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4년 1월 내내 그의 지면은 연루된 의원의 이름을 하나씩 불러냈고, 2월 6일 아침 신문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에게 호소했다. 그날 밤 광장에 모인 대열의 앞자리에는 악시옹 프랑세즈의 행동대 카믈로 뒤 루아가 있었다
소설가 알퐁스 도데의 아들로 태어나 의학을 공부하다 문필로 옮겨 간 논객으로, 모라스와 함께 《악시옹 프랑세즈》를 창간하고 그 논조를 만들었다. 1919년부터 1924년까지 파리 선출 하원의원을 지냈으며, 인신공격과 고발을 무기로 삼는 그의 문체는 프랑스 정치 언어에 한 세대의 흔적을 남겼다. 1923년 아들 필리프의 죽음을 경찰의 소행이라 주장하며 벌인 소송에서 명예훼손으로 유죄를 받고 1927년 벨기에로 달아났다가 1930년 사면으로 돌아왔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에서 그는 연루된 정치인들의 이름을 날마다 지면에 올려 「도둑들의 공화국」이라는 구도를 만들었고, 이 지면 공세가 2월 6일 광장으로 이어졌다.
"요새도, 대포도, 외국의 원조도, 모든 병사 각자가 자신이 조국의 수호자임을 알지 못한다면 아무 소용이 없다."
러시아 제국군에서 30년간 복무한 스웨덴계 핀란드 귀족으로, 러일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을 거쳐 중장까지 올랐다. 1918년 핀란드 내전에서 백군 총사령관으로 적위대를 진압하고 섭정이 되어 독립을 공고히 했으며, 런던 타임스에 "핀란드의 역사적 사명은 볼셰비즘을 몰아내는 것"이라고 말했다. 겨울전쟁과 계속전쟁에서 총사령관으로 수적으로 우세한 소련군에 맞서 싸웠고, 독일과 공동전선을 폈으나 레닌그라드 공격은 거부했다. 1944년 대통령에 취임해 소련과 평화협정을 체결하고 라플란드 전쟁으로 독일군을 축출하여, 동유럽에서 유일하게 점령을 면한 국가로 핀란드를 남겼다.
막심 베강은 제1차 세계대전에서 페르디낭 포슈의 핵심 참모로 연합군 작전을 조율하고 1918년 휴전 조건을 독일 대표단에 낭독한 프랑스 장군이다. 전간기에는 폴란드·레반트에서 프랑스의 군사적 영향력을 수행했으며, 1940년 5월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어 독일군의 돌파 뒤 본토에서 계속 싸우기 어렵다고 판단하고 휴전을 권고했다. 그는 비시 정부와 북아프리카에서 제한적 협력을 택했지만, 유대인 박해 정책을 가혹하게 집행했고 독일과의 전면 협력에는 거리를 두었다. 전후 반역 혐의로 구금되었다가 1948년 무혐의 처분을 받았으며, 이후 페탱의 기억을 옹호했다.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키워 1919년 좌파 봉기를 진압한 SPD 국방장관
1919년 베를린 봉기 진압을 지휘해 자유군단과 군대를 투입하고, 3월 사격 명령으로 군의 즉결 처형을 허용했다.
브란덴부르크의 바구니 제조공 출신으로 SPD 언론인을 거쳐 1906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고 군사 문제 전문가로 알려졌다. 1918년 11월 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 봉기를 수습하고 총독이 되었다. 크리스마스 위기 뒤 USPD가 떠난 인민대표평의회에 들어가 군사를 맡았고, 「누군가는 사냥개가 되어야 한다」며 자유군단을 조직해 1월 봉기와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19년 2월 초대 국방장관이 되었으나 1920년 카프 폭동 뒤 물러났다. 하노버 주지사를 지냈고 1944년 7월 음모 뒤 체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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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0년대사회민주주의 운동과 바구니 제조공 노동조합을 조직하고 브란덴부르크 사회민주협회 의장을 지냈다.
1906년제국의회 의원으로 선출되어 해군·육군 문제 전문가로 활동했다.
1918년 11월–12월정부 대표로 킬에 파견되어 수병들과 노동자·병사 평의회를 이끌었고, 12월 28일 군·해군 전국위원이 되었다.
1919년 2월–1920년라이히스베어 장관으로 임명되어 자유군단과 군대를 동원해 1월 봉기 및 베를린의 3월 투쟁을 진압했다. 1920년 카프 폭동 뒤 사임했다.
1920년–1933년프로이센 하노버 주의 고등행정관을 지냈으며, 1933년 9월 직업공무원 복구법에 따라 해임되었다.
1945년 8월 10일, 그는 교착한 회의에서 “이제 제가 어전에 나아가 성의를 여쭙고, 그 뜻으로 회의의 결정을 삼고자 합니다”라고 제안했다.
스즈키 간타로는 일본 해군 대장 출신 정치가로, 천황의 시종장과 추밀원 의장을 거쳐 전쟁 말기의 총리가 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는 군부의 전쟁 수행 노선을 받들었지만, 1945년 내각과 최고전쟁지도회의의 대립을 관리하며 전쟁을 끝낼 통로를 열었다. 원폭 투하와 소련의 대일 참전 뒤에도 이른바 ‘Big Six’의 교착은 계속되었고, 스즈키는 천황 주재 회의에서 결정을 천황의 재가에 맡기는 절차를 밀어붙였다. 그 결과 일본 정부는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했지만, 그 과정은 침략전쟁의 책임과 군부의 저항을 지운 것이 아니었다.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자본주의는 스스로 개혁할 수 없다」: 93세에 미국 공산당에 입당한 흑인 해방운동의 아버지
「공산주의는 승리할 것이다. 나는 그 날을 앞당기는 데 일조하고 싶다.」 —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제출한 입당 신청서에서
미국의 사회학자, 역사가, 범아프리카주의자이자 20세기 가장 중요한 아프리카계 미국인 지식인이다. NAACP 공동 창립자로서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를 24년간 편집하며 흑인 민권운동의 방향을 이끌었고, 『흑인의 영혼』과 『미국의 흑인 재건』을 통해 미국 사회학과 역사학의 지형을 바꾸었다. 자본주의를 인종차별의 근본 원인으로 보았으며, 마르크스주의와 범아프리카주의의 결합을 추구했다. 1961년 93세의 나이로 미국 공산당에 입당했고, 콰메 은크루마의 초청으로 가나에 정착해 『아프리카나 백과사전』 편찬에 착수하던 중 그곳에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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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5–1897윌버포스대·펜실베이니아대 연구원, 『필라델피아 니그로』(1899) 출간
1897–1910애틀랜타대 교수, 『흑인의 영혼』(1903) 출간, 나이아가라 운동 창립(1905)
1910–1934NAACP 공동 창립, 기관지 『더 크라이시스』 편집장; 범아프리카회의 조직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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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의회가 호르티를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1940헝가리가 추축 동맹에 가입했다. 호르티 정권은 반유대주의 법률과 강제노동 제도를 운영했다.
1941헝가리가 추축국의 소련 침공에 가담했고, 정부는 유대인 2만 명 이상을 점령지 갈리치아로 강제 이송했다.
1944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5월부터 7월까지 유대인 약 43만 7천 명을 이송했다. 호르티는 7월 이송 중단을 명령하고 10월 소련과 휴전을 선언했으나 독일에 구금되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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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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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배이뇌 보이온마는 핀란드의 역사학자이자 교수, 사회민주당 정치가로 독립 초기 공화국의 형성에 관여했다. 그는 노동자 교육기관을 세우고 의회에서 외교와 사회정책을 다루며 학문을 대중적 정치 활동과 결합했다. 1940년 겨울전쟁을 끝낸 모스크바 강화조약 협상에서 핀란드 대표단의 사회민주당계 인사로 서명에 참여했으며, 전쟁과 강대국 사이에서 타협해야 하는 핀란드의 조건을 드러냈다.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투르 대회에서 SFIO 다수를 코민테른으로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을 세운 『뤼마니테』 지도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해 다수파의 분열을 이끌고 프랑스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1923년 루르 점령 반대로 체포됐으나 상원 고등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브르타뉴 팽폴 출신으로 1891년 게드의 프랑스 노동자당에 들어갔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에 참여했다. 1918년부터 평생 『뤼마니테』를 이끌었다. 전쟁 뒤 지지자들이 10월 혁명 쪽으로 기울자,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코민테른 가입을 이끌어 프랑스 공산당의 창립자가 되었다. 1923년 프랑스의 루르 점령을 비난했다가 투옥되었다. 하원 의원과 상원 의원을 지내며 공산당의 원로로 남았고, 1958년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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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2쥘 게드와 폴 라파르그가 세운 프랑스 노동자당의 지롱드 지부에 가입했다.
1905통합 사회당(SFIO) 창당 대회에 참여하고 당 선전 담당자로 활동했다.
1918『뤼마니테』의 책임자로 선출되어 1958년 사망할 때까지 신문을 이끌었다.
1920투르 대회에서 SFIO의 코민테른 가입을 지지하고 분열 뒤 프랑스 공산당의 전신인 프랑스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지부(SFIC) 창립에 참여했다.
1923프랑스의 루르 점령에 반대한 뒤 체포되어 상원 고등법원에 회부됐으나, 법원은 불기소 결정을 내렸다.
독일의 아나키스트 사상가이자 바이에른 혁명 정부의 교육 담당자로, 1919년 진압군에 살해되었다.
국가는 사회적 관계다. 새로운 공동체를 만들 때 국가는 다른 사회적 관계로 대체된다.
란다우어는 국가를 단순히 전복할 권력기구가 아니라 사회적 관계로 보고, 자발적 공동체를 만들어 이를 대체할 수 있다고 주장했다. 1908년 사회주의자 동맹을 세워 협동조합과 공동체를 통한 사회주의 실천을 모색했다.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했으며, 카를 아이스너의 요청으로 1918년 뮌헨에 와 혁명 정부를 지원했다. 1919년 4월 바이에른 레테 공화국에 참여해 계몽·공교육 담당 인민위원을 맡았고, 공화국 진압 뒤 체포되어 5월 2일 스타델하임 교도소에서 살해되었다.
전쟁에 반대하며 국제주의 사회주의자들을 조직했고, 프랑스 공산당 창당 과정에서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 서기로 활동했다.
교사로 일하며 1901년 사회당에 가입했고, 교원 노동조합 활동에 참여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전쟁 협력에 반대하고 짐머발트의 입장을 지지했으며, 국제관계 재개 위원회와 제3인터내셔널 위원회의 서기를 맡았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창당된 프랑스 공산당의 초기 지도부에 참여했다.
「대다수, 민중은 떠날 수 없습니다. 나는 늘 노동자들과 함께 살아왔고, 그들과 함께 남을 것입니다. 그들의 운명이 곧 나의 운명입니다」, 사회당 기관지 《라 보스》에, 1939년 3월
마드리드 대학 철학 교수로 출발해 1925년 파블로 이글레시아스의 뒤를 이어 사회당(PSOE)과 UGT를 이끈 마르크스주의 수정파였다. 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1931)을 지내며 온건한 의회주의 노선을 고수했고, 1934년 10월 무장봉기에 반대하며 당내 주류에서 밀려났다. 내전 발발 후에도 마드리드에 남아 평화 협상을 모색했고, 1939년 3월 카사도 대령의 네그린 전복에 합류해 국방평의회 외무담당이 되었으나 프랑코는 무조건 항복만을 받아들였다. 다른 평의회 구성원들이 망명하는 날에도 홀로 마드리드에 남아 '노동자들과 늘 함께 살아왔으니 그들의 운명을 함께하겠다'고 말했고, 프랑코 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아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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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PSOE·UGT 입당; 마드리드 대학 논리학 교수 임용
1917혁명적 총파업 위원회 참여, 종신형 선고 후 1918년 사면
1925–1931PSOE·UGT 의장;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에 협조 노선
1931–1933제2공화국 제헌의회 의장
193410월 무장봉기에 반대, UGT 의장 사임
1937.05조지 6세 대관식 공화국 대표로 런던 방문, 이든과 평화 중재 모색
1939.03카사도 쿠데타 합류, 국방평의회 외무담당
1939.03–1940.09프랑코군에 체포, 군사재판서 30년형 선고, 카르모나 감옥에서 사망
11월 혁명의 혁명정부를 이끌며 평의회 운동을 의회 민주주의로 돌리고 초대 대통령이 된 SPD 지도자
1918년 11월 혁명 때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고 국민의회 선거를 추진했다. 1919년 초대 독일 공화국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1925년까지 재임했다.
하이델베르크의 재단사 집안에서 태어나 마구공으로 일하다 브레멘에서 당 활동가가 되었고, 1913년 베벨의 뒤를 이어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전쟁 중 전쟁공채와 「성내 평화」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9일 재상직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고, 그날 밤 그뢰너 장군과 비밀 협약을 맺어 군의 지지를 얻었다. 1919년 2월 국민의회에서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좌우의 봉기를 군과 자유군단, 헌법 제48조의 긴급명령으로 눌렀다. 1925년 임기 중 맹장염 수술 뒤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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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독일 사회민주당(SPD)에 입당했다.
1905SPD 당 집행부에 선출되었다.
1912독일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13SPD 공동의장으로 선출되었다.
191811월 혁명 때 국가수상 막스 폰 바덴에게서 국정을 넘겨받아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끌었다.
그리스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왕정과 반의회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적 국가 질서를 추구했다. 1936년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로 의회를 정지하고 8월 4일 체제를 세워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좌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국가 개입과 청년 조직을 통해 사회를 동원하려 했으며, 그의 체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으로 논쟁되어 왔다.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해 전쟁을 이끌었지만, 1941년 독일 침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