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5

혁명의 물결과 세계대전 333명

10월 혁명 뒤 유럽과 아시아로 번진 혁명의 물결, 코민테른 시대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전간기 각국의 정치가, 파시즘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지도자와 지휘관들.

에메 두멩크

Joseph Édouard Aimé Doumenc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8 ○ 등산 사고사

수송·기계화·모스크바 협상의 장군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프랑스 대표단의 권한은 제한적이었고 영국 대표는 서면 권한이 없었으며,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다.

프랑스 육군 장성 에메 두멩크는 제1차 세계대전기에 자동차 수송을 조직했고 전간기에는 독립 기갑사단 구상을 내놓았다. 1939년 8월 모스크바에서 프랑스 군사대표단을 이끌며 소련과의 군사협정을 협상했으나 권한은 제한돼 있었고 회담은 폴란드 통과 문제에서 막혔으며, 독일·소련 협정으로 중단됐다. 1940년에는 최고사령부 소장으로 아르덴 전선의 붕괴를 겪었고, 이후 국가재건 총감과 군사사 저술 활동을 거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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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0에콜 폴리테크니크 학생
  • 1907–1909고등전쟁학교 수학
  • 1916–1918자동차수송국 지휘, 베르됭 보급·교대 조직
  • 1925리프 전쟁 참전
  • 1928독립 기갑사단 구상 제시
  • 1938최고전쟁위원회 위원
  • 1939모스크바 프랑스 군사대표단 단장
  • 1940–1942육군 총사령부 소장, 국가재건 총감, 현역 이탈

볼로디미르 빈니첸코

Володимир Винниченко

중앙라다 총서기국과 디렉토리아를 이끈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

당신들이 러시아에 노동자·농민 독재를 세웠듯, 우리는 우크라이나에 우크라이나어의 독재를 세워야 한다.

우크라이나 사회민주당의 작가로 1917년 중앙라다 총서기국을 이끌고 1918년 디렉토리아 초대 의장으로 키예프를 되찾았다. 소비에트와의 협상을 주장하다 페틀류라와 갈라져 1919년 사임했고 프랑스에서 1951년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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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 창립
  • 1917중앙라다 부의장 겸 총서기국 초대 의장(내무 겸임)
  • 1918.01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총리, 곧 사임
  • 1918.12디렉토리아 의장으로 키예프 탈환
  • 1919-1920회고록 「민족의 재생」 집필
  • 1920우크라이나 SSR 인민위원회 부의장 겸 외무인민위원, 곧 재망명

월터 라이먼 브라운

Walter Lyman Brown

구호를 외교 협상으로 바꾼 실무자

1921년 8월 20일 리가 합의문에 미국구호행정의 유럽 담당 이사로 서명했다.

월터 라이먼 브라운은 제1차 세계대전 뒤 미국 구호 행정을 이끈 실무 외교가로, 허버트 후버의 미국구호행정에서 유럽 업무를 맡았다. 1921년 러시아 기근이 심화되자 그는 리가에서 막심 리트비노프와 협상해 미국구호행정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이 아닌 당시 러시아 소비에트 공화국의 기아 지역에 들어갈 조건을 마련했다. 이 합의는 인도주의적 구호를 표방했지만 미국의 반볼셰비즘과 소비에트 정부의 통제·주권이 맞물린 절충이기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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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1미국구호행정 유럽 업무 담당
  • 1921.08리가 협정 미국 측 서명자
  • 1921–1923러시아 구호 작전 유럽 조정
  • 1921.12리가 이행 협정 미국 측 서명
  • 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사업 종료 과정 참여

조지 C. 캐틀릿 마셜

George C. Marshall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0–1959 ○ 자연사

유럽 부흥을 설계하고 미군을 40배로 키운, 육군·국무·국방 3직을 모두 지낸 유일한 미국인

하버드대 졸업식에서 명예박사 학위를 받은 마셜은 1947년 6월 5일, 준비된 원고도 없이 1,200단어의 연설을 통해 '굶주림, 빈곤, 절망, 혼란에 반대하는' 유럽 원조의 청사진을 내놓았다.

마셜은 육군참모총장(1939~45)·국무장관(1947~49)·국방장관(1950~51)을 두루 지낸 유일한 미국인으로, 처칠이 '승리의 조직자'라 부른 연합군 팽창의 총설계자였다. 1947년 6월 5일 하버드대 연설에서 전후 유럽의 경제 붕괴와 소련 팽창에 맞선 대규모 원조 구상을 제안했고, 이 '마셜 플랜'은 4년간 130억 달러로 서유럽 산업 기반과 통화를 안정시키며 냉전기 미국 대외정책의 틀을 재편했다. 국무장관 시절 이스라엘 승인을 두고 트루먼과 정면 충돌했으며, 국방장관으로 복귀해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을 승인함으로써 민간의 군대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1953년 노벨평화상을 수상했고, 군인 출신 수상자는 그가 유일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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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0펜실베이니아주 유니언타운에서 석탄·코크스 사업가의 막내로 출생
  • 1902버지니아 군사학교 졸업, 육군 소위 임관 후 필리핀 배치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제1사단 작전참모로 칸티니·뫼즈-아르곤 공세 기획
  • 1939–1945육군참모총장, 미군을 18만9천에서 800만으로 팽창시키고 연합군 전략 총괄
  • 1945.12–1947.01중국 특사, 국민당-공산당 연립정부 중재 실패
  • 1947–1949국무장관, 마셜 플랜 제안 및 NATO 창설 추진
  • 1950–1951국방장관, 한국전쟁 중 맥아더 해임 및 군부 재건
  • 1953노벨평화상 수상

헨리 뵈우커스

Henry Beeuwkes
과학·기술 소속 미확정 미국 미국계 1880–1959 ○ 자연사

기근 현장에서 의료 구호를 조직한 의사

뵈우커스는 기근 구호를 급식소의 수가 아니라 병원과 위생망의 회복으로 기록했다.

헨리 뵈우커스는 미국의 의사이자 공중보건 행정가로, 국제 구호를 임상과 위생의 조직 문제로 다룬 인물이다. 1921년부터 1923년까지 미국구호행정의 러시아 의료국장으로 일하며 식량 배급과 병행되는 병원 지원, 의약품 공급, 예방접종과 전염병 대응을 조정했다. 그는 이 경험을 1926년 저서에 정리해 기근 구호가 급식소를 넘어 의료·위생 체계의 복구였음을 기록했다. 이후 황열병 연구와 군 의료 행정에도 참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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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미 육군 의무대 입대
  • 1917–1918제1차 세계대전 프랑스 전선에서 군의관 복무
  • 1921–1923미국구호행정 러시아 의료국장
  • 1925–1927록펠러재단 서아프리카 황열병 조사단장
  • 1926『러시아 기근의 미국 의료·위생 구호』 출간
  • 1942–1945밸리포지 종합병원 지휘관

레지널드 드랙스

Reginald Plunkett-Ernle-Erle-Drax
군사·지휘 영국 국가기관 영국 영국계 1880–1967 ○ 자연사

군사개혁을 주장했으나 외교 협상 권한 없이 파견된 제독

소련 측이 협상 권한을 묻자, 드랙스의 사절단은 정부 승인 없이는 아무 결정도 할 수 없었다.

레지널드 드랙스는 영국 해군의 전술과 지휘 개혁을 주장한 제독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 사이에 주요 지휘직과 참모직을 맡았다. 1939년 8월 그는 프랑스 대표단과 함께 모스크바에 파견되어 소련과의 군사협력을 논의했지만, 영국 정부의 서면 협상 권한을 받지 못했다. 낡은 상선으로 늦게 도착한 대표단의 무력함은 독일과의 전쟁을 막기 위한 영국·프랑스 외교의 제한과 불신을 드러냈고, 결국 협상은 결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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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영국 해군 입대, HMS 브리태니아에서 훈련
  • 1909『현대 해군 전술』 출판, 참모교육 연구
  • 1914–1918대전함 HMS 라이언에서 복무, 주요 해전에 참가
  • 1919–1922왕립 해군참모대학 교장
  • 1923–1924독일 연합국 해군통제위원회 위원장
  • 1932–1934아메리카·서인도 제도 전대 총사령관
  • 1935–1938플리머스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39영국 군사사절단장으로 모스크바 협상 참가
  • 1939–1941노어 해군기지 총사령관
  • 1943–1945대서양 수송선단 준장
  • 1939『모스크바 사절단』 출판

발데마르 파프스트

Waldemar Pabst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80–1970 ○ 자연사

1919년 1월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하고 카프 폭동에 가담한 자유군단 장교

1919년 1월 근위기병소총사단 참모장교로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살해를 명령했다. 1920년 카프-뤼트비츠 폭동을 조직하고 오스트리아 향토방위대의 핵심 간부가 되었다.

1919년 1월 최대 자유군단 부대인 근위기병소총사단의 참모 장교로, 붙잡혀 온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를 심문한 뒤 살해를 명령했다. 뒤에 「내가 그들을 처형하게 했다」고 자랑했다. 1920년 카프 폭동에 주도적으로 가담했다가 오스트리아로 가서 우익 향토방위대 조직을 도왔고 추방되었다. 나치 독일에서는 나치당과 느슨한 관계에 머물며 공적 무대에서 물러났다. 1962년 인터뷰와 회고에서 노스케와 에베르트가 살해를 승인했다고 주장했으나 확인되지 않았다. 처벌받지 않고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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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3프로이센 참모본부에서 중위로 복무했다.
  • 1914–1918대위 겸 참모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 서부전선에서 복무했다.
  • 1918–1919근위기병소총사단의 제1참모장교로 베를린 혁명 진압에 참여했다. 1919년 1월 15일 로자 룩셈부르크와 카를 리프크네히트의 체포 후 심문을 거쳐 살해를 명령했다.
  • 1919–1920민족주의 단체 국민연합의 상무이사로 카프-뤼트비츠 폭동의 기술·조직 준비를 맡았다. 폭동 실패 뒤 오스트리아로 도피했다.
  • 1921–1930티롤 향토방위대의 참모장을 거쳐 1928년 연방참모장이 되었다. 1930년 체포되어 오스트리아에서 추방되었다.
  • 1930–1943베를린 라인메탈-보르시히에서 무기부문 책임자로 일했고 1938년 자신의 사업체를 인수했다. 1943년 스위스에 남아 정치적 망명을 받았다.
  • 1955–19701955년 독일로 돌아왔다. 전후에는 정치 활동을 하지 않았으며 1970년 뒤셀도르프에서 사망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Władysław Sikorski
군사·지휘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계 1881–1943 ✕ 추락사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주권을 지키려 한 장군

1943년 카틴 학살 조사를 요구하자 소련은 시코르스키의 망명정부와 외교관계를 단절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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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비밀 독립운동 조직 ‘능동투쟁연맹’ 공동 창립
  • 1914–1916최고국민위원회 군무부장, 폴란드 군단 장교학교 지휘관
  • 1920폴란드-소련 전쟁, 바르샤바 전투 제5군 사령관
  • 1922–1923폴란드 공화국 수상 겸 내무장관
  • 1924–1925군무장관, 폴란드군 현대화 추진
  • 1939–1943런던 망명정부 수상,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41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 체결, 소련과 관계 복원
  • 1943카틴 국제 조사 요구 뒤 지브롤터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

Maximilian von Weichs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계 1881–1954 ○ 전후 건강 악화로 기소 중단

스탈린그라드 공세를 지휘한 독일 야전원수

유고슬라비아 항복 직후인 1941년 5월, 그는 다친 독일군 1명마다 세르비아인 100명을 처형하라는 보복 명령을 내렸다.

막시밀리안 폰 바이흐스는 바이에른 군대와 제국군 참모 전통을 이어받은 독일 직업군인으로, 나치 독일의 침략전쟁에서 군단과 야전군을 지휘했다. 1942년 새로 편성된 B집단군 사령관이 되어 제6군과 동맹군을 포함한 남부 공세의 지휘 구조를 맡았고, 스탈린그라드 포위 뒤에는 후퇴를 주장했으나 히틀러의 명령을 바꾸지 못했다. 이후 발칸의 집단군 F와 남동방면군을 지휘하며 점령지 민간인에 대한 보복과 전쟁범죄 책임이 제기되었고, 전후 인질재판에서 건강 악화로 기소 절차가 중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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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바이에른군 제2중기병연대 입대
  • 1935제1기갑사단 지휘
  • 1937–1939제13군단 및 제13군관구 사령관
  • 1939–1942제2군 사령관
  • 1942–1943B집단군 사령관, 스탈린그라드 방면 공세
  • 1943–1945집단군 F 및 남동방면군 총사령관
  • 1947인질재판 절차 중 건강 사유로 석방

로베르트 그림

Robert Grimm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스위스 스위스 1881–1958 ○ 자연사

1915년 치머발트 반전 회의를 조직하고 국제사회주의위원회를 이끈 스위스 사회주의자

1918년 올테너 행동위원회를 조직해 의장을 맡고 총파업을 이끌었다. 군사재판에서 군인들에게 파업자 발포 명령을 거부하라고 촉구한 혐의로 징역 6개월을 선고받았다.

인쇄공 출신으로 스위스 사회민주당 좌파의 젊은 지도자가 되었고, 전쟁에 반대했다. 이탈리아 사회당과 함께 국제사회주의사무국과 별개인 반전 회의를 준비해 1915년 9월 치머발트 회의를 조직했고, 1915~1917년 치머발트 운동의 국제사회주의위원회 의장을 지냈다. 1917년 스위스 외무장관 호프만과 독일–러시아 강화 교섭에 관여한 사건으로 물러났다. 1918년 11월 스위스 총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뒤에 베른 주 정부와 연방의회에서 일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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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09바젤 노동운동 비서로 일했다.
  • 1911–1955연방의회 국민의회 의원을 지냈으며 1919~1920년에는 잠시 자리를 비웠다.
  • 1915–1917치머발트 국제사회주의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 1918–1938베른 시 정부 구성원으로 일했다.
  • 1938–1946베른 주 정부 구성원으로 일했다.

윌리엄 Z. 제불론 포스터

William Zebulon Foster
정치·당 지도 미국 공산당 미국 미국 1881–1961 ○ 자연사

1919년 대철강파업 지도자에서 미국 공산당의 최장기 지도자로

“노동자의 이익을 진정으로 대변하는 정당은 혁명적 정당뿐이다.” — 『노동자 생활의 페이지들』(1939)

1919년 대철강파업을 지휘한 노동운동 전략가에서 CPUSA 최장기 지도자로 전환했다. 1944년 브라우더의 당 해산에 맞서 당을 재건했고, 『미국 공산당사』 등 마르크스주의 역사서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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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국 사회당 입당
  • 1909IWW 가입, 스포케인 언론자유 투쟁 참가
  • 1912북미신디칼리스트연맹(SLNA) 창립
  • 1917–1918시카고 도축산업 노동자 조직화 — 8시간 노동제 중재
  • 1919대철강파업 지휘 — 25만 노동자 동원
  • 1920노동조합교육연맹(TUEL) 창립
  • 1921코민테른 제3차 대회 참석 후 공산당 입당
  • 1924첫 대선 출마 — 공산당 후보
  • 1929CPUSA 의장 취임, TUUL 창설
  • 19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 간부회원 선출
  • 1944–1945브라우더 당 해산 반대 — CPUSA 재건, 서기장
  • 1948스미스법 기소 — 건강 악화로 재판 연기
  • 1957CPUSA 명예의장 은퇴
  • 1961모스크바 사망 — 붉은광장 국장

야마다 오토조

山田乙三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81–1965 ○ 자연사

제국 육군의 마지막 관동군 사령관

1945년 8월 소련군의 만주 침공 뒤 관동군의 항복을 명령했다.

야마다 오토조는 러일전쟁부터 제2차 세계대전 종전까지 복무한 일본 제국 육군 대장으로, 군령과 군사교육 분야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4년 관동군 총사령관이 된 그는 태평양 전선으로 병력과 장비가 빠져나간 만주의 취약한 방어력을 파악했지만, 소련의 침공 앞에서 급히 편성된 부대들은 빠르게 무너졌다. 일본의 항복 뒤 소련에 억류된 그는 하바롭스크 전범재판에서 세균전 관련 책임을 추궁받고 25년형을 선고받았으며, 1956년 귀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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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12육군대학 졸업
  • 1934–1937참모본부 총무부장, 육군사관학교 교장
  • 1937–1939제12사단장, 제3군 사령관, 중지나 파견군 사령관
  • 1939–1944교육총감, 군사참의관
  • 1944–1945관동군 총사령관, 만주국 주재 일본 대사
  • 1949–1950하바롭스크 전범재판 피고인, 25년형
  • 1956소련 억류에서 귀환

배이뇌 알프레드 탄네르

Väinö Alfred Tanner
정치·당 지도 핀란드 사회민주당 핀란드 핀란드인 1881–1966 ○ 전범재판 실형 1946–1948

협동조합 운동에서 시작해 겨울전쟁 외무장관으로 스탈린과 마주한 핀란드 사민당의 현실주의 지도자

1939년 11월 9일,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를 거부하자 '맞은편 사람들의 눈이 휘둥그레졌다.' 스탈린이 물었다: '이노마저도 내주지 않겠다는 말인가?'

핀란드 사회민주당을 1918년 내전의 잿더미에서 의회 민주주의 정당으로 재건한 정치가다. 1926년 핀란드 최초의 좌파 정부 수반이 되었고, 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는 파시키비와 함께 실무 대표로 나서 영토 교환에 응하라고 헬싱키를 설득했다. 1939년 11월 9일 마지막 회담에서 핀란드가 축소된 요구마저 거부하자 스탈린과 몰로토프의 '눈이 휘둥그레졌다'고 훗날 기록한 이도 탄네르였다. 전후 소련의 압력으로 5년 6개월의 실형을 살았으나, 출옥 뒤 의회로 돌아와 1960년대 초까지 당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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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의회 의원 (사회민주당)
  • 1917재무 담당 상원의원
  • 1926–1927총리
  • 1927–1945국제협동조합연맹 의장
  • 1937–1939재무장관
  • 1939–1940외무장관
  • 1942–1944재무장관
  • 1957–1963사회민주당 당수

하인리히 브란들러

Heinrich Brandler
정치·당 지도 독일 공산당 독일 독일 1881–1967 ○ 자연사

혁명 봉기를 취소한 KPD 의장이자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공동 창립자

1923년 10월 21일 켐니츠 회의에서 브란들러는 좌파 사민당원들의 이탈을 목격하고 계획된 봉기를 전격 취소했다. 함부르크에서는 취소 소식이 제때 전달되지 않아 노동자들이 고립된 채 봉기했고, 24시간 만에 진압되었다.

독일공산당(KPD) 의장으로 1921년 3월 행동과 1923년 '독일 10월' 봉기를 이끌었으나, 혁명 조건이 성숙하지 않았다고 판단해 봉기를 취소하고 그 책임으로 모스크바에 소환되었다. 에른스트 텔만의 당 지도부에 맞서다 1929년 KPD에서 제명된 후, 아우구스트 탈하이머와 함께 공산당 반대파(KPO)를 창립하여 국제적 '우익반대파'의 핵심 인물이 되었다. 나치 집권 후 프랑스·쿠바 망명을 거쳐 1949년 서독으로 귀환, 생애 끝까지 독립적 공산주의 노선을 견지하며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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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1건설 노조 활동 시작, 사회민주당(SPD) 입당
  • 1914–1916반전 활동, 스파르타쿠스단 창립 멤버; 체포·추방
  • 1918.12독일공산당(KPD) 창립, 중앙위원 선출
  • 1921–1924KPD 의장; 3월 행동·1923년 '독일 10월' 봉기 주도, 실패 후 모스크바 소환
  • 1924–1928코민테른·프로핀테른 활동, 카자흐스탄 유배, 모스크바 VSNKh 근무
  • 1929KPD 제명, 탈하이머와 공산당 반대파(KPO) 창립, 국제적 우익반대파 형성
  • 1933–1948프랑스·쿠바 망명, 반파시스트 통일전선 주창
  • 1949–1956서독 귀환, 노동정치그룹(Gruppe Arbeiterpolitik) 창립·지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의 내무 인민위원, 대숙청에 희생된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

리투아니아가 독립 국가로 남도록 촉구했으나, 스스로는 그 독립을 사회주의 국가로 상상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 지도자로 1918~1919년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의 내무 인민위원을 지냈다. 망명 뒤 코민테른에서 일하며 리투아니아 노동운동사를 썼고,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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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1907년부터 중앙위원)
  • 1909체포되어 4년 카토르가형 선고, 이후 예니세이 지방 유형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리투아니아 담당 부인민위원, 『티에사』 편집
  • 1918–1919최초의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내무 인민위원
  • 1920리투아니아 공산당 해외국 서기(1921년부터 코민테른 집행위 대표)
  • 1926–1935코민테른 국제통제위원회 의장
정부·행정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 1882–1945 ○ 뇌출혈

대공황과 세계대전의 미국, 얄타에서 마지막 힘을 쥐어짠 4선 대통령

얄타에서 돌아온 루스벨트는 1945년 3월 1일 의회 연설에 앉아서 임했다. 걸을 수 없는 대통령이 평생 숨겨온 장애를 처음으로 공개한 순간이었다.

루스벨트는 대공황과 제2차 세계대전을 관통한 미국의 32대 대통령으로, 4선에 오른 유일한 대통령이다. 뉴딜로 연방정부의 역할을 재정의했고 진주만 공격 이후 연합국을 이끌며 독일 우선 전략을 관철했다. 1945년 2월 얄타 회담에서 그는 소련의 대일 참전과 유엔 창설이라는 두 가지 목표에 외교력을 집중했고 스탈린과의 개인적 관계에 신뢰를 걸었으나, 이미 심부전과 고혈압으로 쇠약해져 있었다. 회담 두 달 뒤 뇌출혈로 사망했으며, 얄타 합의는 유엔을 낳고도 동유럽을 넘겨주었다는 비판 속에 냉전기 내내 논쟁의 중심에 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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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2뉴욕주 하이드파크의 부유한 명문가에서 출생
  • 1913–1920해군 차관보, 제1차 세계대전 중 해군 확장 주도
  • 1921소아마비 진단, 하반신 영구 마비
  • 1929–1932뉴욕 주지사, 대공황 대응 실업구제 정책 선도
  • 1933–1945제32대 대통령, 뉴딜·제2차 세계대전 지휘
  • 1943.11테헤란 회담, 스탈린과 첫 대면
  • 1945.02.04–11얄타 회담, 소련의 대일 참전·유엔 안보리 틀 합의
  • 1945.04.12그루지야주 웜스프링스에서 뇌출혈로 사망

프세볼로트 미하일로비치 예이헨바움

Всеволод Михайлович Эйхенбаум

아나키스트 통합을 이론화하고 볼셰비키가 억압한 혁명을 기록한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

『골로스 트루다』, 1917년: '볼셰비키가 권력을 공고히 하고 합법화하면… 국가와 인민의 삶을 위에서부터 운영하기 시작할 것이다. 그들은 모든 반대를 철권으로 분쇄할 권위주의적 정치·국가 기구를 발전시킬 것이다.'

러시아 아나키스트 지식인이자 마흐놉시치나의 지도적 이론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골로스 트루다』를 편집하고, 우크라이나에서 나바트 연합을 공동 창설했으며,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으로서 아나키스트 통합 이론을 발전시켜 공산주의·개인주의·생디칼리즘 아나키스트들의 협력을 주창했다. 1922년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된 후, 1917–1921년 혁명의 아나키스트적 결정판인 『미지의 혁명』을 저술했으며, 동지 마흐노가 추진한 플랫폼주의 중앙집권화에 반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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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 법학 중퇴, 사회혁명당 입당, 노동자 학습 모임 조직
  • 1905피의 일요일 행진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결성 참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수감
  • 1907오흐라나에 체포, 시베리아 유배; 탈출하여 프랑스 망명
  • 1911아폴론 카렐린의 영향으로 아나키스트 전향, 파리에서 '자유 공산주의자 형제단' 가입
  • 1915–1916반전 활동으로 프랑스 당국 추적 피해 미국 도피; 뉴욕에서 『골로스 트루다』 편집
  • 19172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귀환; 『골로스 트루다』를 주요 아나코생디칼리즘 기관지로 재창간
  • 1918–1920우크라이나 나바트 연합 공동 창설; 마흐노 군사혁명평의회 의장; 체카에 두 차례 체포
  • 1922단식 투쟁과 프로핀테른 대표단 개입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에서 추방
  • 1924–1939세바스티앵 포르의 초청으로 파리 이주; 『아나키스트 백과사전』 기고; 5개국어 아나키스트 정기간행물에 집필
  • 1940마르세유에서 빈곤 속에 『미지의 혁명』 탈고
  • 1945파리에서 결핵으로 사망, 페르 라셰즈 묘지 네스토르 마흐노 곁에 안장

빌헬름 카이텔

Wilhelm Keitel
군사·지휘 독일 국가기관 독일 독일 1882–1946 ✕ 처형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의 수장으로 나치의 전쟁 범죄에 가담한 장군이다.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 수장으로서 그는 범죄 명령에 서명하고 나치의 학살과 전쟁 수행에 책임을 졌다.

카이텔은 1938년 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이 되었고, 히틀러의 군 통수권 아래서 정책을 전달하고 실행하는 역할을 했다. 그는 동부 지역에서의 독일군 범죄를 처벌하지 않도록 한 관할권 명령, 소련 정치장교의 즉결 처형을 요구한 정치장교 명령, 야간과 안개 명령 등 국제법을 위반하는 명령과 포고에 서명했다. OKW 수장으로서 그는 소련에서 아인자츠그루펜과 군대의 민간인 학살 협력 및 소련군 포로의 가혹한 처우에 책임이 있었다.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는 네 혐의 모두 유죄를 선고했고, 그는 1946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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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프로이센군 포병 장교로 입대했다.
  • 1938독일 국방군 최고사령부(OKW) 수장에 임명되었다.
  • 19455월 독일군 항복 문서에 서명했다.
  • 1946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소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알렉산드르 모이세예비치 샤피로

Александр Моисеевич Шапиро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소련 러시아 1882–1946 ○ 심장마비

암스테르담에서 IWA까지 국제 아니코생디칼리슴을 엮은 배후의 조직가

1921년 2월, 크로폿킨의 장례 행렬 뒤로 2만 명의 아나키스트가 모스크바 거리를 메웠다. 샤피로와 베르크만이 장례위원회를 조직했다. 소련에서 허용된 마지막 아나키스트 시위였다.

국제 아나코생디칼리즘의 핵심 연결자. 암스테르담 인터내셔널 서기로서 대륙 간 네트워크를 조직했고, 혁명기 볼셰비키 정부에서 일하면서도 아나키스트 비판을 견지했다. 추방 후 베를린에서 IWA 창립을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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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런던 유대인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 『아르베테르 프라인트』 그룹 회원, 주빌리 스트리트 클럽 주재
  • 1907암스테르담 국제아나키스트대회 대표; 국제사무국 서기 및 『Bulletin de l'Internationale Anarchiste』 편집
  • 1915『국제아나키스트 반전 선언』 서명; 크로폿킨의 연합국 지지와 결별
  • 1917–1920귀국 후 『골로스 트루다』 편집진; 유대인인민위원부 및 외무인민위원부에서 근무
  • 1921크로폿킨 장례 조직; 『러시아 혁명과 공산당』 공동 집필; RILU 대회 중 정치범 석방 협상
  • 1922모스크바에서 체포, 국제적 항의로 석방된 후 소련에서 영구 추방
  • 1922–1932베를린에서 IWA 창립 주도, 사무국 서기; 『라보치 푸티』로 러시아 내 비밀 유통
  • 1932–1939바르셀로나에서 CNT-FAI 갈등 중재; 프랑스에서 『라 부아 뒤 트라바이』 편집; 1939년 뉴욕 이주
  • 1945–1946뉴욕에서 『뉴 트렌즈』 편집, 심장마비로 사망

이온 안토네스쿠

Ion Antonescu
정부·행정 루마니아 루마니아 루마니아 1882–1946 ✕ 처형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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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8제1차 세계대전 참모 장교
  • 1933–1934참모총장
  • 1937–1938국방장관
  • 1940전권 총리, 카롤 2세 퇴위, 「지도자」 칭호
  • 1940–1941국민군단국가, 군단 반란 진압
  • 1941소련 침공, 트란스니스트리아 점령
  • 19448월 23일 체포, 소련 이송
  • 1946인민법정 사형 선고, 질라바 처형

게오르기 미하일로프 디미트로프

Георги Михайлов Димитро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불가리아 (1934–1945 소련 시민권 겸유) 불가리아 1882–1949 ○ 자연사, 사망 경위 일부 미확인

라이프치히 재판의 피고에서 코민테른 서기장으로

“나는 피고인 공산주의자로서, 내 정치적 명예와 혁명가로서의 명예, 그리고 내 공산주의 이념과 이상을 변호한다.” 1933년 라이프치히 법정에서 한 이 말은 내 전 생애의 내용과 의미를 지키기 위한 것이었다.

인쇄공·노동운동가로 출발해 1923년 봉기를 이끌었고, 1933년 라이프치히 재판에서 나치에 맞선 법정 변론으로 국제적 상징이 되었다. 제7차 세계대회 직후인 1935년 코민테른 서기장에 올랐고 1943년 코민테른 해산 뒤에는 소련공산당 중앙위 국제정보부를 이끌었다. 대숙청 시기에는 폴란드 공산당 지도부 숙청과 불가리아의 옛 동료 탄압에 관여했으며 일부 구제에도 나섰다. 1945년 불가리아로 돌아와 이듬해 총리가 되었고, 유고슬라비아와의 연방 구상은 스탈린-티토 결별로 무산되었다. 1949년 모스크바 근교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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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5–1943서기장

우메즈 요시지로

梅津美治郎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 1882–1949 ○ 옥사

제국군의 명령과 항복 사이에 선 참모총장

1945년 9월 2일, 그는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우메즈 요시지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고위 지휘관으로, 중국과 만주 점령지에서 군사 통치와 일본의 대륙 정책을 수행했다. 그는 1944년 육군참모총장이 되어 전쟁 지속을 주장했지만, 군부 내 쿠데타 시도에는 가담하지 않고 천황의 항복 명령을 관철했다. 1945년 9월 2일에는 일본 제국 대본영을 대표해 항복문서에 서명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 수행 책임으로 종신형을 선고받고 복역 중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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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육군 소위, 보병 제1연대
  • 1919–1921스위스 주재 무관
  • 1934–1935지나 주둔군 사령관
  • 1939–1944관동군 사령관·총사령관
  • 1944–1945일본 육군참모총장
  • 1945대본영 대표로 항복문서 서명
  • 1948–1949극동국제군사재판 종신형, 복역 중 사망

도고 시게노리

東郷茂徳

전쟁을 막지 못한 종전 외교가

1945년 7월, 그는 포츠담 선언을 평화의 기초로 삼되 소련과 먼저 교섭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도고 시게노리는 일본 제국의 직업 외교관으로, 태평양전쟁의 개전과 종결 때 외상을 맡았다. 그는 전쟁을 피하려는 대미 협상에 참여했지만 개전을 막지 못했고, 전쟁 뒤에는 그 외교적 책임을 두고 재판을 받았다. 1945년에는 소련을 중재자로 삼아 조건부 종전을 모색하는 한편 포츠담 선언 수락을 주장했으며, 이 선택은 종전을 앞당기려는 현실 감각과 소련의 의도를 오판한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극동국제군사재판은 그에게 금고 20년을 선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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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외무성 입성, 외교관 및 영사관 시험 합격
  • 1933–1935외무성 구미국장
  • 1937–1938주독일 대사
  • 1938–1940주ソ 대사, 국경·중립 협상 담당
  • 1941–1942도조 내각 외무대신 겸 척무대신
  • 1945스즈키 내각 외무대신 겸 대동아대신, 포츠담 선언 수락 추진
  • 1948극동국제군사재판, 금고 20년 선고

페트레 두미트레스쿠

Petre Dumitrescu
군사·지휘 루마니아 루마니아 루마니아인 1882–1950 ○ 자연사

동부전선의 루마니아군 지휘관

스탈린그라드 북서쪽 측면이 무너지기 전, 두미트레스쿠는 독일군에 지원을 요청했다.

페트레 두미트레스쿠는 루마니아 왕국의 직업군인으로,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동부전선에서 루마니아 제3군을 지휘했다. 그는 독일군과 함께 소련을 상대로 부코비나와 우크라이나, 크림, 캅카스 작전에 참여하며 루마니아군의 전쟁 수행을 이끌었다. 1942년 스탈린그라드 북서쪽에서 제3군의 취약한 측면이 소련군의 천왕성 작전에 노출되자 지원을 요청했지만, 군대는 큰 손실을 입고 후퇴했다. 전후 전쟁범죄 혐의로 기소되었으나 1946년 증거 부족으로 무죄 판결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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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3포병·공병학교 수학, 소위 임관
  • 1911–1913육군참모대학 수학
  • 1930–1932프랑스 주재 군사 attaché
  • 1935–1937육군참모본부 부참모장
  • 1940–1941루마니아 제1군 사령관
  • 1941–1944루마니아 제3군 사령관
  • 1942스탈린그라드 전투에서 제3군 지휘
  • 1944전역, 전쟁범죄 혐의로 조사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