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3년부터 볼셰비키였던 군사 정치위원으로, 내전 내내 여러 전선의 혁명군사평의회를 거쳐 1921년 발트함대 정치국장이 되었다. 1921년 2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확대회의에서 수병들 사이에 반란 기운이 번지며, 파업을 막지 못하면 '폭발'이 일어나리라고 경고했다. 크론슈타트 반란 때 반군 설득에 나섰다가 체포되었고, 1937년 대숙청에서 끝내 혐의를 부인한 채 이듬해 총살되었다.
1938년 제3차 모스크바 재판 첫날, 크레스틴스키는 피고석에서 일어나 '나는 트로츠키주의자가 아니며, 반소비에트 블록의 구성원도 아니었다'고 선언했다. 대숙청기 세 재판 전체에서 법정 자백을 거부한 유일한 순간이었다.
차르 시절 변호사 출신의 볼셰비키로, 예카테린부르크에서 혁명을 이끌고 최초의 정치국원이 되었다. 스베르들로프 사후 1919년부터 2년간 책임서기로서 당을 이끌었으나, 노동조합 논쟁에서 트로츠키를 지지하며 레닌과 충돌해 실각했다. 이후 소련 최대의 외교무대인 주독 전권대표로 9년간 활약했고, 대숙청기 모스크바 재판에서 유일하게 법정 자백을 거부한 피고로 기록되었다.
사형장으로 향하며 동료들에게 외투와 구두를 벗어 건넸다. 유리 톰스키의 전언에 따르면 그는 「안토노프-옵세옌코는 볼셰비키였고 끝까지 볼셰비키로 남았다고 전해 달라」고 말했다. 21년 전 그는 겨울궁전에서 임시정부를 체포했던 사나이였다.
체르니고프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혁명운동에 투신했다. 1917년 10월 군사혁명위원회 비서로서 포드보이스키·추드노프스키와 함께 겨울궁전 접수 작전을 준비하고 임시정부 체포를 집행했다. 내전기 남부·우크라이나 전선을 지휘했고, 1921년 탐보프 농민봉기 진압 전권위원회 의장으로서 유독가스 사용 결정에 서명했다. 1922년 적군 정치총국장을 지내다 트로츠키를 옹호한 끝에 1924년 1월 해임되었고, 외교관으로 전환해 체코슬로바키아·리투아니아·폴란드 전권대표를 지냈다. 1937년 러시아 SFSR 사법인민위원에 임명되었으나 그해 체포되어 1938년 2월 10일 총살되었다. 1956년 2월 25일 복권되었다.
짜르 군대의 부출신으로 제1차 세계대전에서 금장 검과 여섯 개의 훈장을 받은 직업군인이었다. 내전에서는 남부전선을 지휘하여 데니킨의 백군을 패퇴시켰고, 소비에트-폴란드 전쟁에서는 남서전선을 맡았다. 1931년 붉은 군대 참모총장에 올라 기계화와 탱크전 교리로 군 현대화를 추진했으며, 1935년 최초의 소비에트연방원수 5인 중 하나가 되었다. 1937년 말 스탈린의 신임을 잃고 1938년 체포되어, 공개재판도 없이 1939년 붉은 군대의 날에 총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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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1–17러시아 제국군 장교, 제1차 세계대전 중령·대령, 5회 부상, 게오르기 무기 수훈
베를린에서 중요한 요원과 접선하기 위해 역사학 교수로 위장했을 때, 단벌 신사 트릴리세르에겐 양복이 하나뿐이었다. 새 옷을 급히 맞추고 넥타이를 맨 그날이 그의 진짜 '출장'이었다.
아스트라한의 가난한 구두장이 집안에서 태어나 18세에 사회민주노동당에 입당한 직업혁명가. 1905년 카잔과 페테르부르크에서 볼셰비키 전투조직을 이끌었고, 스베아보르크 봉기를 조직했으며, 5년간 슐리셀부르크 감옥에서 카토르가를 보냈다. 1922년부터 1929년까지 GPU·OGPU 해외부(INO) 부장으로서 소비에트 대외정보망의 토대를 구축했고, 1926년 OGPU 부의장까지 올랐다. 1938년 체포되어 1940년 총살당했고, 1956년 사후 복권되었다.
1927년 세르게이 프로코피예프는 크렘린에서 그녀를 방문한 후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올가 다비도브나 자신은 활기차고 쾌활하며 다소 미국식의 숙녀처럼 보였다.'
러시아 혁명운동에 투신한 볼셰비키 혁명가이자 소비에트 문화 행정가로, 레프 트로츠키의 여동생이자 레프 카메네프의 첫 번째 아내였다. 1918년 교육인민위원부 연극부(TEO) 책임자로서 프세볼로트 메이예르홀트와 함께 러시아 연극의 볼셰비키화를 추진했으며, 1925년부터 1928년까지 대외문화교류협회(VOKS) 회장으로서 르 코르뷔지에와 시어도어 드라이저 등 서구 지식인들을 소련으로 초청하며 소비에트 문화외교의 틀을 구축했다. 1920년대 모스크바에서 주요 문학 살롱을 운영했고 당 여성부 이사로도 활동했으나, 1927년 남편과 오빠가 권력에서 밀려난 후 모든 직위를 상실했고 1941년 오룔 근교 메드베데프 숲에서 총살당했다.
1927년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7월 공산당을 숙청했고, 1940년 일본이 세운 난징 정권의 수반이 되었다. 1910년 체포되어 연(燕)의 저자에서 노래하리라 적었다.
청 섭정왕 암살 미수로 이름을 얻은 동맹회 혁명가로, 쑨원의 유촉을 받아쓴 측근이었다. 1927년 우한 국민정부를 이끌며 한때 공산당과의 합작을 유지했으나 그해 7월 분공(分共)으로 돌아섰다. 이후 장제스와 경쟁·협력을 반복하다 1938년 충칭을 떠나 일본과의 「평화」를 주장했고, 1940년 일본이 세운 난징 국민정부의 주석이 되었다. 1944년 나고야에서 병사했으며 중국에서는 대표적 한간(漢奸)으로 기억된다.
루돌프 뤼터스는 제1차 세계대전과 독일 제국군·국방군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의 독일 보병대장이 된 직업군인이다. 1942년 말부터 크로아티아의 독일군을 지휘하며 네레트바와 수테스카 공세의 계획·실행에 참여했다. 그는 파르티잔을 잘 조직되고 지휘되는 군대로 평가하면서도, 수테스카에서 포위망 안의 무장 가능 남성을 살려 보내지 말라는 명령을 내려 점령전의 절멸적 성격을 드러냈다. 1945년 소련군 포로가 된 뒤 수용소에서 사망했다.
이탈리아 사회주의 언론인에서 출발한 무솔리니는 제1차 세계대전 참전을 계기로 민족주의 혁명으로 전향해 파시즘을 창시했다. 그는 1922년 로마 진군 뒤 총리가 되었고, 폭력과 제도 개편으로 자유주의 체제를 일당 독재로 바꾸었다. 식민 전쟁과 나치 독일과의 동맹, 제2차 세계대전 참전은 이탈리아를 심각한 군사적·정치적 위기로 몰아넣었다. 1943년 실각한 뒤 독일 점령지의 이탈리아 사회공화국을 이끌었으나, 1945년 파르티잔에게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베르트람 램지는 영국 해군 장교로, 전시 해상작전을 조직하고 지휘하는 능력으로 두각을 보였다. 1940년 됭케르크에서 그는 군함과 민간 선박을 동원해 포위된 영국·연합군 병력의 철수를 지휘했다. 이후 북아프리카와 시칠리아 상륙작전을 거쳐 1944년 노르망디 상륙작전의 연합군 해군 총지휘를 맡았다. 그는 1945년 프랑스에서 비행기 추락으로 사망했다.
톨스토이 가문의 백작으로 혁명 후 백군 편에 섰다가 1919년 망명했다. 파리와 베를린 생활을 견디지 못하고 1923년 귀환, '붉은 백작'으로 불리며 체제의 총애를 받았다. 3부작 『고난의 길』과 미완의 『표트르 1세』로 스탈린상을 세 차례 수상했고, SF 고전 『아엘리타』『가린 씨의 쌍곡면』을 남겼다. 전시에는 60여 편의 애국 선전문을 썼으며 1941년 스탈린의 붉은광장 연설문을 기초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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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7–1917시집 『서정』으로 데뷔, 『절름발이 지주』 등으로 상트페테르부르크 문단 진입
1918–1923오데사→콘스탄티노플→파리→베를린 망명; 『아엘리타』『니키타의 유년』 집필
1923소련 영구 귀환 — '귀환 망명자'의 상징으로 체제의 환대를 받음
1930–1941『표트르 1세』 집필, 3부작 『고난의 길』 완성; 1936–38년 고리키 사후 작가동맹 임시 수장
피에르 라발은 변호사와 사회주의 정치인으로 출발했지만 전후 우파로 이동해 제3공화국의 핵심 각료와 총리를 지냈다. 1940년 패전 뒤 그는 페탱이 국민의회에서 전권을 얻고 헌정 질서를 폐기하는 과정에서 중요한 역할을 하며 비시 체제의 중심에 섰다. 라발은 독일과의 협력이 프랑스의 지위를 보전할 수 있다고 믿었고, 1942년 복귀한 뒤 노동력 제공과 경찰 협력을 확대했다. 해방 후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1945년 처형되었다.
1941년 6월 26일, 「신성한 전쟁」을 벨로루스키 역에서 처음 연주하자 병사들은 침묵했다가 다섯 번이나 앙코르를 요청했다.
랴잔 농민 가정 출신으로 카잔 대성당 소년 성가대에서 음악 인생을 시작했다. 상트페테르부르크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글라주노프와 바실렌코에게 배웠고, 혁명 후 모스크바 음악원 교수로서 소비에트 합창 교육의 기초를 닦았다. 1928년 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을 창설, 남성 합창과 민속·교향 혼성 오케스트라, 발레를 결합한 군사 문화 기관을 수립했다. 1941년 독소전 발발 사흘 만에 「신성한 전쟁」을 작곡, 붉은 군대의 비공식 진군가가 되었다. 1943년 「볼셰비키 당 찬가」 선율을 소련 국가로 발전시켰으며, 이 멜로디는 2000년 러시아 연방 국가로 재도입되었다. 교회 전례음악에서 소비에트 국가의 장엄한 음악적 표상으로 나아간 독특한 궤적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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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0상트페테르부르크 궁정 합창대 지휘자 과정 졸업, 지휘자(레겐트) 자격 취득
1913모스크바 음악원 작곡과 졸업(대은메달)
1918–1922구세주 그리스도 대성당 합창 지휘자
1922모스크바 음악원 교수
1928–1946붉은 군대 노래와 춤 앙상블(알렉산드로프 앙상블) 창설·음악 감독·예술 총감독·수석 지휘자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 역, 비보르크 구 위원회를 대표해 막 귀환한 레닌에게 당원증 제600호를 건넸다.
1905년 소르모보 봉기의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부였고, 1911년 레닌의 롱주모 당학교에서 수학했으며, 1917년 2월에는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의 핵심으로서 여성의 날 파업을 무장봉기로 밀어붙였다. 레닌 귀환 당일 핀란드 역에서 당원증 제600호를 직접 건넨 노동자 혁명가이며, 10월에는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에 있었고 내전기에는 제5군 정치국장과 체카 간부를 지냈다. 1940년 조작된 혐의로 체포되어 수용소에 갔다가 병든 몸으로 풀려나 함석공으로 일했고, 사후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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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02소르모보 공장에서 노동하며 RSDLP에 입당, 지하 혁명 활동 시작
1905.12소르모보 무장봉기 지도 '5인조'의 일원으로 바리케이드 전투 지휘
1911레닌의 롱주모 당학교 수학, 귀국 직후 체포되어 나림스키 변방 5년 유형
1916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 RSDLP(b) 지하위원회 위원
1917.02–102월 혁명에서 카유로프·파블로프와 함께 무장봉기 주도; 비보르크 구 봉기본부 위원
1918–1919제5군 정치국장, 체카 간부회 위원 겸 서기, 체카 수송부장
1921–1937크라스노예 소르모보 부소장, 북부 조선소 소장, '혁명의 엔진' 공장 소장 등 산업 지도자
1945년 12월 30일 조만식은 소련군사령부의 압력 속에서도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고,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다. 이 시기를 분수령으로 그를 비롯한 민족주의자들이 북부 정치무대에서 사라지고 김일성 등 좌익이 정국을 주도하게 되었다.
조만식(曺晩植, 호 고당, 1883~1950)은 평안남도 강서 출신의 교육자·개신교 장로·언론인·정치인이다. 1913년 메이지대학 법학부를 졸업하고 오산학교 교사(1915년 교장), 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역임했다. 일제에 대해서는 간디의 비폭력·불복종 노선으로 항일운동을 폈다. 해방 후 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평남 건준과 평남 조공을 통합한 평남인민정치위원회(좌우합작 기구) 위원장이 되었다. 1945년 11월 3일 조선민주당을 창당해 당수가 되었고 12월 30일 반탁 결의문을 채택했다. 1946년 1월 5일 고려호텔에 감금되었고 2월 최용건이 당을 장악했다. 이후 사망은 확정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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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3~19151913년 메이지대학을 졸업하고 그해 오산학교 교사가 되어 1915년 교장이 되었으며 민족교육에 종사
1920~30년대평양기독교청년회 총무·산정현교회 장로로 기독교·사회운동을 조직하고 조선물산장려회 회장, 신간회 평양지회장, 조선일보 사장을 지냄
1945.8평안남도건국준비위원회 위원장을 맡고, 이어 좌우합작 기구인 평남인민정치위원회 위원장을 맡음
1945.10~11토지개혁·소작제 7·3제 논쟁으로 입장이 드러나 우파 위원들이 위원회를 떠나 월남했고, 11월 24일 명칭에서 '정치'가 빠지며 위원회가 좌파 기구로 바뀜
1945.11.3조선민주당을 창당하고 당수로 선출되어 반탁 노선을 폄
1945.12.30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에서 신탁통치를 절대 찬성할 수 없다는 반탁 결의문을 채택
1946.1.5소련군사령부에 의해 고려호텔에 감금되어 정치무대에서 제거됨
1946.2최용건이 당을 장악하고 2월 24일 제1차 당대회에서 당수로 선출됨
1948~1950재판 없이 구금이 이어졌고 교환 협상은 결렬됨. 행방이 확인되지 않으며 사망은 전언·추정으로 시점·경위가 확정되지 않음
전쟁이 발발하자 바다예프를 비롯한 볼셰비키 두마 의원들은 전쟁 차관에 반대표를 던졌고, 페트로그라드 위원회는 「전쟁을 타도하라! 전쟁에 맞서 전쟁을!」이라는 첫 반전 선언문을 배포했다.
페테르부르크의 자물쇠공으로 노동운동에 뛰어든 바다예프는 제4대 국가두마의 볼셰비키 의원이자 레닌의 지시로 《프라우다》의 공식 발행인을 맡아 의원 면책특권을 신문의 법적 방패로 삼았다. 1914년 반전 활동으로 투루한스크에 유배되었다가 2월 혁명 후 귀환하여 페트로그라드와 북부 지역의 식량 공급을 책임졌다. 스탈린 시기에는 중앙소비자협동조합연합 의장과 식품공업 인민위원을 거쳐 1938년부터 전시 기간 내내 러시아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무회 의장을 지내며 명목상 국가원수 역할을 수행했다. 볼셰비키 두마 의원 시절을 기록한 회고록 《국가두마의 볼셰비키들》(1929)을 남겼으며, 그의 이름을 딴 레닌그라드의 바다예프 창고는 오늘날까지 지명으로 남아 있다.
1948년 1월, 음악가 소환 회의. 즈다노프의 설교가 이어지는 가운데 시키랴토프가 프로코피예프를 향해 주의를 기울이라고 명령했다. 프로코피예프는 대답했다: "나는 나에게 소개되지 않은 사람에게는 결코 주의를 기울이지 않습니다."
1906년 입당한 볼셰비키로, 모스크바 재봉노동자 사이에서 지하활동을 시작했다. 1921년 레닌의 첫 당원 검증을 집행한 이래 30년간 중앙통제위원회·당통제위원회에서 스탈린기 모든 핵심 숙청의 실무 집행자로 활동했으며(부하린·리코프 기소, 체첸-인구시 지도부 전원 체포, 몰로토프 아내 추방 등) 1952년 당통제위원장 겸 중앙위 상임위원에 올랐으나 스탈린 사후 한 달 만에 상임위에서 제외되었다.
1947년 9월 18일 유엔 총회에서 당시 외무차관에 불과했던 비신스키는 트루먼 독트린과 마셜 플랜이 구호물자를 "정치적 압력의 도구"로 쓴다고 맹비난하며, 구호물자를 정치적 무기로 써서는 안 된다는 1946년 12월 유엔 총회 결의를 인용했다.
폴란드 슐라흐타(귀족) 가문 출신으로 오데사에서 태어나 어린 시절 바쿠로 이주했고, 1903년 러시아사민당 멘셰비키파에 들어갔다. 1908년 바일로프 감옥 1년형을 선고받아 그곳에서 스탈린을 만났고, 1913년 키예프대학을 졸업한 뒤 1920년 볼셰비키에 입당했다. 러시아연방 검사(1931), 부검찰총장(1933), 소련 검찰총장(1935~1939)을 지냈고 1936~1938년 세 차례 모스크바 재판 모두에서 국가검사를 맡았다. 1939년 5월부터 인민위원회 부의장, 1940~1946년에는 외무인민위원 제1부위원으로 뉘른베르크 소련 대표단을 지휘했다. 외무장관(1949~1953)과 유엔 상임대표(1953~1954)를 지낸 뒤 1954년 뉴욕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그는 『힘으로 악에 저항함』에서 "체포하고, 단죄하고, 사격할" 용기를 요구했고, 고리키는 이를 '복수의 복음'이라 불렀다.
모스크바대학에서 헤겔 법철학으로 석·박사 학위를 동시에 받고 교수가 된 러시아 법철학자이자 정치사상가다. 1905년 혁명기 급진적 입장에서 출발했으나 10월 혁명을 '국가적 재앙'으로 규정하고 반볼셰비키 투쟁의 이론가로 전향, 1922년 '철학자의 배'로 추방되었다. 망명 중 『힘으로 악에 저항함』(1925)에서 무력 저항을 정당화했으며 파시즘을 볼셰비즘에 대항하는 '건강한 현상'으로 옹호했다. 사후 저작은 솔제니친과 푸틴에 이르기까지 러시아 민족주의·권위주의 담론의 핵심 원천이 되었다.
알렉산드로스 파파고스는 그리스 왕정과 메탁사스 독재체제에 충성한 직업군인이자 제2차 세계대전기 그리스 육군 지휘관이었다. 그는 1940년 이탈리아의 알바니아 방면 침공을 저지하고 반격을 조정했지만, 독일의 개입이 임박한 뒤에도 주력을 알바니아 전선에 남겨 메탁사스 방어선의 방어를 어렵게 했다. 점령기에 저항조직을 만들었다가 체포되어 강제수용되었고, 전후에는 내전에서 정부군을 지휘한 뒤 총리가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