겨울전쟁 직전 모스크바 협상에서 스탈린과 마주 앉은 핀란드의 현실주의 외교관
현실을 인정하는 것이 모든 지혜의 시작이다: 스탈린에게서 빌려와 평생의 외교 원칙으로 삼은 말.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 시절부터 시작해 핀란드 독립·내전·겨울전쟁·계속전쟁·냉전을 모두 통과한 정치가다. 독립 직후인 1918년 첫 총리를 지내며 친독일·군주제 노선을 밀었고,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소비에트 러시아와 국경을 확정했다. 1939년 가을 스톡홀름 주재 공사에서 소환되어 모스크바에서 스탈린·몰로토프와 직접 협상했으나 합의에 이르지 못했고, 전쟁이 터지자 무임소장관으로 평화조약 체결을 이끌었다. 1946년 대통령에 오른 뒤로는 '현실 인정이 지혜의 시작'이라며 소련과의 지정학적 공존을 추구했고, 이 파시키비 독트린은 냉전기 핀란드 외교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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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1913핀란드 의회 의원 (핀란드당)
- 1908–1909원로원 재무분과장
- 1918.05–11핀란드 총리
- 1914–1934KOP 은행 총재
- 1936–1939주스웨덴 공사
- 1940–1941주모스크바 공사
- 1944–1946핀란드 총리
- 1946–1956핀란드 대통령
루스벨트의 '보조 대통령'이자 포츠담 배상안을 설계한 국무장관
번스의 국무장관 취임 선서 직후, 트루먼이 말했다. "지미, 성경에 입 맞춰." 번스가 그러고 나서 성경을 트루먼에게 건네며 말했다. "대통령님도 입 맞추시죠." 트루먼이 그렇게 하자 자리 전체가 웃음바다가 되었다.
제임스 F. 번스는 사우스캐롤라이나 출신의 민주당 정치인으로, 뉴딜 입법을 주도한 상원의원, 전시 동원을 총괄하며 '보조 대통령'으로 불린 루스벨트의 오른팔, 그리고 트루먼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포츠담 회담에서 독일 배상의 틀을 설계한 인물이다. 포츠담에서 번스는 각 점령국이 자국 점령지역에서 배상을 취하되 소련에는 서방 지역 산업설비의 15%를 식량·원자재와 교환하고 10%를 무상 제공하는 절충안을 몰로토프와 협상해 타결시켰다. 루스벨트의 후계 구도에서 밀려난 뒤 트루먼과의 관계도 점차 냉각되었으나, 이후 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로 당선되어 인종 분리 교육 체제를 고수하며 '분리하되 평등하게' 노선을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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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1–1925사우스캐롤라이나주 하원의원
- 1931–1941사우스캐롤라이나주 상원의원
- 1941–1942미국 연방대법원 대법관
- 1942–1943경제안정국 국장
- 1943–1945전시동원국 국장
- 1945–1947미국 국무장관
- 1951–1955사우스캐롤라이나 주지사
사직서 한 장으로 정부를 무너뜨리려 했으나 고트발트의 손을 들어준 마지막 민주 대통령
1948년 2월 25일, 베네시는 공산당 민병대가 프라하 거리를 장악하고 내전이 임박한 가운데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서를 수리했다.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핵심 인물로, 1차 대전 중 마사리크·슈테파니크와 함께 민족평의회를 창설했다. 1918년부터 17년간 외무장관으로서 국제연맹과 소협상을 주도하며 프랑스·소련과의 동맹 체계를 구축했다. 뮌헨 협정으로 사임 후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었고, 전후 귀환해 대통령에 복귀했다. 1948년 2월 쿠데타에서 비공산당 장관들의 사직서를 수리하고 고트발트의 공산당 정부를 승인함으로써 체코슬로바키아의 소비에트 블록 편입을 결정지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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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서기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 1921–1922체코슬로바키아 총리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대통령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대통령
고트발트 정부에 남아 '합법성'을 부여하고 쿠데타 2주 만에 체르닌 궁전 아래에서 죽은 비공산당 외무장관
1947년 7월 모스크바에서 마셜 플랜 거부를 강요받고 돌아온 마사리크는 '나는 주권국의 장관으로 떠났다가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말했다.
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토마시 마사리크의 아들로, 1925년부터 13년간 주영 공사를 지내고 2차 대전 중 런던 망명정부 외무장관으로 BBC 방송을 통해 점령지 조국과 매주 연결된 상징이 되었다. 1947년 7월 스탈린에게 마셜 플랜 참여 거부를 강요받은 뒤 '나는 스탈린의 하인으로 돌아왔다'고 토로했으며,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임하지 않고 고트발트 정부의 유일한 비공산당 장관으로 남아 체제 이행에 형식적 정당성을 부여했다. 쿠데타 2주 후 체르닌 궁전에서 투신 또는 피살된 시신으로 발견되었고, 자살인지 타살인지 반세기 넘게 결론이 나지 않은 그의 죽음은 서방에 충격을 주어 마셜 플랜 의회 통과를 촉발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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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1922주미 체코슬로바키아 대리공사
- 1922–1925외무장관 보좌관
- 1925–1938주영 체코슬로바키아 전권공사
- 1940–1945체코슬로바키아 망명정부 외무장관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외무장관
1956년 카다르와 함께 소련 개입을 지지하고 혁명 진압 뒤 총리가 된 헝가리 공산주의자
세레겔리에시의 독일계 가톨릭 집안에서 태어나 법학을 공부했고, 1차 세계대전 동부 전선에서 러시아군 포로가 되어 톰스크로 보내졌다. 그곳에서 볼셰비키에 가담해 국제 포로 부대를 이끌었고, 1918년 귀국해 헝가리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으며 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의 군사 인민위원을 지냈다. 1922~1936년 소련에서 살았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오토 플라터라는 이름으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전후 부다페스트 경찰청장과 외교관을 지냈다. 1956년 혁명 중 너지 정부의 내무장관이었으나 11월 카다르와 함께 모스크바에서 소련 무력 개입을 지지했고, 카다르 정부의 군·공안 장관으로 무장 경찰과 노동자 민병대 조직에 참여했으며 1958~1961년 총리를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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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5러시아군 포로, 톰스크 수용
- 1918헝가리 공산당 창당 참여
- 1919슬로바키아 평의회 공화국 군사 인민위원
- 1936–1939스페인 내전 제11국제여단장
- 1946–1949부다페스트 경찰청장
- 1956너지 정부 내무장관, 카다르 정부 군·공안 장관
- 1958–1961헝가리 총리
동맹망으로 냉전을 밀어붙인 미국 외교가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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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8프린스턴대학교 졸업
- 1911설리번 앤드 크롬웰 국제변호사
- 1919파리 강화회의 미국 대표단 법률고문
- 1945–1950유엔 회의·총회 미국 대표 및 외교 고문
- 1950–1952트루먼 대통령 대일 강화조약 특별고문
- 1953–1959미국 국무장관
- 1954베를린 회의 참가, 서독 NATO 가입 협상 주도
- 1959국무장관 사임, 5월 24일 사망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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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얀 마사리크의 뒤를 이어 외무장관이 되었다가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된 슬로바키아 공산주의자
외무차관으로 마셜 플랜 거부를 지지했고, 1948년 쿠데타 뒤 외무장관이 되어 체코슬로바키아의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조직했다. 1950년 축출된 뒤 체포되어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처형되었다.
슬로바키아 티소베츠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슬로바키아 지식인에게 큰 영향을 준 문화·정치 잡지 『다우』를 함께 편집한 좌파 지식인이었다. 공산당 의원으로 활동했다. 1948년 3월 얀 마사리크가 숨진 뒤 외무장관이 되어 1950년까지 재임했다. 「티토주의」와 「민족주의 편향」 혐의로 1952년 슬란스키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2월 3일 처형되었다. 뒷날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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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에 가입해 변호사로 활동하고 슬로바키아에서 공산주의 조직을 꾸렸다.
- 1935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소속으로 국민의회 의원에 당선되었다.
- 1945외무부 국무차관이 되었다.
- 1948–1950외무장관으로 재임하며 쿠데타 조직에 참여했고 대이스라엘 항공 지원을 마련했다.
- 1950「편향주의」 혐의 속에 사임을 강요당한 뒤 체포되었다.
- 1952슬란스키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고 교수형에 처해졌다.
- 1963사후 복권되었다.
모스크바 주재 미국 대사,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흐루쇼프의 마음을 읽고 해법을 제시한 인물
「흐루쇼프에게 중요한 것은 '나는 쿠바를 구했다, 나는 침공을 막았다'라고 말할 수 있는 것입니다」, 쿠바 미사일 위기 ExComm 회의에서.
미국 외교관으로, 1957년부터 1962년까지 모스크바 주재 대사를 역임하며 흐루쇼프와 독자적인 신뢰 관계를 구축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 당시 케네디의 국가안전보장회의 집행위원회(ExComm)에서, 10월 27일 도착한 두 통의 흐루쇼프 서한 중 강경한 두 번째 서한을 무시하고 26일의 첫 번째 서한에 응답하라고 권고했으며, 이 전략이 위기 해소의 핵심이 되었다. 이후 1967년부터 1969년까지 다시 모스크바 대사를 지내며 SALT 협상과 핵비확산 정책 수립에도 기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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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미국 외교관으로 임용
- 1941주소 미국대사관 2등서기관, 독소전 발발 후 모스크바 잔류
- 1952–1957주오스트리아 고등판무관·대사, 오스트리아 국가조약 및 트리에스테 협상
- 1957–1962주소 미국 대사 (1차), 캠프 데이비드·빈 정상회담, U-2 사건, 부엌 논쟁
- 1962ExComm 위원, 쿠바 미사일 위기 해결에 핵심 조언
- 1962–1966국무부 소련 담당 대사급 순회대사·정무담당 부차관보
- 1967–1969주소 미국 대사 (2차), 글래스보로 정상회담, SALT·핵비확산 협상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마셜의 하버드 연설문으로 옮긴 국무부 소련 전문가
「포츠담 이후, 소련이 세계 공동체의 합리적이고 협력적인 구성원이 되도록 유도하기 위해 할 수 있는 일은 거의 없었다」, 회고록 『역사의 증인』에서.
미국 외교관이자 소련 전문가로, 1934년 주소 미국대사관 개설부터 냉전기까지 미소관계의 거의 모든 중대한 장면에 입회했다. 루스벨트와 트루먼의 통역으로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에 배석했으며, 1947년 마셜 국무장관의 요청으로 케넌과 클레이턴의 정책 메모를 하버드 졸업식 연설문으로 작성해 마셜 플랜의 공개적 출발을 이끌었다. 1953년 주소 대사로 임명되었으나 매카시의 공격을 받으며 인준 청문회를 겪었고, 이후 프랑스 대사까지 지내며 '현자들'로 불린 초당파 외교 고문 중 한 사람으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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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9국무부 외교관으로 임용
- 1934–1940주소 미국대사관 3등서기관, 독소불가침조약 전문 입수
- 1943–1945백악관 소련 고문, 테헤란·얄타·포츠담 회담 통역
- 1947–1949국무부 고문, 마셜의 하버드 연설 초안 작성
- 1949–1951주프랑스 미국 공사
- 1953–1957주소 미국 대사
- 1957–1959주필리핀 미국 대사
- 1962–1968주프랑스 미국 대사
1945년 공산당 호소문을 쓰고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운 동독 공산주의자
작센 탈하임의 양말공 집안에서 태어나 1926년 독일 공산당에 들어갔고, 모스크바 레닌 학교를 다녔다. 나치 집권 뒤 지하 활동과 망명을 거쳐 스페인 내전의 국제여단 정치학교를 이끌었고, 모스크바에서 자유독일 방송을 맡았다. 1945년 작센으로 파견된 공산당 선발 그룹을 이끌었고, 1945년 6월 11일 공산당 호소문 초안을 썼다. 1946년 프롤레타리아 독재 없이도 독일에서 사회주의를 세울 수 있다는 「독일 특유의 사회주의 길」을 내세웠으나, 1948년 티토-스탈린 결렬 뒤 이를 철회해야 했다. 외무차관과 대외정보기관 책임자를 지냈고, 1953년 차이서를 지지했다는 이유로 모든 직책에서 쫓겨났다. 1973년 암 투병 중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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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독일 공산당 입당
- 1935공산당 중앙위원, 정치국 후보위원
- 1945작센 파견 공산당 그룹 책임자, 6월 11일 호소문 초안
- 1946사회주의통일당 중앙서기국원
- 1949–1953외무차관
- 1953모든 직책에서 해임
코민포름 창립 회의의 이탈리아 대표로, 스탈린의 전화선을 목격한 공산주의자에서 반공 비판자로 전향한 인물
“스탈린은 직접 모습을 드러내지도 않으면서 회의의 절대적 지배자였다. 토론 중에 우리가 이 사실을 의식하게 된 것은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성과 크렘린 사이에 직통 전화선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1966년 회고록)
이탈리아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의사로, 전후 연립정부에서 외무차관을 지냈고 폴란드 대사를 역임했다. 1947년 코민포름을 창립한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에 이탈리아 대표로 참석했으며, 1966년 회고록은 크렘린으로 직통된 스탈린의 전화선과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에 대한 즈다노프의 사전 계획된 공격을 포함한 회의의 가장 상세한 목격 증언이 되었다. 1956년 소련의 헝가리 침공을 계기로 이탈리아 공산당과 결별했고, 이후 반공 비판자로 활동하며 『사회주의 통신』을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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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이탈리아 공산당(PCI) 입당
- 1932파시스트 특별재판소에서 10년형 선고
- 1937–1939파리에서 『라 보체 델리 이탈리아니』 편집자
- 1944–1947보노미, 파리, 데 가스페리 내각에서 외무차관
- 1945–1947주폴란드 이탈리아 대사
- 1947.09코민포름 창립 슈클라르스카 포렝바 회의 이탈리아 대표
- 1948–1953이탈리아 공화국 상원의원
- 1957PCI에서 제명; 『사회주의 통신』 공동 창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이자 친중파 원로로, 1979년 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한 정치국원 출신 정치가
1979년 중월전쟁 뒤 카라치에서 감시를 피해 중국으로 망명했다. 그는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하고 소련에 굴종한다고 지도부를 비판했다.
응에안 성 출신의 혁명가로 호찌민과 함께 초기 공산주의 운동에 참여했다. 1950~1957년 북베트남의 초대 주중 대사를 지내며 두 나라를 잇는 핵심 통로였고, 1956~1976년 정치국원, 1958~1979년 국회 부의장을 지냈다. 중소분열 때 북베트남이 잠시 중국 쪽으로 기운 1960년대 초 영향력이 정점에 이르렀으나, 중국과의 관계가 나빠지면서 밀려났다. 1979년 7월 동독으로 치료를 받으러 가던 중 카라치에서 감시를 따돌리고 중국 영사관으로 피신해 베이징으로 갔고, 8월 기자회견에서 베트남의 화교 박해를 비난했다. 1991년 베이징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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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호찌민과 함께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을 도왔다.
- 1950–1957북베트남 초대 주중 대사로 재임했다.
- 1958–1979북베트남 및 통일 베트남 국회 상임위원회 부의장을 지냈다.
- 1956–19761956년 제2차 당대회에서 정치국원으로 선출되었고, 1960년 제3차 당대회에서 재선되었다.
- 1963당 국제연락부장에 임명되어 친중 노선의 대외 정책을 맡았다.
- 1976제4차 당대회에서 정치국과 중앙위원회에서 배제되었다.
- 1979중월전쟁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유엔의 절차를 움직인 국제법률가
1950년 6월 25일, 그는 한국의 상황을 보고하고 결의안 표결을 위한 안전보장이사회 절차를 이끌었다.
어니스트 그로스는 국제법률가이자 미국 외교관으로, 법률 자문과 전후 점령지 행정을 거쳐 유엔에서 미국의 정책을 대표했다. 1950년 6월 한국전쟁이 시작되자 그는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안전보장이사회가 결의 82를 채택하도록 절차와 표결을 조율했다. 이 과정은 소련 대표의 불참이라는 조건을 활용한 미국 외교의 성과였지만, 유엔의 집단안보가 강대국 경쟁 속에서 작동한 방식이라는 긴장도 남겼다. 이후 그는 국제변호사로서 티베트 문제와 남아프리카공화국의 아파르트헤이트를 다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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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1933미 국무부 법률고문
- 1940–1943전시노동위원회 부법률고문
- 1943–1945미 육군 민정국 경제과장
- 1945–1949국무부 법률고문 및 점령지역 담당 차관보 보좌관
- 1949국무부 의회관계 담당 차관보
- 1949–1953유엔 주재 미국 대표부 차석대표, 1949–1950년 대표단장 직무대행
- 1953–1999커티스·말레-프레보스트 법률사무소 변호사
- 1959–1960티베트 망명정부 국제연합 로비스트·자문역
- 1960년대국제사법재판소에서 남아프리카공화국 아파르트헤이트 소송 제기
프랑스 레지스탕스 출신 관료로, 1946년 호찌민과 3월 6일 예비협정을 맺었다
1946년 3월 6일 호찌민과 협정을 맺어 프랑스군이 하노이에 전투 없이 진입하도록 했다.
본명은 장 로제(Jean Roger)이며, 제2차 세계대전 중 레지스탕스 정보망 ‘알리앙스’의 노르망디 책임자로 활동했다. 해방 후 프랑스 정부를 대표해 통킹·북부 안남의 공화국 위원으로 임명되어 호찌민과 협상했고, 1946년 3월 6일 협정으로 프랑스군의 하노이 진입을 전투 없이 이루게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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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7프랑스 르 베지네에서 태어났다.
- 1940–1944레지스탕스 정보망 알리앙스에서 노르망디 책임자로 활동했다.
- 1945–1946통킹·북부 안남 주재 프랑스 공화국 위원으로 호찌민과 협상했다.
- 19463월 6일 예비협정에 서명했다.
- 1954프랑스 정부의 북베트남 대표로 임명되었다.
- 1962–1966보훈장관을 지냈다.
- 1968–1977헌법위원회 위원으로 재임했다.
스탈린이 '영국 스파이'로 지목한 유고슬라비아의 파르티잔 외교관
스탈린은 1948년 3월 27일 서한에서 이렇게 썼다: '영국 스파이 벨레비트가 여전히 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으로 남아 있는 이유를 우리는 이해할 수 없다.'
유고슬라비아의 변호사 출신 파르티잔 장군이자 외교관으로, 전시에는 연합군 군사 임무단과의 접촉 창구를 맡았고 전후에는 외무차관으로서 서방과 협상했다. 1948년 3월 스탈린은 그를 '영국 스파이'라고 직접 지목하며 티토와의 솔직한 외교 서신 교환을 거부했고, 이는 티토-스탈린 결별의 계기 중 하나가 되었다. 그는 사임 후 복권되어 로마·런던 주재 대사와 유엔 유럽경제위원회 사무총장을 지냈으며, 냉전기 유고슬라비아의 독자 노선을 외교적으로 구현한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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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자그레브 대학교 법학박사
- 1939이스탄불에서 티토를 만나 KPJ에 입당
- 1942–1943파르티잔 최고사령부, 연합군 군사 임무단 연락장교
- 1945–1948유고슬라비아 외무부 제1차관
- 1951–1952주이탈리아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52–1956주영국 유고슬라비아 대사
- 1960–1967유엔 유럽경제위원회(UNECE) 사무총장
동서 긴장 속에서 협상 공간을 넓힌 외교가
1957년 10월 2일 그는 유엔 총회에서 체코슬로바키아·폴란드·동독·서독으로 이루어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이는 채택되지 못했다.
아담 라파츠키는 1909년 12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 렘베르크(현 리비우)에서 태어나 바르샤바에서 자랐다. 폴란드의 사회주의 정치가이자 경제학자, 외교관으로서 사회주의권의 안보 요구를 국제 협상의 언어로 번역한 인물이다. 그는 1957년 중부 유럽 비핵지대안을 제시했고, 1964년에는 유럽안보회의 소집을 제안해 헬싱키 프로세스로 이어질 의제 형성에 기여했다. 동시에 PZPR 지도부와 정부에서 활동한 공산주의 정치가였으며, 1966년 노벨 평화상 후보로 추천되었다. 검열 완화를 선호한 개혁파로 여겨졌으나, 1968년 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12월 외무장관직에서 해임되었고 1970년 10월 10일 바르샤바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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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1독립사회주의청년동맹 가입
- 1939–1945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교육·정치 활동
- 1947–1950폴란드 해운장관
- 1950–1956고등교육·과학 및 고등교육 장관
- 1956–1968폴란드 외무장관
- 1964유럽안보회의 소집 제안
- 19683월 사태 뒤 정치 활동에서 이탈
- 1948–1968PZPR 정치국원(1954~56년 후보위원)
- 1968.12유대계 인사 박해에 반대해 외무장관직에서 해임
초강대국의 핵 대치를 중재한 조용한 외교관
“어떤 역사라도 살아남는다면, 인류 문명의 종말을 함께 초래한 사람으로 기억되고 싶지는 않을 것입니다.”
우 딴은 버마의 교사와 관료 출신 외교관으로, 탈식민화와 국제 협상이 중심이 된 냉전기의 유엔을 이끈 제3대 사무총장이었다. 1962년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그는 존 F. 케네디와 니키타 흐루쇼프에게 호소와 제안을 보내 소련 선박의 항로 전환과 쿠바 미사일 철수를 연결하는 출구를 제시했고, 이후 쿠바를 방문해 피델 카스트로와 검증 문제를 논의했다. 그의 중재는 핵전쟁의 위험을 낮췄지만, 유엔의 조용한 외교는 초강대국 중심의 위기 서술에서 오래도록 과소평가되었다. 그는 콩고 평화유지 작전과 베트남전 종식을 위한 협상도 추진하며 국제기구의 도덕적 책임과 강대국 정치 사이의 긴장을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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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8–1931판타나우 국립고등학교 교사·교장
- 1948버마 방송국 국장
- 1951–1957버마 총리실 비서
- 1955반둥 회의 사무국장
- 1957–1961유엔 주재 버마 상임대표
- 1961유엔 콩고위원회 의장
- 1961–1971유엔 사무총장
- 1971–1974애들라이 스티븐슨 국제문제연구소 선임연구원
봉쇄를 국제 연대로 만든 냉전 외교가
“유엔에서는 미사일 위협 제거를, 미주기구에서는 리우 조약에 따른 공동행동을 목표로 해야 합니다.”
딘 러스크는 제2차 세계대전과 전후 국무부를 거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국제주의자였다. 케네디와 존슨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군사적 충돌을 통제하면서도 봉쇄를 선택했고, 미주기구와 유엔을 통해 그 조치를 국제적으로 방어하려 했다. 그러나 베트남전에서는 점차 개입을 강하게 옹호해, 국제법과 동맹 외교를 중시한 인물이 전쟁의 정당화에도 관여한 긴장을 남겼다. 퇴임 뒤에는 그루지야대학교에서 국제법과 외교를 가르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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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4–1940밀스 칼리지 정부학 교수
- 1941–1945미 육군 중국·버마·인도 전구 참모장교
- 1947–1949국무부 특수정치업무국장
- 1949–1950국무부 차관보급 부차관
- 1950–1952극동 담당 국무부 차관보
- 1952–1961록펠러 재단 회장
- 1961–1969미국 국무장관
- 1970–1984그루지야대학교 국제법 교수
쿠바 위기서 진주만 비유로 공습을 저지하고, 베트남전에서 홀로 확전을 반대한 국무차관
기습으로 쿠바를 치는 건 진주만과 똑같은 짓이다. 그게 어디로 갈지 생각하면 정말 소름이 끼친다... 미사일을 다 제거해도 그게 끝이 아니야. 그게 시작이라고 생각한다.
국무차관(1961–1966)으로 존 F. 케네디와 린든 B. 존슨 두 행정부에서 복무하며, 쿠바 미사일 위기와 베트남전이라는 냉전의 두 결정적 순간에 확전을 반대한 예외적 인물이었다. 1962년 10월 EXCOMM에서 기습 공습을 '또 하나의 진주만'이라 규정하며 로버트 케네디를 비롯한 다수를 봉쇄 쪽으로 돌리는 결정적 역할을 했고, 이후 1965년까지 베트남 파병 확대에 홀로 반대하는 각료 내 유일한 반대자가 되었다. 퇴임 후에는 이스라엘에 대한 미국의 편향된 중동 정책을 비판했고, 유럽 통합의 초기 설계자 중 한 명으로 장 모네와 함께 슈만 계획과 유럽석탄철강공동체 조약의 초안을 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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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1942시카고에서 변호사 활동
- 1942–1945렌드리스 관리국 · 전략폭격조사단
- 1946–1961Cleary, Gottlieb, Steen & Hamilton 공동 창립
- 1961국무부 경제담당 차관
- 1961–1966국무차관
- 1968유엔 주재 미국 대사
- 1969–1982리먼 브라더스 선임 전무이사
키신저와 비밀 협상으로 파리 협정을 이끌고 노벨 평화상을 거부한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
레득토는 1968년 파리 회담에 참여해 북베트남 대표단을 실질적으로 이끌었고, 1970년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파리 협정에 서명했다. 남베트남에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노벨 평화상을 거부했다.
남딘 출신으로 본명은 판딘카이다. 1930년 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고 1930~1936년과 1939~1944년 프랑스 식민 감옥에 갇혔다. 항불전쟁 때 남부에서 레주언과 함께 당 조직을 맡았고, 1955년 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에 들어갔다. 1968년 6월 파리 협상에 합류해 실질적으로 북베트남 대표단을 이끌었고, 1970년 2월부터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1973년 1월 파리 협정을 맺었다. 그해 키신저와 함께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정해졌으나 남베트남에 아직 평화가 오지 않았다며 거부했다. 1990년 하노이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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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인도차이나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 1930–1936프랑스 식민 당국에 투옥됐다.
- 1939–1944프랑스 식민 당국에 투옥됐다.
- 1948남부의 코친차이나 당 위원회 부서기이자 조직부장을 맡았다.
- 1955–1986베트남 노동당 정치국원으로 활동했다. 1976년 당명은 베트남 공산당으로 바뀌었다.
- 1968파리 평화 회담에 도착해 북베트남 대표단의 실질적 지휘를 맡았다.
- 1970–1973헨리 키신저와 비밀 협상을 벌여 파리 협정 체결로 이어졌다.
- 1973키신저와 공동 노벨 평화상 수상자로 선정됐으나, 남베트남에 평화가 아직 오지 않았다며 상을 거부했다.
국제법의 언어를 시민권 투쟁으로 돌린 외교관
1968년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에서 소련의 침공을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했다.
이르지 하예크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프라하의 봄 개혁과 그 좌절을 모두 경험했다. 1968년 소련 주도의 침공을 유엔에서 점령이라고 규정하며 항의한 뒤 관직과 공산당 지위를 잃었고, 국제적 약속이 국내 권력보다 어떤 의미를 가질 수 있는지 보여 주었다. 그는 1977년 바츨라프 하벨, 얀 파토치카와 함께 샤르타 77의 첫 대변인이 되어 헬싱키 최종의정서의 인권 조항을 시민적 책임의 근거로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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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9–1945나치 독일에 투옥
- 1945–1948체코슬로바키아 사회민주당 의원·노동운동 간부
- 1950–1953정치·경제과학대학 총장
- 1955–1958영국 주재 대사
- 1958–1965외무차관·유엔 주재 대표
- 1965–1968교육부 장관·외무부 장관
- 1977–1979샤르타 77 첫 대변인
- 1988–1990체코슬로바키아 헬싱키위원회 창립자·의장
핵시대의 협상가
스미스가 정책기획실장 시절 제안한 모스크바-워싱턴 직통 회선은 국무부와 군부의 반대에 부딪혔지만, 훗날 '핫라인'이 되자 케네디 대통령은 그 구상의 공을 스미스에게 돌렸다.
제라드 C. 스미스는 미국의 변호사이자 핵정책 전문가로, 군비통제와 비확산을 국가정책의 문제로 다룬 외교관이었다. 그는 SALT I에서 미국 대표단을 이끌며 경쟁하는 핵전략 속에서 제한 협상의 실무를 조직했고, 회고록 Doubletalk에 그 과정의 긴장과 판단을 기록했다. 이후에도 핵물질 전용 방지와 탄도탄요격미사일 조약의 보존을 주장하며 군비경쟁의 관리와 한계를 함께 보여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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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5예일대학교 졸업
- 1938예일 법학대학원 졸업, 뉴욕 변호사
- 1942–1945미 해군성 조달 담당관
- 1950–1954원자력위원회 특별보좌관
- 1954–1961국무부 원자력 담당 특별보좌관 및 정책기획국장
- 1969–1973미국 군비통제·군축청장, SALT I 미국 대표단 수석협상가
- 1977–1980대통령 특별대표, 핵확산 방지 담당
- 1981대통령 자유훈장 수훈
핵무기 외교의 실무 설계자
키신저와 함께 소련의 초안을 동맹 의무를 보존하는 반대안으로 돌려세웠다.
토머스 브리멜로는 영국 외교관이자 소련 문제 전문가로, 냉전의 동맹정치와 군비외교 사이에서 활동했다. 그는 1973년 핵전쟁 방지 협정 협상에서 헨리 키신저와 초안을 함께 다듬어, 소련의 무조건적 핵무기 선제사용 포기 구상을 동맹 의무와 제3국을 포함한 보다 제한적인 문안으로 바꾸는 데 기여했다. 이 역할은 영국 외무부 전문성이 미국의 대소 전략에 직접 결합한 사례였지만, 동시에 긴장 완화의 언어가 핵억지와 세력정치를 보존하는 방식으로 작동했음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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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8외무부 입부
- 1966–1969주폴란드 영국 대사
- 1969–1973외무부 차관보급, 상임차관 대리
- 1972키신저와 핵전쟁 방지 협정 반대제안 공동 작성
- 1973–1975외무부 상임차관
- 1976브리멜로 남작 작위 수여
- 1977–1978유럽의회 의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