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893–1896

제2인터내셔널 초기의 분쟁

제2인터내셔널은 누구를 받아들이고 무엇을 요구할 것인가. 1893년 취리히와 1896년 런던 대회는 의회 정치를 거부한 아나키스트를 어디까지 받아들일지, 그리고 폴란드 독립을 국제 노동운동의 요구로 삼을지를 두고 갈라졌다.

1893년 취리히 대회는 「정치 행동」을 인정하는 정당과 노동조합만 받는 결의로 란다우어 등 아나키스트를 쫓아냈고, 폴란드 대표단의 반대로 로자 룩셈부르크의 대표권을 거부했다. 독립을 내건 폴란드 사회당(PPS)과 이를 「사회애국주의」라 비판한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의 대립은 1896년 「노이에 차이트」 논쟁으로 번졌다. 1896년 런던 대회는 취리히 결의를 재확인해 아나키스트를 최종 배제했고, PPS의 폴란드 독립 결의안 대신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지지하는 일반 결의를 채택했다.

프랑스벨기에출범한 인터내셔널과 남은 숙제

제2인터내셔널은 둘로 갈라진 채 태어났다. 1889년 7월 파리에서는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가 두 곳에서 따로 열렸다. 폴 브루스가 이끈 가능파는 랑크리 거리에서 모였고, 쥘 게드가 이끌고 빌헬름 리프크네히트와 독일 사회민주당이 뒷받침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대회는 바스티유 함락 100주년인 7월 14일 페트렐 홀에서 문을 열었다. 뒤의 대회가 제2인터내셔널의 창립 대회로 꼽힌다. 리프크네히트는 옛 인터내셔널이 「거대한 노동계급 운동 속으로 옮겨 갔다」고 선언했다. 1

창립 대회는 상설 기구도 회원 규정도 두지 않았다. 누가 이 대회에 들어올 수 있느냐는 물음은 곧 운동이 무엇이냐는 물음이었고, 그 답은 첫 인터내셔널을 쪼갠 마르크스와 바쿠닌의 대립을 다시 불러냈다. 1891년 브뤼셀 대회의 조직자들은 「정치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정당만 초청해 아나키스트를 형식상 배제했다. 같은 대회에서 네덜란드의 페르디난트 도멜라 니우엔하위스는 전쟁이 선포되면 징집병이 총파업으로 맞서자고 제안했으나, 대회는 의회와 선거 전술에 기댄 바양과 리프크네히트의 결의를 압도적으로 택했다. 1 2

도멜라 니우엔하위스는 루터교 목사였다가 신앙을 버리고 노동자의 정치 투쟁에 뛰어든 사람으로, 사회민주연맹을 세우고 1888년 네덜란드 역사상 첫 사회주의자 하원의원이 됐다. 그러나 1891년 의원직을 마친 뒤 그는 의회 활동에 회의를 품고 아나키즘 쪽으로 기울었다. 브뤼셀에서 그가 낸 반전 총파업안은 1893년과 1896년 대회에서 다시 맞붙을 두 문제, 곧 의회 정치냐 직접 행동이냐, 그리고 대회의 문을 어디까지 열 것이냐를 미리 보여 주었다. 2

폴란드프랑스폴란드 사회주의의 두 갈래

같은 시기 폴란드 사회주의도 두 갈래로 갈라지고 있었다. 1892년 11월 파리에 모인 망명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폴란드 사회당(PPS)을 세우고, 프롤레타리아의 권력 장악과 함께 독립된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내건 파리 강령을 채택했다. 그 첫 강령을 만든 중심인물 가운데 하나가 1870~80년대 「평등」과 「새벽」 같은 첫 폴란드 사회주의 잡지를 펴낸 스타니스와프 멘델손이었다. 1863년 봉기 이후 폴란드의 정치적 상상력을 지배해 온 독립의 꿈을 사회주의와 하나로 묶은 것이다. 3 4

독립 노선에 동의하지 않은 이들은 1893년 갈라져 나왔다. 폴란드 노동자연맹과 제2차 「프롤레타리아트」당 출신들이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을 만들었고, 그 이념적 중심은 스위스에서 공부하던 스물두 살의 로자 룩셈부르크와 레오 요기헤스, 율리안 마르흘레프스키가 그해 창간한 월간지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노동자의 대의)였다. 이 당은 민족이 아니라 지역을 단위로 한 노동자 정당을 표방하며 폴란드 독립 요구를 거부했다. 같은 해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에서는 1892년 10월 이그나치 다신스키 등이 세운 갈리치아 폴란드 사회민주당이 PPS와 같은 독립 노선에 서 있었다. 5 6

PPS에게는 강력한 권위가 있었다. 엥겔스는 1892년 2월 10일 런던에서 쓴 「공산당 선언」 폴란드어판 서문에서 「독립되고 강한 폴란드의 회복은 폴란드인만이 아니라 우리 모두의 문제」이며, 「유럽의 나머지 노동자들도 폴란드 노동자들 못지않게 폴란드의 독립을 필요로 한다」고 썼다. 그 독립은 「젊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만이 얻을 수 있다」는 말도 덧붙였다. 마르크스와 엥겔스가 1848년부터 지켜 온 폴란드 독립 지지는 유럽 반동의 보루인 차르 러시아를 약화시킨다는 판단에서 나왔다. 룩셈부르크는 바로 이 전통이 시대가 바뀌어 낡았다고 주장하게 된다. 7 8

스위스독일취리히 1893: 정치 행동 조항과 아나키스트 축출

제2인터내셔널의 세 번째 대회는 1893년 8월 6일부터 취리히에서 열려 20개국에서 439명의 대표가 모였다. 영국 노동조합의 공식 대표단이 처음 참가해 대회의 국제적 권위를 높였다. 개회 직후, 본격적인 토의가 시작되기도 전에 대회는 입장 자격부터 표결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지도자 아우구스트 베벨의 발의로 채택된 결의는 모든 노동조합과 함께 「노동자의 조직과 정치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사회주의 정당만 받아들였다. 정치 행동이란 정치적 권리와 입법 기구를 써서 프롤레타리아의 이익을 넓히고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이라고 규정했다. 9 10

아나키스트는 정치 행동 자체를 거부했으므로 이 조항은 사실상 그들을 내쫓는 결정이었다. 격렬한 논란 끝에 구스타프 란다우어를 비롯한 독일의 아나키스트와 사회민주당 반대파 대표들은 힘으로 끌려 나갔고, 쫓겨나는 대표들은 「우리는 항의한다!」고 외쳤다. 란다우어는 따로 연 아나키스트 집회에서 총파업을 「혁명의 서막」이라 부르며 맞섰다. 취리히 결의는 이후 제2인터내셔널의 문을 지키는 규칙이 되었다. 10 1 11

전쟁 문제에서도 같은 선이 그어졌다. 독일 대표단이 처음 내고 게오르기 플레하노프가 위원회를 대표해 제출한 결의는 「자본주의의 몰락이 곧 보편적 평화」라고 선언하고, 사회주의 의원들에게 모든 군사 예산에 반대하라고 요구했다. 네덜란드 대표단은 브뤼셀 때처럼 전쟁에 맞선 국제 총파업안을 다시 냈지만 부결됐다. 대회는 8시간 노동제를 노동자의 생활 조건을 개선할 「가장 중요한 수단」으로 규정하고, 루이제 카우츠키가 낸 여성 노동 보호 결의를 박수로 채택했다. 9

8월 12일 마지막 회의에서 일흔두 살의 프리드리히 엥겔스가 명예 의장으로 추대돼 폐회 연설을 했다. 엥겔스가 제2인터내셔널의 대회에서 연설한 것은 이때가 유일했다. 그는 아나키스트와 선을 그어야 한다고 강조하면서도 「우리는 공동의 토대 위에서 계속 일해야 한다」고 당부했다. 2년 뒤인 1895년 8월 그는 세상을 떠났다. 11 9

스위스폴란드취리히 1893: 룩셈부르크의 대표권 분쟁

폴란드에서는 11명의 대표가 취리히에 왔고, 그 가운데에는 멘델손과 다신스키가 있었다.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는 룩셈부르크를, 우치와 바르샤바의 사회민주주의 노동자들은 마르흘레프스키를 대표로 보냈다. 다신스키가 이끈 폴란드 연합 대표단은 두 사람의 대표권 인정에 반대했다. 폴란드 사회주의의 내부 분열이 처음으로 국제 무대에 오른 순간이었다. 11 5

대회는 먼저 「스프라바 로보트니차」의 대표권을 익명이라는 이유로 거부했다. 신문의 편집인, 곧 레오 요기헤스가 자신의 본명과 주소를 밝힌 전보를 대회 사무국에 보내 대표권 인정을 요구하자 문제는 풀리는 듯했다. 그러나 사무국이 이 문제를 다룰 때에는 폴란드 대표단이 이미 그 전보에 대한 서면 성명을 내 편집인을 「수상한 인물」로 몰고 대표를 위임할 자격이 없다고 선언한 뒤였다. 룩셈부르크가 반박하려고 발언권을 청했지만 거부당했고, 사무국은 5분 만에 다음 안건으로 넘어갔다. 결국 룩셈부르크의 대표권은 거부됐다. 12 11

룩셈부르크와 마르흘레프스키는 8월 11일 「크루신스카」와 「카르스키」라는 가명으로 이 경위를 밝히는 성명을 냈다. 공식으로 제출되지 못한 「스프라바 로보트니차」의 대회 보고서는 대부분 룩셈부르크가 썼다. 보고서는 폴란드 부르주아지가 러시아 시장에 의존하고 분할된 세 지역이 저마다 다른 이해를 갖게 된 지금 「자본주의 폴란드 국가를 세우려는 노력은 현실적 근거가 없다」고 주장하고, 독립과 사회주의를 하나로 묶으려는 시도를 「사회애국주의」라 불렀다. 그 대신 러시아령 폴란드의 과제로 전제정 타도와 「차르 정권에게서 민주적 헌법을 얻어 내는 것」, 보통선거와 집회·결사·언어의 권리를 내걸었다. 12 13

독일폴란드영국런던을 앞둔 「사회애국주의」 논쟁

취리히에서 밀려난 룩셈부르크는 독일 사회민주당의 이론지 「노이에 차이트」를 무대로 논쟁을 이어 갔다. 1896년 그는 「폴란드 사회주의 운동의 새 경향」과 「폴란드의 사회애국주의」를 잇달아 실었다. 겨냥한 것은 런던 대회에 맞춰 PPS의 해외 조직인 해외폴란드사회주의자동맹이 준비한 결의안이었다. 그 결의안은 한 민족의 다른 민족 지배는 자본가와 전제 군주의 이익에만 봉사하며, 특히 차르 전제가 국제 노동운동에 상시적 위협이 되므로 「폴란드의 독립은 폴란드 프롤레타리아트와 국제 노동운동 전체에게 절대적인 정치적 요구」라고 선언하려 했다. 14 8

1896년 7월 「스프라바 로보트니차」 제25호와 이탈리아 「크리티카 소찰레」에 동시에 실린 글에서 룩셈부르크는 이 결의안을 두 갈래로 비판했다. 첫째, 「러시아 차르 체제는 그 내적 힘도 대외적 의미도 폴란드 지배에서 얻지 않는다」. 차르 체제를 떠받치는 것은 러시아 내부의 사회 구조와 귀족·부르주아지의 이해라는 것이다. 둘째, 민족 지배가 자본가와 전제 군주에게만 이롭다는 일반 원칙은 아무런 실천적 결론도 낳지 못하는 「위대한 진리」일 뿐이며, 결의안은 폴란드가 어떻게 해방될 수 있는지에 대해 「깊은 침묵」을 지킨다고 했다. 행동이 따르지 않는 요구는 「경건한 소망」에 지나지 않는다는 것이다. 그는 이런 결의를 채택하면 폴란드와 다른 곳에서 민족주의 조직을 북돋우게 된다고 경고하며, 그렇다면 「왜 체코, 아일랜드, 알자스로렌의 해방은 안 되는가」라고 물었다. 14

룩셈부르크의 글은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물론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당 지도자 빅토르 아들러까지 화나게 했다. 「노이에 차이트」의 편집인 카를 카우츠키는 같은 해 반론을 실었다. 레닌의 정리에 따르면 카우츠키는 인터내셔널이 당장 폴란드 독립을 자기 강령으로 삼을 수는 없지만,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은 그런 요구를 내걸 권리가 충분하다고 보았고, 룩셈부르크의 유물론이 지극히 「일면적」이라고 비판했다. 이렇게 런던 대회 전에 이미 세 입장이 갈라져 있었다. 폴란드 독립을 인터내셔널의 강령으로 삼자는 PPS, 폴란드 사회주의자는 독립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룩셈부르크, 그리고 그 사이의 카우츠키였다. 8

영국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런던 1896: 아나키스트의 최종 배제

1896년 7월 27일 런던에서 열린 국제 사회주의 노동자·노동조합 대회는 22개국에서 약 770명이 모여 그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의 가장 큰 대회가 됐다. 엥겔스가 세상을 떠난 뒤 처음 열린 대회였고, 개회사를 맡은 독일의 파울 징거는 그의 정신과 업적이 「남아 있다」고 말했다. 벨기에의 에밀 반데르벨더는 훗날 이 대회를 제2인터내셔널의 모든 대회 가운데 「가장 격앙되고 가장 소란스럽고 가장 혼란스러운」 대회라고 불렀다. 아나키스트 대표들이 회의를 어지럽힌 마지막 대회이기도 했다. 15

대회 직전 이탈리아의 아나키스트 에리코 말라테스타는 아나키스트도 대회에 들어갈 수 있어야 한다는 글을 써 반의회 세력의 공동 전선을 이끌었다. 일부 프랑스·이탈리아 아나키스트는 노동조합의 위임을 받아 대표가 되는 길로 취리히 조항을 피했고, 란다우어와 말라테스타는 대표 자격을 거부당하자 방청석에서 회의에 맞섰다. 노동조합 대표로 온 프랑스의 폴 들레잘은 연단에 오르려다 계단 아래로 거칠게 떠밀려 다쳤다. 16 1 17

개막 회의는 국가별 대표단 표결로 취리히 결의를 재확인했다. 17개 대표단이 찬성하고 2개가 반대했으며 이탈리아는 기권했다. 반대한 두 대표단은 프랑스(57 대 56)와 네덜란드(9 대 5)였고, 영국 대표단은 223 대 104로 찬성했다. 영국 독립노동당의 키어 하디와 톰 만은 아나키스트의 입장을 지지했다. 하디는 대회 직후 「노동 지도자」 사설에서, 진짜 쟁점은 아나키스트를 받느냐가 아니라 의회 활동보다 노동조합·협동조합 활동을 앞세우는 사회주의자를 받느냐였으며, 독일 사회민주당이 「포어베르츠」를 통해 자유공산주의자들을 아나키스트로 몰아붙인 해석이 통했다면 네덜란드와 프랑스 대표단의 다수가 쫓겨났을 것이라고 썼다. 그는 국가별 표결 방식도 비판했다. 15 18

대회는 다음 대회의 초청 규정을 못 박았다. 사회주의적 소유와 생산을 추구하며 입법·의회 행동을 받아들이는 조직과, 입법 행동의 필요성을 인정하는 순수 노동조합 조직만 초청하며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배제된다」는 것이었다. 같은 해 도멜라 니우엔하위스도 인터내셔널에서 축출됐고, 이듬해에는 사회주의 운동과 완전히 결별했다. 런던 대회 뒤로 제2인터내셔널의 대회는 의회에 들어가는 사회주의 정당과 노동조합의 대회가 되었다. 15 2

영국폴란드런던 1896: 폴란드 결의와 「민족자결권」

폴란드 문제는 런던에서 긴 논쟁을 불렀다. PPS 대표로 온 유제프 피우수트스키가 독립 결의를 밀었고, 룩셈부르크가 그에 맞섰다. 그러나 PPS의 결의안은 표결에 부쳐지지 않았다. 대회는 그 대신 일반적인 결의를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대회는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지지한다고 선언하며, 현재 군사적·민족적 또는 그 밖의 전제의 멍에 아래 고통받는 모든 나라의 노동자들에게 동정을 표한다」. 결의는 이 나라들의 노동자에게 국제 자본주의를 무너뜨리고 국제 사회민주주의의 목표를 이루기 위해 전 세계의 계급의식 있는 노동자 대열에 함께하라고 호소했다. 8 19 5

두 진영은 저마다 이겼다고 여겼다. 룩셈부르크는 1905년 자신의 논집 서문에서, PPS가 폴란드 회복을 국제 노동운동의 절대적 필요로 인정받으려 했지만 런던 대회는 「정확히 그 반대로」 결정했다고 썼다. 대회는 폴란드를 다른 모든 피압박 민족과 같은 자리에 놓고, 사회주의자의 일반적 동정과 자결권만 다시 확인했다는 것이다. 반면 PPS는 대회가 민족의 자결을 공식 원칙으로 선언했다는 데서 정당성을 찾았다. 19

18년 뒤 레닌은 「민족자결권에 대하여」에서 런던 결의를 한 장으로 다뤘다. 그는 PPS의 제안이 다른 시대의 마르크스의 관점을 영원한 것으로 고정하려는, 「마르크스주의의 문자로 마르크스주의의 정신에 맞서는 시도」였다고 보았다. 동시에 폴란드 사회주의자는 독립을 요구해서는 안 된다는 룩셈부르크의 견해도 민족자결권의 선언 자체를 가로막는 것이어서 인터내셔널에서 「본질적으로 패배했다」고 썼다. 레닌에 따르면 런던 결의가 되풀이한 것은 카우츠키의 견해, 곧 민족자결의 인정과 노동자의 국제적 단결 호소를 한데 묶는 입장이었다. 8

스위스영국폴란드평가

1893~1896년의 두 대회는 제2인터내셔널의 경계를 그었다. 「정치 행동」을 입장 조건으로 삼은 취리히 결의와 런던의 재확인으로 사회주의 운동과 아나키즘은 조직상 완전히 갈라섰다. 쫓겨난 쪽은 이후 노동조합을 통한 직접 행동, 곧 혁명적 생디칼리즘으로 힘을 옮겼다. 키어 하디가 지적했듯 이 경계는 아나키스트만이 아니라 의회 바깥의 활동을 앞세운 사회주의자들까지 밀어냈고, 대회의 중심은 의석을 늘려 가던 독일 사회민주당 같은 대중 정당이 차지했다. 대회 안에 남은 의회주의와 혁명의 긴장은 몇 해 뒤 수정주의 논쟁으로 다시 터져 나왔다. 1 18

폴란드 논쟁은 일회성 다툼이 아니라 이후 반세기 폴란드 좌파를 가른 선이 됐다. 독립을 앞세운 PPS와 국제주의를 앞세운 SDKP(1899년 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합쳐 SDKPiL)의 대립은 1905년 혁명의 거리에서도 이어졌고, 1906년 PPS가 갈라진 뒤 그 좌파는 1918년 SDKPiL과 합쳐 폴란드 공산주의 노동자당을 세웠다. 1896년 런던에서 독립을 주장한 피우수트스키는 1918년 독립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893년 취리히에서 룩셈부르크의 대표권을 막은 다신스키는 같은 해 11월 루블린 임시인민정부의 총리가 되었다. 5 6

런던 결의의 「민족자결권」 문구는 그 자체로 긴 생명을 얻었다. 1903년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 강령에 민족자결권이 들어가자 SDKPiL은 이를 문제 삼았고, 룩셈부르크와 레닌의 논쟁은 1914년 레닌이 런던 결의를 근거로 룩셈부르크를 반박하는 데까지 이어졌다. 역사가들은 이 대립을 두고 룩셈부르크가 자본주의 발전의 경제적 경향을 과대평가해 민족 문제의 정치적 힘을 놓쳤다고 보기도 하고, 반대로 그가 민족주의가 노동운동을 잠식할 위험을 일찍 내다봤다고 평가하기도 한다. 1919년 바이에른 평의회 공화국에서 혁명을 이끌다 자유군단 병사들에게 맞아 죽은 란다우어처럼, 이 대회들에서 갈라선 이들은 저마다 다른 길로 20세기의 혁명을 맞았다. 8 10

결과

사회주의와 아나키즘은 조직상 완전히 갈라섰고, 제2인터내셔널은 의회 정당과 노동조합의 연합이 되었다. 런던의 민족자결 결의는 폴란드 독립을 인터내셔널의 강령으로 삼지도, 폴란드 사회주의자의 독립 요구를 금하지도 않은 타협이었으며, 훗날 레닌이 룩셈부르크와의 민족자결 논쟁에서 근거로 삼았다. PPS와 SDKP의 분열은 1905년 혁명과 1918년 폴란드 공산당 창립까지 폴란드 좌파를 갈랐다.

연표와 지도

취리히 베를린 암스테르담 바르샤바 우치 런던 브뤼셀 크라쿠프 파리 4 바르샤바 6 런던 2 브뤼셀 3 크라쿠프 1 파리 5 취리히
  1. 11889-07-14프랑스
    제2인터내셔널 창립 대회

    파리에서 마르크스주의자들의 국제 사회주의자 대회가 열렸다. 같은 때 가능파는 따로 대회를 열었다.

  2. 21891-08벨기에
    브뤼셀 대회

    정치 행동을 인정하는 정당만 초청해 아나키스트를 형식상 배제했고, 도멜라 니우엔하위스의 반전 총파업안을 부결했다.

  3. 1892-02-10영국
    엥겔스의 「공산당 선언」 폴란드어판 서문

    엥겔스는 독립되고 강한 폴란드의 회복이 유럽 노동자 모두의 문제라고 썼다.

  4. 31892-10폴란드
    갈리치아 폴란드 사회민주당 창립

    다신스키 등이 오스트리아령 갈리치아의 사회민주당을 세웠다.

  5. 1892-11폴란드프랑스
    폴란드 사회당 창립

    파리에 모인 망명 폴란드 사회주의자들이 독립 민주공화국을 목표로 한 파리 강령을 채택했다.

  6. 41893폴란드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 결성

    독립 노선에 반대한 국제주의자들이 SDKP를 세웠고, 룩셈부르크·요기헤스·마르흘레프스키가 「스프라바 로보트니차」를 창간했다.

  7. 51893-08-06스위스독일
    취리히 대회 개막

    20개국 439명의 대표가 모였고, 정치 행동을 인정하는 정당만 받는 결의로 란다우어 등 아나키스트를 쫓아냈다.

  8. 1893-08스위스폴란드
    룩셈부르크의 대표권 거부

    다신스키가 이끈 폴란드 대표단의 반대 속에 「스프라바 로보트니차」의 대표권이 거부됐다.

  9. 1893-08-11스위스
    「크루신스카」와 「카르스키」의 성명

    룩셈부르크와 마르흘레프스키가 가명으로 대표권 거부의 경위를 밝히는 성명을 냈다.

  10. 1893-08-12스위스
    엥겔스의 폐회 연설

    명예 의장으로 추대된 엥겔스가 제2인터내셔널 대회에서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연설했다.

  11. 1895-08영국
    엥겔스 사망

    엥겔스가 런던에서 세상을 떠났다.

  12. 1896독일
    「노이에 차이트」의 폴란드 논쟁

    룩셈부르크가 「폴란드의 사회애국주의」 등을 싣고 카우츠키가 반론을 냈다.

  13. 1896-07폴란드이탈리아
    룩셈부르크의 「런던 대회의 폴란드 문제」

    「스프라바 로보트니차」와 「크리티카 소찰레」에 PPS 결의안을 비판하는 글이 동시에 실렸다.

  14. 61896-07-27영국
    런던 대회 개막

    22개국 약 770명의 대표가 모인, 그때까지 가장 큰 대회였다.

  15. 1896-07-27영국프랑스네덜란드이탈리아
    취리히 결의 재확인

    17개 대표단 찬성, 프랑스·네덜란드 반대, 이탈리아 기권으로 아나키스트 배제를 재확인했다.

  16. 1896-08영국폴란드
    민족자결 결의 채택

    PPS의 폴란드 독립 결의안 대신 모든 민족의 완전한 자결권을 지지하는 일반 결의가 만장일치로 채택됐다.

  17. 1896-08-01영국
    런던 대회 폐막

    다음 대회 초청 규정에 「따라서 아나키스트는 배제된다」는 문구를 넣었다.

  18. 1896-08-08영국
    키어 하디의 대회 회고

    하디가 「노동 지도자」 사설에서 아나키스트 배제와 국가별 표결을 비판했다.

  19. 1899폴란드
    SDKPiL 결성

    SDKP가 리투아니아 사회민주주의자들과 합쳐 폴란드왕국·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이 됐다.

  20. 1914스위스
    레닌의 「민족자결권에 대하여」

    레닌이 런던 결의를 근거로 PPS와 룩셈부르크의 견해를 함께 비판했다.

관련 인물 19명

대회 다수파 (독일 사회민주당 중심)7명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