작가·예술가

95 명

소속 인물

비사리온 그리고리예비치 벨린스키

Виссарион Григорьевич Белинский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11–1848 ○ 폐결핵으로 사망

러시아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 문학 비평가

러시아가 구원을 찾을 곳은 신비주의도 금욕주의도 아니다. 계몽, 인도주의, 그리고 인간 존엄의 각성이다. — 고골에게 보낸 편지, 1847년

비사리온 벨린스키는 러시아 문학 비평의 창시자이자 혁명적 민주주의 사상의 선구자로, '급진 인텔리겐치아의 아버지'로 불린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퇴학당한 후 『텔레스코프』, 『조국의 수기』, 『동시대인』 등 주요 문예지를 무대로 활동하며 푸시킨·고골·레르몬토프·도스토옙스키의 재능을 세상에 알렸다. 헤겔 철학을 거쳐 사회주의로 나아간 그의 사상은 '문학은 사회를 위해 진실을 반영해야 한다'는 신념으로 집약되며, 이는 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를 거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먼 선구가 되었다. 1847년 고골에게 보낸 서한에서 농노제와 전제정치를 정면으로 비판했으며, 이 편지는 차르 검열하에서 필사본으로 유통되며 페트라솁스키 서클과 후대 혁명가들에게 지하 저항의 상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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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29–1832모스크바대학 문학부 수학, 반농노제 희곡으로 퇴학
  • 1834『텔레스코프』지에 『문학적 환상』 발표로 비평가 데뷔
  • 1838–1839『모스크바 관찰자』 비공식 편집자
  • 1839–1846『조국의 수기』 수석 비평가, 러시아 최고의 비평가로 부상
  • 1841헤겔주의 '현실과의 화해' 단계를 극복하고 스스로 사회주의자로 선언
  • 1846–1848네크라소프의 『동시대인』에서 비평 활동, 『1847년 러시아 문학 개관』 집필
  • 1847고골의 『친구와의 왕복서한선』을 규탄하는 공개서한 작성, 필사본으로 전국 유포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네크라소프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Некрасов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21–1878 ○ 장암

농민의 고통을 노래하고 《동시대인》을 혁명적 문학의 중심으로 만든 시인·출판인

"그대는 시인이 아닐지 몰라도, 시민이어야만 한다." — 네크라소프가 시 「시인과 시민」에서 선언한, 러시아 문학의 사회적 사명을 규정한 한 구절.

러시아 사실주의 문학의 중심을 이룬 시인이자 출판인으로, 푸시킨이 창간한 《동시대인》을 인수해 벨린스키·체르니솁스키·도브롤류보프의 비평과 톨스토이·도스토옙스키·투르게네프의 소설이 교차하는 당대 최고의 문예지로 키웠다. 농노제 아래 신음하는 농민을 그들의 언어로 노래한 그의 시는 혁명적 민주주의자들의 정경이 되었고, 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는 러시아 농촌의 모순을 전면적으로 파헤친 서사시로 남았다. 1878년 장례식에 4천 명이 운집해 정치 집회로 변모했으며, 도스토옙스키가 '푸시킨 이후 가장 위대한 시인'이라 추도하자 젊은 혁명가들은 '아니, 더 위대하다!'고 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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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39–1841상트페테르부르크 대학교 철학부 청강생
  • 1840첫 시집 『꿈과 소리』 출간
  • 1840–1846《조국의 수기》 및 여러 잡지에 기고, 희곡·보드빌 집필
  • 1845–1846알마나크 『페테르부르크 생리학』·『페테르부르크 선집』 편집·출판 — 도스토옙스키 데뷔작 수록
  • 1847–1866《동시대인》(Sovremennik) 발행인 겸 편집자
  • 1856대표 시집 『N. 네크라소프 시선』 출간 — 즉시 매진, 전국적 명성
  • 1868–1878《조국의 수기》(Otechestvennye Zapiski) 발행인 겸 편집자
  • 1873–1876대표작 『누가 러시아에서 행복하게 사는가』 집필

미하일 예브그라포비치 살티코프-셰드린

Михаил Евграфович Салтыков-Щедрин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인 1826–1889 ○ 뇌졸중으로 사망

전제정치와 농노제를 신랄하게 풍자한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

1885~1886년 병든 셰드린을 찾아온 학생 대표단 중에는 레닌의 형 알렉산드르와 누이 안나가 있었으며, 안나 울리야노바-옐리자로바는 그를 '우리가 가장 사랑하는 작가'라고 불렀다.

19세기 러시아의 가장 위대한 풍자작가인 미하일 살티코프-셰드린은 『한 도시의 역사』(1870)와 『골로블료프 가문』(1880)을 통해 전제정치·관료제·농노제의 부패를 신랄하게 파헤쳤다. 귀족 출신이었으나 프랑스 유토피아 사회주의에 공감해 페트라솁스키 서클에 가담, 1848년 유배된 후 7년간 지방 관료로 일하며 러시아의 모순을 목격했고, 네크라소프 사후 《조국의 수기》 편집장으로 급진 저널리즘을 이끌었다. 레닌은 그를 '혁명적 청년들이 가장 사랑한 작가'라 불렀고, 지노비예프는 '그의 작품은 당시 어떤 혁명가 조직보다도 진정으로 차르 체제의 기초를 훼손했다'고 평가했으며, 마르크스도 그의 작품을 정치적 관심으로 정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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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8군부성 문서국 관리
  • 1848–1855뱟카 유배, 지방 관료
  • 1858–1860랴잔 부지사
  • 1860–1862트베리 부지사
  • 1863–1864《동시대인》 기고
  • 1864–1868펜자·툴라·랴잔 재무국장
  • 1868–1884《조국의 수기》 편집장

레프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Лев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28–1910 ○ 폐렴

『전쟁과 평화』의 작가이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국가와 교회에 맞선 백작

“그런데 농민들은…… 농민들은 어떻게 죽지?” — 아스타포보 역에서 숨을 거두며, 1910년 11월 20일

러시아의 소설가이자 급진적 도덕 사상가. 『전쟁과 평화』『안나 카레니나』로 세계 리얼리즘 문학의 정점을 찍었고, 1870년대 말 영적 위기 끝에 기독교 아나키즘으로 전회하여 국가·교회·사유재산·조직적 폭력을 전면 거부했다. 『내 안의 하느님 나라』(1894)에 정리된 비폭력 저항 사상은 마하트마 간디와 이후 시민권 운동에 결정적 영향을 미쳤다. 1901년 러시아 정교회에서 파문당했으며, 1910년 재산과 귀족적 삶을 버리고 비밀리에 가출했다가 아스타포보 간이역에서 폐렴으로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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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44–1847카잔대학에서 동양어·법학 수학, 학위 없이 중퇴
  • 1852–1856『유년시절』로 데뷔, 크림전쟁 포병장교로 참전하여 『세바스토폴 이야기』 발표
  • 1862–1869소피야 안드레예브나와 결혼, 야스나야 폴랴나에서 『전쟁과 평화』 집필 완성
  • 1873–1878『안나 카레니나』 발표
  • 1879–1882영적 위기와 회심 — 『참회』 집필, 정교회 교리·국가·사유재산에 대한 근본적 비판 시작
  • 1884–1899『내 안의 하느님 나라』『부활』 등 발표, 기독교 아나키스트·평화주의자로 국제적 명성
  • 1901–1910정교회 파문, 간디와 서신 교환, 1910년 10월 야스나야 폴랴나를 떠나 아스타포보에서 사망

베라 니콜라예브나 피그네르

Вера Николаевна Фигнер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52–1942 ○ 자연사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회 최후의 생존자, 20년 독방을 산 회고록 작가

「나는 자주 생각했다. 내 삶이 피고석 외에 다른 무엇으로 끝날 수 있었을까? 그리고 매번 스스로 대답했다. 아니오!」 — 1884년 '14인 재판'에서

카잔현 귀족 가문 출신, 취리히 대학 의학부 수학 중 나로드니키 서클 '프리치'에 합류했다. 1879년 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으로 선출돼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계획을 기획했으며, 1881년 거사 후 유일하게 체포를 피한 집행위원이었다. 1883년 배신으로 체포돼 슐리셀부르크 요새 20년 독방 수감 후 회고록 『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1921–22)로 혁명운동의 핵심 증언을 남겼다. 볼셰비키에 가입하지 않았으나 소련에 남아 대숙청기 스탈린에게 옛 동지들의 구명 탄원을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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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2–1875취리히·베른 대학 의학부 수학, '프리치' 서클 참여
  • 1876–1879사마라·사라토프현에서 '민중 속으로' 선전 활동, 펠처 근무
  • 1879–1883나로드나야 볼랴 집행위원; 알렉산드르 2세 암살 기획
  • 1883–1884체포, '14인 재판' 사형 선고 후 무기징역 감형
  • 1884–1904슐리셀부르크 요새 독방 20년 수감
  • 1906–1915해외 망명, 파리 정치범구제위원회 조직
  • 1917전러시아 농민대표소비에트 집행위원, 제헌의회 후보
  • 1921–1932『Запечатлённый труд』 출간, 구(舊)정치범 협회 활동

블라디미르 갈락티오노비치 코롤렌코

Владимир Галактионович Короленко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53–1921 ○ 폐렴으로 사망

제정도 볼셰비키도 거부한 러시아 문학의 양심

“인간은 행복을 위해 창조되었다, 새가 비상을 위해 창조되었듯이 — 다만 행복이 언제나 인간을 위해 만들어져 있는 것은 아니다.” — 『역설』

우크라이나계 아버지와 폴란드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러시아 문학을 자신의 '진정한 조국'으로 삼은 작가이자 인권운동가.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여러 차례 시베리아 유배를 겪었고, 그 경험을 바탕으로 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로 1880년대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올랐다. 제정 시절부터 무르탄 사건의 우드무르트 농민, 베일리스 사건의 유대인을 변호했고, 혁명 후에는 루나차르스키에게 보낸 편지들에서 볼셰비키의 적색테러와 사형제를 공개 비판했다. 1902년 알렉세이 고리키의 아카데미 제명에 항의해 자신도 명예 아카데미션을 반납했으며, 죽는 날까지 기근 구호와 고아원 설립에 힘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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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9–1885첫 단편 발표, 나로드니키 활동으로 반복 체포·시베리아 유배
  • 1885–1896니주니 노브고로드에서 『마카르의 꿈』『맹인 음악가』 발표, 문학적 명성
  • 1896–1904『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 고리키 제명 항의로 명예 아카데미션 사퇴(1902)
  • 1904–1917『루스코예 보가츠트보』 편집장, 무르탄·베일리스 사건 변호, 사형제 반대 운동
  • 1917–1921볼셰비키 테러 비판 — 루나차르스키 서한, 기근 구호 활동 중 사망

콘스탄틴 세르게예비치 스타니슬랍스키

Константин Сергеевич Станисла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3–1938 ○ 자연사

모스크바 예술극장 창립자이자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의 창시자

192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 30주년 기념 공연 도중 심장마비가 찾아왔다. 그는 막이 내릴 때까지 무대를 떠나지 않았고, 이후 다시는 배우로 서지 못했다.

러시아·소비에트 연극 연출가이자 배우. 1898년 모스크바 예술극장을 공동 창립해 근대 연극을 혁신했다. 배우의 심리적 진실을 체계화한 '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은 세계 연기 교육의 근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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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모스크바 예술문학협회 공동 창립
  • 1898네미로비치-단첸코와 모스크바 예술극장(MAT) 공동 창립
  • 1906'스타니슬랍스키 시스템' 연기 방법론 개발 착수
  • 1912MAT 제1스튜디오 설립, 배우 훈련 실험실로 운영
  • 1918볼쇼이 극장 오페라 스튜디오(현 스타니슬랍스키 음악극장) 창설
  • 1922–1924MAT 유럽·미국 순회공연 지휘, 세계적 명성 확립
  • 1936소련 최초의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38『배우의 작업』 출간; 모스크바에서 사망

알렉산드르 세라피모비치

Александр Серафимович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3–1949 ○ 자연사

『철류』로 혁명의 서사시를 쓴 돈 카자크의 아들

“우리는 쓰라린 고통 속에서, 온몸의 피를 쥐어짜며 승리를 배웠다.” — 『철류』

돈 카자크 출신 소비에트 작가. 1918년 볼셰비키 입당, 타만 군대의 내전 행군을 그린 『철류』(1924)로 소비에트 산문의 기념비를 세웠다. 『옥탸브리』 주필로 숄로호프의 『고요한 돈강』을 발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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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유배지에서 첫 단편 「얼음 위에서」 발표, 필명 '세라피모비치'
  • 1902–1917모스크바에서 고리키의 '스레다' 그룹 활동 — 『모래』에 톨스토이 찬사
  • 1918볼셰비키 입당, 『이즈베스티야』 문예부장
  • 1924『철류』 발표 — 타만 군대 행군을 그린 내전 서사시
  • 1926–1929『옥탸브리』 주필, 숄로호프 『고요한 돈강』 발굴·출판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상임위원회 창립 위원
  • 1943스탈린상 1급, 상금 국방기금 헌납

알렉세이 막시모비치 고리키

Алексей Максимович Горь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68–1936 ○ 자연사

폭풍을 부르다 새장에 갇힌 바다제비

“인간 — 이 말은 자랑스럽게 울린다.” — 『밑바닥에서』(1902)

볼가의 부랑아에서 유럽이 아는 러시아 최고 작가가 되었고, 혁명 전에는 볼셰비키의 돈줄이자 양심이었다. 1917년 이후 레닌의 폭력을 공개 비판하다 사실상 국외로 밀려났지만, 스탈린은 그를 다시 불러들여 소비에트 문학의 간판으로 세웠다.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교부로 추대된 채 감시 속에 살다 1936년 죽었다. 독살설은 지금도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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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2–1917부랑 노동자 출신 작가로 세계적 명성, 볼셰비키 자금 지원
  • 1917–1921『노바야 지즌』에 「제때없는 생각들」 — 혁명의 폭력을 공개 비판
  • 1921–1933요양 명목의 국외 체류(소렌토)
  • 1932–1936귀국, 작가동맹 초대 의장 — 사회주의 리얼리즘 정식화

마리야 표도로브나 안드레예바

Мария Фёдоровна Андреева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68–1953 ○ 자연사

레닌이 '동지 페노멘'이라 부른 배우 출신 볼셰비키 재정 요원

1903년, 고위 철도 관리의 아내 신분으로 1등석 열차 칸에 경찰이 쫓는 지하운동가를 숨기고 고리키에게 5월제 선전물을 실은 여행가방을 배달했다.

모스크바 예술극장의 대표 여배우로 스타니슬랍스키의 무대 파트너였던 마리야 안드레예바는 1904년 볼셰비키에 입당한 후 당의 핵심 재정 요원으로 활약했다. 사바 모로조프의 유산 등 자본가들의 거액 헌금을 레닌의 금고로 연결하는 탁월한 자금 조달 능력으로 '동지 페노멘'이라는 당내 별칭을 얻었으며, 18년간 막심 고리키의 동반자로서 그의 문학 활동과 해외 선전 여행을 물질적·실무적으로 뒷받침했다. 10월 혁명 후 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으로서 볼쇼이 드라마 극장을 공동 창립했고, 이후 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으로 18년간 봉직하며 혁명기 문화 제도 건설에 헌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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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1898러시아 예술문학협회 배우
  • 1898–1905모스크바 예술극장 주요 여배우
  • 1904–1917RSDRP(볼셰비키) 재정 요원 — '동지 페노멘'
  • 1918–1921페트로그라드 극장·공연 인민위원
  • 1919볼쇼이 드라마 극장 공동 창립
  • 1922–1928베를린 소비에트 무역대표부 예술·영화 담당
  • 1931–1948모스크바 과학자회관 관장

프세볼로트 에밀리예비치 메이예르홀트

Всеволод Эмильевич Мейерхольд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74–1940 ✕ 처형

생체역학의 창시자, 무대 위에서 혁명을 실현한 연극의 건축가

1930년 베를린 순회공연 중 망명한 배우 미하일 체호프(안톤 체호프의 조카)가 메이예르홀트에게 소련으로 돌아가지 말라고 경고했다. 메이예르홀트는 조용히 대답했다: "나는 김나지움 시절부터 혁명을 내 영혼 속에 지니고 살아왔고, 언제나 그 가장 극단적이고 급진적인 형태로 품어왔소. 당신 말이 옳고 내 최후가 당신이 말한 대로 될 것이라는 걸 나도 알고 있소. 그러나 나는 소련으로 돌아갈 것이오." 체호프가 '왜?'라고 묻자 메이예르홀트는 이렇게 답했다: "정직함 때문이오."

러시아와 소련의 연극을 근본적으로 재편한 연출가·배우·교육자. 구성주의 무대와 생체역학이라는 독자적 연기 체계를 확립했으며, 1918년 볼셰비키에 입당해 '연극의 10월'을 선언했다. 고스찜에서 마야콥스키·고골·크로밍크의 작품을 혁신적으로 무대화했고, 예이젠시테인·쇼스타코비치와 협업하며 유럽 연극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38년 극장 폐쇄 후 1939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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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8–1902모스크바 예술극장(MXAT) 배우 — 〈갈매기〉 트레플레프, 〈세 자매〉 투젠바흐 역 초연
  • 1906–1907코미사르젭스카야 극장 수석 연출가 — 블로크의 〈발라간칙〉으로 '조건극' 시대 개막
  • 1908–1917알렉산드린스키·마린스키 극장 연출가 — 레르몬토프 〈가장 무도회〉, 몰리에르 〈돈 후안〉, 글루크 〈오르페오와 에우리디체〉
  • 1918볼셰비키 입당 및 마야콥스키 〈미스테리야 부프〉 초연 (페트로그라드)
  • 1920–1938국립 메이예르홀트 극장(고스찜) 예술감독 — 생체역학 체계와 구성주의 무대 전성기
  • 1920–1921나르콤프로스 연극부(TEO) 책임자 — 루나차르스키 하에서 소비에트 연극 정책 주도
  • 1923공화국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 1922–1924혁명 극장 예술감독 겸임 — 파이코 〈류리 호수〉 초연
  • 1926–1930고골 〈검찰관〉, 마야콥스키 〈빈대〉·〈목욕탕〉 — 쇼스타코비치·로드첸코 협업의 걸작들
  • 1938–1939고스찜 폐쇄 후 스타니슬랍스키 오페라 극장 수석 연출가로 〈리골레토〉 작업

콘코르디야 니콜라예브나 사모일로바

Конкордия Николаевна Самойлова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76–1921 ○ 콜레라

『라보트니차』를 창간하고 러시아 첫 여성의 날을 조직한 볼셰비키 여성 운동의 설계자

1914년 2월, 『라보트니차』 창간호 발행 전날 경찰이 편집실을 급습해 사모일로바를 포함한 편집진 전원이 체포되었다. 허가는 함정이었다. 그러나 회의에 늦은 안나 옐리자로바의 손으로 국제여성의날인 2월 23일 첫 호가 나왔다.

이르쿠츠크 사제의 딸로, 페테르부르크 베스투제프 과정에서 철학을 공부했다. 1902년 파리에서 레닌을 만나 『이스크라』에 합류한 뒤 10년간 지하 선전가로 활동하며 세 차례 체포되었다. 1912년 『프라우다』 편집서기로 일하며 여성 노동자들의 편지에 주목, 1913년 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을 조직했다. 1914년 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를 창간했고, 1917년 2월 혁명 후 복간했다. 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을 지냈으며, 볼가 선전선 정치부장으로 일하다 1921년 아스트라한에서 콜레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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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베스투제프 여성 고등과정 입학, 철학 수학
  • 1897–1901학생운동 참여, 1901년 첫 체포 및 퇴학 처분
  • 1902–03파리 러시아 사회과학 고등학교 수학, 레닌과 만나 『이스크라』 합류
  • 1903–12RSDLP 입당, 지하 선전 활동 — 트베리·오데사·로스토프·루간스크에서 세 차례 체포
  • 1907런던 RSDLP 제5차 대회 대의원
  • 1912–14『프라우다』 편집서기
  • 1913.02러시아 최초의 국제여성의날 집회 조직, 수백 명의 여성 노동자 동원
  • 1914.02이네사 아르만트와 『라보트니차』 창간 — 발간 직전 체포
  • 19172월 혁명 후 『라보트니차』 복간, 11월 제1차 여성노동자회의 조직
  • 1918.01제1차 전러시아 여성노동자대회 공동 조직
  • 1919–20우크라이나 CP(b)U 여성부장, 제8차 당대회 대의원
  • 1920–21『콤무니스트카』 편집위원, 볼가 선전선 「붉은 별」 정치부장

알렉산드르 알렉산드로비치 블로크

Александр Александрович Блок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0–1921 ○ 병사

10월 혁명을 받아들인 러시아 상징주의의 대표 시인

『열둘』을 완성한 뒤 일기에 '오늘 나는 천재다'라고 적었다.

러시아 은세기의 가장 위대한 시인으로 상징주의를 이끈 알렉산드르 블로크는 10월 혁명이 낳은 최대의 문학 작품 『열둘』(1918)을 써서 열두 적위대의 눈보라 행진 앞에 그리스도를 세웠다. 볼셰비키 집권 후 루나차르스키의 소집에 응한 단 다섯 명의 기성 문인 중 한 명으로, 임시정부의 차르 대신 조사위원회에서 일했고 소비에트 문화 기관에서 활동했다. 혁명에의 헌신은 상징주의 독자들을, 신비주의는 볼셰비키 비평가들을 멀어지게 했고, 1921년 '모든 소리가 멈췄다'며 창작의 침묵에 빠졌다. 치료 목적의 출국 비자가 거부된 채 마흔으로 사망했고, 고리키는 루나차르스키에게 정권이 '그의 죽음에 책임이 있을 것'이라고 경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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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첫 시집 『아름다운 여인에 관한 시』 출간
  • 1906희곡 『꼭두각시극』 발표
  • 1917임시정부 차르 대신 특별조사위원회 편집자
  • 1918『열둘』과 『스키타이인』 발표, 사회주의 아카데미 참여
  • 1921푸시킨 추모 연설 「시인의 소명에 관하여」

뱌체슬라프 알렉세예비치 카르핀스키

Вячеслав Алексеевич Карпин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0–1965 ○ 자연사

레닌의 신임을 받은 볼셰비키 언론인, 68년 당원

1917년 1월, 레닌이 올가 라비치에게 격앙된 편지를 쓰자 카르핀스키는 "이건 욕설입니다"라고 직언했다. 레닌은 후일 이네사 아르만트에게 "카르핀스키가 내 편지를 욕설이라고 하더군. 사과 편지를 써야겠어"라고 털어놓았다.

1898년 입당한 최고참 볼셰비키로, 제네바 망명 시절 레닌 직속에서 당 기관지를 편집했다. 혁명 후 《베드노타》 편집장과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부장으로 농민·대중 선전의 제도적 틀을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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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펜자에서 중등학생 마르크스주의 서클 조직, 선전 활동
  • 1898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17세)
  • 1899–1902하리코프대학 의학부에서 '노동계급해방투쟁동맹' 조직, 체포·유형
  • 1904–1917제네바 망명, 레닌 지도 아래 《전진》·《프롤레타리》·《사회민주주의자》 편집
  • 1917–1918귀국, 《농촌의 진리》 편집,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선전교도부장
  • 1918–1922《베드노타》 편집장, 선전선 '붉은 별' 호에서 신문 발행
  • 1918–1927《프라우다》 편집위원,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회 1~7기 위원
  • 1936–1937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기구에서 근무
  • 1937–1965학술·문필 활동 전념, 레닌·당사 연구, 경제학 박사, 사회주의노동영웅(1962)

올가 다비도브나 카메네바

Ольга Давыдовна Камене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883–1941 ✕ 총살

트로츠키의 동생이자 카메네프의 아내: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첫 설계자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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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입당
  • 1918–1919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
  • 1919–1920s당 여성부 이사
  • 1921–1923기근후유증대책중앙위원회 주요 위원
  • 1923–1925대외구호위원회(KZP) 위원장
  • 1925–1928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
  • 1927남편과 오빠의 몰락으로 모든 직위 상실

알렉세이 니콜라예비치 톨스토이

Алексей Николаевич Толстой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883–1945 ○ 폐암

망명에서 돌아와 스탈린 문학의 기둥이 된 붉은 백작

“소비에트 정부 외에 러시아의 진정한 친구는 세상에 없다.” — 전시 연설, 1941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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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 1939소련 과학원 아카데미 정회원 선출
  • 1941–1943스탈린상 2회 수상; 상금 10만 루블로 전차 건조 기부
  • 1941–1945종군기자로 60여 편의 전선 에세이, 「러시아인의 성격」 발표
  • 1945『이반 뇌제』 희곡으로 사후 스탈린상

알렉산드르 바실리예비치 알렉산드로프

Александр Васильевич Александр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3–1946 ○ 순회 중 급사

성가대 소년에서 소련 국가 작곡가로, 붉은 군대 합창단 창시자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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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 1940모스크바 음악원 지휘·합창 학부장, 예술학 박사
  • 1943소장(генерал-майор) 계급 수여
  • 1944소련 국가 음악 공식 채택

표도르 바실리예비치 글라드코프

Фёдор Васильевич Гладков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인 1883–1958 ○ 식도암으로 사망

시멘트 공장의 재건을 통해 소비에트 산업소설의 길을 연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고전 작가

이것이 노동자의 러시아다. 이것이 우리다. 인류가 수 세기 동안 꿈꿔온 신세계다. — 『시멘트』에서

구교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교사와 지하 혁명가로 청년기를 보낸 글라드코프는, 내전기 노보로시스크 시멘트 공장 재건에 직접 참여한 경험을 바탕으로 1925년 『시멘트』를 발표했다. 이 작품은 파괴된 공장의 복구를 통해 혁명 이후 소비에트 사회의 계급·젠더·관료적 갈등을 형상화한 최초의 소비에트 산업소설로,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정전이자 생산소설의 원형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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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사회혁명당 선전활동 시작
  • 1906RSDLP 가입, 이르쿠츠크주 만주르카로 4년 유형
  • 1910쿠반주 파블롭스카야 초등학교장
  • 1918–1920붉은 군대 복무, 노보로시스크 교육 책임자
  • 1920–1921『크라스노예 체르노모리예』 편집자
  • 1921–1925『노비 미르』 서기, 문학그룹 '쿠즈니차' 활동
  • 1925『시멘트』 발표 —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기념비적 작품
  • 1932–1938『에네르기야』 집필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 형상화
  • 1941–1943『프라우다』·『이즈베스티야』 특파원 (우랄)
  • 1945–1947고리키 문학대학 학장
  • 1949–1954자전적 3부작 발표, 스탈린상 2회 수상
  • 1958모스크바에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안장

알렉산드르 콘스탄티노비치 보론스키

Александр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Ворон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4–1937 ✕ 처형

《크라스나야 노비》 편집장,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1921년 크렘린의 레닌 자택. 《크라스나야 노비》 창간 회의에서 고리키가 인도 설화집을 보이자 레닌은 "이걸 황금 외화로 사고 있다. 올해는 기근이 든다"고 잘랐다. 보론스키는 이렇게 회고했다: "두 진리가 충돌했다 — '사람이 빵만으로 살지 않는다'와 '그러나 빵이 없다면'."

《크라스나야 노비》를 창간해 바벨·파스테르나크를 발굴한 마르크스주의 비평가. 예술을 삶의 인식으로 보는 미학으로 RAPP에 맞서 페레발을 이끌었다. 좌익반대파 가담 후 1937년 처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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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탐보프에서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볼셰비키) 입당
  • 1906–1910체포,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1년 독방, 야렌스크 2년 유형
  • 1912프라하 당대회 대의원; 서기로 회의록 작성, 대중노동자신문 창간 주장
  • 1917–1920오데사 소비에트 집행위원, 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당위원장, 전러시아중앙집행위원; 크론시타트 봉기 진압 참여
  • 1921–1927《크라스나야 노비》 창간·편집장; 《프로제크토르》 편집; 출판사 '크루크' 설립; 문학그룹 '페레발' 결성·주도
  • 1923'46인 성명' 서명, 좌익반대파에 가담
  • 1927–1930트로츠키주의 혐의로 출당, 리페츠크 유배; 1929년 반대파 활동 철회 선언, 1930년 복당
  • 1930–1935국립문학출판사 고전문학부 편집자; 자전적 소설 집필
  • 1937대숙청 중 체포(2월 1일), 스탈린 서명 사형명단 등재, 8월 13일 15분 재판 후 총살

예브게니 이바노비치 자먀틴

Евгений Иванович Замяти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4–1937 → 망명지 사망

금지된 미래의 설계자

1931년 6월, 자먀틴은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썼다. 「작가인 나에게 글을 쓸 수 없다는 것은 사형 선고와 같습니다.」 이 한 문장으로 그는 소련을 떠날 허가를 받아냈다.

볼셰비키였던 해군기술자·작가는 통제와 순응의 미래를 『우리들』에 그렸다. 이 소설은 소비에트 검열이 금지한 첫 작품이 되었고, 그는 작가로서의 삶이 불가능해진 뒤 스탈린에게 직접 편지를 써 출국 허가를 받았다. 파리 망명 중에도 소련 여권을 지키며 1935년 반파시스트 작가대회에 소련 대표로 참석했으나, 결국 조국 밖에서 숨을 거두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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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17볼셰비키 지하활동·기술자 생활
  • 1921『우리들』 완성과 금지
  • 1920년대풍자소설·문학비평 활동
  • 1931출국 허가
  • 1932–1937파리 망명 생활

블라디미르 예브그라포비치 타틀린

Владимир Евграфович Татлин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885–1953 ○ 사망

건설되지 않았지만 혁명적 유토피아의 가장 지속적인 상징이 된 탑의 창조자

1920년 베를린 다다 전시회에서 게오르크 그로스와 욘 하트필드는 '예술은 죽었다 — 타틀린의 새 기계 예술 만세!'라고 적힌 플래카드를 들고 섰다.

러시아 및 소비에트 화가, 건축가, 무대 디자이너로, 카지미르 말레비치와 함께 1920년대 소비에트 아방가르드의 양대 거장이었다. 1919-1920년에 설계한 '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는 에펠탑보다 높은 400미터의 나선형 철골 구조물로, 코민테른의 본부로 구상되었으나 실현되지 못한 채 혁명적 건축의 상징으로 남았다. 1914년부터 선보인 '반(反)부조'는 목재와 금속 등 산업 재료로 제작된 3차원 구성물로, 구축주의의 선구적 작업이었다. 1930년대 이후 사회주의 리얼리즘이 득세하며 공식 후원을 잃었으나, 1960년대에 재평가되어 그의 탑은 혁명적 예술의 가장 널리 알려진 이미지로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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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모스크바에서 성상 화가로 경력 시작
  • 1913파리에서 피카소의 작업실 방문, 구호부조 제작 시작
  • 1915마지막 미래파 전시 '0.10'에서 반(反)부조 전시
  • 1919–1920제3인터내셔널 기념비(타틀린의 탑) 설계 및 모형 전시
  • 1925–1927키예프 예술대학 교수
  • 1927–1930모스크바 브후테마스 교수
  • 1930–1932개인 비행 장치 '레타틀린' 제작
  • 1948반공산주의적이라는 비판으로 해고, 그러나 숙청되지 않음

니콜라이 스테파노비치 구밀료프

Николай Степанович Гумилёв
작가·예술가 러시아 제국 러시아 1886–1921 ✕ 체카에 의해 처형

아크메이즘을 창시하고 체카의 총에 쓰러진 실버 에이지의 시인

어느 시 낭독회에서 청중이 정치적 신념을 묻자 답했다 — '나는 확고한 군주주의자입니다.'

러시아 실버 에이지의 중심 시인으로, 세르게이 고로데츠키와 함께 아크메이즘을 창시하여 상징주의의 모호한 신비주의를 거부하고 시의 구체성과 장인정신을 강조했다. 아프리카 탐험과 세계대전에 자원 입대한 모험적 삶은 그의 시에 이국적 정취와 영웅적 기풍을 불어넣었으며, 후기작 『불기둥』(1921)에서는 철학적 깊이를 더해 러시아 시의 정점에 이르렀다. 안나 아흐마토바의 첫 남편이자 역사학자 레프 구밀료프의 아버지였으며, 반볼셰비키 신념을 숨기지 않았다. 1921년 타간체프 사건에 연루되어 체카에 체포·처형되었고, 소련에서 1986년까지 금지되었다가 1991년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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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첫 시집 『정복자들의 길』 출간
  • 1908『낭만의 꽃』 출간; 파리서 잡지 『시리우스』 발행
  • 1909–1910잡지 『아폴론』 공동 창간; 첫 아프리카 탐험
  • 1911–1912고로데츠키와 『시인들의 길드』 결성, 아크메이즘 선언; 『진주』와 『낯선 하늘』 출간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에 기병으로 자원 입대, 성 게오르기 훈장 2회 수훈
  • 1918–1920『모닥불』·『천막』 출간; 고리키의 『세계문학』 출판사 근무; 전러시아 시인연합 의장
  • 1921『불기둥』 출간; 8월 3일 체포, 8월 26일 처형

시디르 아르테모비치 콥파크

Сидор Артемьевич Ковпак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87–1967 ○ 자연사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한 소비에트 최고의 파르티잔 사령관

「화염이 카르파티아 산비탈을 밝혔다… 밤인데도 대낮 같았고, 불타는 기름의 굉음은 우리를 괴롭히던 독일 비행기 엔진 소리조차 삼켜버렸다.」 — 1943년 비트쿠프 유전 습격을 회고하며.

우크라이나 출신의 소비에트 파르티잔 사령관. 1941년 푸티블에서 부대를 조직해 카르파티아 산맥까지 종단하며 독일군 후방을 교란했고, 두 번의 소비에트 연방 영웅 칭호를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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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러시아 제국군 제186아슬란두스 보병연대 복무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정찰병·부사관, 게오르기 십자훈장 3·4급
  • 1918–1919코텔바 적색 파르티잔 부대 지휘관
  • 1919–1926붉은 군대 보급·병사 업무, 현 군사위원 역임
  • 1926–1939군 협동조합 지도원, 푸티블 도로국장 등 지방 경제 관료
  • 1940–1941푸티블 시 집행위원회 의장
  • 1941–1943수미 파르티잔 연대 지휘관, 소장 진급 (1943)
  • 1944–1947우크라이나 SSR 최고재판소 판사
  • 1947–1967우크라이나 SSR 최고회의 부의장

안나 안드레예브나 아흐마토바

Анна Андреевна Ахмато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89–1966 ○ 병사

감옥 바깥에서 기다린 시인

1946년 8월, 즈다노프는 아흐마토바를 두고 "반은 수녀, 반은 창녀"라고 공개 비난했다. 그녀는 회의장에서 일어나 조용히 자리를 떴고, 이후 10년 가까이 출판 금지 상태에 놓였다.

아크메이즘의 대표 시인으로, 초기 시집 『저녁』(1912)과 『묵주』(1914)로 러시아 문단의 정상에 섰다. 체포된 아들과 친구들을 기다리며 스탈린 시대의 공포를 『레퀴엠』에 응축했고, 오랫동안 출판을 금지당하고 1946년 즈다노프의 공식 비난을 받았지만 떠나지 않은 채 기억과 애도의 언어를 지켰다. 말년에는 『영웅 없는 시』를 완성하고 옥스퍼드 명예박사 학위를 받으며 국제적 재평가를 이루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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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저녁』 발표
  • 1935–1940『레퀴엠』을 비밀리에 집필
  • 1946즈다노프의 공식 비난과 출판 금지
  • 1958–1965시집 재출간과 후기 인정

알렉산드르 야코블레비치 아로세프

Александр Яковлевич Аросе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0–1938 ✕ 총살, 1956년 복권

크렘린 포격명령을 내린 혁명가이자 30권을 쓴 프롤레타리아 작가

1924년 1월 24일, 아로세프는 레닌 연구소를 위해 「일리치의 뇌와 심장, 그리고 몸에서 적출된 총알이 담긴 유리병」을 수령했다는 영수증에 서명했다. 「완전한 보존을 내가 개인적으로 책임진다.」

카잔의 재단사 아들로 태어나 소꼽친구 몰로토프의 영향으로 1907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1917년 10월 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으로서 크렘린 포격을 명령했고, 내전기에는 최고혁명재판소 의장으로 우크라이나에서 적색테러를 주도했다. 1934년 초대 VOKS 의장에 취임하여 소련 문화외교의 제도적 기틀을 닦았고, 리투아니아·체코슬로바키아·프랑스 대사를 역임한 외교관이기도 했다. 30권 이상의 소설·희곡·회고록을 남긴 프롤레타리아 작가로서 당 내부의 심리를 파고드는 자전적 문체로 주목받았으나, 1937년 체포되어 이듬해 총살, 1956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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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7RSDLP(볼셰비키) 입당
  • 1917.10모스크바 군사혁명위원회 위원; 크렘린 포격 명령
  • 1918주공군총국(Gлаввоздухфлот) 커미사르
  • 1920우크라이나 최고혁명재판소 의장
  • 1921–1927레닌 연구소 부소장; 체카·OGPU 근무; 프랑스·스웨덴 외교관
  • 1927–1928리투아니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29–1933체코슬로바키아 주재 소련 전권대표
  • 1934–1937VOKS(전연방 대외문화교류협회) 의장

엘 마르코비치 리시츠키

Эль Маркович Лисиц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0–1941 ○ 결핵

절대주의를 건축으로 전환한 구성주의의 공동 창시자, 혁명 아방가르드의 국제적 연결고리

1920년, 붉은 쐐기가 백색 원을 찢고 들어가는 포스터 한 장. 리시츠키는 단 두 개의 도형과 세 가지 색만으로 내전의 모든 것을 말했다.

소비에트 화가·건축가·디자이너. 프로운(PROUN) 시리즈로 절대주의를 입체 공간으로 확장했고, 〈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는 혁명 그래픽의 상징이 되었다. 아방가르드와 서유럽 모더니즘을 잇는 가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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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4다름슈타트 공과대학 건축학부 수학, 우등 졸업
  • 1915–1918리가 공과대학(모스크바 피난) 편입, 공학건축사 학위 취득
  • 1919–1920비텝스크 인민예술학교 교수, 말레비치의 UNOVIS 그룹 핵심 멤버
  • 1920〈붉은 쐐기로 백군을 분쇄하라〉 발표, PROUN 시리즈 시작
  • 1921–1925베를린·스위스 체류, 에렌부르크와 《베쉬》 발행, 데 스테일 가입
  • 1921, 1926–Vkhutemas 및 Vkhutein 교수
  • 1927–1928전연방 인쇄 전시회 및 쾰른 프레사 소비에트관 설계
  • 1930–1941〈건설중인 소련〉 레이아웃, 포토몽타주, 오고뇰크 인쇄소 설계

빅토르 리보비치 세르주

Виктор Львович Серж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0–1947 ○ 심장마비

혁명과 스탈린주의의 부상을 문학으로 증언한 코민테른의 작가-혁명가

1936년 소련을 떠나는 순간, 오렌부르크 유형지에서 써내려간 소설 두 편과 시집 한 권의 원고 전부가 압수당했다. 그는 시집만을 기억으로 복원할 수 있었다. “내가 건네는 것은 진실 자체가 아니라 진실을 향한 증언이다"라고 그는 훗날 말했다.

브뤼셀에서 러시아 망명 나로드니키 집안에서 태어나, 젊은 시절 프랑스 아나키스트 운동에서 활동하다가 5년간 수감되었다. 1919년 소비에트 러시아에 도착해 볼셰비키에 입당, 코민테른에서 언론인·편집자·번역가로 일했으며, 내전기 페트로그라드 방어전에 참가했다. 1923년 좌익 반대파에 합류했고, 1928년 제명·투옥 후 문학으로 전향해 『어느 혁명가의 회고록』, 『러시아 혁명 1년』, 걸작 『툴라예프 사건』을 남겼다. 1936년 국제적 구명 운동으로 소련을 탈출, 프랑스와 멕시코 망명 중에도 저술을 이어가며 20세기 혁명문학의 거장으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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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9–1913파리에서 아나키스트 신문 《L'Anarchie》 필자 및 편집자, 보노 갱 사건 연루로 5년형
  • 1917바르셀로나에서 CNT 활동, 《Tierra y Libertad》 기고; 러시아行 시도 중 프랑스 수용소 억류
  • 1919–1923볼셰비키 입당, 코민테른에서 로망스어 출판 담당, 《인프레코르》 프랑스어판 편집
  • 1923–1927좌익 반대파 합류, 빈·베를린·레닌그라드에서 반스탈린 활동
  • 1928–1933당 제명·투옥 후 작가로 전향, 『감옥의 사람들』 『우리 힘의 탄생』 집필
  • 1933–1936오렌부르크 유형, 국제 구명운동으로 1936년 소련 탈출
  • 1936–1940파리 망명, 모스크바 재판 규탄 저술, 트로츠키와 논쟁적 서신 교환
  • 1941–1947멕시코 망명, 『툴라예프 사건』 『회고록』 완성, 1947년 심장마비로 사망

솔로몬 미하일로비치 미호엘스

Соломон Михайлович Михоэлс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유대계) 1890–1948 ✕ MGB에 암살

스탈린의 전쟁 선전을 위해 세계를 누비고, 스탈린의 명령으로 암살당한 이디시어 연극의 거장

고든 크레이그는 모스크바에서 미호엘스의 《리어왕》을 본 후 이렇게 썼다: '나는 미호엘스의 리어 연기처럼 그토록 깊이, 핵심까지 뒤흔든 연기를 기억하지 못한다.'

소비에트 이디시어 연극의 최대 거장으로, 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의 예술감독을 1929년부터 사망 시까지 맡아 이디시어 무대에 사회주의 리얼리즘과 유대 민족 정체성을 융합했다. 셰익스피어의 《리어왕》 이디시어 공연(1935)으로 세계 연극계의 찬사를 받았으며, 인민예술가 칭호와 스탈린상을 수상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초대 의장으로서 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을 순회하며 소비에트 전쟁 수행을 위한 재정적·정치적 지지를 이끌어냈다. 1948년 스탈린의 직접 명령으로 MGB 요원들에게 암살당했으며, 그의 죽음은 전후 소비에트 국가 반유대주의로의 전환을 알리는 신호탄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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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페트로그라드 유대극장 스튜디오 입단
  • 1920–1928모스크바 국립 유대극장(GOSET) 주연 배우
  • 1929–1948GOSET 예술감독 겸 주연 배우
  • 1941–1945유대인 반파시스트 위원회 의장
  • 1943미국·캐나다·멕시코·영국 순회 선전 여행
  • 1939소비에트 인민예술가 칭호 수여

레프 모이세예비치 크비트코

Лев Моисеевич Квитко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1890–1952 ✕ 처형 · 1955년 복권

소비에트 유대 문화를 노래한 이디시 시인

그의 시 「에텔레」는 나치가 살해한 유대인 희생자를 이디시어와 유대적 기억으로 애도했다.

레프 크비트코는 이디시어로 시와 아동문학을 쓴 소비에트 유대계 시인으로, 혁명과 유대인의 삶을 함께 노래했다. 전시에는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와 기관지 《에이니카이트》에서 활동하며 나치의 유대인 학살을 기록하고 기억하는 문학적 목소리를 냈다. 그러나 전후 국가의 반유대주의적 전환 속에서 위원회 사건으로 체포되어 1952년 처형되었고, 1955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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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키예프에서 첫 시 발표, 첫 시집 《노래들》 출간
  • 1917–1921키예프 그룹의 이디시 시인
  • 1921–1925베를린·함부르크 체류, 독일공산당 가입 및 노동자 선전 활동
  • 1928–1941자전적 운문소설 《젊은 시절》 집필
  • 1941–1948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 및 《에이니카이트》 편집위원
  • 1947–1948문학예술 연감 《헤임란트》 편집
  • 1949–1952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사건으로 수감, 군사대법원에서 사형 선고
  • 19528월 12일 모스크바에서 처형

보리스 레오니도비치 파스테르나크

Борис Леонидович Пастерна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0–1960 ○ 자연사

《닥터 지바고》와 거부된 노벨상의 시인

《닥터 지바고》 사건은 출판·국제정치·작가의 생존이 한 작품을 둘러싸고 충돌한 장면이다.

러시아 시와 번역의 거장이자 소설 《닥터 지바고》의 작가다. 이탈리아에서 먼저 출간된 소설과 1958년 노벨문학상은 소련 당국의 격렬한 비난을 불렀고, 그는 압력 아래 수상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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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첫 시집 《구름 속의 쌍둥이》 발표
  • 1957《닥터 지바고》 이탈리아에서 첫 출간
  • 1958노벨문학상 수상 뒤 압력 아래 거부

드미트리 안드레예비치 푸르마노프

Дмитрий Андреевич Фурман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26 ○ 뇌막염

차파예프를 신화로 만든 정치위원 출신 작가

1920년 6월 베르니 수비대 봉기 때, 푸르마노프는 반란군과 직접 협상에 나서 시간을 벌었다. 반란군 지휘관이 그의 목숨을 위협하는 순간에도 그는 자리를 뜨지 않았고, 그동안 충성 부대가 도착해 무혈 진압에 성공했다.

차파예프 사단 정치위원 출신 작가. 소설 《차파예프》(1923)는 혁명적 영웅 서사의 전범이 되었고, 1934년 바실리예프 형제의 영화로 각색되어 소비에트 대중문화의 기념비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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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모스크바 대학교 문헌학부 수학
  • 1914–1917제1차 세계대전 위생병 · 준위 복무
  • 1917이바노보-보즈네센스크 소비에트 부의장
  • 1919제25소총사단 정치위원 (차파예프 휘하)
  • 1919–1920투르케스탄 전선 정치부장 · 세미레치예 RVS 대표
  • 1920쿠반 상륙부대 정치위원, 울라가이 상륙 격퇴 — 적기훈장 수훈
  • 1923소설 《차파예프》 출간
  • 1924–1925MAPP(모스크바 프롤레타리아 작가 협회) 서기
  • 1925소설 《먀테시》(반란) 출간

오십 에밀리예비치 만델슈탐

Осип Эмильевич Мандельштам
작가·예술가 소련 폴란드 1891–1938 ✕ 옥사

기억으로 살아남은 시인

「러시아에서만 시가 존중받는다—시 때문에 사람이 죽는다. 시가 살인의 동기인 나라가 또 어디 있나?」 아내 나데즈다의 회고록 『희망, 희망을 거슬러』에 기록된, 스탈린 시대 시인의 운명을 응축한 말.

아크메이즘의 핵심 시인이자 산문가로, 스탈린 체제의 언어와 공포를 시에 새겼다. 체포와 유배 뒤 다시 체포되어 극동 수용소로 보내졌고, 아내와 친구들이 암기해 지킨 시편들보다 먼저 수용소 이송 중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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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시집 『돌』 발표
  • 1920년대시·산문·번역 활동
  • 1934–1937체포와 보로네시 유배
  • 1938재체포, 극동 수용소 이송 중 사망

미하일 아파나시예비치 불가코프

Михаил Афанасьевич Булгак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40 ○ 병사

출판되지 않은 악마의 작가

1930년, 출판이 모두 막히자 『거장과 마르가리타』 초고를 벽난로에 던졌다. 훗날 소설 속 악마는 불탄 원고를 꺼내며 말한다. '원고는 타지 않는다.' 불가코프는 죽을 때까지 다시 썼고, 결국 그 말은 현실이 되었다.

의사 출신의 소설가·극작가로, 소비에트 일상의 관료제와 공포를 환상과 풍자로 비틀었다. 희곡이 금지되고 출판 길이 막힌 채 『거장과 마르가리타』를 죽을 때까지 고쳤으며, 이 소설은 사후 검열본으로 먼저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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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19의사로 복무
  • 1921모스크바로 이주, 작가 활동
  • 1925–1929소설·희곡 발표과 검열
  • 1928–1940『거장과 마르가리타』 집필

세르게이 세르게예비치 프로코피예프

Сергей Сергеевич Прокофье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53 ○ 뇌출혈

혁명과 이민과 귀환을 가로지른, 20세기 소비에트 음악의 거장

「작곡가는 시인·조각가·화가와 마찬가지로 인간과 인민을 위해 봉사해야 한다. 인간의 삶을 아름답게 꾸미고 지켜내야 한다.」 — 1951년 수필 「음악과 삶」에서

혁명 후 18년간 서방에서 활동하다 1936년 귀환한 작곡가. 『로미오와 줄리엣』, 『피터와 늑대』, 『알렉산드르 넵스키』로 소비에트 모더니즘을 구축했고, 1948년 형식주의 공격에도 창작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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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4–1914페테르부르크 음악원에서 림스키코르사코프·랴도프 등에게 사사, 작곡과 피아노로 졸업
  • 1914–1918『스키타이 모음곡』, 『고전 교향곡』, 제1바이올린 협주곡 발표 — 러시아 모더니즘의 기수로 부상
  • 1918–1936미국·독일·프랑스에서 망명 활동 — 디아길레프와 협업, 『세 개의 오렌지에 대한 사랑』, 제3피아노 협주곡, 『방탕한 아들』 발표
  • 1936소련으로 영구 귀환 — 『피터와 늑대』 초연, 『로미오와 줄리엣』 전막 초연
  • 1938–1945예이젠시테인 영화 『알렉산드르 넵스키』·『이반 뇌제』 음악, 오페라 『전쟁과 평화』, 제5교향곡 발표
  •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자'로 공격받고 여러 작품 연주 금지, 이후 비밀 명령으로 철회됨
  • 1949–1953제7교향곡, 『돌꽃』, 첼로 교향협주곡 등 후기 걸작을 작곡하며 스탈린과 같은 날 사망

알렉산드르 미하일로비치 로드첸코

Александр Михайлович Родченко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56 ○ 자연사

구성주의의 창시자, 소비에트 디자인·광고·사진의 선구자

1921년, 노랑·빨강·파랑 세 개의 단색 캔버스를 전시하며 선언했다: "나는 회화를 죽음으로 몰아넣었다." 그리고 붓을 놓고 생산 예술로 향했다.

소비에트 화가·디자이너·사진가. 구성주의 창시자로서 추상 회화에서 '생산 예술'로 전환, 소비에트 디자인과 사진의 기초를 세웠다. 급진적 앵글의 사진과 마야콥스키와의 포스터로 혁명기 시각 문화를 혁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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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1–1914카잔 예술학교 수학
  • 1916모스크바로 이주, 타틀린의 〈잡화점〉 전시 참가
  • 1918–1921인민교육위원회 미술국 박물관 사무소장
  • 1920–1930Vkhutemas-Vkhutein 교수
  • 1921–1924예술문화연구소(Inkhuk) 활동, 칸딘스키 후임 의장
  • 1923–1928LEF 및 Novy LEF 잡지 아티스트, 마야콥스키와 협업
  • 1925파리 만국박람회 〈노동자 클럽〉으로 은메달 수상
  • 1928–1932사진 그룹 '10월(Oktyabr)' 창립 멤버
  • 1933벨로모르 운하 건설 촬영, 〈건설중인 소련〉 디자인
  • 1938–1942서커스 연기자 촬영 및 회화로 복귀

일리야 그리고리예비치 에렌부르크

Илья Григорьевич Эренбург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1–1967 ○ 자연사

전쟁 보도와 《해빙》 사이를 건넌 소련 작가

《해빙》이라는 제목은 작품을 넘어 스탈린 이후의 기대와 한계를 부르는 말이 되었다.

소설가·시인·저널리스트로, 제2차 세계대전기 전선 기자로 널리 읽혔다. 1954년 소설 《해빙》의 제목은 탈스탈린화기의 시대 명칭이 되었고, 그는 문화적 완화의 경계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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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적군 기관지 전선 기자
  • 1954소설 《해빙》 발표
  • 1960–1966회고록 《사람들·세월·삶》 연재
작가·예술가 소련 라트비아 1891–1979 → 수용 10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끈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의 개척자

벤야민은 『일방통행로』(1928)를 이렇게 헌정했다: 「이 거리는 아샤 라치스 거리라 이름 붙여졌다, 기술자로서 이 거리를 저자를 관통해 낸 그녀의 이름을 따서.」

라트비아 출신 연극연출가. 혁명 후 프롤레타리아 아동극을 개척했고, 1924년 벤야민을 마르크스주의로 이끌었으며 브레히트·피스카토어와 협업했다. 수용 10년 후 발미에라 극장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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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모스크바 코미사르젭스키 연극학교 수학; 라트비아 난민학교 교사
  • 1918–1920오룔 실험아동극장 설립·운영, 프롤레타리아 아동극 방법론 개척
  • 1920–1924리가 인민대학 연극스튜디오 책임자; 뮌헨에서 브레히트 『에드워드 2세』 조연출; 카프리에서 벤야민과 만남
  • 1925–1930리가·베를린·모스크바에서 프롤레타리아 연극·아동영화관·소련 영화 수출 활동
  • 1930–1935피스카토어 영화 『산타바바라 어부들의 반란』 조감독; 라트비아 국립극장 연출; 『독일 혁명연극』 출간
  • 1938–1948체포되어 카자흐스탄에서 10년간 수용·유형
  • 1950–1957발미에라 드라마극장 주임연출; 1955년 복권, 1956년 당적 회복

마리나 이바노브나 츠베타예바

Марина Ивановна Цветаев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2–1941 ✕ 자살

망명과 귀환 사이에서 시를 밀어붙인 은시대의 시인

1939년 귀환은 망명 작가가 스탈린 시대 소련으로 되돌아온 대가를 보여 준다.

러시아 은시대의 시인·산문가·번역가다. 내전 뒤 망명해 베를린·프라하·파리에서 창작했고, 1939년 소련으로 돌아온 뒤 전쟁 피난지 옐라부가에서 삶을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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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0첫 시집 《저녁 앨범》 자비 출간
  • 1922–1939베를린·프라하·파리 망명 생활
  • 1939소련 귀환
  • 1941옐라부가 피난지에서 사망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마야콥스키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Маяко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그루지야 1893–1930 ✕ 자살

혁명의 확성기이자 풍자자

1930년 1월 21일, 레닌 추도식이 열린 볼쇼이 극장에서 마야콥스키는 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의 3부를 낭독했다. 정부 관람석에 앉은 스탈린은 시인을 향해 뜨겁게 박수를 보냈다. 석 달 뒤 마야콥스키는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러시아 미래주의의 가장 큰 목소리였던 그는 혁명 뒤 ROSTA 포스터와 장시로 새 체제의 언어를 빚었다. 관료주의를 겨눈 후기 풍자는 문단과 국가의 냉대를 받았고 1930년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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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2–1915러시아 미래주의 운동과 『바지를 입은 구름』
  • 1917–1921혁명시와 ROSTA 창문 선전포스터 제작
  • 1923LEF 창간과 전위예술 활동
  • 1924장시 『블라디미르 일리치 레닌』 발표
  • 1925–1926멕시코·쿠바·미국 여행과 미국시 연작
  • 1929–1930희곡 『빈대』·『목욕탕』과 자살

미콜라 흐리호로비치 흐빌로비

Микола Григорович Хвильовий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3–1933 ✕ 자살

근대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창시자

1933년 5월 13일, 동료 작가들을 자택으로 불러 모은 뒤 권총으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유서에 이렇게 썼다: '얄로비의 체포는 한 세대 전체의 처형이다... 나는 아무것도 이해할 수 없다. 공산주의 만세, 공산당 만세.'

우크라이나 소비에트 산문의 기초를 놓은 작가. 바플리테를 이끌며 '모스크바로부터 멀리!'를 외치며 문학의 자율성을 주장했고, 스탈린의 개입으로 '흐빌로비즘' 탄압을 받았다. 대표작 「나」, 『멧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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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1919볼셰비키 지하운동 참여, 적군 합류
  • 1919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21하르키우로 이주, 문학 활동 시작
  • 1922–1923『푸른 에튀드』, 「나(로맨티시즘)」 발표
  • 1925–1928바플리테(VAPLITE) 주도, 『체르보니 실랴흐』 편집
  • 1926팸플릿 선언으로 '흐빌로비즘' 공세 촉발
  • 1927『멧도요』(발트슈네피) 출간
  • 1930프롤리트프론트 조직, 곧 해체

보리스 안드레예비치 필냐크

Борис Андреевич Пильня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4–1938 ✕ 처형

혁명의 혼돈을 쓴 작가

빅토르 세르주가 찾아왔을 때 필냐크는 입을 비틀며 외쳤다. '그가 무려 50군데나 고치라고 했다! 아, 제약 없이 글을 쓸 수만 있다면!'

혁명 이후 러시아의 폭력과 혼돈을 파편적인 문체로 쓴 소설가였다. 『벌거숭이 해』로 명성을 얻었지만, 군 지도자의 죽음을 암시한 작품과 해외 교류는 그를 의심의 대상으로 만들었고 결국 대숙청 속에서 처형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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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21혁명기 단편소설 발표
  • 1922『벌거벗은 해』 발표
  • 1926『꺼지지 않은 달 이야기』 발표와 논란
  • 1926–1927일본 방문 뒤 『일본 태양의 뿌리』 집필
  • 1929–1930『마호가니』와 『볼가는 카스피해로 흐른다』 발표
  • 1931–1933미국 방문 뒤 『O.K.』(『미국 소설』) 발표
  • 1935–1936미코얀 의뢰로 세르게이 벨랴예프와 『고기』 공동 집필
  • 1937–1938체포, 재판과 처형

이사크 에마누일로비치 바벨

Исаак Эммануилович Бабель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4–1940 ✕ 처형

너무 많이 보고 너무 적게 쓴 단편의 명수

“나는 새로운 장르의 대가가 되었다 — 침묵의 장르의.” — 제1차 작가대회(1934)

오데사 유대인 지구의 이야기꾼으로, 부됸니 기병대를 따라 폴란드 전선을 달리며 『기병대』를 썼다. 혁명의 잔혹을 너무 정직하게 그려 부됸니가 격노했다. 예조프의 아내와의 인연까지 겹쳐 1939년 체포되었고, 원고를 돌려달라는 말을 남긴 채 1940년 총살당했다. 압수된 원고들은 끝내 발견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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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926오데사 이야기와 『기병대』로 소비에트 문학의 스타가 되다
  • 1934작가대회에서 '침묵의 장르' 발언
  • 1939체포 — 원고 전량 압수
  • 1940총살, 1954년 복권

알렉산드르 페트로비치 도브젠코

Александр Петрович Довженко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894–1956 ○ 심장마비

〈대지〉의 시인: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서정적 몽타주로 노래한 소비에트 영화의 거장

나는 아직도 장례식을 볼 수가 없다. 그러나 장례식은 내 모든 시나리오와 내 모든 영화를 관통한다… 삶과 죽음의 문제가 어린 시절부터 내 상상력을 사로잡았기 때문이다.

우크라이나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소비에트 무성영화의 서정적 몽타주 미학을 개척한 영화감독. '우크라이나 3부작'(특히 세계 영화사 최고작 중 하나로 꼽히는 〈대지〉(1930))으로 우크라이나의 대지와 민중을 시적으로 형상화했으며, 스탈린의 후원과 통제 사이에서 활동하며 키이우 도브젠코 영화 스튜디오의 기초를 세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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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데뷔작 〈바샤 개혁가〉·〈사랑의 열매〉 연출
  • 1928–1930'우크라이나 3부작' 〈즈베니고라〉·〈무기고〉·〈대지〉 발표 — 서정적 몽타주 미학 확립
  • 1932첫 유성영화 〈이반〉 발표 — 드네프르 수력발전소 건설을 다룬 산업 서사시
  • 1935〈아에로그라드〉 발표, 레닌훈장 수훈
  • 1939–1941〈쇼르스〉 발표, 스탈린상 1급 수상
  • 1943–1945종군기자 겸 다큐멘터리 감독으로 〈우리의 소비에트 우크라이나를 위한 전투〉 등 제작
  • 1948〈미추린〉 발표, 두 번째 스탈린상 수상
  • 1950–1956모스필름에서 활동, 유작 〈바다의 시〉 시나리오 집필 중 심장마비로 사망

미하일 미하일로비치 조셴코

Михаил Михайлович Зощенко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연방 러시아 1894–1958 ○ 심부전으로 사망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일상을 해부한 풍자의 대가

「나는 어떤 운명이든 지금 내가 가진 이 운명보다는 받아들이겠다」 — 1954년 작가동맹 회의에서, 복권되었으나 다시 공격받던 자리에서.

미하일 조셴코는 소비에트 연방에서 가장 널리 읽힌 풍자 작가로, 혁명 이후 평범한 시민의 어눌한 목소리로 서술되는 스카즈 기법을 통해 공동 아파트, 관료주의, 혁명적 이상과 일상의 괴리를 포착했다. 세라피온 형제단의 핵심 멤버였던 그는 1920~1930년대에 약 1억 부의 책을 판매하며 러시아 문학사에서 가장 대중적인 작가 중 한 명이 되었다. 1946년 안나 아흐마토바와 함께 안드레이 즈다노프의 공개 비난을 받고 작가동맹에서 제명되어 빈곤에 내몰렸으며, 이는 전후 스탈린주의 문화 탄압의 상징적 사건이 되었다. 스탈린 사후 복권되었으나 자신의 작품을 철회하기를 거부했고, 1958년 무명 속에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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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5–1917제1차 세계대전 참전, 장교로 복무하며 다섯 차례 훈장 수훈
  • 1919붉은 군대 복무, 건강 악화로 제대
  • 1921세라피온 형제단 가입, 문학 활동 시작
  • 1922–1930s풍자 단편소설로 소비에트 최고 인기 작가로 부상, 약 1억 부 판매
  • 1939노동적기훈장 수훈
  • 1943『해 뜨기 전에』 연재 시작, 곧 중단 명령
  • 1946즈다노프 비판과 함께 작가동맹 제명, 출판 금지
  • 1953스탈린 사후 작가동맹 재가입

세르게이 예세닌

Сергей Есени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895–1925 ✕ 자살

농민의 기억과 혁명의 균열을 노래한 시인

그는 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나 자신의 방식으로” 받아들였다고 회고했다.

세르게이 예세닌은 농민 가정에서 자라 러시아 농촌의 기억과 구전적 이미지에 현대적 서정성을 부여한 시인이었다. 그는 10월혁명을 농민의 관점에서 지지했지만, 산업화와 국가 권력이 자신이 꿈꾼 사회주의와 어긋난다고 느끼며 점차 환멸을 드러냈다. 이미지니즘을 이끈 대표적 시인으로서 그의 작품은 혁명기의 해방감과 도시화가 낳은 상실을 함께 기록했다. 1925년 12월 레닌그라드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고, 그 죽음은 신경제정책기 문화의 어두운 긴장을 상징하는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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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4첫 시 「자작나무」 발표
  • 1915페트로그라드 문단에서 등단
  • 1916첫 시집 『라두니차』 출간
  • 1919이미지니즘 선언 참여
  • 1922–1923아이제도라 덩컨과 유럽·미국 순회
  • 1924이미지니즘 그룹 해산 선언
  • 1925『안나 스네기나』 발표
  • 192512월 레닌그라드에서 사망

라리사 미하일로브나 레이스네르

Лариса Михайловна Рейснер
작가·예술가 소련 폴란드 1895–1926 ○ 장티푸스

혁명의 발키리. 시인, 정찰대원,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

카잔 함락 후 농민 여인으로 변장하고 백군 점령지에 잠입했다가 일본 정보장교에게 체포되었다. 심문 도중 방심한 문틈으로 빠져나와 사라졌다. — 트로츠키, 『나의 생애』

페테르부르크 은세기 문단에서 출발한 볼셰비키 작가·외교관·정치위원. 아크메이즘의 미학에서 출발해 혁명의 현장을 직접 목격하고 기록하는 독보적인 문학적 르포의 창시자가 되었다. 내전기에는 해군 참모부 최초의 여성 정치위원으로 복무했고, 1923년 함부르크 봉기에 코민테른 요원으로 참여했으며, 아프가니스탄 외교 사절단에서 활약했다. 1926년 30세에 장티푸스로 사망할 때까지, 그녀는 혁명의 파토스를 문학으로 옮기는 데 일생을 바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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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3희곡 『아틀란티스』로 문단 데뷔 (알마나크 『시포브니크』)
  • 1915–1916반전 문예지 『루딘』 편집, 구밀료프·만델슈탐 등과 교류
  • 1918제5군 정찰분견대 정치위원, 백군 점령 카잔에 잠입 정찰
  • 1918–1919해군 참모부 정치위원 — 트로츠키가 임명한 최초의 여성
  • 1919–1920볼가-카스피 소함대 및 발트함대 정치국에서 복무
  • 1921아프가니스탄 주재 소비에트 외교 사절단 참여, 후일 『아프가니스탄』(1925) 출간
  • 1923코민테른 요원으로 함부르크 봉기 참여, 『바리케이드 위의 함부르크』(1924) 집필
  • 1925『석탄, 철, 그리고 살아 있는 사람들』 및 『데카브리스트의 초상』 출간

로베르트 페트로비치 에이데만

Роберт Петрович Эйдеман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라트비아인 1895–1937 ✕ 총살

투하쳅스키 재판의 피고인이 된 라트비아 출신 내전 영웅

라트비아 출신의 소비에트 군사 지휘관이자 작가로, 내전에서 제13군을 지휘하며 카홉카 교두보 방어에 결정적 역할을 했다. 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과 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을 역임하며 적군 간부 양성과 민간 국방훈련 체계를 구축했다. 1937년 5월 체포되어 투하쳅스키 사건의 피고인 8인 중 한 명으로 6월 12일 총살됐으며, 1957년 복권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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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키예프 군사학교 졸업, 16시베리아 예비연대 소위
  • 1917–1918중앙시베리아 집행위원회 부의장, 볼셰비키 입당
  • 1918–1920내전: 제16·41·46소총사단장, 제13군 사령관, 카홉카 방어
  • 1924–1925시베리아 군관구 사령관
  • 1925–1932프룬제 군사아카데미 교장 겸 군사위원
  • 1932–1937오소아비아힘 중앙평의회 의장
  • 1937체포(5.22), 투하쳅스키 재판 피고, 총살(6.12)

지가 아르카디예비치 베르토프

Дзига Аркадьевич Вертов
작가·예술가 소련 폴란드 1896–1954 ○ 위암

〈키노-아이〉의 창시자: 카메라가 인간의 눈보다 더 완전한 진실을 포착한다고 믿은 다큐멘터리 혁명가

“나는 노동계급의 종이다. 강제가 아니라 의식적으로, 자발적으로 내 모든 힘을 남김없이 이 계급에 바친다.” — 지가 베르토프

소련 다큐멘터리의 창시자이자 키노-아이 이론가. 〈카메라를 든 사나이〉(1929)는 《사이트 앤드 사운드》 선정 역대 최고 다큐멘터리로, 이중 노출·분할 화면 등 현대 영화 문법의 원형을 제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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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모스크바 영화위원회 뉴스릴 편집자로 활동 시작 — 키노네델랴 연감 제작
  • 1919데뷔작 〈혁명의 기념일〉 — 혁명 뉴스릴을 장편 다큐멘터리로 편집
  • 1922–1924키노-프라우다 뉴스릴 연작 제작, '키노키' 그룹 결성, 키노-아이 선언 발표
  • 1924–1926〈키노-아이〉·〈소비에트 장난감〉·〈세계의 6분의 1〉 발표 — 실험적 다큐멘터리 언어 확립
  • 1929〈카메라를 든 사나이〉 발표 — 무대·자막 없는 '영화적 글쓰기'의 극한 실험, 역대 최고 다큐멘터리로 평가
  • 1930–1934소련 최초 사운드 다큐 〈돈바스의 교향곡〉, 〈레닌에 관한 세 편의 노래〉로 《프라우다》 극찬
  • 1935적성훈장 수훈 — 소련 영화 발전의 특별 공로 인정
  • 1937–1954〈자장가〉 상영 5일 만에 검열 철회, 이후 모든 장편 기획 거부 — CSDF에서 《오늘의 뉴스》 55편 편집

일리야 아르놀도비치 일리프

Илья Арнольдович Ильф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7–1937 ○ 결핵

『열두 개의 의자』의 공동 저자, NEP 시대 소비에트 사회의 모순을 포착한 풍자 작가

미국 횡단 중 만성 결핵이 악화되어 각혈을 하면서도 "아무 일 없다, 계속 가자"며 노트에 풍경을 기록했다.

예브게니 페트로프와 『열두 개의 의자』『황금 송아지』를 함께 쓴 소비에트 풍자 작가.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통해 네프 시기 관료주의와 소시민적 욕망을 예리한 유머로 그려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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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오데사에서 은행 회계원의 3남으로 출생 (본명: 예히엘-레이프 파인질베르크)
  • 1913기술학교 졸업 후 제도사, 전화 교환수, 군수공장 선반공
  • 1919–1921적군 복무, 데니킨군과 교전; 이후 식량공급 기관 회계원
  • 1923모스크바 이주, 철도 노동자 신문 《구도크》 기자
  • 1927예브게니 페트로프와 공동 집필 시작
  • 1928『열두 개의 의자』 발표 — 오스타프 벤데르 탄생
  • 1931『황금 송아지』 발표
  • 1935–1936페트로프와 미국 자동차 횡단, 『단층집 미국』 집필
  • 19374월 13일 모스크바에서 결핵으로 사망, 노보데비치 묘지

미하일 예피모비치 콜초프

Михаил Ефимович Кольц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8–1940 ✕ 처형

소비에트 저널리즘의 가장 찬란했던 목소리, 헤밍웨이가 카르코프로 형상화한 인물

헤밍웨이는 프라우다 특파원을 이렇게 기억했다: "내가 만난 가장 지적인 인간... 우스꽝스러워 보였지만 그 누구보다도 두뇌와 내면의 위엄, 겉으로 드러나는 뻔뻔함과 유머를 지녔다."

오고뇨크·크로코딜 등 주요 소비에트 잡지를 이끈 기자. 스페인 내전 특파원으로 『스페인 일기』를 남겼고, 헤밍웨이 소설 속 카르코프의 모델이 된 인물. 1938년 체포, 1940년 총살 후 1954년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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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38『오고뇨크』 편집장
  • 1925–1938저널-가제타 연합(주르가즈) 책임자
  • 1922–1938『프라우다』 특파원
  • 1934–1938『크로코딜』 편집장
  • 1932–1938『자 루베좀』 창간자 겸 편집자
  • 1936–1937스페인 내전 프라우다 특파원 겸 소련 정치 대리인
  • 1934–1938소비에트 작가동맹 외국부장
  • 1938러시아 SR 최고소비에트 대의원

세르게이 미하일로비치 예이젠시테인

Сергей Михайлович Эйзенштейн
작가·예술가 소련 라트비아 1898–1948 ○ 심장마비

〈몽타주의 대가〉: 혁명적 영화 언어를 창안하여 세계 영화의 문법을 바꾼 거장

혁명은 내 인생에서 가장 소중한 것을 내게 주었다 — 혁명이 나를 예술가로 만들었다. 혁명이 없었다면 나는 결코 전통을 '산산조각내지' 못했을 것이다.

〈전함 포툠킨〉으로 세계 영화의 문법을 바꾼 소련의 영화감독이자 몽타주 이론가. 혁명기 아방가르드에서 스탈린기 역사 서사시까지 시대와 함께 영화 언어를 탐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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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4데뷔작 〈파업〉 발표 — '어트랙션 몽타주'를 실험한 혁신적 영화
  • 1925〈전함 포툠킨〉 발표 — 오데사 계단 시퀀스로 세계 영화사에 기념비적 족적
  • 1927–1929〈10월〉과 〈낡은 것과 새로운 것〉으로 지적 몽타주 이론 심화
  • 1929–1932유럽·할리우드·멕시코 체류 — 미완의 영웅서사시 〈멕시코 만세!〉 촬영
  • 1935러시아 공화국 공훈예술가 칭호 수여
  • 1938〈알렉산드르 넵스키〉 발표 — 스탈린상 1급·레닌훈장 수상, 예술학 박사 학위 취득
  • 1940모스필름 예술감독 취임, 볼쇼이 극장에서 바그너의 〈발퀴레〉 연출
  • 1944–1945〈이반 뇌제〉 1·2부 완성 — 1부로 두 번째 스탈린상 1급 수상

안드레이 플라토노비치 플라토노프

Андрей Платонович Платон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9–1951 ○ 병사

유토피아의 폐허를 쓴 엔지니어

1932년, 고리키의 집에서 스탈린은 소련 작가들에게 "인간 영혼의 엔지니어"라는 말을 남기고 곧장 물었다. "플라토노프는 여기 있습니까?" 1년 전 스탈린 자신이 파멸시킨 작가를 맨 먼저 찾은 것이다. 그는 그 자리에 없었다.

기관사·기술자였던 그는 공산주의의 약속을 가장 낯설고 황량한 문장으로 쓴 소설가였다. 집단화와 개발의 언어를 안에서부터 흔든 『구덩이』와 『체벤구르』는 생전에 제대로 출판되지 못했고, 그의 작품은 오랫동안 검열 속에 묻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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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6기술자·기자·시인으로 활동
  • 1927–1929『체벤구르』와 『구덩이』 집필
  • 1930년대검열과 출판 배제
  • 1942–1945전쟁 특파원 활동

레프 블라디미로비치 쿨레쇼프

Лев Владимирович Кулеш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899–1970 ○ 자연사

〈쿨레쇼프 효과〉의 창안자, 편집이 촬영보다 의미를 만든다는 것을 증명한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아버지

“우리는 영화를 만든다 — 쿨레쇼프는 영화를 만들었다.” — 1929년 제자들이 스승의 저서 《영화의 예술(나의 경험)》 서문에 바친 헌사

소련 영화감독·이론가·교육자. '쿨레쇼프 효과'로 몽타주의 심리적 원리를 입증했고, 1919년 세계 최초 영화학교(VGIK)를 창설해 에이젠슈테인·푸돕킨으로 이어지는 소비에트 몽타주 학파의 토대를 놓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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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한존코프 영화사에서 예브게니 바우에르의 미술감독으로 영화계 입문
  • 1918첫 연출작 〈프라이트 기술사의 계획〉 — 초기 몽타주 실험을 담은 데뷔작
  • 1919국립영화학교(현 VGIK) 설립, 세계 최초의 체계적 영화 교육 시작
  • 1920〈붉은 전선에서〉 — 다큐와 극을 결합한 최초의 소비에트 영화, 쿨레쇼프 워크숍 결성
  • 1924〈볼셰비키 나라의 미스터 웨스트〉 — 쿨레쇼프 집단의 첫 장편으로 소비에트 영화의 국제 경쟁력 입증
  • 1939VGIK 교수 임명, 예술학 후보자 학위 취득
  • 1941저서 〈영화 연출의 기초〉 출간 — 전 세계 영화학교의 표준 교재
  • 1944–1969VGIK 학장(1944), 이후 연출학과장으로 25년간 후진 양성; 노동적기훈장·레닌훈장·인민예술가 수훈

미하일 일리치 롬

Михаил Ильич Ромм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901–1971 ○ 심장마비로 사망

스탈린을 위해 레닌 신화를 창조하고, 해빙기에는 파시즘을 해부한 감독

〈10월의 레닌〉 시나리오 작업 중 머물던 모스필름 부감독의 아파트가 NKVD에 급습당하는 현장을 목격했다. 동료가 체포되어 총살되는 와중에도 그는 제시간에 영화를 완성해 스탈린에게 개인 시사회를 올렸다.

미하일 롬은 스탈린의 직접 주문으로 〈10월의 레닌〉(1937)과 〈1918년의 레닌〉(1939)을 연출하여 수십 년간 지속될 레닌의 영화적 정전을 창조한 감독이다. 이르쿠츠크의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조각가로 출발했으나 영화로 전향, 모스필름에서 5차례 스탈린상을 수상하며 소비에트 사운드 영화의 기초를 닦았다. 스탈린 사후에는 4천만 명 이상이 관람한 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1965)으로 나치즘의 작동 원리를 해부하며 해빙기 지식인의 비판정신을 대변했고, VGIK 교수로서 타르콥스키·슉신·미할코프 등 차세대 감독들을 양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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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VKHUTEIN 조각과 졸업, 조각가·번역가로 활동
  • 1934감독 데뷔작 〈팡파르 부인〉 발표
  • 1937–1939〈10월의 레닌〉·〈1918년의 레닌〉 연출, 스탈린상 1급 수상 (1941)
  • 1940–1947모스필름 예술감독·영화배우극장 감독
  • 1948–1962VGIK 배우·감독 워크숍 지도교수 (1962년부터 교수)
  • 1962〈1년 중 9일〉 연출, 바실리예프 형제상 수상 (1966)
  • 1965다큐멘터리 〈보통 파시즘〉 발표, 4천만 명 이상 관람
  • 1971〈그래도 나는 믿는다〉 작업 중 사망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01–1986 ○ 자연사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셰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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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올가 그리고리예브나 샤투놉스카야

Ольга Григорьевна Шатуновская
작가·예술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1–1990 ○ 자연사

스탈린의 범죄를 끝까지 추적한 흐루쇼프의 수석 조사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당신은 제가 인민의 적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 유형지에서 흐루쇼프에게 보낸 단 한 줄의 편지, 1954년

1916년 15세로 입당한 구볼셰비키. 흐루쇼프 시기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으로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학살이 스탈린의 조작임을 64권으로 입증했다. 콜리마 8년을 견디고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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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5세로 RSDLP(b) 입당
  • 1918바쿠 코뮌에서 샤우먄 비서; 터키군에 사형 선고, 극적 사면
  • 1918–20자캅카스 지하운동, 레닌에게 밀서 전달
  • 1920–37바쿠·브랸스크·모스크바 당 간부, 모스크바 시당 조직부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46체포, 8년형 — 콜리마 수용소
  • 1949–54재체포, 무기한 유형 — 크라스노야르스크
  • 1956–62KPK 위원,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 —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조작 규명
  • 1962스탈린의 오흐란카 협력 의혹 공개 요구, 흐루쇼프의 거부로 은퇴

예브게니 페트로비치 페트로프

Евгений Петрович Петр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2–1942 ✕ 비행기 추락사

일리프와 함께 『열두 개의 의자』를 쓴 풍자 작가이자 『오고뇨크』 편집장

세바스토폴 취재 원고의 마지막 줄: "도시가 버텨낼지도 모른다. 나는 이미 기적을 믿는 데 익숙해졌다."

일리야 일리프와 함께 소비에트 풍자문학의 대표작 『열두 개의 의자』(1928)와 『황금 송아지』(1931)를 써서 사기꾼 오스타프 벤데르를 탄생시킨 작가. 본명은 예브게니 카타예프로,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이며, 오데사 형사국 수사관으로 일한 경험이 그의 초기 글쓰기에 독특한 현장감을 불어넣었다. 1935년 일리프와 함께 미국을 자동차로 횡단하며 『단층집 미국』을 집필했고, 일리프 사후에는 잡지 『오고뇨크』 편집장으로 출판계를 이끌었다. 독소전쟁 발발 후 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을 취재하고 귀환하던 중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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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2오데사에서 교사의 차남으로 출생 (본명: 예브게니 카타예프), 작가 발렌틴 카타예프의 동생
  • 1920–1923오데사 형사국 수사관 — 40건 이상 수사, 소꿉친구였던 도적 코자친스키 체포
  • 1923–1926모스크바 이주, 『크라스니 페레츠』 기자, 후에 『구도크』로 옮기며 필명 '페트로프' 채택
  • 1927일리야 일리프와 공동 집필 시작
  • 1928–1931『열두 개의 의자』와 『황금 송아지』 발표 — 오스타프 벤데르 신화 창조
  • 1935–1936일리프와 미국 자동차 횡단 (25개 주, 16,000km), 『단층집 미국』 집필
  • 1938–1941『오고뇨크』 편집장; 1939년 레닌 훈장·전연방 공산당 입당
  • 1942종군기자로 세바스토폴 포위전 취재, 귀환 중 7월 2일 비행기 추락으로 순직

조지 오웰

George Orwell
작가·예술가 영국 영국 1903–1950 ○ 결핵 · 런던

POUM 민병대에서 총상을 안고 돌아와 전체주의의 언어를 해부한 민주적 사회주의자

『카탈루냐 찬가』, 1936년 12월 바르셀로나에 도착한 첫인상: 「내가 노동계급이 안장에 올라앉은 도시에 있어 본 것은 그때가 처음이었다.」

본명 에릭 아서 블레어. 버마 제국경찰 5년과 파리·런던 밑바닥 생활의 르포로 작가가 되었고, 1936년 12월 스페인으로 건너가 영국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에 들어가 아라곤 전선에서 넉 달을 보내다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을 입었다. 요양 중 겪은 1937년 5월 바르셀로나 시가전과 뒤이은 POUM 불법화는 그를 소련식 공산주의와 완전히 갈라서게 했고, 그 자신이 「트로츠키주의자」로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국경을 넘었다. 그 경험을 적은 『카탈루냐 찬가』는 출간 반년 동안 683부밖에 팔리지 않았다. 오웰은 죽을 때까지 스스로를 민주적 사회주의자로 규정했으며, 『동물농장』과 『1984』는 혁명이 새로운 지배로 굳는 과정과 그것을 떠받치는 언어를 해부한 작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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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3영국령 인도 모티하리에서 식민지 아편국 관리의 아들 에릭 아서 블레어로 출생
  • 1917–1921이튼 칼리지 장학생
  • 1922–1927인도 제국경찰로 버마 근무, 제국 통치에 대한 환멸 끝에 사직
  • 1928–1932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접시닦이·교사·서점 점원
  • 1933『파리와 런던의 밑바닥 생활』 출간, 조지 오웰이라는 필명을 쓰기 시작
  • 1936잉글랜드 북부 탄광지대 취재로 『위건 부두로 가는 길』 집필, 에일린 오쇼너시와 결혼
  • 1936.12바르셀로나 도착, 독립노동당(ILP)의 소개로 POUM 민병대 입대
  • 1937.01–05아라곤 전선 알쿠비에레·우에스카 복무, 5월 우에스카에서 목에 저격 총상
  • 1937.05휴가 중 바르셀로나 5월 사태를 겪으며 POUM 건물을 경비
  • 1937.06POUM 불법화 후 수배되어 아내와 함께 프랑스로 탈출
  • 1938『카탈루냐 찬가』 출간, 반년간 683부 판매
  • 1941–1943BBC 동방부에서 인도 대상 방송 제작
  • 1945『동물농장』 출간
  • 1949『1984』 출간
  • 1950.01.21런던의 병원에서 결핵으로 사망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자볼로츠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Заболоцкий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903–1958 ○ 심장마비

아방가르드에서 굴라그를 거쳐 후기 고전적 서정으로 나아간 시인

이 황량한 시대의 사막에, 전쟁과 화재와 맹렬한 파괴 끝에, 우리 고대 영광의 이 외롭고 무엇과도 닮지 않은 성당이 서 있다.

니콜라이 자볼로츠키는 1928년 다닐 하름스, 알렉산드르 브베덴스키와 함께 아방가르드 문학 그룹 오베리우(OBERIU)를 공동 창립한 소비에트 시인이자 번역가이다. 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1929)은 NEP 시기 소비에트의 그로테스크한 일상을 부조리한 이미지와 풍자로 그려내 혁명 후 러시아 시의 이정표가 되었다. 1938년 대숙청 때 반소비에트 작가조직 결성 혐의로 체포되어 5년간 수감되었고, 유형 중 중세 서사시 『이고리 원정기』의 탁월한 번역을 완성했다. 전후 모스크바로 복귀한 후에는 자연과 인간의 형이상학적 관계를 숙고하는 고전적 서정시로 전환하여 튜체프에 비견될 만한 원숙한 경지에 이르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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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오베리우(OBERIU) 공동 창립
  • 1929첫 시집 『기둥들』(Столбцы) 출간
  • 1933서사시 「농업의 승리」 발표로 비판 공격 촉발
  • 1937두번째 시집 출간
  • 1938–1943대숙청으로 체포·수감, 유형 중 『이고리 원정기』 번역
  • 1946소비에트 작가동맹 복귀, 모스크바 정착
  • 1948세번째 시집 출간
  • 1957마지막 생전 시집 및 연작 「마지막 사랑」 발표

알렉산드르 알프레도비치 베크

Александр Альфредович Бе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3–1972 ○ 암

《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의 작가, 스탈린 시대 관료제를 그린 금서의 저자

임종을 앞둔 베크의 병실에 금서 『새로운 임명』 독일어판이 몰래 전해졌고, 더 이상 읽을 수 없던 그는 책을 베개 곁에 놓아 달라고 한 뒤 표지를 쓰다듬었다.

사라토프에서 군의관의 아들로 태어나 열여섯에 붉은 군대에 자원입대, 사단 신문에서 기자 생활을 시작했다. 대조국전쟁에서 모스크바 민병대에 참가한 뒤 종군기자로 활약하며, 판필로프 사단의 방어전을 기록한 《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1944)를 집필했다: 이 작품은 피델 카스트로체 게바라의 애독서가 된 소비에트 전쟁문학의 고전이다. 전후에는 금속노동자와 기술자의 세계를 그린 작품들을 발표했다. 그러나 스탈린 치하 중공업 관료제를 소설화한 《새로운 임명》(1965)은 당대에 출판 금지되어 1986년에야 소련에서 공개되었다. 당의 문학 통제 아래에서도 독자적인 시선을 견지한 작가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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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붉은 군대 자원입대, 우랄 전선에서 부상; 사단 신문 기자로 활동 시작
  • 1931고리키 주도 '공장·공장사' 편집부 참여
  • 1934첫 소설 《쿠라코》 발표
  • 1941–1945모스크바 민병대 참가, 종군기자로 베를린 입성
  • 1944《볼로콜람스크 고속도로》 발표
  • 1956소설 《재능(베레시코프의 생애)》 발표
  • 1965《새로운 임명》 완성 — 소련 내 출판 금지
  • 1971《새로운 임명》 프랑크푸르트에서 첫 출판

니콜라이 알렉세예비치 오스트롭스키

Николай Алексеевич Остро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계 1904–1936 ○ 병사, 32세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의 저자, 사회주의 리얼리즘의 전범

인생은 단 한 번 주어진다. 죽을 때 '내 모든 삶과 힘을 인류 해방 투쟁이라는 가장 숭고한 대의에 바쳤다'고 말할 수 있도록 살라.

13세에 볼셰비키 활동가가 되고 코톱스키 여단의 붉은군대 기병으로 복무했던 니콜라이 오스트롭스키는, 25세에 강직성 척추염으로 시력과 보행 능력을 잃은 후 자서전적 소설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1932~1934)를 집필했다. 받아쓰기와 필사틀로 완성된 이 작품의 주인공 파벨 코르차긴은 소련·중국·조선 공산주의자 세대의 도덕적 전범이 되었다. 3,640만 부 판매로 러시아어 최다 판매 도서이자 세계적 베스트셀러인 이 소설로 그는 1935년 레닌 훈장을 받았고, 이듬해 32세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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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셰페톱카 볼셰비키 지하운동 연락원
  • 1919콤소몰 가입 및 붉은군대 자원입대, 코톱스키 기병여단 복무
  • 1921–1923키예프 철도공장 전기공·콤소몰 서기
  • 1924당 가입, 베레즈디프·이자슬라프 콤소몰 지구위원회 서기
  • 1930–1934시력·보행 상실 상태에서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 집필
  • 1935레닌 훈장 수훈
  • 1936『폭풍 속에서 태어난 사람들』 집필 착수, 완성 전 사망

표도르 그리고리예비치 우글로프

Фёдор Григорьевич Угл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인 1904–2008 ○ 심장마비로 사망

반알코올 캠페인의 핵심 선전가였던 최고령 집도 외과의사

레닌그라드의 한 교수가 젊은 우글로프의 수술 보고를 듣고 '이건 뮌하우젠 남작의 허풍이다'라고 말했다가, 직접 수술을 검토한 뒤 자신의 생각을 철회했다.

시베리아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사라토프 의대를 졸업하고, 겨울전쟁과 900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했다. 식도·종격동·폐·심장 수술을 개척했으며, 102세까지 수술실에 서서 기네스 세계기록에 올랐다. 1985년 고르바초프의 반알코올 캠페인에서 '어떤 음주도 용납될 수 없으며 술 취함은 러시아 민족의 본성이 아니다'라는 주장을 전국에 유포한 핵심 선전가였고, 종신토록 금주 운동을 이끌었다. 말년에는 알코올 중독의 배후로 유대인 음모론을 제기하고 록 음악을 마약으로 분류하는 등 러시아 민족주의 우파와 결합한 과격한 주장으로 논란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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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사라토프 의대 졸업, 지역 의사
  • 1939–1945겨울전쟁과 레닌그라드 포위전에서 외과의로 복무
  • 1950–1991제1레닌그라드 의대 병원외과 제2학과장
  • 1953–2006『베스트니크 히루르기』 편집장
  • 1967소련 의학아카데미 정회원
  • 1985『환상의 포로』 출간, 반알코올 캠페인 핵심 선전가
  • 1988전인민 금주 투쟁 연합 의장
  • 1994기네스 세계기록: 최고령 집도 외과의

바실리 세묘노비치 그로스만

Василий Семёнович Гроссма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5–1964 ○ 자연사

전쟁의 현장과 전체주의의 거울을 쓴 작가

《삶과 운명》 원고 압수는 해빙기의 허용 범위가 어디에서 멈췄는지 보여 준다.

제2차 세계대전기 《붉은 별》의 종군기자로 스탈린그라드·베를린 전선을 취재했다. 전후 소설 《삶과 운명》은 나치즘과 스탈린주의의 폭력을 나란히 바라보았고, 원고는 1961년 당국에 압수되어 해외에서 먼저 출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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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1–1945《붉은 별》 종군기자
  • 1959–1960소설 《삶과 운명》 완성
  • 1961원고와 사본을 당국이 압수
  • 1980《삶과 운명》 해외 첫 출간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숄로호프

Михаил Александрович Шолох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5–1984 ○ 자연사

돈강처럼 체제 곁을 고요히 흐른 노벨상

“나는 심장이 시키는 대로 썼다. 그리고 내 심장은 당의 것이다.” (1965)

스무 살에 『고요한 돈강』을 쓰기 시작해, 내전이 코사크 마을을 찢는 풍경을 소비에트 문학에서 가장 정직하게 담았다. 너무 이른 걸작이라 대필 시비가 평생 따라붙었다. 그러나 작가는 작품과 반대로 걸었다: 당에 충성했고, 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의 피고들을 총살하지 못한 것이 아쉽다고 연단에서 말했다. 1965년 노벨상을 받았고 1984년 자기 침대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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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8–1940『고요한 돈강』 연재와 완간
  • 1933콜호스화의 참상을 스탈린에게 서한으로 직접 보고
  • 1965노벨문학상 수상
  • 1966시냐프스키-다니엘 재판 옹호 발언으로 지식인들과 결별

레프 로마노비치 셰이닌

Лев Романович Шейни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6–1967 ○ 심장마비

스탈린 시대의 수사반장, 소비에트 탐정소설의 개척자

카밀 이크라모프의 회고에 따르면, 셰이닌은 흐루쇼프 시기에도 비신스키가 살던 집을 차로 지나칠 때마다 진짜 눈물을 흘렸다고 한다.

소련 검찰청 수사국장(1935, 1939~1949)으로서 키로프 암살, 지노비예프·카메네프, 부하린·리코프·야고다 사건 등 스탈린 시대 주요 정치 수사를 지휘한 2급 국가법률고문이다. 뉘른베르크 재판에서는 로만 루덴코 수석검사의 보좌관으로 소련 검찰단에 참여했다. 동시에 《수사관의 수기》(1938)로 소비에트 탐정소설 장르를 개척했고, 영화 《엘베 강의 만남》(1949) 시나리오로 스탈린상을 수상한 작가이기도 하다. 1936년과 1951년 두 차례 체포·투옥되었으나 모두 생환했으며, 해빙기에는 《옥탸브리》 부편집장과 모스필름 편집장을 지내다 1967년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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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3–1927소련 검찰청 근무, 모스크바
  • 1927–1931레닌그라드 지방법원 수사관
  • 1931–1935소련 검찰청 특별중요사건 수사관
  • 1935, 1939–1949소련 검찰청 수사국장, 2급 국가법률고문
  • 1945–1946뉘른베르크 재판 소련 수석검사 보좌관
  • 1953–1960《옥탸브리》 편집위원·부편집장
  • 1960–1964모스필름 편집장, 소련 문화부 예술위원회 위원

드미트리 드미트리예비치 쇼스타코비치

Дмитрий Дмитриевич Шостакович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6–1975 ○ 폐암

소비에트 세기의 음악을 쓰고 두 번의 공식적 파멸을 통과한 작곡가

「나의 교향곡 대부분은 묘비명이다. 우리 민족이 죽임을 당한 모든 이들을 위한 기념비다.」 — 솔로몬 볼코프가 기록한 구술 회고에서

15개의 교향곡과 15개의 현악사중주를 남긴 20세기 최대 작곡가 중 한 명. 1926년 페트로그라드 음악원 졸업작인 제1교향곡으로 국제적 명성을 얻었고, 오페라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1934)은 초연 후 2년 만에 『프라우다』의 「음악 대신 혼란」 기사로 공격받았다. 전시 레닌그라드에서 작곡한 제7번 「레닌그라드」 교향곡은 소련 저항의 상징이 되었으나, 1948년 즈다노프의 '형식주의' 비판으로 다시 한 번 공직에서 배제되었다. 이후 교향곡, 실내악, 영화음악 등에서 소련 체제와 예술가 양심 사이의 긴장을 음악으로 증언하며 생을 마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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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1925페트로그라드 음악원에서 피아노와 작곡 전공, 제1교향곡으로 졸업
  • 1927–1936쇼팽 콩쿠르 입상, 『코』와 『므첸스크의 맥베스 부인』 발표, 국제적 주목
  • 1936『프라우다』 「음악 대신 혼란」으로 공식 비판, 제4교향곡 초연 철회
  • 1937–1948레닌그라드 음악원 교수, 제5·제7「레닌그라드」교향곡으로 명예 회복
  • 1948즈다노프 비판 — '형식주의'로 몰려 교수직 박탈, 작품 다수 발표 금지
  • 1949–1953미국 방문 평화 회의 참석, 『숲의 노래』로 스탈린상 수상, 비공식 풍자곡 『반형식주의 라요크』 작곡
  • 1957–1975소련 작곡가동맹 서기, 러시아 작곡가동맹 제1서기, 제13·14·15교향곡과 후기 사중주들 발표

로만 브란트슈테터

Roman Brandstaetter
작가·예술가 폴란드 폴란드계 1906–1987 ○ 자연사

유대교와 가톨릭의 기억을 잇고 광장의 기억을 조직한 작가

로만 브란트슈테터는 폴란드어로 시와 소설, 희곡을 쓰고 히브리어 성서와 셰익스피어를 번역한 폴란드 작가였다. 유대계 가정에서 태어나 시온주의와 동화의 문제를 탐구했으며, 로마에서 가톨릭으로 개종한 뒤에도 유대 전통과의 긴장을 문학의 중심에 남겼다. 전후에는 포즈난에 정착해 성서적 상상력과 역사적 기억을 결합한 작품을 썼다. 1980년에는 포즈난 1956년 6월 희생자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으로서 노동자 봉기의 기억을 공공 기념물로 만드는 조직 작업을 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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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6시와 평론으로 문단 데뷔
  • 1929–1932파리 유학, 아담 미츠키에비치 연구로 철학박사 취득
  • 1933–1935시온주의 폴란드어 잡지 《오피니아》 문예부장
  • 1940–1946팔레스타인에서 폴란드 전신통신사 근무
  • 1947–1948로마 주재 폴란드 대사관 문화참사관
  • 1948–1950포즈난 폴란드극장과 대극장 문예 책임자
  • 1960–1987포즈난에서 전업 작가로 활동, 성서 번역과 《나사렛 예수》 집필
  • 1980포즈난 1956년 6월 기념비 건립 사회위원회 위원장

바를람 티호노비치 샬라모프

Варлам Тихонович Шалам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07–1982 ○ 자연사

콜리마 수용소를 산문의 형식으로 증언한 작가

《콜리마 이야기》는 수용소를 교정이나 영웅주의가 아닌 인간성의 파괴로 묘사한다.

좌익 반대파와 가까웠던 젊은 시절부터 체포와 수용소를 겪었고, 1937년부터 콜리마에서 장기간 복역했다. 이후 《콜리마 이야기》로 수용소의 비인간화를 압축된 산문으로 기록했으나, 작품은 생전에 소련에서 거의 출간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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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좌익 반대파 관련 활동으로 첫 체포
  • 1937–1951콜리마 수용소 복역
  • 1954–1973《콜리마 이야기》 여섯 연작 집필
  • 1988–1989《콜리마 이야기》 소련에서 본격 출간

알렉산드르 트리포노비치 트바르돕스키

Александр Трифонович Твардо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0–1971 ○ 자연사

해빙기 문학의 문을 연 『신세계』 편집장이자 『바실리 죠르킨』의 국민 시인

솔제니친의 부고: 「시인을 죽이는 방법은 많다. 트바르돕스키에게 선택된 방법은 그의 자식이자 열정이던 잡지를 빼앗는 것이었다. 그로부터 여섯 달 뒤, 그는 임종의 자리로 들어갔다.」

『바실리 죠르킨』으로 전시 국민 시인이 된 작가. 『신세계』 편집장으로 솔제니친의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를 출판해 해빙기 문학의 상징이 되었으나, 브레즈네프 체제 아래 축출된 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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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1첫 장시 『사회주의로의 길』 발표
  • 1936장시 『무라비아의 나라』 발표, 스탈린상 2급 수상 (1941)
  • 1939–1940소련-핀란드 전쟁에서 군사특파원 복무
  • 1942–1945『바실리 죠르킨』 연재 — 스탈린상 1급 (1946)
  • 1950–1954『신세계』 편집장 첫 임기 — 해빙 논쟁으로 해임
  • 1958–1970『신세계』 편집장 두 번째 임기 — 솔제니친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 출판
  • 1961장시 『저 멀리 — 저 멀리』로 레닌상 수상; CPSU 중앙위원 후보
  • 1970『신세계』 편집장에서 강제 퇴진; 이듬해 사망

올가 표도로브나 베르골츠

Ольга Фёдоровна Берггольц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0–1975 ○ 병사

봉쇄된 도시의 라디오 목소리

1942년 2월, 남편 몰차노프가 아사한 직후 베르골츠는 라디오에서 이렇게 낭독했다: "나는 레닌그라드의 과부다."

레닌그라드 포위전(1941–1944) 동안 라디오 방송을 통해 매일 시와 연설을 낭독하며 아사 직전의 시민들에게 생명의 언어를 전한 소비에트 시인이다. 1938년 '문학그룹' 사건으로 체포되어 고문과 유산을 겪었으나 끝내 자백하지 않았고, 1939년 석방·복권된 후 당에 복귀했다. 대표작 『2월 일기』(1942)와 『레닌그라드 시』(1942)는 봉쇄의 참상과 시민의 존엄을 직시했으며, 피스카료프스코예 묘지에 새겨진 그녀의 글귀 '아무도 잊히지 않았다, 아무것도 잊히지 않았다'는 전쟁 기억의 상징이 되었다. 스탈린상(1951)을 수상했고 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1959)로 해빙기 문학의 길을 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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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5첫 시 「레닌」 발표
  • 1930레닌그라드대학 졸업, 첫 책 『겨울-여름-앵무새』 출간
  • 1934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38–1939체포·7개월 구금 후 석방 및 복권
  • 1941–1944레닌그라드 포위전 기간 라디오 방송
  • 1942『2월 일기』, 『레닌그라드 시』 발표
  • 1951『페르보로시스크』로 스탈린상 수상
  • 1959자전적 소설 『낮의 별들』 발표

아나톨리 나우모비치 리바코프

Анатолий Наумович Рыбак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1–1998 ○ 자연사

20년간 금서였다가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된 작가

『아르바트의 아이들』 속 스탈린은 말한다: "죽음이 모든 문제를 해결한다. 사람이 없으면, 문제도 없다." 이 한 문장에 한 시대의 냉혹한 논리가 응축되어 있다.

아르바트 거리에서 자란 유대계 소비에트 작가. 1933년 NKVD에 체포되어 시베리아로 3년 유배, 전쟁 중에는 전차부대 지휘관으로 베를린까지 진격했다. 1960년대에 완성한 『아르바트의 아이들』은 20년 넘게 출판이 금지되었다가 1987년 고르바초프의 글라스노스트로 마침내 빛을 보아 스탈린주의 청산의 문학적 상징이 되었다. 유대인 가문의 나치 점령 하 투쟁을 그린 『무거운 모래』(1979)는 러시아어 최초의 홀로코스트 소설로 평가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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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3–36NKVD 체포, 시베리아 3년 유배
  • 1941–46전차부대 지휘관, 베를린까지 진격
  • 1948–56『코르티크』『청동새』로 아동문학 데뷔
  • 1950『운전사들』로 스탈린상 수상
  • 1960s–87『아르바트의 아이들』 집필, 사미즈다트, 출판 금지
  • 1979『무거운 모래』 — 최초의 러시아어 홀로코스트 소설
  • 1987글라스노스트로 『아르바트의 아이들』 출간, 세계적 센세이션
  • 1989–91소비에트 PEN 센터 회장

파샤 니키티치나 안겔리나

Прасковья Никитична Ангелина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계 그리스인 1912–1959 ○ 자연사

여성 기계화 노동의 선구자

“무엇을 할 수 있겠어요? 제가 하나를 사면 그들도 하나를 사요.”

파샤 안겔리나는 초기 5개년계획의 농업에서 여성 노동자가 기술을 익히고 생산을 조직할 수 있음을 보여 준 트랙터 운전수이자 여단장이었다. 그녀는 여성 트랙터 여단을 이끌며 스타하노프 운동의 농업 부문을 대표하는 공적 인물이 되었고, 여성의 농촌 기계화 진출을 촉진했다. 그러나 그녀의 명성과 생산 기록은 성별 분업을 넘어선 노동의 가능성과 국가가 노동 영웅을 선전의 상징으로 만드는 방식을 함께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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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9최초의 여성 트랙터 운전수 중 한 사람
  • 1933최초의 여성 트랙터 여단 조직·지휘
  • 1935전연맹 스타하노프 대회 참가·발언
  • 1938여성 트랙터 운전수 양성 운동 주도
  • 1940모스크바 티미랴제프 농업 아카데미 졸업
  • 1947, 1958사회주의 노동 영웅 두 차례 수훈
  • 1948『콜호스 들판의 사람들』 출간
  • 1937–1958소련 최고회의 대의원

콘스탄틴 미하일로비치 시모노프

Константин Михайлович Симон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5–1979 ○ 폐암

「나를 기다려 주오」의 시인, 여섯 번의 스탈린상을 받은 전쟁기자이자 문학 관료

「나는 병사가 아니었다. 단지 특파원일 뿐이었다. 그러나 내게는 한 평생 잊지 못할 땅이 있다 — 1941년 7월, 하루 만에 우리가 독일 전차 39대를 격파하고 불태우는 것을 처음 목격한 모길료프 들판이다.」

「나를 기다려 주오」로 전시 소련을 울린 시인. 6회 스탈린상을 받은 종군기자로 3부작 『산 자와 죽은 자』를 남겼다. 파스테르나크 박해 가담자였으나 불가코프 작품 출간을 관철한 문학 관료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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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1938첫 시 발표, 고리키 문학대학 졸업, 작가동맹 가입
  • 1939할힌골 전투에 종군기자로 파견
  • 1941–1945『크라스나야 즈베즈다』 종군기자, 베를린 항복문서 조인 참관
  • 1942시 「나를 기다려 주오」 발표 — 전국적 현상
  • 1946–1950 / 1954–1958『노비 미르』 편집장 (두 차례)
  • 1950–1953『리테라투르나야 가제타』 편집장
  • 1959–19713부작 『산 자와 죽은 자』 완성
  • 1974사회주의 노동 영웅 · 레닌상 수상

알렉산드르 이사예비치 솔제니친

Александр Исаевич Солженицын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8–2008 → 추방 1974

수용소 군도를 세계에 증언한 죄수 Щ-854

1945년 2월 9일, 동프로이센 전선. 적 포대를 탐지해 훈장을 받은 포병 대위가 부대 본부에서 체포됐다. 전우에게 보낸 편지에서 '파한(Пахан)'이라는 은어로 스탈린을 조롱한 죄였다. 군복의 계급장이 뜯겨나갔고, 루뱐카로 향하는 호송열차에 올랐다.

포병 대위로 참전 중 사신(私信)에서 스탈린을 비꼬았다가 8년형을 받았다. 『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1962)로 해빙의 상징이 되었고, 『수용소군도』로 노벨상과 국외 추방(1974)을 함께 얻었다. 1994년 귀국해 러시아에서 죽었다. 자신이 증언한 체제보다 17년을 더 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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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53사신 검열로 체포, 수용소 8년(마르피노·에키바스투즈)
  • 1953–56카자흐스탄 유형, 교사 생활
  • 1962『이반 데니소비치의 하루』: 흐루쇼프의 재가로 출간
  • 1970노벨문학상
  • 1973–74『수용소군도』 파리 출간, 국외 추방
  • 1976–94미국 버몬트 은둔, 1994년 귀국

알렉산드르 예피모비치 보론초프

Александр Ефимович Воронцов
작가·예술가 소련 벨라루스계 1919–1991 ○ 자연사

해방의 현장을 증언한 전선 촬영기사

아우슈비츠 해방 직후, 보론초프가 촬영한 생존자와 수용소의 영상은 현장을 국제적 증거로 바꾸었다.

알렉산드르 보론초프는 소련의 다큐멘터리 영화 촬영기사이자 감독으로, 전쟁의 현장을 기록 영상으로 남긴 인물이다. 1945년 1월 말 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과 함께 해방 직후의 아우슈비츠를 촬영했고, 그 영상은 영화 《아우슈비츠》와 뉘른베르크 재판에 제출된 소련 측 증거에 포함되었다. 전쟁 뒤에는 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에서 촬영과 연출을 이어 가며 전선 기록을 평시의 국가 영화 제작으로 연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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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9–1941모스필름 촬영부 기계공·촬영 조수
  • 1942전러시아국립영화대학교 촬영학부 졸업
  • 1942붉은군대 입대, 노보시비르스크 영화 뉴스릴 스튜디오 촬영기사
  • 1943–1945제1우크라이나 전선 촬영팀 전선 촬영기사
  • 1945영화 《아우슈비츠》 촬영
  • 1945–1989중앙 다큐멘터리 영화 스튜디오 촬영기사·감독
  • 1988러시아공화국 명예 예술가 칭호 수훈

미하일 티모페예비치 칼라시니코프

Михаил Тимофеевич Калашнико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19–2013 ○ 자연사

소련 방위산업의 얼굴이 된 총기 설계자, AK-47의 아버지

죽기 6개월 전 총대주교에게 보낸 편지: "내 소총이 사람의 목숨을 앗아갔다면, …정교회 신자요 기독교인인 나에게 그 죽음들의 책임이 있는 것일까요?"

소련의 대표적 소형화기 설계자. 쿨라크로 몰려 추방된 농민 가정에서 태어나 독학한 칼라시니코프는, 신뢰성 없는 소총에 좌절한 병사들의 불만을 AK-47로 응답했다. 1949년 채택된 AK는 AKM, RPK, PK, AK-74로 이어지며 단순성과 저비용으로 세계에서 가장 널리 보급된 보병 화기가 되었다. 이젭스크 기계공장에서 평생을 보내며 상사에서 중장까지 진급했고 여섯 차례 최고회의 대의원을 지냈다. 사회주의노동영웅 2회, 스탈린상·레닌상·국가상을 수상한 소련 군수 테크노크라트의 전형이었으나 발명으로 부를 얻지는 못했다. 만년에는 자신의 무기가 초래한 죽음에 대한 영적 고통을 총대주교에게 고백하면서도 AK는 방어의 무기라고 주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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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8–1941붉은군대 전차병·전차장, 브랸스크 전투에서 중상
  • 1942–1949소련군 포병총국(GAU) 중앙화기연구소 설계사
  • 1949AK-47 소련군 제식 채택, 스탈린상 1급 수상, 이젭스크로 이주
  • 1949–2013이젭스크 기계공장(이즈마시) 주임 설계자
  • 1950–1958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3~4기)
  • 1959–1974AKM·RPK·PK·AK-74 제식 채택, 레닌상 수상(1964)
  • 1966–1989소비에트 최고회의 대의원 (제7~11기)
  • 1971기술과학 박사 학위 취득
  • 1994–1999소장 진급(1994), 중장 진급(1999)

벌라주 너지

Nagy Balázs
작가·예술가 헝가리 헝가리인 1920–2003 ○ 자연사

노동자평의회를 기록한 망명 역사가

너지 벌라주는 헝가리의 혁명적 사회주의자이자 망명 저술가로, 1956년 혁명에서 노동자평의회가 국가기구와 당 관료제 바깥에서 독자적인 정치·경제 조직을 세운 과정을 기록했다. 그는 11월 4일 이후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결성과 파업, 정부와의 협상을 다룬 당사자 기록을 남겼으며, 이 연구는 1961년 브뤼셀에서 프랑스어로 출판되었다. 그의 저술은 노동계급의 자기조직이 혁명의 패배 속에서도 대안적 정치 형태로 작동한 방식과 그 한계를 함께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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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부다페스트 노동자평의회 운동 참여
  • 1956.11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형성과 저항 기록
  • 1961브뤼셀에서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의 형성」 프랑스어판 출판
  • 1964「International Socialism」에 부다페스트 중앙노동자평의회 기록 게재
  • 2003사망

바실리 이오시포비치 스탈린

Василий Иосифович Сталин
작가·예술가 소련 그루지야 1921–1962 ○ 알코올 중독 · 사망

공군 중장이자 소련 아이스하키의 창시자, 지도자의 아들

1953년 3월 아버지의 장례식에 술에 취해 나타난 바실리는 '그들이 아버지를 독살했다'고 외쳤다. 두 달도 채 지나지 않아 그는 체포되었다.

이오시프 스탈린의 차남으로, 제2차 세계대전 중 전투기 조종사로서 27회의 전투 출격을 수행하고 공군 중장까지 올랐다. 1948년 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에 임명되어 1952년까지 재임했으며, 24세에 소련군 최연소 소장이 되는 등 급속한 승진은 부계의 후원과 무관하지 않았다. 그러나 단순한 '지도자의 아들'을 넘어, 소련 아이스하키 연맹 초대 회장으로서 VVS 모스크바 팀을 창단하고 아나톨리 타라소프를 초대 감독으로 영입하는 등 소련 하키의 제도적 기반을 다진 스포츠 행정가이기도 했다. 1953년 아버지의 사망 직후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체포되어 8년형을 선고받았으며, 블라디미르 중앙교도소에서 가명으로 복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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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카친 군사항공학교 졸업, 공군 소위 임관
  • 1941–1942제16전투항공연대에서 복무, 전투 출격 수행
  • 1943제32근위전투항공연대 연대장
  • 1944–1945제3근위전투항공사단 · 제286전투항공사단 사단장
  • 1946항공 소장 진급, 제1근위전투항공군단장
  • 1948–1952모스크바 군관구 공군 사령관, 항공 중장 진급(1949)
  • 1953체포, 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8년형 선고
  • 1960–1962석방 후 재수감, 카잔으로 유배, 알코올 중독으로 사망

텡기즈 예브게니예비치 아불라제

თენგიზ ევგენის ძე აბულაძე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그루지야 1924–1994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의 문화적 신호탄을 쏘아올린 그루지야의 영화감독

「참회」가 봉쇄되었을 때 아불라제는 필름이 파기될까 두려워 유일한 비디오 사본을 자신의 침대 밑에 보관했다.

그루지야 출신의 소련 영화감독. 1955년 레조 치헤이제와 공동 연출한 데뷔작 「마그다나의 당나귀」로 칸 단편상을 수상했고, 「기도」(1967)·「소망의 나무」(1976)·「참회」(1984)로 이어지는 삼부작을 완성했다. 1984년 완성 후 2년간 봉쇄되었던 「참회」는 1986년 페레스트로이카의 물결 속에서 공개되어 스탈린 시기 테러를 우화적으로 고발한 최초의 소련 영화가 되었고, 그 공개 자체가 글라스노스트 시대의 개막을 알리는 문화적 신호탄이었다. 1987년 칸영화제 심사위원대상을 수상했고 소련 인민대의원(1989~1991)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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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3트빌리시 연극학교 입학, 1946년 졸업
  • 1953VGIK 졸업, 그루지야필름 입사
  • 1955「마그다나의 당나귀」 공동 연출, 칸영화제 단편상(1956)
  • 1967삼부작 첫 영화 「기도」 완성
  • 1976「소망의 나무」 완성, 트빌리시 연극학교 교수
  • 1984「참회」 완성, 2년간 상영 금지
  • 1986「참회」 공개, 글라스노스트의 상징이 되다
  • 1989소련 인민대의원 선출

안드레이 도나토비치 시냡스키

Андрей Донатович Синявский
작가·예술가 소비에트 러시아 1925–1997 ○ 자연사

『노비 미르』의 비평가에서 반체제 운동의 상징이 된 아브람 테르츠

1966년 2월 재판에서 시냡스키는 무죄를 주장했다 — 소비에트 정치 재판에서는 드문 일이었다. 역사가 프레드 콜먼은 이 재판을 "현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탄생"이라 불렀다.

소비에트 문학학자, 비평가, 작가. 필로로기야 학위 후보(1952년)로, 고리키 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모스크바 국립대·예술극장 학교 강사였다. 알렉산드르 트바르돕스키의 『노비 미르』에서 주요 비평가로 활약했으며, 당시 가장 자유주의적인 소비에트 합법 출판물이었다. 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풍자 소설과 「사회주의 리얼리즘이란 무엇인가」(1959)를 발표했다. 1966년 율리 다니엘과 함께 순수 창작물로만 유죄 판결을 받은 최초의 소비에트 작가가 되었고, 이 재판은 근대 소비에트 반체제 운동의 출발점으로 평가된다. 6년간 수용소 복역 후 1973년 프랑스로 망명, 소르본에서 러시아 문학 교수로 재직하며 『신탁시스』를 창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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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 국립대 문헌학부 졸업
  • 1952필로로기야 학위 후보 취득; IMLI 연구원
  • 1955–1965아브람 테르츠 필명으로 서방에 소설·에세이 발표
  • 1950년대 말–1965『노비 미르』 주요 문학비평가
  • 1960소비에트 작가동맹 가입
  • 1966반소비에트 선동 혐의로 7년형 선고; 두브라블라크 수감
  • 1971조기 석방
  • 1973–1997소르본 대학 러시아 문학 교수; 『신탁시스』 공동 창간

스베틀라나 이오시포브나 알릴루예바

Светлана Иосифовна Аллилуева
작가·예술가 미국 러시아 1926–2011 ○ 결장암으로 사망

스탈린의 외동딸이자 크렘린을 버린 최초의 목격자

2010년 인터뷰에서 그녀는 말했다. "그는 내 인생을 망가뜨렸다" — 문학 공부를 거부하고 카플레르를 체포했을 때.

이오시프 스탈린의 외동딸로, 1967년 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하여 크렘린 내부를 서방에 최초로 증언한 회고록으로 국제적 파장을 일으켰다.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는 아버지의 사적 면모와 소비에트 지배층의 삶을 폭로한 기록으로 평가되며, 이후 귀환과 재망명을 거듭하면서도 평생 스탈린의 그림자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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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모스크바대학 역사학부 졸업
  • 1954문헌학 후보학위 취득
  • 1956–1967세계문학연구소 연구원 및 번역가
  • 1967인도에서 미국으로 망명, 《친구에게 보내는 스무 통의 편지》 출간
  • 1978미국 시민권 취득, 라나 피터스로 개명
  • 1984–1986소련 귀환 후 재차 미국으로 이주

루드비크 바출리크

Ludvík Vaculík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인 1926–2015 ○ 자연사

20년간 단 하나의 인간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선언하고 「이천 마디 말」로 저항한 체코의 작가

「지난 20년 동안 이 나라에서는 단 하나의 인간적 문제도 해결되지 않았다」고 1967년 작가대회에서 선언한 바출리크 앞에서 당 대표단은 퇴장했고 청중은 긴 박수를 보냈다.

체코슬로바키아의 작가이자 공산당원이었다가 1967년 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에서 노보트니 정권을 정면으로 비판하는 연설로 당에서 축출되었다. 1968년 6월 대표작 「이천 마디 말」을 발표하여 시민의 자발적 행동과 개혁 심화를 촉구했고, 이는 프라하의 봄을 상징하는 문헌이 되었으나 소련의 개입 구실로도 이용되었다. 침공 이후 출판이 전면 금지되었으나, 지하 출판사 페틀리체를 설립하여 하벨·클리마 등 금지 작가들의 작품을 17년간 펴냈다. 1977년 헌장 77의 서명자로서 체제 비판을 이어갔고, 1989년 이후 『리도베 노비니』의 고정 칼럼니스트로 매주 체코 사회를 논평하며 2015년까지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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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5–1967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당원
  • 1959–1965체코슬로바키아 방송 청년 프로그램 편집자
  • 1965–1969『리테라르니 노비니』(후에 『리테라르니 리스티』) 편집자
  • 1967제4차 체코슬로바키아 작가대회 연설로 당에서 축출
  • 1968「이천 마디 말」 선언문 작성 및 발표
  • 1969–1989출판 금지, 지하 출판 활동
  • 1973–1990사미즈다트 출판사 페틀리체 설립·운영
  • 1977헌장 77 서명

피터 프라이어

Peter Fryer
작가·예술가 영국 영국인 1927–2006 ○ 자연사

당의 침묵과 현장을 맞바꾼 공산주의 저널리스트

노동자평의회 선거에서 “인민민주주의를 위해 우리는 사람을 뽑아 본 경험이 전혀 없습니다”라는 말을 듣고 그는 돌아섰다.

피터 프라이어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저술가이자 기자로, 공산주의 운동 내부의 진실과 국제적 연대를 함께 추구했다. 1956년 헝가리에서 노동자와 학생의 봉기를 취재했지만 Daily Worker에 보낸 기사는 검열되거나 묵살되었고, 그는 『헝가리의 비극』으로 공식 노선에 맞섰다. 이 충돌은 그의 공산당 제명과 영국 공산주의 운동의 분열에 기여했으며, 이후 그는 흑인 영국사의 중요한 저술가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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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2청년공산주의자동맹 가입
  • 1943–1947Yorkshire Post 기자
  • 1945영국 공산당 입당
  • 1948–1956Daily Worker 의회·외신 특파원
  • 1956헝가리 혁명 취재, 『헝가리의 비극』 집필
  • 1957–1959The Newsletter 편집자, Socialist Labour League 창립 참여
  • 1984『Staying Power』 출간
  • 2006런던에서 사망

밀란 쿤데라

Milan Kundera
작가·예술가 체코슬로바키아 체코 1929–2023 ○ 자연사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자유의 양립을 시도한 보편적 순간이라고 주장한 체코 소설가

1968년 12월 『리스티』지에 실린 「체코의 운명」에서: "프라하의 봄은 체코인과 슬로바키아인을 세계사의 중심으로 옮겨 놓았으며, 우리 민족은 자신의 위대함을 목도했다."

체코-프랑스 소설가. 청년기 공산당 입당 후 두 차례 제명되었고, 1967년 작가동맹 대회에서 검열 철폐 연설로 프라하의 봄의 서막을 열었다. 침공 직후 「체코의 운명」(Český úděl)을 발표, 프라하의 봄이 사회주의와 민주주의를 양립시키려 한 보편적 시도라고 주장하며 바츨라프 하벨과 역사적 논쟁을 벌였다. 1975년 프랑스로 망명해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1984)으로 세계적 명성을 얻었고, 2023년 파리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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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8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50당에서 제명
  • 1952–70FAMU에서 세계문학 강의
  • 1956당 복당
  • 1967제4차 작가동맹 대회 연설로 프라하의 봄 지적 서막
  • 1968.12「체코의 운명」 발표, 하벨과 논쟁
  • 1970재제명, 저서 금지
  • 1975프랑스로 망명
  • 1984「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출간
  • 2019체코 시민권 회복

예고르 블라디미로비치 야코블레프

Егор Владимирович Яковлев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30–2005 ○ 자연사

글라스노스트 시대를 연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금기를 깨는 데 앞장서다

「잠자리에 들 때 벙어리였다가 아침에 일어나 말을 할 수는 없는 법이다」: 검열이 풀리던 시절, 점진적으로 넓혀가는 금기의 경계를 설명하며.

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출신으로 『이즈베스티야』 특파원과 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을 지낸 언론인. 1986년 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에 임명되어 3만 5천 부의 영문 선전지를 8개 언어 300만 부의 글라스노스트 기관지로 키웠다. 스탈린 숙청, 아프간 전쟁, KGB 활동 등 금기를 잇달아 깨뜨렸고, 1991년 쿠데타 당시 11개 자유언론의 공동호 『옵샤야 가제타』를 발행해 저항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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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모스크바 역사기록대학 졸업
  • 1956–1966『모스크바 프라우다』·『콤소몰카』·『이즈베스티야』 기자
  • 1967–1968잡지 『주르날리스트』 창간 편집장
  • 1968–1985『이즈베스티야』 특파원, 프라하 주재
  • 1986–1991APN 부의장 겸 『모스크바 뉴스』 편집장
  • 1991–1992소련 및 러시아 국영 TV·라디오 의장
  • 1993–2002『옵샤야 가제타』 발행인

블라디미르 블라디미로비치 코시긴

Владимир Владимирович Косыгин
작가·예술가 소련 코랴크 (러시아) 1933–2012 ○ 자연사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이자 소련 인민대표

1989년 소련 인민대표 당선 후 모스크바 아파트를 거절하고 고향 팔라나로 돌아갔다. '내 모든 책은 나에게 고해성사다'라고 그는 말했다.

코랴크 최초의 전업 작가로, 필명 코얀토(Коянто, '순록의 사람')로 널리 알려진 코랴크 문학의 기념비적 인물이다. 레닌그라드 게르첸 사범대학 북방학부와 고리키 문학대학 고등문학과정을 졸업하고, 1969년 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를 시작으로 코랴크인과 북방 원주민의 삶, 신화, 정체성을 문학으로 형상화하는 데 평생을 바쳤다. 그의 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1976)는 소련 관료들의 북방 정책을 날카롭게 비판하여 큰 반향을 일으켰다. 1989년 코랴크 자치구에서 소련 인민대표로 선출되어 북방 원주민의 권익을 대변했으며, 소련 해체 후에도 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과 주지사 고문을 지내며 고향을 위해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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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6코랴크 자치구 문화계에서 교사·방법론자·문화원장 등으로 활동
  • 1969첫 시집 『알네이의 노래』 출간, 필명 '코얀토' 사용 시작
  • 1972소련 작가동맹 회원
  • 1974캄차카 작가조직 공동 창립
  • 1976산문 『윗사람들은 기다리라』 출간 — 북방 관료제 비판으로 반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코랴크 자치구 선출), 민족문제위원회 위원
  • 1990s–2000s코랴크 자치구 대통령 전권대표부 전문가, 주지사 고문, 인권위원장
  • 2002–2012코랴크 자치구 인권위원장, 팔라나 사범대학에서 북방문학 강의

예브게니 알렉산드로비치 옙투셴코

Евгений Александрович Евтушенко
작가·예술가 러시아 러시아 1933–2017 ○ 자연사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 스타디움을 채운 해빙기 시인의 빛과 그림자

「바비 야르」는 '바비 야르 위에는 아무 기념비도 서 있지 않다'로 시작해, 홀로코스트를 집단적 소련 시민의 희생으로만 말하던 국가 서사에 정면으로 균열을 냈다.

해빙기 대표 시인. 「바비 야르」(1961)로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깼다. 스타디움을 채운 낭독회로 대중적 인기를 얻었으며, '시인은 러시아에서 시인보다 크다'는 시구로 문학의 공적 사명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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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소비에트 스포츠〉지에 첫 시 발표
  • 1952첫 시집 『미래의 정찰병들』 출간, 최연소 소련 작가동맹 가입
  • 1952–1957고리키 문학대학 수학, 두딘체프 옹호로 제적
  • 1961「바비 야르」 발표 — 소련의 홀로코스트 침묵을 깨다
  • 1962「스탈린의 후계자들」을 『프라우다』에 발표
  • 1962쇼스타코비치 교향곡 13번 〈바비 야르〉에 가사 제공, 초연
  • 1968「프라하로 진격하는 탱크」 발표 후 공연 금지·해외여행 제한
  • 1986–1991소련 작가동맹 이사회 서기
  • 1989–1991하리코프 선거구 소련 인민대의원
  • 1991–2017미국 털사대학 교수로 러시아·유럽 시와 영화사 강의

비탈리 알렉세예비치 코로티치

Виталий Алексеевич Коротич
작가·예술가 소련 우크라이나 1936–2025 ○ 자연사

『오고뇨크』를 글라스노스트의 충격파로 바꾸어, 70년간 억압된 진실을 쏟아부은 편집자

「70년 동안 우리는 아버지를 배신한 아들이, 교회를 불태운 자가 영웅이라고 배워왔다. 사람들은 철저한 거짓말 속에서 살아왔다」

키이우 출신 시인이자 의사로, 1985년 반미 소설로 국가상을 받을 만큼 체제 순응적 작가였으나, 1986년 알렉산드르 야코블레프의 추천으로 『오고뇨크』 편집장에 임명되자 잡지를 글라스노스트의 선봉으로 돌변시켰다. 아프가니스탄 전쟁의 실상, 스탈린 시대 대숙청, 노멘클라투라의 특권을 최초로 폭로하며 구독 부수를 26만에서 460만으로 끌어올렸고, 파스테르나크와 나보코프의 작품을 최초로 게재했다. 1989년 인민대표로 당선되어 지역간그룹에 가담했고, 1991년 쿠데타 당시 미국 체류 중 귀국을 거부해 편집장직에서 해임된 후 보스턴대학 교수를 지냈으며, 말년에는 우크라이나 침공을 공개 지지해 고국에서 배척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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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6의사, 키이우
  • 1966–1967『라노크』 편집장
  • 1967–1969우크라이나작가동맹 서기
  • 1978–1986『프세스비트』 편집장
  • 1986–1991『오고뇨크』 편집장
  • 1989–1991소련 인민대표
  • 1992–1998보스턴대학 교수
  • 1999–2014『불바르 고르도나』 편집위원장

블라디미르 세묘노비치 비소츠키

Владимир Семёнович Высоцкий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38–1980 ○ 심근경색

검열된 방송 대신 백만 개 테이프로 퍼져나간 목소리

1980년 7월 28일, 모스크바 올림픽 기간. 비소츠키의 시신이 타간카 극장 로비에 안치되자 십만 인파가 수 킬로미터 줄을 섰다. 경찰 추산 10만8천 명. 『햄릿』 공연 취소에도 단 한 명도 환불을 요구하지 않았다.

타간카 극장의 배우이자 소련 최고의 음유시인. 700곡이 넘는 노래를 7현 기타로 불렀고, 공식 매체에서 배제되었으나 릴 테이프 복제로 전국에 퍼졌다. 1971년 타간카 『햄릿』에서 검은 스웨터의 지식인 반항아로 한 세대의 상징이 되었으며, 범죄자·최전선 병사·알코올 중독자 같은 가면을 빌려 소비에트 사회의 금기를 거리 언어로 노래했다. 브레즈네프마저 병상에서 전화로 그의 노래를 듣기를 원했을 만큼 당과 민중을 동시에 사로잡은 유일무이한 문화적 현상이었다. 1980년 모스크바 올림픽 중 42세로 사망했을 때, 십만 인파가 타간카 광장에 모여 당국이 감추려 했던 존재의 진정한 무게를 증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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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56모스크바 토목공학대학 입학 후 중퇴, 연기 전향
  • 1956–60모스크바 예술극장 부속학교 졸업
  • 1961첫 자작곡 「타투이로프카」 — 범죄 언더월드 연작 시작
  • 1964타간카 극장 입단, 브레히트 『사천의 선인』으로 데뷔
  • 1967영화 『수직』 주연·주제가로 전국적 스타덤, 마리나 블라디와 만남
  • 1971타간카 『햄릿』 초연 — 소련 연극사의 전설적 무대
  • 1979TV 시리즈 제글로프 역으로 전국적 신드롬
  • 19807월 25일 심근경색으로 사망, 십만 인파 운집 장례

안드레이 알렉세예비치 아말리크

Андрей Алексеевич Амальрик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 1938–1980 ✕ 교통사고

1984년 소련 붕괴를 예견한 역사가이자 극작가

“이 재판은 나에게 두려움조차 일으키지 못한다. 이미 시작된 사상 해방의 과정은 되돌릴 수 없다.” — 1970년 11월 스베르들롭스크 법정 최후 진술

역사가이자 부조리극 작가로, 「소련은 1984년까지 존속할 것인가」(1970)에서 소련 체제의 내재적 붕괴를 예견했다. 반체제 활동으로 두 차례 수감, 1976년 강제 이주 후 서방에서 저술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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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9–1963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역사학부 재학, 노르만 기원론 학위논문으로 퇴학
  • 1963–1965부조리극 희곡 창작 및 아방가르드 미술 수집
  • 1965–1966무위도식 혐의로 체포, 시베리아 톰스크주 유형 2년 6개월 선고
  • 1966–1968조기 석방 후 모스크바 귀환, 노보스티 통신사 프리랜서 근무
  • 1969「소련은 1984년까지 존속할 것인가」 집필 및 해외 출판
  • 1970–1975반소 선전 혐의 체포·수감, 3년 노동교화형 후 추가 3년형, 항의 끝에 마가단 유형으로 감형
  • 1976모스크바 헬싱키 그룹 구상 참여, 강제 이주로 네덜란드행
  • 1976–1980위트레흐트대 연구원, 미국 강연, 프랑스 저술 활동

안드리스 슬라핀슈

Andris Slapiņš
작가·예술가 소련 라트비아인 1949–1991 ✕ 촬영 중 피살

독립운동의 현장을 기록한 다큐멘터리 영화인

안드리스 슬라핀슈는 리가 영화 스튜디오에서 활동한 라트비아의 다큐멘터리 영화감독이자 촬영기사였다. 리브인의 문화와 라트비아의 역사·사회 문제를 다룬 작품을 만들며, 기록영화가 억눌린 기억과 현재의 투쟁을 잇는 매체임을 보여 주었다. 1991년 1월 20일 리가 내무부 공격을 촬영하던 중 사망했고, 그가 남긴 장면은 라트비아 독립운동의 국제적 기억을 형성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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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6리가 영화 스튜디오 촬영기사
  • 1976전연방 국립영화학교 촬영학과 졸업
  • 1978다큐멘터리 《리가》 촬영기사
  • 1983리가 영화 스튜디오 다큐멘터리 감독
  • 1988《희망의 들판》 감독·촬영기사
  • 1989《라트비아에서 온 편지》 감독
  • 1990《고향》 촬영기사, 유리스 포드니엑스 연출
  • 1991리가 내무부 공격 촬영 중 사망

알로 마티센

Alo Mattiisen
작가·예술가 소련 에스토니아 1961–1996 ○ 심장마비

「노래혁명」의 사운드트랙을 쓴 작곡가, 다섯 조국의 노래로 에스토니아 대중을 하나로 묶었다

밴드의 연주를 멈추고 30만 군중 앞에서 맨손으로 합창을 지휘하며 '나는 에스토니아인이고 에스토니아인으로 남을 것이다'를 불렀다.

에스토니아의 작곡가이자 음악가로, 1980년대 후반 노래혁명 시기 독립 열망을 노래한 〈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으로 대중의 감정적 결집을 이끌었다. 1987년 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연대해 만든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는 노래혁명의 서곡이 되었고, 이듬해 5월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된 다섯 곡은 이듬해 9월 30만 명이 모인 〈에스티마 라울〉 공연에서 절정을 이루었다. 1996년 35세의 나이로 심장마비로 사망할 때까지 다양한 장르에서 200여 곡을 남겼지만, 역사는 그를 무엇보다 독립운동의 작곡가로 기억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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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84탈린 국립음악원 음악교육학과 졸업
  • 1984프로그 록 밴드 In Spe 합류 (Erkki-Sven Tüür의 후임)
  • 1987인광석 채굴 반대 운동에 바친 연대곡 「어느 땅도 홀로 있지 않다」 발표
  • 1988「다섯 조국의 노래」 연작, 타르투 팝 페스티벌에서 초연
  • 1988탈린 국립음악원 작곡과 졸업
  • 1988–1989에스토니아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음악 연간상 수상

스베틀라나 알렉산드로브나 알렉시예비치

Святлана Александровна Аляксандраўна Алексіевіч
작가·예술가 벨라루스 벨라루스계 1948– ○ 생존

증언의 목소리로 소비에트 세기를 기록한 작가

“나는 현실에 가장 가까이 다가갈 수 있는 문학적 방법을 찾아 왔다.”

스베틀라나 알렉시예비치는 벨라루스의 작가이자 기자로, 러시아어로 전쟁과 사회적 격변을 겪은 사람들의 증언을 엮어 집단적 기억의 문학을 만들었다. 《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와 《아연 소년들》에서 공식 영웅담이 가린 여성과 병사의 경험을 드러냈고, 《체르노빌의 기도》에서는 1986년 재난 뒤 생존자와 유가족, ликвидатор들의 목소리로 기술 재난의 인간적 결과를 기록했다. 그녀의 작업은 사실의 기록과 문학적 구성 사이의 긴장을 감수하면서도 개인의 목소리를 역사 이해의 중심에 놓았으며, 2015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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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5–1967학교 교사와 지역 신문 기자
  • 1972벨라루스 국립대학교 저널리즘 학위
  • 1973–1976《농촌신문》 기자
  • 1976–1984잡지 《뇨만》 논픽션·수필 부문 책임자
  • 1985《전쟁은 여자의 얼굴을 하지 않았다》 출간
  • 1989《아연 소년들》 출간
  • 1997《체르노빌의 기도》 출간
  • 2015노벨 문학상 수상

페레츠 다비도비치 마르키시

Перец Давидович Маркиш
작가·예술가 소련 러시아계 유대인 ✕ 총살, 1955년 복권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급진적 서정시인

1952년 8월 12일, 그는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어 ‘살해된 시인들의 밤’의 상징이 되었다.

페레츠 마르키시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이디시 문학의 중심에 선 시인이자 작가, 극작가였다. 그의 시는 전쟁과 혁명, 유대인의 경험을 이디시어로 엮었고, 그는 소비에트 문화 건설에 참여하면서도 유대인 문화와 자치의 문제를 독자적으로 제기했다.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활동은 그를 전후 국가 탄압의 표적으로 만들었으며, 1952년 다른 이디시 문인들과 함께 처형되었다. 그의 죽음은 정치적 숙청이 문학과 언어의 제도까지 파괴한 사건으로 기억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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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1917볼린에서 성장, 제정 러시아군 복무와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17–1921키이우에서 이디시 시인으로 활동 시작
  • 1921–1926바르샤바·베를린·파리 등지에서 집필·출판
  • 1926–1941소련 귀환, 시·소설·희곡 집필과 작가 활동
  • 1939레닌훈장 수훈
  • 1941–1945전쟁 시기 반나치 시와 문화 활동 전개
  • 1942–1949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유대인 반파시스트위원회 간부로 활동
  • 1949–1955체포·처형, 사후 복권

하인츠 발크

Heinz Valk

「노래 혁명」이라는 이름을 지은 예술가

1988년 9월 11일 「에스티마 라울」 무대에서 30만 명을 향해 외쳤다: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 그 말은 에스토니아 독립운동의 구호가 되었다.

에스토니아의 예술가이자 캐리커처 작가로, 1988년 6월 탈린 노래 축제 광장에서 벌어진 자발적 밤노래 시위 직후 『시르프 야 바사르』에 「노래 혁명」이라는 제목의 글을 발표하여 이 역사적 명칭을 만들어 냈다. 그해 9월 「에스티마 라울」 집회에서는 30만 청중 앞에서 "언젠가 우리는 반드시 승리할 것이다(Ükskord me võidame niikuinii!)"라고 선언해 독립운동의 상징적 구호를 남겼다. 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와 라흐바린네(인민전선) 창립에 참여했으며, 1990년부터 1992년까지 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으로서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에 찬성표를 던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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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5–1961에스토니아 국립미술대학에서 금속공예 전공, 졸업
  • 1972–1976에스토니아 SSR 미술기금 수석 예술가
  • 1979–1987에스토니아 SSR 예술가동맹 이사회 제1서기 (비당원)
  • 1987에스토니아 문화유산협회 창립 회원
  • 1987–1989탈린 미술대학 강사
  • 1988라흐바린네(에스토니아 인민전선) 공동 창립자, 로고 제작
  • 1990–1992에스토니아 최고회의 의원, 1991년 8월 20일 독립 회복 선언 찬성