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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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코프 길랴리예비치 에틴게르

Яков Гиляриевич Этингер
소비에트 유대계 러시아인 1887–1951 ✕ 고문사

스탈린의 '의사 사건' 첫 희생자가 된 크렘린 심장병 전문의

수감 중 스물아홉 차례 심장 발작이 일었고, 그중 열 번은 류민의 사무실에서 심문 도중에 찾아왔다.

벨라루스 민스크의 유대인 상인 집안에서 태어나 독일에서 의학을 공부한 소비에트 심장병학자. 크렘린 진료국의 오랜 컨설턴트로 키로프, 오르조니키제, 디미트로프, 톨랴티 등 소련과 국제 공산주의 지도자들을 치료했으며, 심전도 진단법의 선구자로 1950년 노벨상 후보로도 거론되었다. 1950년 11월 '의사 사건'의 첫 체포자가 되어 류민의 고문 속에 1951년 3월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사망했고, 류민은 그의 죽음을 아바쿠모프 탄핵의 지렛대로 이용해 사건을 전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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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베를린대학교 의학박사
  • 1914–1917제정 러시아군 야전병원 군의관
  • 1918–1920붉은군대 대형 군병원장
  • 1922–1932제1모스크바대학교 의학부 내과 조교·사강사
  • 1929–1950크렘린 진료국 컨설턴트
  • 1932–1949제2모스크바의학원 소아과대학 내과 주임
  • 1950–1951MGB에 체포되어 레포르토보 감옥에서 고문 중 사망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콥파크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우크라이나 1887–1967 ○ 자연사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한 소비에트 최고의 파르티잔 사령관

「화염이 카르파티아 산비탈을 밝혔다… 밤인데도 대낮 같았고, 불타는 기름의 굉음은 우리를 괴롭히던 독일 비행기 엔진 소리조차 삼켜버렸다.」 — 1943년 비트쿠프 유전 습격을 회고하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사령관. 1941년 푸티블에서 부대를 조직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며 독일군 후방을 교란했고,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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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러시아 제국군 제186아슬란두스 보병연대 복무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정찰병·부사관,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 1918–1919코텔바 적색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 1919–1926붉은 군대 보급·병사 업무, 현 군사위원 역임
  • 1926–1939군 협동조합 지도원, 푸티블 도로국장 등 지방 경제 관료
  • 1940–1941푸티블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41–1943수미 파르티잔 연대 지휘관, 소장 진급 (1943)
  • 1944–1947우크라이나 SSR 최고재판소 판사
  • 1947–1967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부의장

발레리안 블라디미로비치 쿠이비셰프

Валериан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йбыш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5 ○ 자연사

제1차 5개년계획기의 계획 관료

1935년 1월 25일, 오전 내내 회의를 주재한 그는 창백한 얼굴로 귀가했다. 가정부가 의사를 부르자고 했으나 거절하고 방으로 들어갔다. 크렘린 주치의가 도착했을 때 그는 이미 관상동맥 혈전으로 사망해 있었다.

짜르 군관의 아들로 태어나 16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 여덟 차례 체포와 유형을 겪으며 볼셰비키 지하운동을 헤쳐왔다. 내전기 제1군·제4군 혁명군사위원, 이후 라프크린·최고경제회의·고스플란 의장을 거쳐 스탈린 공업화의 설계자이자 집행자가 되었다. 1927년 정치국원으로서 경제정책 전반을 총괄했고, 사후 도시·공장에 그의 이름이 붙은 공업화의 충성스러운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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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21혁명과 내전기 당·군 행정에서 성장
  • 1920년대노동자농민검사와 최고경제회의 등 경제감독 기관을 거침
  • 1930–1934고스플란 의장, 제1차 5개년계획기 지표와 공업화 행정 관리
  • 1934–1935당·국가 경제 원로로 남았으나 이른 사망
  • 1935 이후도시·공장명에 이름이 붙은 스탈린식 공업화 상징이 됨

모이세이 이오시포비치 칼마노비치

Моисей Иосифович Калман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집단화 시기 국가은행을 이끈 혁명가 출신 금융행정가

1919년 무장 부대를 이끌고 벨라루스 마을들을 돌며 곡물을 강제 징발했다. 18년 후 자신이 세운 체제에 의해 '해충'으로 처형되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가정에서 태어나 1904년 사회혁명당에 입당, 1917년 볼셰비키로 전향했다. 10월 혁명기 민스크 수비대장과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회에서 활동했고, 내전기 벨라루스와 리투아니아-벨라루스에서 식량인민위원을 지내며 강제 곡물 징발 조직자 중 하나였다. 1930년부터 1934년까지 소련 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으로서 집단화와 병행된 신용개혁(1930–1932)을 주관했고, 1934년부터 1937년까지 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으로 국영농장 체제를 이끌었다. 대숙청 중 체포되어 1937년 11월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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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8민스크 수비대장, 서부전선 군사혁명위원, 서부지역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9–1920벨라루스·리투아니아-벨라루스 식량인민위원, 서부전선 특별식량위원회 의장
  • 1920–1923우크라이나 식량부인민위원, 시베리아 식량위원회 의장
  • 1923–1924러시아 SFSR 식량인민위원, 소련 식량부인민위원
  • 1924–1929사하로트레스트·프롬방크·제르노트레스트 이사, 노농감독부 간부
  • 1929–1930소련 농업부인민위원
  • 1930–1934국가은행 총재 겸 재정부인민위원, 신용개혁 주관
  • 1934–1937곡물·축산 국영농장 인민위원

이반 알렉세예비치 아쿨로프

Иван Алексеевич Акул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37 ✕ 처형

소련 검찰제도의 창설자, 국가보안과 사회주의 적법성의 틈바구니에서

부하린의 미망인은 회고했다: '청렴하고 의지가 강한 아쿨로프가 OGPU의 질서를 바로잡기 시작했지만 곧 환영받지 못하는 사람이 되었다.'

상트페테르부르크 빈민가 출신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이반 아쿨로프는 지하운동, 내전기 전선위원회, 우랄·시베리아·크림·우크라이나의 당 조직 책임자를 거친 직업혁명가였다. 1933년 소련 검찰청이 신설되자 초대 검찰총장에 임명되어 사회주의 적법성이라는 새 제도의 틀을 구축했으며, 국가보안기구와의 긴장 속에서 검찰의 독자적 영역을 개척했다. 그러나 키로프 암살 이후 긴급법 제정에 연루되었고, 이윽고 자신이 구축에 참여한 탄압 기구에 희생되어 1937년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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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b) 입당 · 상트페테르부르크 지하운동
  • 1917–1918우랄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18–1920뱟카·오렌부르크 현당 위원회 서기
  • 1920–1921키르기스 당뷰로 서기
  • 1921–1922크림 지역당 위원회 서기
  • 1922–1927도네츠크 광산노조 위원장
  • 1927–1931전우크라이나 노조평의회 의장
  • 1930–1931노농감찰 부인민위원 · 중앙통제위원회 간부
  • 1931–1932OGPU 제1부의장
  • 1933–1935소련 검찰총장 (초대)
  • 1935–1937소련 중앙집행위원회 서기

미하일 모이세예비치 카가노비치

Михаил Моисеевич Каган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41 ✕ 자살

소련 군수공업의 건설자, 형 라자르의 그늘 속에서

1941년 7월 1일, 미코얀 사무실. 고문으로 짜인 거짓 자백과 대면한 후 대기실 밖으로 나왔다. 화장실에서 권총 한 발 — 체포되기 전에 스스로 끝냈다.

볼셰비키 금속노동자 출신으로 오르조니키제의 측근 부인민위원을 거쳐 국방공업인민위원(1937–1939)과 항공공업인민위원(1939–1940)을 지내며 대숙청기 소련 군수산업의 조직적 틀을 세웠다. 라자르 카가노비치의 친형으로, 소리치고 가르치는 거친 스타일과 유능한 부하들에 대한 의존으로 유명했으며, 1940년 해임되었다가 독소전 발발 직후 고문으로 짜낸 거짓 자백에 연루되어 미코얀 사무실 화장실에서 권총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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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볼셰비키 입당, 노동자 운동
  • 1917–1922우네차 역 적위대 참모, 아르자마스 혁명위원장, 수라시 소비에트 의장, 식량위원 등
  • 1923–1927니즈니노브고로드 주 국민경제회의 의장
  • 1927–1932중앙통제위원회 위원·상임위원, 노농감독인민위원부 간부
  • 1931–1932기계제조총국장 겸 최고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2–1936중공업부인민위원 — 오르조니키제의 수석 대리
  • 1937–1939국방공업인민위원
  • 1939–1940항공공업인민위원
  • 1940–1941카잔 제124항공공장 책임자로 좌천

이반 테렌티예비치 골랴코프

Иван Терентьевич Голяк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61 ○ 자연사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한 소련 최고재판소장

솔제니친은 골랴코프가 "톨스토이, 코롤렌코, 체호프의 작품을 알고 있었다"고 적었다.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했던 재판소장이 마지막으로 남긴 책은 《문학 속의 재판과 법》이었다.

농민 출신으로 1차대전에 참전한 후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남북전쟁기 군사재판소장을 거쳐 1938년 소련 최고재판소장에 올랐다. 대숙청과 전쟁기를 관통하는 10년간 소련 사법체계를 총괄했으며, 모든 사형 선고를 승인한 정치국 비밀위원회 위원으로서 숙청의 사법적 형식화를 책임졌다. 한편 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으로 70여 편의 학술 저작을 남겼고, 기록에 따르면 '합법성' 국면에서는 최대한 많은 유죄판결자를 복권시키려 노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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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RKP(b) 입당
  • 1919–1925혁명군사재판소장 (제14소총사단·북카프카스 군관구)
  • 1925북카프카스대학 법학과 졸업
  • 1925–1933벨로루시 군관구 혁명군사재판소 부의장
  • 1931–193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위원
  • 1938.01–04RSFSR 검찰총장
  • 1938–1948소련 최고재판소장
  • 1938–1947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
  • 1949–1956전연방 법률과학연구소장

니콜라이 미하일로비치 시베르니크

Николай Михайлович Шверник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70 ○ 자연사

스탈린 말기의 공식 국가원수

1905년 1월 9일, 16세의 공장 소년공이었던 시베르니크는 상트페테르부르크 겨울궁전 앞에서 '피의 일요일' 발포를 목격했다. 같은 해 가을, 그는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7세에 볼셰비키에 입당한 페테르부르크 노동자 출신으로, 노동조합 중앙평의회 제1서기를 14년간 맡으며 소비에트 노조체계를 구축했다. 1946년 칼리닌의 뒤를 이어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이 되었으나 실권은 스탈린과 정치국에 있었다. 전시에는 산업 대피와 나치 전쟁범죄 조사위원회를 이끌었고, 스탈린 사후에는 흐루쇼프와 함께 당통제위원장으로서 정치적 억압 피해자들의 복권을 주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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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년대–1930년대노동조합과 당 행정에서 성장
  • 1938–1946민족소비에트 의장, 스탈린기 공식 연방대표제의 한 축
  • 1946–1953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 명목상 국가원수
  • 1953–1956스탈린 사후 노조·국가 행정 원로로 이동
  • 1956 이후당통제위원회 등에서 복권·징계 문제에 관여

안드레이 니콜라예비치 투폴레프

Андрей Николаевич Туполе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8–1972 ○ 자연사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소련 금속항공의 아버지의 말이다.

디자이너가 모형을 보여주자 투폴레프가 말했다: "못생긴 비행기는 날지 못한다." 이 말은 그의 평생 신조가 되었다 — "잘 나는 비행기는 반드시 아름답다."

주콥스키의 제자로 출발해 세계 최초의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을 이끈 공학자. TB-1, TB-3, SB, Tu-2 등 100여 기종을 설계했으며, 금속 외피와 캔틸레버 주익 구조로 소련 항공의 방향을 바꾸었다. 1937년 첩보 혐의로 체포되어 NKVD 샤라시카에서도 Tu-2를 개발했고, 전후 Tu-16, Tu-104, Tu-114, Tu-144로 제트기 시대를 열었다. 코롤료프, 수호이, 페틀랴코프, 라보치킨, 밀 등 항공우주의 한 세대를 키워낸 스승이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네 차례 스탈린상을 받고 1972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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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8주콥스키의 제자, 러시아 최초 항공계산국 참여
  • 1918–1936ЦАГИ 부소장, 전금속 항공기 설계국 창설
  • 1925–1934TB-1, TB-3, АНТ-25, «막심 고리키» — 중폭격기 시대
  • 1937–1941체포, ЦКБ-29(샤라시카)에서 Tu-2 설계
  • 1943–1952Tu-2 전력화, Tu-4 전략폭격기, Tu-16 제트폭격기
  • 1955–1968Tu-104 제트여객기, Tu-114, Tu-144 초음속여객기
  • 1956–1972소련 항공공업 총설계사, 3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모이세이 리보비치 루히모비치

Моисей Львович Рухимович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89–1938 ✕ 처형

레닌이 신뢰한 산업 건설자, 국방공업 초대 인민위원

1921년 10월 1일 레닌은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겸 도누골·히무골 트러스트 책임자였던 루히모비치에게 돈바스의 중소 탄광을 임대하는 문제에 관한 편지를 보냈다.

러시아 제정 말 로스토프 지역에서 노동자 가정에 태어나 1904년부터 사회민주주의 운동에 뛰어들었고 유대인 사회민주노동당(빈트)의 일원으로 활동했다. 1906년부터 1909년까지 망명 생활을 한 뒤 우크라이나에서 활동하다 1913년 당에 입당했고, 1914년 제1차 세계대전에 동원되었다. 1920년대에는 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과 도누골 트러스트 책임자로서 파괴된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을 지휘했고, 쿠즈바스 석탄 개발에 이어 중공업 부인민위원을 지냈다. 1936년 12월 8일 신설 국방공업인민위원부의 초대 인민위원이 되었으나 1937년 10월 15일 해임되었고, 이듬해 총살된 뒤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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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7빈트 활동가, 볼셰비키 입당(1913), 하리코프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장
  • 1918–1920도네츠크-크리보이로크 공화국 군사인민위원, 제41소총사단 군사위원, 제14군 혁명군사위원
  • 1920–1925도네츠크 주집행위원장, 도누골 트러스트 관리자 — 돈바스 석탄 산업 재건
  • 1925–1930우크라이나 SSR 최고국민경제회의 의장, 소련 최고국민경제회의 부의장
  • 1930–1931소련 교통인민위원
  • 1931–1936쿠즈바수골 트러스트 관리자, 중공업 부인민위원 (오르조니키제 휘하)
  • 1936–1937소련 국방공업인민위원 (초대)

라자리 이오시포비치 코간

Лазарь Иосифович Ког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처형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자 벨로모르 건설 책임자

1932년 벨로모르 운하 현장을 찾은 미코얀에게 코간이 물었다. "'수감자'는 모욕적이고 '라게르니크'는 무미건조합니다. 그래서 생각해낸 말이 '카날로아르메예츠(운하군인)'입니다." 미코얀이 동의했고, 이 말에서 약칭 '제카(з/к)'가 탄생했다.

시베리아 유대 상인 집안 출신의 아나코-코뮤니스트로, 1908년 무장강도로 사형 선고를 받고 복역했다. 1918년 볼셰비키에 합류, 체카와 국경경비대를 거쳐 1930년 신설된 굴라크의 초대 수장이 되어 소비에트 강제노동 체계의 제도화를 이끌었다. 1931년부터 백해-발트 운하 건설을 지휘, 약 17만 명의 수용자를 동원해 2년 만에 227km 수로를 완공했으나 수만 명이 사망했다. 야고다 계열로 분류돼 1938년 체포, 1939년 총살됐으나 1956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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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1932OGPU 굴라크 수장
  • 1931–1933백해-발트 운하 건설 책임자
  • 1932–1936굴라크 부수장
  • 1936–1938수상운수 부인민위원
  • 1938–1939체포와 처형

미하일 이바노비치 리조프

Михаил Иванович Рыж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89–1939 ✕ 심문 중 사망

예조프 곁에서 부인민위원까지 오른 뒤 심문실에서 죽어 간 측근

1938년 12월 체포되어 한 달도 지나지 않아 심문 중에 사망했다. 예조프의 조서가 공범으로 꼽은 다섯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탐보프 현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군사위원과 군관구 행정직 등 군·행정 경력을 거쳐 모스크바시 행정에서 일했다. 예조프 시기인 1937년 7월 NKVD 총무경리국장이 되었고 곧 내무부인민위원으로 승진했으며, 그해 12월 소련 임업인민위원으로 옮겨 1938년 10월까지 재임했다. 국가보안 소좌 계급과 적성훈장을 받았고, 예조프의 비서 세라피마 리조바와 부부였다. 예조프 몰락 뒤인 1938년 12월 체포되었고, 예조프의 조서가 자기 음모 집단의 일원으로 꼽은 이름 가운데 하나였다. 1939년 1월 19일 불법 수사 방법이 동원된 심문 끝에 사망했으며,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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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25군사위원·군관구 행정직
  • 1930년대 초농업 행정과 모스크바시 행정 근무
  • 1937.07–08NKVD 총무경리국(AKhU)장
  • 1937.08–12소련 내무부인민위원
  • 1937.12–1938.10소련 임업인민위원

스타니스와프 비켄티예비치 코시오르

Станислав Викентьевич Косиор
소련공산당·볼셰비키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89–1939 ✕ 처형

기근을 부인한 우크라이나 당 수장, 스탈린의 총에 쓰러지다

1932년 4월 26일,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번지던 때 코시오르는 스탈린에게 보낸 서한에서 밝혔다: "우크라이나에 '기근'이 있다는 온갖 이야기는 단호히 배격해야 합니다. 굶주리는 마을들이 있기는 하나 이는 현지의 무능 탓일 뿐입니다."

1889년 11월 18일(구력 11월 6일) 러시아 제국 지배하 폴란드 왕국 벵그루프에서 공장 노동자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1907년 당에 입당했다. 돈바스와 키예프의 지하운동을 거쳐 우크라이나 공산당 창설에 참여했고, 1928~1938년 우크라이나 당을 이끌며 집단화와 공업화를 밀어붙였다. 1930년 정치국 정위원. 1932~33년 대기근의 존재를 부인하는 보고로 비판받는 동시에 감축과 식량 지원을 요청하기도 했다. 1938년 5월 체포되어 1939년 2월 26일 사형이 선고·집행되었고, 1956년 3월 14일 복권되었다. 2010년 우크라이나 법원은 그를 1932~33년 기근 조직자 중 한 사람으로 인정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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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돈바스 지하 볼셰비키 활동, 여러 차례 체포·유형
  • 1917.10페트로그라드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 1919–1920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서기
  • 1926–1928전연방 공산당 중앙위 서기 겸 조직국원
  • 1928–1938우크라이나 공산당 중앙위 총서기 → 제1서기
  • 1930–1938전연방 공산당 정치국 정위원
  • 1938.05'폴란드 군사조직' 혐의로 체포
  • 1939.02.26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집행

레프 니콜라예비치 벨스키

Лев Николаевич Бельский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벨라루스 1889–1941 ✕ 처형

소비에트 민병대를 관장한 부인민위원

1931년 야고다의 '베스나' 사건 조작에 항의했다 해고된 인물이, 6년 후 예조프 휘하에서 대숙청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체카 출신으로 1934년 소비에트 민병대 총국장, 1936년 예조프 휘하의 내무부인민위원이 되어 대숙청기 지방 트로이카를 조직했다. 1939년 체포돼 1941년 처형됐으며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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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6NKVD 노농민병대 총국장
  • 1936–1938내무부인민위원
  • 1938–1939철도 제1부인민위원
  • 1939–1941체포, 재판과 처형

바실리 바실리예비치 울리히

Василий Васильевич Ульрих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독일 1889–1951 ○ 뇌졸중

모스크바 쇼 재판의 판사, 스탈린의 '법적 단두대'

사형을 선고받은 에스토니아 변호사에게 울리히가 미소 지으며 말했다. "자네 직업이 드디어 쓸모 있게 됐군!"

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1926–1948)으로서 스탈린 시대 대숙청의 사법적 얼굴이었다. 라트비아 리가 출신으로, 독일계 발트인 혁명가 아버지와 러시아 귀족 출신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리가 공과대학을 졸업했다. 191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고, 1918년 체카에서 경력을 시작해 1926년 군사합의부 의장에 올랐다. 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부하린, 투하쳅스키 등 구당 지도부에 대한 모스크바 쇼 재판(1936–1938)을 주재했고, 2년간 3만 명 이상의 사형 선고를 내린 기관을 지휘했다. 전후에는 블라소프, 크라스노프 등 나치 협력자 재판과 폴란드 지하국가 지도부 재판을 주재했다. 1948년 해임된 뒤 1951년 뇌졸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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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RSDLP(볼셰비키) 입당
  • 1914리가 공과대학 상업과 졸업
  • 1915–1917러시아 제국군 공병대대 소위
  • 1918–1919NKVD·체카 재무과장
  • 1920공화국 혁명군사재판소 판사
  • 1921–1926RSFSR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26–1948소련 최고재판소 군사합의부 의장
  • 1935–1948소련 최고재판소 부의장
  • 1948–1951군사법률아카데미 고등군사법률과정장

레프 자하로비치 메흘리스

Лев Захарович Мехлис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유대계) 1889–1953 ○ 자연사

스탈린의 개인비서에서 붉은 군대의 숙청 집행자로, '붉은 군대의 인퀴지토르'라 불린 인물

1950년 전 보건장관 예. 이. 스미르노프의 회고에 따르면, 1949년 스탈린에게 메흘리스에게 정부 위원회를 맡기자고 제안했더니 스탈린은 배를 잡고 눈물을 닦으며 웃었다. 요지는 '메흘리스는 무언가를 부수고 파괴하는 데나 맞는 사람'이라는 것이었다.

오데사에서 유대인 가정의 아들로 태어나 상업학교 여섯 학급을 마치고 점원·가정교사로 일했으며, 1907~1910년 시온주의 노동자 정당 포알레 시온에 속했다. 1918년 입당해 붉은 군대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922~1926년에는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였다. 1930~1937년 《프라우다》 편집장으로 '인민의 적'에 대한 투쟁을 선동했고, 1937~1940년 국방부인민위원 겸 정치총국장으로 장교단 대량 숙청을 조직했다. 1942년 케르치 전선의 스타프카 대표로서 참사를 초래해 두 계급 강등되었으나 계급이 회복되어 1944년 상장이 되었고, 국가통제장관(1946~1950)을 지낸 뒤 1953년 심장병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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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7차르 포병대 복무, 루마니아 전선에서 고급 하사관 계급
  • 1918–1920붉은 군대 정치위원, 여단·사단·집단군에서 복무
  • 1922–1926중앙위원회 사무국 보좌관·국장, 스탈린의 사실상 개인비서
  • 1930–1937중앙위 출판부장 겸 《프라우다》 편집장, 대숙청 선전전 지휘
  • 1937–1940국방부인민위원·붉은 군대 정치총국장, 군 장교단 대숙청의 주요 조직자
  • 1942스타프카 대표로 크림 전선에 파견, 케르치 참사로 전선 붕괴, 스탈린 명령으로 두 계급 강등
  • 1942–1945여러 전선 군사평의회 위원, 계급 회복(1942년 중장, 1944년 상장)
  • 1946–1950소련 국가통제장관 겸 국가편성위원회 의장, 각료회의 간부회 위원

유벨리안 다비도비치 숨바토프-토푸리제

Ювельян Давидович Сумбатов-Топуридз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아르메니아 (그루지야계 모친) 1889–1960 ○ 구금 중 사망

대량작전기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된 체키스트

1937~1938년 아제르바이잔 내무인민위원이자 특별 트로이카 위원으로 대숙청에 참여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구금 중 사망했다.

쿠타이시현 카파나의 농가에서 아르메니아인 아버지와 그루지야인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토푸리제는 어머니의 성). 1905~1910년 멘셰비키였고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20년부터 아제르바이잔 체카에서 일했고, 1934년부터 아제르바이잔 GPU·NKVD를 이끌며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으로 특별 트로이카에 들었다. 1938년 4월부터 NKVD 행정경리국장을 지냈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이었다. 1953년 7월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정신병원에 수용되었고, 수사가 끝나기 전인 1960년 8월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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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0멘셰비키로 활동하며 농촌 혁명조직을 만들고 농민에게 전단을 배포했다.
  • 1918–1920붉은군대에서 복무한 뒤 1920년 아제르바이잔 체카에 들어갔다.
  • 1934–1938아제르바이잔 GPU 위원장과 NKVD 국장을 거쳐 1937~1938년 내무인민위원을 지냈고, 특별 트로이카에 참여해 대숙청을 집행했다.
  • 1938–1953NKVD 행정·경리국을 이끌고, 1947~1953년 아제르바이잔 각료회의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베리야 사건으로 체포되어 수사 중 사망했다.

다닐 예고로비치 술리모프

Даниил Егорович Сулимов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자신이 산업화를 이끈 국가에 파괴된 노동자 출신 러시아 공화국 총리

1937년 6월 27일, 자신을 축출한 바로 그 중앙위원회 총회가 진행되는 동안 직무 수행 중 체포되었다.

14세에 공장 노동자로 볼셰비키당에 입당한 올드 볼셰비키인 술리모프는 우랄 당 기구에서 성장하여 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1930~1937)으로서 첫 두 차례 5개년 계획 기간 동안 공화국의 산업화를 총괄했다. 중앙위원회 위원(1923~1937)이자 조직국 위원(1927~1930)으로서, 노동자 출신 볼셰비키 중 가장 높은 정부 자리까지 오른 인물 중 하나였다. 1937년 6월 중앙위원회 총회에서 뱌체슬라프 몰로토프의 정치적 불충성 비판 직후 체포되었고, 파괴활동·간첩·반소비에트 테러 조직 가담 혐의로 11월 27일 처형되었다. 1956년 사후 복권되었으며, 1934~1937년에는 체르케스크 시가 그의 이름을 따 술리모프로 불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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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공장 노동 시작
  • 1918–1919페름 시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의장, 최고경제회의 광산·야금부 간부
  • 1919–1920러시아공산당(볼셰비키) 첼랴빈스크 현 위원회 의장
  • 1923–1926우랄 주 집행위원회 의장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우랄 주 위원회 제1서기
  • 1927–1930소련 교통인민위원부 제1부인민위원
  • 1930–1937러시아소비에트연방사회주의공화국 인민위원회의 의장

보리스 미로노비치 펠트만

Борис Миронович Фельдма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7 ✕ 처형

투하쳅스키 사건 피고 8인 중 하나, 고문 아래 자백의 연쇄를 시작한 인사국장

"나는 체포 다음날 곧바로 반소비에트 조직 가담을 자백했으나, 오늘까지도 나의 역할을 축소하고 가장 본질적인 사실들을 은폐하려 했다." (1937년 5월 19일 심문)

유대인 목수의 아들로 핀스크에서 태어나, 1차대전 사병과 내전 사단장을 거쳐 붉은 군대의 엘리트로 올랐다. 1934년부터 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으로 전군 간부 배치를 총괄했으며, 투하쳅스키와 긴밀히 움직이며 1932년 독일 제국방위군 기동훈련에도 동행했다. 1937년 5월 15일, 투하쳅스키보다 일주일 먼저 체포된 그는 고문 아래 동료 40여 명을 '군사-트로츠키주의 음모' 가담자로 지목했고, 이 자백이 대숙청의 연쇄 폭발을 촉발했다. 6월 12일 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이 선고된 당일, 투하쳅스키 등 7명과 함께 총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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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1917제정 러시아군 사병, 1차대전 참전
  • 1918–1921내전: 제55소총사단장, 탐보프 농민반란 진압 원정군단 지휘
  • 1922–1928제17·제19소총군단장
  • 1928–1934레닌그라드 군관구 참모장
  • 1934–1937노농적군 지휘인사국장
  • 1937.04모스크바 군관구 부사령관으로 전보
  • 1937.05.15체포; 심문에서 동료 40여 명 지목
  • 1937.06.12비공개 군사재판에서 사형 선고, 당일 총살; 1957년 복권

바실리 콘스탄티노비치 블류헤르

Васили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люхер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러시아 1890–1938 ✕ 옥사

「적기 훈장 제1호」: 내전의 영웅이자 첫 원수 5인 중 하나, 레포르토보에서 스러지다

산재한 적위대를 규합해 54일간 우랄 산맥 1,500㎞를 싸우며 돌파했다. 이 불멸의 행군으로 블류헤르 동지에게 적기 훈장 제1호를 수여한다. —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 1918.9.28

야로슬라블 빈농 출신으로, 1918년 우랄에서 1,500㎞ 행군을 지휘해 붉은 군대 최초의 적기 훈장을 받았다. 프룬제 휘하에서 페레콥 방어선을 돌파해 브란겔을 크림에서 축출했고, 극동공화국 총사령관으로 볼로차옙카에서 백군을 최종 격파했다. 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으로 국민혁명군 북벌을 설계했으며, 1929년 중동철도 분쟁에서 만주군을 격파했다. 1935년 초대 원수 5인에 올라 특별극동군을 지휘하며 일본의 팽창에 맞섰으나, 하산 호 전투 뒤 체포되어 루뱐카에서 사망했다. 1956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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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두 차례 게오르기 훈장, 중상으로 제대
  • 1916볼셰비키당 입당
  • 1918우랄 1,500㎞ 대장정 — 적기 훈장 제1호
  • 1919–1920제51소총사단장: 시베리아 전역, 페레콥 돌파로 크림 점령
  • 1921–1922극동공화국 군사장관 겸 인민혁명군 총사령관, 볼로차옙카 승리
  • 1924–1927쑨원의 주력 군사고문 「갈린 장군」 — 국민혁명군 북벌 입안
  • 1929중동철도 분쟁: 만주군 격파, 적성 훈장 제1호 수훈
  • 1929–1938특별극동군 사령관 — 소비에트 극동 방위 총괄
  • 1935초대 원수 5인 중 하나
  • 1937투하쳅스키 사건 특별재판부 참여
  • 1938하산 호 전투 후 해임, 체포, 루뱐카에서 사망
  • 1956사후 복권

빌헬름 게오르기예비치 크노린

Вильгельм Георгиевич Кнорин
코민테른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38 ✕ 처형

코민테른 선전기구의 설계자이자 당사(黨史) 편찬자

«벨라루스인은 민족이 아니며, 그들을 러시아인과 구분짓는 민족지적 특성은 사라져야 한다» — 1918년 10월, 자신이 편집장으로 있던 『즈뱌즈다』 지면을 통해.

라트비아 출신 볼셰비키로, 벨라루스와 라트비아에서 당 조직을 건설했으며 1920년대 벨라루스 공산당 제1서기를 두 차례 역임했다. 코민테른 정보선전부장으로서 각국 공산당의 이념 노선을 조율했고, 역사-당 연구소 소장을 지내며 1935년 『소련 공산당 약사』를 저술했다. 이는 1938년 『볼셰비키당사 단기강좌』의 직접적 전신이다.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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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17민스크 소비에트 서기, 『즈뱌즈다』 편집자
  • 1920–1922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국 서기
  • 1926–192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선전선동부장
  • 1927–1928벨라루스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28–1937코민테른 집행위원회 정보선전부장
  • 1932–1935역사-당 연구소(적색교수양성소) 소장
  • 1935–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당 선전선동부 부장

로베르트 인드리코비치 에이헤

Роберт Индрикович Эйхе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라트비아 1890–1940 ✕ 처형

시베리아 대숙청의 설계자, 고문 속에서도 자백을 철회하다

"펜과 고무 곤봉, 선택하라." 16시간째 심문에서 그는 펜을 집어 들었다. 거짓 자백에 서명했다. 그리고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서 모든 혐의를 전면 철회했다.

라트비아 소작농의 아들로 1905년 15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다. 영국 탄광·선박 노동을 거쳐 혁명에 투신, 스탈린의 절대적 신임 아래 시베리아의 실질적 통치자로 군림하며 가혹한 집단화와 쿨라크 제거를 진두지휘했다. 1935년 정치국 후보위원, 대숙청기 NKVD 트로이카 위원으로 수천 명의 사형 판결에 서명했다. 1938년 체포 후 고무 곤봉으로 눈이 빠지는 고문 속에서도 간첩 혐의를 부인했고,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서 강제된 자백을 철회했다. 1940년 총살,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에서 복권의 대표 사례로 거론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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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라트비아 사회민주당 입당
  • 1908–1911영국 망명: 탄광부·선박 화부
  • 1917–1919리가 소비에트 간부 → 라트비아 소비에트 식량인민위원
  • 1920첼랴빈스크 당위원회 서기
  • 1925–1929시비르 변경 집행위원회 의장
  • 1929–1930시비르 당 제1서기
  • 1930–1937서시비르 당 제1서기 — 집단화·쿨라크 숙청 지휘
  • 1935정치국 후보위원
  • 1937NKVD 트로이카 위원 → 농업인민위원
  • 1938–1940체포 → 고문 → 자백 철회 편지 → 총살

요하네스 바레스

Johannes Vares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에스토니아 1890–1946 ✕ 자살 추정

1940년 즈다노프의 강요로 에스토니아 괴뢰 정부의 총리가 되어 소련 편입을 청원한 시인·의사

비리얀디 근처의 농가에서 태어나 키예프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제1차 세계대전과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에서 군의관으로 복무했다. 뒤에 요하네스 바르바루스라는 필명의 이름난 시인이자 급진 사회주의자가 되었다. 1940년 6월 소련이 에스토니아를 점령하자 안드레이 즈다노프는 콘스탄틴 페츠 대통령에게 바레스를 괴뢰 정부의 총리로 임명하게 했고, 그는 모스크바에 가입 청원을 전한 대표단을 이끌었다. 이후 에스토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을 지냈고, 1941년 독일군이 오자 소련 내지로 피했다. 1944년 돌아와 독립전쟁 시기 행적으로 NKVD의 조사를 받았고, 1946년 11월 탈린의 관저에서 숨졌다. 자살로 여겨지지만 살해설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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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1914키예프 대학교 의학 공부
  • 1918–1920에스토니아 독립전쟁 군의관
  • 1940괴뢰 정부 총리, 소련 가입 청원 대표단장
  • 1940–1946에스토니아 SSR 최고소비에트 상임간부회 의장

솔로몬 미하일로비치 미호엘스

Соломо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оэлс
소비에트 러시아 (유대계) 1890–1948 ✕ 암살

스탈린의 전쟁 선전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이디시어 연극의 거장

고든 크레이그는 모스크바에서 미호엘스의 《리어왕》을 본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미호엘스의 리어 연기처럼 그토록 깊이, 핵심까지 뒤흔든 연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이디시어 연극의 최대 거장으로,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의 예술감독을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맡아 이디시어 무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디시어 공연(1935)으로 세계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칭호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초대 의장으로서 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을 순회하며 소비에트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8년 스탈린의 직접 명령으로 MGB 요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후 소비에트 국가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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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페트로그라드 유대극장 스튜디오 입단
  • 1920–1928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 주연 배우
  • 1929–1948GOSET 예술감독 겸 주연 배우
  • 1941–1945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의장
  • 1943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 순회 선전 여행
  • 1939소비에트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