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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쿠닌, 국가성과 아나키

인물미하일 바쿠닌, 레옹 강베타, 클레멘스 폰 메테르니히, 주세페 가리발디, 루이외젠 카베냐크, 카를 슈르츠, 오토 폰 비스마르크, 프란티셰크 팔라츠키, 피에르조제프 프루동, 고트프리트 킨켈, 요시프 옐라치치, 게오르크 헤르베크, 알프레트 빈디슈그레츠, 아돌프 티에르, 이반 파스케비치, 알퐁스 드 라마르틴, 조르주 당통, 빌헬름 바이틀링, 에티엔 카베, 세르게이 네차예프, 카를 마르크스, 페르디난트 라살레, 빌헬름 리프크네히트, 드미트리 밀류틴, 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용어아나키즘 사건파리 코뮌 학습사회주의의 분기 · 2장 노동자의 국가도 새로운 지배가 될까?

국제노동자협회는 겨우 9년 전에 생겨났을 뿐인데도 이미 전 유럽에서 경제·사회·정치 문제의 실제 전개에 큰 영향을 미치게 되어, 이제는 어떤 논객도, 어떤 정치가도 그것에 더없이 진지한, 그리고 흔히 불안한 주의를 기울이지 않을 수 없다. 공식·준공식 세계, 그리고 대체로 부르주아 세계, 곧 막노동을 착취하며 행복을 누리는 자들의 세계는, 아직 정체를 알 수 없고 윤곽도 흐릿하지만 이미 크게 위협하는 위험이 다가올 때 느끼는 그런 내면의 전율을 품고 그것을 바라본다. 유럽 모든 나라에서 동시에 실행하는 일련의 강력한 조치로 그 빠른 성공에 종지부를 찍지 않는 한 사회적·국가경제적 체제 전체를 어김없이 삼켜 버릴 괴물로 보는 것이다.

알다시피 지난 전쟁은 유럽에서 국가 프랑스의 역사적 우위를 꺾고 그 자리를 훨씬 더 가증스럽고 파멸적인 국가적 범게르만주의의 우위로 바꿔 놓았는데, 그 전쟁이 끝난 뒤 인터내셔널에 맞선 조치는 정부 간 협상에서 가장 즐겨 다루는 주제가 되었다. 지극히 자연스러운 현상이다. 본질상 서로 적대하고 끝내 화해할 수 없는 국가들은 자기들 존재의 공통된 토대이자 목적인 인민 대중을 함께 예속시키는 일 말고는 서로 결합할 다른 토대를 찾을 수 없었고 지금도 찾을 수 없다. 비스마르크 공은 물론 이 새로운 신성동맹의 주된 선동자이자 추진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그러나 맨 먼저 제안을 들고 무대에 나선 것은 그가 아니었다. 그는 그런 발의라는 미심쩍은 영예를 자신이 방금 격파한 프랑스 국가의 굴욕당한 정부에 넘겨주었다.

사이비 인민 정부의 외무장관, 공화국을 변함없이 배반해 왔으나 그 대신 예수회의 충실한 벗이자 옹호자, 신을 믿으면서도 인류를 경멸하고 그 자신은 인민의 대의를 위해 싸우는 모든 정직한 투사에게 경멸받는 자, 모든 변호사의 원형이라는 영예를 오직 강베타 씨 한 사람에게나 양보할 그 악명 높은 웅변가 쥘 파브르가 악랄한 중상자이자 밀고자 역할을 기꺼이 떠맡았다. 이른바 「국민방위」 정부의 구성원들 가운데에서도 그는 의심할 바 없이 인민 방위를 무장 해제하고 파리를 오만하고 뻔뻔하고 무자비한 승자의 손에 노골적으로 배신하여 넘겨주는 데 가장 크게 이바지한 사람 가운데 하나였다. 비스마르크 공은 온 세상이 보는 앞에서 그를 우롱하고 능멸했다. 그런데 쥘 파브르 씨는 자기 자신의 치욕과, 자신이 배반하고 어쩌면 팔아넘기기까지 한 프랑스의 치욕이라는 이중의 치욕을 자랑으로 여기기라도 하듯, 자신에게 망신을 준 승리한 독일 제국의 위대한 재상의 비위를 맞추려는 욕망과 함께 프롤레타리아트 전반, 특히 파리 노동자 세계에 대한 깊은 증오에 떠밀려 인터내셔널을 정식으로 밀고하고 나섰다. 인터내셔널의 구성원들이 프랑스에서 노동자 대중의 선두에 서서 독일 정복자들에 맞서는 동시에 국내의 착취자·통치자·배신자들에 맞서는 전 인민적 봉기를 일으키려 했다는 것이다. 공식적 프랑스, 곧 부르주아 프랑스가 인민의 프랑스를 본보기가 되도록 엄하게 벌해야 했던 끔찍한 범죄였다!

이리하여 끔찍하고 수치스러운 패배를 당한 이튿날 프랑스 국가가 처음으로 입 밖에 낸 말은 가장 추악한 반동의 말이 되었다.

쥘 파브르의 그 기념비적인 회람을 읽지 않은 사람이 있을까? 거기서 조잡한 거짓말과 그보다 더 조잡한 무지를 능가하는 것은 오직 변절한 공화주의자의 무력하고 광포한 악의뿐이다. 그것은 한 사람의 절망적인 외침이 아니라, 세상의 모든 것을 다 써 버리고 마침내 기진맥진하여 죽음을 선고받은 부르주아 문명 전체의 절망적인 외침이다. 피할 수 없는 종말이 다가오는 것을 느끼면서 이 문명은 해로운 생존을 조금이라도 늘리려고 악에 받친 절망 속에서 무엇에나 매달리며, 한때 자기 손으로 무너뜨린 과거의 모든 우상에게 도움을 청한다 — 신에게도, 교회에도, 교황에게도, 가부장적 권리에도. 그리고 무엇보다도 가장 확실한 구원 수단으로서 경찰의 비호와 군사 독재를 부른다. 사회혁명이라는 무서운 폭풍으로부터 「정직한 사람들」을 지켜 주기만 한다면 설령 프로이센의 군사 독재라도 좋다는 것이다.

쥘 파브르 씨의 회람은 메아리를 얻었는데, 어디서였을 것 같은가 — 스페인에서였다! 스페인의 잠깐 국왕이던 아마데오의 잠깐 장관 사가스타 씨도 비스마르크 공의 비위를 맞추고 자기 이름을 불멸로 만들고 싶어졌다. 그 역시 인터내셔널에 맞서 십자군을 일으켰고,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의 몹시 모욕적인 비웃음만 산 무력하고 무익한 조치들로는 성에 차지 않아 그 역시 미사여구로 가득한 외교 회람을 썼다. 그러나 그는 그 회람 때문에, 비스마르크 공과 그의 조수 쥘 파브르는 틀림없이 찬동했겠지만, 더 신중하고 덜 자유로운 영국 정부에게서 마땅한 호통을 들었고, 몇 달 뒤에는 실각하고 말았다.

하기야 사가스타 씨의 회람은 스페인의 이름으로 말하기는 했지만, 불행한 아마데오의 행복한 아버지인 노련하기 그지없는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직접 지도 아래 이탈리아에서, 작성까지는 아니더라도 구상된 것으로 보인다.

이탈리아에서는 인터내셔널에 대한 박해가 세 방향에서 일어났다. 첫째로, 예상대로 교황 자신이 그것을 저주했다. 그는 이를 더없이 독창적인 방식으로 했다. 인터내셔널의 모든 회원을 프리메이슨, 자코뱅, 합리주의자, 이신론자, 자유주의 가톨릭교도와 한데 뒤섞어 하나의 공통된 저주를 내린 것이다. 교황 성하의 정의에 따르면, 신의 영감을 받은 그의 말의 분출에 맹목적으로 복종하지 않는 자는 누구나 이 버림받은 결사에 속한다. 꼭 그렇게 26년 전에 한 프로이센 장군은 공산주의를 정의했다. 「너희는 공산주의자가 된다는 것이 무엇인지 아는가? — 그는 병사들에게 말했다 — 그것은 국왕 폐하의 지고한 생각과 의지를 거슬러 생각하고 행동하는 것이다.」

그러나 국제노동자협회를 저주한 것은 로마 가톨릭 교황만이 아니었다. 러시아에서는 형이상학적 이신론자이자 이탈리아 새 교회의 창시자로서보다 이탈리아의 애국자, 음모가, 선동가로서 훨씬 더 잘 알려진 저명한 혁명가 주세페 마치니, 그렇다, 바로 그 마치니가 1871년, 파리 코뮌이 패배한 이튿날, 야수적인 베르사유 법령의 야수적인 집행자들이 무장 해제된 코뮌 전사들을 수천 명씩 총살하고 있던 바로 그때, 로마 가톨릭의 파문과 경찰·국가의 박해에 자기 나름의 저주, 겉으로는 애국적이고 혁명적이지만 실상은 완전히 부르주아적이면서 동시에 신학적인 저주를 보태는 것이 유익하고 필요하다고 여겼다. 그는 자기 말 한마디면 이탈리아에서 파리 코뮌에 대한 모든 공감을 죽이고 막 생겨나던 인터내셔널 지부들을 싹부터 질식시키기에 충분하리라고 기대했다.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의 요란하고 엄숙한 저주만큼 이 공감을 키우고 인터내셔널 지부를 늘리는 데 이바지한 것은 없었다.

교황에게 적대적이지만 마치니에게는 더욱 적대적인 이탈리아 정부도 나름대로 손 놓고 있지 않았다. 처음에 정부는 도시뿐 아니라 이탈리아의 농촌에까지 빠르게 퍼져 나가는 인터내셔널이 자신에게 끼칠 위험을 깨닫지 못했다. 정부는 새 협회가 마치니의 부르주아 공화주의 선전이 거두는 성과를 견제하는 구실을 할 뿐이리라고 생각했고, 그 점에서는 틀리지 않았다. 그러나 정부는 곧, 바로 자신이 극도의 빈곤과 억압으로 몰아넣은 열정적인 주민들 사이에서 사회혁명의 원칙을 선전하는 일이 마치니의 어떤 정치 선동이나 기도보다 자신에게 더 위험하다는 것을 확신하게 되었다. 파리 코뮌과 인터내셔널에 맞선 분노에 찬 발언 직후에 이 위대한 이탈리아 애국자가 죽자, 이탈리아 정부는 이쪽으로는 완전히 안심하게 되었다. 우두머리를 잃은 마치니파 당은 이제 정부에 조금도 위험이 되지 않는다. 당 안에서는 이미 눈에 띄는 해체 과정이 시작되었고, 그 원칙과 목적은 물론 구성 전체가 순전히 부르주아적이므로, 오늘날 모든 부르주아적 기도를 덮친 그 무력증의 틀림없는 징후를 드러내고 있다.

이탈리아에서 인터내셔널의 선전과 조직은 사정이 다르다. 그것은 이탈리아에서나 유럽의 다른 모든 나라에서나 현대 사회의 생명과 힘과 미래를 온통 제 안에 모으고 있는 막노동자 계층에 직접, 그리고 오로지 그들에게만 호소한다. 부르주아 세계에서 이 계층에 합류하는 사람은 현 질서, 곧 정치·경제·사회 질서를 진심으로 증오하게 되어 자신을 낳은 계급에 등을 돌리고 인민의 대의에 온전히 몸 바친 소수뿐이다. 그런 사람은 많지 않지만 그만큼 귀중하다. 물론 부르주아 일반의 지배욕을 증오하게 되면서 자기 안의 개인적 공명심의 마지막 찌꺼기까지 질식시켰을 때에만 그렇다. 그럴 경우에는, 거듭 말하지만, 그들은 참으로 귀중하다. 인민은 그들에게 생명과 원초적 힘과 토대를 준다. 그 대신 그들은 인민에게 실증적 지식, 추상하고 분석하는 습관, 그리고 스스로 조직하고 결사를 만들어 내는 능력을 가져다준다. 이 결사들은 다시 의식적인 전투력을 만들어 내는데, 그것 없이는 승리를 생각할 수 없다.

이탈리아에는 러시아에서처럼 그런 젊은이가 상당히 많이 있었고, 다른 어느 나라보다 훨씬 많았다. 그러나 그보다 비할 바 없이 더 중요한 것은, 이탈리아에 도시와 공장의 노동자 및 영세 수공업자 200만~300만 명과 땅 없는 농민 약 2천만 명으로 이루어진, 천성적으로 대단히 영리하지만 대부분 글을 모르고 하나같이 빈궁한 거대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있다는 점이다. 이미 위에서 말했듯이, 이 헤아릴 수 없는 사람의 무리는 해방자이자 이탈리아 땅을 모은 국왕의 자유주의적 홀 아래 상층 계급의 압제적이고 도둑 같은 통치로 말미암아 절망적인 처지에 내몰렸다. 얼마나 절망적인지, 현 통치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이자 이해 당사자들조차 의회에서도 관변 신문에서도 이 길로 더는 나아갈 수 없으며, 모든 것을 부숴 버릴 인민의 폭동을 피하려면 인민을 위해 무언가를 해야 한다고 시인하고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을 정도다.

그렇다, 어쩌면 이탈리아만큼 사회혁명이 가까운 곳은 없을 것이다. 스페인조차 예외가 아니다. 스페인에는 이미 공식 혁명이 있고 이탈리아는 겉보기에 모든 것이 조용한데도 그렇다. 이탈리아에서는 온 인민이 사회적 변혁을 기다리며 날마다 의식적으로 그것을 지향한다.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가 인터내셔널의 강령을 얼마나 폭넓게, 얼마나 진심으로, 얼마나 열렬하게 받아들였고 지금도 받아들이고 있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이탈리아에는 유럽의 다른 많은 나라와 달리 특별한 노동자 층이 없다. 그 층은 상당한 벌이 덕분에 이미 어느 정도 특권을 누리고, 어느 정도 문학적 교양까지 자랑하며, 부르주아적 원칙과 지향과 허영에 깊이 물들어 있어서, 거기에 속한 노동자들은 처지로만 부르주아와 구별될 뿐 지향으로는 결코 구별되지 않는다. 특히 독일과 스위스에 그런 노동자가 많다. 반대로 이탈리아에는 매우 적어서, 아무 흔적도 영향도 남기지 못한 채 대중 속에 묻혀 버린다. 이탈리아에서는 마르크스 씨와 엥겔스 씨, 그리고 그들을 따라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학파 전체가 지극한 경멸로 평하는 그 빈궁한 프롤레타리아트가 우세하다. 그러나 그 경멸은 전적으로 부당하다. 미래 사회혁명의 모든 지성과 모든 힘은 바로 그 프롤레타리아트에, 오직 그 안에만 있고, 앞서 말한 노동자 대중의 부르주아적 층에는 결코 없기 때문이다.

이에 관해서는 아래에서 더 자세히 이야기하기로 하고, 지금은 다음 결론을 끌어내는 데 그치자. 바로 이탈리아에서 빈궁한 프롤레타리아트가 결정적으로 우세하기 때문에 이 나라에서 국제노동자협회의 선전과 조직은 더없이 열렬하고 참으로 인민적인 성격을 띠었고, 바로 그 때문에 도시에 그치지 않고 곧바로 농촌 주민까지 사로잡았다.

이탈리아 정부는 지금은 이 운동의 위험을 충분히 깨닫고 온 힘을 다해 그것을 질식시키려 애쓰지만 헛수고다. 정부는 요란하고 미사여구 가득한 회람을 내지 않고, 경찰 권력답게 소리 없이 움직이며 설명도 고함도 없이 숨통을 조인다. 모든 법을 거슬러 노동자 단체를 하나씩 차례로 폐쇄하는데, 왕족, 장관, 지사, 그 밖에 지체 높고 존경받는 인사들이 명예 회원으로 이름을 올린 단체만은 예외다. 그 밖의 모든 노동자 단체는 무자비하게 박해하여 서류와 돈을 압수하고, 회원들은 재판도 없이, 심지어 예심도 없이 더러운 감옥에 몇 달씩 가둬 둔다.

이렇게 행동하면서 이탈리아 정부가 자기 자신의 지혜만이 아니라 독일의 위대한 재상의 조언과 지시도 따르고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예전에 나폴레옹 3세의 명령에 고분고분 따랐던 것과 꼭 마찬가지다. 이탈리아 국가는 기묘한 처지에 놓여 있다. 주민 수와 영토 크기로는 열강에 들어가야 마땅하지만, 실제 힘으로는 파산했고 조직이 썩었으며 온갖 노력에도 규율이 몹시 엉망인 데다 인민 대중은 물론 소부르주아지에게까지 미움을 받고 있어서, 겨우 2류 강국으로나 인정받을 수 있을 정도다. 그래서 이 나라에는 후견인, 곧 이탈리아 밖의 주인이 필요하다. 나폴레옹 3세가 몰락한 뒤,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애국적 노력과 공훈이 마련해 놓은 토대 위에 피에몬테의 음모로 세워진 이 군주국에 없어서는 안 될 동맹자의 자리를 비스마르크 공이 이어받은 것을 누구나 당연하게 여길 것이다.

하기야 범게르만 제국의 위대한 재상의 손길은 이제 온 유럽에서 느껴진다. 예외라면 기껏해야 영국, 그러나 이 생겨나는 강대함을 불안 없이 바라보지는 못하는 영국, 그리고 적어도 당분간은 자기 혁명과 지리적 위치 덕분에 독일의 반동적 영향에서 안전한 스페인 정도다. 새 제국의 영향력은 그 제국이 프랑스에 거둔 놀라운 승리로 설명된다. 누구나 인정하듯이, 이 제국은 그 위치와 정복으로 얻은 막대한 자원과 내부 조직으로 보아 오늘날 유럽 열강 가운데 단연 첫 자리를 차지하고 있으며, 그 모두에게 자신의 우위를 느끼게 할 수 있다. 그리고 그 영향력이 반드시 반동적일 수밖에 없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비스마르크 공의 천재적이고 애국적인 협잡[1]으로 통일된 지금 모습의 독일은, 한편으로는 국왕-황제의 손짓 하나로 세상 모든 것을 목 졸라 죽이고 찔러 죽이며 안팎으로 온갖 범죄를 저지를 태세가 된 자기 군대의 모범적인 조직과 규율에 기대고, 다른 한편으로는 지금까지 독일 귀족, 독일 시민계급, 독일 관료, 독일 교회, 독일 학자 동업 집단 전체가, 그리고 이들의 결합된 영향 아래 드물지 않게 — 아아! — 독일 인민 자체까지 두드러지게 지니고 있는 충성스러운 신민의 애국심과, 무한한 민족적 야심과, 권력에 대한 그 오래된 역사적이고 역시 무한한 복종과 숭배에 기대고 있다 — 이런 독일은, 거듭 말하거니와, 자기 단독 지배자이자 통치자의 전제적·입헌적 권능을 자랑하며, 현대 사회정치 운동의 두 극 가운데 하나, 곧 국가성과 국가와 반동의 극을 온전히 대표하고 제 안에 아우른다.

독일은 무엇보다도 국가다. 루이 14세와 나폴레옹 1세 치하의 프랑스가 그러했고, 프로이센이 지금까지 줄곧 그러하듯이. 프리드리히 2세가 프로이센 국가를 최종적으로 세운 이래 문제가 제기되었다. 누가 누구를 삼킬 것인가, 독일이 프로이센을 삼킬 것인가, 프로이센이 독일을 삼킬 것인가? 결과는 프로이센이 독일을 먹어 버렸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독일이 국가로 남아 있는 한, 겉으로만 자유주의적이고 입헌적이고 민주적이며 심지어 사회민주주의적인 어떤 형태에도 불구하고, 독일은 필연적으로 유럽에서 가능한 모든 전제정의 일차적이고 주요한 대표자이자 항상적인 원천일 수밖에 없다.

그렇다, 역사에 새로운 국가성이 형성된 이래, 곧 16세기 중반부터 독일은, 오스트리아 제국도 그것이 독일적인 한 독일에 넣는다면, 본질적으로 유럽의 모든 반동 운동의 주된 중심이기를 결코 그친 적이 없다. 왕관을 쓴 위대한 자유사상가 프리드리히 2세가 볼테르와 편지를 주고받던 때도 예외가 아니다. 마키아벨리의 제자이자 비스마르크의 스승인 영리한 정치가로서 그는 신과 인간 모두를, 물론 철학자인 자기 편지 상대들까지 포함하여 모든 것을 비웃었고, 오직 자기의 「국가 이성」만을 믿었다. 그것은 늘 그렇듯 「수많은 대대의 신성한 힘」(신은 언제나 강한 대대 편에 선다고 그는 말했다)에, 그리고 또 절약과, 물론 기계적이고 전제적인 국내 행정 관리를 될 수 있는 대로 완벽하게 하는 데 기대고 있었다. 그의 생각으로도, 그리고 우리 생각으로도, 국가의 본질은 참으로 바로 여기에 있다. 나머지는 모두 냉혹한 진리를 의식하기를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의 여린 감정을 속이려는 무해한 꾸밈음일 뿐이다.

프리드리히 2세는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우고 선조들이 준비해 둔 국가 기계를 개량하고 완성했다. 그리고 이 기계는 그의 합당한 후계자 비스마르크 공의 손에서 유럽을 정복하고 될 수 있으면 프로이센-독일화하는 도구가 되었다.

앞서 말했듯이 독일은 종교개혁 이래 유럽의 모든 반동 운동의 주된 원천이기를 그친 적이 없다. 16세기 중반부터 1815년까지 이 운동의 주도권은 오스트리아에 있었다. 1815년부터 1866년까지는 주도권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나뉘었지만, 늙은 메테르니히 공이 오스트리아를 다스리던 동안, 곧 1848년까지는 오스트리아가 우세했다. 1815년부터 이 순수 독일 반동의 신성동맹에, 잇속을 따지는 장사꾼이라기보다 훨씬 더 스스로 나선 자원자로서, 우리의 타타르-독일적, 전러시아-황제적 채찍이 가세했다.

신성동맹이 저지른 온갖 추악한 짓에 대한 무거운 책임을 벗어 버리고 싶은 자연스러운 바람에 떠밀려, 독일인들은 그 주된 장본인이 러시아였다고 자신과 남을 설득하려 애쓴다. 황제의 러시아를 변호할 사람은 우리가 아니다. 우리는 러시아 인민을 깊이 사랑하기 때문에, 그 인민에게 더없이 완전한 번영과 자유를 열렬히 바라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이 더러운 전러시아 제국을 어떤 독일인도 미워할 수 없을 만큼 미워한다. 강령의 첫째 목표로 범게르만 국가의 수립을 내세우는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과 달리, 러시아 사회혁명가들은 무엇보다도 우리 국가의 완전한 파괴를 추구한다. 어떤 형태로든 국가성이 우리 인민을 짓누르는 한 이 인민은 빈궁한 노예로 남으리라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페테르부르크 내각의 정책을 변호하려는 바람에서가 아니라, 언제 어디서나 유익한 진실을 위해서 우리는 독일인들에게 다음과 같이 답하겠다.

실제로 황제의 러시아는 알렉산드르 1세와 니콜라이라는 두 군주의 모습으로 유럽의 내정에 매우 활발히 개입하는 듯이 보였다. 알렉산드르는 이 끝에서 저 끝까지 누비고 다니며 많이 소란을 피우고 떠들어 댔고, 니콜라이는 얼굴을 찌푸리며 위협했다. 그러나 그걸로 전부 끝이었다. 그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하기 싫어서가 아니라 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들의 친구인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독일인들이 허락하지 않았던 것이다. 그들에게는 허수아비라는 명예로운 역할만 주어졌고, 실제로 행동한 것은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그리고 마지막으로 그 둘의 지도와 허락 아래 — 프랑스 부르봉 왕가(스페인에 맞서)뿐이었다.

전러시아 제국은 단 한 번, 1849년에 국경 밖으로 나섰는데, 그것도 헝가리 반란에 시달리던 오스트리아 제국을 구하려는 것이었을 뿐이다. 이번 세기에 러시아는 폴란드 혁명을 두 번 진압했는데, 두 번 모두 폴란드의 노예 상태를 유지하는 데 러시아 못지않게 이해관계가 걸린 프로이센의 도움을 받았다. 물론 나는 황제의 러시아를 말하고 있다. 인민의 러시아는 폴란드의 독립과 자유 없이는 생각할 수 없다.

러시아 제국이 그 본질상 유럽에 더없이 해롭고 자유에 반하는 영향 말고는 다른 영향을 바랄 수 없다는 것, 어느 나라에서든 국가적 잔혹 행위와 의기양양한 압제의 새로운 사례가 있을 때마다, 인민의 반란을 인민의 피 속에 새로 빠뜨려 죽일 때마다 언제나 러시아 제국에서 가장 뜨거운 공감을 얻으리라는 것, 이것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러나 문제는 거기에 있지 않다. 문제는 러시아 제국의 실제 영향력이 얼마나 큰가, 그리고 그것이 지성과 국력과 부로 보아 그 목소리가 문제를 결정할 수 있을 만큼 유럽에서 우월한 지위를 차지하고 있는가이다.

지난 60년의 역사와 우리 타타르-독일 제국의 본질 자체를 살펴보기만 해도 아니라고 답할 수 있다. 러시아는 결코 그렇게 강한 나라가 아니다. 우리 크바스 애국자들의 허풍스러운 상상, 서슬라브와 남동슬라브 범슬라브주의자들의 유치한 상상, 그리고 국내의 것이든 남의 것이든 어떤 군사 독재든 자기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오는 무서운 위험에서 건져 주기만 한다면 그 앞에 엎드릴 태세가 된, 늙음과 공포로 정신이 나간 유럽의 노예 근성 자유주의자들의 상상이 즐겨 그려 내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희망에도 두려움에도 휘둘리지 않고 페테르부르크 제국의 현재 처지를 냉정하게 바라보는 사람은 안다. 이 제국은 서방에서, 그리고 서방에 맞서, 어떤 서방 강대국이 불러내지 않았는데도 제 발의로, 그리고 그 강대국과 더없이 긴밀하게 동맹하지 않은 채로는 결코 아무것도 꾀한 적이 없고 꾀할 수도 없다는 것을. 그 정책은 예로부터 오로지 남이 벌인 일에 어떻게든 끼어드는 데 있었다. 그리고 알다시피 예카테리나 2세에게 스웨덴도 똑같이 나눠 갖자고 제안하기까지 했던 프리드리히 2세가 꾀한 약탈적인 폴란드 분할 이래, 전러시아 제국에 이런 봉사를 줄곧 베풀어 온 서방 강대국이 바로 프로이센이었다.

유럽의 혁명 운동과 관련하여 러시아는 프로이센 정치가들의 손에서 허수아비 노릇을, 그리고 드물지 않게 가리개 노릇을 했다. 그들은 그 뒤에 자기들의 정복 사업과 반동 사업을 아주 교묘하게 숨겼다. 그러나 프로이센-독일 군대가 프랑스에서 거둔 놀라운 일련의 승리 이후, 유럽에서 프랑스의 패권이 최종적으로 무너지고 그 자리를 범게르만 패권이 차지한 이후로는 이 가리개가 더는 필요 없게 되었고, 독일 애국주의가 가장 소중히 품어 온 꿈을 이룬 새 제국은 자기의 정복적 위력과 체계적으로 반동적인 주도력을 한껏 과시하며 노골적으로 나섰다.

그렇다, 베를린은 이제 유럽에서 살아 있는 실제 반동 전체의 눈에 보이는 우두머리이자 수도가 되었고, 비스마르크 공은 그 주된 지도자이자 수상이 되었다. 거듭 말하지만, 수명을 다한 반동이 아니라 살아 있는 실제 반동이다. 수명을 다했거나 노망 든 반동, 주로 로마 가톨릭 반동은 아직도 불길하지만 이미 무력한 그림자로서 로마와 베르사유에서, 부분적으로는 빈과 브뤼셀에서 떠돈다. 또 하나의 반동, 채찍-페테르부르크 반동은 그림자는 아니라고 치더라도 뜻도 미래도 잃은 채 전러시아 제국의 영역 안에서 아직도 행패를 부리고 있다. 그러나 살아 있고 영리하며 참으로 강력한 반동은 이제 베를린에 집중되어, 비스마르크 공의 국가적인, 바로 그 때문에 극도로 반인민적인 천재가 다스리는 새 독일 제국으로부터 유럽의 모든 나라로 퍼져 나간다.

이 반동은 다름 아닌 최신 국가의 반인민적 이념이 최종적으로 실현된 것이다. 최신 국가의 유일한 목적은 극소수의 손에 집중된 자본을 위해 인민 노동을 될 수 있는 대로 널리 착취하는 체제를 갖추는 것이다. 곧 유대 놈들의 왕국, 은행 지배의 승리다. 그것은 재정·관료 권력과 경찰 권력의 강력한 비호를 받는데, 이 권력은 주로 군사력에 기대므로 본질상 전제적이지만, 동시에 허울뿐인 입헌주의의 의회 놀음으로 제 모습을 가린다.

최신 자본주의 생산과 은행 투기는 더 나아가 완전히 발전하려면 거대한 국가 중앙집권을 요구한다. 오직 그것만이 수백만 막노동 인민 대중을 그것들의 착취에 복종시킬 수 있기 때문이다. 노동자 협회, 집단, 공동체, 향, 그리고 마침내 지역과 인민들의 아래로부터 위로의 연방적 조직, 허구가 아닌 참된 자유의 이 유일한 조건은, 어떠한 경제적 자치도 그것들과 양립할 수 없는 것과 똑같이 그것들의 본질에 어긋난다. 그 대신 그것들은 이른바 대의제 민주주의와는 아주 잘 어울린다. 허울뿐인 인민 의지의 허울뿐인 지배에 기초하고, 그 의지는 겉으로만 인민적인 의회에서 허울뿐인 인민 대표자들이 표현한다고 하는 이 최신 국가 형태는, 그것들의 번영에 필요한 두 가지 주된 조건을 제 안에 결합하기 때문이다. 곧 국가 중앙집권, 그리고 주권자인 인민을, 그 인민을 다스리고 대표한다고 하며 어김없이 착취하는 지식인 소수에게 실제로 복종시키는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 라살레주의자, 그리고 독일 사회민주주의자 일반의 사회정치 강령을 이야기할 때 이 사실상의 진실을 더 자세히 살펴보고 밝힐 기회가 있을 것이다. 지금은 문제의 다른 측면에 주목하자. 인민 노동에 대한 착취는 허울뿐인 인민 지배와 허울뿐인 인민 자유의 어떤 정치 형태로 금칠을 하더라도 인민에게는 쓰라리다. 따라서 어떤 인민도, 천성이 아무리 온순하고 관헌에 대한 복종이 아무리 습관이 되었더라도, 기꺼이 착취에 복종하려 하지는 않을 것이다. 그러려면 끊임없는 강제와 폭력이 필요하다. 곧 경찰의 감시와 군사력이 필요하다.

최신 국가는 그 본질과 목적상 필연적으로 군사 국가이며, 군사 국가는 똑같은 필연성으로 정복 국가가 된다. 스스로 정복하지 않으면 정복당할 것이다. 힘이 있는 곳에는 반드시 그 힘의 발현이나 작용이 있게 마련이라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여기서 다시, 최신 국가는 반드시 거대하고 강력한 국가여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이것은 최신 국가가 존속하기 위한 불가결한 조건이다.

자본주의 생산과, 마침내는 그 생산 자체까지 삼켜 버리는 은행 투기가 파산이 두려워 자기들이 잡아먹는 작은 투기와 생산을 희생시키며 끊임없이 제 영역을 넓혀야 하고, 유일하고 보편적이며 세계적인 것이 되려고 애써야 하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필연적으로 군사적인 최신 국가도 세계 국가가 되려는 피할 수 없는 지향을 제 안에 품고 있다. 그러나 세계 국가는 물론 실현될 수 없거니와, 설령 있다 해도 어쨌든 하나뿐일 수밖에 없을 것이다. 그런 국가 둘이 나란히 있는 것은 결코 불가능하다.

패권은 모든 국가에 내재한 이 실현될 수 없는 지향이 수수하게, 가능한 만큼 드러난 것일 뿐이다. 그리고 패권의 첫째 조건은 적어도 주변 모든 국가의 상대적 무력과 종속이다. 그래서 프랑스의 패권이 존재하는 동안 그것은 스페인, 이탈리아, 독일의 국가적 무력을 조건으로 했다. 그리고 프랑스 정치가들은 — 그 가운데 물론 첫째는 티에르 씨다 — 나폴레옹 3세가 이탈리아와 독일의 통일과 결속을 허용한 것을 지금까지도 용서하지 못한다.

이제 프랑스는 자리를 비웠고, 그 자리는 독일 국가가 차지했다. 우리의 확신에 따르면 오늘날 유럽에서 유일하게 진정한 국가다.

프랑스 인민에게는 의심할 바 없이 역사에서 아직 위대한 역할이 남아 있다. 그러나 프랑스의 국가적 경력은 끝났다. 프랑스인의 성격을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우리와 함께 말할 것이다. 프랑스가 오랫동안 으뜸가는 강국일 수 있었던 만큼, 부차적인 국가는 물론 다른 나라들과 대등할 뿐인 국가가 되는 것조차 프랑스에게는 결코 불가능하다고. 국가로서는, 그리고 티에르 씨든 강베타 씨든 심지어 오를레앙 공작들이든 어쨌든 국가의 인물들이 다스리는 한, 프랑스는 자신의 굴욕과 타협하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는 새 전쟁을 준비할 것이고, 복수와 잃어버린 으뜸 자리의 회복을 노릴 것이다.

프랑스가 그 자리를 되찾을 수 있을까? 결코 아니다. 이유는 많지만 주된 것 두 가지만 들자. 최근의 사건들은 애국심, 이 최고의 국가적 미덕, 국가 권력의 이 영혼이 프랑스에서는 더 이상 전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을 입증했다. 상층 신분에서 애국심은 기껏해야 아직 민족적 허영심의 형태로 나타날 뿐이다. 그러나 이 허영심마저 이미 너무나 약해졌고, 실제 이익을 위해 모든 이상적 이익을 희생시키는 부르주아적 필요와 습관에 이미 뿌리째 잘려 나가서, 지난 전쟁 때에는 예전처럼 상점 주인, 사업가, 증권 투기꾼, 장교, 장군, 관료, 자본가, 소유자, 예수회에서 교육받은 귀족들을 잠시나마 헌신적인 영웅과 애국자로 바꿔 놓지조차 못했다. 모두가 겁을 먹었고, 모두가 배신했으며, 모두가 제 재산을 건지는 데만 달려들었고, 모두가 프랑스의 불행을 틈타 프랑스에 맞서 음모를 꾸미기에만 바빴다. 모두가 프랑스의 운명을 좌우하게 된 무자비하고 오만한 승자의 총애를 얻으려고 더없이 뻔뻔하게 서로 앞다퉜다. 모두가 한목소리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굴복과 체념을 설교하며 평화를 애걸했다… 이제 이 타락한 수다쟁이들은 다시 민족 타령을 하며 허풍을 떨지만, 값싼 영웅들의 이 우스꽝스럽고 역겨운 외침도 어제 그들이 보인 비열함에 대한 너무나 요란한 증언을 덮지는 못한다.

이보다 비할 바 없이 더 중요한 것은 프랑스의 농촌 주민에게서조차 애국심이 단 한 방울도 나타나지 않았다는 사실이다. 그렇다, 일반의 예상과 달리 프랑스 농부는 소유자가 된 뒤로 애국자이기를 그만두었다. 잔 다르크 시대에 그는 혼자 제 어깨로 프랑스를 짊어졌다. 1792년과 그 뒤에도 그는 전 유럽의 군사 동맹에 맞서 프랑스를 지켜 냈다. 그러나 그때는 사정이 달랐다. 교회와 귀족의 영지가 헐값에 팔린 덕분에 그는 예전에 노예로서 갈던 땅의 소유자가 되어 가고 있었고, 패배하면 독일 군대를 뒤따라 들어오던 망명 귀족들이 막 얻은 재산을 도로 빼앗아 가리라고 두려워한 것도 당연했다. 지금은 그런 두려움이 없었으므로 그는 사랑하는 조국의 수치스러운 패배를 아주 무관심하게 받아들였다. 알자스와 로렌에서는 그 지방을 순전한 독일 땅으로 보려고 고집하는 독일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이상하게도 애국심의 틀림없는 징후가 나타났지만, 그곳을 빼면 프랑스 중부 전역에서 농민들은 프랑스를 구하려고 무장한 프랑스인 의용병과 외국인 의용병을 내쫓으며 그들에게 무엇 하나 내주지 않았고, 드물지 않게 프로이센군에 넘겨주기까지 했으며, 반대로 독일인들은 더없이 융숭하게 맞아들였다.

애국심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만 남아 있다고 해도 조금도 틀린 말이 아니다.

파리에서도, 프랑스의 다른 모든 지방과 도시에서도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전 인민의 무장과 죽기를 각오한 전쟁을 원하고 요구했다. 그런데 기이한 현상이 벌어졌다. 바로 이 때문에 유산계급의 온갖 증오가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쏟아진 것이다. 마치 「아우들」(강베타 씨의 표현이다)이 형들보다 더 많은 미덕과 애국적 헌신을 보이는 것이 그들에게는 분했다는 듯이.

하기야 유산계급의 말이 부분적으로는 옳았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를 움직인 것은 이 말의 오래되고 좁은 의미에서의 순수한 애국심이 아니었다. 참된 애국심은 물론 매우 존중할 만한 감정이지만, 동시에 편협하고 배타적이며 반인간적이고, 드물지 않게 그저 야수적인 감정이다. 철저한 애국자란 제 조국과 제 것 모두를 열렬히 사랑하는 만큼 외국 것 모두를 똑같이 열렬히 증오하는 사람뿐이다. 영락없이 우리 슬라브주의자들 같은 사람이다. 그런데 프랑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그런 증오의 흔적조차 남아 있지 않았다. 오히려 지난 수십 년 동안, 말하자면 1848년부터, 아니 그보다 훨씬 전부터 사회주의 선전의 영향으로 그들 사이에서는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에 대한 단연 형제적인 태도가 자라났고, 그와 나란히 프랑스의 이른바 위대함과 영광에 대한 똑같이 단호한 무관심도 자라났다. 프랑스 노동자들은 마지막 나폴레옹이 일으킨 전쟁에 반대했고, 그 전쟁 전야에는 인터내셔널 파리 회원들이 서명한 선언으로 독일 노동자들에 대한 진심 어린 형제적 태도를 소리 높여 밝혔다. 그리고 독일 군대가 프랑스에 들어오자 그들은 독일 인민에 맞서서가 아니라 독일 군사 전제정에 맞서 무장하기 시작했다.

이 전쟁은 국제노동자협회가 처음 창립된 지 꼭 6년 만에, 제네바에서 첫 대회가 열린 지 겨우 4년 만에 시작되었다. 그런데 그 짧은 시간에 국제적 선전은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뿐 아니라 다른 많은 나라, 특히 라틴 종족의 노동자들 사이에서도 완전히 새롭고 대단히 폭넓은 표상과 견해와 감정의 세계를 일깨웠고, 애국적이거나 지역적인 편견과 편협한 정념을 거의 모두 삼켜 버린 하나의 공통된 국제적 열정을 낳았다.

이 새로운 세계관은 이미 1868년에 인민 집회에서, 그것도 — 어디서였을 것 같은가, 어느 나라에서? — 오스트리아의 빈에서 엄숙하게 표명되었다. 남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시민 민주주의자 양반들이 빈 노동자들에게 함께 내놓은 일련의 정치적·애국적 제안, 곧 단일하고 분할할 수 없는 범게르만 조국을 엄숙하게 인정하고 선포하자는 쪽으로 기운 제안에 대한 응답이었다. 경악스럽게도 그들은 다음과 같은 대답을 들었다. 「당신들은 우리에게 무슨 독일 조국 타령인가? 우리는 노동자이고, 당신들에게 착취당하며 늘 속고 억압받아 왔다. 어느 나라에 속하든 모든 노동자, 착취당하고 억압받는 온 세계의 프롤레타리아는 — 우리의 형제다. 반면 모든 부르주아, 압제자, 통치자, 후견인, 착취자는 — 우리의 적이다. 노동자들의 국제적 진영, 이것이 우리의 유일한 조국이다. 착취자들의 국제적 세계, 이것이 우리에게 낯설고 적대적인 나라다.」

그리고 빈 노동자들은 자기 말이 진심임을 증명하려고 그 자리에서 「세계 노동자 해방의 선구자인 파리 형제들에게」 축하 전보를 보냈다.

빈 노동자들의 이 대답은 온갖 정치적 논의와 상관없이 인민 본능의 깊은 곳에서 곧바로 흘러나온 것으로, 당시 독일에서 큰 소동을 일으켰다. 그것은 이 당의 존경받는 원로이자 지도자인 요한 야코비 박사를 비롯한 모든 시민 민주주의자들을 놀라게 했고, 그들의 애국적 감정뿐 아니라 라살레와 마르크스 학파의 국가 신앙까지 모욕했다. 아마도 후자의 조언에 따라, 지금은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우두머리 가운데 하나로 꼽히지만 당시에는 아직 그 자신이 시민민주당(지금은 없어진 인민당)의 당원이던 리프크네히트 씨가 「정치적 무분별」로 그런 추문의 빌미를 준 빈 노동자들과 협상하러 곧장 라이프치히에서 빈으로 갔다. 그에게 공정해야 한다. 그는 아주 성공적으로 활동하여, 몇 달 뒤, 곧 1868년 8월 독일 노동자 뉘른베르크 대회에서 오스트리아 프롤레타리아트의 대표자들이 모두 아무런 항의 없이 사회민주당의 편협한 애국 강령에 서명했다.

그러나 바로 이 일은 이 당의, 다소간 학식 있고 부르주아적인 지도자들의 정치적 방향과 독일, 적어도 오스트리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혁명적 본능 사이에 존재하는 깊은 차이를 드러냈을 뿐이다. 사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이 인민 본능은 혁명적·사회적이라기보다 정치적인 당의 선전에 짓눌리고 끊임없이 참된 목표에서 빗나가게 되어, 1868년 이래 별로 앞으로 나아가지 못했고 인민의 의식으로 넘어가지 못했다. 그 대신 라틴 종족의 나라들, 곧 벨기에, 스페인, 이탈리아, 특히 프랑스에서는 이 본능이 그런 압박과 체계적인 타락에서 벗어나 완전한 자유 속에서 폭넓게 발전했고, 실제로 도시와 공장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의식으로 바뀌었다[2].

앞서 말했듯이, 사회혁명의 보편적 성격과 모든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연대에 대한 이 의식은 영국 노동자들 사이에는 아직 거의 없지만,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는 이미 오래전에 형성되었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는 이미 1790년대에, 자신의 평등과 자유를 위해 싸우면서 온 인류를 해방한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지금은 드물지 않게 빈말로 쓰이지만 그때는 진심으로 깊이 느껴졌던 이 위대한 말들 — 온 인류의 자유, 평등, 형제애 — 은 그 시대의 모든 혁명 노래에 나온다. 그것들은 프랑스 노동자들의 새로운 사회적 신앙과 사회혁명적 열정의 토대가 되었고, 말하자면 그들의 천성이 되어, 그들의 의식과 의지와 상관없이 그들의 생각과 지향과 행동의 방향을 결정했다. 프랑스 노동자는 누구나 혁명을 할 때 자기 자신만이 아니라 온 세계를 위해, 그리고 자기 자신을 위해서보다 세계를 위해서 훨씬 더 많이 혁명을 한다고 굳게 확신한다. 강베타 씨 같은 정치적 실증주의자들과 급진 공화주의자들은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이 세계주의적 방향에서 떼어 놓으려고, 온 인류와 온 세계의 해방을 꿈꾸기 전에 프랑스 국가의 위대함과 영광과 정치적 우위라는 애국적 이념에 얽힌 자기 자신의 순전히 민족적인 일을 정돈하고 그 안에서 자기 자신의 자유와 복지를 확보하는 일부터 생각해야 한다고 설득하려 애썼고 지금도 애쓰지만, 헛수고다. 그들의 노력은 보기에는 매우 분별 있지만 헛되다 — 천성은 고칠 수 없다. 그리고 이 꿈은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천성이 되었고, 그의 상상과 마음에서 국가적 애국심의 마지막 잔재를 몰아냈다.

1870~71년의 사건들이 이것을 충분히 입증했다. 그렇다, 프랑스의 모든 도시에서 프롤레타리아트는 독일인들에 맞서 한 사람도 빠짐없는 무장과 의용군 봉기를 요구했다. 그리고 한편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무기를 쥐여 주느니 차라리 천 번이라도 프로이센인들에게 굴복하기를 택한 부르주아 계급 다수의 비열한 공포와 곳곳에서 벌어진 배신이, 다른 한편으로는 파리와 지방에서 「인민 방위 정부」가 벌인 체계적으로 반동적인 방해,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반인민적인 독재자이자 애국자 강베타의 반대가 프롤레타리아트를 마비시키지 않았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틀림없이 이 뜻을 이루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상황에서 가능한 만큼 독일 정복자들에 맞서 무장하면서, 프랑스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자유와 권리만큼이나 독일 프롤레타리아의 자유와 권리를 위해서도 싸우리라고 굳게 확신했다. 그들은 프랑스 국가의 위대함과 명예가 아니라, 부르주아지의 손에서 그들에게 맞선 예속의 도구로 쓰이는 가증스러운 군사력에 대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승리를 염려했다. 그들은 독일 군대를 독일 군대이기 때문이 아니라 군대이기 때문에 미워했다. 티에르 씨가 파리 코뮌에 맞서 동원한 군대는 순전히 프랑스 군대였지만, 그 군대는 독일 군대가 전쟁 기간 내내 저지른 것보다 더 많은 만행과 범죄를 며칠 만에 저질렀다. 이제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제 나라 군대든 남의 나라 군대든 모든 군대가 똑같이 적이며, 프랑스 노동자들은 이것을 안다. 그러므로 그들의 무장 봉기는 결코 애국적인 것이 아니었다.

아직 파리를 에워싸고 있던 독일 군대가 보는 앞에서 파리 노동자들이 베르사유 국민의회와 조국의 구원자 — 티에르에 맞서 일으킨 파리 코뮌의 봉기는, 오늘날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움직이는 유일한 열정을 남김없이 드러내고 설명해 준다. 이제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사회혁명적인 일과 목표와 전쟁 말고는 다른 일도, 다른 목표도, 다른 전쟁도 없고 있을 수도 없다.

다른 한편으로 이것은 베르사유의 통치자들과 대표자들의 마음을 사로잡은 광포한 격분, 그리고 그들의 직접적인 지도와 축복 아래 패배한 코뮌 전사들에게 저질러진 전대미문의 만행을 충분히 설명해 준다. 실제로 국가적 애국주의의 관점에서 보면 파리 노동자들은 끔찍한 범죄를 저질렀다. 아직 파리를 에워싸고 있던 독일 군대, 방금 조국을 쳐부수고 그 민족적 위력과 위대함을 가루로 만들고 민족의 명예를 심장 한복판까지 찌른 독일 군대가 보는 앞에서, 그들은 거친 세계주의적 사회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혀 프랑스 국가의 최종적 파괴, 곧 프랑스 코뮌들의 자치와 양립할 수 없는 프랑스의 국가적 통일의 해체를 선언했다. 독일인들은 그들의 정치적 조국의 경계와 힘을 줄였을 뿐이지만, 그들은 그것을 아예 죽이려 했고, 이 반역적 목적을 드러내려는 듯 지나간 프랑스 영광의 웅장한 증인인 방돔 기둥을 먼지 속에 처박았다!

정치적·애국적 관점에서 보면 어떤 범죄가 이런 전대미문의 신성모독에 견줄 수 있겠는가! 그리고 기억하라. 파리 프롤레타리아트가 그 짓을 한 것은 우연도 아니고, 어떤 선동가들의 영향을 받아서도 아니며, 모든 인민, 특히 프랑스 인민의 역사에서 드물지 않게 볼 수 있는 미친 듯한 열광의 순간에 한 것도 아니었다. 아니다, 이번에 파리 노동자들은 침착하게, 의식적으로 행동했다. 국가적 애국주의에 대한 이 사실상의 부정은 물론 강렬한 인민적 열정의 표현이었다. 그러나 그것은 덧없는 열정이 아니라 깊은, 말하자면 숙고된, 이미 인민의 의식으로 바뀐 열정이었다. 그것은 모든 제도와 편의와 특권과 문명 전체를 거느린 현 사회 체제 전체를 삼켜 버릴 태세가 된 밑 모를 심연처럼, 겁에 질린 세계 앞에 갑자기 입을 벌렸다…

여기서 소름 끼치는 만큼이나 틀림없는 명료함으로 드러난 것은 이것이다. 사회혁명의 열정에 사로잡혀 인간적 진리, 정의, 자유, 평등, 형제애의 원칙 — 점잖은 사회에서는 기껏해야 수사학 연습의 무해한 소재로나 용인되는 원칙 — 에 기초하여 다른 세계를 만들어 내려고 끈질기게 나아가는 거칠고 굶주린 프롤레타리아트와, 현재 경제적 착취라는 귀중한 특권을 지켜 주는 마지막 요새로서 국가적·법적·형이상학적·신학적·군사경찰적 질서를 필사적인 기세로 옹호하는, 배부르고 교양 있는 특권 계급의 세계 사이에는, — 이 두 세계 사이에는, 거듭 말하거니와, 막노동하는 사람들과, 알다시피 온갖 장점과 아름다움과 미덕을 한 몸에 지닌 교양 사회 사이에는 이제 어떤 화해도 불가능하다는 것이다.

죽느냐 사느냐의 전쟁이다! 그것도 프랑스에서만이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그리고 이 전쟁은 한쪽의 결정적 승리와 다른 쪽의 결정적 타도로만 끝날 수 있다. 부르주아 교양 세계가 반란하는 인민의 자연력을 길들이고 예속시켜, 물론 어느 신의 축복을 받고 과학이 이치에 맞게 설명해 주는 총검과 채찍과 몽둥이의 힘으로 막노동 대중을 예전처럼 일하게 만들든가. 이는 곧장 국가를 지금 유일하게 가능한 가장 솔직한 형태, 곧 군사 독재나 황제정의 형태로 완전히 복구하는 길이다. 아니면 노동자 대중이 수백 년 동안 짊어진 가증스러운 멍에를 마침내 벗어던지고 부르주아적 착취와 그에 기초한 부르주아 문명을 뿌리째 무너뜨리든가 — 그리고 이것은 사회혁명의 승리, 국가라고 불리는 모든 것의 분쇄를 뜻한다.

그리하여 한쪽에는 국가가, 다른 쪽에는 사회혁명이 있다. 이것이 두 극이며, 그 적대가 유럽 전체에서 현재 사회생활의 핵심을 이루지만, 프랑스에서는 다른 어느 나라보다 더 손에 잡히듯 뚜렷하다. 물론 소시민화한 귀족까지 포함하여 부르주아지 전체를 아우르는 국가 세계는 베르사유에서 그 중심과 마지막 피난처와 마지막 방어물을 찾았다. 사회혁명은 파리에서 끔찍한 패배를 당했지만 결코 소멸하지 않았고 정복당하지조차 않았으며, 지금도 언제나처럼 도시와 공장의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아우르면서 지칠 줄 모르는 선전으로 이미 농촌 주민까지 사로잡기 시작했다. 적어도 이 선전이 가장 폭넓게 이루어지고 퍼지는 남프랑스에서는 그렇다. 그리고 이제 화해할 수 없게 된 두 세계의 이 적대적 대립이, 프랑스가 다시 일류의 지배적 국가가 되는 것이 결정적으로 불가능해진 두 번째 이유를 이룬다.

프랑스 사회의 모든 특권 계층은 의심할 바 없이 자기 조국을 다시 그 빛나고 위풍당당한 지위에 올려놓고 싶어 할 것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재물욕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부자가 되려는 열정과 반애국적 이기심에 너무나 깊이 물들어 있어서, 애국적 목표를 이루려고 프롤레타리아트의 재산과 생명과 자유를 희생시킬 각오는 정말로 되어 있지만, 자기들에게 이로운 특권은 하나도 포기하지 않을 것이며, 자기 재산을 내놓거나 재산과 권리의 평등화에 동의하느니 차라리 외국의 멍에를 쓸 것이다.

지금 우리 눈앞에서 벌어지는 일이 이를 충분히 확인해 준다. 티에르 씨 정부가 베를린 내각과 최종 조약을 맺었으며 그에 따라 독일 군대가 아직 점령하고 있는 프랑스의 여러 주에서 9월에 철수하게 되었다고 베르사유 의회에 공식 발표하자, 프랑스 특권 계급들의 연합을 대표하는 의회 다수파는 고개를 떨궜다. 그들의 이익을 훨씬 더 실질적으로, 더 생생하게 대변하는 프랑스 공채는 — 마치 국가적 대재앙이라도 닥친 듯 폭락했다… 프랑스에 가증스럽고 폭력적이며 치욕스러운 승리한 독일 군대의 주둔이, 부르주아적 용맹과 부르주아 문명의 대표자인 프랑스의 특권적 애국자들에게는 위안이자 버팀목이자 구원이었으며, 그 군대가 곧 떠난다는 것은 그들에게 사형 선고나 다름없다는 사실이 드러났다.

그렇다면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기이한 애국심은 조국의 치욕스러운 굴복에서 구원을 찾는 셈이다. 이 점을 아직 의심하는 사람들에게는 아무 프랑스 보수 잡지나 가리켜 보이겠다. 반동 정당의 온갖 분파, 곧 보나파르트파, 정통왕당파, 오를레앙파가 바로데 씨의 파리 의원 당선에 얼마나 놀라고 동요하고 격분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그런데 이 바로데란 누구인가? 강베타 씨 당파의 수많은 속물 가운데 하나로, 처지로 보나 본능으로 보나 노선으로 보나 보수주의자이며, 다만 민주주의적·공화주의적 문구를 늘어놓을 뿐이다. 그 문구는 오늘날 가장 반동적인 조치의 실행을 결코 방해하지 않고 오히려 크게 돕는다. 한마디로 그는 혁명과 아무 공통점도 없고 있은 적도 없는 인물이며, 1870년과 1871년에는 리옹에서 부르주아 질서의 가장 열성적인 옹호자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그는 지금 다른 많은 부르주아 애국자들처럼, 결코 혁명적이지 않은 강베타 씨의 깃발 아래에서 활동하는 것이 자기에게 이롭다고 여긴다. 이런 뜻에서 파리는 공화국 대통령 티에르와 베르사유에 군림하는 군주주의적 사이비 인민 의회에 맞서 그를 뽑았다. 그런데 이 하찮은 인물이 뽑힌 것만으로도 보수 정당 전체가 들끓기에 충분했다! 그들의 주된 논거가 무엇인지 아는가? 독일인이다!

아무 잡지나 펼쳐 보라. 그들이 비스마르크 공과 그의 황제의 정당한 분노를 들먹이며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어떻게 위협하는지 보게 될 것이다 — 이 얼마나 대단한 애국심인가! 그들은 그야말로 자기들을 위협하는 프랑스 사회혁명에 맞서 도와 달라고 독일인들을 부르고 있다. 어리석은 공포에 질린 나머지 그들은 죄 없는 바로데마저 혁명적 사회주의자로 여겼다.

프랑스 부르주아지의 이런 분위기로 보아서는 특권 계급의 애국심으로 프랑스의 국가적 위력과 우위를 되살리리라는 희망은 거의 없다.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의 애국심 역시 그다지 희망을 주지 못한다. 그 조국의 경계는 넓어질 대로 넓어져, 이제는 물론 프랑스 부르주아지까지 포함한 모든 부르주아지에 맞서 전 세계 프롤레타리아트를 아우르기에 이르렀다. 이런 뜻에서 파리 코뮌의 선언들은 단호하다. 그리고 프랑스 노동자들이 지금 스페인 혁명에 이토록 분명히 표하는 공감, 특히 남프랑스에서 프롤레타리아트가 스페인 프롤레타리아트와 형제처럼 결합하려 하고, 나아가 모든 민족적 차이와 국가 경계를 거슬러 해방된 노동과 집단적 소유에 기초한 인민 연방을 그들과 함께 이루려는 뚜렷한 열망까지 드러나는 그 공감 — 이 공감과 열망은, 내가 말하건대,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에게도 특권 계급에게와 마찬가지로 국가적 애국심의 시대가 지나갔음을 증명한다.

그런데 프랑스 사회의 모든 계층에 이처럼 애국심이 없고, 그들 사이에 지금 공공연하고 화해할 수 없는 전쟁이 벌어지고 있는데, 어떻게 강력한 국가를 되살리겠는가? 여기서는 늙은 공화국 대통령의 온갖 국가 경영 솜씨도 헛수고로 끝날 것이며, 그가 정치적 조국의 제단에 바친 온갖 끔찍한 희생, 이를테면 파리 코뮌 참가자 수만 명을 여성과 아이들까지 비인간적으로 학살한 일과 또 다른 수만 명을 똑같이 비인간적으로 뉴칼레도니아로 유형 보낸 일도 틀림없이 헛된 희생으로 드러날 것이다.

티에르 씨가 프랑스의 신용, 국내 평온, 옛 질서, 군사력을 되살리려 애쓰는 것은 헛된 일이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부르주아지의 대립으로 그 근본이 흔들리고 끊임없이 다시 흔들리는 국가 건물은 삐걱거리고 금이 가며 매 순간 무너질 듯하다. 그런 늙고 불치의 병에 걸린 국가가 젊고 아직까지 건강한 독일 국가와 어떻게 싸울 수 있겠는가.

이제부터, 거듭 말하거니와, 일등 강국으로서 프랑스의 역할은 끝났다. 프랑스의 정치적 위력의 시대는 군주제적이든 공화제적이든 그 문학적 고전주의의 시대가 지나간 것과 마찬가지로 돌이킬 수 없이 지나갔다. 프랑스에서 국가의 낡은 기초는 모두 썩었고, 티에르가 그 위에 자기의 보수적 공화국, 곧 허울뿐인 공화국 간판을 새로 내건 낡은 군주제 국가를 세우려 애써도 헛일이다. 그러나 현 급진당의 우두머리이자 티에르 씨의 명백한 후계자인 강베타 씨가 이른바 새로운 기초 위에 이른바 진정으로 공화제적이고 민주적인 새 국가를 세우겠다고 약속하는 것도 마찬가지로 헛일이다. 그 기초는 존재하지 않고 존재할 수도 없기 때문이다.

오늘날 진지하고 강력한 국가가 가질 수 있는 튼튼한 기초는 단 하나, 군사적·관료적 중앙집권뿐이다. 군주제와 가장 민주적인 공화국 사이에는 본질적 차이가 단 하나 있을 뿐이다. 군주제에서는 관리 세계가 특권적 유산 계급과 제 주머니의 더 큰 이익을 위해 군주의 이름으로 인민을 억누르고 약탈한다. 공화국에서도 관리 세계는 똑같은 주머니와 계급을 위해 똑같이 인민을 억누르고 약탈할 것이다. 다만 이번에는 인민 의지의 이름으로. 공화국에서는 허울뿐인 인민, 곧 국가가 대표한다는 합법적 인민이 살아 있는 실제 인민을 질식시키고 있으며 앞으로도 질식시킬 것이다. 그러나 인민을 때리는 몽둥이가 인민의 몽둥이라 불린다고 해서 인민이 조금이라도 편해지지는 않을 것이다.

사회 문제, 사회혁명의 열정이 지금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았다. 이 열정은 채워 주든가, 아니면 억눌러 길들이든가 해야 한다. 그러나 그것이 채워질 수 있는 것은 국가적 폭력, 곧 부르주아 이익의 이 마지막 보루가 무너질 때뿐이다. 그러므로 어떤 국가도, 그 형식이 아무리 민주적이라 해도, 설령 가장 붉은 정치적 공화국, 곧 인민 정부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거짓의 의미에서만 인민적인 공화국이라 해도, 인민에게 필요한 것, 곧 위로부터의 어떤 간섭이나 후견이나 폭력도 없이 아래에서 위로 자기 이익을 자유롭게 조직하는 일을 인민에게 줄 수 없다. 모든 국가는, 가장 공화제적이고 가장 민주적인 국가조차, 마르크스 씨가 구상한 허울뿐인 인민국가조차, 그 본질에서 인민 자신보다 인민의 진정한 이익을 더 잘 안다는 지식인 소수, 그렇기에 바로 특권적인 소수를 통해 대중을 위에서 아래로 다스리는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유산 계급과 지배 계급에게 인민의 열정과 인민의 요구를 채워 주는 일은 결단코 불가능하다. 따라서 남는 수단은 하나, 국가적 폭력, 한마디로 국가뿐이다. 국가란 바로 폭력을, 곧 가능하면 위장된, 여의치 않으면 거리낌 없고 노골적인 폭력에 의한 지배를 뜻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강베타 씨는 티에르 씨 못지않게 부르주아 이익의 대표자다. 그도 티에르와 똑같이 강력한 국가와 중간 계급의 무조건적 지배를 원한다. 어쩌면 여기에 프랑스에서 전체 프롤레타리아트의 극히 작은 부분을 이루는, 부르주아화한 노동자 층을 덧붙일지도 모른다. 그와 티에르 씨의 차이는 이것뿐이다. 티에르는 자기 시대의 편견과 선입견에 사로잡혀 오직 대단히 부유한 부르주아지에게서만 버팀목과 구원을 찾고, 소부르주아지와 앞서 말한, 부르주아지가 되려는 노동자 계급에서 나오는 수만, 아니 수십만의 새로운 통치 지망자들을 불신의 눈으로 본다. 반면 강베타 씨는 지금까지 프랑스를 독점적으로 다스려 온 상층 계급에게 배척당했기에, 자기 정치권력, 자기 공화주의적·민주주의적 독재를 바로 지금까지 국가 통치의 이익과 영예에서 밀려나 있던 그 거대하고 순전히 부르주아적인 다수 위에 세우려 한다.

그런데 그는 확신하고 있으며, 우리 생각에도 전적으로 옳은데, 이 다수의 도움으로 권력을 잡기만 하면 부유한 계급들 자신, 곧 은행가, 대지주, 상인, 산업가, 한마디로 인민의 노동으로 남들보다 더 많이 부를 쌓는 모든 큰 투기꾼들이 그에게로 돌아서서 이번에는 그들 쪽에서 그를 인정하고 그와의 동맹과 우정을 구하리라는 것이다. 물론 그는 이를 거절하지 않을 것이다. 진정한 정치가로서 그는 어떤 국가도, 특히 강력한 국가는, 그들과의 동맹과 우정 없이는 존속할 수 없다는 것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이다.

이는 강베타식 국가도, 더 노골적이었을 뿐 더 폭력적이지는 않았던 그 모든 선임자들과 마찬가지로 인민을 억누르고 파탄시키리라는 뜻이다. 그리고 바로 넓은 민주주의적 형식을 걸치게 되기 때문에, 그 국가는 탐욕스럽고 부유한 소수에게 인민 노동에 대한 평온하고 광범위한 착취를 더 강력하고 훨씬 더 확실하게 보장해 줄 것이다.

최신 학파의 정치가로서 강베타 씨는 가장 폭넓은 민주주의적 형식도, 보통선거권도 조금도 두려워하지 않는다. 그 안에 인민을 위한 보장은 얼마나 적고, 반대로 인민을 착취하는 개인과 계급을 위한 보장은 얼마나 많은지를 그는 누구보다 잘 안다. 정부의 전제가 허울뿐인 인민 의지의 허울뿐인 대표에 기댈 때만큼 무섭고 강력한 적은 없다는 것도 그는 안다.

그러므로 만약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가 야심 많은 변호사의 약속에 넘어갈 수 있다면, 만약 강베타 씨가 이 들썩이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자기 민주 공화국의 프로크루스테스 침대에 눕히는 데 성공한다면, 그는 틀림없이 프랑스 국가를 예전의 모든 위대함과 우위 그대로 되살려 낼 것이다.

그러나 문제는 바로 여기에 있다. 그 시도는 성공할 수 없다. 이제 세상에는 어느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에서든, 특히 프랑스 프롤레타리아트에서 경제적 해방과 사회적 평등을 향한 열망을 질식시킬 수 있는 그런 힘도, 그런 정치적·종교적 수단도 없다. 강베타가 무엇을 하든, 총검으로 위협하든 말로 달래든, 지금 이 열망 속에 숨어 있는 장사 같은 힘을 그는 당해 내지 못할 것이며, 막노동자 대중을 예전처럼 빛나는 국가의 전차에 매어 놓는 데는 결코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어떤 웅변의 꽃으로도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를 돌이킬 수 없이 갈라놓는 심연을 덮어 메우고 그들 사이의 필사적인 투쟁을 끝낼 수는 없을 것이다. 이 투쟁에는 국가의 모든 수단과 역량이 동원되어야 할 터이므로, 유럽 국가들 사이에서 대외적 우위를 지킬 수단도 역량도 프랑스 국가에는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니 어떻게 비스마르크의 제국과 겨루겠는가!

프랑스의 국가적 애국자들이 뭐라고 하든, 아무리 큰소리를 치든, 프랑스는 국가로서 이제부터 보잘것없는, 아주 이류의 자리를 차지할 운명이다. 그뿐 아니라, 1870년까지 이탈리아 국가가 프랑스 제국의 정치에 복종했던 것과 꼭 마찬가지로, 프랑스는 독일 제국의 최고 지도와 우호적이면서도 공손한 영향력에 복종해야 할 것이다.

이 처지는 세계 시장에서 적잖은 위안을 얻는 프랑스 투기꾼들에게는 어쩌면 꽤 유리할지 모르나, 프랑스의 국가적 애국자들이 그토록 가득 품고 있는 민족적 허영심의 관점에서는 결코 부러울 것이 없다. 1870년 이전에는 이 허영심이 워낙 강해서, 프랑스가 독일인에게 패하고 굴복하는 치욕을 면할 수만 있다면 부르주아 특권의 가장 편협하고 완고한 옹호자들마저 사회혁명 속으로 내던질 수 있으리라고 생각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1870년 이후로는 아무도 그들에게서 그런 것을 기대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이 자기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한 수지맞는 지배를 포기하느니 차라리 어떤 치욕도, 독일의 보호 아래 들어가는 것마저도 받아들이리라는 것을 모두가 안다.

프랑스 국가가 다시는 예전의 위력을 되찾지 못하리라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이것이 프랑스의 세계적이고, 자그마치 선도적인 역할이 끝났다는 뜻인가? 결코 아니다. 이것은 다만 프랑스가 국가로서의 위대함을 돌이킬 수 없이 잃었으므로 사회혁명 속에서 새로운 위대함을 찾아야 하리라는 뜻일 뿐이다.

그러나 프랑스가 아니라면, 유럽에서 어떤 다른 국가가 새로운 독일 제국과 겨룰 수 있겠는가?

물론 대영제국은 아니다. 첫째, 영국은 이 말의 엄밀하고 최신의 의미에서, 곧 군사적·경찰적·관료적 중앙집권이라는 의미에서 본래 국가였던 적이 한 번도 없다. 영국은 오히려 특권적 이익들의 연방, 자치적 사회에 가깝다. 그 사회에서는 처음에는 토지 귀족이 우세했고 지금은 그와 함께 금융 귀족이 우세하지만, 그곳에서도 프랑스에서와 꼭 마찬가지로, 다소 다른 형태로이기는 하나, 프롤레타리아트가 경제적 처지와 정치적 권리의 평등을 향해 분명하고 위협적으로 나아가고 있다.

물론 영국이 유럽 대륙의 정치 문제에 끼친 영향은 언제나 컸다. 그러나 그 영향은 언제나 군사력의 조직보다는 부에 훨씬 더 많이 기대고 있었다. 모두가 알다시피 지금 그 영향은 크게 줄었다. 30년 전만 해도 영국은 독일인들의 라인 지방 정복도, 흑해에서 러시아 우위의 회복도, 러시아인들의 히바 원정도 그렇게 태연하게 견디지 못했을 것이다. 영국이 이처럼 체계적으로 양보한다는 사실은 의심할 수 없는, 게다가 해마다 점점 더 커지는 정치적 무능을 증명한다. 이 무능의 주된 원인도 역시 막노동자 세계와, 착취하며 정치적으로 지배하는 부르주아지 세계 사이의 대립이다.

영국에서 사회혁명은 사람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가까이 와 있다. 그리고 어디에서도 영국에서만큼 무섭지는 않을 것이다. 어디에서도 바로 영국에서만큼 필사적이고 잘 조직된 저항에 부딪히지는 않을 것이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이탈리아에 관해서는 말할 것도 없다. 이 나라들은 결코 위협적인 국가는커녕 강한 국가조차 되지 못할 것이다. 물질적 수단이 없어서가 아니라, 두 나라 모두의 인민정신이 그들을 전혀 다른 목표로 거스를 수 없이 이끌고 가기 때문이다.

스페인은 카를 5세와 펠리페 2세의 가톨릭 광신과 전제로 정상적인 길에서 벗어났고, 인민의 노동이 아니라 아메리카의 은과 금으로 갑자기 부유해졌다. 16세기와 17세기에 스페인은 세계 군주국을 폭력으로 세운다는 달갑지 않은 명예를 제 어깨에 짊어져 보려 했다. 그 대가는 비쌌다. 스페인이 강성했던 시기는 바로 지적·도덕적·물질적 궁핍이 시작된 시기였다. 모든 힘을 짧고 부자연스럽게 짜내어 온 유럽에 두렵고 미움받는 존재가 되었고, 유럽 사회의 진보적 운동을 잠시, 정말 한순간이나마 멈춰 세우기까지 했던 스페인은, 그 뒤 갑자기 기력이 다한 듯 극도의 우둔과 쇠약과 무기력에 빠졌다. 그리고 부르봉 왕조의 괴물 같고 백치 같은 통치로 완전히 치욕을 뒤집어쓴 채, 나폴레옹 1세가 약탈적으로 그 영토에 쳐들어와 2백 년의 잠에서 깨울 때까지 그 상태에 머물러 있었다.

스페인은 죽지 않았음이 드러났다. 스페인은 순전히 인민적인 봉기로 외세의 멍에에서 벗어났고, 무지하고 무장하지 못한 인민 대중이라도 강렬하고 한마음인 열정에 불타기만 하면 세계 최정예 군대에 맞설 수 있음을 증명했다. 스페인은 그 이상의 것까지 증명했다. 곧 인민의 자유와 힘과 열정을 지키는 데는 무지가 부르주아 문명보다 오히려 낫다는 것이다.

독일인들이 1812년과 1813년의 자기네 민족적이지만 결코 인민적이지는 않은 봉기를 스페인 봉기에 견주며 뽐내는 것은 헛된 일이다. 스페인인들은 그때까지 무적이던 정복자의 거대한 위력에 맞서 아무 방비 없이 봉기했다. 반면 독일인들은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패한 뒤에야 그에 맞서 봉기했다. 그때까지는 독일의 어느 마을이나 어느 도시가 승리한 프랑스 군대에 아주 사소한 저항이라도 감히 한 예가 없었다. 독일인들은 복종이라는 이 제1의 국가적 미덕에 워낙 길들어 있어서, 승리자들의 의지가 사실상 자국 당국의 의지를 대신하자마자 그것이 그들에게 신성한 것이 되었다. 프로이센 장군들 자신도 요새와 가장 튼튼한 진지와 수도를 하나씩 내주면서, 당시 베를린 사령관의, 길이 기억될 만하고 속담이 되어 버린 말을 되풀이했다. 「평온은 시민의 제1의무다.」

당시 예외는 티롤 하나뿐이었다. 티롤에서 나폴레옹은 참으로 인민적인 저항에 맞닥뜨렸다. 그러나 알다시피 티롤은 독일에서 가장 뒤떨어지고 교육받지 못한 지역이며, 그 본보기를 따른 곳은 계몽된 독일의 다른 어느 지역에도 없었다.

인민 봉기는 본성상 자연발생적이고 혼돈스러우며 무자비하기에, 언제나 제 것이든 남의 것이든 재산의 큰 낭비와 희생을 전제한다. 인민 대중은 그런 희생에 언제나 준비되어 있다. 그들이 위업을 이루고 겉보기에 불가능한 목표를 실현할 수 있는 거칠고 야성적인 힘이 되는 것은, 재산을 아주 조금밖에 갖지 못했거나 전혀 갖지 못해서 재산에 타락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방어나 승리에 필요하다면 그들은 자기 마을과 도시를 없애는 일 앞에서도 멈추지 않으며, 재산이 대부분 남의 것이므로 그들에게서는 드물지 않게 그야말로 적극적인 파괴의 열정이 드러난다. 이 부정적인 열정만으로는 혁명적 과업의 높이에 오르기에 턱없이 모자란다. 그러나 그것 없이는 혁명적 과업이 생각할 수도, 있을 수도 없다. 광범위하고 열정적인 파괴, 구원하고 열매 맺는 파괴 없이는 혁명이 있을 수 없기 때문이며, 바로 그 파괴로부터, 오직 그것을 통해서만 새로운 세계가 잉태되고 생겨나기 때문이다.

그러한 파괴는 부르주아 의식, 부르주아 문명과 양립할 수 없다. 부르주아 문명은 온통 재산에 대한 광신적 숭배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뷔르거든 부르주아든 목숨과 자유와 명예는 차라리 내줄지언정 자기 재산만은 포기하지 않는다. 어떤 목적을 위해서든 재산을 건드리고 파괴한다는 생각 자체가 그들에게는 신성모독으로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나라를 지키는 데 필요할 때조차 자기 도시와 집을 없애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는다. 그래서 1870년의 프랑스 부르주아들과 1813년까지의 독일 시민계급은 운 좋은 정복자들에게 그토록 쉽게 굴복했다. 우리는 재산의 소유만으로도 프랑스 농민층을 타락시키고 그들 안의 마지막 애국심의 불씨마저 꺼뜨리기에 충분했음을 보았다.

그러므로 나폴레옹에 맞선 이른바 독일의 민족 봉기에 관해 마지막 말을 하자면, 첫째, 그것은 나폴레옹의 괴멸된 군대가 러시아에서 도망쳐 나오고, 얼마 전까지 나폴레옹 군대의 일부였던 프로이센 군단과 그 밖의 독일 군단이 러시아 편으로 넘어간 뒤에야 일어났다는 점, 둘째, 그때조차 독일에는 본래 의미의 인민 총궐기가 없었고 도시와 마을은 여전히 조용했으며, 대부분 학생인 젊은이들의 의용대만이 조직되었는데 그것도 곧바로 정규군에 편입되었다는 점을 되풀이해 둔다. 이는 인민 봉기의 방식과 정신에 완전히 어긋나는 일이다. 한마디로 독일에서는 젊은 시민들, 더 정확히는 충성스러운 신민들이 자기 철학자들의 열렬한 설교에 고무되고 자기 시인들의 노래에 불타올라 독일 국가를 지키고 되살리려고 무장했다. 바로 이 시기에 독일에서 범게르만 국가라는 생각이 깨어났기 때문이다. 반면 스페인 인민은 뻔뻔하고 강대한 찬탈자에 맞서 조국의 자유와 인민 생활의 자립을 지키려고 모두가 들고일어났다.

그 뒤로 스페인은 잠들지 않았지만, 60년 동안 새 삶을 위한 새 형식을 찾느라 몸부림쳤다. 가엾게도, 무엇인들 시도해 보지 않았던가! 두 번이나 복원된 절대군주정에서 이사벨 여왕의 헌법까지, 에스파르테로에서 나르바에스까지, 나르바에스에서 프림까지, 그리고 프림에서 아메데오 왕과 사가스타와 소리야까지, 스페인은 입헌군주정의 온갖 변종을 하나하나 입어 보려는 듯했으나, 모두가 너무 좁고 파멸적이며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제 보수적 공화국, 곧 공화정 형식 아래 투기꾼과 부유한 재산가와 은행가가 지배하는 체제도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나고 있다. 스위스식의 정치적 소부르주아 연방도 머지않아 똑같이 불가능한 것으로 드러날 것이다.

스페인은 혁명적 사회주의라는 악마에게 정말로 사로잡혔다. 안달루시아와 에스트레마두라의 농민들은 누구에게 묻지도, 누구의 지시를 기다리지도 않고 옛 지주들의 토지를 이미 점거했고 점점 더 점거해 나가고 있다. 카탈루냐와 그 선두에 선 바르셀로나는 자기들의 독립을, 자치를 큰 소리로 선언한다. 마드리드 인민은 연방 공화국을 선포하고, 혁명을 제헌의회의 장래 포고에 복종시키기를 거부한다. 카를로스파 반동의 손아귀에 있다는 북부 여러 주에서는 명백히 사회혁명이 일어나고 있다. 푸에로스와 지역과 공동체의 독립이 선포되고, 모든 사법 문서와 민사 문서가 불태워진다. 스페인 전역에서 군대는 인민과 형제처럼 어울리며 자기 장교들을 내쫓는다. 공적·사적인 전면 파산이 시작되었다 — 이것은 사회경제적 혁명의 첫째 조건이다.

한마디로, 최종적인 파괴와 붕괴이며, 이 모든 것은 스스로 무너져 내린다. 스스로의 부패로 부서졌거나 산산조각 났기 때문이다. 더 이상 재정도, 군대도, 법원도, 경찰도 없다. 국가 권력도 없고 국가도 없다. 남은 것은 강력하고 신선한 인민이며, 이 인민은 오늘날 오직 하나의 사회혁명적 열정에 사로잡혀 있다. 인터내셔널과 사회혁명가 연합의 집단적 지도 아래, 인민은 자기 힘을 결집하고 조직하며, 붕괴하는 국가와 부르주아 세계의 폐허 위에 해방된 노동자-인간의 고유한 세계를 세울 준비를 하고 있다.

이탈리아는 스페인 못지않게 사회혁명에 가까이 있다. 이탈리아에서도 입헌군주주의자들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심지어 두 위대한 지도자 마치니와 가리발디의 영웅적이지만 헛된 노력에도 불구하고, 국가성이라는 관념은 뿌리내리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뿌리내리지 못할 것이다. 그것은 무수한 농촌 프롤레타리아트와 도시 프롤레타리아트의 참된 정신과 현재의 모든 본능적 열망과 물질적 요구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스페인과 마찬가지로 이탈리아도 고대 로마의 중앙집권적, 곧 일인 통치의 전통을 이미 아주 오래전에, 그리고 무엇보다 돌이킬 수 없이 잃었다. 그 전통은 단테와 마키아벨리의 책과 최신 정치 문헌에는 남아 있지만, 인민의 살아 있는 기억 속에는 결코 남아 있지 않다. 이탈리아는, 거듭 말하거니와, 지역도 아닌 공동체의 절대적 자치라는 살아 있는 전통 하나만을 간직하고 있다. 본래 인민 속에 존재하는 이 유일한 정치적 관념에다, 방언이 워낙 달라서 한 지역 사람이 다른 지역 사람의 말을 간신히 알아듣거나 때로는 전혀 알아듣지 못하는 지역들의 역사적·민족지적 이질성을 더해 보라. 그러면 이탈리아가 국가적 통일이라는 최신 정치적 이상의 실현에서 얼마나 멀리 있는지 알 수 있다. 그러나 이것이 이탈리아가 사회적으로 분열되어 있다는 뜻은 결코 아니다. 오히려 방언과 관습과 풍속에 존재하는 온갖 차이에도 불구하고 공통된 이탈리아적 성격과 유형이 있어서, 그것으로 당신은 이탈리아인을 다른 어떤 종족, 심지어 남방 종족의 사람과도 곧바로 구별할 수 있다.

다른 한편, 물질적 이익의 실제적 연대와 도덕적·정신적 열망의 놀라운 동일성이 이탈리아의 모든 지역을 더없이 긴밀하게 서로 잇고 결속시킨다. 그런데 주목할 것은, 이 모든 이익과 열망이 바로 강제적 정치 통일에 맞서 있으며, 반대로 모두 사회적 통일의 확립을 지향한다는 점이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의 강제적·정치적, 곧 국가적 통일은 사회적 분열을 낳았으며, 따라서 최신 이탈리아 국가의 파괴는 반드시 이탈리아의 자유로운 사회적 결합을 낳으리라고 말할 수 있고, 이탈리아의 현실 생활에서 가져온 무수한 사실로 그것을 입증할 수 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본래 인민 대중에게만 해당한다. 이탈리아 부르주아지의 상층에서는 다른 나라들과 마찬가지로, 국가적 통일과 함께 특권을 누리는 인민 노동 착취자 계급의 사회적 통일이 생겨났고, 지금도 점점 더 발전하고 확대되고 있기 때문이다.

이 계급은 지금 이탈리아에서 콘소르테리아라는 통칭으로 불린다. 콘소르테리아는 관료·군·경찰·사법의 공식 세계 전체, 대지주·산업가·상인·은행가의 세계 전체, 공식적이고 반관적인 변호사 집단과 문필계 전체, 그리고 의회 전체를 아우른다. 의회의 우파는 지금 통치의 모든 이익을 누리고 있고, 좌파는 바로 그 통치를 제 손에 넣으려 한다.

그러므로 이탈리아에도 다른 모든 곳과 마찬가지로, 국가의 이름으로 나라를 빨아먹고, 국가의 더 큰 이익을 위해 나라를 극도의 빈곤과 절망으로 몰아넣은 약탈자들의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정치 세계가 존재한다.

그러나 가장 끔찍한 빈곤도, 그것이 수백만의 프롤레타리아트를 덮칠 때조차, 아직 혁명을 위한 충분한 보증은 되지 못한다. 인간은 날 때부터 놀라운, 그리고 정말이지 때로는 사람을 절망시킬 만한 인내심을 타고났다. 빈곤이 그에게 듣도 보도 못한 궁핍과 서서히 굶어 죽는 운명을 지우는데, 거기에 더해 그가 우둔함, 무딘 감정, 자기 권리에 대한 의식의 철저한 결여, 그리고 모든 인민 가운데 특히 동인도 사람들과 독일인들이 두드러지게 지닌 그 흔들림 없는 인내와 복종까지 타고났다면, 그가 견디지 못할 것이 무엇이겠는가. 그런 인간은 결코 일어서지 않는다. 죽을지언정 반란은 일으키지 않는다.

그러나 절망에 이르면 그가 들고일어날 가능성은 이미 더 커진다. 절망은 날카롭고 격렬한 감정이다. 절망은 그를 둔하고 반쯤 잠든 고통에서 끌어내며, 더 나은 처지가 가능하다는 것을 이미 어느 정도 분명히 의식하고 있음을 전제한다. 다만 그는 그 처지에 이르리라고 기대하지 않을 뿐이다.

끝으로, 절망 속에 오래 머무를 수 있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 절망은 사람을 재빨리 죽음으로, 아니면 행동으로 이끈다. 어떤 행동으로? 물론 해방과 더 나은 삶의 조건을 쟁취하는 행동으로. 독일인조차 절망에 빠지면 이러쿵저러쿵 따지기를 그만둔다. 다만 그를 절망에 이르게 하려면 온갖 종류의 모욕과 압박과 고통과 악이 많이, 아주 많이 필요하다.

그러나 빈곤과 절망만으로는 사회혁명을 일으키기에 부족하다. 빈곤과 절망은 개인적 반란이나 기껏해야 지역적 반란을 낳을 수는 있지만, 인민 대중 전체를 일으켜 세우기에는 모자란다. 그러려면 전 인민적 이상이 또 있어야 한다. 그 이상은 언제나 인민 본능의 깊은 곳에서 역사적으로 빚어지며, 그 본능은 일련의 의미심장한 사건과 무겁고 쓰라린 경험을 거치며 길러지고 넓어지고 밝아진다. 곧 자기 권리에 대한 공통된 관념과, 그 권리에 대한 깊고 열렬한, 종교적이라고 할 만한 믿음이 있어야 한다. 이런 이상과 이런 믿음이 인민 속에서 그를 절망으로 몰아넣는 빈곤과 만날 때, 사회혁명은 피할 수 없고 가까우며, 어떤 힘도 그것을 막을 수 없다.

이탈리아 인민이 바로 그런 처지에 있다. 그들이 겪는 빈곤과 온갖 고통은 끔찍하며, 러시아 인민을 짓누르는 빈곤과 고통에 거의 뒤지지 않는다. 그러나 동시에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에는 우리 프롤레타리아트보다 훨씬 더 열렬한 혁명 의식이 자라났고, 그 의식은 나날이 더 분명하고 강하게 모양을 갖추고 있다. 본래 영리하고 열정적인 이탈리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침내 자기에게 무엇이 필요한지, 완전하고 전면적인 해방을 위해 무엇을 원해야 하는지 이해하기 시작했다. 이 점에서 겨우 최근 2년 동안에야 힘차고 폭넓게 전개된 인터내셔널의 선전은 그들에게 큰 공헌을 했다. 그 선전은 바로 그들에게 이 이상을 주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그들 안에서 이 이상을 일깨웠다. 이 이상은 그들의 가장 깊은 본능이 굵은 선으로 그려 놓은 것이며, 우리가 말했듯이 그것 없이는 인민이 어떤 고통을 겪든 인민 봉기는 결단코 불가능하다. 선전은 그들이 실현해야 할 목표를 가리켜 주었고, 동시에 인민의 힘을 조직할 길과 수단을 열어 주었다.

이 이상은 물론 인민에게 무엇보다 먼저 결핍의 끝, 빈곤의 끝, 그리고 모두에게 의무이고 모두에게 평등한 집단 노동을 통한 모든 물질적 욕구의 완전한 충족을 뜻한다. 다음으로는 주인들과 온갖 지배의 끝, 그리고 인민의 필요에 따른 인민 생활의 자유로운 조직을 뜻한다. 국가에서처럼 위에서 아래로가 아니라 아래에서 위로, 모든 정부와 의회를 거치지 않고 인민 자신이 이루는 조직, 곧 농업 노동자와 공장 노동자의 협동조합, 공동체, 지역, 인민들의 자유로운 연합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더 먼 미래에는 모든 국가의 폐허 위에서 승리하는 전 인류적 형제애를 뜻한다.

주목할 것은 이탈리아에서도 스페인에서와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국가공산주의 강령은 전혀 성공하지 못했고, 반대로 악명 높은 동맹, 곧 사회혁명가 연합의 강령이 널리 그리고 열렬히 받아들여졌다는 점이다. 그 강령은 온갖 지배, 정부의 후견, 상관과 권위에 무자비한 전쟁을 선포했다.

이런 조건에서 인민은 해방되어 모든 사람과 각 사람의 가장 넓은 자유 위에 자기 삶을 세울 수는 있지만, 다른 인민들의 자유를 위협할 수는 결코 없다. 그러므로 스페인 쪽에서도 이탈리아 쪽에서도 정복 정책을 기대할 수는 없으며, 오히려 가까운 사회혁명을 기대해야 한다.

스위스, 벨기에, 네덜란드, 덴마크, 스웨덴 같은 작은 국가들 역시 바로 같은 이유로, 그러나 주로 정치적 중요성이 미미하기 때문에 아무도 위협하지 않으며, 오히려 새로운 독일 제국의 정복을 두려워할 많은 이유를 가지고 있다.

오스트리아, 러시아, 프로이센 독일이 남는다. 오스트리아를 언급하는 것은 빠른 걸음으로 죽음에 다가가는 불치병 환자를 말하는 것이나 다름없지 않은가? 왕조의 혼맥과 군사적 폭력으로 만들어진 이 제국은, 게다가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별로 좋아하지 않는 네 인종으로 이루어져 있고, 그 위에 독일 인종이 군림하는데, 이 독일 인종은 나머지 세 인종에게 한결같이 미움을 받으며 그 수는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겨우 이른다. 또 절반은 자치를 요구하는 슬라브인으로 이루어져 있고, 최근에는 마자르-슬라브 국가와 독일-슬라브 국가라는 두 국가로 갈라졌다 — 이런 제국은, 우리가 말하건대, 군사·경찰적 전제가 그 안에서 우세한 동안에는 버틸 수 있었다. 지난 25년 동안 이 제국은 치명타를 세 번 맞았다. 첫 번째 패배는 1848년 혁명이 안겼으니, 그 혁명은 낡은 체제와 메테르니히 공의 통치를 끝장냈다. 그때부터 이 제국은 극약 처방과 온갖 강장제로 노쇠한 목숨을 이어 왔다. 1849년 니콜라이 황제에게 구원받은 이 제국은 오만한 과두 정치가 슈바르첸베르크 공과, 정교 협약(콩코르다트)을 작성한 슬라브주의자 행세의 예수회 신자 툰 백작의 통치 아래, 가장 필사적인 교권적·정치적 반동에서, 그리고 모든 민족적 차이를 무시하고 모든 지방에 더없이 완전하고 무자비한 중앙집권을 세우는 데서 구원을 찾으려 뛰어들었다. 그러나 1859년 나폴레옹 3세가 안긴 두 번째 패배는 군사·관료적 중앙집권이 이 제국을 구할 수 없음을 증명했다.

그때부터 이 제국은 자유주의로 돌아섰다. 작센에서 비스마르크 공(당시에는 아직 백작)의 서투르고 불운한 경쟁자 보이스트 남작을 불러들여 자기 인민들을 필사적으로 해방하기 시작했지만, 그들을 해방하면서 동시에 자기 국가적 통일도 지키려 했다. 곧 도무지 풀 수 없는 과제를 풀려고 한 것이다.

제국에 사는 네 주요 종족 — 슬라브인, 독일인, 마자르인, 왈라키아인[3] — 을 동시에 만족시켜야 했다. 이들은 본성과 언어로 보나 저마다 다른 기질과 문화 수준으로 보나 지극히 다를 뿐 아니라, 대부분 서로 적대적이기까지 해서, 정부의 폭력으로써만 국가적 결합 안에 붙잡아 둘 수 있었고 지금도 그렇다.

독일인들을 만족시켜야 했다. 그들 대다수는 가장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인 헌법을 쟁취하려 하면서도, 유대인과 합쳐도 전체 인구의 4분의 1밖에 되지 않는데도 오스트리아 군주국에서 국가적 우위를 누려 온 예로부터의 권리를 자기들에게 남겨 두라고 끈질기게, 큰 소리로 요구한다.

이것은 우리가 지치지 않고 옹호하는 진리에 대한 새로운 증거가 아닌가? 우리는 모든 사회적 과제가 하루빨리 풀리느냐가 이 진리를 모두가 깨닫느냐에 달려 있다고 확신한다. 그 진리란, 국가는, 어떤 국가든,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적인 형식을 걸치고 있더라도 반드시 우위와 지배와 폭력, 곧 전제 위에 세워져 있다는 것이다. 그 전제는, 원한다면 숨겨진 전제라 해도 좋지만, 그렇기에 더욱 위험하다.

타고난 국가주의자이자 관료라 할 만한 독일인들은 자기들의 요구를 한편으로는 역사적 권리, 곧 정복과 시효의 권리에, 다른 한편으로는 자기 문화가 우월하다는 허울에 근거 짓는다. 이 서문의 끝에서 우리는 그들의 요구가 얼마나 멀리까지 뻗어 있는지 보여 줄 기회를 가질 것이다. 지금은 오스트리아 독일인에 국한하자. 다만 그들의 요구를 전체 독일인의 요구와 떼어 놓기란 매우 어렵다.

오스트리아 독일인들은 지난 몇 년 동안 마지못해 깨달았다. 적어도 당분간은 마자르인에 대한 우위를 포기해야 한다는 것을. 그리고 마침내 마자르인의 독자적 생존 권리를 인정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에 사는 모든 종족 가운데 마자르인은 독일인 다음으로 가장 국가적인 인민이다. 1850년부터 1859년까지 9년 동안 오스트리아 정부가 그들의 완강함을 꺾으려고 더없이 가혹한 박해와 가장 극단적인 조치를 동원했는데도, 그들은 자기 민족적 독자성을 포기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헝가리 왕국에 그들과 함께 사는 다른 모든 종족에 대한 국가적 우위의 권리, 그들 생각으로는 이 역시 역사적인 권리를 옹호했고 끝내 지켜 냈다. 그들 자신은 왕국 전체 인구의 3분의 1을 조금 넘을 뿐인데도 그랬다[4].

이렇게 해서 불행한 오스트리아 제국은 힘이 거의 같고 하나의 왕관 아래에서만 결합된 두 국가로 갈라졌다 — 주민 2050만 명(그 가운데 독일인과 유대인 720만 명, 슬라브인 1150만 명, 이탈리아인과 그 밖의 종족 약 180만 명)의 시스라이타니아 국가, 곧 슬라브-독일 국가와, 트란스라이타니아 국가, 곧 헝가리 국가 또는 마자르-슬라브-루마니아-독일 국가로.

주목할 점은 이 두 국가 가운데 어느 것도 심지어 내부 구성에서조차 현재의 힘은 물론 미래의 힘에 대한 어떤 보증도 제공하지 못한다는 것이다.

헝가리 왕국에서는 자유주의 헌법과 마자르 통치자들의 의심할 바 없는 능란함에도 불구하고, 오스트리아 군주국의 고질병인 인종 간 투쟁이 조금도 가라앉지 않았다. 마자르인에게 종속된 주민 다수는 그들을 좋아하지 않으며 결코 자발적으로 그들의 멍에를 지려 하지 않는다. 그래서 이 다수와 마자르인 사이에는 끊임없는 투쟁이 벌어지고, 슬라브인은 투르크령 슬라브인에게, 루마니아인은 왈라키아·몰다비아·베사라비아·부코비나의 형제 주민에게 기댄다. 주민의 3분의 1에 불과한 마자르인은 어쩔 수 없이 빈에서 버팀목과 보호를 구해야 한다. 그런데 마자르의 이탈을 소화하지 못하는 황제의 빈은, 노쇠하고 몰락한 모든 왕조 정부들과 마찬가지로 잃어버린 위력이 기적처럼 회복되리라는 은밀한 희망을 품고 있어서, 헝가리 왕국이 자리 잡지 못하게 하는 이 내부 분란을 몹시 반기며 슬라브인과 루마니아인의 격정을 마자르인에게 맞서도록 몰래 부추긴다. 마자르 통치자들과 정치인들은 이를 알고 있으며, 그 앙갚음으로 그들 쪽에서도 비스마르크 공과 은밀히 연락을 주고받는다. 비스마르크 공은 멸망이 예정된 오스트리아 제국과의 피할 수 없는 전쟁을 내다보고 마자르인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시스라이타니아 국가, 곧 독일-슬라브 국가의 처지도 조금도 낫지 않다. 여기서는 유대인을 포함해 700만을 조금 넘는 독일인이 1150만 슬라브인을 다스리겠다고 나선다.

이 요구는 물론 기이하다. 아주 먼 옛날부터 독일인의 역사적 과제는 슬라브 땅을 정복하고, 슬라브인을 절멸시키고 굴복시키고 교화하는 것, 곧 독일화하거나 소시민화하는 것이었다고 말할 수 있다. 여기서 두 종족 사이에 깊은 역사적 상호 증오가 생겨났는데, 이 증오는 양쪽 모두 저마다의 특수한 처지에서 비롯된 것이다.

슬라브인은 독일인을 증오한다. 정복당했으나 화해하지 않고 마음속으로 굴복하지 않은 인민들이 모든 승리자를 증오하듯이. 독일인은 슬라브인을 증오한다. 주인이 대개 자기 노예를 증오하듯이. 독일인은 자기들이 슬라브인에게서 사서 받은 증오 때문에 슬라브인을 증오하고, 슬라브인의 꺼지지 않는 해방의 생각과 희망이 자기들 안에 불러일으키는, 어쩔 수 없고 끊임없는 두려움 때문에 슬라브인을 증오한다.

남의 땅을 정복하고 남의 인민을 굴복시킨 모든 자가 그렇듯이, 독일인은 슬라브인을 동시에 증오하고 멸시하는데, 둘 다 전적으로 부당하다. 그들이 왜 증오하는지는 앞에서 말했다. 멸시하는 것은 슬라브인이 독일화될 줄도 몰랐고 독일화되려 하지도 않았기 때문이다. 주목할 것은 프로이센 독일인이 오스트리아 독일인을 지극히 진지하고 통렬하게 나무라며, 슬라브인을 독일화하지 못한 것을 두고 오스트리아 정부를 거의 반역죄로 고발하기까지 한다는 점이다. 그들의 확신으로는, 그리고 실제로도, 이는 전체 독일의 애국적 이익에 대한, 범게르만주의에 대한 최대의 범죄다.

이 증오스러운 범게르만주의에 위협받고, 더 정확히 말하면 이미 사방에서 박해받고 있으나 완전히 짓밟히지는 않은 오스트리아 슬라브인은, 폴란드인을 빼고는, 그것에 또 하나의 더없이 혐오스러운 부조리, 그에 못지않게 자유에 반하고 인민을 죽이는 또 하나의 이상, 곧 범슬라브주의[5]를 맞세웠다.

폴란드인을 빼고도 모든 오스트리아 슬라브인이 흉측한 만큼이나 위험한 이 이상을 숭배한다고 우리가 주장하는 것은 아니다. 덧붙여 말하자면, 투르크령 슬라브인들 사이에서는 그들 틈을 끊임없이 어슬렁거리는 러시아 요원들의 온갖 책동에도 불구하고 이 이상에 대한 공감이 극히 적다. 그럼에도 페테르부르크로부터의 구원과 구원자를 바라는 기대가 오스트리아 슬라브인 사이에 꽤 널리 퍼져 있는 것은 사실이다. 무섭고, 덧붙이자면 지극히 정당한 증오가 그들을 그토록 정신 나가게 만들어서, 리투아니아와 폴란드와 소러시아, 그리고 대러시아 인민 자신이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의 전제 아래 겪는 온갖 재앙을 잊었거나 알지 못한 채, 그들은 우리의 전러시아 차르의 채찍에서 구원을 기다리게 되었다!

그런 터무니없는 기대가 슬라브 대중 속에서 자라날 수 있었다는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들은 역사도 모르고 러시아의 내부 사정도 모른다. 그들은 다만 독일인들을 비웃기라도 하듯, 독일인들에게 맞서 거대한, 순수한 슬라브 제국이라는 나라가 생겨났고, 그 나라가 어찌나 강대한지 증오스러운 독일인들이 그 앞에서 벌벌 떤다는 말만 들었다. 독일인이 떤다, 그러니 슬라브인은 기뻐해야 한다. 독일인이 증오한다, 그러니 슬라브인은 사랑해야 한다.

이 모든 것은 아주 자연스럽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슬라브 지역의 교양 계급 가운데 경험 많고 영리하고 박식한 사람들이 이끄는 한 당파가 생겨나, 범슬라브주의를, 적어도 어떤 이들의 뜻으로는 러시아 제국의 강력한 개입을 통한 슬라브 종족들의 해방을, 다른 이들의 뜻으로는 심지어 러시아 차르의 통치 아래 슬라브 대왕국을 세우는 것을 공공연히 설파하고 있다는 것은 이상하고 슬프며 용서할 수 없는 일이다.

본질상 부르주아적이고 그렇기에 국가적인 이 저주받은 독일 문명이 슬라브 애국자들의 영혼에까지 얼마나 깊이 스며들었는지는 놀라울 정도다. 그들은 독일화된 부르주아 사회에서 태어나 독일의 학교와 대학에서 배웠고, 독일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원하는 데 익숙해졌으니, 그들이 추구하는 목표가 반독일적이지 않았다면 완전한 독일인이 되었을 것이다. 그들은 독일적인 길과 수단으로 슬라브인을 독일의 멍에에서 해방하려 하고, 또 그럴 수 있다고 생각한다. 독일식 교육 탓에 슬라브 국가들을, 또는 하나의 강력한 슬라브 국가를 세우는 것 말고는 다른 해방 방법을 이해하지 못하는 그들은 목표마저 완전히 독일적인 것으로 세운다. 왜냐하면 최신 국가, 곧 중앙집권적이고 관료적이며 경찰·군사적인 국가, 예컨대 새 독일 제국이나 전러시아 제국 같은 국가는 순전히 독일적인 창조물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예전에 거기에 타타르적 요소가 섞여 있었지만, 타타르식 상냥함이라면 이제 독일에도 정말이지 모자라지 않을 것이다.

그 본성 전체와 본질 전체로 보아 슬라브인은 결정적으로 정치적이지 않은, 곧 국가적이지 않은 종족이다. 체코인들이 자기들의 위대한 모라비아 왕국을, 세르비아인들이 두샨의 왕국을 들먹이는 것은 헛된 일이다. 이 모든 것은 덧없는 현상이거나 옛 우화일 뿐이다. 확실한 것은 어떤 슬라브 종족도 스스로 국가를 만들어 내지 못했다는 사실이다.

폴란드의 군주제-공화국은 농민 인민(농노)이 완전히 패배하고 슐라흐타의 멍에 아래 노예처럼 굴복한 뒤에, 게르만주의와 라틴주의의 이중 영향 아래 생겨났다. 많은 폴란드 역사가와 작가들(그 가운데 미츠키에비치도 있다)의 증언과 견해에 따르면, 그 슐라흐타는 슬라브 출신조차 아니었다.

보헤미아 왕국, 곧 체코 왕국은 독일인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순전히 독일의 모습을 본떠 빚어졌다. 그래서 보헤미아는 그토록 일찍부터 독일 제국의 유기적 구성원, 떼어 낼 수 없는 일부가 되었다.

그리고 전러시아 제국이 어떻게 형성되었는지는 누구나 안다. 여기에는 타타르의 채찍과 비잔티움의 축복, 그리고 독일의 관료·군사적이고 경찰적인 계몽이 모두 한몫했다. 가엾은 대러시아 인민, 그리고 나중에 제국에 합쳐진 다른 인민들, 곧 소러시아 인민, 리투아니아 인민, 폴란드 인민은 오직 제 등으로만 그 건설에 참여했다.

따라서 슬라브인이 결코 스스로, 자기 주도로 국가를 이룬 적이 없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들이 국가를 이루지 않은 것은 정복하는 종족이었던 적이 한 번도 없기 때문이다. 오직 정복하는 인민만이 국가를 만들며, 그것도 반드시 자기에게 이롭고 정복당한 인민들에게 해롭게 만든다.

슬라브인은 주로 평화로운 농경 종족이었다. 게르만 종족들을 고무하던 호전적 정신과 거리가 멀었던 그들은 바로 그 때문에 게르만인들에게서 일찍부터 나타난 국가적 지향과도 거리가 멀었다. 그들은 노인들이 가부장적 관습에 따라, 그러면서도 선거 원칙에 기초해 다스리는 자기 공동체 안에서 따로따로 독립적으로 살며 모두가 공동체 토지를 똑같이 이용했고, 귀족을 갖지도 알지도 못했으며, 사제 카스트조차 두지 않았고, 서로 모두 평등했다. 물론 그들은 인간 형제애라는 이념을 아직 가부장적인, 따라서 가장 불완전한 형태로만 실현하고 있었다. 공동체들 사이에는 항구적인 정치적 유대가 없었다. 그러나 공동의 위험, 예컨대 외래 종족의 침입이 닥치면 그들은 일시적으로 방어 동맹을 맺었고, 위험이 지나가기만 하면 이 정치적 결합의 그림자는 사라졌다. 그러므로 슬라브 국가는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 대신 지극히 손님을 반기는 모든 슬라브 종족 사이에는 사회적이고 형제적인 유대가 있었다.

이런 조직에서는 당연히 슬라브인이 호전적 종족들, 특히 자기 지배를 사방에 넓히려던 게르만인들의 공격과 점령 앞에 무방비일 수밖에 없었다… 슬라브인은 일부는 절멸되었고, 대부분은 투르크인, 타타르인, 마자르인,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인에게 정복당했다.

10세기 후반부터 그들의 예속의 수난사가 시작되는데, 그것은 수난사일 뿐 아니라 영웅의 역사이기도 했다. 정복자들에 맞서 여러 세기에 걸친 끊임없고 완강한 투쟁 속에서 그들은 자기 땅의 자유를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이미 11세기에 우리는 두 가지 사실을 만난다. 하나는 오데르강과 엘베강과 발트해 사이에 살던 슬라브 이교도들이 독일 기사와 성직자에 맞서 일으킨 전면 봉기이고, 다른 하나는 그에 못지않게 의미심장한, 대폴란드 농노들이 슐라흐타의 지배에 맞서 일으킨 반란이다. 그 뒤 15세기까지 서슬라브인은 독일인에 맞서, 남슬라브인은 투르크인에 맞서, 북동슬라브인은 타타르인에 맞서 작고 눈에 띄지 않지만 끊임없는 투쟁을 이어 갔다.

15세기에 우리는 체코 후스파의 위대한, 이번에는 승리한, 그리고 순전히 인민적인 혁명을 만난다. 그들의 종교적 원리는, 지나가는 길에 말해 두자면 가톨릭 원리나 그 뒤를 이은 프로테스탄트 원리보다 인간 형제애와 인민적 자유의 원칙에 비할 수 없이 더 가까웠지만, 그것은 제쳐 두고 — 우리는 이 혁명의 순전히 사회적이고 반국가적인 성격에 주목하겠다. 이것은 독일 국가에 맞선 슬라브 공동체의 반란이었다.

17세기에 프라하의 반쯤 독일화된 시민층이 거듭 배신한 탓에 후스파는 최종적인 패배를 당했다. 체코 인구의 거의 절반이 몰살당했고, 토지는 독일에서 온 이주민들에게 넘어갔다. 독일인들이, 그리고 그들과 함께 예수회가 승리했으며, 이 유혈 패배 이후 2세기가 훨씬 넘도록 서슬라브 세계는 가톨릭 교회와 승리한 게르만주의의 압제 아래 꼼짝도 못 하고 말도 못 한 채 머물러 있었다. 같은 시기 남슬라브인들은 마자르 종족의 지배 아래에서, 또는 투르크의 멍에 아래에서 노예의 처지를 힘겹게 이어 갔다. 그러나 그 대신 같은 인민적·공동체적 원리의 이름으로 일어난 슬라브의 반란이 북동쪽에서 되살아났다.

16세기에 대노브고로드와 프스코프 및 다른 지역들이 모스크바 차르들에 맞서 벌인 필사적인 투쟁은 말할 것도 없고, 17세기 초에 대러시아 지방 자치 세력이 폴란드 국왕, 예수회, 모스크바 보야르, 그리고 일반적으로 모스크바의 패권에 맞서 결성한 연합 민병대에 대해서도 말하지 않겠다. 다만 폴란드 슐라흐타에 맞선 소러시아와 리투아니아 주민의 유명한 봉기, 그에 뒤이은 스테판 라진이 이끈 볼가 강 연안 농민의 더욱 단호한 봉기, 마지막으로 그로부터 100년 후에 일어난 못지않게 중요한 푸가초프의 반란을 상기해 보자. 이 모든 순전히 인민적인 운동, 봉기, 반란에서 우리는 국가에 대한 동일한 증오, 자유로운 공동체적 농민 미르를 만들어 내려는 동일한 열망을 발견한다.

마지막으로 19세기는 슬라브 종족이 두루 깨어난 세기라고 할 수 있다. 폴란드는 말할 것도 없다. 폴란드는 결코 잠들지 않았다. 자유, 그것도 인민의 자유가 아니라 슐라흐타와 국가의 자유를 도둑처럼 빼앗긴 이후, 세 약탈 강국 사이에 분할된 이후 폴란드는 투쟁을 멈추지 않았으며, 무라비요프 같은 자들과 비스마르크가 무슨 짓을 하든 폴란드는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반란을 일으킬 것이다. 폴란드에게 불행하게도, 지금까지도 주로 슐라흐타 출신인 폴란드의 지도 정당들은 국가적 강령을 버리지 못했고, 조국의 해방과 갱신을 사회혁명에서 찾는 대신 오랜 전통을 좇아 어떤 나폴레옹의 후원에서, 또는 예수회 및 오스트리아 봉건 영주와의 동맹에서 그것을 찾고 있다.

그러나 우리 세기에는 서슬라브족과 남슬라브족도 각성했다. 모든 독일의 정치적, 경찰적, 문명화적 노력에도 불구하고, 보헤미아는 3세기에 걸친 잠에서 깨어나 다시 순전히 슬라브적인 나라로서 일어나 서슬라브 운동 전체의 자연스러운 중심지가 되었다. 투르크령 세르비아는 남슬라브 운동에 대해 바로 그러한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나 슬라브 종족들의 부흥과 함께 지극히 중요하고, 말하자면 운명적인 문제가 제기된다.

이 슬라브의 부흥은 어떻게 이루어져야 하는가? 국가적 패권의 옛 길로, 아니면 모든 인민, 적어도 유럽 인민 모두의 진정한 해방, 즉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모든 멍에, 무엇보다 국가의 멍에로부터 해방하는 길로인가?

슬라브족은 자신들이 가장 증오하는 외래의 멍에, 주로 독일의 멍에에서 벗어나야 하고 또 벗어날 수 있는가? 이번에는 자기들이 독일식 방법, 곧 정복하고 점령하고, 정복된 인민 대중을 그들이 증오하는 신민의 충성, 곧 전에는 독일에 바치고 이제는 슬라브에 바치는 충성에 억지로 묶어 두는 방법에 기대서인가? 아니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전체의 연대 봉기, 즉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슬라브족의 모든 미래는 이 두 길 중 어느 쪽을 택하느냐에 달려 있다. 그렇다면 그들은 어느 쪽을 택해야 하는가?

우리의 확신에 따르면, 이 문제를 제기하는 것은 곧 그것을 해결하는 것이다. 솔로몬 왕의 지극히 지혜로운 금언과는 달리, 옛것은 결코 되풀이되지 않는다. 고대의 지배 이념을 완전히 실현한 최신 국가는, 기독교가 신학적 신앙 내지 종교적 예속의 최종 형태를 실현하는 것과 마찬가지로, 관료적·군사경찰적·중앙집권적 국가로서, 그 내적 본질의 필연 자체에 따라 주변에 존재하고 살아 움직이고 숨 쉬는 모든 것을 장악하고 복종시키고 목 졸라 죽이려 드는 국가로서, 범게르만 제국에서 그 최종적 표현을 찾은 이 국가는 이제 그 시대를 다해가고 있다. 그 날은 얼마 남지 않았으며, 모든 인민은 그 몰락에서 최종적 해방을 기다리고 있다.

과연 슬라브인들이 인간을 증오하고 인민을 증오하며 이미 역사로부터 단죄받은 그 답을 되풀이하도록 운명지어졌단 말인가? 그리고 무엇을 위해서인가? 명예는 전혀 없다. 오히려 범죄요, 불명예요, 동시대인과 후손의 저주다. 아니면 슬라브인들은 독일인들이 유럽의 나머지 모든 인민의 증오를 얻은 것이 부러워졌단 말인가? 아니면 그들은 세계의 신이라는 역할이 마음에 드는 것인가? 오랜 예속과 고통과 침묵 끝에 그들이 인류에게 새로운 사슬을 가져다주어야 한다면, 모든 슬라브인은 그 군사적 미래와 함께 악마에게나 가 버려라!

그리고 슬라브인들에게는 무슨 이익이 있는가? 위대한 슬라브 국가의 건설이 슬라브 인민 대중에게 무슨 이익이 될 수 있단 말인가? 그런 국가에는 의심할 바 없는 이익이 있다. 다만 수백만 프롤레타리아트에게가 아니라 특권적 소수, 즉 성직자나 귀족이나 부르주아 소수, 아니면 기껏해야 지식인 소수에게 있다. 지식인 소수란 특허받은 학식과 허울뿐인 지적 우월성을 내세워 자신이 대중을 좌지우지할 소명을 받았다고 여기는 자들이다. 이익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억압하고 처형하고 착취하는 몇천 명에게 있다.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에게, 막노동 대중에게는 국가가 클수록 사슬은 더 무겁고 감옥은 더 좁다.

우리는 위에서 사회가 정복 국가가 되지 않으면 국가일 수 없고 국가로 남을 수도 없다고 말했고 증명했다. 경제 분야에서 소규모 및 심지어 중규모의 자본, 공장, 토지 소유, 상사를 멸망시키고 거대한 자본·공장·재산·상사의 이익을 위해 흡수하는 바로 그 경쟁이, 소규모 및 중규모 국가를 제국의 이익을 위해 멸망시키고 흡수한다. 이제부터 모든 국가는, 종이 위에서만, 또 이웃 나라들이 그 존재를 참아 주는 동안에만 그들의 은혜로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실제로, 자립적이고 독립적으로 존재하기를 원한다면, 반드시 정복 국가가 되어야 한다.

그러나 정복 국가가 된다는 것은 수백만의 다른 인민을 강제로 복종시키지 않을 수 없다는 뜻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거대한 군사력의 발전이 필요하다. 그런데 군사력이 승리하는 곳에서는 자유여 안녕! 특히 노동 인민의 자유와 복지여 안녕! 여기서 나오는 결론은, 위대한 슬라브 국가의 건설이란 거대한 슬라브 인민 예속의 건설에 다름 아니라는 것이다.

「하지만」 — 슬라브 국가주의자들이 우리에게 반박할 것이다 — 「우리는 하나의 위대한 슬라브 국가를 원하지 않는다. 우리는 슬라브 인민들의 독립을 위한 필수적인 보증으로서 중간 규모의 순수 슬라브 국가들이 여럿 생겨나는 것만을 바란다.」 그러나 이 견해는 논리와 역사적 사실, 사물의 힘에 어긋난다. 중간 규모의 어떤 국가도 이제 독자적으로 존재할 수 없다. 따라서 슬라브 국가들은 존재하지 않게 되거나, 아니면 하나의 거대하고 모든 것을 삼켜버리는 국가, 즉 범슬라브주의적이고 채찍으로 다스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국가가 존재하게 될 것이다.

게다가 슬라브 국가가 그 자체로 그토록 거대하고 그토록 강력하지 않다면, 새로 등장한 범게르만 제국의 거대한 위력에 맞서 싸울 수 있겠는가? 이해관계만으로 묶인 여러 개별 국가들의 일치된 행동을 기대해서는 결코 안 된다. 첫째, 이질적인 조직과 역량들의 결합은, 그 수가 적국의 역량과 같거나 심지어 능가하더라도, 여전히 적국보다 약하기 때문이다. 적국은 동질적이고, 하나의 사상과 하나의 의지에 복종하는 그 조직이 더 견고하고 더 단순하기 때문이다. 둘째, 여러 강대국의 일치된 협력을, 설령 그들 자신의 이해관계가 그러한 동맹을 요구할 때조차도, 결코 기대해서는 안 되기 때문이다. 국가의 통치자들은 평범한 인간들과 마찬가지로, 대개 눈이 멀어 있어서, 한때의 이해관계와 정념 너머에 있는 자기 처지의 본질적 요구를 보지 못한다.

1863년에 프랑스, 영국, 스웨덴, 심지어 오스트리아의 직접적 이해관계는 러시아에 맞서 폴란드를 편들어 개입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1864년에는 훨씬 더 직접적인 이해관계가 영국, 프랑스, 특히 스웨덴, 심지어 러시아에게 프로이센-오스트리아의, 실질적으로는 프로이센-독일의 정복 위협에 놓인 덴마크를 편들어 개입하라고 명령했다. 그리고 다시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다. 마지막으로 1870년에는 영국, 러시아, 오스트리아가, 북유럽의 작은 국가들은 말할 것도 없이, 명백한 이해관계에 따라 프로이센-독일 군대가 프랑스로 쳐들어가 파리까지, 거의 남부까지 의기양양하게 밀고 들어가는 것을 저지해야 했다. 그러나 이번에도 아무도 개입하지 않았고, 모두에게 위협이 되는 새로운 독일의 위력이 생겨난 뒤에야 열강들은 개입했어야 했다는 것을 깨달았지만, 이미 때는 늦었다.

따라서 이웃 열강 정부들의 지혜에 기대를 걸어서는 안 되며, 자기 자신의 역량에 기대를 걸어야 하고, 그 역량은 적어도 적국의 역량과 맞먹어야 한다. 그러므로 어떤 슬라브 국가도 단독으로는 범게르만 제국의 압력에 저항할 수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범게르만적 중앙집권화에 범슬라브 연방, 즉 북아메리카나 스위스 같은 독자적 슬라브 국가들 또는 주들의 연합을 대항시킬 수는 없겠는가? 이 질문에도 우리는 부정적으로 답해야 한다.

첫째, 어떤 연합이든 성립하려면 전러시아 제국이 무너져야 하고, 그것이 여러 개별적이고 서로 독립적이며 오직 연방적으로만 연결된 국가들로 분열되어야 한다. 그토록 거대한 제국과 그러한 연방적 연합을 이룬 상태에서 소규모, 심지어 중간 규모 슬라브 국가들의 독립과 자유를 지키는 것은 도저히 생각할 수 없기 때문이다.

설령 페테르부르크 제국이 크고 작은 여러 자유 주들로 분열되고, 자기들 쪽에서도 독립 국가로 조직된 폴란드, 보헤미아, 세르비아, 불가리아 등이 이 새로운 러시아 주들과 함께 위대한 슬라브 연방을 이루었다고 하자. 그런 경우에도 우리가 주장하건대, 이 연방은 범게르만적 중앙집권에 맞서 싸울 수 없을 것이다. 그 단순한 이유는 군사·국가적 역량이 언제나 중앙집권 쪽에 있기 때문이다.

주들의 연방은 어느 정도까지 부르주아적 자유를 보장할 수는 있지만, 국가적·군사적 역량을 만들어낼 수는 없다. 바로 그것이 연방이기 때문이다. 국가적 역량은 반드시 중앙집권을 요구한다. 사람들은 우리에게 스위스와 미합중국을 예로 들 것이다. 그러나 스위스는 바로 자기 군사력과 국가적 역량을 키우기 위해 지금 명백히 중앙집권을 향해 나아가고 있으며, 북아메리카에서 연방이 지금까지 가능한 것은 오직 아메리카 대륙에서 이 큰 공화국과 이웃한 곳에 러시아, 독일, 프랑스 같은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가 하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국가적 또는 정치적 영역에서 승리한 범게르만주의에 맞서려면 남은 수단은 하나뿐이다. 범슬라브 국가를 세우는 것이다. 이 수단은 다른 모든 점에서 슬라브인들에게 극히 불리하다. 그것이 필연적으로 전러시아의 채찍 아래에서 슬라브 전체의 노예 상태를 초래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적어도 그 목표, 즉 독일의 위력을 무너뜨리고 독일인들을 범슬라브적, 다시 말해 페테르부르크 황제의 멍에에 복종시키는 목표와 관련해서는 그것이 확실한가?

아니다, 확실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틀림없이 충분하지도 않다. 사실 유럽의 독일인은 모두 5천 50만 명이다(물론 오스트리아 독일인 900만 명을 포함해서). 그러나 독일 애국자들의 꿈이 마침내 실현되어 독일 제국에 벨기에의 플라망 지역 전체, 네덜란드, 독일계 스위스, 덴마크 전체, 심지어 스웨덴과 노르웨이까지 들어간다고 하자. 이들을 합치면 인구가 1천 5백만 명을 조금 넘는다. 그래서 어떠한가? 그렇게 되더라도 유럽의 독일인은 많아야 6천 6백만 명이고, 슬라브인은 약 9천만 명으로 헤아려진다. 그러니 수적으로는 슬라브인이 독일인보다 강하다. 그러나 수적으로 유럽의 슬라브 인구가 독일 인구를 거의 3분의 1이나 능가하는데도, 우리는 범슬라브 국가가 위력에서도, 진정한 국가적·군사적 역량에서도 범게르만 제국과 결코 대등해지지 못하리라고 단언한다. 왜인가? 독일인의 피와 독일인의 본능과 독일인의 전통에는 국가 질서와 국가 규율에 대한 열정이 있기 때문이다. 슬라브인에게는 이런 열정이 없을 뿐만 아니라, 전혀 반대되는 열정이 작동하며 살아 있다. 따라서 그들을 훈육하려면 몽둥이 아래에 두어야 한다. 반면 독일인은 누구든 확신을 품고 자발적으로 몽둥이를 삼킨다. 독일인의 자유란 바로 그가 훈련되어 있고 어떤 상관 앞에서도 기꺼이 굽힌다는 데 있다.

게다가 독일인은 진지하고 근면한 인민이며, 학식이 있고 검소하며 야무지고 정확하고 계산적이다. 그렇다고 필요할 때, 즉 상관이 원할 때 훌륭하게 싸우지 못하는 것도 아니다. 그들은 최근의 전쟁들에서 이를 입증했다. 더욱이 그들의 군사 및 행정 조직은 가능한 최고의 완성도, 다른 어떤 인민도 결코 도달하지 못할 수준에 이르러 있다. 그렇다면 슬라브인이 국가성의 싸움터에서 그들과 겨룰 수 있으리라고 상상이나 할 수 있겠는가!

독일인은 국가 안에서 삶과 자유를 구한다. 그러나 슬라브인에게 국가는 무덤이다. 슬라브인은 국가 밖에서, 독일 국가에 맞선 투쟁에서만이 아니라 모든 국가에 맞선 전인민적 반란에서, 사회혁명에서 자신들의 해방을 구해야 한다.

슬라브인은 스스로를 해방시킬 수 있고, 자신들이 증오하는 독일 국가를 파괴할 수 있다. 그러나 그 길은 이번에는 자기들이 독일인을 자신의 지배에 복종시키고 그들을 슬라브 국가의 노예로 만들려는 헛된 야망이 아니라, 독일인을 공동의 자유와 공동의 인간적 형제애로 부르는 것이다. 그것도 모든 현존 국가의 폐허 위에서 그러하다. 그러나 국가는 저절로 무너지지 않는다. 국가를 무너뜨릴 수 있는 것은 오직 전인민적이고 전종족적이며 국제적인 사회혁명뿐이다.

그러한 혁명을 수행하기 위해 인민의 힘을 조직하는 것 — 이것이 슬라브 종족을 여러 해에 걸친 멍에에서 해방시키기를 진심으로 바라는 사람들의 유일한 과제다. 이 선진적인 사람들은 깨달아야 한다. 과거에 슬라브 인민들의 약점을 이루었던 것, 즉 그들이 국가를 형성하지 못하는 무능력이 바로 현재 그들의 힘이며 미래에 대한 그들의 권리이며, 그들의 현재 인민 운동 모두에 의미를 부여한다는 것을. 최신 국가들의 거대한 발전에도 불구하고, 아니 국가성이라는 원리 자체를 지극히 논리적으로, 피할 수 없는 필연에 따라 부조리에까지 끌고 간 바로 그 최종적 발전 때문에 국가와 국가성의 날이 얼마 남지 않았다는 것, 그리고 육체노동자 대중의 완전한 해방과 그들의 자유로운 사회 조직이 아래로부터 위로, 어떤 정부의 간섭도 없이, 자유로운 경제적·인민적 연합들로부터, 모든 낡은 국가 경계와 모든 민족적 차이를 넘어서, 생산 노동이라는 단 하나의 토대 위에서, 완전히 인간화되고 그 모든 다양성에도 불구하고 완전히 연대적인 토대 위에서 다가오고 있다는 것이 분명해졌다.

슬라브의 선진적인 사람들은 마침내 깨달아야 한다. 슬라브어문학을 가지고 천진하게 노는 시대는 지났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민적 열망의 이상으로 민족성이라는 허구적 원리를 내세우는 것보다 더 터무니없고 동시에 더 해로우며 인민을 죽이는 일은 없다는 것을. 민족성은 보편적 인간적 원리가 아니라 역사적이고 국지적인 사실이며, 모든 실제적이고 해롭지 않은 사실들처럼 공동의 인정을 받을 확실한 권리를 가진다. 모든 인민, 아니 보잘것없는 작은 인민이라도 저마다의 성격, 저마다의 독특한 존재 방식, 말하는 방식, 느끼는 방식, 생각하는 방식, 행동하는 방식을 가진다. 그리고 민족성의 핵심을 이루는 바로 이 성격, 이 방식은 그 인민의 모든 역사적 삶과 모든 생활 조건의 결과다.

모든 인민은, 모든 개인과 마찬가지로, 어쩔 수 없이 지금 있는 그대로이며, 자기 자신으로 있을 확실한 권리를 가진다. 이른바 민족적 권리라는 것의 전부가 여기에 있다. 그러나 인민이나 개인이 이런 모습으로 존재하고 다른 모습으로 존재할 수 없다고 해서, 한쪽은 자기 민족성을, 다른 쪽은 자기 개성을 특별한 원리로 내세울 권리가 그들에게 있다거나 그렇게 하는 것이 그들에게 유익하다는 것, 그리고 그들이 영원히 그것들만 붙들고 씨름해야 한다는 것이 따라 나오지는 않는다. 오히려 그들이 자신에 대해 덜 생각하고 보편적 인간적 내용으로 더 깊이 스며들수록, 한쪽의 민족성과 다른 쪽의 개성은 더욱 살아나고 의미를 얻는다.

슬라브인들도 마찬가지다. 그들은 자기네의 좁고 이기적이며 동시에 추상적인 슬라브주의, 즉 전인류적 문제와 사업과는 무관하고 바로 그렇기 때문에 그것에 반하는 슬라브주의를 붙들고 애쓰는 한, 극히 하찮고 빈곤한 처지에 머물 것이다. 그들이 슬라브인으로서 역사 속에서, 그리고 인민들의 자유로운 형제애 속에서 정당한 자리를 쟁취하는 것은 다른 인민들과 함께 세계적 이해에 깊이 젖어들 때뿐이다.

역사의 모든 시대에는 보다 특수하고 오로지 인민적일 뿐인 다른 모든 이해들 위에 군림하는 전인류적 이해가 존재한다. 그리고 자기 안에서 소명, 즉 그것에 배타적으로 헌신할 만큼의 충분한 이해력과 열정과 힘을 발견하는 인민 또는 인민들이 주로 역사적 인민이 된다. 역사의 여러 시대에 이렇게 군림했던 이해들은 서로 달랐다. 너무 멀리 가지 않기 위해 말하자면, 인간적인 것이라기보다는 신적인 이해, 따라서 인민들의 자유와 복지에 반하는 이해, 지배적이며 지극히 정복적인 이해, 즉 가톨릭 신앙과 가톨릭 교회의 이해가 있었으며, 그때 자기 안에서 그것에 헌신할 가장 큰 성향과 능력을 발견한 인민들 — 독일인, 프랑스인, 스페인인, 부분적으로 폴란드인 — 은 바로 그 때문에 저마다 자기 영역에서 선도적 인민이었다.

정신적 부흥과 종교적 반란의 또 다른 시기가 뒤따랐다. 부흥이라는 전인류적 이해는 우선 이탈리아인들을, 그다음 프랑스인들을, 그리고 훨씬 약한 정도로 영국인, 네덜란드인, 독일인을 전면에 내세웠다. 그러나 그보다 앞서 남프랑스를 들고일어나게 했던 종교적 반란은 15세기에 우리 슬라브 후스파를 가장 두드러진 자리에 밀어올렸다. 후스파는 한 세기에 걸친 영웅적 투쟁 끝에, 앞서 프랑스 알비파가 짓밟혔던 것처럼 짓밟혔다. 그때 종교개혁이 독일, 프랑스, 영국, 네덜란드, 스위스, 스칸디나비아 인민들을 되살려냈다. 독일에서 종교개혁은 독일 기질에 어울리지 않는 반란의 성격을 매우 빠르게 잃고, 평화로운 국가 개혁의 모습을 띠었으며, 이는 즉시 가장 정연하고 체계적이며 학식 있는 국가 전제주의의 토대가 되었다. 프랑스에서 종교개혁파는 오래고 피비린내 나는 투쟁 끝에 승리한 가톨릭교에 짓밟혔는데, 이 투쟁은 이 나라에서 자유로운 사상이 발전하는 데 적지 않게 기여했다. 반면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뒤이어 아메리카 합중국에서 그들은 새로운 문명을 창조했는데, 그 본질상 반국가적이지만 부르주아적·경제적이며 자유주의적인 문명이었다.

이렇게 해서 16세기에 거의 전 유럽을 휩쓴 종교개혁의 종교 운동은 문명화된 인류 속에서 두 가지 주요 방향을 낳았다. 하나는 경제적·자유주의적·부르주아적 방향으로, 그 선두에는 주로 영국이, 그다음에는 영국과 아메리카가 섰다. 다른 하나는 전제적·국가적 방향으로, 그 본질상 역시 부르주아적이고 프로테스탄트적이었으나 귀족적 가톨릭 요소와 뒤섞여 있었고, 하기야 그 요소도 국가에 완전히 복종했다. 이 방향의 주요 대표자는 프랑스와 독일이었다 — 처음에는 오스트리아의, 그다음에는 프로이센의 독일.

18세기 말을 장식한 대혁명은 다시 프랑스를 첫 번째, 선도적 자리에 내세웠다. 그것은 새로운 전인류적 이해, 즉 완전한 인간 자유라는 이상을 창조했으나, 오로지 정치적 영역에서만 그러했다. 이 이상은 해결할 수 없는 모순을 품고 있었고, 따라서 실현 불가능했다. 경제적 평등 없는 정치적 자유, 일반적으로 정치적 자유, 즉 국가 안에서의 자유는 거짓이다.

프랑스 혁명은 이렇게 하여 이번에는 그 나름대로 서로 대립하고, 영원히 투쟁하며, 동시에 불가분하고, 더 나아가 말하자면 필연적으로 동일한 목표, 즉 유산자이며 수적으로 점차 줄어들면서 동시에 점점 더 부유해지는 소수자의 이익을 위해 맨몸 노동 프롤레타리아트를 체계적으로 착취하는 동일한 목표를 향한 동일한 지향 속에서 만나게 되는 두 개의 주요 방향을 낳았다.

인민 노동에 대한 이 착취 위에 한 정당은 민주 공화국을 세우려 하고, 다른 보다 일관된 정당은 그 위에 군주적, 즉 솔직한 국가적 전제정치를, 순진한 입헌 형식으로 간신히 위장된 군사 독재에 의한 중앙집권적, 관료적, 경찰 국가를 세우려 한다.

강베타 씨가 이끄는 첫 번째 정당은 현재 프랑스에서 권력을 장악하려 한다. 비스마르크 공이 이끄는 두 번째 정당은 프로이센 독일에서 이미 완전히 군림하고 있다.

이 두 방향 중 어느 쪽이 인민에게 더 유용한지, 더 정확히 말하자면 어느 쪽이 인민에게, 맨몸 노동 대중에게, 프롤레타리아트에게 덜 해롭고 덜 나쁜지를 결정하기는 어렵다. 둘 다 똑같이 완강한 열정으로 강력한 국가, 즉 프롤레타리아트의 완전한 노예 상태를 세우거나 강화하려 한다.

1789년과 1793년의 위대한 부르주아 혁명이 낳은 이 인민 억압적 방향들, 즉 국가적, 공화적, 신군주적 방향들에 맞서, 프롤레타리아트 자체의 깊은 곳에서, 처음에는 프랑스와 오스트리아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그다음에는 유럽 다른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로부터 마침내 완전히 새로운 방향이 형성되었다. 이 방향은 모든 착취와 모든 정치적 또는 법적 억압, 그리고 정부·행정적 억압의 폐지로, 즉 모든 신분의 경제적 평등화를 통한 모든 계급의 소멸과 그들의 마지막 지주인 국가의 소멸로 곧장 나아간다.

이것이 사회혁명의 강령이다.

그러므로 현재 문명 세계의 모든 나라에 오직 하나의 세계적 문제, 하나의 세계적 이해관계가 존재한다. 그것은 프롤레타리아트를 경제적 착취와 국가적 압제로부터 완전하고 최종적으로 해방하는 것이다. 이 문제가 유혈의 무서운 투쟁 없이 해결될 수 없다는 것, 그리고 모든 인민의 참된 지위와 권리와 의의가 이 투쟁에 참여하는 방향과 성격과 정도에 달려 있으리라는 것은 명백하다.

그렇다면 슬라브인들이 역사 속에서 그리고 인민들의 형제적 연합 속에서 자신의 권리와 자리를 추구해야 하며 오직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그것을 쟁취할 수 있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그러나 사회혁명은 한 인민만의 고립된 혁명일 수 없다. 그것은 본질상 국제적 혁명이다. 따라서 자신의 자유를 찾는 슬라브인들은 바로 그 자유를 위해 자신들의 지향과 인민적 역량의 조직을 다른 모든 나라의 지향 및 인민적 역량의 조직과 결합해야 한다.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는 대중 전체가 국제노동자협회에 가입해야 한다.

우리는 이미 1868년 빈 노동자들이 보여준 국제적 형제애의 훌륭한 선언에 대해 언급할 기회가 있었다. 그들은 오스트리아와 슈바벤의 애국자들이 아무리 설득해도 범게르만 깃발을 들기를 거부하면서, 전 세계의 노동자는 자신들의 형제이며, 모든 나라의 국제적으로 연대한 프롤레타리아트 외에 다른 진영은 인정하지 않는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동시에 그들은 오스트리아 노동자로서 어떤 민족의 깃발도 들 수 없다고 매우 정당하게 판단하고 표명했는데, 오스트리아 프롤레타리아트는 마자르인, 이탈리아인, 루마니아인, 그리고 주로 슬라브인과 독일인 등 가장 다양한 종족으로 구성되어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그들은 이른바 민족 국가 밖에서 자기 문제의 실질적 해결을 모색해야 한다는 것이다.

이 방향으로 몇 걸음만 더 나아갔더라면,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은 어떤 국가에서도 프롤레타리아트의 해방이 결코 불가능하며 그 첫 번째 조건은 모든 국가의 파괴라는 것을 깨달았을 것이다. 그리고 그러한 파괴는 모든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일치된 협력이 있어야만 가능하며, 경제적 토대 위에서 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처음으로 조직하는 일이 바로 국제노동자협회의 목적이다.

이를 깨달았다면 오스트리아의 독일인 노동자들은 자기 자신의 해방뿐 아니라 오스트리아 제국 내 모든 비독일인 인민 대중의 해방에도 선구자가 되었을 것이다. 물론 여기에는 모든 슬라브인도 포함되는데, 우리가 가장 먼저 그들에게 국가, 즉 인민의 감옥을 파괴하고 완전한 평등과 자유의 원칙 위에 새로운 국제 노동 세계를 세우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연합에 독일인 노동자들과 함께 가입하자고 권했을 것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은 이러한 필수적인 첫 걸음을 내딛지 않았고, 그렇게 하지 못한 이유는 리프크네히트 씨와 그와 함께 빈에 온 다른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독일 애국주의 선전에 첫 걸음부터 발이 묶였기 때문이다. 그들은 아마 1868년 7월에, 바로 오스트리아 노동자들의 올바른 사회적 본능을 국제 혁명의 길에서 꾀어내어, 그들이 인민적이라고 부르는, 물론 범게르만적인 단일 국가를 세우기 위한 정치적 선동으로 돌려놓으려는 목적으로 빈에 왔다 — 한마디로, 비스마르크 공의 애국적 이상을 사회민주주의적 토대 위에서 이른바 합법적 인민 선동을 통해 실현하려는 것이었다.

이 길로는 슬라브인뿐 아니라 독일인 노동자도 가서는 안 된다. 그 단순한 이유는 국가가 열 번 인민적이라 불리고 가장 민주적인 형태로 치장된다 해도 프롤레타리아트에게는 반드시 감옥이 될 것이기 때문이다. 슬라브인에게는 이 방향으로 가는 것이 더욱 불가능한데, 그것은 독일의 멍에에 기꺼이 복종하는 것을 의미하며 이는 모든 슬라브인의 마음에 반하기 때문이다. 따라서 우리는 슬라브 형제들에게, 독재 권력을 쥔 2인 집정의 모습으로 무엇보다 마르크스 씨와 엥겔스 씨가, 그 뒤에 또는 그 아래에 베벨 씨, 리프크네히트 씨와 글쟁이 노릇 하는 유대인 몇몇이 우두머리로 서 있는 독일 노동자 사회민주당의 대열에 들어가라고 권하지 않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가 이 당과 동맹을 맺는 자멸적 행위를 하지 않도록 모든 노력을 기울여야 한다. 이 당은 결코 인민적이지 않으며, 그 방향과 목적과 수단에 있어 순전히 부르주아적이고, 게다가 배타적으로 독일적이다. 즉 슬라브인을 죽이는 당이다.

그러나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가 자신을 구하기 위해 이 정당과의 동맹뿐 아니라 접근조차 거부해야 할수록—우리는 그 정당 안에 있는 노동자들과의 관계가 아니라 그 조직과, 그리고 무엇보다도 어디서나 언제나 부르주아적인 그 지도부와의 관계를 말하고 있다—, 같은 구원을 위해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는 국제노동자협회와 더욱 긴밀히 접근하고 결속해야 한다. 독일 사회민주당을 인터내셔널과 혼동해서는 결코 안 된다. 전자의 정치적·애국적 강령은 후자의 강령과 거의 공통점이 없을 뿐 아니라 심지어 완전히 상반된다. 사실 조작된 헤이그 대회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자기네 강령을 인터내셔널 전체에 강요하려 시도했다. 그러나 이 시도는 이탈리아, 스페인, 스위스 일부, 프랑스, 벨기에, 네덜란드, 영국, 그리고 부분적으로는 북미 합중국으로부터 그토록 거대한 항의를 불러일으켰기에, 독일인들 자신을 제외하고는 누구도 독일 강령을 원하지 않는다는 것이 온 세계에 분명해졌다. 그렇다, 의심할 바 없이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도 다른 모든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과 불가분한 자기 이익을 더 잘 이해하고, 자기들에게 강요되었으나 결코 자기들이 만들어낸 것이 아닌 이 강령의 해로운 방향을 깨닫게 되어 그것을 포기하고 자기네 부르주아 지도자들, 즉 퓌러들을 그 강령 곁에 남겨둘 때가 올 것이다.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는, 거듭 말하지만, 크나큰 멍에에서 스스로 해방되기 위해 대규모로 인터내셔널에 가입하여 공장, 수공업, 농업 지부를 만들고, 그것들을 지역 연맹으로, 필요하다면 아마도 전슬라브 연맹으로까지 결합해야 한다. 모든 사람을 국가라는 조국으로부터 해방시키는 인터내셔널의 토대 위에서, 슬라브 노동자들은 자기 독자성에 조금의 위험도 없이 독일 노동자들과 형제처럼 만나야 하고 만날 수 있다. 다른 토대 위에서는 그들과의 동맹이 슬라브 노동자들에게 결코 불가능하다.

이것이 슬라브인을 해방하는 유일한 길이다. 그러나 서슬라브와 남슬라브 청년 대다수가 명망 높은 원로이자 어느 정도 공적이 있는 애국자들의 지도 아래 오늘날 걷고 있는 길은 완전히 반대되는 길이며, 철저히 국가주의적이고 인민 대중에게 파멸적인 길이다.

예로 투르크령 세르비아를, 그중에서도 세르비아 공국을 들어 보자. 러시아 밖에서 슬라브 요소가 어느 정도 독자적인 정치적 존재에 이른 곳은 이곳과, 덧붙이자면 몬테네그로뿐이다.

세르비아 인민은 투르크의 멍에에서 벗어나기 위해 많은 피를 흘렸다. 그러나 투르크인들에게서 벗어나자마자, 이번에는 세르비아 공국이라는 이름의 새로운, 이번에는 제 나라 국가에 매였다. 그 멍에는 실제로 투르크의 멍에보다 오히려 더 무거울 정도다. 세르비아 땅의 이 부분이 어느 정도 정연한 국가의 모습과 구조, 법률, 제도를 갖추자마자, 투르크에 맞선 영웅적 투쟁을 일으키고 그들에 대한 최종 승리를 거둔 인민의 삶과 인민의 힘은 마치 갑자기 얼어붙은 듯 멎어 버렸다. 인민은 사실 무지하고 극도로 가난했지만 활기차고 열정적이며 천성적으로 자유를 사랑했다. 그러나 갑자기 관료적 수탈과 전제정치의 제물로 내던져진, 말 없는, 거의 움직이지도 않는 가축 떼로 변해버렸다.

투르크령 세르비아에는 귀족도 없고 아주 큰 지주도 없으며, 산업가도 없고 대단히 부유한 상인도 없다. 그 대신 새로운 관료 귀족이 생겨났는데, 이들은 대부분 오데사, 모스크바, 페테르부르크, 빈, 독일, 스위스, 파리에서 국비로 교육받은 젊은이들로 이루어져 있다. 이 젊은이들은 젊고 아직 관직에서 타락하지 않았을 때에는 대개 뜨거운 애국심, 인민애, 상당히 진실한 자유주의, 그리고 최근에는 민주주의와 사회주의로까지 두드러진다. 그러나 일단 관직에 들어서면, 그 처지의 철의 논리, 사물의 힘, 즉 특정한 위계 관계와 이익이 걸린 정치 관계에 내재한 힘이 제 몫을 하고, 젊은 애국자들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관료가 된다. 아마 여전히 애국자이자 자유주의자로 남기는 하겠지만. 그러나 자유주의적 관료란 어떤 존재인지 잘 알려져 있다. 그는 단순하고 솔직한 몽둥이 관료보다 훨씬 나쁘다.

게다가 특정한 지위의 요구는 언제나 감정, 구상, 선한 충동보다 강하다. 해외에서 교육받은 젊은 세르비아인들은 고국에 돌아오면, 받은 교육으로 보나, 무엇보다 해외에 있는 동안 대부분 그 비용으로 부양받은 정부에 대한 의무로 보나, 또 그들에게는 다른 생계 수단을 찾는 것이 도저히 불가능하기 때문에, 관료가 되어야 하고, 이 지방에 존재하는 유일한 귀족, 즉 관료 계급의 구성원이 되어야 한다. 일단 이 계급에 들어서면 그들은 어쩔 수 없이 인민의 적이 된다. 그들은 아마도, 아니 십중팔구는, 특히 처음에는 자기 인민을 해방시키고, 적어도 인민의 처지를 개선하고 싶어 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들은 인민을 짓누르고 약탈해야 한다. 그러한 처지에서 2~3년만 지내면 그 처지에 익숙해지고, 마침내 어떤 자유주의적이거나 심지어 민주주의적 교조의 거짓말의 도움으로 그것과 화해하게 된다. 그리고 우리 시대에는 그러한 거짓말이 넘쳐난다. 그들이 맞서 반란할 힘도 없는 철의 필연성과 일단 화해하면, 그들은 이제 철면피 사기꾼이 되고, 그들의 공개적 선언이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일수록 인민에게 더 위험한 사기꾼이 된다.

그러면 그들 중 더 능란하고 더 교활한 자들은 미시적인 공국의 미시적인 정부에서 지배적 영향력을 얻고, 그것을 얻자마자 사방으로 자신을 팔기 시작한다. 국내에서는 — 군주인 공이나 왕위를 노리는 어떤 자에게(세르비아 공국에서 한 공을 타도하고 다른 공으로 교체하는 행위를 혁명이라고 부른다), 또는 그 대신에, 때로는 동시에, 후원하는 열강들의 정부들, 즉 러시아, 오스트리아, 투르크, 그리고 이제는 다른 모든 곳에서처럼 동방에서도 프랑스의 자리를 차지한 독일에, 심지어 드물지 않게 이들 모두에게 한꺼번에 팔아넘긴다.

그러한 국가에서 인민이 얼마나 쉽고 자유롭게 사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그런데 세르비아 공국은 헌정 국가이며, 그곳의 모든 법률은 인민이 선출한 의회가 빚어내고 있다는 점을 잊어서는 안 된다.

일부 세르비아인들은 이런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한다. 이 처지는 본질상 과도기적인 것이며 현재로서는 불가피한 악이지만, 작은 공국이 국경을 확장하고 모든 세르비아 땅, 일부는 모든 남슬라브 땅까지 자기 구성에 받아들여 두샨의 왕국을 온전한 규모로 회복하면 반드시 바뀔 것이라고. 그러면 인민에게 완전한 자유와 마음껏 활개 치는 시대가 올 것이라고 그들은 말한다.

그렇다, 세르비아인들 가운데는 지금도 이것을 지극히 순진하게 믿는 사람들이 있다!

그렇다, 그들은 이 국가가 영역을 넓히고 신민의 수가 두 배, 세 배, 열 배로 늘어나면 국가가 더 인민적이 되고, 그 제도와 존재 조건 전반, 정부의 행동이 인민의 이익과 모든 인민적 본능에 덜 거슬리게 될 것이라고 상상한다. 그런데 그러한 희망 내지 그러한 추측은 무엇에 근거하는가? 이론인가? 그러나 이론적으로는 오히려 국가가 클수록 그 유기체는 더 복잡해지고, 그만큼 인민에게 더 낯설어지며, 바로 그 때문에 그 이익이 인민 대중의 이익에 더 거슬리고, 국가가 그들을 더 무겁게 짓누르며, 인민이 국가를 통제하기는 더욱 불가능해지고, 국가 통치가 인민의 자치로부터 더 멀어진다는 것이 분명해 보인다.

아니면 그들의 기대는 다른 나라들의 실제 경험에 근거하는가? 이에 대한 답으로 러시아, 오스트리아, 확장된 프로이센, 프랑스, 영국, 이탈리아, 심지어 아메리카 합중국을 지적하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곳에서는 이른바 정치꾼, 즉 정치 장사꾼이라는 별개의 철저히 부르주아적인 계급이 모든 일을 좌지우지하며, 맨몸으로 일하는 대중은 군주제 국가에서와 거의 다름없이 옹색하고 끔찍하게 산다.

어쩌면 교양이 많은 세르비아인들이 나서서, 문제는 전혀 인민 대중에게 있는 것이 아니라고 반박할지도 모른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육체적이고 거친 노동으로 나라를 진정으로 대표하는 조국 문명의 꽃을 먹이고 입히고 일반적으로 부양하는 것이 사명으로 주어져 있으며 앞으로도 그러할 것이라고. 따라서 문제는 교양 있고 다소간 재산과 특권을 가진 계급들에게만 있다고.

바로 그 점이 문제다. 이른바 교양 있는 계급들, 즉 귀족과 부르주아지는 한때 온 유럽에서 참으로 번성했고 살아 있는 진보적 문명의 선두에 섰으나, 지금은 살이 찌고 겁이 많아져 우둔해지고 천박해졌다. 그들이 아직 무엇인가를 대표한다면, 그것은 인간 본성의 가장 해롭고 비열한 속성일 뿐이다. 우리는 프랑스처럼 교양이 높은 나라에서 이 계급들이 독일인들에 맞서 조국의 독립조차 지켜내지 못했음을 본다. 우리는 독일 자체에서 이 계급들이 오직 충성스러운 신민의 하인 노릇밖에 못 한다는 것을 보았고 지금도 보고 있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투르크령 세르비아에서는 이 계급들이 아예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을 지적해 둔다. 그곳에는 관료 계급만이 존재한다. 따라서 세르비아 국가는 세르비아 관리들이 더 배부르게 살기 위해서만 세르비아 인민을 짓누를 것이다.

또 다른 이들은 세르비아 공국의 현 체제를 온 마음으로 증오하면서도, 그것을 아직 투르크의 멍에, 나아가 오스트리아의 멍에 아래 있는 슬라브인들을 해방하는 데 필요한 수단 내지 도구로 보면서 참고 견딘다. 그들은 어느 시점에 이르면 공국이 전슬라브 반란의 기반이자 출발점이 될 수 있다고 말한다. 이것도 슬라브인들 자신의 안녕을 위해 반드시 깨뜨려야 할 해로운 착각 가운데 하나다.

그들을 매혹하는 것은 피에몬테 왕국의 사례다. 마치 그 왕국이 이탈리아 전체를 해방하고 통일한 것처럼 여겨진다. 이탈리아는 50년 동안 멈추지 않고 바쳐 온 수많은 영웅적 희생을 통해 스스로 해방되었다. 이탈리아가 정치적 독립을 얻은 것은 주로 위대한 시민 주세페 마치니가 40년 동안 끊임없이 밀어붙인 노력 덕분이었다. 그는 이탈리아 청년들을 위험하지만 고결한 애국적 음모 활동 속에서 되살려내고, 그다음에는 교육해냈다고 할 수 있을 정도였다. 그렇다, 마치니의 20년에 걸친 활동 덕분에 1848년, 봉기한 인민이 유럽 세계 전체를 다시 혁명의 축제로 불러냈을 때, 이탈리아의 모든 도시에서, 가장 남쪽 끝에서 가장 북쪽 끝까지, 반란의 깃발을 든 용감한 젊은이들이 한 무리씩 나타났다. 이탈리아 부르주아지 전체가 그들을 따랐다. 그리고 그때 아직 오스트리아의 지배 아래 있던 롬바르도-베네치아 왕국에서는 온 인민이 일어섰다. 인민 스스로 어떤 군사적 도움도 없이 밀라노와 베네치아에서 오스트리아 연대를 몰아냈다.

그러면 왕정 피에몬테는 무엇을 했는가?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아버지인 카를로 알베르토 왕은 무엇을 했는가? 바로 그 사람은 아직 왕세자이던 시절(1821)에 이탈리아 해방을 위한 음모에 함께했던 동료들을 오스트리아와 피에몬테의 형리들에게 넘겨주었다. 1848년 피에몬테 왕의 첫 번째 행동은 약속과 책략과 음모로 이탈리아 전역의 혁명을 마비시키는 것이었다. 그는 이탈리아를 장악하기를 몹시 바랐지만, 혁명을 미워하는 만큼 두려워하기도 했다. 그는 실제로 이탈리아에서 혁명을, 인민의 힘과 운동을 마비시켰고, 그 뒤 오스트리아 군대가 그의 군대를 제압하는 것은 어렵지 않았다.

그의 아들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이탈리아 땅의 해방자이자 통일자라고 불린다. 이것은 그에 대한 역겨운 중상이다! 굳이 누군가를 이탈리아의 해방자라고 부른다면, 차라리 프랑스인의 황제 루이 나폴레옹이라고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이탈리아는 스스로 해방되었고, 더 중요하게는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와는 무관하게, 나폴레옹 3세의 의사에 반해서 스스로 통일되었다.

1860년, 가리발디가 시칠리아 상륙이라는 자신의 유명한 작전을 시작했을 때, 그가 제노바를 떠난 바로 그 시각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의 장관인 카부르 백작은 나폴리 정부에 닥쳐올 공격을 미리 알려주었다. 그러나 가리발디가 시칠리아와 나폴리 왕국 전체를 해방하자, 비토리오 에마누엘레는 물론 별다른 감사도 없이 그에게서 둘 다를 넘겨받았다.

그리고 13년 동안 그의 통치는 이 불행한 이탈리아를 어떻게 했는가? 그는 이탈리아를 파탄냈고, 그냥 약탈했으며, 이제는 모든 이에게 미움을 받으면서 자신의 전제정으로 추방된 부르봉가를 거의 그리워하게 만든다. 왕들과 국가들은 자기 동족을 이렇게 해방한다. 그리고 이탈리아의 최근 역사를 실제 세부까지 공부하는 일은 누구보다 바로 세르비아인들에게 유익할 것이다.

세르비아 정부가 젊은이들의 애국적 열기를 가라앉히는 수단 중 하나는 내년 봄에, 때로는 농사일이 끝난 뒤 가을에 투르크와 전쟁을 선포하겠다고 주기적으로 약속하는 것이다. 그러면 젊은이들은 그것을 믿고 흥분하며 여름이고 겨울이고 늘 준비한다. 그 뒤에는 언제나 무슨 예기치 못한 장애물, 후원하는 열강 가운데 한 나라의 무슨 각서가 약속된 전쟁 선포를 가로막는다. 전쟁 선포는 반년이나 일 년 미뤄지고, 그리하여 세르비아 애국자들의 일생 전체가 결코 오지 않는 약속 이행을 지루하고 헛되이 기다리며 흘러간다.

세르비아 공국은 남슬라브 종족들을, 세르비아 종족이든 아니든 해방시킬 능력이 없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자신의 음모와 계략으로 그들을 실제로 분열시키고 약화시킨다. 예를 들어 불가리아인들은 세르비아인을 형제로 인정할 용의가 있지만, 세르비아의 두샨 왕국에 대해서는 듣기도 싫어한다. 크로아티아인들도 마찬가지고, 몬테네그로인들도, 보스니아 세르비아인들도 마찬가지다.

이 모든 나라에게 구원은 하나요, 결합으로 가는 길은 하나다 — 사회혁명이다. 결코 국가 전쟁이 아니다. 국가 전쟁은 오직 한 가지 결과만 낳을 수 있다 — 이 모든 나라가 러시아에게든 오스트리아에게든 복속되거나, 아니면 적어도 처음에는, 십중팔구, 두 나라 사이에 분할되는 것이다.

체코의 보헤미아는 하늘의 은혜로 아직 바츨라프의 국가와 왕관을 그 옛 위대함과 영광 그대로 복원하지 못했다. 빈 중앙정부는 보헤미아를 갈리치아의 특권조차 누리지 못하는 단순한 지방처럼 취급한다. 그런데 보헤미아에는 어느 슬라브 국가 못지않게 많은 정당이 있다. 그렇다, 정치꾼 근성과 국가성이라는 이 저주받은 독일 정신이 체코 청년들의 교육에 그렇게 깊이 스며들어, 청년들은 자기 인민을 이해하는 능력을 완전히 잃을 심각한 위험에 처해 있다.

체코 농민 인민은 가장 훌륭한 슬라브 유형 가운데 하나다. 그들 속에는 후스파의 피, 타보르파의 뜨거운 피가 흐르고, 지슈카의 기억이 살아 있다. 우리 자신의 경험과 1848년으로부터 가져온 기억에 따르면, 체코 학생 청년들의 가장 부러운 장점 가운데 하나는 이 인민에 대한 그들의 친족적이고 참으로 형제적인 태도다. 체코 도시 프롤레타리아는 에너지와 뜨거운 헌신에서 농민에게 뒤지지 않는다. 그들은 1848년에 그것을 또한 증명했다.

프롤레타리아트와 농민층은 지금까지 학생 청년들을 사랑하고 그들을 믿는다. 그러나 젊은 체코 애국자들은 이 믿음에 너무 많이 기대서는 안 된다. 그들이 인민과 함께 나아가기에 충분한 정의감, 평등과 자유에 대한 넓은 감각, 인민에 대한 진정한 사랑을 자신 안에서 찾지 못한다면, 이 믿음은 필연적으로 약해지고 마침내 완전히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체코 인민은 — 우리는 인민이라는 말로 언제나 주로 프롤레타리아트를 뜻한다 — 그러니까 보헤미아의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는 오늘날 모든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향하는 곳으로 자연스럽고 불가피하게 향한다. 경제적 해방으로, 사회혁명으로.

만약 체코 인민이 우리 시대의 유일한 본질적 세계 문제를 이루는 이 열망에 낯설게 남아 있다면, 그들은 자연에게서 지독히 박대받고 역사에 짓눌린 인민, 솔직히 말해 지독히 어리석고 죽은 인민일 것이다. 체코 청년들은 자기 인민에게 그런 찬사를 바치려 하지 않을 것이며, 설령 바치려 한다 해도 인민이 그 찬사에 걸맞게 굴지 않을 것이다. 게다가 우리에게는 서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가 사회 문제에 살아 있는 관심을 가지고 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가 있다. 슬라브 주민이 독일인과 뒤섞여 사는 모든 오스트리아 도시에서, 슬라브 노동자들은 프롤레타리아트의 모든 공동 의사 표명에 가장 적극적으로 참여한다. 그러나 이 도시들에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강령을 인정한 단체들 외에 다른 노동자 결사가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 그래서 실제로는 사회혁명적 본능에 이끌린 슬라브 노동자들이, 직접적이고 공공연히 인정된 목표가 범게르만 국가, 즉 거대한 독일 감옥의 창설인 정당에 포섭되는 셈이다.

이 사실은 매우 슬프지만, 그만큼 자연스럽기도 하다. 슬라브인 노동자들에게는 두 가지 선택이 놓여 있다. 하나는 독일인 노동자들, 즉 사회적 지위와 공동의 운명, 굶주림과 궁핍, 온갖 억압을 함께하는 형제들의 모범에 이끌려, 그들에게 국가를 약속하는 당에 가입하는 길이다. 물론 독일의 국가이긴 하지만, 완전히 인민적이고, 자본가와 소유자에게 손해를 끼치고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이익이 되는 가능한 모든 경제적 특혜를 갖춘 국가 말이다. 다른 하나는 자기들의 원로이며 유명한 지도자들과, 열정적이지만 아직 분별이 부족한 젊은이들의 애국적 선전에 이끌려, 그 대열과 그 선두에서 날마다 자신들을 착취하고 억압하는 자들, 즉 부르주아, 공장주, 상인, 금융 투기꾼, 예수회 사제, 그리고 막대한 세습 영지나 매입 영지의 봉건적 소유주들을 마주하게 되는 당에 가입하는 길이다. 그런데 이 당은 첫 번째 당보다 훨씬 더 일관되게 그들에게 민족적 감옥, 즉 슬라브 국가와 바츨라프 왕관의 옛 영광을 온전히 회복시켜 주겠다고 약속한다. 마치 그 영광 덕분에 체코인 노동자들의 형편이 나아지기라도 할 것처럼!

만약 슬라브인 노동자들에게 정말로 이 두 길 외에 다른 출구가 없다면, 우리로서도 그들에게 첫 번째 길을 택하라고 권했을 것이다. 그 길에서는 적어도 그들이 잘못 생각하더라도, 독일인이든 아니든 상관없이 노동과 전통과 삶을 함께하는 형제들과 공동의 운명을 나눈다. 그러나 여기서는 그들에게 자기들의 직접적인 형리, 자기들의 흡혈귀를 형제라 부르도록 강요하고, 전슬라브 해방이라는 이름으로 가장 무거운 사슬을 스스로 짊어지도록 강제한다. 저기서는 그들이 속고, 여기서는 그들이 팔려 나간다.

그러나 곧고 구원이 되는 제3의 출구가 있다 — 인터내셔널 강령에 기초하여 공장 노동자 결사와 농업 노동자 결사를 만들고 연합적으로 조직하는 것이다. 물론 인터내셔널이라는 이름으로 거의 전적으로 애국적이고 정치적인 독일 사회민주당이 선전하는 그 강령이 아니라, 지금 국제노동자협회의 모든 자유 연맹, 즉 이탈리아, 스페인, 쥐라, 프랑스, 벨기에, 영국, 그리고 부분적으로 미국의 노동자들이 인정하는 강령이다. 실질적으로 이를 인정하지 않는 것은 독일인들뿐이다[6].

우리는 이 길이 체코인들에게도, 독일의 멍에든 그 밖의 멍에든 모든 멍에로부터 완전한 해방을 추구하는 다른 모든 슬라브 인민에게도 유일한 출구라고 확신한다. 이 길 밖에는 기만만이 남는다. 파렴치하고 공명심에 찬 우두머리와 당 지도자들에게는 명예와 주머니를 채울 이득이, 막노동하는 대중에게는 노예 상태가 남을 뿐이다.

체코의, 나아가 모든 슬라브의 교양 있는 젊은이들에게 이제 문제는 매우 분명하게 제기되어 있다. 자기 인민을 착취하고, 그 노동으로 부를 쌓고, 그 어깨를 딛고 비열한 공명심을 채우고 싶은가? 그렇다면 그들은 슬라브주의를 표방하는 옛 당들, 팔라츠키·리게르·브라우네르 일당과 함께 갈 것이다. 하기야 서둘러 덧붙이자면, 이 지도자들을 따르는 젊은 추종자들 가운데에는 눈이 멀고 속은 사람도 많다. 그들은 자기 자신을 위해서는 아무것도 얻지 못하면서 노련한 자들의 손에서 인민을 꾀는 미끼 노릇을 한다. 어쨌든 전혀 부러울 것 없는 역할이다.

그러나 진심으로, 그리고 실제로 인민 대중의 완전한 해방을 원하는 사람들은 사회혁명의 길로 우리와 함께 갈 것이다. 인민의 자유를 쟁취할 다른 길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지금까지 모든 서슬라브 나라에서는 낡은 정치, 더없이 협소한 국가성이 우세했고, 그저 체코어로 옮기기만 한 독일 희극이 상연되었을 뿐이다. 그것도 희극 하나가 아니라 무려 둘이었다. 하나는 체코 희극이고 다른 하나는 폴란드 희극이다. 보헤미아와 갈리치아의 정치가들 사이에서 번갈아 일어난 동맹과 결렬의 한심한 역사, 그리고 체코와 갈리치아 의원들이 오스트리아 제국의회에서 함께 또는 따로 벌인 우스꽝스러운 공연의 연속을 모르는 사람이 있는가? 그 모든 것의 밑바탕에는 예수회·봉건적 음모가 깔려 있었고 지금도 깔려 있다. 그리고 이런 한심한, 아니 비열하다고 해도 좋을 수단으로 이 양반들은 자기 동포를 해방하기를 바란다! 참 기묘한 정치가들이다. 그들의 국가 놀이를 바라보며 가까운 이웃인 비스마르크 공은 틀림없이 얼마나 즐거워하고 있을까!

그러나 한번은, 갈리치아 동맹자들의 숱한 배신 가운데 하나 때문에 빈에서 저 유명한 패배를 겪은 뒤, 체코의 국가 삼두정, 곧 팔라츠키·리게르·브라우네르가 대담한 시위를 벌이기로 결심했다. 1867년 바로 이를 위해 모스크바에서 열린 슬라브 민족지 박람회를 계기로, 그들은 몸소 길을 떠나 수많은 서슬라브인과 남슬라브인을 이끌고 슬라브-폴란드 인민의 학살자인 백색 차르에게 경배하러 갔다. 바르샤바에서 그들을 맞이한 것은 러시아 장군들, 러시아 관리들, 러시아 관리 부인들이었다. 그리고 폴란드의 수도에서, 폴란드 주민 전체가 무덤 같은 침묵을 지키는 가운데, 이 자유를 사랑하는 슬라브인들은 이 러시아 형제 살해자들과 입을 맞추고 얼싸안고 함께 술을 마시며 슬라브 형제애를 위해 「우라!」를 외쳤다!

그들이 그 뒤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에서 어떤 연설을 했는지는 모두가 안다. 한마디로, 관록 있는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인민 애호가들이 야만적이고 무자비한 권력에 이보다 더 수치스럽게 경배하고, 슬라브 형제애와 진리와 자유를 이보다 더 죄스럽게 배신한 일은 일찍이 본 적이 없다 — 그런데도 이 양반들은 자기 일행을 모두 거느리고 태연히 프라하로 돌아왔고, 아무도 그들에게 그들이 비열한 짓만이 아니라 어리석은 짓까지 저질렀다고 말하지 않았다.

그렇다, 전혀 쓸모없는 어리석은 짓이었다. 그것은 그들에게 조금도 보탬이 되지 않았고 빈에서 그들의 일을 바로잡아 주지도 못했기 때문이다. 이제 이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옛 독립과 함께 바츨라프의 왕관을 되찾지 못했고, 새 의회 개혁이 그들이 국가 놀이를 하던 마지막 정치적 발판마저 그들에게서 빼앗아 가는 꼴을 보게 되었다.

이탈리아에서 패배한 뒤 헝가리 왕국을 어느 정도 놓아줄 수밖에 없었던 오스트리아 정부는 자기의 시스라이타니아 국가를 어떻게 꾸릴지 오래 궁리했다. 정부 자신의 본능과 독일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들의 요구는 정부를 중앙집권 쪽으로 기울게 했다. 그러나 슬라브인들, 특히 보헤미아와 갈리치아는 봉건·성직자 당에 기대어 연방제를 큰 소리로 요구했다. 이 동요는 올해까지 이어졌다. 마침내 정부는 슬라브인들에게는 공포를, 독일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에게는 더없는 기쁨을 안기며, 시스라이타니아 국가를 이루는 모든 지역에 다시 낡은 독일 관료제의 모자를 씌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이로써 오스트리아 제국이 더 강해진 것은 아니라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제국은 참된 중심을 잃었다. 제국 안의 모든 독일인과 유대 놈들은 이제부터 베를린에서 자신들의 중심을 찾는다. 동시에 슬라브인의 일부는 러시아를 바라보고, 더 확실한 본능에 이끌리는 다른 이들은 인민 연방을 이루는 데서 구원을 찾는다. 빈에서는 더 이상 아무도 아무것도 기대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사실상 끝났으며, 아직 존재하는 듯한 겉모습을 지니고 있다면 그것은 오직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계산된 오랜 인내 덕분이라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두 나라가 꾸물대며 아직 그 분할에 나서려 하지 않는 것은, 저마다 적당한 때가 오면 사자의 몫을 차지할 수 있으리라고 은밀히 바라기 때문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가 새로운 프로이센-독일 제국과 겨룰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러시아는 그럴 수 있는지 살펴보자. 그렇지 않은가, 독자여? 지금 평안히 재위하고 있는 알렉산드르 2세 황제가 즉위한 이래 러시아는 모든 면에서 전례 없는 진보를 이루지 않았는가?

실제로 지난 20년 동안 러시아가 이룬 진보를 재어 보려 한다면, 그때, 예컨대 1856년에 모든 면에서 러시아와 유럽을 갈라놓았던 거리를 오늘날 둘 사이에 놓인 거리와 견주어 보라. 그러면 그 진보는 놀랍게 보일 것이다. 사실 러시아는 그리 높이 올라가지 못했다. 그 대신 공식적·반공식적, 관료적·부르주아적 서유럽이 크게 떨어졌으므로 그 거리는 확실히 줄어들었다. 예컨대 1870년 독일인들이 프랑스에서 저지른 참상과 1871년 프랑스 군대가 자기 나라의 파리에 저지른 참상을 겪은 뒤에, 어떤 독일인이나 프랑스인이 감히 러시아의 야만과 학살을 입에 올리겠는가? 겉으로 드러나 프랑스의 관료·정치 세계를 거의 집어삼킬 뻔한 그 모든 오물을 보고 나서, 어떤 프랑스인이 감히 러시아 관리와 정치가들의 비열함과 매수됨을 떠들겠는가? 아니다, 프랑스인과 독일인을 보면, 러시아의 비열한 자들, 속물들, 도둑들, 학살자들에게는 더 이상 얼굴을 붉힐 이유가 전혀 남지 않았다. 도덕적 측면에서 온 공식적·반공식적 유럽에는 짐승 같은 상태, 아니 적어도 놀랄 만큼 짐승을 닮은 꼴이 자리 잡았다.

정치적 힘의 측면에서는 사정이 다르다. 하기야 이 점에서도, 적어도 프랑스 국가와 견주면 우리의 크바스 애국자들이 우쭐댈 만하다. 정치적으로 러시아는 의심할 바 없이 프랑스보다 더 자립적이고 더 높은 자리에 있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 자신이 러시아의 비위를 맞추고, 패배한 프랑스는 비스마르크의 비위를 맞춘다. 문제는 오로지 전러시아 제국의 힘이, 적어도 유럽 대륙에서는 의심할 바 없이 우세한 범게르만 제국의 힘과 견주어 어떠하냐는 것이다.

우리 러시아인은, 마지막 한 사람까지 다라고 해도 좋을 만큼, 우리의 사랑스러운 전러시아 제국이 그 내부 생활의 관점에서 무엇인지 알고 있다. 황제와 온 황족과 온갖 고귀한 시종들을 선두로 하는 소수, 어쩌면 수천 명의 사람들에게 제국은 지적 복리와 인간적·도덕적 복리를 뺀 모든 복리의 마르지 않는 원천이다. 그보다 더 넓지만 여전히 좁은 소수, 곧 고위 군인·관리·성직자, 부유한 지주, 상인, 자본가, 기생충 수만 명으로 이루어진 소수에게 제국은 합법적이고 매우 짭짤한 도둑질을 너그럽고 자비롭고 관대하게 보호해 주는 후원자다. 그보다 훨씬 더 큰 무리이지만 그래도 인민 대중에 견주면 보잘것없는 하급 관리 대중에게 제국은 인색한 젖어미다. 그리고 막노동하는 수없이 많은 수백만 인민에게 제국은 악독한 계모이며, 무자비하게 털어 가는 수탈자이며, 무덤으로 몰아넣는 고문자다.

농민 개혁 이전에도 제국은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언제나 그러할 것이다. 이것을 러시아인들에게 증명할 필요는 전혀 없다. 어느 성인 러시아인이 이것을 모르거나 모를 수 있겠는가? 러시아의 교양 있는 사회는 세 범주로 나뉜다. 첫째는 이것을 알면서도, 모든 사람에게 그렇듯 자기들에게도 의심할 바 없는 이 진리를 인정하는 것이 자기들에게 너무 불리하다고 여기는 사람들이다. 둘째는 두려워서 그것을 인정하지도 말하지도 않는 사람들이다. 마지막 셋째는 다른 용기는 없으니 적어도 그것을 입 밖에 낼 만큼은 대담한 사람들이다. 네 번째 범주도 있다. 불행히도 너무나 수가 적은 범주로, 인민의 대의에 진지하게 헌신하며 말하는 데 그치지 않는 사람들로 이루어진다.

어쩌면 다섯 번째 범주, 그것도 그리 적지 않은 수의 범주가 있을지도 모른다. 아무것도 보지 못하고 아무것도 깨닫지 못하는 사람들이다. 뭐, 그런 이들과는 할 말도 없다.

조금이라도 생각할 줄 알고 양심이 있는 러시아인이라면 누구나 우리 제국이 인민에 대한 자기 관계를 바꿀 수 없다는 것을 이해해야 한다. 제국은 그 존재 전체로 인민을 파멸시키고 인민의 피를 빨아먹도록 운명지어져 있다. 인민은 본능적으로 제국을 증오하고, 제국은 필연적으로 인민을 억누른다. 제국의 존재와 힘 전체가 인민의 불행 위에 세워져 있기 때문이다. 내부 질서를 유지하고, 강제로 이룬 통일을 지키고, 정복을 위한 것도 아닌 그저 자기를 지키기 위한 대외적 힘이나마 유지하려 해도 제국에는 거대한 군대가 필요하고, 군대와 함께 경찰이 필요하고, 무수한 관료가 필요하고, 관제 성직자가 필요하다… 한마디로 거대하기 짝이 없는 관변 세계가 필요하며, 그 도둑질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유지하는 비용만으로도 인민은 필연적으로 짓눌린다.

어떤 헌법이,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가장 민주적인 헌법이라도, 인민에 대한 국가의 이 관계를 더 나은 쪽으로 바꿀 수 있으리라고 상상하려면 당나귀거나 무식쟁이거나 미치광이여야 한다. 그 관계를 더 나쁘게, 더 무겁고 더 파멸적으로 만드는 것이라면 — 그럴 수도 있겠다. 악이 이미 갈 데까지 갔으니 그것조차 어렵겠지만 말이다. 그러나 인민을 해방하고 인민의 처지를 낫게 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터무니없는 소리다! 제국이 존재하는 한, 제국은 우리 인민을 갉아먹을 것이다. 인민에게 유익한 헌법은 오직 하나뿐일 수 있다 — 제국의 파괴다.

그러므로 우리는 제국의 내부 상태에 대해서는 말하지 않겠다. 그보다 더 나쁠 수는 없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다만 제국이 그 외적 목적, 곧 제국의 존재에 물론 인간적 의미가 아니라 정치적 의미를 부여하는 그 목적을 실제로 달성하고 있는지 살펴보자. 제국은 엄청나고 셀 수 없는 인민의 희생, 사실 자발적이지 않았기에 더욱 가혹했던 희생을 치르고서, 적어도 예컨대 새 독일 제국의 군사력과 겨룰 만한 군사력이라도 만들어 낼 수 있었는가?

현재 러시아의 정치 문제 전체는 사실 바로 이 점에 있다. 한편 내부 문제는, 우리가 알다시피, 이제 하나만 남아 있다 — 사회혁명의 문제다. 그러나 지금은 외부 문제에 머물러, 러시아가 독일과 싸울 능력이 있는지 묻기로 하자.

지금 두 황실 사이에서, 베를린의 삼촌과 페테르부르크의 조카 사이에서 아낌없이 오가는 정중한 인사와 맹세와 입맞춤과 눈물은 아무 의미도 없다. 정치에서 이 모든 것이 한 푼어치 값어치도 없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우리가 건드린 문제는 하룻밤 사이에 거대하고 전능한 국가로 자라난 독일의 새로운 처지 때문에 피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제기되었다. 그러나 모든 역사가 증언하고 가장 합리적인 논리도 확인하듯이, 힘이 대등한 두 국가는 나란히 존재할 수 없다. 그것은 국가의 본질에 어긋난다. 국가의 본질은 변함없이, 그리고 필연적으로 우위에 있으며 우위로 드러나는데, 우위는 대등함을 용납하지 않는다. 한쪽 힘은 반드시 꺾여 다른 쪽에 굴복해야 한다.

그렇다, 이것이 이제 독일에게는 본질적인 필연이다. 길고 긴 정치적 굴욕 끝에 독일은 갑자기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열강이 되었다. 독일이 자기 곁에, 말하자면 바로 자기 코앞에, 자기에게서 완전히 독립해 있고 아직 자기에게 정복되지 않았으며, 거듭 말하거니와, 감히 자기와 대등한 나라로서 맞서려는 열강이 서 있는 것을 참을 수 있겠는가! 게다가 그것이 어떤 열강인가. 러시아, 곧 가장 증오스러운 열강이다!

우리는 독일인들이, 모든 독일인이, 특히 독일 부르주아들이, 그리고 그들의 영향 아래 — 아아! — 독일 인민 자신까지도 러시아를 얼마나 증오하는지 모르는 러시아인이 거의 없다고 생각한다. 그들은 프랑스인들도 증오하며 예전에도 증오했지만, 이 증오는 그들이 러시아에 품는 증오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다. 이 증오는 독일의 가장 강력한 민족적 정념 가운데 하나다.

이 전민족적 정념은 어떻게 생겨났는가? 그 시작은 꽤 존중할 만했다. 그것은 비록 독일 문명이기는 해도 그래도 비할 바 없이 더 인간적인 문명이 우리의 타타르적 야만에 맞서 한 항의였다. 그 뒤, 곧 1820년대에는 그것이 더 분명한 정치적 자유주의가 정치적 전제정치에 맞서 하는 항의의 성격을 띠었다. 1820년대에 독일인들이 진지하게 스스로를 자유주의자라고 부르고 자기네 자유주의를 믿었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그들은 전제정치의 대표자로서 러시아를 증오했다. 물론 그들이 공정할 수 있었고 또 공정하고자 했다면, 적어도 이 증오를 러시아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똑같이 나누었어야 했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의 애국심에 어긋나는 일이었기에, 그들은 신성동맹의 정책에 대한 책임을 모두 러시아에 지웠다.

1830년대 초 폴란드 혁명은 독일 전역에서 더없이 뜨거운 동정을 불러일으켰고, 그 혁명을 피로 진압한 일은 독일 자유주의자들이 러시아에 품은 분노를 더욱 키웠다. 이 모든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고 정당했다. 다만 이 경우에도 공정하려면 그 분노의 얼마간이라도 프로이센에 돌아가야 했을 것이다. 프로이센은 폴란드인을 진압하는 그 역겨운 일에서 분명히 러시아를 도왔기 때문이다. 그것도 결코 너그러워서가 아니라 자기 이익이 그것을 요구했기 때문에 도왔다. 폴란드 왕국과 리투아니아가 해방되면 반드시 프로이센령 폴란드 전체가 봉기했을 것이고, 그것은 막 일어나던 프로이센 군주국의 위세를 뿌리째 죽여 버렸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1830년대 후반에 독일인들이 러시아를 증오할 새로운 원인이 생겨났고, 그것은 이 증오에 완전히 새로운 성격, 더 이상 자유주의적이 아니라 정치적·민족적인 성격을 주었다 — 슬라브 문제가 떠올랐고, 곧 오스트리아와 투르크의 슬라브인들 사이에 러시아의 도움을 바라고 기다리는 어엿한 당 하나가 생겨났다. 이미 1820년대에 민주주의자들의 비밀 결사, 그중에서도 페스텔, 무라비요프-아포스톨, 베스투제프-류민이 이끄는 남부 지파가 자유로운 전슬라브 연방이라는 생각을 처음으로 품었다. 니콜라이 황제는 이 생각을 손에 넣었으나 자기 식대로 고쳐 버렸다. 전슬라브 자유 연방은 그의 머릿속에서 범슬라브주의적 단일 전제 국가로 바뀌었다. 물론 그의 무쇠 왕홀 아래 놓인 국가로.

1830년대 초와 1840년대 초에 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에서 슬라브 땅으로 러시아 요원들이 떠나기 시작했다. 어떤 이들은 공식 요원이었고, 어떤 이들은 자원해서 무보수로 나섰다. 후자는 전혀 비밀스럽지 않은 모스크바의 슬라브주의자 모임에 속했다. 서슬라브인과 남슬라브인 사이에 범슬라브주의 선전이 일어났다. 소책자가 많이 나왔다. 이 소책자들은 일부는 독일어로 쓰였고 일부는 독일어로 번역되어 범게르만 대중을 적잖이 겁에 질리게 했다. 독일인들 사이에 소란이 일었다.

독일의 한복판에 들어 있는 옛 제국 영토 보헤미아가 떨어져 나가 독립한 슬라브 나라가 되거나, 하느님 맙소사, 러시아의 속주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은 그들에게서 입맛과 잠을 앗아 갔다. 그때부터 러시아에 저주가 쏟아졌고, 그때부터 바로 지금까지 러시아에 대한 독일인들의 증오는 커져만 갔다. 이제 그것은 엄청난 규모로 드러나고 있다. 러시아인들도 나름대로 독일인들을 그리 달가워하지 않는다. 이렇게 감동적인 상호 관계가 있는데, 이웃한 두 제국, 전러시아 제국과 범게르만 제국이 오래 평화롭게 지낼 수 있겠는가?

그런데 두 나라 사이에 평화를 지킬 동기는 바로 지금까지 충분히 있었고, 지금도 여전히 충분히 있다. 첫째 동기는 폴란드다. 폴란드를 더할 나위 없이 강도답게 나눠 가진 군주 약탈자는 셋이었다 —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전러시아. 그러나 분할하던 바로 그 순간에도, 그 뒤 폴란드 문제가 다시 떠오를 때마다, 이해관계가 가장 적었고 지금도 가장 적은 쪽은 오스트리아다. 알려진 대로 오스트리아 궁정은 맨 처음에는 분할 자체에 항의하기까지 했고, 프리드리히 2세와 예카테리나 2세가 끈질기게 요구한 끝에야 마리아 테레지아 여제가 자기 몫으로 떨어진 지분을 받아들이기로 동의했다. 그녀는 이 일로 역사에 남은 덕스러운 눈물까지 흘렸지만, 그래도 받아들였다. 받지 않을 수가 있었겠는가? 빼앗으라고 왕관을 쓴 몸이 아니던가. 제왕들에게 법은 없고, 그들의 식욕에는 끝이 없다. 프리드리히 2세는 회고록에서, 폴란드에 가한 연합 약탈에 한번 가담하기로 결심한 오스트리아 정부가 있지도 않은 어떤 강을 찾는다며 조약상 자기 몫보다 훨씬 많은 땅을 서둘러 군대로 점령했다고 적고 있다.

그래도 주목할 만한 것은, 러시아와 프로이센이 재치를 부리고 웃으며 강도짓을 하는 동안 오스트리아는 약탈하면서 기도하고 울었다는 점이다. 예카테리나 2세와 프리드리히 2세가 바로 그 무렵 프랑스 철학자들과 더없이 재치 있고 더없이 박애적인 서신을 주고받았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더욱 주목할 만한 것은, 그 뒤 우리 시대에 이르기까지 불행한 폴란드가 해방되고 재건되려고 필사적인 시도를 할 때마다 러시아와 프로이센 궁정은 전율하고 격분하여 공공연히 또는 은밀히 힘을 합쳐 봉기를 짓밟으려 서둘렀던 반면, 오스트리아는 마지못해 끌려든 공범처럼 동요하지도 않고 그들의 조치에 가담하지도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새로운 폴란드 봉기가 시작될 때마다 폴란드인들을 도울 용의가 있는 듯한 태도를 보였고 어느 정도는 실제로 도왔다는 점이다. 1831년에도 그랬고, 비스마르크가 공공연히 러시아 헌병 역할을 떠맡은 1862년에는 더욱 분명했다. 반면 오스트리아는 폴란드인들이 무기를 폴란드로 실어 나르는 것을, 물론 비밀리에, 허용했다.

이러한 행동의 차이를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설마 오스트리아의 고결함이나 인류애나 정의감 때문이겠는가? 아니다, 그저 오스트리아의 이익 때문이다. 마리아 테레지아가 괜히 운 것이 아니다. 그녀는 남들과 함께 폴란드의 정치적 존재를 침해하면서 자신이 오스트리아 제국의 무덤을 파고 있음을 느꼈다. 북동쪽 국경에 이 귀족적이고, 사실 영리하지는 않지만 철저히 보수적이며 전혀 정복적이지 않은 국가가 이웃해 있는 것보다 오스트리아에 더 유리한 것이 무엇이 있었겠는가? 그 국가는 오스트리아를 러시아라는 불쾌한 이웃에게서 벗어나게 해 주었을 뿐 아니라 프로이센과도 떼어 놓아, 두 정복 열강에 맞서는 귀중한 방벽 노릇을 했다.

이것을 깨닫지 못하려면 마리아 테레지아의 장관들이 지녔던 그 판에 박힌 어리석음, 무엇보다 그 매수된 근성을 고스란히 갖추어야 했고, 뒤이어 늙은 메테르니히의 오만한 옹졸함과 악의에 찬 반동적 고집을 갖추어야 했다. 하기야 알려진 대로 메테르니히도 페테르부르크와 베를린 궁정에서 연금을 받고 있었다. 한마디로 역사에 의해 멸망을 선고받은 처지여야 했다.

전러시아 제국과 프로이센 왕국은 양쪽의 이익을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앞의 나라에는 폴란드 분할이 유럽 열강의 의의를 안겨 주었고, 뒤의 나라는 그로써 오늘날 확고한 우위에까지 이른 길에 들어섰다. 그와 동시에 두 나라는 찢긴 폴란드의 피 묻은 한 조각을 타고난 대식가인 오스트리아 제국에 던져 줌으로써 이 제국을 자신들이 잡을 제물로 마련해 두었고, 그에 못지않게 지칠 줄 모르는 자신들의 식욕에 뒷날 바칠 희생물로 정해 버렸다. 두 나라는 이 식욕을 채우지 못하는 한, 오스트리아의 영토를 서로 나눠 갖지 못하는 한, 온 마음으로 서로를 증오하면서도 동맹이자 친구로 남을 것이며 남을 수밖에 없다. 오스트리아를 나누는 일 자체가 두 나라를 갈라서게 한다 해도 이상할 것은 없지만, 그때까지는 세상 무엇도 두 나라를 갈라서게 할 수 없다.

두 나라는 갈라서 봐야 득이 없다. 새로운 프로이센-독일 제국에게는 현재 유럽에도 온 세계에도 러시아 말고는 동맹국이 하나도 없다. 러시아와 더불어 어쩌면 미국 정도가 있을까. 모두가 이 제국을 두려워하고 모두가 이 제국을 증오하며, 모두가 이 제국의 몰락을 기뻐할 것이다. 이 제국이 모두를 짓누르고 모두를 약탈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 제국은 범게르만 제국의 계획과 이념을 온전히 실현하려면 아직 많은 정복을 해내야 한다. 프랑스인들에게서 로렌의 일부가 아니라 로렌 전체를 빼앗아야 하고,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 덴마크와 스칸디나비아반도 전체를 정복해야 한다. 발트해에서 혼자 주인 노릇을 하려면 우리의 발트 연안 여러 주도 손아귀에 넣어야 한다. 한마디로, 마자르인들에게 남겨 둘 헝가리 왕국과, 오스트리아령 부코비나와 함께 러시아에 넘겨줄 갈리치아를 빼고는, 이 제국은 바로 그 사태의 힘에 떠밀려 반드시 트리에스테까지 포함하는 오스트리아 전체를, 물론 보헤미아까지 포함하여 장악하려 들 것이다. 보헤미아를 두고 페테르부르크 내각은 이 제국과 다툴 생각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우리는 오스트리아 제국의 다소간 먼 장래의 분할을 두고 페테르부르크 궁정과 독일 궁정 사이에 이미 오래전부터 비밀 교섭이 진행되어 왔음을 확신하며 분명히 알고 있다. 물론 두 열강의 우호 관계에서 언제나 그렇듯이, 그러면서 양쪽은 늘 서로를 속이려 애쓴다.

프로이센-독일 제국의 힘이 아무리 막강하다 해도, 온 유럽의 의사에 맞서 그런 거대한 기도를 실현하기에는 이 제국 혼자서는 힘이 모자란다는 것이 분명하다. 따라서 러시아와의 동맹은 절실한 필요이며, 앞으로도 오랫동안 그러할 것이다.

러시아에게도 그러한 필요가 존재하는가?

우선 우리 제국은 다른 어떤 나라보다도 두드러지게 군사 국가다. 가능한 한 거대한 군사력을 만들어 내려고 제국은 세워진 첫날부터 인민의 삶과 번영을 이루는 모든 것을 희생해 왔고 지금도 희생하고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군사 국가로서 제국은 자기 존재에 의미를 주는 하나의 목적, 하나의 일, 곧 정복을 원한다. 이 목적을 떠나면 제국은 그저 터무니없는 것일 뿐이다. 그러므로 사방으로, 무슨 수를 써서라도 정복하는 것, 이것이 바로 우리 제국의 정상적인 삶이다. 이제 문제는 이 정복의 힘이 어느 쪽으로 향해야 하며 어느 쪽으로 향하려 하겠느냐는 것이다.

제국 앞에는 두 길이 열려 있다. 하나는 서쪽 길, 다른 하나는 동쪽 길이다. 서쪽 길은 곧장 독일을 겨눈다. 이것은 범슬라브주의의 길이며, 동시에 프로이센 독일과 오스트리아 제국의 연합 세력에 맞서 프랑스와 동맹하는 길이다. 이때 영국과 미국은 아마 중립을 지킬 것이다.

다른 길은 곧장 동인도와 페르시아와 콘스탄티노플로 이어진다. 그 길에서는 오스트리아와 영국이, 그리고 아마 그들과 함께 프랑스가 적으로 나서고, 프로이센 독일과 미국이 동맹국이 될 것이다. 우리의 호전적인 제국은 이 두 길 가운데 어느 쪽으로 가려 할까? 황태자는 열렬한 범슬라브주의자이며 독일인을 증오하고 소문난 프랑스인의 벗으로서 첫째 길을 지지한다고들 한다. 그 대신 지금 평안히 재위하고 있는 황제는 독일인의 벗이며 자기 삼촌을 사랑하는 조카로서 둘째 길을 지지한다. 그러나 문제는 이 사람 저 사람의 감정이 어디로 끌리느냐가 아니다. 문제는 제국이 성공을 기대하며, 그리고 꺾일 위험을 무릅쓰지 않고 어디로 갈 수 있느냐다.

제국은 첫째 길로 갈 수 있는가? 사실 그 길에서는 프랑스와 동맹할 수 있다. 그러나 그 동맹은 삼사 년 전만 해도 약속하던 그 이익, 그 물질적·정신적 힘을 이제는 전혀 내놓지 못한다. 프랑스의 민족적 통일은 돌이킬 수 없이 무너졌다. 이른바 하나의 프랑스라는 테두리 안에는 이제 서로 다르고 서로 단호히 적대하는 세 개, 아니 어쩌면 네 개의 프랑스가 있다. 귀족과 부유한 부르주아지와 사제들로 이루어진 귀족적·교권적 프랑스, 중간 부르주아지와 소부르주아지를 아우르는 순수 부르주아 프랑스, 도시와 공장의 프롤레타리아트 전체를 품은 노동자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농민 프랑스다. 뒤의 두 프랑스는 서로 손잡을 수 있고 예컨대 프랑스 남부에서는 이미 손잡기 시작했지만, 이들을 빼면 이 계급들 사이에서는 어떤 문제에서든, 조국 수호가 걸린 때조차 한마음이 될 가능성이 모두 사라졌다.

우리는 며칠 전에 이를 보았다. 독일인들은 아직 프랑스에 머물러 있으며, 마지막 10억 프랑을 기다리며 벨포르를 점령하고 있다. 그들이 이 나라에서 물러나기까지는 고작 3~4주가 남아 있었다. 그런데도 미칠 지경으로, 광포할 만큼 반동적인 정통왕당파·오를레앙파·보나파르트파로 이루어진 베르사유 의회의 다수파는 이 기한을 기다리려 하지 않았다 — 티에르를 쓰러뜨리고 그 자리에 마크마옹 원수를 앉혔는데, 마크마옹은 총검의 힘으로 프랑스에 도덕적 질서를 되살리겠다고 약속한다… 국가 프랑스는 생명과 지성과 너그러운 열정의 나라이기를 그쳤다. 프랑스는 마치 갑자기 딴 나라로 바뀌어, 오물과 비열함과 돈에 팔리는 행태와 짐승 같은 잔인함과 배신과 속물근성과 헤아릴 수 없이 놀라운 어리석음에서 앞장서는 나라가 된 듯하다. 그 모든 것 위에는 끝없는 무지가 군림한다. 프랑스는 교황에게, 사제들에게, 종교재판에, 예수회에, 라살레트의 성모와 성 라브르에게 자신을 바치고 있다. 프랑스는 진지하게 가톨릭교회에서 자신의 부활을, 가톨릭의 이익을 지키는 데서 자신의 사명을 찾는다. 종교 행렬이 온 나라를 뒤덮었고, 그 장엄한 연도 소리로 패배한 프롤레타리아트의 항의와 하소연을 덮어 버린다. 의원, 장관, 지사, 장군, 교수, 판사들이 손에 촛불을 들고 그 행렬에서 거드름을 피우며 걷는다. 얼굴도 붉히지 않고 마음속에 아무 믿음도 없이, 오직 「인민에게는 신앙이 필요하기」 때문이다. 하기야 예수회에게서 교육받은 교황지상주의자와 정통왕당파 귀족들, 곧 독실한 신자들의 한 무리도 있어서, 프랑스가 그리스도와 그의 티 없으신 어머니에게 자신을 엄숙히 봉헌하라고 큰 소리로 요구한다. 그리고 인민의 부, 더 정확히 말하면 모든 부를 생산하는 인민의 노동이 증권 투기꾼, 협잡꾼, 부유한 소유자, 자본가들의 약탈에 내맡겨진 바로 그때, 모든 정치가, 장관, 의원, 문무 온갖 관리, 변호사, 그리고 무엇보다 이 위선자 예수회 무리 모두가 더없이 파렴치하게 자기 주머니를 채우는 바로 그때, 프랑스 전체는 정말로 사제들의 통치에 내맡겨지고 있다. 사제들은 모든 교육, 곧 대학과 김나지움과 인민 학교를 손에 넣었다. 그들은 다시금 용감한 프랑스 군대의 고해 신부이자 영적 인도자가 되었다. 이 군대는 머지않아 외적과 싸울 능력을 완전히 잃겠지만, 그 대신 자기 인민에게는 그만큼 더 위험한 적이 될 것이다.

이것이 국가 프랑스의 참된 처지다! 프랑스는 아주 짧은 시간에 (1849년 이후의) 슈바르첸베르크의 오스트리아를 능가했다. 그리고 우리는 그 오스트리아가 어떻게 끝났는지 안다 — 이탈리아에서의 패배, 보헤미아에서의 패배, 그리고 전면적 붕괴였다.

물론 프랑스는 최근의 파탄에도 불구하고 부유하며, 프랑스가 치른 50억 프랑에서 산업적·상업적으로 별 이득을 보지 못한 독일보다 의심할 바 없이 더 부유하다. 이 부 덕분에 프랑스 인민은 아주 짧은 시간에 힘과 정부 체제의 모든 겉모습을 되살릴 수 있었다. 그러나 깊이 들여다볼 것도 없다. 거짓으로 번쩍이는 겉면을 살짝 들추기만 해도 속이 온통 썩었음을, 그것도 아직 거대한 이 국가의 몸뚱이 전체에 살아 있는 영혼의 불꽃 하나 남아 있지 않기 때문에 썩었음을 확인하기에 충분하다.

국가 프랑스는 돌이킬 수 없이 끝나 가고 있으며, 그 동맹을 기대하는 자는 혹독하게 속을 것이다. 그는 프랑스에서 무기력과 공포 말고는 아무것도 찾지 못할 것이다. 프랑스는 교황에게, 그리스도에게, 성모에게, 신의 이성과 인간의 몰상식에 바쳐져 있다. 프랑스는 도둑과 사제들의 먹이로 내맡겨졌다. 그리고 아직 군사력이 남아 있다면, 그것은 모두 자기 프롤레타리아트를 길들이고 진압하는 데 쓰일 것이다. 그러니 그런 나라와 동맹해서 무슨 이득이 있겠는가?

그러나 우리 정부가 알렉산드르 2세를 수반으로 하든 알렉산드르 3세를 수반으로 하든, 서쪽 정복, 곧 범슬라브주의 정복의 길을 결코 따르지 못하게 할 지극히 중요한 이유가 하나 있다. 이 길은 인민들, 무엇보다 슬라브 인민들을 그들의 합법적 군주인 오스트리아 군주와 프로이센-독일 군주에게 맞서 들고일어나게 하는 데로 곧장 이끈다는 의미에서 혁명의 길이다. 이 길은 파스케비치 공이 니콜라이 황제에게 제안한 것이었다.

니콜라이의 처지는 위태로웠다. 그는 가장 강력한 두 열강, 영국과 프랑스를 적으로 두고 있었다. 그에게 은혜를 입은 오스트리아가 그를 위협했다. 그에게 모욕당한 프로이센만이 그에게 충실히 남아 있었으나, 그마저도 세 나라의 압박에 밀려 흔들리기 시작했고 오스트리아 정부와 함께 그에게 엄중한 경고를 보냈다. 굽힐 줄 모르는 것으로 이름을 떨치는 데 자신의 영광을 거의 다 걸었던 니콜라이는 굽히든지 죽든지 해야 했다. 굽히자니 수치스러웠고, 죽자니 물론 내키지 않았다. 바로 이 결정적 순간에 그에게 범슬라브주의의 깃발을 들라는 제안이 들어왔다. 그뿐만 아니라 자신의 황제관에 프리기아 모자를 얹고 슬라브인뿐 아니라 마자르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7]까지 반란으로 불러내라는 제안이었다.

니콜라이 황제는 생각에 잠겼으나, 그를 위해 공정하게 말하자면, 오래 망설이지는 않았다. 그는 더없이 순수한 전제정치로 이름난 자신의 기나긴 경력을 혁명의 무대에서 끝내서는 안 된다는 것을 깨달았다. 그는 죽는 쪽을 택했다.

그는 옳았다. 안에서는 자신의 전제정치를 뽐내면서 국가 밖에서는 혁명을 일으킬 수는 없었다. 니콜라이 황제에게는 특히 그것이 불가능했다. 이 길에서 내디딜 첫걸음에서 그는 폴란드와 정면으로 마주쳤을 것이기 때문이다. 슬라브 인민과 그 밖의 인민들을 봉기로 부르면서 폴란드를 계속 목 조를 수 있었겠는가! 그렇다면 폴란드는 어찌할 것인가? 폴란드를 해방할 것인가? 그러나 그것이 니콜라이 황제의 모든 본능에 얼마나 어긋나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전러시아 국가성에게 폴란드의 해방이 단연코 불가능하다는 것은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두 국가 형태 사이의 투쟁은 수백 년 동안 이어졌다. 문제는 누가 이기느냐, 슐라흐타의 자유냐 차르의 채찍이냐였다. 정작 인민에 관해서는 어느 진영에서도 말이 없었다. 양쪽 모두에서 인민은 똑같이 노예였고, 일꾼이었고, 먹여 살리는 자였고, 국가의 말 없는 받침대였다. 처음에는 폴란드인이 이길 것처럼 보였다. 그들 편에는 교양과 군사 기술과 용기가 있었다. 그리고 그들의 군대는 주로 하급 슐라흐타로 이루어졌으므로 그들은 자유인으로서 싸웠고 러시아인은 노예로서 싸웠다. 모든 승산이 그들 편에 있는 듯했다. 실제로 그들은 아주 오랫동안 전쟁마다 이겼고, 러시아 지방들을 짓밟았으며, 한번은 모스크바를 정복하고 자기네 왕자를 차르의 왕좌에 앉히기까지 했다.

그들을 모스크바에서 몰아낸 힘은 차르의 힘도, 보야르의 힘도 아니었다. 인민의 힘이었다. 인민 대중이 투쟁에 끼어들지 않는 동안에는 폴란드인에게 행운이 따랐다. 그러나 인민 자체가 1612년에 한 번, 또 다른 때에는 보흐단 흐멜니츠키의 지도 아래 소러시아와 리투아니아 농노층의 총봉기라는 형태로 행위자로서 무대에 나서자마자, 행운은 그들을 완전히 떠났다. 그때부터 슐라흐타의 자유 국가는 시들고 기울기 시작하여 마침내 완전히 멸망했다.

러시아의 채찍은 인민 덕분에 승리했고, 동시에 물론 인민에게 크나큰 손해를 끼치며 승리했다. 인민은 진정 국가다운 감사의 표시로 차르의 종복들, 곧 귀족 지주들에게 세습 노예로 넘겨졌다. 지금 재위하고 있는 황제 알렉산드르 2세가 농민을 해방했다고들 한다. 우리는 그 해방이 어떤 것인지 안다.

그런데 전러시아 채찍 제국이 세워진 것은 바로 슐라흐타 폴란드 국가의 폐허 위에서였다. 이 제국에게서 이 기초를 빼앗아 보라. 1772년까지 폴란드 국가에 속해 있던 지역들을 거두어 가 보라. 그러면 전러시아 제국은 사라질 것이다.

제국이 사라지는 것은, 가장 부유하고 가장 비옥하며 인구가 가장 많은 이 속주들을 잃으면 그렇지 않아도 대단치 않은 제국의 부와 힘이 절반으로 줄어들 것이기 때문이다. 이 상실에 이어 곧 발트 지방의 상실이 뒤따를 것이다. 그리고 재건되는 폴란드 국가가 종이 위에서만이 아니라 실제로 재건되어 새롭고 힘찬 삶을 살게 된다고 가정하면, 제국은 머지않아 온 소러시아를 잃을 것이다. 소러시아는 폴란드의 한 지방이 되거나 독립 국가가 될 것이다. 그러면 제국은 흑해 연안의 국경도 잃고, 사방에서 유럽과 차단되어 아시아로 내몰릴 것이다.

제국이 적어도 리투아니아는 폴란드에 내줄 수 있다고 생각하는 이들도 있다. 아니다, 같은 이유로 내줄 수 없다. 리투아니아와 폴란드가 합쳐지면, 그것은 반드시, 그리고 말하자면 피할 수 없는 필연성으로 폴란드 국가 애국주의에게 발트 속주와 우크라이나를 정복할 넓은 출발점이 되어 줄 것이다. 폴란드 왕국 하나만 해방해도 그것으로 충분하다. 바르샤바는 곧바로 빌나, 그로드노, 민스크, 어쩌면 키예프와도 손잡을 것이다. 포돌리아와 볼히니아는 말할 것도 없다.

그러면 어떻게 할 것인가? 폴란드인들은 너무나 가만있지 못하는 인민이라, 그들에게는 자유로운 곳을 단 한 군데도 남겨 둘 수 없다. 당장 그곳에서 음모를 꾸미고, 폴란드 국가를 재건할 목적으로 빼앗긴 모든 지역과 비밀 연계를 맺을 것이다. 예컨대 1841년에는 자유 도시 크라쿠프 하나만 남아 있었는데, 크라쿠프는 전폴란드 혁명 기획의 중심지가 되었다.

그러한 제국이 무라비요프식 체계로 폴란드를 목 조른다는 조건으로만 그 존재를 이어 갈 수 있다는 것은 분명하지 않은가? 우리는 제국을 말하는 것이지 러시아 인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우리가 확신하기로 러시아 인민은 제국과 아무 공통점이 없으며, 그 이해관계도, 그 모든 본능적 지향도 제국의 이해관계 및 의식적 지향과 절대적으로 반대된다.

제국이 무너지고 대러시아, 소러시아, 백러시아와 그 밖의 인민들이 자신의 자유를 되찾자마자, 폴란드 국가 애국자들의 야심 찬 계획은 그들에게 두려운 것이 되지 않을 것이다. 그 계획은 제국에게만 치명적일 수 있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전러시아 황제도, 제정신이고 무쇠 같은 필연에 떠밀리지 않는 한, 폴란드의 아주 작은 부분이라도 놓아주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그런데 폴란드인을 해방하지 않고서 그가 슬라브인들을 반란으로 불러낼 수 있겠는가?

그가 범슬라브주의 반란의 깃발을 들지 못하게 막은 이유들은 지금도 고스란히 남아 있다. 다만 그때는 이 길이 지금보다 더 많은 이익을 약속했다는 차이가 있을 뿐이다. 그때는 아직 미움받는 오스트리아의 멍에 아래 있던 마자르인과 이탈리아가 봉기하리라고 기대할 수 있었다. 지금은 이탈리아가 틀림없이 중립을 지킬 것이다. 오스트리아는 이탈리아와 얽히지 않기 위해서라도 아직 자기 영토로 붙들고 있는 얼마 안 되는 이탈리아 땅의 나머지를 아마 아무 다툼 없이 이탈리아에 내줄 것이기 때문이다. 마자르인으로 말하자면, 그들은 슬라브인에 대한 자기네 지배적 관계가 불어넣는 온갖 열정을 다해 러시아에 맞서 독일인 편에 서리라고 틀림없이 말할 수 있다.

그러므로 러시아 황제가 독일에 맞서 범슬라브주의 전쟁을 일으킨다면, 그가 다소간 적극적인 협력을 기대할 수 있는 것은 슬라브인들뿐일 것이며, 그것도 오스트리아 슬라브인들뿐일 것이다. 만일 투르크의 슬라브인들까지 일으키려 든다면, 오스만 국가의 자립적 존속을 시샘하듯 지키는 수호자 영국이라는 새로운 적을 불러들일 것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오스트리아의 슬라브인은 약 1700만 명으로 헤아려진다. 여기서 갈리치아 주민 500만 명을 빼야 한다. 그곳에서는 다소간 러시아에 호감을 품은 루신인들이 적대적인 폴란드인들 때문에 꼼짝 못 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1200만 명이 남는데, 러시아 황제는 어쩌면 이들의 봉기를 기대할 수 있을지도 모른다. 물론 여기서도 오스트리아 군대에 징집된 자들은 빼야 한다. 그들은 여느 군대의 관례대로 상관이 명령하는 상대라면 누구와도 싸울 것이다.

덧붙이자면, 이 1200만 명은 한 지점이나 몇몇 지점에 모여 있지도 않고 오스트리아 제국의 온 영역에 흩어져 있으며, 서로 전혀 다른 방언을 쓰고, 독일인과, 마자르인과, 루마니아인과, 마지막으로 이탈리아인 주민들과 이리저리 뒤섞여 있다. 이는 오스트리아 정부와 독일인 전반을 끊임없이 불안에 떨게 하기에는 아주 많지만, 프로이센 독일과 오스트리아의 연합 세력에 맞서 러시아 군대에 진지한 버팀목이 되어 주기에는 너무 적다.

아아! 러시아 정부는 이를 알고 있으며 언제나 아주 잘 이해하고 있었다. 그래서 오스트리아에 맞서 범슬라브주의 전쟁을 벌일 의도를 가진 적이 없었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다. 그런 전쟁은 필연적으로 독일 전체에 맞선 전쟁으로 바뀔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우리 정부가 그런 의도를 품고 있지 않다면, 어째서 요원들을 통해 오스트리아 영내에서 진짜 범슬라브주의 선전을 벌이는가? 아주 단순한 이유, 방금 지적한 바로 그 이유 때문이다. 곧 오스트리아의 모든 지방에 열렬하면서도 눈먼, 어리석다고까지는 하지 않겠지만 눈먼 추종자들을 그토록 많이 두는 것이 러시아 정부로서는 매우 즐겁고 유익하기 때문이다. 이는 오스트리아 정부를 마비시키고, 묶어 놓고, 불안하게 하며, 오스트리아에 대해서만이 아니라 독일 전체에 대해서도 러시아의 영향력을 키운다. 제정 러시아는 오스트리아 슬라브인들을 마자르인과 독일인에게 맞서도록 부추기면서, 결국에는 그들을 바로 그 마자르인과 독일인의 손에 넘겨주리라는 것을 아주 잘 알고 있다. 비열한 장난이지만, 그 대신 더없이 국가다운 장난이다.

그러므로 독일인에 맞선 범슬라브주의 전쟁이 벌어질 경우, 전러시아 제국은 서쪽에서 동맹자도 실질적인 버팀목도 별로 찾지 못할 것이다. 이제 제국이 누구와 싸워야 할지 살펴보자. 첫째,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의 모든 독일인과, 둘째, 마자르인과, 셋째, 폴란드인과 싸워야 한다.

폴란드인은 물론 마자르인까지 제쳐 두고, 제정 러시아가 독일 전체, 곧 프로이센 독일과 오스트리아 독일의 연합 세력을 상대로, 아니 프로이센 하나만을 상대로라도 공세 전쟁을 벌일 능력이 있는지 물어보자. 우리가 공세 전쟁이라고 말하는 것은, 여기서는 러시아가 오스트리아 슬라브인들의 거짓 해방, 실은 정복을 노리고 그 전쟁을 시작한다고 상정하기 때문이다.

무엇보다 러시아에서 어떤 공세 전쟁도 민족 전쟁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는 거의 일반적인 규칙이다. 인민들은 자기 정부가 조국 밖에서 시작하고 수행하는 전쟁에 좀처럼 생생한 관심을 보이지 않는다. 그런 전쟁은 종교적 이해나 혁명적 이해가 섞여 들지 않는 한 대개 순전히 정치적인 전쟁이다. 16세기 종교개혁파와 가톨릭교도 사이의 전쟁은 독일인, 프랑스인, 네덜란드인, 영국인, 그리고 스웨덴인에게까지도 그런 전쟁이었다. 18세기 말 프랑스에게는 혁명 전쟁이 그러했다. 그러나 최근의 역사에서 인민 대중이 자기 정부가 국가의 경계를 넓히려고, 또는 그 밖의 순전히 국가적인 이해를 위해 시작한 정치 전쟁에 진정한 공감을 보인 사례로 우리가 아는 것은 예외적인 두 가지뿐이다.

첫째 사례는 나폴레옹 1세 치하의 프랑스 인민이 보여 주었다. 그러나 이 사례는 아직 충분히 설득력이 없다. 황제의 군대는 혁명 군대를 곧바로 이은 것이자 그 자연스러운 결과와도 같았기에, 프랑스 인민은 나폴레옹이 몰락한 뒤에도 그 군대를 바로 그 혁명적 이해의 발현으로 여겼기 때문이다.

훨씬 더 설득력 있는 것은 둘째 사례, 곧 새로 이루어진 프로이센-독일 국가가 프랑스 제2제정을 상대로 시작한 터무니없이 거대한 전쟁에서 독일 인민 전체가 빠져들었다고 해도 좋을 뜨거운 도취다. 그렇다, 이제 막 지나간 이 의미심장한 시기에 독일 인민 전체, 독일 사회의 모든 계층은, 아마 소수의 노동자 무리만 빼고는, 순전히 정치적인 이해, 곧 범게르만 국가를 세우고 그 경계를 넓힌다는 이해에 사로잡혀 있었다. 지금도 이 이해는 신분을 가리지 않고 모든 독일인의 머리와 가슴에서 다른 모든 이해를 압도하며, 바로 이것이 현재 독일의 특별한 힘을 이룬다.

러시아를 조금이라도 알고 이해하는 사람이라면 누구에게나, 우리 정부가 시작하는 어떤 공세 전쟁도 러시아에서 민족 전쟁이 되지 않으리라는 것이 분명할 것이다. 첫째, 우리 인민은 모든 국가적 이해와 무관할 뿐 아니라 본능적으로 그것을 싫어하기까지 한다. 국가는 인민의 감옥이다. 그런데 인민이 무엇하러 자기 감옥을 튼튼하게 하겠는가? 둘째, 정부와 인민 사이에는 아무런 유대도, 어떤 일에서든 단 한순간이라도 둘을 이어 줄 살아 있는 실 한 가닥도 없으며, 서로 이해할 능력도 가능성도 없다. 정부에게 흰 것은 인민에게 검고, 거꾸로 인민에게 아주 희게 보이는 것, 인민에게 삶이고 마음껏 활개 칠 자유인 것은 정부에게는 죽음이다.

어쩌면 푸시킨과 함께 이렇게 물을지도 모른다. 「아니면 러시아 차르의 말이 이제 힘을 잃었단 말인가?」

그렇다, 차르의 말이 인민에게 인민의 뜻에 어긋나는 것을 요구할 때에는 힘이 없다. 차르가 눈짓 한 번 하고 인민에게 외치기만 해 보라. 지주와 관리와 상인을 묶어라, 베어라, 그들의 재산을 빼앗아 너희끼리 나눠 가져라 — 한순간이면 충분하다. 러시아 인민 전체가 일어날 것이고, 이튿날이면 러시아 땅에는 상인과 관리와 지주의 흔적조차 남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차르가 인민에게 세금을 내고 국가에 병사를 대고 지주와 상인의 이익을 위해 일하라고 명령하는 한, 인민은 지금처럼 마지못해 몽둥이 아래에서 복종할 것이며, 할 수 있을 때에는 따르지 않을 것이다. 그렇다면 여기서 차르의 말이 지닌 마법 같은, 기적을 일으키는 힘이란 어디에 있는가?

그리고 차르가 인민에게 인민의 마음을 뒤흔들거나 상상력을 달아오르게 할 만한 무슨 말을 할 수 있겠는가? 1828년, 투르크에서 우리와 같은 신앙을 지닌 그리스인과 슬라브인들이 겪는 모욕을 구실로 오스만 제국에 전쟁을 선포하면서, 니콜라이 황제는 교회에서 낭독하게 한 선언문으로 인민 속에 종교적 광신을 일깨워 보려 했다. 그 시도는 완전히 실패로 끝났다. 우리나라 어딘가에 무서울 만큼 완강한 신앙심이 있다면, 그것은 기껏해야 분파 신도들에게서일 것이다. 그들은 국가도, 황제 자신조차도 누구보다 인정하지 않는 자들이다. 반면 정교의 관제 교회에는 더없이 깊은 무관심과 나란히 죽은 듯한 판에 박힌 의례가 군림하고 있다.

크림 전쟁 초기, 영국과 프랑스가 전쟁을 선포했을 때, 니콜라이는 다시 한번 인민 속에 종교적 광신을 불러일으키려 했으나 마찬가지로 실패했다. 이 전쟁 동안 인민 사이에서 무슨 말이 오갔는지 떠올려 보자. 「프랑스 놈이 우리를 자유롭게 풀어 주라고 요구한단다」. — 인민 의용군도 있었다. 그러나 그것이 어떻게 편성되었는지는 모두가 안다. 대부분 차르의 명령과 상관의 지시에 따라서였다. 그것 역시 징병이었고, 다만 형태가 다르고 기한이 있었을 뿐이다. 그리고 여러 곳에서는 농민들에게 전쟁이 끝나면 자유를 주겠다고 약속했다.

우리 농민층의 국가적 이해란 이런 것이다! 상인과 귀족 사이에서 애국심은 아주 독창적인 방식으로 드러났다. 어리석은 연설, 요란한 충성 맹세, 그리고 무엇보다 연회와 술판이었다. 그러나 한쪽은 돈을 내야 하고 다른 쪽은 자기 농민들을 이끌고 몸소 전쟁에 나가야 할 때가 되자, 나서는 사람은 아주 적었다. 저마다 자기 대신 남을 내세우려 애썼다. 의용군은 요란한 소리만 냈을 뿐 아무 쓸모도 없었다. 그런데 크림 전쟁은 공세 전쟁도 아니고 방어 전쟁이었으니, 민족 전쟁이 될 수 있었고 되어야 했다. 그런데 왜 되지 못했는가? 우리의 상류 계급은 썩고 천박하고 비열하며, 인민은 국가의 타고난 적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바로 이런 인민을 슬라브 문제의 이름으로 일으킬 수 있으리라 기대한다! 우리 슬라브주의자들 가운데는 러시아 인민이 「슬라브 형제들」을 도우러 달려가고 싶어 안달이 나 있다고 진심으로 믿는 정직한 사람들이 몇 있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은 그 형제들이 있다는 것조차 모른다. 그에게 너 자신이 슬라브 인민이라고 말해 준다면 그는 몹시 놀랄 것이다. 두힌스키 씨는 그의 폴란드인·프랑스인 추종자들과 함께 대러시아 인민의 혈관에 슬라브의 피가 흐른다는 것을 물론 부정하는데, 이로써 역사적·민족지적 진리를 거스른다. 그러나 우리 인민을 그토록 모르는 두힌스키 씨는 이 인민이 자기의 슬라브 기원에는 조금도 관심이 없다는 것을 아마 짐작조차 못 할 것이다. 겉으로만 슬라브적이고 실제로는 타타르-독일적인 제국의 압제 아래 지치고 굶주리고 짓눌린 그에게 그런 것을 신경 쓸 겨를이 있겠는가.

우리는 슬라브인들을 속여서는 안 된다. 슬라브 문제에 러시아 인민이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것이라고 그들에게 말하는 자들은 스스로를 지독하게 속이고 있거나 뻔뻔하게 거짓말을 하고 있으며, 물론 불순한 목적을 품고 거짓말을 하는 것이다. 우리 러시아 사회혁명가들이 슬라브 프롤레타리아트와 슬라브 청년을 공동의 사업으로 부른다고 해서, 다소간 슬라브적인 우리 공통의 혈통을 사업의 공동 토대로 그들에게 내놓는 것은 결코 아니다. 우리가 인정할 수 있는 토대는 오직 하나, 사회혁명뿐이다. 그 바깥에서는 그들의 인민에게도 우리 인민에게도 구원이 없다고 우리는 본다. 그리고 바로 이 토대 위에서, 모든 슬라브 인민이 성격과 역사적 운명, 과거와 현재의 열망에서 같은 점을 많이 지니고 있고, 또한 게르만 종족의 국가적 야심에 대해 똑같은 처지에 있기 때문에, 그들이 형제처럼 결합할 수 있다고 생각한다. 그것은 공동의 국가를 세우기 위해서가 아니라 모든 국가를 파괴하기 위해서이며, 자기들끼리 닫힌 세계를 이루기 위해서가 아니라 함께 세계 무대에 나서기 위해서다. 그 시작은 불가피하게 라틴 종족의 인민들과 긴밀한 동맹을 맺는 것이 될 터인데, 그 인민들 역시 슬라브인들과 마찬가지로 지금 독일인의 정복 정책에 위협받고 있다.

그러나 독일인들에 맞선 이 동맹도, 독일인들이 이름만 인민적인 국가일지라도 국가의 존재가 인민 자신에게 얼마나 헤아릴 수 없는 재앙을 안기는지 자기 경험으로 깨닫고, 국가의 멍에를 벗어던지며 국가적 지배를 향한 불행한 열정을 영원히 버릴 때까지만 지속되어야 한다. 그때에야 비로소, 그리고 오직 그때에만 유럽에 사는 세 주요 종족, 곧 라틴·슬라브·게르만 종족이 형제로서 자유롭게 동맹을 이룰 것이다.

그러나 그때까지는 독일인 쪽에서 그들 모두를 똑같이 위협하는 정복에 맞선 슬라브 인민들과 라틴 인민들의 동맹이 쓰라린 필연으로 남을 것이다.

독일 종족의 기이한 사명이여! 그들은 자신에 대한 공통의 두려움과 공통의 증오를 불러일으킴으로써 인민들을 결합시킨다. 그렇게 그들은 슬라브인들을 결합시켰다. 모든 슬라브 인민의 가슴에 깊이 뿌리내린 독일인에 대한 증오가 모스크바와 페테르부르크 요원들의 온갖 설교와 음모보다 범슬라브주의 선전의 성공에 훨씬 크게 기여했음은 의심할 여지가 없기 때문이다. 이제는 아마 같은 증오가 슬라브 인민을 라틴 인민과의 동맹으로 이끌 것이다.

이런 의미에서 러시아 인민 역시 온전히 슬라브 인민이다. 러시아 인민은 독일인을 좋아하지 않는다. 그러나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 독일인에 대한 러시아 인민의 반감은, 스스로 움직여 독일인과 싸우러 나설 정도로까지 이르지는 않는다. 그 반감은 독일인들이 러시아에 직접 들어와 러시아를 마음대로 주무르려 할 때에야 드러날 것이다. 그러나 독일을 향한 공세적 움직임에 우리 인민이 어떤 식으로든 참여할 것이라고 계산하는 자는 크게 잘못 생각하는 것이다.

따라서 우리 정부가 언젠가 어떤 움직임을 꾀한다면, 그것은 인민의 도움 없이, 오로지 정부 자신의 국가적·재정적·군사적 수단만으로 수행해야 한다는 결론이 나온다. 그러나 독일과 싸우기에, 아니 그보다 독일에 대항해 공세적 전쟁을 성공적으로 수행하기에 이 수단들이 충분한가.

우리의 모든 군사 수단과, 무수하다고들 떠드는 우리 군대가 독일의 실제 수단과 독일 군대에 비하면 아무것도 아니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으려면, 지독히 무지하거나 눈먼 크바스 애국자여야 한다.

러시아 병사가 용감한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러나 독일 병사들도 겁쟁이가 아니다. 그들은 연달아 세 차례의 전역에서 그것을 입증했다. 게다가 러시아 쪽에서 공세를 취할 것으로 상정되는 전쟁에서 독일 군대는 자기 집에서 싸울 것이며, 이번에는 정말로 독일의 모든 계급과 전체 주민이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으키는 애국적 봉기, 그리고 그들 자신의 애국적 광신의 뒷받침을 받을 것이다. 반면 러시아 병사들은 아무 의미도, 아무 열정도 없이 오직 명령에 복종하며 싸울 것이다.

러시아 장교와 독일 장교를 비교하자면, 순전히 인간적인 관점에서 우리는 우리 장교 유형에 우위를 줄 것이다. 그것이 우리 것이기 때문이 아니라 엄정한 공정에 근거해서다. 우리 군무장관 밀류틴 씨의 온갖 노력에도 불구하고, 우리 장교단의 압도적 다수는 예전 그대로, 곧 거칠고 무지하며 거의 모든 면에서 아무런 자각이 없는 존재로 남아 있다. 훈련, 주연, 카드, 폭음, 그리고 챙길 것이 있을 때, 바로 중대장이나 기병중대장이나 포대장부터 시작되는 상급 계급에서의 정례적이고 거의 합법화된 도둑질이 지금까지도 러시아 장교 생활의 일상적인 낙을 이룬다. 이것은 프랑스어로 말할 때조차 지극히 공허하고 야만적인 세계다. 그러나 이 세계에서, 그것을 채우고 있는 거칠고 터무니없는 난장판 속에서도 인간적인 마음, 인간적인 것을 본능적으로 사랑하고 이해하는 능력, 그리고 좋은 환경과 선한 영향을 만나면 완전히 의식적인 인민의 벗이 될 수 있는 능력을 찾아낼 수 있다.

독일 장교의 세계에는 제복과 군 규정, 그리고 두 가지 요소로 이루어진 역겨운 장교 특유의 거만함 외에는 아무것도 없다. 그 두 요소란 위계상 위에 있는 모든 것에 대한 하인 같은 복종과, 그들이 보기에 아래에 있는 모든 것, 곧 무엇보다 인민, 그다음으로는 가장 높은 문관과 귀족을 빼고 군복을 입지 않은 모든 것에 대한 오만하고 경멸적인 태도다.

자기 군주, 공작, 왕, 그리고 이제는 전독일 황제에 대해 독일 장교는 신념으로, 열정으로 노예다. 그 손짓 하나면 그는 언제 어디서나 가장 끔찍한 악행을 저지를 준비가 되어 있다. 남의 나라 것뿐만 아니라 자기 나라 것까지도, 수십, 수백 개의 도시와 마을을 불태우고 몰살하고 도륙할 준비가 되어 있다.

인민에 대해 그는 경멸뿐 아니라 증오까지 품는다. 인민을 과분하게 높이 쳐서, 인민이 언제나 반란을 일으키고 있거나 반란을 일으킬 준비가 되어 있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하기야 그렇게 여기는 것은 그만이 아니다. 오늘날 모든 특권 계급이 그렇게 여긴다. 그리고 독일 장교, 아니 정규군의 장교라면 누구나 특권 계급의 특권적 파수견이라고 부를 수 있다. 독일 안팎의 착취자 세계 전체가 인민을 두려움과 불신으로 바라본다. 불행히도 그 두려움과 불신이 언제나 사실로 들어맞는 것은 아니지만, 그럼에도 그것은 인민 대중 안에서 이 세계를 파괴할 의식적인 힘이 이미 일어나기 시작했음을 의심할 바 없이 증명한다.

그러므로 독일 장교는 충실한 파수견처럼 인민 무리를 떠올리기만 해도 콧수염이 곤두선다. 인민의 권리와 의무에 대한 그의 관념은 지극히 가부장적이다. 그가 보기에 인민은 주인들이 입고 배불리 먹도록 일해야 하고, 따지지 않고 당국에 복종해야 하며, 국세와 공동체 부담을 치러야 하고, 또 그 나름으로 병사 노릇을 하며 그의 장화를 닦고 말을 대령해야 한다. 그가 호령하며 사브르를 휘두르면 마주치는 사람마다 쏘고 찌르고 베어야 하며, 명령이 떨어지면 카이저와 조국을 위해 죽음으로 나아가야 한다. 현역 복무 기간이 끝난 뒤에는, 다치고 불구가 되었으면 구걸로 연명하고, 온전한 몸으로 나왔으면 예비군에 들어가 죽을 때까지 복무하며, 언제나 당국에 복종하고 모든 상관 앞에 머리를 숙이며 요구가 있으면 언제든 죽을 준비를 갖추어야 한다.

인민 사이에서 이 이상에 어긋나는 현상은 무엇이든 독일 장교를 미치게 만들 수 있다. 그가 혁명가들을 얼마나 증오할지 상상하기란 어렵지 않다. 그런데 그는 이 일반적인 명칭 아래 모든 민주주의자, 나아가 자유주의자까지 포함한다. 한마디로 어떤 정도로든 어떤 형태로든 전 독일의 지배자 황제 폐하의 신성한 생각과 의지에 반하는 일을 감히 하거나 바라거나 생각하는 자는 모두 포함한다…

그가 자기 조국의 사회혁명가들, 아니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조차 얼마나 각별한 증오를 품을지 짐작할 수 있다. 그들을 떠올리기만 해도 그는 미쳐 날뛰며, 입에 거품을 물지 않고 그들 이야기를 하는 것은 점잖지 못하다고 여긴다. 그들 가운데 그의 손에 떨어지는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리고 불행히도 최근 독일에서 많은 사회민주주의자가 장교들의 손을 거쳐 갔다고 말하지 않을 수 없다. 그들을 마음대로 괴롭히거나 당장 총살할 권리가 없고 감히 손찌검도 못 하니, 그는 가장 모욕적인 온갖 조치와 트집과 몸짓과 말로 자신의 미친 듯하고 천박한 악의를 풀려고 애쓴다. 그러나 허락만 떨어진다면, 상관이 명령만 내린다면, 그는 광포한 열의로, 무엇보다 장교다운 자부심을 품고 고문자와 교수형 집행인과 사형집행인 노릇을 떠맡을 것이다.

그런데 이 문명화된 짐승, 신념으로는 하인이요 천직으로는 사형집행인인 이자를 한번 보라. 그가 젊다면, 당신은 괴물 대신 금발의 청년을 보고 놀랄 것이다. 혈색이 좋고 낯짝에 보송한 솜털이 난, 겸손하고 조용하며 심지어 수줍음까지 타는, 그러면서도 오만한 — 거만함이 내비친다 — 그리고 반드시 감상적인 청년을. 그는 실러와 괴테를 외우고 있으며, 위대한 지난 세기의 인문주의 문학 전체가 그의 머리를 거쳐 갔지만, 머리에는 인간적인 생각 하나, 영혼에는 인간적인 감정 하나 남기지 못했다.

독일인들, 그중에서도 특히 독일 관료와 장교들에게는 풀 수 없을 것처럼 보이는 과제가 맡겨졌다. 교양을 야만과, 학식을 하인 근성과 결합하는 일이다. 이 때문에 그들은 사회적으로는 역겨우면서 동시에 지극히 우스꽝스럽고, 인민 대중에게는 체계적이고 무자비한 악당이지만, 그 대신 국가 공무에는 귀중한 인간이 된다.

독일 시민들은 이것을 알고 있으며, 알기에 그들에게서 받는 온갖 모욕을 애국심으로 견딘다. 그들에게서 자기 자신의 본성을 알아보기 때문이며, 무엇보다 심심풀이로 툭하면 자기들을 무는 이 인민적이면서 특권을 지닌 황제의 개들을 범게르만 국가의 가장 확실한 보루로 보기 때문이다.

정규군에 독일 장교보다 나은 것은 정말로 상상할 수 없다. 학식과 상스러움을, 상스러움과 용기를, 엄격한 명령 이행과 주도하는 능력을, 규율과 잔인함을, 잔인함과 독특한 정직함을, 물론 일면적이고 심지어 나쁜 쪽으로 치우친 것이긴 하나 일종의 열광과 상관의 의지에 대한 보기 드문 복종을 한 몸에 아우르는 인간, 상관의 사소한 신호 하나에 수십, 수백, 수천 명을 언제라도 베어 넘기거나 토막 낼 수 있는 인간, — 조용하고 겸손하고 온순하고 순종적이며 윗사람 앞에서는 언제나 차려 자세를 취하면서, 병사에게는 거만하고 경멸 어린 냉담함을 보이고 필요하면 잔인하기까지 한 인간, 온 삶이 복종하라와 명령하라는 두 마디로 요약되는 인간 — 그런 인간은 군대와 국가에 없어서는 안 된다.

병사 훈련으로 말하자면, 좋은 군대를 조직하는 데 주요한 일 가운데 하나인 이 일은 독일 군대에서 체계적이고 깊이 숙고되었으며 실제로 시험되고 실현된 완성의 경지에 이르렀다. 모든 규율의 기초에 놓인 주요 원칙은 다음 금언에 담겨 있다. 우리는 얼마 전에도 많은 프로이센, 작센, 바이에른 및 그 밖의 독일 장교들에게서 이 금언을 되풀이해 들었다. 그들은 프랑스 전쟁 이래 무리를 지어 스위스를 돌아다니는데, 아마 지형을 익히고 도면을 뜨기 위해서일 것이다 — 나중에 쓸모가 있을 테니. 그 금언은 이러하다.

「병사의 영혼을 장악하려면 무엇보다 먼저 그의 육체를 장악해야 한다.」

그러면 어떻게 그의 육체를 장악하는가? 끊임없는 훈련을 통해서다. 독일 장교들이 제식 훈련을 경멸한다고 생각하지 마라. 전혀 그렇지 않다. 그들은 제식 훈련을 팔다리를 꺾어 길들이고 병사의 육체를 장악하는 최선의 수단 가운데 하나로 본다. 그다음은 총기 조작, 무기 손질, 군복 손질이다. 병사는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에 매여 있어야 하며, 자기 위에서, 자기 걸음 하나하나를 따라다니는 상관의 엄격하고 차갑게 최면을 거는 눈을 한시도 잊지 않고 느껴야 한다. 시간이 좀 더 남는 겨울에는 병사들을 학교로 몰아넣어 읽기, 쓰기, 셈하기를 마저 가르치지만, 무엇보다 황제 숭배와 인민 경멸로 가득 찬 군 규정을 외우게 한다. 황제에게는 받들어총을 하고, 인민에게는 총을 쏘라. 이것이 병사들에게 주는 도덕적·정치적 가르침의 정수다.

이런 수렁에서 3년, 4년, 5년을 지내고 나면 병사는 불구가 된 채로밖에 빠져나올 수 없다. 장교들도 형태는 다르지만 마찬가지다. 병사는 의식 없는 몽둥이로 만들려 한다. 반면 장교는 의식 있는 몽둥이, 신념으로, 생각으로, 이해관계로, 열정으로 몽둥이가 된 자여야 한다. 그의 세계는 장교 사회다. 거기서 그는 한 발짝도 벗어나지 않으며, 위에서 말한 정신에 물든 장교 집단 전체가 한 사람 한 사람을 감시한다. 경험이 없어서든 어떤 인간적 감정에 이끌려서든 다른 사회와 가까이 지내는 불행한 자에게 화가 있을지어다. 그 사회가 정치적으로 무해하다면 그는 비웃음만 살 것이다. 그러나 그 사회가 장교 일반의 성향과 맞지 않는 정치적 성향, 곧 자유주의적이거나 민주주의적인 성향을 띠고 있다면, 사회혁명적 성향은 말할 것도 없고, 그 불행한 자는 끝장이다. 동료 하나하나가 그의 밀고자가 될 것이다.

대체로 상급 지휘부는 장교들이 되도록 자기들끼리 지내기를 바라며, 병사들과 마찬가지로 장교들에게도 자유 시간을 되도록 적게 남기려 애쓴다. 병사들을 훈련시키고 끊임없이 감독하는 일만으로도 하루의 4분의 3이 든다. 나머지 4분의 1은 군사학 연마에 바쳐야 한다. 장교는 소령 계급에 오르기 전에 여러 차례 시험을 통과해야 한다. 그 밖에도 여러 문제에 관한 기한부 과제가 주어지며, 이 과제로 승진 자격을 판단한다.

보다시피 독일의 군대 세계는, 프랑스에서도 마찬가지지만, 완전히 닫힌 세계를 이루며, 이 폐쇄성은 이 세계가 인민의 적이 되리라는 확실한 보증이다.

그러나 독일 군대 세계는 프랑스 군대 세계는 물론 유럽의 모든 군대 세계에 비해 막대한 우위를 지닌다. 독일 장교들은 지식의 실증성과 폭, 군사에 관한 이론적·실천적 지식, 군인이라는 직업에 대한 열렬하고 철두철미하게 고지식한 헌신, 정확성, 꼼꼼함, 자제력, 끈질긴 인내, 그리고 상대적인 정직함에서 세계의 모든 장교를 능가한다.

이 모든 자질 덕분에 독일 군대의 편성과 무장은 실제로 존재하며, 프랑스에서 나폴레옹 3세 치하에 그랬던 것처럼, 또 우리나라에서 흔히 그렇듯이 종이 위에만 있는 것이 아니다. 게다가 바로 그 독일적 장점 덕분에 행정·민간, 특히 군사 감독이 장기간의 기만이 불가능하도록 짜여 있다. 반면 우리나라에서는 아래에서 위까지, 위에서 아래까지 서로 감싸 주기 때문에 진상을 알아내기가 거의 불가능하다.

이 모든 것을 헤아려 보고 스스로 물어보라. 러시아 군대가 독일에 대한 공세 전쟁에서 성공을 기대할 수 있겠는가? 당신은 러시아가 백만 군대를 내보낼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글쎄, 잘 조직되고 무장된 군대는 아마 백만이 안 될 것이다. 하지만 백만이 있다고 하자. 그 절반은 행복한 인민, 너무 배가 불러 언제 날뛸지 모르는 인민의 평온을 지키기 위해 광대한 제국 곳곳에 흩어 남겨 두어야 한다. 우크라이나, 리투아니아, 폴란드만 해도 얼마나 많은 군대가 필요하겠는가! 독일에 맞서 50만 군대를 보낼 수 있다면 그것만도 대단한 일이다. 러시아는 그런 군대를 한 번도 내보낸 적이 없다.

그런데 독일에서는 정말로 백만 군대가 당신을 맞을 것이다. 편성, 훈련, 군사학, 정신, 무장에서 세계 제일인 군대다. 그리고 그 뒤에는 독일 인민 전체가 거대한 민병대로 버티고 설 것이다. 독일 인민은 지난 전쟁에서 프로이센의 프리츠가 아니라 나폴레옹 3세가 이겼다면 아마, 아니 십중팔구 프랑스인들에 맞서 일어서지 않았을 것이다. 그러나 다시 한번 말하건대, 러시아의 침공에 맞서서는 한 사람도 빠짐없이 일어설 것이다.

당신은 필요하면 러시아, 곧 전러시아 제국이 백만 군대를 더 내보낼 수 있다고 말할 것이다. 왜 못 내보내겠는가, 다만 종이 위에서일 뿐이다. 그러려면 천 명당 몇 명씩 새로 징집하라는 칙령을 내리기만 하면 된다. 자, 여기 당신의 백만이 있다. 그런데 그것을 어떻게 모으는가? 누가 모으는가? 당신의 예비군 장성들, 시종무관장들, 시종무관들, 종이 위에만 있는 예비대대와 수비대대 지휘관들, 당신의 지사들과 관리들이다. 맙소사, 그들은 병력을 다 모으기도 전에 몇만, 어쩌면 몇십만 명을 굶겨 죽일 것이다. 그리고 결국 새 백만 대군을 편성할 장교를 어디서 넉넉히 구하고, 무엇으로 무장시키겠는가? 몽둥이로? 당신에게는 백만 명을 제대로 무장시킬 돈도 넉넉지 않은데, 또 다른 백만을 무장시키겠다고 큰소리친다. 어떤 은행가도 당신에게 돈을 빌려주지 않을 것이다. 설령 빌려준다 해도, 백만 명을 무장시키려면 몇 년이 걸린다.

당신의 가난과 무력함을 독일의 부와 독일의 힘에 견주어 보자. 독일은 프랑스에서 50억을 받았다. 30억은 여러 비용 보상과, 물론 병사들은 빼고 제후, 정치가, 장성, 대령, 장교들에 대한 포상, 그리고 국내외의 여러 여행에 쓰였다고 치자. 그러면 20억이 남는데, 이것은 오로지 독일의 무장, 곧 새 요새 건설과 기존의 무수한 요새 보강, 새 대포와 소총 따위의 주문에 쓰였다. 그렇다, 이제 독일 전체가 사방으로 가시를 곤두세운 무시무시한 병기창이 되었다. 그런데 당신은 어설프게 훈련받고 어설프게 무장한 채 독일을 이기기를 바란다.

첫걸음에, 독일 땅에 코를 들이밀자마자 당신은 더없이 처참하게 완패할 것이고, 당신의 공세 전쟁은 곧바로 방어 전쟁으로 바뀔 것이다. 독일군이 전러시아 제국의 경계 안으로 들어올 것이다.

그러나 그때는 적어도 독일군이 자기들에 맞선 러시아 인민 전체의 봉기를 불러일으키지 않겠는가? 그렇다, 독일인들이 러시아 본토 지역으로 들어와 이를테면 곧장 모스크바로 진군한다면 그럴 것이다. 그러나 그런 어리석은 짓을 하지 않고 북쪽으로 발트 연안 지방을 거쳐 페테르부르크로 간다면, 그곳에서 그들은 소시민, 개신교 목사, 유대 놈들 사이에서뿐 아니라 불만을 품은 남작들과 그 자녀들, 학생들 사이에서도, 또 그들을 통해 페테르부르크를 가득 채우고 러시아 전역에 흩어져 있는 우리의 무수한 발트 출신 장성, 장교, 고위·하위 관리들 사이에서도 많은, 아주 많은 친구들을 찾을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그들은 폴란드와 소러시아를 러시아 제국에 맞서 일으킬 것이다.

폴란드가 분할된 날부터 폴란드의 모든 적과 압제자 가운데 프로이센이 가장 집요하고 가장 체계적이며 따라서 가장 위험한 자였다는 것은 사실이다. 러시아는 야만인처럼, 야생의 힘처럼 행동하여 모두를 베고, 목매달고, 고문하고, 시베리아로 유배 보냈지만, 그래도 자기 몫으로 떨어진 폴란드 지역을 러시아화할 줄 몰랐고, 무라비요프식 처방에도 불구하고 지금까지도 러시아화하지 못하고 있다. 오스트리아도 갈리치아를 조금도 독일화하지 않았고, 그러려고 애쓰지도 않았다. 독일 정신과 위대한 독일의 사업, 곧 독일 아닌 나라들을 강제로, 인위적으로 독일화하는 사업의 진정한 대표자인 프로이센은 훨씬 전에 자기 손에 들어온 쾨니히스베르크 지방은 말할 것도 없고, 단치히 지방과 포즈난 공국을 무슨 수를 써서라도 독일화하는 일에 곧바로 착수했다.

프로이센이 그 목적을 이루려고 쓴 수단을 다 말하자면 너무 길 것이다. 그 가운데 폴란드 땅에 독일 농민을 대규모로 이주시킨 것이 큰 자리를 차지했다. 1807년에 토지 상환권과 그 상환을 위한 온갖 편의를 주면서 농민을 완전히 해방한 것도 폴란드 농민들 사이에서까지 프로이센 정부의 인기를 높이는 데 크게 이바지했다. 그다음에는 농촌 학교가 세워졌고, 그 학교 안에서, 또 그 학교를 통해 독일어가 도입되었다. 이런 조치들로 1848년에는 이미 포즈난 공국의 3분의 1 이상이 완전히 독일화되어 있었다. 도시들은 말할 것도 없다. 폴란드 역사의 맨 처음부터 도시에서는 독일어가 쓰였는데, 수많은 독일인 시민과 수공업자, 그리고 무엇보다 그곳에서 너그러운 환대를 받은 유대 놈들 덕분이었다. 아주 오랜 옛날부터 폴란드의 이 지역 도시들 대부분이 이른바 마그데부르크법으로 다스려졌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이렇게 프로이센은 평시에 목적을 이루었다. 그러나 폴란드 애국주의가 인민 운동을 일으키거나 일으키려 할 때면, 프로이센은 물론 가장 단호하고 야만적인 조치도 서슴지 않았다. 우리는 이미 언급할 기회가 있었는데, 프로이센은 자기 영내에서뿐 아니라 폴란드 왕국에서도 폴란드 반란을 진압하는 일에서 러시아 정부에 변함없는 충성과 더없이 뜨거운 협력 의지를 보이기를 그치지 않았다. 프로이센 헌병들, 아니 무슨 말을 하랴, 모든 병과의 근위대와 야전군의 고귀한 프로이센 장교들이 유난한 열정으로 프로이센 영내에 숨어든 폴란드인들을 사냥하고 붙잡아 심술궂은 기쁨에 차서 러시아 헌병들에게 넘겼으며, 러시아에서 그들이 교수형을 당하기를 바란다는 말을 덧붙이기 일쑤였다. 이 점에서 교수형리 무라비요프는 비스마르크를 아무리 칭찬해도 모자랄 지경이었다.

비스마르크 공이 입각하기 전에도 프로이센은 늘 같은 일을 했지만, 부끄러워하며 남몰래 했고, 할 수만 있으면 자기 행동을 부인했다. 비스마르크 공이 처음으로 가면을 벗었다. 그는 프로이센 의회와 유럽 외교계 앞에서 파렴치하게, 소리 높여, 프로이센 정부가 러시아 정부에 모든 영향력을 행사하여 어떤 유혈 조치도 마다하지 말고 폴란드를 끝까지 목 졸라 죽이라고 설득했으며 이 점에서 프로이센은 언제나 러시아에 가장 적극적인 도움을 줄 것이라고, 인정했을 뿐 아니라 자랑까지 했다.

끝으로 최근, 바로 얼마 전에도 비스마르크 공은 오늘날 프로이센-독일의 통치를 누리고 있는 폴란드 지역에서 폴란드 민족성의 잔재를 뿌리 뽑겠다는 정부의 확고한 결의를 의회에서 노골적으로 밝혔다. 불행히도 앞에서 지적했듯이, 포즈난의 폴란드인들은 갈리치아의 폴란드인들과 마찬가지로 이제 자기들의 폴란드 민족의 대의를 교황권의 패권 문제와 그 어느 때보다 긴밀하게 묶어 버렸다. 예수회원, 교황지상주의자, 수도회, 주교들이 그들의 변호인이 되었다. 17세기에 그랬듯이, 이런 동맹과 이런 우정은 폴란드인들에게 이롭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이는 우리 일이 아니라 그들, 폴란드인들의 일이다.

우리가 이 모든 것을 언급한 것은 오직 폴란드인들에게 비스마르크 공보다 더 위험하고 더 악랄한 적이 없다는 것을 보여 주기 위해서였다. 그는 그들을 지상에서 지워 버리는 것을 일생의 과제로 삼은 듯하다. 그런데도 독일의 이익이 요구할 때 그가 폴란드인들을 러시아에 맞선 반란으로 부르는 데는 아무 지장이 없을 것이다. 폴란드인들은 그와 프로이센을 증오한다. 독일 전체를 증오한다고까지는 하지 않겠다. 폴란드인들은 그것을 인정하고 싶어 하지 않을 터이니. 그러나 그들의 영혼 깊은 곳에도 다른 모든 슬라브 인민 못지않게 독일인에 대한 바로 그 역사적 증오가 살아 있다. 또 그들은 프로이센 독일인들에게 당한 피맺힌 모욕을 잊을 수 없다. 그럼에도 폴란드인들은 의심할 바 없이 비스마르크의 부름에 일어설 것이다.

독일과 프로이센 자체에는 이미 오래전부터 수가 많고 무게 있는 정당 하나가, 아니 세 정당이 있다. 자유주의 진보당, 순수 민주당, 사회민주당이다. 이들은 합쳐서 독일 의회와 프로이센 의회에서 의심할 바 없는 다수를 이루고, 사회 안에서는 더욱 확고한 다수를 이룬다. 이 정당들은 독일과 러시아의 전쟁을 예견하고, 어느 정도는 바라며, 말하자면 불러들이기까지 하면서, 일정한 경계 안에서 폴란드가 봉기하고 재건되는 것이 그 전쟁의 필수 조건이 되리라는 것을 깨달았다.

물론 비스마르크 공도, 이 정당들 가운데 어느 하나도 프로이센이 폴란드에서 빼앗은 지역을 모두 폴란드에 돌려주는 데 결코 동의하지 않을 것이다. 쾨니히스베르크는 말할 것도 없고, 그들은 세상없어도 단치히도, 서프로이센의 아주 작은 조각 하나도 내주지 않을 것이다. 포즈난 공국에서조차 이미 완전히 독일화되었다는 핑계로 상당한 부분을 떼어 갖고, 프로이센인들 몫으로 떨어진 폴란드 지역 전체에서 사실상 아주 조금만 폴란드인들에게 남겨 줄 것이다. 그 대신 리보프와 크라쿠프를 포함한 갈리치아 전체는 얼마나 선선히 넘겨줄 것인가. 이 모두가 지금 오스트리아 땅이니 말이다. 그리고 러시아 깊숙이 폴란드인들이 차지하고 지킬 힘이 닿는 만큼의 땅은 더욱 기꺼이 넘겨줄 것이다. 동시에 독일은 폴란드인들에게 필요한 자금과 무기와 군사 원조를 제안할 것이다. 자금은 물론 독일이 보증하는 폴란드 차관의 형태일 것이다.

폴란드인들이 독일의 제안에 동의할 뿐만 아니라 기꺼이 달려들 것이라는 점을 누가 의심할 수 있겠는가. 그들의 처지는 너무나 절망적이어서, 백 배 더 나쁜 제안을 받더라도 그들은 그것을 받아들일 것이다.

폴란드 분할 이후 꼬박 한 세기가 지났고, 이 백 년 동안 폴란드 애국자들의 순교의 피가 흐르지 않은 해는 거의 한 해도 없었다. 백 년에 걸친 끊임없는 투쟁, 필사적인 반란! 이런 용맹을 자랑할 수 있는 다른 인민이 있는가?

폴란드인들이 시도해 보지 않은 것이 무엇인가? 슐라흐타의 음모, 소시민의 모의, 무장 유격대, 인민 봉기, 마침내 외교의 온갖 술수와 심지어 교회의 원조까지. 그들은 모든 것을 시도했고 모든 것에 매달렸지만, 모든 것이 끊어졌고 모든 것이 그들을 배신했다. 그들의 가장 위험한 적인 독일 자신이 일정한 조건 아래 원조를 제안하는데, 그들이 어찌 거절하겠는가?

아마 그 일로 그들을 배신자라고 비난할 슬라브주의자들이 나올 것이다. 무엇을 배신했다는 말인가? 슬라브 연합, 슬라브의 대의를? 그런데 그 연합이 무엇으로 드러났으며, 그 대의란 무엇인가? 팔라츠키 씨와 리게르 씨가 모스크바의 범슬라브 전시회에 가서 차르에게 절하고 온 것으로 드러나지 않았는가? 슬라브인들이 슬라브인으로서 폴란드인들에게 형제적 공감을 언제, 무엇으로, 구체적으로 어떤 행동으로 표현했는가? 바로 그 팔라츠키 씨와 리게르 씨와 그들을 따르는 수많은 서슬라브·남슬라브 수행원들이 바르샤바에서 폴란드인의 피를 간신히 씻어 낸 러시아 장군들과 입을 맞추고 슬라브 형제애와 사형집행인 차르의 건강을 위해 건배한 것으로가 아닌가?

폴란드인은 순교자이자 영웅이며, 그들의 과거에는 위대한 영광이 있다. 반면 슬라브인은 아직 어린아이이며, 그들의 의의는 모두 미래에 있다. 슬라브 세계, 슬라브 문제는 현실이 아니라 희망이며, 그 희망은 오직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실현될 수 있다. 그런데 폴란드인들은, 물론 대부분 교육받은 신분, 주로 슐라흐타에 속하는 애국자들을 두고 하는 말이지만, 지금까지 이 혁명에 별다른 의욕을 보이지 않았다.

아직 존재하지 않는 슬라브 세계와 이미 얼마간 수명을 다한 폴란드 애국주의 세계 사이에 무슨 공통점이 있을 수 있겠는가? 실제로 폴란드 정신으로, 폴란드의 토대 위에서 슬라브 문제를 만들어 내려 애쓰는 극소수의 인물을 빼면, 폴란드인들은 대체로 이 문제에 조금도 관심이 없다. 그들에게는 마자르인이 훨씬 더 이해하기 쉽고 가깝다. 마자르인과는 얼마간 닮은 점도 있고 공통의 역사적 기억도 많다. 반면 폴란드인들을 남슬라브인과 서슬라브인에게서 갈라놓는 것은 무엇보다, 결정적이라고 할 만큼, 그 인민들이 러시아, 곧 폴란드인들 자신이 적들 가운데 가장 증오하는 적에게 품는 호감이다.

폴란드와 폴란드 망명자 사회에서도 모든 나라에서처럼 정치 세계가 한때 여러 정파로 나뉘어 있었다. 귀족적·성직자적·입헌군주적 당이 있었고, 군사독재파가 있었고, 미국을 숭배하는 온건 공화파가 있었고, 프랑스를 본뜬 적색 공화파가 있었으며, 신비주의적 분파, 더 정확히는 교회 정파는 말할 것도 없고, 마지막으로 수는 적지만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당까지 있었다. 그러나 사실은 그 하나하나를 조금만 깊이 들여다보면 바탕이 모두 같다는 것을 확인할 수 있었다. 모두가 1772년 국경의 폴란드 국가를 복원하려는 열렬한 열망을 품고 있었다. 정파 지도자들 사이의 다툼에서 생긴 상호 대립을 빼면, 그들의 주된 차이는 각 정파가 이 공통의 목표, 곧 옛 폴란드의 복원이 오직 자기가 특별히 권하는 길로만 이루어질 수 있다고 확신한다는 데 있었다.

1850년까지는 폴란드 망명자의 압도적 다수가 혁명적이었다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바로 다수가 유럽에서 혁명이 승리하면 독립 폴란드의 복원이 반드시 뒤따르리라고 확신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실제로 1848년 전 유럽에서 폴란드인들이 참여하지 않은, 아니 흔히 앞장서지 않은 운동은 하나도 없었다고 할 수 있다. 작센의 어느 독일인이 이 점에 대해 놀라움을 이렇게 표현했던 것이 기억난다. 소동이 있는 곳이면 어김없이 폴란드인이 있다!

1850년에는 곳곳에서 패배한 결과 혁명에 대한 이 믿음이 무너지고 나폴레옹의 별이 떠올랐으며, 수많은, 정말 수많은 폴란드 망명자들, 그 압도적 다수가 노골적이고 지독한 보나파르트주의자가 되었다. 맙소사, 그들이 나폴레옹 3세의 도움에서 무엇인들 기대하고 바라지 않았던가! 1862~63년 그의 노골적이고 비열한 배신조차 그들 안의 이 믿음을 죽이지 못했다. 그 믿음은 스당에서야 끝났다.

이 파국 뒤 폴란드의 희망에 남은 피난처는 예수회적·교황지상주의적 피난처 하나뿐이었다. 오스트리아의 애국자들과 폴란드 애국자의 대다수가 갈리치아로, 절망에 차서 몰려갔다. 그런데 상상해 보라. 그들의 철천지원수인 비스마르크가 독일의 처지에 떠밀려 그들을 러시아에 맞선 봉기로 부른다면, 먼 희망을 보여 주는 정도가 아니라 돈과 무기와 군사 원조를 준다면 어떻겠는가. 그들이 이것을 거절할 수 있겠는가?

물론 이 원조의 대가로 그들은 지금 프로이센이 차지하고 있는 옛 폴란드 영토 대부분을 공식적으로 포기하라는 요구를 받을 것이다. 이것은 그들에게 무척 쓰라릴 것이다. 그러나 사정에 떠밀리고 러시아에 대한 확실한 승리를 내다보며, 결국 폴란드를 되살리기만 하면 그 뒤에 자기 것을 되찾을 수 있으리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달래면서, 그들은 의심할 바 없이 모든 것을 일으켜 세울 것이고, 자기 관점에서는 만 번이라도 옳을 것이다.

물론 독일 군대의 도움으로, 비스마르크 공의 보호 아래 되살아나는 폴란드는 기이한 폴란드일 것이다. 그러나 아무 폴란드도 없는 것보다는 기이한 폴란드라도 낫다. 게다가 나중에는 비스마르크 공의 보호에서도 벗어날 수 있으리라고 폴란드인들은 틀림없이 생각할 것이다.

한마디로 폴란드인들은 무엇에든 동의할 것이고, 폴란드가 일어서고 리투아니아가 일어서며, 조금 뒤에는 소러시아도 일어설 것이다. 폴란드 애국자들은 사실 형편없는 사회주의자들이어서, 자기 나라에서는 혁명적 사회주의 선전에 나서지 않을 것이다. 설령 나서고 싶어 해도 보호자 비스마르크 공이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 독일과 너무 가깝다. 자칫하면 그런 선전이 프로이센령 폴란드에까지 스며들 수 있다. 그러나 폴란드에서 할 수 없는 일을 러시아에서, 러시아에 맞서서는 할 수 있을 것이다. 러시아에서 농민 반란을 일으키는 것은 독일인에게도 폴란드인에게도 지극히 이로울 것이며, 일으키기도 사실 어렵지 않을 것이다. 지금 얼마나 많은 폴란드인과 독일인이 러시아 곳곳에 흩어져 있는지 생각해 보라. 전부는 아니더라도 대다수가 비스마르크와 폴란드인들의 자연스러운 동맹자가 될 것이다. 이런 상황을 상상해 보라. 완패한 우리 군대가 달아나고, 그 뒤를 쫓아 북쪽에서는 독일인들이 페테르부르크로, 서쪽과 남쪽에서는 폴란드인들이 스몰렌스크와 소러시아로 진군한다 — 그리고 바로 그때 러시아와 소러시아에서는 안팎의 선전에 고무된 전면적이고 기세등등한 농민 반란이 일어난다.

그렇기 때문에 어떤 정부도, 어떤 러시아 차르도, 미치광이가 아닌 한 범슬라브주의의 깃발을 들지 않을 것이며 결코 독일과 전쟁을 벌이지 않으리라고 단언할 수 있다.

먼저 오스트리아를, 다음에 프랑스를 결정적으로 격파한 새롭고 위대한 독일 제국은 이 두 나라뿐 아니라 나중에는 우리 전러시아 제국까지 돌이킬 수 없이 2류 국가, 자기에게 종속된 국가의 지위로 끌어내릴 것이다. 독일 제국은 전러시아 제국을 이미 유럽에서 영원히 떼어 놓았다. 물론 우리는 제국을 말하는 것이지 러시아 인민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러시아 인민은 필요할 때면 어디서든 길을 찾아내거나 뚫어 낼 것이다.

그러나 전러시아 제국에게 유럽의 문은 이제부터 닫혀 있다. 그 문의 열쇠는 비스마르크 공이 쥐고 있으며, 그는 세상없어도 그것을 고르차코프 공에게 넘겨주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북서쪽의 문이 제국에게 영원히 닫혀 있다면, 남쪽과 남동쪽의 문, 곧 부하라, 페르시아, 아프가니스탄을 거쳐 동인도까지, 그리고 마침내 모든 계획과 열망의 최종 목표인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문은 열려 있지 않겠는가, 어쩌면 더욱 확실하고 넓게? 우리 사랑하는 제국의 위대함과 영광을 열렬히 받드는 러시아 정치가들은 오래전부터 수도를, 그리고 그와 함께 제국의 모든 힘과 모든 삶의 중심을 북쪽에서 남쪽으로, 발트해의 혹독한 해안에서 늘 꽃이 피는 흑해와 지중해의 해안으로, 한마디로 페테르부르크에서 콘스탄티노플로 옮기는 것이 낫지 않은지를 논의해 왔다.

물론 너무나 탐욕스러워서 페테르부르크와 발트해의 패권을 지키면서 동시에 콘스탄티노플도 차지하고 싶어 하는 애국자들도 있다. 그러나 이 바람은 도무지 이루어질 수 없는 것이어서, 전러시아 제국의 전능을 굳게 믿는 그들조차 그 실현에 대한 희망을 버리기 시작하고 있다. 게다가 지난 한 해 동안 그들의 눈을 뜨게 했어야 할 사건이 하나 일어났다.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하노버가 프로이센 왕국에 병합되어, 그로써 프로이센 왕국이 곧바로 북방의 해양 강국이 된 일이다.

광대한 해안 국경을 지니지 못한 국가는 어떤 나라도 일류 열강의 반열에 들 수 없다는 것은 누구나 아는 공리다. 해안 국경은 그 나라를 온 세계와 직접 이어 주고, 물질적인 면에서든 사회적·정치도덕적인 면에서든 세계의 움직임에 직접 참여하게 해 준다. 이 진리는 너무나 명백해서 증명할 필요도 없다. 가장 강력하고 교양 있으며 가장 행복한 — 국가 안에서 모두의 행복이 가능한 만큼 — 국가를 가정하고, 어떤 사정 때문에 그 나라가 나머지 세계에서 고립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오십 년, 곧 두 세대만 지나면 그 나라의 모든 것이 정체에 빠지리라고 장담할 수 있다. 힘은 약해지고, 교양은 우둔함에 가까워지며, 행복에서는 림부르크 치즈 냄새가 날 것이다.

중국을 보라. 중국은 총명했고 학식도 있었으며 아마 나름대로 행복하기도 했을 것이다. 그런데 어째서 그렇게 무기력해져서, 유럽의 해양 열강들이 아주 작은 힘만 들여도 중국을 자기들의 지혜에, 자기들의 지배에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자기들의 뜻에 복종시킬 수 있게 되었는가? 여러 세기 동안 정체에 머물렀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렇게 머문 것은 그 여러 세기 동안 한편으로는 자기의 내부 제도 때문에, 다른 한편으로는 세계 생활의 흐름이 너무 먼 곳에서 진행되어 오랫동안 중국에 닿을 수 없었기 때문이다.

국가 안에 갇힌 인민이 세계의 움직임에 참여하려면 여러 조건이 필요하다. 타고난 지혜와 활력, 교양, 생산적 노동 능력, 그리고 가장 폭넓은 내적 자유가 그것이다. 물론 이 자유는 국가 안의 대중에게는 도무지 불가능한 것이지만. 그러나 이 조건들에는 해상 항행과 해상 무역도 반드시 포함된다. 해상 교통은 상대적으로 값싸고 빠르며, 바다가 누구의 소유도 아니라는 의미에서 자유롭기도 하여, 물론 철도까지 포함해 더 잘 알려진 다른 모든 교통을 능가하기 때문이다. 어쩌면 언젠가는 공중 항행이 모든 면에서 더 편리한 것으로 드러나 특히 중요해지고, 마침내 모든 나라의 발전과 생활 조건을 평등하게 만들지도 모른다. 그러나 지금으로서는 그것을 진지한 수단으로 말할 수 없으며, 여전히 바다 항행이 인민들의 번영을 위한 주된 수단으로 남아 있다.

국가들이 더는 존재하지 않을 때가 올 것이다 — 유럽 사회혁명파의 모든 노력은 국가들의 파괴를 향하고 있다 — 정치적 국가들의 폐허 위에 자유로운 생산 협동조합과 공동체와 지역 연방들의 자유로운 형제적 연합이 완전히 자유롭게, 아래로부터 위로 조직되면서 세워질 때가 올 것이다. 그 연합은 모든 언어와 민족성의 사람들을 자유롭기에 차별 없이 품는다. 그때에는 바다로 가는 길이 모두에게 똑같이 열릴 것이다. 해안 주민에게는 직접, 바다에서 멀리 사는 사람들에게는 온갖 국가적 보살핌과 징수와 관세와 제한과 트집과 금지와 허가와 적용에서 완전히 해방된 철도를 통해. 그러나 그때에도 해안 주민들은 물질적일 뿐 아니라 지적·도덕적이기도 한 수많은 자연적 이점을 누릴 것이다. 세계 시장, 그리고 대체로 세계적인 삶의 움직임과 직접 맞닿는 것은 사람을 엄청나게 발전시킨다. 관계를 아무리 평등하게 만들어도 이런 이점을 누리지 못하는 내륙 주민들은 해안 주민들보다 더 굼뜨고 더디게 살고 발전할 것이다.

그래서 공중 항행이 그토록 중요해질 것이다. 대기는 어디에나 스며드는 대양이며, 그 해안은 어디에나 있다. 따라서 대기에 대해서는 모든 사람이, 가장 외딴 벽지에 사는 사람까지 예외 없이 모두 해안 주민이다. 그러나 공중 항행이 바다 항행을 대신하기 전까지는 해안 주민들이 모든 면에서 앞서 나가며 인류 가운데 일종의 귀족을 이룰 것이다.

모든 역사, 무엇보다 역사에서 이루어진 진보의 대부분은 해안 인민들이 이룩했다. 모든 문명의 창조자인 최초의 인민은 그리스인들이다 — 그런데 그리스 전체가 해안에 지나지 않는다고 할 수 있다. 고대 로마는 해양 국가가 된 뒤에야 비로소 강력한 세계 국가가 되었다. 그리고 근대사에서 정치적 자유, 사회생활, 상업, 예술, 과학, 자유로운 사상의 부활, 한마디로 인류의 재생은 누구 덕분인가? 그리스처럼 거의 전체가 해안인 이탈리아 덕분이다. 이탈리아 다음으로 세계의 움직임에서 앞선 자리를 누가 물려받았는가? 네덜란드, 영국, 프랑스, 그리고 마지막으로 미국이다.

이번에는 반대로 독일을 보자. 독일의 인민들은 의심할 바 없는 많은 자질, 이를테면 대단한 근면, 사유와 학문의 능력, 위대한 예술가와 화가와 시인을 낳은 미적 감각, 그에 못지않게 위대한 철학자들을 낳은 심오한 초월주의를 타고났다. 그런데도, 우리는 묻거니와, 왜 독일은 관료적·경찰적·군사적 국가 질서의 발전이라는, 모두를 앞지른 단 하나의 점을 빼고는 다른 모든 면에서 프랑스와 영국에 그토록 크게 뒤처졌는가, 왜 상업에서는 아직도 네덜란드보다, 공업에서는 벨기에보다 아래에 있는가.

독일에는 자유도, 자유에 대한 사랑도, 자유에 대한 요구도 없었기 때문이라고 말할 것이다. 이것은 어느 정도 맞지만 유일한 원인은 아니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또 다른 원인은 넓은 해안이 없다는 것이다. 13세기, 바로 한자가 생겨나던 시기만 해도 독일은 적어도 서쪽에서는 해안이 모자라지 않았다. 네덜란드와 벨기에가 아직 독일에 속해 있었고, 바로 이 세기에 독일의 상업은 꽤 폭넓게 발전할 듯이 보였다. 그러나 이미 14세기부터 네덜란드 도시들은 진취적이고 대담한 기질과 자유에 대한 사랑에 이끌려 눈에 띄게 독일에서 떨어져 나가고 독일을 멀리하기 시작했다. 16세기에 이 분리는 완결되었고, 로마 제국의 굼뜬 상속자인 대제국은 거의 완전한 내륙 국가가 되고 말았다. 네덜란드와 덴마크 사이에 바다로 난 좁은 환기창 하나만 남았는데, 그렇게 거대한 나라가 자유롭게 숨 쉬기에는 턱없이 모자랐다. 그 결과 독일에는 중국의 정체와 아주 닮은 졸음이 덮쳤다.

그때부터 새롭고 강력한 국가를 세운다는 의미에서 독일의 모든 정치적 선진 운동은 작은 브란덴부르크 선제후국에 모였다. 실제로 브란덴부르크 선제후들은 발트해 연안을 차지하려는 끊임없는 노력으로 독일에 적잖은 공을 세웠고, 오늘날 독일이 누리는 위대함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할 수 있다. 그들은 먼저 쾨니히스베르크를 차지했고, 다음에 제1차 폴란드 분할 때 단치히를 손에 넣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으로는 모자랐다. 킬을, 나아가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 전체를 차지해야 했다.

이 새로운 정복은 독일 전체의 갈채 속에 프로이센이 이루었다. 북부든 남부든, 서부든 동부든 중부든, 어느 개별 국가적 조국의 독일인이든 할 것 없이 1848년 이래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의 전개를 얼마나 열렬히 지켜보았는지 우리는 모두 목격했다. 이 열정을 덴마크 전제정 아래에서 숨이 막힌다는 친형제 독일인들에 대한 연민으로 해석한 사람들은 크게 잘못 생각한 것이다. 여기에는 전혀 다른 이해관계가 있었다. 국가적·범게르만적 이해관계, 해안 국경과 해상 교통로를 손에 넣고 강력한 독일 함대를 만들려는 이해관계였다. 독일 함대 문제는 이미 1840년이나 1841년에 제기되었고, 우리는 헤르베크의 시 「독일 함대」가 독일 전체에서 얼마나 열광적으로 환영받았는지 기억한다.

다시 한번 되풀이하거니와 독일인은 지극히 국가적인 인민이며, 이 국가성이 그들 안에서 다른 모든 정념을 압도하고 자유의 본능을 단호히 짓누른다. 그러나 바로 이 국가성이 현재 그들의 특별한 위대함을 이룬다. 그것은 베를린 군주의 모든 야심 찬 계획에 변함없고 곧은 받침대가 되어 주고 있으며, 앞으로도 얼마 동안은 그럴 것이다. 비스마르크 공은 이 국가성을 든든히 딛고 서 있다.

독일인은 학식 있는 인민이며, 견고한 해안 국경 없이는 위대한 국가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역사적·민족지적·지리적 진실을 거슬러, 트리에스테는 독일 도시였고 지금도 그러하며 앞으로도 그러하리라고, 도나우강 전체가 독일의 강이라고 지금도 주장한다. 그들은 바다를 향해 돌진한다. 그리고 사회혁명이 그들을 멈춰 세우지 않는다면, 20년, 10년, 어쩌면 그보다 짧은 시간이 지나기 전에 — 지금은 사건들이 그토록 빠르게 잇따른다 — 머지않아 그들이 독일 땅 덴마크 전체, 독일 땅 네덜란드 전체, 독일 땅 벨기에 전체를 정복하리라고 우리는 확신할 수 있다. 이 모든 것은 말하자면 그들의 정치적 처지와 본능적 열망의 자연스러운 논리 속에 놓여 있다.

이 길에서 한 단계는 이미 지나왔다.

독일의 현 화신이며 머리이자 동시에 두 팔인 프로이센은 발트해에, 그리고 그와 함께 북해에도 굳건히 자리를 잡았다. 브레멘, 함부르크, 뤼베크, 메클렌부르크, 올덴부르크의 독립은 공허하고 무해한 농담이다. 이 모든 것이 홀슈타인, 슐레스비히, 하노버와 함께 프로이센에 편입되었고, 프랑스 돈으로 부유해진 프로이센은 강력한 함대 두 개를 건조하고 있다. 하나는 발트해에, 다른 하나는 북해에. 그리고 두 바다를 잇기 위해 지금 파고 있는 운하 덕분에 이 두 함대는 곧 하나의 함대가 될 것이다. 이미 덴마크 함대도 스웨덴 함대도 능가하는 이 함대가 러시아 발트 함대보다 훨씬 강해지기까지는 그리 여러 해를 기다릴 필요도 없을 것이다. 그러면 발트해에서 러시아가 누리던 우위는… 발트해 속으로 가라앉으리라. 리가여 안녕, 레벨이여 안녕, 핀란드여 안녕, 그리고 난공불락의 크론시타트와 함께 페테르부르크여 안녕!

전러시아의 힘을 과대평가하는 데 익숙한 크바스 애국자들에게는 이 모든 것이 헛소리, 악의적인 동화로 보이겠지만, 사실 이것은 이미 실현된 사실들에서 끌어낸, 독일인과 러시아인의 성격과 능력을 공정하게 평가한 데 근거한 완전히 정확한 결론일 뿐이다. 재정 수단이나, 성실하고 헌신적이며 유능한 온갖 관리가 양쪽에 얼마나 있는지는 말할 것도 없고, 독일의 모든 사업에 러시아의 사업보다 결정적인 우위를 안겨 주는 학문도 말할 것도 없다.

독일의 국가 공무는 보기 흉하고 불쾌한, 말하자면 역겨운 결과를 낳지만, 그 대신 확실하고 착실한 결과를 낳는다.

러시아의 국가 공무도 똑같이 불쾌하고 보기 흉한 결과를 낳는데, 형식은 흔히 한층 더 야만적이고 그러면서 내용은 공허하다. 예를 하나 들자. 독일과 러시아에서 정부가 동시에 어떤 일, 가령 새 배 한 척을 짓는 데 같은 액수, 가령 100만을 배정했다고 하자. 그러면 독일에서는 얼마를 훔칠 것 같은가? 아마 10만, 많이 잡아 20만쯤 훔치겠지만, 그 대신 80만은 곧바로 그 일에 쓰일 것이고, 일은 독일인 특유의 꼼꼼함과 지식으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러면 러시아에서는? 러시아에서는 우선 절반을 훔쳐 가고, 4분의 1은 태만과 무지로 사라진다. 그래서 남은 4분의 1로 기껏해야 무언가 썩은 것, 보여 주기에는 쓸 만하지만 실제 일에는 쓸모없는 것을 날림으로 만들어 낼 것이다.

그렇다면 왜 러시아 함대는 독일 함대에 맞서 버틸 수 있으며, 러시아의 해안 요새, 가령 크론시타트는 주철 포탄뿐 아니라 금 포탄까지 던질 줄 아는 독일인의 사격을 견뎌 낼 수 있는가?

발트해의 지배여, 안녕! 핀란드의 늪지 위에 표트르가 세운 북쪽 수도의 모든 정치적 의의와 힘이여, 안녕! 우리의 원로 대재상 고르차코프 공이 아주 노망이 든 것이 아니라면, 우리의 동맹국 프로이센이 똑같이 우리의 동맹국인 덴마크를 아무 벌도 받지 않고, 마치 우리의 동의라도 얻은 듯이 약탈하던 그 무렵에 스스로 이렇게 말했어야 했다. 그는 깨달았어야 했다. 프로이센이 이제 온 독일을 등에 업고 독일과 불가분의 일체를 이루어 가장 강력한 대륙 국가가 된 그날부터, 한마디로 프로이센의 왕홀 아래 세워진 새 독일 제국이 발트해에서 다른 모든 발트해 연안국에 그토록 위협적인 현재의 위치를 차지한 그때부터, 이 바다에서 페테르부르크 러시아의 우위는 끝장났고, 표트르의 위대한 정치적 창조물이 파괴되었으며, 그와 함께 전러시아 국가의 힘 자체도 파괴되었다는 것을. 북쪽에서 자유로운 해로를 잃은 보상으로 남쪽에서 새로운 길이 열리지 않는다면 말이다.

발트해에서는 이제 독일인이 지배하게 될 것이 분명하다. 물론 이 바다로 들어가는 입구는 아직 덴마크의 손에 있다. 그러나 이 가엾은 작은 나라에는 이제, 처음에는 아마 자유로운 연방의 일원이 되었다가 곧이어 범게르만 국가 중앙집권에 완전히 삼켜지는 것 말고는 다른 선택이 거의 남아 있지 않다는 것을 누가 모르겠는가. 이것은 곧 발트해가 아주 짧은 시간 안에 오로지 독일의 바다가 되고, 페테르부르크는 모든 정치적 의의를 잃게 되리라는 뜻이다.

고르차코프 공은 덴마크 왕국의 분할과 홀슈타인 및 슐레스비히의 프로이센 병합에 동의할 때 이것을 알고 있었어야 했다. 그리고 사태의 힘 자체가 우리를 다음과 같은 양자택일 앞에 세운다. 그가 러시아를 배신했거나, 아니면 그가 내준 북서쪽에서의 전러시아 국가의 우위를 대가로 남동쪽에서 새로운 강대함을 정복하는 데 러시아를 돕겠다는 공식적 약속을 비스마르크 공에게서 받아 두었거나.

우리에게는 그러한 문서가, 즉 파리 강화 직후 거의 곧바로, 또는 적어도 1863년 폴란드 봉기 때 러시아와 프로이센 사이에 맺어진 공수 동맹이 존재한다는 것이 의심할 여지가 없다. 그 무렵 프로이센을 뺀 거의 모든 유럽 열강이 프랑스와 영국의 본보기에 이끌려 전러시아의 야만에 공공연하고 공식적으로 항의했다. 거듭 말하지만, 우리에게 프로이센과 러시아 사이의 공식적이고 양측을 똑같이 구속하는 합의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오직 그러한 동맹만이, 비스마르크가 프랑스가 개입할 위험을 안고서 오스트리아와 독일 대부분을 상대로 전쟁을 벌이고, 그보다 더 결정적인 전쟁을 프랑스를 상대로 벌일 때 보인 그 평온한, 말하자면 태평한 자신감을 설명할 수 있다. 러시아 쪽에서 조금만 적대적인 시위를 했어도, 예컨대 러시아 군대가 프로이센 국경 쪽으로 움직이기만 했어도, 두 전쟁 모두에서, 특히 마지막 전쟁에서 승리한 프로이센 군대의 진격을 멈추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상기해 보자. 마지막 전쟁 말기에 독일 전체, 특히 북부는 군대가 완전히 빠져나가 텅 비어 있었다. 오스트리아가 프랑스를 위해 개입하지 않은 이유는 단 하나, 오스트리아가 군대를 움직이면 자기도 그에 맞서 군대를 움직이겠다는 러시아의 선언뿐이었다. 이탈리아와 영국이 개입하지 않은 것도 오직 러시아가 그것을 원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러시아가 프로이센-독일 황제의 그토록 단호한 동맹국으로 나서지 않았다면, 독일인들은 결코 파리를 점령하지 못했을 것이다.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러시아가 자기를 배신하지 않으리라고 분명히 확신하고 있었다. 이 확신은 무엇에 근거했는가? 설마 두 황제의 친족 관계와 개인적 우정에?

그러나 비스마르크는 정치에서 감정에 기대기에는 너무나 영리하고 노련한 사람이다. 설령 모두가 알다시피 감상적인 마음을 타고나 아주 쉽게 눈물을 흘리는 우리 황제가 차르의 술자리에서 여러 번 털어놓은 그런 감정에 휩쓸릴 수 있었다 하더라도, 그를 둘러싼 정부 전체, 궁정, 독일인을 미워한다는 황태자, 그리고 마지막으로 우리의 원로 국가 애국자 고르차코프 공이 모두 함께, 그리고 여론과 사태의 힘 자체가, 국가는 감정이 아니라 이해관계에 따라 움직인다는 것을 그에게 일깨웠을 것이다.

비스마르크가 러시아와 프로이센의 이해관계가 같다고 계산할 수는 없었다. 그런 일치는 없으며 있을 수도 없다. 그것은 단 한 가지, 곧 폴란드 문제에서만 존재한다. 그런데 이 문제는 오래전에 해결되었고, 그 밖의 모든 면에서는 자기 곁에 거대하고 강력한 전독일 제국이 생겨나는 것만큼 전러시아 국가의 이해관계에 어긋나는 일은 있을 수 없다. 두 거대 제국이 나란히 존재하면 전쟁이 일어나기 마련이고, 그 전쟁은 둘 중 하나의 파멸로밖에 끝날 수 없다.

이 전쟁은, 거듭 말하지만, 피할 수 없다. 그러나 두 제국이 아직 안으로 충분히 다져지지 않았고, 서로를 상대로 결전을, 생사를 건 투쟁을 시작할 만큼 충분히 커지지 않았다고 자각한다면 전쟁은 미뤄질 수 있다. 그럴 때 두 제국은 서로를 미워하면서도 계속 서로를 떠받치고 서로 도움을 주고받으며, 저마다 이 마지못한 동맹을 상대보다 더 잘 이용해 다가올 불가피한 투쟁을 위한 힘과 수단을 더 많이 얻으리라고 기대한다 — 러시아와 프로이센 독일의 상호 처지가 바로 이러하다.

독일 제국은 안으로도 밖으로도 아직 한참 다져지지 않았다. 안으로는 자립적인 여러 중소 국가가 기묘하게 결합한 모습이다. 물론 이 나라들은 소멸할 운명이지만 아직 소멸하지 않았고, 눈에 띄게 사라져 가는 자기 자립의 잔재를 어떻게 해서든 지키려 애쓰고 있다. 밖으로는 굴욕을 당했으나 아직 완전히 꺾이지는 않은 오스트리아와, 패배했고 바로 그 때문에 화해할 수 없는 프랑스가 새 제국을 노려보고 있다. 게다가 신독일 제국은 아직 국경을 충분히 다듬지 못했다. 군사 국가 특유의 내적 필연에 따라 독일 제국은 새로운 영토 획득, 새로운 전쟁을 꾀한다. 중세 제국을 원래의 국경대로 복원하는 것을 목표로 삼은 독일 제국은, 독일 사회 전체를 사로잡은 범게르만 애국심에 이끌려 이 목표를 향해 흔들림 없이 나아가며, 헝가리를 뺀 오스트리아 전체를(트리에스테는 결코 빼지 않지만 보헤미아는 빼고), 독일계 스위스 전체, 벨기에 일부, 그리고 해상 강국의 기초를 놓는 데 필요한 네덜란드 전체와 덴마크 전체를 병합할 꿈을 꾼다 — 거대한 계획이다. 이를 실현하려 들면 서유럽과 남유럽의 상당 부분이 독일에 맞서 들고일어날 것이므로, 러시아의 동의 없이는 결코 실현할 수 없다. 그러므로 신독일 제국에는 아직 러시아 동맹이 필요하다.

전러시아 제국 쪽에서도 프로이센-독일 동맹 없이는 지낼 수 없다. 북서쪽에서 모든 새로운 영토 획득과 확장을 포기한 전러시아 제국은 남동쪽으로 나아가야 한다. 발트해의 우위를 프로이센에 넘겨준 이상, 흑해에서 자기 세력을 쟁취해 굳혀야 한다. 그러지 않으면 유럽에서 차단될 것이다. 그러나 흑해에서의 지배가 실제로 유효하고 유용하려면 콘스탄티노플을 차지해야 한다. 콘스탄티노플이 없으면 지중해로 나가는 입구가 언제든 막힐 수 있을 뿐 아니라, 크림 전쟁 때 실제로 그랬듯이 흑해로 들어오는 입구 자체가 늘 적의 함대와 군대에 열려 있을 것이다.

따라서 우리 국가의 정복 정책이 그 어느 때보다도 추구하는 유일한 목표는 콘스탄티노플이다. 이 목표의 실현은 물론 프랑스를 포함한 남유럽 전체의 이익에 어긋나고, 영국의 이익에도, 독일의 이익에도 어긋난다. 흑해를 러시아가 무제한으로 지배하면 도나우 연안 전체가 러시아에 직접 예속되기 때문이다.

그럼에도 서쪽에서 정복 계획을 실행하려면 러시아 동맹에 기댈 수밖에 없는 프로이센이 러시아의 남동쪽 정책을 돕기로 공식적으로 약속했다는 점은 의심할 수 없다. 마찬가지로 프로이센이 첫 기회를 잡아 그 약속을 저버리리라는 점도 의심할 수 없다.

지금, 조약 이행이 막 시작된 마당에 그런 조약 위반을 예상할 수는 없다. 우리는 러시아를 옥죄던 파리 조약의 조건들을 폐기하는 문제에서 프로이센-독일 제국이 전러시아 제국을 얼마나 열렬히 지지했는지 보았다. 히바 문제에서도 똑같이 열렬히 계속 지지하고 있음이 틀림없다. 게다가 러시아인들이 될 수 있는 한 동쪽 깊숙이 들어가 버리는 것은 독일인들에게 이롭다.

그런데 무엇이 러시아 정부를 히바 원정에 나서게 했는가? 정부가 러시아 상인층과 러시아 상업의 이익을 지키려고 원정에 나섰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만약 그렇다면, 정부는 왜 러시아 안에서 자기 자신을 상대로는 그런 원정에 나서지 않느냐고 물을 수 있을 것이다. 이를테면 모스크바 총독을, 그리고 널리 알려졌듯 더없이 뻔뻔한 방식과 온갖 수단으로 러시아 상업과 러시아 상인들을 억누르고 약탈하는 총독과 시장들 일반을 상대로 말이다.

그렇다면 모래 사막을 정복해서 우리 국가가 얻을 이익이 무엇이겠는가? 어떤 이들은 아마 우리 정부가 서구의 문명을 동방에 전한다는 러시아의 위대한 사명을 수행하려고 이 원정에 나섰다고 대답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설명은 학술 연설이나 공식 연설, 그리고 언제나 고상한 헛소리로 가득 차 있고 실제로 행해지는 것, 실제로 있는 것과는 늘 정반대를 말하는 교조적인 책과 소책자와 잡지에나 어울릴 것이다. 우리는 그것으로 만족할 수 없다. 러시아의 문명 전파 사명을 자각하고 그에 따라 사업과 행동을 이끌어 가는 페테르부르크 정부를 상상해 보라! 우리 통치자들의 본성과 동기를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이라면 그런 상상만으로도 웃다가 숨이 넘어갈 지경일 것이다.

인도로 가는 새로운 무역로를 연다는 이야기도 하지 않겠다. 무역 정책은 영국의 정책이며, 러시아의 정책이었던 적은 한 번도 없다. 러시아 국가는 무엇보다도, 아니 오로지라고 해도 좋을 만큼 군사 국가다. 그 안에서는 모든 것이 모든 것을 유린하는 권력의 위력이라는 단 하나의 이해관계에 종속되어 있다. 군주, 국가, 이것이 주된 것이다. 나머지 모든 것은 — 인민도, 심지어 신분적 이해관계도, 산업과 상업과 이른바 문명의 번영도 — 이 단 하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한 수단일 뿐이다. 어느 정도의 문명 없이는, 산업과 상업 없이는 어떤 국가도, 특히 근대 국가는 존재할 수 없다. 이른바 민족의 부, 인민의 부와는 거리가 먼 특권 신분의 부가 곧 힘이기 때문이다. 러시아에서는 그 부가 모두 국가에 흡수되고, 국가는 다시 군인·문관·성직자로 이루어진 거대한 국가 계급을 먹여 살린다. 관청 곳곳에 만연한 도둑질, 국고 횡령, 인민 수탈이야말로 러시아 국가 문명의 가장 확실한 표현이다.

그러므로 러시아 정부를 히바 원정에 나서게 한 다른, 더 주된 원인들 가운데 이른바 상업적 원인도 있었다는 것은 조금도 이상하지 않다. 날로 불어나는 관가 무리, 우리가 보기에는 우리 상인층까지 포함되는 그 무리에게 새로운 활동 무대를 열어 주고, 약탈할 새 지역을 내주어야 했던 것이다. 그러나 이 방면에서 국가의 부와 힘이 크게 늘어나기를 기대할 수는 없다. 오히려 재정 면에서 이 사업은 이익보다 훨씬 더 많은 손실을 가져오리라고 확신할 수 있다.

그렇다면 왜 히바로 갔는가? 군대에 할 일을 주려고? 수십 년 동안 카프카스는 군사 학교 구실을 했지만 이제 카프카스는 평정되었다. 그래서 새 학교를 열 필요가 있었고, 그리하여 히바 원정을 궁리해 낸 것이다. 이런 설명도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러시아 정부가 지극히 무능하고 어리석다고 가정하더라도 마찬가지다. 우리 군대가 히바 사막에서 얻은 경험은 서방과의 전쟁에는 전혀 적용할 수 없고, 다른 한편으로 그 대가는 너무나 비싸서 얻은 이익이 지출과 비용의 규모에 도저히 비할 수 없다.

그런데 혹시 러시아 정부가 진심으로 인도 정복을 꾀한 것은 아닐까? 우리는 페테르부르크 통치자들의 지혜를 지나치게 믿는 잘못을 범하지는 않지만, 그래도 정부가 그런 터무니없는 목표를 세웠다고는 생각할 수 없다. 인도를 정복한다고! 누구를 위해, 무엇 때문에, 무슨 수단으로? 그러자면 러시아 인구의 절반까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4분의 1을 동쪽으로 옮겨야 할 것이다. 그리고 왜 하필 인도인가? 인도에 이르려면 먼저 호전적이고 수가 많은 아프가니스탄 종족을 굴복시키는 수밖에 없다. 그런데 영국인이 무장시키고 일부는 훈련까지 시킨 아프가니스탄을 정복하는 것은 히바를 제압하는 것보다 적어도 서너 배는 더 어려울 것이다.

정복할 작정이라면 왜 중국부터 시작하지 않는가? 중국은 매우 부유하고 모든 면에서 인도보다 우리에게 접근하기 쉽다. 중국과 러시아 사이에는 아무것도, 아무도 없기 때문이다. 할 수 있다면 가서 차지하라.

그렇다. 중국의 만성병이 된 혼란과 내전을 이용한다면 이 지역에서 정복을 아주 멀리까지 넓힐 수 있을 것이고, 러시아 정부도 그런 종류의 일을 꾀하고 있는 듯하다. 정부는 몽골과 만주를 중국에서 공공연히 떼어 내려고 애쓴다. 어쩌면 어느 날 우리는 러시아 군대가 중국의 서쪽 국경을 침범했다는 소식을 듣게 될지도 모른다. 이는 지극히 위험한 일이며, 고대 로마인이 게르만 민족들에게 거둔 그 이름난 승리들, 잘 알려진 대로 야만적인 게르만 종족들이 로마 제국을 약탈하고 정복하는 것으로 끝난 승리들을 끔찍하리만치 떠올리게 한다.

중국 한 나라에만 해도 어떤 이는 4억, 또 어떤 이는 약 6억의 주민이 있다고 본다. 이들은 제국의 국경 안에서 살기가 눈에 띄게 비좁아지고 있으며, 지금 점점 더 큰 무리를 이루어 거스를 수 없는 흐름을 타고 일부는 오스트레일리아로, 일부는 태평양을 건너 캘리포니아로 이주하고 있다. 다른 무리들은 마침내 북쪽과 북서쪽으로 움직일 수 있다. 그러면? 그러면 눈 깜짝할 사이에 시베리아, 곧 타타르 해협에서 우랄 산맥과 카스피해까지 뻗은 지역 전체가 더는 러시아 땅이 아니게 될 것이다.

생각해 보라. 면적(12,220,000제곱킬로미터)이 프랑스 면적(528,600제곱킬로미터)의 20배가 넘는 이 거대한 지역에 지금까지 주민이 600만 명을 넘지 않으며, 그중 러시아인은 약 260만 명뿐이고 나머지는 모두 타타르계나 핀계 원주민이며, 군대 규모는 보잘것없다. 시베리아 전역을, 중앙아시아의 우리 새 영토까지 뒤덮을 뿐 아니라 우랄을 넘어 볼가강에까지 이를 중국 대중의 침입을 막을 무슨 방도가 있겠는가.

이것이 동방으로부터 거의 불가피하게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이다. 중국 대중을 얕보는 것은 잘못이다. 그들은 그 엄청난 수효만으로도 이미 위협적이다. 지나친 인구 증가 때문에 중국 국경 안에서는 앞으로 살아가기가 거의 불가능해졌으니 위협적이다. 또 상하이나 광둥이나 마이마친에서 유럽 상인들과 거래하는 중국 상인들을 보고 그들을 판단해서는 안 되기에 위협적이다. 중국 내부에는 중국 문명에 훨씬 덜 일그러지고 비할 데 없이 더 정력적인 대중이 살고 있으며, 그들은 게다가 틀림없이 호전적이고, 수만, 수십만 명이 죽어 나가는 끝없는 내전 속에서 군사적 습관에 길들여졌다. 또 최근 그들이 최신 무기의 사용법과 유럽식 규율, 곧 유럽 국가 문명의 이 꽃이자 그 마지막 공식적 결정체를 익히기 시작했다는 점도 짚어 두어야 한다. 이 규율, 새 무기와 새 전술에 대한 지식을 중국 대중의 원시적 야만과, 인간적 항의에 대한 어떤 관념도 자유의 어떤 본능도 없는 상태와, 더없이 노예적인 복종의 습관과 결합시켜 보라. 그런데 바로 지금, 1860년 영국과 프랑스의 지난번 중국 원정 이후 중국에 몰려든 수많은 미국인·유럽인 군사 모험가들의 영향 아래 그것들이 결합되고 있다. 여기에 출구를 찾지 않을 수 없는 인구의 괴물 같은 규모까지 고려해 보라. 그러면 동방으로부터 우리를 위협하는 위험이 얼마나 큰지 알게 될 것이다.

바로 이 위험을 가지고 우리 러시아 정부는 어린아이처럼 순진하게 장난을 치고 있다. 국경을 넓히려는 터무니없는 충동에 떠밀려, 러시아가 인구는 너무 적고 너무 가난하며 너무 무력해서 새로 얻은 아무르 지방에 지금까지 사람을 채우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채우지 못하리라는 점은 고려하지 않는다. 이 지방은 넓이가 210만 제곱킬로미터(프랑스의 거의 네 배)인데, 군대와 함대를 합쳐도 주민이 겨우 6만 5,000명이다. 이처럼 무력하고 러시아 인민 전체가 하나같이 가난에 빠져 있으며, 아버지 같은 통치 덕분에 인민이 모든 면에서 너무나 절망적인 처지에 몰려 더없이 파괴적인 반란 말고는 다른 출구도 구원도 남아 있지 않은데 — 그렇다, 이런 조건에서 러시아 정부는 아시아 동방 전체에 자기 세력을 세우기를 바란다.

조금이라도 성공할 가망을 지니고 더 나아가려면, 정부는 유럽에 등을 돌리고 유럽 문제에 대한 모든 개입을 포기해야 할 뿐 아니라 — 비스마르크 공이 지금 바라는 것이 바로 이것뿐이다 — 자기 군사력 전부를 단호히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로 옮겨, 타메를란이 자기 인민 전체를 이끌고 그랬듯이 동방 정복에 나서야 할 것이다. 그러나 타메를란은 그의 인민이 따랐지만, 러시아 정부는 러시아 인민이 따르지 않을 것이다.

인도로 돌아가자. 아무리 어리석다 해도 러시아 정부가 인도를 정복해 그곳에 자기 세력을 굳히리라는 희망을 품을 수는 없다. 영국은 무엇보다도 자기 무역 회사들을 통해 인도를 정복했다. 우리에게는 그런 회사가 없고, 어딘가에 있다 해도 보여 주기용 꼭두각시 회사일 뿐이다. 영국은 상선과 군함으로 이루어진 거대한 함대를 써서 바닷길로 인도를 엄청나게 착취하거나 인도와 강압적인 무역을 벌인다. 우리에게는 그런 함대가 없고, 우리와 인도 사이에는 바다 대신 끝없는 사막이 가로놓여 있다 — 그러니 인도 정복은 말도 안 된다.

그러나 우리가 정복할 수 없다면, 영국에 맞선 현지인들의 반란을 일으키고 그 반란을 도우며, 필요해지면 군사 개입으로까지 지원함으로써, 인도에서 영국의 지배를 파괴하거나 적어도 크게 흔들어 놓을 수는 있다.

그렇다, 할 수는 있다. 다만 돈도 사람도 넉넉하지 않은 우리가 막대한 인명과 돈을 치러야 할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무엇 때문에 그런 희생을 치르겠는가? 설마 아무 이득도 없이, 오히려 우리 자신에게 명백한 손해를 끼쳐 가며 영국인들을 골탕 먹이는 순진한 재미를 누리려는 것뿐이겠는가? 아니다, 영국인들이 우리를 방해하기 때문이다. 그들은 어디에서 우리를 방해하는가? — 콘스탄티노플에서다. 영국은 자기 힘을 유지하는 한, 콘스탄티노플이 우리 손에 들어가 다시 수도가 되는 것을, 그것도 이제는 전러시아 제국만의 수도도, 슬라브 제국의 수도도 아닌 동방 제국의 수도가 되는 것을 결코, 세상 무슨 일이 있어도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

바로 이런 이유로 러시아 정부는 히바에서 전쟁을 시작했고, 대체로 오래전부터 인도에 다가가려 애써 온 것이다. 정부는 영국에 해를 끼칠 수 있는 지점을 찾고 있으며, 다른 곳을 찾지 못하니 인도에서 영국을 위협한다. 이렇게 해서 정부는 영국인들이 콘스탄티노플은 러시아 도시가 되어야 한다는 생각을 받아들이게 하고, 국가 러시아에 그 어느 때보다 필요한 이 정복에 그들이 동의하지 않을 수 없게 만들기를 바라는 것이다.

발트해에서 러시아의 우위는 돌이킬 수 없이 잃었다. 총검과 채찍으로 묶어 놓은 전러시아 국가, 대러시아 인민을 비롯해 그 안에 갇히고 사슬에 묶인 모든 인민 대중에게 미움받고, 제 나라의 제멋대로 구는 전횡과 제 나라의 어리석음과 제 나라의 도둑질로 타락하고 와해되고 파산한 이 국가가, 그리고 실제보다 종이 위에 더 많이 존재하며 무기 없는 자들에게나, 그것도 우리에게 아직 결단력이 모자라는 동안에나 통하는 그 군사력이, 새로 일어서는 독일 제국의 무섭고도 훌륭하게 조직된 위력과 싸울 수는 없다. 따라서 발트해를 포기하고, 발트 연안 지역 전체가 독일의 한 주가 되는 순간을 기다려야 한다. 이를 막을 수 있는 것은 오직 인민 혁명뿐이다. 그런데 그러한 혁명은 국가에는 죽음이며, 우리 정부가 자신의 구원을 찾을 곳은 거기에 있지 않다.

정부에게는 독일과의 동맹 말고 다른 구원이 남아 있지 않다. 발트해를 독일인들에게 내주지 않을 수 없게 된 이상, 이제 흑해에서 자신의 위대함을 위한, 아니 그저 자신의 정치적 존재와 의미를 위한 새로운 터전, 새로운 기반을 찾아야 하는데, 독일인의 허락과 도움 없이는 그것을 얻을 수 없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이 도움을 약속했다. 그렇다, 우리가 확신하는 바와 같이 그들은 비스마르크 공과 고르차코프 공 사이에 체결된 정식 조약으로 러시아 국가에 그 도움을 주기로 의무를 졌다. 그러나 그들이 결코 그 도움을 주지 않으리라는 것도 우리는 확신한다. 주지 않을 것이다. 자기들의 도나우 연안과 도나우 무역을 러시아의 마음대로 내줄 수 없기 때문이고, 또 유럽 남부에 새로운 러시아의 위력, 위대한 범슬라브 제국이 세워지도록 돕는 것이 그들의 이익일 수 없기 때문이다. 그것은 범게르만 제국으로서는 그야말로 일종의 자살이나 다름없을 것이다. — 그러나 그것이 콘스탄티노플로 가는 가장 곧은 길이라는 구실로 러시아 군대를 중앙아시아로, 히바로 향하게 하고 밀어 넣는 것, — 이것은 다른 문제다.

우리의 원로 국가 애국자이자 외교관인 고르차코프 공과 그의 지존한 후원자 알렉산드르 니콜라예비치 황제가 이 모든 한심한 일에서 더없이 어리석은 역할을 했고, 이름난 독일 애국자이자 국가 사기꾼인 비스마르크 공이 나폴레옹 3세를 속였을 때 못지않게, 아니 어쩌면 그보다 더 교묘하게 그들을 속였다는 것은 우리에게 의심할 여지가 없어 보인다.

그러나 일은 이미 벌어졌고, 되돌릴 수 없다. 새 독일 제국은 위풍당당하고 위협적인 모습으로 일어서서 자신을 시기하는 자들과 적들을 비웃고 있다. 러시아의 무기력한 힘으로는 새 독일 제국을 무너뜨릴 수 없다. 오직 혁명만이 그것을 할 수 있으며, 러시아나 유럽에서 혁명이 승리하기 전까지는 국가적 독일이 승리하고 모든 것을 지배할 것이며, 러시아 국가도, 유럽의 모든 대륙 국가들과 마찬가지로, 이제부터 오직 독일의 허락과 은혜로만 존재하게 될 것이다.

이것은 물론 국가 애국자인 러시아인의 마음에는 하나같이 지극히 모욕적인 일이지만, 무서운 사실은 사실로 남는다. 독일인들은 그 어느 때보다도 우리의 주인이 되었다. 러시아의 모든 독일인이 프랑스에서의 독일군 승리를 그토록 열렬하고 요란하게 축하한 것도, 페테르부르크의 모든 독일인이 자신들의 새 범게르만 황제를 그토록 성대하게 맞이한 것도 괜한 일이 아니다.

현재 유럽 대륙 전체에 진정으로 독립된 국가는 단 하나만 남았다 — 바로 독일이다. 그렇다, 모든 대륙 열강 가운데 — 물론 우리는 큰 나라들만 말하고 있다. 소국과 중간 국가들이 처음에는 어김없이 예속되고 머지않아 멸망할 운명이라는 것은 말할 나위도 없기 때문이다 — 모든 일류 국가 가운데 오직 독일 제국만이 완전한 독립의 모든 조건을 갖추고 있으며, 나머지 모든 나라는 독일에 예속되어 있다. 이것은 독일이 지난 몇 년 동안 덴마크, 오스트리아, 프랑스를 상대로 눈부신 승리를 거두었기 때문만도 아니고, 프랑스의 모든 무기와 모든 군수 물자를 차지했기 때문만도 아니며, 프랑스에 50억을 물게 했기 때문만도 아니고, 알자스와 로렌을 병합해 프랑스에 맞서 방어에서도 공격에서도 훌륭한 군사적 위치를 차지했기 때문만도 아니다. 또한 독일군이 병력 수, 무장, 규율, 조직, 정확한 임무 수행, 그리고 장교뿐 아니라 하사관과 병사들까지 갖춘 군사 지식에서, 참모부가 다른 나라보다 낫다는 것은 논란의 여지가 없으니 말할 것도 없고, 지금 유럽에 있는 모든 군대를 단연 능가하기 때문만도 아니며, 독일 인구의 대다수가 글을 읽고 쓸 줄 알고 근면하며 생산적이고, 학식 있다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비교적 매우 교양 있는 사람들이며, 게다가 온순하고 당국과 법에 순종적이기 때문만도, 독일의 행정과 관료제가 다른 모든 국가의 관료제와 행정이 헛되이 추구해 온 이상을 거의 실현했다고 할 만하기 때문만도 아니다…

이 모든 이점은 물론 새 범게르만 국가의 놀라운 성공에 이바지했고 지금도 이바지하고 있지만, 그 현재의 압도적인 힘의 주된 원인을 여기에서 찾아서는 안 된다. 오히려 이 모든 것은 독일 사회생활 전체의 바탕에 놓인 더 일반적이고 더 깊은 원인이 드러난 것에 지나지 않는다고 말할 수도 있다. 그 원인은 바로 독일 인민의 특징을 이루는 사회성 본능이다.

이 본능은 겉보기에는 서로 반대되지만 언제나 떨어질 수 없는 두 요소로 나뉜다. 하나는 무슨 일이 있어도 복종하려는 노예의 본능, 이른바 합법적 권력에 대한 순종이라는 명분 아래 승리한 힘에 온순하고 슬기롭게 굴복하는 본능이고, 동시에 다른 하나는 자기보다 약한 모든 것을 체계적으로 복종시키고 호령하고 정복하고 체계적으로 억압하려는 주인의 본능이다. 이 두 본능은 거의 모든 독일인에게 상당한 정도로 발달해 있다. 물론 처지상 적어도 두 번째 본능은 채울 길이 없는 프롤레타리아트는 예외다. 그리고 둘은 늘 떨어지지 않은 채 서로를 보완하고 설명하면서 애국적인 독일 사회의 바탕을 이룬다.

모든 계급과 부류의 독일인이 권력 앞에서 보이는 고전적 순종은 독일의 역사 전체가, 특히 근래의 역사가 말해 준다. 근래의 역사는 복종과 인내의 위업이 끊임없이 이어진 기록이다. 독일인의 마음속에는 국가 권력을 신처럼 받드는 참된 숭배가 수백 년에 걸쳐 다져졌다. 이 숭배는 점차 관료주의적 이론과 실천을 낳았고, 그 뒤 독일 학자들의 노력 덕분에 오늘날까지 독일 대학에서 가르치는 정치학 전체의 기초가 되었다.

중세 독일의 십자군 기사와 남작들부터 근래의 하찮은 속물 시민에 이르기까지 게르만 종족의 정복적이고 억압적인 지향에 대해서도 역사는 마찬가지로 크게 말해 준다.

그리고 이 지향을 슬라브 종족만큼 쓰라리게 겪은 이는 없다. 적어도 북쪽과 동쪽에서, 그리고 물론 독일식 관념에 따르면, 독일인의 역사적 사명 전체는 바로 슬라브 종족들을 절멸하고 노예로 만들고 강제로 게르만화하는 데 있었고, 어쩌면 지금도 여전히 거기에 있다고 말할 수 있다.

이것은 길고 슬픈 역사이며, 그 기억은 슬라브인의 마음속에 깊이 간직되어 있다. 그리고 사회혁명이 미리 그들을 화해시키지 않는다면, 이 역사는 독일인에 맞선 슬라브인의 마지막 불가피한 투쟁에서 틀림없이 되살아날 것이다.

독일 사회 전체의 정복적 지향을 정확히 평가하기 위해서는 1815년 이후 독일 애국주의의 발전을 잠깐 살펴보는 것으로 충분하다.

1525년, 곧 농민 반란을 피로 진압한 시대부터 18세기 후반, 곧 독일의 문학적 부흥 시대까지 독일은 깨어날 줄 모르는 잠에 빠져 있었다. 그 잠은 이따금 대포 소리와, 독일이 대개 그 무대이자 희생자였던 무자비한 전쟁의 무서운 장면과 시련으로 깨지곤 했다. 그럴 때 독일은 공포에 질려 깨어났지만, 루터파 설교의 자장가에 실려 곧 다시 잠들었다.

이 시기, 곧 거의 2세기 반 동안 바로 이 설교의 영향 아래에서 독일의 순종적이고, 참된 영웅주의에 이를 만큼 노예처럼 참을성 있는 성격이 완전히 다듬어졌다. 이때 권력에 대한 무조건적 복종과 축복의 체계가 만들어져 모든 독일인의 삶 전체에, 살과 피에 스며들었다. 이와 함께 행정학이 발달했고, 현학적으로 체계적이며 비인간적이고 몰개성적인 관료적 실무가 발달했다. 모든 독일 관리는 국가의 사제가 되어, 국가 봉사의 제단 위에서 가장 사랑하는 아들을 칼이 아니라 관청의 펜으로 찔러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다. 바로 그때 하인 같은 음모와 군 복무 말고는 아무것도 할 줄 모르는 독일의 고귀한 귀족은 궁정과 외교에서의 파렴치함과 돈에 팔리는 칼을 돈을 더 많이 주는 유럽 궁정들에 내놓았다. 그리고 죽도록 순종적인 독일 시민은 참고 일하며 불평 없이 무거운 세금을 내고 가난하고 비좁게 살면서 영혼의 불멸이라는 생각으로 스스로를 위로했다. 독일을 나눠 가진 수많은 군주의 권력은 끝이 없었다. 교수들은 서로 뺨을 때리고 나서 서로를 상부에 고발했다. 죽은 학문과 맥주 사이에 시간을 나눠 쓰던 학생층은 그런 교수들에게 딱 어울렸다. 그리고 막노동하는 인민에 대해서는 아무도 말하지 않았고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18세기 후반에도 독일의 상황은 이러했다. 그런데 무슨 기적처럼 갑자기 이 저속함과 비열함의 끝없는 심연에서, 레싱이 일으키고 괴테, 실러, 칸트, 피히테, 헤겔이 완성한 찬란한 문학이 솟아났다. 이 문학이 처음에는 17세기와 18세기 프랑스의 위대한 문학, 처음에는 고전주의 문학, 그다음에는 철학 문학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는 것은 알려져 있다. 그러나 이 문학은 그 시조 레싱의 작품에서부터 벌써 완전히 독자적인 성격과 내용과 형식을 띠었으며, 그것은 말하자면 독일의 관조적 삶의 가장 깊은 곳에서 흘러나온 것이었다.

우리가 보기에 이 문학은 근대 독일의 가장 큰 공적이며, 거의 유일한 공적이라 할 만하다. 대담하면서도 폭넓은 장악력으로 이 문학은 인간 정신을 크게 앞으로 밀고 나갔고 사유에 새로운 지평을 열었다. 이 문학의 주된 장점은 한편으로 완전히 민족적이면서도 동시에 지극히 인도적이고 전인류적인 문학이었다는 데 있다. 하기야 이것은 18세기 유럽 문학 전체, 아니 거의 전체의 특징이기도 하다.

그러나 이를테면 프랑스 문학이 볼테르, 장자크 루소, 디드로를 비롯한 백과전서파의 작품에서 모든 인간적 문제를 이론의 영역에서 실천으로 옮기려 애쓰던 바로 그때, 독일 문학은 자신의 추상적·이론적이며 주로 범신론적인 성격을 정숙하고 엄격하게 지켰다. 그것은 추상적으로 시적이고 형이상학적인 인본주의의 문학이었고, 입문자들은 그 높은 곳에서 현실의 삶을 경멸하며 내려다보았다. 하기야 그 경멸은 충분히 받을 만한 것이었다. 독일의 일상은 저속하고 역겨웠기 때문이다.

이렇게 해서 독일의 삶은 서로 대립하고 서로를 부정하면서도 서로를 보완하는 두 영역으로 갈라졌다. 하나는 높고 넓지만 완전히 추상적인 인도주의의 세계, 다른 하나는 역사적으로 물려받은 충성스러운 신민의 저속함과 비열함의 세계다. 프랑스 혁명이 일어났을 때 독일은 이렇게 둘로 갈라져 있었다.

이 혁명을 문학계 독일 거의 전체가 매우 호의적으로, 말하자면 적극적인 공감으로 맞아들였다는 것은 잘 알려져 있다. 괴테는 얼굴을 조금 찌푸리며, 전례 없는 사건들의 소란이 자신의 학문적·예술적 작업과 시적 관조의 실마리를 방해하고 끊어 버렸다고 투덜거렸다. 그러나 새 문학과 형이상학과 학문의 대표자나 지지자 대다수는 혁명을 기쁘게 맞이했고, 혁명이 모든 이상을 실현해 주리라고 기대했다. 18세기 말에도 여전히 매우 중대한 역할을 하며 유럽 모든 나라의 앞선 사람들을 보이지 않으나 상당히 실질적인 형제애로 묶고 있던 프리메이슨은 프랑스 혁명가들과 독일의 고귀한 몽상가들 사이에 살아 있는 연결을 맺어 주었다. 공화국 군대가 브라운슈바이크에게 영웅적으로 맞서 그를 수치스러운 도주로 몰아넣은 뒤 처음으로 라인강을 건넜을 때, 독일인들은 그들을 해방자로 맞이했다.

독일인들이 프랑스인들에게 보인 이 호의는 오래가지 않았다. 프랑스 군인들은 프랑스인답게 물론 매우 상냥했고, 공화주의자로서 온갖 호감을 받을 만했지만, 그래도 그들은 군인, 곧 폭력의 거리낌 없는 대표자이자 하수인이었다. 이런 해방자들이 곁에 있는 것은 곧 독일인들에게 짐이 되었고, 그들의 호감은 크게 식었다. 게다가 곧이어 혁명 자체가 매우 격렬한 성격을 띠게 되어, 독일인의 추상적 관념이나 속물적이고 관조적인 기질과는 도저히 양립할 수 없게 되었다. 하이네가 전하기로는, 마지막에는 독일 전체에서 쾨니히스베르크의 철학자 칸트 한 사람만이 9월 학살에도, 루이 16세와 마리 앙투아네트의 처형에도, 로베스피에르의 공포정치에도 불구하고 프랑스 혁명에 대한 공감을 간직했다고 한다.

그 뒤 공화국은 처음에는 총재정부로, 다음에는 통령정부로, 마침내 제정으로 바뀌었다. 공화국 군대는 광기에 이를 만큼 거대한 나폴레옹의 야심을 위한 맹목적이고 오랫동안 승승장구한 도구가 되었고, 1806년 말 예나 전투 뒤 독일은 완전히 예속되었다.

1807년부터 독일의 새로운 삶이 시작된다. 프로이센 왕국이, 그리고 그것을 통해 독일 전체가 빠르게 부흥한 놀라운 역사를 모르는 이가 누구인가. 1806년에 프리드리히 2세와 그의 아버지와 할아버지가 세운 국가적 힘은 모두 무너졌다. 위대한 군사령관이 조직하고 훈련시킨 군대는 궤멸했다. 쾨니히스베르크 변경을 뺀 독일 전체와 프로이센 전체가 프랑스 군대에 정복되어 실제로는 프랑스 지사들의 통치를 받았고, 프로이센 왕국의 정치적 존속은 오로지 전러시아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간청 덕분에 보전되었다.

이 위기의 상황에서 열렬한 프로이센 애국자, 아니 그 이상으로 독일 애국자인, 영리하고 대담하고 결단력 있는 사람들의 무리가 나타났다. 그들은 프랑스 혁명의 교훈과 본보기에서 배워, 폭넓은 자유주의 개혁으로 프로이센과 독일을 구하려고 계획했다. 다른 때였다면, 이를테면 예나 전투 전이나 어쩌면 귀족·관료 반동이 다시 모든 권리를 되찾은 1815년 이후였다면, 그들은 그런 개혁을 생각할 겨를조차 없었을 것이다. 궁정·군부 파벌이 그들을 짓밟았을 것이고, 신이 정해 준 자신의 무한한 권리 말고는 아무것도 몰랐던 더없이 덕성스럽고 더없이 어리석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그들이 그런 개혁을 두고 찍소리라도 냈다면 당장 슈판다우에 가두었을 것이다.

그러나 1807년에는 상황이 전혀 달랐다. 군부·관료 및 귀족 파벌은 궤멸하고 망신당하고 굴욕을 당해 목소리를 잃을 지경이었고, 국왕은 바보라도 잠시나마 영리해질 만한 교훈을 얻었다. 슈타인 남작이 수석 대신이 되었고, 그는 과감한 손으로 프로이센의 낡은 질서를 허물고 새로운 조직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일은 농민을 토지 긴박에서 해방하되, 토지를 개인 소유로 얻을 권리만이 아니라 실제로 얻을 수 있는 가능성까지 준 것이었다. 두 번째 일은 귀족의 특권을 없애고 군 복무와 문관 복무에서 모든 신분을 법 앞에 평등하게 만든 것이었다. 세 번째 일은 선거 원칙에 따라 주와 시의 행정을 조직한 것이었다. 그러나 그의 주된 일은 군대를 완전히 개조한 것, 더 정확히 말하면 프로이센 인민 전체를 군대로 바꾸어 현역군, 란트베어, 슈투름베어의 세 범주로 나눈 것이었다. 끝으로 슈타인 남작은 당시 독일에 있던 영리하고 열정적이고 생기 있는 모든 것에 프로이센 대학의 문을 활짝 열어 피난처를 마련해 주었고, 무신론을 설파했다는 이유로 괴테의 친구이자 후원자인 바이마르 공작에게 막 예나에서 쫓겨난 유명한 피히테를 베를린 대학에 받아들였다.

피히테는 주로 독일 청년들을 향한 열렬한 연설로 강의를 시작했는데, 이 연설은 나중에 『독일 민족에게 고함』이라는 제목으로 출간되었다. 그 안에서 그는 독일의 미래 정치적 위대함을 매우 훌륭하고 명확하게 예언했으며, 독일 민족은 인류의 최고 대표자, 아니 인류의 지배자이자 말하자면 그 면류관이 될 운명이라는 자랑스러운 애국적 확신을 밝혔다. 이것은 오류였다. 물론 독일인들보다 앞서 다른 민족들, 예컨대 고대 그리스인과 로마인, 근대에는 프랑스인들도 이 오류에 빠졌고, 그것도 더 큰 근거를 가지고 그랬다. 그러나 모든 독일인의 의식 속에 깊이 뿌리내린 이 오류는 지금 독일에서 지나치게 기형적이고 조야한 규모로 커졌다. 적어도 피히테에게서는 그것이 참으로 영웅적인 성격을 띠었다. 피히테는 프랑스 총검 아래에서 그것을 밝혔다. 그때 베를린은 나폴레옹의 장군이 다스리고 있었고 거리에서는 프랑스 북소리가 울려 퍼졌다. 게다가 이 이상주의 철학자가 애국적 자부심에 불어넣은 세계관은 실제로 인도주의, 곧 18세기 독일의 위대한 문학에 새겨진 그 넓고 부분적으로 범신론적인 인도주의를 호흡하고 있었다. 그러나 현대 독일인들은 그들의 철학자이자 애국자의 주장의 거대함은 그대로 간직하면서도 그의 인도주의는 포기했다. 그들은 그것을 아예 이해하지 못하며, 추상적이고 전혀 실천적이지 않은 사고가 낳은 기형아라며 비웃을 태세까지 되어 있다. 그들에게는 비스마르크 공이나 마르크스 씨의 애국주의가 더 이해하기 쉽다.

나폴레옹이 러시아에서 완전히 패하고 불운한 퇴각, 더 정확히 말해 얼마 안 되는 잔병을 이끌고 도주한 틈을 타 독일인들이 마침내 스스로 일어섰다는 것은 누구나 안다. 그들은 물론 이 봉기를 두고 자기들을 몹시 칭송하지만, 전혀 근거 없는 일이다. 사실 자립적인 인민 봉기란 한 번도 없었다. 다만 패한 나폴레옹이 더는 위험하지도 두렵지도 않게 되자, 독일 군단들, 처음에는 프로이센 군단이, 다음에는 오스트리아 군단이 그때까지 러시아를 겨누던 창끝을 이제는 나폴레옹에게 돌려, 나폴레옹을 뒤쫓던 러시아의 승리한 군대에 합류했을 뿐이다. 합법적이지만 그때까지 불운했던 프로이센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감격과 고마움의 눈물을 흘리며 베를린에서 자신의 구원자인 전러시아 황제를 껴안았고, 곧이어 충성스러운 신민들에게 불법적이고 오만한 나폴레옹에 맞서 합법적으로 봉기하라고 호소하는 포고를 내렸다. 국왕이자 아버지의 목소리에 순종하여 독일의, 그중에서도 주로 프로이센의 청년들이 일어나 의용군단을 꾸렸고, 이 군단들은 정규군에 편입되었다. 프로이센 추밀고문관이자 이름난 첩자이며 공식 밀고자였던 이가 1815년에 펴내 모든 애국자의 분노를 산 소책자에서, 해방 사업에서 인민의 자립적 행동이란 전혀 없었다고 부정하며 「프로이센 시민들은 국왕이 명령했을 때에야 비로소 무기를 들었고, 여기에는 영웅적인 것도 비범한 것도 전혀 없었으며 그저 모든 충성스러운 신민의 의무를 이행한 것뿐」이라고 말한 것은 그리 틀린 말이 아니었다.

어찌 되었든 독일은 프랑스의 멍에에서 해방되었고, 전쟁이 완전히 끝난 뒤에는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최고 지도 아래 내부 개조 작업에 착수했다. 첫 번째 일은 수많은 소영지의 직속 지위를 박탈하는 것이었다. 그리하여 이 영지들은 독립 국가에서, 명예롭고 (프랑스인들에게서 받아 낸 10억으로) 돈으로 넉넉히 보상받은 신민으로 바뀌었고, 독일에는 모두 서른아홉 개의 국가와 군주만 남았다.

두 번째 일은 군주와 신민 사이의 상호 관계를 정하는 것이었다.

투쟁의 시대에, 아직 모두의 머리 위에 나폴레옹의 칼이 드리워져 있고 크고 작은 군주들이 자기 인민의 충성스러운 도움을 필요로 하던 때에, 그들은 수많은 약속을 남발했다. 프로이센 정부가 헌법을 약속했고, 다른 모든 정부도 그 뒤를 따랐다. 그러나 이제 재난이 지나가자 정부들은 헌법이 쓸모없다고 확신하게 되었다. 메테르니히 공이 이끄는 오스트리아 정부는 옛 가부장적 질서로 돌아가겠다는 결정을 대놓고 선언했다. 빈 시민들 사이에서 엄청난 인기를 누리던 더없이 인자한 프란츠 황제는 라이바흐 리체움 교수들을 접견한 자리에서 이를 직접 이렇게 밝혔다.

「지금은 새 사상이 유행이오 — 그가 말했다 — 나는 이것을 칭찬할 수 없고 앞으로도 결코 칭찬하지 않겠소. 옛 관념을 고수하시오. 우리 선대들은 그 관념으로 행복했는데, 우리라고 어찌 그것으로 행복하지 못하겠소? 나에게는 학자가 필요 없고 정직하고 순종적인 시민만 필요하오. 그런 시민을 길러 내는 것이 바로 그대들의 의무요. 나를 섬기는 자는 내가 명령하는 것을 가르쳐야 하오. 그것을 할 수 없거나 하려 하지 않는 자는 떠나도 좋소. 그러지 않으면 내가 내보내겠소…」

프란츠 요제프 황제는 약속을 지켰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바로 1848년까지 무제한의 자의가 지배했다. 신민을 잠재우고 우둔하게 만드는 것을 주된 목적으로 삼은 통치 체제가 더없이 엄격하게 시행되었다. 사상은 잠들었고, 대학 안에서조차 꼼짝하지 않았다. 그곳에서는 살아 있는 학문 대신 판에 박힌 낡은 것을 되풀이했다. 추문거리를 다룬 조잡한 국산 소설과 몹시 형편없는 시 말고는 문학이 없었다. 자연과학은 유럽 나머지 지역의 당대 수준보다 50년 뒤떨어져 있었다. 정치 생활은 전혀 없었다. 농업, 공업, 상업은 중국식 정체에 사로잡혀 있었다. 인민, 막노동하는 대중은 완전한 예속 상태에 놓여 있었다. 그리고 이탈리아와 부분적으로 헝가리가 반역적인 소요로 오스트리아 충성 신민들의 행복한 잠을 어지럽히지 않았다면, 이 제국 전체를 거대한 죽은 자들의 왕국으로 여길 수 있을 것이다.

이 왕국에 의지하여 메테르니히는 33년 동안 유럽 전체를 같은 상태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그는 유럽 반동의 주춧돌이자 영혼이자 지도자가 되었고, 당연히 그의 주된 관심사는 독일에서의 모든 자유주의적 기미를 없애는 것이었을 수밖에 없었다.

그를 가장 불안하게 한 것은 프로이센이었다. 프로이센은 프리드리히 2세의 천재성, 그가 오스트리아에게서 빼앗은 슐레지엔, 그 뒤의 폴란드 분할, 그리고 슈타인 남작과 샤른호르스트를 비롯한 프로이센 부흥 동지들의 대담한 자유주의 덕분에 지난 세기 말에야 일류 열강의 대열에 들어섰고, 그 때문에 전독일 해방의 선두에 선 새롭고 젊은 국가였다. 최근에 일어난 모든 상황과 사건, 시련, 성공과 승리, 그리고 프로이센 자신의 이익까지도 그 정부가 프로이센에 그토록 다행스럽고 구원이 되었던 새 길을 대담하게 걸어가도록 부추길 것처럼 보였다. 바로 이것을 메테르니히 공은 그토록 무섭게 두려워했고, 또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었다.

이미 프리드리히 2세 시대부터, 나머지 독일 전체가 지적·도덕적 예속의 극단에 이르러 타락한 궁정들의 거리낌 없고 뻔뻔하며 파렴치한 통치와 음모와 약탈의 희생물이 되어 있을 때, 프로이센에서는 반듯하고 정직하며 될 수 있는 한 공정한 행정이라는 이상이 실현되었다. 그곳에 전제군주는 하나뿐이었다. 물론 가차 없고 무시무시한 전제군주, 곧 국가 이성 또는 국가 이익의 논리였다. 그것을 위해 단연코 모든 것이 희생되었고, 그 앞에 모든 권리가 머리를 숙여야 했다. 그러나 그 대신 그곳에는 다른 어느 독일 국가보다 개인의 방탕한 자의가 훨씬 적었다. 프로이센 신민은 국왕이라는 인격에 구현된 국가의 노예였으나, 나머지 독일에서처럼 국왕의 궁정이나 애첩이나 총신의 노리개는 아니었다. 그래서 이미 그때 독일 전체가 프로이센을 각별한 존경의 눈으로 바라보았다.

이 존경은 1807년 이후 크게 불어나 적극적인 호감으로 바뀌었다. 이때 프로이센 국가는 거의 완전히 멸망할 지경에 몰리자 자유주의적 개혁에서 자신의 구원과 독일의 구원을 찾기 시작했고, 일련의 성공적인 개혁 끝에 프로이센 국왕은 자기 인민뿐 아니라 독일 전체를 프랑스 정복자에 맞선 봉기로 불러냈다. 그러면서 전쟁이 끝나면 자기 신민에게 더없이 폭넓은 자유주의 헌법을 주겠다고 약속했다. 이 약속을 이행할 기한까지 정해졌으니, 바로 1815년 9월 1일이었다. 이 엄숙한 국왕의 약속은 나폴레옹이 엘바섬에서 돌아온 뒤이자 워털루 전투 전인 1815년 5월 22일에 공표되었다. 그것은 빈 회의에 모인 유럽의 모든 군주가 나폴레옹 상륙 소식에 하나같이 공포에 사로잡혀 함께 내놓은 약속을 되풀이한 것에 지나지 않았다. 이 약속은 갓 만들어진 독일 연방의 문서에 가장 중요한 조항 가운데 하나로 들어갔다.

중부와 남부 독일의 소군주 가운데 몇몇은 꽤 성실하게 약속을 지켰다. 그러나 군사·관료적 귀족 요소가 단연 우세했던 북부 독일에서는 오스트리아가 대놓고 강력하게 비호하는 낡은 귀족적 체제가 그대로 남았다.

1815년부터 1819년 5월까지 독일 전체는 오스트리아와 달리 프로이센이 자유주의적 개혁을 향한 모두의 열망을 자기의 강력한 비호 아래 받아들이리라고 기대했다. 모든 정황과 프로이센 정부의 명백한 이해관계가 프로이센을 그쪽으로 기울게 할 것처럼 보였다. 1815년 5월에 공표된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의 엄숙한 약속은 말할 것도 없고, 1807년 이래 프로이센이 겪은 모든 시련, 그리고 주로 정부의 자유주의 덕분에 이룩한 놀라운 부흥이 정부를 그 방향으로 더욱 굳게 이끌었어야 마땅했다. 마지막으로, 프로이센 정부가 자유주의적 개혁의 솔직하고 단호한 후원자로 나서도록 재촉했어야 할 훨씬 더 중요한 고려 사항이 있었다. 그것은 신생 프로이센 군주국과 유서 깊은 오스트리아 제국 사이의 역사적 경쟁이었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가운데 누가 독일의 선두에 설 것인가? 이것이 앞선 사건들과, 두 나라가 서로 처한 위치의 논리가 지닌 힘이 제기한 문제였다. 독일은 복종에 길든 노예처럼, 자유롭게 살 줄도 모르고 살고 싶어 하지도 않으면서 힘센 주인을, 곧 자신을 온전히 내맡길 수 있고 자신을 하나의 나눌 수 없는 국가체로 통합해 유럽 최강 열강들 사이에서 명예로운 지위를 안겨 줄 최고 지배자를 찾고 있었다. 그러한 주인은 오스트리아 황제일 수도, 프로이센 국왕일 수도 있었다. 둘이 함께 이 자리를 차지하려면 서로를 마비시키고, 그리하여 독일을 예전의 무력함과 무기력에 다시 빠뜨릴 수밖에 없었다. 오스트리아는 당연히 독일을 뒤로 끌어당길 수밖에 없었다. 달리 행동할 수가 없었다. 수명을 다하고 늙어 쇠약해질 대로 쇠약해져 모든 움직임이 치명적이 되고 움직이지 않는 것이 노쇠한 생존을 지탱하는 필수 조건이 된 오스트리아는, 자기 자신을 구하기 위해 독일에서뿐 아니라 유럽 전체에서 같은 부동의 원리를 수호해야 했다. 유럽 대륙 어느 구석에서든 인민 생활의 모든 발현, 앞으로 나아가려는 모든 열망은 오스트리아에게 모욕이자 위협이었다. 죽어 가면서 오스트리아는 모든 것이 자신과 함께 죽기를 바랐다. 그런데 정치 생활에서도 다른 모든 생활에서와 마찬가지로 뒤로 가거나 제자리에 머무르기만 하는 것은 곧 죽는 것이다. 그러므로 오스트리아가 마지막 힘을, 물질적으로는 아직 막대한 그 힘을 동원해 유럽 전반에서, 특히 독일에서 모든 움직임을 무자비하고 꾸준히 짓누른 것은 당연한 일이다.

그러나 오스트리아의 정책이 그러할 수밖에 없었던 바로 그 때문에 프로이센의 정책은 정반대여야 했다. 나폴레옹 전쟁 이후, 작센에게서 주 하나를 통째로 빼앗아 그 희생으로 프로이센의 영토를 크게 넓혀 준 빈 회의 이후, 특히 블뤼허가 이끄는 프로이센군과 웰링턴이 이끄는 영국군의 연합군이 승리한 운명의 워털루 전투 이후, 프로이센군이 두 번째로 파리에 개선 입성한 이후, 프로이센은 유럽 일류 열강 가운데 다섯 번째 자리를 차지했다. 그러나 실제 힘, 국가의 부, 주민 수, 심지어 지리적 위치로 보아도 프로이센은 아직 그들과 어깨를 나란히 하기에는 한참 멀었다. 발트해의 슈테틴, 단치히, 쾨니히스베르크만으로는 강력한 해군은커녕 상당한 상선단을 꾸리기에도 너무나 부족했다. 기형적으로 길게 늘어진 데다 새로 얻은 라인주와는 남의 영토로 갈라져 있던 프로이센은 군사적으로 대단히 불리한 국경을 지니고 있었다. 남독일, 하노버, 네덜란드, 벨기에, 프랑스에서 공격해 오기는 아주 쉽고 막아 내기는 무척 어려운 국경이었다. 마지막으로 1815년 프로이센의 주민 수는 간신히 1500만에 이르렀다.

이러한 물질적 약세에도 불구하고, 그것도 프리드리히 2세 시대에는 훨씬 더 심했는데도, 이 위대한 왕의 행정적·군사적 천재성은 프로이센의 정치적 위상과 군사력을 일구어 내는 데 성공했다. 그러나 그가 이룩한 것은 나폴레옹에 의해 잿더미가 되었다. 예나 전투 이후 모든 것을 새로 만들어야 했다. 그리고 우리가 보았듯이, 교양 있고 현명한 국가 애국자들은 오로지 가장 대담하고 가장 자유주의적인 개혁을 잇달아 단행함으로써 프로이센에 예전의 위상과 힘을 되찾아 주었을 뿐 아니라 그것을 크게 늘려 놓았다. 실제로 그들은 프로이센이 열강 가운데 만만치 않은 자리를 차지할 수 있을 만큼 그것을 늘려 놓았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정치적 위상과 도덕적 영향력을 키우고 국경을 다듬고 넓히려고 꾸준히 애쓰지 않는다면 그 자리를 오래 지킬 수 있을 만큼은 아니었다.

그러한 결과를 얻기 위해 프로이센 앞에는 서로 다른 두 길이 열려 있었다. 하나는 적어도 겉보기에는 더 인민적인 길이고, 다른 하나는 순전히 국가적이고 군사적인 길이었다. 첫째 길을 따른다면 프로이센은 과감하게 독일 입헌 운동의 선두에 서야 했을 것이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이름난 오라녀 공 빌럼(1688년)의 위대한 선례를 따라 자기 깃발에 「프로테스탄트 신앙과 독일의 자유를 위하여」라고 써넣고, 그리하여 오스트리아의 가톨릭주의와 전제정에 맞선 공공연한 투사로 나서야 했을 것이다. 둘째 길에서는 국왕으로서 한 엄숙한 언약을 어기고 프로이센에서 더 이상의 자유주의적 개혁을 단호히 포기한 채, 그만큼 공공연히 독일 반동의 편에 서는 동시에, 앞으로 있을 정복에 대비해 모든 관심과 노력을 내정과 군대의 개선에 집중해야 했다.

세 번째 길도 있었다. 사실 아주 오래전에, 바로 로마 황제들인 아우구스투스와 그 후계자들이 연 길이었으나, 그들 이후 오랫동안 잊혔다가 최근에야 나폴레옹 3세가 다시 찾아냈고, 그의 제자인 비스마르크 공이 말끔히 다듬고 개선한 길이었다. 그것은 더없이 폭넓으면서 동시에 더없이 무해한 인민 대표 형식으로 위장되고 장식된 국가적·군사적·정치적 전제정의 길이다.

그러나 1815년에는 이 길이 아직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시에는 오늘날 가장 어리석은 전제군주들조차 아는 진리를 아무도 짐작조차 하지 못했다. 곧 이른바 입헌적 또는 인민 대표적 형식은 국가적·군사적·정치적·재정적 전제정을 방해하지 않으며, 오히려 그것을 합법화하고 인민 통치라는 거짓 외관을 입혀 줌으로써 그 내적 견고함과 힘을 크게 늘릴 수 있다는 진리였다.

그때에는 이것을 알지 못했고, 알 수도 없었다. 착취하는 계급과 착취당하는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의 완전한 단절이 부르주아지에게도,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에게도 아직 지금처럼 분명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그때에는 모든 정부도, 부르주아 자신들도 부르주아지 뒤에 인민 자신이 서 있으며, 부르주아지가 꿈틀하며 신호만 보내면 온 인민이 부르주아지와 함께 정부에 맞서 일어서리라고 생각했다. 지금은 사정이 전혀 다르다. 유럽 모든 나라의 부르주아지는 무엇보다도 사회혁명을 두려워하며, 이 폭풍에 맞서 국가 말고는 다른 피난처가 없다는 것을 안다. 그래서 부르주아지는 언제나 될 수 있는 한 강력한 국가를, 쉽게 말해 군사독재를 원하고 요구한다. 그리고 자신의 허영심을 지키기 위해서, 또 인민 대중을 더 쉽게 속이기 위해서 이 독재가 인민 대표 형식을 걸치기를 바란다. 그래야 인민 자신의 이름으로 인민 대중을 착취할 수 있기 때문이다.

그러나 1815년에는 이러한 두려움도, 이러한 교활한 정치도 유럽 어느 나라에도 아직 없었다. 반대로 부르주아지는 어디서나 진심으로, 그리고 순진하게 자유주의적이었다. 부르주아지는 아직 자신을 위해 일하는 것이 곧 모두를 위해 일하는 것이라고 믿었고, 그래서 인민을 두려워하지 않았으며 인민을 부추겨 정부에 맞서게 하는 것도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 결과 모든 정부는 될 수 있는 한 귀족에 기대면서 부르주아지를 혁명적 계급으로 여겨 적대했다.

1815년에도, 그리고 훨씬 뒤에도, 프로이센 쪽에서 아주 작은 자유주의적 표명만 있었어도, 프로이센 국왕이 자기 신민에게 부르주아 헌법의 그림자만큼이라도 주었어도, 온 독일이 그를 자신의 수장으로 인정하기에 충분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때에는 비프로이센 독일의 독일인들 사이에 프로이센에 대한 강한 반감이 아직 생기지 않았다. 그 반감은 훨씬 뒤에, 특히 1848년에 드러났다. 반대로 독일의 모든 나라가 프로이센을 기대에 차서 바라보며 바로 프로이센에게서 해방의 말이 나오기를 기다렸다. 최근 프로이센 정부는 전제 권력에는 사실 아무런 해도 끼치지 않으면서 자유주의적이고 인민 대표적인 제도를 프로이센인뿐 아니라 오스트리아인을 뺀 모든 비프로이센 독일인에게까지 그토록 아낌없이 베풀었는데, 그 절반만으로도 적어도 오스트리아를 뺀 독일 전체가 프로이센의 패권을 인정하기에 충분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가 몹시 두려워한 것이 바로 이것이었다. 그것만으로도 오스트리아는 이미 그때 지금 처한 그 불행하고 막다른 처지에 놓이게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 연방에서 첫째 자리를 잃음으로써 오스트리아는 스스로 독일 열강이기를 그쳤다. 우리가 보았듯이 독일인은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 인구의 4분의 1에 지나지 않는다. 오스트리아의 독일계 지역들과, 보헤미아, 모라비아, 슐레지엔, 슈티리아 같은 일부 슬라브계 지역들이 함께 독일 연방의 구성원이던 동안에는,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은 독일의 나머지 수많은 주민을 등에 업고 제국 전체를 어느 정도 독일 제국으로 볼 수 있었다. 그러나 지금 실제로 그렇게 되었듯이 제국이 독일 연방에서 떨어져 나가기만 하면, 900만, 당시에는 그보다도 적었던 제국의 독일계 인구는 제국 안에서 역사적 우위를 지키기에는 너무나 약해졌을 것이다. 그러면 오스트리아의 독일인들에게는 합스부르크 가문의 신민 신분을 벗어던지고 나머지 독일과 합치는 길밖에 남지 않았을 것이다. 지금 어떤 이들은 의식적으로, 어떤 이들은 무의식적으로 바로 이것을 지향하고 있으며, 이 지향이 오스트리아 제국을 머지않은 죽음으로 몰아넣고 있다.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패권이 확립되기만 하면, 오스트리아 정부는 자기의 독일계 지역들을 독일 전체에서 떼어 내지 않을 수 없게 되었을 것이다. 첫째, 그 지역들을 독일 연방에 남겨 두면 그 지역들을, 그리고 그 지역들을 통해 자기 자신까지도 사실상 프로이센 국왕의 최고 지배에 복속시키게 되기 때문이다. 둘째, 그렇게 되면 오스트리아 제국이 두 부분, 곧 프로이센의 패권을 인정하는 독일계 부분과 그것을 인정하지 않는 나머지 전체로 갈라지게 되어, 이 또한 제국의 파멸이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물론 1850년에 슈바르첸베르크 공이 시험해 보려 했으나 성공하지 못했고 성공할 수도 없었던 다른 수단이 있었다. 그것은 제국 전체를 헝가리와 트란실바니아와 모든 슬라브계·이탈리아계 속주까지 포함해 하나의 나눌 수 없는 국가로서 독일 연방에 통째로 편입하는 것이었다. 이 시도는 성공할 수 없었다. 프로이센이, 그리고 프로이센과 함께 독일의 대부분이 필사적으로 반대했을 것이기 때문이다. 1850년에 실제로 그랬듯이 다른 모든 열강, 특히 러시아와 프랑스도 반대했을 것이다. 그리고 마지막으로 독일인을 증오하는 오스트리아 인구의 4분의 3이 들고일어났을 것이다 — 슬라브인, 마자르인, 루마니아인, 이탈리아인. 이들에게는 자기가 독일인이 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치욕으로 여겨진다.

프로이센과 독일 전체는 당연히 이 시도에 반대했을 것이다. 그것이 실현되면 프로이센은 소멸하고 독일은 특유의 독일적 성격을 잃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독일은 더 이상 독일인의 조국이 아니게 되고, 온갖 민족성이 뒤섞인 혼돈스럽고 강제적인 집합체로 바뀌었을 것이다. 러시아와 프랑스가 동의하지 않았을 까닭은, 독일 전체를 복속시킨 오스트리아가 단숨에 유럽 대륙에서 가장 강력한 열강이 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따라서 오스트리아에게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독일에 통째로 들어가 독일을 질식시키지는 않되, 그렇다고 프로이센이 독일 연방의 수장이 되도록 내버려 두지도 않는 것이었다. 이런 정책을 따르면 오스트리아는 프랑스와 러시아의 적극적인 도움을 기대할 수 있었다. 러시아의 정책은 바로 최근까지, 곧 크림 전쟁 때까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 사이의 상호 경쟁을 체계적으로 유지하여 어느 쪽도 다른 쪽을 누르지 못하게 하는 한편, 독일의 중소 국가들에 불신과 공포를 불러일으키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에 맞서 이들을 비호하는 데 있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이 나머지 독일에 끼치는 영향은 주로 도덕적인 성격이었다. 그 영향은 무엇보다도 이런 기대에 바탕을 두고 있었다. 곧 바로 얼마 전까지 자신의 애국적이고 계몽적·자유주의적인 방향을 그토록 여러 번 입증한 프로이센 정부가 이제도 약속을 지켜 신민에게 헌법을 주고, 그리하여 독일 전체의 진보 운동을 이끌게 되리라는 기대였다. 그렇기에 메테르니히 공의 주된 관심은 프로이센 국왕이 신민에게 헌법을 주지 않게 하고, 오스트리아 황제와 함께 독일의 반동 운동을 이끌게 하는 데 쏠릴 수밖에 없었다. 이 노력에서 그는 부르봉가가 다스리는 프랑스와 아락체예프가 좌지우지하는 알렉산드르 황제에게서도 더없이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메테르니히 공은 프로이센 안에서도 그만큼 열렬한 지지를 얻었다. 극소수의 예외를 빼면 프로이센 귀족 전체와 군·민 고위 관료층, 그리고 마지막으로 국왕 자신까지 그를 지지했다.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매우 착한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는 국왕이었다. 즉 국왕이 마땅히 그래야 하듯 타고난 성품으로나 교육으로나 습관으로나 전제군주였다. 게다가 그는 복음주의 교회의 경건하고 신앙 깊은 아들이었는데, 이 교회의 첫째 교리는 「모든 권세는 하느님에게서 나온다」는 것이다. 그는 자신이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았다는 것, 자신에게 명령할 권리가, 아니 더 정확히는 명령할 의무가 있다는 것, 그리고 모든 신민에게는 아무 군말 없이 복종하고 이행할 의무가 있다는 것을 진지하게 믿었다. 이런 사고방식은 자유주의와 어울릴 수 없었다. 사실 국가가 위난에 처했을 때 그는 충성스러운 신민에게 더없이 자유주의적인 약속을 잔뜩 했다. 그러나 그것은 국가적 필요에 따른 것이었고, 최고의 법인 그 필요 앞에서는 군주 자신도 머리를 숙여야 했다. 이제 위난이 지나갔으니, 지키면 인민 자신에게 해로울 약속을 지킬 필요도 없었다.

대주교 아일레르트는 당시의 설교에서 이것을 아주 잘 설명했다. 「국왕은 — 그는 말한다 — 현명한 아버지처럼 행동했다. 자기 생일이나 병이 나은 날 자식들의 사랑에 감동하여 여러 약속을 했고, 그다음 마땅한 침착함으로 그것을 고쳐 자신의 본래적이고 유익한 권력을 되찾았다.」 국왕 주위의 궁정 전체와 장성단 전체와 고위 관료층 전체가 같은 정신에 젖어 있었다. 그들 자신이 프로이센에 불러온 위난의 시기에 그들은 숨을 죽이고, 슈타인 남작과 그의 주요 협력자들의 거스를 수 없는 개혁을 말없이 견뎠다. 그러나 위난이 지나가자 그들은 예전보다 더 심하게 음모를 꾸미고 떠들어 댔다.

그들은 국왕 못지않은, 어쩌면 국왕 자신보다 더한 진심 어린 반동주의자였다. 전독일적 애국심을 그들은 이해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온 마음으로 증오했다. 독일 깃발은 그들에게 역겨웠고 반란의 깃발로 보였다. 그들이 아는 것은 그들의 사랑스러운 프로이센뿐이었는데, 그나마도 그 미운 자유주의자들에게 털끝만큼도 양보하지 않을 수만 있다면 또 한 번 망쳐 버릴 각오가 되어 있었다. 부르주아지에게 어떤 정치적 권리든, 특히 비판과 통제의 권리를 인정한다는 생각, 부르주아지를 자기들과 동등하게 대할 수도 있다는 생각만으로도 그들은 그저 공포에 질렸고, 부르주아지에게 형언할 수 없는 분노를 느꼈다. 그들은 프로이센 국경의 확장과 정리를 바라고 원했지만, 오직 정복을 통해서였다. 처음부터 그들의 목표는 분명했다. 프로이센을 독일화하려 한 자유주의 당파와 반대로, 그들은 언제나 독일을 프로이센화하려 했다.

게다가 곧 수석 장관이 된 그들의 지도자이자 국왕의 벗인 비트겐슈타인 공을 필두로 그들은 거의 모두 메테르니히 공에게 매수되어 있었다. 그들 맞은편에는 이미 물러난 슈타인 남작의 벗들과 협력자들로 이루어진 작은 무리가 있었다. 이 한 줌의 국가 애국자들은 국왕을 자유주의적 개혁의 길에 붙잡아 두려고 엄청난 노력을 계속 기울였으나, 국왕과 궁정과 관료층과 군대가 똑같이 멸시하던 여론 말고는 어디에서도 기댈 곳을 찾지 못했고, 곧 쓰러졌다. 메테르니히의 금과 독일 상류층 자체의 반동적 성향이 훨씬 더 강한 것으로 드러났다.

따라서 순전히 자유주의적인 계획을 실행하기 위해 프로이센에 남은 길은 하나뿐이었다. 장차 독일 안에서 벌일 정복에 대비해 행정·재정 수단과 군사력을 개선하고 점차 늘리는 길이었다. 그런데 이 길은 프로이센 군주국의 전통과 그 본질 전체에 완전히 들어맞았다. 군사적이고 관료적이며 경찰적인, 한마디로 국가적인, 즉 대내외의 모든 발현에서 합법적으로 폭력적인 군주국이었으니 말이다. 이때부터 독일의 관변층에서는 합리적이고 계몽된 전제정이라는 이상이 형성되기 시작했고, 그것이 1848년까지 프로이센을 다스렸다. 그것은 범게르만 애국주의의 자유주의적 열망에도, 메테르니히 공의 전제적 몽매주의에도 똑같이 어긋났다.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대내외 정책에서 이처럼 강력하게 표현된 반동에 맞서, 아주 자연스럽게도 독일 전역에서, 그러나 주로 남부에서 자유주의적 애국 당파의 투쟁이 일어났다. 그것은 일종의 결투였다. 여러 형태로 이어졌으나 결과는 거의 언제나 같았고 독일 자유주의자들에게 언제나 지극히 비참했던 이 결투는 1815년부터 1870년까지 꼭 55년 동안 계속되었다. 그것은 몇 시기로 나눌 수 있다.

1. 튜턴 낭만주의자들의 자유주의와 프랑스 혐오의 시기, 1815년부터 1830년까지.

2. 프랑스 자유주의를 노골적으로 모방한 시기, 1830년부터 1840년까지.

3. 경제적 자유주의와 급진주의의 시기, 1840년부터 1848년까지.

4. 독일 자유주의의 죽음으로 끝난 결정적 위기의 시기, 그런데 아주 짧았던 시기, 1848년부터 1850년까지, 그리고 마지막으로 —

5. 죽어 가는 자유주의가 프로이센 의회에서 국가성에 맞서 벌인 완강한, 마지막이라고 할 수 있는 투쟁으로 시작해 독일 전역에서 프로이센 군주국의 최종적 승리로 끝난 시기, 1850년부터 1870년까지.

1815년부터 1830년까지 제1기의 독일 자유주의는 고립된 현상이 아니었다. 그것은 전유럽적 자유주의의 한 민족적 분파, 물론 매우 독특한 분파일 뿐이었다. 전유럽적 자유주의는 마드리드에서 페테르부르크까지, 독일에서 그리스까지 유럽의 거의 모든 지점에서 군주제적이고 귀족적·성직자적인 전유럽 반동에 맞서 매우 활발한 투쟁을 시작했다. 그 반동은 부르봉 왕가가 프랑스, 스페인, 나폴리, 파르마, 루카의 왕좌로, 교황과 함께 예수회가 로마로, 피에몬테 국왕이 토리노로 돌아오고, 오스트리아인이 이탈리아에 자리 잡으면서 승리를 거두었다.

이 참으로 국제적인 반동의 주된 공식 대표자는 신성동맹이었다. 이 동맹은 처음에 러시아, 프로이센, 오스트리아 사이에 맺어졌으나, 뒤에 영국, 로마, 투르크를 뺀 크고 작은 유럽 열강이 모조리 가입했다. 그 시작은 낭만적이었다. 동맹에 관한 첫 구상은 아직 꽤 젊고 아주 시들지는 않은 호색가 황제 알렉산드르 1세의 총애를 받던 그 유명한 크뤼데너 남작 부인의 신비주의적 상상 속에서 무르익었다. 그녀는 황제에게, 당신은 불행한 유럽을 검은 천사 나폴레옹의 발톱에서 구하고 지상에 신의 질서를 세우라고 하늘이 내려보낸 흰 천사라고 확신시켰다. 알렉산드르 파블로비치는 기꺼이 그러한 사명을 믿었고, 그래서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에 신성동맹을 맺자고 제안했다.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은 세 군주는 마땅히 그래야 하듯 성삼위일체를 증인으로 불러 서로 무조건적이고 끊을 수 없는 형제애를 맹세했고, 지상에서 하느님의 뜻과 도덕과 정의와 평화가 승리하는 것을 동맹의 목적으로 선포했다. 그들은 어둠의 정신, 곧 인민들의 자유를 향한 열망이 그들에 맞서 일으킬 모든 투쟁에서 조언과 행동으로 서로 도우며 언제나 함께 행동하겠다고 약속했다. 실제로 이 약속은 유럽에서 자유주의의 모든 발현에 맞서 연대하여 무자비한 전쟁을 벌이고, 혁명이 쳐부수고 없앴으나 복고가 되살린 봉건 제도를 끝까지, 무슨 수를 써서라도 떠받치겠다는 뜻이었다.

신성동맹의 미사여구꾼이자 멜로드라마 배우 같은 대표자가 알렉산드르였다면, 그 실제 지도자는 메테르니히 공이었다. 대혁명 시기에 그러했고 지금도 그러하듯이, 그때 독일은 유럽 반동의 주춧돌이었다.

신성동맹 덕분에 반동은 국제적인 것이 되었고, 그 결과 반동에 맞선 반란들도 국제적 성격을 띠게 되었다. 1815년부터 1830년까지의 시기는 서유럽에서 부르주아지의 마지막 영웅적 시기였다.

절대군주 권력과 봉건적·성직자적 제도의 강제적 복원은 이 존경스러운 계급에게서 혁명 기간에 쟁취한 모든 이익을 빼앗았고, 그리하여 이 계급을 자연히 다시 얼마간 혁명적인 계급으로 돌려놓을 수밖에 없었다. 프랑스, 이탈리아, 스페인, 벨기에, 독일에서는 막 승리한 질서를 타도하는 것을 목적으로 하는 부르주아 비밀 결사들이 생겨났다. 입헌주의가 깊고 살아 있는 뿌리를 내린 유일한 나라인 영국에서는 그 나라의 관습대로, 되살아난 봉건제에 맞선 부르주아 자유주의의 이 전면적 투쟁이 합법적 선동과 의회를 통한 변혁의 성격을 띠었다.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에서는 이 투쟁이 단호히 혁명적인 방향을 띨 수밖에 없었고, 그 여파는 러시아와 폴란드에까지 미쳤다. 이 모든 나라에서 정부가 적발하여 없앤 비밀 결사는 곧바로 다른 결사로 대체되었고, 모두가 하나의 목적을 지녔다 — 무장 봉기, 곧 반란의 조직이다. 1815년부터 1830년까지 프랑스의 역사 전체는 부르봉 왕좌를 타도하려는 시도의 연속이었고, 숱한 실패 끝에 프랑스인들은 마침내 1830년에 목적을 이루었다. 1830~31년의 스페인, 나폴리, 피에몬테, 벨기에, 폴란드 혁명과 러시아 12월 반란의 역사는 누구나 안다. 이 모든 나라에서 봉기는 어떤 곳에서는 성공하고 어떤 곳에서는 실패했지만 지극히 진지했다. 많은 피가 흘렀고 많은 값진 희생이 치러졌다. 한마디로 투쟁은 진지했고 흔히 영웅적이었다. 이제 같은 시기에 독일에서 무슨 일이 벌어졌는지 살펴보자.

1815년부터 1830년까지 첫 시기 전체를 통틀어 독일에서 자유주의 정신이 조금이라도 두드러지게 표명된 사례는 두 가지밖에 없다. 첫째는 1817년의 유명한 바르트부르크 집회였다. 한때 루터의 비밀 은신처였던 바르트부르크성 근처에 독일 각지에서 약 500명의 학생이 독일 민족의 삼색기를 들고 어깨에 같은 색 띠를 두른 채 모였다.

북독일과 남독일의 이 학생들은 애국적인 교수이자 시인으로서 유명한 민족 찬가 「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를 지은 아른트의 정신적 자식들이었고, 그 못지않게 애국적인, 모든 독일 김나지움 학생의 아버지 얀의 정신적 자식들이었다. 얀은 「씩씩하고, 경건하고, 쾌활하고, 자유롭게」라는 네 마디로 금발에 머리를 길게 기른 독일 청년의 이상을 표현한 사람이다. 이 학생들은 온 유럽 앞에서, 그리고 무엇보다 독일의 모든 정부 앞에서 독일 인민의 요구를 소리 높여 밝히려고 모일 필요가 있다고 여겼다. 그렇다면 그들의 요구와 표명은 무엇이었는가?

당시 온 유럽에는 입헌 군주제가 유행이었다. 프랑스에서도, 스페인에서도, 이탈리아에서조차, 폴란드에서도 부르주아 청년들의 상상력은 그 너머로 나아가지 못했다. 오직 러시아에서만, 페스텔과 무라비요프아포스톨이 이끌고 남부결사라는 이름으로 알려진 데카브리스트의 한 분파가 러시아 제국의 파괴와, 모든 토지를 인민에게 넘겨주는 슬라브 연방 공화국의 건설을 요구했다.

독일인들은 그런 것을 꿈꾸지 않았다. 그들은 아무것도 파괴하려 하지 않았다. 모든 진지한 혁명의 불가결한 첫째 조건인 그런 일에 그들은 지금과 마찬가지로 그때도 거의 마음이 없었다. 그들은 수많은 아버지 군주 가운데 누구에게도 반역적이고 신성모독적인 손을 들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그들은 다만 이 아버지 군주들이 저마다 무슨 헌법이든 하나쯤 주기를 바랐다. 나아가 그들은 개별 의회들 위에 놓인 전독일 의회와, 민족 통일의 대표자로서 개별 군주들 위에 놓인 전독일 황제를 바랐다. 보다시피 지극히 온건하면서 더없이 터무니없는 요구다. 그들은 군주제 연방을 원하면서 동시에 단일 독일 국가의 강대함을 꿈꾸었으니, 이는 명백히 터무니없다. 그러나 독일인의 강령을 좀 더 가까이 들여다보기만 하면, 겉보기의 이 터무니없음이 오해에서 비롯되었음을 알 수 있다. 그 오해란 독일인들이 민족적 강대함과 통일과 함께 자유도 요구했다는 잘못된 가정이다.

독일인들은 자유를 필요로 한 적이 없다. 그들에게 정부 없는 삶, 곧 그들을 마구 부리는 최고의 의지와 최고의 사상과 무쇠 같은 손이 없는 삶이란 아예 생각할 수도 없다. 그 손이 강할수록 그들은 더 자랑스러워하고 삶은 그들에게 더 즐거워진다. 그들을 슬프게 한 것은 자유가 없다는 사실이 아니었다. 자유가 있었어도 그들은 써먹을 줄 몰랐을 것이다. 그들을 슬프게 한 것은 수많은 작은 폭정이 엄연히 존재하는 가운데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민족적 강대함이 없다는 사실이었다. 그들의 숨은 열정, 그들의 유일한 목표는 거대한 범게르만 국가, 다른 모든 인민이 그 앞에서 떨 폭력적이고 모든 것을 삼키는 국가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러므로 그들이 인민 혁명을 결코 원하지 않은 것은 지극히 자연스럽다. 이 점에서 독일인들은 대단히 논리적이었다. 실제로 국가의 강대함은 인민 혁명의 결과일 수 없다. 그것은 기껏해야, 프랑스에서 그랬듯이, 어떤 계급이 인민 반란을 누르고 거둔 승리의 결과일 수는 있다. 그러나 프랑스에서조차 강한 국가를 완성하려면 나폴레옹의 강력한 전제적 손이 필요했다. 독일 자유주의자들은 나폴레옹의 전제정을 증오했지만, 국가 권력이라면 프로이센의 것이든 오스트리아의 것이든 범게르만 권력으로 바뀌는 데 동의하기만 하면 숭배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지금까지도 독일의 민족 찬가로 남아 있는 아른트의 유명한 노래 「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는 강대한 국가를 세우려는 이 열렬한 열망을 남김없이 표현한다. 그는 묻는다. 「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 — 프로이센인가? — 오스트리아인가? — 북독일인가 남독일인가? — 서부인가 동부인가?」 그리고 답한다. 「아니다, 아니다, 그의 조국은 훨씬 더 넓어야 한다.」 그 조국은 「독일어가 울리고 하늘의 하느님께 노래하는」 모든 곳에 걸쳐 있다.

그런데 세계에서 가장 번식력이 왕성한 인민 가운데 하나인 독일인은 사방으로 이주민을 내보내 유럽의 모든 수도와 아메리카, 심지어 시베리아까지 채우고 있으니, 머지않아 지구 전체가 범게르만 황제의 권력에 굴복해야 할 판이다.

이것이 바르트부르크 학생 집회의 진짜 의미였다. 그들은 자기들을 엄하게 다잡고, 자기들의 열렬하고 자발적인 복종으로 강해져 온 유럽을 떨게 할 범게르만 주인을 찾고 요구했다.

이제 그들이 어떻게 불만을 표명했는지 보자. 바르트부르크 축제에서 그들은 먼저 루터의 유명한 찬송가 「내 주는 강한 성이요」를 불렀고, 이어 「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를 불렀다. 몇몇 독일 애국자에게 만세를, 반동분자들에게 저주를 외쳤다. 마지막으로 반동적인 소책자 몇 권을 불태웠다. 그것이 전부였다.

더 의미 있는 것은 1819년에 일어난 다른 두 사건이었다. 학생 잔트가 러시아 첩자 코체부를 살해한 일과, 젊은 약제사 카를 뢰닝이 나사우 공국의 하찮은 고관 폰 이벨을 살해하려 한 일이다. 두 행위 모두 아무런 이익도 가져올 수 없었으니 지극히 어리석었다. 그러나 적어도 거기에는 열정의 진실성, 자기희생의 영웅심, 그리고 생각과 말과 행동의 일치가 나타났다. 이것이 없으면 혁명주의는 어김없이 수사로 떨어져 역겨운 거짓이 되고 만다.

이 두 사건, 곧 잔트가 저지른 정치적 살인과 뢰닝의 시도를 빼면, 독일 자유주의의 나머지 모든 표명은 더없이 순진하고 게다가 지극히 우스꽝스러운 수사의 영역을 벗어나지 못했다. 그것은 야만적인 튜턴주의의 시대였다. 속물의 자식이자 그 자신도 장래의 속물인 독일 학생들은 스스로를 타키투스와 율리우스 카이사르가 묘사한 고대 게르만인, 아르미니우스의 호전적인 후손, 울창한 숲의 순결한 주민이라고 상상했다. 그리하여 그들은 논리대로라면 마땅히 그래야 했듯 자기들의 소시민 세계가 아니라 프랑스와 프랑스인, 그리고 대체로 프랑스 문명의 흔적이 묻은 모든 것을 깊이 경멸하게 되었다. 프랑스 혐오는 독일에서 유행병이 되었다. 대학 청년들은 40년대와 50년대의 우리 슬라브주의자들과 똑같이 고대 게르만 옷을 차려입기 시작했고, 엄청난 양의 맥주로 청춘의 열기를 식혔다. 그러는 사이 그칠 줄 모르는 결투가 그들의 호전적 용맹을 드러냈는데, 그 결투는 대개 얼굴에 긁힌 상처로 끝났다. 그리고 애국심과 거짓 자유주의는 호전적 애국 노래를 고래고래 부르는 데서 완전한 표현과 만족을 찾았다. 그 노래들 가운데 지금 이루어졌거나 이루어지고 있는 범게르만 제국의 예언적 노래인 민족 찬가 「독일인의 조국은 어디인가?」가 물론 으뜸 자리를 차지했다.

이러한 표명들을 같은 시기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 벨기에, 폴란드, 러시아, 그리스의 자유주의 표명들과 비교해 보면, 누구든 독일 자유주의보다 더 순진하고 우스꽝스러운 것은 없었다는 데 동의할 것이다. 독일 자유주의는 가장 격렬한 표명에서조차 복종과 신민 근성이라는 그 상스러운 감정, 더 점잖게 말하면 권력과 윗사람에 대한 그 경건한 숭배로 가득 차 있었고, 그 광경은 뵈르네에게서 누구나 알고 우리도 이미 인용한 그 고통에 찬 외침을 끌어냈다. 「다른 인민들은 흔히 노예이지만, 우리 독일인은 언제나 하인이다」[8].

실제로 독일 자유주의는 극소수의 인물과 사례를 빼면 독일적 하인 근성, 곧 전민족적인 하인의 공명심이 특별한 형태로 발현된 것에 지나지 않았다. 그것은 머리 위에 강력한 황제의 손을 느끼고 싶다는 모두의 바람을 검열의 승인 없이 표현한 것일 뿐이었다. 그러나 신민다운 충성에서 나온 이 요구가 정부에는 반란으로 보였고, 반란으로 탄압받았다.

이것은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경쟁으로 설명된다. 두 나라는 저마다 폐지된 바르바로사의 왕좌에 기꺼이 앉고 싶어 했지만, 어느 쪽도 그 왕좌를 경쟁자가 차지하는 것은 받아들일 수 없었다. 그 결과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은, 전혀 다른 속셈에서이긴 하지만 그들과 보조를 맞춘 러시아와 프랑스의 지지를 동시에 받으며, 단일하고 강대한 범게르만 제국을 세우려는 모든 독일인의 공통된 열망을 가장 극단적인 자유주의의 발현으로 여겨 탄압하기 시작했다.

코체부 살해는 더없이 격렬한 반동의 신호였다. 독일 군주들과 독일 각료들의 회합과 회의, 그리고 알렉산드르 1세 황제와 프랑스 공사가 참여한 국제 회의까지 열리기 시작했다. 독일 연방이 명령한 일련의 조치로 가련한 농노 근성의 독일 자유주의자들을 옭아맸다. 체조에 열중하는 것도, 애국 노래를 부르는 것도 금지했다. 그들에게는 맥주만 남겨 주었다. 곳곳에 검열을 두었다. 그러자 어떻게 되었는가? 독일은 갑자기 잠잠해졌고, 대학생들은 항의의 그림자조차 없이 복종했으며, 1819년부터 1830년까지 11년 동안 독일 땅 어디에서도 어떤 정치 생활도 조금도 드러나지 않았다.

이 사실은 너무나 놀라워서, 1816~1865년 50년의 역사를 꽤 상세하고 진실하게 쓴 독일 교수 뮐러는 이 갑작스럽고 참으로 기적 같은 평정의 모든 정황을 이야기하면서 이렇게 외친다. 「독일에 혁명의 토양이 없다는 데 다른 증거가 더 필요한가?」

독일 자유주의의 두 번째 시기는 1830년에 시작되어 1840년 무렵에 끝났다. 이것은 프랑스인을 거의 맹목적으로 모방한 시기다. 독일인들은 갈리아인을 잡아먹기를 그치는 대신 모든 증오를 러시아에 돌린다.

독일 자유주의는 11년의 잠에서 스스로의 움직임으로 깨어난 것이 아니라, 파리의 7월 사흘 덕분에 깨어났다. 파리는 정통 국왕을 쫓아냄으로써 신성동맹에 첫 타격을 가했다. 뒤이어 벨기에와 폴란드에서 혁명이 터졌다. 이탈리아도 몸을 떨치고 일어났지만, 루이 필리프가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넘겨주는 바람에 더 무거운 멍에를 졌다. 스페인에서는 크리스티노파와 카를로스파 사이에 내전이 불붙었다. 이런 상황에서는 독일조차 깨어나지 않을 수 없었다.

이 각성은 7월 혁명이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을 포함한 모든 독일 정부를 죽도록 겁에 질리게 했기 때문에 더욱 쉬웠다. 비스마르크 공이 그의 국왕 겸 황제와 함께 독일 왕좌에 자리 잡을 때까지, 모든 독일 정부는 겉으로는 군사적·정치적·부르주아적 힘을 고루 갖추었는데도 도덕적으로는 지극히 나약했고 자신에 대한 믿음을 모두 잃은 상태였다. 이 의심할 여지 없는 사실은 게르만 종족의 대물림된 유순함과 신민 근성을 생각하면 몹시 이상해 보인다. 정부들이 무엇을 걱정하고 두려워할 필요가 있었겠는가? 정부들은 독일인들이 선량한 신민답게 복종하기는 하지만 정부를 견딜 수 없이 싫어한다는 것을 느꼈고 알았다. 그렇다면 자기 통치자들을 숭배하려는 성향이 이토록 강한 종족의 증오를 잠재우려고 정부들은 무엇을 했는가? 그리고 이 증오의 원인은 정확히 무엇이었는가?

원인은 두 가지였다. 첫째는 관료 기구와 군대에서 귀족 요소가 우세했다는 점이다. 7월 혁명은 프랑스에서 봉건적·성직자적 우세의 잔재를 없앴다. 영국에서도 7월 혁명에 뒤이어 자유주의적 부르주아 개혁이 승리했다. 대체로 1830년부터 유럽에서 부르주아지의 완전한 승리가 시작되지만, 독일에서만은 그렇지 않았다. 독일에서는 바로 최근까지, 곧 귀족 비스마르크가 자리 잡을 때까지 봉건 당파가 계속 군림했다. 관료 기구와 군대 모두에서 모든 고위직과 하위직의 대부분이 그들 손에 있었다. 독일 귀족들, 곧 공, 백작, 남작, 심지어 그저 「폰」을 단 자들까지 시민을 얼마나 경멸적이고 오만하게 대하는지는 누구나 안다. 1848년 프라하를, 1849년 빈을 포격한 오스트리아 장군 빈디슈그레츠 공의 유명한 말이 있다. 「인간은 남작부터 시작된다.」 이러한 귀족의 우세는 독일 시민들에게 더욱 모욕적이었다. 이 귀족은 모든 면에서, 부로 보나 지적 발달로 보나 부르주아 계급보다 비교할 수 없이 낮았기 때문이다. 그런데도 귀족은 어디서나 모든 사람을 지휘했다. 시민들에게 주어진 것은 돈을 내고 복종할 권리뿐이었다. 이것은 시민들에게 몹시 불쾌한 일이었다. 그리고 정통 군주를 숭배할 준비는 얼마든지 되어 있었지만, 거의 전적으로 귀족 손에 있는 정부만은 참을 수 없었다.

그러나 주목할 만하게도 그들은 여러 번 시도했으면서도 귀족의 멍에를 끝내 벗어던지지 못했다. 그 멍에는 격동의 1848년과 1849년조차 견뎌 냈고, 이제야 포메른 귀족 비스마르크 공에 의해 체계적으로 무너지기 시작하고 있다.

독일인들이 정부를 싫어한 다른, 그리고 가장 주된 원인은 우리가 이미 설명했다. 정부들은 독일이 강력한 국가로 통일되는 것에 반대했다. 따라서 독일 애국자들의 모든 부르주아적·정치적 본능이 정부들에 의해 모욕당했다. 정부들은 이것을 알았기에 자기 신민을 믿지 않았고, 신민들이 끝없는 순종과 완전한 결백을 증명하려고 끊임없이 애썼는데도 진심으로 그들을 두려워했다.

이러한 오해 때문에 정부들은 7월 혁명의 여파에 몹시 놀랐다. 어찌나 놀랐는지, 독일인들 말로 「푸치」라는 더없이 순진하고 피 한 방울 흘리지 않는 거리 소동만으로도 작센 국왕과 하노버 국왕, 헤센다름슈타트 공작과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신민에게 헌법을 주기에 충분했다. 나아가 프로이센과 오스트리아, 심지어 그때까지 독일 전체 반동의 영혼이었던 메테르니히 공까지도 이제 독일 연방에 독일의 충성스러운 신민들의 정당한 요구에 맞서지 말라고 권고했다. 남독일의 의회들에서는 이른바 자유주의 당파의 지도자들이 전독일 의회 요구를 다시 꺼내고 범게르만 황제를 선출하자고 아주 큰 소리로 말하기 시작했다.

모든 것은 폴란드 혁명의 결말에 달려 있었다. 만약 폴란드 혁명이 승리했다면, 북동쪽의 버팀목을 잃고 폴란드 영토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상당 부분을 내주어야 했을 프로이센 군주국은 독일 안에서 새로운 버팀목을 찾아야 했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는 아직 정복으로 그것을 얻을 수 없었으므로, 자유주의적 개혁으로 나머지 독일의 호의와 사랑을 얻고 모든 독일인을 과감히 제국의 깃발 아래 불러 모아야 했을 것이다… 한마디로 지금 이루어진 일이 다른 경로를 거쳐서이긴 하지만 이미 그때 실현되었을 것이며, 어쩌면 처음에는 더 자유주의적인 형태로 실현되었을 것이다. 지금처럼 프로이센이 독일을 삼키는 대신, 그때는 독일이 프로이센을 삼키는 것처럼 보였을지도 모른다. 그러나 그것은 그렇게 보였을 뿐일 것이다. 실제로는 독일이 여전히 프로이센 국가 조직의 힘에 예속되었을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온 유럽에 버림받고 배신당한 폴란드인들은 영웅적으로 저항했음에도 마침내 패배했다. 바르샤바가 함락되었고, 그와 함께 독일 애국주의의 모든 희망도 무너졌다. 사위인 니콜라이 황제에게 그토록 큰 도움을 준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는 사위의 승리에 고무되어 가면을 벗고 예전보다 더 심하게 범게르만 애국자들을 박해했다. 그러자 그들은 온 힘을 모아 마지막 엄숙한 표명을 했다. 강력하지는 않았더라도 적어도 대단히 요란했던 이 표명은 1832년 5월의 함바흐 축제라는 이름으로 독일 최근사에 남아 있다.

바이에른령 팔츠의 함바흐에 이번에는 남녀 약 3만 명이 모였다. 남자들은 어깨에 삼색 띠를 두르고 여자들은 삼색 스카프를 둘렀으며, 모두가 물론 독일 삼색기 아래 있었다. 이 집회에서는 더 이상 독일 여러 나라와 종족의 연방이 아니라 범게르만 중앙집권화가 이야기되었다. 몇몇 연설자, 이를테면 비르트 박사는 독일 공화국, 나아가 유럽 연방 공화국, 유럽 합중국이라는 이름까지 입에 올렸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말에 지나지 않았다. 독일 군주들이 범게르만 제국을 세우려 하지 않거나 세울 힘이 없다는 것이 뻔히 드러나자 독일인의 가슴속에 일어난 분노와 증오와 절망의 말, 지극히 웅변적이었지만 그 뒤에 의지도 조직도 없었고, 따라서 힘도 없었던 말이었다.

그렇지만 함바흐 집회가 아무 흔적도 남기지 않은 것은 아니었다. 바이에른령 팔츠의 농민들은 말로 만족하지 않았다. 그들은 낫과 쇠스랑으로 무장하고 귀족의 성과 세관과 관청을 부수러 나서서 모든 서류를 불태우고, 세금 납부를 거부하며, 자신들에게 토지를, 그리고 그 토지 위에서의 완전한 자유를 요구했다. 그 발단이 1525년 독일 농민의 전면 봉기와 아주 닮은 이 농민 반란은 보수주의자들뿐 아니라 자유주의자들과 독일 공화주의자들까지도 몹시 겁에 질리게 했다. 그들의 부르주아 자유주의는 진정한 인민 반란과 결코 양립할 수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모두가 흡족하게도, 다시 일어난 이 농민 봉기 시도는 바이에른 군대에 진압되었다.

함바흐 축제의 또 다른 결과는 무장한 학생 70명이 프랑크푸르트에서 독일 연방 청사를 지키던 중앙 위병소를 습격한 사건이었다. 이것은 터무니없는 짓이었지만, 대단히 대담했고 그런 점에서 존경할 만했다. 이 기도가 터무니없었던 까닭은 독일 연방을 쳐야 할 곳이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베를린이나 빈이었기 때문이고, 학생 70명으로는 독일에서 반동의 힘을 꺾기에 턱없이 부족했기 때문이다. 물론 그들은 프랑크푸르트 시민 전체가 자기들 뒤에서, 자기들과 함께 일어서리라고 기대했다. 정부가 며칠 전에 이미 이 무모한 시도를 통보받았다는 사실은 꿈에도 몰랐다. 그런데 정부는 이를 미리 막을 필요가 없다고 여겼고, 오히려 그것이 일어나도록 내버려 두었다. 나중에 독일의 혁명가들과 혁명적 열망을 완전히 뿌리 뽑을 좋은 구실을 얻기 위해서였다.

그리고 실제로 프랑크푸르트 습격 사건 뒤에 독일 모든 나라에서 더없이 무서운 반동이 일어났다. 프랑크푸르트에는 중앙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그 지휘 아래 크고 작은 모든 나라의 특별위원회가 활동했다. 중앙위원회에는 물론 오스트리아와 프로이센의 국가 심문관들이 앉아 있었다. 이것은 독일 관리들과 독일 제지 공장들에게 참으로 축제였다. 헤아릴 수 없이 많은 종이가 글로 채워졌기 때문이다. 독일 전역에서 1800명 넘게 체포되었고, 그중에는 교수, 박사, 변호사 같은 존경받는 인사도 많았다. 한마디로 자유주의 독일의 꽃 전부였다. 많은 이가 도망쳤지만, 많은 이가 1840년까지, 일부는 1848년까지 요새에 갇혀 있었다.

우리는 이 필사적인 자유주의자들 가운데 상당수를 1848년 3월 예비의회에서, 이어 국민의회에서 보았다. 그들은 하나같이 필사적인 반동분자로 드러났다.

함바흐 축제, 팔츠의 농민 봉기, 프랑크푸르트 습격 사건, 그리고 그 뒤에 이어진 거대한 재판으로 독일의 모든 정치 운동은 끝났고, 1848년까지 조금도 끊기지 않고 이어진 무덤 같은 고요가 찾아왔다. 그 대신 운동은 문학으로 옮겨 갔다.

앞서 말했듯이, 제1기(1815~1830), 곧 광적인 프랑스 혐오의 시기와 달리, 독일 자유주의의 이 제2기(1830~1840)와 제3기(1848년까지)는 적어도 문예와 정치 문헌에 관한 한 순전히 프랑스적인 시기라고 부를 수 있다. 이 새로운 경향의 선두에는 두 유대인이 서 있었다. 한 사람은 천재 시인 하이네, 다른 한 사람은 독일의 뛰어난 팸플릿 작가 뵈르네였다. 두 사람은 7월 혁명이 일어나자 거의 첫날에 파리로 옮겨 갔고, 거기서 한 사람은 시로, 다른 한 사람은 《파리 서간》으로 독일인들에게 프랑스의 이론, 프랑스의 제도, 파리의 생활을 설파하기 시작했다.

그들은 독일 문학에 일대 전환을 일으켰다고 할 수 있다. 서점과 대본 도서관은 프랑스 희곡, 멜로드라마, 희극, 중편, 장편소설의 번역과 아주 형편없는 모방작으로 넘쳐났다. 젊은 부르주아 세계는 프랑스식으로 생각하고, 느끼고, 말하고, 머리를 빗고, 옷을 입기 시작했다. 그렇다고 그 세계가 조금이라도 더 호감 가게 된 것은 결코 아니고, 다만 더 우스꽝스러워졌을 뿐이다.

그러나 동시에 베를린에서는 더 진지하고 더 철저하며, 무엇보다 독일 정신에 비교할 수 없이 더 잘 맞는 경향이 뿌리를 내리고 있었다. 역사에서 흔히 그랬듯이, 7월 혁명 직후에 찾아온 헤겔의 죽음은 베를린에서, 프로이센에서, 그다음에는 독일 전역에서 그의 형이상학적 사상의 우위, 곧 헤겔주의의 왕국을 굳건히 했다.

프로이센은 적어도 당분간은, 그리고 앞서 말한 이유들 때문에, 자유주의적 개혁을 통해 독일을 하나의 분할할 수 없는 국가로 통합하는 일을 단념했다. 그러나 다른 모든 독일 국가와 지방에 대한 도덕적·물질적 우위까지 완전히 포기할 수는 없었고 포기하려 하지도 않았다. 오히려 프로이센은 독일 전체의 정신적·경제적 이해관계를 자기 주위로 끌어모으려고 끊임없이 애썼다. 이를 위해 프로이센은 두 가지 수단을 썼다. 베를린 대학의 육성과 관세동맹이 그것이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3세 치세의 마지막 몇 해 동안 국민교육 장관은 슈타인 남작, 빌헬름 폰 훔볼트 등이 속한 옛 자유주의 학파의 정치가인 추밀고문관 폰 알텐슈타인이었다. 그 반동 시대에 가능한 한도 안에서, 그는 다른 모든 프로이센 장관들, 곧 자기 동료들에게 맞서고, 모든 정신의 빛을 체계적으로 꺼뜨림으로써 오스트리아와 독일 전체에 반동의 지배를 굳히려던 메테르니히에게 맞서면서, 옛 자유주의 전통에 충실하게 진보적인 인물들과 독일 학문의 명사들을 모두 베를린 대학에 모으려고 애썼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정부가 메테르니히와 한통속이 되어 니콜라이 황제의 부추김을 받으며 무슨 수를 써서라도 자유주의와 자유주의자들을 짓누르던 바로 그때, 베를린은 독일의 학문적·정신적 삶의 중심지, 그 눈부신 초점이 되었다.

헤겔은 일찍이 1818년에 프로이센 정부의 초빙을 받아 피히테의 강좌를 맡았고, 1831년 말에 죽었다. 그러나 그는 베를린 대학, 쾨니히스베르크 대학, 할레 대학에 젊은 교수들, 곧 자기 저작의 편집자들이자 자기 학설의 열렬한 신봉자이자 해석자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학파를 통째로 남겼다. 이들의 지칠 줄 모르는 노력 덕분에 이 학설은 곧 독일 전체뿐 아니라 유럽의 여러 나라, 심지어 프랑스에까지 퍼졌다. 프랑스에는 빅토르 쿠쟁이 그것을 완전히 일그러뜨려 옮겨 놓았다. 이 학설은 새로운 계시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새로운 빛의 살아 있는 원천인 양 베를린에 수많은 독일인과 비독일인의 지성을 붙잡아 두었다. 그 시대를 살아 보지 않은 사람은 1830년대와 1840년대에 이 철학 체계의 매력이 얼마나 강력했는지 결코 이해하지 못할 것이다. 사람들은 영원히 찾아 헤매던 절대자가 마침내 발견되고 파악되었으며, 이제 그것을 베를린에서 소매로든 도매로든 살 수 있다고 생각했다.

인간 사유의 발전사에서 헤겔 철학은 참으로 중요한 현상이었다. 그것은 레싱의 저작에서 시작되어 괴테의 저작에서 전면적으로 발전한 독일 정신의 범신론적·추상적 인도주의 운동의 마지막이자 결정적인 말이었다. 이 운동은 한없이 넓고 풍요롭고 고귀하며 완전히 합리적인 듯한 세계를 창조했다. 그러나 그 세계는 기독교적·신학적 하늘과 동떨어진 만큼이나 땅과 삶과 현실과도 동떨어져 있었다. 그 결과 이 세계는 신기루처럼 하늘에 이르지도 땅에 닿지도 못한 채 하늘과 땅 사이에 매달려, 자기 신봉자들, 곧 반성하고 시를 짓는 그 주민들의 삶 자체를 몽유병적 표상과 체험이 끝없이 이어지는 행렬로 바꾸어 놓았다. 그리하여 그들을 삶에 아무 쓸모 없는 존재로 만들었고, 더 나쁘게는 그들이 시적 또는 형이상학적 이상 속에서 숭배하던 것과 정반대의 일을 현실 세계에서 하도록 운명지었다.

이렇게 해서 오늘날까지도 독일에서 우리를 놀라게 하는 놀랍고도 꽤 일반적인 사실이 설명된다. 레싱, 실러, 괴테, 칸트, 피히테, 헤겔의 열렬한 숭배자들이 정부가 명하는, 인도적이지도 자유주의적이지도 않은 것과는 거리가 먼 조치들을 고분고분하게, 심지어 기꺼이 집행할 수 있었고 지금도 그럴 수 있다는 사실 말이다. 일반적으로 독일인의 관념 세계가 고매하면 고매할수록 살아 있는 현실에서 그의 삶과 행동은 더 흉하고 더 저속하다고까지 말할 수 있다.

이 고도로 관념적인 세계를 최종적으로 완성한 것이 헤겔 철학이었다. 헤겔 철학은 자신의 형이상학적 구성과 범주들로 그 세계를 남김없이 표현하고 설명했으며, 바로 그럼으로써 그 세계를 죽였다. 철의 논리를 거쳐, 그 세계와 자기 자신이 한없이 파탄 나 있고 실재하지 않으며, 쉽게 말해 공허하다는 것을 마침내 자각하기에 이르렀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헤겔 학파는 두 개의 상반된 당파로 갈라졌다. 물론 그 사이에 제3의 중간 당파도 생겼지만, 여기서 그에 관해 말할 것은 없다. 그중 한쪽, 곧 보수 당파는 헤겔의 유명한 말 「모든 현실적인 것은 이성적이다」에 매달려 새 철학에서 현존하는 모든 것의 정당화와 합법화를 찾아냈다. 이 당파는 헤겔 자신이 이미 정치 체제의 이상으로 내세운 프로이센 군주정의 이른바 공식 철학을 만들어 냈다.

그러나 반대편 당파, 곧 이른바 혁명적 헤겔주의자들은 헤겔 자신보다 더 일관되고 비교할 수 없이 더 대담한 것으로 드러났다. 이 당파는 헤겔의 학설에서 보수적인 가면을 벗겨 내고, 그 학설의 참된 본질을 이루는 무자비한 부정을 적나라하게 드러냈다. 이 당파의 선두에는 유명한 포이어바흐가 섰다. 그는 논리적 일관성을 밀고 나가 신적 세계 전체를 완전히 부정했을 뿐 아니라 형이상학 자체까지 부정하기에 이르렀다. 그는 그 이상 나아갈 수 없었다. 그 자신은 어디까지나 형이상학자였으므로, 자신의 정당한 후계자들, 곧 유물론자 또는 실재론자 학파의 대표자들에게 자리를 내주어야 했다. 하기야 그 대표자들 대부분은, 예컨대 뷔히너 씨, 마르크스 씨 등은 형이상학적 추상 사유의 지배에서 벗어날 줄 몰랐고 지금도 모른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완전한 부정의 방향으로 발전된 헤겔주의가 퍼진 뒤에 뒤따를 혁명이 1793년의 혁명보다 비교할 수 없이 더 급진적이고 더 깊고 더 무자비하며 그 파괴의 폭도 더 넓으리라는 견해가 지배적이었다. 그렇게 생각한 것은, 헤겔이 다듬어 내고 그의 제자들이 가장 극단적인 결론에까지 밀고 나간 철학 사상이 실제로 볼테르와 루소의 사상보다 더 완전하고 더 전면적이며 더 깊었기 때문이다. 잘 알려진 대로 볼테르와 루소는 제1차 프랑스 혁명의 전개에, 무엇보다 그 결말에 더없이 직접적이면서도 결코 늘 유익하지만은 않은 영향을 미쳤다. 예컨대 인민 대중, 곧 어리석은 군중을 본능적으로 경멸한 볼테르의 숭배자들이 미라보 같은 정치가들이었다는 것, 그리고 장 자크 루소의 가장 광신적인 추종자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가 프랑스에서 신적 질서와 반동적 시민 질서를 복구한 자였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1830년대와 1840년대에는 혁명적 행동의 때가 다시 오면 헤겔 학파의 철학 박사들이 1790년대의 가장 대담한 활동가들을 훨씬 뒤로 따돌리고, 엄밀하게 논리적이고 무자비한 혁명주의로 세계를 놀라게 하리라고 여겼다. 시인 하이네는 이 주제로 웅변적인 말을 많이 남겼다. 「당신들의 모든 혁명은」 하고 그는 프랑스인들에게 말했다. 「우리의 미래 독일 혁명 앞에서는 아무것도 아닙니다. 신적 세계 전체를 체계적으로, 학문적으로 파괴하는 대담함을 지녔던 우리는 지상의 어떤 우상 앞에서도 멈추지 않을 것이며, 특권과 권력의 폐허 위에서 온 세계를 위해 가장 완전한 평등과 가장 완전한 자유를 쟁취할 때까지 쉬지 않을 것입니다.」 거의 이런 말로 하이네는 프랑스인들에게 독일 혁명이 장차 일으킬 기적을 예고했다. 그리고 많은 이가 그를 믿었다. 그러나 아아! 1848년과 1849년의 경험만으로도 이 믿음을 산산조각 내기에 충분했다. 독일 혁명가들은 제1차 프랑스 혁명의 영웅들을 능가하지 못했을 뿐 아니라, 1830년대의 프랑스 혁명가들과 견줄 만큼도 되지 못했다.

이 비참한 무능의 원인은 무엇인가? 그것은 물론 주로 독일인의 특수한 역사적 성격, 곧 반란보다는 충직한 신민의 복종에 훨씬 더 기울게 하는 성격으로 설명되지만, 독일이 혁명으로 나아간 그 추상적 방법으로도 설명된다. 이번에도 자기 본성에 맞게, 독일은 삶에서 사상으로가 아니라 사상에서 삶으로 나아갔다. 그러나 추상적 사상에서 출발하는 자는 결코 삶에 이르지 못한다. 형이상학에서 삶으로 가는 길은 없기 때문이다. 둘은 심연으로 갈라져 있다. 그리고 이 심연을 뛰어넘는 것, 곧 살토 모르탈레를, 또는 헤겔 자신이 논리의 세계에서 자연의 세계, 살아 있는 현실의 세계로 넘어가는 질적 도약(qualitativer Sprung)이라고 부른 것을 해내는 일은 아직 아무도 성공하지 못했고 앞으로도 결코 아무도 성공하지 못할 것이다. 추상에 기대는 자는 추상 속에서 죽을 것이다.

살아 있는, 구체적이고 이성적인 길 — 그것은 학문에서는 현실의 사실에서 그것을 포괄하고 표현하며 그럼으로써 설명하는 사상으로 나아가는 길이고, 실천의 세계에서는 — 사회적 삶에서 출발하여 바로 그 삶의 지시와 조건과 요구와 다소간 격렬한 요청에 따라 그 삶을 가능한 한 이성적으로 조직하는 데로 나아가는 운동이다.

이것이 넓은 인민의 길, 진정하고 완전한 해방의 길, 누구에게나 열려 있기에 참으로 인민적인 길, 곧 아나키적 사회혁명의 길이다. 이 혁명은 인민 속에서 스스로 일어나, 인민적 삶의 드넓은 범람을 가로막는 모든 것을 파괴하고, 그런 다음 인민 존재의 가장 깊은 곳에서 자유로운 사회생활의 새로운 형태를 창조한다.

형이상학자 나리들의 길은 전혀 다르다. 우리가 형이상학자라고 부르는 것은 세상에 이제 얼마 남지 않은 헤겔 학설의 추종자들만이 아니라, 실증주의자들, 그리고 일반적으로 오늘날 학문이라는 여신을 설교하는 모든 이들이다. 한마디로, 어떤 경로로든, 설령 과거와 현재를 가장 꼼꼼하게, 그러나 필연적으로 언제나 불완전하게 연구한 결과일지라도, 사회 조직의 이상을 스스로 만들어 내고는 새로운 프로크루스테스처럼 무슨 수를 써서라도 미래 세대의 삶을 거기에 끼워 맞추려는 모든 이들이다. 다시 말해 사상과 학문을 자연적·사회적 삶의 필연적 발현 가운데 하나로 보지 않고, 이 가련한 삶을 지나치게 좁혀서 그 안에서 오직 자기 사상과, 물론 언제나 불완전한 자기 학문의 실천적 발현만을 보는 모든 이들이다.

형이상학자든 실증주의자든, 학문과 사상의 이름으로 자신들이 삶에 법칙을 정해 줄 소명을 받았다고 여기는 이 모든 학문과 사상의 기사들은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모두 반동가다. 이것을 증명하기는 지극히 쉽다.

형이상학 일반은 말할 것도 없다. 형이상학이 가장 눈부시게 번성하던 시대에도 그것을 다룬 사람은 극소수뿐이었다. 그보다 넓은 뜻의 학문, 곧 더 진지하고 그 이름에 조금이라도 값하는 학문은 오늘날 극히 미미한 소수만이 접근할 수 있다. 예컨대 우리 러시아에서는 주민 팔천만 명 가운데 진지한 학자를 몇 명이나 헤아릴 수 있는가? 학문을 입에 올리는 사람은 아마 수천 명을 헤아릴 수 있겠지만, 학문을 제대로 조금이라도 아는 사람은 몇백 명도 될까 말까 할 것이다. 그런데 만약 학문이 삶에 법칙을 정해 주어야 한다면, 압도적 다수인 수백만 명이 학자 백 명이나 이백 명에게, 실은 그보다 훨씬 적은 수에게 통치받아야 한다. 모든 학문이 사람을 사회 통치에 적합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고, 학문 중의 학문, 모든 학문의 정점 — 사회학만이 그렇게 하는데, 이 사회학은 그 복된 학자가 미리 다른 모든 학문을 진지하게 익혀 두었을 것을 전제하기 때문이다. 그런데 그런 학자가 러시아뿐 아니라 온 유럽에 몇이나 되는가? 스무 명이나 서른 명쯤일까! 그리고 이 스무 명이나 서른 명의 학자가 온 세계를 통치해야 한다! 이보다 더 터무니없고 더 혐오스러운 전제정을 상상할 수 있겠는가?

첫째, 이 서른 명의 학자는 십중팔구 저희끼리 물어뜯을 것이고, 뭉친다면 그것은 온 인류에게 화가 될 것이다. 학자란 이미 그 본질상 온갖 지적·도덕적 타락에 빠지기 쉬우며, 그의 주된 악덕 — 그것은 자기 지식과 자기 지성을 떠받들고 모르는 이들을 모두 멸시하는 것이다. 그에게 통치를 맡겨 보라. 그는 가장 견디기 힘든 폭군이 될 것이다. 학자의 오만은 다른 어떤 오만보다도 역겹고 모욕적이며 억압적이기 때문이다. 현학자들의 노예가 되다니 — 인류에게 이 무슨 운명인가! 그들에게 마음대로 하게 내버려 두면, 그들은 지금 학문의 이익을 위해 토끼와 고양이와 개에게 하는 것과 똑같은 실험을 인간 사회에 하게 될 것이다.

학자들을 그 공적에 따라 존경하자. 그러나 그들의 지성과 도덕을 구하기 위해서라도 그들에게 어떤 사회적 특권도 주어서는 안 되며, 자기 신념과 사상과 지식을 설파할 자유라는 모든 이의 권리 외에 다른 어떤 권리도 인정해서는 안 된다. 그 누구에게도 그렇듯 그들에게도 권력을 주어서는 안 된다. 권력을 쥔 자는 불변의 사회학적 법칙에 따라 반드시 사회의 압제자이자 착취자가 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학문이 언제까지나 소수만의 소유물로 남지는 않을 것이며, 누구에게나, 모든 사람에게 열릴 때가 올 것이라고 말할 것이다. 글쎄, 그때는 아직 멀었고, 그때가 오기까지는 많은 사회적 변혁이 일어나야 한다. 그때까지 누가 자기 운명을 학자들의 손에, 학문의 사제들의 손에 맡기려 하겠는가? 그럴 바에야 무엇 하러 그것을 기독교 사제들의 손에서 빼앗는가?

사회혁명 뒤에는 모든 사람이 똑같이 학식을 갖추게 되리라고 상상하는 이들은 크게 잘못 생각하고 있다고 우리는 본다. 학문은 학문으로서 그때도 지금처럼 수많은 사회적 전문 분야 가운데 하나로 남을 것이다. 다만 이런 차이는 있을 것이다. 지금은 특권 계급 사람들만 접근할 수 있는 이 전문 분야가, 그때는 단번에 영원히 철폐된 계급의 구별 없이, 누구에게나 의무가 될 일반 육체노동에 지장을 주지 않는 한에서 거기에 종사할 소질과 의욕이 있는 모든 사람에게 열릴 것이다.

모두의 공유 재산이 되는 것은 일반적인 학문 교육, 그리고 무엇보다 학문적 방법에 대한 친숙함, 곧 사고하는 습관, 다시 말해 사실들을 일반화하여 그로부터 다소간 올바른 결론을 이끌어 내는 습관뿐일 것이다. 그러나 백과사전적인 두뇌, 따라서 학식 있는 사회학자는 언제나 아주 드물 것이다. 만일 언젠가 사상이 삶의 원천이자 유일한 지도자가 되고 학문과 학식이 사회 통치의 선두에 선다면 인류에게 화가 될 것이다. 삶은 메말라 버리고 인간 사회는 말 못 하는 노예의 무리로 변할 것이다. 학문이 삶을 다스리면 온 인류를 우둔하게 만드는 것 말고 다른 결과는 있을 수 없을 것이다.

우리 아나키스트 혁명가들은 전 인민의 교육과 해방과 사회생활의 폭넓은 발전을 옹호하는 자들이며, 따라서 국가와 모든 국가 행세의 적이다. 모든 형이상학자, 실증주의자, 학문이라는 여신을 숭배하는 학식 있는 자와 없는 자 모두에 맞서, 우리는 자연적·사회적 삶이 언제나 사상에 앞선다고 주장한다. 사상은 삶의 기능 가운데 하나일 뿐이며 결코 삶의 결과가 아니다. 삶은 자신의 마르지 않는 깊이에서, 추상적 반성들의 연속이 아니라 다양한 사실들의 연속을 통해 발전한다. 그리고 추상적 반성은 언제나 삶이 낳는 것이지 결코 삶을 낳지 못하며, 이정표처럼 삶의 방향과 그 독자적이고 자생적인 발전의 여러 국면을 가리킬 뿐이다.

이러한 확신에 따라, 우리는 책에서 읽어 낸 것이든 우리 스스로 지어낸 것이든 어떤 사회 체제의 이상도 우리 인민이나 다른 인민에게 강요할 의도가 없으며 그런 시도를 조금도 하지 않는다. 오히려 우리는 인민 대중이 역사에 의해 다소간 발전된 자기 본능 속에, 절실한 필요 속에, 의식적·무의식적 열망 속에 자신의 미래의 정상적 조직의 모든 요소를 지니고 있다고 확신하기에, 그 이상을 인민 자신 속에서 찾는다. 그리고 모든 국가 권력, 모든 정부는 그 본질상, 그 위치상 인민 밖에, 인민 위에 놓여 있기 때문에 반드시 인민을 인민에게 낯선 질서와 목적에 복종시키려 하게 마련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모든 정부 권력, 국가 권력의 적, 국가 체제 일반의 적임을 선언하며, 인민은 아래로부터 위로, 자발적이고 완전히 자유로운 결합을 통해, 모든 공식적 후견 없이, 그러나 개인과 당파의 다양하고 똑같이 자유로운 영향까지 배제하지는 않은 채 스스로 자기 삶을 창조할 때에만 행복하고 자유로울 수 있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사회혁명가들의 확신이며, 이 때문에 사람들은 우리를 아나키스트라고 부른다. 우리는 이 명칭에 항의하지 않는다. 우리는 실제로 모든 권력의 적이기 때문이다. 권력은 그것을 쥔 자들에게도, 그것에 복종하도록 강요당하는 자들에게도 똑같이 타락시키는 작용을 한다는 것을 우리는 안다. 그 해로운 영향 아래에서 어떤 이들은 공명심과 탐욕에 찬 전제자, 곧 자신의 개인적 이익이나 신분적 이익을 위해 사회를 착취하는 자가 되고, 다른 이들은 — 노예가 된다.

온갖 종류의 관념론자들, 형이상학자들, 실증주의자들, 삶에 대한 학문의 우위를 옹호하는 자들, 교조적 혁명가들은 모두 한데 모여, 논거는 서로 달라도 똑같은 열의로 국가와 국가 권력의 관념을 옹호한다. 그들은 그 안에서, 그들 나름으로는 완전히 논리적으로, 사회의 유일한 구원을 본다. 완전히 논리적이라고 하는 것은, 그들이 우리가 보기에 완전히 거짓인 명제, 곧 사상이 삶에 앞서고 추상적 이론이 사회적 실천에 앞서며, 따라서 사회학이 사회적 변혁과 개조의 출발점이 되어야 한다는 명제를 한번 기초로 받아들인 이상, 필연적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기 때문이다. 곧 사상, 이론, 학문은 적어도 현재로서는 극소수만의 소유물이므로, 이 극소수가 사회생활의 지도자가 되어야 하고, 모든 인민 운동의 선동자일 뿐 아니라 관리자가 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혁명 다음 날 새로운 사회 조직은 인민의 필요와 본능에 따라 인민의 결사, 공동체, 향, 지방이 아래로부터 위로 자유롭게 결합하여 만드는 것이 아니라, 전 인민의 의지를 표현한다고 하는 이 학식 있는 소수의 독재 권력만이 만들어야 한다는 것이다.

인민 대표제라는 거짓 허구 위에, 그리고 한 줌의 특권층이 인민 대중을 다스린다는 현실의 사실 위에 국가성 이론과 이른바 혁명적 독재 이론이 똑같이 기초를 두고 있다. 그 특권층은 선거를 위해 끌려 나와 무엇 때문에 누구를 뽑는지 결코 알지 못하는 인민 무리가 뽑은, 아니 뽑았다고 할 수도 없는 자들이다. 살아 있는 실제 인민은 조금도 알지 못하는 가상의 전 인민적 사상과 의지를 이렇게 거짓되고 추상적으로 표현한다는 것, 바로 이것이 두 이론의 공통된 기초다.

혁명적 독재와 국가성의 차이는 오직 겉모습에 있을 뿐이다. 본질에서 둘은 똑같이, 다수는 어리석고 소수는 총명하다는 거짓 명분을 내세워 소수가 다수를 다스리는 통치다. 그러므로 둘은 똑같이 반동적이다. 둘 다 직접적이고 필연적인 결과로 통치하는 소수의 정치적·경제적 특권을 굳히고, 인민 대중의 정치적·경제적 예속을 굳히기 때문이다.

이제 분명해진다. 기존 권력과 질서를 무너뜨리고 그 폐허 위에 자기들의 독재를 세우려는 교조적 혁명가들이 왜 국가의 적이었던 적이 결코 없고 앞으로도 없을 것이며, 오히려 언제나 국가의 가장 열렬한 옹호자였고 앞으로도 그럴 것인지가. 그들은 현재의 권력의 적일 뿐이다. 현재의 권력이 자기들의 독재 가능성을 가로막기 때문이다. 그러나 동시에 그들은 — 국가 권력의 가장 열렬한 벗이다. 국가 권력을 붙들어 두지 않으면 혁명이 인민 대중을 참으로 해방하여, 이 겉으로만 혁명적인 소수에게서 인민 대중을 새 멍에에 매어 놓고 자기들의 통치 조치로 은혜를 베풀어 보겠다는 모든 희망을 앗아 갈 것이기 때문이다.

이것이 얼마나 옳은지는 지금의 형세가 보여 준다. 지금 온 유럽에서 반동이 승리를 거두고 있다. 모든 국가가 더없이 악랄한 자기 보존과 인민 억압의 정신에 사로잡혀 군사·경찰·재정이라는 삼중 갑옷으로 머리부터 발끝까지 무장하고, 비스마르크 공의 최고 지휘 아래 사회혁명에 맞선 필사적인 투쟁을 준비하고 있다. 모든 진실한 혁명가라면 단결하여 국제 반동의 필사적인 공격을 막아 내야 할 것 같은 바로 지금, 우리는 오히려 마르크스 씨가 이끄는 교조적 혁명가들이 도처에서 인민 혁명에 맞서 국가성과 국가주의자들 편을 드는 것을 본다.

프랑스에서 그들은 1870년부터 혁명적인 남부 연맹(La Ligue du Midi)에 맞서 국가주의적 공화파이자 반동가인 강베타 편에 섰다. 그러나 독일의 예속으로부터, 그리고 그보다 더 위험하며 지금 승리를 거두고 있는 성직자파·정통왕당파·오를레앙파·보나파르트파의 연합으로부터 프랑스를 구할 수 있었던 것은 오직 남부 연맹뿐이었다. 이탈리아에서 그들은 가리발디와 마치니파의 잔당에게 추파를 던지고 있다. 스페인에서는 카스텔라르, 피 이 마르갈, 마드리드 제헌의회 편을 공공연히 들었다. 끝으로 독일과 그 주변, 곧 오스트리아·스위스·네덜란드·덴마크에서 그들은 비스마르크 공을 섬기며 이 모든 나라를 범게르만화하는 일을 돕고 있다. 그들 스스로 인정하듯, 그들은 비스마르크 공을 매우 쓸모 있는 혁명적 활동가로 보고 있다.

이제 분명해진다. 헤겔 학파의 철학 박사 나리들이 추상적 관념의 세계에서는 불타는 혁명주의를 보였으면서도 실제로는 1848년과 1849년에 혁명가가 아니라 대부분 반동가로 드러난 까닭이, 그리고 오늘날 그들 대다수가 비스마르크 공의 노골적인 지지자가 된 까닭이.

그러나 1820년대와 1840년대에는 그들의 거짓 혁명주의가 아직 어떤 식으로도 시험받지 않았기에 많은 신뢰를 얻었다. 그들 자신도 그것을 믿었지만, 대개 매우 추상적인 성격의 저작에서 그것을 드러냈기 때문에 프로이센 정부는 그것에 아무런 주의도 기울이지 않았다. 어쩌면 정부는 그때 이미 그들이 정부를 위해 일하고 있음을 알았는지도 모른다.

한편 프로이센 정부는 자신의 주된 목표 — 먼저 독일에서 프로이센의 패권을 세우고 그다음에는 독일 전체를 자신의 분할되지 않는 지배에 직접 복속시키는 일을 흔들림 없이 추구했다. 그 길로 택한 것은 자유주의적 개혁의 길이나 독일 학문을 장려하는 길보다도 정부 스스로 보기에 비교할 수 없이 유리하고 편리한 길 — 곧 경제의 길이었다. 이 길에서 정부는 부유한 상공업 부르주아지 전체와 독일의 유대 놈 금융계 전체의 뜨거운 공감을 얻게 되어 있었다. 이 둘의 번영은 반드시 광범한 국가 중앙집권을 요구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지금 독일계 스위스에서 그 새로운 예를 본다. 그곳의 대산업가·대상인과 은행가들은 광대한 독일 시장, 곧 주변의 모든 작은 나라에 보아뱀의 끌어당기는, 아니 빨아들이는 힘을 행사하는 범게르만 제국과 가장 긴밀하게 정치적으로 결합하기를 바란다는 속내를 이미 공공연히 드러내기 시작했다.

하기야 관세동맹을 세우자는 최초의 구상은 프로이센이 아니라 바이에른과 뷔르템베르크의 것이었다. 두 나라는 이미 1828년에 서로 그러한 동맹을 맺었다. 그러나 프로이센은 곧 그 구상과 그 실행을 모두 손에 넣었다.

예전에 독일에는 국가 수만큼이나 많은 세관과 온갖 잡다한 관세 제도가 있었다. 이 상황은 참으로 견딜 수 없는 것이어서 독일의 상업과 산업 전체를 침체에 빠뜨렸다. 그러므로 강력한 손으로 독일의 관세 통합에 나선 프로이센은 독일에 진정한 은혜를 베푼 셈이다. 이미 1836년에 프로이센 군주정의 최고 지휘 아래 두 헤센,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작센, 튀링겐, 바덴, 나사우, 그리고 자유시 프랑크푸르트가 동맹에 속해 있었다 — 모두 합쳐 주민 2700만 명이 넘었다. 남은 것은 하노버, 메클렌부르크 공국들과 올덴부르크 공국, 자유시 함부르크, 뤼베크, 브레멘, 그리고 끝으로 오스트리아 제국 전체뿐이었다.

그러나 바로 오스트리아 제국을 독일 관세동맹에서 배제하는 것이 프로이센의 핵심 이익이었다. 처음에는 경제적인 배제에 불과한 이 배제가 나중에는 정치적 배제까지 불러올 것이기 때문이었다.

1840년에 독일 자유주의의 제3기가 시작되었다. 이 시기를 특징짓기는 매우 어렵다. 이 시기는 더없이 다양한 경향, 학파, 이해관계, 사상이 다방면으로 발전했다는 점에서는 대단히 풍부하지만, 사실 면에서는 그만큼 빈약하다. 이 시기는 바로 1840년에 아버지의 왕위에 오른 국왕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의 엉뚱한 인격과 혼란스러운 글들로 온통 채워져 있다.

그와 함께 프로이센의 대러시아 관계가 완전히 달라졌다. 아버지와 동생, 곧 지금의 독일 황제와는 반대로, 새 국왕은 니콜라이 황제를 증오했다. 훗날 그는 이 일로 비싼 대가를 치렀고 쓰라리게, 그리고 떠들썩하게 이를 뉘우쳤다 — 그러나 치세 초기에는 악마도 그에게 무섭지 않았다. 반쯤 학자요 반쯤 시인이며, 생리적 허약에 시달리고 게다가 술꾼이었던 그는 떠돌이 낭만주의자들과 범게르만을 부르짖는 애국자들의 후원자이자 벗으로서, 아버지 생애의 마지막 몇 해 동안 독일 애국자들의 희망이었다. 모두가 그가 헌법을 내려 주리라고 기대했다.

그의 첫 조치는 전면 사면이었다. 니콜라이는 눈살을 찌푸렸지만, 그 대신 온 독일이 박수를 보냈고 자유주의적 희망은 더욱 커졌다. 그러나 그는 헌법을 내려 주지 않았다. 그 대신 정치적이고 낭만적이고 고대 게르만적인 온갖 헛소리를 하도 많이 늘어놓아서 독일인들조차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었다.

그런데 사정은 아주 간단했다. 허영심 많고 명예욕 강하며 진득하지 못하고 안절부절못하면서도, 끈기도 일할 능력도 없던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그저 왕좌에 앉은 향락가, 난봉꾼, 낭만주의자, 아니면 제멋대로인 폭군이었다. 실제적인 일에는 아무 능력도 없는 사람이었기에 그는 아무것도 의심하지 않았다. 그는 자신이 그 신비로운 신적 소명을 진심으로 믿었던 왕권이 자기 마음 내키는 대로 그야말로 무엇이든 할 권리와 힘을 주며, 논리와 자연과 사회의 모든 법칙을 거슬러 가장 불가능한 일을 이루고 도저히 양립할 수 없는 것들을 결합할 권리와 힘을 준다고 여겼다.

그리하여 그는 프로이센에 완전한 자유가 있기를 바라면서도, 동시에 왕권은 무제한으로 남고 자신의 자의는 아무것에도 얽매이지 않기를 바랐다. 이런 정신으로 그는 처음에는 지방 헌법만 포고하다가, 1847년에는 일반 헌법 비슷한 것을 내려 주었다. 그러나 이 모든 것에 진지한 것은 하나도 없었다. 단 한 가지만 있었을 뿐이다. 서로를 보완하고 서로 모순되는 끊임없는 시도로 그는 낡은 질서 전체를 뒤집어 놓았고, 위에서 아래까지 자기 신민들을 단단히 들쑤셔 놓았다. 모두가 무언가를 기대하기 시작했다.

그 무언가란 1848년 혁명이었다. 모두가 그 혁명이 다가오는 것을 프랑스와 이탈리아에서뿐 아니라 독일에서까지 느꼈다. 그렇다, 바로 독일에서였다. 독일은 이 제3기, 곧 1840년부터 1848년 사이에 프랑스의 반역 정신을 흠뻑 들이마셨다. 이러한 프랑스적 정신 풍조를 헤겔주의는 조금도 방해하지 않았다. 오히려 헤겔주의는 자신의 추상적 혁명주의의 결론을 프랑스어로, 물론 걸맞은 둔중함과 독일식 억양을 섞어 표현하기를 무척 좋아했다. 독일이 이 시기만큼 프랑스 책을 많이 읽은 적은 없었다. 독일은 자기 문학을 잊어버린 듯했다. 그 대신 프랑스 문학, 특히 혁명 문학이 어디에나 스며들었다. 라마르틴의 『지롱드당사』, 루이 블랑과 미슐레의 저작들이 최신 소설들과 함께 독일어로 번역되었다. 그리고 독일인들은 대혁명의 영웅들에 들떠 장차 맡을 역할을 저희끼리 나누기 시작했다. 누구는 자신을 당통이나 사랑스러운 카미유 데물랭(der liebenswürdige Camille Desmoulins!)으로, 누구는 로베스피에르나 생쥐스트로, 또 누구는 마라로 상상했다. 그러나 자기 자신인 사람은 거의 없었다. 그러려면 진정한 본성을 타고나야 하기 때문이다. 독일인에게는 깊은 사유도 고매한 감정도 다 있지만, 본성만은 없다. 있다 해도 종의 본성이다.

많은 독일 문인이 하이네와 당시 이미 세상을 떠난 뵈르네를 본받아 파리로 이주했다. 그 가운데 눈에 띄는 이는 아르놀트 루게 박사, 시인 헤르베크, 카를 마르크스였다. 그들은 처음에 함께 잡지를 내려 했지만 서로 다투고 갈라섰다. 뒤의 두 사람은 이미 사회주의자였다.

독일은 1840년대에 들어서야 사회주의 학설들을 알게 되었다. 빈의 교수 슈타인이 그에 관한 독일어 책을 처음으로 쓴 사람이라고 해도 좋을 정도다. 그러나 최초의 실천적인 독일 사회주의자, 더 정확히는 공산주의자는 의심할 바 없이 재단사 바이틀링이었다. 그는 프랑스 공산주의자 비밀 결사의 회원으로 있던 파리를 떠나 1843년 초 스위스로 왔다. 그는 스위스의 독일인 수공업자들 사이에 많은 공산주의 결사를 세웠으나, 1843년 말 당시 취리히주 정부의 수반이던 블룬칠리 씨에 의해 프로이센에 넘겨졌다. 블룬칠리는 지금 독일에서 이름난 법률가이자 법학 교수다.

그러나 독일에서 처음에는 비밀리에, 곧이어 공공연히 사회주의를 선전한 주역은 카를 마르크스였다.

마르크스 씨는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주의 운동에서 너무나 중요한 역할을 했고 지금도 하고 있으므로, 이 주목할 만한 인물을 몇 가지 정확한 선으로 그려 보려고 애쓰지 않고 지나칠 수는 없다.

혈통으로 보면 마르크스 씨는 유대인이다. 그는 이 재능 있는 종족의 모든 장점과 모든 결점을 한 몸에 지니고 있다고 할 수 있다. 어떤 이들의 말로는 비겁할 정도로 신경질적인 그는 지극히 공명심 많고 허영심 강하며, 다투기 좋아하고 편협하며, 자기 조상들의 주 하느님 여호와처럼 절대적이고, 그처럼 미칠 듯이 복수심이 강하다. 불행히도 그의 질투를, 같은 말이지만 그의 증오를 산 사람에 대해서라면 그가 지어내어 퍼뜨리지 못할 거짓말과 중상은 없다. 그리고 그의 생각에, 하기야 대개는 잘못된 생각이지만, 자기 지위와 영향력을 강화하거나 자기 세력을 넓히는 데 도움이 될 수 있다면 그가 멈칫할 비열한 음모도 없다. 이 점에서 그는 완전히 정치적 인간이다.

이것이 그의 부정적 자질이다. 그러나 그에게는 긍정적 자질도 매우 많다. 그는 매우 총명하고 지극히 다방면으로 박식하다. 철학 박사인 그는 이미 1840년 무렵 쾰른에서 진보적 헤겔주의자들의 꽤 두드러진 모임들의 영혼이자 중심이었다고 할 수 있으며, 그들과 함께 반정부 잡지를 내기 시작했으나 잡지는 곧 장관의 명령으로 폐간되었다. 이 모임에는 브루노 바우어와 에드가르 바우어 형제, 막스 슈티르너도 속해 있었고, 그 뒤 베를린에서 독일 니힐리스트의 첫 모임도 속해 있었다. 이 모임은 그 냉소적인 일관성으로 러시아의 가장 맹렬한 니힐리스트들을 훨씬 능가했다.

1843년 또는 1844년에 마르크스는 파리로 이주했다. 거기서 그는 처음으로 프랑스와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결사, 그리고 동향인인 독일 유대인 모리츠 헤스 씨와 만났다. 헤스는 마르크스보다 먼저 학식 있는 경제학자이자 사회주의자였으며, 이 무렵 마르크스 씨의 학문적 발전에 상당한 영향을 미쳤다.

마르크스 씨만큼 많이 알고 많이 읽었으며, 또 그토록 지혜롭게 읽은 사람은 드물다. 이 무렵 이미 그가 오로지 몰두한 대상은 경제학이었다. 그는 영국 경제학자들을 특히 꼼꼼하게 연구했다. 이들은 지식의 실증성에서도, 영국의 경제적 사실들 위에서 길러진 실천적 사고방식에서도, 엄격한 비판에서도, 결론의 성실한 대담성에서도 다른 모든 경제학자를 능가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씨는 이 모든 것에 두 가지 새로운 요소를 더했다. 하나는 그가 헤겔 학파에서 익혔고 곧잘 장난, 아니 방탕에까지 끌고 가는, 더없이 추상적이고 더없이 기묘하게 정교한 변증법이고, 다른 하나는 공산주의적 출발점이다.

마르크스 씨는 물론 생시몽부터 프루동까지 프랑스 사회주의자들을 모조리 읽었다. 잘 알려진 대로 그는 프루동을 증오한다. 그리고 그가 프루동에게 퍼부은 무자비한 비판에 많은 진실이 담겨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프루동은 현실의 토대에 서려고 온갖 애를 썼지만 관념론자이자 형이상학자로 남았다. 그의 출발점 — 그것은 추상적인 법 관념이다. 그는 법에서 경제적 사실로 나아간다. 그러나 마르크스 씨는 그와 반대로, 인간 사회와 인민들과 국가들의 과거와 현재의 모든 역사가 확증하는 의심할 수 없는 진리, 곧 경제적 사실이 언제나 법률적·정치적 법에 앞섰고 지금도 앞선다는 진리를 밝히고 증명했다. 이 진리를 서술하고 증명한 것이 바로 마르크스 씨의 주요한 학문적 공적 가운데 하나다.

그러나 무엇보다 주목할 만한 것, 그리고 물론 마르크스 씨가 결코 인정한 적이 없는 것은, 정치적인 면에서 마르크스 씨가 루이 블랑의 직계 제자라는 사실이다. 마르크스 씨는 이 자그마한 실패한 혁명가이자 정치가보다 비교할 수 없이 총명하고 비교할 수 없이 박식하다. 그러나 독일인인지라, 그 당당한 키에도 불구하고 이 조그만 프랑스인의 문하에 들어간 것이다.

하기야 이 기묘한 일은 간단히 설명된다. 부르주아 정치가이자 로베스피에르의 열렬한 숭배자인 수사가 프랑스인과, 헤겔주의자·유대인·독일인이라는 삼중 자격을 지닌 학식 있는 독일인은 둘 다 철저한 국가주의자이고 둘 다 국가 공산주의를 설교한다. 차이라면 한쪽은 논증 대신 수사적 열변으로 만족하고, 다른 쪽은 학식 있고 둔중한 독일인답게 둘이 똑같이 아끼는 이 원칙을 헤겔 변증법의 온갖 술수와 자신의 다방면에 걸친 지식의 온갖 풍부함으로 둘러싼다는 점뿐이다.

1845년 무렵 마르크스는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우두머리가 되었고, 곧이어 변함없는 벗 엥겔스 씨와 함께 독일 공산주의자, 곧 국가 사회주의자들의 비밀 결사를 세웠다. 엥겔스 씨는 마르크스만큼 총명하고, 학식은 덜하지만 그 대신 더 실천적이며, 정치적 중상과 거짓말과 음모에도 못지않게 능한 사람이다. 물론 마르크스가 엥겔스 씨와 함께 우두머리로 있던 그들의 중앙위원회는 1846년 두 사람이 파리에서 추방되자 브뤼셀로 옮겨 가 1848년까지 그곳에 머물렀다. 하기야 바로 그해까지 그들의 선전은 독일 전역에 조금씩 퍼져 나가기는 했어도 비밀에 머물렀기 때문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았다.

사회주의의 독은 의심할 바 없이 온갖 경로를 통해 독일로 스며들고 있었다. 그것은 종교 운동에서까지 나타났다. 1844년에 생겨나 1848년에 가라앉은 「신가톨릭주의」라는 이름의 덧없는 종교 교설을 들어 보지 못한 사람이 있겠는가(지금 독일에는 로마 교회에 맞서 「구가톨릭주의」라는 이름의 새 이단이 나타났다).

신가톨릭주의는 다음과 같이 생겨났다. 지금 프랑스에서 그러듯이 1844년 독일에서는 가톨릭 성직자들이, 트리어에 보관되어 있다는 그리스도의 솔기 없는 옷을 기리는 거대한 행렬로 가톨릭 주민들의 광신을 부추기려는 생각을 했다. 이 축제에 유럽 각지에서 약 백만 명의 순례자가 모여들었다 — 성의를 엄숙하게 들고 행진하며 「성의여, 우리를 위해 하느님께 빌어 주소서!」 하고 노래했다. — 이것은 독일에서 큰 물의를 일으켰고 독일 급진파에게 소극을 벌일 구실을 주었다. 1848년에 우리는 브레슬라우에서 그 맥줏집을 볼 기회가 있었다. 이 행렬 직후 몇몇 슐레지엔 급진파가 그곳에 모였는데, 그 가운데에는 유명한 라이헨바흐 백작과 그의 대학 동창들인 김나지움 교사 슈타인과 전직 가톨릭 사제 요한 롱에가 있었다. 그들이 불러 주는 대로 롱에는 트리어 주교에게 보내는 공개 서한, 곧 주교를 19세기의 테첼이라고 부른 웅변적인 항의문을 썼다. 이렇게 해서 신가톨릭 이단이 시작되었다.

이 이단은 독일 전역에, 심지어 포즈난 공국에까지 빠르게 퍼졌고, 사람들은 고대 기독교의 공산주의적 공동 식사를 되살린다는 구실로 공산주의를 공공연히 설교하기 시작했다. 정부는 어리둥절하여 어찌할 바를 몰랐다. 설교가 어쨌든 종교적 성격을 띠고 있었고, 개신교 주민들 사이에서도 자유 공동체들이 생겨나, 더 조심스럽기는 했지만 역시 정치적·사회주의적 경향을 드러냈기 때문이다.

1847년 수만 명의 직조공을 굶어 죽게 만든 산업 공황은 사회 문제에 대한 독일 전체의 관심을 한층 더 강하게 불러일으켰다. 카멜레온 같은 시인 하이네는 이를 계기로 가까이 닥쳐올 무자비한 사회혁명을 예언하는 훌륭한 시 「직조공」을 썼다.

그렇다, 독일에서는 모두가 사회혁명은 아니더라도 적어도 정치 혁명을 기다렸고, 그 혁명에서 위대한 독일 조국의 부활과 쇄신을 바랐다. 그리고 이 보편적인 기대 속에서, 이 희망과 염원의 합창 속에서 주된 음조는 애국적이고 국가주의적인 것이었다. 독일인들은 영국인과 프랑스인이 그들을 학식 있고 사유가 깊은 인민이라고 말하면서도 그들에게는 실천적 능력도 현실 감각도 전혀 없다고 비꼬듯 놀라워하는 데 분개하게 되었다. 그래서 그들의 모든 염원과 요구는 주로 한 가지 목표, 곧 단일하고 강력한 범게르만 국가를 세우는 일로 향했다. 그 형태가 공화제든 군주제든 상관없이, 그 국가가 모든 이웃 인민에게 놀라움과 두려움을 불러일으킬 만큼 강하기만 하면 되었다.

1848년, 전 유럽적 혁명과 함께 제4기, 곧 독일 자유주의의 마지막 위기가 찾아왔다. 이 위기는 독일 자유주의의 완전한 파산으로 끝났다.

1525년, 이미 눈에 띄게 종말에 다가가던 봉건제와 독일에서 막 형성되기 시작하던 근대 국가들의 연합 세력이 거대한 농민 봉기를 꺾고 비참한 승리를 거두었다. — 이 승리로 독일 전체는 관료적 국가의 멍에 아래 오랜 노예 상태에 빠지는 운명이 결정적으로 정해졌다. 그 뒤로 이 나라에 1848년 전야만큼 많은 가연물과 혁명적 요소가 쌓인 적은 없었다. 최상층 관료와 귀족 계급을 빼면 불만과 기대, 변혁을 바라는 마음이 보편적이었다. 그리고 나폴레옹 몰락 뒤에도, 1820년대에도, 1830년대에도 독일에 없던 일이 일어났다. 이제 부르주아지 내부에서도 스스로 혁명가라고 부르는 사람들이 수십 명이 아니라 수백 명씩 나타났고, 그들에게는 그렇게 불릴 자격이 있었다. 문학의 헛꽃과 수사의 빈말에 만족하지 않고 자기 신념을 위해 실제로 목숨을 바칠 각오가 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많이 알았다. 그들은 물론 부자들의 세계나 문필·학술 부르주아지에 속하지 않았다. 그들 가운데 변호사는 극히 드물었고 의사는 조금 더 많았으며, 주목할 만하게도 학생은 거의 한 명도 없었다. 빈 대학 학생들만은 예외였는데, 빈 대학은 1848년과 1849년에 꽤 진지한 혁명적 경향을 드러냈다. 아마도 학문 수준에서 모든 독일 대학보다 비교할 수 없이 뒤떨어져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프라하 대학은 슬라브 대학이므로 말하지 않는다).

독일의 배우는 청년들 대다수는 이미 그때 반동 편에 서 있었다. 물론 봉건적 반동이 아니라 보수적·자유주의적 반동이었다. 그들은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 질서를 지키려는 투사였다. 이 청년들이 지금 무엇이 되었는지는 상상하고도 남을 것이다.

급진파는 두 범주로 나뉘었다. 둘 다 프랑스 혁명 사상의 직접적인 영향 아래 형성되었다. 그러나 둘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었다. 제1범주에는 독일의 학식 있는 젊은 세대의 꽃이라 할 사람들이 속했다. 여러 학부의 박사, 의사, 변호사, 그리고 적지 않은 관리, 작가, 언론인, 연설가였다. 물론 모두가 사유 깊은 정치가로서, 자기 재능에 넓은 활동 무대를 열어 줄 혁명을 조바심치며 기다렸다. 혁명이 시작되자마자 이 사람들은 급진파 전체의 선두에 섰고, 급진파를 헛되이 소진시키고 그 안에 남은 마지막 에너지마저 마비시킨 숱한 학자연한 책략을 거친 끝에 완전히 보잘것없는 존재로 전락했다.

그러나 덜 화려하고 덜 야심적이지만 그 대신 더 진실하고, 따라서 비교할 수 없이 더 진지한 다른 범주의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은 소부르주아들이었다. 그 가운데에는 학교 교사와 상회나 공장의 가난한 점원이 많았다. 물론 변호사, 의사, 교수, 언론인, 서적상, 심지어 관리도 있었지만 그 수는 아주 적었다. 이 사람들은 참으로 성자 같은 사람들이었고, 혁명 사업에 대한 끝없는 헌신과 그 사업에 끝까지, 빈말 없이 자신을 바칠 각오라는 점에서 가장 진지한 혁명가들이었다. 그들에게 다른 지도자들이 있었다면, 그리고 독일 사회가 대체로 인민 혁명을 해낼 능력과 의향이 있었다면, 그들이 귀중한 기여를 했으리라는 데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이 사람들은 혁명가였고 정직하게 혁명에 봉사할 각오가 되어 있었지만, 혁명이 무엇이며 혁명에 무엇을 요구해야 하는지는 분명히 깨닫지 못했다. 그들에게는 집단적 본능도, 집단적 의지와 사상도 없었고 있을 수도 없었다. 그들은 발밑에 아무런 토대도 없는 개인적 혁명가였으며, 자기 안에서 길잡이가 될 사상을 찾지 못했으므로 학식 있는 손위 형제들의 갈팡질팡하는 지도에 맹목적으로 몸을 맡길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그들의 손에서, 의식적으로든 무의식적으로든 인민 대중을 기만하는 도구가 되었다. 개인적 본능으로는 모두를 위한 보편적 해방과 평등과 복지를 원했지만, 그들은 범게르만 국가의 승리를 위해 일하도록 강요받았다.

독일에는 그때도 지금처럼 그보다 더 진지한 혁명적 요소가 있었다 — 바로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다.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1848년 베를린과 빈과 프랑크푸르트암마인에서, 1849년 드레스덴과 하노버 왕국과 바덴 대공국에서, 조금이라도 분별 있고 정직한 지도부만 만나면 진지한 봉기를 일으킬 능력과 각오가 있음을 입증했다. 베를린에서는 그때까지 파리만이 자랑하던 요소, 곧 혁명가이자 영웅인 거리의 개구쟁이 가맹까지 나타났다.

그 당시 독일의 도시 프롤레타리아트는, 적어도 그 압도적 다수는, 아직 마르크스의 선전의 영향과 그의 공산당 조직 바깥에 거의 완전히 놓여 있었다. 그 당은 주로 프로이센령 라인 지방의 공업 도시들, 특히 쾰른에 퍼져 있었다. 베를린과 브레슬라우에도, 그리고 나중에는 빈에도 지부가 있었지만 매우 미약했다. 물론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도, 다른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와 마찬가지로, 정치 혁명뿐 아니라 종교 혁명까지 포함한 지난 모든 혁명에서 인민 대중이 다소간 드러낸 모든 사회주의적 열망이 본능적 요구로서 맹아 상태로 들어 있었다. 그러나 그러한 본능적 표출과, 사회 변혁이나 사회 개혁을 바라는 의식적이고 명확히 규정된 요구 사이에는 엄청난 차이가 있다. 독일에는 1848년에도 1849년에도 그러한 요구가 전혀 없었다. 마르크스 씨와 엥겔스 씨가 지어 쓴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유명한 선언이 이미 1848년 3월에 발표되었는데도 말이다. 그것은 독일 인민 위를 거의 흔적도 없이 스쳐 지나갔다. 독일 모든 도시의 혁명적 프롤레타리아트는 정치적 급진파, 곧 극단 민주파에 직접 종속되어 있었고, 이것이 극단 민주파에 막대한 힘을 주었다. 그러나 부르주아적·애국적 강령 때문에, 또 지도자들의 철저한 무능 때문에 갈피를 잃은 부르주아 민주파는 인민을 배신했다.

끝으로 독일에는 지금은 이미 없는 요소가 하나 더 있었다. 혁명적 농민층, 적어도 혁명적으로 될 수 있는 농민층이다. 그 무렵 독일의 절반이 넘는 지역에는 아직 옛 농노제의 잔재가 남아 있었다. 메클렌부르크의 두 공국에는 지금도 남아 있는 것처럼 말이다. 오스트리아에서는 농노제가 완전히 지배적이었다. 독일 농민층이 봉기할 능력과 각오가 있다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었다. 1830년 바이에른령 팔츠에서 그랬듯이 1848년에도 거의 독일 전역에서 프랑스 공화국 선포 소식이 알려지자마자 농민층 전체가 술렁였고, 처음에는 수많은 혁명적 의회의 의원을 뽑는 첫 선거에 더없이 뜨겁고 활기차고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그때 독일 농민들은 아직 의회가 자기들을 위해 무언가를 할 수 있고 또 하려 하리라고 믿었고, 가장 과격하고 가장 붉은 사람들을 대표로 의회에 보냈다 — 물론 독일의 정치적 인간이 과격하고 붉을 수 있는 한도 안에서. 머지않아 의회에서는 아무 이득도 기대할 수 없음을 알자 농민들은 식어 버렸다. 그러나 처음에는 무엇이든, 모두가 들고일어나는 반란까지도 할 태세였다.

1848년에도 1830년과 마찬가지로 독일의 자유주의자와 급진파가 무엇보다 두려워한 것은 바로 이 반란이었다. 마르크스 학파의 사회주의자들조차 그것을 좋아하지 않는다. 모두 알다시피 페르디난트 라살레는 자기 입으로 인정했듯이 독일 공산당의 이 최고 지도자의 직계 제자였다. 그렇다고 스승이 라살레가 죽은 뒤, 실천 면에서 스승을 멀찍이 앞질러 간 이 빛나는 제자에게 질투와 시샘 섞인 불만을 드러내지 않은 것은 아니지만 말이다. 거듭 말하거니와, 모두 알다시피 라살레는 16세기 농민 봉기의 패배와 그 뒤에 이어진 독일 관료 국가의 강화와 번영이 혁명의 참된 승리였다는 생각을 여러 차례 밝혔다.

독일의 공산주의자들 또는 사회민주주의자들에게 농민층, 모든 농민층은 반동이고, 국가, 모든 국가, 심지어 비스마르크의 국가도 혁명이다. 우리가 그들을 중상한다고 생각하지는 말라. 그들이 실제로 그렇게 생각한다는 증거로 우리는 그들의 연설, 소책자, 잡지 기사, 끝으로 그들의 편지를 들겠다 — 이 모든 것은 때가 되면 러시아 독자들에게 제시될 것이다. 하기야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달리 생각할 수도 없다. 어떻게든 국가주의자인 그들은 모든 인민 혁명, 특히 본성상 아나키적이고 곧바로 국가의 파괴로 나아가는 농민 혁명을 저주하지 않을 수 없다. 모든 것을 삼키는 범게르만주의자로서 그들은 농민 혁명이 특유하게 슬라브적인 혁명이라는 이유 하나만으로도 그것을 배척하지 않을 수 없다.

그리고 농민 반란에 대한 이 증오에서 그들은 독일 부르주아 사회의 모든 계층, 모든 정당과 더없이 다정하고 더없이 감동적으로 뜻을 같이한다. 1830년에 바이에른 팔츠의 농민들이 낫과 쇠스랑을 들고 영주의 성에 맞서 일어나기만 해도, 그때 남독일 부르셴샤프트 학생들을 불태우던 혁명적 열기가 단번에 식어 버렸음을 우리는 이미 보았다. 1848년에도 똑같은 일이 되풀이되었다. 1848년 혁명 바로 초기에 독일 급진파가 농민 봉기의 시도에 가한 단호한 반대는 이 혁명이 비참하게 끝난 주된 원인이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혁명은 전례 없는 인민의 승리를 잇달아 거두며 시작되었다. 파리의 2월의 날들 이후 불과 한 달 남짓한 사이에 독일 땅에서 모든 국가 통치 기구와 세력이 인민 쪽의 별다른 노력도 없이 쓸려 나갔다. 파리에서 인민 혁명이 승리하자마자, 공포와 자기 경멸로 넋이 나간 통치자들과 정부들이 독일에서 잇달아 쓰러지기 시작했다. 물론 베를린과 빈에서는 무력 저항 비슷한 것이 있었지만, 너무나 하찮아서 말할 거리도 못 된다.

그리하여 혁명은 독일에서 거의 아무런 유혈도 없이 승리했다. 모든 족쇄가 부서지고 모든 장벽이 스스로 무너졌다. 독일 혁명가들은 무엇이든 할 수 있었다. 그런데 그들은 무엇을 했는가?

독일만이 아니라 온 유럽에서 혁명이 무력했음이 드러났다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그러나 다른 모든 나라에서 혁명은 길고도 진지한 투쟁 끝에 외세에 의해 패배했다. 이탈리아에서는 오스트리아 군대에 의해, 헝가리에서는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연합군에 의해 패배했다. 그러나 독일에서는 혁명가들 자신의 무능으로 혁명이 분쇄되었다.

프랑스에서도 같은 일이 일어났다고 말할지 모른다. 아니다, 프랑스에서는 전혀 달랐다. 그곳에서는 바로 이 시기에 무서운 혁명적 문제가 제기되어 모든 부르주아 정치가들, 심지어 붉은 혁명가들까지도 단번에 반동으로 내몰았다. 프랑스에서는 잊지 못할 6월의 날들에 부르주아지와 프롤레타리아트가 화해가 불가능한 적으로서 두 번째로 맞섰다. 그들이 처음 맞선 것은 1834년 리옹에서였다.

독일에서는, 이미 지적했듯이, 당시 사회 문제가 땅속 길을 통해 프롤레타리아트의 의식 속으로 겨우 스며들기 시작했을 뿐이었다. 그때 그것이 언급되기는 했지만, 주로 이론적으로, 그리고 독일의 문제라기보다 프랑스의 문제로서 언급되었다. 그래서 사회 문제는 아직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를 민주주의자들에게서 떼어 놓을 수 없었다. 노동자들은 민주주의자들이 자기들을 싸움터로 이끌어 주기만 하면 따지지 않고 그들을 따를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러나 독일 민주당의 지도자들과 정치가들이 원하지 않은 것이 바로 거리의 전투였다. 그들은 의회에서 벌이는 피 흘리지 않는 안전한 전투를 더 좋아했다. 크로아티아의 반이자 합스부르크-오스트리아 반동의 도구 가운데 하나였던 옐라치치 남작은 그런 의회를 「웅변 연습소」라고 그럴듯하게 불렀다.

당시 독일에는 의회와 제헌의회가 셀 수 없이 많았다. 그 가운데 으뜸으로 꼽힌 것은 온 독일에 공통된 헌법을 만들어야 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였다. 국민의회는 약 600명의 대의원으로 이루어졌는데, 이들은 독일 땅 전역의 대표로서 인민이 직접 뽑은 사람들이었다. 오스트리아 제국의 본래 독일계 지역 대의원들도 있었다. 그러나 보헤미아와 모라비아의 슬라브인들은 그곳에 대의원을 보내기를 거부했고, 이는 독일 애국자들을 크게 분노하게 했다. 그들은 보헤미아와 모라비아가, 적어도 슬라브인이 사는 한, 결코 독일 땅이 아니라는 것을 도무지 이해할 수 없었고, 무엇보다 이해하려 하지 않았다. 이렇게 해서 프랑크푸르트에는 독일 곳곳에서 독일 애국주의와 자유주의, 독일의 지성과 독일의 학식의 정수가 모여들었다. 이 시기까지 살아남는 행운을 누린 20년대와 30년대의 모든 애국자와 혁명가, 40년대의 모든 자유주의 명사가 이 최고의 전독일 의회에서 만났다. 그런데 갑자기, 모두가 놀랍게도, 바로 첫날부터 인민의 보통선거로 직접 뽑힌 대의원의 적어도 4분의 3이 반동주의자라는 것이 드러났다! 그것도 그저 반동주의자가 아니라, 학식은 대단히 높지만 더없이 순진한 정치적 장난꾸러기들이었다.

그들은 자기들의 현명한 머리에서 온 독일을 위한 헌법을 뽑아내 인민의 이름으로 선포하기만 하면 모든 독일 정부가 곧바로 그것에 복종하리라고 진지하게 상상했다. 그들은 독일 군주들의 약속과 맹세를 믿었다. 마치 1815년부터 1848년까지 30년 넘게 그 군주들의 뻔뻔하고 체계적인 배신을 자기 몸으로도, 동지들의 몸으로도 겪어 보지 않았다는 듯이. 심오한 역사가들과 법학자들은 역사의 쪽마다 그 설명과 확증을 읽을 수 있었을 단순한 진리를 깨닫지 못했다. 그 진리란 이렇다. 어떤 정치적 힘이든 그것을 무해하게 만들고, 달래고, 굴복시키는 수단은 단 하나, 그것을 파괴하는 것뿐이다. 철학자들은 깨닫지 못했다. 정치적 힘에 맞서는 보장은 완전한 파괴 말고는 있을 수 없다는 것을, 서로 싸우는 힘과 사실들의 무대인 정치에서 말과 약속과 맹세는 아무 의미도 없다는 것을. 그 까닭은 이것 하나로 충분하다. 모든 정치적 힘은 실제의 힘으로 남아 있는 한, 그것을 부리는 권력자와 군주들의 의지와 상관없이, 심지어 그 의지를 거슬러서라도, 그 본질상, 그리고 스스로 소멸하지 않으려면, 어떻게든 자기 목적의 실현을 향해 꾸준히 나아가지 않을 수 없다.

1848년 3월 독일 정부들은 사기가 꺾이고 겁에 질려 있었지만 결코 파괴되지는 않았다. 낡은 국가·관료·사법·재정·정치·군사 조직은 상처 하나 없이 남아 있었다. 시대의 압력에 밀려 그들은 고삐를 조금 늦추었지만, 고삐 끝은 모두 군주들의 손에 그대로 쥐여 있었다. 기계적인 집행에 익숙한 관리들의 압도적 다수, 경찰 전체, 군대 전체가 여전히, 아니 전보다 더 군주들에게 충성했다. 그들의 존재 전체를 위협하는 인민의 폭풍 속에서 구원을 기대할 곳은 군주들뿐이었기 때문이다. 끝으로, 혁명이 도처에서 승리했는데도 세금의 징수와 납부는 예전과 다름없이 꼬박꼬박 이루어졌다.

혁명 초기에 몇몇 고립된 목소리가, 새 헌법이 들어서 확립될 때까지 독일 땅 전역에서 세금 납부와 온갖 현물·금전 부담의 이행을 모두 멈추어야 한다고 요구한 것은 사실이다. 그러나 인민 자신, 특히 농민들 사이에서도 많은 의심을 산 이 제안에 맞서, 자유주의자뿐 아니라 가장 붉은 혁명가와 급진파까지 부르주아 세계 전체가 한목소리로 위협적인 비난의 합창을 터뜨렸다. 그런 요구는 곧장 국가 파산과 모든 국가 기관의 파괴로 이어질 터였고, 그것도 모두가 새롭고 한층 강력한,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범게르만 국가를 세우려고 애쓰던 바로 그때였으니 말이다! 원, 세상에! 국가의 파괴라니! 그것은 어리석은 막노동자 군중에게는 해방이요 축제일지 모르지만, 점잖은 사람들, 오로지 국가성의 힘으로만 존재하는 부르주아지 전체에게는 재앙이다. 그리고 프랑크푸르트 국민의회도, 그와 함께 독일의 모든 급진파도 독일 군주들의 손에 있던 국가 권력을 없앤다는 생각은 머리에 떠올릴 수조차 없었고, 다른 한편으로는 그 권력과 양립할 수 없는 인민의 힘을 조직할 줄도 몰랐고 조직하려 하지도 않았으므로, 그들에게 남은 일은 바로 그 군주들의 약속과 맹세가 신성하다고 믿으며 스스로를 위로하는 것뿐이었다.

과학과 학자들에게 사회를 조직하고 국가를 통치할 특별한 사명이 있다고 떠드는 사람들에게는 불행한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희비극적 운명을 더 자주 일깨워 주는 것이 좋을 것이다. 학자들의 회의라는 이름을 들을 자격이 있는 정치적 회의가 있었다면, 바로 이 범게르만 의회였다. 이 의회에는 모든 독일 대학, 모든 학부의 가장 이름난 교수들, 특히 법학자, 정치경제학자, 역사학자들이 앉아 있었다. 그런데 첫째로, 위에서 이미 지적했듯이, 이 의회는 다수가 무서울 만큼 반동적이었다. 얼마나 반동적이었느냐 하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의 친구이자 늘 서신을 주고받는 사이요 충실한 하인으로서 그전에 독일 연방 주재 프로이센 공사를 지냈고 1848년 5월 국민의회 의원이 된 라도비츠가, 오스트리아 군대, 곧 대부분 마자르인과 크로아티아인으로 이루어져 빈 내각이 반란을 일으킨 이탈리아인들을 치러 보낸 이 독일 군대에 대한 공감을 엄숙히 표명하자고 이 의회에 제안하자, 그의 독일 애국적 연설에 감격한 압도적 다수가 일어나 오스트리아인들에게 박수를 보냈을 정도였다. 이로써 의회는 온 독일의 이름으로, 독일 혁명의 주된, 말하자면 유일하게 진지한 목적은 결코 독일 인민들을 위한 자유의 쟁취가 아니라,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범게르만 제국이라는 이름으로 그들에게 거대한 새 애국적 감옥을 지어 주는 것이라고 엄숙히 선언한 셈이다.

이 의회는 포즈난 공국의 폴란드인들에게도, 그리고 슬라브인 전체에게도 똑같이 노골적인 부당함을 저질렀다. 독일인을 증오하는 이 모든 종족은 범게르만 국가에 삼켜져야 했다. 독일 조국의 미래의 힘과 위대함이 그것을 요구했다.

현명하고 애국적인 이 의회가 풀어야 할 첫 번째 내정 문제는 전독일 국가들이 공화국이어야 하느냐 군주국이어야 하느냐였다. 그리고 물론 문제는 군주제 쪽으로 결정되었다. 그러나 이 점에서 교수 겸 의원이자 입법자이신 나리들을 탓해서는 안 된다. 물론 그들은 진짜 독일인답게, 게다가 학식 있는 독일인답게, 곧 의식적으로 확신에 찬 상놈들답게 온 마음으로 자기네의 소중한 군주들을 지키려 했다. 그러나 설령 그런 지향이 없었다 해도 그들은 어쨌든 군주제 쪽으로 결정하지 않을 수 없었을 것이다. 위에서 언급한 몇백 명의 진실한 혁명가를 빼면 독일 부르주아지 전체가 그것을 원했기 때문이다.

그 증거로, 민주당의 존경받는 원로이자 지금은 사회민주주의자인, 앞서 말한 쾨니히스베르크의 애국자 요한 야코비 박사의 말을 들겠다. 1858년 쾨니히스베르크 유권자들 앞에서 한 연설에서 그는 이렇게 말했다.

「여러분, 이제 나는 이것을 더없이 깊은 확신에서 말한다. 이제 우리 온 나라에서, 온 민주당 안에서, 군주제 말고 다른 국가 형태를 추구하는 사람은 말할 것도 없고, 그것을 꿈꾸기라도 하는 사람조차 한 사람도 없다.」 그는 더 나아가 이렇게 덧붙인다. 「다른 어느 때보다도 바로 1848년이, 군주제적 요소가 인민의 마음속에 얼마나 깊이 뿌리내렸는지를 우리에게 보여 주었다.」

두 번째 문제는 독일 제국이 중앙집권제와 연방제 가운데 어떤 형태를 취할 것인가였다. 전자가 논리적이었을 것이고, 단일하고 나눌 수 없는 강력한 독일 국가의 건설이라는 목적에도 비할 데 없이 잘 맞았을 것이다. 그러나 그것을 실현하려면 군주 하나를 빼고 모든 군주에게서 권력과 왕좌를 빼앗아 독일에서 쫓아내야 했을 것이다. 곧 수많은 개별 반란을 일으켜 끝까지 밀고 나가야 했을 것이다. 이는 독일인의 충군 정신에 너무나 어긋났다. 그래서 문제는 옛 이상에 따라 연방 군주제 쪽으로 결정되었다. 중간 크기와 작은 군주들이 여럿 있고 의회도 그만큼 있으며, 그 모든 것의 꼭대기에 단일한 전독일 황제와 의회가 있는 형태였다.

그러면 누가 황제가 될 것인가? 이것이 핵심 문제였다. 이 자리에 앉힐 수 있는 사람이 오스트리아 황제 아니면 프로이센 국왕뿐이라는 것은 분명했다. 오스트리아도 프로이센도 그 밖의 누구는 용납하지 않았을 것이다.

의회에서 다수의 호감은 오스트리아 황제 쪽에 있었다. 여기에는 여러 이유가 있었다. 첫째, 프로이센인이 아닌 모든 독일인은 이탈리아에서 피에몬테를 증오하듯 프로이센을 증오했고 지금도 증오한다. 또한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 국왕은 혁명 전후의 변덕스럽고 제멋대로인 행동으로, 즉위 당시 그를 환영했던 모든 호감을 완전히 잃었다. 게다가 남독일 전체는 주민 대다수가 가톨릭이라는 성격과 역사적 전통 및 관습 때문에 결정적으로 오스트리아 편에 기울어 있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황제를 선택하는 것은 그래도 불가능했다. 오스트리아 제국은 이탈리아, 헝가리, 보헤미아, 그리고 마지막으로 빈 자체에서 일어난 혁명 운동에 시달리며 멸망 직전에 있었던 반면, 프로이센은 베를린, 쾨니히스베르크, 포젠, 브레슬라우, 쾰른 거리의 소요에도 불구하고 무장하고 준비된 상태였기 때문이다.

독일인들은 자유보다 단일하고 강력한 제국을 훨씬 더 강하게 원했다. 독일에게 진지한 황제를 줄 수 있는 나라는 프로이센 하나뿐이라는 점은 모두에게 분명했다. 그러므로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거의 과반을 구성한 교수 나리들에게 한 방울의 건전한 비판적 판단력과 한 방울의 활력이라도 있었다면, 그들은 망설이지도 미루지도 않고 내키지 않는 마음을 누르고 즉시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제안했어야 했다.

혁명 초기라면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는 틀림없이 황제관을 받아들였을 것이다. 베를린 봉기, 군대에 대한 인민의 승리는 그의 심장을 정통으로 때렸다. 그는 굴욕감을 느꼈고, 왕으로서의 자기 명예를 구하고 회복할 수단이라면 무엇이든 찾고 있었다. 다른 수단이 없던 그는 자진해서 황제관을 붙잡았다. 이미 3월 21일, 베를린에서 패배한 지 사흘 뒤에 그는 독일 민족에게 보내는 선언을 발표하여, 독일을 구하기 위해 자신이 독일 공동 조국의 선두에 선다고 밝혔다. 이 선언을 손수 쓴 뒤 그는 말에 올라 군 수행원들에게 둘러싸인 채 손에 범게르만 삼색기를 들고 베를린 거리를 의기양양하게 지나갔다.

그러나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이 전혀 은근하지 않은 암시를 이해하지 못했거나 이해하려 하지 않았고, 프로이센 국왕을 곧바로 그리고 단순하게 황제로 선포하는 대신, 근시안적이고 우유부단한 사람들이 그러듯이, 아무것도 해결하지 못하면서 프로이센 국왕에게는 노골적인 모욕이 되는 중간책에 의지했다. 교수 나리들은 독일 황제를 선출하기에 앞서 전독일 헌법을 만들어 내야 한다는 것, 그리고 그보다 앞서 「독일 인민의 기본권」을 정식으로 규정해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했다.

학식 있는 입법자들은 이 권리를 법적으로 규정하는 데 반년 넘게 쏟았다. 실무는 그들이 세운 임시 정부에 넘겼는데, 그 정부는 책임지지 않는 국가 통치자와 책임지는 내각으로 구성되었다. 통치자로는 역시 프로이센 국왕이 아니라 그에게 보란 듯이 오스트리아 대공을 뽑았다.

그를 선출한 뒤 프랑크푸르트 의회는 모든 연방군이 그에게 충성을 맹세할 것을 요구했다. 따르는 것은 작은 군주들의 보잘것없는 군대뿐이었고, 프로이센군과 하노버군, 심지어 오스트리아군까지도 노골적으로 거부했다. 이로써 프랑크푸르트 의회의 힘과 영향력과 중요성이 영에 불과하다는 것, 독일의 운명은 프랑크푸르트가 아니라 베를린과 빈에서, 특히 전자에서 결정되었다는 것이 모두에게 분명해졌다. 후자는 자기 자신의, 순전히 오스트리아적이고 결코 독일적이지 않은 사무에 너무나 골몰해 독일 문제를 다룰 시간이 없었기 때문이다.

그동안 급진파, 이른바 혁명당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 당원 중 프로이센인이 아닌 대다수는 프랑크푸르트 의회에 들어가 소수파를 이루고 있었다. 나머지는 각 지방 의회에 있었는데, 역시 무력했다. 첫째, 이 의회들이 독일 전체 사무의 흐름에 미치는 영향은 그 자체가 하찮았으므로 필연적으로 하찮을 수밖에 없었고, 둘째, 베를린과 빈과 프랑크푸르트에서의 의회 정치조차 우스꽝스럽고 공허한 말잔치였기 때문이다. 1848년 5월 22일 베를린에서 개원한 프로이센 헌법 제정 의회는 급진주의의 정수를 거의 모두 포함하고 있었는데, 이 점을 명백히 입증했다. 그곳에서는 가장 열렬하고 가장 웅변적이며 심지어 혁명적인 연설이 나왔지만 아무 일도 이루어지지 않았다. 첫 회의들부터 정부가 제출한 헌법 초안을 거부하고 프랑크푸르트 의회와 마찬가지로 자기들의 초안을 심의하는 데 몇 달을 쏟았으며, 그 과정에서 급진파들은 온 인민이 놀랄 만큼 앞다투어 자신들의 혁명성을 과시했다.

구제 불능의 어리석음이라고까지는 하지 않더라도, 독일 민주주의자들과 혁명가들의 혁명적 무능이 남김없이 드러났다. 프로이센 급진파들은 완전히 의회 놀이에 빠져 다른 모든 것에 대한 감각을 잃었다. 그들은 의회 결정의 힘을 진지하게 믿었고, 그중 가장 영리한 자들은 의회 토론에서 거두는 승리가 프로이센과 독일의 운명을 결정한다고 생각했다.

그들은 민주적 자치와 평등권을 군주제 기구와 화해시키려는, 해결 불가능한 과제를 스스로에게 부여했다. 그 증거로 1848년 6월 이 당의 주요 지도자 중 한 사람인 요한 야코비 박사가 베를린에서 자기 선거구 유권자들 앞에서 행한 연설을 인용하겠는데, 이 연설은 민주주의 강령 전체를 명확히 보여준다.

「공화국 이념은 시민적 자치와 평등권의 최고이자 가장 순수한 표현이다. 그러나 공화정이라는 통치 형태의 실현이 특정 시기와 특정 국가의 현실이 부여한 조건 아래에서 가능한가 하는 것은 별개의 문제다. 오직 시민들의 보편적이고 만장일치의 의지만이 이 문제를 결정할 수 있다. 어떤 개인이 감히 그러한 결정에 대한 책임을 떠맡으려 한다면 미친 짓을 하는 것이다. 인민에게 이 통치 형태를 강요하려는 정당은 미친 짓, 나아가 범죄 행위를 저지르는 것이다. 오늘뿐 아니라 3월 프랑크푸르트 예비 회의에서도 나는 바덴 대표들에게 같은 말을 했고, 아아! 헛수고였지만, 그들을 공화주의 봉기에서 말리려 애썼다. 바덴 한 곳을 제외한 독일 전체에서 혁명 자체는 흔들리지 않은 왕좌 앞에 공손히 멈춰 섰고, 이로써 군주들의 자의에 한계를 그을 수는 있어도 그들을 쫓아낼 생각은 전혀 없음을 증명했다. 우리는 사회의 의지에 복종해야 하며, 따라서 입헌군주정이라는 통치 형태가 우리가 새로운 정치적 건물을 세워야 할 유일한 토대다.」

그리하여 민주적 토대 위에 군주제를 새로 구성하는 것 — 이것이 심오하지만 그만큼 혁명성은 극히 희박한 프로이센 제헌의회의 급진파와 적색 민주파가 스스로에게 부과한 어렵고도 사실상 불가능한 과제였다. 그들은 인민의 의지뿐 아니라 그들이 흠모하는 반쯤 미친 군주의 자의까지도 묶어둘 새로운 입헌적 사슬을 고안하며 이 과제에 더 깊이 파고들수록, 진짜 할 일에서는 더 멀어져 갔다.

그들의 실천적 근시안이 아무리 컸다 해도, 3월의 나날에 패배하기는 했으나 눈에 띄게 소멸하지는 않은 군주제가 낡은 반동적·귀족적·군사적·경찰적·관료적 세계 전체를 자기 주위에 끌어모으며 음모를 꾸미고, 민주파를 쫓아 버리고 예전처럼 무제한한 권력을 장악할 적당한 기회를 기다리고 있음을 보지 못할 정도까지는 아니었다. 야코비 박사의 같은 연설은 프로이센 급진파가 이를 잘 보고 있었음을 증명한다. 「우리 자신을 속이지 말자 — 그는 말했다 — 절대주의와 융커[9]는 결코 사라지지도, 씨가 마르지도 않았다. 그들은 죽은 척할 필요도 거의 느끼지 않고 그런 수고도 거의 하지 않는다. 반동의 책동을 보지 못하려면 눈먼 사람이어야 했다…」.

그리하여 프로이센 급진파는 자신들을 위협하는 위험을 꽤 명확히 보았다. 그렇다면 그들은 그것을 막기 위해 무엇을 했는가? 군주제적·봉건적 반동은 이론이 아니라 힘, 무서운 힘이었다. 그 뒤에는 3월 패배의 치욕을 씻고 흐려지고 모욕당한 왕권을 인민의 피로 회복하려는 조바심에 불타는 군대 전체, 관료제 전체, 막대한 재정 수단을 장악한 국가 기구 전체가 있었다. 그렇다면 급진파는 새로운 법률과 헌법, 즉 순전히 종이로 된 수단으로 이 무서운 힘을 묶을 수 있다고 생각했단 말인가?

그렇다, 그들은 그런 희망을 품을 만큼 실천적이고 현명했던 모양이다. 그렇지 않다면, 그들이 머리 위에 드리운 폭풍에 맞서 일련의 실천적이고 실효성 있는 조치를 취하는 대신 국가의 모든 힘과 권력을 의회에 복종시킬 새 헌법과 새 법률을 논의하며 몇 달을 통째로 보낸 것을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의회 토론과 법령의 실효성을 그토록 믿은 나머지, 국가적·반동적 힘에 혁명적·인민적 힘을 조직하여 맞세운다는 유일한 수단을 소홀히 했다.

1848년 혁명의 시작을 알린, 유럽 거의 모든 수도에서 군대에 대한 인민 봉기의 전례 없이 손쉬운 승리는 독일뿐 아니라 다른 모든 나라의 혁명가들에게도 해로웠다. 그것이 혁명가들 사이에, 인민의 사소한 시위 하나면 어떤 군사적 저항도 꺾을 수 있다는 어리석은 확신을 불러일으켰기 때문이다. 이런 믿음 때문에 프로이센과 독일 전반의 민주주의자와 혁명가들은, 필요하다고 판단될 때면 언제든 인민 운동으로 정부를 위협하는 것이 자기들 손에 달려 있다고 여기면서, 인민 속에서 혁명적 열정과 역량을 키우는 일은 말할 것도 없고 조직이나 지도 같은 것도 전혀 필요하지 않다고 보았다.

오히려 선량한 부르주아답게, 그들 가운데 가장 혁명적인 인물들조차 이런 열정과 이런 역량을 두려워했고, 언제나 그것에 맞서 국가 질서와 부르주아 사회 질서 편에 설 준비가 되어 있었으며, 위험한 수단인 인민 반란에 덜 의지할수록 좋다고 생각했다. 이리하여 독일과 프로이센의 공식 혁명가들은 새로이 고개를 드는 반동에 최종적이고 실질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는 유일한 수단을 저버렸다. 그들은 인민 혁명을 조직할 생각은커녕, 오히려 곳곳에서 인민 혁명을 달래고 진정시키려 애썼고, 바로 그렇게 해서 자기들이 쥐고 있던 유일하게 진지한 무기를 부러뜨리고 말았다.

6월의 날들, 군사 독재자이자 공화국 장군인 카베냐크가 파리 프롤레타리아트를 상대로 거둔 승리는 독일 민주주의자들의 눈을 뜨게 했어야 했다. 6월의 참사는 파리 노동자들에게 불행이었을 뿐 아니라, 유럽 혁명에 대한 첫 번째, 말하자면 결정적인 패배였다. 모든 나라의 반동 세력은 혁명가들, 특히 독일 혁명가들보다 6월의 날들이 지닌 비극적이면서 자기들에게 그토록 유리한 의미를 더 빠르고 더 잘 이해했다.

그 소식이 처음 전해지자 모든 반동 진영에서 얼마나 큰 환희가 일었는지 보았어야 했다. 그들은 그것을 구원의 소식으로 받아들였다. 지극히 정확한 본능에 이끌린 그들은 카베냐크의 승리에서 프랑스 반동이 프랑스 혁명을 이긴 것만이 아니라, 전 세계적 또는 국제적 반동이 국제적 혁명을 이긴 것을 보았다. 모든 나라의 군인들과 참모부는 그것을 군 명예의 국제적 설욕으로 환영했다. 알다시피 프로이센·오스트리아·작센·하노버·바이에른 및 그 밖의 독일 군대 장교들은 곧바로 프랑스 공화국의 임시 통치자인 카베냐크 장군에게 축하 서한을 보냈다. 물론 상관의 허락과 자기 군주의 승인을 받아서였다.

카베냐크의 승리는 실제로 막대한 역사적 의미를 지녔다. 이 승리와 함께 반동과 혁명의 국제적 투쟁에서 새로운 시대가 시작된다. 6월 23일부터 26일까지 나흘 동안 이어진 파리 노동자들의 봉기는 그 사나운 기세와 격렬함에서 파리가 지금까지 목격한 그 어떤 인민 반란도 능가했다. 사회혁명은 사실상 이 봉기에서 시작되었다. 이 봉기가 사회혁명의 제1막이었고, 파리 코뮌의 마지막, 더욱 필사적인 저항이 제2막이었다.

6월 봉기에서 처음으로 가면 없이 정면으로 맞붙은 것은, 이제 남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싸우며 누구의 지도도 받지 않고 가장 신성한 자기 이익을 지키기 위해 스스로 일어선 거친 인민의 힘과, 문명과 인간성, 사회적 예의와 시민적 권리에 대한 존중이라는 어떤 고려에도 얽매이지 않고 거친 투쟁의 도취 속에서 무자비하게 모든 것을 불태우고 베고 파괴하는 거친 군사적 힘이었다.

이전의 모든 혁명에서 군대는 인민과 싸울 때 인민 대중뿐 아니라 그 선두에 선 존경받는 시민들, 대학생과 공과대학 청년들, 그리고 마지막으로 대부분 부르주아로 구성된 국민위병까지 적으로 맞닥뜨렸기에, 어느새 사기가 꺾여 실제로 패배하기 전에 물러서고 후퇴하거나 인민과 형제애를 나누곤 했다. 교전 중인 양측 사이에는 싸움이 한창일 때에도 일종의 협약이 존재하고 지켜져서, 가장 격렬한 격정도 일정한 경계를 넘지 못하게 했다. 마치 양측이 공동의 합의로 무딘 무기를 쓰고 싸우는 듯했다. 인민 쪽에서도 군대 쪽에서도 집이나 거리를 파괴하거나 비무장한 사람들을 수만 명씩 학살하고도 무사하리라고는 아무도 생각하지 못했다. 보수파가 어떤 반동적 조치를 옹호하면서 반대당의 불신을 잠재우려 할 때 끊임없이 되풀이하던 상투적 문구가 있었다. 「인민을 이기기 위해 파리를 포격할 생각을 하는 권력은 곧바로 존립할 수 없게 될 것이다」[10].

군사력 사용에 대한 이러한 제한은 혁명에 극히 유리했고, 예전에 인민이 대개 승리자로 나선 까닭을 설명해 준다. 카베냐크 장군이 끝장내고자 한 것이 바로 군대에 대한 인민의 이 손쉬운 승리였다.

그에게 왜 대규모 병력으로 공격을 감행하여 반드시 막대한 수의 반란자를 죽여야 했는지 물었을 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군기가 인민의 승리로 두 번째로 더럽혀지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순전히 군사적이지만 그만큼 철저히 반인민적인 이 생각에 이끌린 그는 처음으로 반란자들이 점거한 집과 거리 전체를 파괴하는 데 대포를 쓸 용기를 냈다. 마지막으로 승리 후 둘째, 셋째, 넷째 날에, 미혹된 형제들에게 형제의 품을 열어 준다는 감동적인 선언을 잔뜩 내걸고도, 그는 군대가 격분한 국민위병과 함께 사흘 내리 재판도 없이 약 만 명의 반란자를 학살하고 총살하도록 허용했으며, 그중에는 물론 많은 무고한 사람도 섞여 있었다.

이 모든 것은 두 가지 목적으로 이루어졌다. 반란자들의 피로 군대의 명예(!)를 씻어내고, 동시에 프롤레타리아트에게 군사력의 우월성에 대한 마땅한 존경과 그 무자비함에 대한 공포를 심어 주어 혁명 운동에 대한 의욕을 빼앗으려는 것이었다.

이 뒤의 목적을 카베냐크는 이루지 못했다. 우리는 6월의 교훈이 파리 코뮌의 프롤레타리아트가 뒤이어 일어서는 것을 막지 못했음을 보았다. 그리고 우리는 코뮌에 주어진 훨씬 더 잔혹한 새로운 교훈조차 사회혁명을 멈추게 하지 못하고 지연시키지도 못하며, 오히려 그 지지자들의 기력과 열정을 열 배로 키워 그 승리의 날을 앞당기리라 희망한다.

그러나 카베냐크가 사회혁명을 죽이는 데 성공하지 못했다면, 그는 다른 목적은 달성했다. 자유주의와 부르주아 혁명성을 완전히 죽이고, 공화국을 죽이고, 그 폐허 위에 군사독재를 세운 것이다.

군사력을 부르주아 문명이 채운 족쇄에서 풀어 주고, 그것에 타고난 야만성을 온전히 되돌려 주고, 무엇 앞에서도 멈추지 않고 이 비인간적이고 무자비한 야만성을 마음껏 휘두를 권리를 되돌려 준 그는, 이제부터 모든 부르주아적 저항을 불가능하게 만들었다. 무자비함과 전면 파괴가 군사 행동의 구호가 된 뒤로, 거리 바리케이드로 하는 옛 고전적이고 순진한 부르주아 혁명은 어린애 장난이 되었다. 이제 아무것도 존중하지 않고, 게다가 가장 무서운 파괴 무기로 무장하고, 집과 거리뿐 아니라 도시 전체를 모든 주민과 함께 없애는 데 언제든 그 무기를 쓸 준비가 된 군사력에 맞서 성공적으로 싸우려면, 이런 사나운 짐승에 맞서 싸우려면, 그에 못지않게 사납지만 더 정당한 또 다른 짐승이 있어야 한다. 바로 조직된 전 인민적 반란, 사회혁명이다. 그것은 군사적 반동과 마찬가지로 아무것도 아끼지 않고 무엇 앞에서도 멈추지 않을 것이다.

프랑스와 일반적으로 국제적 반동에 그토록 귀중한 봉사를 한 카베냐크는 그러나 가장 진실한 공화주의자였다. 공화주의자가 유럽에서 군사 독재의 첫 기초를 놓고 나폴레옹 3세와 독일 황제의 첫 선구자가 되도록 운명지어졌다는 것은 놀라운 일이 아닌가. 마치 또 다른 공화주의자, 그의 유명한 선구자 로베스피에르가 나폴레옹 1세에게 구현된 국가 전제주의를 준비하도록 운명지어졌던 것과 마찬가지로. 이것은 모든 것을 삼키고 모든 것을 억압하는 군사 규율, 즉 범게르만 제국의 이상이 부르주아 국가 중앙집권화, 부르주아 공화국, 그리고 일반적으로 부르주아 문명의 필연적인 최종 결론임을 증명하지 않는가.

어찌 되었든, 독일 장교들, 귀족들, 관료들, 통치자들과 군주들은 카베냐크를 몹시 사랑하게 되었고, 그의 운 좋은 성공에 고무되어 눈에 띄게 기운을 차리고 이미 새로운 전투를 준비하기 시작했다.

그러면 독일 민주주의자들은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그들은 어떤 위험이 자신들을 위협하고 있는지, 그리고 그것을 막는 데 남은 수단은 인민 속에 혁명적 열정을 불러일으키는 것과 인민의 힘을 조직하는 것, 단 두 가지뿐임을 이해했는가? 아니다, 이해하지 못했다. 오히려 그들은 마치 일부러 그러듯 의회 토론에 더욱 깊이 빠져들었고, 인민에게 등을 돌린 채 인민을 온갖 반동 앞잡이들의 영향에 내맡겼다.

인민이 그들에게 완전히 냉담해지고 그들과 그들의 대의에 대한 신뢰를 모두 잃은 것이 무엇이 이상하겠는가? 그리하여 11월에 프로이센 국왕이 근위대를 베를린으로 불러들이고, 완전한 반동을 노린 것이 분명한 브란덴부르크 장군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제헌의회 해산을 명령하고, 프로이센에 자기 나름의 헌법, 물론 철저히 반동적인 헌법을 하사했을 때, 3월에 그토록 한마음으로 일어나 그토록 용감하게 싸워 근위대를 베를린에서 물러나게 했던 바로 그 베를린 노동자들이 이제는 꿈쩍도 하지 않고 끽소리도 내지 않은 채 「민주주의자들이 군인들에게 쫓겨나는」 것을 무관심하게 바라보았다.

이로써 실제로 독일 혁명의 희비극은 끝났다. 그보다 앞서, 즉 10월에 빈디슈그레츠 공이 빈에서 질서를 회복했다. 물론 상당한 유혈이 없지는 않았다 — 대체로 오스트리아 혁명가들은 프로이센 혁명가들보다 더 혁명적이었다.

그때 프랑크푸르트의 국민의회는 무엇을 하고 있었는가? 1848년 말에 이르러 마침내 기본권과 새로운 범게르만 헌법을 표결로 채택하고 프로이센 국왕에게 황제관을 제안했다. 그러나 오스트리아, 프로이센, 바이에른, 하노버, 작센 정부는 기본권과 새로 만들어진 헌법을 거부했고, 프로이센 국왕은 황제관을 받기를 거절한 뒤 자기 의원들을 소환했다.

반동이 독일 전역에서 승리를 거두었다. 뒤늦게 정신을 차린 혁명파는 1849년 봄을 기해 전면 봉기를 조직하기로 결심했다. 5월에 꺼져 가던 혁명은 작센, 바이에른의 팔츠, 바덴에 마지막 불꽃을 던졌다. 이 불꽃은 곳곳에서 프로이센 군인들에 의해 꺼졌다. 그들은 오래지 않은, 그러나 충분히 유혈이 낭자한 싸움 끝에 독일 전역에서 옛 질서를 회복했으며, 바덴에서 프로이센 군을 지휘한 프로이센 왕자, 즉 현 황제이자 국왕인 빌헬름 1세는 반란자 몇 명을 교수형에 처할 기회를 놓치지 않았다.

이것이 유일무이하고 오랫동안 마지막이 될 독일 혁명의 비참한 결말이었다. 이제 문제는 이것이다. 그 실패의 주된 원인은 무엇이었는가?

학자들에게 흔히 있는 정치적 무경험과 실천적 미숙함은 차치하고, 혁명적 대담성의 완전한 결여, 혁명적 조치와 행동에 대한 독일인의 뿌리 깊은 혐오와 권력에 복종하기를 열렬히 좋아하는 성향도 차치하고, 끝으로 자유에 대한 본능과 열정과 감각이 크게 모자랐다는 점도 차치하고, 실패의 주된 원인은 모든 독일 애국자가 범게르만 국가의 건설을 공통으로 열망한 데 있었다.

독일인의 본성 깊은 곳에서 우러나오는 이 열망은 독일인을 혁명에 철저히 무능하게 만든다. 강한 국가를 세우려는 사회는 반드시 권력에 복종하려 한다. 반면 혁명적 사회는 권력을 벗어던지려 한다. 그렇다면 이 두 상반되고 상호 배타적인 요구를 어떻게 화해시킬 것인가? 그것들은 서로를 마비시킬 수밖에 없으며, 1848년 독일인들에게 실제로 그런 일이 일어났다. 그들은 자유도 강한 국가도 얻지 못했고, 반대로 무서운 패배를 당했다.

두 열망은 너무나 모순되어 실제로는 같은 인민 안에서 동시에 만날 수 없다. 그중 하나는 반드시 진짜 열망을 뒤에 감춘 허깨비 열망일 수밖에 없으며, 1848년이 바로 그랬다. 자유를 향한 겉치레 열망은 자기기만, 속임수였다. 반면 범게르만 국가 건설을 향한 열망은 대단히 진지했다. 이것은 적어도 가장 붉은 민주주의자와 급진파의 압도적 다수를 포함한, 교양 있는 독일 부르주아 사회 전체에 관해서는 의심할 여지가 없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 안에 반사회적 본능이 살아 있어 어쩌면 그것이 프롤레타리아트를 자유를 쟁취할 수 있게 만들 것이라고 생각하고 짐작하고 바랄 수는 있다. 독일 프롤레타리아트도 다른 나라 프롤레타리아트와 똑같은 경제적 멍에를 지고 그것을 똑같이 증오하며, 그들에게도 다른 이들에게도 국가라 불리는 수백 년 묵은 감옥을 부수지 않고서는 경제적 노예 상태에서 벗어날 길이 없기 때문이다. 다만 짐작하고 바랄 수 있을 뿐이다. 그에 대한 사실의 증거는 없기 때문이다. 오히려 우리는 1848년뿐 아니라 현재에도 독일 노동자들이 자기 지도자들에게 맹목적으로 복종하는 것을 보았다. 그런데 그 지도자들, 독일 노동자 사회민주당의 조직자들은 노동자들을 자유로도 국제적 형제애로도 이끌지 않고, 범게르만 국가의 멍에 아래로 곧장 이끈다.

1848년에 독일 급진파들은, 위에서 언급한 바와 같이, 국가 권력에 반란을 일으켜 그것을 더 강하고 더 넓게 만들어야 하는 슬프고 비극적인 처지에 놓였다. 그러니 그들은 그것을 파괴하려 하지 않았을 뿐 아니라, 오히려 그것에 맞서 싸우는 동안에도 그것을 보존하는 데 가장 다정하게 마음을 썼다. 그러니 그들의 모든 활동은 그 본질에서부터 깨지고 마비되어 있었다. 권력의 행동에는 그러한 모순이 없었다. 권력은 조금도 망설이지 않고, 자기네의 기이하고 청하지도 않은, 성가신 친구들인 민주파를 어떤 수단을 써서라도 목 졸라 죽이려 했다. 급진파들이 자유가 아니라 제국의 창건을 생각했다는 것은 한 가지 사실만 들어도 충분하다. — 이미 민주파가 승리를 거둔 프랑크푸르트 의회가 1849년 3월 28일 프리드리히 빌헬름 4세에게 황제관을 제안했을 때, 즉 프리드리히가 이른바 혁명적 성과니 인민의 권리니 하는 것을 완전히 말살하고, 인민이 직접 선출한 제헌의회를 해산시키고, 가장 반동적이고 가장 비열한 헌법을 반포했을 때, 그가 자신과 왕관이 당한 모욕에 분노에 차서, 자기에게 증오스러운 민주파를 경찰 병사들로 사냥하고 있을 때였다.

그들이 그러한 군주에게 자유를 요구할 만큼 눈이 멀 수는 없었을 것이다! 그렇다면 그들은 무엇을 바라고 기대했는가? 범게르만 국가를!

왕은 그것조차 그들에게 줄 수 없었다. 왕과 함께 승리하고 다시 국가 권력을 장악한 봉건당은 통일 사상에 극도로 적대적이었다. 그것은 독일 애국주의를 반역으로 증오했고, 자기네 프로이센 애국주의만을 알았다. 군대 전체, 모든 장교, 모든 사관학교 생도들은 그때 잘 알려진 프로이센 애국가를 미친 듯이 불렀다.

「나는 프로이센 사람, 내 깃발을 아느냐」

프리드리히는 황제가 되고 싶었지만 자기 편 사람들을 두려워했고, 오스트리아와 프랑스를 두려워했으며, 무엇보다도 니콜라이 황제를 두려워했다. 1848년 3월 포즈난 공국의 자유를 요구하러 온 폴란드 대표단에게 그는 이렇게 대답했다. 「나는 여러분의 청을 들어줄 수 없다. 그것은 나의 매제 니콜라이 황제의 뜻에 어긋나기 때문이다. 그는 참으로 위대한 사람이다! 그가 『예』라고 말하면 그대로 『예』가 되고, 『아니오』라고 말하면 『아니오』가 된다.」

왕은 니콜라이가 황제관을 결코 허락하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고 있었고, 그래서, 특히 그 때문에 프랑크푸르트 대표단에게서 그것을 받기를 단호히 거부했다.

그런데도 그는 하다못해 3월 선언으로 손상된 자기 명예를 되찾기 위해서라도 독일 통일과 프로이센 패권이라는 방향에서 무언가를 해야만 했다. 이를 위해 프리드리히는 프로이센 군대가 독일 민주파를 진압하며 거둔 월계관과, 독일에서 그가 거둔 성공에 불만을 품은 오스트리아의 내부 곤경을 이용하여, 1849년 5월 프로이센·작센·하노버 사이에 연합을 세우려고 시도했다. 이 연합은 모든 외교와 군사 업무를 프로이센의 손에 집중하려는 것이었으나 오래가지 못했다. 오스트리아가 러시아 군대의 도움으로 헝가리를 진압하자마자(1849년 9월), 슈바르첸베르크는 프로이센에 독일의 모든 것을 3월 이전의 옛 질서로 되돌릴 것을, 한마디로 오스트리아의 우위에 그토록 편리한 독일 연방을 복원할 것을 위협적으로 요구했다. 작센과 하노버는 곧바로 프로이센에게서 떨어져 나가 오스트리아에 붙었고, 바이에른도 그 본을 따랐다. 그리고 호전적인 뷔르템베르크 국왕은 「오스트리아 황제가 자기 군대를 이끌고 어디로 가라고 명령하든 그리로 가겠다」고 공공연히 선언했다.

이리하여 불행한 프로이센은 완전한 고립에 빠졌다. 무엇을 해야 했는가? 오스트리아의 요구에 응하는 것은 허영심 많으나 나약한 왕에게는 불가능해 보였다. 그래서 왕은 자기 친구인 라도비츠 장군을 수상으로 임명하고 군대를 출동시키라고 명령했다. 하마터면 싸움이 벌어질 뻔했다. 그러나 니콜라이 황제가 독일인들에게 「멈춰라!」라고 외치고 올뮈츠(1850년 11월) 회의로 달려와 판결을 내렸다. 굴욕을 당한 왕은 복종했고, 오스트리아는 의기양양했으며, 프랑크푸르트의 옛 연방 궁전에서(1851년 5월) 3년간의 일식 끝에 독일 연방이 다시 문을 열었다.

혁명은 없었던 것과 같았다. 그 유일한 흔적은 끔찍한 반동뿐이며, 이는 독일인들에게 구원의 교훈이 되어야 한다. 자유가 아니라 국가를 원하는 자는 혁명을 가지고 장난해서는 안 된다.

1848년과 1849년의 위기로 독일 자유주의의 역사는 사실상 끝난다. 이 위기는 독일인들에게 그들이 자유를 쟁취할 능력이 없을 뿐 아니라 자유를 원하지도 않는다는 것을 증명했다. 그뿐 아니라 프로이센 왕정의 주도 없이는 그들이 자기네의 진정하고도 진지한 목표에조차 이르지 못한다는 것, 단일하고 강력한 국가를 만들어 낼 힘이 없다는 것도 증명했다. 뒤이은 반동이 1812년과 1813년의 반동과 다른 점은 이것이다. 그때의 반동이 아무리 쓰라리고 고통스러웠어도 독일인들은 그 속에서도 자기들이 자유를 사랑하며, 자기들의 반역적 힘을 훨씬 능가하는 연합 정부들의 힘이 방해하지만 않았다면 자유롭고 통일된 독일을 만들어 낼 수 있었으리라는 착각을 간직했고 또 간직할 수 있었다. 이제 그런 위안이 되는 자기기만은 불가능하다. 혁명 첫 몇 달 동안 독일에는 그들이 무언가를 하려고만 했다면 그들을 막을 수 있었을 정부 세력이 전혀 없었다. 오히려 나중에는 그들 자신이 누구보다도 그런 세력의 복구를 거들었다. 따라서 혁명이 아무 결과도 내지 못한 것은 외부 장애 때문이 아니라 오로지 독일 자유주의자들과 애국자들 자신의 무능 때문이었다.

이 무능에 대한 자각은 말하자면 독일 정치 생활의 기초이자 독일의 새로운 여론의 길잡이가 되었다. 독일인들은 겉보기에 변하여 실천적인 사람들이 되었다. 레싱에서 괴테까지, 칸트에서 헤겔까지를 포함하는 그들의 고전 문학의 세계적 의의 전체를 이루었던 광범한 추상적 이념들을 포기하고, 프랑스의 자유주의와 민주주의와 공화주의도 포기한 그들은, 이제부터 프로이센의 정복 정책에서 독일의 운명이 실현되기를 구하게 되었다.

그들의 명예를 위해 덧붙이자면, 이 전환은 갑자기 일어나지 않았다. 1849년부터 현재까지의 지난 24년은, 우리가 간략히 하기 위해 하나의 제5시기로 묶었지만, 실제로는 네 시기로 나누어야 한다.

5. 절망적 복종의 시기, 1849년부터 1858년까지, 즉 프로이센에서 섭정이 시작될 때까지.

6. 1858년부터 1866년까지의 시기, 죽어가는 자유주의가 프로이센 절대주의에 맞서 벌인 마지막 임종의 투쟁 시기.

7. 1866년부터 1870년까지의 시기, 패배한 자유주의의 항복.

8. 1870년부터 현재까지의 시기, 개선한 노예 상태의 득세.

다섯 번째 시기에 독일의 대내적·대외적 굴욕은 극에 달했다. 안으로는 노예들의 침묵이었다. 남독일에서는 메테르니히의 후계자인 오스트리아 장관이 무조건 호령했고, 북독일에서는 만토이펠이 그랬다. 만토이펠은 1850년 올뮈츠 회의에서 오스트리아의 비위를 맞추려고 프로이센 왕정을 더없이 굴욕스럽게 만들었고, 프로이센 궁정·귀족·군사관료 당이 크게 흡족해하는 가운데 살아남은 민주주의자들을 사냥했다. 따라서 자유에 관해서는 영이고, 국가로서 독일의 대외적 위신과 비중과 의의에 관해서는 영보다도 못했다. 궁정·군부·관료·귀족을 제외한 모든 지방, 모든 정파의 독일인들이 1847년 이래 줄곧 더없이 격렬한 열정을 드러내 온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문제는 프로이센의 간섭 덕분에 덴마크에 유리하게 최종 결말이 났다. 다른 모든 문제에서도 연합된 독일,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독일 연방으로 분열된 독일의 목소리는 다른 열강들의 고려 대상조차 되지 못했다. 프로이센은 그 어느 때보다도 러시아의 노예가 되었다. 불행한 프리드리히는 예전에는 니콜라이를 증오했으나 이제는 니콜라이의 이름만 걸고 맹세했다. 페테르부르크 궁정의 이익에 대한 충성은, 프로이센 전쟁장관과, 국왕의 친구인 영국 궁정 주재 프로이센 공사가 서방 열강에 대한 동조를 표명했다는 이유로 둘 다 교체될 정도까지 이르렀다.

슈바르첸베르크 공과 오스트리아의 「배은망덕」에 관한 이야기는 니콜라이를 깊이 충격에 빠뜨리고 모욕한 것으로 유명하다. 동방에서 자국의 이익상 러시아의 천적이었던 오스트리아는 공공연히 러시아에 맞서 영국과 프랑스 편을 들었으나, 프로이센은 온 독일의 커다란 분노에도 불구하고 끝까지 충실했다.

여섯 번째 시기는 현 국왕이자 황제인 빌헬름 1세의 섭정으로 시작된다. 프리드리히는 완전히 미쳐 버렸고, 프로이센 왕자라는 이름으로 온 독일의 미움을 받던 그의 동생 빌헬름이 1858년 섭정이 되었으며, 1861년 1월 형이 죽자 프로이센 국왕이 되었다. 놀랍게도 이 부사관 같은 국왕, 악명 높은 민주주의자 교수형꾼에게도 인민에게 영합하는 자유주의의 밀월기가 있었다. 섭정에 오르면서 그는 연설을 하여, 프로이센을, 나아가 프로이센을 통해 온 독일을 마땅한 높이로 끌어올리겠다는 확고한 뜻을 밝혔다. 그러면서 헌법이 왕권에 정한 한계를 존중하고{이 존중은 그에게 그만큼 더 쉬웠을 것 같다. 하사된, 곧 국왕의 은혜로 내려 준 헌법은 사실상 왕권을 아무것도 제한하지 않았기 때문이다. 예외는 단 한 조항 — 대의 기관의 동의 없이 새 차관을 들이거나 새 세금을 법령으로 정할 권리였다. 이미 한 번 의회의 동의를 얻은 세금을 거두는 데는 새로운 의회 표결이 필요 없었다. 의회에는 그것을 폐지할 권리가 없었기 때문이다. 바로 이 새 제도가 독일의 입헌주의와 의회주의 전체를 완전히 공허한 놀이로 만들어 버렸다. 다른 나라들, 곧 영국, 프랑스, 벨기에, 이탈리아, 스페인, 포르투갈,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등에서는 의회가 정부에 세금을 거부할 본질적이고 유일하게 실질적인 권리를 지니고 있어, 마음만 먹으면 어떤 정부든 불가능하게 만들 수 있고, 그 결과 통치 업무에서 상당한 비중을 얻는다. 하사된 헌법은 프로이센 의회에서 이 권리를 빼앗고, 새 세금의 설정과 새 차관의 체결을 거부할 권리만 주었다. 그러나 의회의 권리를 지키겠다고 약속하고 3년 뒤에 빌헬름 1세가 그 권리를 어기지 않을 수 없게 된 경위를 우리는 곧 보게 될 것이다.} 의회가 표현하는 인민의 지향에 언제나 의지하겠다고 했다.

이 약속에 따라 그가 통치하며 맨 먼저 한 일은 만토이펠 내각의 해산이었다. 만토이펠 내각은 일찍이 프로이센을 통치한 내각 가운데 가장 반동적인 것의 하나였고, 프로이센의 정치적 패배와 몰락을 구현한 화신과도 같았다.

만토이펠은 1850년 11월에 수상이 되었는데, 마치 프로이센에 극도로 굴욕적인 올뮈츠 회의의 모든 조건에 서명하고 프로이센과 독일 전체를 오스트리아의 패권에 완전히 복종시키기 위해서인 것 같았다. 그것이 니콜라이의 의지였고, 슈바르첸베르크 공의 격정적이고 오만한 열망이었으며, 프로이센 융커, 즉 귀족의 압도적 다수의 열망이자 의지이기도 했다. 그들은 프로이센과 독일의 합병에 대해서는 듣기조차 싫어했고, 오스트리아 황제와 전러시아 황제에게 자기 자신의 국왕보다도 거의 더 충성했다. 국왕에게는 사랑이 아니라 의무 때문에 복종했을 뿐이다. 꼬박 8년 동안 만토이펠은 이런 방향과 정신으로 프로이센을 통치하면서, 기회만 있으면 오스트리아 앞에서 프로이센에 굴욕을 안겼고, 동시에 프로이센 안에서, 그리고 독일 전체에서 자유주의나 인민 운동과 인민의 권리를 떠올리게 하는 모든 것을 무자비하고 가차 없이 탄압했다.

이 증오의 대상이던 내각은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의 자유주의 내각으로 교체되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공은 첫날부터, 빈에 대해 프로이센의 명예와 독립을 회복하고 독일에 대해 잃어버린 영향력도 되찾겠다는 섭정의 의도를 천명했다.

이런 방향의 말 몇 마디와 조치 몇 가지만으로도 모든 독일인을 열광시키기에 충분했다. 최근의 모든 모욕과 잔학 행위와 범죄는 잊혔다. 민주주의자들의 교수형 집행인, 섭정이었다가 이어 국왕이 된 빌헬름 1세는 어제까지만 해도 미움과 저주를 받았으나 갑자기 총아이자 영웅이며 유일한 희망으로 바뀌었다. 그 증거로 그 유명한 야코비가 쾨니히스베르크 유권자들 앞에서 한 말(1858년 11월 11일)을 인용한다.

「섭정에 취임하면서 왕자가 한 참으로 사나이답고 헌법에 맞는 연설은 모든 프로이센인과 모든 독일인의 마음을 새로운 믿음과 새로운 희망으로 채웠습니다. 모두가 비상한 활기로 투표함을 향해 달려가고 있습니다.」

1861년에 같은 야코비는 다음과 같이 썼다. 「섭정 왕자가 스스로 결단하여 나라의 통치를 손에 쥐었을 때, 모두가 프로이센이 정해진 목표를 향해 거침없이 나아가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섭정이 나라의 통치를 맡긴 사람들이 무엇보다 먼저 지난 10년 동안 정부가 저지른 모든 악을 없애고, 관리들의 자의를 끝장내어 전반적인 애국 정신과 시민의 자유로운 자각을 일으키고 되살리리라고 기대했습니다...

「이 희망들은 이루어졌습니까? 만인의 목소리가 공공연히 대답합니다. 이 2년 동안 프로이센은 한 걸음도 나아가지 못했고, 자기의 역사적 사명을 이루는 일에서 예전과 다름없이 멀리 떨어져 있습니다.」

존경스러운 야코비 박사, 마지막 신봉자이자 독일 정치적 민주주의의 대표자인 그는 틀림없이 자기 강령에 충실한 채로 죽을 것이다. 그의 강령은 최근 몇 년 사이에 독일 사회민주주의자들의 강령이라는, 그리 넓지 않은 한계까지 확장되었다. 그의 이상, 즉 전 인민적 자유를 통한 범게르만 국가의 건설은 공상이며 부조리다. 우리는 이미 이에 대해 말했다. 1848년과 1849년 이후 독일 애국자들의 압도적 다수는 범게르만 세력의 기초는 오직 대포와 총검으로만 놓을 수 있다는 확신에 이르렀고, 그래서 독일은 호전적 군주국 프로이센에게서 구원을 기대했다.

1858년에 국민자유당 전체가 정부 정책이 바뀌는 첫 징후를 틈타 정부 편으로 넘어갔다. 이전의 민주당은 쪼개졌다. 그 압도적 다수는 새 당 「진보당」을 결성했고, 나머지는 계속 민주당이라 불렸다. 진보당은 처음부터 정부와 손잡기를 갈망했으나, 체면은 지키고 싶어서 그렇게 넘어갈 그럴듯한 구실을 달라고 정부에 애원했고, 적어도 겉으로라도 헌법을 존중해 달라고 요구했다. 진보당은 1866년까지 정부에 추파를 던지기도 하고 티격태격하기도 하다가, 덴마크와 오스트리아에 거둔 승리의 광채에 굴복해 정부에 무조건 항복했다. 민주당도, 뒤에서 보겠지만, 1870년에 똑같은 짓을 했다.

야코비는 이 일반적인 본보기를 따르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따르지 않을 것이다. 민주주의 원칙이 그의 삶 자체다. 그는 폭력을 증오하며, 폭력으로 강력한 독일 국가를 세울 수 있다고 믿지 않는다. 그래서 그는 지금의 프로이센 정책의 적으로 남았다. 물론 외롭고 무력한 적이다. 그가 무력한 주된 까닭은, 머리끝에서 발끝까지 국가주의자인 그가 진심으로 자유를 꿈꾸면서 동시에 단일한 범게르만 국가를 바란다는 데 있다.

현 독일 황제 빌헬름 1세는 모순에 시달리지 않는다. 잊을 수 없는 니콜라이 1세처럼 그는 마치 한 덩어리 금속으로 만들어진 듯하다. 한마디로 편협하기는 해도 온전한 인간이다. 그와 왕위에 오르지 못한 샹보르 백작은 자기가 하느님의 기름부음을 받았고 신성한 소명과 권리를 지녔다고 믿는 거의 유일한 사람들일 것이다. 신앙 깊은 군인 왕인 그는 니콜라이처럼 모든 원칙 위에 정통주의 원칙, 즉 세습적 국가 권리를 둔다. 이 원칙은 그의 양심과 지성에 독일 통일의 심각한 걸림돌이었다. 수많은 합법적 군주를 왕좌에서 밀어내야 했기 때문이다. 그러나 국가 법전에는 또 다른 원칙 — 신성한 정복권 — 이 있어 문제를 풀어 주었다. 군주로서의 의무에 충실한 군주라면, 반란을 일으킨 인민이 바치는 왕좌, 인민이 합법적 군주를 몰아내고 비워 놓은 왕좌에는 세상없어도 앉기를 승낙하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하느님이 자기 무기에 축복을 내리고 선전포고할 적당한 구실만 있다면, 그는 그 인민과 왕좌를 정복할 권리가 자기에게 있다고 여길 것이다. 이 원칙과 그에 근거한 권리는 모든 군주가 늘 인정해 왔고 지금도 인정한다.

따라서 빌헬름 1세에게는 전쟁을 통해 국가를 확장할 합법적 구실과 수단을 만들어 낼 수 있는 장관이 필요했다. 그런 사람이 비스마르크였다. 빌헬름은 그의 진가를 제대로 알아보고 1862년 10월에 그를 장관으로 임명했다.

비스마르크 공은 지금 유럽에서 가장 강력한 인물이다. 그는 포메른 귀족의 가장 순수한 전형이다. 왕가에 대한 돈키호테 같은 충성, 흔한 군인풍의 무뚝뚝한 겉모습, 그리고 시민 출신 자유주의 정치가들을 대하는, 오만하고 냉랭하게 정중하며 대개는 경멸 섞인 조롱조의 태도를 지녔다. 그는 「융커」, 즉 귀족이라고 불리는 것에 화내지 않으며, 반대자들에게 흔히 이렇게 대답한다. 「안심하시오. 우리는 융커의 명예를 드높일 줄 압니다.」 대단히 영리한 사람인 그는 융커의 편견은 물론 어떤 다른 편견에서도 완전히 자유롭다.

우리는 비스마르크를 프리드리히 2세의 정치를 곧바로 잇는 정치가라고 불렀다. 비스마르크도 프리드리히처럼 무엇보다 힘을 믿고, 그다음으로 그 힘을 부리며 흔히 그것을 열 배로 불리는 지성을 믿는다. 철두철미한 국가의 인간인 그는 프리드리히 대왕처럼 신도 악마도 인류도, 심지어 귀족도 믿지 않는다. 이 모든 것은 그에게 수단일 뿐이다. 국가의 목적을 이루기 위해서라면 그는 신의 법도 인간의 법도 거리끼지 않는다. 정치에서 그는 도덕을 인정하지 않는다. 비열한 짓과 범죄는 성공하지 못했을 때에만 부도덕하다. 프리드리히보다 더 냉정하고 무정한 그는 프리드리히만큼 거리낌 없고 뻔뻔하다. 귀족당 덕분에 출세한 귀족이면서도 그는 국가의 이익을 위해 귀족당을 체계적으로 짓누르며, 그것도 모자라 예전에 자유주의자, 진보주의자, 민주주의자들을 조롱하던 것과 똑같이 귀족당을 조롱한다. 사실 그는 황제만 빼고 모든 것과 모든 사람을 조롱한다. 황제의 호의 없이는 아무것도 꾀할 수도 이룰 수도 없기 때문이다. 하지만 어쩌면 은밀히, 그런 친구가 있다면 친구들과 함께 황제까지 조롱하는지도 모른다.

비스마르크가 이룬 모든 일을 제대로 평가하려면 그가 어떤 사람들에게 둘러싸여 있는지 떠올려야 한다 {우리가 믿을 만한 직접적 출처에서 얻은, 비스마르크를 잘 보여 주는 일화가 있다. 1848년 독일의 가장 붉은 혁명가 가운데 한 사람이자 사이비 혁명가 킨켈을 요새에서 구해 낸 슈르츠에 대해 못 들어 본 사람이 있겠는가. 슈르츠는 킨켈을 진지한 혁명가로 여겼지만, 사실 킨켈은 정치에서 한 푼어치 값어치도 없는 인물이었다. 슈르츠는 자기 자유를 걸고 크나큰 난관을 대담하고도 재치 있게 이겨 내어 그를 구출했고, 자신은 미국으로 달아났다. 미국에서 존중받는 자질인 영리함과 유능함과 정력을 갖춘 사람이었기에, 그는 곧 그곳에서 수백만을 헤아리는 독일계 당의 우두머리가 되었다. 지난 전쟁 동안 그는 북군에서 장군까지 올랐다(그전에 이미 상원의원으로 선출되어 있었다). 전쟁이 끝난 뒤 합중국은 그를 특명 대사로 스페인에 보냈다. 그는 이 기회에 남독일을 방문했지만, 사이비 혁명가 킨켈을 구출한 죄로 사형 판결이 내려져 있던 프로이센에는 가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그가 독일에 와 있다는 것을 알고, 미국 독일인들 사이에서 그토록 영향력 있는 인물을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고 그를 베를린으로 초청하면서 이렇게 전하게 했다. 「슈르츠 같은 사람에게는 법이 쓰여 있지 않소.」 슈르츠가 베를린에 오자 비스마르크는 그를 위해 만찬을 베풀고 동료 장관들을 모두 초대했다. 만찬이 끝나고 모두 물러가 슈르츠가 비스마르크와 단둘이 허물없는 이야기를 나누게 되었을 때, 비스마르크가 그에게 말했다. 「내 동료들을 보고 들으셨지요. 바로 저런 당나귀들을 데리고 나는 독일을 다스리고 만들어 내야 할 운명이오.」}. 국왕은 식견이 좁은 사람으로, 신학과 하사관식 교육을 받았으며, 비스마르크에게 대놓고 적대적인 귀족·성직자당에 둘러싸여 있다. 그래서 비스마르크는 새 조치 하나, 새 걸음 하나마다 싸워서 얻어 내야 한다. 이런 집안싸움이 그의 시간과 지력과 정력의 적어도 절반을 앗아 가고, 물론 그의 활동을 몹시 늦추고 방해하고 마비시킨다. 그러나 이는 그에게 어느 정도 좋은 일이기도 하다. 비스마르크 못지않게 영리했던 그 이름난 폭군 나폴레옹 1세가 그랬듯이 일을 벌이다가 분수를 넘어 날뛰지 못하게 막아 주기 때문이다.

비스마르크의 공적 활동은 1847년에 시작되었다. 그는 연합 대의회에서 가장 극단적인 귀족당의 우두머리로 등장했다. 1848년에 그는 프랑크푸르트 의회와 전독일 헌법의 공공연한 적이었으며, 러시아와 오스트리아, 즉 대내외 반동의 열렬한 동맹자였다. 이런 정신으로 그는 그해에 창간되어 지금도 나오는 초반동 신문 《크로이츠차이퉁》에 매우 적극적으로 참여했다. 물론 그는 브란덴부르크 내각과 만토이펠 내각의, 따라서 올뮈츠 회의 결정의 열렬한 옹호자였다. 1851년부터 그는 프랑크푸르트의 독일 연방 주재 공사였다. 바로 이 시기에 그는 오스트리아에 대한 태도를 근본적으로 바꾸었다. 「오스트리아의 정책을 자세히 들여다보았을 때 내 눈에서 눈가리개가 떨어진 것 같았다」라고 그는 친구들에게 말했다. 그제야 그는 오스트리아가 프로이센에 얼마나 적대적인지 깨달았고, 열렬한 옹호자에서 화해할 수 없는 적으로 돌아섰다. 이때부터 독일에 대한 오스트리아의 모든 영향력을 없애고 오스트리아를 독일에서 배제하는 것이 그의 변함없는, 가장 아끼는 구상이 되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는 프로이센의 빌헬름 왕자와 만났다. 빌헬름은 올뮈츠 회의 이후 혁명을 증오하듯 오스트리아를 증오하게 되었다. 빌헬름은 섭정이 되자마자 곧 비스마르크에게 눈을 돌렸고, 처음에는 그를 러시아 주재 대사로, 다음에는 프랑스 주재 대사로, 마지막으로 수상으로 임명했다.

대사로 있는 동안 비스마르크는 자기 강령을 무르익혔다. 파리에서 그는 나폴레옹 3세 본인에게서 국가적 사기술의 귀중한 가르침을 몇 가지 받았다. 나폴레옹 3세는 열성적이고 유능한 청강생을 보자 속마음을 털어놓고, 유럽 지도를 다시 그려야 한다는 속이 빤히 보이는 암시를 몇 번 던졌다. 자기에게는 라인 국경과 벨기에를 달라고 하고, 나머지 독일은 프로이센에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이 협상의 결과는 잘 알려져 있다. 제자가 스승을 속여 넘겼다.

내각에 들어가면서 비스마르크는 연설을 하여 자기 강령을 밝혔다. 「프로이센의 국경은 일류 국가에게는 비좁고 불편하다. 새 국경을 정복하려면 군사 조직을 확대하고 개선해야 한다. 다가올 투쟁에 대비해야 하며, 그때를 기다리면서 힘을 모으고 늘려야 한다. 1848년의 잘못은 모두 인민적 제도를 통해 독일을 하나의 국가로 통일하려 한 데 있었다. 거대한 국가적 문제는 권리가 아니라 힘으로 해결된다 — 힘은 언제나 권리에 앞선다.」

이 마지막 표현 때문에 비스마르크는 1862년부터 1866년까지 독일 자유주의자들에게 적잖이 시달렸다. 1866년부터, 즉 오스트리아에 대한 승리 이후, 특히 1870년 이후, 즉 프랑스의 패배 이후 이 모든 비난은 열광적인 찬가로 바뀌었다.

비스마르크는 평소의 대담함과 그 특유의 냉소, 경멸 어린 솔직함으로 이 말에서 인민들의 정치사 전체의 본질, 국가적 지혜의 모든 비밀을 털어놓았다. 힘의 끊임없는 우위와 승리 — 이것이 진짜 본질이다. 정치 언어에서 권리라고 불리는 것은 모두 힘이 만들어 낸 사실을 신성하게 꾸민 것에 지나지 않는다. 해방을 갈망하는 인민 대중이 추상적 권리의 이론적 승리에서 해방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은 분명하다. 그들은 힘으로 자유를 쟁취해야 하며, 그러기 위해서는 국가 밖에서, 국가에 맞서 자신들의 자생적 힘을 조직해야 한다.

우리가 이미 말했듯이 독일인들은 자유가 아니라 강한 국가를 원했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알았고, 프로이센의 관료제와 군사력이 있으면 그것을 이룰 수 있다고 느꼈다. 그래서 그는 어떤 권리에도,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의 격렬한 논박과 공격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대담하고 굳건하게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그는 앞선 집권자들과 달리, 목표를 이루고 나면 자유주의자도 민주주의자도 자기의 열렬한 동맹자가 되리라고 믿었다.

하사관 국왕과 정치가 비스마르크는 군대 증강을 원했고, 그러자면 새 세금과 공채가 필요했다. 새 세금과 공채의 승인권을 쥔 인민 대표원은 줄곧 이를 거부했고, 그 때문에 여러 차례 해산되었다. 다른 나라였다면 이런 충돌이 정치 혁명을 불러일으켰을 수도 있겠지만, 프로이센에서는 그렇지 않았다. 비스마르크는 이를 알았기에 거부에도 아랑곳하지 않고 공채와 세금으로 필요한 액수를 어디서든 손에 넣었다. 의회는 거부를 거듭하다가, 독일까지는 아니더라도 유럽의 웃음거리가 되었다.

비스마르크는 틀리지 않았다. 목표를 이루자 그는 자유주의자들에게도 민주주의자들에게도 우상이 되었다.

아마 어느 때, 어느 나라에서도 1864년, 1866년, 1870년 사이에 독일에서 드러난 것만큼 빠르고 완전한 여론의 전환은 없었을 것이다. 오스트리아·프로이센의 대덴마크 전쟁 직전까지 비스마르크는 독일에서 가장 인기 없는 인물이었다. 이 전쟁 중에, 특히 전쟁이 끝날 무렵 그는 인민의 권리든 국가의 권리든 모든 권리를 더없이 깊이 경멸함을 드러냈다. 프로이센과 그에 끌려간 어리석은 오스트리아가, 독일 연방의 명령으로 슐레스비히와 홀슈타인을 점령하고 있던 작센·하노버 군단을 그곳에서 얼마나 거리낌 없이 쫓아냈는지, 비스마르크가 자기에게 속은 오스트리아와 정복한 지역들을 얼마나 뻔뻔하게 나누어 가졌는지, 그리고 결국 그 모두를 프로이센만의 전리품이라고 선언하며 끝냈는지는 잘 알려져 있다.

이런 행태가 정직하고 자유를 사랑하며 정의로운 모든 독일인의 강한 분노를 불러일으키리라고 짐작할 수도 있다. 그러나 정반대로 바로 이때부터 비스마르크의 인기가 오르기 시작했다 — 독일인들은 자기들 위에 국가적·애국적 지성과 강력한 정부 권력이 있음을 느꼈다. 1866년의 전쟁은 그의 위상을 더 높였을 뿐이다. 나폴레옹 1세의 원정을 떠올리게 하는 보헤미아로의 신속한 진군, 오스트리아를 쓰러뜨린 일련의 눈부신 승리, 독일 전역을 누빈 개선 행진, 적지 약탈, 하노버와 헤센-카셀과 프랑크푸르트를 전리품으로 선언한 일, 장차 황제가 될 사람의 비호 아래 북독일 연방을 결성한 일 — 이런 사실들이 독일인들을 열광시켰다. 프로이센 야당의 지도자들, 피르호니 슐체-델리치니 하는 이들은 스스로 도덕적으로 패배했다고 선언하고 갑자기 입을 다물었다. 야당에는 고귀한 노인 야코비를 우두머리로 하는 아주 작은 집단만 남았고, 이들은 1866년 이후 남독일에서 결성된 「인민당」에 합류했다.

승리한 프로이센이 격파된 오스트리아와 맺은 조약에 따라 옛 독일 연방은 해체되고, 그 자리에 프로이센이 이끄는 북독일 연방이 생겨났다. 오스트리아, 바이에른, 뷔르템베르크, 바덴에는 남부 연방을 결성할 권리가 주어졌다.

전쟁 뒤 임명된 오스트리아 장관 보이스트 남작은 그런 연방 결성이 얼마나 중요한지 알고 온 힘을 여기에 쏟았으나, 풀 수 없는 국내 문제들과, 바로 그 연방이 중요했던 열강들 쪽의 거대한 장애가 그를 가로막았다. 비스마르크는 모두를 속여 넘겼다. 러시아도, 프랑스도, 독일 군주들도. 이들에게는 프로이센이 지금의 지위에 오르지 못하게 막아 줄 연방의 결성이 중요했다.

이 무렵 남독일 부르주아지로 이루어진 「인민당」은 오로지 비스마르크에 반대할 목적으로 생겨났으며, 그 강령은 본질적으로 보이스트의 것과 같았다. 즉 오스트리아와 긴밀히 결합하고 가장 폭넓은 인민적 제도에 기초한 남독일 연방을 결성하자는 것이었다.

「인민당」의 중심지는 슈투트가르트였다. 오스트리아와의 연합 말고도 이 당에는 다른 색채가 많았다. 예컨대 바이에른에서는 극단적 가톨릭파, 즉 예수회에 추파를 던졌고, 프랑스와의 연합, 스위스와의 연합을 바랐다. 공화국 스위스와의 연합을 바란 그룹이 「평화와 자유 연맹」의 주요 창립자였다.

대체로 그 강령은 순진하고 모순투성이였다. 민주적 인민 제도가 기묘하게도 군주제 통치 형태와 결합되었고, 군주들의 독립은 범게르만 통일과, 범게르만 통일은 다시 전 유럽 공화주의 연방과 결합되었다. 한마디로 거의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 남아야 하면서도 모든 것이 새로운 정신으로 가득해야 했고, 무엇보다 박애적 성격을 띠어야 했다. 자유와 평등이 바로 그것들을 파괴하는 조건 아래서 꽃피어야 했다. 이런 강령은 남독일의 감상적인 시민들만이 지어낼 수 있었다. 1868년 「평화 연맹」 대회가 보여 주었듯이, 그들은 처음에는 현대의 사회주의적 지향을 체계적으로 무시하고, 나중에는 열렬히 부정하는 것으로 이름났다.

「인민당」이 1860년대에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창설한 사회민주주의자들의 노동자당과 적대 관계에 서게 되리라는 것은 분명했다.

이 책의 제2부에서는 독일과 유럽 전반에서 노동자 결사들이 발전해 온 과정을 자세히 이야기할 것이다. 여기서는 최근 10년의 끝 무렵, 곧 1868년에 독일의 노동자 대중이 세 부류로 나뉘어 있었다는 점만 짚어 두자. 첫째 부류는 가장 수가 많았고, 어떤 조직에도 속하지 않았다. 둘째 부류도 꽤 수가 많았는데, 이른바 「노동자 교육 협회」(Arbeiterbildungsverein)들로 이루어져 있었다. 마지막으로 셋째 부류는 수는 가장 적었지만 가장 정력적이고 가장 의식이 뚜렷했으며, 「전독일노동자협회」(der deutsche allgemeine Arbeiterverein)이라는 이름으로 라살레파 노동자들의 밀집 대오를 이루었다.

첫째 부류에 대해서는 할 말이 없다. 둘째 부류는 슐체-델리치와 그와 같은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의 직접 지도를 받는 소규모 노동자 결사들의 일종의 연합체였다. 그 구호는 「자조」(Selbsthilfe)였다. 막노동자들에게, 국가와 정부에게서는 구원도 도움도 기대하지 말고 오직 자기 자신의 힘에서만 구하라고 끈질기게 권했다는 뜻에서다. 이 충고는 훌륭했을 것이다. 거기에 거짓된 장담, 즉 지금의 사회 조직 조건에서도, 노동자 대중을 갉아먹는 경제적 독점과 그 독점을 인민 반란으로부터 지켜 주는 정치 국가가 존재하는 상황에서도 막노동자들의 해방이 가능하다는 장담이 덧붙지만 않았다면 말이다. 이런 착각 때문에, 그리고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들과 이 당 우두머리들 쪽에서는 완전히 의식적인 기만 때문에, 그들의 영향 아래 있던 노동자들은 모든 정치·사회적 관심사와 국가·소유 등에 관한 문제에서 체계적으로 물러나 있어야 했다. 그리고 지금의 사회 체제가 합리적이고 합법적이라는 것을 출발점으로 삼아, 소비·신용·생산 협동조합을 만들어 자기 처지를 개선하고 덜어 보려고 해야 했다. 정치 교육을 위해서는 슐체-델리치가 노동자들에게 진보당의 강령 전체를 권했는데, 그 자신도 동지들과 함께 진보당에 속해 있었다.

이제 모두에게 분명해졌듯이, 슐체-델리치의 체계는 경제적으로는 사회적 폭풍에 맞서 부르주아 세계를 지키는 쪽으로 곧장 기울어 있었고, 정치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를 그것을 착취하는 부르주아지에게 완전히 종속시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부르주아지 밑에서 고분고분하고 어리석은 도구로 남아 있어야 했다.

이런 조잡한 이중의 기만에 맞서 페르디난트 라살레가 일어섰다. 그에게는 슐체-델리치의 경제 체계를 깨부수고 그 정치 체계의 하잘것없음을 낱낱이 보여 주는 것쯤은 쉬운 일이었다. 라살레만큼 독일 노동자들에게 다음과 같은 점을 설득력 있게 설명하고 증명한 사람은 없었다. 지금의 경제 조건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처지는 없어질 수 없을 뿐 아니라, 오히려 피할 수 없는 경제 법칙에 따라 해마다 악화될 수밖에 없고 또 악화되리라는 것이다. 그것도 기껏해야 극소수 노동자에게나 잠깐 지나가는 이익을 줄 수 있을 뿐인 온갖 협동조합 시도에도 불구하고 말이다.

정치 강령을 깨부수면서 그는, 겉으로만 인민적인 이 모든 정치가 부르주아의 경제적 특권을 강화하는 쪽으로 기울어 있을 뿐임을 증명했다.

여기까지는 우리도 라살레와 의견이 같다. 그러나 바로 다음 지점에서 우리는 그와, 그리고 독일의 모든 민주주의 사회주의자 또는 공산주의자와 갈라진다. 노동자들에게 오직 자기 자신의 힘에서만 구원을 찾고 국가에는 아무것도 요구하지도 기대하지도 말라고 권한 슐체-델리치와 반대로, 라살레는 노동자들에게 첫째, 지금의 경제 조건에서는 그들의 해방은커녕 그들의 처지가 조금이라도 나아지는 것조차 불가능하고 악화만이 필연적이며, 둘째, 부르주아 국가가 존재하는 한 부르주아의 경제적 특권은 난공불락으로 남는다는 것을 증명한 뒤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실제의 자유, 경제적 평등에 기초한 자유를 얻으려면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를 장악하고, 지금 국가 권력이 오로지 착취 계급의 이익을 위해 프롤레타리아트를 향해 있는 것과 꼭 마찬가지로, 그 권력을 노동 대중의 이익을 위해 부르주아지를 향해 돌려야 한다는 것이다.

그러면 국가를 어떻게 장악할 것인가? — 이를 위한 수단은 두 가지뿐이다. 정치 혁명, 아니면 평화적 개혁을 위한 합법적 인민 선동이다. 라살레는 독일인으로서, 유대인으로서, 학자로서, 그리고 부유한 사람으로서 두 번째 길을 권했다.

이런 뜻에서, 이런 목적으로 그는 독일 노동자들의 상당한, 주로 정치적인 당을 결성하고, 그것을 위계적으로 조직하고, 엄격한 규율과 자신의 독재에 복종시켰다. 한마디로 그는 마르크스 씨가 지난 3년 동안 인터내셔널에서 하려 했던 일을 해냈다. 마르크스의 시도는 실패로 끝났지만 라살레의 시도는 완전한 성공을 거두었다. 그는 국가의 대표자와 권력자를 뽑는 보통선거권을 쟁취하기 위한 전 인민적 평화 선동을 당의 직접적이고 가장 가까운 목표로 내걸었다.

합법적 개혁을 통해 이 권리를 쟁취하고 나면, 인민은 자기 대표자들을 인민 의회에 보내기만 하면 된다. 그 의회는 일련의 포고와 법률로 부르주아 국가를 인민국가로 바꿀 것이다. 인민국가의 첫 번째 일은 생산 및 소비 노동자 협동조합에 무제한 신용을 개설하는 것이 될 터인데, 그제야 그 협동조합들은 부르주아 자본과 싸울 수 있게 되고 머지않아 그것을 이기고 삼킬 것이다. 삼키는 과정이 완료되면 사회의 근본적 개조 시기가 도래할 것이다.

라살레의 강령이 그러하고, 사회민주당의 강령도 그러하다. 사실 이것은 라살레의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의 것으로, 마르크스가 1848년 엥겔스와 함께 공표한 유명한 『공산당 선언』에서 충분히 밝힌 바다. 1864년 마르크스가 쓴 첫 『국제협회 선언』에도 이에 대한 분명한 암시가 있는데, 「노동계급의 첫 번째 의무는 스스로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데 있다」라는 구절, 또는 『공산당 선언』에 쓰인 대로 「노동자 혁명의 첫걸음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지배 신분의 지위로 끌어올리는 데 있어야 한다. 프롤레타리아트는 모든 생산수단을 국가의 손에, 즉 지배 신분의 지위로 끌어올려진 프롤레타리아트의 손에 집중시켜야 한다」라는 구절이 그것이다.

라살레의 강령이 그가 스승으로 인정한 마르크스의 강령과 조금도 다르지 않다는 것이 분명하지 않은가? 슐체-델리치를 반박하는 소책자에서 라살레는 그의 저작들의 특징인 참으로 천재적인 명료함으로 근대 사회의 사회정치적 발전에 관한 자신의 기본 개념을 서술한 뒤, 이 사상과 심지어 용어까지도 자기 것이 아니라 마르크스 씨의 것이라고 직접 말한다. 마르크스 씨가 아직 출간되지 않은 훌륭한 저작에서 처음으로 표명하고 발전시켰다는 것이다.

그렇기에 라살레 사후 『자본』에 관한 저술의 서문에 실린 마르크스 씨의 항의는 더욱 이상해 보인다. 마르크스는 라살레가 자기 사상을 가로채 자기를 도둑질했다고 쓰라리게 불평한다. 집단적 소유를 설교하면서 일단 표명된 사상은 개인의 소유이기를 그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하는 공산주의자 쪽에서 나온, 지극히 이상한 항의다. 라살레가 한 쪽 또는 여러 쪽을 베꼈다면 사정이 달랐을 것이다 — 그것은 도둑질이며, 빌려 온 사상을 소화하여 자기 정신 노동으로 독자적인 형태로 재현하지 못하는 저자의 지적 무능을 증명하는 것이었으리라. 그런 짓은 지적 능력이 없고 허영심 많고 파렴치한 자들, 공작 깃털을 꽂은 까마귀들이나 한다.

라살레는 대중의 주목을 끌려고 그런 비루한 수단에 기댈 필요가 있기에는 너무나 영리하고 독자적이었다. 그는 허영심이 많았다. 유대인답게 아주 많았다. 그러나 동시에 너무나 빼어난 재능을 타고나서 가장 까다로운 허영심의 요구도 손쉽게 채울 수 있었다. 그는 영리하고 학식 있고 부유하고 수완 좋고 지극히 대담했다. 변증법과 언변, 이해와 서술의 명료함을 최고도로 타고났다. 이론에, 그리고 막후의 음모나 지하 음모에는 강하지만 반대로 공개 무대에서는 모든 의미와 힘을 잃는 스승 마르크스와 달리, 라살레는 실천의 장에서 벌이는 공개적 투쟁을 위해 일부러 만들어진 사람 같았다. 투쟁으로 달아오른 자존심이 불러일으킨 변증법적 수완과 논리의 힘이, 그에게서는 열렬한 신념의 힘을 대신했다. 그는 프롤레타리아트에게 지극히 강한 영향을 미쳤지만 결코 인민적인 사람은 아니었다.

삶 전체와 환경, 습관, 취향으로 보아 그는 상류 부르주아 계급, 이른바 황금 청년 또는 노란 장갑 청년에 속했다. 물론 그는 그들보다 머리 하나는 높이 솟아 지성으로 군림했고, 그 지성 덕분에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의 선두에 섰다. 몇 년 만에 그는 엄청난 인기를 얻었다. 자유주의적·민주주의적 부르주아지 전체가 그를 깊이 증오했다. 같은 뜻을 지닌 동지들, 사회주의자들, 마르크스주의자들, 그리고 스승 마르크스 자신은 악의 어린 시기의 온 힘을 그에게 집중했다. 그렇다, 그들은 부르주아지 못지않게 깊이 그를 증오했다. 그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에게 증오를 드러낼 엄두를 내지 못했다. 그들에게 그는 너무 강했기 때문이다.

우리는 라살레와 마르크스의 이론에 대한 깊은 혐오를 이미 여러 차례 표명했다. 그 이론은 노동자들에게 최종적 이상은 아닐지라도 적어도 당면한 주요 목표로서 인민국가의 건설을 권하는데, 그들의 설명에 따르면 이 국가는 「지배 신분의 지위로 끌어올려진 프롤레타리아트」에 다름 아니다.

묻건대, 프롤레타리아트가 지배 신분이 된다면 그것은 누구를 지배할 것인가? 이는 이 새 지배, 이 새 국가에 예속될 또 다른 프롤레타리아트가 아직 남으리라는 뜻이다. 예컨대 농민 천민은, 알다시피 마르크스주의자들의 호의를 받지 못하며, 문화의 가장 낮은 단계에 있으므로 아마도 도시와 공장의 프롤레타리아트에게 통치받을 것이다. 또는 이 문제를 민족적 관점에서 본다면, 이를테면 독일인들에게 슬라브인들은 같은 이유로 승리한 독일 프롤레타리아트에 대해, 그 프롤레타리아트가 자기 부르주아지에 대해 놓여 있는 것과 같은 노예적 예속 상태에 놓이게 될 것이다.

국가가 있으면 반드시 지배가 있고, 따라서 노예 상태도 있다. 공공연하든 위장되었든 노예 상태 없는 국가는 생각할 수 없다 — 바로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국가의 적이다.

지배 신분으로 끌어올려진 프롤레타리아트란 무슨 뜻인가? 설마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통치의 우두머리 자리에 서게 된다는 것인가? 독일인은 약 4천만으로 헤아려진다. 설마 그 4천만 명 모두가 정부의 구성원이 된다는 것인가? 온 인민이 통치자가 될 것이고, 통치받는 자는 없을 것이다. 그렇다면 정부도 없고 국가도 없을 것이다. 그러나 국가가 있다면 통치받는 자도 있고 노예도 있을 것이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이론에서 이 딜레마는 간단히 풀린다. 그들이 인민의 통치라고 하는 것은 인민이 선출한 소수의 대표자를 통한 인민의 통치다. 인민 전체가 보편적이고 빠짐없는 선거권으로 이른바 인민 대표들과 국가의 통치자들을 뽑는 것 — 이것이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그리고 민주주의 학파의 마지막 말이다 — 은 거짓말이다. 그 뒤에는 통치하는 소수의 전제가 숨어 있으며, 이 거짓말은 이른바 인민 의지의 표현으로 나타나는 만큼 더욱 위험하다.

그러니 이 문제를 어떤 관점에서 보든 늘 똑같은 슬픈 결과에 이른다. 특권적 소수에 의한 인민 대중의 거대한 다수의 통치다. 그러나 이 소수는,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말하기를, 노동자들로 이루어질 것이다. 그렇다, 아마도, 예전의 노동자들로. 그러나 그들은 인민의 통치자나 대표가 되자마자 노동자이기를 그칠 것이고, 국가의 높은 곳에서 막노동하는 세계 전체를 내려다볼 것이다. 그들은 더는 인민을 대표하지 않고 자기 자신과, 인민을 통치하겠다는 자기들의 요구를 대표할 것이다. 이를 의심할 수 있는 자는 인간의 본성을 전혀 모르는 자다.

그러나 이 선출된 자들은 열렬히 확신에 찬, 게다가 학식 있는 사회주의자들일 것이다. 라살레파와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저작과 연설에서 끊임없이 나오는 「학식 있는 사회주의자」, 「과학적 사회주의」라는 말들은, 이른바 인민국가가 진짜 학자이거나 자칭 학자인 새롭고 극히 소수인 귀족이 인민 대중을 몹시 전제적으로 통치하는 것에 지나지 않으리라는 것을 그 자체로 증명한다. 인민은 학식이 없다. 그러니 인민은 통치의 근심에서 완전히 해방되고, 통치받는 가축 떼에 완전히 편입될 것이다. 훌륭한 해방이로다!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이 모순을 느끼고, 학자들의 통치가 세상에서 가장 무겁고 모욕적이며 경멸스러운 통치로서 온갖 민주주의적 형식에도 불구하고 진짜 독재가 되리라는 것을 자각하고는, 이 독재가 일시적이고 짧으리라는 생각으로 위안을 삼는다. 그들은 말한다. 이 독재의 유일한 관심이자 목표는 인민을 경제적으로나 정치적으로나 그런 단계까지 교육하고 끌어올려, 모든 통치가 곧 쓸모없어지고 국가가 모든 정치적 성격, 곧 지배하는 성격을 잃고 저절로 경제적 이해관계와 공동체들의 완전히 자유로운 조직으로 바뀌게 하는 것이라고.

여기에 명백한 모순이 있다. 그들의 국가가 정말로 인민적이라면 무엇 때문에 그것을 폐지하는가? 그리고 인민의 진정한 해방을 위해 그 폐지가 필요하다면 어찌 감히 그것을 인민적이라 부르는가? 그들에 맞선 우리의 논쟁을 통해 우리는 그들로 하여금, 자유 또는 아나키, 곧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노동 대중의 자유로운 조직이 사회 발전의 최종 목표이며, 인민국가도 빼놓지 않고 모든 국가는 멍에이며, 따라서 한쪽으로는 전제를, 다른 쪽으로는 — 노예 상태를 낳는다는 것을 자각하게 만들었다.

그들은 말한다. 그러한 국가의 멍에, 곧 독재는 가장 완전한 인민 해방에 이르기 위한 필수적 과도 수단이라고. 아나키 또는 자유 — 목표, 국가 또는 독재 — 수단. 그러니 인민 대중을 해방하려면 먼저 그들을 노예로 만들어야 한다.

우리의 논쟁은 일단 이 모순에서 멈추었다. 그들은 독재만이, 물론 자기들의 독재만이 인민의 의지를 창조할 수 있다고 주장한다. 우리는 대답한다. 어떤 독재도 스스로를 영속화하는 것 말고는 다른 목표를 가질 수 없으며, 독재는 그것을 견디는 인민 속에 노예 상태만을 낳고 기를 수 있다. 자유는 오직 자유를 통해서만, 곧 전 인민적 반란과 아래에서 위로 이루어지는 노동 대중의 자유로운 조직을 통해서만 창조될 수 있다.

현대사의 모든 관심이 걸려 있는 이 문제는 이 책의 제2부에서 더 자세하고 더 면밀하게 다룰 것이다. 지금은 매우 의미심장하고 변함없이 되풀이되는 다음 사실에 독자의 주의를 돌리고자 한다.

반국가적 사회주의자들, 곧 아나키스트들의 정치·사회 이론은 그들을 흔들림 없이 곧바로 모든 정부, 모든 종류의 부르주아 정치와의 가장 완전한 단절로 이끌어, 사회혁명 말고는 다른 출구를 남겨 두지 않는다. 반면 반대 이론, 곧 국가공산주의자들과 과학적 권위의 이론은 마찬가지로 흔들림 없이, 정치적 전술이라는 구실 아래 자기 지지자들을 정부들과, 또 갖가지 부르주아 정당들과의 끊임없는 거래로 끌어들여 얽어맨다. 즉 그들을 곧장 반동으로 떠민다.

그 가장 좋은 증거가 라살레다. 비스마르크와 그가 맺은 관계와 교섭을 모르는 이가 있는가? 그가 무자비하고도 매우 성공적인 전쟁을 벌였던 자유주의자들과 민주주의자들은 그것을 이용해 그가 돈에 팔렸다고 비난했다. 그리 공공연하지는 않았지만, 독일에 있는 마르크스 씨의 개인적 추종자들도 저희끼리 같은 말을 수군거렸다. 그러나 이쪽도 저쪽도 거짓말을 했다. 라살레는 부유했으므로 자신을 팔 까닭이 없었다. 그는 너무나 영리하고 너무나 자존심이 강해서, 자립적인 선동가의 역할보다 정부의 앞잡이나 그 누구의 앞잡이라는 떳떳하지 못한 처지를 택할 수 없었다.

우리가 라살레를 인민의 사람이 아니었다고 한 까닭은 이렇다. 그는 너무나 노란 장갑의 멋쟁이여서, 대개 영리하고 빛나는 연설로 프롤레타리아트를 사로잡던 집회 말고는 그들과 만나지 않았다. 부와 그에 따르는 우아하고 호사스러운 생활 습관에 너무나 길들어 있어서 인민 속에서 즐거움을 찾을 수 없었고, 너무나 유대인이어서 인민 속에서 편안할 수 없었으며, 끝으로 자신의 지적 우월성에 대한 의식이 너무나 가득해서 배우지 못한 막노동자 무리를 얼마간 경멸하지 않을 수 없었다. 그는 그 무리를 형제가 형제를 대하듯이 하기보다 의사가 환자를 대하듯이 대했다. 이런 한계 안에서 그는 인민의 대의에 진지하게 헌신했다. 정직한 의사가 자기 환자의 치료에 헌신하듯이. 다만 의사는 환자에게서 사람이라기보다 대상을 본다. 우리는 그가 세상 무엇을 준대도 인민의 대의를 배신하지 않았을 만큼 정직하고 자존심이 강했다고 깊이 확신한다.

라살레가 프로이센 장관과 맺은 관계와 거래를 설명하려고 비열한 억측에 기댈 필요는 전혀 없다. 앞서 말했듯이 라살레는 모든 색채의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들과 공공연한 전쟁 중이었고, 이 순진한 웅변가들의 무력함과 무능함을 똑똑히 보았기에 그들을 몹시 경멸했다. 비스마르크도 이유는 달랐지만 역시 그들과 적대했다 — 이것이 둘이 가까워진 첫째 계기였다. 그러나 이 접근의 주된 기초는 라살레의 정치·사회 강령, 곧 마르크스 씨가 만든 공산주의 이론 속에 있었다.

이 강령의 요점은 오직 국가를 통한 프롤레타리아트의 (이른바) 해방이다. 그러나 그러려면 국가가 부르주아 자본의 멍에에서 프롤레타리아트를 해방하는 자가 되기로 동의해야 한다. 그렇다면 국가에 어떻게 그런 의지를 불어넣을 것인가? 이를 위한 수단은 두 가지뿐일 수 있다.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를 장악하기 위해 혁명을 해야 한다 — 영웅적 수단이다. 우리 생각으로는 프롤레타리아트는 국가를 일단 장악하면 인민 대중의 영원한 감옥인 국가를 즉시 파괴해야 한다. 그러나 마르크스 씨의 이론에 따르면 인민은 국가를 파괴하기는커녕 오히려 공고히 하고 강화하여, 이런 모습으로 자기 은인과 후견인과 스승들, 곧 공산당 지도자들, 한마디로 마르크스 씨와 그의 친구들의 처분에 온전히 넘겨야 한다. 그러면 그들이 자기 방식대로 해방하기 시작할 것이다. 무지한 인민에게는 아주 강한 보살핌이 필요하므로, 그들은 통치의 고삐를 강력한 손에 집중할 것이다. 그들은 단 하나의 국립은행을 세워 상공업·농업 생산, 나아가 학문의 생산까지 모두 그 손에 집중하고, 인민 대중을 두 군대, 곧 산업군과 농업군으로 나누어, 새로운 특권적 학문·정치 신분을 이룰 국가 기술자들의 직접 지휘 아래 둘 것이다.

독일 공산주의자들의 학파가 인민에게 내건 목표가 얼마나 눈부신지 보라! 그러나 이 모든 복락에 이르려면 무엇보다 먼저 작고 순진한 한 걸음을 내디뎌야 한다 — 혁명을! 그러니 독일인들이 혁명을 일으키기를 기다려 보시라! 혁명에 대해 끝없이 따지는 것이야 그럴 수도 있겠지만, 그것을 실제로 하는 것은...

독일인들 자신도 독일 혁명을 믿지 않는다. 다른 인민이 그것을 시작하거나, 어떤 외부의 힘이 그들을 끌고 가거나 떠밀어야 한다. 그들 스스로는 결코 공론 이상으로 나아가지 않을 것이다. 따라서 국가를 장악할 다른 수단을 찾아야 한다. 국가의 정점에 서 있거나 설 수 있는 사람들의 호감을 얻어야 한다.

라살레 시대에도 지금과 똑같이 국가의 정점에는 비스마르크가 서 있었다. 그러면 누가 그의 자리에 설 수 있었는가? 자유당과 민주·진보당은 패배했다. 남은 것은 순수한 민주당뿐이었고, 이 당은 나중에 「인민당」이라는 이름을 얻었다. 그러나 이 당은 북부에서는 보잘것없었고, 남부에서는 다소 수가 많았지만 그 대신 오스트리아 제국의 패권을 곧장 지향했다. 최근의 사건들은 이 순전히 부르주아적인 당에 내적 자립성도 힘도 전혀 없었음을 증명했다. 1870년에 이 당은 완전히 와해되었다.

라살레는 주로 실천적 본능과 분별을 타고났는데, 그것은 마르크스 씨에게도 그 추종자들에게도 없는 것이다. 모든 이론가처럼 마르크스는 실천에서는 변함없고 구제 불능인 몽상가다. 그는 국제협회에서의 불운한 원정으로 이를 보여 주었는데, 그 원정의 목표는 인터내셔널 안에, 그리고 인터내셔널을 통해 유럽과 아메리카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 운동 전체 위에 자기 독재를 세우는 것이었다. 그런 목표를 세우려면 미쳤거나 아주 추상적인 학자여야 한다. 마르크스 씨는 올해 더없이 완전하고 마땅한 패배를 당했지만, 그 패배도 그를 그의 야심 찬 몽상벽에서 벗어나게 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바로 그 몽상벽 때문에, 그리고 부르주아지 사이에서 숭배자와 추종자를 얻으려는 바람 때문에 마르크스는 프롤레타리아트를 부르주아 급진파와의 거래로 줄곧 떠밀었고 지금도 떠민다. 교육으로 보나 천성으로 보나 그는 자코뱅이며, 그가 가장 아끼는 꿈은 정치적 독재다. 강베타와 카스텔라르 — 이들이 그의 참된 이상이다. 그의 마음과 모든 생각은 그들을 향해 있으며, 최근에 그가 그들을 단념해야 했다면 그것은 오직 그들이 사회주의자인 척할 줄 몰랐기 때문이다.

최근 몇 년 마르크스에게서 더 강하게 드러난, 급진 부르주아지와의 거래를 향한 이 지향에는 이중의 몽상이 담겨 있다. 첫째, 급진 부르주아지가 국가 권력을 장악하게 되면 그 권력을 프롤레타리아트의 이익을 위해 쓰기를 원할 것이며, 그렇게 원할 수 있으리라는 것, 둘째, 급진당이 국가를 장악하고서 언젠가 제 안에 뿌리를 숨기고 있는 반동에 맞서 버틸 수 있으리라는 것이다.

부르주아 급진당이 막노동하는 대중과 갈라지는 까닭은, 경제적·정치적 이해관계로도, 온갖 생활 습관으로도, 야심과 편견으로도 착취 신분과 깊이, 말하자면 유기적으로 묶여 있다는 데 있다. 그러니 이 당이, 설령 인민의 도움으로 얻었다 하더라도, 그렇게 얻은 권력을 어떻게 그 인민의 이익을 위해 쓰기를 원할 수 있겠는가? 그것은 신분 전체의 자살일 터인데, 신분의 자살이란 생각할 수 없다. 가장 열렬하고 가장 붉은 민주주의자들도 예전에도, 지금도, 앞으로도 뼛속까지 부르주아여서, 인민 쪽에서 사회주의적 요구와 본능이 빈말을 넘어 조금이라도 진지하게 표명되기만 하면 언제든 당장 가장 격렬하고 광기 어린 반동으로 뛰어들고 만다.

이는 논리적으로 필연적이며, 논리를 떠나서도 근래의 역사 전체가 그 필연성을 증명한다. 1848년 6월의 날들에 붉은 공화파가 저지른 명백한 배신을 떠올리는 것으로 충분하다. 그런데도 이 본보기와 그 뒤를 이은 나폴레옹 3세의 20년에 걸친 가혹한 교훈으로는 부족했다는 듯이, 1870~1871년 프랑스에서 똑같은 일이 다시 한번 되풀이되었다. 강베타와 그의 당은 혁명적 사회주의의 가장 격렬한 적으로 드러났다. 그들은 손발이 묶인 프랑스를 지금 그곳에서 날뛰고 있는 반동에 넘겨주었다. 또 다른 예는 스페인이다. 가장 극단적인 급진 정당(la partie intransigente)이 국제 사회주의의 가장 격렬한 적으로 드러났다.

이제 또 다른 문제가 있다. 급진 부르주아지는 전 인민적 반란 없이 승리하는 변혁을 이룰 수 있는가? 이 물음은 던지기만 해도 부정적으로 답이 나온다. 물론 할 수 없다. 그러니 혁명을 이루는 데에는 인민에게 부르주아지가 필요한 것이 아니라 부르주아지에게 인민이 필요하다. 이는 어디서나 분명해졌지만, 러시아에서는 어느 곳보다 더 분명하다. 혁명을 꿈꾸며 공론을 일삼는 우리 귀족·부르주아 청년들을 모두 모아 보라. 그러나 첫째, 그들을 어떻게 하나의 살아 있는, 같은 생각과 같은 지향을 지닌 몸으로 묶을 것인가? 그들은 인민 속에 잠겨 들어갈 때에만 하나가 될 수 있다. 인민 밖에서는 언제나 무의미하고 의지 없고 빈말만 늘어놓는, 완전히 무력한 무리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부르주아 세계의 가장 훌륭한 사람들, 즉 신념과 지향이 아니라 출신으로 부르주아인 사람들은 인민 속에, 순수하게 인민적인 대의 속에 잠겨 녹아들 때에만 쓸모가 있을 수 있다. 계속 인민 밖에 존재한다면 그들은 인민에게 쓸모없을 뿐 아니라 명백히 해로울 것이다.

그런데 급진당은 별개의 당을 이룬다. 그것은 인민 밖에서 살고 활동한다. 그렇다면 막노동자들과 연합하려는 이 당의 지향은 무엇을 보여 주는가? 다름 아닌 무력함의 자각, 국가 권력을 장악하려면 인민의 도움이 필요하다는 자각이다. 물론 인민을 위해서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위해 장악하려는 것이다. 그리고 권력을 장악하자마자 이 당은 불가피하게 인민의 적이 될 것이다. 적이 되면 지지 기반, 곧 예전의 인민적 힘을 잃을 것이고, 잠시나마 권력을 붙들기 위해 이번에는 인민에 맞서는 새로운 힘의 원천을, 패배한 반동 정당들과의 연합과 거래에서 찾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이렇게 양보에서 양보로, 배신에서 배신으로 나아가며 이 당은 자신도 인민도 반동에 넘겨줄 것이다. 독재자가 된 열렬한 공화주의자 카스텔라르가 지금 하는 말을 들어 보라. 「정치는 양보와 거래로 살아간다. 그러므로 나는 공화국 군대의 선두에 온건 군주당 출신 장군들을 세울 작정이다.」 이것이 어떤 결과로 이어질지는 물론 누구에게나 분명하다.

실천가인 라살레는 이 모든 것을 훌륭히 이해하고 있었다. 게다가 그는 독일 부르주아지 전체를 깊이 경멸했으므로, 노동자들에게 어떤 부르주아 정당과도 손잡으라고 권할 수 없었다.

남은 것은 혁명이었다. 그러나 라살레는 동포들을 너무 잘 알았기에 그들에게서 혁명적 주도를 기대하지 않았다. 그러면 그에게 무엇이 남았는가? 하나 — 비스마르크와 손잡는 것이다.

결합점은 마르크스의 이론 자체가 주었다. 곧 단일하고 광대하며 강력히 중앙집권화된 국가. 라살레는 그것을 원했고, 비스마르크는 이미 그것을 하고 있었다. 그들이 어찌 결합하지 않겠는가?

비스마르크는 장관직에 오른 그때부터, 아니 1848년 프로이센 의회 시절부터 자신이 부르주아지의 적, 그것도 부르주아지를 경멸하는 적임을 입증했다. 그런데 지금의 활동은 그가 귀족·봉건 당파의 광신자도 노예도 아님을 보여 준다. 그는 출신과 교육으로 보아 이 당파에 속하지만, 짓밟히고 정복되어 자기에게 노예처럼 고분고분한 부르주아 자유주의자·민주주의자·공화주의자, 심지어 사회주의자들의 당파를 이용해 이 당파의 콧대를 꺾고, 이 당파마저 끝내 하나의 국가적 공통분모로 끌어오려 한다.

그의 주된 목표는 라살레와 마르크스의 목표와 마찬가지로 국가다. 그러므로 라살레는 마르크스보다 비할 수 없이 논리적이고 실천적인 사람으로 드러났다. 마르크스는 비스마르크를, 물론 그 나름의 방식으로이긴 하지만, 혁명가로 인정하면서도 그의 몰락을 꿈꾸는데, 아마도 그가 국가에서 첫째 자리를 차지하고 있기 때문일 것이다. 마르크스 씨 생각에는 그 자리가 자기 것이어야 하니까.

라살레에게는 아마 그만큼 높은 자존심이 없었던 듯하다. 그래서 그는 비스마르크와 관계를 맺는 것을 꺼리지 않았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공산당 선언』에서 펼친 정치 강령과 완전히 일치하게, 라살레는 비스마르크에게 단 하나, 노동자 생산조합을 위한 국가 신용의 개설만을 요구했다. 그러나 동시에 — 그리고 이것은 그가 비스마르크를 어느 정도로 믿었는지를 보여 준다 — 그는 같은 강령에 따라 노동자들 사이에서 선거권 쟁취를 위한 평화적·합법적 선동을 일으켰다. 이것은 우리가 이미 의견을 밝힌 또 하나의 몽상이다.

라살레는 뜻밖에 때 이르게 죽는 바람에 자기 계획을 끝까지 밀고 나가기는커녕 조금이나마 펼쳐 볼 수도 없었다.

라살레가 죽은 뒤 독일에서는 노동자교육협회들의 자유 연맹과 라살레가 세운 전독일노동자협회 사이에서, 마르크스 씨의 친구들과 추종자들의 직접적 영향 아래 제3의 당 — 「독일 노동자 사회민주당」이 형성되기 시작했다. 그 선두에 매우 재능 있는 두 사람이 섰다. 한 사람은 반쯤 노동자였고, 다른 한 사람은 문필가이자 마르크스 씨의 직계 제자이며 대리인이었다. 베벨 씨와 리프크네히트 씨다.

우리는 1868년 리프크네히트 씨의 빈 원정이 낳은 서글픈 결과를 이미 이야기했다. 이 원정의 결과가 뉘른베르크 대회(1868년 8월)였고, 이 대회에서 사회민주당이 마침내 조직되었다.

마르크스의 직접 지도 아래 움직인 창립자들의 의도에 따르면, 이 당은 국제노동자협회의 범게르만 지부가 되어야 했다. 그러나 독일의, 특히 프로이센의 법률은 그런 결합을 허용하지 않았다. 그래서 그 결합은 간접적으로만, 곧 다음과 같은 표현으로 선언되었다. 「독일 노동자 사회민주당은 독일 법률이 허용하는 한에서 국제협회와 연계한다.」

이 새 당이 독일에서 창립된 데에는, 그것을 통해 제1차 제네바 대회(1866년)에서 배제된 마르크스의 강령 전체를 인터내셔널에 들여오려는 은밀한 희망과 속셈이 있었음이 틀림없다.

마르크스의 강령이 사회민주당의 강령이 되었다. 처음에는 제1차 제네바 대회가 승인한 인터내셔널 강령의 주요 조항 몇 가지가 되풀이된다. 그런데 그다음 갑자기 「정치권력의 쟁취」로 가파르게 넘어가, 이것이 새 당의 「가장 가깝고 가장 직접적인 목표」로 독일 노동자들에게 권해지고, 다음과 같은 주목할 만한 문구가 덧붙는다. 「노동자의 경제적 해방에 없어서는 안 될 예비적 조건으로서 정치적 권리(전인민적 선거권, 출판의 자유, 결사와 공개 집회의 자유 등)의 쟁취.」

이 문구는 이런 뜻이다. 사회혁명으로 나아가기 전에 노동자들은 정치혁명을 완수해야 한다. 또는 독일인의 본성에 더 걸맞게 말하자면 정치적 권리를 쟁취해야 하고, 더 간단히 말하면 평화적 선동으로 얻어 내야 한다. 그런데 사회적 운동에 앞선, 또는 같은 말이지만 사회적 운동 바깥의 정치적 운동은 모두 부르주아 운동일 수밖에 없으므로, 이 강령은 독일 노동자들에게 무엇보다 부르주아적 이해관계와 목표를 제 것으로 삼고 급진 부르주아지에게 이롭게 정치 운동을 완수하라고 권하는 셈이 된다. 급진 부르주아지는 그 보답으로 인민을 해방하기는커녕 새로운 권력에, 새로운 착취에 종속시킬 것이다.

이 강령을 바탕으로 독일·오스트리아 노동자들과 「인민당」의 부르주아 급진파 사이의 감동적인 화해가 이루어졌다. 뉘른베르크 대회가 끝난 뒤 이를 위해 대회가 선출한 대표들이 슈투트가르트로 갔고, 거기서 속은 노동자들의 대표자들과 부르주아 급진당 우두머리들 사이에 방어와 공격을 함께하는 정식 연합이 맺어졌다.

이 연합의 결과 양쪽은 형제처럼 함께, 9월 베른에서 열린 「평화와 자유 연맹」 제2차 대회에 나타났다. 여기서 꽤 의미심장한 사실이 벌어졌다. 우리 독자들 가운데 전부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많은 이가 이 대회에서 처음 드러난 분열에 대해 들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사회주의자·민주주의자들과, 이른바 연합(동맹) 당파에 속했거나 그 뒤 거기 가입한 혁명적 사회주의자들 사이의 분열이다{이에 대해 모르는 이들은 우리 출판물 제2권, 곧 『인터내셔널의 역사적 발전』 제1부 301~365쪽에서 꼭 필요한 정보를 얻을 수 있다. 1873.}.

이미 훨씬 전부터 피할 수 없게 된 이 결별에 겉으로 드러난 계기를 준 문제를, 동맹파는 지극히 명확하고 분명하게 제기했다. 그들은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와 사회주의자들의 정체를 드러내어, 그들이 무관심할 뿐 아니라 분명히 적대적이기까지 하다는 것을 그들 입으로 크게 털어놓게 만들고자 했다. 유일하게 인민적 문제라고 불릴 수 있는 문제 — 사회 문제에 대해서 말이다.

이를 위해 그들은 「평화와 자유 연맹」에 「개인들의 평등화」(정치적·법적 관계에서만이 아니라 주로 경제적 관계에서)와 「계급들의 평등화」(계급의 완전한 소멸이라는 뜻에서)를 자기 모든 지향의 주된 목표로 인정하라고 제안했다. 한마디로 그들은 연맹에 사회혁명적 강령을 받아들이라고 권했다.

그들은 일부러 제안을 가장 온건한 형식으로 내놓았다. 적대자들, 곧 연맹의 다수파가 문제를 너무 날카롭게 제기했다는 반론으로 자기들의 거부를 감출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다수파에게 분명히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지금 아직 목적을 이룰 수단의 문제는 다루지 않습니다. 우리는 여러분에게 묻습니다. 여러분은 이 목적이 실현되기를 원하십니까? 여러분은 이 목적을 정당한 목표로, 그리고 지금으로서는 유일한 목표라고까지는 말하지 않더라도 주된 목표로 인정하십니까? 여러분은 세계 어느 지역, 어느 인민, 어느 성에 속하든 모든 사람 사이에 생리적이거나 인종적인 평등이 아니라 사회경제적인 평등이 더없이 완전하게 실현되기를 원하십니까, 바라십니까? 우리는 확신하며, 최근의 역사 전체가 이를 확증합니다. 인류가 소수의 착취자와 다수의 피착취자로 나뉘어 있는 한 자유는 생각할 수 없으며 거짓이 됩니다. 여러분이 모두를 위한 자유를 원한다면 우리와 함께 보편적 평등을 원해야 합니다. 여러분은 그것을 원하십니까, 예 또는 아니오?」

부르주아 민주주의자·사회주의자 양반들이 좀 더 영리했다면, 자기 명예를 지키려고 「예」라고 대답하되 실천적인 사람들답게 이 목적의 실현을 아주 먼 훗날로 미루었을 것이다. 동맹파는 그런 대답을 염려하여, 그럴 경우에는 목적 달성에 필요한 길과 수단의 문제를 제기하기로 미리 저희끼리 합의해 두었다. 그랬다면 집단적 소유와 개인적 소유의 문제, 법적 권리의 폐지와 국가의 문제가 전면에 나섰을 것이다.

그러나 이 싸움터에서라면 대회 다수파가 싸움을 받아들이기가 첫 번째 싸움터에서보다 훨씬 편했을 것이다. 첫 번째 문제는 어떤 얼버무림도 허용하지 않을 만큼 명료했다. 반면 두 번째 문제는 훨씬 복잡하고 무수한 해석의 여지를 주므로, 솜씨가 조금만 있으면 인민적 사회주의에 반대하여 발언하고 투표하면서도 여전히 사회주의자이자 인민의 벗으로 보일 수 있다. 이 점에서 마르크스 학파는 우리에게 많은 본보기를 주었다. 그리고 독일의 독재자는 (자기 앞에 머리를 숙인다는 어김없는 조건만 붙으면) 아주 너그럽게 손님을 맞아,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르주아인 사회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을 지금 엄청나게 많이 자기 깃발로 감싸고 있으니, 「평화와 자유 연맹」도 그를 제1인자로 인정하기로 동의하기만 했다면 그 깃발 아래로 피신할 수 있었을 것이다.

부르주아 대회가 그렇게 했다면 동맹파의 처지는 비할 바 없이 어려워졌을 것이다. 그랬다면 연맹과 동맹파 사이에, 지금 동맹파와 마르크스 사이에 있는 것과 똑같은 싸움이 벌어졌을 것이다. 그러나 연맹은 마르크스주의자들보다 더 어리석고 동시에 더 정직했다. 연맹은 처음 제시된 싸움터에서 싸움을 받아들였고, 「연맹은 경제적 평등을 원하는가, 예 또는 아니오?」라는 물음에 압도적 다수로 「아니오」라고 대답했다. 이로써 연맹은 스스로를 프롤레타리아트에게서 완전히 잘라 냈고, 가까운 죽음을 자초했다. 연맹은 죽었고, 떠돌며 쓰라리게 한탄하는 두 그림자, 아만트 괴크와 생시몽주의자 백만장자 르모니에만 남겼다.

이제 이 대회에서 일어난 이상한 사실로 돌아가자. 뉘른베르크와 슈투트가르트에서 온 대표들, 곧 독일 노동자들의 새 사회민주당 뉘른베르크 대회가 파견한 노동자들과 「인민당」의 부르주아 슈바벤인들은 연맹의 다수파와 함께 만장일치로 평등에 반대표를 던졌다. 부르주아들이 그렇게 투표한 것은 놀랄 일이 아니다. 그러니까 부르주아인 것이다. 어떤 부르주아도, 설령 더없이 새빨간 혁명가라 해도, 경제적 평등을 원할 수 없다. 이 평등은 그의 죽음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사회민주당원인 노동자들은 어떻게 평등에 반대표를 던질 수 있었는가? 이것은 그들이 지금 따르고 있는 강령이 그들을, 그들의 사회적 처지와 본능이 그들에게 정해 준 목표와 정반대되는 목표로 곧장 이끈다는 것을 증명하지 않는가? 그리고 정치적 목적 때문에 부르주아 급진파와 맺은 그들의 연합이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를 흡수하는 데가 아니라 반대로 프롤레타리아트가 부르주아지에 종속되는 데 기초하고 있음을 증명하지 않는가?

주목할 만한 또 다른 사실이 있다. 베른 대회보다 며칠 앞서 폐막한 인터내셔널 브뤼셀 대회는 베른 대회와의 어떤 연대도 거부했고, 브뤼셀 대회에 참가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은 모두 이런 뜻으로 발언하고 투표했다. 그렇다면 앞의 이들과 마찬가지로 마르크스의 직접적 영향 아래 움직이던 다른 마르크스주의자들은 어떻게 베른 대회 다수파와 그토록 감동적인 한목소리로 함께할 수 있었는가?

이 모든 것은 지금까지 풀리지 않은 수수께끼로 남았다. 같은 모순이 1868년 내내, 그리고 그 뒤 1869년에도 《인민국가》에서 드러났다. 이 신문은 베벨 씨와 리프크네히트 씨가 펴내는, 독일 노동자 사회민주당의 주된, 말하자면 공식 기관지였다. 거기에는 때로 부르주아 연맹을 겨냥한 꽤 강한 기사들이 실렸다. 그러나 그다음에는 영락없는 애정 고백이, 때로는 다정한 나무람이 뒤따랐다. 순수하게 인민의 이익을 대변해야 할 기관지가, 노동자들 앞에서 연맹의 옹호자들을 난처하게 만드는 너무 뜨거운 부르주아 본능의 표출을 억눌러 달라고 연맹에 애원하는 듯했다.

이런 동요는 마르크스 씨의 당 안에서 1869년 9월까지, 곧 바젤 대회까지 계속되었다. 이 대회는 인터내셔널의 발전에서 한 시대를 긋는다.

그전까지 독일인들은 인터내셔널 대회에 아주 미미하게 참여했다. 주된 역할은 프랑스, 벨기에, 스위스, 그리고 부분적으로 영국의 노동자들이 맡았다. 그런데 이제 위에서 말한, 인민적·사회적이라기보다 부르주아적·정치적인 강령을 바탕으로 당을 조직한 독일인들이 잘 훈련된 중대처럼 바젤 대회에 나타나, 자기 우두머리 가운데 한 사람인 리프크네히트 씨의 엄격한 감시 아래 한 사람처럼 투표했다.

그들의 첫 일은 물론 자기 강령을 들여와 정치 문제를 다른 모든 문제의 맨 앞에 놓자고 제안하는 것이었다. 격렬한 싸움이 벌어졌고, 독일인들은 결정적으로 패배했다. 바젤 대회는 인터내셔널 강령의 순수성을 지켜, 독일인들이 부르주아 정치를 끌어들여 그것을 훼손하게 두지 않았다.

이렇게 인터내셔널 안의 분열이 시작되었고, 그 원인은 그때나 지금이나 독일인들이다. 무엇보다 국제적인 이 협회에 그들은 자기들의 편협하게 부르주아적이고 민족·정치적인, 오로지 독일적인 범게르만 강령을 감히 내놓았고, 거의 강제로 떠안기려 했다.

그들은 호되게 얻어맞았고, 이 패배에는 「사회혁명가 연합」에 속한 사람들 — 동맹파가 적잖이 이바지했다. 그래서 「연합」을 향한 독일인들의 격렬한 증오가 생겼다. 1869년 말과 1870년 상반기는 「동맹」 사람들을 겨냥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악의적인 욕설과, 더 악의적이고 적잖이 비열한 음모로 가득 찼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독일에서 일어나 프랑스에서 터진 군사적·정치적 뇌우 앞에서 곧 잠잠해졌다. 전쟁의 결말은 알려진 그대로다. 프랑스는 쓰러졌고, 제국으로 바뀐 독일이 그 자리를 차지했다.

우리는 방금 독일이 프랑스의 자리를 차지했다고 말했다. 아니다, 독일은 근대사에서 지금껏 어떤 국가도 차지하지 못한 자리를 차지했다. 카를 5세의 스페인조차 그런 자리를 차지하지 못했다. 세력과 영향력에서 독일에 견줄 만한 것은 기껏해야 나폴레옹 1세의 제국뿐이다.

나폴레옹 3세가 이겼다면 어땠을지 우리는 모른다. 틀림없이 나빴을 것이고, 아주 나빴을 것이다. 그러나 온 세계에, 인민들의 자유에 지금보다 더 나쁜 불행이 닥치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폴레옹 3세의 승리는 다른 나라들에 급성 질환 같은 결과를 낳았을 것이다. 고통스럽지만 오래가지 않는 질환 말이다. 프랑스 민족의 어느 계층에도 승리를 굳히고 영속시키는 데 필요한 유기적·국가적 요소가 넉넉히 있지 않기 때문이다. 프랑스인들은 자기들의 일시적 우위를 스스로 무너뜨렸을 것이다. 그 우위가 그들의 허영심을 흡족하게 했을지는 몰라도, 그들의 기질은 그것을 견디지 못한다.

독일인은 다르다. 그는 노예 상태에도, 지배에도 똑같이 맞게 태어났다. 프랑스인은 — 기질로 보나 허세로 보나 군인이지만, 규율을 참지 못한다. 독일인은 더없이 견디기 힘들고 모욕적이고 무거운 규율에도 기꺼이 따를 것이다. 그 규율이 그를, 더 정확히는 그의 독일 국가를 다른 모든 국가와 인민 위에 세워 주기만 한다면, 그는 그 규율을 사랑할 준비마저 되어 있다.

독일군이 거둔 일련의 눈부신 승리, 그리고 마침내 파리 함락 소식이 전해졌을 때 독일 민족 전체를, 독일 사회의 모든, 정말이지 모든 계층을 사로잡은 그 미친 듯한 환희를 달리 어떻게 설명하겠는가? 독일에서는 모두가 아주 잘 알고 있었다. 승리의 직접적 결과는, 이미 전부터 지나친 오만으로 두드러지던 군사적 요소의 결정적 우위일 것이며, 따라서 내부 생활에서는 가장 거친 반동이 승리를 거두리라는 것을. 그런데 어떠했는가? 단 한 사람도, 아니 거의 어떤 독일인도 겁먹지 않았고, 오히려 모두가 한마음의 환희로 하나가 되었다. 슈바벤의 반대파 전체가 새 황제의 태양 광채 앞에서 눈처럼 녹아 버렸다. 인민당은 사라졌고, 시민도 귀족도 농민도 교수도 예술가도 문필가도 학생도 범게르만의 승리를 합창하기 시작했다. 외국에 있는 모든 독일인 협회와 모임은 축하연을 열고 「황제 만세!」를 외쳤다. 1848년에 민주주의자들을 목매달았던 바로 그 황제를 향해서였다. 자유주의자, 민주주의자, 공화주의자가 모두 비스마르크파가 되었다. 자유를 배우고 자유에 익숙해질 수 있었을 성싶은 미국에서조차 수백만의 독일 이주민이 열광하며 범게르만 전제의 승리를 축하했다.

이처럼 어디서나 모두에게 나타난 사실은 지나가는 현상일 수 없다. 그것은 모든 독일인의 영혼에 깃든 깊은 열정을 드러낸다. 떼려야 뗄 수 없는 듯한 요소들을 함께 품은 열정 — 명령과 복종, 지배와 노예 상태 말이다.

그러면 독일 노동자들은? 글쎄, 독일 노동자들은 아무것도 하지 않았다. 프랑스 노동자들에 대한 공감과 연민을 힘차게 표명한 적이 한 번도 없었다. 아주 드물게 집회가 열려 몇 마디 문구가 나왔을 뿐인데, 그 문구 속에서 승리한 민족적 자부심은 국제적 연대의 표명 앞에서 말하자면 입을 다물었다. 그러나 누구도 문구 너머로는 나아가지 않았다. 그런데 군대가 완전히 빠져나간 독일에서는 그때 무언가를 시작하고 해낼 수 있었다. 수많은 노동자가 군대에 징집되어 거기서 군인의 의무를 훌륭히 다했다는 것은 사실이다. 곧 상관의 명령에 따라 모두를 때리고, 목 조르고, 베고, 총살했으며, 약탈까지 했다. 그들 가운데 몇몇은 그렇게 군인의 의무를 다하면서, 같은 때에 《인민국가》에 비탄의 편지를 써서 독일군이 프랑스에서 저지른 야만적 행위를 생생한 색채로 그려 냈다.

그래도 더 확고한 반대의 예가 몇몇 있었다. 용감한 노인 야코비의 항의가 그렇다. 그는 그 때문에 요새에 갇혔다. 리프크네히트 씨와 베벨 씨의 항의도 있었는데, 이들은 지금도 요새에 갇혀 있다. 그러나 이것은 따로 떨어진, 아주 드문 예다. 우리는 1870년 9월 《인민국가》에 실린 기사를 잊을 수 없다. 거기서는 범게르만적 승리의 환호가 드러내 놓고 터져 나왔다. 그 기사는 이런 말로 시작했다. 「독일군이 거둔 승리 덕분에 역사적 주도권은 마침내 프랑스에서 독일로 넘어왔다. 우리 독일인은……」 등등.

한마디로, 독일인들에게는 아무 예외 없이 군사적·정치적 민족 승리의 열광적인 감정이 우세했고 지금도 우세하다고 말할 수 있다. 범게르만 제국과 그 위대한 재상 비스마르크 공의 힘은 주로 여기에 기초한다.

정복한 부유한 지방들, 노획한 무수한 무기, 그리고 끝으로 독일이 거대하고 훌륭하게 무장하고 개량된 군대를 유지할 수 있게 해 주는 50억, 제국의 창건과 그 제국을 프로이센 전제정에 유기적으로 종속시킨 일, 새 요새들의 무장, 그리고 끝으로 함대의 창설 — 이 모든 것이 범게르만의 힘을 키우는 데 크게 이바지한 것은 물론이다. 그러나 그 힘의 주된 버팀목은 역시 깊고 의심할 바 없는 인민의 공감에 있다.

우리 스위스 친구 한 사람이 표현한 대로다. 「지금은 일본에 살든, 중국에 살든, 모스크바에 살든 독일인 재단사는 누구나 자기 뒤에 독일 함대와 독일의 모든 힘이 있다고 느낀다. 이 자랑스러운 자각이 그를 미친 듯한 환희에 빠뜨린다. 마침내 독일인도 영국인이나 미국인처럼 자기 국가에 기대어 자랑스럽게 『나는 독일인이다』라고 말할 수 있는 날을 보게 된 것이다. 물론 영국인이나 미국인이 『나는 영국인이다』, 『나는 미국인이다』라고 말할 때 그 말은 『나는 자유인이다』라는 뜻이다. 그러나 독일인은 이렇게 말한다. 『나는 노예다. 그 대신 나의 황제는 모든 군주보다 강하고, 나를 목 조르는 독일 병사가 너희 모두를 목 졸라 죽일 것이다.』」

독일 인민은 이 자각에 언제까지 만족할 것인가? 누가 그것을 말할 수 있겠는가? 독일 인민은 이제야 내려온 단일 국가의, 단일 몽둥이의 은총을 그토록 오래 갈망해 왔으니, 아마 앞으로도 오래, 아주 오래 그것을 누릴 것이다. 인민마다 제 취향이 있는데, 독일 인민에게는 강한 국가 몽둥이에 대한 취향이 우세하다.

독일에서 국가적 중앙집권화와 더불어 모든 악의 원리, 모든 타락, 그리고 광범한 정치적 중앙집권화에 피할 수 없이 따르는 내부 붕괴의 모든 원인이 발달하기 시작할 것이고 이미 발달하기 시작했다는 것은 아무도 의심할 수 없다. 도덕적·지적 해체 과정이 이미 모두의 눈앞에서 벌어지고 있으니 더욱 의심할 수 없다. 가장 보수적이거나 온건한 독일 잡지들만 읽어 보아도, 알다시피 세상에서 가장 정직하다는 독일 대중을 사로잡은 타락에 대한 끔찍한 묘사를 어디서나 만날 수 있다.

이것은 자본주의적 독점의 피할 수 없는 결과이며, 이 결과는 언제 어디서나 국가적 중앙집권화의 강화와 확대에 따라온다. 특권을 누리며 소수의 손에 집중된 자본은 오늘날 모든 정치 국가의 영혼이 되었다고 할 수 있다. 국가는 이 자본에게서, 오직 이 자본에게서만 신용을 얻고, 그 대가로 인민의 노동을 무한히 착취할 권리를 보장해 준다. 화폐 독점과 떼려야 뗄 수 없는 것이 증권 투기, 그리고 주식 형태의 생산·상업 회사를 통해 인민 대중에게서, 또 점점 가난해지는 중소 부르주아지에게서 마지막 한 푼까지 빨아내는 일이다.

증권 투기와 주식 투기와 더불어 부르주아지 사이에서는 검약과 절제와 노동에 기초한 옛 부르주아적 미덕이 사라지고, 빨리 부자가 되려는 지향이 널리 생겨난다. 그런데 이것은 사기, 그리고 이른바 합법적인 도둑질이나 불법적이되 교묘한 도둑질을 통하지 않고는 불가능하므로, 옛 속물적 정직과 성실은 반드시 사라질 수밖에 없다.

그 이름난 독일인의 정직이 우리 눈앞에서 얼마나 빠르게 사라지는지 놀라울 정도다. 독일의 정직한 속물은 말할 수 없이 편협하고 어리석었다. 그러나 타락한 독일인은 묘사할 말조차 없을 만큼 역겨운 존재다. 프랑스인에게서는 타락이 우아함과 가볍고 매력적인 재치로 가려진다. 반면 절제를 모르는 독일의 타락은 무엇으로도 가려지지 않는다. 그것은 역겹고 거칠고 어리석은 알몸 그대로 드러나 있다.

독일 사회 전체를 사로잡은 이 새로운 경제적 경향과 더불어, 독일 사상과 독일 예술과 독일 학문의 모든 품위도 눈에 띄게 사라지고 있다. 교수들은 그 어느 때보다 하인이 되었고, 학생들은 전보다 더 심하게 자기 황제의 건강과 영예를 위해 맥주에 취한다.

그러면 농민들은? 그들은 어리둥절한 채로 있다. 몇 세기 동안 바로 가장 자유주의적인 부르주아지에게 체계적으로 밀려나고 몰려서 반동의 진영으로 들어간 그들은, 압도적 다수가, 특히 오스트리아와 독일 중부와 바이에른에서, 지금 반동의 가장 튼튼한 버팀목을 이루고 있다. 단일한 범게르만 국가와, 군대·문관·경찰의 무수한 인원을 거느린 황제가 자기들을 목 조르고 약탈한다는 것을 그들이 보고 깨닫기까지는 아직 많은 시간이 흘러야 할 것이다.

끝으로 노동자들. 그들은 정치꾼 노릇, 문필가 노릇, 유대인 노릇을 하는 우두머리들에게 홀려 갈피를 잃었다. 그들의 처지는 사실 해마다 더 견딜 수 없게 되어 가며, 이는 독일의 모든 주요 산업 중심지에서 그들 사이에 일어나는 심각한 소요로 입증된다. 독일의 어느 도시에선가 거리 소동이, 때로는 경찰과의 충돌까지 일어나지 않고 지나가는 달, 아니 주가 거의 없다. 그러나 이로부터 인민 혁명이 가깝다고 결론지어서는 결코 안 된다. 첫째, 우두머리들 자신이 끊임없이 혁명을 입에 올리면서도 어떤 부르주아 못지않게 혁명을 미워하고 두려워하기 때문이다!

이 증오와 두려움 때문에 그들은 노동 인구 전체를 이른바 합법적이고 평화적인 선동의 길로 이끌었고, 그 결과는 대개 사회민주당에서 노동자 한두 명, 또는 문필가 노릇을 하는 부르주아 한두 명을 전독일 의회에 뽑아 보내는 것이다. 그러나 이것은 독일 국가에 위험하기는커녕 오히려 지극히 유익하다. 피뢰침 구실, 숨구멍 구실을 하기 때문이다.

끝으로, 독일 혁명을 기대할 수 없는 것은 실제로 독일인의 지성과 성격과 기질에 혁명적 요소가 지극히 적기 때문이다. 독일인은 어떤 윗사람에 대해서든, 심지어 황제에 대해서도 여러분이 바라는 만큼 얼마든지 따지고 들 것이다. 그의 따지기에는 끝이 없을 것이다. 그러나 바로 이 따지기가 말하자면 그의 지적·도덕적 힘을 증발시켜 한데 모일 틈을 주지 않으므로, 그를 혁명적 폭발의 위험에서 구해 준다.

게다가 우리가 이미 몇 번이나 되풀이했듯이 독일 인민의 본질을 이루는 기본 특징은 대대로 물려받은 복종과 우위를 향한 지향인데, 혁명적 경향이 어떻게 이것과 독일 인민 안에서 결합할 수 있겠는가? 그리고 그대들은 지금 모든 독일인의 의식이나 본능 속에서 어떤 지향이 지배하는지 아는가? 독일 제국의 경계를 넓게, 멀리 넓히려는 지향이다.

어느 사회 계층에서든 좋으니 독일인을 데려와 보라. 아른트의 그 유명한 노래에 이렇게 화답하지 않을 독일인을 천 명 중 하나, 아니 만 명 중 하나라도 찾아낸다면 그것만도 많은 셈이다.

「아니, 아니, 아니, 독일의 조국은 더 넓어야 한다.」

독일인은 누구나 위대한 독일 제국을 이룩하는 일이 이제 막 시작되었을 뿐이며, 그것을 끝까지 해내려면 헝가리를 뺀 오스트리아 전체, 스웨덴, 덴마크, 네덜란드, 벨기에의 일부, 프랑스의 또 한 부분, 그리고 알프스에 이르기까지 스위스 전체를 제국에 합쳐야 한다고 생각한다. 이것이 지금 그의 안에서 다른 모든 것을 짓누르는 열정이다. 이 열정이 이제 사회민주당의 모든 행동도 좌우하고 있다.

그리고 비스마르크가 짐짓 꾸미는 만큼 이 당의 열렬한 적이라고 생각하지 말라. 그는 너무 영리하기에, 이 당이 오스트리아, 스웨덴, 덴마크, 벨기에, 네덜란드, 스위스에 독일 국가 사상을 퍼뜨리며 자기의 개척자 노릇을 한다는 것을 못 볼 리 없다. 이 게르만 사상의 전파에 지금 마르크스 씨의 주된 지향이 있다. 이미 말했듯이 그는 인터내셔널 안에서 자기에게 이롭게 비스마르크 공의 위업과 승리를 되풀이하려 했다.

비스마르크는 모든 당을 손에 쥐고 있으며, 그것들을 마르크스 씨의 손에 넘겨줄 것 같지는 않다. 그는 지금 교황보다도, 성직자들의 프랑스보다도 훨씬 더, 유럽 반동의, 아니 전 세계 반동의 우두머리라고 해도 좋다.

프랑스의 반동은 더없이 흉하고 우스꽝스럽고 가련하지만, 결코 위험하지는 않다. 그것은 너무나 정신 나갔고, 프롤레타리아트는 말할 것도 없고 부르주아지 자신의 모든 지향과도, 국가 존립의 모든 조건과도 너무나 터무니없이 어긋나서 실제적인 힘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죽어 가는 프랑스 국가의 병적이고 필사적인 경련에 지나지 않는다.

범게르만 반동은 전혀 다르다. 그것은 부르주아 문명의 현대적 요구와 거칠고 어리석게 어긋나는 것을 자랑하지 않는다. 오히려 모든 문제에서 그 요구와 완전히 일치하게 행동하려고 온갖 공을 들인다. 자기들의 전제적 행동과 일을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심지어 민주주의적인 형식으로 가리는 기술에서 그들은 스승 나폴레옹 3세를 능가했다.

예컨대 종교 문제를 보라. 교황청의 중세적 요구에 단호히 맞서는 대담한 주도권을 누가 쥐었는가? 독일, 비스마르크 공이었다. 그는 어디서나 자기를 해치려 파고드는 예수회의 음모를 두려워하지 않았다. 그들이 선동하는 인민 속에서도, 그리고 무엇보다 아직도 온갖 위선에 지극히 기울어 있는 황실에서도 말이다. 그는 예수회의 단검과 독약조차 두려워하지 않았다. 알다시피 그들은 위험한 적수를 이런 것으로 처치하는 버릇이 예로부터 있다. 비스마르크 공이 로마 가톨릭교회에 어찌나 강하게 맞섰던지, 늙고 마음씨 좋은 가리발디까지 움직였다. 가리발디는 싸움터에서는 영웅이지만 철학자와 정치가로서는 아주 형편없고, 무엇보다 사제들을 미워하여 그들의 적이라고 선언하기만 하면 누구든 가장 앞선 자유주의적 인물로 떠받드는 사람인데, 바로 그 가리발디가, 거듭 말하거니와, 얼마 전 독일의 위대한 재상을 기리는 열광적인 찬가를 발표하고 그를 유럽과 세계의 해방자로 선포했다. 가엾은 장군은 깨닫지 못했다. 지금 이 반동이 교회 반동보다 비할 수 없이 나쁘고 위험하다는 것을. 교회 반동은 사납지만 무력하다. 오늘날 그것은 결코 불가능하기 때문이다. 그는 국가 반동이 지금 더 위험하다는 것, 그것은 아직 가능하다는 것, 그것이 오늘날 반동의 마지막이자 유일하게 가능한 형태라는 것을 깨닫지 못했다. 이른바 자유주의자와 민주주의자들 가운데 많은 이가 지금까지도 이것을 깨닫지 못하며, 그래서 많은 이가 가리발디처럼 비스마르크를 인민 자유의 투사로 본다.

비스마르크 공은 사회 문제에서도 똑같이 행동한다. 그는 몇 달 전 독일의 학자 법률가들과 정치경제학자들로 진짜 사회 대회를 소집하여, 오늘날 노동자들이 골몰하는 모든 문제를 엄밀하고 깊이 있게 논의하게 하지 않았던가? 사실 이 신사들은 아무것도 결정하지 않았고, 결정할 수도 없었다. 그들에게 주어진 물음은 단 하나였기 때문이다. 자본과 노동의 현존 관계를 조금도 바꾸지 않고 노동자의 처지를 어떻게 덜어 줄 것인가, 또는 같은 말이지만 어떻게 불가능한 것을 가능하게 만들 것인가. 그들이 아무것도 결정하지 못한 채 흩어질 수밖에 없었음은 분명하다. 그러나 그래도 비스마르크는 유럽의 다른 정치가들과 달리 사회 문제의 중요성을 온전히 이해하고 그것을 공들여 다룬다는 명성은 남았다.

끝으로 그는 독일 애국 부르주아지의 정치적 허영을 더없이 만족시켰다. 그는 강력한 단일 범게르만 제국을 세웠을 뿐 아니라, 그 제국에 가장 자유주의적이고 민주주의적인 통치 형태까지 부여했다. 전인민적 선거권에 기초하고 온갖 문제를 무제한으로 논의할 권리를 가진 의회를 주고, 자기에게는 오직 자기와 자기 군주가 원하는 것만을 행하고 실천에 옮길 권리 하나만 남겨 두었다. 이렇게 그는 독일인들에게 끝없는 잡담의 마당을 열어 주고, 자기에게는 세 가지만 남겼다. 재정, 경찰, 군대, 곧 진짜 국가의 알맹이 전체, 반동의 힘 전체다.

이 세 가지 자그마한 물건 덕분에 그는 지금 독일 전체에서 무제한으로 군림하며, 독일을 통해 유럽 대륙 전체에서 군림한다. 우리는 다른 대륙 국가들이 모두 논할 거리도 안 될 만큼 약하거나, 아직 형성되지 않았고 앞으로도 결코 제대로 된 국가로 형성되지 못하거나(예컨대 이탈리아), 아니면 오스트리아, 투르크, 러시아, 스페인, 프랑스처럼 해체 과정에 있음을 보여 주었고, 우리 생각에는 증명했다. 한쪽에는 덜 자란 것들이, 다른 쪽에는 — 폐허가 있고, 그 한가운데에 아름다움과 힘이 넘치는 범게르만 국가의 장엄한 건물이 우뚝 솟아 있다 — 모든 특권과 독점, 한마디로 부르주아 문명의 마지막 피난처이자 국가성, 곧 반동의 마지막 강력한 보루가. 그렇다, 유럽 대륙에는 진짜 국가가 단 하나 있을 뿐이다 — 범게르만 국가다. 나머지는 모두 위대한 독일 제국의 부왕령에 지나지 않는다.

이 제국은 위대한 재상의 입을 빌려 사회혁명에 생사를 건 전쟁을 선포했다. 비스마르크 공은 자기 뒤에 서서 자기를 떠받치는 4천만 독일인의 이름으로 사회혁명에 사형 선고를 내렸다. 그의 경쟁자이자 시기하는 자인 마르크스도, 그리고 그 뒤에 선 독일 사회민주당의 모든 우두머리도, 마치 비스마르크를 거들기라도 하듯 자기들 쪽에서 사회혁명에 똑같이 필사적인 전쟁을 선포했다. 이 모든 것을 우리는 다음 부에서 자세히 다룰 것이다.

우리는 보게 될 것이다. 지금 이 순간 한쪽에는 독일 제국에서, 정복과 우위, 곧 국가 통치라는 단 하나의 열정에 사로잡힌 독일 인민에게서 실현된 완전한 반동이 서 있다. 다른 쪽에서는 인민들, 곧 모든 나라 수백만 막노동자의 해방을 위한 유일한 투사로서 사회혁명이 고개를 들고 있다. 지금까지 사회혁명은 유럽 남부, 곧 이탈리아, 스페인, 프랑스에만 힘을 모았다. 그러나 머지않아, 우리가 바라기로는, 북서부의 인민들, 곧 벨기에, 네덜란드, 그리고 무엇보다 영국도 그 깃발 아래 일어설 것이고, 그다음에는 마침내 모든 슬라브 종족도 일어설 것이다.

범게르만 깃발에는 무슨 일이 있어도 국가를 유지하고 강화한다고 적혀 있다. 반면 사회혁명의 깃발, 우리의 깃발에는 불타는 핏빛 글자로 이렇게 새겨져 있다. 모든 국가의 파괴, 부르주아 문명의 소멸, 자유로운 결사들을 통한 아래에서 위로의 자유로운 조직 — 고삐 풀린 막노동 천민, 해방된 인류 전체의 조직, 새로운 전 인류적 세계의 창조.

다음 부에서는 이 상반된 두 원리가 유럽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의식 속에서 어떻게 나타나고 발전했는지를 보여 줄 것이다.

부록 A.

그러나 오해를 막기 위해 한마디 해 둘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우리가 인민의 이상이라고 부르는 것은, 인민의 삶과 상관없이 부르주아 학자나 반쯤 학자들이 한가한 틈에 만들어 내어 무지한 인민 무리에게 그들의 미래 체제에 꼭 필요한 조건이라며 너그럽게 내놓는 정치·사회적 도식, 공식, 이론과 조금도 닮은 데가 없다. 우리는 이런 이론들을 조금도 믿지 않으며, 그 가운데 가장 나은 것조차 인민 삶의 힘차고 드넓은 자유분방함을 담기에는 너무 좁은 프로크루스테스의 침대로 보인다.

가장 합리적이고 깊이 있는 학문이라도 미래 사회생활의 형태를 알아맞힐 수는 없다. 학문은 현존 사회에 대한 엄격한 비판에서 논리적으로 나오는 부정적 조건들만 규정할 수 있다. 그렇게 사회경제학은 이런 비판을 거쳐 개인적·세습적 소유의 부정에 이르렀고, 따라서 미래 사회 체제에 꼭 필요한 조건으로서 집단적 소유라는 추상적이고 말하자면 부정적인 명제에 이르렀다. 같은 길을 거쳐 학문은 국가와 국가 통치라는 관념 자체, 곧 신학적이든 형이상학적이든, 신의 권리든 지식인·학자의 권리든 어떤 가상의 권리의 이름으로든 위에서 아래로 사회를 다스리는 것의 부정에 이르렀고, 그 결과 반대되는, 따라서 역시 부정적인 명제 — 아나키에 이르렀다. 아나키란 공동체를 이루는 모든 단위 또는 부분이 자립적이고 자유롭게 조직되고 그것들끼리 자유로운 연방을 이루는 것, 곧 아래에서 위로의 조직이다. 그것은 어떤 윗선의, 설령 선출된 윗선이라 해도 그 명령에 따른 것이 아니고, 어떤 학문적 이론의 지시에 따른 것도 아니며, 삶 자체가 드러내는 온갖 필요가 아주 자연스럽게 발전한 결과다.

그러므로 어떤 학자도 인민을 가르칠 수 없으며, 사회혁명 다음 날 인민이 어떻게 살아갈 것이며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자기 자신을 위해서조차 규정할 수 없다. 그것은 첫째로 각 인민의 처지에 따라, 둘째로 그들 안에서 드러나 더 강하게 작용할 지향들에 따라 정해질 것이며, 결코 위로부터의 지침이나 해설에 따라, 일반적으로 혁명 전날 지어낸 어떤 이론에 따라 정해지지 않을 것이다.

우리가 알기로 러시아에서는 지금 이른바 인민 교사를 길러 내려는 흐름 하나가 통째로 생겨났다. 무엇보다 먼저 인민을 가르쳐야 하고, 인민이 배워서 자기 권리와 의무를 깨달은 뒤에야 비로소 그를 반란으로 일으킬 수 있다고들 주장한다. 여기서 곧바로 물음이 떠오른다. 그대들은 인민에게 무엇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그대들 자신도 모르고 알 수도 없으며, 오히려 그대들 자신이 무엇보다 먼저 인민에게서 배워야 할 것을 가르치겠다는 것인가?

이 흐름, 아니 결코 새롭다고 할 수 없는 이 당파 안에서는 두 범주를 구별해야 한다.

가장 수가 많은 것은 교조주의자, 협잡꾼, 그리고 대개는 자기 자신을 속이는 자들의 범주다. 이들은 현존 사회가 특권을 누리는 부유한 소수에게 베푸는 어떤 쾌락과 이익도 포기하지 않으면서, 동시에 정말로 인민 해방의 대의에 헌신하는 사람, 아니 어쩌면 혁명가라는 평판까지 얻거나 지키고 싶어 한다 — 그것이 너무 큰 불편을 수반하지 않을 때에는. 러시아에는 이런 양반들이 너무 많이 나타났다. 그들은 인민은행, 아르텔, 소비조합과 생산조합을 세우고, 물론 여성 문제에도 매달리며, 자신을 요란하게 학문의 투사, 실증주의자, 그리고 지금은 마르크스주의자라고 부른다. 그들을 가르는 공통된 특징은 — 아무것도 희생하지 않고 자기의 소중한 인격을 무엇보다 아끼고 돌보면서, 동시에 모든 면에서 앞선 사람으로 통하고 싶어 한다는 것이다.

이 범주와는, 그 수가 아무리 많다 해도, 말해 봐야 헛일이다. 혁명 전에는 이들을 폭로하고 망신 주는 수밖에 없다. 그리고 혁명 때에는…… 글쎄, 그때는 그들이 스스로 사라져 주기를 바라자.

그러나 다른 범주가 있다. 정직하고 참으로 헌신적인 젊은이들로 이루어진 범주인데, 이들은 지금 같은 상황에서는 다른 할 일도 출구도 없어 보인다는 이유 하나로, 최근 마치 절망에서인 듯 이 흐름에 뛰어들었다. 경찰의 주의를 그들에게 끌까 두려워 그들을 더 자세히 밝히지는 않겠다. 그러나 그들 가운데 이 글을 읽는 이들은 우리의 말이 바로 자기들을 향한 것임을 알 것이다.

바로 그들에게 우리는 묻고 싶다. 그들은 인민에게 무엇을 가르치려 하는가? 인민에게 합리적 학문을 가르치려 하는가? 우리가 아는 한 그들의 목적은 그런 것이 아니다. 그들은 인민 학교에 학문을 들여오려는 사람은 누구든 정부가 첫걸음부터 막으리라는 것을 안다. 게다가 우리 인민 자신이 지금처럼 너무나 비참한 처지에서는 학문을 할 겨를이 전혀 없다는 것도 안다. 인민이 이론에 다가갈 수 있게 하려면 그의 실천을 바꾸어야 하고, 무엇보다 그의 생활의 경제적 조건을 근본적으로 개조하여, 어디에나 퍼져 있고 거의 모두가 겪는 굶주림의 재앙에서 그를 끌어내야 한다.

그렇다면 정직한 사람들이 어떻게 인민의 경제생활을 바꿀 수 있겠는가? 그들에게는 아무 권력도 없다. 국가 권력 자체도, 아래에서 증명하려 하겠지만, 인민의 경제적 처지를 바로잡을 힘이 없다. 국가 권력이 인민을 위해 할 수 있는 유일한 일은 — 스스로 폐지되어 사라지는 것이다. 그 존재가 인민의 복리와 맞지 않기 때문이며, 그 복리는 오직 인민 자신만이 만들어 낼 수 있기 때문이다.

그렇다면 인민의 벗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인민을 자립적인 운동과 행동으로 일깨우는 것, 그리고 무엇보다 — 바로 지금 우리가 말한 그 흐름의 성실한 옹호자들이 그렇게 주장하는데 — 인민에게 해방의 길과 수단을 가리켜 주는 것이다.

길과 수단은 두 종류일 수 있다. 하나는 곧장 전인민적 반란의 조직을 지향하는 순전히 혁명적인 것이고, 다른 하나는 인민의 경제생활을 체계적으로, 느리지만 동시에 근본적으로 개조하는 데서 인민 해방을 시작하는, 좀 더 평화적인 것이다. 이 두 번째 방법은 진심으로 따르려 한다면 물론 부르주아 경제학자들이 그토록 좋아하는 저축에 관한 진부한 설교를 배제한다. 막노동하는 인민 일반에게, 특히 우리 인민에게는 저축할 것이 전혀 없다는 단순한 이유에서다.

그러나 정직한 사람들이 우리 인민을 이 느리지만 근본적인 경제 개조의 길로 떠밀기 위해 무엇을 할 수 있는가? 마을마다 사회학 강좌라도 열겠는가? 첫째, 늘 그렇듯 아버지처럼 빈틈없이 지켜보는 그 정부가 허락하지 않을 것이다. 둘째, 농민들은 아무것도 알아듣지 못하고 교수를 비웃을 것이다. 끝으로 사회학 자체가 미래의 학문이다. 지금으로서는 사회학은 긍정적인 답보다 풀 수 없는 물음이 비할 수 없이 더 많다. 우리의 가난한 농민들에게는 정말이지 사회학에 매달릴 겨를이 없다는 것은 말할 것도 없다. 그들에게는 오직 실천을 통해서만 작용할 수 있으며, 결코 이론을 통해서는 안 된다.

그렇다면 이 실천은 무엇일 수 있는가? 최신 사회학의 정신에 따라 우리 농민층의 거대한 대중 전체를 자립적인 경제 개조의 길로 떠미는 것을 주된, 아니 유일한 목표로 삼는 실천 말이다. 그것은 노동자 아르텔과 협동조합, 곧 신용·소비·생산 협동조합을 만드는 일 말고는 다른 무엇일 수도 없다. 그 가운데서도 특히 생산 협동조합인데, 그것이 다른 것들보다 목표, 곧 부르주아 자본의 지배에서 노동을 해방하는 데로 더 곧장 나아가기 때문이다.

그러나 현재 사회를 지배하는 경제적 조건 아래에서 이런 해방이 가능한가? 학문은 사실들에, 곧 지난 20년 동안 여러 나라에서 이루어진 일련의 실험 전체에 근거하여 우리에게 단호히 말한다. 불가능하다고. 우리가 결코 그 추종자라고 할 수 없는 라살레는 자기 소책자들에서 이 불가능성을 더없이 빛나고 대중적인 방식으로 증명했다. 이 점에서는 모든 최신 경제학자도 그와 의견이 같다. 그들은 부르주아적이기는 해도 진지한 사람들이라, 마지못해서인 듯 협동조합 체계의 무력함을 드러낸다. 그러면서 그들은 이 체계를 사회혁명의 뇌우를 막아 줄 구원의 피뢰침으로 보는데, 그렇게 보는 것도 꽤 옳다.

인터내셔널은 나름대로 여러 해에 걸쳐 협동조합 문제를 자주, 많이 제기했고, 수많은 논거를 바탕으로 다음과 같은 결론에 이르렀다. 이 결론은 로잔 대회(1867년)에서 표명되었고 브뤼셀 대회(1868년)에서 확인되었다.

모든 형태의 협동은 의심할 바 없이 미래 생산의 합리적이고 공정한 형태다. 그러나 협동이 그 목적, 곧 모든 노동 대중의 해방과 그들에 대한 온전한 보상과 충족에 이를 수 있으려면, 토지와 자본이 모든 형태에서 집단적 소유가 되어야 한다. 그렇게 되기 전까지 협동은 대부분의 경우 대자본과 대토지 소유의 전능한 경쟁에 짓눌릴 것이다. 드물게, 예컨대 어떤 생산조합이, 그것도 반드시 어느 정도 폐쇄적인 생산조합이 이 싸움을 견디고 살아남는 데 성공하는 경우에도, 그 성공의 결과는 빌어먹는 프롤레타리아트 대중 한가운데에 집단적 행운아들이라는 새로운 특권 계급이 생겨나는 것에 지나지 않을 것이다. 그러므로 현존하는 사회경제의 조건 아래에서 협동은 노동 대중을 해방할 수 없다. 그러나 그런데도 협동에는 지금도 노동자들에게 서로 결합하고 조직하며 자기 일을 스스로 관리하는 데 익숙해지게 한다는 이점이 있다.

그러나 이 의심할 바 없는 유익함을 인정하는데도, 처음에는 우리를 빠르게 나아가게 했던 협동조합 운동은 최근 유럽에서 크게 약해졌다.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노동자 대중은 지금 협동을 통해 자기 해방에 이를 수 있다는 믿음을 잃자, 실천적 교육을 마무리하려고 협동에 기댈 필요를 느끼지 않았다. 목표에 이른다는 믿음을 잃자마자 그들은 목표로 이끄는 길, 더 정확히 말하면 목표로 이끌지 않는 길도 내팽개쳤다. 유익하다 한들 체조나 하고 있을 겨를이 그들에게는 없다.

서방에서 참인 것이 동방에서 거짓일 수는 없으며, 우리는 협동조합 운동이 러시아에서 조금이라도 진지한 규모를 얻을 수 있으리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지금 러시아에서 협동은 서방에서보다 더 불가능하다. 협동이 실제로 성공한 곳에서 그 성공의 주요 조건 가운데 하나는 개인의 주도성, 끈기, 용기였다. 그러나 개인은 우리 러시아보다 서방에서 훨씬 더 발달해 있다. 러시아에서는 지금까지도 떼 지어 하는 움직임이 우세하다. 게다가 정치적·사회적 외부 조건 자체도, 교육 수준도 서방이 러시아보다 협동조합의 형성과 발전에 비할 수 없이 유리한데, 그 모든 것에도 불구하고 서방에서 협동조합 운동은 시들어 버렸다. 그렇다면 그것이 러시아에서 어떻게 뿌리내릴 수 있겠는가?

러시아 인민 운동의 바로 그 가축 떼 같은 성질이 협동에 유리할 수 있다고 말할 사람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진보의 요소들, 곧 노동과 생산과 그 생산물의 조직을 끊임없이 개선하는 일은 늘 판에 박힌 관습으로 기우는 떼 지은 활동과 양립할 수 없다. 그런데 그런 개선 없이는 자본으로 경쟁하는 상대에 맞선, 그렇지 않아도 너무나 불평등한 싸움이 완전히 불가능해진다. 그러므로 러시아에서 협동은 극히 하찮은, 아니 자그마하다고 해도 좋을 규모로만, 그것도 모든 것을 짓누르는 자본과 그보다 더 짓누르는 정부의 눈에 띄지 않고 느껴지지 않는 동안에만 번성할 수 있다.

그렇지만 우리는 이해한다. 자유주의적 빈말로 자신을 달래거나 교조적이고 영혼 없고 무의미한, 한마디로 미르토프식 또는 케드로프식 학자연한 잡담으로 자기 이기심을 가리기에는 너무 진지하고 정직하며, 다른 한편으로 팔짱을 끼고 부끄러운 무위에 머물기에는 너무 생기 있고 열정적인 젊은이들이, 눈앞에 다른 출구가 보이지 않자 이른바 협동조합 운동에 뛰어든다는 것을. 이것은 적어도 그들에게 노동자들을 만나고, 노동자로서 그들의 대열에 서고, 그들을 알아 가고, 될 수 있으면 무엇이든 어떤 목적을 이루려고 그들을 결합할 수단과 기회를 준다. 어쨌든 이것은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것보다 비할 수 없이 위안이 되고 유익하다.

이런 관점에서 우리는 협동조합 시도에 반대할 것이 없다. 그러나 동시에, 그것을 시도하는 젊은이들은 자기들이 이룰 수 있는 결과에 대해 결코 스스로를 속여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대도시와 공장 마을에서, 공장 노동자들 사이에서는 그 결과가 꽤 클 수 있다. 농촌 주민들 사이에서는 그 결과가 지극히 보잘것없을 것이고, 초원의 모래알처럼, 바다의 물방울처럼 그 속에 묻혀 사라질 것이다……

그런데 지금 러시아에 협동조합 사업 말고는 다른 출구도, 다른 할 일도 없다는 말이 옳은가? 우리는 단연코 옳지 않다고 생각한다.

러시아 인민 안에는 우리가 사회혁명의 필요조건으로 꼽을 수 있는 앞의 두 요소가 더없이 넓은 규모로 존재한다. 러시아 인민은 지나친 빈곤과 본보기가 될 만한 노예 상태를 자랑할 수 있다. 그 고통은 헤아릴 수 없으며, 인민은 그것을 참을성 있게 견디는 것이 아니라 깊고 격렬한 절망 속에서 견딘다. 그 절망은 이미 역사에서 두 번, 스텐카 라진의 반란과 푸가초프의 반란이라는 두 차례의 무서운 폭발로 터져 나왔고, 오늘날까지도 끊임없이 이어지는 개별 농민 반란 속에서 줄곧 드러나고 있다.

그렇다면 무엇이 인민이 승리하는 혁명을 이루는 데 걸림돌이 되는가? 인민 혁명에 의미를 부여하고 뚜렷한 목표를 줄 수 있는 공통의 인민적 이상이 없어서인가? 앞에서 말했듯이 그런 이상 없이는 인민 전체의 동시적이고 전면적인 봉기가 불가능하고, 따라서 혁명의 성공 자체도 불가능하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 안에 그런 이상이 아직 형성되지 않았다고 말하는 것은 옳다고 하기 어려울 것이다.

만약 그런 이상이 없었다면, 적어도 그 주요 특징에서만이라도 인민의 의식 속에 형성되지 않았다면, 러시아 혁명에 대한 모든 희망을 버려야 했을 것이다. 그러한 이상은 인민 생활의 가장 깊은 곳에서 솟아오르는 것이며, 반드시 인민이 겪은 역사적 시련과 그 열망·고통·항거·투쟁의 결과이고, 동시에 인민의 참된 요구와 희망을 말하자면 형상으로, 누구나 알아들을 수 있게, 언제나 단순하게 표현한 것이기 때문이다.

인민이 이 이상을 스스로 자기 안에서 길러 내지 않는다면 아무도 그것을 인민에게 줄 수 없음은 분명하다. 대체로 말해, 개인이든 사회든 인민이든, 그 안에 싹으로만이 아니라 어느 정도 발달한 형태로도 이미 존재하지 않는 것은 누구에게도 줄 수 없다는 점에 유의해야 한다. 개인을 예로 들어 보자. 어떤 생각이 이미 그 사람 안에 살아 있는 본능으로, 그리고 그 본능의 첫 발현이라 할 만한 다소간 뚜렷한 표상으로 존재하지 않는다면, 당신은 세상 무슨 수를 써도 그에게 그 생각을 설명해 줄 수 없고, 무엇보다 그것을 머릿속에 넣어 줄 수 없다. 제 운명에 만족하는 부르주아를 보라. 당신은 프롤레타리아가 완전한 인간적 발달을 누리고 사회생활의 모든 향락과 만족과 복리에 동등하게 참여할 권리가 있다는 것을 그에게 언젠가 설명해 줄 수 있으리라고, 또는 사회혁명의 정당성과 구원적 필연성을 그에게 증명해 줄 수 있으리라고 기대하는가? 아니다, 당신이 미치지 않았다면 시도조차 하지 않을 것이다. 왜 시도하지 않겠는가? 이 부르주아가 타고나기를 선량하고 총명하고 고결하고 너그러우며 정의를 지향하는 성향마저 지녔다 해도 — 보라, 내가 얼마나 양보하는지, 이런 부르주아는 세상에 많지 않은데도 말이다 — 그리고 대단히 교양 있고 학식까지 갖추었다 해도, 그는 그래도 당신을 이해하지 못할 것이고 사회혁명가가 되지 않으리라고 당신은 확신할 것이기 때문이다. 그러면 왜 되지 않겠는가? 그의 삶이 그 안에 당신의 사회혁명적 사상에 상응하는 본능적 지향을 길러 내지 않았다는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반대로 그런 지향이 그 안에 싹으로라도, 또는 가장 터무니없는 표상의 형태로라도 있었다면, 그의 사회적 지위가 그의 감각적 욕구에 아무리 즐겁고 그의 자존심에 아무리 흡족하다 해도 그는 자기 자신에게 만족할 수 없었을 것이다.

반대로 교육을 가장 덜 받고 가장 터무니없는 사람을 데려와 보라. 그 사람 안에서 사회혁명적 이념에 상응하는 본능과, 어둡기는 해도 정직한 지향을 정말로 찾아내기만 한다면, 그의 지금 표상이 아무리 야만적이더라도 겁내지 말고 그저 진지하게, 애정을 가지고 그를 대하라. 그러면 그가 당신의 이념을, 아니 더 정확히 말하면 그 자신의 이념을 얼마나 넓고 얼마나 열렬하게 끌어안고 제 것으로 삼는지 보게 될 것이다. 그 이념은 그 자신의 본능을 분명하고 완전하고 논리적으로 표현한 것에 지나지 않기 때문이다. 그러니 당신은 사실 그에게 아무것도 주지 않았고 새로운 것을 아무것도 가져다주지 않았으며, 다만 그가 당신을 만나기 훨씬 전부터 그 안에 살아 있던 것을 그에게 분명히 해 주었을 뿐이다. 그래서 나는 아무도 누구에게 아무것도 줄 수 없다고 말하는 것이다.

그런데 이것이 개인에 대해 옳다면 인민 전체에 대해서는 더욱 옳다. 인민에게 무언가를 줄 수 있다고, 어떤 물질적 복리든 새로운 지적·도덕적 내용이든 새로운 진리든 선사할 수 있다고, 인민의 삶에 제멋대로 새 방향을 줄 수 있다고, 또는 36년 전에 작고한 차다예프가 바로 러시아 인민을 두고 주장했듯이 인민 위에 흰 종이 위에 쓰듯 무엇이든 마음대로 써 넣을 수 있다고 상상하려면, 타고난 천치이거나 구제할 길 없는 교조주의자여야 한다.

가장 위대한 천재들 가운데에도 지금까지 인민을 위해 정말로 무언가를 한 사람은 적었다. 인민의 천재들은 지극히 귀족적이어서, 그들이 지금까지 한 모든 것은 착취하는 소수를 교화하고 강화하고 부유하게 하는 데에만 이바지했다. 모두에게 버림받고 짓눌린 가난한 인민 대중은 어둡고 결실 없는 노력을 끝없이 거듭하며 자유와 빛을 향한 거대한 순교의 길을 스스로 뚫어야 했다. 가장 위대한 천재들도 사회에 새로운 내용을 가져다주지 않았고 가져다줄 수도 없었다. 사회 자체가 만들어 낸 그들은 수백 년에 걸친 작업을 이어 가고 발전시키면서, 같은 내용을 위한 새로운 형식을 가져왔고 지금도 가져올 뿐이다. 그 내용은 사회생활의 움직임 자체에 의해 끊임없이 새로 태어나고 넓어진다.

그러나 다시 한 번 말하거니와, 가장 이름난 천재들도 지금까지 본래 의미의 인민, 곧 수백만 막노동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서는 아무것도 하지 않았거나 아주 적은 것만 했다. 인민의 삶, 인민의 발전, 인민의 진보는 오로지 인민 자신에게 속한다. 이 진보는 물론 책을 통한 교육으로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대대로 전해지며 필연적으로 넓어지고 그 내용이 깊어지고 다듬어지며 제 형식을 갖추어 가는 경험과 사상의 자연스러운 축적으로 이루어진다. 물론 그 걸음은 지극히 느리며, 무겁고 쓰라린 역사적 시련을 끝없이 거친다. 그 시련은 마침내 우리 시대에 이르러 모든 나라, 적어도 모든 유럽 나라의 인민 대중을 다음과 같은 자각에 이르게 했다. 곧 그들이 특권 계급과 오늘날의 국가들에게서, 대체로 정치적 변혁에서 기대할 것은 아무것도 없으며, 오직 자신의 힘으로, 사회혁명을 통해서만 해방될 수 있다는 자각이다. 바로 이것이 오늘날 그들 안에 살아 움직이는 보편적 이상을 규정한다.

러시아 인민의 관념 속에도 그런 이상이 존재하는가? 존재한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으며, 그 주요 특징을 규정하려고 우리 인민의 역사적 의식 속으로 그리 깊이 파고들 필요조차 없다.

첫째이자 주된 특징은 땅, 온 땅은 제 땀으로 그것을 적시고 제 손의 노동으로 기름지게 하는 인민의 것이라는 전인민적 확신이다. 그 못지않게 중요한 둘째 특징은 땅을 쓸 권리가 개인이 아니라, 땅을 일시적으로 개인들에게 나누어 주는 공동체 전체, 곧 미르에 속한다는 것이다. 앞의 둘과 똑같이 중요한 셋째 특징은 준절대적 자율, 공동체 자치, 그리고 그 결과로서 공동체가 국가에 대해 갖는 단호한 적대 관계다.

이것이 러시아 인민의 이상의 바탕에 놓인 세 가지 주요 특징이다. 본질에서 이것들은 최근 라틴 나라들의 프롤레타리아트 의식 속에서 형성되고 있는 이상과 완전히 맞아떨어진다. 라틴 나라들은 오늘날 게르만 나라들보다 비교할 수 없이 사회혁명에 가까이 서 있다. 그러나 러시아 인민의 이상은 다른 세 가지 특징으로 흐려져 있다. 이 특징들은 그 이상의 성격을 일그러뜨리고 그 실현을 몹시 어렵고 더디게 만든다. 그러므로 우리는 이 특징들과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하며, 그 싸움은 이미 인민 자신 안에서 벌어지고 있기에 더욱 가능하다.

이상을 흐리는 이 세 가지 특징은 1) 가부장제, 2) 미르에 의한 개인의 흡수, 3) 차르에 대한 믿음이다.

넷째 특징으로 공식 정교든 분파든 기독교 신앙을 덧붙일 수도 있겠다. 그러나 우리가 보기에 우리 러시아에서 이 문제는 서유럽에서, 가톨릭 나라들뿐 아니라 개신교 나라들에서조차 지니는 만큼의 중요성을 전혀 지니지 않는다. 사회혁명가들은 물론 이 문제를 소홀히 하지 않으며, 인민 앞에서 만군의 주와 지상에 있는 그의 신학적·형이상학적·정치적·법률적·경찰적·부르주아경제학적 대리인들에게 치명적인 진실을 말할 기회가 있으면 언제든 놓치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종교 문제를 첫자리에 놓지 않는다. 그들은 이렇게 확신하기 때문이다. 인민의 미신은 자연히 인민의 무지와 맞물려 있지만, 그 뿌리는 그 무지보다는 인민의 궁핍과 물질적 고통, 날마다 겪는 온갖 전대미문의 압박에 있다. 종교적 관념과 설화, 터무니없는 것을 향한 이 환상적 성향은 이론적 현상이라기보다 훨씬 더 실천적인 현상이다. 곧 정신의 착오라기보다 견딜 수 없이 옹색한 삶에 맞서는 삶 자체, 의지와 열정 자체의 항의다. 교회는 인민에게 일종의 천상의 선술집이고, 마찬가지로 선술집은 지상에 있는 일종의 천상의 교회다. 교회에서든 선술집에서든 인민은 한순간이나마 자신의 굶주림과 압제와 굴욕을 잊고, 날마다의 불행에 대한 기억을 달래려 애쓴다. 한 번은 미친 믿음 속에서, 또 한 번은 술 속에서. 한쪽 도취는 다른 쪽 도취 못지않다.

사회혁명가들은 이것을 알기에, 인민 속의 종교성은 오직 사회혁명으로만 죽일 수 있으며 이른바 자유사상가들의 추상적이고 교조적인 선전으로는 결코 죽일 수 없다고 확신한다. 이 자유사상가 나리들은 머리끝부터 발끝까지 부르주아이며, 스스로를 실증주의자라 부르고 유물론자라 자처할 때조차 수법과 습관과 생활에서 구제할 길 없는 형이상학자다. 그들에게는 언제나 삶이 사유에서 흘러나오는 것, 말하자면 미리 놓인 사유의 실현인 것처럼 보인다. 그래서 그들은 사유가, 물론 그들의 빈약한 사유가 삶도 이끌어야 한다고 주장한다. 그들은 반대로 사유가 삶에서 흘러나오며, 사유를 바꾸려면 무엇보다 먼저 삶을 바꿔야 한다는 것을 이해하지 못한다. 인민에게 넓은 인간적 삶을 주어 보라. 그러면 인민은 그 사유의 깊은 합리성으로 당신을 놀라게 할 것이다.

스스로를 자유사상가라 부르는 골수 교조주의자들에게는 이론적 반종교 선전을 실천적 사업보다 앞세우는 또 다른 까닭이 있다. 그들은 대개 형편없는 혁명가이며, 그저 허영에 찬 이기주의자이자 겁쟁이다. 게다가 그들은 처지로 보아 교양 계급에 속하며, 이 계급의 삶에 넘쳐 나는 안락과 세련된 우아함, 지적 허영의 향락을 무척 아낀다. 그들은 본질에서도 목적 자체에서도 거칠고 거리낌 없는 인민 혁명이 그들이 그토록 잘 살고 있는 부르주아 세계의 파괴 앞에서 멈추지 않으리라는 것을 안다. 그래서 그들은 혁명 사업에 정직하게 봉사하는 데 따르는 상당한 불편을 결코 떠안을 생각이 없고, 덜 자유주의적이고 덜 대담하지만 그래도 소중한 후원자들, 숭배자들, 그리고 교양과 생활의 인연과 우아함과 물질적 안락으로 맺어진 친구들과 동료들의 분노를 사고 싶지도 않을 뿐 아니라, 무엇보다 그들 자신이 자기를 받침대에서 끌어내리고 지금 처지의 모든 이점을 단번에 빼앗을 그런 혁명을 원하지 않으며 두려워한다.

그런데도 그들은 이를 인정하고 싶지 않다. 그들은 기어이 자신들의 급진성으로 부르주아 세계를 놀라게 하고 혁명적 청년들을, 할 수만 있다면 인민 자체도 자기 뒤로 끌어들여야 한다. 그렇다면 어찌해야 하는가? 부르주아 세계를 놀라게 하되 화나게 해서는 안 되고, 혁명적 청년들을 끌어들이되 혁명의 나락은 피해야 한다! 이를 위한 수단은 하나뿐이다. 겉으로만 혁명적인 자신들의 분노를 모두 주 하느님에게 돌리는 것이다. 그들은 하느님이 존재하지 않는다고 굳게 확신하기에 그의 진노를 두려워하지 않는다. 상전들은 사정이 다르다. 차르부터 말단 경찰관까지 모든 상전 말이다! 은행가와 유대 놈 주세 청부업자부터 말단 쿨라크 상인과 지주까지, 사회적 지위로 보아 부유하고 힘 있는 사람들도 사정이 다르다! 그들의 분노는 너무도 뼈아프게 드러날 수 있다.

이런 논리에 따라 그들은 주 하느님에게 가차 없는 전쟁을 선포하고, 종교를 그 모든 발현과 형태에서 가장 급진적으로 부정하며, 신학과 형이상학적 헛소리와 인민의 모든 미신을 과학의 이름으로 짓밟는다. 그 과학이란 물론 그들이 호주머니에 넣고 다니며 수다스러운 글마다 여기저기 흩뿌려 놓는 것이다. 그러나 그와 동시에 그들은 이 세상의 모든 정치적·사회적 세력을 더없이 다정하게 대한다. 논리와 여론에 떠밀려 그것들을 부정하기까지 할 때에도 너무도 정중하고 온순하게 부정하기에, 그들에게 화를 내려면 성미가 여간 사납지 않아야 한다. 그들은 반드시 빠져나갈 구멍을 남겨 두고 그 세력들이 고쳐지리라는 희망을 내비친다. 그 세력들을 믿고 희망하는 이 능력이 어찌나 큰지, 그들은 우리의 통치 원로원이 조만간 인민 해방의 기관이 될 수도 있다고까지 생각한다. (취리히에서 곧 나올 것으로 기대되는 비정기 간행물 《전진》의 가장 최근의, 순서로는 세 번째인 강령을 보라.)

그러나 이 협잡꾼들은 내버려 두고 우리 문제로 돌아가자.

인민은 결코, 어떤 구실로도, 어떤 목적을 위해서도 속여서는 안 된다. 그것은 범죄일 뿐 아니라 혁명 사업을 이룬다는 관점에서도 해롭다. 해로운 까닭은 우선 모든 속임수가 본질상 근시안적이고 하찮고 옹색하며, 언제나 흰 실과 썩은 실로 꿰매어져 있어 반드시 터지고 드러나기 때문이며, 혁명적 청년들 자신에게도 가장 거짓되고 제멋대로이고 독단적이며 인민에 반하는 방향이기 때문이다. 사람은 오직 온전히 자기 진리 위에 서 있을 때, 자기의 가장 깊은 신념에 따라 말하고 행동할 때에만 강하다. 그럴 때 그는 어떤 처지에 놓이든 무엇을 말하고 무엇을 해야 할지 언제나 안다. 그는 쓰러질 수는 있어도 자기 자신을 욕되게 하거나 자기 일을 욕되게 할 수는 없다. 우리가 거짓의 길로 인민의 해방을 추구한다면 반드시 갈피를 잃고 길에서 벗어나 목적 자체를 놓치게 될 것이며, 인민에게 조금이라도 영향력이 있다면 인민 자체도 길에서 벗어나게 할 것이다. 곧 반동의 뜻에 따라, 반동에 이롭게 행동하게 될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 자신이 철저한 확신을 지닌 무신론자이고 모든 종교적 신앙의 적이며 유물론자인 만큼, 인민과 신앙에 관해 이야기하게 될 때마다 우리는 우리의 무신앙을, 더 나아가 종교에 대한 우리의 적대적 태도를 인민에게 남김없이 밝혀야 한다. 이 문제에 관한 인민의 모든 질문에 우리는 정직하게 답해야 하며, 필요해질 때, 곧 성공이 내다보일 때에는 우리 견해가 옳음을 인민에게 설명하고 증명하려고까지 애써야 한다. 그러나 우리 스스로 그런 대화의 기회를 찾아 나서서는 안 된다. 우리는 인민 속 선전에서 종교 문제를 맨 앞에 내세워서는 안 된다. 우리의 깊은 확신으로는 그렇게 하는 것은 인민의 사업을 배반하는 것과 같다.

인민은 교조주의자도 철학자도 아니다. 인민에게는 여러 문제를 한꺼번에 다룰 여가도 습관도 없다. 하나에 빠지면 다른 모든 것을 잊는다. 그러므로 인민 앞에 주된 문제, 다른 어떤 문제보다도 그 해결에 인민의 해방이 달린 문제를 내놓는 것이 우리의 직접적인 의무다. 그런데 이 문제는 인민의 처지 자체가, 인민의 삶 전체가 가리켜 준다. 이 문제는 경제적·정치적 문제다. 사회혁명이라는 의미에서 경제적이고, 국가의 파괴라는 의미에서 정치적이다. 인민을 종교 문제로 붙잡아 두는 것은 인민을 참된 사업에서 떼어 놓는 것이며, 인민의 사업을 배반하는 것이다.

인민의 사업은 오로지 인민의 이상을 실현하는 데, 그리고 인민 자신 안에 뿌리를 둔 범위에서 가능한 한 그 이상을 바로잡고, 목표를 향해 더 곧고 더 빠르게 나아가는 더 나은 방향을 주는 데 있다. 우리는 러시아 인민의 이상을 주로 흐리는 세 가지 불행한 특징을 지적했다. 이제 덧붙여 두자. 뒤의 두 가지, 곧 미르에 의한 개인의 흡수와 차르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은 실은 첫째, 곧 가부장제에서 자연스러운 결과로 나온다. 그러므로 가부장제야말로 우리가 온 힘을 다해 싸워야 할 주된 역사적 악, 그러나 불행히도 철저히 인민적인 악이다.

가부장제는 러시아의 삶 전체를 일그러뜨려, 그 삶을 견딜 수 없게 만드는 둔하고 우매한 정체, 헤어날 수 없는 토박이 진창, 뿌리 깊은 거짓, 탐욕스러운 위선, 그리고 마침내 농노적 노예 상태라는 성격을 거기에 덧씌웠다. 남편의, 아버지의, 그다음에는 맏형의 전제는 법률적·경제적 원리부터 이미 부도덕한 가족을 개선하는 폭력과 제멋대로의 횡포, 날마다의 집안 비열함과 방탕의 학교로 만들었다. 회칠한 무덤 — 러시아 가족을 규정하는 데 더없이 알맞은 표현이다. 착한 러시아 가장은, 정말 착한 사람이지만 줏대가 없다면, 그저 마음씨 좋은 돼지, 죄 없고 말대꾸 못하는 존재다. 아무것도 분명히 자각하지 못하고 아무것도 뚜렷이 원하지 않으며, 선과 악을 무심하게, 그래서 마치 일부러 그러는 것이 아닌 듯이, 거의 동시에 행하는 존재다. 그의 행동은 목적보다는 사정과 그때그때의 기분, 그리고 무엇보다 주위 환경에 훨씬 더 좌우된다. 가족 안에서 복종하는 데 길든 그는 사회에서도 계속 복종하고 바람 부는 쪽으로 휜다. 그는 노예가 되고 노예로 남도록 생겨 먹었지만 전제자는 되지 못할 것이다. 그럴 힘이 그에게는 없다. 그래서 그는 제 손으로 매질하지는 않겠지만, 상전이 매질하려는 불행한 사람을, 죄가 있든 없든 반드시 붙잡아 줄 것이다. 그에게 상전은 세 가지 주요하고 신성한 모습으로 나타난다. 아버지로, 미르로, 그리고 차르로.

그러나 그가 고집 세고 불같은 사람이라면 노예이면서 동시에 전제자가 될 것이다. 자기보다 아래에 있고 자기 자의에 매인 모든 사람 위에서 제멋대로 구는 전제자 말이다. 그의 주인은 미르와 차르다. 그 자신이 가장이라면 집에서는 끝없는 전제자가 되겠지만, 미르에게는 하인이요 차르에게는 노예가 될 것이다.

공동체는 그의 세계다. 그것은 그의 가족, 그의 씨족이 자연스럽게 넓어진 것에 지나지 않는다. 그래서 그 안에서도 가부장적 원리가 지배하고, 똑같이 역겨운 전제와 똑같이 비굴한 복종이, 그래서 또 가족 안에서와 똑같은 뿌리 깊은 불의와 모든 개인적 권리에 대한 똑같은 근본적 부정이 지배한다. 미르의 결정은 그것이 무엇이든 법이다. 「누가 감히 미르를 거스르랴!」 러시아 농민은 경탄하며 외친다. 우리는 실은 미르 밖에, 더 정확히는 미르 위에 서 있는 차르와 그의 관리들과 귀족들 말고도, 러시아 인민 자체 안에 감히 미르를 거스르는 사람이 있음을 보게 될 것이다. 바로 도적이다. 그래서 도적질은 러시아에서 중요한 역사적 현상이다. 러시아 최초의 반란자, 최초의 혁명가인 푸가초프와 스텐카 라진은 도적이었다.

미르에서는 노인들, 곧 가장들만 투표권을 가진다. 장가가지 않은, 또는 장가갔더라도 분가하지 않은 젊은이들은 시키는 대로 하고 복종해야 한다. 그러나 공동체 위에, 모든 공동체 위에 차르, 곧 보편적 족장이자 시조, 온 러시아의 아버지가 서 있다. 그래서 그의 권력은 무제한이다.

각 공동체는 저 홀로 닫힌 전체를 이루고, 그 결과 — 이것이 러시아의 주된 불행 가운데 하나다 — 어떤 공동체도 다른 공동체들과 무슨 자립적이고 유기적인 유대를 갖지 않으며 가질 필요도 느끼지 않는다. 공동체들은 서로 오직 아버지 차르를 통해, 오직 그의 최고의 아버지다운 권력 안에서만 결합되어 있다.

우리는 이것이 큰 불행이라고 말한다. 이런 분열이 인민을 무력하게 만들고, 거의 언제나 국지적이고 서로 연결되지 않은 인민의 모든 반란을 피할 수 없는 패배로 몰아넣으며, 그럼으로써 전제 권력의 승리를 굳힌다는 것은 분명하다. 따라서 혁명적 청년들의 주된 의무 가운데 하나는 가능한 모든 수단을 써서, 무슨 일이 있어도, 분열된 공동체들 사이에 살아 있는 반란의 유대를 세우는 것이어야 한다. 어려운 과제이지만 불가능하지는 않다. 역사는 혼란의 시기에, 예컨대 가짜 드미트리 시대의 내란에서,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의 혁명에서, 그리고 니콜라이 황제 치세 초의 노브고로드 반란에서 공동체들 스스로가 제 힘으로 움직여 이 구원의 유대를 세우려 했음을 보여 주기 때문이다.

공동체의 수는 헤아릴 수 없이 많고, 그들 모두의 아버지 차르는 그들 위에 너무 높이, 주 하느님보다 아주 조금 낮은 곳에 서 있어서 그들 모두를 몸소 다스릴 수 없다. 주 하느님 자신도 세상을 다스리려면 헤아릴 수 없이 많은 하늘의 품계와 군세, 곧 세라핌, 케루빔, 대천사, 날개 여섯 달린 천사와 수수한 날개의 천사의 봉사가 필요한데, 하물며 차르가 관리 없이 지낼 수는 없다. 그에게는 군사·민사·사법·경찰 행정 전체가 필요하다. 이렇게 해서 차르와 인민 사이에, 차르와 공동체 사이에 군사적·경찰적·관료적이며 필연적으로 엄격히 중앙집권화된 국가가 들어선다.

이렇게 해서 인민의 후견인이자 은인인 상상 속의 아버지 차르는 높이, 높이, 거의 하늘 저편에 놓이고, 실제의 차르, 채찍의 차르, 도둑 차르, 파멸자 차르인 국가가 그의 자리를 차지한다. 여기서 자연스럽게 다음과 같은 기이한 사실이 나온다. 우리 인민은 상상 속의, 있어 본 적 없는 차르를 신처럼 떠받드는 동시에, 국가로 실현된 실제의 차르를 증오한다.

우리 인민은 국가를 깊고 격렬하게 증오하며, 그 대표자들이 어떤 모습으로 앞에 나타나든 그 모두를 증오한다. 얼마 전까지만 해도 인민의 증오는 귀족과 관리들 사이에 나뉘어 있었고, 때로는 관리보다 귀족을 더 증오하는 것처럼 보이기까지 했다. 그러나 실상 인민은 양쪽을 똑같이 증오한다. 농노제 폐지로 귀족이 눈에 띄게 몰락하고 사라지며 오로지 봉직 신분이라는 본래 모습으로 되돌아가기 시작한 뒤로, 인민은 관리 신분 전체에 대한 증오 속에 귀족까지 끌어안았다. 그 증오가 얼마나 정당한지 증명할 필요가 있겠는가!

국가는 그러지 않아도 가부장적 원리로 이미 타락한 러시아 공동체를 완전히 짓밟고 타락시켰다. 국가의 압제 아래에서 공동체의 선거 자체가 기만이 되었고, 인민이 직접 일정 기간 뽑는 사람들, 곧 읍장, 촌장, 십호장, 향장은 한편으로는 권력의 도구로, 다른 한편으로는 부유한 쿨라크 농민들에게 매수된 하인으로 바뀌었다. 이런 조건에서 정의와 진리, 소박한 인간애의 마지막 남은 자취마저 공동체에서 사라질 수밖에 없었다. 게다가 공동체는 국가의 세금과 부역으로 파산했고 상전들의 자의에 끝까지 짓눌렸다. 그 어느 때보다도 개인에게는 도적질이, 인민 전체에게는 — 전면적 반란, 곧 혁명이 유일한 출구로 남았다.

이런 처지에서 우리의 지적 프롤레타리아트, 곧 러시아의 정직하고 진실하며 끝까지 헌신하는 사회혁명적 청년들은 무엇을 할 수 있는가? 그들은 인민 속으로 들어가야 한다. 의심할 바 없다. 오늘날 어디에서나, 특히 러시아에서는 인민 밖에서는, 수백만 막노동 대중 밖에서는 더 이상 삶도, 사업도, 미래도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어떻게, 무엇 때문에 인민 속으로 들어가야 하는가?

지금 우리 사이에서는 네차예프 기도가 불행하게 끝난 뒤 이 문제에 관한 의견이 몹시 갈라진 듯하다. 그러나 생각의 전반적 혼란 속에서도 벌써 두 가지 주요하고 상반된 방향이 갈라져 나오고 있다. 하나는 좀 더 평화적이고 준비적인 성격이고, 다른 하나는 반란적이며 곧바로 인민 방위의 조직을 지향한다.

첫째 방향의 옹호자들은 이 혁명이 지금 실제로 가능하다고 믿지 않는다. 그러나 그들은 인민의 불행을 태연한 구경꾼으로 지켜볼 수도 없고 그러고 싶지도 않기에, 인민 속으로 들어가 그 불행을 형제처럼 함께 나누기로, 또 동시에 인민을 이론이 아니라 실천으로, 자신의 살아 있는 본보기로 가르치고 준비시키기로 결심한다. 그들은 공장 노동자가 되어 노동자들과 나란히 똑같이 일하면서 그들 사이에 결합의 정신을 퍼뜨리려 애쓸 것이다...

다른 이들은 농촌 콜로니를 세우려 할 것이다. 그곳에서 그들은 우리 농민들에게 익히 알려진 토지의 공동 이용 외에도, 농민들이 아직 전혀 모르지만 경제적으로 꼭 필요한 원리를 도입하고 적용할 것이다. 곧 공동의 땅을 집단으로 경작하고, 생산물이나 생산물의 값을 가장 엄격한 정의, 법률적 정의가 아니라 인간적 정의에 따라 자기들끼리 균등하게 나누는 원리다. 다시 말해 유능하고 강한 사람에게는 더 많은 노동을, 무능하고 약한 사람에게는 더 적은 노동을 요구하고, 벌이를 노동량에 따라서가 아니라 각자의 필요에 따라 나누는 것이다.

그들은 자신의 본보기로, 그리고 무엇보다 집단 노동의 조직에서 얻으리라 기대하는 이익으로 농민들을 끌어들일 수 있기를 바란다. 카베도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자신의 이카리아인들을 이끌고 아메리카로 건너가 새 이카리아를 세웠을 때 같은 희망을 품었다. 그 이카리아는 아주 잠깐 존속했을 뿐이다. 게다가 그런 실험의 성공에는 아메리카의 토양이 러시아의 토양보다 그래도 유리했다는 점을 지적해 두어야 한다. 아메리카에는 더없는 자유가 군림하고, 우리의 축복받은 러시아에는 — 차르가 군림한다.

그러나 우리의 준비자들, 인민을 평화롭게 깨우치려는 이들의 희망은 여기서 그치지 않는다. 그들은 완전한 개인의 자유에 기초하여 자신들의 가정생활을 꾸림으로써, 우리 러시아의 노예 상태 전체의 바탕에 놓인 저 역겨운 가부장제에 맞서려 한다. 곧 그들은 우리 사회의 주된 악을 그 뿌리에서부터 치고, 그럼으로써 인민의 이상을 바로잡고 정의와 자유와 해방의 수단에 관한 실천적 개념을 인민 속에 퍼뜨리는 데 직접 이바지하려는 것이다.

이 모든 것은 훌륭하고 더없이 너그럽고 고귀하다. 그러나 실행될 수 있을지는 의심스럽다. 설령 여기저기서 성공한다 해도 그것은 바다에 떨어진 한 방울일 것이며, 우리 인민을 준비시키고 일으키고 해방하기에는 한참 모자란 한 방울일 것이다. 많은 수단과 많은 살아 있는 힘이 들겠지만 그 결과는 너무나 보잘것없을 것이다.

이런 계획을 그리며 진심으로 실현하려는 이들은 우리 러시아 현실을 그 온갖 추악함 속에서 보지 않으려고 틀림없이 눈을 감고 그리하는 것이다. 실행의 첫머리에서부터 그들을 덮칠 온갖 무섭고 무거운 환멸을 미리 예언할 수 있다. 아마 몇몇, 아주 드문 행운의 경우를 빼면, 그들 대다수는 시작 너머로 나아가지 못할 것이고 나아갈 힘도 없을 것이기 때문이다.

눈앞에 다른 길이 보이지 않는다면 시도해 보라. 그러나 이것으로는 모자라다는 것, 우리의 가련한 순교자 인민을 해방하고 구원하기에는 너무나 모자라다는 것도 알아 두라.

또 하나의 길은 전투적이고 반란적인 길이다. 우리는 이 길을 믿으며 오직 이 길에서만 구원을 기대한다.

우리 인민은 분명히 도움을 필요로 한다. 인민은 어느 마을이든 일으키는 것이 일도 아닐 만큼 절망적인 처지에 놓여 있다. 그러나 모든 반란은 아무리 실패하더라도 언제나 유익하지만, 개별적 폭발만으로는 모자라다. 모든 마을을 한꺼번에 일으켜야 한다. 그것이 가능하다는 것은 스텐카 라진과 푸가초프가 이끈 거대한 인민 운동이 증명해 준다. 이 운동들은 우리 인민의 의식 속에 그들이 실현하려 애쓰는 이상이 실제로 살아 있음을 증명하며, 그 운동들의 실패로부터 우리는 이 이상에 성공을 가로막아 왔고 지금도 가로막는 본질적 결함이 있다고 결론짓는다.

우리는 이 결함들을 열거했고, 그것들에 맞서고 인민의 의식 자체 안에서 그것들을 이겨 내는 데 모든 노력을 기울이는 것이 우리 혁명적 청년들의 직접적인 의무라는 확신을 밝혔다. 그리고 그런 투쟁이 가능함을 증명하려고, 그 투쟁이 이미 오래전부터 인민 자신 안에서 시작되었음을 보여 주었다.

가부장제에 맞선 전쟁은 오늘날 거의 모든 마을, 모든 가정에서 벌어지고 있다. 그리고 공동체, 곧 미르는 이제 인민이 증오하는 국가 권력과 관리들의 자의의 도구로 어찌나 바뀌었는지, 국가 권력과 관리들의 자의에 맞선 반란은 동시에 공동체와 미르의 전제에 맞선 반란이 되고 있다.

남은 것은 차르를 신처럼 떠받드는 것이다. 우리는 그것이 지난 10~12년 동안 어지신 알렉산드르 황제의 현명하고 인민을 사랑하는 정책 덕분에 인민의 의식 자체 안에서 몹시 닳고 약해졌다고 생각한다. 농노를 거느린 귀족 지주는 이제 없다. 그가 바로 인민의 증오라는 뇌우를 주로 자신에게 끌어당기던 피뢰침이었다. 남은 것은 귀족이나 상인 출신의 토지 소유자, 곧 큰 쿨라크이고, 무엇보다 관리, 곧 차르의 천사 또는 대천사가 남았다. 그러나 관리는 차르의 뜻을 집행한다. 우리 농민은 차르에 대한 광적인 역사적 믿음으로 아무리 눈이 흐려져 있어도 마침내 이것을 스스로 깨닫기 시작한다. 어찌 깨닫지 않을 수 있겠는가! 10년 동안 그는 러시아 방방곡곡에서 차르에게 청원 대표들을 보냈고, 그들은 모두 차르 자신의 입에서 오직 한 가지 대답만을 들었다. 「너희에게 다른 자유는 없을 것이다!」

아니다, 뭐라 하든, 러시아 농민은 무지하지만 바보는 아니다. 눈을 찌르는 그 많은 사실과 제 살갗으로 겪어 낸 그 많은 시련을 겪고도 마침내 자기에게 차르보다 더한 적은 없다는 것을 깨닫기 시작하지 않는다면, 그는 더할 나위 없는 바보여야 할 것이다. 온갖 방법으로 그에게 이것을 깨우쳐 주고 느끼게 하는 것, 날마다의 인민의 삶에 넘쳐 나는 온갖 비참하고 비극적인 사건을 이용하여, 그가 살 수 없게 만드는 관리와 지주와 사제와 쿨라크의 모든 광포와 약탈과 강탈이 곧바로 차르 권력에서 나오고 그것에 기대며 오직 그 덕분에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 주는 것, 한마디로 그가 그토록 증오하는 국가가 바로 차르 자신이며 차르 말고 다른 무엇도 아니라는 것을 그에게 증명하는 것 — 이것이 혁명적 선전의 직접적이고 지금으로서는 주된 의무다.

그러나 이것으로는 모자라다. 러시아에서 전인민적 봉기를 마비시키고 지금까지 불가능하게 만든 주된 결함은 공동체들의 폐쇄성, 농민의 지역 미르들이 저마다 고립되고 분열되어 있다는 것이다. 무슨 일이 있어도 이 폐쇄성을 깨뜨리고, 이 개별 미르들 사이에 혁명적 사상과 의지와 행동의 살아 있는 흐름을 이어야 한다. 모든 마을, 모든 향, 할 수 있다면 모든 주의 가장 뛰어난 농민들, 러시아 농민 세계에서 나온 앞선 사람들, 타고난 혁명가들을 서로 이어야 하며, 할 수 있는 곳에서는 공장 노동자들과 농민층 사이에도 그와 같은 살아 있는 유대를 놓아야 한다. 이 유대는 개인적인 것일 수밖에 없다. 물론 그때 가장 꼼꼼한 신중함을 지키면서, 각 마을, 각 향, 각 주의 가장 뛰어난, 곧 앞선 농민들이 다른 모든 마을과 향과 주의 그런 농민들을 알게 해야 한다.

무엇보다 먼저 농민층에서 나온 이 앞선 사람들을, 그리고 그들을 통해 인민 전체는 아니더라도 적어도 인민의 상당하고 가장 활기찬 부분을 설득해야 한다. 온 인민에게, 러시아 전역의 모든 마을과 향과 주에, 그리고 러시아 밖에도 하나의 공통된 불행이 있고 따라서 하나의 공통된 사업이 있다는 것을. 인민 안에는 그 무엇도, 그 누구도 맞설 수 없는 불굴의 힘이 살아 있으며, 그 힘이 지금까지 인민을 해방하지 못한 것은 오직 그것이 모여서 동시에, 모든 곳에서, 함께, 한마음으로 움직일 때에만 강력한데 지금까지 모인 적이 없었기 때문이라는 것을 그들에게 설득해야 한다. 그 힘을 모으려면 마을과 향과 주가 하나의 공통된 계획에 따라, 전인민적 해방이라는 단 하나의 목표를 위해 서로 이어지고 조직되어야 한다. 그리고 우리 인민 안에 참된 단결의 감정과 의식이 생겨나게 하려면, 일종의 인민 신문, 인쇄든 석판이든 필사든 아니면 입으로 전하는 것이든 그런 신문을 꾸려야 한다. 그 신문은 여기저기서 터져 나오는 개별 인민 반란, 농민 반란이나 공장 반란 하나하나를 러시아의 구석구석, 모든 주와 향과 마을에 곧바로 알려야 하며,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일으키는 커다란 혁명 운동도 알려야 한다. 그리하여 우리 농민과 우리 공장 노동자가 자신을 외톨이로 느끼지 않고, 오히려 자기 뒤에 같은 압제 아래 있으면서도 그만큼 같은 열정과 해방의 의지를 품고 전면적 폭발을 준비하는 막노동 대중의 거대하고 헤아릴 수 없는 세계가 서 있음을 알게 하려는 것이다.

이것이 혁명적 선전의 과제이며, 솔직히 말해 혁명적 선전의 유일한 사업이다. 우리 청년들이 이 사업을 어떻게 이루어야 하는지를 인쇄물로 이야기하기는 곤란하다.

한 가지만 말해 두자. 러시아 인민은 우리의 교육받은 청년들을 자기 삶에서, 자기 불행 속에서, 자기 사업 속에서, 자기의 필사적인 반란 속에서 만날 때에야 비로소 그들을 자기 청년으로 인정할 것이다. 청년들은 이제부터 구경꾼으로서가 아니라 활동적이고 앞장서며 스스로 파멸을 각오한 동참자로서, 어디서나 언제나, 크든 아주 작든 모든 인민의 동요와 반란에 함께해야 한다. 청년들은 엄격히 숙고한 확고한 계획에 따라 스스로 행동하고, 승리에 없어서는 안 될 한마음을 만들어 내기 위해 이 점에서 자신의 모든 행동을 가장 엄격한 규율에 따르게 하면서, 스스로를 단련하고 인민을 필사적인 저항뿐 아니라 대담한 공격으로도 단련해야 한다.

끝으로 한마디 덧붙이자. 우리가 우리의 지적 프롤레타리아트라고 부르는 계급, 우리 사이에서 이미 사회혁명적 처지, 곧 쉽게 말해 절망적이고 견딜 수 없는 처지에 놓인 이 계급은, 수치스럽게 헛되이 멸망하고 싶지 않다면 이제 사회혁명 사업에 대한 의식적인 열정으로 가득 차야 한다. 이 계급은 이제 인민 혁명의 준비자, 곧 조직자가 되도록 부름받았다. 그에게는 다른 출구가 없다. 물론 그는 받은 교육 덕분에, 이미 지나치게 붐비고 몹시 박정한 인민의 약탈자·착취자·압제자 대열에서 다소간 이로운 자리를 하나 얻으려 애쓸 수도 있을 것이다. 그러나 첫째, 그런 자리는 갈수록 줄어들어 아주 적은 수만이 얻을 수 있다. 대다수는 배신의 치욕만을 안은 채 궁핍과 속물근성과 비열함 속에서 멸망할 것이다. 우리는 배신을 생각조차 할 수 없고 저지를 수 없는 사람들에게만 말을 건넨다.

러시아 인민의 착취자, 파멸자, 적들의 세계와 모든 관계를 돌이킬 수 없이 끊은 그들은 자신을 오로지 인민 해방 사업에 속하는 귀중한 자본으로, 오직 인민 속 선전과 차츰차츰의 각성과 전인민적 반란의 조직에만 쓰여야 할 자본으로 여겨야 한다.

부록 B. 취리히 슬라브 지부의 강령

슬라브 지부는 제1차 대회(1866년 9월, 제네바)에서 채택된 국제노동자협회의 기본 규약을 전적으로 인정하면서, 슬라브 지역에서 혁명적 사회주의 원칙을 선전하고 인민의 힘을 조직하는 것을 특별한 목적으로 삼는다.

슬라브 지부는 범슬라브주의, 곧 러시아 제국의 도움으로 슬라브 인민들을 해방하려는 기도와, 범게르만주의, 곧 지금 거대한 사이비 인민국가로 조직되려 애쓰는 독일인들의 부르주아 문명의 도움으로 해방하려는 기도, 그 양쪽의 지향과 발현에 똑같은 힘으로 맞서 싸울 것이다.

우리가 보기에 홀로 인민 대중의 참되고 완전한 해방의 모든 조건을 갖춘 아나키적 혁명 강령을 받아들이며, 어떤 형태로든 국가의 존재는 프롤레타리아트의 자유와 양립할 수 없고 인민들의 형제적 국제 연합을 허용하지 않는다고 확신하기에, 우리는 모든 국가의 철폐를 원한다. 특히 슬라브 인민들에게 이 철폐는 생사가 걸린 문제이며, 동시에 다른 인종의 인민들, 예컨대 투르크·마자르·독일 인민과 화해하는 유일한 방법이다.

국가와 함께 법률적 권리라 불리는 모든 것, 입법과 정부를 통해 위에서 아래로 짜인 모든 체제, 지배 계급에게 이롭도록 인민의 노동을 확립하고 체계화하는 것 말고는 다른 목적을 가져 본 적이 없는 체제가 반드시 사라져야 한다.

국가와 법률적 권리의 철폐는 필연적으로 개인의 세습 재산과 이 재산에 기초한 법률적 가족의 철폐를 낳을 것이다. 그 둘은 모두 인간적 정의를 전혀 허용하지 않기 때문이다.

국가, 소유권, 법률적 가족의 철폐 — 이것만이 인민 생활을 아래에서 위로 조직하는 것을 가능하게 할 것이다. 그 조직은 사물 자체의 힘으로 모두에게 가능하고 의무가 된 집단적 노동과 소유에 기초하여, 개인들이 결사로, 또는 독립 공동체로, 또는 공동체와 모든 지역적·민족적 경계를 넘어 이해관계와 사회적 지향의 동일성으로 결합된 거대한 동질적 결사로 완전하고 자유롭게 연방하고, 공동체들이 민족으로, 민족들이 인류로 연방하는 길을 통해 이루어진다.

슬라브 지부는 유물론과 무신론을 신봉하며 모든 종류의 예배, 모든 공식·비공식 신앙 고백에 맞서 싸울 것이다. 그리고 말로나 행동으로나 모든 사람의 양심의 자유와 각자가 자기 사상을 전파할 신성한 권리를 더없이 존중하면서, 신이라는 관념을 그 모든 발현, 곧 종교적·형이상학적·교조적·정치적·법률적 발현에서 없애려 애쓸 것이다. 이 해로운 관념이 모든 종류의 노예제를 신성화해 왔고 지금도 신성화하고 있다고 확신하기 때문이다.

슬라브 지부는 실증 과학을 더없이 존중한다. 슬라브 지부는 프롤레타리아트를 위해 성별 구별 없이 모두에게 평등한 과학 교육을 요구한다. 그러나 모든 정부의 적으로서, 가장 오만하고 해로운 정부인 학자들의 정부를 분노하며 거부한다.

슬라브 지부는 자유와 함께 남성과 여성의 권리와 의무의 평등을 요구한다.

슬라브 지부는 슬라브 인민들의 해방을 추구하지만, 민족 감정에서 다른 인종의 인민들에게 적대적인 특별한 슬라브 세계를 조직할 생각은 전혀 없다. 오히려 슬라브 인민들 또한 인류의 공동 가족에 들어가도록 힘쓸 것이다. 국제노동자협회는 이 공동 가족을 자유, 평등, 보편적 형제애의 원칙 위에 실현하자고 호소했다.

국제협회가 떠맡은 위대한 과제, 곧 인민 대중을 모든 후견과 모든 정부로부터 해방하는 과제에 비추어, 슬라브 지부는 협회 안에 어떤 최고 권력이나 정부가 존재할 가능성도 인정하지 않으며, 따라서 자립적 지부들의 자유로운 연방 말고는 다른 조직을 인정하지 않는다.

슬라브 지부는 공식 진리도, 총평의회나 총대회가 정한 획일적 정치 강령도 인정하지 않는다. 슬라브 지부가 인정하는 것은 모든 나라의 노동하는 손이 착취자들에 맞서 벌이는 경제 투쟁에서 개인들과 지부들과 연합들의 완전한 연대뿐이다. 특히 슬라브 지부는 이 투쟁의 모든 실천적 결과에 슬라브 노동자들을 끌어들이려 힘쓸 것이다.

슬라브 지부는 모든 나라의 지부들에게 다음을 인정한다. 가) 철학적·사회적 선전의 자유, 나) 다른 지부들과 연합들의 자유와 권리를 침해하지 않는 한에서 정치의 자유, 인민 혁명을 위한 조직의 자유, 다른 나라 지부들·연합들과 교류할 자유.

쥐라 연합이 이 원칙들을 소리 높여 선포했고 이를 성실히 실천하고 있으므로, 슬라브 지부는 쥐라 연합에 가입했다.

주석

  1. 정치에서도 고위 금융계에서와 마찬가지로 사기는 미덕으로 여겨진다.

    ↩
  2. 오직 자신의 해방이나 자신의 처지 개선만을 추구하는 영국 노동자들의 노력이 반드시 온 인류에게 이롭게 돌아간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그러나 영국인들은 그것을 알지도 못하고 추구하지도 않는다. 반대로 프랑스인들은 알고 추구한다. 우리가 보기에 이것은 프랑스인들에게 유리한 엄청난 차이이며, 그들의 모든 혁명 운동에 참으로 세계적인 의미와 성격을 부여한다.

    ↩
  3. 주민 3600만 명 가운데 이 종족들은 다음과 같이 나뉜다. 슬라브인 약 1650만 명(폴란드인과 루신인 500만 명, 다른 북슬라브인 곧 체코인·모라바인·슬로바키아인 725만 명, 남슬라브인 425만 명), 마자르인 약 550만 명, 루마니아인 290만 명, 이탈리아인 60만 명, 독일인과 유대인 900만 명, 그 밖의 종족 약 150만 명.

    ↩
  4. 헝가리 왕국에는 마자르인 550만 명, 슬라브인 500만 명, 루마니아인 270만 명, 유대인과 독일인 180만 명, 그 밖의 종족 약 50만 명, 모두 1550만 명의 주민이 있다.

    ↩
  5. 우리는 범슬라브주의의 철저한 적인 만큼 범게르만주의의 철저한 적이기도 하며, 우리가 보기에 지극히 중요한 이 문제에 앞으로 나올 책자 가운데 하나에서 별도의 글을 바칠 생각이다. 지금은 다만 이렇게 말해 두자. 우리는 러시아에서, 그리고 주로 슬라브 지역에서 정부의 공식 요원들과, 자유 슬라브주의자 행세를 하는 요원들 또는 공식적인 러시아 요원들이 벌이는 범슬라브주의 선전에 온 힘과 온갖 수단으로 맞서는 것을 러시아 혁명적 청년들의 신성하고 미룰 수 없는 의무로 여긴다. 그들은 불행한 슬라브인들에게, 슬라브 형제들에 대한 뜨거운 아버지다운 사랑에 젖은 페테르부르크의 슬라브인 차르와, 소러시아와 폴란드를 목 졸라 죽이고 폴란드는 일부를 독일인들에게 팔아넘기기까지 한 비열하고 인민을 증오하며 인민을 죽이는 전러시아 제국이 슬라브 나라들을 독일의 멍에에서 해방할 수 있고 또 해방하려 한다고 믿게 하려 애쓴다. 바로 그때 페테르부르크 내각은 동방에서 약속받은 지원의 대가로 보헤미아 전체를 모라바와 함께 비스마르크 공에게 공공연히 팔아넘기고 배신하여 내주고 있다.

    ↩
  6. 취리히에 슬라브 지부가 결성되어 쥐라 연합에 들어갔다. 우리는 모든 슬라브인에게 이 지부의 강령을 열렬히 권한다.

    ↩
  7. 우리는 마치니 본인에게서, 바로 그 무렵 런던의 러시아 준공식 요원들이 그에게 면담을 청하고 제안을 해 왔다는 말을 들었다.

    ↩
  8. 하인 근성은 자발적 노예 상태다. 이상한 일이다! 러시아인의 노예 상태보다 더 나쁜 노예 상태는 있을 수 없을 것 같은데, 러시아 학생들 사이에는 독일 학생 사회 전체에 지금도 있는 것 같은 교수와 상전에 대한 하인 같은 태도가 있었던 적이 한 번도 없다.

    ↩
  9. 프로이센에서는 귀족주의적 경향과 군부 귀족 당파를 이렇게 부른다. 「융커」라는 말은 귀족이라는 뜻으로 쓰인다.

    ↩
  10. 이 말은 1840년 하원에서 티에르가 한 것이다. 당시 루이 필리프의 장관이던 그는 파리 요새화 법안을 하원에 제출했다. 31년 뒤 프랑스 공화국 대통령이 된 티에르는 코뮌을 진압하려고 파리를 포격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