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1945

혁명의 물결과 세계대전 333명

10월 혁명 뒤 유럽과 아시아로 번진 혁명의 물결, 코민테른 시대의 공산주의자와 사회주의자, 전간기 각국의 정치가, 파시즘과 스페인 내전, 제2차 세계대전의 지도자와 지휘관들.

카를리스 울마니스

Kārlis Ulmanis

라트비아 독립전쟁의 총리, 뒤에 1934년 쿠데타의 독재자

점령 당일 라디오 연설에서 저항을 금하며 "나는 내 자리에 남고, 그대들도 그대들의 자리에 남으시오."라고 했다.

1918년 11월부터 라트비아 임시정부 총리로 소비에트군, 독일계 쿠데타, 베르몬트군을 차례로 넘기고 1920년 리가 강화와 토지개혁을 이끌었다. 1934년 쿠데타로 독재를 세웠고 1940년 소련에 강제이송되어 1942년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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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1라트비아 임시정부 초대 총리
  • 1920리가 강화 조약과 토지개혁 주도
  • 1918–1934농민연합 지도자로 총리·외무장관 여러 차례 역임
  • 1934-05군과 아이스사르기 동원, 무혈 쿠데타
  • 1936-04'민족의 지도자' 자처, 대통령 겸 총리
  • 1939-10소련군 기지 배치를 허용한 상호원조조약 서명
  • 1940-07소련 점령 뒤 퇴위, 7월 강제이송
  • 1942크라스노보츠크 감옥에서 사망

바실 페트로프 콜라로프

Васил Петров Коларов
외교·국제활동 코민테른 불가리아 불가리아 1877–1950 ○ 자연사

불가리아 공산주의의 공동 창건자, 코민테른에서 국가원수까지

1923년 9월 22일, 콜라로프는 디미트로프와 함께 반파시스트 무장봉기를 개시했다. 진압 후 잔여 대원을 이끌고 유고슬라비아로 탈출, 궐석 사형 선고와 함께 22년의 망명 생활이 시작되었다.

불가리아 공산당의 공동 창건자이자 코민테른 서기장(1922~24). 1923년 9월 봉기를 직접 지휘했으나 실패로 22년간 소련에 망명했고, 귀국 후 국가원수와 총리를 지내며 불가리아의 스탈린화를 주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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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불가리아 노동사회민주당 입당
  • 1904–1919플로브디프 테스냐키 조직 책임자
  • 1905–1923중앙위원회 위원
  • 1913–1923국민의회 의원
  • 1919–1923불가리아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22–1924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서기장
  • 19239월 반파시스트 봉기 공동 지도자
  • 1928–1939크레스틴테른(농민인터내셔널) 집행위원회 의장
  • 1931–1941국제농업연구소 소장 (모스크바)
  • 1946–1947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임시 국가원수
  • 1947–1949부총리 겸 외무장관
  • 1949–1950불가리아 인민공화국 총리

생디칼리슴에서 코민테른·제4인터내셔널까지: 혁명의 한 세기를 관통한 프랑스 국제주의자

레닌은 로스메르를 이렇게 평했다: "그는 다섯 가지나 여섯 가지 언어로 침묵을 지키는 법을 아는 사람이다." — 필리프 로브리외, 『프랑스 공산당 내부사』에서 인용

미국 태생의 프랑스 혁명적 생디칼리스트이자 코민테른 지도부 핵심 인물.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라 비 우브리에르》를 발행하며 반전 국제주의 운동을 조직했고, 모스크바에서 17개월간 체류하며 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을 주도했다. 프랑스 공산당 정치국원으로 활약하다 1924년 트로츠키 옹호로 제명된 후 좌익반대파와 트로츠키주의 운동에 투신했으며, 1938년 자신의 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를 개최했다. 만년에는 알제리 전쟁 반대 선언에 서명했고 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를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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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CGT 기관지 《라 비 우브리에르》 편집 — 피에르 모나트와 함께 혁명적 생디칼리슴 운동 주도
  • 1915–1918반전 국제주의자로 치머발트 회의 프랑스 참가 조직 — 전쟁 내내 반전 활동 지속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가맹위원회 활동 — 모스크바 파견, 17개월 체류하며 코민테른 집행위원 선출
  • 1921적색노동조합인터내셔널(프로핀테른) 창립대회 주도 — 로조프스키·톰 만과 함께 임시평의회 간부
  • 1922–1924프랑스 공산당(PCF) 정치국원 겸 《뤼마니테》 사무총장 — 당내 좌파 지도부 핵심
  • 1924.10트로츠키 반대 운동에 반발하여 수바린·모나트와 함께 PCF에서 제명
  • 1929–1931프랑스 최초 트로츠키주의 조직 공산주의자동맹 결성 참여 — 전술적 차이로 1931년 탈퇴
  • 1938.9페리니 자택에서 제4인터내셔널 창립대회 개최 — GPU의 암살 위협 속 비밀 진행
  • 1939멕시코 방문 — 트로츠키와의 우정 회복, 듀이위원회 참여, 트로츠키 손자 시에바의 후견인
  • 1940–1947제2차 세계대전으로 미국 체류 — 1947년 프랑스 귀환
  • 1953회고록 『레닌의 모스크바』 출간 — 알베르 카뮈 서문
  • 1960알제리 전쟁 반대 '121인 선언' 서명

아라키 사다오

荒木貞夫
군사·지휘 일본 국가기관 일본 일본인 1877–1966 ○ 전범 유죄 · 1955년 석방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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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

Павел Бермондт-Авалов

독일 자유군단을 이끌고 리가를 공격한 서러시아 의용군 사령관

유데니치의 나르바 합류 명령을 거부한 그는 1919년 10월 '러시아 국가권력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리가로 진격했다.

「아발로프 공」을 자칭한 러시아 기병 장교로 1919년 철수를 거부한 독일 자유군단 수만 명을 서러시아 의용군으로 묶어 10월 리가를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망명 뒤 베를린에서 러시아 파시스트 조직을 이끌었고 1973년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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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군악장으로 제1아르군 연대 입대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8키예프 주둔 남군 징병·방첩 책임자
  • 1919-04잘츠베델 포로수용소에서 의용 분견대 편성
  • 1919-07미타바에서 그라프 켈레르 부대 결성
  • 1919-09서러시아 의용군 총사령관 자처, 10월 리가 진격
  • 1925회고록「볼셰비즘과의 투쟁」간행
  • 1933러시아 민족사회주의 운동(론트) 창설

장 시아프

Jean Chiappe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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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루돌프 발덴

Karl Rudolf Walden
산업·생산 운영 소속 미확정 핀란드 핀란드인 1878–1946 ○ 자연사

산업과 전쟁을 잇댄 군사 조직가

만네르헤임은 그를 산업가의 경험과 군대 조직 능력을 함께 지닌 동료로 기억했다.

루돌프 발덴은 핀란드의 제지산업을 키운 기업가이자 군사·국가 조직가였다. 1918년 내전에서 백군의 후방과 보급을 정비한 경험은 만네르헤임과의 긴 협력으로 이어졌고, 겨울전쟁에는 본부 대표로 내각에 참여했다. 그는 전쟁이 끝난 뒤 국방장관이 되어 모스크바 강화조약에 핀란드 측 서명자로 이름을 올렸으며, 영토를 잃고 독립을 지켜야 했던 국가의 전환을 맡았다. 노동운동에 보수적이었던 그의 태도는 겨울전쟁의 공동방위 속에서 노동조합을 협상 상대로 인정하는 방향으로 바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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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하미나 사관학교 졸업, 핀란드 근위대 소위
  • 1918백군 후방지구·본부 후방 참모 책임자
  • 1918–1919핀란드 전쟁장관
  • 1920타르투 평화조약 핀란드 대표
  • 1939–1940겨울전쟁 전시내각 본부 대표
  • 1940–1944핀란드 국방장관, 모스크바 강화조약 서명자
  • 1942보병대장 진급
  • 1944모스크바 휴전협정 핀란드 대표단장
  • 1946사망

히로타 고키

廣田弘毅

군부의 압력 속에서 외교와 책임 사이에 선 정치가

1945년 6월, 그는 말리크에게 다가갔지만 소련은 회담을 늦추며 대일전 준비 시간을 벌었다.

히로타 고키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 출신 정치가로, 국제협조를 표방하면서도 중국 침략과 군부의 대외정책에 제동을 걸지 못한 인물이다. 외무상과 총리를 거치며 군부대신 현역무관제를 되살리고 방공협정을 추진해 민간정부의 자율성을 약화시키는 데 관여했다. 1945년 6월에는 소련의 야코프 말리크 대사와 접촉해 전쟁 종결을 위한 중재 가능성을 타진했지만, 소련은 이미 대일 참전을 준비하며 회담을 지연시켰다. 도쿄 재판에서 전쟁범죄 유죄 판결을 받아 1948년 문관으로는 유일하게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그 책임과 형량은 지금도 논쟁적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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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외무성 입성, 외교관 시험 수석 합격
  • 1923–1926외무성 유럽미주국장
  • 1927–1930주네덜란드 공사
  • 1930–1932주 소련 대사
  • 1933–1936외무상, 사이토·오카다 내각
  • 1936–1937내각총리대신, 외무상 겸임
  • 1937–1938제1차 고노에 내각 외무상
  • 1945말리크 대사와 접촉, 소련 중재 타진

윌리엄 N. 해스켈

William N. Haskell
군사·지휘 미국 국가기관 미국 미국인 1878–1952 ○ 자연사

기근 한복판의 국제 구호 지휘관

1921년 10월 모스크바의 해스켈은 후버에게, 굶주림이 겨울에 절정에 이르러 1,600만 명을 덮칠 것이라고 타전했다.

윌리엄 N. 해스켈은 미 육군 장교로서 전후 국제 구호 행정과 군사 지휘를 결합한 인물이었다. 허버트 후버의 임명으로 1921년부터 1923년까지 소련 러시아에서 미국구호행정의 작전을 이끌며, 기근 속 식량·의료품의 대규모 배급을 조직했다. 그의 임무는 볼셰비키 관료의 통제와 협조를 동시에 상대하면서 구호의 속도와 행정적 책임을 조정하는 일이었다. 이후 뉴욕 주방위군과 미국 민방위 조직을 지휘하며 군과 국가 행정에서 긴 경력을 이어 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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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미 육군사관학교 졸업, 기병 장교
  • 1905육군참모대학 졸업
  • 1906–1907필리핀에서 미군 작전 복무
  • 1916–1917뉴욕 주방위군 제69보병연대 임시 대령
  • 1918–1919미 원정군 포병 복무, 임시 대령 및 공로훈장 수훈
  • 1919–1921ARA 아르메니아 사절단장
  • 1921–1923ARA 소련 러시아 지부장, 러시아 기근 구호 지휘
  • 1926–1940뉴욕 주방위군 사령관, 소장
  • 1944–1945미국 민방위국장

로베르 투숑

Robert Touchon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 1878–1960 ○ 자연사

산악전 경험과 구식 지휘체계의 긴장을 드러낸 프랑스 장군

1914년 크리스마스 밤, 부상당한 채 테트드포 정상에서 숫적으로 우세한 독일군을 상대로 중대를 지휘하며 버텨 두 차례 표창을 받았다.

로베르 투숑은 산악전과 보병 교육으로 명성을 쌓은 프랑스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전투 경험과 알프스 부대 지휘를 바탕으로 승진했다. 1940년 5월 독일군의 돌파 뒤 제6군을 지휘하며 마지노선에서 이동한 부대들을 엔강 방어선에 급히 배치했고, 샤를 드골의 제4기갑사단도 몽코르네 반격에 투입했다. 그러나 전차부대는 충분히 통합되거나 지원되지 못했고, 그의 군은 전선의 틈을 막은 뒤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휴전 뒤 퇴역한 그는 비시의 국가평의회와 리옹 국가재판소에 참여해 군인으로서의 경력과 권위주의 체제에 대한 협력이 겹치는 유산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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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01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알프스 엽병 대대 지휘, 제1차 세계대전 참전과 다수 표창
  • 1928–1930제159보병연대 지휘관, 브리앙송
  • 1932–1935생마상 보병·전차 응용학교 교장
  • 1938–1939리옹 군정장관 및 제14군관구 사령관
  • 1939.11–1940.02제23군단 사령관
  • 1940.02–07제6군 사령관, 엔강 방어와 몽코르네 반격 시기
  • 1941–1942비시 국가평의회 위원 및 리옹 국가재판소 판사

안젤리카 이사코브나 발라바노바

Анжелика Исааковна Балабанова
정치·당 지도 코민테른 소련 러시아 1878–1965 ○ 자연사

무솔리니를 가르치고 그를 배신자라 부른 코민테른의 첫 서기

「그보다 더 비참한 인간은 본 적이 없다」 — 로잔에서 처음 만난 무솔리니를 두고

러시아 태생 이탈리아 사회주의자. 코민테른 초대 서기로 무솔리니에게 마르크스주의를 가르쳤고, 그가 파시즘으로 전향하자 배신자라 규탄했다. 1922년 볼셰비즘과 결별하고 이탈리아 최대주의 분파를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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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러시아를 떠나 브뤼셀 신대학에서 철학·문학 박사 학위 취득
  • 1900이탈리아 사회당(PSI) 입당, 이주노동자 조직화
  • 1912–14PSI 중앙위원, 《아반티!》 편집자로 무솔리니와 협력
  • 1915–16치머발트·킨탈 회의 참석, 반전 국제사회주의 운동
  • 1917러시아로 돌아가 볼셰비키 입당
  • 1919–1920코민테른 초대 서기, 제1·2차 대회 준비
  • 1922–1930볼셰비즘과 결별, 이탈리아로 돌아가 PSI 최대주의 분파 주도
  • 1930–1945PSIm(최대주의 사회당) 지도, 망명 중 반파시스트 활동

폴 레노

Paul Reynaud
정부·행정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인 1878–1966 ○ 자연사

패배 앞에서 항전을 주장한 공화국 정치가

1940년 6월, 그는 프랑스가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폴 레노는 변호사 출신의 프랑스 공화국 정치가로, 경제·식민지·국방 문제에서 독자적인 노선을 보였다. 그는 나치 독일의 위협에 맞서 재무를 전시 체제로 돌리고 기갑·공군 중심의 현대전을 준비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40년 프랑스가 붕괴하자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고 북아프리카에서 전쟁을 계속하려 했지만, 정전파에 밀려 총리직을 사임했고 이후 비시 정권과 독일에 억류되었다. 해방 뒤에도 의원과 헌법 논의의 중심 인물로 활동하며 강한 의회주의를 지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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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파리 변호사단 변론대회 제1서기
  • 1919–1924하원의원, 알프드오트프로방스
  • 1928–1940하원의원, 파리
  • 1930재무장관
  • 1931–1932식민지 장관
  • 1938법무장관
  • 1938–1940재무장관
  • 1940국무회의 의장, 외무·국방장관 겸임
  • 1946–1962국회의원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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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5–1917.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1–1918.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아이모 카얀데르

Aimo Cajander
정부·행정 핀란드 국가기관 핀란드 핀란드인 1879–1943 ○ 자연사

산림 유형론을 세우고 전쟁 전야의 내각을 이끈 핀란드의 산림학자·정치가

겨울전쟁 당시 민간복 차림의 예비병을 가리켜 '모델 카얀데르'라는 말이 돌았다. 총리 재임 중 국방준비 부족의 상징처럼 그의 이름이 붙었으나, 책임이 그에게만 있었던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의 산림학자이자 정치가. 1879년 우시카우풍키에서 태어나 시베리아 답사를 거친 식물학 논문으로 1903년 박사학위를 받았고, 1911년 헬싱키대학교 산림학 교수가 되었다. 1918년 산림청장 대행을 거쳐 1934년 총국장이 되어 죽을 때까지 산림행정을 이끌었다. 1922년과 1924년, 1937년에 세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1933년부터 국민진보당 의장을 맡았다.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했고 1943년 1월 21일 의사당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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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시베리아 답사에 기초한 식물학 논문으로 박사학위 취득
  • 1904헬싱키대학교 식물학 도슨트
  • 1911–1934헬싱키대학교 산림학(임업) 교수
  • 1918–1943산림청(메찰리투스) 지휘, 1918년 청장 대행·1927년 상임 청장·1934년 총국장
  • 1922핀란드 총리, 독립 후 첫 관료 내각 수반
  • 1924핀란드 총리, 제2차 내각 수반
  • 1928–1929국방장관
  • 1929–국민진보당 소속 의원(바사·비푸리 서부 선거구)
  • 1933–1943국민진보당 의장, 당내 좌파로 평가됨
  • 1937–1939핀란드 총리, 최초의 사회민주당·농민당 연립(제3차 내각), 겨울전쟁 개시 뒤 사임

샤를 들레스트랭

Charles Delestraint

기갑전과 지하군을 잇고 사라진 장군

1943년 6월 9일, 지하군 지휘관 비달은 파리 라뮈에트역에서 체포되었다.

샤를 들레스트랭은 제1차 세계대전의 포로 경험과 기갑부대 지휘를 거친 프랑스 장군으로, 현대전에서 전차의 역할을 중시했다. 패전과 휴전 뒤에도 저항을 선택한 그는 샤를 드골의 지명으로 비밀군의 초대 지휘관이 되어 여러 저항운동의 군사 조직을 묶었다. 그는 장 물랭과 협력해 점령지 전역으로 조직을 넓혔지만 1943년 6월 9일 체포되었고, 후임을 정해야 하는 상황은 칼뤼르 회의의 배경이 되었다. 나치 수용소에서 살해된 그는 사후 해방훈장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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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1900생시르 육군사관학교 생도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독일군 포로
  • 1923–1936기갑부대 지휘관, 대령
  • 1936–1939제3기갑여단장, 준장
  • 1939–1940제7군 전차부대 및 제1기갑집단 지휘관
  • 1942–1943비밀군 초대 지휘관, 암호명 비달
  • 1943–1945나츠바일러와 다하우 수감, 처형

레옹 주오

Léon Jouhaux

31년간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한 생디칼리스트, 노벨 평화상 수상자

「노동운동의 역사에서 이보다 큰 승리는 없었다」, 마티뇽 협정 타결 직후 라디오 연설에서, 1936년 6월

성냥 공장 노동자 출신으로 1909년 서른 살에 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이 되어 1940년까지 이끈 프랑스 노동운동의 얼굴. 혁명적 생디칼리슴에서 출발했으나 1914년 신성동맹을 받아들이며 개혁주의로 옮겨 갔고, 베르사유 조약의 노동 조항 기초와 국제노동기구(ILO) 창설에 참여했다. 1936년 재통합된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에 서명했으며, 비시 정권 아래 억류되어 독일로 이송되었다가 살아 돌아와 1948년 공산당 주도의 CGT에서 갈라져 나온 「노동자의 힘」(FO)의 창립 의장이 되었고 1951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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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06오베르빌리에 성냥 공장 노동자, 아버지를 실명시킨 백린에 맞선 파업으로 해고
  • 1909–1940노동총동맹(CGT) 사무총장
  • 1914.08반전 총파업 노선을 접고 「신성동맹」 수용, 조레스 장례식에서 연설
  • 1919–1921베르사유 조약 노동 조항 기초, ILO 창설 참여; CGT 분열로 혁명파가 CGTU로 이탈
  • 1936.03–06재통합 CGT를 이끌고 마티뇽 협정 서명, 조합원 100만에서 400만으로
  • 1940–1945비시 정권의 CGT 해산 뒤 가택연금, 1943년 독일 이송·억류
  • 1947–1948공산당 주도 CGT와 재분열, 「노동자의 힘」(FO) 창립 의장
  • 1947–1954프랑스 경제이사회 의장, 1951년 노벨 평화상 수상
  • 1954.04파리에서 사망

비토리오 암브로시오

Vittorio Ambrosio

왕권 아래에서 추축동맹의 출구를 설계한 장군

“추축국은 포위된 고리 안에 있다. 빠져나와야 한다.”

비토리오 암브로시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기병 장교 출신 장군으로, 두 차례의 세계대전과 이탈리아의 유고슬라비아 침공에서 지휘관으로 복무했다. 1943년 이탈리아군 최고사령관이 된 그는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의 패배 뒤 독일과의 동맹을 지속할 수 없다고 판단하고, 왕과 군부를 중심으로 무솔리니의 실각과 연합국과의 휴전을 추진했다. 그의 선택은 파시즘을 넘어선 민주적 단절이라기보다 왕정과 군 지휘부가 국가의 전쟁 이탈을 관리하려 한 것이었으며, 9월 휴전은 독일군의 이탈리아 점령과 이탈리아군의 혼란을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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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기병 장교로 임관
  • 1911–1913이탈리아-튀르크 전쟁 참전
  • 1915–1918제1차 세계대전 참전, 카포레토 후퇴 엄호
  • 1941제2군 사령관, 유고슬라비아 침공 지휘
  • 1942육군 참모총장
  • 1943-02–1943-11군 최고참모총장, 무솔리니 실각과 연합국 휴전 추진
  • 1943-11육군 감찰총감으로 좌천

얀 돔프스키

Jan Dąbski
외교·국제활동 폴란드 폴란드 폴란드인 1880–1931 ○ 자연사

리가 평화를 설계한 농민운동 외교가

협상이 교착에 빠지자 돔프스키는 상대 수석대표 아돌프 이오페에게 일대일 비공개 교섭을 직접 제안했고, 그것이 막힌 국경 문제를 풀어 예비조약 체결로 이끌었다.

얀 돔프스키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이자 언론인으로, 독립 이후 의회 정치와 외교를 연결했다. 폴란드-소련 전쟁의 종결 국면에서 그는 폴란드 대표단을 이끌며 전쟁 수행의 성과와 동부 국경의 현실 사이에서 타협을 모색했다. 리가에서 아돌프 이오페와 비공개 교섭을 벌여 1920년 10월 12일 예비조약을 성사시켰고, 이듬해 최종 평화조약에 서명했다. 이후에도 농민정당과 의회 민주주의를 지켰지만, 리가 체제가 남긴 우크라이나·벨라루스 분할의 문제는 그의 외교가 감당해야 할 역사적 유산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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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갈리치아 폴란드 농민당 입당
  • 1907–1913빈 의회 담당 기자·『쿠리에르 르보프스키』 공동편집자
  • 1913–1918폴란드 군사·민족위원회 활동, 폴란드 군단 복무
  • 1919–1922제헌의회 의원, 농업위원회 위원
  • 1920–1921폴란드 외무차관, 민스크·리가 평화협상 대표단 수석대표
  • 1921외무부장, 비스와프 비토스 내각
  • 1923–1931농민정당 지도자, 세임 부의장
  • 1931『리가 평화』 회고록 출간, 바르샤바에서 사망

빈차스 카프수카스

Vincas Mickevičius-Kapsukas
정치·당 지도 소속 미확정 소련 리투아니아 1880–1935 ○ 사망

소비에트 리투아니아와 리트벨 정부를 이끈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

그는 레닌이 리투아니아인을 붉은 군대에 더 징집하라고 요구하자, 지지 기반이 무너진다며 이를 거부했다.

리투아니아 공산당의 창설자로 1918년 12월 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의 수반이 되고 1919년 리트벨을 이끌었으나 농민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패배 뒤 코민테른에서 발트 문제를 맡았고 1935년 모스크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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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리투아니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14크라쿠프에서 레닌과 접촉
  • 1917페트로그라드에서 볼셰비키 입당, 리투아니아 문제 인민위원
  • 1918리투아니아 공산당 중앙위원, 용어 《티에사》 편집자
  • 1918–19소비에트 리투아니아 정부 수반, 이어 리트벨 인민위원회 의장
  • 1923–35코민테른 집행위원회에서 활동

쿨레르보 아킬레스 만네르

Kullervo Achilles Manner

1918년 핀란드 적색혁명 정부의 수반, 이후 망명 공산당과 코민테른을 오간 혁명가

1917년 7월 만네르의 "자유로운 핀란드로!"라는 외침과 함께 에두스쿤타는 '최고권력법'을 가결했고, 방청석은 핀란드 국가로 화답했다.

핀란드의 사회주의 혁명가. 1918년 내전 당시 핀란드 인민대표단 의장으로 적색정부를 이끌었고, 패배 후 소련으로 망명하여 핀란드 공산당을 공동 창당하고 14년간 당을 이끌며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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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헬싱키 대학 졸업, 포르보 신문사 기자
  • 1906사민당 입당, 노동자 신문 『튀욀래이넨』 창간·주필
  • 1910–1914, 1917핀란드 의회 의원 (우시마 선거구)
  • 1917핀란드 의회 의장 겸 사민당 의장
  • 1918.01–04핀란드 인민대표단 의장 (적색정부 수반), 4월에는 적위대 총사령관 겸임
  • 1918.08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SKP) 공동 창당
  • 1920–1934핀란드 공산당 의장, 코민테른 집행위원 (1920, 1928 선출)
  • 1934–1935코민테른 중남미 담당 보고관으로 전보
  • 1935–1939체포·10년형 선고, 우흐타-페초라 수용소에서 사망

마누엘 아사냐

Manuel Azaña
정부·행정 스페인 공화파 스페인 스페인 1880–1940 ○ 자연사

내전 내내 공화국을 상징했으나 끝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한 마지막 대통령

「평화, 자비, 용서입니다.」 1938년 7월 18일, 내전 2주년에 바르셀로나 시청에서 아사냐는 74분 동안 유혈 중단과 화해를 호소했으나, 프랑코도 공화국 강경파도 그의 말을 듣지 않았다.

스페인 제2공화국의 마지막 대통령이자 내전기 공화파의 상징적 구심점. 1931년 전쟁장관·총리로 군 개혁과 반교권 정책·농지개혁을 주도했고, 1934년 인민전선을 조직해 1936년 대통령에 올랐으나 내전 내내 실권은 총리들에게 넘어갔다. 1938년 바르셀로나에서 「평화, 자비, 용서」를 외쳤지만 프랑코 진영은 무조건 항복만을 요구했고, 1939년 카탈루냐 함락 뒤 아내와 함께 피레네 산길을 걸어 프랑스로 건너가 사임했다. 공화파 안에서조차 '도주'라는 비난을 받은 이 결정은 공화국의 잔존 정통성을 무너뜨렸고, 그는 망명 1년 만에 점령된 프랑스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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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20마드리드 아테네오 서기
  • 1926공화행동당 창당
  • 1931.04–10전쟁장관
  • 1931.10–1933.09총리 겸 전쟁장관
  • 1936.02–05총리
  • 1936.05–1939.02공화국 대통령

샤를 욍치제르

Charles Huntziger
군사·지휘 프랑스 국가기관 프랑스 프랑스계 1880–1941 ○ 추락사

패전과 정전의 군사적 논리를 대표한 장군

그는 1940년 6월 22일 콩피에뉴 숲에서 프랑스를 대표해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샤를 욍치제르는 프랑스 식민보병 출신의 장군으로, 제1차 세계대전의 발칸 전선과 전간기 해외 지휘·협상에서 경력을 쌓았다. 1940년 세당 방면 제2군을 지휘하며 독일군의 돌파를 막지 못했고, 그 판단은 프랑스 패전의 책임을 둘러싼 논쟁 속에서 비판받았다. 그는 전투를 계속할 수 있는 한계가 임박했다고 보았으며, 페탱 정부의 전권대표단 의장으로 6월 22일 정전협정에 서명했다. 이후 비시의 국방장관이 되어 협력국가의 군사 재편을 맡았고, 1941년 비행기 사고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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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생시르 졸업, 식민보병 소위
  • 1918동부연합군 작전참모, 바르다르 공세 계획
  • 1924–1928톈진 프랑스 조계 주둔군 사령관
  • 1934–1938레반트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39–1940제2군 사령관, 세당 방면
  • 1940제4군집단 사령관, 6월 22일 정전 프랑스 대표단 의장
  • 1940–1941비시 국방장관, 정전군 총사령관

리하르트 뮐러

Richard Müller
사회운동·조직 소속 미확정 독일 독일 1880–1943 ○ 자연사

베를린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1918년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지낸 뒤 혁명사를 쓴 선반공

1918년 11월 혁명 때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부터 반전 정치파업을 조직했다.

튀링겐 농촌 출신의 선반공으로 베를린 금속노조 선반공 부문의 지도자가 되었다. 전쟁 중 공장 대표들의 비밀 조직인 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며 1916년 리프크네히트 체포 항의 파업, 1917년 4월과 1918년 1월의 대중 파업을 조직했다. 1918년 11월 9일 밤 제국의회를 점거해 평의회 선거를 소집했고, 대베를린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으로 평의회 정권의 형식상 수반이 되었다. 뒤에 공산당에 들어갔다가 떠났고, 1924~1925년 세 권짜리 혁명사를 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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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혁명적 직장위원을 이끌고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는 정치파업을 조직하기 시작했다.
  • 1918독일 혁명기에 노동자·병사 평의회 집행위원회 의장을 맡았다.

마쓰오카 요스케

松岡洋右

제국 일본의 대륙외교를 밀어붙인 외교가

1941년 4월 모스크바를 떠날 때, 스탈린이 직접 역에 나와 그를 전송했다.

마쓰오카 요스케는 일본 제국의 외교관이자 정치가로, 만주사변 이후 일본의 대륙 진출과 국제적 고립을 함께 상징한 인물이다. 그는 국제연맹에서 만주국을 옹호하며 일본의 탈퇴를 이끌었고, 만철 총재를 거쳐 외무상이 되었다. 1941년에는 독일·이탈리아와의 동맹을 추진하는 한편 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을 체결했지만, 독소전쟁 뒤 대소전쟁을 주장하다 실각했다. 전후 전범으로 구금되었으나 재판 중 병사해 판결을 받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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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외무성 외교관 시험 합격, 외무성 입성
  • 1919파리강화회의 일본 대표단 수행원
  • 1922–1930남만주철도 이사, 1927년 부총재
  • 1933국제연맹 일본 대표단 수석전권대표, 일본 탈퇴 선언
  • 1935–1939남만주철도 총재
  • 1940–1941제2차 고노에 내각 외무대신, 삼국동맹 추진
  • 1941몰로토프와 일소중립조약 서명
  • 1941제3차 고노에 내각 출범과 함께 외무대신에서 물러남