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늙은 볼셰비키의 편지: 모스크바 재판은 어떻게 준비되었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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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노비예프(Зиновьев)-카메네프(Каменев)-스미르노프 재판이 우리에게 머리를 망치로 얻어맞은 듯한 충격을 주었다고 말한다면, 이는 최근에 겪은 일 — 그리고 지금도 겪고 있는 일 — 을 아주 희미하게밖에 전하지 못하는 셈이다. 물론 말하는 것은 이른바 “소비에트 속물”의 정서가 아니다. 그런 속물은 애초에 온갖 정치에 지독히 지쳐 있어, 제발 자기만 내버려두어 조용히 살게 해주기만을 바랄 뿐 다른 것은 아무것도 꿈꾸지 않는다. 말하는 것은 얼마 전까지도 나라에서 정치를 할 독점적 권리를 자기에게 있다고 여기던 한 층의 정서, 말하자면 당의 장교단의 정서다.

지난봄과 여름에 이 층의 정서는 평온하고 태평스러웠다. 우리에게 오랫동안 없었던 일이었다. 지금 돌이켜 보면 많은 이들이 적지 않은 불안한 징후를 알아차린다. 그러나 이 모든 것은 뒤늦은 지혜일 뿐이다. 그때는 가장 어려운 나날이 지나갔고 앞으로는 느리더라도 어쨌든 틀림없이 형세가 나아지는 시기가 — 경제 분야에서든 정치 분야에서든 — 놓여 있다는 확신이 일반적이었다. 헌법의 의의를 과대평가하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헌법이 주로 전쟁을 위한 정치적 준비의 필요에서 비롯되었음을 알고 있었다. 그러나 바로 그 필요 때문에 가까운 장래에는 유난히 격렬한 테러의 폭발이 불가능해지고 형세가 다소 안정될 것이라는 생각이 일반적이었다.

이 모든 것이 내일에 대한 일종의 확신을 낳았다. 그리고 그 확신을 안고 우리는 여름 휴가로 흩어져 떠났다. 우리 일상에서 여름 휴가는 이제 옛적에는 결코 하지 못했던 그런 중요한 역할을 맡게 되었다. 여름 휴가를 누릴 권리만은 혁명이 쟁취한 권리 가운데 스탈린 자신도 당과 소비에트의 고위 관리에게서 빼앗을 엄두를 내지 못하는 유일한 권리라는 우스갯소리가 우리 사이에 도는 것도 우연이 아니다... 8월 초에는 정치국 위원 일부가 떠나 있고 스탈린도 곧 떠날 것이며, 업무도 여름철 비수기에 접어들 것이라는 소식이 전해졌다. 그 시기에는 우리가 보통 아무런 중대한 결정도 내리지 않고 아무런 큰 사건도 일어나지 않는다.

그런데 고요함 대신 — 우리에게조차 한 번도 없었던 재판이 벌어졌다... 이제야 겨우 정신을 차리기 시작했고, 어떻게 무슨 일이 일어났는지 조금씩 알아차리게 되었다. 물론 일어난 일이 전혀 우연이 아니었음이 드러난다. 우리에게는 우연이라는 것이 바깥에서 보이는 것보다 훨씬 적다.

레닌의 임종의 유언 가운데 우리 “당 지도부”가 자코뱅파의 오류를 되풀이하지 말라 — 상호 절멸의 길에 들어서지 말라 — 는 그의 간곡한 권고만큼이나 집요하게 붙들고 있는 것은 거의 없을 것이다. 당 반대파와의 투쟁에서는 많은 것까지 감행할 수 있지만 총살만은 안 된다는 것이 공리로 여겨졌다. 물론 이 규칙에서 벗어난 일은 이미 오래전부터 더러 있었다. 블륨킨을 총살했고, 자기 조직의 지시를 받아 국가정치보안부(GPU) 비밀과에 잠입하여 동지들에게 자기들 가운데 있는 배신자와 다가오는 체포에 대해 경고한 트로츠키스트 몇 명도 총살했다. 그러나 이 총살들은 모두가 예외적 조치로 여겼다. 당내 투쟁에 가담했기 때문이 아니라 직무상 의무를 저버렸기 때문에 적용되는 조치였다. 그런 잘못을 소비에트 정권은 언제나 더 엄하게 벌했다. 실제로 1924-25년에 중앙통제위원회 서기국에 잠입해 《사회주의 통보》로 보내려고 거기서 문서 몇 통을 훔쳐낸 멘셰비키 한 명이 총살되기까지 했다. 그런데도 이른바 “멘셰비키 재판” 때조차 멘셰비키에게 총살을 적용하는 문제는 진지하게 제기되지 않았다.

당내 반대파 활동에 참여한 데 대한 사형 문제가 처음 제기된 것은 류틴 사건과 관련해서였다. 1932년 말의 일이었는데, 당시 나라의 상황은 크론시타트 봉기 시절과 비슷했다. 물론 실제 봉기가 일어난 것은 아니었지만, 많은 이들은 차라리 봉기를 상대하는 편이 나았을 것이라고 말했다. 나라의 절반가량이 혹독한 기아에 빠져 있었고, 모든 노동자도 굶주릴 만큼 적은 배급으로 연명했다. 노동 생산성은 크게 떨어졌고 그것을 끌어올릴 방법도 없었다. 문제는 노동자들의 악의가 아니라 굶주린 배로는 제대로 일할 수 없다는 물리적 불가능성이었기 때문이다. 당의 가장 폭넓은 층에서도 오로지 이런 이야기뿐이었다. 스탈린이 자신의 정책으로 나라를 막다른 골목으로 몰아넣었고, "당을 농민과 다투게 만들었으며", 이제 상황을 구할 길은 스탈린을 제거하는 것뿐이라는 것이다. 중앙위원회의 영향력 있는 위원들 다수가 이런 취지로 발언했고, 심지어 정치국에서도 반스탈린 다수파가 이미 형성되어 있다는 말이 돌았다. 도대체 무엇을 해야 하는가, 스탈린의 총노선을 어떤 강령으로 대체해야 하는가 하는 문제는 당 간부들이 모이는 곳마다 논의되었다. 온갖 강령과 선언이 여러 사람 손을 거쳐 돌아다닌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그중에서도 특히 눈길을 끈 것은 류틴의 강령이었다. 이 강령은 분명히 "농민 애호" 성격을 띠었으며, 콜호즈 폐지와 농민에게 경제적 자기 결정의 기회를 줄 것을 요구했다. 그러나 사람들의 주목을 특히 끈 것은 이것이 아니었다. 당시 "농민 애호적"이었던 강령은 "우파"만의 것이 아니었다. 예컨대 슬렙코프(Слепков)의 강령 같은 것이 그랬고, 얼마 전까지 "좌파"였던 트로츠키주의자들의 강령도 그러했다. 트로츠키주의자들은 실질적으로 총노선 전체에 대한 정치적 책임을 지고 있었는데, 그들이 그 노선의 최초 이데올로그들이었기 때문이다. 류틴의 강령을 다른 여러 강령과 구별시킨 것은 스탈린을 개인적으로 겨냥한 날카로움이었다. 타자기로 다시 쳐진 그것은 전체가 200쪽에 조금 못 미쳤는데, 그중 50쪽 이상이 스탈린의 인물됨에 대한 평가, 당에서의 그의 역할에 대한 평가, 스탈린을 제거하지 않고서는 당도 나라도 건강해질 수 없다는 논제의 논증에 할애되었다. 이 페이지들은 대단한 힘과 격렬함으로 쓰였고, 실제로 읽는 이에게 인상을 주었다. 스탈린을 러시아 혁명의 일종의 악한 천재로 그려냈는데, 그는 개인적 권력욕과 복수심에 이끌려 혁명을 벼랑 끝으로 몰아넣었다는 것이다.

바로 이 페이지들이 류틴 강령의 성공을 만들어냈고, 동시에 그 저자가 이후 겪게 될 모든 고난을 예정지었다. 강령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으므로, 그것이 곧 스탈린의 책상에 올라간 것도 놀라운 일이 아니었다. 물론 체포와 수색이 시작되었는데, 이때 류틴 강령의 유포에 관계된 사람들뿐 아니라 다른 모든 문서의 유포에 가담한 사람들도 붙잡혔다. 당시 유배 중이었는지 격리소에 있었는지(그의 강령이 바로 그곳에서 쓰였다) 분명치 않던 류틴은 모스크바로 끌려왔고, 심문에서 자신이 저자임을 인정했다. 그의 운명 문제는 정치국에서 결정되었다. 국가정치보안부가 (물론 스탈린의 지시에 따라) 사형을 주장했고, 류틴은 레닌의 유훈이 사형 적용을 허용하지 않던, 오랫동안 활동하며 공로를 쌓은 당 활동가에 속했기 때문이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논쟁은 매우 격렬했다. 스탈린은 국가정치보안부의 제안을 지지했다. 그의 가장 강력한 논거는 청년들 사이에서, 그중에서도 콤소몰 청년들 사이에서 테러 분위기가 커지고 있다는 지적이었다. GPU 보고서에는 전국의 노동자·학생 청년들 사이에 그런 대화가 퍼져 있다는 보고가 넘쳐났다. 그 보고서들은 또한 이 계층의 사람들이 당 및 소비에트 관리들 가운데 비교적 하급자들에 대해 저지른 개별 테러 행위 사례도 적지 않게 기록하고 있었다. 이런 종류의 테러리스트들에 대해서는, 그들이 콤소몰원일지라도 당은 “최고형” 적용을 주저하지 않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실행자들을 그렇게 혹독하게 벌하면서 그러한 관행을 직접 정당화하는 정치적 선전을 편 사람을 봐주는 것은 정치적으로 부당하고 논리적으로도 맞지 않다고 논증했다. 다만 사소한 것에 힘을 낭비하지 말고 바로 우두머리를 때리라는 권고와 함께였다. 류틴의 강령은 그, 스탈린을 죽일 필요성을 정당화한 것에 다름 아니라고 스탈린은 주장했다.

정치국에서 표가 어떻게 갈렸는지 나는 이미 기억하지 못한다. 다만 처형에 가장 단호하게 반대한 사람이 키로프였고, 그가 정치국 위원 다수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는 데 성공했다는 것만 기억한다. 스탈린은 사안을 날카로운 충돌까지 몰고 가지 않을 만큼 신중했다. 류틴의 목숨은 그때 구제되었다. 그는 여러 해 동안 가장 엄격한 격리수용소 가운데 한 곳에 갇혔다. 그러나 이 작은 사건과 관련해 제기된 큰 문제들이 어떤 형태로든 다시 정치국 앞에 제기되어야 한다는 것은 모두에게 분명했다.

그리고 그 문제들은 실제로 제기되었다. 다만 32~33년 겨울의 상황과는 전혀 다른 상황에서였다.

1933년 여름과 가을은 연방에 전환점이었다. 그리고 내정과 외교, 두 가지 점에서 동시에 전환점이었다.

그해의 수확은, 인정해야 하겠지만, 여기 모든 사람에게 완전히 예상 밖이었다. 당시의 황폐함 속에서 밭을 갈고 곡식을 거둘 수 있으리라고 믿은 사람은 거의 없었다. 여기에 스탈린의 의심할 바 없는 공로가 있다. 그는 자기 기준으로 보아도 예외적인 에너지를 발휘했고, 모든 사람을 탈진할 때까지 일하게 만들었다. 그는 그 여름이 적어도 자기에게 결정적이라는 것을 의심할 바 없이 이해하고 있었다. 그 여름이 경제 상황을 개선하지 못했다면, 그에 대한 불만은 어떤 식으로든 분출했을 것이다. 그런데 그 여름의 결과가 좋으리라는 것이 밝혀지자 당내 분위기에 심리적 전환이 일어났다. 실질적으로 이제야 당원의 넓은 층이 총노선이 정말로 승리할 수 있다고 믿게 되었고, 믿게 되자 이 노선과 불가분하게 결부된 스탈린에 대한 태도를 바꾸었다. “스탈린이 이겼다”라고, 어제만 해도 류틴의 강령을 읽을 수 있게 구해 달라고 부탁했던 사람들까지 말했다. 그만큼 더 강하게, 이 경제 상황의 개선이 정치에 어떻게 반영되어야 하는가라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외교 정책의 근본 문제들까지 동시에 전면에 떠오르면서 상황은 더욱 복잡해졌다. 히틀러가 집권한 뒤 첫 몇 달 동안 이곳의 많은 사람은 제3제국을 독일 역사에서 잠깐 지나갈 사건으로 여겼다. 히틀러는 기껏해야 몇 달을 버틸 것이고, 그 뒤에는 처참한 붕괴와 혁명이 닥치리라는 것이었다. 영국과 프랑스의 “제국주의자들”이 자신들의 “숙적”에게 군비 확장 계획을 완수하도록 내버려두리라고 생각한 사람은 거의 없었고, 소련을 공격하겠다는 히틀러의 말도 심각하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상황이 우리가 바라는 것보다 훨씬 심각하다는 것, 서방의 대히틀러 선제 행동을 기대할 수 없다는 것, 러시아를 공격하기 위한 준비가 한창 진행되고 있다는 것을 깨닫기까지는 오랜 시간이 걸렸다.

우크라이나에서의 독일 선전, 특히 이른바 “동성애자 음모”[옮긴이 주 1]에 관한 수사에서 드러난 자료는 큰 충격을 주었다. 이 “음모”는 1933년 말에 적발되었는데, 그 내용은 다음과 같았다. 독일 무관의 보좌관 가운데 한 사람으로, 유명한 룀 대위의 측근이자 추종자인 인물이 모스크바의 동성애자 모임에 들어갔다. 그는 당시 우리나라에서 완전히 합법이었던 이 모임을 위장막으로 삼아 나치 활동을 위한 조직망을 구축했다. 그 연결망은 레닌그라드, 하리코프, 키예프 등 지방 도시들까지 뻗어 있었다. 문학·예술계 인물들도 대거 이 사건에 연루되었다. 동성애 성향으로 알려진 매우 저명한 예술가의 개인 비서, 이미 여러 학술 저작을 발표한 레닌 연구소의 중진 연구원 등이 그들이다. 독일인들은 이런 인맥을 군사 정보 수집뿐 아니라 소비에트·당 내부의 결속을 무너뜨리는 데에도 이용했다. 이 음모의 주도자들이 노린 바가 그만큼 광범위했으므로, 소련의 정책 지도자들도 더 멀리 내다보지 않을 수 없었다. 이렇게 외교 정책의 전환이 점차 싹텄고, 얼마 뒤 국제연맹 가입과 프랑스의 “인민전선” 결성으로 이어졌다.

이 전환은 당연히 큰 논쟁을 거쳤다. 승전국들의 질서를 무너뜨리기 위해 독일과 손을 잡는다는 기존 노선, 설령 독일의 우파와라도 협력한다는 노선의 관성을 이겨내기는 쉽지 않았다. 더구나 모두가 알고 있듯, 서유럽의 민주 정당들과 협력하는 노선은 필연적으로 국내 정책의 상당한 변화도 수반했다. 바로 이 시기에 키로프가 특히 두각을 나타냈다.

키로프는 정치국에서 원래부터 두드러진 역할을 하고 있었다. 그는 이른바 “백 퍼센트” 총노선 지지자였고, 그 노선을 관철하는 불굴의 기세와 정력으로 남달랐다. 그래서 스탈린은 그를 매우 높이 평가했다. 그러나 그의 행동에는 언제나 어느 정도 독자성이 섞여 있었고, 그것이 스탈린을 짜증 나게 했다. 어느 때인가 키로프가 사소한 문제 하나로 반대 의견을 내자 불만을 품은 스탈린이, 키로프는 레닌그라드를 떠날 수 없다는 핑계를 대면서 여러 달 동안 그를 정치국 회의에 부르지 않았다고 나는 전해 들었다. 그러나 그에게 더 단호한 탄압을 가하는 일은 스탈린도 결국 감행하지 못했다. 불만을 품은 사람들의 무리가 너무 컸으므로, 키로프처럼 눈에 띄는 당 일꾼 하나를 그 대열에 보태는 일을 마음 편히 밀어붙일 수는 없었다. 더구나 레닌그라드에서 키로프는 자기에게 완전히 충성하는 사람들로 주위를 둘러싸는 데 성공했으므로, “레닌그라드 사람들”과의 새 충돌은 지노비예프 시대보다 오히려 더 심각해질 판이었다. 33~34년 겨울 무렵에는 키로프의 지위가 워낙 공고해져서 어느 정도 독자적인 노선을 펴는 것도 가능했다. 이 노선은 대외정책에서 이른바 “서구 지향”을 한층 일관되게 관철하는 데 그치지 않고, 이 새로운 지향에서 국내정책에 대한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까지 걸쳐 있었다.

이 새로운 외교 노선이 국내 정책에 어떤 변화를 요구하는가 하는 문제는 우리에게 다음과 같이 제기되었다. 군사적 충돌이 불가피하다면, 강력한 군대를 만드는 등의 순수한 군사적 준비뿐 아니라 정치적 준비도 해야 한다. 곧 후방의 주민들이 전쟁을 감당할 수 있도록 마음의 준비를 갖추게 해야 한다는 것이다. 전쟁 전 준비의 이 영역에는 두 가지 길이 있었다. 한편으로는 모든 이견을 무자비하게 억압하고 행정적 압박을 계속 강화하며, 필요하다면 테러까지 강화하는 기존 노선을 유지할 수 있었다. 다른 한편으로는 “소비에트 사회와의 화해”를 시도할 수 있었다. 곧 다가올 전쟁에 대비하는 후방의 정치적 준비에 사람들이 자발적으로 참여하도록 하는 길이었다. 이 두 번째 노선의 가장 뚜렷하고 확고한 지지자는 М. А. 고리키와 키로프였다. 우리의 삶에 매우 큰 영향을 미쳤던 고리키의 역할에 대해서는 따로 이야기해야 할 것이다. 더구나 그가 세상을 떠난 지금은 전보다 더 솔직하게 말할 수 있다. 이것은 별개의 큰 주제다. 그는 스탈린에게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인정해야 하듯 그 영향은 유익했다. 그러나 그토록 영향력이 컸어도 고리키는 정치국 위원이 아니었고, 정치국의 결정에 직접 참여하지도 않았다. 그만큼 키로프의 역할이 더욱 컸다.

키로프는 테러를, 그것도 일반적인 테러와 당내부의 테러를 점차 약화시키자는 생각의 옹호자로 나섰다. 그의 제안의 의미를 과대평가할 필요는 없다. 잊지 말자, 키로프는 제1차 5개년계획 시기에 당을 이끌던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즉 좋지 않은 기억으로 남은 농촌 원정과 탈쿨라크화를 고무하고 수행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켐 연안과 무르만은 그 벨로모르라크(백해 노동수용소)와 함께 그의 직접 관할 아래 있었다. 발트-백해 운하 건설도 그의 관할이었다. 이것만으로도 그에게 인간의 목숨을 다루는 데 지나친 조심성이 있었다고 비난할 수는 결코 없다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러나 그가 발언해야 했던 그 환경에서는 이것이 그의 강점이었다. 제1차 5개년계획의 참상에 대한 자기 몫의 책임을 모두 떠맡았기에, 그는 제2차 5개년계획 시기를 위한 테러 완화의 이념가로 그만큼 더 대담하게 나설 수 있었다.

농촌의 소규모 사적 소유 요소를 없애기 위해 필요했던 파괴의 시기는 끝났다 — 대략 이런 것이 그의 생각의 흐름이었다 — 콜호즈의 경제적 처지는 견고하며, 앞으로는 나아질 수만 있다. 이는 앞으로의 '나라 발전'을 위한 견고한 토대를 만든다. 나라의 경제적 처지가 개선되어 갈 것이므로, 인구의 넓은 민주적 계층은 점점 더 권력과 화해하게 될 것이다. '내부의 적'의 범위는 점점 더 줄어들고 줄어들 것이다. 그리고 당의 과제는 경제 건설의 이 새로운 단계에서 당을 지지할 수 있는 역량을 결집하도록 돕는 것, 즉 소비에트 권력이 의지하는 기반을 넓히는 데 있다. 특히 키로프는 5개년계획을 둘러싼 투쟁 시기에 반대파로 밀려났고, 이제 '파괴적' 발전 단계가 끝난 뒤 새로운 기반을 받아들일 준비가 된 당의 모든 요소와 화해하는 데 단호한 지지자로 나섰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연설 가운데 하나에서 "우리에게는 더 이상 심각한 세력을 이루는 비타협적 적이 없다"고 선언했다. 모든 옛 그룹과 정당은 5개년계획 투쟁 시기에 녹아 없어졌고, 그들과 진지하게 겨룰 필요는 없다. 이 마지막 시기에 나타난 새로운 적들에 관해서라면, 몇몇을 빼고는, 우리가 화해 정책을 펴기만 하면 합의에 이르지 못할 자가 그들 가운데 없다.

키로프의 이 설교(실질적으로는 고리키도 같은 것을 — 어쩌면 더 큰 힘으로 — 설파했다)는 당 상층부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상층부가 1차 5개년계획 시기의 긴장을 쉽게 감당했다고 생각해서는 안 된다. 농촌에 대한 원정에 따르던 공포들 — 이 공포들에 관해 당신들은 희미한 인식밖에 지니지 못하고 있지만, 당 상층부인 그들은 벌어지는 모든 일을 늘 파악하고 있었다 — 은 그들 가운데 많은 이에게 극도로 고통스럽게 받아들여졌다. 이런 점에서 매우 시사적인 한 사건을 내가 전해 들었다. 1932년 말이었던 것 같은데, 레닌그라드에서 문학 청년들의 모임이 열려 칼리닌이 초청되었다. 이 모임은 국가정치보안부의 기념일과 겹쳤다 — 어쩌면 체카 창설 15주년이었을 것이다. 이 모임이 그 기념일과 어떤 직접적 연관을 가졌을 가능성도 있다. 어쨌든 모임에서는 체카에 바치는 시가 많이 낭송되었다. 이 시들에서 울린 기본 음조는 체카를 향한 염원이었다 — "그 손이 더 무자비하게 내리치기를". 악의 있는 혀들은 그날 저녁 칼리닌이 몹시 취해 있었다고 말한다. 그것이 사실이라 해도, 그것은 한 가지만을 증언한다. 알코올이 억제 중추의 저항을 약화시켜 칼리닌에게 더 솔직하게 말할 용기를 주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모임에 참석한 모든 이는 한목소리로 그의 연설이 정말로 응어리진 마음의 외침처럼 울렸다고 증언한다. 가장 잔인한 시 가운데 하나가 낭송된 뒤 — 거의 낭독자 시인의 장엄한 낭송을 중간에 끊을 뻔하면서 — 그는 일어나, 눈에 거의 눈물이 맺힌 채, 테러는 때때로 할 수밖에 없지만 결코 그것을 찬양해서는 안 된다고 말하기 시작했다. 그는 말했다. "우리가 그토록 잔혹한 조치에 나서야 한다는 것, 이것이 우리의 비극이다. 그리고 우리 모두는 테러를 포기할 수 있게 되는 것 말고는 다른 무엇도 그렇게 바라지 않는다." 체카의 무자비함을 찬양할 것이 아니라, 체카의 '징벌하는 손'이 멈출 수 있는 때가 더 빨리 오기를 바라야 한다.

이 연설은 당시 큰 인상을 남겼고, 레닌그라드뿐 아니라 모스크바의 문학계에서도 많이 회자되었다. 그 때문에 칼리닌이 나중에 “한바탕 얻어맞았다”고들 전한다. 어쨌든 이 연설은 제1차 5개년계획을 치러낸 사람들이 왜 테러의 완화 가능성을 입증하는 생각들에 유난히 달라붙었는지를 보여준다. 그럴 만한 객관적 전제 몇 가지가 나타났을 때 말이다. 키로프의 성공은 대단했다. 더구나 스탈린도 그의 생각에 정면으로 반대하지는 않고, 거기서 나오는 실천적 결론만 약화시켰다. 스탈린이 그렇게 처신한 것은 고리키(Горький)의 영향 때문이었고, 그 영향은 당시 절정에 이르렀다고 전한다.

이런 생각의 영향 아래 이미 33년 여름, 곧 수확량의 대략적인 규모가 밝혀진 직후에 카메네프, 지노비예프와 그 밖의 여러 전직 반대파 인사가 당원 권리를 회복했다. 게다가 그들에게는 자기 입맛에 맞는 일을 고를 권리까지 주어졌고, 일부는 당 대회(1934년 2월)에 초대받기까지 했다.

키로프는 이 대회에 일종의 승리자로 나타났다. 레닌그라드에서 치른 그의 선거는 다른 어떤 선거에서도 없었던 성대함 속에 치러졌다. 레닌그라드의 각 지구 회의는 하루에 소집되었고, 키로프는 그것들을 하나씩 돌아다녔으며 가는 곳마다 “우리 미로니치(Мироныч) 만세!”라는 함성과 엄숙한 박수갈채를 받았다. 키로프 뒤에 레닌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전체가 서 있다는 것을 과시하기 위해 모든 일이 다 이루어졌다. 키로프는 대회 자체에서도 성대한 환영을 받았다. 그가 회의장에 나타나자 박수갈채가 터졌고, 그가 보고를 하러 나설 때에는 사람들이 일어나서 맞이하고 일어나서 배웅했다. 대회 휴게실에서는 나중에 누가 박수갈채를 더 많이 받았는가 — 스탈린인가 키로프인가 — 하는 주제로 이야기가 많이 오갔다. 물론 이것은 과장이다. 스탈린은 두말할 것 없이 키로프보다 더 위엄 있게 맞이받았다. 그러나 이 박수갈채들을 서로 견줄 수 있었다는 사실 자체만으로도 키로프가 대회에서 어떤 역할을 했는지 충분히 말해준다.

키로프는 정치국에 다시 선출되었을 뿐 아니라 중앙위원회 서기로도 선출되었다. 그가 모스크바로 옮겨 당 서기국의 여러 부서를 직접 지도하게 될 일이 예정되어 있었다. 그 부서들은 그때까지 포스티셰프나 카가노비치(Каганович)의 지도 아래에 있었다. 이것은 키로프가 영감을 준 새 당 노선을 더 일관되게 관철하는 것을 보장해야 했다. 그러나 이 이사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공식적으로 내세운 이유는 레닌그라드를 책임 있는 지도자 없이 남겨둘 수 없다는 것이었다. 키로프의 대리인을 물색했으나 끝내 찾지 못했고, 키로프의 모스크바 이주는 계속 미루어졌다.

그러나 키로프는 정치국의 업무에 참여했고, 그곳에서의 그의 영향력은 꾸준히 커졌다.

어느 정치국 회의에서, — 아마도 1934년 초여름이었을 것이다 — 류틴(Рютин) 사건과 관련해 제기된 논쟁의 직접적 연속이었던 문제가 상정되었다. 그 시기에 여러 청년 단체 — 학생과 콤소몰 — 가 적발되었는데, 그 안에서 테러를 주제로 한 대화가 오갔다. 테러적 성격의 행동은 그들에게 아무것도 없었다. 만일 그렇지 않았다면 이 단체들의 참가자 운명에 관한 문제를 아예 아무도 제기하지 않았을 것이다. 적극적 테러로 넘어간 단체의 구성원은 육체적으로 말살되어야 한다는 원칙은 내전 시절부터 확고히 확립되어 있었다. 34년 봄에 적발된 단체 참가자들의 ‘행동’은, 당 민주주의가 완전히 결여되고 소비에트 헌법이 사실상 폐기된 상황에서 반대파에게는 테러의 길밖에 다른 투쟁 경로가 남지 않는다는 지극히 막연한 이야기의 범위를 벗어나지 않았다. 이전에도 이런 사건에는 원칙적으로 ‘최고형’이 적용되었다. 새 노선에 비추어 국가정치보안부는 지침을 문의했다. 위에 열거한 모든 단체에 관한 이야기를 담은 상세한 보고서가 작성되었다. 지금 와서 뒤늦게 생각해 보면, 이 문제를 정치국에 상정한 것은 우연한 일이 아니었고 스탈린과 그의 최측근이 새 노선이 얼마나 견고한지 시험해 본 것이었다는 생각이 든다. 정치국이 그 ‘자유주의’에서 어디까지 나아갈 것인가? 정치국의 지침은 상당히 유연하게 내려졌다. 일반적이고 확고한 지시는 주어지지 않았다. 개별 사건마다 그 사건의 개별적 특성을 검토하도록 권고되었다. 그러나 결정의 전반적 어조는, 해당 단체 구성원 개개인의 ‘교정 불가능성’에 대한 판단이 설 때에만 ‘최고형’을 극단적 경우에 적용하도록 권고하는 것이었다. 이 결정에 비추어 위의 모든 사건은 비교적 가벼운 판결 — 격리소 또는 수용소 — 로 끝났다. 어떤 경우에는 체포된 사람들이 그다지 멀지도 않고 나쁘지도 않은 곳으로의 단순한 유배로 끝나기도 했다. 레닌그라드에서 체포된 ‘테러리스트’ 사건도 바로 그렇게 처리되었다.

새 노선에 관한 소식은 당내부에서 매우 널리 알려졌다. 의심할 바 없이 그 영향으로, ‘대반대파’ 시절부터 끝까지 비타협적인 태도를 고수했던 주요 반대파 인사들 — 라콥스키, 소스놉스키 등 — 이 비타협을 포기했다. 이는 당내 ‘화해’ 정책의 커다란 성과로 평가되었다. ‘회개한’ 이들에게는 즉시 모스크바에 거주할 허가와 책임 있는 일을 맡을 기회가 주어졌다. 라콥스키는 카가노비치의 개인 면담을 받기까지 했다. 소스놉스키는 정치 풍자 기고가라는 본래의 역할로 돌아갔는데, 다만 《프라우다》가 아니라 (유배 전 그는 그곳 편집인 중 한 명이었다) 《이즈베스티야》로 돌아갔다. 등등.

키로프의 성공을 마무리한 것은 1934년 11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였다. 이 전원회의에는 최근 당 대회의 원칙적 결정을 이행하기 위해 관철시키도록 제안된 구체적 조치들의 프로그램 전체가 승인을 위해 제출되었다. 키로프가 주 보고자이자 그날의 주인공이었다. 그를 모스크바로 이주시키는 문제가 다시 제기되어 긍정적으로 결정되었다. 이 이주는 새해 전, 앞으로 몇 주 안에 이루어져야 한다고 결정되었다. ‘이데올로기’와 관련된 비서국의 모든 부서가 그의 직접적 지도 아래 놓였다. 그는 임시 대리인에게 업무를 인계하기 위해 레닌그라드로 아주 짧은 기간만 다녀올 예정이었다. 그런 만큼 그곳에서 온 그의 사망 전보는 모두를 더욱 충격에 빠뜨렸다...

키로프(Киров) 살해 사건에 관해서는 매우 많은 것을 이야기할 수 있었을 것이다. — 그리고 그 사건은 분명히 언론에서 상세히 조명받을 만하다. 이 불운한 총성으로부터 소련 역사의 새 시기가 시작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런 이야기는 나를 너무 멀리 끌고 갈 것이고, 내 편지는 그 자체로 이미 정도를 넘어 길어졌다. 그래서 나는 당내 관계가 어떻게 전개되었는지를 이해하는 데 중요한 몇몇 대목만 다루겠다.

살해 소식을 모스크바로 가져온 첫 전화통보들만 보아도 그 살해가 정치적 성격을 띠었다는 데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니콜라예프에게서는 그를 살해로 몰아넣은 동기를 서술한, 미리 작성된 선언문이 발견되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직전 몇 달 사이에 형성된 당내 화해의 분위기 속에서는 12월 1일의 총성을 당내 투쟁을 토양으로 자라난 테러 행위로 곧바로 규정하기란 많은 이들에게 심리적으로 불가능했다. 화해 정책의 주된 수호자가 반대파의 총탄에, 그것도 그 정책의 승리가 거의 확실해 보이던 바로 그 순간에 죽었다는 사실을 믿고 싶지 않았다. 이런 분위기에는 그러한 테러 행위가 당내 관계의 전개에 어떤 결과를 가져올지에 대한 두려움도 작용했다. 1934년 12월 초 며칠의 분위기, 곧 많은 이들이 살해를 “한 외국 열강의 음모”(그 나라의 이름을 댈 필요는 없었다)로 설명하려 애썼고 니콜라예프를 그 맹목적 도구로 여겼던 그 분위기가 여기에서 나왔다. 여기서 끌어낸 결론은 이 암살이 소련의 국내 정치 관계에 아무 의미가 없다는 것, 그리고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키로프의 보고들을 통해 방금 윤곽이 잡힌 노선이 당 정책의 지도 노선으로서 전적으로, 아무 변경도 없이 남아 있어야 한다는 주장으로 귀결되었다. 이 설명에 특히 매달린 이들은 언젠가 여러 반대파와 이런저런 관계를 맺었던 모든 사람들이었다. — 따라서 그들은 이제 자신의 운명을 걱정할 만한 이유가 있었다. 언론에서 이런 분위기의 주된 대변자가 된 것은 라데크(Радек)였다. — 만일 그가 “게슈타포의 손길”이라는 이 설명이 모든 과거 반대파들, 그중에서도 그 라데크 자신을 거슬러 돌아가리라고 짐작할 수 있었더라면!

니콜라예프의 총성에 대한 이러한 평가로 처음에 기울었던 것은 반대파들만이 아니었다. 그것은 일반적으로 널리 퍼져 있었다. — 아마 내무인민위원부(NKVD) 지도부도 그것을 받아들일 준비가 되어 있었던 듯하다. 니콜라예프의 총성에 대한 대응으로 총살된 첫 집단들의 명단을 떠올려 보라. 그 명단에는 주로 외국 정보기관과의 연계를 의심받은 인물들이 들어갔다(그 의심이 얼마나 근거 있었는지는 물론 별개의 문제다). — 우리나라에서도 우크라이나의 분리주의 선전은 그때 이미 독일인들의 지시에 따른 활동으로 여겨지고 있었다. 그런데 이 총살들에 관한 지령은 레닌그라드에서 온 전화통보들에서 받은 첫인상 아래 모스크바에서 내려진 것이었다.

이 설명은 공식 설명으로 채택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첫 며칠 동안 아무런 지도적 지령도 내리지 않았다. 일어난 일에 대한 해명을 다른 사람들에게 맡기고, 자신은 수사를 적극적으로 조직하는 데 주의를 집중했다. 정치국에서 그들의 지지가 특히 중요했던 보로실로프, 오르조니키제와 함께 그는 곧바로 레닌그라드로 떠났고, 이곳에서 수사의 방향과 규모를 정해 수사의 기본 어조를 잡았다. 그는 가장 중요한 심문 몇 건에 직접 참석했고, 특히 니콜라예프(Николаев)를 직접 심문했으며,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관리국을 해체하는 조치도 직접 지휘했다. 수사를 직접 지도하는 일은 아그라노프(Агранов)에게 맡겨졌다. 그는 최근 몇 년간 스탈린의 각별한 개인적 신임을 받아 온 사람이다. 스탈린은 다른 누가 어떻든 "야샤"(스탈린이 공식 회의에서조차 아그라노프를 자주 부르는 이 애칭이다)만은 스탈린에게서 받은 임무를 부지런하고 순종적으로 수행하는 역할에서 결코 벗어나지 않을 것이며, 다른 쪽에서 오는 암시에 결코 좌우되지 않으리라고 확신했다. 내무인민위원부의 다른 지도자들에 대해서는 스탈린에게 그런 확신이 없었다.

수사는 처음부터 여러 가지 흥미로운 자료를 내놓았다. 니콜라예프의 행동을 움직인 동기를 이해하는 데는 그의 일기가 특히 중요했다. 이 일기의 발췌문은 니콜라예프 사건에 관한 그 보고서에 실렸는데, 그 보고서에 대해서는 내가 아래에서 다시 말할 것이다. 다만 발췌된 것은 아주 적은 분량이었다. 이 일기에 대해서는 일반적으로 많은 소문이 떠돌았고, 때로는 서로 엇갈리기도 했다. 그러나 니콜라예프에 대한 총체적 평가와 관련해서는 이 소문들이 서로 일치한다. 그의 총탄은 나라에도, 당에도 그토록 치명적인 역할을 했기에 그에 대해 완전히 객관적이기는 대단히 어렵다. 그러나 어느 정도의 공정함을 지키려 애쓴다면, 그가 내전의 강철 이빨에 당 안으로 끌려들어온 우리 청년세대 가운데 한 전형적인 대표자임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 세대는 이후 몇 년 동안 갖가지 돌격 동원과 일반 동원 속에서 온갖 시련과 명성의 유혹을 겪고, 이제는 신경이 닳아 빠지고 건강이 망가지고 영혼마저 완전히 소진된 채 평화적 건설의 모래톱에 내던져졌다.

니콜라예프의 개인적 삶의 경로는 이러하다. 유데니치의 진격 당시, 거의 16세 소년이나 다름없는 나이로 그는 자원하여 전선에 나갔고 내전이 끝날 때까지 그곳에 남았다. 전선에서 그는 청년단원이 되었다. 그의 이력에서 매우 불분명한 대목은 체카—국가정치보안부와의 관계다. 이 기관들의 업무에서 그가 어느 정도 눈에 띄는 역할을 맡은 적은 한 번도 없었지만, 그가 여기에 관여했다는 사실만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다만 이해할 만한 이유로 이 사실은 지금 당내 배포를 목적으로 한 문서에서조차 철저히 묵살되고 있다. 니콜라예프는 당 조직 생활에는 거의 참여하지 않았다. 1920년부터 당에 적을 두고 있기는 했지만, 처음에는 청년단(비보르크구) 소속이었고 그다음에는 일반 당 조직 소속이었다. 1925년의 반대파에는 참여하지 않았는데, 그 시기 회의에서 있었던 얼마간의 표결은 예외로 쳐야 한다. 알려진 대로 당시 레닌그라드 조직의 90%가 지노비예프의 노선을 지지하고 있었다. 어쨌든 이 조직이 제14차 당대회 이후 겪은 전면 심사 때 니콜라예프는 아무런 처벌도 받지 않았고, 다른 도시로 전출되지도 않았다. 그것은 반대파에 조금이라도 연루된 모든 ‘레닌그라드 사람들’이 받은 최소한의 처벌이었다. 29~30년 이후 33년 초까지의 시기는 여러 출장지에서 보냈는데, 주로 당 동원으로 파견된 무르만스크 지방이었고 그곳에서 강제노동 관리 부문의 그다지 중요하지 않은 직위를 맡았다. 돌아온 뒤에는 다시 국가정치보안부 계통에서 일했다. 이번에는 아마도 스몰니 경비과에서였는데, 다시 말하지만 이 부분은 특히 엄중하게 비밀에 부쳐져 있다.

이것이 니콜라예프의 형식적 약력의 이정표들이다. 지난 2년, 즉 무르만스크에서 돌아온 뒤의 전 기간을 담은 그의 일기 기록은 이 외형적 형식들이 어떤 사상적 내용으로 채워졌는지를 말해준다. 여러모로 보아 그의 심경의 출발점은 점점 더 관료화되어 가는 당 기구와 그가 겪은 개인적 충돌이었다. 일기는 이런 종류의 기록과, 혁명 초년의 당 생활을 그토록 즐겁게 만들었던 옛 동지적 관계가 사라져 간 데 대한 불평으로 가득하다. 그는 이 과거에 대한 회상으로 자주 돌아가는데, 그 과거는 그에게 매우 장밋빛으로, 그러나 대단히 단순화되어 — 일종의 독특한 ‘피로 맺어진 형제애’로 그려진다. 지금의 형식주의는 그를 짜증나게 하고 억누른다. 이런 토대 위에서 그는 여러 차례 충돌을 겪었고, 그것은 34년 초 그의 당 제명으로 이어졌다. 이 제명은 곧 취소되었다. 무르만스크에서의 업무 긴장으로 생긴 신경 과로 때문에 그가 병든 상태라는 것, 따라서 그에게 엄격한 요구를 할 수 없다는 것이 확인되었다.

당 안에서 자라나는 관료주의에 대한 이런 불평들이 니콜라예프 비판의 출발점이었다. 그러나 실질적으로 이 불평들은 그 비판의 종착점이기도 했다. 그가 저지른 일의 중대함과, 현실에 대한 그의 비판적 태도의 깊이 없음, 천박함 사이의 불일치는 놀랍다. 당 바깥의 세계가 그에게는 거의 존재하지 않는다는 점은 말할 것도 없다. 그는 당 생활에도 그 총정치노선에 따라 관심을 두지 않고, 거의 전적으로 당내 관계가 전개되는 각도에서만 관심을 둔다. 그러나 이 당내 관계를 그는 점점 더 날카롭게 받아들이면서, 차츰 그것을 당 과거의 영광스러운 전통에 대한 노골적 배신으로, 나아가 혁명 일반에 대한 배신으로 평가하기 시작한다.

동시에 그에게는 어느 정도 희생적인 심정이 자라나고 있었다. 그는 당의 발전에서 나타난 해로운 국면들에 당의 주의를 환기하려면 누군가 자신을 희생해야 하며, 그것은 지금 당과 국가의 권력을 장악한 그 “찬탈자” 집단에서 가장 큰 인물 가운데 하나에 대한 테러 행위를 통해서만 가능하다는 생각을 점점 더 자주 내비쳤다. 테러 문제에서 니콜라예프에게 큰 영향을 준 것은 이전 시기 러시아 혁명가들의 회고록 문학을 읽은 일이었다. 일기에서 보이듯 그는 이 분야에서 많이 읽었다. 테러리스트들, 즉 나로드나야 볼랴 당원과 사회주의혁명당원의 회고록 문학은 구할 수 있는 것은 모두 읽었다. 그리고 자신의 행위를 이전 시기 러시아 혁명가들의 테러 활동을 직접 이은 것으로 여겼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스탈린과 대화하던 중 그가 왜 이런 일을 했는지, 이제 그는 죽은 목숨이 아니냐는 스탈린의 물음에 니콜라예프는 이렇게 대답했다. “뭐, 지금도 많은 사람이 죽는다. 대신 앞으로 내 이름은 젤랴보프와 발마셰프(Балмашёв)의 이름과 나란히 언급될 것이다!”

자신의 행위와 이전 시대 러시아 혁명가들의 테러 행위 사이에 직접적인 선을 그으려는 이런 바람은 니콜라예프 사건의 다른 몇몇 세부 사항에서도 드러난다.

니콜라예프 자신의 행동 동기가 이렇게 밝혀지자, 수사의 관심은 두 가지 기본 주제에 집중되었다. 한쪽은 “공범자”와 “교사자”를 찾는 일이었고, 다른 한쪽은 암살을 미리 막지 못한 내무인민위원부 레닌그라드 지부 지도부의 유죄 정도를 밝히는 일이었다.

첫 번째 질문에 대한 답은 사실상 아주 간단했다. 니콜라예프는 자신의 선언에서 자신의 행위가 순전히 개인적인 행위이며 공범자가 아무도 없다는 점을 강조했다. 일기 기록들은 이 진술을 완전히 뒷받침했다. 그 가운데에는 니콜라예프가 구성원으로 있었거나 그 지시를 받아 행동했을 어떤 비밀 조직의 존재를 간접적으로라도 뒷받침하는 기록이 하나도 없었다. 어쨌든 내가 이미 언급한 그 보고서에는 그런 인용문이 하나도 실려 있지 않다. 그리고 만약 일기에 그런 기록이 있었다면 수사관들이 그것을 그 보고서에 넣지 않았을 리 없다는 점에는 의심의 여지가 없다. 일기의 전반적인 성격은, 만약 그런 조직이 존재했다면 니콜라예프가 자신이 속한 비밀 조직과 관련된 모든 일을 일기에서 체계적으로 숨겼을 것이라는 추측 자체를 완전히 배제한다. 그는 자신의 결론을 간접적으로라도 뒷받침해 준 모든 대화를 일기에 상세하게, 그리고 지극히 부주의하게 적어 두었다.

그러나 우리는 '공모자'와 '선동자'라면 오직 해당 구체적 행위에 직간접으로 가담하거나 선동한 자만을 가리키던 시절에서 이미 오래전에 벗어났다. 우리의 해석에 따르면, 특정한 행위가 싹트는 토양이 되는 정서를 지지하고 강화하는 사람은 누구나 공모자이며 선동자다. 그런 공모자와 선동자를 찾는 일은 어렵지 않았다. 니콜라예프의 일기에서 레닌그라드에는 조직 내부와 그 주변에 불만 세력이 적지 않게 존재했음이 드러났는데, 그들은 당과 국가에 자리 잡은 질서에 대한 자신의 비판적 태도를 숨기지 않았다. 이들은 주로 전직 반대파 인물들로서, 그 직전까지만 해도 온갖 탄압을 받고 감옥과 유배를 겪었으며 가장 최근에야 레닌그라드로 돌아온 사람들이었다. 이전에 당과 소비에트 계통에서 어느 정도 중요한 요직을 맡았고 정치 생활에서 두드러진 역할을 해 온 이들은 이제 자신의 초라한 처지에 좀처럼 적응하지 못했으며, 언제나 새 질서에 대해 투덜대고 그것을 '좋았던 옛 시절'과 비교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에게 어떤 비밀 조직이 있던 것은 아니었지만, 그중 많은 이들이 서로 사적인 친분 관계를 유지하고 있었고 그 관계의 시작은 아주 먼 시절로 거슬러 올라갔다. 만날 때면 당내 사정과, 여전히 감옥과 유배지를 떠돌고 있는 동지들의 운명에 관한 정보를 주고받았고, 때로는 그들을 위한 모금을 벌이기도 했으며, 가장 증오하는 상대들의 험담을 늘어놓았다. 그들의 정치 활동은 이것이 전부였다. 바깥세상과 관련된 활동은 거의 하려 들지 않았다. 다만 이따금 그중 누군가가 어느 학회에서 보고를 하거나, 이스트파르트(Истпарт)의 저녁 모임 중 한 자리에서 역사적 회고를 늘어놓는 정도였다...

그러한 '이념적으로 무장 해제되지 않은 반대파'의 온상이 존재한다는 사실은 그다지 큰 비밀이 아니었다. 지방 내무인민위원부 지부도 그들에 대해 알고 있었고, 옛 시절 차르 경찰이, 다소 따로 떨어져 '이방인'처럼 살면서 주위 사회와 어울리지 않던 이전 유배자들의 거류지를 봐주었던 것처럼, 그들을 봐주었다. 이제 아그라노프는 이 환경을 가능한 한 꼼꼼히 '조사'하라는 임무를 받고, 특유의 '재능'을 동원해 바로 이 환경을 파고들었다.

아그라노프 작업에서 훨씬 더 다루기 까다로운 것은 두 번째 부분이었다.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지부의 문서를 감사한 결과, 그 지부 지도부는 니콜라예프의 심경은 물론 그가 테러에 동조한다는 점까지도 충분히 잘 알고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자제력이 없고 신경질적인 인물인 그는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들이 있는 자리에서도 민감한 주제를 두고 솔직하게 말하곤 했다. 그런데 우리는 첩보 체계가 워낙 잘 갖추어져 있어서, 가까운 친구 서너 명과 나눈 반대파 발언도 “이를 알아야 할 자들”의 귀에 들어갈 가능성이 충분하다. 니콜라예프에 관해서는 알고 보니 실로 많은 것이 그들의 귀에 들어가고 있었다. 이런 상황에서 그를 어떻게 키로프와 직접 가까이 접촉하도록 내버려둘 수 있었는지 전혀 이해할 수 없게 되었다. 하물며 “지도자들”의 경호를 그토록 철저히 하는 우리로서는! 그래서 문제를 다른 측면에서 밝히는 일이 절대적으로 필요했다. 니콜라예프 자신을 움직인 동기가 무엇인지는 그의 문서에서 분명했다. 훨씬 더 중요한 것은, 이번 사안에서 암살을 미리 막아야 할 의무를 진 자들 쪽에 직접적인 묵인이 있었는지 밝히는 일이었을 것이다. 모스크바로 옮겨 가기 직전에 키로프를 제거하는 데 누가 이해관계가 있었는가? 그런 자들에게서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지부의 이러저러한 지도부로 이어지는 실마리가 뻗어 있는 것은 아닐까? 그 방향으로 수사가 진행되었다면 적지 않게 흥미로운 자료가 나왔으리라고 생각된다. 이 주제를 둔 대화를 나는 들은 적이 없다. 지금 우리는 아예 말하기를 그만두었다. 특히 그런 위험한 주제에 관해서는. 그러나 그런 추측이 많은 사람의 머리에 떠오른다는 것을 보여 주는 암시는 지금도 듣게 된다. 그리고 1934년 12월에는 스톨리핀 살해 사건에 대한 관심이 어느새 갑자기 커졌는데, 그 사건은 키로프 살해 사건과 공통점이 매우 많다.

이 모든 문제는 수사에서 제기되지 않았다. 어쨌든 수사의 주된 관심은 전혀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공모자들”에 대한 수사가 처음부터 레닌그라드 반대파 서클에 대한 수사로 바뀌었다면,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지부 지도자들에 대한 수사는 그들이 왜 반대파를 “묵인”하여 그들에게 레닌그라드 거주, 언론 협력, 각종 회의에서의 발언 등의 권리를 쉽사리 허용했는가를 캐는 수사로 빠르게 바뀌었다. 피고인들은 자신을 변호하기 위해 키로프의 구두 및 서면 지시를 내세웠다. 키로프는 자신의 일반 정치적 견해에 따라 전직 반대파에게 온갖 특혜를 주라고 주장했으며, 내무인민위원부에 그들을 지나친 트집으로 자극하지 말라고 명령했다.

이런 언급은 사실과 완전히 들어맞았다. 말하자면 최근 몇 년 동안 키로프는 레닌그라드를 독자적인 문학·과학 중심지로 만들어, 문학과 과학 출판 분야에서 모스크바와 경쟁할 수 있게 하려는 옛 지노비예프 전통을 되살리려 애쓰고 있었다. 이를 위해 그는 레닌그라드의 출판 활동이 발전하도록 온갖 방식으로 도왔고, 잡지가 존속할 수 있는 유리한 조건을 물질적 측면에서든 검열 측면에서든 만들어 주었으며, 학술 단체의 활동을 후원했다. 이런 종류의 일에 옛 반대파 인사들을 끌어들이는 것을 키로프는 온갖 방식으로 장려했는데, 마치 옛날 자유주의 성향의 총독들이 유배자들을 시베리아 변방의 과학적 조사 작업에 끌어들이는 것을 장려했던 것과 같았다. “이방인들”과의 유비는 이 점에서도 정확했다! 키로프는 자신의 “자유주의” 속에서 1934년 가을에는 랴자노프[1]처럼 “회개하지 않은” 죄인까지 레닌그라드에 정착하도록 허가하는 데까지 이르렀다. 그런 상황에서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지부의 지도부가 무엇을 할 수 있었겠는가. 그들은 자기들의 직접적인 정치 지도자, 곧 레닌그라드에 대해 당과 소비에트의 모든 권한을 위임받은, 정치국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위원 가운데 한 사람에게서 명령을 받고 있었다.

12월 중순이 되자 수사는 상당히 진척되어 정치국에 그에 관한 종합 보고서가 제출되었다. 이 보고서에 대한 논의는 니콜라예프의 총격에서 어떤 정치적 결론을 끌어내야 하는가라는 문제에 대한 논의와 함께 진행되었다.

이해하겠지만, 나는 줄곧 스탈린 자신이 논쟁에서 취한 입장에 관심을 두고 있었다.

1933년 가을부터 당 상층부에서 벌어진 투쟁은 우리 지도부 내부의 이전 모든 갈등과 본질적으로 달랐다. 이전의 모든 반대파가 스탈린에 반대하는 반대파, 그를 당의 최고 지도자 자리에서 밀어내기 위한 반대파였던 데 반해, 이제는 그런 축출에 대한 암시조차 없었다. 분파 형성은 스탈린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의 노선을 따라 이루어지지 않았다. 예외 없이 모두가 그에 대한 완전한 충성을 강조하기를 멈추지 않았다. 그것은 스탈린에게 미치는 영향력, 이른바 그의 영혼을 둘러싼 투쟁이었다. 결정적인 순간에 그가 어느 편에 설 것인가라는 문제는 열려 있었고, 앞으로 당분간의 당 정책이 이 스탈린의 결정에 달려 있음을 깨닫고 있었기에 모두가 그를 자기편으로 끌어들이려 애썼다. 키로프가 살해되기 전까지 스탈린은 매우 신중하게 처신했다. 때로는 새 노선 주창자들에게 동조하며 지지했고, 때로는 그들을 억눌렀다. 새 노선의 지지자들과 자신을 묶지 않으면서도, 동시에 그 노선의 확고한 반대자로 나서지도 않았다. 그는 매일 보고를 받는 일을 줄여 최소한으로 제한했고, 자주 사무실에 틀어박혀 파이프를 물고 몇 시간씩 이 구석 저 구석을 걸어 다녔다. 그런 날이면 그의 비서실에서는 모두가 서로에게 조용히 하라고 “쉿” 했다. 스탈린이 새 노선을 구상하며 생각하고 있었고, 그가 생각할 때에는 절대적인 정적을 지켜야 했다.

그에게 큰 영향을 준 사람은 고리키였다. 이 무렵은 고리키의 영향력이 정점에 이른 시기였다. 소비에트 정권과 무당파 지식인을 화해시켜야 한다는 생각을 열렬히 옹호하던 그는 당내부에 화해 정책이 필요하다는 키로프의 생각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였다. 그러한 화해가 당의 대열을 결속하고 강화하면, 당이 소비에트 지식인의 폭넓은 계층에 도덕적 영향을 미칠 가능성이 그만큼 커지기 때문이었다. 주위 모든 사람을 향한 순전히 동양적인 의심이라는, 스탈린 성격의 기본 특징을 잘 파악하고 있던 고리키는 특히 스탈린에게 이런 확신을 심어 주려 애썼다. 그를 대하는 태도는 이제 여러 반대파와 격렬한 싸움을 벌이던 때와 전혀 달라졌다는 확신, 이제는 모두가 스탈린의 기본 노선이 천재적임을 인정하므로 그의 지도적 지위를 넘보는 사람은 아무도 없다는 확신이다. 그리고 이런 상황에서 어제의 반대자들에게 베푸는 관대함은 그의 지위를 조금도 훼손하지 않으면서 그의 도덕적 권위만 높여 줄 뿐이다.

나는 스탈린을 충분히 잘 알지 못하므로, 그의 행동이 그저 연기였는지, 아니면 그때 정말로 고리키의 권고를 믿어 볼까 망설였는지 판단하지 않겠다. 어쨌든 고리키에게는 스탈린이 언제나 쉽게 넘어가는 논거가 하나 있었다. 자신의 이런저런 행보를 장래 전기 작가들이 어떻게 볼 것인가라는 생각이다. 스탈린은 오래전부터 자기 전기를 만들어 왔을 뿐만 아니라, 그것이 훗날 자기에게 유리한 어조로 쓰이도록 신경 써 왔다. 그는 타협할 수 없는 적과의 투쟁이 문제될 때에는 준엄하고 무자비한 인물로 그려지기만을 바라지 않는다. 우리의 가혹한 시대 상황상 그가 자기 영혼 깊은 곳에 있는 그대로의 모습으로 있을 사치를 누릴 권리가 있는 자리에서는, 소박하고 관대하고 인간적인 인물로도 그려지기를 바란다. 천성적으로 무척 원시적인 사람인 그는 때로 이런 기분을 그에 못지않게 원시적인 방식으로 풀어 놓기를 꺼리지 않았다. 그가 일종의 하룬 알라시드(Гарун-аль-Рашид) 노릇을 하려 드는 것도 그래서다. 다행히 그도 동방 사람이었고 천성도 꽤 원시적이었다. 어쨌든 고리키는 이 심금을 능란하게 울리며 그것을 좋은 목적에 이용하려 했다. 스탈린의 의심을 누그러뜨리고 복수심을 가라앉히는 따위의 일에 말이다. 물론 스탈린에게는 다른 동기가 결정적이었을 수도 있다. 주위 사람들이 모두 지난 10년의 긴장으로 그토록 지쳐 있었으므로, 이런 분위기에 맞서면 충돌이 벌어질 수도 있었기 때문이다... 여하튼 1934년에 스탈린이 어느새 누그러지고 마음이 부드러워졌으며 일상에서 한결 온화해져 작가·배우·화가들을 만나고, 그들의 이야기에 귀를 기울이고, 속마음을 털어놓게 만들기를 좋아했다는 점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이 변화는 스탈린이 이전 반대파 인사들을 대하는 태도에도 드러났다. 이 영역에서 가장 특징적인 것은 부하린의 정치 활동 복귀였다. 그는 여러 해 동안 불명예를 겪은 끝에 《이즈베스티야》 편집장 자리를 받았다. 카메네프에 대한 태도 변화는 그보다 더욱 뚜렷한 표시였다. 카메네프는 아마 세 번 당에서 제명되었고 세 번 참회했다. 마지막으로 그는 32~33년 겨울에 류틴의 강령, 곧 스탈린이 특히 적대적으로 대했던 문서를 “읽고도 신고하지 않은” 혐의로 적발되어 잘못을 저질렀다. 이번에는 카메네프가 심각하게, 그리고 오래도록 불명예에 빠진 듯 보였다. 그러나 카메네프를 매우 아꼈던 고리키는 이번에도 스탈린을 누그러뜨리는 데 성공했다. 고리키는 스탈린과 카메네프의 만남을 주선했는데, 당시 사람들이 이야기하듯 그 자리에서는 카메네프 쪽에서 일종의 사랑 고백 같은 것이 있었다.

단둘이서 이루어진 이 고백의 세부 내용은 물론 아무도 모른다. 그러나 당 안에서는 당시 그 결과를 두고 찬성하는 뜻을 표했다. 스탈린은 스스로 거의 공개적으로 밝힌 바대로 “카메네프를 믿게 되었다”. 카메네프는 자기의 모든 반대파 활동을 솔직하게 이야기하고, 전에는 왜 스탈린에 반대했으며 지금은 왜 완전히 스탈린의 반대자가 아니게 되었는지 설명했다고 한다. 당시에는 또 카메네프가 스탈린에게 더 이상 어떤 반대파 활동도 하지 않겠다고 “명예를 건 약속”을 했으며, 그 대가로 출판사 《아카데미야》를 지도하는 광범한 권한을 받았을 뿐 아니라 가까운 장래에 다시 지도적 정치 사업에 참여하게 해 주겠다는 약속도 받았다고 전해졌다.

이른바 선급금으로 그는 제17차 당대회에서 발언할 허가를 받았고, 그 발언은 요란한 성공을 거두었다. 거기서 카메네프는 독재의 필요성을 “이론적으로 정당화”했는데, 그것은 당의 독재도 계급의 독재도 아닌 일인 독재였다. 그는 민주주의는 계급 내부에서든 당내부에서든 평화적 건설 시기, 곧 합의하고 서로 설득할 시간이 있는 시기에나 적합하다고 주장했다. 위기 시기에는 다르다. 그때는 당과 나라에 지도자가 있어야 하는데, 곧 홀로 결단의 용기를 떠맡는 사람이다. 그는 이런 시기에 직관을 타고난 지도자를 가진 당과 나라는 행운이라고 말했다. 그들은 가장 어려운 처지에서도 승자로 빠져나갈 기회를 가진다. 그런 역할에 맞지 않는 사람이 지도적 자리에 있게 되면 그것이 그들의 불행이다. 그때는 그들에게 파멸이 닥친다…… 연설 전체는 듣는 이들에게 연설자가 스탈린을 첫 번째 유형의 지도자로 여기고 있다는 의심을 남기지 않도록 구성되고 행해졌으며, 대회는 연설자에게 열광적인 박수를 보냈고 그것은 스탈린을 향한 열광으로 옮겨 갔다…… 그리고 아주 오랜 뒤에야 사람들은 그 연설이 상당히 마키아벨리적으로 구성되어 있어, 주의 깊게 읽으면 정반대의 인상마저 줄 수 있다는 것을 헤아려냈다. 비신스키가 마지막 재판에서 카메네프를 위선적인 마키아벨리의 추종자라고 위협한 것은 바로 이 연설을 겨냥한 것이었다……

스탈린에 관해서라면, 그가 한때 당 노선을 전면적으로 바꾸려는 계획과 당내 화해 정책에 동조했으리라고 생각할 수 있다. 그러나 그의 최측근, 그의 실무 참모진은 그것에 전적으로 반대했다. 이 참모진의 인물들이 당의 일반 노선에 변화를 주는 것에 원칙적인 반대자였기 때문은 아니었다. 그 변화는 키로프와 그의 친구들의 계획에 구성 요소로 들어가 있던 것이었다. 큰 정치적 문제에 이 참모진은 대체로 무관심했다. 여기서 그들은 이후의 사태가 보여 주었듯, 키로프가 추진하려 했던 것보다 더 급격한 전환도 감수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그들이 온갖 결의를 다해 반대한 것은 당내 노선의 변화였다. 그들은 알고 있었다. 스탈린에게는 많은 이들이 그에게서 발견되는 큰 무엇인가를 이유로 그의 성격의 부정적인 측면들을 용서할 준비가 되어 있었지만, 바로 그 부정적인 성격 특성들에 기대를 걸고 있는 그의 부하들에게는 당내 체제가 바뀔 경우 용서가 없으리라는 것을. 결국 싸움은 스탈린을 지지하느냐 반대하느냐를 둘러싼 것이 아니라 그에게 영향력을 행사하는 문제를 둘러싼 것이었다. 조직국의 언어로 옮기면, 중앙위원회의 실무 기구를 새로운 사람들, 즉 여기에 새로운 습관과 사람을 대하는 새로운 태도를 가져올 준비가 된 사람들로 교체하는 문제였다. 그리고 이 오래된 참모진이 온 힘을 다해 변화에 저항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이 저항의 선두에는 카가노비치와 예조프가 있었다. 앞의 인물은 의심할 바 없이 매우 비범한 사람이다. 큰 학식은 없지만 대화 상대의 생각을 즉석에서 붙잡아 소화해 내는 능력을 지녔고, 그는 자신의 일할 능력, 기억의 정확성, 조직적 재능으로 두드러진다. 의장에게 토론을 정해진 궤도에 올리고 오로지 용건에 대해서만 발언하게 하며, 게다가 그 대화들을 내용 면에서 이끌어 갈 능력이 요구될 때, 그보다 온갖 회의와 위원회를 더 잘 이끄는 사람은 없다. 그리고 그렇게 재능 있는 머리가 도덕적 됨됨이에 관해 평가가 엇갈릴 여지가 거의 없는 인간에게 속해 있다는 것은 안타까울 따름이다. 당내에서 그는 신뢰할 수 없는 사람으로 알려져 있다. 그의 말에 의지할 수는 없다. 그는 약속을 하는 것만큼이나 쉽게 나중에 그 약속을 저버린다... 어쩌면 이 점에는 외부 조건이 책임이 있을지도 모른다. 그는 배신에 대한 수요가 컸던 시기에 자신의 큰 당 경력을 쌓기 시작했다... 그러나 다른 한편, 그 수요의 성장에 가장 크게 기여한 사람들 가운데 하나가 바로 그가 아니었던가?

그의 충실한 조력자는 예조프였다. 카가노비치의 경우라면 정직한 수단으로도 자기 출세를 할 수 있었는데 무엇 때문에 이 길을 택했는지 때때로 의아해지지만, 예조프에 관해서는 그런 의아함이 생겨날 수 없다. 이 사람은 오직 그런 방법으로만 출세할 수 있었던 자다. 이제는 아쉽게도 이미 길어진 내 일생을 통틀어, 천성적으로 예조프만큼이나 반감을 불러일으키는 사람을 만난 일은 거의 없었다. 그를 지켜보고 있으면 라스테랴예바 거리 장인 집안의 사나운 아이들이 자주 떠오른다. 그들이 가장 좋아하는 장난은 등유를 부은 고양이 꼬리에 묶은 종이쪽에 불을 붙이고는, 점점 가까이 다가오는 불길에서 벗어나려야 벗어날 수 없어 미친 공포에 거리를 내달리는 고양이를 넋 놓고 바라보는 것이었다... 나는 그가 어린 시절에 실제로 그런 장난을 즐겼으리라고 조금도 의심하지 않는다. 다른 형태로, 다른 활동 무대에서 그는 지금도 그것을 계속하고 있다. 그가 이전의 거물급 당 활동가였던 반대파 인물 하나하나를 어떻게 괴롭히는지 지켜볼 필요가 있다. 그를 실컷 희롱하도록 허락되었을 경우에는 말이다. 젊은 시절에 그는 분명 적잖이 남에게 부림을 당했다. 그의 당 경력도 아마 순탄치 않았을 것이다. 그는 틀림없이 멸시당하고 미움을 받았으며, 이전에 당에서 두드러진 직위를 차지했던 모든 이들 — 말을 잘하는 지식인들(자신은 연설가가 아니다), 사람들이 그 책을 탐독하는 작가들(자신은 밀고서 말고는 아무것도 쓴 적이 없다), 자기 공적을 자랑스러워하는 옛 혁명가들(자신은 지하 활동을 한 적이 없다) — 에 대한 무한한 원한을 쌓아 두었다... 옛 볼셰비키에 대한 박해가 "젊어진" 볼셰비키 당의 공식 구호가 된 시대에, 그보다 더 나은 인물을 지어내기도 어려웠을 것이다. 그가 천성적으로 아낌없이 부여받은, 의심할 바 없는 유일한 재능은 막후 음모의 재능이다. 그리고 그는 그 재능을 발휘할 기회를 놓치지 않는다. 조직국과 중앙통제위원회 기구에서 보낸 거의 꼬박 10년은 그에게 당 기구의 현역 활동가들의 인격적 자질을 드물게 잘 아는 식견을 안겨 주었다. 조금이라도 독립적이고 자기 신념과 호감에 확고한 사람들을 그는 천성적으로 증오하며 조직적으로 지도적 직위에서 밀어내고, 그 자리에는 위에서 내려오는 어떤 명령이든 이의 없이 수행할 사람들을 앉힌다. 물론 그가 이런 노선을 취할 수 있는 것은 오직 그것이 위로부터 축복받았기 때문일 뿐이지만, 그것을 현실에 관철하는 방식에는 예조프가 자기 개성을 적잖이 불어넣었다... 그 결과 이 10년 동안 그는 자신의 믿을 만한 친구들로 이루어진 하나의 온전한 그물망을 엮어 냈다. 그에게 그런 사람들은 당 기구의 모든 부문에, 소비에트 통치의 모든 기관에 어디에나 있다. 내무인민위원부와 군대도 예외가 아니다. 이 사람들은 그가 내무인민위원부의 수장에 임명되어 그 지도부 구성을 대폭 "젊어지게" 한 지금, 그에게 특히 요긴하게 쓰였다. 그런데 말이 나온 김에: 예조프는 옛 국가정치보안부의 모든 지도급 간부 가운데 "야샤" 아그라노프 한 사람만을 그 직책에 남겨 두었다... 그들은 오래되고 충실한 친구다!

이 두 사람의 공동 체제, 즉 카가노비치와 예조프는 처음부터 당내부의 화해 정책에 반대하는 입장을 밝혔다. 키로프가 살아 있는 동안에는 그들의 발언이 그다지 단호하지 않았다. 그들은 스탈린을 그 정책에 반대하도록 부추기고, 한 번이라도 적으로 여긴 사람이면 누구에게나 지니고 있던 그의 타고난 불신을 자극하는 것으로 만족했으며, 키로프를 모스크바로 옮기는 일은 온 힘으로 방해했다. 그들은 그 전출이 자기들이 그토록 공들여 골라 놓은 당 기구의 인적 구성에 변화를 일으키는 문제를 안건에 올릴 것임을 잘 알고 있었다. 11월 전원회의에서 이 방해 공작은 마침내 꺾였지만, 키로프의 전출은 그래도 실현될 수 없었다... 그리고 이제, 오직 이 공동 체제에만 이로웠던 키로프의 죽음 뒤에, 그들은 공개적으로 나섰다.

아그라노프의 보고서는 전적으로 그들의 뜻에 맞게 작성되었다. 전직 반대파 출신의 무해한 레닌그라드 불만 분자들은 체계적인 테러 계획을 품고 있던 음모자들로 그려졌다. 그들의 중심으로 그려진 것은 지노비예프 시절 비보르크구 공산주의청년동맹(콤소몰) 전 지도자들의 무리였다. 루먄체프, 코톨리노프(Котолынов), 샤츠키(Шатский) 등이 그 우두머리였다. 34년 가을부터 이들은 실제로 거의 정기적으로 만났다. 사정은 이러했다. 레닌그라드 이스트파르트가 레닌그라드의 콤소몰 운동사 편찬 문제를 안건에 올리고, 각 구에 이스트파르트 위원회 산하로 전직 콤소몰 활동가들의 회고의 밤을 정기적으로 열도록 조직했던 것이다. 이 회고의 밤에는 지노비예프 시절 콤소몰의 전직 활동가들을 거의 강제로 끌어왔다. 심지어 (예를 들어 샤츠키처럼) 정치에서 완전히 손을 떼 버린 사람들까지 말이다. 비보르크구에서는 콤소몰 회고의 밤이 가장 활발하게 열렸다. 특히 흥미로웠던 것은 루먄체프의 이야기였다. 바로 그 루먄체프로서, 1926년 초 레닌그라드 주 콤소몰 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중앙위원회 공식 대표들이 제출한 수정안, 즉 주 위원회가 제14차 당대회 결정을 옳다고 인정한다는 수정안을 부결시킨 사람이었다. 알려진 대로 그 대회는 지노비예프 지지자들을 단호히 규탄했다. 그때 루먄체프의 이런 행동은 한때 스크보르초프-스테파노프가 편집하던 《레닌그라드스카야 프라우다》의 거센 공격을 받았다. 지금의 회고에서 루먄체프는 지노비예프 반대파 시절에도 언급했는데, 인정하건대 그 이야기는 공식적 정견의 정신에 온전히 들어맞지는 않았다. 이 회고를 둘러싸고 적지 않은 이야기가 오갔고, 아그라노프는 그것을 자기 구상의 출발점으로 삼아 이스트파르트 모임을 반대파의 회합으로 둔갑시켰다. 마침 그 모임에는 니콜라예프도 다니고 있었기 때문이다.

이런 밑그림 위에 무엇을 수놓을 수 있는지, 아그라노프의 산출물에 관심을 두었던 사람이면 누구나 안다. 이번만큼은 그는 자기 자신을 능가했다. 레닌그라드로 만족하지 않고 실을 모스크바로,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에게까지 뻗쳤다. 이 두 사람은 자기 옛 지지자들이 레닌그라드에서 모스크바로 넘어올 때마다 그들과 만나는 무모한 짓을 했다. 그리하여 옛 반대파 지도자들이, 최고층에서 화해 문제를 놓고 논쟁이 벌어지던 바로 그 순간에 꾸민, 갈래갈래 뻗은 음모의 그림이 나왔다.

특히 스탈린을 겨냥해, 보고서는 증언들에 각별히 힘을 실었다. 그 증언들은 카메네프가 자신이 명예를 걸고 한 약속을 지키지 않았다는 것을 입증했다. 스탈린이 "믿어 주었던" 그 카메네프는 반대파적 정서를 알면서도 중앙통제위원회에 알리지 않았을 뿐 아니라, 친구들과의 대화에서 조심스럽기는 하지만 완전히 충성스럽다고는 할 수 없는 발언을 하는 즐거움도 스스로 누렸다.

이 보고서에 대한 정치국 논의는 매우 긴장된 분위기 속에서 이루어졌다. 의제에는 두 가지 문제가 올라 있었다. 첫째는 수사에서 드러난 '공모자'와 '선동자'를 어떻게 처리할 것인가였고, 둘째는 반대파의 음모가 드러난 사실에서 어떤 정치적 결론을 끌어낼 것인가였다. 뒤의 문제가 앞의 문제를 밀어냈다. 다수의 분위기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잡은 노선을 바꾸는 데 반대했다. 그 노선은 경제 분야의 여러 개혁과 정치 분야의 새 헌법 도입을 예정하고 있었다. 이 문제에서 그들은 이긴 듯이 보였다. 스탈린은 이 모든 조치가 반드시 집행되어야 한다고, 자신 역시 그 조치들의 확고한 지지자라고, 키로프가 잡은 계획은 오직 한 가지 점에서만 수정되어야 한다고 단호히 선언했다. 즉 반대파가 완전한 '무장 해제'를 할 기미가 없다는 것이 밝혀진 이상, 당은 자기 방어를 위해 이전 반대파들의 대열을 다시 힘 있게 점검해야 하며, 무엇보다도 '트로츠키주의자', '지노비예프파', '카메네프파'를 점검해야 한다는 것이었다. 약간의 망설임 끝에 이 노선이 채택되었다. 첫 번째 문제로 말하자면, 여기서는 이 사건을 여느 테러 사건과 마찬가지로 소비에트 법원의 손에 넘기고, 수사기관이 필요하다고 여기는 사람은 누구든 사건에 끌어들이도록 수사기관에 맡기기로 결정했다. 이것은 반대파 지도자들을 재판과 처단에 넘겨주는 일이었다.

이 결정이 채택되자 당 기구가 가동되었다. 반대파에 대한 공세는 모스크바 위원회와 레닌그라드 위원회의 전체회의로 시작되었다. 같은 날 열린 두 회의는 정치국에서 나온 보고자들을 두는 등 특별히 성대하게 치러졌다. 그 위원회들의 위원들에게는 니콜라예프 사건에 관한 부피가 큰 보고서가 배포되었는데, 그것은 앞서 내가 이미 언급한 바로 그 보고서였다. 니콜라예프의 일기에서 인용한 구절, 진술에서 뽑아낸 대목, 그 밖의 문서들이 실려 있었다. 이 보고서는 극히 제한된 수량만 인쇄되었고, 위원회 위원들이 개인 서명을 하고 받아 갔으며, 필요가 끝나면 해당 위원회 비서처에 역시 서명을 하고 반납해야 했다. 이런 종류의 문서가 부적절한 손으로 새어 나가는 것을 막기 위해, 문서는 개인 손에 남지 않고 위원회 비서처에 반납되며, 그곳 특별 비밀 캐비닛에 보관되었다... 그러나 이 비밀 보고서에서조차 니콜라예프가 '체포'될 때 그에게서 발견된 선언문은 전문이 실리지 않았다. 그 전문을 아는 것은 분명 이 좁은 범위의 사람들에게조차 허용되지 않는 듯했다. 이 전원회의들은 물론 아무런 토론 없이 진행되었다. 미리 준비된 결의안이 만장일치로 채택되었고, 바로 다음 날 모든 사냥개들이 목줄에서 풀려났다. 언론에서도 회의에서도 '모든 반대파', 특히 이전의 '트로츠키주의자'와 '지노비예프파'에 대한 광적인 박해가 시작되었다. 이렇게 해서 탄압을 수행하는 데 필요한 '여론'이 만들어졌다.

첫 번째 재판은 사람들 사이에서 그다지 화제를 불러일으키지 못했다. 피고인들은 이미 운명이 정해진 몸이었다. 그들을 두둔하려 나서는 사람은 아무도 없었다. 법정에는 아무도 들어갈 수 없었고, 친척조차 허락되지 않았다. 그나마 친척들을 자유의 몸으로 찾아내기는 어려웠다. 적어도 레닌그라드에서는 그랬다. 레닌그라드에서는 피고인과 어떤 개인적 관계를 맺고 있던 사람이면 나이와 성별, 당적을 가리지 않고 모두 “공모” 혐의자로 체포되었다. 방청할 수 있었던 이는 직무상 방청해야 할 처지에 있는 사람들뿐이었다. 이 재판에 관한 이야기가 이렇게 적은 것도 그 때문이다. 어쨌든 한 가지는 분명하다. 이 재판은 결코 순탄하게 진행되지 않았다. 거의 모든 피고인이 자신들에게 씌워진 죄명에 이의를 제기했고, 자신들에게 돌려진 진술을 부인했으며, 수사 과정에서 자신들이 받은 압력에 대해 말했다. 그들 가운데 “음모 조직”의 중앙부가 존재한다고 인정한 사람은 하나도 없었다. 물론 이런 항의는 모두 헛된 것이었다.

레닌그라드 내무인민위원부 지부 지도부에 대한 재판은 그보다도 더 비밀스럽게 치러졌지만, 분위기는 전혀 달랐다. 죄명은 비교적 가볍게 제시되었고, 피고인들은 자기 잘못을 인정하면서도 키로프에게서 내려온 지령을 내세워 자신을 변호했다. “수령들”의 신변 경호 문제라면 단순한 부주의에도 우리가 얼마나 엄하게 책임을 묻는지 아는 사람치고 이 판결의 관대함에 놀라지 않은 이가 없었다. 스몰니 경비를 주로 지휘하던 발체비치(Бальцевич)조차 자기 직무에 대한 “범죄적 태만” 혐의만 인정되어 강제수용소 10년형을 받았다. 레닌그라드 지부장과 그 부지부장들은 고작 2~3년형으로 그쳤는데, 게다가 그들은 곧바로 강제수용소 관리의 여러 직책에 책임 있는 자리로 임명되었다. 실제로 그들에게 그 판결은 직급 강등에 지나지 않았던 셈이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재판은 성격이 전혀 달랐다. 처음부터 “시범 재판”으로 기획된 것이었다. “완전한 공개” 아래 진행되어 레닌그라드 주민의 눈앞에서 “레닌그라드” 반대파 지도자들을 완전히 “실추시키는” 것을 과제로 삼았다. 피고인들은 마지막 순간에 모스크바와 다른 도시들에서 압송되었다. 최근 몇 년간 그들 모두 레닌그라드 밖에서 살았던 듯하다. 구성상 이 재판은 지노비예프 시절 레닌그라드 위원회에 대한 재판이었다. 물론 그때에도 충실한 스탈린주의자였던 소수는 빠졌다. 그들에게는 “당이 그들에게 요구하는” 도움이 있다고 통고되었다. 그들이 한때 벌여 놓은 파벌 투쟁의 극단에서 자라난 테러 기운과 싸우는 데 도움을 주라는 것이었다. 그리고 그 도움은 정치적으로 자신을 제물로 바치는 형태로 주어져야 한다는 것이었다. 이 테러 기운에 책임을 지고 그것을 단호히 규탄하는 반대파 지도자들이 법정에서 참회하는 발언을 하는 것만이 그들의 옛 추종자들을 멈춰 세우고, 그런 활동을 계속하지 않도록 경고할 수 있었다. 이 제안은 많은 이들을 두렵게 하고 물러서게 했다. 피고인들 사이에서 이 제안을 받아들이라고 주로 선동한 사람은 카메네프였다.

그는 체포되기 전 마지막으로 스탈린에게 불려 갔다. 이는 아마 결정적 정치국 회의 전이었을 것이다. 스탈린은 개인 면담에서 카메네프가 자신, 즉 스탈린에게 개인적으로 한 약속을 정말로 지키지 않았는지, 서약에도 불구하고 계속 반대파와의 연계를 유지했는지 확인하고 싶어 했다고 한다. 이 해명은 극적인 성격을 띠었다고 전한다. 모스크바에서 전직 반대파 인사들은 실제로 '함께 차를 마시는 모임'를 유지했고, 거기에는 반정부적 불만을 담은 발언이 곁들여졌다. 이는 레닌그라드에서 있었던 것과 같았다. 카메네프는 이 차 모임에 직접 나오지는 않았지만 그 모임이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고, 거기서 오간 발언들에 대해 정보를 받았으며, 참가자 일부와 속내를 털어놓는 대화에서 자신은 마음속으로는 예전과 같은 사람으로 남아 있다고 말했다. 카메네프의 이런 발언은 '차 모임' 참가자 모두가 알고 있었고, 그중 누군가가 레닌그라드의 동지들에게 이 이야기를 했으며, 아그라노프는 그들에게서 이를 알게 되었다. 이제 카메네프는 자신이 오해받았고 잘못 해석되었다고 말하려 했지만, 마침내 자기 죄를 인정하고 다시 참회했으며 심지어 울기까지 했다. 그러나 스탈린은 이제는 더 이상 믿지 않으며 사건을 '정상적인' 사법 절차로 넘기겠다고 선언했다.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정치 윤리라는 관점에서 볼 때 압도적 다수 반대파 인사들의 행동은 정말로 요구되는 수준에 훨씬 못 미친다. 물론 우리 당 안에 존재하는 조건들은 견딜 수 없다. 충성스럽게 행동하고, 우리 모두에게 제기되는 요구들을 완전히 이행하는 것은 도저히 불가능하다. 그렇게 하려면 고발자가 되어, 어쩌다 우연히 들은 반대파 발언 하나하나, 눈에 띈 반대파 문서 하나하나를 가지고 중앙통제위원회에 달려가 보고해야 하기 때문이다. 자기 당원들에게 그런 요구를 제기하는 당이라면, 자기가 특정 목적을 위해 자발적으로 뭉친 동지들의 자유로운 결합체로 여겨지기를 기대할 근거가 당연히 없다. 우리는 모두 거짓말을 해야 한다. 그것 없이는 살 수 없다. 그러나 거짓말에서 넘어가서는 안 되는 일정한 경계가 있고, 반대파 인사들, 특히 반대파 지도자들은 유감스럽게도 이 경계를 아주 자주 넘었다.

예전에 우리 늙은 '정치범'들은 통치자들의 세계와 관계를 맺는 데 관한 일정한 윤리 규범을 가지고 있었다. 사면 청원서를 제출하는 것은 범죄였다. 그런 짓을 한 사람은 정치적으로 끝난 인간이었다. 우리가 감옥에 갇혀 있거나 유형지에 있을 때, 우리는 당국에 도주하지 않겠다는 의무를 지지 않으려 했다. 그러한 의무가 특혜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경우에도 마찬가지였다. 우리는 그들의 포로다. 그들의 일은 우리를 감시하는 것이고, 우리의 일은 그들에게서 도망치려 애쓰는 것이다. 그러나 특별한 조건에서 그러한 의무를 지는 것이 불가피한 경우에는 그것을 엄격히 이행해야 했다. '명예를 걸고' 받은 특혜를 이용해 도주하는 것은 수치스러운 행위로 여겨졌고, 옛 고역수들은 그러한 짓을 저질러 '정치범'이라는 이름을 더럽힌 자들의 이름을 잘 기억하고 있었다.

이제 심리 상태는 완전히 달라졌다. 사면 청원서를 내는 일은 이제 지극히 흔한 일로 여겨지게 되었다. "이것은 내 당이다. 그러니 제정 시대에 만들어 낸 그 규칙들은 내 당에는 전혀 적용되지 않는다" — 이것이 어디서나 맞닥뜨리게 되는 논거다. 그러나 동시에 이 "내 당"은 알고 보니 어디서나 속여도 되는 상대였다. 당은 사상적 반대자들과 설득이 아니라 강제의 방법으로 싸우기 때문이다. 그 결과 특수한 윤리가 자리 잡았다. 그것은 어떤 조건이든 받아들이고 어떤 의무서든 서명하는 것을 허용했다 — 그것을 이행하지 않을 생각을 미리 품은 채로. 이 윤리는 옛 세대 당원들 사이에 특히 널리 퍼졌고, 이제야, 그것도 큰 어려움을 겪으면서 청년들이 비로소 이 윤리와 결별하기 시작한다... 이 새로운 윤리는 반대파의 대열에 극도로 부패하게 작용했다. 허용되는 것과 허용되지 않는 것의 경계가 완전히 지워졌고, 이 윤리는 많은 이들을 노골적인 배신으로, 노골적이고 감추지 않은 변절로 몰아갔다. 그러면서도 이 윤리는 옛 반대파와의 어떤 밀약도 반대하는 사람들에게 설득력 있는 논거를 주었다. 그들을 믿을 수 있겠는가, 그들은 원칙적으로 거짓말을 하는 것도 가능한 일로 인정하는데? 그들이 어디서 진실을 말하고 어디서 거짓말하는지 어떻게 구별할 것인가? 그들에 대한 올바른 노선은 오직 하나뿐이다. 그들 가운데 누구도, 어느 때에도 믿지 말 것, 그가 무슨 말을 하든, 어떻게 맹세하든. 예조프는 그러한 논쟁이 시작될 때부터 바로 이 관점에 섰고, 이제 그의 노선은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고 있었다. 카메네프는 체포로 완전히 짓눌려 있었고, 자신의 참회를 다시 믿게 만들기 위해 가능한 모든 일을 했다. 그런데도 “레닌그라드 당위원회 사건”(그 재판은 바로 이렇게 부르는 것이 옳았을 것이다)에 끌려든 사람들 모두가 자신의 죄를 단호히 인정하는 발언에 나서도록 설득하는 일은 성공하지 못했다. 그래서 시범 재판을 열 계획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렇게 격렬한 시기에 피고 일부가 다른 일부의 진술에 이의를 제기하는 재판을 여는 것은 불가능하다고 여겨졌다. 이 재판은 비공개로 진행되었고, 그 결과는 누구도 만족시키지 못했다. 예조프는 사형을 요구했고, 언론과 집회에서는 그러한 방향으로 캠페인이 벌어졌다. 그러나 옛 볼셰비키들 가운데는 아직 이 생각을 받아들이지 못하는 이가 많았다. 사형을 적용하지 말아 달라는 청원을 스탈린에게 한 것은 공적이 있는 개별 당원들만이 아니었다. “옛 볼셰비키” 협회에서는 정치국에 보낼 집단 성명서에 서명을 받는 일을 공개적으로 벌였는데, 그 성명은 레닌의 기본 유훈을 상기시키는 것이었다. 피가 우리 사이에 놓이지 않게 하자... “최고형”을 위한 토양은 아직 분명히 마련되지 않았고, 정치국에서 스탈린 자신이 이번 재판에서는 이 형벌을 적용하지 말자는 제안을 냈다. 그에게는 이 문제가 공개적으로 제기되었다는 것으로 충분했다... 그러나 그만큼 더 기세 좋게 당의 추가 숙청에 착수했다.

이렇게 조성된 상황에서 예조프가 빠르게 부상한 것은 지극히 자연스러운 일이었다. 그는 정치국에 들어갔을 뿐 아니라 중앙위원회 제5서기 자리, 바로 키로프가 모스크바로 옮겨 와 맡아야 했던 그 자리를 차지했다. 키로프가 맡아야 했던 부서들이 모두 그에게 예속되었다. 정치국에서는 세력 균형이 아예 달라졌다. 키로프와 쿠이비셰프의 죽음으로 비게 된 두 자리(두 사람 모두 '화해' 정책의 지지자였다)에는 어떤 완화도 반대하는 가장 단호한 사람들이 앉았다. 충분한 권한을 받은 예조프는 기구 숙청에 힘차게 나섰다. 옛 카토르가 수형자 협회가 폐쇄되었다. 니콜라예프는 주로 이 협회의 간행물에서 자신의 테러 열정을 길어 올렸다... '옛 볼셰비키' 협회도 폐쇄되었다. '시대의 요구'를 이해하지 못하는 '불평을 늘어놓는 원로들'이 여기에 둥지를 틀고 있었다. '이론가들'이 참호를 파고 앉아 있던 공산주의 아카데미는 폐지되었다. 스테츠키는 지방 언론과 수도 언론을 가리지 않고 편집진을 힘차게 숙청했다. 이른 봄에는 스탈린 암살 음모와 관련하여 '제2차 카메네프 재판'이 열렸는데, 여기에는 크렘린 경비대의 여러 인원이 가담했다. 여러모로 보아 이 재판의 바탕에는 진실의 알갱이가 놓여 있었다. 우리 쪽에서도 이 재판을 그토록 애써 입에 올리지 않았는데, 그런 방식은 실제로 꺾이지 않은 적수를 심판하는 재판에서만 볼 수 있는 일이다. 카메네프는 물론 이 사건에 전혀 엉뚱하게 끌어들여졌다. 그에게는 이 사건과 아무런 관계가 없음이 분명했지만, 반대파를 더욱더 매장하기 위해 그의 이름이 사건에 등장해야 했다. 그리고 스탈린이 그를 개인적으로 대하는 태도가 그러했으므로, 그를 공격하는 데 열심인 것은 이익일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다시 말하지만 이 사건의 바탕에는 그래도 얼마간의 진실의 알갱이가 놓여 있었다. 적어도 모스크바에서도 니콜라예프가 레닌그라드에서 닦아 놓은 길을 따를 필요가 있다는 이야기가 있었다... 그러나 크렘린의 경비 감독은 스몰니보다 훨씬 더 철저했다. 이 재판의 가장 중요한 결과는 한쪽으로는 예누키제의 몰락이었고, 다른 한쪽으로는 고리키에게 보낸 '제1차 경고'였다.

예누키제는 스탈린의 오랜 가까운 개인적 친구 가운데 한 사람이었다. 스탈린은 의심할 바 없이 나름대로 그를 아꼈고, 끝까지 그와 가까운 개인적 관계를 유지했다. 예누키제는 스탈린이 때때로 손님으로 찾아가던, 스탈린이 참석하는 모든 친목 모임에 빠짐없이 불려 가던 아주 드문 사람들 가운데 하나였다. 그런 모임은 대개 예누키제가 마련하곤 했다. 예누키제는 스탈린의 죽은 아내와 친했다. 그녀는 어릴 때 그의 무릎에서 놀았다. 그리고 스탈린은 죽은 아내에 대한 모든 기억을 자기 성미와는 전혀 어울리지 않는 다정함으로 대했다. 마지막으로 예누키제는, 스탈린이 그가 자기 밑에서 어떤 음모도 꾸미지 않는다고 완전히 확신하는 사람이었다. 그러나 그럼에도 그는 몰락했다. 그 원인은 예누키제가 레닌그라드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은 사람들과 그 가족들에게 베푼 도움이었다.

말하자면 예누키제는 일반적으로 정치범과 유형자들에게 상당히 폭넓게 도움을 베풀었다. 이는 당내 인사들 사이에서도, 체포되고 유형되는 사람들 사이에서도 모두가 알고 있었다. 물론 스탈린도 이를 알고 있었다. 국가정치보안부의 보고를 통해서만이 아니라 예누키제 본인의 이야기를 통해서도 알고 있었다. 전하는 바에 따르면 그는 이런 활동에 대해 스탈린의 비공식적 동의를 받아 두었다. 그런 스탈린의 동의가 없었다면 예누키제의 이런 활동은 전혀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러나 이제 시대가 바뀌었다. 예조프는 예누키제의 자비가 기관을 해이하게 만들며, 기관을 완전한 전투 태세로 끌어올리려면 예누키제를 제거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듣기로는 스탈린이 어느 정도 예누키제를 감싸려 했으나, 그리 힘을 쓰지는 않은 듯하고, 결국 예누키제는 모든 직위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스탈린이 그를 위해 해준 유일한 일은 그에게 아무런 추가 처벌도 가하지 않고, 북캅카스에서 휴양소와 요양소 관리국이라는, 정치적 영향과는 거리가 멀지만 평온한 자리를 마련해 준 것뿐이었다... 예조프와 가까운 사람들은 스탈린의 이런 처신을 특별한 고결함의 후광으로 감싸려 든다. 당과 국가의 이익을 위해 필요해지자 스탈린은 자기 개인적 감정을 희생하는 것도 주저하지 않았다는 것이다... 그러나 실제로 보면 전혀 다르다. 스탈린은 예누키제의 이런 활동 면을 아주 잘 알고 있었고 그것을 허용해 주었으므로, 그의 처신은 오히려 단순한 배신에 가깝다...

고리키의 경우는 더 복잡했다. 키로프가 살해된 뒤 고리키는 격분하여 테러리스트들에 대한 응징을 요구했다. 그러나 이 총격을, 34년에 세워졌고 그 자신이 그토록 많은 노력을 쏟아부은 노선을 완전히 뒤집는 데 정치적으로 이용하려 한다는 사실이 드러나자마자, 고리키는 자기 영향력을 총동원해 스탈린을 멈춰 세우고 그가 이 길에 들어서지 않도록 말리려 했다. 카메네프의 두 번째 재판 때, 카메네프의 목숨에 심각한 위험이 닥쳤을 때 그의 불만은 특히 격렬해졌다.

이 모든 노력은 아무 성과도 없었다. 스탈린은 고리키에게 오지 않게 되었고, 고리키가 전화를 걸어도 받지 않았다. 심지어 《프라우다》에 고리키를 반대하는 자슬라프스키(Заславский)의 기사가 실리기까지 했다. 바로 그 전날까지만 해도 전혀 있을 수 없는 일이었다. 사정을 알 만한 사람들은 모두 자슬라프스키가 이 기사를 예조프와 스테츠키의 직접적인 지시로 썼다는 것을 잘 알고 있었다. 요즘 그를 이런 종류의 심부름에 자주 골라 쓰는 것이다... 글솜씨는 빼어나지만 도덕적 규칙은 전혀 없다. 고리키는 반항했고, 심지어 자기에게 해외 출국용 여권을 내줄 것을 요구하기까지 했다. 그것은 단호히 거절되었지만, 그에 대한 더 강경한 조치로까지는 가지 않았다. 그래도 고리키는 고리키인지라, 직위에서 끌어내릴 수도, 면직시킬 수도 없었기 때문이다...

카메네프-지노비예프 1차 재판 이후 이어진 이 모든 당내 테러 조치들은 외부 관찰자에게는 전혀 알려지지 않았다. 당 안에서도 그것들에 비교적 관심을 거의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들은 막 뒤에서 진행되었다. 바깥세상에 1935년 초는 진정한 '소비에트 봄'의 시기였다. 개혁이 잇따랐고, 그 모두는 한 지점을 겨냥했다. 비당파 지식인과의 화해, 그리고 실천 속에서, 특정 분야의 긍정적인 소비에트 건설 작업으로 자신의 재능과 소비에트 권력에 대한 헌신을 보여준 모든 이들을 소비에트 사회생활에 적극 참여시키는 방식으로 권력의 기반을 넓히는 것이었다. 그 전에 키로프의 계획을 지지했던 모든 이가 이제 스탈린의 조치를 환영했다. 이 조치들은 키로프 계획의 필수 구성 부분이었던 것과 너무도 닮아 있었으니까! 고리키에게는 소비에트 권력과 비당파 지식인의 화해가 평생의 숨은 꿈이었다. 그것은 그가 소렌토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저지른 '자기 자신'과의 타협을 정당화해 주는 것이었다.

이런 상황에서 계속되는 당내 테러는 어쩐지 성가신 우연, 니콜라예프의 총격에 대한 지나치게 오래 끌리는 반응처럼 보였을 뿐, 당 정책 전반의 근본적 전환을 예고하는 징후는 결코 아니었다. 모두는 지식인과의 화해 정책을 일관되게 밀고 나가는 단순한 논리가 당 지도부로 하여금 틀림없이 당내부의 “화해 정책” 궤도로 되돌아오게 하리라고 확신했다. 스탈린에게서 이 병적인 의심의 급성 발작만 지나가게 하면 될 터였다! 그러기 위해서는 “가능한 한 자주, 집요하게 당이 현재의 지도부에 충성한다는 것을 강조하고, 편하든 불편하든 모든 경우에 스탈린 개인에게 향을 피워야” 했다(어쩌겠는가, 그에게 그런 약점이 있다면, 그런 엄청난 용량의 아첨으로만 그의 의심 많은 성격을 달랠 수 있다면). 스탈린이 제1차 5개년계획의 결정적 시기를 당을 이끌어 통과시키며 당을 위해 해낸 큰일을 생각하며 이런 사소한 것들을 용서하는 법을 배워야 했고, 동시에 지금 얼마나 거대한 변화가 일어나고 있는지, 우리가 어떤 새로운 “행복한 삶”의 시기로 들어서고 있는지 — 대중 속에 인간 존엄의 감각과 인간 인격에 대한 존중을 길러내고 “프롤레타리아 휴머니즘”의 기초를 발전시키는 일이 당의 모든 정책의 기초로 놓이는 그 시기 — 를 더 크게, 더 집요하게 말해야 했다.

우리 모두 이 희망 속에서 얼마나 순진했던가! 뒤를 돌아보면, 지금은 우리가 완전히 다른 방향으로 나아가고 있다는 징후를, 즉 발전이 당내부의 화해로 가는 것이 아니라 당내 테러를 그 논리적 완성점, 곧 당의 과거 이력으로 보아 스탈린의 반대자가 될 수 있는 사람, 권력의 키를 쥔 그의 후계자 후보가 될 수 있는 모든 사람을 육체적으로 말살하는 시기까지 밀어붙이는 쪽으로 가고 있다는 징후를 어째서 알아차리지 못했는지 이제는 이해하기조차 어렵다. 지금 나에게는 스탈린이 키로프 암살과 카메네프의 두 번째 재판 사이의 바로 이 시기에 자기 결정을 내리고 “개혁” 계획을 세웠다는 데 조금도 의심이 없다. 16인의 재판과, 우리가 그리 멀지 않은 장래에 알게 될 그 밖의 모든 재판들이 이 계획의 불가결한 구성 부분이다. 키로프 암살 전까지 그는 어떤 길로 나아가야 할지 몰라 망설이고 있었다면, 이제는 결심을 굳혔다.

이 결정의 성격을 규정한 핵심은, 옛 당 활동가들 대다수의 실제 기분이 그에게, 스탈린에게 극히 적대적임을 입증한 정보 요약들이었다.

키로프 사건 이후 진행된 재판들과 수사들은 당이 스탈린의 일인 독재와 화해하지 않았다는 것, 모든 요란한 선언에도 불구하고 옛 볼셰비키들이 마음속으로는 그를 부정적으로 대하며 그 부정적 태도가 줄어들지 않고 오히려 커지고 있다는 것, 그리고 지금 그토록 자신의 충성을 요란하게 떠들어대는 사람들 대다수가 내일, 정치 정세가 조금이라도 바뀌면 그를 배신하리라는 것을 틀림없이 보여주었다.

이것은 스탈린이 니콜라예프의 총격 이후 수사 과정에서 수집된 모든 자료를 토대로 확정한 핵심 사실이었다. 그를 공정하게 평가하자면, 그는 이 사실을 뒷받침할 근거를 찾아내는 데도 성공했고, 여기서 의심할 바 없이 두려움 없는 결론을 이끌어내는 데도 성공했다. 스탈린이 보기에 이런 태도의 원인은 옛 볼셰비키 심리의 근저 자체에 있다. 옛 체제에 반대하는 혁명 투쟁 속에서 자란 우리 모두는 반대론자의 심리, 타협할 줄 모르는 항의자의 심리를 스스로 길러왔다. 우리가 원하든 원하지 않든, 우리의 정신은 현존하는 모든 것을 비판하는 방향으로 움직이며, 우리는 어디서나 무엇보다 먼저 약점을 찾는다. 요컨대 우리는 모두 건설자가 아니라 비판자요 파괴자다. 과거에는 이것이 좋았다. 그런데 이제 우리가 긍정적 건설에 종사해야 할 때, 이것은 가망 없이 나쁘다. 회의론자와 비판가라는 이런 인간 재료로는 견고한 무엇도 세울 수 없는데, 이제 우리에게는 소비에트 사회라는 건물의 견고함을 생각하는 일이 특히 중요하다. 불가피하게 우리 앞에 닥쳐올 전쟁과 관련된 큰 격변을 향해 나아가고 있기 때문이다.

그리고 그가 여기서 이끌어낸 결론은 결코 소심하다고 할 수 없다. 만약 옛 볼셰비키, 오늘날 나라의 지배층을 이루는 그 집단이 새로운 조건에서 이 기능을 수행하는 데 적합하지 않다면, 그들을 가능한 한 빨리 직위에서 물러나게 하고 새로운 지배층을 만들어야 한다. 키로프의 계획에서 비당파 지식인과의 화해, 비당파 노동자와 농민을 나라의 사회·정치 생활에 끌어들이는 일은 권력의 사회적 기반을 넓히는 수단이었고, 권력을 모든 민주적 계층의 주민과 가깝게 만드는 수단이었다. 스탈린의 계획에서 같은 조치들은 전혀 다른 의미를 얻었다. 그것들은 나라의 지배층을 이렇게 재편하는 데 도움이 되어야 했다. 즉 그 대열에서 비판 정신에 감염된 자들이 모두 추방되고, 긍정적 건설을 향한 새로운 심리를 지닌 새로운 지배층이 만들어지는 것이었다.

그런 계획을 실현하기 위해 어떤 준비 조치들이 취해졌는지 일일이 설명하려면 이야기가 너무 길어질 것이다. 가장 큰 관심은 물론 당 기구를 다루는 데 쏠렸다. 당 기구는 많은 부분에서 급진적으로 개편되었다. 스탈린이 이 방향의 조치들을 끝까지, 즉 새 헌법의 시행까지 밀어붙이기로 미리 결심했다는 점도 의심할 바 없다. 우리는 다른 누구는 몰라도 옛 볼셰비키에게만큼은 이 헌법이 적어도 “인간과 시민”의 권리에 대한 얼마간의 보장이라도 가져다줄 것이라고 기대했다. 스탈린의 구상에서 그것은 전혀 다른 역할을 했다. 그것은 그가 우리를 나라의 운명에 대한 영향력에서 최종적으로 배제하는 일을 돕는 것이었다. 나머지는 다소 우연적인 상황들이 결정했다.

두 번째 카메네프 재판 이후 고리키의 영향력은 크게 떨어졌다. 그러나 그의 별은 완전히 꺼지지 않았다. 그와 스탈린의 외적 화해가 이루어졌고, 그는 끝까지 스탈린이 적어도 어느 정도는 계속 존중했던 유일한 인물이었다. 아마도 그가 살아 있었더라면 8월 재판은 그래도 그런 결말을 맞지 않았을 것이다. 어쨌든 고리키의 죽음이, 스탈린의 최측근에서 처단을 서두르라고 요구하던 모든 이들의 제약을 최종적으로 풀어주었다는 점은 의심할 바 없다.

7월 말 모스크바에서 문을 닫은 채, 그리고 물론 완전히 공개 없이, 스탈린 암살 준비 혐의로 기소된 콤소몰 학생 몇 명으로 이루어진 작은 집단의 사건이 심리되었다. 거의 모두가 풋내기 젊은이들이었다. 아무것도 해내지 못했고, 이야기 이상으로 나아가지도 못했다. 그러나 이야기는 진지하게 오갔고, 끝까지 가겠다는 결의도 있었던 것으로 보인다. 지금 우리에게 적지 않게 넘어오는 그런 사건 가운데 하나다. “폭발적 재료”가 나라 안에 충분히 쌓여 있다! 법정에서 그들 대부분은 자기 계획을 부인하지 않았고, 우연히 피고석에 오른 자신과 가까운 친구 몇 명을 구하는 데에만 마음을 썼다. 사건은 복잡하지 않았고 판결도 의심의 여지가 없었다. 니콜라예프 사건 이후 테러에 관한 모든 이야기는 오직 한 가지 형벌로 처벌된다... 그런 만큼 판사들은 기소 측 대표가 사건을 추가 수사로 넘길 것을 요구했을 때 더욱 놀랐다.

뒤에 알려진 바로는 그는 이 요구를 최고 상급 기관의 제의에 따라 제기했고, 그 기관은 중앙위원회 서기국의 직접 지시에 따라 움직였다. 서기국에서는 이 작은 사건을 정치적으로 이용하기로 결정한 것이었다. 추가 수사는 아그라노프에게 맡겨졌고, 이는 즉시 그 수사의 성격을 규정했다. 피고 학생들로부터 그들의 정치교양과 당의 역사를 가르치는 교수들에게로 실마리가 뻗어 나갔다. 러시아 혁명운동사에 관한 어떤 강의에서든 권력에 대한 비판적 분위기를 키우는 데 이바지하는 페이지는 언제나 쉽게 찾아낼 수 있고, 젊고 뜨거운 머리들은 현재에 관한 자기 결론을, 아직 학생 시절에 공식적으로 확립된 것으로서 들었던 사실들에 기대어 뒷받침하기를 늘 좋아한다. 아그라노프는 지목된 교수들 가운데 누구를 공범으로 볼 것인지만 선택하면 되었다. 이런 방식으로 16인 재판의 첫 피고들이 모집되었다.

그들로부터 옛 볼셰비키, 전 반대파 지도자들에게로 실마리를 뻗는 것은 더욱 쉬웠다. 자료의 일부는 이미 미리 준비되어 있었다. 니콜라예프 사건 이후 반대파 인사들에 대한 모든 사건을 맡아 지휘하는 아그라노프는 그런 문서를 예비용으로 많이 만들어 두었다. 문제는 오직 상급 당 기관들이 사건에 어느 정도의 규모를 부여하려 하는가로 좁혀졌다. 준비 작업은 극비리에 진행되었다. 정치국에서는 이 문제가 미리 논의되지 않았다. 몰로토프와 칼리닌은 자기들에게 어떤 놀라움이 준비되고 있는지도 모른 채 휴가를 떠났다. 니콜라예프 사건 이후 저명한 당원들을 혁명재판소에 넘기는 일은, 이들 당원에게 테러 성격의 행위가 기소되는 경우 정치국의 사전 동의를 필요로 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비신스키가 사건에 관여하고 있었다. 모든 것을 지휘한 것은 예조프였다.

이 재판은 말단 당 일꾼들에게뿐 아니라 중앙위원회(ЦК) 위원들에게도, 적어도 정치국 위원 일부에게는 완전히 뜻밖의 일이었다. 스탈린은 모든 것에 동의해 주고는, 재판이 한창 진행 중일 때 캅카스로 휴양을 떠났다. 유죄 판결을 받은 이들의 운명을 논의할 정치국 회의를 열 수 없게 하려는 것이었다. 이 문제는 오로지 공식 기관에서, 즉 중앙집행위원회(ЦИК) 간부회에서만 결정되었다. 거기서는 아무도 처형에 반대하는 목소리를 내지 못했다... 이후 재판들과 거기에 끌어들일 사람들의 범위를 놓고 어느 정도 투쟁이 있었다. 정치국 위원 몇 사람의 압력으로 부하린(Бухарин)과 리코프의 복권에 관한 성명이 나왔다. 이 피고인들을 심문하지도 않고 그것이 발표되었다는 점이 특징적이다. 예조프는 이 양보를 이제 후회하며, 그것을 아직 바로잡을 수 있을 것이라고 숨기지 않고 말한다. 스탈린은 휴가 중에 그러한 모든 문제에 대해 한결같이 아무 대답도 주지 않았으나, 이제는 공개적으로 입장을 취했다. 숙청을 끝까지 밀어붙이라는 것이다. 유럽 여론의 태도라는 논거도 그에게는 통하지 않는다. 그런 모든 논거에 그는 경멸하듯 대답한다. "괜찮아, 그들은 삼켜 버릴 거야." 그가 보기에 이 재판에 분개할 사람들은 자기 나라 정치에 결정적인 영향을 미칠 줄도 모르고 미칠 수도 없으며, "신문 지상의 짤막한 글" 따위는 그를 조금도 걱정시키지 않는다.

앞으로 더 재판이 있을지는 아직 알 수 없으나, 아그라노프에게는 가장 엄한 지시가 내려졌다. 끝까지 청소해 버리라는 것이다. 야고다는 밀려났다. 그가 그 재판의 준비에 온건한 방식으로 저항하려 했기 때문이다. 그는 거의 모든 것이 이미 준비된 뒤에야 그 재판에 대해 알게 되었고, 재판 문제를 정치국에 상정할 것을 주장했다. 그를 상대로 아그라노프는 옛 당 활동가들을 감싸준다는 혐의를 제기했고, 그는 이제 사실상 가택연금 상태에 있다. 예조프는 내무인민위원부를 넘겨받은 뒤 옛 국가정치보안부의 지도부 수뇌를 모조리 갈아치웠다. "노인들" 가운데서는 아그라노프 한 사람만을 곁에 남겼다. 중앙과 지방의 새 내무인민위원부 기구는 당 비서국들의 기구에서 뽑아 구성되었다. 이들은 모두 이전에도 예조프와 함께 일했던 사람들이며 그의 신임을 받는 사람들이었다. 체포된 사람 가운데 여럿이 감옥에서 죽었다는 소문이 돈다. 심문은 혹독하게 진행되며, 심문받는 사람들 앞에는 단순한 선택이 놓여 있다. 아그라노프가 요구하는 것을 전부 인정하거나, 아니면 죽거나. 총살은 아직 없었다. 외국인들에 대한 총살을 빼고 나면 말이다. 그 외국인들은 모두 게슈타포, 폴란드 비밀경찰 등과 연계가 있다는 혐의를 받고 있다. 그러나 그런 "외국인" 명단에는 마음만 먹으면 토박이 러시아인도 넣는다. 사람들은 Л. 소스놉스키(Сосновский)에게 바로 그렇게 했다고 말한다... 이민자들, 소비에트 시민권을 받아들인 사람들에 대해서는 이미 말할 것도 없다... 혁명 전 그럭저럭 굵직한 이력이 있는 우리 볼셰비키는 이제 저마다 제 굴속에 앉아 떨고 있다. 이론적으로 우리 모두가 현 조건에서 바람직하지 않은 요소라는 것이 증명되어 있지 않은가. 수사에 가담한 누구의 눈에든 한 번 띄기만 하면 우리의 운명은 결정되고 만다. 우리를 위해 나서 줄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대신 소비에트의 평범한 시민에게는 온갖 특혜와 완화책이 쏟아진다. 이것은 의식적으로 하는 일이다. 우리에 대한 처단이 스탈린에게서 받은 완화책에 대한 기억과 그의 회상 속에서 불가분하게 얽혀 있게 하자는 것이다...

Y. Z.

원주

  1. 마지막 인물의 유랑기는 이러하다. 31년에 그는 몇 달 동안 감옥에 갇힌 뒤 사라토프로 유배되었고, 그곳에서 지역 도서관의 자리를 얻었다. 1934년에는 외국인 친구들의 애씀으로 그의 처지를 완화하는 문제가 제기되었다. 그가 모스크바로 소환되었고, 그곳에서 당과 마르크스 연구소로 복귀하는 조건을 두고 그와 협상이 진행되었다. 그는 칼리닌의 접견을 받았다. 협상은 성과를 내지 못했다. 랴자노프는 이른바 “멘셰비키 재판”과 관련하여 자기 죄를 적어도 간접적으로 인정하는 것으로 해석될 수 있는 어떠한 진술서도 제출하기를 단호히 거부했고, 당시의 모든 고발은 자신에 대한 음모의 결과라고 계속 주장하면서 자기 사건의 재심을 요구했다. 랴자노프의 이런 비타협성은 스탈린을 몹시 짜증나게 했다. 소문에 따르면 스탈린은 개인적으로 누군가에게 랴자노프의 처지를 개선해 주겠다고 약속했지만, 그 개선이 그의 명예 회복으로 이어지기를 결코 바라지 않았다. 31년의 “음모”는 상당 부분 스탈린 자신이 부추긴 것이었다. 키로프가 해결책을 찾아냈다. 그가 랴자노프가 레닌그라드로 이주하도록 허가하는 일을 자신이 맡았다. 그곳에서는 랴자노프에게 그가 관심을 가진 문제들로 과학 연구를 할 수 있게 하는 조건이 마련되었다. 반면 사라토프에서는 지역 도서관이 빈약하여 그러한 기회를 거의 누리지 못했다. 랴자노프는 레닌그라드에 1935년 초까지 머물렀다. 키로프 암살 뒤에 이어진 전반적 “숙청”과 관련하여 그때 그에게 사라토프로 돌아가라는 제안이 있었고, 그는 지금도 그곳에 살고 있다. ↩

옮긴이 주

  1. 이 문단에서 필자는 ‘동성애자 나치 간첩망’이라는 설명을 사실로 받아들여 서술하며, 이를 소련 외교 정책 전환의 계기로 제시한다. 이는 필자의 서술이지 이 번역에서 확인한 사실이 아니다. 편지는 사건의 적발 시점을 1933년 말로 적지만, 사료에서 확인되는 대규모 체포는 그해 여름·가을 모스크바와 레닌그라드에서 진행되었다. 당시 비밀경찰은 남성 동성애자들을 반혁명 혐의로 기소하고 동성애를 파시즘·간첩 활동과 연결했다. 외국 공관과의 접촉이나 동성애자들의 사교 관계가 있었다는 사실과, 이 편지가 주장하는 나치 간첩망의 실재는 구별해야 한다. 여기서 ‘합법’이라는 표현도 정부가 공인한 조직이라는 뜻으로 읽어서는 안 된다. 당시 러시아 공화국에는 남성 간 동성 성행위 자체를 처벌하는 조항이 없었으며, 재범죄화는 1934년에 이루어졌다. 관련 수사 기록과 야고다의 보고서를 분석한 연구: Irina Roldugina, “The Recriminalization of Homosexuality under Stalin: New Sources, New Answers,” The Russian Review 84, no. 4 (2025), 660–680.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