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와 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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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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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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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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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볼가의 부랑아에서 유럽이 아는 러시아 최고 작가가 되었고,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돈줄이자 양심이었다. 1917년 이후 레닌의 폭력을 공개 비판하다 사실상 국외로 밀려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소비에트 문학의 간판으로 세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부로 추대된 채 감시 속에 살다 1936년 죽었다. 독살설은 지금도 남아 있다.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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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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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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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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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1946년 8월, 즈다노프는 아흐마토바를 두고 "반은 수녀, 반은 창녀"라고 공개 비난했다. 그녀는 회의장에서 일어나 조용히 자리를 떴고, 이후 10년 가까이 출판 금지 상태에 놓였다.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으로, 초기 시집 『저녁』(1912)과 『묵주』(1914)로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섰다. 체포된 아들과 친구들을 기다리며 스탈린 시대의 공포를 『레퀴엠』에 응축했고, 오랫동안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6년 즈다노프의 공식 비난을 받았지만 떠나지 않은 채 기억과 애도의 언어를 지켰다. 말년에는 『영웅 없는 시』를 완성하고 옥스퍼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국제적 재평가를 이루었다.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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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스탈린의 전쟁 선전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이디시어 연극의 거장
고든 크레이그는 모스크바에서 미호엘스의 《리어왕》을 본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미호엘스의 리어 연기처럼 그토록 깊이, 핵심까지 뒤흔든 연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이디시어 연극의 최대 거장으로,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의 예술감독을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맡아 이디시어 무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디시어 공연(1935)으로 세계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칭호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초대 의장으로서 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을 순회하며 소비에트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8년 스탈린의 직접 명령으로 MGB 요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후 소비에트 국가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오데사 유대인 지구의 이야기꾼으로, 부됸니 기병대를 따라 폴란드 전선을 달리며 『기병대』를 썼다. 혁명의 잔혹을 너무 정직하게 그려 부됸니가 격노했다. 예조프의 아내와의 인연까지 겹쳐 1939년 체포되었고, 원고를 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1940년 총살당했다. 압수된 원고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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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나는 어떤 운명이든 지금 내가 가진 이 운명보다는 받아들이겠다」 — 1954년 작가동맹 회의에서, 복권되었으나 다시 공격받던 자리에서.
미하일 조셴코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널리 읽힌 풍자 작가로, 혁명 이후 평범한 시민의 어눌한 목소리로 서술되는 스카즈 기법을 통해 공동 아파트, 관료주의, 혁명적 이상과 일상의 괴리를 포착했다. 세라피온 형제단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20~1930년대에 약 1억 부의 책을 판매하며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946년 안나 아흐마토바와 함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공개 비난을 받고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빈곤에 내몰렸으며, 이는 전후 스탈린주의 문화 탄압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으나 자신의 작품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1958년 무명 속에 사망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농민 가정에서 자라 러시아 농촌의 기억과 구전적 이미지에 현대적 서정성을 부여한 시인이었다. 그는 10월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지지했지만, 산업화와 국가 권력이 자신이 꿈꾼 사회주의와 어긋난다고 느끼며 점차 환멸을 드러냈다. 이미지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혁명기의 해방감과 도시화가 낳은 상실을 함께 기록했다. 1925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신경제정책기 문화의 어두운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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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1937년 5월 체포되어 투하쳅스키 사건의 피고인 8인 중 한 명으로 6월 12일 총살됐으며, 1957년 복권됐다.
〈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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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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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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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이 황량한 시대의 사막에, 전쟁과 화재와 맹렬한 파괴 끝에, 우리 고대 영광의 이 외롭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성당이 서 있다.
니콜라이 자볼로츠키는 1928년 다닐 하름스, 알렉산드르 브베덴스키와 함께 아방가르드 문학 그룹 오베리우(OBERIU)를 공동 창립한 소비에트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1929)은 NEP 시기 소비에트의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부조리한 이미지와 풍자로 그려내 혁명 후 러시아 시의 이정표가 되었다. 1938년 대숙청 때 반소비에트 작가조직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되었고, 유형 중 중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의 탁월한 번역을 완성했다. 전후 모스크바로 복귀한 후에는 자연과 인간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숙고하는 고전적 서정시로 전환하여 튜체프에 비견될 만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임종을 앞둔 베크의 병실에 금서 『새로운 임명』 독일어판이 몰래 전해졌고, 더 이상 읽을 수 없던 그는 책을 베개 곁에 놓아 달라고 한 뒤 표지를 쓰다듬었다.
사라토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사단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조국전쟁에서 모스크바 민병대에 참가한 뒤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판필로프 사단의 방어전을 기록한 《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1944)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피델 카스트로와 체 게바라의 애독서가 된 소비에트 전쟁문학의 고전이다. 전후에는 금속노동자와 기술자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중공업 관료제를 소설화한 《새로운 임명》(1965)은 당대에 출판 금지되어 1986년에야 소련에서 공개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가로 기억된다.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레닌그라드의 한 교수가 젊은 우글로프의 수술 보고를 듣고 '이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이다'라고 말했다가, 직접 수술을 검토한 뒤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시베리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사라토프 의대를 졸업하고, 겨울전쟁과 900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했다. 식도·종격동·폐·심장 수술을 개척했으며, 102세까지 수술실에 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에서 '어떤 음주도 용납될 수 없으며 술 취함은 러시아 민족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국에 유포한 핵심 선전가였고, 종신토록 금주 운동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의 배후로 유대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록 음악을 마약으로 분류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우파와 결합한 과격한 주장으로 논란을 낳았다.
스무 살에 『고요한 돈강』을 쓰기 시작해,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는 풍경을 소비에트 문학에서 가장 정직하게 담았다. 너무 이른 걸작이라 대필 시비가 평생 따라붙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과 반대로 걸었다: 당에 충성했고,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의 피고들을 총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연단에서 말했다. 1965년 노벨상을 받았고 1984년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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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아르바트의 아이들』 속 스탈린은 말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한 문장에 한 시대의 냉혹한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란 유대계 소비에트 작가. 1933년 NKVD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3년 유배, 전쟁 중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1960년대에 완성한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2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마침내 빛을 보아 스탈린주의 청산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가문의 나치 점령 하 투쟁을 그린 『무거운 모래』(1979)는 러시아어 최초의 홀로코스트 소설로 평가받았다.
파샤 안겔리나는 초기 5개년계획의 농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술을 익히고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트랙터 운전수이자 여단장이었다. 그녀는 여성 트랙터 여단을 이끌며 스타하노프 운동의 농업 부문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이 되었고, 여성의 농촌 기계화 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과 생산 기록은 성별 분업을 넘어선 노동의 가능성과 국가가 노동 영웅을 선전의 상징으로 만드는 방식을 함께 드러낸다.
1945년 2월 9일, 동프로이센 전선. 적 포대를 탐지해 훈장을 받은 포병 대위가 부대 본부에서 체포됐다. 전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한(Пахан)'이라는 은어로 스탈린을 조롱한 죄였다. 군복의 계급장이 뜯겨나갔고, 루뱐카로 향하는 호송열차에 올랐다.
포병 대위로 참전 중 사신(私信)에서 스탈린을 비꼬았다가 8년형을 받았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로 해빙의 상징이 되었고, 『수용소군도』로 노벨상과 국외 추방(1974)을 함께 얻었다. 1994년 귀국해 러시아에서 죽었다. 자신이 증언한 체제보다 17년을 더 살았다.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죽기 6개월 전 총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내 소총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정교회 신자요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 죽음들의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소련의 대표적 소형화기 설계자. 쿨라크로 몰려 추방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한 칼라시니코프는, 신뢰성 없는 소총에 좌절한 병사들의 불만을 AK-47로 응답했다. 1949년 채택된 AK는 AKM, RPK, PK, AK-74로 이어지며 단순성과 저비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보병 화기가 되었다. 이젭스크 기계공장에서 평생을 보내며 상사에서 중장까지 진급했고 여섯 차례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한 소련 군수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으나 발명으로 부를 얻지는 못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무기가 초래한 죽음에 대한 영적 고통을 총대주교에게 고백하면서도 AK는 방어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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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1966년 2월 재판에서 시냡스키는 무죄를 주장했다 — 소비에트 정치 재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역사가 프레드 콜먼은 이 재판을 "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탄생"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문학학자, 비평가, 작가. 필로로기야 학위 후보(1952년)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모스크바 국립대·예술극장 학교 강사였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노비 미르』에서 주요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소비에트 합법 출판물이었다. 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풍자 소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59)를 발표했다. 1966년 율리 다니엘과 함께 순수 창작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소비에트 작가가 되었고, 이 재판은 근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6년간 수용소 복역 후 1973년 프랑스로 망명, 소르본에서 러시아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신탁시스』를 창간했다.
201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 — 문학 공부를 거부하고 카플레르를 체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동딸로, 1967년 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크렘린 내부를 서방에 최초로 증언한 회고록으로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아버지의 사적 면모와 소비에트 지배층의 삶을 폭로한 기록으로 평가되며, 이후 귀환과 재망명을 거듭하면서도 평생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상세 이력 보기
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1945영국 공산당 입당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1980년 7월 28일, 모스크바 올림픽 기간. 비소츠키의 시신이 타간카 극장 로비에 안치되자 십만 인파가 수 킬로미터 줄을 섰다. 경찰 추산 10만8천 명. 『햄릿』 공연 취소에도 단 한 명도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타간카 극장의 배우이자 소련 최고의 음유시인. 700곡이 넘는 노래를 7현 기타로 불렀고, 공식 매체에서 배제되었으나 릴 테이프 복제로 전국에 퍼졌다. 1971년 타간카 『햄릿』에서 검은 스웨터의 지식인 반항아로 한 세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범죄자·최전선 병사·알코올 중독자 같은 가면을 빌려 소비에트 사회의 금기를 거리 언어로 노래했다. 브레즈네프마저 병상에서 전화로 그의 노래를 듣기를 원했을 만큼 당과 민중을 동시에 사로잡은 유일무이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중 42세로 사망했을 때, 십만 인파가 타간카 광장에 모여 당국이 감추려 했던 존재의 진정한 무게를 증언했다.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노래혁명」의 사운드트랙을 쓴 작곡가, 다섯 조국의 노래로 에스토니아 대중을 하나로 묶었다
밴드의 연주를 멈추고 30만 군중 앞에서 맨손으로 합창을 지휘하며 '나는 에스토니아인이고 에스토니아인으로 남을 것이다'를 불렀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이자 음악가로, 1980년대 후반 노래혁명 시기 독립 열망을 노래한 〈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으로 대중의 감정적 결집을 이끌었다. 1987년 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연대해 만든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는 노래혁명의 서곡이 되었고, 이듬해 5월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다섯 곡은 이듬해 9월 30만 명이 모인 〈에스티마 라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96년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200여 곡을 남겼지만, 역사는 그를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