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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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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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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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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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행군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1940년 즈다노프의 강요로 에스토니아 괴뢰 정부의 총리가 되어 소련 편입을 청원한 시인·의사
비리얀디 근처의 농가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뒤에 요하네스 바르바루스라는 필명의 이름난 시인이자 급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40년 6월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자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콘스탄틴 페츠 대통령에게 바레스를 괴뢰 정부의 총리로 임명하게 했고, 그는 모스크바에 가입 청원을 전한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을 지냈고, 1941년 독일군이 오자 소련 내지로 피했다. 1944년 돌아와 독립전쟁 시기 행적으로 NKVD의 조사를 받았고, 1946년 11월 탈린의 관저에서 숨졌다. 자살로 여겨지지만 살해설도 있다.
스탈린의 전쟁 선전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이디시어 연극의 거장
고든 크레이그는 모스크바에서 미호엘스의 《리어왕》을 본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미호엘스의 리어 연기처럼 그토록 깊이, 핵심까지 뒤흔든 연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이디시어 연극의 최대 거장으로,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의 예술감독을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맡아 이디시어 무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디시어 공연(1935)으로 세계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칭호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초대 의장으로서 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을 순회하며 소비에트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8년 스탈린의 직접 명령으로 MGB 요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후 소비에트 국가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