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945

이탈리아 전선과 무솔리니의 몰락

이탈리아는 왜 1943년 전쟁에서 이탈했는데도 1945년까지 전선과 내전의 격전지가 되었는가?

이탈리아 전선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5월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의 지중해 전역이다. 북아프리카 패배와 본토 폭격 뒤 파시스트 체제 내부와 국왕은 전쟁 지속이 정권과 국가를 파괴한다고 판단했지만,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떼어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어 두려 했다. 시칠리아 점령 뒤 대파시스트 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는 9월 3일 카시빌레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9월 8일 공개되자 독일군은 중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지만 아펜니노산맥과 구스타프선, 안치오, 몬테카시노에서 막혔고, 1944년 6월 로마를 점령한 뒤에도 고딕선에서 소모전을 치렀다. 1945년 4월 최종 공세와 파르티잔 총봉기가 북부를 무너뜨렸고,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독일군 집단군 C는 5월 2일 항복했다.

튀니스가 함락되기 전, 이미 무너지고 있던 전쟁

1943년 5월 13일 튀니스와 비제르트에서 추축군이 항복했을 때, 이탈리아의 위기는 단순히 다음 침공을 기다리는 군사적 위기가 아니었다. 1922년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국가는 야당과 독립 노동조합을 억압하고, 군사적 위신과 제국 건설을 정권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제국의 전쟁은 이탈리아가 감당할 수 있는 생산력과 수송력을 넘어섰다. 1940년 참전 뒤 그리스,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와 소련 전선에서 연달아 패배했고, 독일군의 지원 없이는 작전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43년 봄 북아프리카에서 약 25만 명이 포로가 된 것은 병력 손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결정하거나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전쟁의 비용은 전선 밖에서도 정권을 잠식했다. 연합군의 공습은 항구와 공업 도시를 때렸고, 연료와 식량 부족은 배급과 암시장,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다. 1943년 3월 토리노의 피아트 미라피오리 공장에서 시작된 노동자 파업은 파시스트 통치 아래 공개적 집단행동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신호였다. 파업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하나의 혁명 계획을 공유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 중단과 생활 조건 개선이라는 요구가 반파시즘과 결합하면서, 노동계급의 불만이 국가적 위기의 정치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1920년대에 추방·투옥·망명을 겪었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아직 분열되어 있었지만 정권 이후의 질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출구를 서로 다르게 상상한 세 세력이 있었다. 무솔리니와 충성파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해야 이탈리아가 강대국으로 남고 사회혁명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군부·보수 엘리트는 왕정과 국가기구를 보존하려면 무솔리니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파시스트들은 전쟁 중단을 독재의 종식과 연결했지만,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사이에는 누가 새 국가의 주도권을 가질지 합의가 없었다. 연합국도 이탈리아를 즉시 해방할 생각만 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시칠리아와 본토에 압력을 가해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떼어 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으며, 지중해의 항로와 기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므로 5월의 항복은 이탈리아 사회가 전쟁을 끝낸 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같은 붕괴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결과

이 전선은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떼어 냈지만 즉시 해방하지는 않았다. 독일 점령,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왕국 정부와 저항운동이 겹치면서 전쟁은 점령전이자 이탈리아인 사이의 내전이 되었다. 민간인, 병사, 유대인, 파르티잔이 보복과 폭격, 전투의 비용을 부담했다. 1945년 해방은 파시즘을 무너뜨렸지만 왕정과 기존 국가기구를 곧바로 폐지하지 않았고, 저항세력이 전후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할 공간을 남겼다. 지중해 전략 논쟁은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의 전선 개방 문제와 이어진다.

연표

  1. 1943.05.13
    북아프리카의 추축군 항복

    튀니스와 비제르트가 함락되고 약 25만 명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탈리아 본토가 다음 침공 목표가 되었다.

  2. 1943.07.09
    시칠리아 침공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총괄한 허스키 작전이 시작되었고, 조지 패튼버나드 몽고메리가 이끄는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3. 1943.07.24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결별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19 대 7, 기권 1로 무솔리니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4. 1943.07.25
    무솔리니의 축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했으며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5. 1943.08.17
    시칠리아 함락

    연합군이 메시나에 들어갔지만 독일군은 병력 대부분을 해협 건너 본토로 철수시켰다.

  6. 1943.09.03
    카시빌레 휴전협정

    바돌리오 정부는 카시빌레에서 연합국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7. 1943.09.08
    휴전의 공개와 독일 점령

    휴전 공개 뒤 독일군은 중북부 이탈리아와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공격했고 국왕과 정부는 브린디시로 이동했다.

  8. 1943.09.12
    무솔리니의 구출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 공수부대가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를 구출했고, 그는 독일 점령지의 협력 정부를 이끌었다.

  9. 1944.01.22
    안치오 상륙

    연합군은 구스타프선 뒤를 흔들기 위해 안치오에 상륙했지만 교두보를 확대하지 못해 장기전에 묶였다.

  10. 1944.06.04
    로마 점령

    연합군은 네 차례 공세 끝에 구스타프선을 돌파하고 로마에 들어갔다.

  11. 1944.08.25
    고딕선 공세

    올리브 작전은 여러 지점을 뚫었지만 결정적 돌파에는 실패했고 전선은 겨울까지 북부에 남았다.

  12. 1945.04.25
    총봉기와 북부 해방

    북부 해방위원회가 총봉기를 선언했고 파르티잔과 연합군의 최종 공세가 북부 도시들을 해방했다.

  13. 1945.05.02
    독일군 항복

    독일군 집단군 C의 항복이 발효되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조직적인 전투가 끝났다.

관련 인물 3명

출처: George F. Botjer, Sideshow War: The Italian Campaign, 1943–1945,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6.Richard Lamb, War in Italy, 1943–1945: A Brutal Story, St. Martin's Press, 1993.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Chronology of Army History, 2024.The National WWII Museum, The Allied Campaign in Italy, 1943–45: A Timeline, Part One, 2023.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Italy, Holocaust Encyclopedia,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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