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기능·활동(선택됨)
국가·세력

인물이 많은 소속

모든 소속 60개

국제조직

그루지야

그리스

남아프리카 공화국

독일

러시아

몽골

미국

불가리아

브라질

소련

스페인

영국

오스트리아

유고슬라비아

이탈리아

인도네시아

일본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칠레

튀르키예

폴란드

프랑스

핀란드

헝가리

정치적 입장
국적
출신 배경
시대(선택됨)

조르주 클레망소

Georges Clemenceau

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70파리 18구 구청장
  • 1906내무장관
  • 1906–1909프랑스 총리
  • 1917–1920프랑스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의장

토마시 가리그 마사리크

Tomáš Garrigue Masaryk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850–1937 ○ 자연사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조직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맺은 독립운동의 철학자-대통령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82–1914프라하 카렐 대학 철학 교수
  • 1891–1893오스트리아 제국의회(라이히스라트) 의원 (청년체코당)
  • 1907–1914오스트리아 제국의회 의원 (체코 진보당)
  • 1915–1918체코슬로바키아 민족평의회 의장 (망명)
  • 1917–1918러시아에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 편성 지휘
  • 1918–1935체코슬로바키아 초대 대통령

우드로 윌슨

Woodrow Wilson

14개조와 국제연맹을 내걸었으나 상원 비준을 얻지 못한 미국 대통령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2–1910프린스턴 대학교 총장
  • 1911–1913뉴저지 주지사
  • 1913–1921미국 대통령
  • 191814개조 발표
  • 1919파리 강화회의, 국제연맹 규약 기초 위원회 의장

사아드 자글룰

سعد زغلول
독립 활동 민족해방·반식민 운동 이집트 이집트 1857–1927 ○ 자연사

1919년 몰타 추방이 이집트 혁명을 불러온 와프드당 창립 지도자

나일강 삼각주의 농촌에서 태어나 알아즈하르와 카이로의 법률학교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 점령 아래 판사, 교육장관(1906~1908), 법무장관(1910~1912)을 지냈고 1913년 입법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18년 11월 보호령 폐지와 강화회의 대표권을 요구하며 와프드를 이끌었다. 영국이 1919년 3월 그를 몰타로 추방하자 1919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다. 뒤에 세이셸로 다시 추방되었다가 1923년 돌아왔다. 1924년 선거에서 와프드당이 압승해 첫 와프드 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그해 11월 수단 총독 리 스택이 암살되고 영국이 요구를 들이밀자 사임했다. 1927년 카이로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6–1908교육장관
  • 1910–1912법무장관
  • 1913입법의회 부의장
  • 1918와프드 창립 지도자
  • 1919.03몰타로 추방, 1919년 이집트 혁명
  • 1924이집트 총리

조지 커즌

George Nathaniel Curzon

인도 총독을 지내고 외무장관으로 커즌선과 로잔 조약 협상을 이끈 보수당 정치가

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하원 의원
  • 1899–1905인도 총독
  • 1916전시 내각, 상원 원내대표
  • 1919–1924외무장관
  • 1922–1923로잔 회의 연합국 수석 협상자

가타야마 센

片山潜
코민테른 공산주의 일본 일본 1859–1933 ○ 자연사

플레하노프와 악수한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코민테른의 동아시아 전략가

1904년 암스테르담 대회. 의장이 러일전쟁 중인 양국 대표 — 플레하노프와 가타야마 — 가 부의장으로 함께 선출되었음을 알리자, 두 사람은 일어나 말없이 손을 굳게 잡았다. 회의장은 기립 박수로 화답했다.

일본 공산주의의 아버지. 오카야마 출신으로 미국 유학 후 일본 최초의 노조와 사회민주당을 창건했다. 코민테른 집행위원으로 동아시아 반제국주의 전략을 입안했으며, 모스크바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4–1896미국 유학, 그리넬 칼리지·예일 신학부 졸업, 기독교·사회주의 전향
  • 1896–1901귀국, 철공조합·『노동세계』 창간, 사회민주당 창당
  • 1904암스테르담 제2인터내셔널, 플레하노프와 반전 악수
  • 1911–1912도쿄 시가전차 파업 주도, 9개월 투옥
  • 1914–1921미국 망명, CPUSA 가입, 일본인 노동자 공산 그룹 조직
  • 1921–1922멕시코 경유 소비에트 러시아, 일본공산당 창립 주도
  • 1922–1933코민테른 집행위원·상임간부회, 반제·반전 국제회의

비토리오 에마누엘레 오를란도

Vittorio Emanuele Orlando

카포레토 뒤 총리로 승전을 이끌었으나 강화회의에서 영토 요구를 이루지 못한 정치가

팔레르모에서 태어나 이름난 법학 교수가 되었고, 1897년부터 하원의원으로 활동한 자유주의자였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 패전으로 정부가 무너지자 총리가 되어 카도르나를 해임하고 군을 재정비했으며, 1918년 비토리오 베네토 승리로 「승리의 총리」라 불렸다. 강화회의에서 런던 조약이 약속한 달마티아와 피우메를 요구했으나 얻지 못해 1919년 4월 회의를 떠났고 6월 사임했다. 「불구의 승리」는 무솔리니가 일어선 배경이 되었다. 처음엔 무솔리니를 지지했으나 1924년 마테오티 살해 뒤 결별했다. 1952년 로마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7–1925하원의원(파르티니코)
  • 1907–1909법무장관
  • 1916내무장관
  • 1917–1919이탈리아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4거두」
  • 1946제헌의회 의원

티서 이슈트반

Tisza István

제1차 세계대전 때 헝가리 총리를 지내고 과꽃 혁명 날 병사들에게 살해된 이중군주국 옹호자

1875~1890년 총리를 지낸 티서 칼만의 아들로, 칼뱅파 하급 귀족 가문에서 자라 부다페스트와 하이델베르크, 베를린에서 공부했다. 1886년 자유당 의원으로 정계에 들어섰고, 1903~1905년과 1913~1917년 두 차례 헝가리 총리를 지냈으며 1912~1913년에는 하원의장이었다. 오스트리아와의 이중군주국 체제를 누구보다 열렬히 지지했고, 보통선거권과 대토지 분할에 반대했다. 1914년 7월 세르비아와의 전쟁에 처음에는 홀로 반대했으나 결국 지지로 돌아섰다. 개혁을 내건 카를 왕의 요구로 1917년 5월 사임했다. 1918년 10월 31일 과꽃 혁명 중 부다페스트의 집에 들이닥친 병사들에게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6자유당 하원의원
  • 1903–1905헝가리 총리
  • 1910국민노동당 창당
  • 1912–1913하원의장
  • 1913–1917헝가리 총리

카를 레기엔

Carl Legien
독립 활동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독일 독일 1861–1920 ○ 자연사

1918년 슈티네스와 노사 협정을 맺고 1920년 카프 폭동에 총파업으로 맞선 독일 자유노조 지도자

마리엔부르크에서 태어나 고아원에서 자랐고 선반공이 되었다. 188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890년부터 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1893~1898년과 1903~1920년 제국의회 의원을 지냈다. 1913년 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이 되었다. 당의 우파를 이끌었고, 1차 세계대전에서는 성내 평화와 파업 포기를 지지했다. 1918년 11월 15일 후고 슈티네스와 협정을 맺어 고용주가 처음으로 노조를 노동자 대표로 인정하고 8시간 노동제와 사업장 노동자위원회를 받아들이게 했으나, 노조는 급진 사회주의자들의 요구를 거부했다. 1919년 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이 되었고, 1920년 3월 카프 폭동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다. 같은 해 베를린에서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사회민주당 입당
  • 1890독일 노동조합 총위원회 위원장
  • 1893제국의회 의원
  • 1913국제노동조합연맹 초대 회장
  • 1918.11.15슈티네스-레기엔 협정
  • 1919독일노동조합총연맹 위원장
  • 1920.03카프 폭동에 맞선 총파업

후고 하제

Hugo Haase

전쟁에 반대해 독립사회민주당을 세우고 1918년 에베르트와 함께 인민대표평의회를 이끈 법률가

1918년 12월 에베르트 정부가 혁명 수병대를 유혈 진압하자, 하제는 USPD 대표들과 항의해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사임했다.

동프로이센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변호사로 사회주의자 재판을 변호하며 이름을 알렸고, 1911년 베벨과 함께 SPD 공동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전쟁공채에 반대했으나 당의 결정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 성명을 읽어야 했다. 1917년 전쟁에 반대하는 이들과 독립사회민주당(USPD)을 세웠다. 1918년 11월 인민대표평의회에서 에베르트와 공동의장을 맡았지만 크리스마스 위기 뒤 정부를 떠났다. 1919년 10월 제국의회 앞에서 총격을 받고 11월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88변호사로 개업해 노동자·농민과 사회주의 활동가를 변호했다.
  • 1911아우구스트 베벨과 함께 독일사회민주당(SPD) 의장이 되었다.
  • 1914전쟁공채에 반대했지만 당 규율에 따라 제국의회에서 찬성표를 던지고 당의 찬성 입장을 변호했다.
  • 1917독립사회민주당(USPD) 창립에 참여해 의장이 되었다.
  • 191811월부터 에베르트와 인민대표평의회 공동의장을 맡았고, 12월 정부의 수병대 진압에 항의해 사임했다.
  • 191910월 8일 제국의회에 들어가다 총격을 당했고, 총상으로 인한 혈액중독으로 11월 7일 사망했다.

아서 헨더슨

Arthur Henderson

영국 노동당 조직가이자 국제 군축 운동을 이끈 정치인이다.

헨더슨은 주물공으로 일하며 노동조합 활동을 했고, 1900년 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했다. 1906년 노동당을 세운 회의를 주재하고 1911년부터 1934년까지 당 서기를 맡아 당의 조직과 기반 확대를 이끌었다. 1915~1916년 교육위원회 의장, 1924년 내무장관, 1929~1931년 외무장관을 지냈으며 1932년 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됐다. 군축회의가 끝내 실패했지만, 국제 협상과 군축을 위한 활동으로 1934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900노동대표위원회 창립에 참여하다
  • 1906노동당 창립 회의를 주재하다
  • 1911–1934노동당 서기로 재직하다
  • 1915–1916교육위원회 의장으로 재직하다
  • 1924내무장관으로 재직하다
  • 1929–1931외무장관으로 재직하다
  • 1932국제연맹 군축회의 의장에 선출되다
  • 1934노벨 평화상을 받다

데이비드 로이드 조지

David Lloyd George

대전 후반 영국을 이끌고 강화회의에서 독일에 대한 온건론을 편 자유당 총리

맨체스터의 웨일스인 집안에서 태어나 급진 자유주의 웅변가로 이름을 얻었다. 재무장관으로 1909년 「인민 예산」과 국민보험법을 내 복지국가의 토대를 놓았다. 군수장관과 육군장관을 거쳐 1916년 12월 총리가 되었다. 파리 강화회의에서는 독일 경제를 무너뜨릴 막대한 배상에 반대하고 프랑스의 패권을 견제했다. 1921년 영국-소련 무역협정을 맺고 아일랜드 자유국 수립을 협상했으나 1922년 보수당이 연립에서 빠지자 사임했다. 1936년 히틀러를 만나 찬양하기도 했다. 1945년 죽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하원의원(카나번 버러스)
  • 1908–1915재무장관
  • 1915–1916군수장관
  • 1916육군장관
  • 1916–1922영국 총리
  • 1919파리 강화회의 영국 대표

펠릭스 야코블레비치 콘

Феликс Яковлевич Кон
소련 국가기관 소련 공산주의 소련 폴란드 1864–1941 ○ 자연사

바르샤바 소년 애국자에서 코민테른의 노혁명가로: 봉인열차와 함께 돌아온 폴란드인

“여섯 살 때 나는 반란군 지도자가 되어 '모스칼'과 '슈바벤'에게서 폴란드를 해방하는 꿈을 꾸었다.” — 회고록 『50년 동안』

20년간 차르의 감옥과 시베리아 유형을 견디며 시베리아 원주민 연구로 금메달을 받은 민족지학자가 된 폴란드 혁명가. 폴란드사회당(PPS) 내에서 피우수트스키의 민족주의 노선에 맞서 좌파 분당을 주도했고, 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볼셰비키에 합류했다. 국제적색원조회(MOPR) 창립에 참여하고 소비에트 라디오방송체계를 창설했으며, 60년 가까이 국제 혁명운동의 최전선에서 활동하다 대숙청을 넘겨 77세로 자연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2폴란드 최초의 사회주의 정당 '프롤레타리아트' 가입
  • 1884–1891체포, 10년형 선고 — 카라 강제노동수용소 복역; 1889년 여성 수감자 체벌 항의 집단 음독 주도
  • 1891–1904야쿠츠크·이르쿠츠크·미누신스크 유형 — 민족지 연구로 금메달 수상; 레닌·크루프스카야와 교류
  • 1904–1907바르샤바 귀환, PPS 좌파 지도자 — 1906년 피우수트스키 축출 및 PPS-레비차 분당 주도
  • 1907–1914오스트리아 갈리치아 망명 — 드로호비치 노동자 의료보험조합장, PPS-레비차 해외조직 활동
  • 1914–1917스위스 망명 — 치머발트 회의 참석, 국제주의 좌파 활동
  • 1917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러시아 귀환; 하리코프 지역 폴란드 문제 정치위원
  • 1918RKP(b) 입당 (당적 1906년 소급 인정); 우크라이나 외무인민위원부·폴란드국 활동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폴레프콤) 위원 — 비아위스토크에서 폴란드 소비에트 정부 수립 시도
  • 1921우크라이나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책임서기 (3월–12월)
  • 1922–1923코민테른 집행위원회(ICCI) 서기
  • 1925–1928『크라스나야 즈베즈다』(붉은 별) 편집장
  • 1928–1930『라보차야 가제타』 편집장 및 아동잡지 『무르질카』 주필
  • 1931–1933전연방 라디오방송위원회 초대 의장 — 소비에트 라디오 방송체계 창설
  • 1933–1937RSFSR 교육인민위원부 박물관 부서장, 『소베츠키 무제이』 주필
  • 1937–1941『나샤 스트라나』 편집장; 독일 침공 후 모스크바 라디오 폴란드어 방송 지도

에른스트 프리드리히 도이믹

Ernst Friedrich Däumig
독일 공산당 공산주의 독일 독일 1866–1922

독일 사회주의자이자 노동자평의회 운동의 지도자다.

사회민주당 언론인으로 출발한 도이믹은 제1차 세계대전 중 독립사회민주당에 합류해 베를린 급진파와 혁명적 오프로이테에서 영향력을 키웠다. 1918년 11월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지도부로서 평의회 체제를 헌정의 토대로 삼으려 했으나 제헌의회 지지 세력에 패했다. 그는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좌파의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이끌고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으며, 1921년 2월 파울 레비와 함께 의장직에서 물러났다. 3월 행동과 레비 제명 뒤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고, 1922년 USPD에 복당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01게라·할레·에르푸르트의 사회민주당 신문에서 일하기 시작했다.
  • 1911베를린 사회민주당 기관지 《포어베르츠》에 군사 기술·노동자 교육 담당자로 합류했다.
  • 1916《포어베르츠》를 떠난 뒤 독립사회민주당을 위해 선전 활동을 했다.
  • 1918혁명적 오프로이테 지도자이자 베를린 노동자평의회 집행위원회 주요 인사가 되었다.
  • 1920독립사회민주당 의원으로 제국의회에 들어갔고, 볼셰비키의 21개 조건 수용과 공산주의 인터내셔널 가입을 지지했다. 12월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이 되었다.
  • 19212월 파울 레비와 함께 독일통일공산당 공동의장직에서 사퇴했다. 3월 행동 이후 당을 떠나 공산주의 노동공동체를 세웠다.
  • 1922공산주의 노동공동체와 함께 독립사회민주당에 복당했다.
독일 공산당 소련 공산주의 소비에트 폴란드인 1866–1925 ○ 병사

폴란드에서 태어나 독일과 러시아 혁명을 모두 거친 국제주의자

1920년 붉은 군대의 바르샤바 진군을 앞두고 라데크와 함께 레닌에게 진군 중단을 거듭 권고했다 — 폴란드 노동자의 혁명 의식을 과대평가하지 말라고.

폴란드 공산주의 운동의 창립자 중 한 명으로, 로자 룩셈부르크·레오 요기헤스와 함께 1893년 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을 공동 창립했다. 독일 사회민주당 좌파에서 스파르타쿠스단과 독일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고, 러시아 혁명 후 볼셰비키에 합류해 레닌의 농업·농민 정책 수립을 도왔다. 1920년 폴란드-소비에트 전쟁에서 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 위원장을, 이후 국제적십자사(MOPR) 초대 의장과 서방 소수민족 공산대학 초대 총장을 지내며 국제 공산주의 제도화에 기여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9폴란드 노동자동맹 공동 창립
  • 1893폴란드 왕국 사회민주당(SDKPiL) 공동 창립
  • 1896취리히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
  • 1906–1907SDKPiL 대표로 RSDLP 런던 당대회 참석, 중앙위 후보위원
  • 1914–1918스파르타쿠스단 활동, 독일에서 반전 운동으로 투옥
  • 1920폴란드 임시혁명위원회(TKRP) 위원장
  • 1922–1925MOPR 중앙위 초대 의장, KUNMZ 초대 총장

램지 맥도널드

Ramsay MacDonald

1914년 전쟁공채 지지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내놓고, 뒤에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된 정치가

1914년 영국의 참전과 전쟁 지출에 반대해 노동당 의장직을 사임했으며, 1931년 거국 내각을 이끌어 노동당 지지를 잃었다.

스코틀랜드 로시머스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조직가가 되었고, 1911년 노동당 의장이 되었다. 1914년 8월 노동당이 정부의 전쟁공채를 지지하자 의장직을 사임했고, 전쟁 반대로 거센 비난을 받았다. 1924년 영국 첫 노동당 총리가 되어 소련을 승인했고, 1929년 다시 총리가 되었다. 1931년 경제 위기 속에 보수당과 거국 내각을 꾸려 노동당에서 제명되었다. 1937년 항해 중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93독립노동당에 가입하고 런던에서 언론인으로 일했다.
  • 1906레스터 지역구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 1911노동당 의회그룹 의장이 되었다.
  • 1924영국 최초의 노동당 총리로 취임했다.
  • 1929두 번째 소수 노동당 정부를 이끌었으며, 실업 증가 속에 야당 지도자들을 거국 내각에 포함했다.
  • 1935거국 내각에서 사임했다.

레오 요기헤스

Leo Jogiches

혁명의 지하 조직가. 언제나 뒤에서, 마지막엔 맨 앞에서

1919년 3월 10일,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의 죽음을 추적하던 요기헤스는 베를린 모아비트 교도소에서 체포된 지 몇 시간 만에 뒷머리에 총을 맞고 살해되었다. 마지막으로 수사관에게 남긴 말: 「당신들은 이 살인자들을 절대 찾지 못할 것이다」.

폴란드-유대인 출신 마르크스주의 혁명가. 1893년 로자 룩셈부르크와 함께 SDKPiL을 창립하고, 1차 세계대전 중 스파르타쿠스단의 핵심 지하 조직가로 활동했다. 평생 룩셈부르크의 가장 가까운 정치적 동지이자 연인이었으며, 뛰어난 조직가였으나 스스로 글로 남기는 데는 어려움을 겪었다. 1919년 1월 룩셈부르크와 리프크네히트가 살해되자 KPD 지도부를 맡아 그들의 죽음을 파헤치다 두 달 뒤 같은 의용군 계열에 살해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빌뉴스 최초의 지하 사회주의 연구 서클 창립
  • 1890징집을 피해 취리히로 망명, 룩셈부르크와 만남
  • 1892사회민주주의 도서관 출판사 설립
  • 1893룩셈부르크와 폴란드왕국 사회민주당(SDKP, 훗날 SDKPiL) 공동 창립
  • 1905–1906바르샤바에서 SDKPiL 중앙위 지도 — 체포, 8년 중노동형, 탈옥
  • 1907RSDLP 런던 대회에서 중앙위 후보위원 선출
  • 1916–1918스파르타쿠스단 지하 조직 총괄 — 신문 《스파르타쿠스》 발행 지휘
  • 1919.01–03KPD 지도부 장악,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살해 조사 주도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Józef Piłsudski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러시아 제국 빌나 현의 줄로보 영지(오늘날 리투아니아)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서술된다.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고, 폴란드 사회당에서 지하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켰다가 1917년 마그데부르크에 갇혔고,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뒤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서 베레자 카르투스카 등에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7–1892알렉산드르 3세 암살 모의 연루로 시베리아 유형
  • 1892–1908폴란드 사회당(PPS) 지도자, 기관지 『로보트니크』 발행인
  • 1908–1914전투단과 소총병 연맹 조직, 갈리치아에서 군사 간부 양성
  • 1914–1917폴란드 군단 제1여단장(오스트리아-헝가리군 소속)
  • 1917–1918독일에 대한 충성 선서 거부로 마그데부르크 요새 수감
  • 1918.11–1922.12국가원수(나첼니크 파인스트바)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의 폴란드군 총사령관
  • 1926.055월 쿠데타로 재집권
  • 1926–1935사나차 체제의 실권자, 국방장관 겸 두 차례 총리
  • 1932소련-폴란드 불가침조약 체결

체렌도르지

Цэрэндорж
몽골 국가기관 공산주의 몽골 몽골 1868–1928 ○ 재임 중 병사

몽골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 구체제의 외교관

1924년 9월 23일 총리 체렌도르지가 의장을 맡은 헌법 기초위원회가 설치되었고, 같은 해 11월 26일 첫 대후랄이 6장 50조의 헌법을 만장일치로 채택했다. 이 헌법은 몽골 최초로 공화정을 규정했다.

1868년 헤를렌 바얀울란에서 제브춘담바 후툭투의 대샤비 속민으로 태어났다. 몽골어·만주어·중국어·러시아어를 익혀 1885~1911년 허레 만주 행정청의 서기와 통역관으로 일했고, 1911년 독립 후 외무부에 들어가 1913~1915년 차관, 1915~1919년 수석장관을 지냈다. 1919년 중국 점령기에 자치 철회 문서에 서명했고, 1921년 혁명 후 인민정부의 외무차관이 되었다. 1923년 총리로 임명되어 1924년 헌법 기초위원회를 이끌고 인민공화국 초대 총리가 되었다. 1926년 이후 소련의 통제가 강화되자 사유재산 폐지와 불교 탄압에 저항했으며, 1928년 재임 중 병사했다. 사망일은 2월 13일설과 11월 13일설이 있다.

상세 이력 보기
  • 1885–1890허레 만주 행정청 서기
  • 1890–1904러시아 영사관 통역학교 교사
  • 1904–1911허레 만주부 중국어 통역관(6품)
  • 1913–1915자치 몽골 외무차관
  • 1915–1919외무부 수석장관
  • 1923–1928몽골 총리(1924년부터 인민공화국 총리)

샤를 모라스

Charles Maurras

악시옹 프랑세즈의 두뇌, 「통합민족주의」의 이름으로 공화국 자체를 부정한 왕당파 이론가

「이것은 드레퓌스의 복수다!」, 종신형 선고를 듣고 리옹 법정에서, 1945년 1월 27일

프로방스 마르티그에서 태어나 청년기에 청력을 잃은 시인이자 논객으로, 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결성된 악시옹 프랑세즈를 반세기 동안 이끌었다. 그가 말한 「통합민족주의」는 왕정 복고와 의회 공화국의 폐기를 내걸고 유대인, 개신교도, 프리메이슨, 외국인을 프랑스를 안에서 좀먹는 「네 개의 연합국」으로 지목했다. 1926년 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했음에도 세력은 유지되었고, 1938년에는 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이 되었다. 1934년 1월 스타비스키 사건 내내 그의 신문은 「도둑들」을 날마다 지목했고 2월 6일 아침 지면은 저녁에 의사당 앞으로 나오라고 독자들에게 호소했다. 1940년 페탱의 집권을 「신의 뜻밖의 선물」이라 부르며 비시를 지지했고, 점령기 내내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했다. 1945년 1월 대적 협력 혐의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을 선고받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68–1890마르티그 출생, 청력을 잃고 파리에서 문필 활동 시작
  • 1899–1908드레퓌스 사건을 계기로 악시옹 프랑세즈에 합류, 1908년 일간지 창간
  • 1908–1939「통합민족주의」의 이론가로 프랑스 극우 전체에 영향
  • 1926교황청이 악시옹 프랑세즈를 단죄
  • 1934.01–02스타비스키 사건 지면 공세, 2월 6일 시위 호소
  • 1938아카데미 프랑세즈 회원 선출
  • 1940–1944비시 지지, 저항 세력과 유대인을 지면에서 고발
  • 1945.01대적 협력으로 종신형과 공민권 박탈 선고
  • 1952병으로 석방된 해에 투르에서 사망

노이 조르다니아

ნოე ჟორდანია
그루지야 국가기관 비볼셰비키 사회주의자 그루지야 그루지야 1868–1953 → 망명지에서 사망

1918~1921년 그루지야 민주공화국 정부를 이끈 그루지야 멘셰비키의 지도자

1868년 그루지야 서부 구리아에서 태어나 바르샤바 수의학교에서 마르크스주의를 받아들였고, 1890년대 그루지야 최초의 합법 마르크스주의 단체 메사메 다시를 이끌었다. 1903년 멘셰비키 편에 섰고 1906년 제1대 국가 두마 의원이 되었다. 1917년 트빌리시 소비에트와 그루지야 민족회의를 이끌었고, 1918년 5월 독립 선포 회의를 주재한 뒤 7월 그루지야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이 되어 토지개혁과 사회 입법을 이끌었다. 1921년 붉은 군대의 침공으로 프랑스에 망명해 망명정부를 이끌다 1953년 파리 근교에서 숨졌다.

상세 이력 보기
  • 1890년대메사메 다시 지도자
  • 1906제1대 국가 두마 의원
  • 1917트빌리시 소비에트 의장, 그루지야 국민평의회 의장
  • 1918–1921그루지야 민주공화국 정부 수반
  • 1921–1953프랑스에서 망명정부 수반

얀 퇴니손

Jaan Tõnisson
민족주의 에스토니아 에스토니아 1868–1941? 실종 · 사망 추정

타르투 강화를 체결한 에스토니아 총리, 「포스티메스」의 발행인

1940년 6월 소련의 점령이 닥치자 그는 페츠 대통령에게 상징적으로라도 무장 저항해야 한다고 설득했다.

「포스티메스」를 이끈 에스토니아 자유주의 민족운동의 대표로 1919~1920년 총리를 지내며 타르투 강화를 체결했다. 1934년 페츠의 권위주의 체제에 반대해 밀려났고 1940년 소련 점령 뒤 체포되어 실종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 1896「포스티메스」 편집인 겸 발행인으로 민족운동의 기관지로 키움
  • 1906러시아 제1두마 의원, 비보르크 호소 서명
  • 1917에스토니아 임시지방의회(마패브) 의원
  • 1919–1920총리로 타르투 강화 조약 체결
  • 1923–1925리가코구 의장
  • 1927–1928국가원로
  • 1931–1932외무장관
  • 1933국가원로(마지막 정부)

네빌 체임벌린

Neville Chamberlain

전쟁을 피하려다 전쟁의 문을 연 유화정책의 설계자

1938년 뮌헨에서 돌아온 그는 협정을 “우리 시대의 평화”라고 선언했다.

네빌 체임벌린은 전간기 영국의 보수 정치가로, 국내 행정 개혁과 재무 정책을 거쳐 총리가 되었다. 그는 독일과의 전쟁을 피하고 재무장을 위한 시간을 벌려 했지만, 그 전략은 나치 독일의 팽창을 억제하지 못했다. 1938년 뮌헨 협정에서 체코슬로바키아의 영토 양도를 받아들인 그의 정부는 소련이 제안한 집단안보 구상에도 충분히 호응하지 않았고, 이 선택은 1939년 외교 위기와 독소 불가침조약으로 이어진 국제적 조건의 일부가 되었다. 폴란드 침공 뒤 전쟁을 선포했으나 1940년 노르웨이 전투 논쟁 속에서 사임했다.

상세 이력 보기
  • 1911–1915버밍엄 시의원, 도시계획위원회 의장
  • 1915버밍엄 시장
  • 1916–1917국가복무국장
  • 1923–1924보건부 장관, 재무장관
  • 1924–1929보건부 장관
  • 1931–1937재무장관
  • 1937–1940영국 총리
  • 1938–1939뮌헨 협정과 대독 유화정책 주도

프란시스코 라르고 카바예로

Francisco Largo Caballero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린 UGT의 노동자 지도자, 혁명과 전쟁 사이에서 무너진 공화국 총리

1936년 11월, 라르고 카바예로는 CNT 지도자 네 명을 각료로 임명했다. 국가의 폐지를 강령으로 삼아 온 아나키스트들이 국가의 장관석에 앉은 것이다. 그중 보건장관 페데리카 몬세니는 스페인 역사상 첫 여성 각료였다.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으로 일하다 노동조합 지도자가 된 사람. 노동총동맹(UGT)을 이끌며 1917년 8월 총파업으로 종신형을 선고받았고, 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에서는 국가참사원에 들어가 조직을 지켰는데 이 선택은 평생 논쟁으로 남았다. 제2공화국 노동장관으로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밀어붙였고, 1934년 아스투리아스 봉기 전후로 급격히 좌경화해 지지자들에게 「스페인의 레닌」이라 불렸다. 1936년 9월 총리 겸 전쟁장관이 되어 11월에는 CNT 지도자 넷을 입각시켜 아나키스트를 처음으로 정부에 앉혔으나, 인민군 재건과 혁명의 속도를 놓고 공산당·소련 고문단과 계속 부딪쳤다. 1937년 5월 사태 뒤 POUM 금지 요구를 거부하다 각료들이 이탈하면서 물러났고, 망명지 프랑스에서 게슈타포에 붙잡혀 작센하우젠 수용소에 갇혔다가 1945년 해방을 맞았다.

상세 이력 보기
  • 1869마드리드의 가난한 집에서 출생, 일곱 살에 학교를 그만두고 미장공이 됨
  • 1890–1894건설노동자 파업을 계기로 노동총동맹(UGT) 활동 시작, 1894년 PSOE 입당
  • 19178월 총파업 지도로 종신형 선고, 이듬해 하원의원 당선과 함께 석방
  • 1924–1930프리모 데 리베라 독재 아래 국가참사원 노동 참사관, UGT 조직을 유지한 대가로 오랜 논쟁을 남김
  • 1925파블로 이글레시아스 사후 PSOE와 UGT의 최고 지도자로
  • 1931–1933제2공화국 노동장관, 농촌 8시간 노동제를 비롯한 노동 입법 추진
  • 1934–1935「스페인의 레닌」으로 불릴 만큼 좌경화, 10월 아스투리아스 봉기 실패로 수감됐다 무죄 석방
  • 1936.09.04총리 겸 전쟁장관 취임
  • 1936.11CNT 각료 네 명을 입각시키고 정부를 발렌시아로 이전
  • 1937.05.175월 사태 뒤 POUM 금지를 거부하다 총리직에서 물러남
  • 1937–1938UGT 지도부에서도 밀려남
  • 1939공화국 패배와 함께 프랑스로 망명
  • 1943–1945게슈타포에 체포되어 작센하우젠 강제수용소 수감, 해방으로 생환
  • 1946.03.23파리에서 사망, 1978년 유해가 마드리드로 돌아옴