련의 개입이야말로 항복 이행을 강제하는 데 무겁게 작용하는 요인」이라고 봤다.
리처드 B. 프랭크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을 연구한 군사사가다. 그는 과달카날 전투부터 일본 제국의 종말까지 작전과 정책, 일본 지도부의 판단을 함께 추적하며 전쟁의 귀결을 설명했다. 특히 『Downfall』은 일본의 항복을 둘러싼 군사적 붕괴와 원자폭탄 투하, 소련의 대일전 참전을 결합해 논쟁적인 종결 과정을 분석한 저작이다.
“군사적으로는 균형이 크게 이동한 순간이지만, 소련인들이 갑자기 자신을 믿기 시작한 상징적 전환점이었다.”
리처드 오버리는 제2차 세계대전과 나치 독일을 중심으로 현대 전쟁의 구조와 결과를 연구해 온 영국 역사가다. 그는 군사 작전만이 아니라 국가의 경제 동원, 사회적 경험, 정치적 심리가 전쟁의 향방을 함께 만든다고 분석했다. 스탈린그라드에 대해서는 소련의 전략적 승리가 아직 독일의 패배를 확정한 것은 아니지만, 소련 사회가 자신감을 회복하고 독일군이 취약하다는 인식이 세계로 퍼진 상징적·심리적 전환점이었다고 설명한다. 이러한 관점은 전쟁의 물질적 조건과 집단적 인식의 변화를 대립시키기보다 서로 연결해 파악한다.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그는 더그의 구성원을 120명으로 보는 통설에 반대하여, 실제로는 110명 미만이었고 고위 장교는 배제되었으며 새 구성원은 받지 않았다고 기록했다.
현대 에티오피아사를 연구하는 역사가이자 저술가로, 아디스아바바 대학 명예교수다. 하일레 셀라시에 1세 대학에서 역사학을, 런던 대학에서 아프리카사를 공부했고, 역사학과장과 에티오피아 연구소장을 지냈다. 1855~1991년을 다루는 에티오피아 현대사 표준 개설서를 썼으며, 사회연구포럼 창립 회원으로 활동했다.
「우리는 스탈린에게 기근 책임을 면제하지 않는다… 그러나 이 책이 드러낸 것은 잘못된 정책 탓에 초래되었지만 예상치 못했고 바라지도 않았던 기근 위기와 씨름하는 소비에트 지도부의 모습이다.」
오스트레일리아의 경제사가이자 소비에트 사회·경제·인구사 연구자. 로버트 W. 데이비스와 함께 『기아의 해』(2004)를 저술해 구소련 기록보관소 자료를 바탕으로 1932–1933년 기근 사망자를 약 450만~650만 명으로 추산했으며, 기근을 의도된 제노사이드가 아니라 강제적 곡물 조달 정책·기상 재해·무분별한 공업화가 결합된 비극으로 설명했다. 1990년 「소련의 1930년대 탄압 규모와 초과 사망에 대한 추가 해명」으로 서방의 과장된 수치를 바로잡기 시작했고, 훗날 독일과 소련의 탄압 규모를 비교하는 작업으로까지 나아갔다.
1993년 10월 4일 백악관 포격 중 라디오 생방송에서: "비행사들이여, 전투기를 띄워라! 이 갱단은 크렘린에 자리 잡고 있다. 죽어가는 민주주의를 구하라!"
소련의 마지막 영웅 중 한 명이자 러시아의 유일한 부통령. 아프가니스탄에서 Su-25 공격기로 485회 출격하고 두 차례 격추·포로가 된 전투 조종사였으며, 1988년 소련영웅 칭호를 받았다. 1991년 옐친의 러닝메이트로 RSFSR 부통령에 당선되었고, 8월 쿠데타 당일 루키야노프에게 고르바초프 건강검진을 요구하는 서한을 전달하고 백악관 방어를 조직했으며, 총대주교 알렉시 2세를 설득해 교회의 옐친 지지를 이끌어냈다. 이후 옐친의 경제개혁과 권력 집중에 반대하며 의회파에 섰고, 1993년 10월 헌정위기에서 의회에 의해 대통령 권한대행으로 선포되었다가 탱크 포격 끝에 체포되었다.
복무 중 '바실리 티모페예프'라는 필명으로 첩보소설을 쓰던 그는, 기밀 해제 전 예조프의 신문 조서 원문을 발굴해 평전에 그대로 실었다.
소련 국가보안 기관(KGB) 출신의 러시아 작가다. 기밀 해제 이전의 수사 기록에 접근해 예조프 평전 『예조프: 「철의」 스탈린 인민위원 이야기』(2001, 「특별 문서고」 총서)를 썼다. 이 책은 예조프 신문 조서와 재판 기록을 대량으로 수록한 초기 공간물이지만, 조서 인용 사이사이에 신문실 정경 같은 소설적 재구성을 끼워 넣어 사료와 창작의 경계가 흐리다는 한계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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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69모스크바 폴리그라프 연구소 졸업
1971KGB 학교 졸업
1970년대 이후국가보안기관 정보장교로 복무(대령), 태국·인도에서 타스 통신 특파원으로 근무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의사들이 생명을 구하려 애쓰는 병상에서 팔라흐는 말했다: '내 행동은 이미 목적을 달성했다.' 그리고 동료 학생들에게 다시는 이런 일을 하지 말고 살아서 투쟁하라고 당부했다.
1969년 1월 16일, 바르샤바조약군 점령 5개월 만에 체코 사회가 체념으로 빠져드는 것을 막기 위해 바츨라프 광장에서 분신한 카렐대학교 학생. 검열 폐지와 소련군 기관지 발행 중단을 요구하며 자신을 '인간횃불 1호'라 부른 그는 사흘 만에 사망했다. 20만 명이 운집한 장례식은 정상화 직전 체코슬로바키아의 마지막 항의였고, 20년 후 그의 기일 시위는 벨벳 혁명의 도화선이 됐다.
「내겐 양심이 있고, 그래서 내 양심이 시키는 대로 말하러 여기 왔다. 더는 이렇게 살 수 없다.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
1987년 8월 라글레 파레크, 티트 마디손 등과 함께 MRP-AEG를 공동 창립하고 히르베파르크 집회에서 '우리는 우리 땅에서 소수민족이 되어가고 있다'고 경고했다. 집회 후 언론의 인신공격 보도에 항의해 두 달간의 단식 투쟁을 시작했고, 단식 중 붉은 광장에서 몰로토프-리벤트로프 조약 공개를 요구하는 팻말을 들었다가 강제 송환되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회의 대의원으로 활동했으며, 유머 신문 「로사 리프」의 편집에도 참여했다.
'공수부대 단 하나의 연대로 2시간이면 질서를 되찾을 수 있다'고 체첸 전쟁 직전 장담했으나, 그 말은 재앙의 서막이었다.
파벨 그라초프는 아프가니스탄 전쟁에서 '최소 희생'으로 헤로이 칭호를 받은 공수부대 장군으로, 1990년 12월 소련 공수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91년 8월 쿠데타 당일 야조프의 명령에 따라 106공수사단을 모스크바에 진주시켰으나, 이튿날 백악관 강습 계획을 반대하고 옐친 측에 합류해 수비 병력을 보냄으로써 쿠데타 실패의 결정적 고리가 되었다. 쿠데타 후 러시아 초대 국방장관이 되어 1993년 체제 위기에서 옐친을 지지했고, 제1차 체첸 전쟁을 지휘했으나 참담한 패배와 부패 스캔들로 '파샤-메르세데스'라는 조롱을 받으며 1996년 경질되었다.
2008년 인터뷰에서 "프랑코는 스페인 국민 대다수의 감사와 인정을 받아 마땅하다"고 말해 논란을 일으켰다.
마오주의 도시게릴라 조직 GRAPO의 창립 멤버에서 프랑코 옹호 역사 수정론자로 전향한 스페인의 논쟁적 저술가. 스페인 내전의 발발 책임이 좌익의 반민주적 혁명 기도에 있다고 주장하며, 1934년 10월 사회당 주도 봉기를 내전의 실질적 시작으로 보는 관점으로 포스트 프랑코 역사학계의 정설에 도전했다. 2003년 『내전의 신화』는 15만 부 판매로 대중적 성공을 거두었고, 스탠리 G. 페인의 옹호와 폴 프레스턴 등 주류 역사학자들의 맹비판 사이에서 스페인 현대사 수정주의 논쟁의 중심에 섰다.
상세 이력 보기
1967–1974마드리드 국립언론학교 수학, 급진적 반프랑코 운동가로 활동
1975마오주의 무장조직 GRAPO 공동 창립, 10월 1일 경찰관 살해 현장에 동행
1977GRAPO에서 제명됨
1983납치 공모로 징역 1년 선고, 사회 재편입 조치 수용
1999–2001『내전의 기원』 등 3부작 출간, 수정주의적 내전 해석 제시
2003『내전의 신화』 출간, 15만 부 판매 및 6개월 연속 베스트셀러
2005–현재Libertad Digital 등에 칼럼 기고, 프랑코 옹호 역사서 다수 출간
1977년 12월 로우르데스 카살과 함께 안토니오 마세오 여단을 이끌고 쿠바를 방문했다. 55명이 참여한 이 방문은 쿠바계 이민자들과 쿠바 정부의 1978년 대화를 앞서는 것이었다.
마리펠리 페레스-스타블은 1949년 태어난 쿠바 출신 사회학자·역사가로, 11세 때 가족과 함께 쿠바를 떠났다. 뉴욕주립대 스토니브룩에서 1985년 사회학 박사, 플로리다대에서 정치학 석사 학위를 받았다. 『쿠바 혁명: 기원, 과정, 유산』(옥스퍼드대 출판부, 초판 1993)의 저자이며 이 책의 시대 구분이 이 사전의 역사 서술에서 인용된다. 플로리다 인터내셔널 대학교 사회학 교수(현 명예교수)를 지냈고 2004~2009년 미주 대화의 민주적 거버넌스 담당 부회장을 맡았다. 쿠바인이라는 출신 표기는 출처에 따른 것으로, 미국 시민권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네프는 왜 실패했는가? 나는 이 물음에 답하는 세 가지 방식을 구별하고자 한다: 합리적 포기, 비합리적·정치적 결정, 제약된 선택.
마크 해리슨은 케임브리지에서 경제학을, 옥스퍼드에서 현대사를 공부한 영국의 경제사가로, 1975년부터 워릭대학교 경제학과에서 가르치며 소련 경제사를 연구해 왔다. 1980년 논문 「네프는 왜 실패했는가」에서 네프 폐기를 합리적 포기, 비합리적·정치적 결정, 제약된 선택의 세 입장으로 정리해 이후 네프사 서술의 분석틀을 제공했다. 그의 연구는 전시 경제, 국가 비밀, 강제의 경제학으로 확장되었으며, 1996년 『전쟁의 회계』로 영국 슬라브·동유럽학회 앨릭 노브 상을, 2023년 『비밀의 리바이어던』으로 소비에트 체제의 정보 통제를 분석했다.
레닌 조선소에서, 레닌의 이론을 실행하는 과정에서, 우리는 마르크스-레닌주의를 접어 버렸다.
1980년 8월 그단스크 레닌 조선소 파업의 실질적 설계자로, 파업 계획을 입안하고 21개 요구를 분류·우선순위화했으며 공장간파업위원회(MKS)를 공동 창립한 폴란드의 민주화 운동가이자 역사가이다. 1981년 12월 계엄 선포 후 4년 넘게 지하에 숨어 불법화된 연대노조의 지하 조직망을 재건했고, 여성으로 변장해 딸의 세례식에 참석할 정도로 철저히 은신했다. 1986년 체포되었다가 사면으로 풀려났고, 공산정권 붕괴 후 국회의원·상원의장·내무차관을 거쳐 2010년에는 몇 시간 동안 폴란드 대통령 권한대행을 맡는 독특한 이력을 남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