국적

체코슬로바키아

28 명

해당 인물

토마시 가리크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50–1937 ○ 사임 2년 후 자연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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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84–1948 ○ 사임, 9월 자연사

사직서 한 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고트발트의 손을 들어준 마지막 민주 대통령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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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서기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 1921–1922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스타니슬라프 체체크

Stanislav Čeček
반혁명 세력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886–1930 ○ 자연사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휘관

1918년 5월 펜자에서 약 8,000명의 군단 병력이 체체크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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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프라하 제102보병연대 중위
  • 1914러시아군 체코 수렵대 참가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4연대 지휘관
  • 1918펜자 집단 지휘관, 코무치 인민군 볼가 전선 총사령관
  • 1920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차장
  • 1921–1923프랑스 육군대학 유학
  • 1924–1926대통령 군사실장, 국방부 항공부서장
  • 1929–1930제5보병사단장 겸 체스케부데요비체 군사령관

얀 가리그 마사리크

Jan Garrigue Masaryk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86–1948 ✕ 체르닌 궁전에서 추락사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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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2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리공사
  • 1922–1925외무장관 보좌관
  • 1925–1938주영 체코슬로바키아 전권공사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라돌라 가이다

Radola Gajda
반혁명 세력 체코슬로바키아인 체코계 1892–1948 ○ 옥고 뒤 자연사

군단의 승리를 백군 정치로 확장한 장군

라돌라 가이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러시아 내전에서 부상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지휘관이자 전간기 체코슬로바키아의 장군·정치가였다. 1918년 군단의 동부집단을 이끌며 노보니콜라옙스크에서 이르쿠츠크까지 철도선을 장악하고, 중립과 무장투쟁 사이의 논쟁에서 전투를 밀어붙였다. 이후 콜차크의 백군에 합류했으나 지휘권을 잃고, 귀국 뒤 군 참모총장 대행과 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를 거쳤다. 그의 군사적 반볼셰비즘은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에서 파시즘으로 변형되었지만, 나치 점령기에는 저항을 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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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1오스트리아-헝가리군 복무
  • 1915–1916몬테네그로군 장교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중대·연대 지휘관
  • 1918군단 동부집단 사령관, 이르쿠츠크·예카테린부르크 점령 지휘
  • 1918–1919콜차크 백군 시베리아군 사령관
  • 1922–1926체코슬로바키아군 사단장, 총참모장 대행
  • 1927–1939파시스트 국민공동체 지도자, 국회의원

바츨라프 노세크

Václav Nosek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92–1955 ○ 폐암으로 사망

1948년 2월 비공산당 경찰 간부 해임으로 정부 위기를 촉발시킨 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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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창립 대의원
  • 1929KSČ 중앙위원회 위원 선출
  • 1941–1942런던 체코슬로바키아 국가평의회 위원 → 부의장
  • 1945–1953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53–1955체코슬로바키아 노동사회복지장관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1–1986 ○ 자연사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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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얀 파토치카

Jan Patočk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7–1977 ○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자연사

진실의 책임을 시민적 행동으로 옮긴 현상학자

1977년 3월 3일, 그는 헌장 77 대변인으로 말하겠다며 불러낸 국가보안기관의 장시간 조사를 받았다.

얀 파토치카는 후설과 하이데거에게 배운 체코 철학자로서 현상학과 역사철학을 발전시켰고, 유럽의 위기와 인간의 영혼 돌봄을 탐구했다. 공산당 가입을 거부한 뒤 여러 차례 대학 강단과 출판에서 배제되었지만, 연구와 가정 세미나를 이어 갔다. 1977년 그는 바츨라프 하벨, 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헬싱키 최종의정서와 시민권 보장을 요구한 헌장 77의 첫 대변인이 되었다. 반복된 국가보안기관 조사 뒤 건강이 악화되었고, 그는 3월 13일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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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1931프라하 카렐대학교에서 철학·슬라브어문학·로망스어문학을 공부하고 철학 박사학위를 받음
  • 1933프라이부르크대학교에서 에드문트 후설과 마르틴 하이데거에게 현상학을 배움
  • 1936–1939카렐대학교에서 강의 자격을 취득하고 철학 저널 《체코의 정신》 편집을 맡음
  • 1945–1950전후 카렐대학교와 마사리크대학교에서 철학을 가르쳤으나 공산당 가입 거부 뒤 대학을 떠남
  • 1964–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일하고 1968년 카렐대학교 교수로 복귀했으나 1972년 퇴직당함
  • 1973–1976가정 세미나에서 철학을 가르치고 《플라톤과 유럽》과 《역사철학의 이단적 에세이》를 발전시킴
  • 1977바츨라프 하벨·이르지 하예크와 함께 헌장 77의 첫 대변인으로 활동

요세프 파벨

Josef Pave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8–1973 ○ 사망, StB 감시 속에서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보안기관 개혁을 시도했으나 KGB의 내부 교란으로 좌절된 인물

1968년 8월 침공 당일, 파벨이 해임한 부하 샬고비치는 KGB와 함께 두브체크를 체포했고, 내무부는 장관의 손을 떠났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원으로 스페인 내전에 의용군으로 참전했고, 1948년 쿠데타에서는 민병대를 지휘했다. 내무차관으로 공포정치에 가담했으나 1951년 체포되어 슬란스키 사건에 연루된 혐의로 고문과 25년형을 받았고, 1955년 무죄 석방되었다.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내무장관으로 복귀해 국가보안대(StB) 개혁을 추진하고 KGB 연락장교 6명의 존재를 폭로했으나, 부하인 빌리암 샬고비치가 KGB와 공모해 침공 당일 두브체크 체포를 지원하면서 개혁은 무너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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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35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료
  • 1937–1939스페인 내전 참전 (디미트로프 대대 지휘)
  • 1947KSČ 중앙위 방위·보안부문 비서장
  • 1948인민민병대 주참모장, 내무차관
  • 1951–1955체포·고문, 1953년 25년형 선고, 1955년 무죄 석방
  • 1968.4–8체코슬로바키아 내무장관
  • 1968–1973강제 퇴임 후 KSČ 제명, StB 감시 속에 사망

프란티셰크 크리겔

František Kriegel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슬로바키아 1908–1979 ○ 당 제명 · 의사면허 박탈 1969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한 유일한 프라하의 봄 지도자

모스크바에서 브레즈네프 앞에 선 크리겔은 이렇게 말했다: '쏘든지 시베리아로 보내든지, 나는 서명하지 않겠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 스페인 내전에서 국제여단 군의관으로 복무하고,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KSČ 상임간부회 위원 겸 민족전선 의장으로 개혁을 이끌었다.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일 체포되어 모스크바로 연행되었고, 26명의 체코슬로바키아 정치인 중 유일하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을 거부했다. 이후 당에서 축출되고 의사 면허도 박탈당했으나, 1977년 헌장 77에 최초 서명하며 생애 마지막까지 반체제 인사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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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KSČ 입당
  • 1936–39스페인 내전 국제여단 군의관
  • 1940–45중국-버마 전선 군의관
  • 1949–52보건부 차관
  • 1964–68국민의회 의원 → KSČ 중앙위원
  • 1968.4–8민족전선 의장 겸 KSČ 상임간부회 위원
  • 1968.8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거부
  • 1969–77당 제명·의사면허 박탈, 이후 헌장 77 최초 서명

요세프 스므르콥스키

Josef Smrkovský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11–1974 ○ 감시 속 사망

수용소에서 살아 돌아와 프라하의 봄 최고 개혁파가 된 사람

모스크바 의정서 서명 후 귀국한 스므르콥스키는 동료 지도자들이 침묵하는 가운데 유일하게 국민 앞에 나서 말했다. 브레즈네프가 그의 연설만을 문제 삼았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개혁공산주의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에서 두브체크의 가장 중요한 정치적 동맹이었다. 나치 점령기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를 이끌었고,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인민민병대를 지휘했으며, 1951년 슬란스키 사건 연루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가 1963년 복권되어 1968년 국민의회 의장이 되었다. 1968년 1월 『루데 프라보』 인터뷰로 개혁의 신호탄을 쏘아올렸고, 8월 침공 후 모스크바로 끌려가 의정서 서명을 강요당했으며, 귀환 후 후사크에 의해 축출되어 감시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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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KSČ 입당, 붉은노조 청년서기
  • 1944–45지하 중앙위원, 체코민족평의회 부의장으로 프라하 봉기 주도
  • 1946–48국민의회 의원, 인민민병대 부사령관으로 2월 쿠데타 지원
  • 1951–55슬란스키 사건 연루, 종신형 → 1955년 석방
  • 1955–63JZD 파블로비체 의장으로 복무
  • 1963–67복권, 중앙위원 → 임업·수자원부 장관
  • 1968.4–1969.1국민의회 의장, 두브체크의 핵심 개혁 동맹
  • 1968.8–1970모스크바 연행, 의정서 서명 → 후사크에 의해 축출·제명

구스타우 후사크

Gustáv Husák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3–1991 ○ 실각 후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짓밟고 '정상화'를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최장기 지도자

1989년 12월 10일, 후사크는 41년 만의 첫 비공산 다수 내각을 출범시킨 직후 대통령직을 사임했다. 자신이 구축한 체제의 공식적 종말을 직접 목도한 것이다.

슬로바키아 출신 공산주의 법률가. 반나치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에서 활동했고, 전후 슬로바키아 행정을 장악했으나 1950년 '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을 받았다. 1963년 복권되어 두브체크의 프라하의 봄에서 부총리를 지냈지만, 소련 침공 후 입장을 선회해 개혁파 숙청을 주도했다. 1969년부터 1987년까지 당 총서기, 1975년부터 1989년까지 대통령으로서 20년간 '정상화' 체제를 이끌며 상대적 생활안정과 비밀경찰 탄압을 병행했다. 1989년 벨벳 혁명으로 41년 만의 비공산 내각에 정권을 넘기고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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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4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지도부,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부의장
  • 1946–1950슬로바키아 행정위원회 의장 — 민주당 해체 주도
  • 1954–1960부르주아 민족주의 혐의로 종신형, 레오폴도프 교도소 수감
  • 1968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 소련 침공 후 반개혁 노선으로 전환
  • 1969–198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제1서기·총서기 — 정상화 주도
  • 1975–1989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89벨벳 혁명으로 사임

지리 하예크

Jiří Háje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13–1993 ○ 자연사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지리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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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바실리 빌랴크

Vasiľ Biľak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7–2014 ○ 반역 기소, 유죄 없이 사망

자기 나라에 소련 탱크를 불러들인 초대장에 서명한 당 이념 비서

반역 혐의로 기소된 뒤 빌랴크는 "나는 브레즈네프에게 편지를 쓴 적이 없다"고 부인했다. 초청장은 개인이 아니라 소련 공산당 중앙위원회 앞으로 보내졌기 때문이라는, 말장난에 가까운 항변이었다.

루신족 출신의 재단사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정치국원이 된 네오스탈린주의자.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건전한 세력'의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하는 초청장에 서명한 5인 중 한 명이었다. 침공 후 후사크 체제의 이념 책임자로서 '정상화'의 교리적 기초가 된 「위기 발전의 교훈」(1970)을 기초하고 반체제 탄압을 정당화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될 때까지 당내 최강경 노선을 고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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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루신족 가정 출생, 재단사 수업
  • 1936–45공산계 노조 가입, 재단사 노동,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54–62당 고등정치학교 졸업, 프레쇼프 지역당 서기, 교육·문화 담당
  • 1962–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 이념 담당 서기
  • 1968.1–8슬로바키아 당 제1서기, 4월 KSČ 정치국원, 바르샤바조약군 초청 서한 서명
  • 1968–88KSČ 정치국원 겸 중앙위 서기: 대외정책·이념 총괄
  • 1970「위기 발전의 교훈」 기초, 정상화의 교리적 헌장
  • 1988.12정치국·서기직 해임, 1989년 당에서 제명

빌리암 샬고비치

Viliam Šalgovič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19–1990 ✕ 벨벳 혁명 후 자살

두브체크를 체포해 소련에 넘긴 내무차관

1987년 5월 1일 브라티슬라바 노동절 퍼레이드에서 한 학생이 주석단에 서 있던 샬고비치에게 달걀 두 개를 던졌다. 그는 경호원에게 달걀이 묻은 재킷을 건네며 자리를 떠나야 했다.

슬로바키아 출신 체코슬로바키아 보안기관 장교이자 정치인. 전시에는 친나치 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으로 탈주한 후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에서 복무했고, 전후 StB 장교로 정치탄압에 가담했다. 1968년 6월, 두브체크는 자신과 개인적 친분이 있는 샬고비치를 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로 발탁했으나, 샬고비치는 KGB와 협력하여 개혁파 체포 계획을 세우고 8월 21일 두브체크 일행을 소련군에 넘겼다. '정상화' 체제에서는 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1975~1989)이라는 의전직에 머물렀고, 벨벳 혁명 직후 자택 지하실에서 목을 매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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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슬로바키아군에서 소련 파르티잔으로 탈주
  • 1945–1951체코슬로바키아군 방첩 장교, 레이친 계열
  • 1950–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62–1968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통제감사위 부위원장
  • 1968.6–8내무차관 겸 StB 책임자: 프라하의 봄 진압 계획
  • 1969헝가리 주재 체코슬로바키아 무관
  • 1975–1989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오타 시크

Ota Šik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19–2004 → 1968년 망명, 스위스 사망

계획과 시장 사이의 '제3의 길'을 설계한 체코슬로바키아 경제학자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시크는 안토닌 노보트니의 사임을 최초로 공개 요구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혁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선언했다, 고르바초프보다 20년 앞서서.

체코슬로바키아의 경제학자이자 정치인으로, 프라하의 봄 경제 개혁의 설계자였다. 1964년 저서에서 사회주의 계획경제에 시장 메커니즘을 접목하는 신경제모델을 제시했고, 1967년 12월 중앙위원회에서 노보트니 체제를 공개 비판하며 경제 개혁이 정치적 변화 없이는 불가능하다고 주장했다. 1968년 두브체크 내각에서 부총리로 개혁을 주도했으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으로 유고슬라비아 망명길에 올랐고 이후 스위스에서 '제3의 길'을 이론화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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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공산당 입당, 대독 저항운동 참가
  • 1940~1945마우트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 1961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경제연구소 소장
  • 1962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위원
  • 1968.04~1968.12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겸 경제개혁 조정관
  • 1970~1990스위스 장크트갈렌대학교 경제학 교수
  • 1990바츨라프 하벨 대통령 경제 고문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슬로바키아 1921–1990 ○ 실각 후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끝장내기 위해 소련에 개입을 요청한 초청장에 서명한 KSČ 강경파

1968년 8월 21일 아침, 두브체크는 '인드라 동지가 이끄는 노동자·농민 정부의 이름으로' 체포되었다. 그러나 인드라의 내각은 단 하루도 현실이 되지 못했고, 그가 서명한 초청장은 1990년대에야 공개되었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의 네오스탈린주의 정치인. 1968년 프라하의 봄 당시 보수파 핵심으로, 바르샤바조약군 개입을 요청한 '초청 편지'에 서명한 5인 중 하나였으며 침공 직후 소련의 후원 아래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으로 내정되었다. 후사크 체제에서도 정치국원과 연방의회 의장으로서 '정상화' 숙청을 추진했고, 1989년 벨벳 혁명으로 축출되어 이듬해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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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45–56즐린(고트발도프) 지역당 서기
  • 1960–62KSČ 중앙위 계획부장
  • 1962–63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
  • 1963–68체코슬로바키아 교통장관
  • 1968.8'초청 편지' 서명, '노동자·농민 정부' 수반 내정
  • 1968–71KSČ 중앙위 서기
  • 1971–89KSČ 정치국원, 연방의회 의장

라도반 리흐타

Radovan Richta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4–1983 ○ 지병으로 사망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라는 말을 만든 체코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

말년에 리흐타는 예측 연구팀을 만들려 했으며, 자신의 말로는 "우리를 정치적 저주에서 벗어나게 하고 사회를 공식적으로 탐구할 수 있게" 하기 위해서였다.

체코슬로바키아의 마르크스주의 철학자이자 사회학자로, '과학기술혁명' 개념을 정립하고 60인의 공동연구를 이끌어 『갈림길에 선 문명』(1966)을 출간했다. 이 저작은 중앙집권적 계획은 과학기술 시대에 낡은 방식이라 주장하며 프라하의 봄 행동강령의 이론적 토대가 되었고, 그가 만든 '인간의 얼굴을 한 사회주의'는 1968년 개혁의 상징이 되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 침공 이후 리흐타는 후사크의 '정상화'에 순응하여 철학·사회학 연구소장으로 동료 학자들의 숙청을 주도했고, 1977년에는 헌장 77과 얀 파토치카를 공격하는 언론 캠페인에 가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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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게슈타포 체포, 판크라츠·테레진 수감
  • 1945–1953카렐대학교 철학부·자연과학부 수학, PhDr. 취득
  • 1949–1954『트보르바』 부편집장, 『루데 프라보』 편집위원
  • 1954–1966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6–1968과학기술혁명 학제간 연구팀장, 『갈림길에 선 문명』 출간
  • 1967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통신회원 선출
  • 1969–198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사회학 연구소장
  • 1972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정회원(아카데미크) 선출

루보미르 슈트로우갈

Lubomír Štrougal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4–2023 ○ 자연사 (재판 중단)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끈 후사크의 오른팔

정치적 패배의 이유를 묻자, 슈트로우갈은 이렇게 답했다: '나는 반체제 인사들을 과소평가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으로, 1970년 1월 올드르지흐 체르니크를 대신해 총리에 오른 뒤 18년간 '정상화' 내각을 이끌었다. 법학을 전공하고 농업장관과 내무장관을 거친 당 관료였으며, 프라하의 봄 시기 부총리를 지내다 소련 침공 후 후사크의 반개혁 노선에 합류했다. 1980년대 후반 고르바초프의 페레스트로이카를 지지하며 강경파 야케시 당 총서기와 충돌해 실각했고, 벨벳 혁명 후 KSČ에서 제명되었다. 말년에는 국경 사망 사건으로 기소되었으나 치매로 중단된 채 2023년 98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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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베셀리나트루주니치 출생, 부친은 나치 강제수용소에서 사망한 공산주의자
  • 1945~48KSČ 입당, 카렐대학교 법학 졸업
  • 1959~61농업·임업·수자원 장관
  • 1961~65내무장관, 국가보안(StB) 관할
  • 1968체르니크 내각 부총리 겸 경제위원회 의장
  • 1968.11~70.1KSČ 중앙위 서기·상임위원, 후사크의 '정상화' 노선 합류
  • 1970.1~88.10체코슬로바키아 연방 총리, 18년 재임
  • 1988~90야케시와 충돌 후 사임, 벨벳 혁명 후 KSČ 제명
사회주의권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1987 ○ 재임 중 사망

행동강령 초안을 쥔 이념간부, 침공 뒤에는 정상화의 충복

1968년 초, 아우에스페르크는 프라하의 자기 사무실에서 밀란시르·리흐타·시크와 함께 행동강령 초안을 써 내려갔다.

프라하의 봄을 이끈 행동강령의 제5장을 직접 집필하고 실무그룹을 이끈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이념간부였다. 노보트니의 비서실장으로 정치 경력을 쌓았고, 1965년부터 이념부장으로 문화·학문 영역에 대한 검열을 주도했다. 1968년 4월 행동강령 초안을 완성했으나 침공 직후에는 드레스덴의 친소 방송에 참여했고, 후사크 체제에서 국제정치부장과 네덜란드 대사를 지내며 정상화를 충실히 집행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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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1954프라하 정치사회대학 국제관계학부 조교
  • 1956ÚV KSČ 국제문제 담당 컨설턴트
  • 1963–1964안토닌 노보트니 제1서기 비서실장
  • 1965–1968ÚV KSČ 이념부장, ÚV 후보위원
  • 1969–1974ÚV KSČ 국제정치부장, ÚV 정위원
  • 1971–1986연방의회 민족원 의원
  • 1974–1986『평화와 사회주의의 문제들』 편집위원회 KSČ 대표
  • 1986–1987주네덜란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

카렐 코시크

Karel Kosík
이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0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비독단적 마르크스주의자

그는 프라하의 봄이 1968년 후사크 체제에 이어 1989년 이후에도 다시 매장되었다고 비판했다.

카렐 코시크는 마르크스주의를 인간의 실천과 구체적 역사성의 철학으로 재구성한 체코 철학자였다. 대표작 《구체성의 변증법》(1963)은 마르크스와 하이데거 현상학을 대화시키며 국제적 명성을 얻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민주적 사회주의를 주장한 지식인이었고, 정상화 시기에는 공산당에서 제명되어 침묵과 저항을 견뎠다. 1989년 이후에는 개혁의 기억이 후사크 체제와 신자유주의 질서에 의해 차례로 매장되었다고 비판하며 사건의 유산을 둘러싼 논쟁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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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1944좌파 지하 저항조직 프르제드보이 참여, 불법 잡지 편집
  • 1944–1945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지엔슈타트 수용소에 수감
  • 1953–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 연구원
  • 1963《구체성의 변증법》 출간
  • 1968–1969프라하 카렐대학교 철학 교수,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70–1989공산당 제명 뒤 대학에서 배제된 반체제 지식인
  • 1990–1992카렐대학교 철학 강의
  • 1992–2003체코 과학아카데미 철학연구소에서 연구와 집필

루드비크 바출리크

Ludvík Vaculík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15 ○ 자연사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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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바브라크 카르말

Babrak Karmal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29–1996 ○ 망명 중 사망

소련 침공으로 집권했으나 국민적 정당성을 얻지 못한 아프가니스탄 공산정권의 얼굴

"소련 동지들은 나를 한없이 사랑하며, 내 개인적 안전을 위해 내 명령조차 따르지 않는다": 꼭두각시 대통령이 친구에게 털어놓은 자기 유폐의 실상.

바브라크 카르말은 아프가니스탄 인민민주당(PDPA)의 창립 멤버이자 파르참(깃발) 분파의 지도자로, 1978년 4월 혁명 후 부수상이 되었으나 곧 칼크파의 숙청으로 체코슬로바키아 대사로 좌천되었다. 프라하에서 해임된 뒤 아프간 정권의 암살단을 피해 체코슬로바키아 비밀경찰의 보호 아래 숲속 오두막에서 은신했으며, 1979년 12월 소련의 아프가니스탄 침공과 함께 대통령으로 복귀했다. 집권 기간 중 사면령, 새 국기 채택, 기본원칙 헌법 제정 등으로 정권의 기반을 넓히려 했으나, 소련의 꼭두각시라는 인식을 벗지 못했고 무자헤딘 반군과의 내전은 교착에 빠졌다. 1986년 고르바초프에 의해 해임된 뒤 모스크바로 망명하여 간암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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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창립, 파르참파 결성
  • 1965–1973하원의원
  • 1978.4–6혁명평의회 부의장
  • 1978.7–9주체코슬로바키아 대사
  • 1979.12–1986.11혁명평의회 의장 겸 PDPA 사무총장
  • 1979.12–1981.6각료평의회 의장
  • 1986–1996모스크바 망명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9–202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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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

즈데녜크 믈리나르시

Zdeněk Mlynář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30–1997 ○ 자연사

사회주의를 민주화하려 한 개혁 공산주의자

즈데녜크 믈리나르시는 체코슬로바키아의 공산주의 정치가이자 법률가로, 사회주의를 민주적 통제와 시민의 능동성에 결합하려 했다. 그는 1968년 프라하의 봄에서 중앙위원회 서기로 일하며 알렉산데르 두브체크 주변의 개혁 지도부에 참여했고, 행동강령을 만든 정치·법률 연구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러나 바르샤바조약군의 침공 뒤 모스크바 의정서에 서명했고 곧 개혁 노선의 한계와 점령의 현실에 부딪혀 당과 공직에서 물러났다. 이후 헌장 77에 서명하고 오스트리아로 망명해 정치학자이자 프라하의 봄을 성찰한 저술가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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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0–1955모스크바 국립대학교 법학부에서 수학
  • 1955–1956프라하 검찰총국에서 근무
  • 1956–1968체코슬로바키아 과학아카데미 국가·법 연구소 연구자
  • 1967–1968공산당 정치체계 개혁 연구팀 및 행동강령 작성 참여
  • 196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프레지디엄 위원
  • 1970공산당에서 제명, 국립박물관에서 곤충학 연구
  • 1977–1997헌장 77 서명 뒤 오스트리아 망명, 인스브루크대학교 정치학 교수

바츨라프 하벨

Václav Havel
외국 정치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36–2011 ○ 자연사

부조리극으로 체제를 풍자하고 반체제 운동을 이끈 체코 극작가 출신 정치가

1969년 2월, 하벨은 잡지 『트바르시』에 실은 「체코의 운명?」에서 쿤데라의 낙관적 민족 서사를 정면으로 반박했다: "우리 운명의 주인은 무엇보다 바로 우리 자신이며, 지리적 위치나 수백 년의 숙명 뒤에 숨는다고 우리가 해방되지는 않는다."

체코의 극작가이자 반체제 운동가, 정치가. 부조리극 『가든 파티』(1963)와 『비망록』(1965)으로 체제를 풍자하며 명성을 얻었고, 1968년 프라하의 봄 진압 후 밀란 쿤데라의 「체코의 운명」에 「체코의 운명?」으로 응답하며 반체제로 전환했다. 1977년 헌장 77을 공동 창립하고 투옥을 거듭했으며, 1989년 벨벳 혁명을 이끌어 체코슬로바키아 마지막 대통령과 체코 초대 대통령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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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3『가든 파티』로 극작가 데뷔
  • 1968바르샤바조약군 침공 당시 자유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으로 저항
  • 1969『트바르시』에 「체코의 운명?」 발표, 쿤데라에 반박
  • 1977헌장 77 공동 창립, 초대 대변인
  • 1979–1983반체제 활동으로 투옥, 『올가에게 보내는 편지』 집필
  • 1989시민포럼 이끌며 벨벳 혁명 주도
  • 1989–1992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93–2003체코 공화국 대통령

무함마드 나지불라

Mohammad Najibullah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프가니스탄 아프가니스탄 1947–1996 ✕ 고문 · 거세 후 시신 전시

소련 철수 후에도 3년을 버텼으나 탈레반에 의해 잔혹히 살해된 아프가니스탄의 마지막 공산주의 대통령

"나는 대통령이 되고 싶지 않았소, 당신이 나를 설득해 밀어붙였고 지원을 약속했소. 이제 나와 아프가니스탄 공화국을 운명에 내던지는 것이오." 셰바르드나제에게, 1991년 가을

파슈툰 명문가 출신의 의사이자 PDPA 파르참파 활동가였던 나지불라는 1980년부터 5년간 비밀경찰 KHAD를 이끌며 잔혹한 탄압으로 두각을 나타냈고, 유리 안드로포프의 주목을 받아 1986년 바브라크 카르말을 대신해 PDPA 사무총장 겸 대통령에 올랐다. '민족화해' 정책으로 이슬람을 국교로 복원하고 복수정당제를 도입했으나 내전은 진정되지 않았고, 소련군 철수를 막으려 애썼지만 1989년 2월 철수가 완료된 뒤에도 3년간 정권을 유지했다. 1991년 소련 해체로 군사·경제 지원이 끊기고 둠두스툼의 배신으로 정권이 붕괴하자 카불의 UN 건물로 피신했으며, 1996년 탈레반이 수도를 점령했을 때 끌려나와 고문 끝에 살해되어 시신이 전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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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PDPA 파르참파 입당
  • 1977PDPA 중앙위원
  • 1978주이란 대사, 곧 해임 후 동유럽 망명
  • 1980–1985국가정보청(KHAD) 청장
  • 1986–1992PDPA 사무총장
  • 1987–1992아프가니스탄 대통령
  • 1992–1996카불 UN 건물 피신

얀 파우어

Jan Pauer
연구자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50–

탱크와 기억의 전쟁 사이에서 프라하의 봄을 해석한 역사가

그 나라의 점령, 1968년 8월의 믿기 어려운 그 연대의 경험, 그것은 누구나 겪을 수 없는 아주 드문 역사적 순간들에 속하고, 그것을 경험한 것은 행운이라 할 수 있습니다.

얀 파우어는 1968년 프라하의 봄을 목격하고 이듬해 서독으로 이주한 체코 출신 역사가다. 1995년 바르샤바조약군의 체코슬로바키아 침공을 다룬 표준적 저작 『프라하 1968』을 출간했으며, 브레멘대학 동유럽연구소에서 체코슬로바키아 현대사를 연구했다. 2011년 ENRS 기고문에서 그는 침공이 '시민사회 반대운동의 시작이자 개혁공산주의의 역사적 종말'이었다고 평가하며, 프라하의 봄이 소련의 탱크와 탈냉전기 체코의 기억 정치에 의해 두 번 묻혔다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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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9체코슬로바키아를 떠나 서독으로 이주
  • 1990–1993체코 정부의 1967~1971년 역사연구위원회 위원
  • 1993–브레멘대학 동유럽연구소 연구원
  • 1995『프라하 1968: 바르샤바조약군의 진입』 출간
  • 2017『자율성을 위한 투쟁: 중동부 유럽의 반체제 담론』 공동 편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