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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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과 인민공화국의 인물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인물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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카를 빌헬름 페르디난트 폰 브라운슈바이크

Karl Wilhelm Ferdinand von Braunschweig-Wolfenbüttel
왕정·왕당파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 (신성 로마 제국) 독일 1735–1806 ✕ 아우어슈테트 전상으로 사망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낸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

1792년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자기 이름으로 선언을 내, 프랑스 왕실이 해를 입으면 파리와 주민에게 가혹한 보복을 하겠다고 경고했다.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로, 프리드리히 대왕의 조카이자 프로이센군 원수였다. 1792년 전쟁이 시작되자 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이 되었고, 7월 25일 코블렌츠에서 이른바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명의는 공작이었지만 문안은 망명 귀족 쪽에서 쓴 것으로 알려져 있다. 왕을 지키려던 이 위협은 파리에서 오히려 왕정에 대한 반감을 키웠다. 그는 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철수했다. 1806년 아우어슈테트 전투에서 치명상을 입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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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0아버지를 이어 브라운슈바이크볼펜뷔텔의 군주가 되었다.
  • 1792오스트리아·프로이센 연합군 사령관으로 7월 25일 브라운슈바이크 선언을 냈다.
  • 1792롱위와 베르됭을 점령했으나 9월 20일 발미에서 진격을 멈추고 프랑스에서 물러났다.
  • 1806프로이센군을 이끌고 아우어슈테트에서 싸우다 치명상을 입고 11월 10일 오텐젠에서 사망했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왕정·왕당파 프로이센 독일 (프로이센) 1744–1797 ○ 재위 중 포츠담에서 사망

필니츠 선언에 서명하고 대프랑스 원정에 나선 프로이센 왕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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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 179711월 16일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1747–1792 ○ 재위 중 빈에서 병사

필니츠 선언에 서명한 신성 로마 황제

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 왕과 함께 필니츠 선언에 서명해, 다른 열강이 동참하면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다. 1765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개혁 정치를 폈고, 1786년 그곳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다른 열강이 모두 함께할 때에만 프랑스에 개입하겠다는 조건부 선언을 냈다. 러시아와 영국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선언은 프랑스 혁명 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792년 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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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1790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1세)으로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 1786토스카나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 1790형 요제프 2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고,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프로이센 왕과 만나 프랑스 개입 용의를 밝힌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 1792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아들 프란츠 2세가 뒤를 이었다.

이자크 르 샤플리에

Isaac Le Chapelier

동업조합과 노동자 단결을 금지한 르 샤플리에 법의 발의자

1791년 6월 14일 그의 발의로 채택된 법이 동업조합과 같은 직업의 노동자·고용주가 공동 이익을 위해 단결하는 것을 금지했다.

렌 출신 변호사로 1789년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다.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고, 1789년 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서 봉건제를 폐지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다. 헌법위원회에서 1791년 헌법의 상당 부분을 기초했다. 1791년 6월 14일 그의 이름이 붙은 법이 채택되어 동업조합과 노동자의 단결을 금지했고, 이 금지는 1864년까지 이어졌다. 같은 해 9월 민중 결사의 공동 정치 행동을 제한하는 법도 제출했다. 푀양파와의 관계로 공포정치기에 혐의를 받아 1794년 4월 22일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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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렌 세네쇼세의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브르타뉴 클럽 창립에 참여했다.
  • 17898월 국민제헌의회 의장으로 8월 4일 밤 회의를 주재했고, 9월 말 헌법위원회에 들어갔다.
  • 17916월 14일 르 샤플리에 법이 채택되었고, 7월 샹드마르스 학살 뒤 자코뱅 클럽을 떠나 푀양파로 옮겼다.
  • 17919월 30일 민중 결사의 공동 정치 행동을 제한하는 법을 통과시켰다.
  • 1794체포되어 4월 22일 파리에서 단두대에 올랐다.

아드리앵 뒤포르

Adrien Duport

사법 개혁을 추진한 푀양파 정치가

«뒤포르가 생각하고, 바르나브가 말하고, 라메트가 행동한다»던 삼두파의 한 축으로, 1791년 푀양파 분열을 주도하며 혁명의 종결과 헌정 질서의 안정을 주장했다.

파리 고등법원 법관 출신의 국민의회 의원으로 배심제와 형사사법 개혁을 추진했다. 바르나브·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1791년 푀양파 결성에 참여했다. 1792년 왕정 붕괴 뒤 망명해 스위스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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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78파리 고등법원 변호사로 인가받고 같은 해 고등법원 심사관으로 임명되어 1790년까지 재직했다.
  • 1787–17881787년 '애국자당'을 결성해 국민 의회 소집을 요구했고, 1788년에는 삼신분 구분에 반대하는 30인회를 세웠다.
  • 17895월 13일 파리 귀족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었고, 6월 말 자유주의 귀족 47인과 함께 제3신분에 합류했다.
  • 1789–1791제헌의회에서 바르나브·알렉상드르 드 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고, 형사법위원회 보고자로서 1790년 3월 29일 사법제도 개편안과 1791년 2월 8일 배심제 도입에 기여했다. 1791년 2월 14일부터 26일까지 의회 의장을 지냈다.
  • 17917월 푀양파 분열에 앞장섰고, 9월 27일 유대인 완전 해방령을 주도했으며 24일 자유 유색인 권리 철회에 가담했다.
  • 17928월 10일 왕정 붕괴 뒤 센 형사재판소 소장직을 그만두고 체포되었다가 석방된 후 잉글랜드와 스위스를 거쳐 망명했다.
  • 1798용기병 반동 쿠데타(1797년 9월 4일) 이후 다시 프랑스를 떠나 스위스 가이스에서 결핵으로 사망했다.

앙투안 바르나브

Antoine Barnave
푀양파 왕정·왕당파 프랑스 프랑스 1761–1793 ✕ 처형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한 푀양파의 중심 연설가

1791년 7월 15일,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하며 “우리는 혁명을 끝내려 하는가, 다시 시작하려 하는가”라고 물었다.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왕정이, 평등으로 한 걸음 더 나아가면 소유가 파괴된다고 경고했다.

제3신분 대표로 국민의회에서 두각을 나타냈고 뒤포르·라메트와 삼두파를 이루었다. 바렌 도주 뒤 입헌군주제를 지키려 푀양파를 이끌고 왕실과 비밀 교섭했으며, 왕실 문서가 발견된 뒤 반역죄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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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9그르노블 제3신분 대표로 삼부회에 선출되어 신분 통합과 머릿수별 표결을 주장했다.
  • 1790제헌국민의회 의장으로 선출되었고, 같은 해 그르노블 시장이 되었다.
  • 1791바렌에서 왕 일가를 파리로 호송한 뒤 푀양파를 결성하고 국왕의 불가침성을 옹호했다.
  • 1792–17931792년 8월 국민의회에서 고발되어 그르노블과 포르바로에 수감됐고, 혁명재판소에서 반역죄로 사형을 선고받아 1793년 11월 파리에서 처형됐다.

장 샤를 피슈그뤼

Charles Pichegru
프랑스 제1공화국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프랑스 프랑스 1761–1804 감옥에서 사망, 자살 · 타살 논쟁

프랑스 혁명전쟁의 장군, 반혁명 음모자

1794년 2월 북부군 사령관이 되어 플뢰뤼스 전투에 참여했고, 1794년 12월–1795년 1월 얼어붙은 강을 건너 위트레흐트와 암스테르담에 입성했는데, 이때 프랑스 경기병이 얼음 위에서 네덜란드 함대를 사로잡았다.

1778–1804 프랑스 혁명전쟁기의 장군. 프랑스 혁명전쟁 프랑드르 전선에서 오스트리아령 네덜란드와 네덜란드 공화국을 무너뜨리고 라인 전선에서 싸웠다. 이후 왕당파로 돌아섰고, 1797년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에서 카옌으로 유배되었으며, 런던으로 도피한 뒤 1799년 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했다. 프랑스로 돌아와 나폴레옹에 대한 왕당파 음모에 연루되어 체포되었고, 1804년 4월 감옥에서 죽은 채 발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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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3제1포병연대에 입대, 미국 독립전쟁에 잠시 참전
  • 1793여단장, 이어 사단장으로 진급해 라인군 사령관이 되었다
  • 1794북부군 사령관으로 취임, 플랑드르와 네덜란드 전역을 지휘
  • 179512 제르미날 봉기를 진압하고 '조국의 구원자' 칭호를 받았다
  • 1797오백인회 의원이 되었고 프뤽티도르 18일 쿠데타로 카옌에 유배
  • 1799코르사코프의 참모로 복무
  • 1804왕당파 음모 연루로 체포되어 감옥에서 사망

어포니 얼베르트

Apponyi Albert

1920년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고 국제연맹에서 트리아농 국경 수정을 호소한 귀족 정치인

빈에서 태어난 백작으로, 1877년 의회에 들어가 반세기 동안 활동한 웅변가였다. 1906~1910년 교육장관으로 비헝가리계 학교에 헝가리어 교육을 강제한 1907년의 「어포니법」을 만들었다. 1920년 1월 파리 강화회의에서 헝가리 대표단을 이끌어 1월 16일 연설했으나 조건은 바뀌지 않았고, 3월 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졌다. 이후 합스부르크 정통주의 야당 의원이자 국제연맹 대표로 트리아농 국경의 부당함을 호소했다. 1933년 군축회의 참석차 머물던 제네바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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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7의회 진출
  • 1906–1910교육장관, 1907년 어포니법
  • 1920파리 강화 대표단장
  • 1920섭정 선거에서 호르티에게 패배
  • 1923–1933국제연맹 대표

위안스카이

袁世凯

신해혁명의 성과를 가로채 황제가 되려 한 북양군벌의 총수

1911년 우창 봉기 뒤 기용되어 청 조정과 혁명파를 동시에 압박해 청 황제의 퇴위를 얻어내고 이듬해 중화민국 임시대총통이 되었다. 1915년 제정을 선포했으나 국보전쟁의 반발로 이듬해 3월 퇴위하고 6월에 사망했다.

청 말 북양신군을 키운 군인·관료였다. 1911년 신해혁명이 일어나자 청 조정과 혁명파 사이에서 양쪽을 압박해 1912년 청 황제의 퇴위와 자신의 중화민국 임시대총통 취임을 함께 얻어냈다. 이후 국회를 무력화하고 국민당을 해산했으며, 1915년 말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가 각 성의 반발로 이듬해 제정을 취소하고 곧 병사했다. 그의 죽음 뒤 북양군은 분열해 군벌 시대가 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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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1907직례총독 겸 북양대신
  • 1912–1916중화민국 대총통
  • 1915.12–1916.03「중화제국」 황제 자칭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독일 독일 1859–1941 → 망명지에서 사망

7월 위기에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1918년 퇴위해 망명한 마지막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세자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맏딸 사이에서 태어나 1888년 황제가 되었고,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했다. 1900년 의화단 진압군에게 훈족처럼 싸우라고 연설했고, 함대 증강과 모로코 개입으로 독일을 고립시켰다. 1914년 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군사 지원을 보장했다. 전쟁 중에는 결정을 최고사령부에 넘겨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가 섰다. 1918년 11월 9일 퇴위가 발표되자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그의 인도를 거부했다. 1941년 도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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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 즉위
  • 1890비스마르크 해임, 「신노선」
  • 1914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지원 보장
  • 191811월 9일 퇴위 발표, 네덜란드 망명

프란츠 페르디난트

Franz Ferdinand
오스트리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863–1914 ✕ 사라예보에서 암살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어 1차 세계대전의 직접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그라츠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고 1896년 아버지가 죽자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조피 호테크와의 귀천상혼은 자녀의 계승권을 포기한 뒤에야 허락되었다. 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913년 전군 총감이 되었다. 성직주의와 반민주주의, 반헝가리주의를 신념으로 삼았으며, 제국 안 슬라브 민족들의 자치 확대를 주장하는 한편 세르비아에 대해서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경계해 신중론을 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함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었고, 이 사건이 7월 위기와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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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 1900조피 호테크와 귀천상혼
  • 1913전군 총감
  • 1914.06.28사라예보에서 암살

보그드 칸

Богд хаан
왕정·왕당파 몽골 몽골 (티베트인) 1869–1924 ○ 자연사

티베트 출신 환생 라마로 즉위한 마지막 몽골 대칸

제후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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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우르가(이흐 후레) 도착, 몽골 불교 수장으로 승인
  • 191112월 29일 보그드 칸으로 즉위
  • 1919중국의 자치 폐지로 권력 상실
  • 1921인민혁명 후 제한군주로 복위
  • 1924후두암으로 사망, 군주제 종식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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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Joseph August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마지막 원수로, 1919년 8월 잠시 헝가리 섭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대공

헝가리의 얼추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팔라틴) 분가에서 태어났다. 1890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과 군, 집단군을 지휘했고,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10월 27일 카를 황제가 그를 헝가리의 전권 대리인(호모 레기우스)으로 삼았으나 과꽃 혁명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1919년 8월 카를을 대신하는 섭정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어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협상국이 합스부르크가의 국가원수를 인정하지 않아 8월 23일 물러났다. 호르티 시대에는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44년 헝가리를 떠났고 1962년 서독의 라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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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임관
  • 1914–1918군단·군·집단군 사령관
  • 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원수, 헝가리 호모 레기우스
  • 1919헝가리 섭정
  • 1927상원 의원
  • 1936–1944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

레하르 언털

Lehár Antal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6–1962 ○ 빈에서 사망

서헝가리에서 반혁명 부대를 이끌고 1921년 카를 왕의 두 차례 복귀 시도에 가담한 왕정주의 장군

쇼프론에서 태어나 빈의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나온 직업 장교로, 작곡가 레하르 페렌츠의 동생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공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십자장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평의회 공화국 시기 그라츠에서 약 2,000명의 부대를 모았고, 1919년 8월 서헝가리 군 사령관이 되어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에 대한 보복을 벌였다. 왕정주의자로서 1921년 3월 카를 왕 곁에 섰고, 10월 두 번째 시도에서는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실패한 뒤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독일로 도피했다. 이후 베를린과 빈에서 살며 형의 유산을 관리하다 1962년 빈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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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빈 사관학교 졸업
  • 1918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남작
  • 1919그라츠에서 부대 모집, 서헝가리 군 사령관
  • 1921카를 왕의 두 차례 복귀 시도
  • 1921독일로 도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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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d Olimxon
반혁명 세력 부하라 에미르국 우즈베크인 (망기트 왕조) 1880–1944 → 망명지에서 사망

1920년 붉은 군대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한 부하라 에미르국의 마지막 에미르

1880년 부하라에서 에미르 압둘아하드 칸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니콜라이 사관학교에서 3년간 통치와 군사를 배웠고, 돌아와 나사프와 카르마나의 총독을 지냈다. 1911년 망기트 왕조의 12대이자 마지막 에미르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뇌물과 자의적 징세를 금하는 개혁을 내걸었으나 곧 전통파의 손을 들었고, 1917년 이후 청년부하라인 등 개혁파를 탄압했다. 1918년 3월 콜레소프가 이끈 볼셰비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1920년 8월 말 부하라 작전 중 두샨베를 거쳐 카불로 달아났다. 망명지에서 영국과 손잡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바스마치를 지원했다고도 하며, 1944년 카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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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러시아 정부로부터 부하라 왕세자로 확인받음
  • 1911–1920부하라 에미르
  • 1920–1944아프가니스탄 망명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

Αλέξανδρος Παπάγος

알바니아 전선에 승부를 건 그리스 육군 원수

독일군이 북부 국경을 침공했을 때도 그리스군 주력은 알바니아 전선에 묶여 있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그리스 왕정과 메탁사스 독재체제에 충성한 직업군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기 그리스 육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0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방면 침공을 저지하고 반격을 조정했지만, 독일의 개입이 임박한 뒤에도 주력을 알바니아 전선에 남겨 메탁사스 방어선의 방어를 어렵게 했다. 점령기에 저항조직을 만들었다가 체포되어 강제수용되었고, 전후에는 내전에서 정부군을 지휘한 뒤 총리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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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그리스 육군 기병 소위로 임관
  • 1935–1936군사장관, 육군 총감
  • 1936–1940육군 총참모장, 메탁사스 체제의 군사 기반 강화
  • 1940–1941그리스 육군 총사령관, 알바니아 전선과 메탁사스 방어선 작전 지휘
  • 1943–1945점령기 저항조직 군사계층 결성, 독일군에 체포되어 수감
  • 1949–1951내전기 정부군 총사령관, 공산군에 대한 최종 공세 지휘
  • 1952–1955그리스 총리

오스텐부르크모라베크 줄러

Ostenburg-Moravek Gyula
헝가리 국가기관 파시스트·나치 헝가리 1884–1944 부다페스트에서 사망

부대 장교들이 『네프서버』 기자 둘을 살해했고 1921년 카를 왕의 복귀 시도에 가담한 헌병 장교

마로시바샤르헤이에서 태어난 장교로,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쇼프론의 헌병 사령관이 되었다. 1920년 2월 17일 그의 장교 부대원들이 『네프서버』의 쇼모지 벨러와 버초 벨러를 살해해 호르티에 반대하는 세력에 경고를 보냈고, 3월 섭정 선거 때는 그의 부대가 국민의회의 「질서」를 지켰다. 1921년 8월 쇼프론 철수를 거부해 이 도시가 헝가리에 남을 길을 열었다. 같은 해 10월 왕정주의 장교들과 함께 카를 왕을 불러들여 장갑열차로 부다페스트로 진군했으나 부더외르시 전투에서 졌고, 사면을 받은 뒤 퇴역했다. 1932년 프로너이 팔과 함께 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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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쇼프론 헌병 사령관
  • 1920부대원들이 쇼모지·버초 살해
  • 1921쇼프론 철수 거부
  • 1921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 부더외르시 전투
  • 1932헝가리 전국 파시스트당 창당

카를 1세

Karl I.
오스트리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헝가리 1887–1922 → 망명지에서 사망

헝가리 국왕 카를 4세로서 1921년 두 차례 왕위 회복을 시도한 마지막 합스부르크 황제

1916년 11월 큰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카를 1세)이자 헝가리 국왕(카를 4세)이 되었다. 연합국과 비밀 평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1918년 가을 제국은 해체되었다. 11월 11일 오스트리아에서, 13일 헝가리에서 국정 참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나 퇴위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1919년 스위스로 망명한 뒤 1921년 3월과 10월 두 차례 헝가리 왕위 회복을 시도했으나 섭정 호르티의 반대로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 뒤 체포되어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으로 유배되었고 1922년 그곳에서 호흡부전으로 죽었다. 2004년 가톨릭교회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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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오스트리아 황제 · 헝가리 국왕 즉위
  • 1918국정 참여 포기 선언
  • 1919스위스 망명
  • 1921두 차례 헝가리 왕위 회복 시도
  • 1921–1922마데이라섬 유배, 사망
  • 2004복자 선포

게오르기오스 2세

Γεώργιος Βʹ

왕정 복고와 메탁사스 정권의 후견인

1936년 8월 4일, 게오르기오스 2세는 메탁사스가 의회를 중단하고 독재체제를 세우는 데 왕의 승인을 보탰다.

게오르기오스 2세는 정치적 위기 속에서 왕정의 복고와 유지를 추구한 그리스 국왕이었다. 1935년 왕위에 돌아온 뒤 이오아니스 메탁사스의 집권과 1936년 8월 4일 독재체제를 승인해 왕권과 군부 권위주의를 결합했다. 그는 영국과의 동맹을 유지하며 이탈리아와 독일의 침공에 맞섰지만, 전쟁 중 망명 정부를 이끌고 해방 뒤에도 왕정 복귀를 추진해 저항운동 세력과 충돌하는 정치적 유산을 남겼다. 1946년 왕위에 복귀한 지 얼마 지나지 않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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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2–1924그리스 국왕, 첫 재위
  • 1935왕정 복고 뒤 국왕으로 복귀
  • 1936–1941메탁사스 정권 아래 국가원수
  • 1940–1941그리스군 최고지휘권 행사, 추축국 침공에 대응
  • 1941–1944런던 중심의 망명 정부와 연계된 국왕
  • 1944–1946해방 뒤 귀환 문제를 둘러싼 국왕, 섭정에 동의
  • 1946–1947국왕으로 복귀, 사망할 때까지 재위

민드센티 요제프

Mindszenty József
왕정·왕당파 헝가리 헝가리(독일계 집안) 1892–1975 ○ 망명지 빈에서 사망

1949년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고 1956년부터 미국 대사관에 피신한 에스테르곰 대주교·추기경

버시주 체히민드센트의 독일계 성을 쓰는 집안에서 나 1915년 사제가 되었고, 1919년 카로이·쿤 벨러 정부에 잇달아 체포되었다. 뒤에 성을 고향 마을 이름을 딴 민드센티로 바꾸었다. 1944년 3월 베스프렘 주교가 되었고,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되었다가 1945년 4월 풀려났다. 1945년 에스테르곰 대주교·수좌대주교, 1946년 추기경이 되어 교회 학교 국유화 등에 맞섰다. 1948년 12월 체포되어 고문 끝에 자백했고, 1949년 2월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을 받았다. 1956년 혁명 중 풀려났고 소련군이 들어오자 미국 대사관에 피신해 15년을 지냈다. 1971년 빈으로 떠났고, 1974년 바오로 6세가 대주교좌 공석을 선언했으며 1975년 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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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사제 서품
  • 1919카로이 정부와 쿤 벨러 정부에 체포됨
  • 1944베스프렘 주교, 11월 화살십자당 정권에 체포됨
  • 1945–1974에스테르곰 대주교, 수좌대주교
  • 1946추기경 서임
  • 1948–1949체포, 여론 재판에서 종신형
  • 1956–1971혁명 중 석방, 부다페스트 미국 대사관에 피신
  • 1971–1975빈에서 망명 생활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Pavle Karađorđević

전쟁을 피하려다 추축국의 압박에 밀린 섭정

1941년 3월 25일 삼국동맹 가입 이틀 뒤 군부 쿠데타로 섭정직에서 쫓겨났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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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 1912–1921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수학, 제1차 세계대전 복무
  • 1929베오그라드 현대미술관 설립과 후원
  • 1934–1939유고슬라비아 섭정평의회 의장
  • 1939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추진
  • 1941삼국동맹 가입 뒤 군부 쿠데타로 실각

히로히토

裕仁
일본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일본 일본 1901–1989 ○ 자연사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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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도쿄에서 출생
  • 1916황태자로 책봉
  • 1921–1926섭정
  • 1926–1945일본 제124대 천황, 제국 헌법상 대권 행사
  • 1941대미·대영·대 네덜란드 개전 결정 승인
  • 1945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
  • 1947–1989일본국 헌법상 상징천황
  • 1989도쿄에서 사망

푸이

溥仪
청 왕조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906–1967 ↓ 퇴위 1912 · 자연사

청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 인민공화국의 「개조된」 시민

일곱 살도 되기 전에 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하고 1917년 한 차례 복위했다. 이후 만주국의 집정과 황제를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사로잡힌 뒤, 1959년 사면되어 개조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세 살에 청의 선통제로 즉위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했다. 자금성에 머물다 1924년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로 갔고, 1932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집정, 1934년부터 황제가 되었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억류된 뒤 1950년 중국에 송환되어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개조 교육을 받았고 1959년 특사로 풀려났다.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와 정협 위원으로 살다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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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청 선통제
  • 1934–1945만주국 황제
  • 1950–1959푸순 전범관리소 수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