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3–1945

이탈리아 전선과 무솔리니의 몰락

이탈리아는 왜 1943년 전쟁에서 이탈했는데도 1945년까지 전선과 내전의 격전지가 되었는가?

이탈리아 전선은 1943년 7월 연합군의 시칠리아 침공으로 시작되어 1945년 5월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으로 끝난 제2차 세계대전의 지중해 전역이다. 북아프리카 패배와 본토 폭격 뒤 파시스트 체제 내부와 국왕은 전쟁 지속이 정권과 국가를 파괴한다고 판단했지만, 연합군은 이탈리아를 전쟁에서 떼어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어 두려 했다. 시칠리아 점령 뒤 대파시스트 평의회는 베니토 무솔리니를 축출했고, 피에트로 바돌리오 정부는 9월 3일 카시빌레 휴전협정에 서명했다. 그러나 9월 8일 공개되자 독일군은 중북부를 점령하고 무솔리니를 구출해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세웠다. 연합군은 살레르노와 타란토에 상륙했지만 아펜니노산맥과 구스타프선, 안치오, 몬테카시노에서 막혔고, 1944년 6월 로마를 점령한 뒤에도 고딕선에서 소모전을 치렀다. 1945년 4월 최종 공세와 파르티잔 총봉기가 북부를 무너뜨렸고, 무솔리니는 체포되어 처형되었으며 독일군 집단군 C는 5월 2일 항복했다.

튀니스가 함락되기 전, 이미 무너지고 있던 전쟁

1943년 5월 13일 튀니스와 비제르트에서 추축군이 항복했을 때, 이탈리아의 위기는 단순히 다음 침공을 기다리는 군사적 위기가 아니었다. 1922년 이후 베니토 무솔리니의 파시스트 국가는 야당과 독립 노동조합을 억압하고, 군사적 위신과 제국 건설을 정권의 정당성으로 삼았다. 그러나 그 제국의 전쟁은 이탈리아가 감당할 수 있는 생산력과 수송력을 넘어섰다. 1940년 참전 뒤 그리스, 북아프리카, 동아프리카와 소련 전선에서 연달아 패배했고, 독일군의 지원 없이는 작전을 유지하기 어려웠다. 1943년 봄 북아프리카에서 약 25만 명이 포로가 된 것은 병력 손실만이 아니라 이탈리아가 독자적으로 전쟁을 결정하거나 끝낼 수 없다는 사실을 드러낸 사건이었다.

전쟁의 비용은 전선 밖에서도 정권을 잠식했다. 연합군의 공습은 항구와 공업 도시를 때렸고, 연료와 식량 부족은 배급과 암시장, 임금 하락으로 이어졌다. 1943년 3월 토리노의 피아트 미라피오리 공장에서 시작된 노동자 파업은 파시스트 통치 아래 공개적 집단행동이 여전히 가능하다는 신호였다. 파업 참가자들이 처음부터 하나의 혁명 계획을 공유했던 것은 아니다. 전쟁 중단과 생활 조건 개선이라는 요구가 반파시즘과 결합하면서, 노동계급의 불만이 국가적 위기의 정치적 표현으로 바뀌었다. 동시에 1920년대에 추방·투옥·망명을 겪었던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자유주의자들은 아직 분열되어 있었지만 정권 이후의 질서를 논의하기 시작했다.

위기의 출구를 서로 다르게 상상한 세 세력이 있었다. 무솔리니와 충성파는 독일과의 동맹을 유지해야 이탈리아가 강대국으로 남고 사회혁명을 막을 수 있다고 보았다. 국왕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와 군부·보수 엘리트는 왕정과 국가기구를 보존하려면 무솔리니와 거리를 두어야 한다고 판단했다. 반파시스트들은 전쟁 중단을 독재의 종식과 연결했지만, 자유주의자와 사회주의자, 공산주의자 사이에는 누가 새 국가의 주도권을 가질지 합의가 없었다. 연합국도 이탈리아를 즉시 해방할 생각만 한 것이 아니었다. 미국과 영국의 지도자들은 시칠리아와 본토에 압력을 가해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떼어 내고, 독일군을 남쪽에 묶으며, 지중해의 항로와 기지를 확보하려 했다. 그러므로 5월의 항복은 이탈리아 사회가 전쟁을 끝낸 순간이 아니라, 서로 다른 목적을 가진 세력들이 같은 붕괴를 각자의 방식으로 이용하기 시작한 출발점이었다.

시칠리아는 왜 다음 전장이 되었나

북아프리카에서 약 25만 명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항복한 1943년 5월 13일, 연합군은 추축국을 유럽의 한 전쟁터에서 처음 몰아냈다. 그러나 다음 선택은 단순한 승리의 추격이 아니었다. 영국은 시칠리아를 공격하면 이탈리아의 취약한 사기를 흔들어 전쟁에서 이탈시킬 수 있고, 독일군을 남쪽으로 끌어내 동부전선과 앞으로의 프랑스 작전에 부담을 줄 수 있다고 주장했다. 미국 쪽에서는 프랑스 북부 상륙을 미루는 지중해 작전이 결정적 제2전선을 늦출 수 있다는 불안이 있었지만, 시칠리아 점령은 지중해 해상로를 열어 수송 비용을 낮추고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떼어낼 가능성이 있었다. 결국 카사블랑카 회담 뒤 연합참모본부는 시칠리아를 택했다. 이는 이탈리아 민중을 수동적으로 ‘해방’하려는 계획만은 아니었다. 연합군은 이탈리아 국가의 균열을 군사적으로 확대해 독일의 동맹 체계를 약화시키려 했다. 그 계산은 맞았지만, 독일군이 이탈리아군의 붕괴를 대신 메울 위험도 함께 키웠다.

계획은 지리와 지휘권을 둘러싼 타협이었다. 드와이트 D. 아이젠하워가 총괄하고 해럴드 알렉산더가 지상군을 조정했지만, 조지 S. 패튼의 미 제7군과 버나드 L. 몽고메리의 영 제8군은 처음부터 같은 방식으로 섬을 보지 않았다. 넓게 흩어진 상륙은 공항과 항구를 동시에 빼앗을 수 있지만 각 부대가 서로 돕기 어렵다. 몽고메리는 1943년 4월 24일 분산안을 반대하고 남동부에 전력을 모으자고 주장했고, 항공 및 해군 지휘관들은 상륙 함대가 추축국 비행장에 노출된다고 맞섰다. 5월 초 계획은 행정상의 위험, 해변으로 보급해야 하는 문제를 감수하되 작전상의 분산 위험을 줄이는 쪽으로 바뀌었다. 상륙용 수륙양용 차량 DUKW가 해변 보급을 예상보다 쉽게 만든 것은 이 타협을 현실로 바꾼 물질적 조건이었다.

기만도 정치와 물자의 일부였다. 영국 정보부의 작전 민스미트는 가짜 문서를 실은 시신을 스페인 해안에 흘려보내 독일 지휘부가 주공을 사르데냐와 그루지야가 아닌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방면으로 오인하게 했다. 실제 상륙은 7월 9일 밤부터 시작되어 7월 10일 새벽 남부 해안의 젤라, 리카타, 스코글리티에 집중되었다. 3,000척이 넘는 함정이 사흘 동안 15만 명 이상의 병력과 장비를 실어 날랐고 4,000대 이상의 항공기가 엄호했다. 폭풍은 공수부대를 흩뜨리고 상륙 자체를 위협했지만, 추축국에는 연합군이 당장 공격하지 않을 것이라는 잘못된 확신을 주었다. 시칠리아의 초기 방어군은 약 20만 명의 이탈리아군과 훨씬 적은 독일군이었고, 독일 지휘부는 주공을 다른 섬들로 예상했다. 따라서 상륙은 성공했지만, 그것이 곧 이탈리아의 해방을 뜻하지는 않았다. 연합군은 한 국가의 전쟁 의지를 꺾는 데 성공하는 순간, 독일군이 그 빈자리를 무력으로 메울 조건도 만들고 있었다.

파시즘은 표결로 끝났지만, 왕정이 결단했다

시칠리아 상륙이 무솔리니를 곧바로 무너뜨린 것은 아니었다. 진짜 균열은 전쟁을 계속할 능력과 정권을 보존할 가능성이 서로 충돌하면서 파시스트 지배층 안에서 벌어졌다. 1943년 3월 토리노 피아트 미라피오리 공장에서 시작된 파업은 북부 공업도시로 번졌다. 임금과 식량을 둘러싼 요구였지만, 20년간 억눌린 노동자들이 국가의 명령을 더는 자동으로 따르지 않는다는 신호이기도 했다. 폭격, 연료와 식량 부족, 튀니지 패배는 군부와 관료에게 독일과의 동맹이 이탈리아 국가 자체를 위험에 빠뜨린다는 판단을 강요했다.

그렇다고 7월 24일 밤의 대평의회가 반파시스트 혁명의 회의였던 것은 아니다. 디노 그란디와 갈레아초 치아노를 포함한 다수의 파시스트 지도자들은 파시즘의 사회질서를 폐기하려 한 것이 아니라, 무솔리니 개인에게 집중된 전쟁 지휘를 국왕과 군부가 통제하는 헌정 틀로 되돌려 전쟁에서 빠져나오려 했다. 그란디의 결의는 무솔리니를 직접 해임하라는 법적 명령이라기보다, 국왕이 헌법상 군 통수권과 국가 운영 권한을 회복하라는 요청이었다. 이 차이는 중요했다. 19 대 7, 기권 1의 표결은 정권 내부의 정치적 파산을 드러냈지만, 법적으로 총리를 해임할 권한은 여전히 국왕에게 있었다.

무솔리니도 회의의 위험을 몰랐다고 단정할 수 없다. 최근 연구자 에밀리오 긴은 그가 대평의회에서 반대파를 일부러 움직여 히틀러에게 이탈리아의 국내 위기를 입증하려 했다는 해석을 제시한다. 무솔리니의 계산에서 표결은 독일에 양보를 받아내기 위한 마지막 도박일 수 있었다. 그러나 그 도박은 그가 예상한 외교적 압박이 아니라 왕정의 행동으로 귀결됐다. 7월 25일 정례 알현에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에게 피에트로 바돌리오가 정부를 맡는다고 통보했다. 대화가 끝난 뒤 무솔리니는 경찰에 체포됐다.

이 장면을 민중이 파시즘을 단숨에 전복한 순간으로만 쓰면 이후의 비극을 놓친다. 왕과 장군들이 택한 것은 독일과의 즉각적인 단절이나 대중 동원이 아니라, 왕정을 보존한 채 전쟁의 책임을 새 정부로 넘기는 궁정 쿠데타였다. 파시스트 기관은 해체되지 않았고, 바돌리오 정부는 독일의 반응을 두려워해 전쟁을 계속한다고 선언했다. 따라서 무솔리니의 실각은 해방의 종결이 아니라 권력의 공백을 만들었다. 그 공백을 독일군이 무장으로 메울 준비를 이미 하고 있었고, 이탈리아 사회의 반파시스트 세력은 아직 그 국가적 결정을 자신들의 해방으로 바꿀 조직을 갖추지 못했다.

시칠리아에서 빠져나온 군대, 비밀로 묶인 항복

시칠리아 함락은 추축군의 전멸이 아니었다. 독일군 지휘관 한스 발렌틴 후베는 섬을 지키는 싸움보다 병력을 보존하는 편이 다음 전투에 유리하다고 판단했고, 독일군은 8월 11일부터 17일까지 메시나 해협을 건너 철수하는 레어강 작전을 실행했다. 약 3만 9,600명의 독일군과 9,000대가 넘는 차량, 전차 27대와 중포 94문이 빠져나갔다. 이탈리아군도 함께 철수했지만, 연합군은 항구와 해협을 동시에 봉쇄할 수단이 부족했고 섬의 험한 지형은 추격을 늦췄다. 따라서 8월 17일 연합군이 메시나에 들어갔을 때 얻은 것은 포로의 대량 포획보다 이탈리아 본토로 건너갈 발판이었다. 독일군은 패배했지만 남부 이탈리아에서 다시 방어선을 세울 병력과 장비를 보존했다.

이 조건에서 바돌리오 정부가 원한 것은 명예로운 강화가 아니라 독일의 보복을 견딜 시간을 사는 일이었다. 정부는 이미 독일군이 알프스와 본토에 증파되고 있음을 알았지만, 이탈리아군의 연료와 탄약은 부족했고 로마 주변 군단조차 독일군을 단독으로 상대할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장군 주세페 카스텔라노는 연합군에게 이탈리아 영토를 독일군의 공격으로부터 보호할 상륙과 공수작전을 먼저 요구했다. 그러나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참모 발터 베델 스미스가 제시한 9월 3일 협정은 협상의 여지가 거의 없는 항복문서였다. 제1조는 이탈리아군의 즉각적인 모든 적대행위 중지를, 제6조와 제7조는 연합군이 본토와 섬의 항구 및 비행장을 작전기지로 사용할 권리를 규정했다. 이탈리아는 독일군에게 군사시설을 제공하지 않도록 최선을 다해야 했지만, 연합군의 실질적 보호를 보장받지는 못했다.

바돌리오와 국왕은 이 문서에 서명하는 것 자체보다 발표 시점을 더 두려워했다. 서명은 9월 3일에 이루어졌지만, 연합군의 사전 동의 없이는 공개할 수 없었다. 정부는 군대 전체에 명확한 전환 명령을 내리지 않았고, 그 결과 비밀은 독일군의 기습을 막는 장치인 동시에 이탈리아군을 무장 해제한 족쇄가 되었다. 이탈리아 지도자들의 계산은 전쟁을 끝내 국가를 보존하려는 것이었고, 연합군의 계산은 이탈리아의 항복을 독일과의 전쟁을 위한 통로로 만드는 것이었다. 두 계산이 만나는 순간은 해방이 아니라, 독일군이 이미 준비한 점령과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불러왔다.

항복을 알린 국가는 누구의 명령을 따랐는가

9월 8일의 문제는 항복 자체보다 항복 뒤에 누구에게 복종할 것인지가 정해져 있지 않았다는 데 있었다. 바돌리오의 라디오 성명은 이탈리아가 연합국과 휴전했다는 사실을 알렸지만, 독일군에 맞서 즉시 무장하라는 작전 명령은 아니었다. 카시빌레 협정은 이탈리아군에게 연합국에 대한 적대행위를 중지하고 병력과 시설을 보존하라고 요구했지만, 독일군을 어떻게 공격할지는 최고사령부가 조직적으로 전달하지 못했다. 국왕과 정부가 로마를 떠나 브린디시로 이동하는 동안, 국내외에 흩어진 부대들은 상급 명령과 통신망을 잃었다. 독일군은 이 공백을 미리 준비한 작전 아체로 메웠다. 이 작전은 이탈리아를 동맹국으로 대우하던 군사적 외피를 벗기고, 철도와 항만, 비행장, 병영을 장악하며 이탈리아군의 무장을 해제하는 계획이었다. 결과는 한 가지로 통일되지 않았다. 사르데냐와 코르시카, 남부 아풀리아의 일부 부대는 독일군에 저항했지만, 로마의 방어는 지휘 혼란 속에 무너졌다. 케팔로니아에서는 아퀴 사단이 항복 뒤에도 무장해제를 거부했다. 독일군은 전투와 처형으로 대응했고, 이탈리아군 1,315명이 전투에서 죽고 5,100명 이상이 살해되었다. 이 사건은 이탈리아의 이탈이 곧 해방을 뜻하지 않았음을 보여 준다. 국가는 연합국과 협정했지만 병사들은 독일 점령, 포로화, 강제노동, 또는 저항 중 하나를 선택하도록 내몰렸다.

무솔리니의 구출은 이 군사적 공백을 정치적 대안으로 바꾼 사건이었다. 바돌리오 정부는 그가 다시 독일의 상징이 되는 것을 막으려 여러 장소로 옮겼지만, 독일 정보망은 그의 최종 수용지가 그란사소의 캄포 임페라토레 호텔임을 확인했다. 9월 12일 하랄트 모르스가 지휘한 공수 및 지상 병력이 접근했고, 오토 스코르체니가 SS 병력과 함께 글라이더로 호텔에 내렸다. 이 작전은 흔히 스코르체니의 단독 영웅담으로 소비되었지만, 실제 지휘와 병력 운용은 모르스와 독일 공수부대의 몫이었다. 카라비니에리 경비대는 발포하지 않았고, 작전 중 사망자는 이탈리아 삼림경비원과 카라비니에리 한 명을 포함한 소수에 그쳤다. 나치 선전은 이를 독일의 결단과 기술이 무솔리니를 되찾은 극적인 승리로 포장했다. 히틀러가 되살린 것은 옛 정권 그 자체가 아니라 독일 점령지에서 독일군의 명령을 집행할 협력 정부였다. 무솔리니는 9월 23일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선포했고, 같은 순간 이탈리아 왕국도 연합국 편에서 전쟁을 계속했다. 따라서 9월의 휴전은 전쟁의 종료가 아니라 두 이탈리아 국가와 독일 점령, 그리고 무장 저항이 겹치는 새로운 전쟁의 시작이었다.

안치오에서 멈춘 순간, 로마로 달려간 순간

안치오 상륙은 구스타프선을 우회하면 전쟁이 풀릴 것이라는 계산에서 나왔다. 윈스턴 처칠은 로마를 위협하는 대담한 상륙을 원했지만, 미국 지휘부는 노르망디 상륙에 필요한 상륙정과 병력을 떼어 와야 한다는 점, 살레르노에서 독일군의 반격에 거의 밀려났던 기억을 알고 있었다. 그래서 계획의 목적은 처음부터 하나가 아니었다. 해럴드 알렉산더에게 핵심은 알바노 구릉을 장악해 카시노와 구스타프선으로 이어지는 6번·7번 국도를 끊는 것이었고, 마크 W. 클라크에게는 카시노 공격을 돕도록 독일군 예비대를 끌어내는 것도 충분한 성과였다. 현장 지휘관 존 루카스가 조심한 것은 무능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1월 22일 상륙은 거의 저항 없이 성공했지만, 당일 밤 이미 3만 6천 명과 차량 3,200대가 들어온 교두보는 뒤로 늪과 바다, 앞으로 산악 지형을 둔 좁은 함정이었다. 루카스는 병력을 곧장 알바노로 밀어 넣으면 독일군이 각개격파할 것이라고 보아 방어선을 굳혔다. 그 사이 알베르트 케셀링은 로마 주변과 구스타프선에서 병력을 빼고 프랑스·독일 등지의 증원까지 모았다. 1월 25일 무렵 독일군 약 4만 명이 교두보를 포위했고, 30일 시스테르나로 침투한 미군 레인저 767명 가운데 전선으로 돌아온 사람은 6명뿐이었다. 2월의 반격과 포격은 전투를 제1차 세계대전식 참호전으로 바꾸었다. 6주 동안 양측은 거의 2만 명씩 손실했고, 미 제6군단의 비전투 손실도 3만 7천 명에 이르렀다. 루카스는 2월 22일 교체되었지만, 교두보가 실패한 것은 아니다. 5월 11일 카시노와 가리글리아노에서 연합군이 공격을 재개하자 독일군은 안치오 방면 병력을 남쪽으로 돌려야 했다. 5월 23일 작전 버펄로는 시스테르나를 거쳐 발몬토네와 6번 국도를 끊으려 했다. 이것은 로마 점령보다 독일 제10군의 퇴로를 자르는 군사적 목표였다. 그러나 5월 말 마크 W. 클라크는 주공을 북서쪽, 7번 국도를 따라 로마로 돌렸다. 그는 미국 제5군이 먼저 로마에 들어가기를 원했다. 그 결과 독일 제10군의 상당 부분은 포위되지 않고 북쪽으로 빠져나가 다음 방어선에서 싸울 수 있었다. 로마는 6월 4일 해방되었지만, 안치오의 대가는 독일군을 단번에 무너뜨린 승리가 아니라 네 달 동안 병력과 포탄을 묶어 둔 소모전이었다. 다음 날 노르망디 상륙이 시작되면서 이 성과의 의미는 가려졌고, 이탈리아 전쟁은 끝나지 않은 채 북쪽으로 옮겨 갔다.

산악의 방어선을 넘은 것은 군대만이 아니었다

고딕선 공세가 곧바로 북부 평야를 열지 못한 까닭은 독일군의 의지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이 선은 라스페치아에서 아드리아해까지 아펜니노산맥의 능선을 이용한 약 16킬로미터 깊이의 방어대였고, 독일군은 1만 5천 명이 넘는 강제노동자를 동원해 기관총 진지 약 2,375곳, 대전차포와 박격포 진지 479곳, 지뢰 9만 5천여 발을 배치했다. 연합군은 1944년 8월 25일 올리브 작전에서 아드리아해 연안을 택했다. 해럴드 알렉산더의 당초 구상은 중앙 아펜니노를 정면으로 치는 것이었지만, 제8군 사령관 올리버 리스는 산악전에서 전차와 포병의 우세를 살릴 수 없다고 반대했다. 연합군은 여러 지점을 뚫고 리미니를 점령했으나, 케셀링은 예비대를 늦게 투입한 뒤 질서 있게 철수했다. 병력 일부가 프랑스 남부 상륙작전으로 빠져나간 상황에서, 이 전투의 성과는 돌파라기보다 독일군을 계속 묶어 두고 겨울을 견디게 만든 소모였다. 후방에서는 파르티잔의 역할이 커졌다. 1944년 9월 무렵 독일 장군들은 산악지대에서 표식을 단 차량으로 이동하기 어려웠고, 독일군의 공사와 보급은 매복과 사보타주로 방해받았다. 그러나 저항은 단순히 연합군을 기다린 것이 아니었다. 북부 이탈리아 민족해방위원회는 공장과 도시의 조직을 보존하고, 독일군과 이탈리아 사회공화국군이 물러날 때 행정권을 넘겨받을 준비를 했다. 1945년 4월 연합군의 공세가 세니오강과 산테르노강을 넘어 포강 평야로 나오자, 독일군은 더 이상 예비대를 채울 수 없었다. 4월 19일 민족해방위원회는 총봉기를 명령했고, 4월 25일 밀라노와 토리노에서 파르티잔과 노동자들이 봉기했다. 밀라노는 연합군보다 이틀 먼저 파르티잔이 장악했고, 토리노에서는 피아트 공장 점거를 포함한 도시 투쟁이 벌어졌다. 볼로냐는 4월 21일 폴란드군과 이탈리아 왕국군 전투단이 들어오기 전 이미 저항세력이 독일군의 퇴로를 압박하고 있었다. 따라서 1945년의 해방은 외부 군대가 빈 공간에 들어온 사건이 아니었다. 연합군의 화력과 기갑부대가 독일 방어를 붕괴시킨 동시에, 파르티잔은 도시를 먼저 점령하고 협력자와 점령군의 권력을 해체했다. 다만 이 두 과정의 결합은 곧 긴장도 낳았다. 저항세력이 전쟁 중 만든 정치적 권위를 어디까지 보존할 것인지, 왕국 정부와 연합군의 국가기구를 얼마나 빨리 복원할 것인지가 해방의 순간부터 쟁점이 되었다.

항복은 전장에서만 결정되지 않았다

1945년 5월 2일의 항복은 포강을 건넌 연합군의 승리만으로 설명되지 않는다. 독일군 집단군 C는 여전히 수십만 명의 병력을 거느리고 있었지만, 4월의 연합군 공세와 폭격으로 보급선이 끊겼고 독일 본토와 오스트리아로 빠져나갈 길도 닫혀 갔다. 독일군 지휘부가 시간을 더 벌면 알프스에서 최후 항전을 조직할 수 있다는 기대와, 그 시간을 벌수록 이탈리아 민간인과 병사에게 보복과 파괴가 더해진다는 현실이 충돌했다.

그 틈에서 스위스의 미국 전략사무국(OSS) 지국장 앨런 덜레스와 무장친위대 장군 카를 볼프 사이에 작전 선라이즈라는 비밀 접촉이 진행되었다. 볼프가 원한 것은 단순한 군사적 항복보다 유리한 철수와 자신의 책임을 덜어 줄 거래였다. 덜레스는 독일군이 이탈리아 북부의 무기를 들고 오스트리아로 이동하는 것을 거부했다. 대신 항복 뒤에도 독일 지휘관이 당분간 부대를 통제하게 하여 질서 있는 무장해제와 시설 인계를 확보하려 했다. 이 선택은 연합군이 파르티잔에게 북부의 통치와 무장해제를 맡기지 않으려 했다는 뜻이었다. 소련은 미국과 독일이 별도 강화를 추진한다고 의심했고, 협상에 소련 대표를 넣어야 한다고 요구했지만 실제 회담에는 참여하지 못했다. 따라서 선라이즈는 전쟁을 빨리 끝낸 실무적 통로인 동시에 연합국 내부의 불신을 키운 사건이었다.

결정적인 문서는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체결된 항복문서였다. 독일군 남서방면 총사령관을 대신해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의 참모 장교가 서명했고, 문서는 5월 2일 그리니치 표준시 정오부터 육해공의 모든 적대행위를 중지하도록 명령했다. 독일군뿐 아니라 독일 지휘 아래 있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군사·준군사 조직도 대상이었다. 병력은 현 위치를 지키고, 무기와 탄약을 넘기며, 철도와 공장과 문서 보존, 포로와 정치범 석방, 파르티잔으로 구성된 민족해방위원회(CLNAI)와의 연락까지 수행해야 했다. 항복은 이탈리아 전쟁을 끝냈지만, 누가 해방의 주체였는가라는 문제를 끝내지는 않았다. 연합군은 국가적 통제를 확보했고, 파르티잔은 실제 도시와 공장을 장악한 경험을 근거로 새 질서의 권리를 주장했다. 전투의 종결은 곧바로 정의와 책임의 종결이 아니었다.

끝난 것은 전쟁이었고, 끝나지 않은 것은 정당성이었다

1945년 4월의 승리는 무엇을 결정했는가. 카세르타에서 4월 29일 서명된 항복은 독일군 집단군 C가 5월 2일 정오부터 무조건 항복한다는 것을 확정했고, 북부의 독일 점령과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의 군사적 기반을 함께 무너뜨렸다. 그러나 그것은 이탈리아가 곧바로 하나의 정치적 주체로 합쳐졌다는 뜻이 아니었다. 왕국 정부의 이탈리아 공동교전군, 각지의 파르티잔, 북부해방민족위원회, 그리고 연합군은 모두 해방의 주체라고 주장했지만 서로 같은 미래를 뜻하지 않았다. 파르티잔에게 4월 25일은 외국 군대가 도착한 날이 아니라 노동자와 시민이 도시를 장악하고 파시즘의 책임을 심판한 봉기의 날이었다. 왕정과 바돌리오 체제에 가까운 세력은 국가의 연속성과 질서 회복을 강조했다. 연합군은 치안과 행정을 통제하며 공산주의 세력이 독자적인 권력 중심을 만드는 것을 막으려 했다. 따라서 해방은 파시스트 국가의 붕괴를 확정했지만, 누가 새 국가의 주권을 대표하는지는 확정하지 않았다.

이 결말을 해석하는 방식도 갈렸다. 클라우디오 파보네는 저항을 단순한 애국적 전쟁으로만 부르지 않고, 독일 점령에 맞선 민족해방전쟁, 파시즘을 무너뜨린 계급적·정치적 해방전쟁, 이탈리아인끼리 싸운 내전이라는 ‘삼중전쟁’으로 분석했다. 이 틀에서는 협력자와 파르티잔의 선택을 모두 외부 점령의 부산물로 지울 수 없으며, 1945년의 폭력과 숙청은 전후 국가의 성격을 둘러싼 투쟁이기도 했다. 반대편의 국민적 서사는 이 구분이 공동체의 분열과 보복을 과장한다고 보며, 연합군과 왕국군의 군사적 승리를 중심에 둔다. 최근 연구는 어느 한쪽을 완전히 폐기하기보다, 1943년 이후의 국가 붕괴와 독일의 강압, 파시스트 협력, 파르티잔의 자율적 동원을 한 장면 안에서 함께 보려 한다. 국립 제2차세계대전박물관이 집계한 1943년 9월부터 1945년 5월까지의 이탈리아 민간인 사망자는 120,060명이며, 파르티잔 사망자는 보복 희생을 포함해 54,700명으로 제시된다. 숫자의 범위와 책임 배분에는 논쟁이 남지만, 이 자료들은 해방을 깔끔한 군사적 결승선으로 묘사할 수 없게 한다. 전선은 끝났고 파시즘의 국가 형태도 무너졌지만, 왕정의 존속, 저항운동의 정치적 유산, 협력자 처벌의 한계는 공화국이 성립한 뒤에도 해결되지 않은 질문으로 남았다.

결과

이 전선은 이탈리아를 추축국에서 떼어 냈지만 즉시 해방하지는 않았다. 독일 점령, 이탈리아 사회공화국, 왕국 정부와 저항운동이 겹치면서 전쟁은 점령전이자 이탈리아인 사이의 내전이 되었다. 민간인, 병사, 유대인, 파르티잔이 보복과 폭격, 전투의 비용을 부담했다. 1945년 해방은 파시즘을 무너뜨렸지만 왕정과 기존 국가기구를 곧바로 폐지하지 않았고, 저항세력이 전후 정치의 정당성을 주장할 공간을 남겼다. 지중해 전략 논쟁은 「제2전선과 노르망디 상륙」의 전선 개방 문제와 이어진다.

연표와 지도

로마 밀라노 몬테카시노 시칠리아 12 7 독일군 · 북이탈리아 11 연합군 · 고딕선 8 그란사소 4 빌라 사보이아 3 베네치아 궁전 10 로마 13 카세르타 9 연합군 · 안치오 5 메시나 6 카시빌레 1 튀니스 2 연합군 연합군2911독일군7

1943.07.09 시칠리아 상륙

  • 추축국 (1943년 9월부터 독일 점령지와 살로 공화국)
  • 연합국과 남부의 왕국 정부

경계는 근사치이며 작전 기록과 볼투르노·구스타프·고딕 방어선을 바탕으로 개략적으로 그렸습니다. 1945년 4월에는 파르티잔이 해방한 도시 가운데 밀라노·토리노만 표시했고, 1945년 5월 트리에스테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이 먼저 들어갔습니다.

  1. 11943.05.13
    북아프리카의 추축군 항복

    튀니스와 비제르트가 함락되고 약 25만 명의 독일군과 이탈리아군이 포로가 되면서 이탈리아 본토가 다음 침공 목표가 되었다.

  2. 21943.07.09
    시칠리아 침공

    드와이트 아이젠하워가 총괄한 허스키 작전이 시작되었고, 조지 패튼과 버나드 몽고메리가 이끄는 군대가 시칠리아에 상륙했다.

  3. 31943.07.24
    파시스트 대평의회의 결별

    파시스트 대평의회는 19 대 7, 기권 1로 무솔리니 불신임안을 통과시켰다.

  4. 41943.07.25
    무솔리니의 축출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했으며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5. 51943.08.17
    시칠리아 함락

    연합군이 메시나에 들어갔지만 독일군은 병력 대부분을 해협 건너 본토로 철수시켰다.

  6. 61943.09.03
    카시빌레 휴전협정

    바돌리오 정부는 카시빌레에서 연합국과 비밀리에 휴전협정을 체결했다.

  7. 71943.09.08
    휴전의 공개와 독일 점령

    휴전 공개 뒤 독일군은 중북부 이탈리아와 이탈리아군 주둔지를 공격했고 국왕과 정부는 브린디시로 이동했다.

  8. 81943.09.12
    무솔리니의 구출

    오토 스코르체니가 이끄는 독일 공수부대가 그란사소에서 무솔리니를 구출했고, 그는 독일 점령지의 협력 정부를 이끌었다.

  9. 91944.01.22
    안치오 상륙

    연합군은 구스타프선 뒤를 흔들기 위해 안치오에 상륙했지만 교두보를 확대하지 못해 장기전에 묶였다.

  10. 101944.06.04
    로마 점령

    연합군은 네 차례 공세 끝에 구스타프선을 돌파하고 로마에 들어갔다.

  11. 111944.08.25
    고딕선 공세

    올리브 작전은 여러 지점을 뚫었지만 결정적 돌파에는 실패했고 전선은 겨울까지 북부에 남았다.

  12. 121945.04.25
    총봉기와 북부 해방

    북부 해방위원회가 총봉기를 선언했고 파르티잔과 연합군의 최종 공세가 북부 도시들을 해방했다.

  13. 131945.05.02
    독일군 항복

    독일군 집단군 C의 항복이 발효되면서 이탈리아 전선의 조직적인 전투가 끝났다.

원문

파시즘 대평의회 문서 세 건 (1928~1943)그란디 결의안 — 파시즘 대평의회 회의 (1943년 7월 24~25일)

대평의회는 이 중대한 시련의 나날에 모여, 이탈리아 인민의 단일한 신의가 그 어느 곳보다 드높이 빛나는 시칠리아의 긍지 높은 사람들과 나란히 우리 영광스러운 군의 지고한 용맹이라는 고귀한 전통과 불굴의 희생정신을 새롭게 하는 모든 병과의 영웅적인 전투원들에게 무엇보다도 뜻을 전한다.

국내외 상황과 전쟁의 정치적·군사적 수행을 검토하고,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조국의 통일, 독립, 자유, 리소르지멘토부터 오늘날까지 4세대에 걸친 희생과 노력의 결실, 이탈리아 인민의 생명과 미래를 방어하는 것이 모든 이탈리아인의 신성한 의무임을 선언한다.

국민의 운명을 결정지을 이 엄중한 시기에 모든 이탈리아인의 정신적·물질적 단결의 필요성을 확인한다.

이러한 목적을 위해 왕실, 대평의회, 정부, 의회, 협동체에 우리의 국가 법률과 헌법이 정한 임무와 책임을 부여함으로써 모든 국가 기능의 즉각적인 복원이 필요함을 선언한다.

정부 수반이 온 국민의 마음이 충성스럽고 믿음직하게 향하는 국왕 폐하에게, 조국의 명예와 구원을 위해 왕국 헌장 제5조에 따라 육·해·공군의 실질적인 지휘권과 함께 우리의 제도가 국왕에게 부여하고 국가의 모든 역사에 걸쳐 항상 우리 존엄한 사보이아 왕가의 영광스러운 유산이었던 최고의 결정 주도권을 맡아 주기를 간청할 것을 요청한다.

관련 인물 23명

관련 용어

출처: George F. Botjer, Sideshow War: The Italian Campaign, 1943–1945, Texas A&M University Press, 1996.Richard Lamb, War in Italy, 1943–1945: A Brutal Story, St. Martin's Press, 1993.U.S. Army Center of Military History, Chronology of Army History, 2024.The National WWII Museum, The Allied Campaign in Italy, 1943–45: A Timeline, Part One, 2023.United States Holocaust Memorial Museum, Italy, Holocaust Encyclopedia,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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