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3년 7월 13일 샤를로트 코르데에게 살해된 친구 장폴 마라를 그린 《마라의 죽음》은 혁명의 대표적 이미지가 되었다. 나폴레옹 몰락 후 이 그림은 오랫동안 대중의 시야에서 사라졌다가 다시 발견되었다.
1748년 파리에서 태어나 1825년 브뤼셀에서 사망한 프랑스 화가다. 신고전주의의 대표적 화가로 1780년대 《호라티우스 형제의 맹세》로 명성을 얻었으며, 프랑스 혁명의 적극적 지지자이자 자코뱅 클럽 성원으로 로베스피에르의 친구였다. 국민공회 의원으로서 루이 16세 처형에 찬성표를 던졌고, 일반 치안위원회 위원으로 공포정치에 관여했다. 로베스피에르 실각 후 1794~1795년 두 차례 투옥되었다가 석방되었고, 1804년 제정 선포 후 나폴레옹의 궁정 화가가 되어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을 그렸다. 1815년 나폴레옹 몰락 후 브뤼셀에서 망명 생활을 했으며 그곳에서 사망했다. 지로데·제라르·그로·앵그르 등을 길러냈다.
『페르 뒤셴』을 창간해 파리 상퀼로트의 목소리를 만들고 1793년 지롱드파 타도에 앞장선 언론인으로, 급진적 비기독교화를 밀어붙이다 1794년 3월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동료들과 함께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언론인이자 파리 코뮌의 검사 대리. 1790년 창간한 『페르 뒤셴』의 거칠고 대중적인 문체로 상퀼로트 독자층에 영향력을 얻었고 코르들리에 클럽의 유력 인물이 됐다. 1793년 지롱드파 공격, 더 강한 경제 통제와 비기독교화 운동을 지지했다. 다만 ‘에베르파’는 정식 정당이 아니라 그의 신문, 코르들리에 일부, 코뮌 인맥을 묶어 부르는 이름이다. 1794년 3월 봉기 호소가 실패한 뒤 혁명정부에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됐다.
1794년 7월 27일 테르미도르 9일, 국민공회 의원들은 그를 약 90명의 동료와 함께 체포했고, 그는 재판 없이 처형됐다.
프랑스 혁명기의 변호사이자 국민공회 의원으로, 공안위원회에서 활동했다. 1792년 생필품 연설에서는 생존에 필요한 물자의 확보를 강조하면서 재산과 상업의 정당한 영역도 인정했다. 1794년 정치도덕 보고에서는 덕과 공포를 혁명 정부의 원리로 제시했다. 이 주장은 공포정을 정당화한 당사자의 논리이며, 여러 위원회와 국민공회가 내린 결정을 모두 그의 개인 명령으로 볼 수는 없다. 테르미도르의 정치적 패배 뒤 처형됐다.
1793년 8월 29일 생도맹그 민사위원으로서 북부 관구의 모든 노예가 자유라고 선포했다. 국민공회의 전 식민지 노예제 폐지보다 다섯 달 앞섰다.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흑인우호협회의 노예제 폐지론을 지지하는 글을 썼고 브리소와 가까웠다. 1792년 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는데, 처음 내건 임무는 노예해방이 아니라 자유 유색인의 동등한 권리 보장이었다. 백인 식민자들과의 충돌과 영국·에스파냐의 위협 속에서 1793년 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해방된 이들에게는 농장 노동 의무가 따랐다. 국민공회는 1794년 2월 4일 노예제 폐지를 모든 식민지로 넓혔다. 해방의 동기가 평등 이념이었는지 권력 유지의 필요였는지는 역사가들 사이에 논쟁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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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84법학 학위를 받고 파리 고등법원 변호사가 되었다.
1792폴브렐 등과 함께 민사위원으로 생도맹그에 파견되었다.
17938월 29일 북부 관구의 노예해방을 선포했다.
1794–1795본국으로 소환되어 식민자들의 고발에 맞서 해명했고, 혐의를 벗었다.
1796–1797생도맹그로 돌아갔으나 투생 루베르튀르가 1797년 8월 그를 배에 태워 프랑스로 돌려보냈다.
전쟁부 사무총장으로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고, 1794년 3월 에베르파와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되었다.
파리 감옥 수위의 아들로, 소송대리인 사무소의 서기로 일했다. 코르들리에 클럽 초기 회원으로 서기를 맡았고, 1792년 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갔다. 1793년 4월 부쇼트 전쟁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어 부처 사무국을 급진 애국파로 채웠다. 1793년 12월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풀려난 뒤 관용파와 혁명정부에 맞선 에베르파의 투쟁에 나섰다. 강좌에서는 1794년 3월 에베르·롱생·모모로 등과 함께 체포되어 3월 24일 처형된 인물로 등장한다. 반역 음모 혐의를 뒷받침할 물증은 제시되지 않았다고 평가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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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7928월 10일 봉기 뒤 파리 코뮌 총평의회에 들어가 파브르 데글랑틴의 자리를 이었다.
17934월 부쇼트 장관 아래 전쟁부 사무총장이 되었다.
1793–179412월 17일 일반안전위원회의 명령으로 체포되었다가 이듬해 2월 2일 풀려났다.
1799년 11월 9–10일 브뤼메르 쿠데타로 그는 탈레랑·시에예스 등과 결탁해 총검으로 무장한 병력으로 오백인회를 해산시키고 총재정부를 무너뜨렸으며, 이후 제1통령으로서 실권을 장악했다.
코르시카의 이탈리아계 가문 출신으로 1785년 프랑스 왕립군 포병 소위로 임관하고 1789년 혁명을 지지했으며, 1793년 툴롱과 1795년 방데미에르에서 왕당파를 제압해 승진했다. 1796년 이탈리아 원정으로 국민적 영웅이 되고 1799년 11월 브뤼메르 쿠데타로 총재정부를 전복해 제1통령이 되었으며, 1804년 제1제국의 황제가 되었다. 1805년 아우스터리츠에서 승리했으나 1812년 러시아 원정과 1813년 라이프치히에서 무너져 1814년 엘바로 유배되었고, 1815년 백일천하 뒤 워털루에서 패해 세인트헬레나에서 1821년 사망했다. 나폴레옹 법전과 공교육 같은 개혁을 남긴 한편 점령지 약탈, 언론 폐쇄와 비판자 탄압, 식민지 노예제 부활로 논란이 되는 인물이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이 과들루프에 파견한 원정군 사령관.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했으나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고, 반란은 1804년까지 이어졌다.
1770년 메츠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복무하던 콩티 용기병연대에 5세에 사관후보생으로 들어갔다. 혁명을 지지했고 1791년 소위, 1793년 대위, 1794년 기병대장을 거쳐 1796년 클레베르에 의해 준장으로 승진했다. 오슈 휘하에서 라인·삼브르뫼즈 군에서 복무하며 네우비트에서 두각을 드러냈고, 1800년 모로의 라인 군에서 사단을 지휘해 12월 3일 호엔린덴에서 오스트리아군 좌익을 우회 기습해 승리를 결정지었다. 1801년 라인 군 해산 뒤 바타비아 공화국 기병 총감독이 되었다. 1801~1802년 나폴레옹은 그를 과들루프 원정군 사령관으로 임명했고, 그는 델그레스의 저항을 진압한 뒤 노예제 강제 재도입을 집행했다. 1802년 9월 3일 바스테르에서 황열로 사망했다.
1881년 3월 13일 아침, 알렉산드르 2세는 로리스-멜리코프의 개혁안에 서명하며 말했다: "나는 승인했다. 그러나 이것이 헌법을 향한 첫걸음임을 스스로 숨기지 않는다." 몇 시간 후 차르는 암살당했다.
아르메니아 귀족 출신으로 캅카스 전쟁과 러시아-튀르크 전쟁에서 두각을 나타낸 기병 장군이었으나, 그의 역사적 무게는 군사적 공적보다 정치 개혁에 있다. 1880년 겨울궁전 폭파 사건 이후 전제적 권한을 위임받아 '마음의 독재'로 불린 온건 노선을 펼쳤으며, 혁명 탄압과 동시에 검열 완화·지방 자치·선거 대표제 도입을 골자로 한 개혁안을 추진했다. 알렉산드르 2세가 암살당한 1881년 3월 13일 아침, 차르는 로리스-멜리코프의 선거 자문위원회 구상을 승인했으나, 알렉산드르 3세가 즉위 후 콘스탄틴 포베도노스체프의 조언으로 개혁안을 폐기하고 전제정치를 선언했다. 러시아 최초의 헌정 실험을 설계했으나 반동에 좌절된 그는 개혁과 전제의 분기점에서 상실된 개혁의 순간을 상징한다.
니콜라이 2세에게 이렇게 말했다고 전해진다: "현 체제의 연장은 나라를 얼어붙은 상태로 유지할 수 있느냐에 달렸다. 봄기운이 조금만 스며들어도 모든 것이 무너질 것이다."
알렉산드르 3세 시대 제정 러시아의 최고 보수 이데올로그이자 1880~1905년 성무원 검사장. 1881년 4월 '전제정치 불가침 선언'을 기초해 로리스-멜리코프의 입헌 개혁안을 폐기시켰고, 교구학교 확대·검열 강화·비정교도 탄압의 반동적 반개혁을 주도했다. 3권의 『민법 강의』를 집필한 법학자이며, 『러시아 정치가의 성찰』에서 의회제를 '우리 시대의 위대한 거짓말'로 규정했다. 알렉산드르 3세와 니콜라이 2세 두 차르의 스승이었고, 1901년 톨스토이 파문도 그의 재임 중 단행되었다. 1905년 10월 선언 후 물러났지만 그가 평생 지킨 전제 권력은 혁명 세대가 타도할 구체제 그 자체였다.
"폐하께서는 제 관 주위에 이미 촛불이 켜졌고, 의식을 완료하는 데 필요한 것은 저 자신뿐임을 보지 못하십니다." — 1914년 재소환된 74세 총리가 자신의 노쇠함에 대해 남긴 말.
제정 러시아 최후의 제1급 추밀고문이자 두 차례 총리를 지낸 평생 관료. 1906년 제1두마를 해산시키고, 1914년 74세에 다시 소환되어 전시 내각을 이끌었으나 무능과 두마 적대, 라스푸틴 일파에 대한 굴종으로 체제 붕괴의 상징이 되었다. 반의회적 전제 고수를 '신이 기름 부은 자'에 대한 충성이라 여겼고, 이 완고함이 바로 입헌 실험을 좌초시킨 능동적 요인이었다. 혁명 후 소치의 별장에서 강도에게 가족과 함께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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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제국 법률학교 졸업, 원로원에서 변호사로 관직 시작
1866–1869폴란드 입헌왕국 프워츠크·키엘체 부지사
1891법무차관
1895–1899내무장관 — 농민·젬스트보 문제에 보수적 접근, 1899년 축출
1906.04–07각료회의 의장(총리) — 제1두마와의 대립 끝에 두마 해산, 스톨리핀에게 교체
1914.01–1916.01각료회의 의장(총리) — 전시 내각, 두마·진보블록과 적대, 라스푸틴 측근으로 전락
1925년,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되러 가며 마지막 말을 남겼다: '인생에 지쳤다. 신이시여 감사합니다!'
제정 러시아의 마지막 총리. 1917년 1월 황제의 임명을 받았을 때 스스로 '무능력'을 이유로 사양했으나, 충신으로서 받아들인 뒤로도 2월 혁명의 파고 앞에서 결정적인 행동을 하지 못했다. 혁명 후 사수공과 공동 농장 경비원으로 생계를 잇다가, 1925년 '리체이스트 사건'에 연루되어 반신불수 상태로 총살당했다.
1918년 3월 7일, 68번째 생일을 맞은 마사리크는 시베리아 횡단이 가능하다는 것을 군단에 직접 보여주기 위해 모스크바에서 블라디보스토크로 떠나는 열차에 올랐다.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 의회 의원이었던 마사리크는 제1차 세계대전 발발과 함께 망명하여 체코슬로바키아 독립운동의 정치적 지도자가 되었다. 1917년 러시아로 건너가 체코·슬로바키아 포로병들로 체코슬로바키아 군단을 편성하고 볼셰비키와 펜자 협정을 체결, 군단의 블라디보스토크 경유 프랑스 이송을 확보했다. 1918년 초대 대통령으로 취임해 17년간 중부 유럽에서 가장 안정된 민주국가를 이끌었고, 그의 성공은 러시아 내전에 군단이 휘말리는 모순 위에 세워졌다.
버지니아에서 태어나 프린스턴 대학교 총장과 뉴저지 주지사를 거쳐 1912년 대통령이 되었고, 취임 첫해 연방 관료 조직에 인종 분리를 들여왔다. 1917년 4월 독일의 무제한 잠수함전을 이유로 참전을 요청했고, 1918년 1월 14개조로 국제연맹과 민족자결의 구상을 내놓았다. 파리 강화회의에서 연맹 규약 기초를 이끌었지만 연맹을 위해 독일에 대한 여러 요구를 양보했다. 1919년 10월 뇌졸중으로 쓰러졌고 타협을 거부해 상원의 조약 비준이 무산되었다. 같은 시기 파머 습격의 「적색 공포」가 벌어졌다. 1919년 노벨 평화상을 받았고 1924년 죽었다.
1904년 9월 16일 내무부 관료들 앞에서: "행정의 성과는 공공기관과 국민에 대한 진실로 호의적이며 신뢰하는 태도에 달려 있다." 이 한 마디가 '신뢰의 시대'를 열었다.
플레베 암살 후 내무장관에 올라 '신뢰의 시대'를 선언하고 검열 완화·유배자 사면·젬스트보 대회 허용으로 자유주의 여론에 호응했으나, 국무회의에 선출직 대표를 도입하려던 개혁안은 니콜라이 2세에게 거부당했다. 1905년 1월, 가폰 신부의 평화 청원 행진에 대한 그의 무대응은 피의 일요일 학살로 귀결됐고, 사흘 뒤 사임했다. 정직하고 선의에 찼으나 정치적 결단력이 부족했던 그는 개혁과 반동 사이에 끼어 역사의 무게를 감당하지 못한 인물로 남았다.
나일강 삼각주의 농촌에서 태어나 알아즈하르와 카이로의 법률학교에서 공부하고 변호사가 되었다. 영국 점령 아래 판사, 교육장관(1906~1908), 법무장관(1910~1912)을 지냈고 1913년 입법의회 부의장이 되었다. 1918년 11월 보호령 폐지와 강화회의 대표권을 요구하며 와프드를 이끌었다. 영국이 1919년 3월 그를 몰타로 추방하자 1919년 이집트 혁명이 일어났다. 뒤에 세이셸로 다시 추방되었다가 1923년 돌아왔다. 1924년 선거에서 와프드당이 압승해 첫 와프드 정부의 총리가 되었으나, 그해 11월 수단 총독 리 스택이 암살되고 영국이 요구를 들이밀자 사임했다. 1927년 카이로에서 죽었다.
1918~1920년 히바 칸국의 실권을 쥐고 소비에트 권력과 싸운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
1857년(1862년 설도 있다) 투르크멘 요무트 부족 지도자의 아들로 태어나 마을의 재판관(카지)과 물 관리인(미라브)을 지냈고, 1912~1916년 투르크멘 봉기로 이름을 얻었다. 1918년 1월 히바의 칸 아스판디야르에게 군 총사령관으로 임명되었으나 칸을 암살하고 그 숙부 사이드 압둘라를 허수아비 칸으로 세워 실권을 쥐었다. 1918년 11월 페트로알렉산드롭스크를 포위했고 1919년 콜차크 정부와 연락했으나, 1920년 초 붉은 군대에 패해 카라쿰 사막으로 물러났다. 이후 호레즘 인민소비에트공화국과 투르크멘 SSR을 거듭 침공해 1924년 1월에는 히바를 포위했다. 페르시아와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해 1938년 헤라트 근처에서 숨졌다.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1917년 2월, 참수부에 보낸 전문에서: "수도는 무정부 상태. 정부는 마비되었다. 지체는 죽음이다. 왕조의 운명이 걸린 마지막 시간이다." 니콜라이 2세는 읽고 나서 시종장에게 말했다. "이 뚱보 로댠코가 또 무슨 헛소리를 써 보냈군."
우크라이나계 귀족 출신으로, 1905년 10월당을 공동 창립하여 입헌군주제와 의회주의라는 두 축에서 차르 체제의 점진적 개혁을 추구했다. 1911년부터 1917년까지 제3·4대 국가두마 의장을 지내며 라스푸틴을 공개 비판하고 전시 정부의 무능에 맞섰다. 1917년 2월 혁명기에는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를 이끌며 니콜라이 2세 퇴위를 결정적으로 추동했으나, 미하일 대공이 즉위를 거부하며 입헌군주제 구상은 무너졌다. 1920년 유고슬라비아로 망명하여 빈곤 속에서 회고록 『라스푸틴의 통치』를 남겼고, 망명 군주주의자들에게 배척당한 채 숨졌다. 혁명 이전 러시아 의회 정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한 몸에 체현한 인물이다.
더비셔의 귀족 집안에서 태어나 이튼과 옥스퍼드를 거쳐 1885년 하원에 들어갔고, 러시아의 인도 위협을 경고하는 여행기를 썼다. 1899~1905년 인도 총독으로 행정 개혁을 폈지만, 1905년 벵골 분할로 민족주의를 갈라놓으려 했다는 비판을 받았고 재임 중 대기근이 겹쳤다. 1차 세계대전 중 로이드 조지의 전시 내각에 들어갔고, 1919년 10월 외무장관이 되어 소련-폴란드 경계안인 커즌선에 이름을 남겼다. 세브르 조약을 설계했고, 1922년 로잔 회의에서 연합국 수석 협상자로 튀르키예의 국경을 정했다. 1923년 총리 자리를 놓쳤고 1925년 죽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