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9년 11월 9–10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탈레랑·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총재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코르시카의 이탈리아계 가문 출신으로 1785년 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3년 툴롱과 1795년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를 제압해 승진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고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해 제1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무너져 1814년 엘바로 유배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 뒤 워털루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서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공교육 같은 개혁을 남긴 한편 점령지 약탈, 언론 폐쇄와 비판자 탄압, 식민지 노예제 부활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1918~1920년 히바 칸국의 실권을 쥐고 소비에트 권력과 싸운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
1857년(1862년 설도 있다)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의 재판관(카지)과 물 관리인(미라브)을 지냈고, 1912~1916년 투르크멘 봉기로 이름을 얻었다. 1918년 1월 히바의 칸 아스판디야르에게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칸을 암살하고 그 숙부 사이드 압둘라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실권을 쥐었다. 1918년 11월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를 포위했고 1919년 콜차크 정부와 연락했으나, 1920년 초 붉은 군대에 패해 카라쿰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후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과 투르크멘 SSR을 거듭 침공해 1924년 1월에는 히바를 포위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해 1938년 헤라트 근처에서 숨졌다.
표트르 볼로고츠키는 시베리아 지역주의와 사회혁명당 운동에서 출발한 변호사이자 정치가로, 제정 말기부터 지방자치와 법률 개혁을 주장했다. 1918년 그는 시베리아의 반볼셰비키 정부를 이끌고 우파와 사회주의자, 지역주의자 사이의 타협을 관리했다. 콜차크의 집권 뒤에도 정부 수반으로 남았지만 군사 독재와 행정의 무능이 낳은 위기를 비판했고, 1919년 사임한 뒤 중국으로 망명했다.
사회주의자로 출발해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었고,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의 서진을 꺾은 뒤 쿠데타로 권위주의 체제를 세운 군인 정치가
패배하고도 굴하지 않는 것이 승리요, 승리하고서 월계관 위에 주저앉는 것이 패배다.
1867년 러시아 제국 빌나 현의 줄로보 영지(오늘날 리투아니아)에서 귀족 가문의 둘째 아들로 태어났다. 가문은 폴란드인 또는 폴란드화한 리투아니아인으로 서술된다. 알렉산드르 3세 암살 음모에 연루되어 시베리아 유형 5년을 살았고, 폴란드 사회당에서 지하 기관지 「로보트니크」를 펴냈다. 제1차 세계대전에서 오스트리아 편에 폴란드 군단을 일으켰다가 1917년 마그데부르크에 갇혔고, 1918년 부활한 폴란드의 국가원수가 되어 1920년 바르샤바에서 붉은군대를 꺾었다. 1926년 5월 쿠데타 뒤 사나차 체제의 실권자로서 베레자 카르투스카 등에 반대파를 가두었고, 1935년 5월 12일 바르샤바에서 간암으로 사망했다.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상세 이력 보기
1920의회가 호르티를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1940헝가리가 추축 동맹에 가입했다. 호르티 정권은 반유대주의 법률과 강제노동 제도를 운영했다.
1941헝가리가 추축국의 소련 침공에 가담했고, 정부는 유대인 2만 명 이상을 점령지 갈리치아로 강제 이송했다.
1944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5월부터 7월까지 유대인 약 43만 7천 명을 이송했다. 호르티는 7월 이송 중단을 명령하고 10월 소련과 휴전을 선언했으나 독일에 구금되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그리스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왕정과 반의회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적 국가 질서를 추구했다. 1936년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로 의회를 정지하고 8월 4일 체제를 세워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좌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국가 개입과 청년 조직을 통해 사회를 동원하려 했으며, 그의 체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으로 논쟁되어 왔다.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해 전쟁을 이끌었지만, 1941년 독일 침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처칠의 회고록 서술이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어 스탈린에게 밀어 보냈다.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해 돌려보냈다." 소련 당국은 1958년 이를 부인했다.
영국의 정치가·군인·저술가. 1874년 블레넘 궁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수단·보어전쟁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회에 입성했고, 자유당 정부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해군장관을 지냈으나 갈리폴리 원정 실패로 물러났다. 1924~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40년 5월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1945년 선거에서 패한 뒤 야당 당수가 되어 1946년 '철의 장막'을 경고했으며, 1951~1955년 다시 총리를 지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 사망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인도 자치에 반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갈린다.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1920년 종교·교육장관으로서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한 기독교사회주의 정치인
메죄페트리에서 태어나 서트마르 신학교를 4년 다니다 나와 기자가 되었고, 기독교사회주의 신문 『이거즈 소』와 일간지 『우이 러프』를 편집했으며 1908~1918년 가톨릭 인민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프리드리히 정부의 선전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종교·교육장관을 지냈다.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했으며, 이 법은 20세기 유럽 최초의 반유대법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1920년 기독교민족연합당 대표가 되었으나 곧 의석을 잃었고, 1945년 체포될 무렵에는 직물상이었다.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는 폴란드의 군인이자 정치가로, 전간기 민주주의와 군부 권위주의의 충돌 속에서 독자적 노선을 모색했다. 제2차 세계대전 동안 런던 망명정부의 수상 겸 폴란드군 총사령관으로서 서방 연합국에 폴란드의 국가적 요구를 제기했다. 그는 1941년 시코르스키-마이스키 협정을 통해 소련과 외교관계를 복원하고 폴란드 포로 석방과 군대 창설의 길을 열었지만, 카틴 학살 조사 요구 뒤 관계가 다시 단절되었다. 1943년 지브롤터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하면서 망명정부의 외교적 영향력도 큰 타격을 입었다.
루마니아를 추축국의 대소 전쟁에 몰아넣고 트란스니스트리아의 학살을 명령한 「지도자」, 1946년 질라바에서 처형되다
1944년 8월 23일 오후, 왕궁에 불려온 안토네스쿠가 국왕의 즉각 휴전 요구를 거부하자 미하이는 미리 정한 신호로 경비병을 불러 그를 체포했다. 그날 밤 국왕의 라디오 연설이 휴전을 알렸고, 루마니아군은 독일군에게 총구를 돌렸다.
피테슈티의 군인 집안에서 태어난 기병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참모로 머러셰슈티 방어전 계획에 참여했고 파리·런던 주재 군사 담당관과 1933~34년 참모총장을 지냈다. 1937~38년 고가 정부의 국방장관을 맡았으나 카롤 2세와 대립해 1940년 비스트리차 수도원에 연금되었다. 1940년 여름 베사라비아·북트란실바니아 상실로 왕정이 흔들리자 9월 4일 전권을 가진 총리가 되어 이틀 뒤 카롤 2세를 퇴위시키고 스스로 「지도자」를 칭했으며, 철위단과 함께 국민군단국가를 세웠다가 1941년 1월 군단 반란을 무력으로 진압했다. 1940년 11월 삼국동맹에 가입하고 1941년 6월 독일과 함께 소련을 침공해 베사라비아와 북부 부코비나를 되찾고 드네스트르 너머 트란스니스트리아를 점령했다. 이아시 포그롬과 오데사 학살, 트란스니스트리아로의 강제 이송으로 루마니아 관할에서 28만에서 38만에 이르는 유대인과 1만 명이 넘는 로마인이 죽었다고 2004년 비젤 위원회는 결론지었다. 스탈린그라드에서 두 개 군을 잃은 뒤 강화의 길을 찾았으나 1944년 8월 23일 미하이 국왕에게 체포되어 소련으로 넘겨졌고, 1946년 5월 부쿠레슈티 인민법정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6월 1일 질라바에서 총살되었다.
베를린 주재 대사로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이고 점령 뒤 총리로서 유대인 이송을 앞당긴 군인 외교관
베르셰츠(브르샤츠)의 세르비아계 가정에서 디미트리예 스토야코비치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 때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참모본부의 정보장교로 일했다. 전쟁 뒤 호르티의 반혁명 군대에서 방첩을 맡았고, 1927~1933년 베를린 주재 무관을 지낸 뒤 1935년부터 1944년까지 베를린 주재 대사로 있으며 독일과의 동맹을 밀어붙였다. 1944년 3월 독일 점령 뒤 총리 겸 외무장관이 되어 화살십자당을 합법화하고 노동조합을 해산하고 정적을 투옥했으며, 유대인 강제 이송의 속도를 크게 높였다. 8월 호르티의 압력으로 물러났고, 전후 미군에 붙잡혀 헝가리로 넘겨진 뒤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총살되었다.
도조 히데키는 일본 제국 육군의 통제파를 대표한 군인 정치가로, 만주와 중국에서 제국의 군사적 팽창을 밀어붙였다. 관동군 참모장 시기에는 소련과의 국경 긴장을 이용하면서도 중국 북부로 전선을 넓혔고, 이후 육군 지도부의 우선순위는 대소 북진보다 석유와 전략 자원을 겨냥한 남진으로 기울었다. 총리로서 그는 국가를 총동원해 미국·영국과의 전쟁을 수행하고 반대 의견을 억눌렀으며, 1944년 전황 악화 속에서 실각했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아 처형되었다.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과 대소련 참전을 주장하고 유대인 노동봉사를 가혹하게 만든 국방장관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4년 뫼들링 공병 사관학교를 졸업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호르티의 국민군에 들어갔다. 1938년 임레디 내각의 국방장관이 되어 1942년까지 자리를 지켰고, 참모총장 베르트와 함께 유고슬라비아 침공 전면 참여와 동부전선 참전을 강하게 주장했으며, 커셔 폭격 뒤에는 소련이 폭격했다고 단정하며 즉시 선전포고를 요구했다. 1942년 노동봉사 대대 징집의 연령 상한을 없앴고, 6월 의회에서 유대인을 인종으로 정의하겠다고 밝혔다. 1942년 9월 지나친 친독 성향 때문에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군사법원에서 강등·제적되었고, 베네수엘라로 이주했다가 1964년 오스트리아 린츠를 방문하던 중 숨졌다.
트루먼의 집무실 책상에는 '책임은 여기서 끝난다(The buck stops here)'라는 문구가 놓여 있었고, 원자폭탄에서 맥아더 해임까지 그는 그대로 살았다.
트루먼은 루스벨트 사망으로 대통령직을 승계한 뒤 1945년 8월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에 원자폭탄 투하를 명령한 미국의 33대 대통령이다. 1947년 3월 '무장 소수파나 외부 압력에 저항하는 자유민을 지원한다'는 트루먼 독트린을 선언했고, 1948년 4월 마셜 플랜에 서명해 서유럽 재건과 소련 봉쇄의 제도적 기반을 구축했다. 한국전쟁이 발발하자 유엔군 파병을 주도했고 중국과의 전면전을 우려해 맥아더를 해임함으로써 민간 통제 원칙을 재확인했다. 퇴임 당시 역대 최저 지지율로 떠났으나 냉전 승리와 함께 '위대에 가까운' 대통령으로 사후 재평가되었다.
국민군 조직을 주도하고 1932~1936년 총리로서 헝가리를 이탈리아·독일 쪽으로 이끈 우익 급진파 장교
톨너주 무르거에서 마을 교사의 아들로 태어나 오스트리아-헝가리군 장교로 제1차 세계대전에 나갔다. 1919년 세게드에서 준군사 단체 MOVE를 만들고 호르티의 국민군 조직을 주도했으며, 1921년 카를 왕의 복귀를 무력으로 막는 데 앞장섰다. 1929년 베틀렌 정부의 국방장관이 되었고 1932년 총리가 되었다. 무솔리니와 손잡고 1934년 로마 의정서에 서명했으며, 히틀러를 찾아간 첫 외국 정부 수반으로서 독일과 무역 협정을 맺었다. 1936년 뮌헨에서 병으로 죽었다.
1936~1938년 총리로서 죄르 강령을 발표하고 제1차 유대인법을 의회에 낸 굄뵈시의 후임자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나 1909년 페슈트주 공무원으로 출발했고, 혁명 뒤 죄르주·코마롬주의 주지사를 지냈다. 1927년 국회의원이 되었고 1935년 굄뵈시 내각의 농업장관이 되었다. 1936년 10월 굄뵈시의 후임 총리가 되어 베틀렌 노선의 헌정 질서 회복을 내세웠고, 1937년 국민의지당을 금지하고 살러시를 투옥했다. 1938년 3월 죄르 강령을 발표했으나, 오스트리아 병합 뒤 친독 인사를 입각시키고 극우 세력과 협상하다 5월 사임했다. 그의 정부가 낸 제1차 유대인법은 임레디 정부 아래 통과되었고, 그는 1938년 12월부터 죽을 때까지 하원 의장을 지냈다.
솜버테이 출신의 법률가이자 외교관으로, 1922년 외무부로 옮겨 언론국장 등을 지냈다. 1941년 1월 외무장관이 되었고, 4월 텔레키가 자살하자 총리를 겸했다. 트리아농으로 잃은 땅을 되찾으려 친독 노선을 걸어 유고슬라비아 침공에 참여했고, 6월 커셔 폭격 뒤 의회 동의 없이 소련과의 전쟁 상태를 선언했으며, 영국·미국과도 전쟁에 들어갔다. 「외국인」 유대인 추방과 제3차 유대인법을 밀어붙였고, 1942년 3월 호르티에 의해 물러났다. 전후 인민재판소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1월 총살되었다.
부다페스트의 가톨릭 가정에서 태어나 재무부에서 일한 경제 전문가로, 1932년 굄뵈시 내각의 재무장관, 1935년 국립은행 총재가 되었다. 1938년 5월 총리가 되어 그해 가을부터 외교를 독일·이탈리아 쪽으로 돌렸고, 그의 재임 중 제1차 빈 중재로 남부 슬로바키아가 헝가리에 돌아왔다. 독재적 개편과 제2차 유대인법을 추진했으나 1939년 2월 정적들이 그의 유대계 조상을 밝혀내 사임했다. 1940년 친파시스트 정당 헝가리 쇄신당을 세웠고, 1944년 독일 점령 뒤 스토여이 내각의 장관을 지냈다. 1946년 인민재판소의 사형 선고로 총살되었다.
1944년 내무부 차관으로 버키 라슬로와 함께 헝가리 유대인의 게토 수용과 아우슈비츠 이송을 맡은 극우 관료
어보니의 부유한 집안에서 태어나 제1차 세계대전에 경기병 장교로 싸웠고,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MOVE 등 반혁명 단체에 가담해 잔혹함으로 이름났다. 1923년부터 15년 동안 괴될뢰 수석 군수, 1938년 페스트주 부지사를 지내며 반유대법이 미흡하다며 해수욕장 출입 금지 등을 독자적으로 가했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여로시 언도르 밑에서 내무부 차관이 되어 유대인 게토 수용과 이송에 폭넓은 권한을 받았고, 버키 라슬로와 함께 아이히만을 도와 5~7월 40만 명이 넘는 헝가리 유대인을 이송했다. 9월 해임되었으나 화살십자당 집권 뒤 작전 지역 민정 담당 정부위원이 되었다. 1945년 달아났다가 미군에 붙잡혀 넘겨졌고, 1946년 사형 선고를 받아 교수형을 당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