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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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수아 드 라 로크

François de La Rocque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5–1946 ○ 억류 후유증

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돌린 불의 십자단의 대령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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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5로리앙에서 장군의 아들로 출생
  • 1907–1918생시르 졸업, 모로코 근무와 1차 대전 복무
  • 1919–1928참모 근무를 거쳐 중령으로 예편
  • 1929–1931불의 십자단 가입, 회장 취임
  • 1931–1936불의 십자단을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확대
  • 1934.02.06의사당 앞에서 대열을 해산시킴
  • 1936.06동맹 해산령 뒤 프랑스사회당(PSF) 창당
  • 1936–1939PSF를 프랑스 최대 우파 정당으로 키움
  • 1940–1942페탱 지지, 비시 국민평의회 참여
  • 1942–1943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 운영, 1943년 3월 게슈타포에 체포
  • 1943–1945독일로 이송되어 억류
  • 1945–1946해방 후 프랑스 당국에 구금, 이듬해 병사
  • 1961저항 강제이송자로 사후 인정

이타가키 세이시로

板垣征四郎

만주 점령을 현실로 만든 군부 책략가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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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육군사관학교 졸업, 육군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졸업, 참모 경력 시작
  • 1924–1926중국 주재 일본 공사관 무관보좌관
  • 1929–1932관동군 고급참모, 만주사변과 점령 작전 주도
  • 1934–1937만주국 군정 최고고문, 관동군 참모차장·참모장
  • 1937–1939제5사단장, 육군대신
  • 1939–1941지나파견군 총참모장
  • 1941–1945조선군·제7방면군 사령관, 싱가포르에서 항복 서명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사형 집행

알베르트 케셀링

Albert Kesselring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60 ○ 전쟁범죄 유죄, 1952년 석방

루프트바페를 키우고 이탈리아 방어를 지휘한 나치 야전원수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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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바이에른군 제2 야전포병연대에 입대
  • 1933제국항공성 행정국장, 루프트바페 창설 준비
  • 1936–1937루프트바페 참모총장
  • 1939–1941제1·제2 항공함대 지휘, 폴란드와 서부 및 동부 전선
  • 1941–1943남부 총사령관, 지중해 전구 독일군 지휘
  • 1943–1945남서부 총사령관 겸 C집단군 사령관, 이탈리아 방어
  • 1945서부전선 총사령관, 5월 미군에 항복
  • 1947–1952전쟁범죄 유죄 판결, 1952년 석방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

Kazimierz Sosnkowski
폴란드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폴란드 폴란드인 1885–1969 ○ 자연사

독립 투쟁과 망명군을 이끈 군사 지도자

바르샤바 봉기 지원이 좌절되자 연합국 지도자들의 폴란드 포기를 공개적으로 비판했다.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이자 장군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함께 비밀 군사조직과 폴란드 군대를 건설했다. 그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군 조직과 전투를 지휘하고 전간기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국내 저항운동과 런던 망명정부의 군사 지도자로서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정책이 폴란드를 종속시킬 위험을 경고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지원을 요구하며 연합국을 공개 비판한 뒤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전후 캐나다에서 망명 폴란드 사회의 원로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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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07폴란드 사회당 전투조직 간부, 러시아 제국에 맞선 비밀 활동
  • 1908–1914능동투쟁연맹 창립 참여, 소총수연맹 참모장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 부사령관 겸 참모장
  • 1919–1920폴란드 군무부 차관, 군대 통합과 확장 담당
  • 1920–1924군무부 장관,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예비군 지휘
  • 1939–1941무장투쟁연맹 총사령관, 망명정부 국내문제위원회 의장
  • 1943–1944폴란드군 서방 총사령관, 바르샤바 봉기 지원 촉구
  • 1944연합국 비판 뒤 총사령관직 해임, 캐나다로 이주

헤르만 호트

Hermann Hoth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5–1971 ○ 전쟁범죄 유죄, 1954년 석방

기갑전의 성과와 동부전선 범죄가 겹친 독일 장군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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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프로이센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 및 야전 지휘
  • 1935–1938제18보병사단 지휘
  • 1939–1940제15군단 지휘, 폴란드와 프랑스 침공 참가
  • 1941제3기갑집단 지휘, 민스크와 비테프스크 점령
  • 1941–1942제17군 사령관
  • 1942–1943제4기갑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구출 작전 지휘
  • 1948–1954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 유죄 판결과 란츠베르크 수감
  • 1956『기갑작전』 출간
  • 1971고슬라에서 사망

스타니슬라프 체체크

Stanislav Čeček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의 지휘관

1918년 5월 펜자에서 약 8,000명의 군단 병력이 체체크의 지휘 아래 집결했다.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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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프라하 제102보병연대 중위
  • 1914러시아군 체코 수렵대 참가
  • 1917체코슬로바키아 군단 제4연대 지휘관
  • 1918펜자 집단 지휘관, 코무치 인민군 볼가 전선 총사령관
  • 1920체코슬로바키아군 참모차장
  • 1921–1923프랑스 육군대학 유학
  • 1924–1926대통령 군사실장, 국방부 항공부서장
  • 1929–1930제5보병사단장 겸 체스케부데요비체 군사령관

굄뵈시 줄러

Gömbös Gyula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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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MOVE 결성, 국민군 조직
  • 1921카를 왕 복귀 저지
  • 1929국방장관
  • 1932–1936총리
  • 1934로마 의정서 서명

더라니 칼만

Darányi Kálmán

1936~1938년 총리로서 죄르 강령을 발표하고 제1차 유대인법을 의회에 낸 굄뵈시의 후임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9년 페슈트주 공무원으로 출발했고, 혁명 뒤 죄르주·코마롬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1927년 국회의원이 되었고 1935년 굄뵈시 내각의 농업장관이 되었다. 1936년 10월 굄뵈시의 후임 총리가 되어 베틀렌 노선의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웠고, 1937년 국민의지당을 금지하고 살러시를 투옥했다. 1938년 3월 죄르 강령을 발표했으나, 오스트리아 병합 뒤 친독 인사를 입각시키고 극우 세력과 협상하다 5월 사임했다. 그의 정부가 낸 제1차 유대인법은 임레디 정부 아래 통과되었고, 그는 1938년 12월부터 죽을 때까지 하원 의장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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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페슈트주 공무원
  • 1920년대죄르주·코마롬주 주지사
  • 1927국회의원
  • 1935농업장관
  • 1936–1938총리
  • 1938죄르 강령 발표
  • 1938–1939하원 의장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계 1886–1948 ✕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 후 사망

기갑전의 한계를 드러낸 일본군 장성

1939년 7월 9일, 전차의 절반 이상을 잃은 야스오카 파견대는 해산되고 그는 지휘에서 해임되었다.

야스오카 마사오미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성으로, 보병 중심 군대에서 전차 운용을 맡은 지휘관이었다. 1939년 노몬한 전투에서 제1전차단을 중심으로 임시 편성된 야스오카 파견대를 지휘해 7월 공세에 참가했지만, 전차와 보병·포병의 협조가 무너진 가운데 장갑차량의 절반 이상을 잃고 부대가 해산되었다. 이후 예비역에 편입되었고, 인도네시아 점령 통치에 참여한 뒤 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되어 1948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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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육군 보병 소위, 보병 제43연대
  • 1914육군대학 졸업
  • 1935육군 소장, 보병 제30여단장
  • 1938육군 중장, 독립혼성 제1여단장
  • 1939제1전차단장, 노몬한의 야스오카 파견대 지휘
  • 1941예비역 편입
  • 1942–1945육군 사정장관, 수라바야 주지사
  • 1945–1948전후 전범 혐의로 체포, 1948년 사망

고트하르트 하인리치

Gotthard Heinrici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6–1971 ○ 자연사

동부전선의 방어전문가

1945년 4월 16일, 소련군 포격 직전 전방 참호의 주력을 후방 진지로 철수시켜 방어선을 보존했다.

고트하르트 하인리치는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독일 국방군의 고위 지휘관으로서 동부전선 방어전의 전문가라는 명성을 얻었다. 그는 소련 침공과 점령전쟁에 참여했으며, 전쟁범죄와 정치적 명령이 작전 영역에 스며든 현실에서 지휘 책임을 졌다. 1945년 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이 된 그는 소련군의 주공을 예측하고 제로 고지를 중심으로 종심 방어를 구축했지만, 그 전술적 성과는 패배를 뒤집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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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프로이센 육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동부전선 복무, 참모 장교
  • 1937–1940제16보병사단 사단장
  • 1940–1941제12군단장, 프랑스 전역과 소련 침공 참전
  • 1942–1944제4군 사령관, 동부전선 방어전 지휘
  • 1944–1945제1기갑군 사령관, 폴란드·슬로바키아 방면 후퇴전 지휘
  • 1945.03–04육군집단 비스툴라 사령관, 제로 고지 전투와 베를린 방어 지휘
  • 1945–1948영국군 포로, 1948년 석방

오키나와 소모전을 지휘한 일본군 장군

패전이 확정된 뒤에도 그는 항복 권고를 거부하고 최후 명령으로 끝까지 싸우라고 지시했다.

우시지마 미쓰루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로, 중국 침략전쟁과 태평양전쟁에서 지휘관을 맡았다. 1944년 오키나와에 배치된 뒤 제32군을 이끌며 해안 결전 대신 남부의 종심 방어와 소모전을 택했지만, 그 방어 체계는 주민 동원과 전투 편입을 수반했다. 1945년 5월 슈리에서 남부로 철수한 결정은 전투를 연장했으나 피란민을 전장에 몰아넣어 주민 희생을 키웠고, 그는 항복을 거부한 채 6월 자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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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육군사관학교 제20기 졸업, 보병 소위
  • 1916육군대학교 제28기 졸업
  • 1918–1919시베리아 출병군 참모, 수송·배치 담당
  • 1937–1939제36보병여단장, 중국 전선 지휘
  • 1939–1941제11사단장, 만주국 호림 주둔
  • 1942–1944육군사관학교장
  • 1944–1945제32군 사령관, 오키나와 방어 지휘
  • 1945육군대장 승진, 마부니에서 자결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

Heinrich von Vietinghoff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7–1952 ○ 자연사

이탈리아 전선의 독일군 항복을 대표한 장군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그의 대리인들이 독일군의 이탈리아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프로이센 군인 가문 출신인 하인리히 폰 피팅호프는 제국군과 국가방위군을 거쳐 국방군의 상급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폴란드 침공과 소련 침공에 참여했고, 1943년부터 이탈리아 주둔 독일군의 방어전을 지휘했다. 1945년 4월 카세르타에서 연합군과 항복 조건을 조율하고 군을 대표해 서명하게 함으로써, 독일군의 이탈리아 전쟁을 끝내는 절차의 핵심 당사자가 되었다. 전후에는 포로 생활 뒤 서독 재무장 논의에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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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8프로이센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9–1935국가방위군 장교, 육군부와 군단 참모 복무
  • 1938–1939제5기갑사단 사단장
  • 1940–1942제46기갑군단 사령관, 발칸 및 동부전선 지휘
  • 1942–1943제9군 및 제15군 사령관
  • 1943–1944이탈리아 제10군 사령관, 구스타프선과 고딕선 방어
  • 1944–1945육군집단 C 및 남서방면군 최고지휘관
  • 1945카세르타 항복 협정에서 독일군 대표

피에르 테탱제

Pierre Taittinger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7–1965 ○ 병사

청년애국단을 세운 의원, 거리의 부대와 의사당 의석을 함께 가진 사람

「거리도 우리 것이다」라는 뜻으로 그는 의회 의석과 준군사 조직을 함께 유지했다. 1934년 2월 6일 밤 콩코르드에 도착한 대열 가운데 청년애국단이 있었고, 그날 죽은 열다섯 명 가운데 여럿이 그 조직의 단원이었다

1차 대전 참전 뒤 하원의원이 된 정치인으로, 1924년 좌파연합의 집권에 맞서 청년애국단을 세워 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조직으로 키웠다. 파란 외투와 베레모를 갖춘 이 조직은 공산당 집회를 습격하고 거리를 다투는 일을 활동으로 삼았고, 그러면서도 지도자는 의회 안에 자리를 두고 있었다. 이 이중성은 프랑스 극우 동맹들의 특징이었다. 1934년 2월 6일 청년애국단은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 가운데 하나였고 사망자도 그 대열에서 나왔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표를 던졌고 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을 지냈으며, 해방 뒤 구금되었다가 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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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7–1918파리 출생, 1차 대전 참전
  • 1919–1940하원의원
  • 1924청년애국단 창설
  • 1925–1936수만 명 규모의 준군사 동맹을 지휘
  • 1934.02.06청년애국단이 콩코르드 광장의 주력 대열로 참가
  • 1940.07페탱 전권 위임에 찬성
  • 1943–1944점령기 파리 시의회 의장
  • 1944–1945해방 후 구금되었다가 석방

에리히 폰 만슈타인

Erich von Manstein
나치당·나치 정권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87–1973 ○ 1949년 전범 유죄, 53년 석방

나치 독일 최고의 작전 전략가이자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정점

"프로이센의 야전원수는 반란을 일으키지 않는다." 1944년 7월 20일 히틀러 암살 미수 사건에 가담하지 않은 이유를 이 한 마디로 답했다.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이자 동부전선에서 가장 위험한 작전적 두뇌로 꼽혔던 군인이다. 1940년 프랑스 침공의 아르덴 우회 기동안(낫질 작전)의 입안자이며, 1941~42년 크림반도와 세바스토폴을 함락시키고 1943년 2~3월 하리코프에서 소련군의 과신장된 진격을 역습해 독일 남부전선의 붕괴를 막고 쿠르스크 돌출부를 형성시켰다. 히틀러와의 작전적 불화로 1944년 3월 해임되었고, 전후 영국 군사재판에서 전쟁범죄로 18년 형을 선고받았으나 1953년 석방되어 서독 군 재건에 조언했다.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는 홀로코스트와 국방군 범죄를 외면한 채 '깨끗한 국방군' 신화의 주춧돌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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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프로이센 근위보병 제3연대 소위 임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양 전선에서 참모 장교로 복무하고 대위로 종전
  • 1920년대–1935제국방위군 참모·지휘관, 국방성 근무; 소령에서 대령으로
  • 1936육군 참모본부 수석 부참모총장 (소장)
  • 1939–1940폴란드·프랑스 전역: 남부집단군 참모장, 낫질 작전 입안, 제38군단장
  • 1941–1942제11군 사령관: 크림반도·세바스토폴 함락; 야전원수 진급
  • 1942–1944돈 집단군→남부집단군 사령관; 하리코프 역습, 쿠르스크 남부 축; 1944년 3월 해임
  • 1949–1955전쟁범죄로 18년 형(1953년 석방); 『잃어버린 승리』 출간, 서독 군사 고문

장제스

蔣介石
중국국민당 반혁명 세력 중국 중국계 1887–1975 ○ 자연사

항일전쟁과 반공 통치를 함께 이끈 국민당 지도자

1937년 소련과 조약을 맺은 뒤에도 그는 공산주의의 확산을 허용하지 않겠다고 밝혔고, 일본과 공산당을 동시에 상대할 수 없다고 설명했다.

장제스는 중국 국민당의 군사·정치 지도자로서 1920년대 북벌을 이끌어 난립한 중국을 국민정부 아래 통합했다. 그는 공산당과의 내전을 우선시했지만, 1936년 서안사변 뒤 일본에 맞선 제2차 국공합작을 받아들였고 1937년 소련과의 불가침조약을 바탕으로 무기와 항공기 지원을 확보했다. 항일전쟁에서 중국의 저항을 지휘한 뒤 국공내전에서 패배해 대만으로 정부를 옮겼으며, 그곳에서 장기간의 계엄과 권위주의 통치를 구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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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중국동맹회 가입
  • 1924–1927황푸군관학교 교장
  • 1926–1928국민혁명군 총사령관, 북벌 지휘
  • 1928–1931국민정부 주석, 행정원장
  • 1937–1945중국 전구 항일전쟁 최고지휘관
  • 1948–1975중화민국 총통
  • 1950–1975대만에서 국민정부 통치

하인츠 구데리안

Heinz Wilhelm Guderia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88–1954 ○ 자연사

기갑전의 설계자이자 나치 독일의 장군

1940년 5월, 그는 뫼즈를 건넌 기갑부대가 보병을 기다리지 말고 해협을 향해 계속 나아가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인츠 구데리안은 전차를 집중 운용하는 기동전 교리를 발전시켜 독일 기갑부대의 형성과 초기 전격전 승리에 기여한 직업군인이었다. 그는 자신의 역할을 과장해 ‘기갑군의 아버지’로 내세웠지만, 그 구상은 오스발트 루츠와 여러 장교들의 작업 위에 세워졌다. 1940년 프랑스 침공에서 그는 아르덴을 돌파해 뫼즈를 건너 영국 해협까지 신속히 진격하자고 밀어붙였고, 이 작전은 연합군을 덩케르크 일대에 고립시켰다. 그러나 그는 나치 정권과 협력했고 동부전선의 침략전쟁과 점령 범죄에 연루된 지휘관이었으며, 전후 회고록은 자신의 책임과 정권과의 결합을 축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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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하노버 경보병대대 장교
  • 1914–1918제1차세계대전 참전, 통신·참모 장교
  • 1927–1931육군수송·차량화 부대 참모 및 교관
  • 1935–1938제2기갑사단 지휘관, 차량화 부대 감찰관
  • 1938–1940제19군단 사령관, 서부전역 기갑 지휘
  • 1941제2기갑집단 사령관, 바르바로사 작전
  • 1943–1945기갑부대 총감찰관, 육군참모총장 직무대행

존 포스터 덜레스

John Foster Dulles
미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미국 미국인 1888–1959 ○ 자연사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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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이브라힘 벡

Ibrohimbek Laqay
반혁명 세력 부하라 에미르국 우즈베크인 (로카이 부족) 1889–1931 ✕ 총살

부하라 에미르의 복위를 내걸고 동부 부하라에서 싸운 로카이 부족 출신의 바스마치 지도자

1889년 무렵 부하라 에미르국 코크타시 마을에서 우즈베크 로카이 부족 장로의 막내아들로 태어났다. 1920년 부족의 벡이 되어 에미르 사이드 알림 칸을 섬겼고, 에미르가 망명한 뒤 그의 복위를 내걸고 동부 부하라의 여러 부족을 모아 바스마치를 이끌었다. 이슬람 보수주의를 내세워 자디드를 대열에서 몰아냈고, 엔베르 파샤를 의심해 한때 체포했다. 1926년 아프가니스탄으로 물러난 뒤에도 국경 너머로 습격을 이어 갔고, 그곳에서 아프가니스탄 정부군과도 싸웠다. 1931년 6월 소련 영내의 카피르니간강을 건너다 사로잡혀 타슈켄트로 압송되었고, 8월 31일 총살되었다. 2021년 우즈베키스탄 대법원이 복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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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로카이 부족의 벡, 부하라 에미르 휘하 복무
  • 1921–1925에미르 복위를 위한 동부 부하라 무장 투쟁 지휘
  • 1926–1931아프가니스탄을 근거지로 소련 영내 습격

아돌프 히틀러

Adolf Hitler

인종주의 전쟁국가를 만든 독재자

1942년 여름, 히틀러는 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나누어 코카서스 석유와 볼가 강 유역을 동시에 겨냥하게 했고, 그 결과는 제6군의 포위와 파괴로 이어졌다.

아돌프 히틀러(1889~1945)는 오스트리아 헝가리 제국의 브라우나우암인에서 태어나 오스트리아 시민권을 세습으로 가졌고, 1913년 뮌헨으로 옮겨 스스로 무국적으로 신고했다. 1919년 독일노동자당에 들어가 1921년 당수가 되었고, 1923년 뮌헨 폭동 실패 후 복역 중 《나의 투쟁》을 구술했다. 1925년 오스트리아 시민권에서 해제되어 1932년 독일 시민권을 얻기까지 무국적이었다. 1933년 1월 30일 수상이 되어 3월 23일 전권위임법으로 독재를 구축했고, 1934년 8월 2일 힌덴부르크 사망 후 국가원수를 겸했다. 그의 정권은 약 600만 유대인 학살과 민간인·포로 약 1,930만 명의 의도적 살해에 책임이 있었다. 1945년 4월 30일 베를린에서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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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1918오스트리아 출생, 제1차 세계대전에서 독일군 복무
  • 1919독일노동자당 가입, 정치 활동 시작
  • 1921국가사회주의 독일노동자당 지도자
  • 1923–1924뮌헨 폭동 실패, 투옥 중 《나의 투쟁》 집필
  • 1933독일 국가수상, 나치 독재 수립
  • 1934–1945총통 겸 국가원수, 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2남부 집단군을 A군과 B군으로 분할, 스탈린그라드·코카서스 공세 지시
  • 1945베를린에서 자살

이시와라 간지

石原莞爾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89–1949 ○ 자연사

만주 침략을 설계한 이론가

“기름이 필요하다고 전쟁을 시작하는 자가 있는가.”

이시와라 간지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군사사상가로, 만주를 장차 미국과 맞설 전쟁을 준비하는 전략적 기반으로 보았다. 그는 1931년 관동군 작전참모로서 이타가키 세이시로와 함께 철도 폭파를 구실로 만주사변을 시작하고 점령을 확대했다. 그러나 중국과의 전면전에는 반대하며 자신의 팽창 구상이 초래한 결과와 충돌했고, 도조 히데키와 대립한 뒤 예비역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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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육군사관학교 졸업, 보병 소위
  • 1915–1918육군대학교 수학, 2등 졸업
  • 1921–1925육군대학교 교관, 독일 주재 유학
  • 1928–1931관동군 작전주임참모, 작전과장
  • 1935–1937참모본부 작전과장, 작전부장
  • 1937–1938관동군 참모부장 대리
  • 1939–1941육군 중장, 제16사단장, 예비역 편입
  • 1941–1945입명관대 국방학 연구소장, 동아연맹 운동 지도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

Jean de Lattre de Tassigny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계 1889–1952 ○ 자연사

비시의 명령을 거부하고 해방군을 이끈 장군

1945년 1월, 후퇴 명령이 내려졌지만 장군은 상징적 도시 스트라스부르의 수성을 명령해 드골의 지시를 '완벽한 수렴'으로 하루 먼저 앞질렀다.

장 드 라트르 드 타시니는 제1차 세계대전과 모로코 전쟁을 거친 프랑스 직업군인으로, 1940년 패전 속에서도 사단의 결속을 지킨 지휘관이다. 비시 정권 아래 복무했지만 1942년 독일군의 남부 프랑스 점령에 맞서라는 명령을 거부하지 않았고, 투옥과 탈출 뒤 자유 프랑스에 합류했다. 육군 B와 프랑스 제1군을 지휘하며 프로방스 상륙 이후 툴롱과 마르세유를 해방하고 라인강과 다뉴브강까지 진격했으며, 1945년 베를린 항복식에서 프랑스를 대표했다. 전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 식민전쟁을 지휘하던 중 암으로 사망했고 사후 프랑스 원수로 추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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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기병학교 수료, 장교 임관
  • 1914–1918제12용기병연대·제93보병연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1–1926모로코 주둔, 리프 전쟁 참전
  • 1940제14보병사단 사단장, 프랑스 전투
  • 1942–1943몽펠리에 제16군관구 사령관, 비시 명령 거부로 투옥·탈출
  • 1943–1945육군 B 및 프랑스 제1군 사령관, 해방전쟁 지휘
  • 1950–1951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극동원정군 총사령관

조르주 티에리 다르장리외

Georges Thierry d'Argenlieu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89–1964 ○ 자연사

고등판무관으로 코친차이나 공화국을 세워 인도차이나 전쟁의 길을 연 수도사 출신 제독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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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 19473월 4일 프랑스 정부가 그를 소환하고 직위에서 해임했다.

바르도시 라슬로

Bárdossy László

커셔 폭격을 구실로 소련에 선전포고하고 유대인 추방을 승인한 전시 총리

솜버테이 출신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1922년 외무부로 옮겨 언론국장 등을 지냈다. 1941년 1월 외무장관이 되었고, 4월 텔레키가 자살하자 총리를 겸했다. 트리아농으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친독 노선을 걸어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했고, 6월 커셔 폭격 뒤 의회 동의 없이 소련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영국·미국과도 전쟁에 들어갔다. 「외국인」 유대인 추방과 제3차 유대인법을 밀어붙였고, 1942년 3월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1월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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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22문교부 관료
  • 1922–1941외무부 언론국장, 외교관
  • 1941외무장관
  • 1941–1942총리 겸 외무장관, 대소련 참전
  • 1945–1946인민재판소 사형 선고, 처형

알프레트 요들

Alfred Jodl

나치 전쟁기획의 실무 책임자

1940년 6월 30일 그는 “영국에 대한 최종 승리는 이제 시간문제”라고 썼다.

알프레트 요들은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을 맡아 나치 국가의 군사 결정을 작전 명령으로 바꾼 직업군인이었다. 1940년 영국을 상대로 최종 승리가 시간문제라고 판단하며 압박과 침공 선택지를 검토했고, OKW에서 관련 준비와 지휘 문서 작성을 조정했다. 그는 소련 정치위원 처형 명령과 특공대 즉결 처형 명령에 서명하거나 배포했으며, 점령지 주민 강제 소개와 가옥 소각 명령에도 책임을 졌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네 혐목 모두 유죄 판결을 받아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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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바이에른 제4야전포병연대에서 군 복무 시작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 포병 장교
  • 1932–1935육군 작전부 근무
  • 1935–1939국방군 최고사령부 국가방위부 책임자
  • 1939–1945국방군 최고사령부 작전참모장
  • 1944육군 상급대장 진급
  • 1945뉘른베르크 재판 피고, 독일 항복문서 서명
  • 1946뉘른베르크에서 교수형