바르샤바 봉기
런던 망명정부의 국내군은 왜 소련군이 눈앞에 온 바르샤바에서 봉기를 시작했고, 그 도시는 어떻게 파괴되었는가?
바르샤바 봉기는 1944년 8월 1일부터 10월 2일까지 독일 점령에 맞서 폴란드 국내군이 수도를 해방하고 소련군보다 먼저 폴란드의 주권을 드러내려 한 무장 봉기다. 독일군의 철수와 소련군의 접근, 런던 망명정부와 소련 사이의 국경 및 국가권력 분쟁이 결정을 재촉했다. 국내군은 도시 일부와 행정망을 장악했지만 독일군의 증원과 민간인 학살에 밀렸고, 서방의 공수 지원은 제한적이었다. 소련군은 비스와강 동쪽에 멈춰 있었으며 9월에야 제한적인 지원을 했다. 63일 뒤 국내군은 항복했고, 독일군은 주민을 추방한 뒤 바르샤바를 체계적으로 파괴했다.
한 나라가 두 제국의 지도 위에 놓이기 전
1939년 8월 23일을 이해하려면 먼저 그날 협상 테이블에 올라간 폴란드가 어떤 국가였는지 보아야 한다. 제2 폴란드 공화국은 1918년 제국들의 분할에서 다시 세워졌고, 1919년 베르사유 조약과 1919~1921년 국경전쟁을 거쳐 독일과 소비에트 러시아 사이에 자리 잡았다. 1939년 인구는 약 3,510만 명이었지만 폴란드인만의 국가는 아니었다. 우크라이나인 13.9퍼센트, 아슈케나지 유대인 10퍼센트, 벨라루스인 3.1퍼센트, 독일인 2.3퍼센트 등이 살았다. 동쪽의 농촌과 서쪽의 산업지대는 경제적으로 크게 달랐고, 국가는 이질적인 제국 유산과 국경을 하나의 군대와 행정으로 묶어야 했다. 훗날 바르샤바에서 싸울 국내군은 이 불안정하지만 국제적으로 승인된 공화국의 국가기관을 전쟁 속에서도 이어 가려는 지하 조직이었다.
정치적으로 이 국가는 자유주의적 의회공화국으로 출발했으나 1926년 5월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의 쿠데타 뒤 산acja, 곧 ‘치유’를 표방한 권위주의 체제로 바뀌었다. 1935년 헌법 이후 대통령 이그나치 모시치츠키, 외무장관 요제프 베크, 군 총사령관 에드바르트 리츠시미그위가 국가를 이끌었다. 정부는 반대파를 체포하고 선거를 조작했으며, 우크라이나인과 벨라루스인, 유대인에 대한 차별도 강화했다. 그러므로 1939년의 폴란드 지도층을 민주주의의 순수한 수호자로 만들 수는 없다. 그러나 그들의 국가주권 방어는 단순한 수사가 아니었다. 독일은 베르사유 질서를 무너뜨리고 단치히와 폴란드 회랑을 요구했으며, 소비에트 국가는 1920년 전쟁의 기억과 동부 국경 문제를 안고 있었다. 어느 한쪽의 보호국이 되는 선택은 독립국가의 소멸을 뜻했다.
1939년 3월 영국과 프랑스가 폴란드 독립을 보장하고, 4월 아돌프 히틀러가 1934년 독일-폴란드 불가침 선언을 파기하면서 위기는 군사적 형태를 갖추었다. 바르샤바는 서방의 지원을 기대했지만, 독일과 맞설 때 소련군이 폴란드 영토를 통과하거나 들어오는 것도 받아들일 수 없었다. 모스크바는 서방이 독일의 공격을 동쪽으로 돌리려 한다고 보았고, 런던과 파리는 소련의 군사력을 불신했다. 그 교착 속에서 8월 23일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와 요아힘 폰 리벤트로프가 독소 불가침조약에 서명했다. 공개된 조약은 10년간 서로를 공격하지 않는다고 했지만, 비밀 추가 의정서는 폴란드를 두 세력권으로 나누었다. 국경선은 아직 전투로 정해지지 않았어도, 폴란드의 존립을 결정할 권리가 이미 폴란드 밖에서 행사된 것이다. 9월의 이중 점령과 망명정부, 지하국가, 국내군의 탄생은 이 문서가 만든 조건에서 출발했다.
결과
봉기는 독일군을 몰아내지 못했고 국내군과 폴란드 민간인에게 재앙적인 사망과 추방을 남겼다. 10월 2일 항복 뒤 독일군은 약 65만 명을 노동수용소로 보내고 도시를 허물었다. 소련군은 1945년 1월 폐허가 된 수도에 들어갔으며, 런던 망명정부가 전후 국가권력을 장악할 가능성은 사라졌다. 봉기를 둘러싼 소련과 서방 동맹국의 충돌은 냉전 형성의 초기 균열이 되었고, 폴란드의 독립 기억은 훗날 폴란드 연대노조와 계엄에서 다시 정치적 언어가 되었다.
연표
- 1939.08.23분할의 전제
독소 불가침조약의 비밀 의정서는 폴란드를 두 세력권으로 나누었고, 1939년 9월 독일과 소련의 점령은 전후 폴란드 문제를 국경과 정권의 문제로 만들었다.
- 1943.04카틴 이후의 단절
카틴 학살 문제가 공개된 뒤 소련은 런던의 폴란드 망명정부와 외교관계를 끊었고, 국내군 지도부는 독일과 소련을 모두 잠재적 적으로 보는 노선을 유지했다.
- 1944.01폭풍 작전
붉은 군대가 전쟁 전 폴란드 국경을 넘자 국내군은 독일군을 후방에서 공격하고 소련군이 도착하기 전에 폴란드 행정을 세우는 폭풍 작전을 시작했다.
- 1944.07.21루블린 위원회
소련의 후원을 받는 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가 루블린에서 세워져 해방 지역의 권력을 주장했고, 런던 망명정부와 국내군은 봉기가 단순한 군사작전이 아니라 주권의 시위라고 판단했다.
- 1944.07.25개시 승인
런던의 망명정부는 국내군 지휘부의 요청에 따라 바르샤바 봉기를 승인했지만, 정확한 시기는 현지 지휘관에게 맡겼다.
- 1944.07.29라디오의 호소와 반격
모스크바의 코시우시코 라디오는 바르샤바 시민에게 독일군을 공격하라고 호소했지만, 바르샤바 동쪽에 도달한 소련 전차부대는 독일 기갑군단의 반격을 받았다.
- 1944.08.01봉기 시작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와 안토니 흐루시치엘의 지휘 아래 국내군은 오후 5시에 공격을 시작해 도심과 여러 구역을 장악했지만, 독일군의 핵심 거점과 중화기는 남아 있었다.
- 1944.08.05볼라의 학살
독일군은 볼라 지구를 탈환하는 과정에서 민간인을 조직적으로 살해했고, 이 대량폭력은 봉기를 군사적 진압을 넘어 주민 전체를 겨냥한 처벌전으로 바꾸었다.
- 1944.08.13고립된 공수
영국과 폴란드 공군은 이탈리아 기지에서 공수했지만 장거리 비행과 독일 방공망 때문에 손실이 컸고, 보급품의 절반보다 적은 양만 국내군이 회수했다.
- 1944.09.13뒤늦은 소련 지원
소련군은 9월 13일부터 자체 공수를 시작했고, 소련 지휘 아래의 폴란드군 일부가 비스와강을 건넜지만, 주력의 도하와 도시 구출로 이어지지 못했다.
- 1944.10.02항복과 추방
국내군은 63일의 전투 끝에 항복했고, 협정은 전투원을 포로로 대우하도록 했지만 독일군은 민간인을 도시 밖으로 내보내고 바르샤바의 조직적인 파괴를 계속했다.
- 1945.01폐허 위의 새 권력
소련군이 1945년 1월 바르샤바에 들어왔을 때 수도는 폐허였고, 소련이 후원하는 폴란드 권력이 전후 국가의 주도권을 확보했다.
관련 인물 1명
출처: Anna M. Cienciala, “The Diplomatic Background of the Warsaw Uprising of 1944: The Players and the Stakes,” The Polish Review, 1994Jennifer Popowycz, “The Allied Responses to the Warsaw Uprising of 1944,” The National WWII Museum, 2021Włodzimierz Borodziej, The Warsaw Uprising of 1944, University of Wisconsin Press, 2006Norman Davies, Rising ’44: The Battle for Warsaw, Penguin Books, 200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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