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1796

방데 전쟁

1793년 3월 프랑스 서부의 농민은 왜 징집령에 맞서 무기를 들었고, 공화국은 왜 전투가 끝난 뒤에도 이 지역을 불태우고 포로를 익사시켰으며, 그 희생자 수와 성격을 두고 역사가들은 무엇을 다투는가?

1793년 3월 30만 명 징집령은 성직자 민사기본법과 국유재산 매각으로 쌓인 서부 농촌의 불만에 불을 붙였다. 「군사적 방데」의 농민과 장인은 가톨릭 왕당군을 세워 봄과 여름에 투아르·퐁트네·소뮈르를 점령했으나 낭트에서 막혔고, 10월 숄레에서 패한 뒤 영국의 도움을 찾아 루아르강을 건넌 6만~10만 명은 르망과 사부네에서 섬멸되었다. 공포정치 아래 낭트와 앙제에서 약 1만 5천 명이 익사·총살·참수되었고, 1794년 1~5월 튀로의 지옥 종대는 민간인 2만~5만 명을 죽이며 봉기를 되살렸다. 테르미도르 뒤 1795년 2월 라자주네 조약으로 첫 전쟁이 끝났으나 키브롱 상륙과 함께 두 번째 전쟁이 터졌고, 오슈가 사면과 예배의 자유와 기동 종대로 1796년 스토플레와 샤레트를 잡아 전쟁을 끝냈다.

프랑스배경: 혁명과 서부 농촌의 균열

방데 전쟁의 무대는 오늘날의 방데도와 루아르앵페리외르(브르타뉴) 남부, 멘에루아르(앙주) 서남부, 되세브르(푸아투) 서북부에 걸친 농촌이었다. 역사가들은 이 반란 지역을 「군사적 방데」라 부른다. 미셸 보벨에 따르면 구체제 말 이곳 토지의 절반 이상이 귀족 소유였고 부르주아가 10~20%, 농민이 30% 미만, 성직자가 5% 미만을 가졌으며, 글을 아는 사람은 결혼 당사자의 10~20%에 그쳤다. 1789년 서부 농민은 혁명을 대체로 반겼다. 브르타뉴·멘·앙주·바푸아투의 진정서는 봉건제 잔재에 대한 적의를 보여 주었고, 애국파 의원이 뽑혔으며, 1790~1791년에도 귀족과 그 저택에 대한 폭력이 되풀이되었다. 방데와 멘에루아르는 입법의회에 자코뱅 의원을 가장 많이 보낸 열두 개 도에 들었다. 그러나 1789년 11월 교회 재산의 국유화는 가난한 주민을 돕던 교회의 재원을 빼앗았고, 국유재산 매각은 공동체가 대대로 쌓은 재산을 부르주아·상인 같은 개인의 손에 넘겼다. 농촌 공동체는 자신들이 약탈당했다고 느꼈다. 1

1790년 7월 12일 제헌의회가 통과시킨 성직자 민사기본법은 사제에게 헌법 선서를 요구했고, 1791년 교황이 이를 단죄한 뒤 서부의 성직자 대부분은 선서를 거부했다. 보벨의 추산으로 1791년 선서 사제는 방데와 루아르앵페리외르에서 0~35%, 멘에루아르에서 35~55%, 되세브르에서 75~100%였고, 서부 전체로는 성직자의 65% 이상이 선서를 거부해 전국 평균 48%를 크게 웃돌았다. 구원을 걱정한 농민은 선서 거부 사제를 계속 찾았고, 장례식을 둘러싸고 「귀족파」와 「민주파」가 싸웠으며, 1791년 1월 마슈쿨 근처 생크리스토프뒤리뇨롱에서 국민방위대의 개입으로 첫 사망자가 났다. 입법의회는 1791년 11월과 1792년 5월 27일 선서 거부 사제의 예배를 금지하고 시민 20명의 요구만으로 추방할 수 있게 했고, 사제들은 숨어서 여성들의 보호 아래 비밀 미사를 올렸다. 영어 위키백과는 160명의 주교 가운데 7명을 뺀 모두와 본당 사제의 절반가량이 선서를 거부했다고 적는다. 그러나 귀족이 망명할 때도, 1793년 1월 루이 16세가 처형될 때도 폭동은 없었다. 왕정에 대한 애착이 첫 봉기의 방아쇠가 아니었다는 뜻이다. 1 2

봉기의 원인은 사료와 역사가마다 다르게 그려진다. 당대 국민공회는 귀족과 사제의 음모로 보았고, 19세기 공화파 역사가 샤를루이 샤생은 민중적 성격을 부정했으며, 왕당파·가톨릭 쪽 저자들은 왕과 교회를 지키려는 농민의 자발적 봉기로 그렸다. 20세기에 들어 알베르 마티에는 경제·사회 조건에서 원인을 찾았고, 1950년대 마르셀 포쇠는 「방데의 빈곤」을 들어 소작농 다수가 환매 가능한 봉건 지대 폐지의 혜택을 받지 못했고 국유재산은 부르주아와 상인에게 돌아갔다고 보았다. 폴 부아는 사르트 연구에서 혁명 훨씬 이전부터 있던 농민과 부르주아, 농촌과 도시의 깊은 대립을 드러냈고, 미국 사회학자 찰스 틸리는 18세기 도시의 성장과 지방 권력 장악이 농민의 저항을 낳았다고 분석했다. 알베르 소불은 소작 지대에서 대농장주·곡물상·국유재산 매입자인 부르주아에 맞설 태세였던 가난한 농민 대중과, 17세기 말부터 선교단이 다진 강한 신앙, 그리고 30만 명 징집의 추첨을 구체제의 민병제와 같은 것으로 본 농민의 인식을 들었다. 그는 봉기의 동시성이 모의를 짐작하게 한다면서도 농민은 왕당파도 구체제 지지자도 아니었고 귀족은 봉기에 놀랐다가 뒤에 이용했다고 썼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세금과 소작료의 부담, 소작농 처지의 악화, 도시 엘리트가 독차지한 국유재산, 구(district)가 자리 잡은 읍에 밀려 자치를 잃은 작은 농촌 공동체, 사제와 의식을 지키려는 공동체의 자유에 대한 민사기본법의 침해를 공통 원인으로 꼽으면서, 1793년 3월 징집령이 공동체들이 국가의 대리인에 맞서 뭉칠 기회를 주었다고 본다. 그에 따르면 왕당주의는 깊지 않았고, 대다수 봉기는 「청산과 혁명파 사냥과 약탈」로 시작되었으며, 반혁명 귀족은 3월의 조직되지 않은 운동에 거의 관여하지 않았다. 샤레트처럼 무력으로 끌려 나온 이도 있었다. 1 2

프랑스1793년 3월: 30만 명 징집령과 봉기

1793년 2월 24일 국민공회는 전년에 한 해 전역 기간만 복무하기로 하고 입대한 의용병들이 대거 귀향하자 결원을 메우려 30만 명 징집을 명령했고, 각 코뮌은 미혼 남성 가운데 추첨으로 할당량을 채워야 했다. 징모관의 도착은 구체제의 방식을 떠올리게 했고 전국 각지에서 폭동이 일었다. 3월 초 북서부의 반응이 특히 거셌다. 첫 유혈은 3월 3일 일요일 숄레에서 났다. 지역 할당 절차를 들으러 모인 젊은이 500~600명이 출발을 거부했고, 이튿날 척탄병 두 명이 다치자 국민방위대가 군중에게 발포해 3~10명이 죽었다. 3월 10~11일 봉기는 전면화되었다. 앙주에서 반군은 옛 병사 스토플레와 페르드리오, 옛 왕실 장교인 귀족 봉샹과 델베, 행상인 카틀리노를 지휘관으로 삼아 3월 12일 생플로랑르비에이, 13일 슈미예와 잘레를 점령해 총과 대포를 빼앗았고, 14일 농민 1만 5천 명이 국민방위대 500명이 지키던 숄레를 습격했다. 레 지방에서는 3월 11일 수천 명의 농민이 마슈쿨을 점령하고 수슈가 이끄는 왕당파 위원회를 세웠다. 3월 23일 포르닉에서 패하고 포로가 처형된 데 대한 보복으로 수슈의 위원회는 3월 27일부터 4월 22일까지 애국파 포로 150~200명을 총살했다. 영어 출처는 마슈쿨에서 공화파 시민 수백 명이 학살되었다고 적는다. 방데도에서도 3월 12일 티포주, 13일 샬랑·레제르비에·몽테귀, 14일 라로슈쉬르용, 15일 샹토네와 클리송이 반군 손에 넘어갔다. 1 2

3월 15일 마르세 장군이 국민방위대 2,400명을 이끌고 라로셸에서 나와 18일 샹토네를 되찾았으나, 19일 생뱅상스테를랑주 근처 그라브로 다리에서 루아랑과 사피노의 부대에 기습당해 궤멸했다. 「퐁샤로 전투」로 불린 이 패배는 파리까지 심리적 충격을 주었고, 이때부터 서부의 모든 반군이 「방데인」으로 불리게 되었다. 마르세는 반역죄로 여섯 달 뒤 파리에서 단두대에 올랐다. 루아르강 북쪽 브르타뉴의 봉기는 3월 말 캉클로와 베세르의 종대에 진압되었지만, 강 남쪽에서는 반군을 누를 군대가 거의 없었다. 3월 17일 봉기 소식을 들은 국민공회는 이튿날 우연히 라루에리 후작의 브르타뉴 협회에 대한 보고를 받고 두 사건을 연결해 귀족과 성직자의 음모라고 잘못 결론지었다. 3월 19일 공회는 무기를 들고 잡히거나 흰 모표를 단 모든 반군에게 사형을 정했다. 당통의 발의로 5월 10일 이 법령은 반군 지도자만 겨냥하도록 완화되었고, 7월 6일 포고는 집으로 돌아가는 방데인에게 사면을 약속했으나, 일부 파견의원은 이런 유화책을 따르지 않았다. 징집에 반대한 소요는 방데만의 것이 아니었다. 1793년 클레르몽페랑·보르도·그르노블·앙굴렘·됭케르크에서도 봉기가 있었고, 6월에는 리옹·마르세유·툴루즈·님·보르도와 노르망디에서 연방주의·왕당파 반란이 일어났다. 징집을 따라간 파견의원들은 봉기를 과장해 보고하며 온건한 지방 당국을 공모자로 몰았고, 「군사적 방데」는 반혁명 전체의 상징이 되었다. 1 2

4월이 되자 반란 영토의 윤곽이 잡혔다. 반군은 집중된 지휘부도 변변한 장비도 없었고 무기와 탄약은 대부분 공화국군에게서 빼앗은 것이었으며, 농민은 전투가 끝나면 땅으로 돌아갔다. 군사 경험이 있는 지휘관을 찾던 반군은 옛 왕실 장교인 지역 귀족에게 기댔지만 대부분은 실패할 봉기라며 내키지 않아 했고 강제로 끌려 나왔다. 델베는 농민들이 그의 군 경험을 보고 지휘를 떠맡겼다. 4월 4일 「앙주군」과 「푸아투·중부군」이 세워졌고 4월 30일 둘이 합쳐 가톨릭 왕당군이 되었으나 통합 지휘부는 없었다. 5월 30일 샤티용쉬르세브르에 점령지를 다스릴 방데 최고회의가 서고 군대는 앙주·오푸아투의 「대군」 4만 명, 중부군 1만 명, 샤레트가 이끄는 바푸아투·레 지방의 「늪지군」 1만 5천 명으로 재편되었다. 지휘관 가운데 카틀리노는 행상인, 스토플레는 사냥터지기였고, 샤레트는 해군 장교, 봉샹·델베·레스퀴르·라로슈자클랭은 귀족 출신이었다. 산울타리와 움푹 팬 길로 이루어진 보카주는 매복에 유리했고 공화국군 대부대의 기동을 막았다. 공화국 쪽은 낭트·앙제·소뮈르·투아르·파르트네·레사블돌론·뤼송·퐁트네르콩트 같은 둘레의 도시에 기댔고, 봄에는 9,000~1만 7천 명이던 병력이 8월 중순 2만~3만 명, 10월 말 4만~7만 명, 1794년 1월 말 5만 5천~9만 8천 명으로 늘었다. 1793~1796년 서부에 투입된 공화국군은 연인원 13만~15만 명으로 추정된다. 1 3 4

프랑스가톨릭 왕당군의 봄과 여름: 투아르에서 숄레까지

4월 초 베뤼예 장군의 세 개 종대가 반군을 바다 쪽으로 밀어내려 했으나, 4월 13일 레조비에에서 라로슈자클랭이 케티노를 꺾고 4월 19일 브쟁, 22일 보프레오에서 공화국군 종대가 차례로 격파되면서 앙주의 공화국 공세는 실패했다. 5월 3일 브레쉬르가 떨어졌고, 5월 5일 투아르에서 케티노는 5,000명으로 3만 명에 가까운 방데군과 피비린내 나는 전투 끝에 항복해 뒤에 혁명재판소에서 사형을 받았다. 반군은 총 수천 정과 대포 12문, 50만 리브르를 얻었고, 포로들은 방데에서 다시 싸우지 않겠다는 맹세와 함께 풀려났다. 5월 16일 퐁트네르콩트에서 평지 전투에 익숙하지 않은 방데군이 패했으나 25일 3만 명으로 돌아와 공화국군을 궤멸시키고 포로 3,000명을 잡았다. 6월 9일 소뮈르 공격은 봉기의 정점이었다. 베르티에가 지키던 이 도시를 하루 만에 점령해 포로 1만 1천 명과 총 1만 5천 정, 대포 60문, 화약 5만 리브르를 얻었고, 포로들은 맹세를 어기면 알아볼 수 있도록 머리를 깎인 채 풀려났다. 6월 12일 귀족 출신 지휘관들은 결속을 위해 평민 카틀리노를 총사령관으로 뽑았다. 그러나 같은 날 모인 농민 3만 명 가운데 2만 명이 귀향했고, 6월 25일 라로슈자클랭에게 맡겨진 소뮈르 수비대는 여덟 명뿐이어서 도시를 비웠다. 1 2

소뮈르에서 왕당파 참모부는 낭트·파리·니오르 가운데 어디로 갈지 망설이다 낭트로 향했다. 6월 18일 대군은 수비대 5,000명이 버리고 간 앙제에 들어갔고, 샤레트는 함께 낭트의 항구와 부를 차지하자고 제안했다. 낭트에서는 산악파인 민중과 지롱드파인 상업·법조 부르주아가 갈라져 있었으나 주민은 파견의원이 명령한 소개를 거부하고 저항을 조직했다. 시장 바코 드 라샤펠과 브레스트 연안군 사령관 캉클로는 정규군·의용병·국민방위대·노동자 1만 2천 명을 모았고, 6월 28~29일 좌안의 샤레트군 1만 5천 명과 우안의 대군 1만 8천 명이 벌인 공격은 조율 부족으로 실패했다. 카틀리노는 부대 선두에서 총에 맞아 7월 14일 죽었다. 같은 때 라로셸 연안군 사령관 비롱의 명령으로 베스테르만이 반란 지역 심장부로 양동 공격을 벌여 6월 25일 파르트네, 7월 3일 반군의 「수도」 샤티용을 점령하고 공화국군 포로 2,000명을 풀어 주며 최고회의 문서를 빼앗았지만, 7월 5일 숄레에서 돌아온 대군 2만 5천 명에게 궤멸되어 수백 명만 데리고 빠져나왔다. 이 습격은 낭트 재공격을 막았고 반군은 영토를 지키려 루아르 좌안으로 돌아갔으며, 앙제·소뮈르·투아르·퐁트네는 싸움 없이 공화국 손에 돌아갔다. 7월 19일 군사회의는 델베를 총사령관으로 뽑았다. 7월과 8월의 전투는 결정적이지 않았으나 8월 14일 뤼송에서 샤레트까지 합친 3만 5천 명의 방데군이 튕크의 6,000명에게 대패해 1,500~2,000명을 잃었다. 1 2 5

파리에서 제1차 대프랑스 동맹의 공세를 받던 혁명가들은 방데의 봉기를 「등 뒤의 비수」로 여겼다. 7월 26일 바레르는 공회에서 방데의 파괴와 반군의 섬멸을 요구했고, 8월 1일 공회는 방데의 숲을 베고 반군의 소굴을 부수고 수확물을 거두고 가축을 빼앗되 「여자·아이·노인은 내륙으로 옮겨 인도적 배려로 생계와 안전을 보장한다」는 법령을 통과시켰다. 같은 날 공안위원회는 카리에에게 이 지역의 물리적 파괴를 통한 「평정」을 명령했다고 영어 출처는 적는다. 8월 9일 공회는 7월 23일 마인츠에서 명예로운 항복을 한 수비대를 방데로 보내기로 했고, 9월 6~8일 낭트에 도착한 이 규율 잡힌 마인츠군은 클레베르가 전위를 맡아 레제와 마슈쿨을 되찾았다. 그러나 9월 18일 토르푸에서 델베·레스퀴르·봉샹의 앙주군에 첫 패배를 당했고, 이어 코롱과 생랑베르에서 로시뇰의 패배가 캉클로의 계획을 무너뜨렸다. 파리는 경악했다. 10월 1일 공회는 두 번째 법령을 채택해 라로셸 연안군·마인츠군·브레스트 연안군 일부를 서부군으로 합쳤고 귀족 출신 장군들을 해임했으며, 바레르는 「방데를 파괴하라」는 연설로 「섬멸법」이라 불린 10월 1일 법을 얻어 냈다. 공안위원회는 질서 회복을 완수하라며 카리에를 서부군에 보냈다. 전쟁장관 부쇼트는 캉클로·그루시 같은 귀족 장군을 로시뇰·롱생·레셸 같은 상퀼로트 장군으로 바꿨으나 이들은 대개 무능했다. 10월 초 낭트와 니오르에서 나온 두 종대가 10월 15일 숄레에서 합류해 2만 6천 명이 되었고, 10월 17일 방데군 4만 명이 숄레 탈환을 시도했으나 백병전 끝에 격퇴되었다. 양쪽 모두 수천 명이 죽거나 다쳤고 델베와 봉샹이 중상을 입었다. 6 1 2

프랑스영국갈레른 행군과 사부네 (1793년 10~12월)

숄레에서 패한 방데군은 보프레오를 거쳐 생플로랑르비에이로 물러나며 부상자 400명을 남겼고, 이들은 베스테르만의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반군은 브르타뉴와 멘을 봉기시키고 영국 해협의 항구를 점령해 영국군 상륙을 얻겠다는 희망으로 루아르강을 건너기로 했다. 10월 18일 밤 새 총사령관 라로슈자클랭은 전투원 2만~3만 명과 부상자·노인·여자·아이 1만 5천~6만 명, 모두 6만~10만 명을 강 너머로 옮겼다. 브르타뉴어로 북서풍을 뜻하는 「갈레른 행군」의 시작이었다. 죽어 가던 봉샹은 부하들이 총살하려던 공화국군 포로 5,000명의 학살을 막았고 몇 시간 뒤 숨졌다. 방데군은 10월 22일 라발을 점령했고 브르타뉴와 멘의 주민 6,000~1만 명이 「작은 방데」로 합류했다. 10월 25일 기다리지 않고 공격한 베스테르만의 전위는 크루아바타유에서 궤멸했고, 이튿날 레셸의 무능으로 공화국군 2만 명은 앙트람에서 4,000명을 잃고 앙제로 달아났다. 레셸은 체포되어 낭트에서 자살했다. 방데군은 11월 1일 마옌, 3일 푸제르를 점령했으나 그날 레스퀴르가 숄레의 부상으로 죽었다. 푸제르에서 영국 정부의 서신을 가진 망명자 두 명을 만난 참모부는 그랑빌 공격을 결정했고, 11월 14일 그랑빌 앞에 섰지만 영국 배는 한 척도 없었고 도시는 저항했다. 사기가 꺾인 병사들은 지휘관의 명령을 거부하고 방데로 돌아가기로 했으며, 노르망디에 남겨진 낙오자 800명은 공화국군에게 총살되었다. 1 7 2

렌에서 재편된 공화국군 2만 5천 명은 로시뇰의 지휘 아래 앙트랭과 퐁토르송에서 길을 막았으나, 11월 18일 퐁토르송에서 트리부의 4,000명이 격파되었고 11월 20~22일 돌에서 방데군이 버티고 반격해 앙트랭을 빼앗았다. 그러나 절반이 부상자·노인·여자·아이인 방데군은 굶주림과 질병으로 수천 명을 잃었고, 공화국군은 셰르부르 연안군 6,000명과 북부군 1만 명을 증원받았다. 12월 3~4일 앙제 공격에 실패한 방데군은 12월 10일 르망을 점령해 쉬려 했으나 12일 마르소와 클레베르가 이끄는 2만~3만 명의 공격을 받았다. 전투는 이튿날까지 이어져 부상자·여자·아이 학살로 번졌고, 방데군은 르망과 라발 가는 길에 1만~1만 5천 명의 시신과 수천 명의 포로를 남겼다. 12월 16일 앙스니에서 라로슈자클랭과 스토플레는 한 줌의 병사와 함께 강을 건넜으나, 배가 부족한 가운데 낭트에서 온 공화국 포함이 나룻배를 가라앉혔다. 노르쉬르에르드르에서 베스테르만은 낙오자 300~400명을 학살했다. 1만~1만 5천 명으로 줄어든 방데군은 12월 22일 사부네를 점령했고, 23일 새벽 공화국군 약 1만 8천 명이 공격했다. 파견의원 프리외르와 부르보트, 장군의 사촌인 파견의원 튀로는 전날 밤 즉시 공격을 요구했으나 클레베르와 마르소가 동이 틀 때까지 기다리게 했다. 3,000~7,000명의 방데인이 전사하거나 즉결 처형되었고 공화국군의 손실은 전사 30명, 부상 200명이었다. 여자와 아이는 낭트의 감옥으로 보내졌고, 비뇽 위원회는 사부네에서 661~2,000명의 포로를 총살했다. 베스테르만은 프랭키오 근처에서 남녀와 아이 500~700명을 쏘았다. 「방데는 더 이상 없다」로 시작하는 그의 보고서는 진위가 다투어진다. 알랭 제라르는 정통왕당파 역사가의 창작으로 보고, 영어 위키백과는 편지가 쓰였다는 시점에 그의 부대가 수천 명의 포로를 살려 두고 있었고 민간인 학살이 공회의 명령을 어기는 일이었다고 적는다. 1 8 5 2

갈레른 행군이 끝났을 때 공화국의 승리는 확정되었다. 강을 건넌 6만~10만 명 가운데 4,000명만 루아르를 다시 건너 돌아왔고 5만~7만 명이 죽었으며 2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살아남은 이들은 작은 무리로 흩어져 멘·오트브르타뉴·모르비앙의 숲에 숨었고 주민 일부가 이들을 도왔다. 그러나 이 승리는 장군과 파견의원을 안심시키지 못했다. 거의 진압되었다고 믿었던 반란군이 몇 달 동안 떠돌며 나라를 공포에 떨게 했으므로, 이들은 지역 전체가 반혁명과 연방주의에 지배된다고 보았다. 뒤이은 탄압의 강도는 「상당수 정치·군사 책임자와 병사·활동가에게」 전쟁의 통상 규칙을 무효로 만든 폭력의 격화를 보여 주지만, 여자·아이·노인과 무기 없는 남자를 보호하라는 공회 법령에는 어긋나는 것이었고 군 지휘관과 파견의원은 공회에 거듭 거짓 보고를 했다. 한편 행군에 참여하지 않은 샤레트는 10월 12일 누아르무티에섬을 점령했고, 부앵에서 지역 지휘관 파조가 공화국군 포로 수백 명을 학살했다. 숄레에서 중상을 입은 델베는 11월 초 이 섬으로 피신했다. 영국의 지원을 우려한 공안위원회의 명령으로 악소가 섬 탈환에 나섰고, 1794년 1월 3일 공화국군 3,000명이 상륙하자 방데 수비대는 목숨을 보장받는 조건으로 항복했다. 그러나 파견의원 프리외르 드 라마른과 부르보트, 장군의 사촌인 파견의원 튀로는 항복 조건을 지키지 않고 며칠 사이 포로 1,200~1,500명을 총살했으며, 설 수 없던 델베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처형되었다. 1 6 4

프랑스공포정치의 진압: 낭트·앙제의 처형과 지옥 종대 (1793년 12월~1794년 5월)

갈레른 행군의 끝은 피의 보복의 시작이었다. 루아르강 북쪽에서는 파견의원들이 세운 혁명군사위원회가 포로와 공모 혐의자를 재판했다. 마옌에서는 1,325명이 재판받아 454명이 처형되었고, 일에빌렌의 브뤼튀스 마니에 위원회는 744명을 재판해 267~268명에게 사형을 내렸으며, 알랑송 형사재판소는 방데 포로 172명을 포함해 189명을 사형에 처했다. 낭트에서는 1793년 10월 8일 부임한 파견의원 카리에가 전임자가 만든 혁명위원회와 「마라 중대」를 물려받아, 11~12월 혁명재판소를 통해 방데인과 공모한 혐의로 144명을 단두대에 보냈다. 12월 갈레른 행군에서 잡힌 남녀와 아이 8,000~9,000명이 커피 창고 감옥에 쌓였고, 티푸스가 퍼져 수감자 3,000명과 간수·의사가 죽으며 도시로 번질 위협이 되자 카리에는 감옥과 폰툰선을 비우려 익사형과 총살에 대거 의존했다. 1793년 12월 16일부터 1794년 2월 27일까지 익사형으로 1,800~4,860명, 총살로 2,600~3,600명이 죽었고, 도시의 포로 1만 2천~1만 3천 명 가운데 8,000~1만 1천 명이 죽었다. 희생자 대다수는 방데인이었고 슈앙, 지롱드파·연방주의자로 몰린 낭트 혐의자, 선서 거부 사제, 매춘부, 일반 범죄자, 영국·네덜란드 전쟁 포로도 있었다. 카리에는 12월 11일 공안위원회에 「여자들이 사제와 함께 방데 전쟁을 꾸미고 지탱했다」며 모든 반란 지역에서 「남녀를 가리지 않고 모든 개인을 죽이고 모조리 불태우라」는 명령을 내리겠다고 썼다. 공안위원회 요원 쥘리앵이 2월 4일 로베스피에르에게 보낸 보고는 카리에가 「애국파 자신에게 공포를 명령했다」고 고발했고, 카리에는 2월 8일 소환되었다. 1 9 10

앙제에서는 파견의원 앙츠와 프랑카스텔이 같은 포로 물결을 맞아 펠릭스파랭 군사위원회로 재판하거나 재판 없이 처형했다. 앙제 시내에서 290명이 총살·참수되고 1,020명이 옥중 전염병으로 죽었으며, 생트젬쉬르루아르에서 1,500~1,800명, 아브리예에서 900~3,000명, 퐁드세에서 1,500~1,600명이 총살되었다. 위스네에 따르면 멘에루아르에서 수감된 1만 1천~1만 5천 명 가운데 8,500~9,000명이 죽었고, 마르탱은 적어도 5,000~6,000명이 총살되었다고 본다. 방데 남부에서는 파견의원 르키니오가 퐁트네르콩트의 군사위원회로 332명을 재판해 192명을 총살하게 했다. 파리에서는 11월 7일 메를랭 드 티옹빌의 제안으로 방데도의 이름이 「방제(복수된)」로 바뀌었고, 방데의 의원 파요는 방화 군대의 파견을 요구했다. 전선에서 포로들을 살려 달라고 호소한 클레베르와 사바리의 요청을 카리에는 듣지 않았다. 역사가 마르탱은 카리에의 정치적 서투름과 수사의 과잉이 그의 잔혹성만큼이나 그 악명을 만들었으며, 리옹의 푸셰와 콜로 데르부아, 앙제의 프랑카스텔과 앙츠, 루아르앵페리외르와 방데의 부르보트·프리외르 드 라마른과 장군의 사촌인 파견의원 튀로도 그만큼 큰 학살에 책임이 있으나 후대의 심판은 그만큼 가혹하지 않았다고 지적한다. 1 9 6

12월 30일 낭트에서 마르소에게 서부군 지휘권을 넘겨받은 튀로는 에베르파에 가까워 마인츠군의 미움을 샀다. 12월 19일 그는 물랭의 조언으로 사면안을 공안위원회에 보냈으나 답이 없자 공회 법령을 엄격히 적용하는 계획을 짰다. 1794년 1월 7일 클레베르는 방데군이 6,200명뿐이고 공화국군은 2만 8천 명이니 해안을 지키고 요새 야영지로 영토를 포위하며 주민의 신뢰를 얻고 반군 집결지만 치자고 제안했지만 튀로는 거부했고 클레베르는 1월 9일 전출되었다. 1월 16일 튀로는 파견의원들에게 「여자와 아이를 모두 칼로 베어야 한다면」 책임을 덮어 줄 결정이 필요하다고 썼으나 답장은 없었고, 1월 19일 무장 반군과 「그런 경우의 처녀·여자·아이」를 총검으로 찌르되 처형은 장군의 사전 명령으로만 하라는 지침을 내렸다. 1월 21일 열두 개 종대가 동쪽에서, 악소의 여덟 개 종대가 서쪽에서 735개 코뮌, 주민 75만 5천 명의 영토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장군들은 명령을 제각기 해석했다. 악소는 「우리는 군인이지 사형집행인이 아니다」라며 샤레트 추격에 전념했고 물랭은 애국파 주민을 꼼꼼히 소개했지만, 코르델리에·그리뇽·위셰·아메의 부대는 왕당파와 애국파를 가리지 않고 마을 전체를 몰살했다. 화약을 아끼려 칼로 죽였고 여자와 아이를 살해했으며, 2월 28일 레뤼크쉬르불로뉴의 교구 주민이 학살되었다. 1월 23일 파견의원 라녤로가 샬랑 주변의 학살을 공회에 고발했으나 반응이 없었다. 2월 8일 카르노는 공안위원회가 「이미 여러 번 속았던 문제」라 오래 침묵했다면서 튀로의 「조치는 좋고 의도는 순수해 보인다」고 썼다. 그러나 같은 날 스토플레가 숄레를 두 시간 동안 되찾자 파리는 경악했고, 2월 12일 바레르는 공회에서 「법령의 야만적이고 과장된 집행」을 비난하며 평화로운 애국파 마을을 불태운 것을 나무랐으며, 13일 카르노는 「도적을 죽여야지 농장을 불태우면 안 된다」고 썼다. 6 1 11

그러나 2월 10일 「무제한 권한」을 받고 파견된 프랑카스텔·앙츠·가로는 2월 19일 앙제에서 튀로를 만나 그의 계획을 승인했고, 2월 18일 「지금 방데에 있는 주민은 모두 아주 집요한 반군이다. 여자, 처녀, 열두 살 넘는 소년이 가장 잔인하다」고, 3월 9일 「방데 전쟁이 완전히 끝나면 모든 것을 파괴했으므로 주민은 남지 않을 것」이라고 공안위원회에 썼다. 3월 초 병력을 해안에 집중하라는 명령으로 열두 개 종대는 네 개로 합쳐졌고, 3월 10일 튀로는 가옥과 농장의 방화를 중지시켰다. 같은 날 1월에 클레베르의 안을 지지했던 카리에가 공회에서 튀로의 정책을 옹호했다. 곧 방데의 공화파 주민 대표단이 처음으로 파리에서 접견되어 방화 중지와 충성 지역·반란 지역의 구별을 요구했고, 3월에 도착한 파견의원 게즈노와 톱상은 튀로의 해임을 청했다. 4월 12일 서부군 병력 일부가 국경으로 빠지자 튀로는 종대를 끝내고 요새 야영지를 세웠으며, 5월 13일 정직되었다. 공안위원회는 방데 애국파의 학살은 못마땅해했으나 반군의 노인·여자·아이에 대한 살육은 내버려 두었고, 7월 23일 카르노는 위원회 명의로 니오르의 파견의원들에게 개입을 거부하는 편지를 썼다. 넉 달 동안 수백 개 마을이 불탔고 2만~5만 명의 민간인이 지옥 종대에게 학살되었다. 지옥 종대라는 이름은 왕당파 지휘관 푸아리에 드 보베의 회고록에 따르면 공화파 자신이 붙인 것이었다. 학살은 반란을 끝내기는커녕 되살렸다. 1794년 초 수백 명씩만 거느리던 샤레트·스토플레·사피노·마리니 아래로 종대를 피한 농민들이 모여들었고, 4월 22일 네 지휘관은 샤티용의 라불레 성에서 서로 돕기로 맹세했다. 6 1

프랑스테르미도르와 라자주네 조약 (1794년 7월~1795년 6월)

1794년 5월 튀로의 해임으로 지옥 종대는 끝났으나 폭력은 서서히 줄었다. 4월 공안위원회가 많은 병력을 국경으로 돌려 6월 서부군은 1월의 10만 명에서 5만 명으로 줄었고, 튀로와 후임 비뫼는 기동 종대를 접고 도시로 수확물을 거두어들이기 위한 요새 야영지를 세웠다. 6월 2일 샤레트·스토플레·사피노는 1만 명 가까운 병력을 합쳐 샬랑을 공격했으나 수백 명의 수비대에게 격퇴되었고, 7월 위셰의 종대는 레제를 점령하면서 마을 주민 수백 명을 학살했다. 9월 샤레트는 라룰리에르·프렐리녜·무티에레모파의 공화국군 야영지를 차례로 습격했다. 1794년 7월 27일 로베스피에르가 몰락하자 공회는 협상에 열렸다. 8월 16일 서부군 사령관에 임명된 알렉상드르 뒤마 장군은 부대의 군기 문란과 약탈을 고발하고 10월 23일 사임했으며, 캉클로가 서부군으로, 오슈가 브레스트 연안군으로 돌아와 화해 정책을 폈다. 9월 3일 체포된 카리에는 낭트 혁명위원회 재판에서 옛 부하들의 증언으로 기소되었고, 11월 13일 공회가 면책특권을 박탈한 뒤 「여기 있는 모든 것이 유죄다, 의장의 종까지」라고 외쳤으며, 12월 16일 단두대에서 처형되었다. 여러 역사가는 공회가 카리에를 희생양으로 삼아 대다수 가담자의 죄를 덮었다고 본다. 리옹의 학살 책임을 지고 있던 푸셰는 바뵈프에게 카리에를 겨눈 언론 공세를 맡겼고, 바뵈프의 소책자 『인구 감소 체계에 대하여, 또는 카리에의 생애와 범죄』는 뒤에 20세기에 다시 읽혔다. 1 9

1794년 12월 1일 멘에루아르·되세브르·방데의 의원들은 민간인 학살을 고발하고 반군과 지도자의 사전 사면을 권고했고, 12월 2일 공회는 한 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는 방데인과 슈앙을 사면하는 법령을 채택했다. 1795년 첫 6주 동안 마지막 방데 포로들이 풀려났다. 12월 23일 파견의원의 밀사들이 벨빌에서 샤레트를 만났고, 샤레트와 사피노는 평화 제안에 열려 있음을 보였다. 1795년 1월 11일 공식 교섭이 합의되었으나 스토플레는 1월 28일 베르니에 신부가 쓴 반대 선언을 퍼뜨렸다. 2월 12일 샤레트·사피노와 장교들, 스토플레의 대리인, 브르타뉴 슈앙의 대표 코르마탱이 낭트 근처 생세바스티앵의 라자주네 저택에서 파견의원들을 만났고, 2월 17일 합의가 이루어졌다. 반군은 공화국 승인과 대포 반납의 대가로 사면, 예배의 자유, 10년간의 세금·징집 면제, 재산 보장, 방데 수비대 2,000명, 반란 중 발행한 어음의 상환, 재건 배상금 1,800만 리브르를 얻었고, 루이 17세의 석방 문제는 미결로 남았다. 조약은 공화국 대표들만 서명했고 방데 지도자들은 비준하지 않은 채 전투 중지와 공화국 승인을 호소하는 선언문을 냈다. 2월 18일 도착한 스토플레는 같은 조건을 제안받았으나 공화국 승인을 단호히 거부하고 22일 앙주로 돌아갔다. 2월 26일 샤레트와 사피노는 낭트에 입성해 공화국 장군·파견의원과 나란히 화해 행진을 했고, 3월 14일 공회는 라자주네 합의를 비준했다. 12 1 13

조약은 왕당파 진영을 갈라놓았다. 3월 4일 스토플레와 베르니에는 「공화파가 된 옛 방데 지도자들」을 비난하는 글을 냈고, 다음 날 조약에 서명한 로루 사단장 프뤼돔을 체포해 사형을 선고하고 칼로 처형했으며, 3월 6일 앙주군은 사피노의 사령부를 약탈했다. 캉클로는 2만 8천 명으로 3,000명뿐인 앙주군을 몰아붙였고, 스토플레는 3월 26일 스리제에서 휴전에 서명한 뒤 슈앙과의 라마빌레 협상 결과를 기다리다 5월 2일 생플로랑르비에이에서 라자주네와 같은 조건으로 강화했다. 슈앙 쪽에서는 코르마탱이 4월 라마빌레 조약을 맺었으나 참석한 지도자 121명 가운데 21명만 서명했다. 5월 20일 샤레트·스토플레·사피노는 화해를 표시하려 모였다. 그러나 불안은 남았다. 피란 갔던 공화파 「방데 난민」이 돌아오면서 충돌이 잦았고, 지방 행정은 농촌에서 힘이 없었으며, 왕당파가 장악한 많은 농촌 코뮌은 도시로 피했던 애국파의 귀환을 힘으로 막았다. 전쟁 전부터 샤랑트앵페리외르로 밀려들던 난민은 1793년 봄 공화파, 8월 1일 법령 뒤 두 번째 물결, 1794년 1월부터 지옥 종대를 피한 청·백 양쪽의 세 번째 물결로 이어졌고, 르네는 4만~6만 명, 마르탱은 2만~4만 명으로 추산한다. 르네는 난민의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고 공화국이 이들을 받아들이고 먹이고 일자리까지 준 사실이 제노사이드 가설과 완전히 모순된다고 본다. 2월과 6월 사이 암살과 사건이 양쪽 관계를 악화시켰고, 6월 8일 라자주네에서 열린 재회담에도 불신이 이겼다. 파견의원들은 방데 장군들이 시간을 벌 뿐이라 보고 체포 작전을 구상했으나 병력 부족으로 포기했다. 5월 샤레트는 아르투아 백작의 부관 리비에르 후작에게서 영국의 도움을 받은 브르타뉴 상륙이 임박했다는 통보와 양동 요청을 받았고, 6월 8일 루이 17세가 파리의 탕플 감옥에서 죽었다. 1 12 14

프랑스영국제2차 방데 전쟁: 키브롱과 오슈의 평정 (1795년 6월~1796년 7월)

1795년 6월 23일 워런과 후드가 이끄는 영국 함대가 망명군 3,500명과 4만 명분의 무기·군복·식량을 싣고 출항했고, 6월 27일 키브롱반도의 카르나크에 상륙해 카두달이 모은 슈앙 수천 명과 합류했다. 그러나 퓌자예와 데르빌리의 지휘권 다툼으로 기습의 이점을 잃었고, 반에서 2,000명으로 출발한 오슈는 7월 4일까지 1만 3천 명을 모아 7월 7일 반도를 거의 봉쇄했다. 7월 20일 밤 폭풍 속의 공격에서 망명군에 편입되었던 공화국군 포로들이 팡티에브르 요새를 넘겼고, 퓌자예는 영국 기함으로 철수했으며 7월 21일 솜브뢰유가 항복했다. 포로 6,332명 가운데 여자와 아이는 풀려났으나 솜브뢰유와 동료 748~750명이 군사위원회의 판결로 오레에서 총살되었고, 그중 430명이 귀족이었다. 한편 6월 24일 샤레트는 장교나 다른 방데 장군과 상의 없이 벨빌에서 라자주네 조약의 파기와 전쟁 재개를 선언했고, 부하들은 이를 열의 없이 받아들였다. 그는 6월 25일 레제사르 야영지를 기습하고 26일 「비밀 조항」이 루이 17세의 석방과 왕정 복고를 약속했다고 주장하는 선언을 냈다. 스토플레의 앙주군과 사피노의 중부군은 조약을 깨지 않았고 7월 공회에 사절을 보냈으나 샤레트의 재봉기로 협상은 무산되었다. 루이 18세는 샤레트를 중장 계급으로 가톨릭 왕당군의 수장에 임명했고 스토플레는 소장이 되었다. 키브롱의 처형에 대한 보복으로 샤레트는 8월 9일 벨빌의 공화국군 포로 100~300명을 처형했다. 영국은 눈을 방데로 돌려 8월 10~12일 생장드몽 해변에 총 1,200정과 군도 3,000자루를 내렸고, 8월 22일 영국군 5,000명과 아르투아 백작이 이끄는 망명자 800명을 실은 123척의 함대가 포츠머스를 떠났다. 함대는 9월 30일 일되외섬을 점령했고 아르투아 백작은 10월 2일 상륙했으나, 누아르무티에 공격은 실패했고 샤레트는 해안으로 접근하지 못했다. 10월 8일 원정은 포기되었고 아르투아 백작은 샤레트와 합류하지 않은 채 11월 18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이 완전한 실패는 방데 전투원의 사기를 크게 꺾었다. 15 1 14

1795년 8월 29일 공안위원회는 병으로 물러난 캉클로 대신 오슈를 서부군 사령관에 임명했고, 9월 14일 그에게 전권을 주며 현지 파견의원의 개입을 금지했다. 12월 26일 총재정부는 서부군·브레스트 연안군·셰르부르 연안군을 대양 연안군으로 합쳐 그에게 맡겼고, 12월 28일 반란 도의 모든 큰 코뮌에 계엄을 선포했다. 오슈는 실용적인 정책을 폈다. 체포해야 할 반군 지도자와, 무기를 반납하고 복종하면 자유로운 일반 전투원·농민을 구별했고, 저항하는 공동체의 가축은 몰수했다가 무기와 바꿔 돌려주었다. 군 기강을 세워 약탈을 막았고, 평정된 지역에 애국파 난민의 귀환을 막기도 했으며, 더 이상 추적되지 않는 선서 거부 사제들이 자유롭게 예배하도록 두어 회유했다. 영어 출처는 그가 복종한 농민에게 가축을 돌려주고 「사제들에게 몇 크라운을 쥐여 주었다」고 적는다. 지역 애국파는 이를 「군사 독재」라 비난했으나 황폐한 전쟁에 지친 주민과 반군 장교 대다수는 평화로 기울었고, 10월부터 캉통 전체가 무기를 반납했다. 8월 4일 르푸아레에서 열린 방데 선서 거부 성직자의 시노드도 공화국과의 타협을 모색했다. 오슈는 10월 생필베르·클리송·레제르비에·샹토네를 차례로 점령한 뒤 600~2,500명의 기동 종대 여섯 개를 편성해 보름마다 교대하며 대포 없이 반란 영토를 끊임없이 돌게 했다. 11월 중순 샤레트의 장교들은 전투 중지를 건의했으나 그는 거부했고, 11월 27일과 12월 5일 패배하며 부사령관 쿠에튀스와 기병대장을 잃었다. 1 16

1796년 1월 3~4일 샤레트는 스토플레를 전쟁에 끌어들이려 앙주로 가다 라브뤼피에르와 티포주에서 기습당해 부대가 완전히 흩어졌고, 그 뒤로 수백 명만 모을 수 있었다. 사피노는 1월 윌로 장군과 강화했으나 오슈는 너무 관대하다며 이를 부인했다. 중장과 생루이 기사가 된 스토플레는 오래 망설이다 아르투아 백작의 명령으로 1월 26일 환상 없이 다시 봉기했으나 400명밖에 모이지 않았고, 슈미예 공격에 실패한 뒤 1월 29일 몰레브리에 숲으로 숨어들었다. 2월 23~24일 밤 라푸아트비니에르 근처 라소그르니에르 농가에서 바시니 연대의 분견대에 붙잡혀 앙제에서 군사위원회의 사형 선고를 받고 2월 25일 총살되었다. 2월 중순 오슈의 동의로 샤레트에게 프랑스를 떠나라는 제안이 전해졌으나 그는 2월 20일 거부했다. 트라보의 종대는 2월 21일 라베고디에르, 27일 프루아퐁에서 그를 거듭 패주시켰고, 그의 주요 장교들은 공화국에 항복했다. 3월 23일 쉰 명 남짓을 거느린 샤레트는 레뤼크 근처에서 발랑탱의 종대에 기습당해 트라보의 종대 쪽으로 몰렸고 생쉴피스르베르동 근처 라샤보트리 숲에서 붙잡혔다. 앙제를 거쳐 낭트로 옮겨진 그는 사형 선고를 받고 3월 29일 총살되었다. 샤레트의 죽음은 방데 전쟁의 끝이었다. 중부군에서 사피노의 후계자 바슬로가 5월 4일 총살되었고, 앙주에서 스토플레의 후계자 도티샹과 포레스티에가 5월 무기를 내려놓았다. 오슈는 이어 브르타뉴·멘·노르망디 슈앙의 항복을 받아 7월 6일 오른의 퐁트네레루베에서 강화에 서명했고, 7월 13일 「서부의 소요는 끝났다」고 발표했다. 7월 16일 총재정부는 「오늘 마침내 이 끔찍한 방데와 슈앙의 전쟁이 꺼졌다고 말할 수 있다」고 선포했고, 7월 30일 서부 도의 계엄이 해제되었다. 방데는 1799년 세 번째 전쟁, 1815년 네 번째, 1832년 다섯 번째 봉기를 겪지만 규모는 훨씬 작았다. 1 2 16

프랑스평가

방데 전쟁의 서술은 「청군」과 「백군」이라는 두 사료 전통 사이에서 쓰여 왔다. 첫 저작은 당사자의 회고록으로, 왕당파 쪽에서는 레스퀴르의 미망인 라로슈자클랭 후작부인의 회고록이 왕과 교회를 지키려는 농민의 자발적 봉기를 그렸고, 공화파 쪽에서는 클레베르·튀로·사바리·베스테르만이 글을 남겼다. 19세기에 올라르의 제자 샤생은 열한 권의 문서집을 펴내며 봉기를 귀족과 사제의 조작으로 보았고, 가톨릭·왕당파 학자들은 구술 전승과 회고록으로 1793~1794년 탄압의 폭력에 집중했다. 19세기 공화파 역사가들의 처리는 사료 선택의 문제를 보여 준다. 미슐레는 공포정치와 카리에를 고발하면서도 튀로는 한 줄만 언급했고, 루이 블랑은 공포정치와 로베스피에르를 옹호하며 방데인의 학살이 공화파의 학살보다 더 많은 희생자를 냈다고 썼으며, 1865년 에드가르 키네는 튀로와 카리에가 공회의 지시대로 움직였다고 썼다가 자기 진영에서 배척당했다. 제3공화국 아래 조레스의 『프랑스 혁명 사회주의사』는 방데인을 「역사의 쓰레기통」에 던져야 한다며 1793년의 마슈쿨 학살을 길게 다뤘으나 지옥 종대와 낭트·앙제의 익사형·총살은 언급하지 않았다. 1909년 크로폿킨은 『대혁명』에서 방데인과 마슈쿨을 비난하면서도 공안위원회를 튀로의 섬멸 정책의 책임자로 보았다. 마티에와 소불의 저작에서 지옥 종대는 거의 지워졌다. 1960~1970년대 프티프레르·부아·포쇠·틸리는 청·백 양쪽의 마니교적 서술을 끝내려 했고, 1980년대 이후 「제노사이드」 논쟁을 거치며 방데의 황폐화는 더는 숨겨지지 않아 소불이 책임 편집한 『프랑스 혁명 역사사전』과 1989년의 저작들도 이를 다루게 되었다. 1 6

희생자 수는 출처마다 크게 엇갈린다. 당대의 추정은 과장되었다. 1794년 12월 1일 세 도의 공회 의원 아홉 명은 공안위원회 앞에서 40만 명이 사라졌다고 했고, 클레베르는 회고록에서 「프랑스인 30만 명 가까이」, 오슈는 1796년 편지에서 「60만 명」, 프뤼돔은 1797년 90만에서 100만 명 이상을 적었으며 샤토브리앙이 되풀이한 60만이라는 숫자가 후대에 전해졌다. 1801~1804년 내무부의 요청으로 네 도의 지사들이 1790~1791년과 1800년의 인구를 비교해 첫 통계를 냈고, 1818년 카볼로는 군사적 방데 네 도의 사망·실종을 15만 9,412명으로 계산했다. 1980년대 레노 세셰르는 700개 코뮌의 교구부와 호적을 조사해 출생률에 공통 승수 27을 곱하는 방법으로 81만 5,029명 가운데 11만 7,257명(14.38%)이 「결손」이라고 추산했으나, 복원된 인구가 1784년과 1807년의 것이어서 전쟁 기간을 벗어나고, 전쟁 중 출생 감소를 무시하며, 전사자와 학살 희생자와 간접 사망을 구분하지 않고, 난민과 도시 이주를 빼고, 희생자의 정치 성향을 가리지 않으며, 방데 밖 출신 사망자를 셈하지 않는다는 비판을 받았다. 찰스 틸리는 세셰르가 인구 감소기에 1,000명당 37명의 일정한 출생률을 가정하고 순이동을 0으로 두며 종전을 1794년이 아닌 1802년으로 잡는 「정당화할 수 없는 세 가지 가정」으로 인구와 가옥 수와 손실을 부풀렸다고 분석했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1987년 1790년과 1801년 인구조사를 연 1%의 자연증가로 보정해 1801년에 20만~25만 명이 「모자란다」고 보았는데, 이 결손은 공화파와 왕당파를 가리지 않는 전투의 살육에 주로 기인한다. 2007년 자크 위스네가 이끈 공동 연구는 1793~1796년 군사적 방데 주민 약 17만 명이 죽었다고 보았는데, 전쟁 전 인구 75만 5천 명의 22~23%이며 그중 4분의 1에서 5분의 1은 공화파였다. 공화국군 전사자는 쿨롱과 라보리외의 2만 6천~3만 7천 명, 뒤파키에의 3만 명 추산이 있고, 위스네는 동원 병력 13만~15만 명에 비추어 5만 명을 넘을 수 없다고 본다. 마르탱은 2014년 위스네의 추산이 「합리적이고 근거가 있어 보인다」고 평했고, 알랭 제라르는 그것이 「두 세기에 가까운 미친 숫자들」을 끝냈다고 썼다. 영어 위키백과는 양쪽을 합쳐 11만 7천~45만 명이라는 폭을 적고, 전체 약 20만 명 사망 가운데 군사적 방데 주민이 약 17만 명으로 반란 영토 인구의 20~25%라고 정리한다. 1 2 17

「방데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1969년 방데의 추억 협회 회보에 실린 군의관 아드리앵 카레의 글에서 나치 범죄와의 비교와 함께 처음 등장했고, 1983~1985년 피에르 쇼뉘가 이를 공론화했다. 1986년 세셰르는 1985년 소르본에서 쇼뉘·뫼이예·튈라르 등을 심사위원으로 통과한 국가박사 논문을 『프랑스인끼리의 제노사이드: 복수된 방데』로 펴냈고, 혁명 200주년을 앞둔 1986~1989년 논쟁은 언론·의원·장군·법률가·소설가를 끌어들였다. 그는 1793년 8월 1일·10월 1일·11월 7일 법령의 폐지를 요구했다. 쇼뉘는 「히틀러의 유대인 제노사이드 명령서는 없지만 바레르와 카르노의 방데 명령서는 있다」며 이를 최초의 「이념적 제노사이드」라 불렀고, 튈라르, 르루아라뒤리, 스테판 쿠르투아, 조나손과 초크, 애덤 존스, 마크 레빈 같은 학자가 제노사이드라는 규정을 지지했다. 1993년 솔제니친은 레뤼크쉬르불로뉴의 200주년 기념 연설에서 자코뱅을 레닌의 볼셰비키에, 방데인을 볼셰비키에 맞선 러시아·우크라이나·카자크 농민에 견주며 「혁명적 전제」가 둘 다를 무자비하게 파괴했다고 말했다. 2017년 외교관이자 법률가 자크 빌맹은 국제형사법에 비추어 1793년 3월부터 전쟁범죄, 4~7월 인도에 반한 범죄, 1793년 8월 1일부터 1794년 중반까지 제노사이드가 성립한다고 주장했다. 논쟁은 정치화되었다. 1987년 장마리 르펜이 인도에 반한 범죄 인정 수정안을 냈고, 2007년과 2012년 우파 의원 아홉 명이, 2013년에는 UMP와 국민전선 의원이 함께 「방데 제노사이드」 인정 법안을 냈으며, 2018년 극우 의원 두 명이 다시 발의했다. 좌파당의 알렉시 코르비에르는 2013년 법안을 「역사 조작의 조잡한 행위」이자 「프랑스 혁명을 비방하고 20세기의 실제 제노사이드를 평범하게 만들려는 극우의 낡은 이념적 술수」라 불렀다. 1 2 18

대학의 대다수는 제노사이드 규정을 거부했다. 1985년 프랑수아 르브룅이 쇼뉘의 주장을 반박했고, 피터 맥피는 전쟁이 방데인 전체가 아니라 왕당파 방데인을 상대로 치러졌고 공화국은 공화파 방데인의 지원에 기댔으며, 왕당군이 패하자 공회가 작전을 끝냈고, 세셰르가 왕당파가 공화파 민간인과 포로에게 저지른 잔학 행위를 독자에게 알리지 않으며 민담을 사실로 되풀이하고 사망자 추정치의 폭을 무시한다고 지적했다. 그는 이 사건이 내전 중에 일어났고 공안위원회가 방데 인구 전체를 절멸할 의도가 없었으므로 유엔 협약의 제노사이드 정의에 맞지 않는다고 본다. 티머시 태킷은 「방데는 양쪽이 끝없는 공포를 저지른 비극적 내전이었고 사실 반군이 먼저 시작했다. 제노사이드라는 말은 전혀 부정확하고 부적절하다」고 썼고, 클로드 랑글루아는 세셰르의 주장을 「유사 신화적」이라 불렀다. 공산당과 가까웠던 혁명사 전문가 미셸 보벨은 1987년 「프랑스인끼리의 제노사이드에 관한 문헌 전체가 방데 전쟁 사망자 수에 대한 위험한 추정에서 출발한다」며 쇼뉘 같은 비전문가가 「도덕적 권위의 무게를 저주의 담론에 실었다」고 썼다. 장클레망 마르탱은 「전쟁범죄와 끔찍한 전투는 분명히 있었지만 결코 제노사이드는 아니었다」고 요약한다. 그에 따르면 제노사이드 개념은 명확히 구획된 집단에 적용된 이념적 의도를 전제하는데, 전쟁 이전의 「방데」 정체성은 존재하지 않았고 혁명은 종교·사회·인종 집단을 겨냥하지 않았으며, 8월 1일 법령과 바레르의 보고는 여자·아이·노인을, 10월 1일 법령은 무기 없는 남자까지 보호 대상에서 제외하지 않았고, 「도적」이라는 말은 왕정 때부터 쓰이던 것이었다. 그는 방데를 「혁명에 대한 모든 반대의 상징」으로 본 혁명가들의 시각이 「정의로운 폭력」을 정당화했으나 공회는 자신의 법령을 어기는 군인과 파견의원의 행동을 승인하지 않았고, 지역 혁명파의 동원이 앙제와 남부 방데의 부당한 폭력을 멈추게 했으며, 일부 장교는 동료의 황폐화 정책을 거부하고 재판에 넘겼다고 지적한다. 그의 분석에서 이것은 강한 국가가 주민에게 휘두른 폭력이 아니라 반군과 애국파 사이의 폭력의 소용돌이를 막기에는 너무 약한 국가의 이야기이며, 반군도 국가 대리인을 사냥해 죽이고 읍을 약탈하는 옛 농민 반란의 습관을 되풀이했다. 파트리스 그니페는 전투가 끝난 뒤 군사적 필요와 무관하게 가해진 고통을 「오늘날 인도에 반한 범죄라 부를 수 있는, 혁명사에 유례없는 범죄」로 규정하면서도 「공안위원회는 10월에 8월 1일 법령의 적용을 넓힌 것으로 보이고 1794년 초에는 절멸을 승인할 것」이라며 공회를 면책하지 않았다. 위스네 자신은 「학살」과 「전쟁범죄」가 적절한 말이며 「냉정하게 조직된 유대인 절멸과 지옥 종대의 피비린내 나는 습격을 결코 같은 선에 놓지 않겠다」고 썼다. 2020년 데이비드 벨은 1794년 초의 학살이 「민간인에 대한 국가 폭력의 무서운 새 단계」였다고 인정하면서도 전시의 모든 대규모 민간인 살해를 제노사이드로 정의하면 그 말이 의미를 잃는다고 보았다. 1 2 19 17

사회주의 운동에 방데는 두 가지 유산을 남겼다. 하나는 어휘다. 「방데」는 혁명에 맞선 농민 반혁명의 보통명사가 되었고, 러시아 내전에서 볼셰비키는 돈 카자크 지역을 「러시아의 방데」로 불렀다. 스테판 쿠르투아는 레닌이 「카자크를 프랑스 혁명의 방데에 견주고 기꺼이 그들을, 현대 공산주의의 창시자 바뵈프가 1795년 「인민 학살(populicide)」이라 부른 계획에 맡겼다」고 쓴다. 다른 하나는 혁명적 폭력과 그 한계에 대한 물음이다. 테르미도르 뒤 바뵈프는 『인구 감소 체계에 대하여』에서 카리에의 범죄를 고발하며 「인민 학살」이라는 신조어를 만들었다. 그 책에서 인구 감소 체계는 방데만이 아니라 프랑스 전체에 관한 것이었고, 바뵈프는 앙라제의 비판을 이어 공포정치가 1793~1794년의 학살에 책임이 있다고 보며 산악파와 자코뱅을 공격했는데, 그는 평등 수립에 프랑스보다 적은 인구가 필요하다는 18세기 철학자들의 생각이 공안위원회의 계획을 뒷받침했다고 주장했다. 이 소책자는 1794년에는 거의 읽히지 않았으나 20세기에 되살아나 1987년 세셰르가 다시 펴냈다. 오슈 자신은 1796년 아일랜드 원정 때 울프 톤에게 「사람을 단두대에 보내면 개인 한 명은 없애지만 그의 친구와 연고자 전부를 정부의 영원한 적으로 만든다」며 흘린 피가 자유의 원칙에 큰 해를 끼쳤다고 말했다. 방데의 교훈은 뚜렷하다. 1793년의 봉기는 징집과 종교와 지역 사회의 불만이 겹친 농민 반란이었지 처음부터 왕정 복고 운동이 아니었고, 진압은 반군의 학살에 대한 응답이자 내전의 논리였으나 정부 자신의 법령을 넘어선 민간인 살육으로 번져 반란을 되살렸다. 오슈의 평정이 보여 주듯 전쟁을 끝낸 것은 섬멸이 아니라 사면과 예배의 자유와 군 기강이었다. 희생자 수와 법적 규정은 지금도 다투어지므로 단일한 숫자나 명칭으로 결론을 내리지 않는 것이 이 사건을 다루는 바른 태도다. 1 18 16 2

결과

1796년 2월 스토플레, 3월 샤레트가 총살되었고 7월 16일 총재정부는 전쟁의 종결을 선포했다. 군사적 방데 주민 약 17만 명(전쟁 전 인구 75만 5천 명의 22~23%)을 포함해 약 20만 명이 죽은 것으로 추산되며, 공화국군 전사자는 2만 6천~5만 명으로 본다. 1980년대 이후 「제노사이드」 규정을 둘러싼 논쟁이 이어졌으나 대다수 역사가는 전쟁범죄와 내전의 학살로 규정한다. 방데는 1799년, 1815년, 1832년에 작은 봉기를 더 겪었고, 「방데」라는 이름은 농민 반혁명의 보통명사가 되었다.

연표와 지도

숄레 그랑빌 르망 키브롱 앙제 사부네 소뮈르 낭트 누아르무티에 마슈쿨 투아르 퐁트네르콩트 10 그랑빌 11 르망 18 오레 17 키브롱 19 앙제 9 생플로랑르비에이 12 사부네 5 소뮈르 6 낭트 20 낭트 16 라자주네 (생세바스티앵) 1 숄레 8 숄레 14 숄레 7 토르푸 13 누아르무티에 2 마슈쿨 4 투아르 15 레뤼크쉬르불로뉴 3 생뱅상스테를랑주
  1. 1793-02-24프랑스
    30만 명 징집령

    국민공회가 미혼 남성 가운데 추첨으로 30만 명을 징집하기로 했다. 징모관의 도착이 전국에서 소요를 불렀다.

  2. 11793-03-03프랑스
    숄레의 첫 유혈

    징집 절차를 들으러 모인 젊은이들이 출발을 거부했고, 이튿날 국민방위대의 발포로 3~10명이 죽었다.

  3. 21793-03-11프랑스
    마슈쿨 점령과 애국파 학살

    레 지방의 농민이 마슈쿨을 점령하고 왕당파 위원회를 세웠다. 3월 27일부터 4월 22일까지 애국파 포로 150~200명이 총살되었다.

  4. 31793-03-19프랑스
    퐁샤로 전투

    라로셸에서 온 마르세의 종대가 그라브로 다리에서 궤멸했다. 이때부터 서부의 반군 전체가 「방데인」으로 불렸다. 같은 날 공회는 무장 반군에게 사형을 정했다.

  5. 1793-04-30프랑스
    가톨릭 왕당군 결성

    앙주군과 푸아투·중부군이 합쳐 가톨릭 왕당군이 되었다. 5월 30일 샤티용에 방데 최고회의가 섰다.

  6. 41793-05-05프랑스
    투아르 점령

    케티노의 5,000명이 3만 명에 가까운 방데군에게 항복했다. 반군은 무기와 50만 리브르를 얻었다.

  7. 51793-06-09프랑스
    소뮈르 점령

    방데군이 하루 만에 소뮈르를 점령해 포로 1만 1천 명과 대포 60문을 얻었다. 6월 12일 카틀리노가 총사령관으로 뽑혔다.

  8. 61793-06-29프랑스
    낭트 공격 실패

    샤레트와 카틀리노의 두 군대가 낭트를 공격했으나 조율 부족으로 실패했다. 카틀리노가 총에 맞아 7월 14일 죽었다.

  9. 1793-08-01프랑스
    방데 파괴 법령

    바레르의 보고에 따라 공회가 숲을 베고 수확과 가축을 거두되 여자·아이·노인은 내륙으로 보호하도록 명령했다. 마인츠군이 방데로 보내졌다.

  10. 71793-09-18프랑스
    토르푸 전투

    클레베르의 마인츠군이 델베·레스퀴르·봉샹의 앙주군에 첫 패배를 당했다.

  11. 1793-10-01프랑스
    「방데를 파괴하라」

    바레르의 연설과 함께 두 번째 법령이 채택되었다. 서부군이 창설되고 귀족 출신 장군들이 해임되었다.

  12. 81793-10-17프랑스
    숄레 전투

    방데군 4만 명의 숄레 탈환 시도가 백병전 끝에 실패했다. 델베와 봉샹이 중상을 입었다.

  13. 91793-10-18프랑스
    루아르강 도하, 갈레른 행군 시작

    라로슈자클랭이 전투원과 민간인 6만~10만 명을 생플로랑르비에이에서 강 너머로 옮겼다. 봉샹은 포로 5,000명의 학살을 막고 죽었다.

  14. 101793-11-14프랑스영국
    그랑빌 공격 실패

    영국 함대를 기대하고 항구를 공격했으나 배는 한 척도 없었고 도시는 버텼다. 병사들은 방데로 돌아가기로 했다.

  15. 111793-12-12프랑스
    르망 전투

    마르소와 클레베르의 공격으로 방데군이 궤멸했고 부상자·여자·아이가 학살되었다. 르망과 라발 길에 1만~1만 5천 명이 죽었다.

  16. 121793-12-23프랑스
    사부네 전투

    갈레른 행군의 마지막 전투. 3,000~7,000명이 전사하거나 처형되었고 비뇽 위원회가 포로 661~2,000명을 총살했다.

  17. 131794-01-06프랑스
    누아르무티에, 델베 처형

    1월 3일 섬을 점령한 공화국군이 항복 조건을 어기고 포로 1,200~1,500명을 총살했다. 델베는 안락의자에 앉은 채 처형되었다.

  18. 1794-01-21프랑스
    지옥 종대 출발

    튀로의 열두 개 종대가 동쪽에서, 악소의 여덟 개 종대가 서쪽에서 반란 영토를 가로지르기 시작했다. 1월 19일 지침은 무장 반군과 「그런 경우의 여자·아이」를 총검으로 찌르라고 했다.

  19. 141794-02-08프랑스
    카르노의 승인과 숄레 탈환

    카르노가 튀로의 「조치는 좋고 의도는 순수해 보인다」고 썼다. 같은 날 스토플레가 숄레를 두 시간 동안 되찾아 파리를 경악시켰고, 12일 바레르가 「야만적이고 과장된 집행」을 비난했다.

  20. 151794-02-28프랑스
    레뤼크쉬르불로뉴 학살

    샤레트와 졸리가 코르델리에와 크루자의 종대를 막아 냈으나 공화국군은 교구 주민을 학살했다. 1993년 솔제니친이 이곳에서 200주년 연설을 했다.

  21. 1794-05-13프랑스
    튀로 정직

    반군을 끝내지 못한 튀로가 정직되어 지옥 종대가 끝났다. 폭력은 서서히 줄었다. 넉 달 동안 민간인 2만~5만 명이 죽었다.

  22. 1794-12-02프랑스
    사면 법령

    테르미도르 공회가 한 달 안에 무기를 내려놓는 방데인과 슈앙을 사면했다. 12월 16일 카리에가 파리에서 처형되었다.

  23. 161795-02-17프랑스
    라자주네 조약

    샤레트와 사피노가 사면, 예배의 자유, 10년간의 징집 면제를 얻고 공화국을 승인했다. 스토플레는 거부했다가 5월 2일 생플로랑르비에이에서 강화했다.

  24. 1795-06-24프랑스
    샤레트의 조약 파기

    영국의 상륙에 맞춰 샤레트가 벨빌에서 전쟁 재개를 선언했다. 6월 8일 루이 17세가 탕플에서 죽었다.

  25. 171795-06-27프랑스영국
    키브롱 상륙

    영국 함대가 카르나크에 망명군 3,500명을 내렸고 슈앙 수천 명이 합류했다. 퓌자예와 데르빌리의 지휘권 다툼으로 기습의 이점을 잃었다.

  26. 181795-07-21프랑스영국
    키브롱 항복

    오슈가 팡티에브르 요새를 점령하자 솜브뢰유가 항복했다. 포로 가운데 748~750명이 오레에서 총살되었다.

  27. 1795-10-02프랑스영국
    아르투아 백작의 일되외 상륙

    영국군 5,000명과 망명자 800명을 실은 함대가 일되외섬을 점령했으나 샤레트와 합류하지 못했고, 아르투아 백작은 11월 18일 영국으로 돌아갔다.

  28. 1795-12-26프랑스
    오슈, 대양 연안군 총사령관

    총재정부가 서부의 세 군을 합쳐 오슈에게 맡겼다. 기동 종대와 사면, 예배의 자유로 평정이 진행되었다.

  29. 191796-02-25프랑스
    스토플레 총살

    1월 26일 400명과 다시 봉기한 스토플레가 2월 23~24일 밤 농가에서 붙잡혀 앙제에서 처형되었다.

  30. 201796-03-29프랑스
    샤레트 총살

    3월 23일 라샤보트리 숲에서 붙잡힌 샤레트가 낭트에서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방데 전쟁의 끝으로 여겨진다.

  31. 1796-07-16프랑스
    총재정부의 종전 선포

    슈앙 지도자들의 항복을 받은 뒤 총재정부가 「방데와 슈앙의 끔찍한 전쟁은 꺼졌다」고 선포했고, 7월 30일 계엄이 해제되었다.

관련 인물 22명

공화국군과 국민공회 파견의원11명

관련 용어

출처: 자료 1자료 2자료 3자료 4자료 5자료 6자료 7자료 8자료 9자료 10자료 11자료 12자료 13자료 14자료 15자료 16자료 17자료 18자료 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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