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38년 초 노보시비르스크에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하자마자, 형사 요원들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와 호송에 동원하라는 요구를 거부했다.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와 한 달 내내 충돌한 끝에 그는 전출되었고, 넉 달 뒤에는 그 자신이 체포되었다.
1919년부터 체카에서 일한 고참 요원으로, 1935년부터 이바노보주 밀리치야(경찰) 국장을 지냈고 1938년 2월 카자흐 SSR 내무인민위원부 부인민위원 겸 밀리치야 총국장이 되었다. 그 직전 노보시비르스크 밀리치야 국장으로 부임했을 때는 밀리치야 인력을 대규모 작전의 체포 업무에 동원하라는 주 NKVD 국장 고르바치의 요구를 거부해 한 달 만에 자리에서 밀려났다. 1938년 6월 알마아타에서 체포되어 여러 나라의 간첩이라는 자백을 강요당했으나 아홉 달 넘게 버텼고, 고문 끝에는 자신이 만주국 황제 푸이의 사생아라는 식의 일부러 터무니없는 진술서를 써서 수사의 조작성을 기록에 남겼다. 1940년 10년형을 선고받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2년 풀려나 사병으로 참전했으며, 1950년대 중반 복권되었다. 만년에 쓴 회고록 「NKVD 내부에서: 체키스트의 수기」(1995년 사후 출간)는 지휘부급 생존자가 대숙청기 NKVD 내부를 증언한 보기 드문 기록으로, 역사가들이 널리 인용한다.
상세 이력 보기
1919체카(전러시아 비상위원회) 입부, 서부전선 사단 특별부 정찰 요원
1922모스크바 주 GPU 비밀정치부 근무, 불라노프의 보좌관
1925–1927외무인민위원부 암호부와 소프키노에서 근무
1930–1931중앙아시아·레닌그라드 군관구 OGPU 전권대표부 근무
1931–1933히비노고르스크 GPU 국장, 이후 타타르 자치공화국 OGPU 근무·카잔 형사수사
1942년,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는 「베르흐-이세츠키 제철소에서 전채요리와 술이 곁들여진 야회를 개최한 건에 대하여」라는 결의를 채택했다. 공장 간부들의 연회를 규탄한 이 결의는 안드리아노프의 강경한 통치 스타일을 극명하게 보여준다.
바실리 안드리아노프는 스탈린 시대 후기 소련의 주요 지역당 지도자로, 스베르들롭스크 주당위원회 제1서기(1939~1946)와 레닌그라드 주당위원회 제1서기(1949~1953)를 지냈다. 전시 스베르들롭스크에서 신타길 제철소와 스레드네우랄스크 제련소 건설을 진두지휘하고 방산 생산을 총괄하여 네 개의 레닌 훈장을 받았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 후 말렌코프의 추천으로 레닌그라드에 파견되어 대규모 당·국가 기구 개편을 주도했고, 1952년 10월 스탈린에 의해 당 중앙위원회 간부회(정치국) 위원으로 선출되었다. 스탈린 사후인 1953년 3월 간부회에서 제외되고 곧 레닌그라드 당직에서도 해임되었으며, 국가통제부 차관을 거쳐 1956년 연금 생활에 들어갔다.
정치국에서 나는 스탈린 시절 버릇대로 '지도자' 귀에 거슬려도 내 생각을 말했다. 흐루쇼프는 처음엔 조용히 듣더니, 점차 냉담해졌고 마침내 노골적 적의로 돌아섰다.
1938년부터 20년 넘게 소련 농업을 지휘하며 전시 식량 공급과 전후 복구를 관리했다. 1939년 전연방농업전시회를 조직해 집단농업의 성과를 선전했고, 1953년 말 흐루쇼프의 처녀지 개간 정책의 토대가 된 보고서를 직접 작성했다. 그러나 흐루쇼프의 급진적 개혁(옥수수 강제 재배, 개인 텃밭 철폐, 티미랴제프 농업아카데미 지방 이전)에 공개 반대하며 밀려났고, 이후 인도·유고슬라비아 대사로 12년간 외교관 생활을 했다.
1937년 2월 26일, 『이즈베스티야』 1면에 33세의 신임 고스플란 의장 스미르노프의 사진이 실렸다. 8개월 뒤 그는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체포되었다.
소련의 경제 관료이자 계획 이론가로, 고스플란 자본건설 부문과 종합계획국을 거쳐 1937년 2월 고스플란 의장에 올랐다. 메즐라우크의 최측근으로서 그를 대신해 임명되었으나, 대숙청이 절정에 달한 8개월 동안 계획기구를 이끌다 1937년 10월 체포되었다. 반혁명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938년 7월 총살되었으며, 1차 5개년계획을 설계한 계획 관료들마저 숙청의 대상이 된 순간을 상징하는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1916–1920철도 공장 제도 보조, 농업 코뮌 활동, 콤소몰 지도원
1921–1924심비르스크 콤소몰 정치교육부장·서기, 시당 위원회 선전선동부장
1924–1929크룹스카야 공산주의교육 아카데미·경제연구소 대학원 수학, 최고경제회의 자본건설부장
북극점-1 부빙기지 귀환 기념 크렘린 연회에서 스탈린이 코사레프와 잔을 부딪히고 껴안아 입맞춘 뒤 귀에 속삭였다. 코사레프가 아내 마리야에게 전한 그 말은 '배신하면 죽인다'였다. 회고록과 유. 보린의 저술로 전해지는 일화다.
모스크바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콤소몰 창립과 함께 가입하고 1919년 볼셰비키당에 들어갔다. 내전 참전 여부에 대해서는 적군에 자원 입대했다는 기록과 병을 이유로 복무를 피했다는 기록이 엇갈린다. 25세에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가 되어 스파르타크 협회를 세웠고, 대숙청기에는 콤소몰원 14만 1천여 명 제명을 관장했으며 1937년 2월 부하린·리코프의 체포와 사형에 찬성표를 던졌다. 미샤코바 사건 뒤 1938년 11월 콤소몰 중앙위 전원회의에서 해임되고 11월 28일 체포되었으며, 로도스의 고문에도 자백하지 않은 채 1939년 2월 23일 레포르토보 교도소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복권되었다.
국방위원회 회의에서 보즈네센스키는 스탈린의 의견에 정면으로 반대하며 산업이 감당할 정확한 수치를 제시하곤 했다. 바실렙스키 원수는 "그의 말이 결정적이었고, 거의 틀리지 않았다"고 증언했다.
소련의 경제학자이자 정치국원. 35세에 고스플란 의장이 되어 대조국전쟁 시기 소련 전시 경제 계획을 총괄했으며, 국가방위위원회 위원으로 산업 대피와 군수 생산 전환을 지휘했다. 1947년 『전시 소련경제』로 스탈린상을 수상하고 전후 경제 부흥 계획을 주도하며 스탈린의 총애를 받는 차세대 지도자로 부상했다. 즈다노프 사후 말렌코프·베리야와의 권력 투쟁에서 밀려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몰락, 1950년 처형되었다.
1949년 8월 13일, 게오르기 말렌코프의 집무실로 호출된 포프코프는 그 자리에서 체포되었다. 레닌그라드 사건의 시작이었다.
블라디미르 현 출신의 소비에트 당 간부로, 목수 견습생에서 레닌그라드 시·주당 제1서기까지 오른 노동자 출신 당료였다. 1939년부터 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으로서 872일 포위전 내내 식량 공급, 방역, 에너지 수송, '생명의 길' 운영을 지휘하며 도시 방어의 핵심 실무를 맡았다. 전후 배급제 폐지와 도시 재건을 진두지휘했고 1946년 제1서기로 승진해 소련 제2도시 당 조직을 총괄했다. 1949년 1월 주최한 레닌그라드 무역박람회가 말렌코프의 공격을 받으며 '레닌그라드 사건'의 발단이 되었고, 그해 8월 말렌코프 집무실에서 체포되어 1950년 처형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상세 이력 보기
1925–1926블라디미르 볼로스트 콤소몰 서기
1926–1937목수·연구직, 레닌그라드 공과대학 졸업
1937–1938레닌그라드 레닌스키 구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1938–1939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제1부의장
1939–1946레닌그라드 시 소비에트 집행위원장 — 포위전 내내 도시 방어·보급 총괄
1941–1944방어위원회 위원·방공군 군사평의회 위원·방역위원장
1946–1949레닌그라드 주·시당 제1서기,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위원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7년 당적 복권)
1942년 아내가 "면도할 거예요?"라고 묻자 쿠르차토프는 "승리한 다음에"라고 답했다. 소련 최초의 원자폭탄이 터질 때까지 7년간 수염을 깎지 않았고, 동료들은 그를 그냥 '보로다(수염)'라고 불렀다.
소련 핵물리학 공동체를 구축하고 원자력 사업 전체를 지휘한 과학 책임자였다. 1930년대 LFTI에서 동료들과 유럽 최초의 사이클로트론을 건설했고, 1943년 원자폭탄 계획의 과학 지도자로 임명되어 1949년 첫 핵실험을 이끌었다. 그의 연구소는 이후 수소폭탄, 세계 최초의 원자력발전소(오브닌스크, 1954), 원자력 쇄빙선까지 개발했다. 무기 경쟁의 한복판에서 평화적 원자력 이용을 추진한 과학자였다.
베리야가 전화로 "우리는 당신을 기관에서 쫓아내고 체포해 수용소에서 썩게 할 것이며, 가루로 만들어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고 말했다.
대조국전쟁 시기 30만 빨치산을 지휘한 우크라이나 파르티잔 사령부 책임자로, 이후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내무장관을 지낸 소비에트 보안기관 간부다. 전후 서부 우크라이나에서 우크라이나 반란군(UPA) 진압을 직접 지휘하며 대규모 체포를 주도했고, 스탈린 사후 라브렌티 베리야에 의해 르비우 주 경찰청장으로 좌천되었다. 1953년 6월 베리야가 당 기관을 우회해 MVD의 독자적 권력을 구축하려 한다고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경고했으며, 베리야로부터 '수용소 먼지로 만들어 버리겠다'는 협박을 받은 이 사건은 베리야 체포 결의의 결정적 방아쇠가 되었다.
1964년 부고에서 코시긴과 미코얀은 그가 소련의 "재정·신용 체계를 조직하고 강화하는 데 중대한 기여를 했다"고 평가했다.
로스토프 철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1920년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하고 1923년 당에 들어갔다. 돈 강과 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11년간 실무를 쌓은 뒤 레닌그라드 재무아카데미를 마치고 타타르 자치공화국, 러시아공화국, 연방 차원의 재정 요직을 거쳐 1948년 소련 국가은행 총재가 되었다. 10년간 고스방크를 이끌며 1947년 화폐개혁의 후속 집행, 전후 복구 자금 배분, 1950년대 소비재·주택 건설 확대 국면의 신용 공급을 관리했고, 1958년 흐루쇼프 체제 아래 강등되어 1960년 병으로 퇴직했다. 노동자 출신 재정 관료가 스탈린 후기에서 탈스탈린화 초입까지 소련 통화·신용 시스템의 일상적 작동을 책임진 인물이다.
상세 이력 보기
1920–1923붉은 군대 자원입대, 돈 군소함대 복무 후 철도 형사 및 식량인민위원부 열차 사령관
1923–1934돈·북캅카스 지역 재정기관에서 금융 대리인·감독관·구·시 재정과장으로 승진
임종을 앞둔 베크의 병실에 금서 『새로운 임명』 독일어판이 몰래 전해졌고, 더 이상 읽을 수 없던 그는 책을 베개 곁에 놓아 달라고 한 뒤 표지를 쓰다듬었다.
사라토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사단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조국전쟁에서 모스크바 민병대에 참가한 뒤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판필로프 사단의 방어전을 기록한 《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1944)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애독서가 된 소비에트 전쟁문학의 고전이다. 전후에는 금속노동자와 기술자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중공업 관료제를 소설화한 《새로운 임명》(1965)은 당대에 출판 금지되어 1986년에야 소련에서 공개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가로 기억된다.
1937년, 나다라야는 전 그루지야 중앙위원회 서기 삼손 마물리야를 심문 탁자에 묶어 일주일 넘게 구타한 끝에 오르조니키제에 대한 허위 자백을 받아냈다. 1955년 재판에서 스스로 실토한 내용이다.
그루지야 서부 세피에티 마을 출신으로, 1937년 대숙청 정점에서 그루지야 NKVD 내부감옥을 운영하며 수감자 구타와 허위 사망진단서 작성에 관여했다. 1939년 베리야의 개인 경호 부책임자가 되어 모스크바로 올라갔고, 1953년 경호 책임자에 올랐다. 베리야 몰락 후 체포되어 1955년 트빌리시 공개 재판에서 10년형을 선고받았으며, 여섯 고위 피고와 달리 처형을 면했다. 1965년 모르도바 수용소에서 석방되었고 1982년 모스크바에서 사망했다.
본래 성은 아르기로풀로다. 첫 남편 이반 자르니츠키는 1920년대 북캅카스 오게페우 국경수비대 참모장을 지낸 체키스트였고, 뒤에 체키스트 세르게이 미로노프의 둘째 아내가 되었다.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고 조카딸을 입양했다. 미로노프가 대숙청 끝에 총살된 뒤 1941년 7월 그의 사촌 M. D. 코롤과 결혼했다. 1942년 체포되어 교정노동수용소 5년형을 받았고 1958년 복권되었다. 만년의 구술 회상은 미라 야코벤코가 『아그네사: 스탈린 체키스트 아내의 고백』으로 엮었다.
“1941년 이후 우리는 전차 생산을 5배 이상 늘렸습니다. 이는 전체 집단의 엄청난 창조적 노력 덕분입니다.” — 1944년 당 활동가회의 연설에서
하리코프 및 우랄 전차공장 책임자로서 T-34의 대량생산 체제를 확립했으며, 전쟁 기간 중 단일 공장에서 약 3만 5천 대의 T-34를 생산해 소련 전차 전력의 중추를 형성했다. 전후 수송기계공업장관을 거쳐 국가과학기술위원회 의장과 발명발견위원회 의장을 지내며 소련의 특허·발명 제도를 국제적 수준으로 정비했다. 1938년 전임자가 숙청된 직후 부임해 하리코프 공장을 안정시키고 코시킨·모로조프 설계국을 전폭 지원하여 T-34의 실현을 가능케 한 인물로 평가된다.
그는 모스크바로 보내는 4,004단어의 전문에서 이렇게 썼다: '그러한 전개는 전 세계에서 미국 경제적 지위의 심각한 강화를 의미하며, 미국의 세계 지배로 가는 하나의 단계가 될 것이다.'
소련 외교관이자 미국 주재 대사(1946–1947). 1946년 9월 조지 케넌의 '장전보(長電報)'에 대응하여 4,004단어의 '노비코프 전보'를 작성해 모스크바로 송부했다. 이 전문에서 그는 미국의 전후 외교정책이 독점자본의 세계 패권 추구이며 소련이 그 주요 장애물로 간주되고 있다고 분석했다. 전문은 몰로토프의 지시로 작성되었으며 상당 부분 그의 공동 집필이었다. 냉전의 기초 문서로 평가받는 이 전보는 1990년 글라스노스트 시기까지 비밀로 분류되어 있었다. 그는 1943~1944년 카이로 주재 대사로 근무하며 시리아·레바논과의 외교 관계 수립에 기여했으나, 워싱턴 대사직에서 1947년 돌연 해임된 후 외교 무대에서 조용히 사라졌다.
1943년 쿠르차토프의 긴급 호출은 그녀를 피란지에서 원자력 계획의 최전선으로 돌려보냈다.
즈나이다 예르쇼바는 방사성 원소의 산업적 생산과 핵화학을 연결한 소련의 방사화학자였다. 1943년 이고리 쿠르차토프의 요청으로 카자흐스탄 피란지에서 모스크바로 돌아와, 기레드메트에서 우라늄 카바이드와 금속 우라늄 생산을 이끌었고 이 성과는 F-1 원자로 연구에 쓰였다. 이후 플루토늄·폴로늄·삼중수소 기술을 발전시키며 핵무기와 우주용 동위원소 전원이라는 서로 다른 국가 사업에 기여했다.
1954년 1월, 볼린의 최고재판소 총회는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을 반환할 수 있다는 해석을 내놓았다. 당 지도부는 곧바로 이를 오류라고 규정했고, 그 해석은 3년 후 그를 실각시킨 결정적 원인이 되었다.
쿠반의 가난한 어부 가정에서 아홉째 아이로 태어나 내전에 참전하고, 라브파크와 레닌그라드대학 법학부를 거쳐 프롤레타리아 법조인으로 성장했다. 1939년 RSFSR 검찰총장에 올라 대숙청 후반기와 전쟁기 검찰을 이끌었고, 194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이 되어 1952년까지 사법기관 숙청을 직접 조직·감독했다. 그러나 1954년 1월 최고재판소 총회가 재활된 시민에게 주택 반환 가능성을 시사한 해석을 내놓자 당 지도부는 이를 오류로 규정했고, 결국 1957년 2월 해임되었다. 이후 국가중재위원회 부위원장으로 12년간 재직하다 104세까지 생존해 소련 최고위 법조인 중 가장 오래 산 인물로 남았다.
1937년 6월 20일, ANT-25기가 밴쿠버의 피어슨 비행장에 착륙하자 미군 장교가 물었다. "어디서 왔소?" 치칼로프가 답했다. "모스크바에서, 북극을 넘어서요."
소련의 시험비행사이자 1930년대 소비에트 항공력의 상징. 폴리카르포프 설계국에서 I-15, I-16 전투기를 시험하며 상승 스핀과 슬로 배럴 롤이라는 새 곡예비행 기동을 창안했다. 1936년 모스크바-우드 섬 9,374km 무착륙 비행으로 소비에트 연방영웅 칭호를 받았고, 이듬해 같은 ANT-25기로 모스크바-북극-밴쿠버(미국) 8,811km를 63시간 만에 횡단하며 북극 항로를 개척했다. 스탈린이 직접 공항에 마중 나올 만큼 대중적 영웅이 되었으나, 1938년 12월 서둘러 추진된 I-180 전투기 초도비행에서 엔진 정지로 추락해 34세로 사망했다.
1938년 11월, 요양원에 있는 그에게 남편이 루미날을 보냈다. 며칠 뒤 그는 과다 복용으로 숨졌다.
고멜의 상인 가정에서 예브게니야 파이겐베르크로 태어나, 하유틴·외교관 글라둔과의 결혼을 거쳐 1931년 예조프와 결혼했다. 1930년대에는 화보지 《건설 중의 소련》의 부편집인으로 사실상 편집을 이끌었고, 바벨과 숄로호프, 예이젠시테인 같은 문화계 인사들이 드나드는 모스크바 살롱을 열었다. 1933년 딸 나탈리야를 입양했다. 1938년 남편의 몰락이 다가오자 가까운 친구들이 잇따라 체포되었고 그 자신의 과거를 고발하는 진정서도 접수되었다. 심한 우울 상태로 요양원에 들어갔고, 남편이 보내 준 수면제 루미날의 과다 복용으로 1938년 11월 21일 사망했다. 돈스코이 묘지에 묻혔다.
레닌그라드 공업을 책임진 2인자, '레닌그라드 사건'의 주요 피고로 처형된 기술관료 출신 당 간부
1937년 말, 키로프 공장 당위원회는 카푸스틴을 '전문적 무능'을 이유로 당에서 제명했다. 노동자들이 작업반장에게 탄원서를 제출해 재심을 요구했고, 결정은 번복되었다.
트베리 현 농민 출신으로 노동자·군 복무를 거쳐 레닌그라드 산업대학을 우등 졸업한 기술관료였다. 1940년 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가 되어 포위전 내내 KV 전차·연대포·박격포 생산을 총괄했고, 1945년 제2서기로 승진해 도시 경제 재건을 지휘했다. 1949년 '레닌그라드 사건'으로 체포되어 영국 스파이 혐의가 조작되었고, 이듬해 10월 1일 보즈네센스키·쿠즈네초프·포프코프 등과 함께 레바쇼보에서 총살되었다.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상세 이력 보기
1923–1928볼호프스트로이 토공·'붉은 푸틸로베츠' 공장 리벳공; 붉은군대 복무, 소대장 보좌관
1928–1934보로실로프 제련공장 정비사·직장; 레닌그라드 산업대학 기계공학 우등 졸업
1935–1938영국 맨체스터 메트로폴리탄-비커스 연수; 키로프 공장 터빈공장 부책임자 (당 제명 후 노동자 탄원으로 복권)
1938–1940키로프 공장 당위 서기 → 키로프 구당 서기
1940–1945레닌그라드 시당 공업 담당 서기; 포위전 중 국방위원회 전권대표·방어위원회 '빅5' 위원
1945–1949레닌그라드 시당 제2서기
1949–1950'레닌그라드 사건': 체포·재판·처형 (1954년 사법 복권, 1988년 당적 회복)
메르쿨로프는 회고했다 — "베리야는 밤늦은 업무를 마친 뒤 언제나 코불로프만 데리고 집이나 다차로 향했다." 루뱐카의 그 누구보다 코불로프는 베리야의 사적인 영역에 속한 인물이었다.
트빌리시에서 아르메니아인 재단사의 아들로 태어나 1925년 1월 당에 들어갔고, 1922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보안 기관 경력을 시작했다. 1931년 베리야의 눈에 들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로 옮겨간 뒤 그루지야 내무인민위원 차석(1937–1938)과 NKVD 수사부장(1938–1939)을 지냈다. 1940년 폴란드군 장교·경찰 등을 사형에 처한 카틴 학살 3인조의 일원이었고, NKVD·NKGB 차석으로 체첸·인구시와 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를 지휘했다. 1946년부터 해외 소련 재산 총국(GUSIMZ) 부국장, 1951년 10월부터 제1부국장이었고 1953년 3월 내무부 제1차관이 되었으나 6월 27일 베리야와 함께 체포되어 12월 23일 총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22–1931그루지야 체카·GPU에서 하급 보안 요원으로 근무
1931–1937베리야에게 발탁되어 그루지야 GPU 비밀정치부에서 활동, NKVD로 승계
1937–1938그루지야 NKVD 차석, 대숙청기 현장 숙청 책임
1938–1939NKVD 수사국장 — 예조프 사건과 주요 정치사건 수사 총괄
1939–1941NKVD 경제총국장, 카틴 학살 사형 판결 3인조(1940) 참여
1941–1945NKVD·NKGB 부인민위원(차석) — 체첸·인구시·크림 타타르 등 민족 강제이주 작전 지휘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 갑판 위에서 "소련 대표가 서명할 차례입니다"라는 맥아더의 말에 데레뱐코 중장이 걸어나가 항복문서에 서명했다. 23분간의 의식은 전 세계에 생중계되었고, 제2차 세계대전은 공식적으로 끝났다.
소련의 군사정보 장교이자 중장으로, 1945년 9월 2일 USS 미주리호에서 일본 항복문서에 소련 대표로 서명하여 제2차 세계대전의 공식 종결에 참여했다. 독소전 기간에는 제53군, 제57군, 제4근위군의 참모장으로 쿠르스크 전투, 코르순-셰브첸코 작전, 이아시-키시뇨프 공세, 부다페스트와 빈 함락 작전에 참여했다. 종전 직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를 시찰한 최초의 소련 관료로서 원자폭탄 피해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제출했으며, 이는 소련 핵무기 개발을 가속화하는 계기가 되었다. 이후 연합국 대일이사회 소련 대표와 GRU 정보국장을 역임했으며, 일본 시찰 당시의 방사선 피폭으로 인한 암으로 1954년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2붉은 군대 입대
1924제2키예프 붉은감제관학교 졸업, 제297보병연대 배속
1933–1936프룬제 군사아카데미 동방학부에서 영어·일본어 전공
1936–1938적군 정보총국(GRU) 근무, 스페인 내전 파견, 중국군 비밀 무기지원 작전 수행