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뉴턴에게는 과학적 포부와 사색의 깊이 외에도 행정적 재능이 있었다… 막대한 행정·실무 활동이 그를 과학 작업에서 떼어놓았다.” — 바빌로프가 1945년 자신의 뉴턴 전기에서 쓴, 동시에 자기 자신을 그린 구절.
소련의 물리광학자이자 과학행정가로, 소비에트 물리광학 학파의 창시자이다. 루미네선스 연구를 개척했으며, 1934년 파벨 체렌코프와 함께 바빌로프-체렌코프 효과를 공동 발견하여 훗날 체렌코프의 노벨 물리학상 수상의 토대를 놓았다. 1934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레베데프 물리학연구소(FIAN) 소장을 지내며 소련 최대의 물리학 연구기관으로 키워냈고, 1945년 과학아카데미 총재로 선출되어 초기 원자력 시대의 소비에트 과학을 행정적으로 이끌었다.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았으며 제2판 『대소비에트 백과사전』 편집장을 맡았다. 유전학자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동생으로, 형이 리센코의 박해로 체포·사망한 시기에도 공식적 지위를 유지하며 물리학을 보호해야 했던 인물이다.
“저항을 즉시 중지하라. 베를린의 민간인과 부상자들이 겪는 고통을 매 시간 연장할 뿐이다.”
헬무트 바이들링은 제국군에서 출발해 국방군 포병 장교와 군단 지휘관으로 올라선 독일 장군이었다. 동부전선에서의 지휘는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과 점령 체계에 연루되었고, 그의 군단은 오자리치 강제수용소 사건과 관련해 전후 책임 추궁의 대상이 되었다. 1945년 4월 23일 베를린 방위구역 사령관이 된 그는 히틀러의 항복 금지 명령 아래 도시 방어를 지휘했으며, 5월 2일 바실리 추이코프와 협상해 주둔군의 저항 중지 명령을 내렸다. 소련 포로가 된 뒤 전쟁범죄로 25년형을 선고받고 1955년 수감 중 사망했으며, 러시아 검찰은 1996년 그를 복권 대상이 아니라고 판단했다.
두 달간의 빙판 체류 내내 그는 매일 저녁 텐트에서 철학·수학·지리 강연을 열었다. 결핵으로 각혈하면서도 끝까지 진영을 떠나지 않겠다고 버텼고, 104명 중 단 한 명의 무단 이탈도 없었다.
수학자·북극 탐험가·국가행정가. 모길료프 출생의 독일계 러시아인으로, 군론 연구로 모스크바 대수학파를 창건했다. 1932년 쇄빙선 시비랴코프호로 북극해 항로를 세계 최초로 단일 항해로 돌파했고, 1934년 첼류스킨호 침몰 후 빙판 위에서 104명의 생존자를 이끌었다. 글라브세브모르푸티 국장으로 북극 개발을 총괄했으며, 말년에는 태양계 행성이 차가운 먼지 구름의 응축으로 형성되었다는 우주기원론을 제창하여 소련 과학계에 큰 영향을 남겼다.
1942년 11월, 그는 영국 공작대와 ELAS의 아리스 벨루히오티스 부대가 합류한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자기 병력을 투입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나폴레온 제르바스는 1941년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세우고 점령에 맞선 비공산주의 저항을 이끌었다. 그는 1942년 고르고포타모스 철교 폭파작전에서 영국 특수작전집행부, ELAS와 협력했지만, 곧 영국의 지원과 공산주의 세력과의 대립을 중시하며 공화주의에서 왕정 지지로 선회했다. 해방 뒤에는 우익 정치인과 공공질서 행정가로 활동하며 저항운동의 군사적 권위를 내전기의 국가 탄압과 결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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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1914지원병으로 입대해 발칸전쟁에 참전하고 하사관학교를 졸업했다.
1916–1920국방운동에 가담해 마케도니아 전선에서 복무하고 소령으로 진급했다.
1925–1926판갈로스 정권 아래 아테네 수비대 사령관과 공화국수비대 대대장을 지냈다.
1941베니젤로스파 장교들과 국민공화그리스동맹(EDES)을 창립했다.
1942–1944EOEA를 조직해 에피루스에서 무장 저항을 지휘하고 고르고포타모스 작전에 참여했다.
미국 컬럼비아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실용주의 철학자로, 문어 대신 백화문으로 글을 쓰는 문학혁명을 이끌어 중국인의 문자 생활을 바꾸었다. 신청년의 마르크스주의자들과도, 헌정을 저버린 국민정부와도 거리를 두었으며 1962년 타이베이에서 사망했다.
미국에서 존 듀이에게 배운 철학자로 1917년 『신청년』에 문학개량을 제안해 백화문 운동을 열었다. 5·4 시기 「문제를 많이 연구하고 주의(主義)를 적게 말하라」며 마르크스주의로 기운 리다자오·천두슈와 갈라섰다. 베이징대 교수와 총장을 지냈고 항일전쟁기 주미대사로 일했다. 1949년 뒤 미국과 대만에서 활동했으며 대륙에서는 1950년대 그의 사상을 겨냥한 대규모 비판운동이 벌어졌다. 타이베이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1941년 희곡 『이레네가 무슨 뜻일까?』에서 평화의 이름을 내세우며 싸움을 벌이는 인물들을 그렸다. 외교 경험은 전쟁과 방관을 다루는 연극의 소재가 되었다.
스페인의 연극 연출가·극작가이자 공화국 외교관. 마누엘 아사냐의 처남으로, 현대적 연극 교육과 무대 실험을 추진했으며 내전 중 제네바 총영사로 활동했다. 외교 활동에서는 대통령과 정부 사이의 갈등에 얽혔다. 프랑스 망명 중 체포되어 스페인에서 수감 생활을 했고, 이후 멕시코에서 연극 활동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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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0바야돌리드 대학과 마드리드 대학에서 수학하고 법학 학위를 받았으며, 볼로냐 스페인 대학에서 박사 과정을 밟았다.
1917마드리드 아테네움에서 우나무노의 『페드라』를 연출하며 연출가로 데뷔했다.
1928–1929마드리드의 렉스 극장에서 실험 극단 '엘 카라콜'을 이끌었다.
1930–1935마르가리타 시르구의 극단에서 연출과 문학 자문을 맡아 마드리드 에스파뇰 극장을 함께 운영했다.
1932에스파뇰 극장 안에 연극 학교인 에스파뇰 실험극장을 세웠다.
1934마리아 게레로 극장을 배정받아 연극학교 '연극예술학교'(TEA)를 세웠다.
내전기제네바 총영사로 재직했고, 아사냐의 일기가 도난당한 사건에 휘말렸다.
1940년대프랑스에서 체포되어 스페인으로 이송되었고, 프랑코 정권 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은 뒤 30년 징역으로 감형되어 여러 형무소를 거쳤다.
1947석방된 뒤 멕시코로 망명해 연극 연출과 강연 활동을 다시 시작했다.
1953–1967멕시코와 과테말라에서 연출과 강연을 이어갔으며 1967년 멕시코에서 사망했다.
1963년, 72세의 볼로디체바는 유리 카랴킨에게 말했다: "레닌 동지를 해독하는 것은 아주 어려웠고, 스탈린 동지는 아주 쉬웠습니다…"
레닌의 업무서기(1918~1924)로, 1922년 12월 30~31일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를 포함한 마지막 구술들을 받아썼다. 1923년 3월 5일 레닌이 트로츠키에게 그루지야 사건 방어를 요청한 편지를 받아쓰고 전달했으며, 유언 초기 필사본을 스탈린의 명령으로 폐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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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VII(4월) 전러시아 당대회 서기국 근무, VI 당대회 속기사
1917.11–1918.07인민위원회의(Sovnarkom) 출판국 서기
1918–1924인민위원회의 및 노동국방회의(STO) 타자수·속기사, 서기 보좌관
1922.12–1923.03레닌의 마지막 논문·편지 구술을 받아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 문제 또는 자치화에 관하여」 등
돈바스 탄광 갱목용 목재를 금지령을 어기고 반출한 사건을 보고받은 스탈린은 "고르바토프는 무덤만이 바로잡을 것이다"라고 말한 뒤, 사리사욕이 없었음을 이유로 사건을 종결시켰다고 전해진다.
1891년 블라디미르현 파호티노의 농가에서 태어나 1912년 제정 러시아 군대에 입대했고, 제1차 세계대전에서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을 받으며 상급 하사관까지 올랐다. 1919년 붉은군대에 들어가 내전에서 기병연대장과 바슈키르 기병여단장을 지켰으며, 1937년 해임되고 1938년 체포되어 고문을 당하면서도 죄를 인정하지 않았다. 1939년 5월 콜리마 수용소 15년형을 선고받고 1941년 3월 석방되었으며, 1943년부터 종전까지 제3군을 지휘했고 1945년 베를린 사령관이 되었다. 전후 공수군과 발트 군관구를 지휘하고 1955년 육군 대장이 되었으며, 1964년 회고록으로 1930년대 대숙청을 상세히 밝힌 초기 소련 국가 요인이 되었다.
1943년 4월 17일, 라친스키가 이끄는 폴란드 외교부는 카틴 사건 조사를 국제적십자위원회에 요청했다.
에드바르트 라친스키는 폴란드 제2공화국의 외교관이자 런던 망명정부의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전쟁 중 연합국에 독일 점령지의 유대인 대량학살을 알렸고, 1943년 카틴 학살 의혹의 국제적 조사를 요청하는 폴란드 측 외교 행동에 참여했다. 1945년 이후에도 망명정부의 정통성을 지키면서 조선의 민주 opposition movement와 연대를 모색했고, 1979년부터 1986년까지 망명 중인 폴란드 공화국 대통령을 지냈다.
트로츠키는 회고록에 이렇게 썼다: "스클랸스키를 나의 대리인으로 선택했다. 그 후 한 번도 후회한 적이 없다. 프랑스 혁명의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될 인물이 있다면 바로 스클랸스키다."
적군의 실질적 창설자 중 한 명이자 트로츠키의 가장 신뢰받는 대리인. 키예프 의대 출신의 볼셰비키로, 1918년 겨우 26세에 공화국 혁명군사평의회 부의장 겸 전쟁인민위원 대리에 임명되어 내전 내내 트로츠키가 전선을 누비는 동안 모스크바에서 적군의 전 행정·작전 기구를 지휘했다. 트로츠키는 그를 프랑스 혁명의 군사 조직가 라자르 카르노에 비견했다. 스탈린의 권력 장악 속에서 1924년 해임되어 섬유 트러스트로 좌천되었고, 이듬해 미국 출장 중 롱레이크 호수에서 의문의 익사로 사망했다. 스탈린 시기 이후 그의 이름은 소련 군사사에서 철저히 삭제되었다.
1930년 8월 2일, 바라노프는 보로네시 비행장에서 무장 낙하산병의 첫 전투 투하를 명령했다 — "적 영토에서의 사보타주 작전을 위한 무장 낙하산병 집단 투하를 시연하라" — 이날은 소련 공수군(VDV)의 탄생일이 되었다.
소비에트 공군과 항공산업의 주요 창설자로, 1924년부터 1931년까지 노농적군 공군(VVS) 사령관을 맡아 조직적·산업적 기초를 구축했다. 1932년부터 오르조니키제 휘하 중공업 부인민위원 겸 항공공업 총국장으로 항공기·엔진 생산 확대를 주도해 제2차 세계대전을 떠받칠 항공산업 토대를 놓았다. 1930년 8월 2일 보로네시 근교에서 소련 최초의 전투 낙하산병 투하를 지시해 공수군(VDV) 창설의 기원을 만들었고, 비밀 리페츠크 독일 항공학교 설립 협정에도 서명했다. 초기 로켓 연구(GIRD)와 성층권 비행선 개발을 지원했으며 모스크바·하리코프·카잔 항공대학 설립을 주도했다. 1933년 항공 사고로 아내와 함께 사망, 유해는 크렘린 벽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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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1913년 체포·페테르부르크 추방
1915–1917제국군 징집, 혁명 선동으로 체포되어 8년 중노동형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1927년 11월 7일 혁명 10주년, 크렘린 맞은편 자택에서 레닌·트로츠키·지노비예프의 초상화와 '레닌의 유언을 이행하라'는 현수막을 내걸었다. 스탈린 지지자들이 난입해 파괴했고, 거리에서 구타당해 체포되었으나 그날 탈출했다.
라트비아 출신의 볼셰비키 혁명가·경제가. 열네 살에 입당하여 1917년 24세로 중앙위원에 선출되었다. 레닌의 핀란드 은신 시기 핵심 협력자였고, 10월혁명 당시 핀란드 주둔군을 페트로그라드로 수송했다. 내전기에는 동부·남부·서부·캅카스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 위원과 붉은군대 정치총국장을 지냈다. 좌익 반대파의 주요 지도자로 1927년 11월 마지막 공개 시위를 주도했고, 1930년 트로츠키주의 결별 선언 후 복권되었으나 이반 스미르노프의 지하 조직에 계속 가담했다. 1937년 1월 처형되었다.
라트비아계 농민 가정 출신의 볼셰비키로, 혁명과 당 조직 사업을 거쳐 중앙 지도부에 올랐다. 그는 농촌 정책에서 전면적 집단화를 강행한 핵심 실무자였으며, 모스크바 당 조직을 이끌며 속도전을 밀어붙였다. 그러나 1930년 과속의 책임을 뒤집어쓰고 실각했으며, 이후에도 중앙아시아와 과학 행정에서 당의 정책을 집행했다. 1937년 체포되어 조사 중 사망했고, 1955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4년 정부 연구 여행으로 독일·영국·캐나다·미국을 돌며 선진 자본주의 국가의 농업 생산 조직을 연구하던 중 소로킨을 만났고, 소로킨은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권했지만 콘드라티예프는 귀국해 연구를 계속하기로 했다.
1892년 3월 4일(신력 3월 16일) 코스트로마현 키네솀마 우예즈드 갈루옙스카야 마을에서 열 자녀를 둔 농민 가정의 장남으로 태어난 러시아·소비에트 경제학자이다. 자본주의 경제의 약 50년 장기 순환을 규명한 '콘드라티예프 파동' 이론의 창시자로, 1905년 사회혁명당에 들어가 1906년 체포되어 수감되었고 1915년 페테르부르크대 법학부를 졸업했다. 1917년 케렌스키의 농업 비서관과 식량차관을 지냈고, 네프 시기 콘윤크투라 연구소를 창립해 1928년까지 소장을 맡으며 1923~1928년 농업 장기계획을 주도했다. 1927년 1차 5개년 계획의 불균형을 지적했고 1928년 4월 해임, 1930년 체포되어 1932년 8년형을 받고 1938년 9월 17일 처형되었다.
국유은행 총재 시포프가 스몰니에 체포되어 있던 밤, 고르부노프는 "특별한 예의로서, 대단히 성가셨지만" 자신의 침대를 시포프에게 양보하고 의자에서 잠을 청해야 했다.
니콜라이 고르부노프는 1917년 11월부터 인민위원회의 서기 겸 레닌의 개인비서로 소비에트 정부의 초기 행정 기반을 구축한 볼셰비키 기술관료였다. 바우만 모스크바 고등기술학교 총장(1923-1929)과 소련 과학아카데미 상임서기(1935-1937)를 지내며 과학기술 행정의 핵심 연결고리로 활동했고, 니콜라이 바빌로프의 식물탐사와 전연방 농업과학아카데미(바스흐닐) 설립을 적극 뒷받침했다. 타지키스탄 파미르 원정대(1932-1935)를 이끌어 1933년 소련 최고봉 스탈린봉(현 이스모일 소모니봉) 첫 등정을 조직했으며, 등반가 예브게니 아발라코프와 함께 정상 공격에 직접 참여했다. 대숙청기인 1938년 체포되어 '등반가 사건'으로 처형되었고, 1954년 복권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