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85.09.22–2006.03.09

일본의 거품경제와 붕괴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엔이 치솟은 뒤 일본의 땅값과 주가는 왜 그토록 부풀었고, 1990년대 초 거품은 어떻게 꺼졌나? 부실채권은 왜 10년 넘게 정리되지 않고 1997~1998년 은행·증권사의 연쇄 파산으로 이어졌으며, 제로 금리와 양적완화는 디플레이션 앞에서 무엇을 할 수 있었나? 「잃어버린 10년」 동안 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고, 대차대조표 불황론·통화정책 실패론·미국 압력론·마르크스주의는 이 경험을 각각 어떻게 설명하나?

전후 고도 성장과 수출 흑자로 미국과 무역 마찰을 빚던 일본은 1985년 9월 플라자 합의로 달러 인하에 동의했고, 엔은 1년 만에 1달러 240엔대에서 150엔대로 올랐다. 엔고 불황을 막으려 일본은행이 공정 보합을 1987년 2월 2.5%까지 내리고 정부가 내수 확대를 약속하자, 싼 돈이 땅과 주식으로 몰려 1989년 12월 29일 닛케이 지수가 38,915로 정점을 찍었다. 1989~1990년 미에노 야스시 총재의 급격한 금리 인상과 대장성의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로 거품이 꺼지자 은행에는 부실채권이 쌓였고, 손실을 미룬 은행들이 좀비 기업을 연명시켰다. 1997년 소비세 인상 뒤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과 야마이치 증권이, 1998년 일본장기신용은행이 무너졌다. 일본은행은 1999년 제로 금리, 2001년 양적완화를 시작했지만 디플레이션과 저성장은 「잃어버린 10년」을 넘어 이어졌고, 신규 졸업자의 취직 빙하기와 비정규 고용의 증가가 뒤따랐다.

미국전후 일본은 어떻게 미국과 무역 마찰을 빚는 수출 대국이 되었나? {japan}

제2차 세계대전 직후 일본 경제는 폐허였다. 1946년 공업 생산은 전쟁 전의 27.6%로 떨어졌다. 냉전이 시작되자 미국은 일본을 약하게 만드는 대신 반공의 보루로 다시 세우는 쪽으로 정책을 바꾸었고, 1950년 한국전쟁의 군수 주문이 파산 직전의 중공업을 살렸다. 1950년대 중반 전쟁 전 생활수준을 되찾은 뒤 일본은 1957~1973년 해마다 국민총생산이 10% 안팎 늘어나는 「고도 성장」을 누렸다. 엔은 브레턴우즈 체제 아래 1달러 360엔에 고정되어 있어 수출에 유리했다. 1

성장의 엔진은 은행과 기업이 얽힌 구조였다. 일본은행이 시중 은행에 돈을 빌려주고, 시중 은행은 다시 대기업 집단에 갚을 능력 이상으로 빌려주는 「오버론」이 관행이 되었다. 전쟁 전 재벌의 뒤를 잇는 기업 집단 「게이레쓰」는 한 은행을 중심으로 서로 주식을 나눠 가졌고, 이 상호 보유가 적대적 인수를 막았다. 가계의 높은 저축이 은행을 거쳐 기업의 설비 투자로 들어갔다. 일본은 1968년 세계 3위, 1980년대에는 소련을 넘어 세계 2위의 경제가 되었다. 1 2

1965년 이후 미국의 대일 무역이 줄곧 적자가 되자 마찰이 터져 나왔다. 미국은 섬유(1972), 철강·컬러텔레비전(1977)에서 일본의 「수출 자율 규제」를 받아냈고, 1981년에는 일본 자동차 업계가 대미 수출을 스스로 묶었다. 1985년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가 500억 달러에 이르자 비판은 일본의 투자·금융·서비스 시장 폐쇄성으로 번졌고, 미국에서는 「재팬 배싱」(일본 때리기)이 유행어가 되었다. 1987년 4월 레이건 대통령은 일본의 덤핑에 맞선다며 일본산 개인용 컴퓨터와 컬러텔레비전 등에 100%의 제재 관세를 매겼다. 3 4

영국플라자 합의는 무엇을 약속했고, 엔은 얼마나 올랐나? {usa} {japan} {germany} {france}

1980년대 전반 달러는 지나치게 비쌌다.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의 고금리와 레이건 정부의 재정 적자가 겹쳐 미국 금리가 높아지자 세계의 돈이 달러로 몰렸고, 1980~1985년 달러는 엔·마르크·프랑·파운드에 견주어 약 50% 올랐다. 달러가 비싸면 미국 상품은 외국에서 비싸지고 외국 상품은 미국에서 싸진다. 곡물 수출업자, 자동차 업계, 캐터필러·IBM·모토로라 같은 제조업체가 보호무역을 요구했고, 의회가 보호무역 입법을 검토하기 시작하자 1985년 1월 재무장관이 된 제임스 베이커가 환율 조정 협상에 나섰다. 5

1985년 9월 22일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 5개국(G5)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만났다. 일본에서는 대장대신 다케시타 노보루가 나왔다. 내용은 실무자 협의에서 미리 정해져 있었고 회의는 20분 만에 끝났다. 발표문은 「달러 이외 주요 통화들의 추가적이고 질서 있는 절상이 바람직하다」고 하고, 그렇게 하는 것이 도움이 될 때 「더 긴밀히 협력할 준비가 되어 있다」고 밝혔다. 말은 조심스러웠지만 뜻은 분명했다. 각국 중앙은행이 시장에서 함께 달러를 팔아 값을 끌어내리겠다는 것이다. 일본 정부는 내수 확대, 외국 상품에 대한 시장 개방, 국내 자본 시장 자유화를 약속했다. 6 5 7

효과는 예상보다 컸다. 발표 다음 날 하루 사이 달러는 1달러 235엔에서 약 20엔 떨어졌고, 1년 뒤에는 150엔대에서 거래되었다. 다케시타가 「1달러 190엔이라도 괜찮다」고 말한 것도 투기적인 엔 매수를 부채질했다. 1987년 2월 22일 서방 6개국은 파리 루브르 궁의 프랑스 재무부에서 지나친 달러 하락을 멈추고 환율을 당시 수준에서 안정시키기로 했다(루브르 합의). 그때 환율은 1달러 150엔 안팎이었다. 그러나 엔은 1987년 말 128엔, 1988년 초 121엔까지 계속 올랐다. 6 8 9 10

엔이 오르면 같은 일본 상품의 달러 값이 오르므로 수출 기업은 값을 올려 덜 팔거나 이윤을 줄여야 한다. 수출과 수출용 설비 투자가 성장을 이끌던 일본 경제는 곧바로 타격을 입었다. 실질 성장률은 1985년 5.2%에서 1986년 3.3%로 떨어졌고, 이 「엔고 불황」이 이어지는 정책의 출발점이 되었다. 정작 미국의 대일 무역 적자는 거의 줄지 않았다. 일본 기업은 합리화와 생산 기지의 해외 이전으로 경쟁력을 지켰고, 일본의 무역 흑자는 1986~1988년 오히려 늘었다. 엔고를 피해 동남아시아로 공장을 옮기는 일본 기업이 급증하면서 그 지역의 고도 성장에도 불이 붙었다. 10 3 11 6

일본일본은행은 왜 금리를 내렸고, 그 돈은 어디로 흘러갔나?

일본은행이 시중 은행에 돈을 빌려줄 때 받는 금리를 공정 보합(공정 할인율)이라 한다. 이 금리가 내려가면 은행과 기업이 돈을 싸게 빌릴 수 있어 대출과 투자가 늘어난다. 일본은행은 1986년 1월 30일부터 다섯 차례 공정 보합을 내려 5%에서 1987년 2월 23일 2.5%로 낮추었고, 이 사상 최저 수준을 1989년 5월까지 유지했다. 첫 인하를 빼면 대부분의 인하는 엔고를 막고 외환 시장에 개입하려는 국제 정책과 얽혀 있었다. 두 번째와 세 번째는 미국과의 공동 발표였고, 네 번째와 다섯 번째는 미·일 또는 G7의 공동 성명에 따른 것이었다. 국내 경기보다 환율 안정이 앞섰다는 비판이 여기서 나온다. 10

재정도 풀었다. 1986년 4월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사적 자문기구가 낸 「마에카와 보고서」는 거대한 경상수지 흑자를 「위기적 상황」으로 보고, 수출 대신 내수로 성장하고 시장을 열며 금융을 자유화하라고 권했다. 정부는 공공 투자를 늘렸고, 1988년도 추가경정예산에서 대장대신 미야자와 기이치가 공공사업 확대에 나섰다. 1989~1990년 미·일 구조협의에서도 미국은 일본에 공공 투자를 늘리라고 요구했고, 가이후 내각은 10년간 430조 엔의 공공투자 기본계획을 세웠다. 12 13 11 14

싼 돈은 공장보다 땅과 주식으로 갔다. 금융 자유화로 대기업이 주식·채권 시장에서 직접 돈을 조달하게 되자, 고객을 잃은 은행들은 부동산을 담보로 중소기업과 개인에게 공격적으로 대출했다. 1987~1988년에는 평범한 회사원도 집을 담보로 맡기면 용도를 묻지 않고 1억 엔까지 빌릴 수 있었다. 기업은 주가 상승을 이용해 전환사채·신주인수권부 사채 같은 「에쿼티 파이낸스」로 싸게 돈을 모아 그 상당 부분을 「자이테크」(재무 기술), 곧 주식과 부동산 투기에 썼다. 땅값이 오르면 담보 가치가 오르고, 그만큼 더 빌려 다시 땅을 사는 순환이 생겼다. 10 15

1987년 여름 일본은행은 자산 가격 급등을 걱정해 긴축을 내비쳤다. 그러나 10월 19일 뉴욕 증시가 하루에 폭락한 「블랙 먼데이」가 터지자 세계 경제의 불안을 이유로 인상을 미루었다. 공식 물가는 안정되어 있었다. 엔고로 수입 원자재와 석유 값이 내려갔기 때문이다. 「통계상 물가 안정」이 이루어진 상태에서 큰 폭의 금리 인상을 국민에게 설득하기 어려웠고, 대장성과 외국 당국의 압력까지 겹쳐 인상은 늦어졌다. 일본은행 부총재 미에노 야스시는 이때 「마른 장작」이 쌓이고 있다며 금리 인상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져 있다. 10 16 17 15

일본땅값과 주가는 얼마나 부풀었나?

부풀어 오른 것은 먼저 도쿄의 땅이었다. 도쿄 상업지의 1제곱미터당 평균 가격은 1985년 42% 오른 데 이어 1986년 한 해에 다시 122% 올라 421만 1천 엔이 되었다. 땅이 부족해지자 투자자들은 가나가와·사이타마·지바로, 이어 오사카·교토·나고야·고베로 몰려갔다. 1991년까지 6대 도시의 상업지 가격은 1985년보다 302.9% 올랐다. 1989년 긴자는 1제곱미터에 3천만 엔이었고, 면적 1.15제곱킬로미터의 도쿄 황궁 터가 미국 캘리포니아주 전체의 부동산보다 비싸다는 계산까지 나왔다. 10

주가가 그 뒤를 따랐다. 닛케이 225 지수는 1986년 한 해에 45% 가까이 올랐고, 1989년 12월 29일 장중 38,957.44, 종가 38,915.87이라는 최고치를 찍었다. 1985년 1월 2일보다 224% 넘게 오른 값이다. 주가수익비율(주가를 주당 이익으로 나눈 값)은 80배를 넘었다. 기업들이 서로 주식을 쥐고 있어 시장에서 거래되는 주식이 적었고, 땅값이 오를수록 땅을 가진 기업의 장부상 자산이 늘어 주가를 밀어 올렸다. 1989년 세계 시가총액 상위 50개 기업 가운데 32개가 일본 기업이었다. 10 13 18

이 숫자들의 크기는 생산과 견주어야 실감난다.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토 마코토에 따르면 1988년 한 해 땅값 상승만으로 생긴 자본 이득은 416조 엔으로, 그해 국민총생산의 1.21배였다. 비슷한 땅값 거품이 있던 미국에서는 같은 해 국민총생산의 약 3%였다. 세제도 투기를 거들었다. 상속세가 높은데 땅은 시가의 절반 정도로 평가되고 빚은 액면대로 공제되었으므로, 돈을 빌려 땅을 사는 것이 절세가 되었다. 땅에 매기는 실효 보유세는 도쿄권에서 시가의 0.06%까지 떨어져, 땅을 쓰기보다 묵혀 두고 값이 오르기를 기다리는 편이 이익이었다. 15 10

거품의 끝에서 부패가 드러났다. 1988년 리크루트 사건에서는 인재 정보 회사의 비상장 주식이 정치인들에게 건네진 것이 밝혀져 내각 전체가 연루되었고, 다케시타 노보루 총리는 1989년 물러났다. 뇌물, 내부자 거래, 주가 조작, 사기가 관료부터 보통 사람까지 사회 곳곳에 퍼져 있었다는 것이 거품이 꺼진 뒤 차례로 드러났다. 10 19

일본거품은 어떻게 꺼졌나?

1989년 들어 사정이 바뀌었다. 4월 3%의 소비세가 처음 도입되었고, 실업률이 2.2%로 떨어지고 일손이 모자라 제조업 임금이 6.5% 오르자 일본은행은 물가 상승을 막겠다며 5월 금리를 올리기 시작했다. 1989년 12월 17일 총재가 된 미에노 야스시는 인상을 서둘러, 1989년 5월부터 1년 3개월 동안 다섯 차례에 걸쳐 2.5%였던 공정 보합을 1990년 8월 6%로 끌어올렸다. 땅값 때문에 회사원이 도쿄에 집을 살 수 없던 때라 언론은 그를 투기를 퇴치하는 「헤이세이의 오니헤이」(에도 시대의 이름난 단속 관리에 빗댄 별명)라 불렀다. 10 20 21 17 15

주가가 먼저 무너졌다. 닛케이 지수는 1990년 1월 4일 38,921로 시작해 12월 5일 21,902까지 떨어져 한 해 만에 43% 넘게 잃었고, 1992년 8월에는 14,309까지 내려갔다. 1990년 3월 27일 대장성 은행국장 쓰치다 마사아키 명의로 「토지 관련 융자의 억제에 대하여」라는 통달이 전국의 금융기관에 내려갔다. 부동산 대출의 증가율을 전체 대출 증가율 아래로 묶는 「총량 규제」다. 당시 대장대신은 하시모토 류타로였다. 이 규제는 1991년 12월 20일에야 풀렸다. 10 22

총량 규제에는 구멍이 있었다. 주택금융전문회사(주센)와 농협 계열 금융기관은 대상에서 빠졌기 때문에 농협 돈이 주센을 거쳐 부동산으로 계속 흘러갔고, 이것이 뒤에 주센의 부실채권 문제를 키웠다. 다른 한편 은행들은 융자 증명서를 내주고도 돈을 주지 않거나 공사 도중에 대출을 끊었다. 뒤에 「대출 기피」·「대출 회수」라 불리는 일이 전국에서 한꺼번에 일어난 것이다. 땅값은 1991년 도쿄에서 급락하기 시작해 연말에는 대부분의 도시 땅값이 마이너스가 되었고, 1992년 초 거품 붕괴가 공식화되었다. 22 10

당시 이 조치를 너무 늦었다고 비판한 사람은 있어도 너무 세다고 비판한 사람은 드물었다. 주요 신문들은 오히려 「지가 버블을 완전히 부숴라」, 「지가 대책의 고삐를 늦추지 말라」고 썼다. 그러나 금리 인상과 총량 규제는 예상을 훨씬 넘는 경기 후퇴를 불렀고, 미에노에게는 지나친 거품 퇴치와 늦고 찔끔찔끔한 금융 완화로 디플레이션과 「잃어버린 10년」을 불렀다는 비판이 뒤따랐다. 22 17

일본왜 부실채권은 10년 넘게 정리되지 않았나?

거품기에 은행은 땅을 담보로 돈을 빌려주었다. 땅값이 반 토막 나자 담보로 잡은 땅을 팔아도 빌려준 돈을 돌려받을 수 없게 되었고, 갚을 가망이 낮은 대출, 곧 부실채권이 은행 장부에 쌓였다. 기업의 대차대조표(자산과 부채를 나란히 적은 표)도 망가졌다. 자산 가격은 폭락했는데 빚은 그대로였으므로 많은 기업은 부채 비율을 낮추느라 투자를 꺼렸다. 이토 마코토는 이것을 자산이라는 「저량」의 불황과 소득·생산이라는 「유량」의 불황이 겹친 「복합 불황」이라 불렀다. 담보 가치가 녹아내리자 기업은 자기 돈으로도, 땅을 담보로도 사업을 넓히기 어려워졌고, 고용 사정이 나빠져 1993년에는 실질 임금이 실제로 떨어졌다. 10 15

은행에는 손실을 미룰 이유가 있었다. 1988년 국제결제은행(BIS)의 자기자본 규제는 은행이 자산의 8% 이상을 자기자본으로 갖도록 했는데, 일본 은행들은 보유 주식의 장부가와 시가 차이인 「잠재 이익」의 45%를 자기자본에 넣도록 허락받았다. 주가가 떨어지자 이 잠재 이익이 녹아 자기자본 비율이 내려갔다. 손실을 드러내면 자본이 모자라게 되므로 은행들은 갚을 수 없는 기업에 대출을 갈아 주며 연명시켰다. 현재의 이익으로 이자도 갚지 못하는데 은행 대출로 살아남는 이런 기업을 「좀비 기업」이라 부른다. 좀비 기업은 건실한 기업의 이윤을 깎고 일자리 창출과 생산성, 투자를 끌어내린다는 비판을 받았다. 15 10 18

정부는 경기 부양으로 대응했다. 1993년 재정 지출을 크게 늘렸고, 이후에도 거듭 경기 대책을 냈다. 그러나 미래가 불안한 사람들은 쓰기보다 저축했고, 세수는 줄어 재정 적자가 커졌다. 첫 공적 자금 투입은 주센에 대한 것이었다. 1996년 하시모토 내각은 주센 7개사의 손실 6조 4천억 엔 가운데 모회사 은행·일반 은행·농협 계열이 부담할 수 없는 6,850억 엔을 세금으로 메우는 법안을 냈다. 「주센 국회」라 불린 이 국회에서 거센 비판이 일었고 야당 신진당 의원들이 위원회실 앞에서 농성했지만 법안은 통과되었다. 10 23

일본1997~1998년 금융위기는 어떻게 터졌나?

하시모토 류타로 내각은 재정 재건을 서둘렀다. 1997년 4월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리고, 소득세 특별 감세를 없애고, 의료비 본인 부담을 10%에서 20%로 올렸다. 소비는 다시 얼어붙었다. 같은 무렵 진행된 아시아의 통화·금융위기도 일본 경제를 거꾸로 짓눌렀다. 1997년 11월 3일 중견 증권사 산요 증권이 회사갱생법을 신청했고, 이튿날 이 회사에 빌려준 무담보 단기 자금(콜 자금) 약 10억 엔이 갚아지지 않으면서 은행끼리 하루짜리 돈을 빌리는 콜 시장이 얼어붙었다. 15 24 25 26

그 뒤 두 주 사이에 대형 금융기관이 잇달아 쓰러졌다. 1997년 11월 17일 홋카이도의 유일한 도시은행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다쿠긴)이 자금을 마련할 길이 끊겼다며 영업을 호쿠요 은행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전후 도시은행의 첫 파산이자 지금까지 유일한 사례다. 다쿠긴은 거품기에 가장 작은 도시은행이라는 조바심에서 공격적으로 대출을 늘렸고, 1997년 3월 부실채권이 대출 총액의 13.4%에 이르렀다. 11월 24일에는 4대 증권사의 하나인 야마이치 증권이 자주 폐업을 결의했다. 고객의 손실을 메워 주고 장부 밖에 숨겨 온 부채가 일본에서 1,583억 엔, 해외에서 1,065억 엔이었다. 같은 달 도쿠요 시티 은행도 무너졌다. 26 25 15 10

정부는 1998년 3월과 1999년 3월 두 차례에 걸쳐 대형 은행에 모두 9조 3천억 엔의 공적 자금을 넣었다. 1998년 참의원 선거에서 자민당이 패하자 하시모토는 물러나고 오부치 게이조가 총리가 되었다. 그해 가을 「금융 국회」에서 여당은 야당의 금융재생법안을 사실상 그대로 받아들였고, 금융재생법(10월 12일)과 조기건전화법(10월 16일)이 성립했다. 1998년 10월 23일 일본장기신용은행(장은)이 특별공적관리, 곧 일시 국유화되었고 12월에는 일본채권신용은행이 뒤따랐다. 장은에는 약 7조 9천억 엔의 공적 자금이 들어가 그 가운데 약 3조 6천억 엔이 손실로 확정되었고, 은행은 미국 투자펀드 리플우드 중심의 투자조합에 팔려 2000년 신세이 은행이 되었다. 10 24 27 28

오부치 정부는 공공 지출을 늘리고 소득세를 낮추었으며, 3,500만 명에게 상품권을 나눠 주어 소비를 살리려 했다. 국채를 더 찍어 기반 시설을 짓는 이 정책은 「오부치노믹스」라 불렸다. 경기 하강은 잠시 늦춰졌으나 흐름을 바꾸지는 못했고 나랏빚만 불어났다. 이 위기를 거치며 은행들은 합병을 거듭해 네 개의 거대 은행 그룹으로 정리되었다. 돈줄이 막힌 많은 소규모 차입자는 고리대금업체(사라킨)에 기댔다. 29 18

일본제로 금리와 양적완화는 디플레이션을 멈추었나?

물가가 계속 떨어지는 디플레이션에서는 시간이 갈수록 현금의 가치가 오른다. 기업은 임금과 연구개발, 투자를 줄이고 현금을 쥐고 있는 편을 택한다. 중앙은행은 보통 금리를 내려 투자와 소비를 북돋우지만, 물가가 떨어지는 동안에는 명목 금리가 0%여도 물가 하락분만큼 실질 금리가 플러스로 남는다. 금리를 0 아래로 내리기 어려우니 통화정책이 힘을 잃는 이 상태를 「제로 하한」이라 한다. 일본의 금리는 1994년 이후 1% 아래에 머물렀다. 18

1999년 2월 일본은행은 은행 간 하룻밤 대출 금리(무담보 콜 익일물)를 사상 최저인 0.15%로 유도하기로 했다. 총재 하야미 마사루가 「0이라도 좋다」고 말한 데서 「제로 금리 정책」이라는 이름이 붙었다. 미국의 정보기술 호황으로 경기가 살아나는 듯하자 2000년 8월 11일 일본은행은 정부의 연기 요청을 물리치고 9명 가운데 7 대 2로 제로 금리를 풀었다. 그해 말 세계적 경기 후퇴가 닥쳤고, 일본은행은 2001년 2월 금리를 다시 내린 뒤 3월 19일 금리 대신 은행들이 일본은행에 맡기는 당좌예금의 잔고를 목표로 삼아 그것을 늘리는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양적완화는 2006년 3월 9일, 소비자물가가 넉 달 잇달아 0% 이상 오른 것을 확인하고 끝났다. 30 31 10

하야미는 정치인들의 완화 요구에 맞서 「인플레이션은 경제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다」라며, 규제와 독점을 줄이는 구조 개혁이 먼저라고 주장했다. 2000년의 해제는 뒤에 일본은행이 디플레이션 탈출에 매달릴 뜻이 없다는 신호로 받아들여져 디플레이션 예상을 굳혔다는 비판을 받았다. 부실채권 정리는 고이즈미 준이치로 내각에서 속도가 붙었다. 2002년 금융 담당 장관이 된 경제학자 다케나카 헤이조의 「다케나카 플랜」은 은행 회계를 엄격히 따지게 했고, 2003년 5월 감사인이 리소나 은행의 결산 승인을 거부하자 정부가 170억 달러 규모의 구제 자금을 넣었다. 닛케이 지수는 2003년 3월 11일 7,862로 거품 이후 바닥을 찍었다. 32 30 33 10

경제는 2000년대 들어 느리게 회복했지만 잃어버린 것은 컸다. 1991~2003년 국내총생산은 해마다 1.14%밖에 늘지 않았고, 2017년의 국내총생산은 1997년보다 2.6% 많을 뿐이었다. 그래서 「잃어버린 10년」은 「잃어버린 20년」으로 늘어났다. 1991년부터 해마다 재정 적자를 내며 경기 부양을 거듭한 결과 2013년 정부 부채는 국내총생산의 약 240%로 세계 최고가 되었다. 초저금리의 엔을 빌려 해외의 고금리 자산에 투자하는 엔 캐리 트레이드도 이 시기에 커졌다. 18 10

일본일하는 사람들의 삶은 어떻게 바뀌었나?

1970~1980년대 일본 대기업의 상징은 「종신 고용」이었다. 불황이 길어지자 기업들은 인원 감축과 외주화로 사업을 재편했고, 종신 고용은 흔들렸다. 판례상 정규직 해고가 어려웠기 때문에 기업은 기존 직원을 지키는 대신 신규 졸업자 채용을 크게 줄였다. 1993~2004년 무렵 졸업한 세대를 「취직 빙하기 세대」라 부르며, 그 수는 약 1,700만 명으로 추산된다. 15~24세 완전실업률은 1999~2005년 8.7~10.1%에 이르렀고, 제조업 신규 구인은 1992년 13만 8천 명에서 2002년 6만 1천 명으로 절반 넘게 줄었다. 10 34

그 자리를 메운 것은 비정규 고용이었다. 고용된 사람 가운데 파트타이머·아르바이트·파견·계약 사원 같은 비정규 노동자의 비율은 1990년 처음 20%를 넘은 뒤 한동안 제자리였으나, 1990년대 후반 아시아 금융위기 뒤로 가파르게 올라 1999년 25%, 2003년 30%를 넘었다. 후생노동성의 2010년 『노동경제백서』는 그 원인으로 상대적으로 임금이 낮은 사람을 쓰려는 인건비 억제 지향과 노동자 파견 사업의 규제 완화를 꼽았다. 다케나카가 주도한 2003~2004년 노동자파견법 개정은 파견 노동의 범위를 크게 넓혔다. 한국의 비정규직 문제는 같은 시기 외환위기를 계기로 커졌지만 그 이야기는 따로 다룬다. 35 33

임금은 정체했다. 실질 임금은 1997년 정점에서 2013년까지 약 13% 떨어져 국제적으로도 두드러졌고, 2010년 가계 소득은 1987년 수준으로 돌아갔다. 이토 마코토는 대기업이 마이크로일렉트로닉스(ME) 정보 기술을 도입하고 노무 관리를 「합리화」하며 여성 비정규 노동자의 비율을 늘리는 동안 실질 임금은 억눌리고 대기업의 국제 경쟁력과 재무 구조는 오히려 좋아졌다고 지적했다. 그에 따르면 기업 중심 사회에서 노동자가 협력해 이윤을 높일수록 무역 흑자가 늘고 엔이 올라 다시 기업을 압박하는 순환이 생겼다. 18 15

미국경제학자들은 거품과 장기 불황을 어떻게 설명하나? {japan}

첫째 쟁점은 플라자 합의가 원인이냐는 것이다. 일본에서는 플라자 합의를 「잃어버린 30년」의 출발점으로 보는 견해가 많다. 협조 개입으로 엔을 끌어올린 결과 일본산 상품이 경쟁력을 잃었고, 그 배경에는 일본의 국내총생산이 미국을 앞지를까 하는 미국의 경계와 오랜 무역 마찰이 있었다는 것이다. 2018년 미·중 무역 전쟁이 시작되자 중국 관영 신화통신은 「플라자 합의로 미국에 굴복한 일본의 경제 침체를 잊지 말라」고 썼다. 반대 견해도 있다. 경제학자 제프리 프랭클은 엔이 오른 1985~1986년과 1990년대 불황 사이에 엔고가 멈춘 1987~1989년의 거품기가 있었고, 마르크가 오른 독일에서는 거품도 불황도 없었다고 지적한다. 리처드 베르너는 플라자 합의나 대장성의 금리 인하 요구 같은 외부 압력만으로는 일본은행의 행동을 설명할 수 없다고 본다. 6 5 10

둘째는 통화정책의 실패라는 설명이다. 거품은 일본은행이 너무 오래 금리를 낮게 두고 늦게 올린 탓이고, 붕괴 뒤에는 너무 세게 조이고 늦게 풀었다는 것이다. 베르너는 한발 더 나아가, 일본은행이 은행마다 대출 증가 한도를 정해 주던 「창구 지도」를 통해 대출을 부풀렸으며, 이것을 주도한 이는 총재 스미타 사토시가 아니라 부총재 미에노와 영업국장 후쿠이 도시히코였다고 주장한다. 폴 크루그먼은 일본을 금리가 0에 가까워 통화정책이 듣지 않는 「유동성 함정」의 사례로 보았고, 스콧 섬너는 통화정책이 너무 긴축적이어서 고통을 늘렸다고 보았다. 10 18 36 17

셋째는 노무라 종합연구소의 경제학자 리처드 쿠가 내놓은 「대차대조표 불황」론이다. 땅값과 주가가 무너지자 많은 기업이 자산보다 빚이 많은 상태가 되었고, 금리가 0에 가까워도 기업들은 돈을 빌려 투자하는 대신 벌어들인 돈으로 빚을 갚았다. 쿠에 따르면 기업의 자금 수요는 1995년 마이너스가 되어 2005년까지 10년 동안 순상환이 계속되었고, 1998년 이후 기업 부문은 빌리는 쪽이 아니라 저축하는 쪽이 되었다. 이윤 극대화가 아니라 부채 최소화가 기업의 목표가 된 것이다. 이런 때는 빌릴 사람이 없으니 통화정책이 듣지 않고, 정부가 빌려 쓰는 재정 지출만이 수요의 구멍을 메울 수 있다. 쿠는 일본이 막대한 재정 지출 덕분에 미국 대공황 같은 붕괴를 피했다고 본다. 이것은 재정 지출로 유효수요를 메우라는 케인스주의의 처방과 통한다. 크루그먼은 이 진단에 동의하면서도, 인플레이션을 약속하면 실질 금리가 내려가 저축을 줄일 수 있다며 통화정책의 여지를 남겼다. 37 18 38

넷째는 실물과 제도의 설명이다. 하야시 후미오와 에드워드 프레스콧은 1990년대 일본의 부진이 신용 경색이 아니라 생산성 증가율의 저하 때문이라고 보았다. 기업이 하고 싶은 투자는 대체로 자금을 구할 수 있었으니, 문제는 투자하려는 의욕이 낮았다는 데 있다는 것이다. 제니퍼 에이믹스는 일본의 전문가들이 원인을 몰랐던 것이 아니라, 은행 구제처럼 당장 고통을 주는 정책을 밀어붙일 제도적 유연성이 없었다고 분석했다. 18

미국마르크스주의자와 일본 공산당은 무엇이라고 했나? {japan}

우노 고조의 학파를 이은 마르크스주의 경제학자 이토 마코토는 1990년대 불황을 이렇게 분석했다. 하이먼 민스키의 금융 불안정성 가설처럼 신용이 투기로 부풀었다가 터지는 일반적 논리만으로는 일본 위기의 크기와 경과를 다 설명할 수 없고, 플라자 합의 뒤 내수 확대를 위한 재정·통화 정책과 일본은행·정부의 역할을 함께 봐야 한다. 금리가 내려가면 주식과 땅 같은 「가공 자본」의 값은 그만큼 오른다. 이렇게 부풀어 오른 자산 가격에서 나온 자본 이득과 그것이 이끈 내수는 상당 부분 허구적이었고, 실질 임금이 생산성만큼 오르며 내수가 커지던 고도 성장기와는 성격이 달랐다. 자본 이득은 그해 사회의 잉여 노동이 만든 잉여가치에서만 나오는 것이 아니며, 거꾸로 자산 가격의 붕괴는 가공 자산 가치의 파괴이므로, 잉여가치론을 이 손익에 너무 직접 적용해서는 안 된다고 그는 덧붙였다. 15 39

이토는 불황 속에서 신자유주의 정책이 밀어붙여졌다고 비판했다. 금융 「빅뱅」에 맞춘 금융업 자유화, 노동법과 고용 관계 규제의 완화, 1997년 소비세 인상 같은 대중 과세가 그것이다. 그는 1997년 정책 실패가 일하는 사람들의 미래 불안을 키웠다고 보고, 고용 불안과 디플레이션의 악순환은 사람들에게 안정된 미래를 보장해 아래로부터 소비 수요를 되살려야 풀린다고 주장했다. 15

미국의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 로버트 브레너는 『혼돈의 기원』(1998)에서 일본의 거품을 선진 자본주의 전체의 「장기 침체」 안에 놓았다. 그에 따르면 1970~1990년 G7의 제조업 이윤율은 1950~1970년보다 평균 40% 낮았는데, 그 원인은 독일·일본의 저비용 생산자가 미국 시장에 뛰어들어 생긴 세계적 과잉 설비였다. 플라자 합의는 엔과 마르크를 끌어올려 일본과 독일 제조업이 조정의 짐을 대부분 지게 한 장치였고, 일본은 그 압박을 덜려고 느슨한 금융정책으로 거품을 만들었다. 1990년대 중반 클린턴 정부가 거꾸로 달러를 끌어올린 「역(逆)플라자 합의」는 일본 제조업 구제였지만, 엔고를 피해 중국과 동아시아로 옮겨 간 일본 공장들이 과잉 생산을 더 키워 일본 경제를 되살리지 못했다고 브레너는 보았다. 같은 마르크스주의 진영에서도 영국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서평은, 브레너가 미국·영국에 몰린 군비 지출이 독일·일본의 경쟁력에 준 영향을 놓쳤고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며 이윤율을 끌어내리는 압력도 함께 따져야 한다고 비판했다. 40 41

일본 공산당은 은행의 파산 처리를 국민 부담으로 하는 정부 정책에 반대해 왔다고 밝힌다. 2002년 7월 공적 자금으로 은행 이외 기업이 가진 은행 주식까지 사들이게 하는 법 개정안이 중의원 위원회를 통과할 때, 공산당 사사키 겐쇼 의원은 이것이 국민 부담의 위험을 키우는 새로운 은행 지원책이라며 「경제의 실태를 회복시켜 기업 실적을 개선하지 않고 공적 자금으로 주가를 떠받치려는 정책은 근본적으로 잘못되었다」고 비판했다. 2008년 그는 1996년 주센 처리 이래 46조 엔이 넘는 공적 자금이 금융기관에 들어가 10조 엔 이상의 국민 부담이 생겼고, 「실패해도 마지막에는 세금으로 구해 준다」는 의존심을 낳았다고 정리했다. 그동안 12조 4천억 엔의 자본이 은행에 들어갔지만 중소기업 대출은 84조 엔 줄었다는 것이다. 42 43 44

결과

2002년 이후 다케나카 플랜으로 부실채권 정리가 진척되고 경기가 느리게 회복하자 일본은행은 2006년 3월 양적완화를, 7월 제로 금리를 끝냈다. 그러나 1991~2003년 연평균 성장률은 1.14%에 그쳤고, 대형 은행들은 네 개의 거대 그룹으로 통합되었으며, 공적 자금 투입과 거듭된 경기 부양으로 정부 부채는 세계 최고 수준이 되었다. 종신 고용은 흔들리고 비정규 고용 비율은 2003년 30%를 넘었다. 2008년 금융위기 뒤 서방의 정부와 논자들은 일본의 「잃어버린 10년」을 피해야 할 전례로 거듭 거론했고, 2018년 이후 중국에서는 플라자 합의가 미국의 통화 압력에 굴복해서는 안 된다는 교훈으로 다시 거론되었다.

연표와 지도

도쿄 파리 루브르 궁 삿포로 뉴욕 플라자 호텔 워싱턴 오사카 4 파리 루브르 궁 16 삿포로 1 뉴욕 플라자 호텔 2 도쿄 3 도쿄 5 도쿄 6 도쿄 7 도쿄 8 도쿄 9 도쿄 10 도쿄 11 도쿄 12 도쿄 13 도쿄 14 도쿄 15 도쿄 17 도쿄 18 도쿄 19 도쿄 20 도쿄 21 도쿄 22 도쿄 23 도쿄 24 도쿄
  1. 11985.09.22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
    플라자 합의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달러 이외 통화의 질서 있는 절상이 바람직하다는 발표문을 냈다. 일본에서는 대장대신 다케시타 노보루가 참석했다.

  2. 21985.09.23일본
    엔의 급등

    합의가 알려진 다음 날 하루 사이에 달러가 1달러 235엔에서 약 20엔 떨어졌다.

  3. 31986.04.07일본
    마에카와 보고서

    나카소네 야스히로 총리의 사적 자문기구가 수출 대신 내수로 성장하고 시장을 열라고 권하는 보고서를 냈다.

  4. 41987.02.22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캐나다
    루브르 합의

    서방 6개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파리에서 달러 하락을 멈추고 환율을 당시 수준에서 안정시키기로 합의했다.

  5. 51987.02.23일본
    공정 보합 2.5%

    일본은행이 공정 보합을 사상 최저인 2.5%로 내렸다.

  6. 1987.10.19미국일본
    블랙 먼데이

    뉴욕을 비롯한 세계 증시가 하루에 폭락했다.

  7. 61989.04일본
    소비세 도입

    일본이 3%의 소비세를 처음 시행했다.

  8. 71989.05일본
    첫 금리 인상

    일본은행이 공정 보합을 2.5%에서 올리기 시작했다.

  9. 81989.12.17일본
    미에노 총재 취임

    부총재 미에노 야스시가 일본은행 총재가 되었다.

  10. 91989.12.29일본
    닛케이 지수 최고치

    닛케이 225 지수가 장중 38,957.44, 종가 38,915.87로 거품기의 최고치를 기록했다.

  11. 101990.03.27일본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

    대장성 은행국장 쓰치다 마사아키가 부동산 대출 증가율을 전체 대출 증가율 아래로 묶으라는 통달을 전국 금융기관에 보냈다.

  12. 111990.08일본
    공정 보합 6%

    일본은행이 1년 3개월 동안의 다섯 번째 인상으로 공정 보합을 6%로 올렸다.

  13. 121991.12.20일본
    총량 규제 해제

    대장성이 부동산 대출 총량 규제를 풀었다.

  14. 131996일본
    주센 처리법

    하시모토 내각이 낸 법이 거센 반대 속에 국회를 통과해, 주택금융전문회사 손실 가운데 6,850억 엔을 공적 자금으로 메우게 되었다.

  15. 141997.04일본
    소비세 5%

    하시모토 내각이 소비세를 3%에서 5%로 올렸다.

  16. 151997.11.03일본
    산요 증권 파산

    산요 증권이 회사갱생법 적용을 신청했고, 이튿날 이 회사에 대한 무담보 콜 자금이 갚아지지 않았다.

  17. 161997.11.17일본
    다쿠긴 파산

    홋카이도 다쿠쇼쿠 은행이 자금을 마련할 수 없다며 홋카이도 영업을 호쿠요 은행에 넘긴다고 발표했다.

  18. 171997.11.24일본
    야마이치 증권 자주 폐업

    야마이치 증권 이사회가 장부 밖 부채를 이유로 자주 폐업에 따른 영업 정지를 정식 결의했다.

  19. 181998.10.23일본
    장은 국유화

    일본장기신용은행이 금융재생법에 따라 특별공적관리, 곧 일시 국유화되었다.

  20. 191999.02일본
    제로 금리 정책

    일본은행이 하룻밤 콜 금리를 사상 최저인 0.15%로 유도하기로 했고, 하야미 마사루 총재가 「0이라도 좋다」고 말했다.

  21. 202000.08.11일본
    제로 금리 해제

    일본은행 정책위원회가 정부의 연기 요청에도 7 대 2로 제로 금리 해제를 의결했다.

  22. 212001.03.19일본
    양적완화 시작

    일본은행이 금리 대신 시중 은행의 일본은행 당좌예금 잔고를 정책 목표로 삼는 양적완화를 시작했다.

  23. 222003.03.11일본
    닛케이 지수 바닥

    닛케이 225 지수가 거품 이후 최저인 7,862까지 떨어졌다.

  24. 232003.05일본
    리소나 은행 구제

    감사인이 리소나 은행의 결산 승인을 거부했고, 은행은 정부에 170억 달러 규모의 구제를 요청했다.

  25. 242006.03.09일본
    양적완화 종료

    일본은행이 소비자물가가 넉 달 연속 전년보다 오른 것을 근거로 양적완화를 끝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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