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차 세계대전 막바지와 파리 강화회의 때 프랑스 총리로 헝가리에 가혹한 조건을 밀어붙인 급진파 정치가
방데 출신의 의사이자 언론인으로, 1870년 파리 18구 구청장이 되었고 이듬해 파리 코뮌과 정부 사이의 타협을 시도했다. 독립 급진파의 핵심 인물로 정교분리를 주장했다. 1906년 내무장관으로서 노동운동을 억압하는 정책을 폈고 「호랑이」라는 별명을 얻었으며, 1906~1909년과 1917~1920년 총리를 지냈다. 1917년 11월 전쟁이 가장 어려울 때 총리가 되어 독일에 대한 완전한 승리를 요구했고, 파리 강화회의에서 베르사유 조약을 이끌어 냈다. 헝가리를 독일처럼 약화시키려 해 트리아농 조약의 가혹한 조건을 낳았다. 1929년 죽었다.
기계공 출신인 아이히호른은 사회민주당에서 일하다 1917년 독립사회민주당으로 옮겼다. 1918년 11월 혁명 뒤 베를린 경찰청장이 되어 좌파 정치 세력에 우호적인 경찰 운영을 폈다. 프로이센 내각은 1919년 1월 4일 그를 해임하고 사회민주당원 오이겐 에른스트로 교체하려 했다. 이에 맞선 대중 시위와 총파업이 일어났고, 이어진 점거와 무장 충돌은 1월 봉기로 이어졌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부대 장교들이 『네프서버』 기자 둘을 살해했고 1921년 카를 왕의 복귀 시도에 가담한 헌병 장교
마로시바샤르헤이에서 태어난 장교로,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쇼프론의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2월 17일 그의 장교 부대원들이 『네프서버』의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고, 3월 섭정 선거 때는 그의 부대가 국민의회의 「질서」를 지켰다. 1921년 8월 쇼프론 철수를 거부해 이 도시가 헝가리에 남을 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왕정주의 장교들과 함께 카를 왕을 불러들여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으나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졌고, 사면을 받은 뒤 퇴역했다. 1932년 프로너이 팔과 함께 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을 세웠다.
스위스 샤프하우젠에서 태어나 세 살 때 아버지를 따라 독일로 옮겼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1급 철십자훈장을 받았고, 오케스트리온 공장 관리자로 일하며 1923년 나치당에 들어가 「발트키르히의 히틀러」로 불렸다. 1932년 친위대에 들어갔다. 1941년 7월부터 1943년 9월까지 카우나스에서 특수작전집단 A 산하 특무부대 3을 지휘하며 리투아니아인의 도움을 받아 유대인 남녀와 어린이를 가리지 않고 총살했고, 1941년 11월 제9요새 학살을 저질렀다. 1941년 12월 1일 13만 7,346명의 처형을 날마다 집계한 보고서를 썼다. 1943년 말 신경 쇠약으로 독일에 돌아갔고, 전후 농장 일꾼으로 살다 1959년 보고서가 드러나 체포되자 재판 전에 목을 매 자살했다.
1907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 때 참모장교로 콘스탄티노플의 독일 군사사절단에서 일했다. 1919년 경찰로 옮겨 칠레 경찰대 책임자, 경찰학교 감찰총감을 지냈고, 친위대에 들어가 힘러의 참모부에서 일했다. 1939년 말 친위대 경찰사단을, 1943년 라트비아인 제6친위군단을 맡았다. 1944년 12월 부다페스트의 제9친위산악군단장이 되어 1944년 12월 24일부터 1945년 2월 11일까지 포위전에서 독일군을 지휘했고, 모든 항복 권유를 거부해 길고 참혹한 포위전으로 이어졌다. 탈출 시도가 실패한 뒤 소련군 포로가 되어 1949년 징역 25년을 선고받았고, 1955년 풀려나 1971년 빌레펠트에서 교통사고로 숨졌다.
니레지하저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난 언론인으로, 제1차 세계대전 중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다. 10월 혁명 뒤 모스크바에서 쿤 벨러와 함께 헝가리인 포로 공산주의자들을 조직했고, 1918년 12월 독일 스파르타쿠스단 창립에도 참여했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군사 인민위원 대리와 교육 인민위원을 지냈으며, 그의 무장대는 레닌 소년단으로 불렸다.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처형한 적색 테러의 중심인물로, 5월 말에는 모스크바로 날아가 레닌을 만났다. 1919년 8월 2일 오스트리아 국경을 넘다 붙잡혀 죽었는데, 당국은 자살로 발표했다.
부다페스트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구두공으로 일하다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에서 복무했다. 1918년 소비에트 러시아로 탈출해 헝가리인 공산주의자 그룹에 들어가 선동가 학교에서 배웠다. 1918년 12월 귀국해 공산당 본부를 지키는 수병 경비대에 들어갔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200명이 넘는 무장대를 이끌며 혁명재판소의 재판도 맡았고, 그의 부하들은 반혁명 혐의자를 재판 없이 체포·고문·처형했다. 4월 말 뵘 빌모시의 해산 명령으로 무장해제되었으나 6월 봉기 뒤 쿤 벨러에게 재무장을 요청해 활동을 이어 갔다. 붕괴 뒤 8월 4일 체포되었고, 살인 9건으로 사형을 선고받아 1919년 12월 18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경찰은 1940년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 《리조스파스티스》를 내세워 당원들을 혼란에 빠뜨리려 했다.
그리스 육군 장교 출신인 콘스탄티노스 마니아다키스는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4·8월 독재에서 공안과 반공 탄압을 조직한 핵심 관료였다. 그는 아시팔리아의 정보망과 고문, 섬 강제추방을 결합해 그리스 공산당(KKE)의 공개 활동과 지도부를 무력화했다. 1940년에는 경찰이 통제하는 가짜 KKE 지도부와 위조된 《리조스파스티스》를 만들어 당원들을 혼란시키려 했다. 해방 뒤에도 반공주의를 정치 자산으로 삼아 의원이 되었고, 독재 시기의 책임은 제대로 청산되지 않았다.
부유한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갈릴레이 서클에서 활동했고, 은행원으로 일하며 1918년 반군국주의 혁명적 사회주의자 지하조직을 이끌었다. 헝가리 공산주의자당 창립에 참여해 중앙위원이 되었고, 1919년 3월 21일 옥중에서 두 당의 합당 문서를 타자로 쳤다. 평의회 공화국에서 상점 사회화를 맡은 뒤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조사국장으로 반혁명 혐의자를 추적했다. 붕괴 뒤 루카치 죄르지와 함께 지하당 재건을 맡았다가 체포되어 고문을 받았고, 1919년 12월 교수형에 처해졌다.
슈바르츠발트의 호른베르크에서 직물공장주의 아들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다. 1929년 나치당, 1930년 친위대에 들어갔고, 1933년부터 브라운슈바이크의 경찰청장과 정치경찰 책임자를 지냈다. 1941년 6월 힘러에게 남부 러시아·우크라이나의 친위대·경찰 고위 지도자로 뽑혀 관할 지역의 아인자츠그루펜 학살을 모두 지휘했고, 카미야네츠포딜스키(2만 3600명)와 바비 야르(3만 3771명)의 대량 총살에 자신의 방식을 썼다. 11월 오스트란트로 옮겨 리가 유대인의 절멸을 명령받았고, 룸불라에서 이틀 동안 2만 5000명이 살해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1945년 4월 소련군에 포로로 잡혀 리가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에르되퓔레에서 태어났고 1916년까지 홀렌데르라는 성을 썼다. 금융기관 사무원으로 일하며 제1차 세계대전 중 코르빈 오토와 반군국주의 운동을 조직하다 1918년 체포되었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에서 내무 인민위원부 정치부의 코르빈 대리를 지냈다. 공화국이 무너지자 빈을 거쳐 모스크바로 망명해 국제적색구원회 일을 했고, 쿤 벨러의 제안으로 귀국해 불법 당 출판을 맡았다. 1932년 7월 체포되어 비어토르바지 폭파와 무관함에도 사형을 선고받고 7월 29일 퓌르시트 샨도르와 함께 교수형에 처해졌다.
헌병대 출신의 국민사회주의자로,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서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은 인물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사관학교를 나와 제1차 세계대전에 장교로 싸웠고, 1919년 세게드에서 폭력적인 반혁명 활동으로 이름을 얻은 뒤 헌병대 지도자로 떠올랐다. 1938년 헌병 소장으로 물러나 헝가리 국민사회주의당에 들어갔고, 1939년 의원이 되었으며 독일 자금의 신문 『머저르샤그』 편집인이 되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내무부 정무 차관이 되어 엔드레 라슬로와 함께 유대인 이송을 맡았고, 4월 4일 아이히만 특무대와의 회의를 주재해 유대인 재산을 빼앗고 도시 게토로 옮긴 뒤 독일로 이송하기로 정했다. 여름에 해임되고 반호르티 쿠데타 모의로 체포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국가보안국장이 되었다. 1945년 오스트리아에서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교수형을 당했다.
1941년 특수작전집단 A를 이끌며 카우나스 포그롬을 부추기고 발트 유대인 살해를 지휘한 친위대 장교
슈테르넨펠스의 목사 집안에서 태어나 튀빙겐 대학에서 법학 박사가 되었다.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가 뷔르템베르크와 브레슬라우의 게슈타포를 이끌었고, 1938년 빈의 유대인 이주 중앙청 공식 수장이 되었다. 1941년 2월 특수작전집단 A 사령관이 되어 6월 북부집단군을 따라 발트 3국에 들어갔다. 카우나스에서는 클리마이티스에게 포그롬을 시키고 리가에서는 아라이스에게 부대를 꾸리게 하는 등, 학살을 현지인의 「자기 정화」처럼 꾸몄다. 1941년 겨울까지 유대인 24만 9,420명을 죽였다고 보고했고, 11월 말 오스트란트 보안경찰·정보부(SD) 사령관이 되었다. 1942년 3월 러시아 크라스노그바르데이스크 근처에서 소련 파르티잔에게 치명상을 입었다.
1943년 10월 포젠에서 그는 친위대 장교들에게, 시체 백 구에서 천 구를 견디며 '품위 있는 자'로 남은 것이 '기록되지도, 기록될 수도 없는 영광의 장'이라고 말했다.
하인리히 힘러는 나치 독일의 친위대와 경찰 체계를 확장해 인종주의적 지배와 대량학살을 관료적으로 조직한 핵심 지도자였다. 그는 강제수용소와 절멸정책, 점령지의 학살 부대를 통솔하며 유대인과 여러 집단에 대한 집단살해를 실행하는 데 중심 역할을 했다. 1944년 바르샤바 봉기 때에는 도시를 파괴하고 주민을 살해·추방하는 독일의 보복 작전을 승인하고 지시했다. 전쟁 말기 서방과의 독자적인 협상을 시도하다 히틀러에게 해임됐고, 영국군에 체포된 뒤 자살했다.
카를 볼프는 나치 독일의 고위 SS 장교로, 하인리히 힘러의 개인 참모장을 지내며 정권의 핵심 의사결정과 범죄에 접근했다. 이탈리아 점령기에 최고 SS·경찰 지도자로서 유대인 검거와 강제노동, 저항운동 탄압을 관할했고, 그 책임을 전후 협상 참여로 지울 수는 없었다. 1945년 스위스에서 미국 OSS의 앨런 덜레스와 비밀 협상인 작전 선라이즈를 진행해 북이탈리아 독일군의 조기 항복을 이끌었지만, 그 영향력과 동기는 제한적으로 평가된다. 전후에는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다.
오자키 호쓰미는 아사히 신문 기자이자 공산주의자로, 리하르트 조르게의 도쿄 첩보망에서 가장 핵심적인 일본인 정보원이었다. 그는 고노에 후미마로 총리의 브레인으로서 내각의 최고위급 기밀에 접근할 수 있었고, 1941년 9월 일본이 소련을 공격하지 않고 남방으로 진출할 것이라는 결정적 정보를 조르게에게 전달해 모스크바 전투의 향방을 바꾸었다. 1941년 10월 체포되어 전시 일본에서 유일하게 국가반역죄로 교수형에 처해졌으며, 사형 집행 전 감옥에서 아내와 딸에게 보낸 편지는 『사랑은 별비처럼』으로 출간되어 전후 일본의 베스트셀러가 되었다.
1942년 반제 회의에서 하이드리히는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해 독일 국가기관들의 협력을 조율했다.
하이드리히는 1931년 친위대에 들어가 국가보안부(SD)를 조직하고 이끌었으며, 1936년에는 게슈타포와 형사경찰을 포괄한 보안경찰을 지휘했다. 1939년 제국보안본부(RSHA)가 설치되자 수장이 되어 보안경찰과 SD를 통합 지휘했고, 유대인과 정치적 반대자에 대한 나치의 박해와 살해 정책을 실행하는 핵심 기관을 이끌었다. 1941년 총독 대리로 임명된 보헤미아·모라비아에서 저항 세력을 처형하고 유대인 게토화와 강제이송을 추진했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를 주재해 유럽 유대인 살해를 위한 부처 간 협력을 조율했으며, 5월 체코 저항요원의 공격으로 부상한 뒤 6월 4일 사망했다.
유럽 각지 유대인의 절멸 수용소 이송을 맡고 1944년 헝가리 유대인의 아우슈비츠 이송을 지휘한 친위대 장교
독일 졸링겐의 칼뱅파 가정에서 태어나 1914년 가족을 따라 오스트리아로 옮겨 자랐고, 1932년 나치당과 친위대에 들어갔다. 1938년 빈에서 오스트리아 유대인의 이주를 조직했다. 1939년 12월 국가보안본부 IV B4과장이 되었고,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 참석해 회의록을 작성했으며, 이후 그와 부하들이 유대인을 절멸 수용소로 보내는 이송을 맡았다. 1944년 3월 독일의 헝가리 점령 뒤 헝가리 유대인 이송을 지휘해, 7월 이송이 멈출 때까지 72만 5000명 가운데 43만 7000명이 이송되었다. 전후 미군에 붙잡혔다가 수용소에서 달아나 1950년 아르헨티나로 건너갔으나, 1960년 이스라엘 모사드에 납치되어 예루살렘에서 재판을 받고 1962년 교수형을 당했다.
1942년 7월 2일, 그는 독일 점령 당국의 유대인 체포에 프랑스 경찰을 투입하겠다고 동의했다.
르네 부스케는 프랑스의 고위 관료로, 비시 정권의 경찰 협력을 국가 주권의 외형과 결합해 추진했다. 그는 독일 보안기관과 협상해 프랑스 경찰을 동원할 자율성을 확보하는 한편, 유대인 박해와 추방을 실행하는 체계에 경찰력을 제공했다. 1942년 7월 벨디브 검거에서 그의 행정적 결정은 대규모 체포와 강제 이송을 가능하게 했으며, 해방 뒤에는 숙청을 피하고 금융·정계의 영향력 있는 인물로 복귀했다.
발도네에서 라트비아인 대장장이 아버지와 발트 독일계 어머니 사이에 태어났다. 라트비아군에서 복무하고 라트비아 대학에서 법학을 공부했으며 1938년까지 경찰관으로 일했다. 1941년 7월 독일군이 리가에 들어오자 슈탈레커를 만나 대학생 단체와 뇌성십자 출신으로 부대를 꾸렸고, 이 부대는 7월 4일 리가 회당 방화에 가담했다. 아라이스 특공대는 라트비아와 벨라루스에서 약 2만 6,000명을 죽였고, 그는 1943년 친위대 소령이 되었다. 전후 1949년까지 영국군 포로수용소에 갇혔다가 가명으로 프랑크푸르트에서 일했다. 1979년 함부르크 지방법원은 1941년 12월 8일 리가 게토 유대인을 죽음으로 내몬 죄로 종신형을 선고했고, 1988년 카셀의 감옥에서 숨졌다.
1987년 리옹 재판에서 그는 이지외 급습을 부인하며 이렇게 말했다. “나는 레지스탕스와 싸웠다. 그것은 전쟁이었다.”
클라우스 바르비는 나치 친위대와 보안방첩대에서 활동한 장교로, 점령기 리옹 게슈타포를 지휘하며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유대인을 체계적으로 박해했다. 그는 칼뤼르에서 장 물랭을 체포하고 고문했으며, 이지외의 유대인 아동 44명과 교사들을 아우슈비츠로 보내는 데 책임이 있었다. 전후 미국 정보기관의 반공 작전에 이용되어 볼리비아로 도피한 그는 오랫동안 처벌을 피했지만, 1987년 리옹 재판에서 반인도적 범죄로 종신형을 선고받았다. 그의 사례는 나치 범죄의 연속성과 냉전 반공주의가 만든 면책의 구조를 함께 드러낸다.
1944년 6월 9일, 그는 노르망디 상륙을 양동으로 보이게 하는 보고를 독일군 수뇌부에 보냈다.
후안 푸홀 가르시아는 제2차 세계대전기에 독일 정보기관에 침투한 뒤 영국에 충성한 스페인계 이중간첩이었다. 그는 리스본에서 공개 자료만으로 영국에 존재하지 않는 요원망을 꾸며 독일 지휘부의 신뢰를 얻었다. 영국 정보기관과 협력한 뒤에는 가공의 요원들과 제한된 진짜 정보를 엮어 독일의 판단을 유도했다. 특히 포티튜드 작전에서 노르망디 상륙이 양동이고 주공이 파드칼레에 온다는 이야기를 강화해 연합군의 기만을 뒷받침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