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9–1938

호르티 체제: 백색테러에서 우경화까지

장교 부대의 테러에서 출발한 호르티 체제는 어떻게 20년 가까이 안정을 유지했고, 왜 1930년대에 파시즘 국가들 쪽으로 기울었는가?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호르티의 국민군 장교 부대들은 공산당원·사회민주당원·유대인을 겨냥한 헝가리 백색테러를 벌였고, 호르티는 1920년 왕 없는 왕국의 섭정이 되었다. 트리아농 조약으로 영토의 3분의 2 이상을 잃은 헝가리는 국경 수정을 국가 목표로 삼았고, 1920년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으로 유럽 최초의 전후 반유대법을 만들었다. 베틀렌 이슈트반은 공개투표 선거법과 사회민주당과의 협정, 국제연맹 차관으로 체제를 안정시켰지만, 불법 공산당은 라코시 재판과 셜러이·퓌르시트 처형으로 짓눌렸다. 대공황 뒤 굄뵈시 줄러는 이탈리아·독일과 손잡았고, 1938년 더라니 정부의 죄르 강령과 제1차 유대인법은 다음 시대를 예고했다.

세게드의 국민군과 헝가리 백색테러

1919년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하고 있던 남부 도시 세게드에서 반공 정치인들이 반혁명 정부를 세웠다. 총리 카로이 줄러는 전쟁 영웅으로 여겨지던 전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사령관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직과 반혁명군 지휘를 맡겼고, 호르티는 6월 6일 세게드에 도착해 포고로 국민군을 창설했다. 연합국의 요구로 내각이 개편되어 장관직을 잃은 뒤에도 그는 군 지휘부를 국방부에서 떼어 내 국민군을 계속 장악했다. 8월 1일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고 8월 6일 루마니아군이 부다페스트에 들어오자, 호르티는 8월 9일 국민군을 싸우지 않고 도나우강 서쪽 지방으로 옮겨 발러톤호 남쪽의 시오포크에 사령부를 두었다. 강제 징집으로 9월 말에는 병력이 3만 명에 이르렀다. 1 2 3

국민군의 장교 부대들은 적색 테러에 대한 보복과 주민 위협을 내세워, 공산당 지지자로 의심되는 사람들을 재판 없이 처형하고 본보기로 공공장소에 매달았다. 가장 악명 높은 지휘관은 프로너이 팔이었고, 오시텐부르그모러베크 줄러, 레하르 언털, 그리고 케치케메트 일대의 헤이여시 이반이 비슷한 부대를 이끌었다. 이 부대들은 형식상 국민군 소속이었지만 지휘관 개인에게 광신적으로 충성하는 사병처럼 움직였다. 희생자는 주로 공산당원·사회민주당원·농민, 그리고 유대인이었다. 헝가리 유대인 대부분은 볼셰비키를 지지하지 않았지만, 평의회 공화국 지도부에 젊은 유대계 지식인이 많았다는 사실이 반유대 폭력으로 쉽게 옮겨 갔다. 피해는 호르티 사령부가 있던 시오포크 주변의 도나우강 서쪽 지방과 도나우강·티서강 사이의 평원에서 가장 컸다. 4) 1 5

가장 널리 알려진 학살은 루마니아군이 케치케메트에서 물러난 직후에 일어났다. 1919년 11월 19일 밤 헤이여시의 부대원들은 구금 시설에서 36명을 끌어내 인근 오르고바니 숲으로 데려갔고, 이들은 그곳에서 살해되었다. 희생자는 지역 유대인이거나 부유해 보이는 주민이었고, 적색 테러에 가담했다고 볼 근거는 없었다. 이틀 앞선 11월 17일 이자크에서는 헤이여시 부대가 일으킨 포그롬으로 유대인 수백 명이 폭행과 약탈을 당하고 쫓겨났으며, 이 부대가 죽인 사람의 약 3분의 1이 유대인이었다. 1920년 2월 17일에는 오스텐부르크 부대의 장교들이 신문 『네프서버』의 기자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다. 6 7 8

희생자 수는 지금도 논쟁 중이며 추산은 300명에서 6,000명까지 갈린다. 영어권 문헌은 1919~1921년 살해된 사람을 1,500~6,000명 또는 1,000~5,000명으로 들고, 헝가리 역사학계의 신중한 평가는 500~600명, 많아도 1,000명에 훨씬 못 미친다고 보며 300명이라는 추정도 있다. 헝가리어 문헌은 망명한 뵘 빌모시와 야시 오스카르가 내놓은 5,000명 안팎을 과장으로 본다. 재판 없이 투옥되거나 수용된 사람은 수만 명이었다. 호르티가 직접 잔학 행위에 가담한 증거는 없지만, 전기 작가 토머스 색미스터는 그가 장교 부대를 「암묵적으로 지지」했다고 평가했고 호르티는 이들을 「나의 가장 훌륭한 부하들」이라 불렀다. 그는 뒷날에도 「쇠 빗자루만이 나라를 깨끗이 쓸어 낼 수 있었다」며 사과하지 않았다. 4) 3 9 1

왕 없는 왕국: 섭정 호르티와 카를 왕의 복귀 시도

영국 외교관 조지 클러크의 중재로 군사독재를 세우지 않겠다고 약속한 호르티는, 루마니아군이 물러난 1919년 11월 16일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다. 그는 이 도시가 「붉은 누더기를 걸치고」 천 년의 전통을 저버렸다고 꾸짖은 뒤 용서하겠다고 연설했다. 루마니아군은 1920년 2월 25일 헝가리에서 완전히 철수했다. 1920년 1월 국민의회 선거를 앞두고 사회민주당은 테러 때문에 선거운동이 불가능하다며 선거를 거부했고, 노동·복지장관이던 페이에르 카로이는 1월 16일 사임하고 오스트리아로 피신했다. 3월 1일 국민의회는 왕국을 복원하고, 국민군 장교들이 의사당을 장악한 가운데 호르티를 섭정으로 뽑았다. 호르티는 131 대 7로 어포니 얼베르트를 이겼고, 총리 임면권, 의회 소집·해산권, 군 통수권 등 귀족 작위 수여와 교회 임명권을 뺀 국왕의 대권을 받아 낸 뒤에야 취임했다. 2 1 10

연합국이 합스부르크가의 복귀를 용납하지 않았으므로 헝가리는 법적으로는 왕국이지만 왕이 없는 나라가 되었다. 마지막 국왕 카를 4세(오스트리아 황제로서는 카를 1세)는 두 차례 왕위 회복을 시도했다. 1921년 3월 26일 부활절 토요일에 그는 위조 여권으로 스위스를 떠나 솜버테이에 나타났고 이튿날 부다페스트 왕궁으로 호르티를 찾아가 권력 이양을 요구했으나, 호르티는 즉시 떠나라고 거절했다. 이 「부활절 위기」 뒤 총리 텔레키 팔이 물러나고 4월 14일 베틀렌 이슈트반이 총리가 되었다. 10월에는 쇼프론에 주둔하던 오스텐부르크 부대와 레하르 언털 대령이 카를을 받들고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다. 10월 23일 호르티와 굄뵈시 줄러가 독려한 정부군은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이들을 막았고, 정부군 14명과 오스텐부르크 부대원 5명이 죽었다. 프로너이도 이 두 번째 시도에 가담했다. 1 11 5

패배한 카를은 체포되어 마데이라섬으로 유배되었다. 10월 29일 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에드바르트 베네시는 합스부르크가를 폐위하지 않으면 침공하겠다는 최후통첩을 보냈고, 11월 6일 헝가리 의회는 1713년 국사조칙을 무효화해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계승권을 없애는 법을 통과시켰다. 헝가리는 군주정으로 남았지만 왕을 뽑지 않았고, 호르티는 1944년까지 대통령에 가까운 지위의 섭정으로 남았다. 같은 시기 장교 부대의 시대도 끝나 갔다. 정부는 1920년 여름부터 부대를 통제하고 해산하기 시작했고, 프로너이는 1921년 유대계 부유한 정치인을 갈취한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지휘권을 잃었으며, 그의 대대는 1922년 1월 공식 해산되었다. 그러나 호르티는 섭정 사면으로 학살 가해자들을 처벌에서 면제했다. 11 12) 5 9

트리아농 조약과 「아니, 아니, 결코!」

헝가리 강화 대표단은 어포니 얼베르트가 이끌고 1920년 1월 7일 파리에 도착했다. 어포니는 1월 16일 연합국 최고회의에서 프랑스어로 연설하고 스스로 영어로 옮긴 뒤 이탈리아어로 마무리하며, 헝가리인의 자결권과 역사적 헝가리의 지리적·경제적 일체성을 내세워 헝가리는 이 국경을 결코 받아들이지 않고 수정을 추구할 것이라고 말했다. 대표단 자료에는 지리학자 텔레키 팔이 1910년 인구조사를 바탕으로 인구 밀도와 민족 분포를 함께 그린 이른바 「붉은 지도」도 들어 있었다. 연합국은 조건을 바꾸지 않았고, 강화회의 의장 밀랑의 동봉 서한은 「천 년 된 상황이라도 정의에 어긋나면 지속될 수 없다」며 국경을 1919년 초안대로 두었다. 13 14 15

조약은 1920년 6월 4일 베르사유의 그랑 트리아농 궁에서 조인되었다. 협상이 아니라 일괄 수락 여부만 고를 수 있는 조건이었고, 헝가리 대표단은 항의 속에 서명했다. 헝가리는 11월 16일 비준했고 조약은 1921년 7월 26일 발효했다. 조약 뒤 헝가리는 면적 93,073㎢, 인구 760만 명의 내륙국이 되었는데, 이는 전쟁 전 헝가리 왕국 면적의 28%, 인구의 36%였다. 역사적 영역을 기준으로 한 다른 계산은 영토의 72%, 인구의 58%를 잃었다고 본다.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오스트리아로 넘어간 지역에는 헝가리인 330만 명이 소수민족으로 남았다. 군대는 징병 없이 3만 5천 명으로 제한되었고, 해군은 사라졌으며, 이웃 나라들에 배상금을 물어야 했다. 13 12)

트리아농은 전간기 헝가리 정치의 중심 문제가 되었다. 「아니, 아니, 결코!」(Nem, nem, soha!)라는 구호가 어디에나 내걸렸고, 1927년 영국 신문왕 로더미어 경이 『데일리 메일』에서 트리아농 국경을 비판하자 헝가리인 120만 명이 감사 서한에 서명했다. 한편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루마니아·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은 헝가리의 공격에 공동 대응하는 방어 동맹인 소협상을 맺었고, 프랑스는 1924년 체코슬로바키아, 1926년 루마니아, 1927년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과 동맹 조약을 맺어 이를 뒷받침했다. 역대 헝가리 정부는 국경 수정을 대외 정책의 목표로 삼았지만, 소협상의 군사력 앞에서 무력으로 이를 이룰 길은 막혀 있었다. 1 16

1920년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과 「기독교 민족」 노선

역사가 데아크 이슈트반은 1919~1944년의 헝가리를 「우익 국가」로 규정한다. 반혁명에서 태어난 역대 정부는 「민족적 기독교」 정책을 내세우고 프랑스 혁명과 19세기의 자유주의·사회주의를 배척했으며, 헝가리를 볼셰비즘과 그 도구로 여긴 사회주의·코즈모폴리터니즘·프리메이슨에 맞서는 보루로 보았다. 이 노선이 처음 법으로 나타난 것이 1920년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1920년 법률 제25호)이다. 교육장관 할레르 이슈트반이 6월 22일 제출한 원안은 철저히 가르칠 수 있는 만큼만 학생을 받는다는 정원 규정이었으나, 집권당 안의 요구로 각 「인종과 민족」 출신 학생의 비율이 전국 인구 비율에 이르도록, 적어도 그 10분의 9가 되도록 한다는 조항이 들어갔다. 법은 혁명에 가담한 「불온」 인물의 입학도 막으려 했다. 1 17

법문에 유대인이라는 말은 없었지만, 대학에서 인구 비율보다 많았던 집단은 사실상 유대인뿐이었다. 유대인은 인구의 약 6%였으나 1910년대 대학생의 약 15%였고, 의학·법학 등 인기 학부에서는 30%를 넘었다(1920년 고등교육 전체로는 10.4%). 1920년 9월 정원 219명의 국민의회에서 표결에 참여한 64명 가운데 57명이 찬성하고 7명이 반대했으며, 총리 텔레키 팔 등 일부 의원은 항의의 뜻으로 표결에 나오지 않았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이 법을 제1차 세계대전 뒤 유럽에서 처음 제정된 반유대법으로 본다. 영국 유대인 대표위원회가 1925년 국제연맹 이사회에 트리아농 조약의 소수민족 보호 조항 위반으로 제소해 받아들여지자, 베틀렌 정부는 1928년 법률 제14호로 민족 비율 조항을 지우고 공무원·참전군인·소지주와 장인·기업인·상인이라는 사회 범주에 따른 기준으로 바꾸었다. 역사가 코바치 M. 마리어와 코모로치 게저는 이 법을 1938년 이후 반유대법들의 정신적 선구인 「0번째 유대인법」이라고 부른다. 18 17 19 16 12)

베틀렌의 안정화 (1921–1931)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인 베틀렌 이슈트반은 1921년 4월 14일 총리가 되어 10년 동안 재임했다. 그는 먼저 장교 부대와 급진파 학생들을 매수와 공직, 진급과 의석으로 체제 안에 끌어들였다. 베틀렌은 이들이 국내 공산당원 대부분을 죽여 공산당을 무너뜨리는 데 큰 몫을 한 「필요악」이지만, 장기적으로는 무모한 전쟁을 부를 위협이라고 보았다. 1922년 초 그는 여러 우익 세력을 묶어 통일당(정식 명칭 기독교 농민·소농·시민당)을 세웠고, 이 당은 같은 해 선거에서 압승한 뒤 이름을 바꿔 가며 1944년까지 집권당으로 남았다. 16 20)

1922년 선거법은 소득과 6년 거주, 6년 학력을 투표 조건으로 삼아 유권자를 인구의 29.5%로 줄였고, 부다페스트와 큰 도시를 뺀 농촌 선거구에서는 1918년 이전처럼 공개투표를 되살렸다. 하원 의석은 농촌 199석, 도시 46석으로 배분되었고, 야당 후보는 출마에 필요한 추천 서명을 집권당보다 훨씬 많이 모아야 했다. 총리가 임명한 주지사가 선거를 감독했고, 내무부가 지휘하는 경찰과 헌병대는 농촌의 야당 후보를 괴롭혔다. 통일당은 1922~1935년 네 차례 총선에서 평균 61%를 득표했다. 도시 선거구는 비교적 자유롭게 치러져 야당 의원들이 의회에 들어갔는데, 베틀렌은 이를 여론을 재는 지표이자 불만의 배출구로 활용했다. 16 12)

1921년 12월 22일 정부와 사회민주당은 베틀렌–페이에르 협정을 맺었다. 사회민주당 쪽에서는 노동조합 지도자 페이에르 카로이와 함께 퍼르커시 이슈트반, 미아키치 페렌츠가, 정부 쪽에서는 베틀렌과 각료 네 명이 서명했다. 당은 공무원·철도원·우편 노동자를 조직하지 않고, 농업 노동자 사이의 선전을 제한하며, 대중 파업과 공화주의 선전, 베틀렌 외교 정책 비판을 그만두기로 했다. 그 대가로 당은 합법 활동과 노동조합 재건, 선거 참여를 보장받았고, 의석은 24석으로 묶였지만 좌파에 대한 보복을 멈추는 사면령이 나왔다. 비밀 협정이었으나 사회민주당 기관지 『네프서버』가 1924년 12월 31일 전문을 실었다. 사회민주당은 1922년부터 1944년까지 의회에 의석을 가졌고, 공산당은 이 협정을 「노동 귀족」과 자본의 타협이자 배신으로 보았다. 공산당은 협정 밖에 남아 계속 불법으로 탄압받았다. 21 10

베틀렌은 차관을 얻기 위해 당분간 트리아농 반대 운동을 접었다. 헝가리는 1922년 9월 18일 국제연맹에 가입했고, 1923년 12월 루마니아와 세르브·크로아트·슬로베니아 왕국에 20년 동안 금 크로네 2억을 배상하기로 합의해 차관의 길을 열었다. 1924년 7월 국제연맹 감독 아래 금 크로네 2억 5천만 규모의 차관이 런던에서 발행되었고, 절반은 런던 금융가에서, 나머지는 미국·이탈리아·스위스에서 왔다. 차관으로 인플레이션이 잡혔고, 1927년 새 화폐 펭괴가 도입되었으며, 1920년대 후반에는 산업과 농업 생산이 빠르게 늘었다. 노동자 의료보험 가입률은 1913년 30%에서 1927년 80%로 늘었다. 1927년 베틀렌은 파시스트 이탈리아와 우호조약을 맺었고, 경제가 나아지자 1928년 「우리는 지방을 잃은 것이 아니라 분할되었다」며 다시 공개적으로 트리아농을 공격했다. 16 12)

안정은 농촌의 깊은 불평등 위에 서 있었다. 1920년대 초의 토지개혁에도 헝가리는 전형적인 농업국으로 남았고, 900만 국민의 절반이 농업으로 살았다. 인구의 0.06%에 불과한 대지주가 1,070개 영지로 경작지의 3분의 1 가까이를 차지했고, 중간 규모 지주가 또 3분의 1을 가졌으며, 인구의 3분의 1을 이루는 농업 노동자·영세농·땅 없는 머슴·날품팔이가 나머지 3분의 1을 나눠 가졌다. 이들을 다룬 1928년의 책 『300만 거지』는 헝가리 최초의 사회 조사 기록으로 꼽히는데, 지은이 올라 죄르지는 뒤에 임레디 벨러 진영에 선 극우 기자였다. 부다페스트는 서유럽에 견줄 생활 수준을 누렸지만, 농촌 주민 대다수는 도로·학교·의사도 없는 외딴 농가에서 극심한 빈곤과 문맹 속에 살았다. 22 23) 12)

불법 공산당: 라코시 재판에서 셜러이·퓌르시트 처형까지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헝가리 공산당(KMP)은 불법화되었다. 쿤 벨러를 비롯한 지도부는 빈으로, 이어 모스크바로 망명해 임시 중앙위원회로 당을 유지하려 했고, 국내에는 합법 외곽 정당을 세웠으나 정부의 탄압으로 1927년에는 이름만 남았다. 당원은 해마다 줄어 극히 적었다. 버시 졸탄의 경력이 이 시기 당원들의 처지를 보여 준다. 1919년 열여섯 살에 입당한 그는 1921년 귀국했다가 붙잡혀 징역 10년을 받았고, 1922년 포로 교환으로 소련에 갔다. 1925년 코민테른의 지시로 다시 돌아왔다가 곧 체포되어 1926년 징역 6년을 받았고, 형은 1929년 13년 6개월로 늘어났다. 3 24)

평의회 공화국의 인민위원이었던 라코시 마차시는 코민테른 요원으로 일하다 1924년 지하 당을 재건하려고 귀국해 체포되었다. 1925년 9월 검거된 공산당원들의 사건은 11월 14~16일 즉결재판소에 올랐으나 국내외의 항의로 일반 법원에 넘겨졌고, 1926년 7~8월의 첫 재판에서 라코시는 징역 8년 6개월을 받았다. 1934년 4월 형기가 끝나자 당국은 평의회 공화국 시기의 행위를 들어 반역·반란·살인 공모와 교사, 통화 위조 혐의로 그를 다시 기소했고, 1935년 1~2월의 두 번째 재판은 종신형을 선고했다. 라코시는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상징이 되었고,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에는 그의 이름을 딴 대대가 생겼다. 1940년 10월 30일 가석방된 그는 1849년 빌라고시에서 러시아군이 노획한 헝가리 혁명군 깃발과 맞바꾸는 형식으로 11월 2일 소련으로 떠났고, 버시 졸탄과 함께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25

1931년 9월 13일 0시 20분쯤 부다페스트 서쪽 비어토르바지 고가교에서 빈으로 가던 급행열차가 폭파되어 22명이 죽고 120명이 다쳤다. 현장에서 「노동자들이여, 너희에게는 권리가 없다. 그러니 우리가 자본가들에게 맞서 쟁취하겠다…」로 시작하는 편지가 발견되자, 카로이 줄러 정부는 공산주의 테러의 시작으로 보고 다음 날 전국에 즉결재판 제도(계엄)를 선포했으며, 9월 20일에는 반국가 조직 혐의자 전체로 그 적용을 넓혔다. 실제 범인은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도 열차를 탈선시킨 머투시커 실베스테르로, 10월 빈에서 체포되어 자백했다. 그럼에도 즉결재판 제도는 유지되었다. 당시 굄뵈시 국방장관이 사건을 꾸몄다는 의혹이 널리 돌았고 지금도 이를 주장하는 역사가가 있지만 구체적 증거는 없으며, 머투시커가 앞서 다른 나라에서도 같은 범행을 했다는 사실은 이 의혹과 맞지 않는다. 26 27

1932년 7월 지하 공산당의 지도자 셜러이 임레와 퓌르시트 샨도르가 체포되었다. 셜러이는 1919년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에서 코르빈 오토의 대리를 지냈고, 망명지 모스크바에서 국제적색구원회 일을 하다 쿤 벨러의 제안으로 귀국해 불법 당 출판을 맡고 있었다. 퓌르시트는 1926년 입당해 1930년 당 지도부에 들어간 사무직 노동자였다. 두 사람은 비어토르바지 사건과 무관했지만 즉결재판 제도에 따라 재판에 넘겨졌고, 두 주 동안 고문을 받은 끝에 사형을 선고받았다. 헝가리 적색구원회의 구명 운동과 국제적 항의, 시인 요제프 어틸러가 쓴 항의 전단에도 둘은 1932년 7월 29일 교수형에 처해졌다(비어토르바지 사건 문헌에는 28일로도 적혀 있다). 셜러이는 교수대에서 쿤 벨러의 이름을 외쳤다. 크게 약해진 당은 1936년 코민테른에 의해 해산되었다. 28 29 26 3

대공황과 굄뵈시의 우경화 (1931–1936)

1929년 시작된 대공황은 헝가리의 번영을 빠르게 무너뜨렸고, 빈의 크레디트안슈탈트 은행 파산이 타격을 키웠다. 1929~1931년의 경제 붕괴 속에 베틀렌이 물러났고, 호르티는 카로이 줄러 내각을 거쳐 1932년 세게드 시절의 동지 굄뵈시 줄러를 총리로 임명했다. 굄뵈시는 1919년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었으며, 「인종 보호자」를 자처하는 인종주의 단체를 세운 반유대주의자였다. 여전히 통일당을 장악하던 베틀렌은 의회와 내각을 통해 통치하고 토지개혁과 인종법을 추진하지 않는다는 조건을 걸었고, 내무장관 케레스테시피셰르 페렌츠와 농업장관 칼러이 미클로시 같은 측근을 입각시켜 굄뵈시를 견제했다. 굄뵈시는 취임하며 반유대 발언을 공개적으로 철회했고, 산토 벨러가 이끈 유대인 지도부는 인종법을 만들지 않겠다는 약속을 받고 그를 지지했다. 굄뵈시는 이 약속을 지켰다. 12) 16 30

굄뵈시는 대외적으로 트리아농 수정에 대한 지지와 불황 극복을 위한 무역을 구했다. 1933년 그가 이탈리아로 날아가 만난 무솔리니는 트리아농 조약 수정을 지지하고, 헝가리가 옛 영토를 되찾으려 유고슬라비아·루마니아와 전쟁을 하면 돕겠다고 약속했다. 히틀러가 독일 총리가 되자 굄뵈시는 그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이 되었고, 곧 독일과 큰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4년 3월 17일 그는 무솔리니, 오스트리아 총리 엥겔베르트 돌푸스와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다. 세 의정서는 정기 협의, 상호 무역 장벽 철폐, 밀 가격 하락에 따른 헝가리 지원, 아드리아해 항구 경유 수송 편의를 약속했고, 독일의 오스트리아 팽창에 맞서는 성격도 띠었다. 반면 히틀러는 체코슬로바키아에 대한 헝가리의 요구만 지지하고 루마니아·유고슬라비아에 대한 요구는 지지하지 않겠다고 했으며, 굄뵈시가 지나치게 친유대적이라고 여겼다. 30 31

국내에서 굄뵈시는 통일당을 민족통일당으로 바꾸고 「민족 사회생활의 완전한 통제」를 목표로 내걸었으며, 1935년 총선에서는 「계급 차별 없는 단일한 헝가리 민족」을 선전했다. 그는 히틀러에게 헝가리가 곧 나치당식 일당 국가가 될 것이라고 장담했고, 4년 동안 장교단에서 보수파를 몰아내고 자기 생각에 가까운 급진파를 승진시켜 1936년에는 군이 급진파의 거점이 되었다. 독일과의 무역 보장으로 독일은 헝가리의 주된 교역 상대가 되었고, 헝가리 경제는 독일에 의존하게 되었다. 굄뵈시는 가장 극단적인 목표를 이루지 못한 채 1936년 10월 6일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20) 1 16 12) 30

더라니 정부와 죄르 강령: 1938년의 문턱

1936년 10월 12일 총리가 된 더라니 칼만은 베틀렌 노선의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우면서도 굄뵈시의 유산과 크게 갈라서려 하지는 않았다. 그는 1937년 4월 화살십자당의 전신인 국민의지당을 금지하고 지도자 살러시 페렌츠를 징역 3년에 처했지만, 진보적 지식인 운동인 「3월 전선」도 경찰의 감시와 기소를 받았다. 섭정의 권한은 다시 넓어져, 호르티는 법률 시행을 1년까지 미룰 수 있게 되었고 의회에 책임지지 않게 되었다. 1938년 선거법은 마침내 비밀투표를 되살렸지만, 투표 연령을 남성 26~30세, 여성 30세로 높여 유권자를 25만~30만 명 줄였다. 32

1938년 3월 5일 더라니는 죄르에서 열린 민족통일당 대회에서 10억 펭괴 규모의 군비 확장 계획인 죄르 강령을 발표했다. 헝가리 국립은행 총재 임레디 벨러가 마련한 이 계획은 6억 펭괴의 일회성 재산세와 4억 펭괴의 차입으로 재원을 마련해 6억은 무장에, 4억은 농업·교통·광업 등 간접 국방 부문에 쓰도록 했다. 계획은 1938년 법률 제20호가 되었고, 트리아농 조약의 군비 제한은 사실상 무너졌다. 같은 3월 오스트리아 병합으로 헝가리가 나치 독일과 국경을 맞대게 되자 더라니는 친독 인사를 입각시키고 극우 세력과 협상해 화살십자당원의 출마를 허용했다. 보수파와 호르티의 불만 속에 그는 5월 11일 사임했다. 그의 정부가 의회에 낸 제1차 유대인법은 후임 임레디 정부 아래 1938년 5월 통과되어 일부 경제 부문에서 유대인의 비율을 20%로 묶었다. 이 법들과 헝가리가 추축국 쪽으로 기울어 가는 과정은 다음 사건에서 다룬다. 33 32 19

결과

헝가리는 의회와 선거를 유지한 보수 권위주의 체제로 남았지만, 공산당은 지하에서 거의 소멸했다. 트리아농 수정의 꿈과 반공주의는 1938년 이후 헝가리를 독일과의 동맹과 반유대법으로 이끌었다.

연표와 지도

부다페스트 그랑 트리아농 죄르 비어토르바지 부더외르시 시오포크 오르고바니 세게드 4 그랑 트리아농 8 죄르 2 부다페스트 6 비어토르바지 5 부더외르시 3 오르고바니 1 세게드 7 로마
  1. 11919.05.30헝가리프랑스
    세게드 반혁명 정부

    프랑스군 점령하의 세게드에서 반공 정치인들이 정부를 세웠다.

  2. 1919.06.06헝가리
    국민군 창설

    호르티가 세게드에서 포고로 국민군을 창설했다.

  3. 1919.08.06헝가리루마니아
    루마니아군 부다페스트 입성

    평의회 공화국 붕괴 닷새 뒤 루마니아군이 수도에 들어왔다.

  4. 21919.11.16헝가리
    호르티의 부다페스트 입성

    루마니아군이 물러난 뒤 국민군이 수도에 들어갔다.

  5. 31919.11.19헝가리
    오르고바니 학살

    헤이여시 부대원들이 36명을 오르고바니 숲으로 끌고 가 살해했다.

  6. 1920.03.01헝가리
    호르티 섭정 선출

    국민의회가 왕국을 복원하고 131 대 7로 호르티를 섭정으로 뽑았다.

  7. 41920.06.04헝가리프랑스루마니아체코슬로바키아유고슬라비아오스트리아
    트리아농 조약 조인

    헝가리는 전쟁 전 영토의 28%, 인구의 36%만 남게 되었다.

  8. 1920.09헝가리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대학 입학을 민족 인구 비율로 제한해 사실상 유대인 학생을 줄였다.

  9. 1921.04.14헝가리
    베틀렌 총리 취임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텔레키의 후임이 되었다.

  10. 51921.10.23헝가리
    부더외르시 전투

    정부군이 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를 막았다.

  11. 1921.11.06헝가리체코슬로바키아
    합스부르크가 폐위

    의회가 합스부르크가의 왕위 계승권을 없앴다.

  12. 1921.12.22헝가리
    베틀렌–페이에르 협정

    사회민주당이 활동 제한을 받아들이는 대가로 합법 활동을 보장받았다.

  13. 1922.09.18헝가리
    국제연맹 가입

    차관을 얻기 위한 첫 조건이었다.

  14. 1924.07헝가리영국
    국제연맹 차관

    금 크로네 2억 5천만 규모의 차관이 런던에서 발행되었다.

  15. 1926.08헝가리
    라코시 첫 재판

    라코시가 징역 8년 6개월을 선고받았다.

  16. 1927헝가리이탈리아
    이탈리아와 우호조약

    베틀렌이 무솔리니의 이탈리아와 조약을 맺었다.

  17. 61931.09.13헝가리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22명이 죽었고, 정부는 공산당을 지목해 즉결재판 제도를 선포했다.

  18. 1932.07.29헝가리
    셜러이·퓌르시트 처형

    두 공산당 지도자가 즉결재판 끝에 교수형에 처해졌다.

  19. 1933헝가리독일
    굄뵈시의 히틀러 방문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이 되었다.

  20. 71934.03.17헝가리이탈리아오스트리아
    로마 의정서

    이탈리아·오스트리아·헝가리가 협의와 경제 협력을 약속했다.

  21. 1935.02헝가리
    라코시 종신형

    두 번째 재판에서 평의회 공화국 시기의 행위로 종신형을 받았다.

  22. 81938.03.05헝가리
    죄르 강령

    더라니가 10억 펭괴 규모의 군비 확장 계획을 발표했다.

  23. 1940.11.06헝가리소련
    라코시의 소련 도착

    1849년 혁명군 깃발과 맞바꾸는 형식으로 풀려나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관련 인물 16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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