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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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출신 배경
시대

루이 조제프 드 부르봉콩데

Louis Joseph de Bourbon, prince de Condé

망명군 콩데군을 지휘한 부르봉 왕족

부르봉 왕가의 왕족이자 콩데 공으로, 혁명 초 프랑스를 떠나 콩데군을 이끌며 혁명 프랑스와 싸웠다.

부르봉 왕가의 콩데 공으로 혁명 직후 프랑스를 떠났다. 망명귀족으로 구성된 콩데군을 조직해 오스트리아군 등과 함께 혁명 프랑스에 맞서 싸웠다. 나폴레옹 몰락 뒤 프랑스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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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36–1740부르봉 왕가 방계로 태어나 1740년 아버지 루이 앙리 1세 사망으로 콩데 공위를 계승했다.
  • 1753베르사유에서 샤를로트 드 로앙과 혼인해 왕실 내 지위를 굳혔다.
  • 1750년대–1760년대루이 15세와 루이 16세의 왕실에서 그랑 메트르 드 프랑스를 지냈고, 7년 전쟁에 육군 장성으로 참전했다.
  • 1791코블렌츠에 근거를 두고 망명귀족 부대를 조직해 지휘했다.
  • 1792–1801콩데군을 이끌며 오스트리아군과 함께 싸웠고, 이후 영국·러시아의 지원을 받았다. 부대는 1801년 해산되었다.
  • 1814–1818나폴레옹 몰락 후 파리로 돌아와 루이 18세의 왕실에서 다시 그랑 메트르를 맡았고, 1818년 사망했다.

루이 16세

Louis XVI

혁명으로 폐위되고 재판받은 프랑스 국왕

국민공회는 1792년 12월 3일 루이 16세를 직접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반역죄 유죄 표결 끝에 1793년 1월 21일 그를 단두대로 처형했다.

1774년 즉위한 프랑스 국왕으로 재정 위기 속에서 1789년 삼부회를 소집했다. 1791년 헌법을 받아들였지만 바렌 도주와 대외전쟁 속에서 왕실에 대한 불신이 커졌다. 1792년 왕권이 정지되고 국민공회 재판에서 유죄를 선고받아 1793년 1월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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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4–1792프랑스 국왕으로 즉위해 1792년 9월 왕정이 폐지될 때까지 재위했다.
  • 1789재정 위기 속에서 삼부회를 소집했고, 바스티유 함락 뒤 국민의회의 입법 권한을 인정했다.
  • 17916월 바렌 도주가 실패했고, 같은 해 9월 제정된 헌법을 받아들여 입헌군주제가 선포됐다.
  • 17928월 10일 봉기로 체포되어 탕플 감옥에 갇혔고, 9월 21일 국민공회가 왕정을 폐지했다.
  • 1792–1793국민공회가 12월 3일 그를 재판하기로 결정했고, 12월 11일부터 재판이 열려 반역죄 유죄가 선고됐다.
  • 17931월 21일 파리 혁명 광장에서 단두대로 처형됐다.

샤를 10세

Charles Philippe, comte d’Artois
프랑스 왕정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57–1836 ○ 망명 중 사망

혁명기 망명왕당파를 이끈 아르투아 백작

1825년 랭스 대관식에서 성왕(聖王) 치유 의식까지 되살리며 왕권의 신성을 내세웠지만, 1830년 7월 칙령으로 의회를 해산하고 언론을 검열하자 파리 시민이 봉기해 8월 2일 퇴위했다.

루이 16세의 동생 아르투아 백작으로 1789년 바스티유 함락 직후 망명했다. 국외에서 왕정복고를 추진하고 망명귀족 세력의 정치적 구심이 됐다. 부르봉 왕정복고 뒤 1824년 샤를 10세로 즉위했으나 1830년 7월혁명으로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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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아버지 도팽 루이 사망
  • 1773사부아의 마리 테레즈와 결혼
  • 17897월 17일, 바스티유 함락 사흘 뒤 출국
  • 1791–1792트리어 선제후국에 망명 궁정을 두고 반혁명 침공을 준비
  • 1814왕국 총독 대리로서 왕정복고를 주도
  • 1824–1830프랑스 국왕. 1825년 랭스에서 대관식
  • 18307월 칙령 발표, 8월 2일 퇴위

호레이쇼 넬슨

Horatio Nelson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잉글랜드 1758–1805 ✕ 트라팔가르에서 전사

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한 영국 해군 제독

1798년 8월 아부키르만에서 청색기 소장으로 영국 함대를 지휘해 나폴레옹의 이집트 원정군을 호송한 프랑스 함대를 격파했다. 프랑스 기함 오리앙이 폭발하고 교전한 17척 중 전열함 2척과 프리깃 2척만이 달아났다.

영국 해군 제독. 1758년 노퍽주 번햄소프의 목사관에서 태어나 삼촌 모리스 서클링의 후원으로 해군에 들어갔고, 서인도와 지중해에서 복무하며 1794년 칼비에서 한쪽 눈을, 1797년 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었다. 1798년 8월 1~3일 아부키르만에서 프랑스 함대를 격파해 이집트의 나폴레옹 군을 고립시켰고, 1801년 코펜하겐에서 덴마크를 꺾었으며 1805년 트라팔가르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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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4칼비에서 한쪽 눈을 잃음
  • 1797산타크루스데테네리페에서 오른팔을 잃음
  • 1798나일 해전에서 프랑스 함대 격파
  • 1801코펜하겐 해전에서 덴마크 격파
  • 1805트라팔가르 해전에서 전사

자크 카틀리노

Jacques Cathelineau
가톨릭 왕당군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59–1793 ✕ 전상으로 사망

방데 봉기의 첫 총사령관

레팽앙모주 출신의 행상인이자 성당 사무원. 징병과 성직자 시민법을 둘러싼 반발로 1793년 3월 무장 봉기에 나섰고, 6월 12일 수뮈르에서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로 총사령관에 추대됐다. 6월 29일 낭트 공격 중 치명상을 입고 7월 14일 숨졌다.

앙주 지방의 행상인이자 독실한 가톨릭 신자로 1793년 징병 반대 봉기에 가담했다. 여러 농민 부대를 결집시키며 가톨릭 왕당군의 첫 총사령관으로 선출됐다. 낭트 공격에서 입은 총상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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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3.03.12생플로랑 르 비에유에서 봉기가 일어난 뒤 이웃 주민을 모아 잘레로 행군했고, 27명이 그를 따랐다.
  • 1793.03.13잘레에서 첫 전투를 치러 성과 대포를 빼앗았고, 이어 스토플레와 함께 셀레를 점령했다.
  • 1793.04.23–1793.05.05보프레오를 점령하고 투아르 전투에서 승리했다.
  • 1793.05.16–1793.06.09퐁트네르콩트에서 패했으나, 몽트뢰유벨레와 수뮈르를 점령하며 만회했다.
  • 1793.06.12수뮈르 함락 뒤 방데 지도자들의 회의에서 가톨릭 왕당군의 총사령관으로 추대됐다.
  • 1793.06.294만 명을 이끌고 낭트를 공격하다 창문에서 쏜 총에 치명상을 입었다.
  • 1793.07.14생플로랑 르 비에유로 옮겨져 부상으로 숨었다.

프랑수아 드 샤레트

François Athanase de Charette de la Contrie

방데 남부의 왕당파 유격전을 이끈 지휘관

브르타뉴 하급 귀족 출신 해군 장교로 공화국에 맞선 방데 봉기의 상징적 지휘관이 됐다. 그의 선택과 지휘권 다툼은 왕당파 안에서도 그를 가장 논쟁적인 지휘관으로 만들었다.

프랑스 해군 장교 출신으로 1793년 방데전쟁에서 가톨릭 왕당군 지휘관이 됐다. 방데 남부에서 유격전을 이끌었고 1795년 조네 조약을 맺었다가 다시 봉기했다. 1796년 체포되어 낭트에서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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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9–1790브레스트에서 해군 근위병으로 복무를 시작해 1787년 해군 중위로 승진했고 1790년 사직했다.
  • 1793마슈쿨 반군의 지휘를 맡았고 12월 가톨릭 왕당군 바포아투 부대의 장군으로 선출됐다.
  • 17952월 조네에서 조약을 맺고 공화국을 인정했으나 5월 다시 무기를 들었고, 7월 루이 18세에게 총사령관으로 인정받았다.
  • 17963월 라 샤보트리에서 체포되어 낭트에서 총살됐다.

장 조제프 아마블 앙베르

Jean Joseph Amable Humbert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67–1823 ○ 뉴올리언스에서 사망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여단장, 1798년 아일랜드 원정 지휘관

1798년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 전투에서 레이크 경 휘하 영국군을 격파했다.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이 선포되었고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패배해 포로가 되었다.

1767년 생낭보르(로렌 보주)에서 태어나 1792년 자원 입대해 급속히 승진했고 1794년 여단장이 되었다. 1798년 아일랜드 원정을 지휘해 8월 22일 킬랄라에 상륙하고 8월 27일 캐슬바에서 영국군을 격파했으며 8월 31일 코노트 공화국 선포에 관여했으나 9월 8일 발리너멕에서 항복하고 포로 교환으로 귀국했다. 이후 생도맹그 원정에 참전하고 1813년 미국으로 이주해 1815년 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을 도왔으며 만년에는 프랑스어 교사로 지내다 1823년 뉴올리언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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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9213대대 자원병으로 입대
  • 1794여단장(général de brigade) 임명
  • 1798아일랜드 원정 지휘, 킬랄라 상륙과 캐슬바 승리
  • 1802생도맹그 원정 참전
  • 1813미국 뉴올리언스로 이주
  • 1815뉴올리언스 전투에서 미군 지원

샤를로트 코르데

Charlotte Corda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68–1793 ✕ 혁명재판소 판결 후 처형

지롱드파를 지지한 귀족 출신으로 마라를 암살한 인물

1793년 7월 13일 ‘지롱드파 반란 음모를 안다’고 속여 마라의 면담을 얻어, 약용 목욕 중이던 그를 부엌칼로 찔러 죽였다.

프랑스 혁명기 인물로 지롱드파를 지지했다. 1793년 7월 13일 자코뱅 지도자 장폴 마라를 암살했다. 그녀는 마라를 1792년 9월 학살의 책임자로 보았고 급진화한 자코뱅파 때문에 혁명이 위기에 처했다고 판단했다. 현장에서 체포되어 혁명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7월 17일 단두대에서 처형됐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Napoléon Bonaparte

혁명의 전쟁에서 황제가 된 정복자

1799년 11월 9–10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탈레랑·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총재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코르시카의 이탈리아계 가문 출신으로 1785년 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3년 툴롱과 1795년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를 제압해 승진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고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해 제1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무너져 1814년 엘바로 유배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 뒤 워털루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서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공교육 같은 개혁을 남긴 한편 점령지 약탈, 언론 폐쇄와 비판자 탄압, 식민지 노예제 부활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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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5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했다.
  • 1793툴롱 공방전을 승리로 이끌어 준장으로 승진했다.
  • 1795방데미에르 왕당파 봉기를 진압했다.
  • 1796–1797이탈리아 원정군을 지휘해 오스트리아군을 격파했다.
  • 1798–1799이집트·시리아 원정을 지휘했다.
  • 1799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하고 제1통령이 되었다.
  • 1804–1814프랑스 제1제국의 황제로 통치했다.
  • 1815백일천하 동안 다시 권좌에 올랐다가 워털루에서 최종 패배했다.

앙리 드 라 로슈자클랭

Henri de La Rochejaquelein

스물한 살에 방데군 총사령관이 된 귀족 장교

1793년 방데 봉기의 지휘관으로 부상해 숄레 패전 뒤 스물한 살에 왕당군 총사령관이 됐다. 1793년 말 루아르강 북쪽 원정을 이끌었고 1794년 1월 게릴라전 중 전사했다.

왕실군 장교 출신으로 1793년 방데 봉기에 합류해 주요 전투를 지휘했다. 숄레 패전 뒤 스물한 살에 가톨릭 왕당군 총사령관으로 선출됐고 루아르강 북쪽 원정에 참여했다. 1794년 공화국군과의 교전에서 전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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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7부친이 대령으로 있던 왕실 폴란드 연대에 입대
  • 1792입헌위병대 장교로 8월 10일 튈르리궁 방어전에 참전
  • 1793징집 거부 뒤 레스퀴르와 함께 봉기에 합류해 퐁트네르콩트·소뮈르 등에서 승리
  • 1793.10숄레 패전 뒤 가톨릭 왕당군 총사령관으로 선출
  • 1793.11루아르강 북쪽 원정에서 그랑빌 공략에 실패하고 앙제로 후퇴
  • 1793.12르망과 사브네 전투에서 패해 부대가 궤멸
  • 1794.01.28누아예 부근에서 정찰 중 공화국군 병사에게 사살

아돌프 티에르

Adolphe Thiers
독립 활동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797–1877 ○ 뇌졸중

7월 왕정의 총리로, 1871년 파리 코뮌을 진압하고 제3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된 정치가

1871년 5월 파리 코뮌을 진압한 티에르는 1873년 독일군의 프랑스 영토 철수를 앞당긴 뒤 왕당파 의회의 반대 속에 사임했다.

마르세유 출신 변호사·언론인으로 『프랑스 혁명사』를 써 이름을 알렸고, 1830년 7월 혁명에서 루이 필리프를 옹립한 뒤 7월 왕정의 내무장관과 총리를 지냈다. 1834년 리옹 견직공 봉기와 파리 봉기를 진압했다. 제2제정기에는 자유주의 야당의 지도자였다. 1871년 2월 국민의회가 그를 행정 수반으로 세웠고, 3월 18일 몽마르트르의 대포 회수가 실패하자 정부를 베르사유로 옮겨 5월 피의 주간에 코뮌을 진압했다. 1871년 8월 대통령이 되었고 독일 배상금을 조기에 갚았으나 1873년 왕당파 의회에 밀려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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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3–1827『프랑스 혁명사』 10권을 출간해 역사가로 이름을 알렸다.
  • 1836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407월 왕정에서 총리를 지냈다.
  • 1871–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으로 재임했다.

파트리스 드 마크마옹

Patrice de Mac Mahon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08–1893 ○ 자연사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다가 베르사유군을 이끌고 파리 코뮌을 진압했으며, 「도덕 질서」의 대통령이 된 원수

1871년 5월 베르사유군 사령관으로 파리 코뮌을 진압했다. 1873년 대통령이 된 뒤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공화파가 의회 다수당이 되자 1879년 사임했다.

아일랜드계 귀족 가문 출신 군인으로 알제리 정복과 크림 전쟁의 말라코프 공격, 1859년 마젠타 전투로 원수와 공작이 되었다. 1870년 샬롱군을 이끌고 메스를 구하러 가다 스당에서 부상당해 황제와 함께 포로가 되었다. 독일에서 풀려난 뒤 티에르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1871년 5월 파리에 진입했고, 피의 주간의 진압과 대량 처형이 그의 지휘 아래 벌어졌다. 1873년 티에르를 이어 대통령이 되어 왕정복고를 기다리는 「도덕 질서」 정부를 이끌었고, 1877년 의회와의 충돌에서 패한 뒤 1879년 사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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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7프랑스군에 입대했다.
  • 1855크림 전쟁 중 세바스토폴 공방전의 말라코프 전투에서 승리했다.
  • 1859마젠타 전투에서 프랑스군의 승리에 기여해 원수와 마젠타 공작 작위를 받았다.
  • 1864알제리 총독으로 임명됐다.
  • 1870프랑스-프로이센 전쟁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하다 스당 전투에서 부상당해 나폴레옹 3세와 함께 포로가 됐다.
  • 1871티에르 대통령 아래 베르사유군 사령관이 되어 5월 파리 코뮌 진압을 지휘했다.
  • 1873프랑스 제3공화국 대통령에 선출돼 「도덕 질서」 정책을 추진했다.
  • 1877–1879의회와의 대립 뒤 공화파가 선거에서 승리하자 1879년 대통령직에서 사임했다.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

Hermann von Eichhorn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으로 있다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에게 암살된 독일 원수

1918년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된 프로이센 원수 헤르만 폰 아이히호른은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의 폭탄 공격으로 암살됐다.

1866년 프로이센-오스트리아 전쟁과 1870–71년 프로이센-프랑스 전쟁에 참전하고 제18군단장까지 오른 프로이센 장교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는 1915년 1월부터 제10군을 이끌며 코브노와 그로드노를 점령했고, 1916년부터는 아이히호른 집단군도 지휘했으며 1917년 12월 원수가 되었다. 1918년 4월 3일 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점령지 우크라이나의 군정총독이 되었고, 7월 30일 키예프에서 좌파 사회혁명당원 보리스 돈스코이가 마차에 던진 폭탄에 목숨을 잃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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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6–1914프로이센군 입대, 1866·1870–71년 전쟁 참전, 제9사단장(1901–1904)·제18군단장(1904–1912)
  • 1915–1918제10군 사령관, 코브노·그로드노 점령, 1916년부터 아이히호른 집단군 사령관, 1917년 원수
  • 1918키예프 집단군 사령관 겸 우크라이나 군정총독, 7월 30일 키예프에서 암살

주나이드 칸

Jüneýit han
반혁명 세력 히바 칸국 투르크멘인 (요무트 부족) 1857–1938 → 망명지에서 사망

1918~1920년 히바 칸국의 실권을 쥐고 소비에트 권력과 싸운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

1857년(1862년 설도 있다)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의 재판관(카지)과 물 관리인(미라브)을 지냈고, 1912~1916년 투르크멘 봉기로 이름을 얻었다. 1918년 1월 히바의 칸 아스판디야르에게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칸을 암살하고 그 숙부 사이드 압둘라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실권을 쥐었다. 1918년 11월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를 포위했고 1919년 콜차크 정부와 연락했으나, 1920년 초 붉은 군대에 패해 카라쿰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후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과 투르크멘 SSR을 거듭 침공해 1924년 1월에는 히바를 포위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해 1938년 헤라트 근처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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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6투르크멘 봉기 지도자
  • 1918히바 칸국 군 총사령관
  • 1918–1920히바 칸국의 실질적 통치자
  • 1920–1931카라쿰·페르시아·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한 바스마치 지도자

나주무딘 고친스키

Нажмудин Гоцинский
반혁명 세력 러시아 제국 1859–1925 ✕ 총살

북캅카스의 무프티로서 1918~1925년 다게스탄과 체첸의 반볼셰비키 봉기를 이끈 아바르인 종교 지도자

1859년 다게스탄 고초브 마을의 아바르인 귀족 지주 집안에서 태어난 이슬람 학자다. 1917년 5월 북캅카스 산악민 연합 대회에서 북캅카스의 무프티가 되었고, 8월 다게스탄·체첸의 이맘으로 추대되었다가 사흘 만에 칭호를 내려놓았다. 1918년 볼셰비키와 싸웠고, 1919년 데니킨의 의용군을 공산주의자보다 덜한 악으로 보고 협력했다. 1920년 9월 다게스탄 봉기를 일으켜 이끌었으나 봉기는 1921년 5월 진압되었다. 체첸으로 옮겨 다시 봉기를 준비하다 1925년 9월 체포되어 그해 10월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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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3아바르 관구 코이수부 구역 나이브
  • 1917북캅카스 무프티
  • 1917다게스탄·체첸 이맘으로 추대, 사흘 만에 사퇴
  • 1920–1921다게스탄 봉기 지도
  • 1924–1925체첸 봉기
  • 1925체포, 로스토프나도누에서 처형

표트르 바실리예비치 볼로고츠키

Пётр Васильевич Вологодский
러시아 백색운동 반혁명 세력 러시아인 러시아인 1863–1925 ○ 자연사

타협으로 백색 시베리아를 묶은 변호사 정치가

콜차크에게 그는 군 지휘관의 자의와 정부의 무능으로 권위가 시간마다 떨어진다고 직언했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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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7시베리아 사법기관 서기관·판사·검사보
  • 1897–1917톰스크 변호사, 도시 두마 의원
  • 1902–1907톰스크 사회혁명당 조직과 시베리아 지역주의 운동 지도자
  • 1917톰스크 губер니야 комиссар, 옴스크 사법원장
  • 1918.01–06자치 시베리아 임시정부 외무장관
  • 1918.06–11시베리아 임시정부 의장
  • 1918.11–1919.11러시아 정부 각료회의 의장
  • 1920–1925중국 망명, 법률·교민 업무

에리히 루덴도르프

Erich Ludendorff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5–1937 ○ 자연사

힌덴부르크와 함께 독일의 전쟁을 지휘하고 전후 맥주홀 폭동에 가담한 장군

포젠주의 평민 집안에서 태어나 참모본부에서 일했고, 1914년 리에주와 탄넨베르크로 이름을 얻었다. 1916년 8월 힌덴부르크와 함께 최고사령부를 넘겨받아 제1병참총감으로서 사실상의 군사독재 아래 전쟁을 지휘하고 힌덴부르크 계획을 밀어붙였다. 1918년 3월 미하엘 작전으로 춘계 공세를 열었으나 실패했고, 9월 즉각 휴전을 요구한 뒤 10월 해임되었다. 전후 비수설을 퍼뜨렸고 1920년 카프 폭동과 1923년 히틀러의 맥주홀 폭동에 가담했다. 1924~1928년 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의원을 지냈다. 1937년 뮌헨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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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리에주 공략, 탄넨베르크 승리
  • 1916–1918제1병참총감
  • 1918춘계 공세(미하엘 작전), 10월 해임
  • 1920카프 폭동 가담
  • 1923맥주홀 폭동 가담
  • 1924–1928제국의회 의원(국가사회주의 자유운동)

뤼디거 폰 데어 골츠

Rüdiger von der Goltz

핀란드와 발트에서 독일의 동방 영향력을 지키려 한 자유군단 사령관

백군 병참장군 하네스 이그나티우스는 그를 두고 "핀란드의 사실상의 섭정"이라 불렀다.

1918년 발트 사단을 이끌고 핀란드 백군을 도운 뒤 1919년 라트비아에서 독일군과 자유군단을 지휘해 리가를 탈환했으나, 라트비아 정부를 장애물로 여겨 쿠데타를 뒷받침했다. 체시스 패배 뒤 소환되었고 바이마르 시기 극우 퇴역군인 운동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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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대장성(대참모부) 배속
  • 1914제76보병연대 지휘, 제1차 마른 전투에서 부상
  • 1918발트해 사단장, 핀란드 백군 지원 후 '주핀란드 독일군 장군'
  • 1919제6예비군단장, 리가 탈환 후 체시스(벤덴)에서 패배하고 소환
  • 1920카프 쿠데타에서 베를린 방어 사령
  • 1924–1933독일 조국단체연합(VVVD) 의장

루치안 젤리고프스키

Lucjan Żeligowski

「항명」을 가장해 빌뉴스를 점령하고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운 폴란드 장군

「1920년 10월 9일, 빌뉴스는 폴란드 장군 젤리고프스키가 아니라 리투아니아인 젤리고프스키가 점령했다.」

러시아 제국군 출신 폴란드 장군으로 1920년 10월 9일 피우수트스키와 협의한 「항명」으로 빌뉴스를 점령해 중부 리투아니아를 세웠다. 이 사건은 1938년까지 폴란드와 리투아니아의 국교를 막았다. 1947년 런던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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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러시아 제국군 보병 장교 임관
  • 1917–1918러시아 내 폴란드군 조직, 제4폴란드소총병사단장
  • 1919귀국 후 폴란드군 제10보병사단장
  • 1920리투아니아-벨라루스 전선 사령관, 10월 「항명」으로 빌뉴스 점령
  • 1920–1921중부 리투아니아 수장
  • 1925군사부 장관
  • 1935–1939폴란드 하원 의원
  • 1940–1947런던 망명정부 국민평의회 위원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러시아 제국 빌나 현의 줄로보 영지(오늘날 리투아니아)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서술된다.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고, 폴란드 사회당에서 지하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켰다가 1917년 마그데부르크에 갇혔고,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뒤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서 베레자 카르투스카 등에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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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0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레옹 도데

Léon Daudet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42 ○ 병사

악시옹 프랑세즈의 목소리, 추문을 날마다 지면에서 거리로 밀어 올린 논객

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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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7–1890파리 출생,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의학 수학
  • 1900–1908왕당파로 전향, 악시옹 프랑세즈 합류
  • 1908–1942《악시옹 프랑세즈》 공동 창간자이자 주필
  • 1919–1924파리 선출 하원의원
  • 1923–1927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둘러싼 소송, 명예훼손 유죄로 벨기에 망명
  • 1930사면으로 귀국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로 2월 6일 시위를 조성
  • 1942생레미드프로방스에서 사망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

Carl Gustaf Emil Mannerheim
핀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핀란드 핀란드 1867–1951 ○ 자연사

러시아 제국군 중장에서 핀란드의 원수가 되어 두 차례 소련과 맞선 귀족 군인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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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7러시아 제국군 기병 장교, 1917년 중장으로 퇴역
  • 1918핀란드 백군 총사령관으로 내전 승리
  • 1918–1919핀란드 섭정(국가원수)
  • 1931–1939핀란드 국방위원회 의장
  • 1939–1944핀란드 방위군 총사령관 (겨울전쟁·계속전쟁)
  • 1944–1946핀란드 공화국 제6대 대통령

막심 베강

Maxime Weygand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67–1965 ○ 자연사

승리의 참모에서 패배와 협력의 장군으로

1940년 6월 12일, 베강은 프랑스 정부에 항복을 권고했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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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1888생시르 군사학교와 소뮈르 기병학교에서 수학
  • 1914–1918포슈의 참모장 및 연합군 최고사령부 참모
  • 1918콩피에뉴 휴전 협상에서 조건 낭독
  • 1920폴란드 국제연합군사사절단 군사 고문
  • 1923–1924레반트 고등판무관
  • 1931–1935프랑스 최고전쟁위원회 부의장 겸 육군 감찰관
  • 1940.05–06프랑스군 총사령관, 휴전 권고
  • 1940.06–1941.11비시 국방장관 및 북아프리카 총대표
  • 1942–1945독일에 억류, 이터성에 수감
  • 1948반역 혐의 무혐의 처분

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뇌, 「통합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왕당파 이론가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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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68–1890마르티그 출생, 청력을 잃고 파리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99–1908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 1908년 일간지 창간
  • 1908–1939「통합민족주의」의 이론가로 프랑스 극우 전체에 영향
  • 1926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 2월 6일 시위 호소
  • 1938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 1940–1944비시 지지,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
  • 1945.01대적 협력으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 선고
  • 1952병으로 석방된 해에 투르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