얄타 회담과 포츠담 회담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전후 세계는 이미 나뉘어 있었는가?
1945년 2월 크림반도의 휴양지 얄타에서 스탈린·루스벨트·처칠이, 7월과 8월 베를린 교외 포츠담에서 스탈린·트루먼·애틀리가 마주 앉아 전후 세계의 틀을 짰다. 얄타에서는 독일의 분할 점령과 배상, 폴란드의 국경과 정부 구성,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안보리 거부권을 포함한 유엔 창설 방안이 합의되었고, 소련은 남사할린·쿠릴의 확보를 조건으로 대일 참전을 약속했다. 포츠담에서는 독일의 비무장화·탈나치화 원칙과 폴란드의 서부 국경 실무가 다루어졌다. 회담장 밖에서는 이미 다른 시대가 시작되고 있었다. 트루먼이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렸을 때 스탈린은 무표정했다. 정보망을 통해 원폭을 이미 알고 있었기 때문이다.
1945년 2월, 세 사람이 크림반도로 간 이유
1945년 2월 4일, 얄타에서 8일간의 회담이 시작되었을 때 제2차 세계대전의 유럽 전선은 이미 종착점을 향해 달리고 있었다. 독일은 아직 항복하지 않았지만, 더 이상 승리할 가능성은 존재하지 않았다. 소련군은 1월 12일 시작된 비스와-오데르 공세로 3주도 안 되어 바르샤바, 크라쿠프, 포즈난을 점령하고 오데르 강변에 도달했다. 게오르기 주코프 원수의 제1벨라루스 전선군은 베를린에서 불과 65km 떨어진 곳까지 진격해 있었고, 이반 코네프 원수의 제1우크라이나 전선군은 실레지아의 산업 지대를 장악했다. 서방에서는 1944년 12월 독일의 아르덴 반격(벌지 전투)이 1월 말까지 격퇴되었고, 연합군은 아직 라인 강을 건너지 못한 상태였다.
얄타는 '빅 3'의 두 번째 정상회담이었다. 첫 회담인 1943년 11월의 테헤란 회담은 군사 협조(특히 노르망디 상륙 작전의 일정과 규모)에 집중된 자리였다. 테헤란에서 세 사람은 독일의 무조건 항복과 분할 점령 원칙에 합의했지만, 구체적인 전후 질서는 아직 먼 이야기였다. 스탈린은 테헤란에서 루스벨트에게 대일 참전을 구두로 약속했으나, 대가는 명시되지 않았다.
얄타로 가는 15개월 사이에 전황은 근본적으로 바뀌었다. 붉은 군대는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의 승리 이후 멈추지 않고 서진하여 1944년 여름 바그라티온 작전으로 벨라루스 전역의 독일 중부집단군을 궤멸시켰고, 가을에는 루마니아·불가리아·유고슬라비아를 독일의 궤도에서 이탈시켰다. 소련군이 이미 동유럽 대부분을 군사적으로 장악했다는 사실이 얄타의 모든 협상을 규정한 가장 근본적인 조건이었다. 미국 대표단의 제임스 번스가 후일 기록했듯, “러시아인들에게 무엇을 허용할 것인가가 아니라, 우리가 러시아인들에게서 무엇을 얻어낼 수 있을 것인가”가 문제였다.
회담의 또 다른 무대는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이미 준비되어 있었다. 영국 총리 윈스턴 처칠은 루스벨트 없이 스탈린을 만나 동남유럽의 영향력 배분을 두고 이른바 '백분율 협정'을 논의했다. 처칠이 종이쪽지에 적어 건넨 수치는 루마니아에서 소련 90%, 그리스에서 영국 90%, 유고슬라비아와 헝가리에서 각각 50 대 50이라는 내용이었다. 처칠은 “수백만 인민의 운명을 이토록 건성으로 처리하다니 냉소적으로 보일 것”이라며 종이를 태우자고 했지만, 스탈린은 보관하라고 충고했다. 이 협정은 공식화된 적 없고 얄타 의제에도 오르지 않았으나, 루마니아와 불가리아에서 소련의 우위를 사실상 인정하는 논리가 이미 작동하고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독일 점령의 기본 틀도 얄타 이전에 정해져 있었다. 런던에 설치된 유럽 자문 위원회(EAC)는 1944년 9월 12일, 독일을 3개 점령 구역으로 분할하고 베를린을 별도로 관리하는 의정서에 서명했다. 프랑스에 별도 구역을 할당하는 문제와 배상 액수는 얄타로 넘어왔지만, 점령의 큰 그림은 이미 합의된 상태였다.
얄타에 모인 세 사람은 저마다 다른 압박을 안고 있었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미국 대통령은 1944년 11월 네 번째 임기에 당선된 지 석 달이 지난 시점이었고, 건강은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회담 두 달 뒤인 4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하게 될 그의 상태는 참모들에게도 분명했다. 루스벨트의 의제에서 가장 시급한 것은 소련의 대일 참전이었다.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일본 본토 침공에 미군 사상자가 100만 명에 이를 수 있다고 추산했고, 관동군을 만주에서 묶어둘 소련의 역할은 그 추산을 낮추는 열쇠였다. 두 번째 과제는 유엔 창설의 마무리였다. 덤버턴오크스 회의(1944년 8~10월)에서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문제가 타결되지 못한 상태였고, 루스벨트는 자신이 구상한 전후 집단안보 체제를 완성하기 위해 스탈린과의 직접 합의가 필요했다.
처칠은 폴란드의 장래에 가장 민감했다. 영국은 1939년 폴란드의 독립을 보장하며 참전했고, 런던에는 망명정부가 자리 잡고 있었다. 그러나 붉은 군대가 이미 폴란드 전역을 장악했고, 소련은 루블린에 임시정부를 세운 상태에서 처칠의 협상력은 제한적이었다. 그가 10월 모스크바에서 스탈린과 세력권 협의를 먼저 시도한 것 자체가 이 한계를 인식하고 있었음을 보여준다.
스탈린의 위치는 가장 강했다. 소련은 독일과의 전쟁에서 2천만 명 이상의 사망자를 냈고 국토는 황폐화되었지만, 유럽 최강의 육군을 보유하고 있었고 그 군대는 이미 베를린 문턱에 서 있었다. 스탈린은 전후 안보의 핵심 조건으로 소련 국경의 서쪽 이동과 동유럽에 우호적인 정부(그에게 '우호적'이란 통제 가능한 정부를 의미했다)의 수립을 요구했다. 동시에 미국의 경제 원조와 독일 배상금에 접근할 수 있는 협력 관계를 유지해야 하는 이중의 과제도 안고 있었다.
회담 장소 선정 자체가 세 사람의 역학을 보여주었다. 루스벨트는 지중해의 중립지를 원했으나, 스탈린은 의사들이 긴 여행을 금했다며 크림반도를 고집했다. 루스벨트와 처칠은 몰타에서 사전 조율을 거친 뒤 소련 땅으로 날아갔다. 이미 1943년 테헤란에서 소련 대사관의 도청 위험을 경험한 바 있었지만, 이번에는 스탈린이 정한 텃밭에서 협상이 진행될 수밖에 없었다.
8일간의 식탁: 폴란드, 배상, 그리고 극동의 비밀 각서
얄타 회담은 1945년 2월 4일부터 11일까지 리바디야 궁전에서 8차례의 본회의로 진행되었다. 소련 대표단은 유수포프 궁전, 미국은 리바디야, 영국은 보론초프 궁전에 머물렀다. 프랭클린 D. 루스벨트는 이미 건강이 심각하게 악화된 상태였다: 주치의 로스 매킨타이어 제독은 혈압 260/150을 기록했고, 참모총장 윌리엄 리히 제독은 「내가 본 중 가장 늙고 지쳐 보였다」고 기록했다. 루스벨트는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다.
폴란드 문제는 회담 시간의 약 4분의 1, 1만 단어의 발언을 소비한 최대 쟁점이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은 폴란드 동부 국경을 1919년 영국 외무장관 커즌 경이 제안한 선, 즉 커즌 선으로 확정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이는 전간기 폴란드 영토의 48%를 소련에 넘기는 것이었다. 스탈린은 이렇게 말했다: 「러시아 국민에게 폴란드 문제는 명예의 문제일 뿐 아니라 안보의 문제입니다. 역사적으로 폴란드는 적이 러시아로 통과한 회랑이었습니다. 지난 30년 동안 두 번이나 적이 이 회랑을 통과했습니다.」 서방은 붉은군대가 이미 폴란드 전역을 점령하고 있었기 때문에 커즌 선을 수용했고, 일부 지역에서 5~8킬로미터만 폴란드 쪽으로 조정했다. 폴란드는 독일 영토로 서쪽에서 보상받기로 했다.
정부 구성은 더 격렬했다. 윈스턴 처칠은 영국이 1939년 폴란드의 독립을 위해 참전했다는 점을 내세우며 런던 망명정부의 참여를 요구했다. 스탈린은 1944년 7월 소련이 수립한 루블린 위원회(폴란드 민족해방위원회)를 핵심으로 해야 한다고 맞섰다. 타협은 루블린 임시정부를 「폴란드 국내외의 민주적 지도자들을 포함하여 더 넓은 민주적 기초 위에서」 재편하고, 「보통선거와 비밀투표에 기초한 자유롭고 구속 없는 선거」를 약속하는 것이었다. 그러나 리히 제독이 루스벨트에게 지적했듯, 이 문구는 「러시아가 기술적으로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릴 수 있을 정도로 탄력적」이었다. 루스벨트는 이렇게 답했다: 「알아, 빌. 하지만 지금 폴란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 몰로토프는 스탈린에게 이 문구가 소련의 계획을 방해할 수 있다고 우려했고, 스탈린은 「신경 쓰지 마. 우리 방식으로 할 거야」라고 답했다고 전해진다.
배상 문제도 회담을 거의 깨뜨릴 뻔했다. 스탈린은 총액 200억 달러, 그중 절반을 소련에 할당할 것을 요구했는데, 이는 독일이 소련 영토에 초래한 막대한 파괴를 반영한 액수였다. 루스벨트는 원칙적으로 동조했으나, 처칠은 제1차 세계대전 이후 배상이 독일을 불안정하게 만들었던 기억을 들어 고정 액수에 반대했다. 최종 타협은 모스크바에 배상 위원회를 설치하고 200억 달러를 「논의의 기초」로 삼는 것이었다. 영국 대표단은 어떤 숫자도 명시되어서는 안 된다는 입장을 고수했다. 실제로 소련은 자국 점령 지역에서 일방적으로 배상을 추출했고, 서방은 이후 자기 구역에서 배상 개념을 포기했다.
유엔 창설 방안은 상당한 합의를 보았다. 안전보장이사회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즉 「대국 만장일치」 원칙이 확정되었고, 회의 소집일은 1945년 4월 25일 샌프란시스코로 정해졌다. 스탈린은 소련의 16개 구성 공화국 전부의 유엔 가입을 요구했으나, 루스벨트와 처칠은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 두 곳만 동의했다. 가장 큰 희생을 치른 공화국들이라는 명분이었다.
회담의 가장 극적인 결과는 본회의장 바깥에서 이루어졌다. 2월 8일, 루스벨트와 스탈린은 처칠이 배석하지 않은 자리에서 극동에 관한 비밀 협정을 체결했다. 소련은 독일 항복 2~3개월 후 대일 참전을 약속했고, 그 대가로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 획득, 다롄항의 국제화(소련의 우월적 이익 보장), 뤼순항의 해군기지 조차, 만주 철도의 중소 공동 운영을 확보했다. 몽골의 현상 유지도 명시되었다. 이 합의는 중국 국민당 정부와 협의해야 한다는 단서가 달렸지만, 장제스는 통보받지 못했다.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조언에 따라 「동의를 확보할 조치를 취하기로」 했을 뿐이었다. 이 비밀 의정서는 1947년이 되어서야 존재가 공개되었다.
2월 11일 정오, 3국 외무장관인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앤서니 이든이 의정서에 서명했다. 루스벨트는 의회에 귀환해 「크림에서 평화의 세계로 가는 길을 시작했다는 확고한 믿음을 갖고 왔다」고 보고했다. 몇 주 안에 그 믿음은 깨지기 시작했다.
샌프란시스코: 50개국이 거부권과 맞서다
1945년 4월 25일, 50개국 대표단 850명이 샌프란시스코 오페라하우스에 모였다. 얄타에서 소련·미국·영국이 합의한 대로 유엔 헌장을 작성하기 위한 자리였다. 그러나 2개월 뒤 마지막 서명식까지, 이 회의는 거부권이라는 하나의 문제를 두고 강대국과 약소국이 격돌한 전장이었다.
밑그림은 이미 있었다. 1944년 가을 워싱턴의 덤바턴오크스 저택에서 4대 강국(미·영·소·중)이 작성한 제안서가 그것이었다. 문제는 안전보장이사회의 투표 방식이었다. 얄타에서 루스벨트와 처칠, 스탈린은 상임이사국 5개국이 실질적 사항에 거부권을 행사하되 당사국은 기권한다는 이른바 「얄타 공식」에 합의했다. 그러나 그 합의문은 절차적 사항과 실질적 사항의 경계를 명확히 긋지 않았고, 바로 그 틈새에서 싸움이 시작되었다.
소련의 그로미코 대사는 안건의 토론 자체도 상임이사국 만장일치가 필요하다는 입장이었다. 즉 안보리가 어떤 분쟁을 의제로 올리는 것조차 거부권의 대상이라는 해석이었다. 이에 호주의 에바트 외무장관을 필두로 한 중소국 대표들이 반발했다. 에바트는 주권평등을 내세우며 "단 한 국가가 다른 모든 국가의 발언권을 봉쇄할 수 있다면 이 기구는 국제연맹보다 나을 것이 없다"고 몰아붙였다. 네덜란드, 콜롬비아, 뉴질랜드, 칠레 등도 가세해 수백 건의 수정안이 쏟아졌다.
교착은 6월 초 모스크바에서 풀렸다. 해리 홉킨스가 스탈린을 찾아가 유럽 전선 종전을 하루 앞둔 6월 6일 이 문제를 제기했다. 스탈린은 마치 처음 듣는 문제인 양 몰로토프에게 설명을 요구하더니, 잠시 후 "그건 사소한 문제"라며 토론 단계에는 거부권을 적용하지 않겠다고 양보했다. 6월 7일 그로미코가 입장을 철회했고, 다음날 「뉴욕 타임스」 1면은 "거부권 논쟁 종결: 소련이 양보, 분쟁 토론 허용"이라 보도했다.
거부권만 있었던 것은 아니다. 대표단 구성 자체가 얄타의 또 다른 산물이었다. 소련의 우크라이나·벨라루스 공화국이 별도 대표로 참석했는데, 이는 루스벨트가 스탈린의 초기 요구(소련 16개 공화국 모두 참여)를 깎아내는 대가로 수용한 것이었다. 중남미 국가들은 이에 반발하며, 추축국에 우호적이었던 아르헨티나를 받아들이지 않으면 백러시아의 참여도 인정할 수 없다고 맞섰다. 결국 양측 모두 초청되는 것으로 절충되었다. 진짜 빈자리는 폴란드였다. 종전 직전 얄타에서 합의된 새 정부 구성이 지연되면서, 연합국 선언의 원서명국인 폴란드는 헌장 서명란에 공백으로 남았다. 폴란드 대표가 실제로 서명한 것은 10월 15일이었다.
6월 20일, 에바트·그로미코·스테티니우스 3인 소위원회가 총회의 토론 권한을 명문화하는 타협안을 도출하면서 마지막 장애물이 제거되었다. 6월 25일, 오페라하우스 본회의에서 핼리팩스 경이 표결을 요청하자 대표단 전원이 기립했다. 만장일치로 유엔 헌장이 통과된 순간이었다. 이튿날 참전용사기념관 강당에서 50개국이 서명했고, 트루먼 대통령이 "여러분은 전쟁 그 자체를 상대로 승리를 거두었다"고 축사했다. 루스벨트는 이 광경을 보지 못했다. 회의 개막 13일 전, 4월 12일에 사망했기 때문이다. 헌장은 그해 10월 24일 발효되었고, 이날은 지금도 「유엔의 날」로 기념된다.
포츠담: 테이블에 앉은 얼굴은 바뀌었고, 붉은군대가 세운 국경은 남았다
얄타에서 포츠담까지 다섯 달 사이에 연합국 정상들의 면면은 절반이 바뀌었다. 루스벨트는 4월 12일 뇌출혈로 사망했고, 부통령에서 대통령이 된 트루먼은 얄타 합의의 세부조차 브리핑받지 못한 상태였다. 처칠은 7월 5일 총선 결과를 기다리며 회담장에 왔다가 7월 26일 패배가 확정되자 런던으로 떠났고, 노동당의 애틀리와 새 외무장관 베빈이 영국 대표 자리를 이어받았다. 17일간의 회담 내내 한 자리를 지킨 정상은 스탈린뿐이었다.
독일 배상 문제는 첫날부터 충돌했다. 소련은 얄타에서 루스벨트가 구두로 수용한 200억 달러 총액(그중 절반은 소련 몫)을 고수했으나, 트루먼과 번스 국무장관은 베르사유 조약의 전철을 밟지 않겠다며 거부했다. 번스가 제시한 절충안은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구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은 서부 지구 산업설비의 15퍼센트를 식량·석탄과 교환하고 10퍼센트를 무상으로 추가 이전받는다는 것이었다. 소련이 서부 지구 전체에 대한 배상 청구권을 포기하는 대가였다. 이른바 '번스 플랜'은 회담 후반부에 가까스로 타결되었으나, 소련 점령지구에서는 이미 공장 전체가 소련으로 실려 가는 철거가 한창이었다.
폴란드 서부 국경을 둘러싼 논쟁은 더 격렬했다. 스탈린은 오데르-서나이세 강 이동의 독일 영토를 폴란드에 넘기고 그 지역 독일인 주민을 추방하는 것을 기정사실로 내밀었다. 붉은군대가 이미 그 땅을 폴란드 행정에 넘긴 후였다. 처칠은 폴란드가 동쪽에서 소련에 넘긴 영토보다 서쪽에서 더 많은 땅을 요구한다는 '보상 이론'을 들고 반발했고, 트루먼도 배상 문제와 국경을 연계하려 했다. 결국 서방 측은 오데르-나이세 선을 '평화조약까지의 잠정' 경계로 인정했지만, 이 잠정은 1990년까지 45년간 유지되었다. 회담은 쾨니히스베르크와 주변 지역을 소련에 귀속시키는 데에도 원칙적으로 합의했다. 이 도시는 1946년 칼리닌그라드로 개명된다.
회담의 제도적 유산은 외무장관회의였다. 5대국 외무장관으로 구성된 이 기구는 이탈리아·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핀란드와의 평화조약을 기초하고, 장차 독일 평화협정을 준비하는 임무를 맡았다. 포츠담 선언은 7월 26일 미국·영국·중국 명의로 발표되어 일본에 무조건 항복을 요구했고, 소련은 아직 대일 중립 상태였기에 서명하지 않았다. 트루먼이 7월 24일 스탈린에게 '특별한 파괴력을 지닌 신형 무기'를 넌지시 알린 장면은 회담의 상징적 순간으로 남았지만, 스탈린은 소련 정보망을 통해 맨해튼 계획을 이미 파악하고 있었고 표정 하나 바꾸지 않았다. 회담 내내 트루먼의 일기에 적힌 '그는 정직하지만 지독히 영리하다'는 평가는, 포츠담이 전시 동맹의 종점이자 냉전의 출발점이었다는 사실을 한 문장으로 요약한다.
1945년 8월 8일, 모스크바 오후 5시: 전쟁이 두 개의 막을 내리다
얄타 비밀 의정서는 소련이 독일 항복 후 2~3개월 안에 대일 참전한다고 못 박았다. 독일은 5월 8일에 항복했다. 3개월이면 8월 8일이다. 스탈린은 그 기한을 정확히 지켰다. 그러나 그날이 오기까지의 90일은, 태평양 전쟁을 누가 어떻게 끝낼 것인지를 둘러싼 미국과 소련의 숨 가쁜 경주였다.
1945년 5월 말, 해리 홉킨스를 통해 스탈린은 트루먼에게 "8월 8일까지 준비를 마치겠다"고 전했다. 이 시한을 들은 미국 측은 복잡한 심정이었다. 참모본부는 소련 참전이 일본의 항복을 앞당겨 미군 희생을 줄일 것이라고 봤지만, 트루먼과 번스 국무장관은 소련이 아시아로 세력을 확장하는 것을 경계했다. 7월 16일 앨라모고도에서 원자폭탄 실험이 성공하자 트루먼의 계산은 바뀌었다. 이제 소련 없이도 일본을 굴복시킬 수 있다고 판단한 것이다. 포츠담 회담 기간 내내 트루먼은 스탈린에게 원폭에 대해 "파괴력이 특별한 신형 무기"라고만 슬쩍 흘렸다. 스탈린은 무표정으로 들었지만, 이미 맨해튼 계획에 침투한 소련 첩보망을 통해 모든 것을 알고 있었다.
트루먼이 더 노골적으로 취한 조치는 포츠담 선언이었다. 7월 26일 발표된 이 대일 최후통첩은 미국·영국·중국 3국 명의였고, 소련은 서명국에서 배제되었다. 스탈린이 "서명국에 끼워 달라"고 요청했지만 번스는 거절했다. 문제는 일본이었다. 도고 시게노리 외상은 포츠담 선언에 소련 서명이 없는 것을 보고 마지막 희망을 모스크바 중재에 걸었다. 스즈키 내각은 7월 28일 선언을 "묵살"한다고 발표했고, 모스크바 주재 사토 나오타케 대사를 통해 종전 중재를 계속 타진했다. 사토는 본국에 "추상적인 문구로는 극도로 현실적인 소련을 움직일 수 없다"며 무조건 항복을 사실상 권고했지만, 도고는 "그것만은 받아들일 수 없다"고 답했다.
8월 6일 아침, 히로시마에 원자폭탄이 투하되었다. 크렘린은 충격에 빠졌다. 프라우다는 8월 7일자에 히로시마를 한 줄도 보도하지 않았고, 8월 8일자에야 트루먼 성명을 지면 아래쪽에 아무 논평 없이 실었다. 스탈린은 8월 6일 하루 동안 크렘린 사무실에 아무도 들이지 않았다. 전쟁이 끝나기 전에 소련이 참전하지 못할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엄습했다. 그런데 예상과 달리, 일본은 히로시마 다음 날에도 사토에게 "몰로토프 면담을 긴급히 잡으라"고 지시했다. 모스크바 중재에 대한 일본의 집착은 여전했다.
스탈린은 즉시 움직였다. 8월 7일 오후 4시 30분, 바실렙스키 극동군 총사령관에게 공격 개시를 8월 11일에서 8월 9일 자정(치타 시간 기준)으로 48시간 앞당기라고 명령했다. 바실렙스키는 그날 밤 3개 전선과 태평양함대에 작전 개시 명령을 하달했다. 이튿날인 8월 8일 오후 5시(모스크바 시간), 몰로토프는 마침내 크렘린 외무인민위원부로 사토를 불러들였다. 사토가 인사를 건네자마자 몰로토프는 읽고 있던 선전포고문을 계속 읽어 내려갔다. "히틀러 독일의 패배와 항복 후에도 일본은 전쟁을 계속하려는 유일한 강대국으로 남았다." "연합국은 소련 정부에 일본의 침략에 대한 전쟁에 참가할 것을 제안했다." "소련 정부는 8월 9일부터 스스로를 일본과의 전쟁 상태에 있다고 간주한다." 사토가 대사관으로 돌아와 암호 전문을 보내려 했을 때는 이미 통신이 두절된 뒤였다. 1시간도 지나지 않아 만주 국경 전역에서 소련군 150만 명이 진격을 시작했다.
소련 만주 전략 공세 작전은 8월 9일부터 3개 전선에서 동시에 개시되었다: 자바이칼 전선(말리놉스키), 제1극동 전선(메레츠코프), 제2극동 전선(푸르카예프). 사막과 대싱안링 산맥을 넘은 기갑부대, 아무르강과 우수리강을 도하한 보병, 한반도 북부 항구에 상륙한 함대가 5,000킬로미터의 전선에서 일제히 관동군을 포위했다. 불과 2주 만에 소련군은 84,000명의 일본군을 사살하고 640,000명을 포로로 잡았다. 소련 측 전사자는 12,031명이었다.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도 순차적으로 점령되었다.
8월 15일, 히로히토 천황은 항복 방송을 내보냈다. 쓰요시 하세가와의 연구가 설득력 있게 보여주듯, 일본의 항복 결정에는 히로시마·나가사키보다 소련의 참전이 더 결정적이었다. 원폭은 이미 겪어온 도시 폭격의 연장선으로 인식된 반면, 중립국 소련의 배신과 만주 전선의 순식간 붕괴는 천황제 유지라는 마지막 희망마저 무너뜨렸기 때문이다. 스탈린은 일본이 항복한 후에도 공세를 멈추지 않았다. 만주의 주요 도시와 뤼순·다롄 항구를 최대한 확보하라고 지시하며 "군사 작전을 계속하라"고 명령했다. 얄타에서 약속받은 전리품은 문서가 아니라, 붉은군대가 그 위에 서 있었기 때문에 확보된 것이었다.
얄타가 유럽을 나누었는가, 아니면 이미 나뉜 유럽을 문서로 남겼을 뿐인가
얄타에 대한 기억은 회담 종료 직후부터 갈렸다.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에서 "크림반도에서 평화의 세계로 가는 길을 시작했다는 확신을 가지고 돌아왔다"고 보고했지만, 그 확신은 몇 주를 넘기지 못했다. 3월 21일, 주소 미국 대사 애버렐 해리먼은 루스벨트에게 전문을 보냈다. "소비에트 계획은 전체주의의 확립이며, 우리가 아는 개인의 자유와 민주주의를 종식시키는 것임을 분명히 깨달아야 합니다." 나흘 뒤 루스벨트는 "애버렐이 옳다"고 인정했다. 그리고 그로부터 나흘 뒤, NKVD는 모스크바로 초청된 폴란드 비공산계 지도자 16명을 전원 체포해 굴라크로 보냈다. 임시정부 협상에 참여하라는 초청 자체가 함정이었다.
얄타 합의의 핵심 약속은 종이 위에서도 이미 모순을 품고 있었다.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은 피해방국 국민들이 "자유선거를 통해 국민의 의사에 책임을 지는 정부를 가장 빠른 시일 내에 수립"할 것을 천명했지만, 동시에 폴란드에 관해서는 소련이 이미 바르샤바에 세운 공산계 임시정부를 "보다 폭넓은 민주적 기반 위에서" 재구성하는 것으로 절충했다. 이 언어의 모호함은 의도된 것이었다. 루스벨트의 비서실장 윌리엄 리히 제독은 합의문을 읽고 이렇게 말했다. "이것은 너무 신축성이 있어서 러시아인들이 기술적으로 한 번도 위반하지 않으면서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쭉 늘여 갈 수 있다." 루스벨트가 답했다. "압니다, 빌. 하지만 지금 폴란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입니다." 이 대화 한 토막은 얄타를 둘러싼 역사 논쟁의 축소판이다.
얄타가 동유럽을 스탈린에게 '넘겨주었다'는 서사, 즉 '얄타 신화'는 1940년대 후반 공화당이 루스벨트의 유산을 공격하면서 미국 국내 정치의 무기가 되었고, 폴란드·발트 3국·체코 등에서는 서방의 배신이라는 집단 기억으로 뿌리내렸다. 이 서사의 핵심은 얄타에 실질적인 선택지가 있었다는 전제다. 그러나 이에 맞서는 역사학계의 반론은 세 가지 층위에서 전개된다.
첫째, 군사적 현실이다. 1945년 2월 붉은군대는 이미 폴란드 전역과 루마니아·불가리아·헝가리 대부분을 점령하고 베를린 65km 앞까지 진출해 있었다. 동유럽의 운명을 결정한 것은 얄타의 협상 테이블이 아니라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의 전장이었다. 둘째, 얄타 이전의 외교적 선례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에서 처칠과 스탈린은 이미 발칸 반도의 영향력 배분에 관한 백분율 협정을 비밀리에 주고받았다. 루마니아는 소련 90%, 그리스는 영국 90% 식의 계산이 오간 이 쪽지가, 얄타보다 4개월 앞서 유럽의 분할선을 그렸다. 셋째, 문서의 내용 자체다. 얄타 협정은 자유선거를 명시했고, 소련은 이를 문서로 서명했다. 지켜지지 않았지만, 합의된 바를 합의되지 않은 것처럼 서술하는 것은 사후적 서사일 뿐이다. 몰로토프는 훗날 스탈린에게 "얄타 합의의 문구가 우리 계획을 방해할까 우려된다"고 말했고, 스탈린은 답했다. "걱정 마. 나중에 우리 식으로 하면 돼."
1990년대 소련 기록물 개방 이후 포스트-수정주의 역사학이 밝혀낸 그림은 더 복잡하다. 존 루이스 개디스는 1997년 저서 『이제 우리는 안다』에서 새 기록물을 검토한 뒤, 초기 저작의 양비론적 입장에서 물러나 스탈린의 책임이 더 컸다고 결론 내렸다. 스탈린은 타협할 여유가 트루먼보다 컸음에도 이념적·제국적 팽창을 선택했다는 것이다. 반면 소련 측 기록에 접근한 블라디슬라프 주보크와 콘스탄틴 플레샤코프 같은 연구자들은 소련 지도부가 서방의 포위를 진심으로 두려워했고, 동유럽 지배를 방어적 조치로 인식했음을 보여주었다.
결국 얄타-포츠담 체제가 남긴 것은 세 가지다. 첫째, 승인된 국경들, 즉 독일-폴란드 국경의 오데르-나이세 선, 소련의 서부 국경 확장, 발트 3국의 소련 병합은 냉전 기간 내내, 그리고 1989년 이후에도 대체로 그대로 유지되었다. 독일이 통일되었지만 국경은 재협상되지 않았다. 체코슬로바키아가 분리되었지만 양국의 경계는 전후 그대로였다. 둘째, 「해방된 유럽」의 약속과 소비에트 현실 사이의 간극은 냉전의 도덕적 서사를 처음부터 규정했다. 셋째, '강대국이 약소국의 운명을 결정한다'는 얄타적 원리는 그 원리가 폐기되어야 한다는 반작용을 낳았고, 이 반작용이 1989년 이후의 유럽 질서, 즉 주권 평등, 자유선거, 영토 보전의 출발점이 되었다.
1989년 12월 몰타에서 조지 H. W. 부시와 고르바초프가 만나 냉전의 종언을 선언했을 때, 유럽인들은 이를 두고 '얄타에서 몰타까지'라는 말을 만들었다. 그러나 몰타가 폐기한 것은 얄타의 국경이 아니라 얄타의 방식, 즉 강대국들끼리 식탁에서 유럽의 지도를 그리고 그 위에 사는 사람들의 의사를 묻지 않는 방식이었다.
합의된 것, 합의되지 않은 것, 그리고 1989년까지 살아남은 것
얄타와 포츠담이 실제로 확정한 것은 몇 가지 구체적인 합의였다. 독일의 분할 점령과 베를린의 사중 관리, 안보리 상임이사국의 거부권을 골자로 한 유엔 창설 구상, 소련의 대일 참전과 그 대가로 남사할린·쿠릴 열도를 확보하는 비밀 각서. 이 세 틀은 1945년부터 냉전기 내내 실제로 작동했다. 반면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과 폴란드 자유선거 약속은 처음부터 집행력이 없는 문서였다. 루스벨트의 비서실장 윌리엄 리히 제독은 폴란드 합의문을 두고 "러시아인들은 기술적으로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이 조항을 늘릴 수 있다"고 평했고, 루스벨트도 "빌, 지금으로선 폴란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라고 인정했다. 몰로토프가 협상 과정에서 선언의 구속력을 약화시키는 수정 문구를 삽입했고, 스탈린은 회담 직후 몰로토프에게 "괜찮다. 우리는 우리 방식으로 할 것이다"라고 말한 것이 소련 쪽 기록에 남아 있다.
그래서 얄타 논쟁은 결국 두 질문으로 수렴한다. 첫째, 루스벨트가 더 버텼다면 동유럽의 운명이 달라졌을 것인가. 둘째, 얄타는 유럽을 분할했는가, 아니면 이미 분할된 유럽을 종이에 옮겼을 뿐인가. 냉전기 미국 보수 진영은 전자를 전제로 루스벨트를 '매국' 또는 '순진무구'로 공격했고, 동유럽의 망명 정치인들과 지식인들은 얄타를 '서구의 배신'이라는 틀로 기억했다. 반면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학자들(다이앤 클레멘스, 프레이저 하버트, 세르히 플로히 등)은 소련 측 자료를 검토하며 다른 결론을 냈다. 플로히의 『얄타: 평화의 대가』(2010)는 얄타가 서방의 외교적 패배였다는 통념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붉은군대가 이미 점령한 영토에서 서방이 얻을 수 있었던 최대치가 바로 얄타의 문건이었다고 주장한다. 하버트는 『얄타 1945: 갈림길에 선 유럽과 미국』(2010)에서 얄타가 이후 모든 것을 결정했다는 '상징적 얄타' 신화를 해체하고, 1945년 봄에 걸친 연속된 외교적 상호작용 속에서 전후 질서가 형성되었음을 보여준다.
1989년 베를린 장벽 붕괴와 1991년 소련 해체는 이 논쟁에 결정적 증거를 하나 추가했다. 얄타 체제가 그렇게 쉽게 무너졌다면, 애초에 얄타가 그 체제를 '만들었다'고 말할 수 있는가. 부시와 고르바초프의 몰타 회담(1989년 12월)은 흔히 '얄타에서 몰타까지'라는 대구로 서술되지만, 정작 몰타에서는 어떤 조약도 서명되지 않았다. 냉전 종식은 새로운 문서가 아니라 오래된 문서의 집행력이 사라졌음을 확인한 사건이었다. 오늘날 학계의 합의는 얄타가 냉전의 원인이라기보다 냉전이 시작된 뒤 가장 편리한 설명 도구가 되었다는 쪽으로 기운다. 이 합의는 얄타의 무죄를 입증하지 않는다. 다만 이렇게 말할 수는 있다. 1945년 2월 크림반도에서 세 사람이 나누었던 것은 유럽이 아니라 유럽에 대한 이야기였고, 진짜 유럽은 이미 붉은군대의 진지와 서방 연합군의 상륙 지점 사이에 놓여 있었다고.
누가 역사를 썼는가: 정통주의, 수정주의, 그리고 기록보관소가 열린 뒤
얄타만큼 역사가들의 평가가 극단으로 갈린 회담도 드물다. 냉전기 미국에서 얄타는 토머스 A. 베일리의 『미국, 러시아와 맞서다』(1950)와 허버트 페이스의 『처칠, 루스벨트, 스탈린』(1957) 같은 정통주의 저작들에 의해 '병든 루스벨트가 스탈린에게 동유럽을 넘겨준 자리'로 서술되었다. 이 서사는 1950년대 공화당의 정치 공세와 맞물려 '얄타 신화'로 굳어졌고,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의 대선 공약에도 등장할 정도로 미국 여론에 깊이 파고들었다. 1959년 윌리엄 애플먼 윌리엄스의 『미국 외교의 비극』으로 촉발된 수정주의는 시선을 돌렸다. 개브리얼 콜코와 조이스 콜코의 『권력의 한계』(1972)는 전후 질서를 소련 팽창주의가 아니라 전 세계 시장을 향한 미국의 '열린 문' 정책에서 비롯된 것으로 읽었다. 개르 앨퍼로비츠의 『원자 외교』(1965)는 히로시마·나가사키 원폭 투하가 이미 패배한 일본을 겨냥한 것이 아니라 소련을 향한 신호였다고 주장했다.
1970년대 존 루이스 개디스가 『미국과 냉전의 기원』(1972)으로 '포스트수정주의'를 열며 양 진영에 책임을 분배하는 균형을 시도했지만, 결정적 전환은 1991년 소련 기록보관소 개방에서 왔다. 개디스 자신이 『우리는 이제 안다』(1997)에서 기록보관소 증거를 종합한 결론은 그가 이전에 견지했던 포스트수정주의 균형을 뒤집는 것이었다. "지리, 인구, 전통이 이런 결과에 기여했지만 결정하지는 않았다. 인과의 사슬을 만든 것은 상황에 예측 불가능하게 반응한 인간들이었고, 그 사슬을 제자리에 고정시킨 것은 특히 스탈린이었다." 스탈린이 얄타에서 약속한 자유선거를 고의로 이행하지 않았으며, 서방 지도자들이 상대했던 것보다 훨씬 넓은 재량권을 국내에서 누렸다는 점이 새 증거로 입증되었다는 것이다.
그러나 기록보관소가 닫아준 문만큼 열어준 문도 많았다. 세르히 플로히는 2010년 저서 『얄타: 평화의 대가』에서 러시아 기록보관소를 정밀히 검토한 결과, 루스벨트의 건강이 협상에 실질적 영향을 미쳤다는 증거는 발견되지 않았다고 밝혔다. 오히려 플로히가 주목한 것은 세 정상이 각자 전혀 다른 정치문화에서 왔다는 사실이었다. 스탈린에게 '민주주의'는 서방과 다른 의미였고, 의회의 견제를 받는 처칠과 루스벨트의 제약을 진심으로 이해하지 못했다. 반대로 서방 정상들은 스탈린이 폴리트뷰로의 압력에 굴복하고 있다고 착각했다.
냉전 종식 후 30년이 지난 지금, 얄타 논쟁은 더 이상 누구의 책임이냐는 단일한 질문에 갇혀 있지 않다.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에서는 얄타를 식민화의 기원으로 읽고, 러시아에서는 강대국 외교의 정점으로 기념하며, 미국 학계는 루스벨트에게 실현 가능한 대안이 있었는지를 두고 의견이 갈린다. 합의된 것은 단 하나다.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짜인 틀이 반세기를 버텼다는 사실, 그리고 그 틀이 남긴 국경은 1989년 이후에도 대부분 그대로 남아 있다는 사실이다.
회담장의 잉크가 마르기도 전에:얄타는 무엇을 결정했고, 무엇을 미래로 밀어냈는가
얄타와 포츠담에서 합의된 것 중 실제로 지켜진 것은 협상 당사자들이 상대의 말을 가장 덜 믿었던 영역이었다. 스탈린은 독일 항복 석 달 뒤 대일 선전포고라는 약속을 정확히 지켰다. 1945년 8월 8일 오후 5시, 몰로토프는 사토 나오타케 주소 일본대사에게 선전포고서를 전달했고 8월 9일 0시를 기해 150만 병력이 만주로 진입했다. 전후 유엔 체제도 얄타 설계도의 뼈대대로 작동했다. 안보리 5개 상임이사국의 거부권, 우크라이나와 벨로루시의 별도 의석, 신탁통치 제도: 1945년 6월 샌프란시스코에서 서명된 유엔 헌장의 핵심 구조는 리바디야 궁전에서 짜였다. 소련이 되찾은 남사할린과 쿠릴 열도는 오늘날까지 러시아의 실효 지배 아래 있다.
정반대로, 종이 위에 가장 자세히 적혔던 약속일수록 이행되지 않았다.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은 해방된 모든 국가가 자유선거를 통해 자신의 정부를 선택할 권리를 명시했으나, 1947년 1월 폴란드 총선은 공산당이 통제하는 선거였고 1948년 체코슬로바키아 쿠데타로 동유럽의 마지막 비공산 정부마저 사라졌다. 독일 배상 총액도 합의되지 못했다. 얄타에서 소련은 총액 200억 달러, 소련 몫 100억을 제안했고 루스벨트는 이를 '논의의 기초'로 받아들였다. 포츠담에서 제임스 F. 번스 국무장관은 바로 이 문구를 들어 몰로토프에게 그 어떤 총액도 약속된 적 없다고 맞섰다. 결국 포츠담은 각 점령국이 자기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 제공하고 10%는 무상 이전한다는 구역별 절충안으로 봉합했을 뿐, 하나의 통일된 배상 체제가 아니었다.
독일의 최종적 평화조약도 체결되지 않았다. 포츠담 협정은 폴란드 서부 국경인 오데르-나이세선에 대해 '최종적 경계 획정은 평화조약을 기다린다'고 명시했고, 이 한 문장이 45년을 버텼다. 1990년 9월 「독일에 관한 최종 해결 조약」, 이른바 2+4 조약이 서명되기까지 법적으로 제2차 세계대전은 끝나지 않은 셈이었다.
세르히 플로히는 얄타를 두고 '의도와 우연이 함께 만들어낸, 유럽 역사상 가장 길고도 가장 위험한 평화의 시작'이라고 썼다. 이 평가가 함의하는 것은 분명하다. 얄타 체제는 의회에서 비준된 조약이 아니었고, 모든 조항이 지켜진 합의도 아니었으며, 당사자들조차 서로 다른 해석을 품고 귀국한 임시방편이었다. 루스벨트의 비서실장 윌리엄 리히 제독은 폴란드 조항에 대해 '러시아인들이 기술적으로 위반하지 않으면서도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이 조항을 늘릴 수 있을 만큼 신축성 있다'고 직언했고, 루스벨트는 '빌, 지금으로선 그것이 폴란드를 위해 내가 할 수 있는 최선이야'라고 답했다. 그러나 바로 그 임시방편으로 40년 넘게 유럽에서 강대국 간 직접 충돌은 일어나지 않았다. 얄타가 결정한 것은 최종적 답안이 아니라, 앞으로의 모든 논쟁이 벌어질 테이블의 모양이었다. 유엔 안보리라는 테이블, 분할 점령이라는 테이블, 동유럽의 현실을 사실상 인정하는 테이블 말이다. 그 테이블들은 냉전을 견뎌냈고, 1989년에서야 비로소 철거되었다.
결과
두 회담은 전승국 협조의 정점이자 그 협조가 끝나 가는 자리였다. 소련은 국경의 서쪽 이동과 동유럽에 대한 사실상의 세력권, 안보리 상임이사국 지위라는 전후 반세기의 자산을 확보했다. 서방에서, 특히 동유럽에서 「얄타」는 강대국들이 약소국의 운명을 흥정한 배신의 대명사가 되었고, 유럽의 분단 질서 전체가 「얄타 체제」라 불리게 되었다. 학계의 평가는 갈린다. 얄타가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서사에 대해, 회담은 이미 붉은군대가 서 있던 현실을 추인했을 뿐이며 문서상으로는 자유선거가 약속되어 있었다는 반론이 맞선다. 1989년 동유럽 혁명과 1991년 소련 해체로 얄타 체제는 해체되었고, 몰타 회담은 흔히 「얄타에서 몰타까지」라는 대구로 그 종언을 표현했다.
연표
- 1945.02.04–11얄타 회담
독일 분할 점령, 폴란드 문제, 유엔 창설, 소련의 대일 참전이 합의되었다.
- 1945.04–06샌프란시스코 회의
얄타에서 합의된 방식대로 유엔 헌장이 작성·서명되었다.
- 1945.07.17–08.02포츠담 회담
독일 점령 원칙과 폴란드 서부 국경이 다루어졌고, 회기 중 처칠이 애틀리로 교체되었다.
- 1945.08.08소련의 대일 선전포고
얄타의 약속대로 독일 항복 석 달 뒤 소련이 만주로 진공했다.
관련 인물 18명
주도 · 집행2
지도부5
두 회담 모두에 앉은 유일한 정상으로, 협상의 최대 수혜자였다.
포츠담 회담의 미국 대표해리 S. 트루먼1884–1972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이 된 지 석 달 만에 포츠담에 참석해, 독일 배상 문제에서 소련의 요구에 맞서고 스탈린에게 원자폭탄을 넌지시 알렸다.
얄타 회담의 미국 대표프랭클린 D. 루스벨트1882–1945얄타에서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을 협상했고, 회담 두 달 뒤 사망했다.
얄타의 영국 대표윈스턴 처칠1874–1965얄타 회담에서 폴란드의 자유선거와 민주 정부를 주장했으며, 소련의 대일 참전 조건과 유엔 안보리 체제에 합의했다.
처칠을 대체한 영국 총리클레멘트 애틀리1883–19677월 5일 총선 결과가 7월 26일 발표되면서 처칠을 대신해 포츠담 회담에 합류했고, 어니스트 베빈과 함께 기존 영국 정책을 이어갔다.
참여8
주미 대사로 얄타에 배석했고 유엔 창설 실무를 맡았다.
안드레이 비신스키1883–1954외무 부인민위원으로 협상단에 있었다.
게오르기 주코프1896–1974베를린 점령군 사령관으로 포츠담의 무대 뒤에 있었다.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제임스 F. 번스1882–1972제임스 F. 번스는 트루먼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의에서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구에서 배상을 추출하되 서방 점령지구 산업설비의 15%와 10%를 소련에 넘기는 배상 타협안을 설계했다.
루스벨트에게 모호함을 직고한 비서실장윌리엄 D. 리히1875–1959루스벨트에게 얄타의 폴란드 합의가 ‘러시아인들이 기술적으로 합의를 깨지 않으면서도 얄타에서 워싱턴까지 늘릴 수 있을 만큼 신축적’이라고 직고했다.
얄타 회담의 대통령 통역이자 대소 정책 참모찰스 E. 볼렌1904–1974얄타 회담에서 루스벨트의 통역관이자 대소 정책 참모로 활동했으며, 회담 기록의 주요 증언자로도 남았다.
회담에 참석한 영국 외무장관앤서니 이든1897–1977산프란시스코 총회에서 스테티니우스, 몰로토프, 쑹쯔원과 공동 의장을 맡았다.
미국 국무장관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1900–1949몰로토프, 이든과 함께 회담 의정서에 서명했다.
반대 · 저항1
관련 용어
출처: S. M. Plokhy, Yalta: The Price of Peace (2010)Michael Neiberg, Potsdam: The End of World War II and the Remaking of Europe (2015)Fraser J. Harbutt, Yalta 1945: Europe and America at the Crossroads (20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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