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년 3월 2일, 구치코프는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의 황실 열차에 올라 니콜라이 2세로부터 퇴위 조서를 받았다. 로마노프 왕조 300년은 그 열차 안에서 막을 내렸다.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10월 17일 동맹'(옥토브리스트)을 이끌며 입헌군주제와 스톨리핀 개혁을 지지한 보수적 자유주의자였다. 제3대 두마 의장과 중앙군수산업위원회 의장을 지냈고, 라스푸틴과 궁정을 공개 비판하며 니콜라이 2세의 적이 되었다. 1917년 3월 2일 바실리 슐긴과 함께 프스코프에서 차르의 퇴위를 받아냈으며, 임시정부 초대 육군해군장관이 되었으나 4월 위기로 사임했다. 이후 코르닐로프와 백군을 후원했다. 보어전쟁 의용군, 티베트 여행, 수차례 결투로 점철된 모험가적 삶을 살았고, 1936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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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청조를 무너뜨리고 중화민국을 세운 1911년 신해혁명을 이끈 인물로 평가받는다. 임종에서 직접 구술한 유언에서도 소련과의 우호를 거듭 밝혔다.
광둥 출신으로 하와이와 홍콩에서 교육받고 의사가 되었다. 1894년 흥중회, 1905년 도쿄에서 동맹회를 조직해 청 타도와 공화국 수립을 내걸었고, 1911년 신해혁명 뒤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으나 곧 위안스카이에게 자리를 넘겼다. 민족·민권·민생의 삼민주의를 제창했으며 1923년 소련의 요페와 공동선언을 내고 소련의 원조와 공산당원의 개인 자격 입당을 받아들여 제1차 국공합작을 열었다. 1925년 베이징에서 간암으로 사망했고, 국민당과 공산당이 모두 그의 유산을 주장했다.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10월 혁명을 목도한 포트레소프는 이렇게 썼다. "민주주의의 살해다." 그리고 볼셰비키가 세운 체제를 한마디로 규정했다. "바보들의 사회주의."
1900년 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으로, 러시아 사회민주노동당(RSDLP)의 창립 세대다. 1903년 당 대회에서 마르토프 편에 서며 멘셰비키의 지도적 이론가가 되었고, 레닌의 전위당 모델에 맞서 대중정당을 주장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에는 멘셰비키 방어파를 이끌었으며, 1917년 10월 혁명을 거부했다. 1919년 체카에 체포된 후 1925년 소련을 떠나 베를린과 파리에서 소비에트 체제 비판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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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1896스트루베·마르토프의 사회민주주의 서클에서 활동, '노동해방' 그룹과 접촉
1896페테르부르크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결성 참여
1897–1899체포되어 뱟카현으로 유형
1900–1903이스크라 창간 편집인 6인 중 한 명; 제2차 당대회 이후 멘셰비키 지도부
1905–1907귀국하여 멘셰비키 신문 『나찰로』『넵스키 골로스』 편집
1910–1914멘셰비키 청산파 기관지 『나샤 자랴』 편집, 4권짜리 『20세기 초 러시아 사회운동』 공동 편찬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1903년 5월 키예프에서 체포된 직후, 게르슈니는 저항하지 않고 헌병과 검사들이 지켜보는 앞에서 자신의 수갑과 족쇄에 입을 맞추었다.
사회주의혁명당(에스에르)의 공동 창립자이자 전투조직의 창설자·초대 지도자로서, 1902년 시피야긴 내무장관 암살을 필두로 1902~1903년 러시아 제국을 충격에 빠뜨린 정치 테러를 기획·지휘했다. 유대인 가정 출신의 약제사·세균학자로서 민스크에서 문화계몽 활동을 펼치다 합법적 수단의 한계를 절감하고 전업 혁명가로 전향, '혁명의 호랑이'라 불리며 제국 최대의 지명수배자가 되었다. 1903년 체포돼 사형 선고 후 종신형으로 감형되었고, 1906년 아카투이 카토르가에서 양배추 통에 숨어 탈출해 중국·일본·미국을 거쳐 유럽으로 귀환했으며, 사후에 부하였던 예브노 아제프가 오흐라나 첩자로 밝혀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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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키예프대학교 약학 과정 수학, 학생운동 참여로 첫 체포
1898–1900민스크에서 세균학 연구소 개설, 학교·문화계몽 활동, '노동자당' 가입·지도
1901–1902분산된 에스에르 그룹들을 단일 사회주의혁명당으로 통합 주도, 전투조직 창설
1902–1903전투조직 초대 수장으로서 시피야긴·보그다노비치 암살, 오볼렌스키 암살 미수 기획·지휘
1903–1904키예프에서 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군사재판 사형 선고 후 종신형 감형
1916년 11월 19일 두마 연설에서: "라스푸틴이 살아있는 한, 우리는 승리할 수 없습니다." 이 연설 직후 유수포프 공작이 암살 음모를 제안했다.
흑백당과 '미하일 대천사 동맹'을 창립한 제정 러시아의 대표적 극우 군주주의 정치인. 2·3·4대 국가두마 의원으로 반유대주의·반의회주의 연설과 의사당 내 물리적 기행으로 악명을 떨쳤다. 1916년 12월 궁정의 '어둠의 세력'을 제거해 군주제를 구하려는 신념으로 라스푸틴 암살에 가담했고, 직접 권총을 발사했다. 혁명 후 백군에 합류해 반볼셰비키 지하조직을 이끌다 체포·사면되었으며, 노보로시스크에서 발진티푸스로 사망했다.
1917년 4월 16일(구력 4월 3일) 밤, 페트로그라드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임시정부를 비판하고 유럽 전역의 프롤레타리아 혁명을 촉구했으며, 이후 며칠에 걸쳐 4월 테제를 내놓았다.
레닌은 러시아 제국 심비르스크에서 블라디미르 일리치 울리야노프로 태어난 혁명가·정치가·이론가다.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분열에서 볼셰비키를 이끌었고 1917년 10월 혁명을 지도했다. 그의 정부는 토지를 분배하고 은행과 대공업을 국유화했으며,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이탈했고 코민테른을 통해 세계혁명을 추진했다. 동시에 국가보안기구가 집행한 적색테러로 수만 명이 살해되거나 수용되었고, 내전에서 반볼셰비키 군대를 물리쳤다. 전쟁 폐허와 기근, 민중 봉기에 대응해 1921년 신경제정책을 제안했다. 1924년 1월 21일 고르키에서 사망했고 스탈린이 후계 구도를 장악했다.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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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리가 협상에서 민스크를 포기한 선택은 폴란드의 동방정책을 연방국가 구상에서 민족국가 구상으로 돌렸다.
스타니스와프 그랍스키는 경제학자이자 정치가로, 젊은 시절 사회주의 운동에 참여했으나 국가민주주의 진영의 핵심 이론가가 되었다. 그는 폴란드의 독립과 국가 통합을 민족적 동질성에 강하게 결부했고, 우크라이나인·벨라루스인 등 소수민족을 포괄하는 연방 구상에 비판적이었다. 1920년 민스크와 리가 협상에서 그는 민스크를 요구하지 않는 노선을 지지해 피우수트스키의 동방 연방 구상을 약화시키고 리가 국경의 민족국가적 틀을 굳혔다. 이후 교육장관과 망명 정부·전후 국가기구의 지도자로 활동했지만, 1926년 이후 엔데치아와 거리를 두며 정치적 입장을 조정했다.
「집권하는 동안 나는 집무실을 거의 떠나지 못했다. 그러나 밖에 나가 파리 교외를 지나며 고물 자동차와 오토바이와 2인승 자전거의 행렬을, 맞춰 입은 스웨터 차림의 노동자 부부들을 보았을 때, 그래도 내가 어렵고 어두운 삶들에 일종의 갠 하늘을, 한 줄기 트임을 들여놓았다는 느낌을 받았다」, 리옴 재판 진술, 1942년 3월
드레퓌스 사건으로 정치에 들어와 1920년 투르 대회에서 다수파의 코민테른 가입에 맞서 사회당(SFIO)의 「낡은 집」을 지킨 지도자. 1936년 인민전선 정부의 총리로 마티뇽 협정을 중재하고 2주 유급휴가와 주 40시간제를 입법했으며, 프랑스 최초의 사회주의자 총리이자 최초의 유대인 총리로서 극우의 표적이 되었다. 1940년 페탱 전권 위임에 반대한 80인 중 한 명으로 비시 정권의 리옴 재판에서 피고석을 인민전선 변호의 연단으로 바꾸었고, 부헨발트 억류에서 살아 돌아와 1946년 말 과도정부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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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4–1906국사원 법관이자 문예비평가,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조레스를 따라 사회주의 운동에 입문
1918년, 마르토프는 스탈린이 1907년 당에서 제명된 전력이 있음을 폭로했다. 스탈린은 명예훼손으로 고소했고, 혁명재판소는 마르토프에게 '공적 견책'을 선고했다.
이스크라를 레닌과 함께 만든 동지였으나, 1903년 당원 자격 조항 하나를 두고 갈라져 멘셰비키의 지도자가 되었다. 10월 이후에도 나라를 떠나지 않고 합법 야당의 자리를 지키려 애썼고, 1920년 출국을 「허락받아」 베를린에서 결핵으로 죽었다. 병상의 레닌이 그의 안부를 물었다는 이야기가 전한다.
1918년 1월 18일, 타브리다 궁전. 제헌의회 의장으로 선출된 체르노프는 러시아 최초의 민주적 의회 개회를 선언했다. 볼셰비키 의원들이 퇴장한 후에도 회의는 계속되었고, 토지 사회화 법안이 통과되었다. 새벽 4시 40분, 무장한 수비대가 "경비가 피곤하니 회의를 끝내 달라"며 접근했다. 체르노프는 차기 회의 일정을 정하고 휴회를 선언했다. 그날이 마지막 회기였다.
나로드니키 농본주의와 마르크스주의를 접목해 토지 사회화를 사회혁명당(PSR) 강령으로 정립한 수석 이론가. 1917년 제헌의회 의장에 선출되었으나, 볼셰비키의 의회 해산 후 32년간 망명하며 저술로 맞섰다.
트란실바니아 통합을 이끈 국민농민당의 지도자, 1947년 종신형을 받고 시게트 감옥에서 죽다
1947년 11월 11일 부쿠레슈티 군사법원은 일흔네 살의 마니우에게 종신 중노동형을 선고했다. 그가 마지막 변론에서 남긴 말은, 자기가 한 일은 모두 루마니아 인민을 위한 것이었고 역사가 판단할 것이라는 한 문장이었다.
트란실바니아 설라지의 그리스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헝가리 의회의 루마니아 민족당 의원으로 정치를 시작했다. 1918년 12월 알바이울리아 대집회 뒤 트란실바니아 지도평의회 의장으로 루마니아와의 통합을 이끌었고, 1926년 농민당과 합쳐 국민농민당을 세워 1928~30년과 1932~33년 총리를 지냈다. 카롤 2세의 개인 통치와 1938년 왕정 독재에 맞섰고, 안토네스쿠 시기에는 베사라비아 회복까지는 지지했으나 드네스트르를 넘는 전쟁에 반대해 1944년 8월 23일 쿠데타 준비에 참여했다. 전후에는 그로자 정부와 소련의 지배에 맞서는 야당의 중심이었고 1946년 선거 조작에 항의했다. 1947년 7월 당 지도부가 터머더우 비행장에서 국외 탈출을 시도하다 체포된 것을 빌미로 국민농민당이 해산되었고, 그는 10~11월 재판에서 「반역」 죄로 종신형을 받았다. 1953년 2월 시게트 감옥에서 80세로 죽어 표지 없는 무덤에 묻혔다.
1913년 2월 볼셰비키 무도회에서 말리놉스키가 빌려준 연미복을 입은 스탈린이 체포되자, 그는 스탈린과 대화 중이던 현장에서 '내가 구해내겠다'고 외쳤다.
볼셰비키 중앙위원이자 제4대 두마 의원으로 활약한 폴란드 출신 노동운동가. 레닌의 깊은 신임을 얻어 당내 최고위 노동자 출신 지도자로 부상했으나, 실은 제정 오흐란카의 최고액 비밀요원 '포르트노이'로서 오르조니키제·스베르들로프·스탈린의 체포를 초래하고 당 분열을 심화시켰다. 1914년 강제 사임 후 1918년 귀환, 재판에서 사형을 받고 크렘린에서 총살되었다. 그의 침투가 드러나면서 볼셰비키 내부의 음모적 불신이 깊어졌고, 이는 훗날 대숙청 시기 편집증적 숙청 논리의 한 기원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