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년 8월 11일, 전쟁 초입의 낙관이 산산조각난 할더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러시아 거인을 과소평가했다… 12개 사단을 격멸하면 러시아군은 또 다른 12개 사단을 내보낸다.'
프란츠 할더는 1938년부터 1942년까지 독일 육군 참모총장으로 재직하며 폴란드·프랑스 침공과 바르바로사 작전의 작전 계획을 주도한 군인이다. 1940년 7월 31일 베르크호프 회의 직후 작성한 일기에 소련을 파괴하기로 한 히틀러의 결단을 기록했으며, 이후 정치장교 즉결처형을 명령한 '코미사르 명령'과 동부전선에서 독일군의 전쟁범죄에 사법적 면책을 부여한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을 기안했다. 전후에는 미 육군 사적부의 수석 고문으로 활동하며 700여 명의 전직 독일 장교들을 감독해 전쟁범죄를 은폐하고 '깨끗한 국방군' 신화를 구축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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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참모 장교로 복무하며 1급·2급 철십자장 수훈
1938–1942육군 참모총장 (OKH), 폴란드·프랑스·발칸·소련 침공 작전계획 주도
1940.07베르크호프 회의: 히틀러의 소련 파괴 결단을 일기에 기록, 바르바로사 계획 입안 개시
1941'코미사르 명령'과 '바르바로사 관할권 법령' 기안, 동부전선의 전쟁 수행을 급진화
1942.09동부전선 전략 실패로 히틀러와 갈등, 참모총장에서 해임
1944–19457·20 음모 연루로 체포, 다하우·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1947–1961미 육군 사적부 수석 고문, 전직 장교 700여 명의 사료 편찬 지휘하며 '깨끗한 국방군' 신화 구축
1961미국 공로 민간인 훈장 수훈, 히틀러와 미국 대통령 모두에게서 훈장을 받은 유일한 독일인
1918년 9월 16일, 아타만 칼미코프의 백군에게 끌려나가 총살당하기 직전 그녀의 마지막 외침: '자유와 독립을 조선에!'
시베리아 한인 이주민의 딸로 태어나 1916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최초의 조선인 공산주의자다. 레닌의 지시로 극동에 파견되어 하바롭스크 소비에트 외무인민위원을 지내고 이동휘와 함께 한인사회당을 창당했으며, 조선인 적위대를 조직해 백군과 일본군에 맞서 싸우다 1918년 33세로 처형당한, 러시아 혁명과 조선 독립운동을 잇는 상징적 인물이다.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체포된 그는, 대회가 진행되는 동안 하루도 못 되어 재판을 받고 총살당했다.
1919년 몽골인민당 창립에 참여했고, 1921년 혁명 뒤 초대 중앙위원회 의장과 재무장관을 지내며 초기 인민정부 수립을 이끌었다. 1922년 총리 보도를 숙청·처형하는 데 앞장섰다. 제한된 자본주의와 소련 고문 축소를 주장하다 코민테른 좌파와 충돌했고, 1924년 8월 제3차 당대회에서 부르주아로 몰려 하루 만에 체포·총살됐다. 그 숙청이 당을 비자본주의 노선과 공화국으로 돌려세우는 분수령이 됐다.
1921년 귀환을 호소하며 말했다. “소련 정권은 러시아와 그 인민을 대표하는 유일한 정권이다.”
야코프 슬라시초프는 러시아 제국군 출신의 백군 장군으로, 남러시아 내전에서 크림 방어를 지휘한 인물이다. 그는 1919년 말 페레코프 지협의 방어선을 장악하고 1920년 초 붉은 군대의 거듭된 공격을 막아, 열세한 병력으로 브랑겔의 크림 거점을 지탱했다. 그러나 그의 지휘 아래 벌어진 가혹한 진압과 약탈 의혹은 군사적 역량과 함께 백군 통치의 폭력성을 드러냈다. 망명 뒤 소련으로 돌아가 전술을 가르치며, 패배한 진영의 군사 지식이 새 국가에 흡수되는 역설을 보여 주었다.
사단이 궤멸하던 1939년 8월 22일, 고마쓰바라는 일기에 "사이다병으로 지근거리 공격을 해도 효과가 없었고, 장병들은 절망 속에 남겨졌다"고 남겼다.
고마쓰바라 미치타로는 러시아를 연구한 일본 제국 육군 장교로, 정보와 참모 업무를 거쳐 야전 지휘관이 되었다. 그는 1939년 할힌골에서 제23사단을 지휘하며 일본의 국경전쟁을 대규모 작전으로 이끌었지만, 주코프의 포위 공세 속에서 사단이 사실상 궤멸하는 패배를 겪었다. 이 패배는 그의 경력에 책임을 묻는 결과로 이어졌고, 그는 1940년 예편한 뒤 그해 사망했다.
1941년 4월 6일 독일의 침공이 시작되자 그는 영국군 철수를 요구한 독일의 통첩을 거부했다.
알렉산드로스 코리지스는 법률가·경제학자이자 은행가로, 국가 재정과 농업 신용 제도의 조직에 관여했다. 그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권위주의 정권에서 관료와 장관을 지냈지만, 정당 정치인이라기보다 행정가로 총리가 되었다. 1941년 1월 메탁사스 사망 뒤 영국군 지원을 받아들이며 독일의 침공에 맞선 정부를 이끌었고, 그 선택은 그리스의 전쟁 수행을 연합국과 결부시켰다. 독일군이 진격하던 4월 18일 자살로 생을 마쳤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 패튼은 실재하지 않는 제1미군집단의 얼굴이 되어 칼레를 향한 위협을 연출했다.
조지 S. 패튼은 기갑부대의 기동성과 공격적 작전 운용을 중시한 미국 육군 장군이었다.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에서 전투 지휘 능력을 보였지만, 병사 폭행과 거친 발언으로 지휘권과 명성에 반복해서 논란을 일으켰다. 1944년 포티튜드 사우스에서는 허구의 제1미군집단을 지휘하는 인물로 내세워 독일군이 칼레 방면의 상륙을 믿도록 만들었고, 실제 노르망디 상륙 뒤에도 독일 예비전력을 묶어 두는 데 기여했다. 이후 제3군을 이끌고 프랑스를 가로질러 독일로 진격했으나, 전후에는 반소련 발언과 탈나치화 비판으로 바이에른 군정에서 해임되었다.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다. 좌파는 그 밤에서 파시즘의 총연습을 보았고 극우는 그를 배신자라 불렀다. 두 평가는 그 뒤로도 그를 함께 따라다녔다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생시르를 거쳐 모로코와 1차 대전에서 복무하고 중령으로 예편한 직업군인. 1931년부터 참전군인 조직 불의 십자단을 이끌며 수십만 규모의 대중운동으로 키웠고, 규율과 자동차 대열을 앞세운 그 행동양식은 프랑스 좌파에게 파시즘의 얼굴로 보였다. 1934년 2월 6일 밤 그의 대열은 하원 뒤편까지 이르렀으나 그는 돌입 대신 해산을 명령했고, 이 신중함 때문에 극우 진영 안에서 배신자로 몰렸다. 1936년 인민전선 정부가 동맹을 해산하자 프랑스사회당(PSF)을 세워 선거정치로 방향을 틀었고, 이 당은 1930년대 말 프랑스 최대의 우파 정당이 되었다. 1940년 페탱을 지지해 비시 국민평의회에 참여하면서 동시에 영국에 정보를 넘기는 조직을 운영하다 1943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독일에 억류되었고, 해방 뒤에는 비시 부역 혐의로 프랑스 당국에 다시 구금되었다가 1946년 병으로 죽었다. 그가 파시스트였는가 아니면 권위주의적 보수의 프랑스적 형태였는가는 스테른헬 이래 오늘날까지 프랑스 우파 연구의 중심 논쟁으로 남아 있다.
1948년 옥중 일기에 그는 만주사변의 성공을 되돌아보며, 중국에 손댄 것이 잘못이었다고 썼다.
이타가키 세이시로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교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과 중국 침략 확대를 이끈 핵심 인물이었다. 그는 이시와라 간지와 함께 1931년 철도 폭파를 계획하고 관동군의 독단적 군사행동을 점령과 괴뢰국 수립으로 연결했다. 이후 육군대신과 여러 전선의 지휘관을 지냈으며,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침략전쟁의 책임을 물어 사형을 선고받고 처형되었다.
1939년 11월 26일 저녁, 그는 몰로토프의 마이닐라 포격 항의각서를 받고 즉시 헬싱키에 사실 확인을 요청했다.
아르노 위리외코스키넨은 독립 핀란드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외무부의 정치 업무와 대외 협상을 맡았다. 모스크바 공사로서 그는 1939년 11월 마이닐라 포격을 둘러싼 몰로토프의 항의와 핀란드의 회답을 전달하며 전쟁 직전 외교의 최전선에 섰다. 그는 소련과의 불가침조약 체결에도 참여했지만, 협상으로 안보 갈등을 봉합하려던 외교는 겨울전쟁을 막지 못했다.
1947년 2월 베네치아에서 재판이 시작되어 5월 6일 아르데아티나 학살과 민간인 살해 선동 혐의로 유죄, 사형 선고를 받았고, 7월 4일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10월 석방되었다.
알베르트 케셀링은 루프트바페 건설을 주도한 나치 독일의 야전원수로, 폴란드·프랑스·소련 침공과 지중해 전구를 지휘했고 1941년 11월부터 남부 총사령관으로 이탈리아 전역을 맡아 구스타프선과 고딕선에서 연합군의 진격을 지연시켰다. 동시에 그의 지휘 아래 민간인 보복이 자행되었고, 1944년 6월 반당파 지령으로 보복을 승인했으며 아르데아티나 동굴 학살을 포함해 점령기 이탈리아 민간인 약 2만 2천 명이 희생되었다. 1947년 베네치아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종신형으로 감형되어 1952년 석방되었으나, 자신의 전쟁 수행을 철회하지 않았다.
체스터 W. 니미츠는 미국 해군의 잠수함·군수 전문가에서 태평양 전쟁의 연합군 해상 지휘관으로 올라선 제독이다. 1941년 진주만 공습 직후 태평양함대 사령관이 된 그는 일본군 통신정보를 작전 판단에 결합해 미드웨이에 가용 전력을 집중했고, 과달카날 공세를 승인하며 반격의 지휘 체계를 세웠다. 그의 지휘는 압도적 물자와 정보 우위를 작전 기동으로 전환했지만, 섬 전투와 봉쇄가 낳은 막대한 희생이라는 전쟁의 대가를 지우지는 못했다. 전후에는 해군참모총장으로 감군과 핵추진 잠수함 건설을 함께 추진했다.
카지미에시 손코프스키는 폴란드 독립운동가이자 장군으로, 유제프 피우수트스키와 함께 비밀 군사조직과 폴란드 군대를 건설했다. 그는 폴란드-소련 전쟁에서 군 조직과 전투를 지휘하고 전간기 군 현대화를 추진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국내 저항운동과 런던 망명정부의 군사 지도자로서 소련과 서방 연합국의 정책이 폴란드를 종속시킬 위험을 경고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지원을 요구하며 연합국을 공개 비판한 뒤 총사령관직에서 해임되었고, 전후 캐나다에서 망명 폴란드 사회의 원로로 활동했다.
「우리는 이 나라 노동이 시도한 가장 거대한 행동에 착수하고 있다 — 그 끝은 아무도 모른다!」 1919년 시애틀 총파업 직전 사설
미국 네브래스카 출신 좌파 저널리스트이자 공산주의자. 시카고대 철학 박사 후 시애틀 총파업(1919)을 취재하며 노동운동에 투신했다. 1921년 소련으로 건너가 1930년 영자신문 『모스크바 뉴스』를 창간했다. 1946년 옌안에서 마오쩌둥을 인터뷰해 '모든 반동파는 종이호랑이'라는 유명한 발언을 기록했고, 1949년 소련에서 첩자 혐의로 추방되었다가 1955년 명예 회복 후 중국에 정착했다. 이후 '외국인 친구'로서 문화대혁명기까지 마오의 중국을 취재하며 30권 이상의 저작을 남겼다. 20세기 공산주의 혁명들을 현장에서 목격하고 서방에 전한 독보적 증언자다.
1942년 12월, 호트의 제4기갑군은 포위된 스탈린그라드의 제6군을 구출하려 했으나 실패했다.
헤르만 호트는 프로이센군과 제국군 전통을 이어받아 독일 국방군의 기갑 지휘관으로 성장한 장군이다. 프랑스 침공과 소련 침공에서 빠른 기동작전을 지휘했으며, 1942년 제4기갑군 사령관으로 블라우 작전의 남부 공세와 스탈린그라드 구출 시도에 참여했다. 그러나 그는 소련과의 전쟁을 절멸전으로 이해했고 정치위원 명령과 민간인에 대한 잔혹한 조치를 전달·집행했다. 전후 국방군 최고사령부 재판에서 전쟁범죄와 인도에 반한 죄로 15년형을 선고받았고 1954년 조기 석방되었다.
프랭크 잭 플레처는 제2차 세계대전 태평양전쟁에서 항공모함 기동부대를 지휘한 미국 해군 제독이다. 그는 산호해에서 일본의 포트모르즈비 진격을 저지하고, 미드웨이에서는 전술 지휘관으로 일본 항공모함 네 척의 격침에 관여했다. 그의 신중한 항공모함 운용은 전력을 보존했지만, 과달카날에서 함대 철수를 둘러싼 논쟁도 남겼다.
메헬렌 문서를 검토한 뒤,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배제하지 않고 경보를 방어 준비로 전환했다.
라울 판 오버스트라텐은 제1차 세계대전과 제2차 세계대전에 복무한 벨기에 장군으로, 군사사와 작전 분석에도 힘을 쏟았다. 1938년부터 1940년까지 레오폴드 3세의 군사고문으로서 메헬렌에서 확보한 독일 공격계획을 검토하고 경보를 현실적인 방어 조치로 바꾸는 데 관여했다. 그의 신중함은 정보의 진위를 따지면서도 독일의 공격 가능성을 과소평가하지 않는 실무적 판단으로 나타났다. 전후에는 왕실과 군의 기록을 바탕으로 벨기에의 전쟁정책을 저술했다.
체체크는 제1차 세계대전의 체코 민족운동과 러시아 내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연결한 장교였다. 1918년 그는 펜자에 집결한 약 8,000명의 최대 군단 집단을 지휘했고, 사마라 점령을 통해 코무치 정부가 세워질 조건을 열었다. 그의 행보는 군단 지휘관들이 볼셰비키 군대와의 충돌에서 상부의 명령만 기다리지 않고 독자적으로 정치·군사적 주도권을 행사했음을 보여 준다. 전후 체코슬로바키아에서 그는 군 참모와 항공 행정을 맡으며 군단의 전투 경험을 국가 군사체계 건설로 옮겼다.
“헝가리 프롤레타리아트는 지도자가 아니라 자기 자신을 배신했다.” — 공화국 붕괴 직전 마지막 연설, 1919년 8월 1일
옛 트란실바니아 출신 유대계 언론인에서 혁명가로 전향한 쿤 벨러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의 실질적 창설자이자 지도자였다. 유럽사상 두 번째 프롤레타리아 독재를 133일간 이끌며 산업 국유화를 추진했으나, 토지 분배 대신 국영농장을 택해 농민의 지지를 잃고 협상국 개입 속에 붕괴했다. 망명 후 코민테른 집행위원회와 선전선동부에서 국제 공산주의 운동의 이론가로 활동했고, '제3시기' 좌경노선을 지지하다 1935년 인민전선 전환을 놓고 디미트로프와 대립했다. 1937년 대숙청에 휩쓸려 이듬해 총살, 1955년 복권되었다.
존 고트는 제1차 세계대전의 용맹성과 제2차 세계대전의 지휘 판단이 함께 기억되는 영국 육군 원수였다. 1918년 됭노르 운하 전투에서 중상을 입고도 공격을 이끈 공로로 빅토리아 십자장을 받았다. 프랑스 주둔 영국 원정군 사령관으로서 1940년 독일군의 포위와 대륙 방어선의 붕괴를 판단해 됭케르크 철수를 명령했고, 이 선택은 병력을 보존했지만 그의 야전 지휘 능력에 대한 논쟁을 남겼다. 이후 몰타 총독으로 포위된 섬의 방어를 지휘하며 명성을 회복했다.
1919년 4월 19일, 흑해의 전함 장 바르호 위에 붉은 깃발이 올랐다. 백군 지원을 거부한 수병들의 반란 지도자로 체포된 앙드레 마르티는 콘스탄티노플 군법회의에서 중노동 20년형을 선고받았다.
프랑스 해군 기관사로 복무하던 1919년, 백군 지원을 거부하며 전함 장 바르호의 반란을 이끌어 중노동 20년형을 받았다. 1923년 사면 후 프랑스 공산당에 합류해 하원의원·중앙위원을 지냈고, 1935년 코민테른 서기 겸 상임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페인 내전에서는 국제여단 정치위원으로서 알바세테에서 여단을 조직했고, 엄격한 규율로 '알바세테의 도살자'라 불렸다. 1952년 PCF에서 축출되었으나 30년간 프랑스 공산주의와 코민테른 국제 활동의 중심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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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8프랑스 해군 기관병 입대
1919흑해 함대 반란 지도 — 전함 장 바르호에서 백군 지원 거부, 체포 후 중노동 20년형
그는 1942년 처칠에게 도시 폭격으로 노동계급 주거지를 무너뜨리자는 ‘Dehousing’ 논리를 제출했다.
프레더릭 린데만은 영국의 물리학자이자 윈스턴 처칠의 핵심 과학 자문자로, 과학 연구를 국가의 전쟁 수행과 정책 결정에 직접 결합했다. 그는 옥스퍼드 클라렌던 연구소를 이끌며 항공기 스핀 회복과 물리화학을 연구했고, 전시에는 통계 부서를 조직해 전쟁 내각이 보급과 생산을 수치로 판단하도록 했다. 폭격의 효과와 민간 사기를 둘러싼 논쟁에서 그는 도시 지역 폭격을 강하게 지지했으며, 코번트리 이후에도 폭격 지속을 뒷받침하는 정책 논리를 제공했다. 그의 전문성은 처칠에게 신속한 판단의 도구를 주었지만, 계급주의적 인간관과 폭격 정책은 과학 지식이 국가 폭력에 편입될 때 생기는 책임의 문제를 드러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