트로츠키, 『배반당한 혁명』(발췌)
인물레프 트로츠키, 이오시프 스탈린, 블라디미르 레닌, 크리스티안 라콥스키, 나데즈다 크룹스카야, 그리고리 지노비예프, 레프 카메네프, 니콜라이 부하린, 알렉세이 리코프, 미하일 톰스키, 뱌체슬라프 몰로토프, 레프 소스놉스키, 빅토르 세르주, 세르게이 키로프, 안드레이 안드레예프, 알렉산드르 케렌스키, 이라클리 체레텔리, 그라쿠스 바뵈프, 막시밀리앵 로베스피에르, 폴 바라스, 나폴레옹 보나파르트, 나폴레옹 3세, 유제프 피우수트스키, 장제스, 알렉산드르 트로야놉스키, 이반 마이스키, 블라디미르 포툠킨, 야코프 수리츠, 베니토 무솔리니, 아돌프 히틀러, 프랭클린 D. 루스벨트, 레옹 블룸 용어테르미도르, 프랑스 혁명의 테르미도르, 국가자본주의, 보나파르티즘, 좌익반대파, 우익반대파, 트로츠키주의, 연속혁명, 일국사회주의, 관료적 중앙집중주의, 파벌 금지 (1921년 제10차 당대회 결의), 레닌 입당 운동, 신경제정책(네프), 쿨라크, 탈쿨라크화, 스타하노프 운동, 소련 1936년 헌법 (스탈린 헌법), 제4인터내셔널 사건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 학습사회주의의 분기 2부 · 2장 스탈린의 소련은 노동자 국가일까, 국가자본주의일까?
제5장 소비에트 테르미도르
스탈린은 왜 이겼는가?
소련의 역사가는 지배 관료층의 정책이 큰 문제들에서 서로 모순되는 갈지자걸음의 연속이었다는 결론에 이르지 않을 수 없을 것이다. 그것을 “정세의 변화”로 설명하거나 정당화하려는 시도는 분명 성립하지 않는다. 지도한다는 것은 적어도 어느 정도는 내다본다는 뜻이다. 스탈린 분파는 매번 자기 머리 위로 쏟아져 내린 필연적인 발전의 결과를 조금도 내다보지 못했다. 분파는 그 결과에 행정적 반사작용의 방식으로 대응했다. 그때그때의 방향 전환을 뒷받침할 이론은 사후에 만들어 냈고, 어제 무엇을 가르쳤는지는 별로 개의치 않았다. 똑같이 반박할 수 없는 사실과 문서에 근거해 역사가는, 이른바 “좌익반대파”가 나라 안에서 진행되던 과정을 비할 데 없이 더 올바르게 분석했고 그 이후의 전개를 훨씬 더 정확하게 내다보았다고 결론지어야 할 것이다.
얼핏 보면 이 주장과 어긋나는 단순한 사실이 있다. 멀리 내다볼 줄 몰랐다는 분파가 언제나 이겼고, 더 통찰력 있었다는 그룹은 패배에 패배를 거듭했다는 사실이다. 저절로 떠오르는 이런 반론은 그러나 합리주의적으로 사고하며 정치를 논리적 논쟁이나 체스 시합으로 보는 사람에게만 설득력이 있다. 정치 투쟁은 그 본질상 논거의 투쟁이 아니라 이해관계와 세력의 투쟁이다. 물론 지도부의 자질이 충돌의 결과와 무관한 것은 결코 아니지만, 그것이 유일한 요인은 아니며 궁극적으로 결정적인 요인도 아니다. 더욱이 싸우는 진영은 저마다 자기 모습을 닮은 지도자를 요구한다.
2월 혁명이 케렌스키와 체레텔리를 권력에 올려놓은 것은 그들이 지배하던 차르 도당보다 “더 똑똑하거나” “더 능란해서”가 아니라, 적어도 한동안 그들이 낡은 체제에 맞서 일어선 혁명적 인민 대중을 대표했기 때문이다. 케렌스키가 레닌을 지하로 몰아넣고 다른 볼셰비키 지도자들을 감옥에 가둘 수 있었던 것은 개인적 자질에서 그들을 능가해서가 아니라, 그 무렵 노동자와 병사의 다수가 아직 애국적 소부르주아지를 따랐기 때문이다. 이 말이 여기 어울린다면, 케렌스키의 개인적 “장점”은 바로 그가 압도적 다수보다 더 멀리 보지 못했다는 데 있었다. 볼셰비키 역시 지도자들의 개인적 우월함으로 소부르주아 민주파를 이긴 것이 아니라 사회 세력의 새로운 결합으로 이겼다. 프롤레타리아트가 마침내 불만에 찬 농민을 이끌고 부르주아지에 맞설 수 있게 된 것이다.
프랑스 대혁명이 상승기에도 하강기에도 거쳐 간 단계들의 순서는, 차례로 바뀐 “지도자”와 “영웅”의 힘이 무엇보다 자기를 떠받친 계급과 계층의 성격에 들어맞는 데 있었다는 것을 그에 못지않게 설득력 있게 보여 준다. 무슨 절대적인 장점이 아니라 오직 이 부합이 그들 각자에게 일정한 역사 시기에 자기 개성의 각인을 남길 수 있게 해 주었다. 미라보, 브리소, 로베스피에르, 바라스, 보나파르트가 차례로 권력을 잡은 데에는 객관적 법칙성이 있으며, 그것은 역사의 주인공들 자신이 지닌 개별적 특징보다 헤아릴 수 없이 강력하다.
잘 알려져 있듯이, 지금까지 모든 혁명은 뒤이어 반동을, 심지어 반혁명을 불러왔다. 반동은 결코 국민을 출발점까지 완전히 되돌려 놓지는 않았지만, 언제나 인민이 쟁취한 것의 대부분을 빼앗아 갔다. 일반적으로 첫 반동의 물결에 희생된 것은 혁명의 공세기에 대중의 선두에 섰던 선구자, 발기인, 주동자였다. 반대로 맨 앞으로 나선 것은 어제의 혁명의 적들과 손잡은 이류 인물들이었다. 열린 정치 무대에서 벌어진 “거물”들의 극적인 결투 밑에서는 계급 사이 관계의 변동이, 그리고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것으로, 어제까지 혁명적이던 대중의 심리에 깊은 변화가 일어나고 있었다.
볼셰비키당과 노동계급의 활력은 어떻게 되었는가, 그들의 혁명적 주도성과 자기희생과 평민적 자부심은 어디로 갔는가, 왜 그 자리에 그토록 많은 비열함과 비겁함과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드러났는가 하고 당혹스러워하며 묻는 많은 동지들에게 답하면서, 라콥스키는 18세기 프랑스 혁명의 곡절을 끌어와 바뵈프의 예를 들었다. 바뵈프는 아베 감옥에서 나온 뒤, 파리 변두리 지역의 영웅적 민중이 어떻게 되었는가 하고 역시 당혹스러워하며 자문했다. 혁명은 개인의 것이든 집단의 것이든 인간의 에너지를 엄청나게 집어삼킨다. 신경은 견디지 못하고, 의식은 닳아 해지고, 성격은 마모된다. 사건이 너무 빨리 펼쳐져서 잃은 힘을 새로운 힘의 유입으로 메울 틈이 없다. 굶주림, 실업, 혁명 간부들의 죽음, 통치에서 대중의 배제, 이 모든 것이 파리 변두리를 육체적으로나 도덕적으로나 그토록 피폐하게 만들었기에, 그들이 새로 봉기하기까지는 30년이 넘게 걸렸다.
부르주아 혁명의 법칙이 프롤레타리아 혁명에는 “적용되지 않는다”는 소련 문헌의 공리 같은 주장에는 아무런 과학적 내용이 없다. 10월 변혁의 프롤레타리아적 성격은 세계 정세와 국내 세력의 특수한 상호관계에서 정해졌다. 그러나 계급들 자체는 차리즘과 뒤처진 자본주의의 야만적 환경 속에서 형성되었지, 사회주의 혁명의 필요에 맞춰 특별 주문으로 준비된 것이 결코 아니었다. 정반대였다. 여러 면에서 아직 뒤처져 있던 러시아 프롤레타리아트가 몇 달 사이에 반봉건 군주정에서 사회주의 독재로 역사상 유례없는 도약을 이루었기 때문에, 바로 그 때문에 그 자신의 대열 안에서 반동이 제 권리를 주장하게 될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반동은 잇따른 물결을 이루며 커졌다. 외부의 조건과 사건이 다투어 반동을 키웠다. 간섭에 간섭이 이어졌다. 서방으로부터 직접적인 도움은 없었다. 기대하던 풍요 대신 나라에는 불길한 궁핍이 오래 자리 잡았다. 게다가 노동계급의 가장 뛰어난 대표자들은 내전에서 목숨을 잃었거나, 몇 계단 위로 올라가 대중에게서 떨어져 나갔다. 그리하여 힘과 희망과 환상을 유례없이 쏟아부은 뒤에 피로와 쇠퇴, 그리고 변혁의 결과에 대한 노골적인 환멸의 긴 시기가 찾아왔다. “평민적 자부심”이 빠져나간 자리로 소심함과 출세주의가 밀려 들어왔다. 이 물결을 타고 새로운 지휘층이 떠올랐다.
수백만 적군(赤軍)의 동원 해제도 관료층의 형성에 적지 않은 역할을 했다. 승리한 지휘관들은 지방 소비에트와 경제와 교육 분야의 지도적 자리를 차지했고, 내전에서 성공을 가져다준 체제를 어디서나 끈질기게 도입했다. 이렇게 사방에서 대중은 나라를 지도하는 일에 실제로 참여하는 데서 점차 밀려났다.
프롤레타리아트 안의 내부 반동은 네프로 새 삶에 눈뜨고 점점 대담하게 고개를 들던 도시와 농촌의 소부르주아 계층에게 희망과 자신감을 엄청나게 불어넣었다. 처음에 프롤레타리아트의 대리인으로 생겨난 젊은 관료층은 이제 스스로를 계급들 사이의 중재자로 느끼기 시작했다. 관료층의 자립성은 달마다 커졌다.
같은 방향으로, 그것도 막강한 힘으로 작용한 것이 국제 정세였다. 세계 노동계급에게 무거운 타격이 떨어질수록 소련 관료층은 그만큼 더 자신감을 얻었다. 이 사실들 사이에는 시간적 연관만이 아니라 인과적 연관이 있으며, 그것도 양방향으로 그러하다. 관료층의 지도는 패배를 거들었고, 패배는 관료층의 상승을 도왔다. 1923년 불가리아 봉기의 궤멸과 독일 노동자 정당들의 불명예스러운 퇴각, 1924년 에스토니아 봉기 시도의 붕괴, 1926년 영국 총파업의 배신적인 청산과 피우수트스키 집권 때 폴란드 노동자 정당들의 부끄러운 처신, 1927년 중국 혁명의 끔찍한 궤멸, 그리고 그 뒤 독일과 오스트리아에서 겪은 더욱 참혹한 패배. 이것이 소련 대중의 세계 혁명에 대한 믿음을 죽이고, 관료층이 유일한 구원의 등대로서 점점 더 높이 올라서게 해 준 역사적 파국들이다.
지난 13년 동안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패배한 원인에 관해서는, 대중과 단절되고 뼛속까지 보수적인 크렘린 지도부가 모든 나라의 혁명운동에서 한 파멸적 역할을 밝히려 했던 저자의 다른 저작들을 참조하라고 할 수밖에 없다. 여기서 우리가 무엇보다 주목하는 것은, 유럽과 아시아에서 혁명이 끊임없이 패배하면서 소련의 국제적 처지는 약해졌지만 소련 관료층은 엄청나게 강해졌다는, 논란의 여지 없고 교훈적인 사실이다. 이 역사적 연쇄에서 특히 의미심장한 날짜가 둘 있다. 1923년 후반, 소련 노동자들의 관심은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을 향해 손을 뻗는 듯 보이던 독일에 열렬히 쏠려 있었다. 독일 공산당의 허둥지둥한 퇴각은 소련 노동자 대중에게 더없이 쓰라린 실망을 안겼다. 소련 관료층은 곧바로 “연속혁명”에 반대하는 캠페인을 열고 좌익반대파에게 첫 번째 잔인한 타격을 가한다. 1926~1927년 소련 주민은 다시 희망의 물결을 겪는다. 이번에는 모든 눈이 중국 혁명의 드라마가 펼쳐지던 동방으로 향한다. 좌익반대파는 타격에서 회복해 새 지지자들의 대열을 끌어모은다. 1927년 말 중국 혁명은 망나니 장제스에게 궤멸당한다. 코민테른 지도부가 중국의 노동자와 농민을 말 그대로 그의 손에 넘겨준 것이다. 차가운 환멸의 물결이 소련 대중 사이를 지나간다. 신문과 집회에서 고삐 풀린 박해를 벌인 끝에 관료층은 마침내 1928년 좌익반대파에 대한 대량 체포를 결행한다.
볼셰비키-레닌주의자의 깃발 아래 수만 명의 혁명 투사가 결집한 것은 사실이다. 선진 노동자들은 반대파에게 틀림없는 공감을 품고 있었다. 그러나 그 공감은 수동적인 것으로 머물렀다. 새로운 투쟁으로 상황을 진지하게 바꿀 수 있다는 믿음이 대중에게는 이미 없었다. 그사이 관료층은 되풀이했다. “반대파는 국제 혁명을 위해 우리를 혁명전쟁에 끌어들이려 한다. 동란은 이제 그만! 우리는 쉴 권리를 얻었다. 우리 힘으로 사회주의 사회를 건설하겠다. 너희 지도자인 우리를 믿어라!” 이 안정의 설교는 군사와 민간의 기관원들을 단단히 결속시켰고, 지친 노동자들과 특히 농민 대중에게서 틀림없는 반향을 얻었다. 반대파가 정말로 “연속혁명”의 이념을 위해 소련의 이익을 희생할 준비가 되어 있는 것은 아닐까, 하고 그들은 스스로에게 물었다. 실제로 투쟁은 소비에트 국가의 사활적 이익을 두고 벌어지고 있었다. 독일에서 코민테른의 그릇된 정책은 10년 뒤 히틀러의 승리, 곧 서쪽에서 오는 무서운 전쟁 위험을 보장했고, 그에 못지않게 그릇된 중국 정책은 일본 제국주의를 강화하고 동쪽에서 오는 위험을 크게 앞당겼다. 그러나 반동의 시기를 무엇보다 특징짓는 것은 사고의 용기가 모자란다는 점이다.
반대파는 고립되었다. 관료층은 쇠가 달았을 때 두드렸다. 근로 대중의 당혹과 수동성을 이용하고, 그 가운데 가장 뒤처진 층을 선진층에 맞세우고, 쿨라크와 소부르주아 동맹자 일반에게 점점 더 대담하게 기대면서, 관료층은 몇 해 사이에 프롤레타리아트의 혁명적 전위를 분쇄했다.
대중이 알지 못하던 스탈린이 완성된 전략 계획으로 무장하고 무대 뒤에서 불쑥 나타났다고 생각한다면 순진한 일일 것이다. 아니다. 스탈린이 자기 길을 더듬어 찾아내기도 전에, 관료층이 먼저 그를 더듬어 찾아냈다. 스탈린은 관료층에게 필요한 모든 보증을 갖추고 있었다. 고참 볼셰비키의 위신, 굳센 성격, 좁은 시야, 그리고 자기 영향력의 유일한 원천인 기구와의 떼려야 뗄 수 없는 결합이었다. 그에게 쏟아진 성공은 처음에는 그 자신에게도 뜻밖이었다. 그것은 낡은 원칙과 대중의 통제에서 벗어나려 하고, 자기 내부 문제를 맡길 믿을 만한 중재자가 필요했던 새 지배층의 한결같은 호응이었다. 대중과 혁명의 사건들 앞에서는 이류 인물이던 스탈린은, 테르미도르 관료층의 의심할 바 없는 지도자로서, 그들 가운데 첫째가는 자로서 모습을 드러냈다.
새 지배층은 곧 자기 나름의 사상과 감정을, 그리고 더 중요하게는 자기 나름의 이해관계를 갖게 되었다. 오늘날 관료층의 나이 든 세대는 압도적 다수가 10월 혁명 때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에 서 있었거나(소련 대사들만 예로 들어도 트로야놉스키, 마이스키, 포툠킨, 수리츠, 힌추크 등이 그렇다), 좋게 보아야 투쟁에서 비켜서 있었다. 오늘날의 관료 가운데 10월의 나날에 볼셰비키 진영에 있던 사람들도 대부분 이렇다 할 역할을 하지 않았다. 젊은 관료들로 말하자면, 그들은 나이 든 관료들이 골라 길러 낸 사람들이고, 흔히 그들 자신의 자식들 가운데서 나왔다. 이런 사람들은 10월 혁명을 해낼 수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그 혁명을 착취하는 데에는 더할 나위 없이 잘 맞는 사람들이었다.
물론 두 역사적 장(章)이 바뀌는 데 개인적 계기가 영향을 미치지 않은 것은 아니다. 레닌의 병과 죽음은 틀림없이 결말을 앞당겼다. 레닌이 더 오래 살았더라면 관료 권력의 압박은 적어도 처음 몇 해 동안에는 더 느리게 진행되었을 것이다. 그러나 이미 1926년에 크룹스카야는 좌익반대파 사람들 사이에서 “일리치가 살아 있었다면 아마 벌써 감옥에 있을 거예요”라고 말했다. 레닌 자신의 우려와 불안한 예견이 그때 그녀의 기억 속에 아직 생생했고, 그녀는 거슬러 부는 역사의 바람과 흐름에 맞선 그의 개인적 전능함에 대해 아무런 환상도 품지 않았다.
관료층이 이긴 것은 좌익반대파만이 아니다. 관료층은 볼셰비키당을 이겼다. 국가 기관이 “사회의 머슴에서 사회의 주인으로” 바뀌는 것을 주된 위험으로 보았던 레닌의 강령을 이겼다. 관료층은 이 모든 적, 곧 반대파와 당과 레닌을 사상과 논거가 아니라 자기의 사회적 무게로 이겼다. 관료층의 납덩이 같은 엉덩이가 혁명의 머리보다 무거웠다. 이것이 소비에트 테르미도르의 수수께끼를 푸는 열쇠다.
볼셰비키당의 변질
10월의 승리를 준비하고 보장한 것은 볼셰비키당이었다. 소비에트 국가를 세우고 거기에 튼튼한 뼈대를 맞춰 넣은 것도 당이었다. 당의 변질은 국가 관료화의 원인이자 결과가 되었다. 그것이 어떻게 일어났는지 짧게라도 보여 줄 필요가 있다.
볼셰비키당의 내부 체제를 특징지은 것은 민주집중제의 방법이었다. 이 두 개념의 결합에는 조금의 모순도 없다. 당은 자기 경계가 언제나 엄격하게 그어져 있도록 경계했을 뿐 아니라, 그 경계 안에 들어온 모든 사람이 당 정책의 방향을 결정할 실질적 권리를 누리도록 경계했다. 비판과 사상 투쟁의 자유는 당내 민주주의에서 떼어 낼 수 없는 내용이었다. 볼셰비즘은 분파와 양립하지 않는다는 오늘날의 교리는 쇠퇴기의 신화다. 실제로 볼셰비즘의 역사는 분파 투쟁의 역사다. 하기야 세계를 뒤엎는 것을 목표로 삼고 대담한 부정자, 반역자, 투사들을 자기 깃발 아래 모으는 진정한 혁명 조직이 어떻게 사상적 충돌 없이, 그룹과 일시적 분파 없이 살아가고 발전할 수 있겠는가? 볼셰비키 지도부의 선견지명은 흔히 충돌을 누그러뜨리고 분파 투쟁의 기간을 줄일 수 있었지만, 그 이상은 아니었다. 중앙위원회는 이 들끓는 민주적 기반에 의지했고, 거기서 결정하고 명령할 용기를 길어 올렸다. 모든 결정적 단계에서 지도부가 옳았다는 것이 분명히 드러나면서 지도부는 높은 권위를, 곧 집중제의 귀중한 도덕적 자본을 얻었다.
그러므로 볼셰비키당의 체제는, 특히 권력을 잡기 전에는, 위에서 임명되어 명령에 따라 방향을 바꾸는 “지도자들”을 거느리고, 아래에는 오만하고 크렘린에는 비굴한, 통제받지 않는 기구를 거느린 오늘날 코민테른 지부들의 체제와 완전히 정반대였다. 그러나 권력 장악 후 첫 몇 해, 당에 이미 행정의 녹이 슬기 시작했을 때에도, 10~15년 뒤 당의 모습을 스크린에 비춰 보여 주는 사람이 있었다면 볼셰비키는 누구나, 스탈린도 예외 없이, 그를 악의적인 중상꾼이라고 불렀을 것이다!
레닌과 그 동료들이 늘 마음을 쓴 것은 볼셰비키 대열을 권력에 따르는 악덕에서 지키는 일이었다. 그러나 당 기구와 국가 기구가 지나치게 가까워지고 부분적으로는 아예 하나로 합쳐지면서, 이미 그 첫 몇 해에 당 체제의 자유와 탄력성은 틀림없는 손상을 입었다. 어려움이 커질수록 민주주의는 줄어들었다. 처음에 당은 소비에트의 틀 안에서 정치 투쟁의 자유를 지키기를 원했고 또 그러기를 바랐다. 내전은 이 셈법을 혹독하게 고쳐 놓았다. 반대 정당들은 하나씩 금지되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의 정신에 분명히 어긋나는 이 조치를 볼셰비즘의 지도자들은 원칙이 아니라 일시적인 자기방어 행위로 보았다.
집권당이 빠르게 커지고 과업이 새롭고 거대했으니 내부의 의견 대립이 생기는 것은 피할 수 없었다. 나라 안에 숨어 있던 반대 조류는 여러 경로로 유일한 합법 정치 조직에 압력을 가했고, 그것이 분파 투쟁을 더 날카롭게 만들었다. 내전이 끝날 무렵 분파 투쟁은 국가권력을 뒤흔들 만큼 날카로운 형태를 띤다. 1921년 3월, 적지 않은 볼셰비키까지 대열에 끌어들인 크론시타트 봉기의 나날에, 제10차 당대회는 분파 금지에, 곧 국가의 정치 체제를 집권당의 내부 생활에 옮겨 놓는 데에 기댈 수밖에 없다고 판단했다. 분파 금지는 이번에도 정세가 처음으로 진지하게 나아지면 없어져야 할 예외 조치로 여겨졌다. 동시에 중앙위원회는 새 규정을 극도로 신중하게 적용했고, 그것이 당의 내부 생활을 질식시키지 않도록 무엇보다 신경을 썼다.
그러나 원래의 구상에서는 어려운 사정에 마지못해 바친 공물에 지나지 않던 것이, 당의 내부 생활을 오로지 관리의 편의라는 관점에서만 다루기 시작한 관료층의 입맛에는 더없이 잘 맞았다. 이미 1922년, 잠시 건강이 나아졌을 때 레닌은 관료주의의 위협적인 성장에 경악했고, 국가 기구를 장악하기에 앞서 당 기구의 축이 된 스탈린 분파에 맞선 투쟁을 준비했다. 두 번째 발작과 뒤이은 죽음 때문에 그는 내부 반동과 힘을 겨룰 수 없었다.
이 시기까지 아직 지노비예프, 카메네프와 손잡고 나아가던 스탈린은 이제부터 모든 노력을 당 기구를 평당원의 통제에서 해방하는 데 쏟는다. 중앙위원회의 “안정”을 위한 이 투쟁에서 스탈린은 동맹자들보다 더 일관되고 더 자신만만했다. 그는 국제적 과제에서 눈을 뗄 필요가 없었다. 애초에 그런 일에 관여한 적이 없었기 때문이다. 새 지배층의 소부르주아적 시야는 바로 그 자신의 시야였다. 그는 사회주의 건설의 과제가 민족적이고 행정적인 성격을 띤다고 굳게 믿었다. 그는 코민테른을 필요악으로, 될 수 있으면 대외 정책의 목적에 이용해야 할 것으로 대했다. 그의 눈에 자기 당은 기구의 순종적 받침대로서만 가치가 있었다.
일국사회주의 이론과 동시에, 볼셰비즘에서는 중앙위원회가 전부이고 당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이론이 관료층을 위해 유통되기 시작했다. 어쨌든 둘째 이론은 첫째 이론보다 훨씬 성공적으로 실현되었다. 레닌의 죽음을 이용해 지배 그룹은 “레닌 입당”을 선포했다. 언제나 세심하게 지켜지던 당의 문이 이제 활짝 열렸고, 노동자와 사무원과 관리들이 떼 지어 들어왔다. 정치적 의도는 혁명적 전위를, 경험도 자립성도 없지만 대신 윗사람에게 복종하는 오랜 습관을 지닌 날것의 인적 재료 속에 녹여 버리는 데 있었다. 의도는 성공했다.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통제에서 관료층을 해방함으로써 “레닌 입당”은 레닌의 당에 치명타를 가했다. 기구는 필요한 독립성을 손에 넣었다. 민주집중제는 관료적 중앙집중주의에 자리를 내주었다. 이제 당 기구 자체 안에서 위에서 아래로 근본적인 물갈이가 이루어진다. 볼셰비키의 으뜸가는 미덕은 복종이라고 선포된다. 반대파와의 투쟁이라는 깃발 아래 혁명가들이 관리들로 교체된다. 볼셰비키당의 역사는 급속한 퇴화의 역사가 된다.
펼쳐지던 투쟁의 정치적 의미는 많은 사람에게 가려져 있었다. 좌파, 중앙파, 우파 세 그룹의 지도자들이 모두 같은 크렘린 참모부, 곧 정치국에 속해 있었기 때문이다. 피상적인 사람들에게는 문제가 그저 개인적 경쟁, 레닌의 “유산”을 둘러싼 다툼으로 보였다. 그러나 철의 독재라는 조건에서 사회적 적대는 처음에는 사실상 집권당의 기관들을 통하지 않고는 드러날 수 없었다. 많은 테르미도르파는 한때 자코뱅파 출신이었고, 보나파르트도 젊은 시절 자코뱅파에 가담했다. 제1통령이자 프랑스인의 황제는 나중에 옛 자코뱅파 가운데서 가장 충직한 하인들을 뽑았다. 시대는 바뀌고 자코뱅파도 함께 바뀐다. 20세기의 자코뱅파도 마찬가지다.
레닌 시대의 정치국 가운데 지금 남아 있는 것은 스탈린 한 사람뿐이다. 두 위원, 기나긴 망명 시절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였던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는 저지른 적도 없는 범죄로 10년 징역을 살고 있다. 다른 세 위원, 리코프와 부하린과 톰스키는 지도부에서 완전히 밀려났으나 순종한 대가로 이류 자리를 차지하고 있다. 끝으로 이 글을 쓰는 사람은 망명 중이다. 온갖 노력에도 끝내 테르미도르에 적응하지 못한 레닌의 미망인 크룹스카야도 눈 밖에 나 있다.
지금의 정치국원들은 볼셰비키당의 역사에서 이류 자리를 차지했던 사람들이다. 혁명 첫 몇 해에 누군가 그들의 장래 출세를 예언했다면 가장 먼저 놀란 것은 그들 자신이었을 테고, 그 놀라움에는 거짓 겸손이 없었을 것이다. 그런 만큼 정치국은 언제나 옳으며 어쨌든 누구도 정치국에 맞서 옳을 수 없다는 규칙이 오늘날 더욱 무자비하게 작동한다. 그러나 정치국 자체도, 틀릴 수 없고 따라서 자기 자신에 맞서 옳을 수도 없는 스탈린에 맞서서는 옳을 수 없다.
당내 민주주의의 요구는 줄곧 모든 반대 그룹의 끈질기고도 절망적인 구호였다. 우리가 알고 있는 좌익반대파 강령은 1927년에, 형법에 “비판을 이유로 노동자를 직접 또는 위장된 방식으로 박해하는 모든 행위를 중대한 국가 범죄로 처벌하는 특별 조항”을 넣으라고 요구했다. 그 대신 형법에서 찾아낸 것은 반대파 자체를 겨냥한 조항이었다.
당내 민주주의는 나이 든 세대의 기억 속에 추억으로만 남았다. 그와 함께 소비에트, 노동조합, 협동조합, 문화·체육 단체의 민주주의도 과거의 일이 되었다. 모든 것과 모든 사람 위에 당 서기들의 위계가 무제한으로 군림한다. 이 체제는 독일에서 그 낱말이 들어오기 몇 해 전에 이미 “전체주의적” 성격을 띠었다. 라콥스키는 1928년에 이렇게 썼다. “생각하는 공산주의자를 기계로 바꾸고 의지와 성격과 인간적 존엄을 죽이는 타락시키는 방법을 써서, 최상층은 갈아 치울 수도 손댈 수도 없는 과두 집단으로, 계급과 당을 대신하는 과두 집단으로 바뀌는 데 성공했다.” 이 분노에 찬 글이 쓰인 뒤로 체제의 퇴화는 헤아릴 수 없이 더 나아갔다. 게페우는 당 내부 생활의 결정적 요인이 되었다. 몰로토프가 1936년 3월 프랑스 기자 앞에서 집권당에는 더 이상 분파 투쟁이 없다고 자랑할 수 있었다면, 그것은 오로지 오늘날 의견 차이가 정치경찰의 자동적인 개입으로 해결되기 때문이다. 옛 볼셰비키당은 죽었고, 어떤 힘도 그것을 되살리지 못할 것이다.
당의 정치적 퇴화와 나란히, 통제받지 않는 기구의 도덕적 부패가 진행되었다. 특권을 누리는 고관을 가리키는 “솝부르”, 곧 소비에트 부르주아라는 말은 아주 일찍부터 노동자들의 어휘에 들어왔다. 네프로 넘어가면서 부르주아적 경향은 더 기름진 토양을 얻었다. 1922년 3월 제11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지배층이 변질될 위험을 경고했다. 그는 패자가 더 높은 수준에 있으면 승자가 패자의 문화를 받아들인 일이 역사에 여러 번 있었다고 말했다. 러시아 부르주아지와 관료의 문화는 사실 보잘것없었다. 그러나 아아, 새 지배층은 흔히 그 문화 앞에서조차 무릎을 꿇는다. 모스크바에서는 “책임 있는 공산주의자 4,700명”이 국가 기계를 지도한다. “누가 누구를 이끄는가? 공산주의자들이 이끈다고 말할 수 있을지 나는 매우 의심스럽다…” 그 뒤의 당대회에서 레닌은 더 이상 연설할 수 없었다. 그러나 활동하던 마지막 몇 달 동안 그의 모든 생각은 관료층의 억압과 전횡과 부패에 맞서 노동자들에게 경고하고 그들을 무장시키는 데 쏠려 있었다. 그러나 그가 볼 수 있었던 것은 병의 첫 증상들뿐이었다.
우크라이나 인민위원회의 의장을 지냈고 나중에 런던과 파리 주재 소련 대사를 지낸 크리스티안 라콥스키는 이미 유형 중이던 1928년, 소련 관료층에 관한 짧은 연구를 벗들에게 돌렸다. 우리는 위에서 이 글을 여러 번 인용했는데, 이 문제에 관해 쓰인 모든 글 가운데 지금도 가장 뛰어나기 때문이다. 라콥스키는 이렇게 쓴다. “레닌의 생각에서도, 우리 모두의 생각에서도, 당 지도부의 과제는 바로 당과 노동계급을 권력에 따르는 특권과 이점과 특혜의 부식 작용에서, 권력이 옛 귀족과 소시민의 잔재와 가까워지는 데서, 네프의 타락시키는 영향에서, 부르주아 풍속과 그 이데올로기의 유혹에서 지키는 데 있었다… 솔직하게, 분명하게, 큰 소리로 말해야 한다. 당 기구는 이 과제를 해내지 못했고, 지키고 교육하는 이 이중의 역할에서 완전한 무능을 드러냈으며, 실패했고, 파산했다.”
사실 관료적 탄압에 꺾인 라콥스키 자신은 나중에 자기 비판적 견해를 철회했다. 그러나 일흔 살의 갈릴레이도 신성한 종교재판의 손아귀에서 코페르니쿠스의 체계를 철회해야 했지만, 그래도 지구는 계속 돌았다. 우리는 예순 살 라콥스키의 참회를 믿지 않는다. 그 자신이 그런 참회를 여러 번 철저하게 분석해 보였기 때문이다. 그의 정치적 비판으로 말하자면, 그것은 저자의 주관적 꿋꿋함보다 객관적 발전의 사실들 속에서 훨씬 더 믿을 만한 버팀목을 찾았다.
권력 장악은 프롤레타리아트와 다른 계급들의 관계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 자신의 내부 구조도 바꾼다. 권력 행사는 특정한 사회 집단의 전문 직업이 되고, 그 집단은 자기 사명을 높이 평가할수록 그만큼 더 조급하게 자기 자신의 “사회문제”를 풀려고 한다. “집권당원에게 자본주의적 축적이 허용되지 않는 프롤레타리아 국가에서 분화는 처음에는 기능적이지만 나중에는 사회적인 것으로 바뀐다. 나는 계급적이라고 말하지 않는다. 사회적이라고 말한다…” 라콥스키는 이렇게 설명한다. “자동차와 좋은 아파트를 쓸 수 있고 정기 휴가를 받으며 당 최고액 봉급을 받는 공산주의자의 사회적 지위는, 한 달에 50~60루블을 받으며 탄광에서 일하는 공산주의자의 지위와 다르다.”
권력을 잡은 자코뱅파가 부패한 원인으로 부의 추구, 청부와 납품 따위에의 참여를 열거하면서, 라콥스키는 새 지배층의 변질에 옛 귀족 부인들이 적잖이 이바지했다는 바뵈프의 흥미로운 지적을 인용한다. 자코뱅파는 그들에게 사족을 못 썼다. 바뵈프는 외친다. “소심한 평민들이여, 무엇을 하는가? 오늘은 그들이 너희를 껴안지만 내일은 목 졸라 죽일 것이다.” 소련 지배층의 아내들을 조사해 보면 비슷한 그림이 나올 것이다. 이름난 소련 언론인 소스놉스키는 소련 관료층의 풍속이 형성되는 데 “자동차와 하렘 요인”이 한 특별한 역할을 지적했다. 사실 라콥스키에 이어 소스놉스키도 그 뒤 참회했고 시베리아에서 돌아왔다. 그러나 그 때문에 관료층의 풍속이 나아지지는 않았다. 오히려 그 참회 자체가 깊어 가는 타락의 증거다.
원고 형태로 손에서 손으로 돌던 소스놉스키의 옛 글들에는 새 지배층의 생활에서 잊을 수 없는 일화들이 흩어져 있으며, 그것은 승자가 패자의 풍속을 얼마나 깊이 받아들였는지 생생하게 증언한다. 그러나 지난 몇 해로 돌아가지 않기 위해(소스놉스키는 1934년에 채찍을 완전히 거문고로 바꾸었다), 소련 신문에서 아주 최근의 예만 들어 보자. 그것도 남용이나 이른바 “지나침”이 아니라 오히려 공식 여론이 합법으로 인정한 일상의 현상을 고르겠다.
모스크바의 한 공장 지배인, 이름 있는 공산주의자가 『프라우다』에서 자기가 이끄는 기업의 문화적 성장을 자랑한다. “기계공이 전화를 한다. ‘어떻게 할까요, 지금 평로를 세울까요, 아니면 기다릴까요?’ … 나는 대답한다. ‘기다려.’ …” 기계공은 지배인에게 더없이 공손하게 “어떻게 할까요”라고 말하는데, 지배인은 그에게 반말로 대답한다. 어떤 문화적 자본주의 나라에서도 있을 수 없는 이 점잖지 못한 대화를 지배인 자신이 『프라우다』 지면에서 아주 정상적인 일인 양 들려준다. 편집자는 알아차리지 못하니 이의를 달지 않고, 독자는 익숙해졌으니 항의하지 않는다. 우리도 놀라지 말자. 크렘린의 성대한 회의에서 “지도자들”과 인민위원들은 훈장을 받으라고 특별히 초대된 부하 공장 지배인, 콜호스 의장, 작업반장, 여성 노동자들에게 반말을 한다. 차르 러시아에서 가장 인기 있던 혁명 구호 가운데 하나가 윗사람이 아랫사람에게 반말하는 것을 없애라는 요구였다는 사실을 어찌 떠올리지 않겠는가!
고관대작다운 무례함으로 사람을 놀라게 하는 권력과 “인민” 사이의 크렘린 대화는, 10월 변혁과 생산수단의 국유화와 집단화와 “계급으로서의 쿨라크 청산”에도 불구하고, 사람과 사람 사이의 관계가, 그것도 소련 피라미드의 맨 꼭대기에서, 아직 사회주의 수준으로 올라서지 못했을 뿐 아니라 많은 점에서 문화적 자본주의에도 뒤처져 있다는 것을 틀림없이 증언한다. 지난 몇 해 동안 이 가장 중요한 영역에서 엄청난 후퇴가 일어났다. 진짜 러시아식 야만이 재발한 원천은 의심할 여지 없이 소비에트 테르미도르다. 테르미도르는 교양 없는 관료층에게 완전한 독립성과 무통제를 가져다주었고, 대중에게는 익히 아는 복종과 침묵의 계명을 가져다주었다.
우리는 독재라는 추상을 민주주의라는 추상에 맞세워 순수이성의 저울로 그 성질을 다는 것과는 거리가 멀다. 변하지 않는 것은 변화뿐인 이 세상에서 모든 것은 상대적이다. 볼셰비키당의 독재는 역사상 가장 강력한 진보의 도구 가운데 하나였다. 그러나 여기서도 시인의 말처럼 “이성은 헛소리가 되고 선행은 재앙이 된다”(Vernunft wird Unsinn, Wohltat Plage)[2]. 반대 정당의 금지는 분파 금지를 불러왔고, 분파 금지는 무오류의 지도자와 다르게 생각하는 것의 금지로 끝났다. 경찰이 만든 당의 일체성은 관료적 면책을 불러왔고, 그것이 온갖 방종과 부패의 원천이 되었다.
제9장 소련이란 무엇인가?
소련의 사회관계
공업에서는 생산수단의 국가 소유가 거의 전면적으로 지배한다. 농업에서는 파종 면적의 10퍼센트 이하를 차지하는 소프호스에서만 국가 소유가 지배적이다. 콜호스에서는 협동조합 소유, 곧 집단 소유가 여러 비율로 국가 소유 및 개인 소유와 결합되어 있다. 법적으로 국가에 속하는 토지는 “영구” 이용권으로 콜호스에 넘겨졌는데, 이것은 집단 소유와 거의 다르지 않다. 트랙터와 복잡한 기계는 국가 소유이고, 더 작은 농기구는 콜호스에 속한다. 그 밖에 콜호스원은 저마다 개인 경영을 한다. 끝으로 농민의 10퍼센트 넘게가 여전히 개인농으로 남아 있다.
1934년 인구조사에 따르면 인구의 28.1퍼센트가 국영 기업과 기관의 노동자와 사무원이었다. 공업과 건설 노동자는 가족을 빼고 1935년에 750만 명에 이르렀다. 콜호스와 협동조합 수공업은 조사 당시 인구의 45.9퍼센트를 포괄했다. 학생, 적군 병사, 연금 생활자, 그 밖에 국가에 직접 의존하는 사람들이 3.4퍼센트였다. 모두 합쳐 인구의 74퍼센트가 “사회주의 부문”에 속했고, 이 74퍼센트가 나라 고정자본의 95.8퍼센트를 차지했다. 1934년에 개인 농민과 수공업자는 아직 22.5퍼센트였지만, 그들 손에 있는 것은 국민 자본의 4퍼센트를 조금 넘는 데 지나지 않았다!
1934년 이후로는 인구조사가 없었고, 다음 조사는 1937년에 있을 예정이다. 그러나 지난 2년 사이 사경제 부문이 “사회주의” 부문에 밀려 더욱 줄어들었으리라는 것은 의심할 여지가 없다. 관변 경제학자들의 계산으로는 개인 농민과 수공업자가 지금 인구의 약 10퍼센트, 곧 약 1,700만 명에 불과하며, 그들의 경제적 비중은 그 수보다 헤아릴 수 없이 더 낮아졌다. 중앙위원회 서기 안드레예프는 1936년 4월에 이렇게 말했다. “1936년 우리나라에서 사회주의 생산의 비중은 98.5퍼센트에 이를 것이다. 곧 보잘것없는 1.5퍼센트 남짓만이 아직 비사회주의 부문에 속한다.” 얼핏 보면 이 낙관적인 숫자는 사회주의가 “최종적이고 되돌릴 수 없는” 승리를 거두었다는 반박할 수 없는 증거 같다. 그러나 산술 뒤에 있는 사회적 현실을 보지 못하는 자에게 화 있을진저!
숫자 자체도 무리하게 끌어낸 것이다. 콜호스원의 텃밭 경영을 “사회주의” 부문에 넣었다는 것만 말해도 충분하다. 그러나 문제의 핵심은 여기에 있지 않다. 국영과 콜호스 경영 형태가 통계상 압도적이고 전혀 논란의 여지 없이 우세하다는 사실은, 그것이 그 자체로 미래에 아무리 중요하더라도,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다른 문제, 곧 “사회주의” 부문 자체 안에서, 그것도 농업만이 아니라 공업에서도 부르주아적 경향이 얼마나 강력한가 하는 문제를 없애 주지 않는다. 나라가 이룬 물질적 수준의 향상은 모든 사람에게 더 높은 욕구를 일깨우기에는 충분히 크지만, 그것을 채우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그러므로 경제 성장의 동학 자체에, 농민과 “정신” 노동 종사자만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트의 상층에서도 소부르주아적 욕망이 깨어나는 일이 들어 있다. 개인농과 콜호스원, 수공업자와 국영 공업을 덩그러니 맞세우는 것으로는 이 욕망이 지닌 폭발력을 조금도 짐작할 수 없다. 이 욕망은 나라 경제 전체에 스며 있으며, 한마디로 말하면 너나없이 사회에 되도록 적게 주고 사회에서 되도록 많이 받으려는 열망으로 나타난다.
소비와 사재 축적의 과제를 푸는 데 쓰이는 에너지와 재간은 본래 의미의 사회주의 건설에 쓰이는 것보다 적지 않다. 특히 사회적 노동의 생산성이 극히 낮은 것은 이 때문이다. 국가가 원심력의 분자적 작용과 끊임없이 싸우는 동안, 지배층 자신은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개인 축적의 주된 저수지다. 새로운 법 규범으로 위장된 소부르주아적 경향은 사실 통계로 쉽게 측정되지 않는다. 그러나 그것이 경제생활에서 실제로 우세하다는 것을 무엇보다 증언하는 것은 바로 “사회주의” 관료층 자체다. 그것은 형용모순(contradictio in adjecto)[3]의 노골적인 예이며, 괴물 같고 점점 커지는 사회적 왜곡이며, 이번에는 그것이 사회에 악성 종기를 만드는 원천이 된다.
새 헌법은 뒤에서 보겠지만 관료층을 국가와, 국가를 인민과 동일시하는 데 온전히 기초하고 있으며, “국가 소유, 곧 전 인민의 재산”이라고 말한다. 이 동일시가 공식 교리의 근본적인 궤변이다. 마르크스 자신을 비롯해 마르크스주의자들이 노동자 국가와 관련해 국가 소유, 국민 소유, 사회주의 소유라는 말을 단순한 동의어로 썼다는 것은 부정할 수 없다. 큰 역사적 척도에서는 이런 말 쓰임에 별다른 불편이 없었다. 그러나 새로운 사회가 발전하는 첫 단계, 아직 보장되지 않은 단계, 더구나 고립되어 있고 경제적으로 자본주의 나라들에 뒤처진 사회가 문제일 때에는 그것이 조잡한 오류와 노골적인 기만의 원천이 된다.
사적 소유가 사회적 소유가 되려면 애벌레가 나비가 되기 위해 번데기 단계를 거쳐야 하듯 반드시 국가 단계를 거쳐야 한다. 그러나 번데기는 나비가 아니다. 수많은 번데기가 나비가 되지 못하고 죽는다. 국가 소유는 사회적 특권과 차별이 사라지는 만큼만, 따라서 국가의 필요가 사라지는 만큼만 “전 인민적”이 된다. 달리 말하면 국가 소유는 국가 소유이기를 그치는 정도에 따라 사회주의 소유로 바뀐다. 거꾸로, 소비에트 국가가 인민 위로 높이 올라설수록, 재산의 수호자인 자신을 재산의 낭비자인 인민에게 사납게 맞세울수록, 국가 자신이 국가 소유의 사회주의적 성격에 반하는 증언을 그만큼 더 뚜렷하게 하는 셈이다.
“우리는 아직 계급의 완전한 철폐와는 거리가 멀다”고 공식 신문은 인정하면서, 그 근거로 아직 남아 있는 도시와 농촌, 정신노동과 육체노동의 차이를 든다. 이 순전히 학술적인 인정에는 관료층의 소득을 “정신” 노동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로 가릴 수 있다는 편리함이 있다. 진리보다 플라톤이 훨씬 소중한 “벗들” 역시 낡은 불평등의 잔재를 학술적으로 인정하는 데 그친다. 실제로는 무엇이든 떠맡는 “잔재”로는 소련의 현실을 도저히 설명할 수 없다. 도시와 농촌의 차이는 어떤 면에서는 누그러졌지만, 다른 면에서는 도시와 도시 문화, 곧 도시 소수의 안락이 유달리 빠르게 성장한 덕분에 크게 깊어졌다. 육체노동과 정신노동 사이의 사회적 거리는 학술 인력이 하층 출신으로 보충되었는데도 지난 몇 해 동안 줄어든 것이 아니라 넓어졌다. 모든 사람의 삶을 사방에서 규정하는 수천 년 묵은 카스트의 칸막이, 곧 세련된 도시민과 투박한 농사꾼, 학문의 마술사와 막노동꾼 사이의 칸막이는 과거로부터 다소 누그러진 형태로 그냥 남아 있는 것이 아니라 상당 부분 새로 되살아났고, 점점 더 도발적인 성격을 띠어 간다.
이름난 구호 “간부가 모든 것을 결정한다”는 스탈린 자신이 바랐을 것보다 훨씬 더 노골적으로 소련 사회의 본성을 드러낸다. 간부란 그 본질상 지배하고 명령하는 기관이다. “간부” 숭배란 무엇보다 관료, 행정, 기술 귀족의 숭배를 뜻한다. 간부를 발탁하고 기르는 일에서도, 다른 분야와 마찬가지로, 소련 체제는 선진 부르주아지가 자기 나라에서 오래전에 해결한 과제를 아직 해결해야 한다. 그러나 소련의 간부들은 사회주의의 깃발을 들고 나서므로 거의 신에게 바치는 것 같은 영예와 점점 더 높은 봉급을 요구한다. 이리하여 “사회주의” 간부의 분리는 부르주아적 불평등의 부활을 동반한다.
생산수단의 소유라는 관점에서 보면 원수와 하인, 트러스트의 우두머리와 막노동꾼, 인민위원의 아들과 부랑아 사이에는 마치 아무 차이도 없는 것 같다. 그런데 앞의 사람들은 귀족풍의 아파트에 살고, 나라 곳곳에 별장을 여러 채 쓰고, 최고급 자동차를 마음대로 부리며, 자기 장화를 어떻게 닦는지 잊은 지 오래다. 뒤의 사람들은 흔히 칸막이도 없는 목조 바라크에 살며 반쯤 굶주린 채 살아가고, 장화를 닦지 않는 것은 오로지 맨발로 다니기 때문이다. 고관에게 이 차이는 주목할 가치도 없어 보인다. 막노동꾼에게는 이 차이가 매우 본질적으로 보이며, 거기에는 근거가 없지 않다.
물론 피상적인 “이론가”들은 재화의 분배가 생산에 비해 이차적인 요인이라며 스스로를 위로할 수 있다. 그러나 여기서도 상호작용의 변증법은 고스란히 힘을 발휘한다. 개인의 생활 조건의 차이가 어느 쪽으로 발전하느냐에 따라 국유화된 생산수단의 최종 운명이라는 문제도 결국 결판날 것이다. 기선이 집단 소유라고 선포되었는데 승객들은 여전히 일등, 이등, 삼등 칸으로 나뉘어 있다면, 삼등 칸 승객들에게는 생활 조건의 차이가 법적인 소유의 교체보다 헤아릴 수 없이 더 큰 의미를 지닐 것은 분명하다. 반대로 일등 칸 승객들은 커피와 시가 사이에서 집단 소유가 전부이고 편안한 선실은 아무것도 아니라는 생각을 설교할 것이다. 여기서 자라나는 적대는 불안정한 집단을 폭파할 수 있다.
소련 신문은 모스크바 동물원에서 한 소년이 “이 코끼리는 누구 거예요?” 하고 물어 “나라 거란다”라는 대답을 듣자 곧바로 “그럼 조금은 내 것이기도 하네요”라는 결론을 내렸다는 이야기를 즐겨 전했다. 그러나 실제로 코끼리를 나눈다면 선택된 이들의 몫으로는 귀한 상아가 돌아가고, 몇몇은 코끼리 햄을 맛볼 것이며, 다수는 내장이나 발굽으로 만족해야 할 것이다. 몫을 받지 못한 소년들이 국가 소유를 자기 소유와 동일시할 리는 거의 없다. 부랑아들은 국가에서 훔친 것만을 “자기 것”으로 여긴다. 동물원의 꼬마 “사회주의자”는 틀림없이 “국가는 곧 나다!”[4]라는 공식으로 생각하는 데 익숙한 어느 이름난 고관의 아들이었을 것이다.
알기 쉽게 사회주의적 관계를 증권거래소의 말로 옮겨 보면, 시민들을 나라의 부를 소유한 주식회사의 참여자로 그려 볼 수 있다. 소유가 전 인민적 성격을 띤다는 것은 “주식”이 똑같이 나뉘어 있고, 따라서 모든 “주주”가 같은 몫의 배당을 받을 권리가 있다는 것을 전제한다. 그러나 시민들은 국민적 기업에 “주주”로서만이 아니라 생산자로서도 참여한다. 우리가 사회주의라고 부르기로 한 공산주의의 낮은 단계에서는 노동의 보수가 아직 부르주아적 규범에 따라, 곧 숙련도와 노동 강도 따위에 따라 지급된다. 그러므로 이론적으로 각 시민의 소득은 두 부분, a + b, 곧 배당 더하기 임금으로 이루어진다. 기술이 높고 경제 조직이 완전할수록 a가 b에 비해 차지하는 자리가 커지고, 개인 노동의 차이가 생활수준에 미치는 영향은 작아진다. 소련에서 임금 격차가 자본주의 나라들보다 작지 않고 오히려 크다는 사실에서, 소련 시민의 주식은 고르지 않게 나뉘어 있고 시민의 소득에는 고르지 않은 임금과 함께 고르지 않은 배당 몫이 들어간다는 결론을 내릴 수밖에 없다. 막노동꾼은 다른 조건이 같다면 자본주의 기업에서도 받았을 최저 임금 b만을 받는 데 비해, 스타하노프 노동자나 관리는 2a + B나 3a + B 따위를 받으며, B는 다시 2b, 3b 따위와 같을 수 있다. 달리 말하면 소득의 차이는 개인 생산량의 차이만이 아니라 남의 노동 생산물을 위장된 방식으로 전유하는 것으로도 정해진다. 특권을 누리는 소수 주주가 몫을 빼앗긴 다수를 희생시켜 살아간다.
소련의 막노동꾼이 같은 수준의 기술과 문화라면 자본주의 기업에서 받았을 것보다 더 많이 받는다고, 곧 그래도 그가 작은 주주라고 가정한다면, 그의 임금은 a + b와 같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더 높은 범주의 소득은 3a + 2b, 10a + 15b 따위의 공식으로 나타날 것이다. 이것은 막노동꾼이 주식 1주를, 스타하노프 노동자가 3주를, 전문가가 10주를 가지며, 그 밖에 본래 의미의 그들의 임금은 1 : 2 : 15의 비율이라는 뜻이다. 이런 조건에서 신성한 사회주의 소유를 기리는 찬가는 평노동자나 콜호스원보다 공장 지배인이나 스타하노프 노동자에게 훨씬 더 설득력 있게 들린다. 그런데 평범한 근로자가 사회의 압도적 다수를 이루며, 사회주의는 새 귀족이 아니라 바로 그들을 위해 마련된 것이다.
“우리나라의 노동자는 임금 노예가 아니며, 노동력이라는 상품의 판매자가 아니다. 그는 자유로운 근로자다.”(『프라우다』) 지금으로서는 이 비장한 공식은 용납할 수 없는 허풍이다. 공장을 국가의 손에 넘긴 것은 노동자의 처지를 법적으로만 바꾸었을 뿐이다. 실제로 그는 정해진 시간 동안 정해진 보수를 받고 일하며 궁핍 속에 살아갈 수밖에 없었다. 노동자는 전에 당과 노동조합에 걸던 희망을 혁명 뒤에는 자기가 만든 국가에 옮겨 걸었다. 그러나 이 도구가 할 수 있는 유익한 일은 기술과 문화의 수준에 갇혀 있었다. 그 수준을 높이려고 새 국가는 근로자의 근육과 신경을 다그치는 낡은 방법에 기대기 시작했다. 감독꾼의 무리가 늘어났다. 공업 관리는 극도로 관료적인 성격을 띠었다. 노동자들은 공장 지도에 대한 영향력을 모조리 잃었다. 성과급, 고된 물질적 생활 조건, 이동의 자유가 없는 상황, 모든 공장의 생활에 스며든 끔찍한 경찰 통제 아래서 노동자가 자신을 “자유로운 근로자”로 느끼기는 어렵다. 그는 관리에게서 상관을, 국가에서 주인을 본다. 자유로운 노동은 관료 국가의 존재와 양립하지 않는다.
필요한 수정을 거치면 이 말은 농촌에도 해당한다. 공식 이론에 따르면 콜호스 소유는 사회주의 소유의 특수한 형태다. 『프라우다』는 콜호스가 “본질적으로 이미 일관되게 사회주의적인 국영 기업과 같은 유형”이라고 쓰면서도, 바로 이어서 농업의 사회주의적 발전을 보장하는 것은 “볼셰비키당이 콜호스를 지도한다”는 사정이라고 덧붙인다. 곧 경제에서 정치로 우리를 돌려보낸다. 이것은 결국 사회주의적 관계가 아직은 사람들 사이의 실제 관계가 아니라 윗분들의 자애로운 마음속에 놓여 있다는 뜻이다. 근로자들은 그 마음을 의심해 보는 것이 아주 좋을 것이다. 실제로 콜호스 경영은 개인 경영과 국영 경영의 중간에 서 있으며, 콜호스 안의 소부르주아적 경향은 콜호스원의 텃밭, 곧 개인 경영의 빠른 발전으로 더할 나위 없이 잘 보완된다. 콜호스원의 개인 파종지는 콜호스 파종지 1억 800만 헥타르에 비해 400만 헥타르, 곧 4퍼센트에도 못 미치지만, 집약적인, 특히 채소 재배 덕분에 농민 가족에게 가장 중요한 소비재를 공급한다. 소와 양과 돼지의 대부분은 콜호스가 아니라 콜호스원의 소유다. 농민들은 너나없이 부업 경영을 주업으로 바꾸고, 수익이 적은 콜호스는 뒷전으로 밀어낸다. 반대로 노동일 보수가 높은 콜호스는 더 높은 사회적 계단으로 올라서서 부유한 농장주 범주를 만들어 낸다. 원심적 경향은 아직 사멸하기는커녕 오히려 강해지고 커진다. 어쨌든 콜호스는 지금까지 농촌 경제 관계의 법적 형태, 특히 소득 분배 방식만을 바꾸었을 뿐, 낡은 오두막, 텃밭, 가축 돌보기, 고된 농사꾼 노동의 리듬 전체를 거의 그대로 두었고, 국가에 대한 낡은 태도도 상당 부분 그대로 두었다. 사실 국가는 더 이상 지주와 부르주아지에게 봉사하지 않지만, 농촌에서 도시를 위해 너무 많이 거두어 가고 너무 많은 게걸스러운 관리를 먹여 살린다.
1937년 1월 6일로 예정된 소련 인구조사를 위해 다음과 같은 사회 범주 목록이 마련되었다. 노동자, 사무원, 콜호스원, 개인농, 수공업자, 자유직업인, 성직자, 그 밖의 비근로 분자. 공식 해설에 따르면 조사표에 다른 사회적 특성이 전혀 없는 것은 오로지 소련에 계급이 없기 때문이다. 실제로 조사표는 특권적인 상층과 가장 혜택받지 못한 하층을 감추려는 노골적인 계산으로 짜였다. 정직한 인구조사로 어렵지 않게 드러내야 하고 또 드러낼 수 있었을 소련 사회의 실제 계층은 다음과 같다. 부르주아적 생활 조건에서 사는 관료 상층, 전문가 등. 소부르주아지 수준의 중간층과 하층. 대략 같은 수준의 노동자 귀족과 콜호스 귀족. 중간 노동자 대중. 콜호스원 중간층. 개인 농민과 개인 수공업자. 룸펜프롤레타리아트로 넘어가는 노동자와 농민의 최하층. 부랑아, 매춘부 등.
새 헌법이 소련에서 “인간에 의한 인간의 착취의 철폐”가 이루어졌다고 선언할 때 그것은 거짓을 말하는 것이다. 새로운 사회적 분화는 인간 착취의 가장 야만적인 형태, 곧 개인적 시중을 들게 하려고 사람을 노예로 사들이는 일이 되살아날 조건을 만들었다. 새 인구조사의 목록에는 개인 하인이 전혀 언급되지 않는다. 그들은 분명 “노동자” 집단 속에 녹여 넣어야 할 것이다. 다른 한편 이런 질문이 빠져 있다. 사회주의 시민이 하인을 두고 있는가, 정확히 몇 명인가(하녀, 요리사, 유모, 보모, 운전사)? 개인용 자동차가 있는가, 방을 몇 칸 쓰는가 따위. 소득 규모에 관해서는 아예 아무것도 없다! 남의 노동을 착취하면 정치적 권리를 잃는다는 규칙을 되살린다면, 뜻밖에도 지배층의 정수가 소련 헌법의 문턱 밖에 남아야 한다는 사실이 드러날 것이다. 다행히도 권리의 완전한 평등이 확립되어 있다… 주인에게도 하인에게도.
소련 체제 안에서 서로 반대되는 두 경향이 자라난다. 소련 체제는 썩어 가는 자본주의와 달리 생산력을 발전시키는 한에서 사회주의의 경제적 토대를 준비한다. 상층의 비위를 맞추려고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을 점점 더 극단적인 데까지 밀고 나가는 한에서 자본주의 복고를 준비한다. 소유 형태와 분배 규범 사이의 모순은 끝없이 커질 수 없다. 부르주아적 규범이 어떤 형태로든 생산수단으로까지 퍼지든가, 아니면 거꾸로 분배 규범이 사회주의 소유에 맞춰지든가 해야 할 것이다.
관료층은 이 양자택일이 드러나는 것을 두려워한다. 언제 어디서나, 신문에서, 연설에서, 통계에서, 자기네 소설가들의 소설에서, 시인들의 시에서, 끝으로 새 헌법의 조문에서 관료층은 도시와 농촌의 실제 관계를 사회주의 어휘의 추상으로 세심하게 덮는다. 그래서 공식 이데올로기 전체가 그토록 생기 없고 거짓되고 재주 없는 것이다!
국가자본주의인가?
낯선 현상 앞에서 사람들은 흔히 낯익은 용어로 피신한다. 소비에트 체제의 수수께끼를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름으로 덮어 버리려는 시도가 있었다. 이 용어에는 그것이 도대체 무엇을 뜻하는지 아무도 정확히 모른다는 편리함이 있다. 처음에 “국가자본주의”라는 용어는 부르주아 국가가 운송 수단이나 공업 기업을 직접 자기 관리 아래 두는 모든 현상을 가리키려고 생겨났다. 그런 조치가 필요하다는 것 자체가, 생산력이 자본주의보다 더 커져서 실천에서 자본주의를 부분적인 자기부정으로 이끌고 있다는 징후의 하나다. 그러나 수명을 다한 체제는 자기부정의 요소를 품은 채로도 여전히 자본주의 체제로서 계속 존재한다.
사실 이론적으로는 부르주아지 전체가 하나의 주식회사로 조직되어 자기 국가를 통해 국민경제 전체를 관리하는 상황을 상상할 수 있다. 그런 체제의 경제 법칙에는 아무런 비밀도 없을 것이다. 잘 알려져 있듯이 개별 자본가는 자기 기업의 노동자가 직접 만들어 낸 잉여가치 부분이 아니라, 나라 전체에서 만들어지는 총잉여가치 가운데 자기 자본에 비례하는 몫만을 이윤으로 받는다. 완전한 “국가자본주의”에서는 평균이윤율의 법칙이 우회로, 곧 자본 사이의 경쟁을 거치지 않고 국가 회계를 통해 곧바로 직접 실현될 것이다. 그러나 그런 체제는 결코 존재한 적이 없고, 소유자들 자신 사이의 깊은 모순 때문에 앞으로도 결코 존재하지 않을 것이다. 더구나 자본주의적 소유의 보편적 담지자가 된 국가는 사회혁명에 너무나 유혹적인 대상이 될 것이다.
전쟁 이후, 특히 파시즘 경제의 실험 이후로 국가자본주의라는 이름 아래 가장 흔히 이해되는 것은 국가의 개입과 규제의 체계다. 프랑스 사람들은 이 경우 훨씬 더 알맞은 용어, “에타티슴”(국가주의)을 쓴다. 국가자본주의와 에타티슴 사이에는 분명 맞닿는 점들이 있다. 그러나 체계로서 보면 둘은 같다기보다 오히려 정반대다. 국가자본주의는 사적 소유를 국가 소유로 대체하는 것을 뜻하며, 바로 그 때문에 부분적인 성격을 유지한다. 에타티슴은 어디서든, 무솔리니의 이탈리아든 히틀러의 독일이든 루스벨트의 미국이든 레옹 블룸의 프랑스든, 사적 소유를 구하려는 목적으로 사적 소유의 토대 위에서 국가가 개입하는 것을 뜻한다. 정부의 강령이 무엇이든 에타티슴은 불가피하게 썩어 가는 체제의 손실을 튼튼한 어깨에서 약한 어깨로 떠넘기게 된다. 에타티슴이 소유자들을 완전한 몰락에서 “구하는” 것은 그들의 존재가 대소유를 유지하는 데 필요한 한에서뿐이다. 에타티슴의 계획 조치는 생산력 발전의 필요가 아니라, 사적 소유에 맞서 들고일어나는 생산력을 희생시켜서라도 사적 소유를 지키려는 근심이 명령한다. 에타티슴은 기술 발전의 억제, 생존 능력 없는 기업의 유지, 기생적 사회 계층의 영속화를 뜻한다. 한마디로 철두철미 반동적인 성격을 띤다.
“이탈리아 경제의 4분의 3이, 공업이든 농업이든, 국가의 손에 있다”(1934년 5월 26일)는 무솔리니의 말을 글자 그대로 받아들여서는 안 된다. 파시스트 국가는 기업의 소유자가 아니라 기업가들 사이의 중개자일 뿐이다. 이 둘은 같은 것이 아니다. 『포폴로 디탈리아』는 이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조합국가는 경제를 지도하고 통일로 이끌지만, 경제를 운영하거나 관리하지는 않는다(dirige e porta alla unità l’economia, ma non fa l’economia, non gestisce). 생산의 독점 아래에서 그렇게 한다면 그것은 다름 아닌 집산주의일 것이다.”(1936년 6월 11일) 농민과 소유자 일반에 대해 파시스트 관료층은 무서운 지배자로 나서고, 자본가 거물들에 대해서는 으뜸 대리인으로 나선다. 이탈리아의 마르크스주의자 페로치는 옳게 이렇게 쓴다. “조합국가는 독점자본의 점원에 지나지 않는다… 무솔리니는 기업의 모든 위험을 국가에 떠안기고 착취의 이익은 기업가들에게 남겨 준다.” 히틀러도 이 점에서 무솔리니의 발자취를 따른다. 파시스트 국가의 계급적 종속이 계획 원리의 한계와 그 실제 내용을 규정한다. 문제는 사회의 이익을 위해 자연에 대한 인간의 힘을 높이는 것이 아니라, 소수의 이익을 위해 사회를 착취하는 것이다. 바로 그 무솔리니가 이렇게 자랑했다. “만약 내가 이탈리아에 국가자본주의나 국가사회주의를 세우고 싶었다면(실제로는 그렇지 않지만), 나는 오늘 필요하고도 충분한 객관적 조건을 모두 갖추고 있다.” 단 하나를 빼고 말이다. 자본가계급의 수탈이다. 이 조건을 실현하려면 파시즘은 바리케이드의 반대편으로 옮겨 가야 할 텐데, 무솔리니가 서둘러 장담하듯 “실제로는 그렇지 않으며”, 물론 앞으로도 그렇지 않을 것이다. 자본가를 수탈하려면 다른 세력, 다른 간부, 다른 지도자가 필요하다.
역사상 처음으로 생산수단을 국가의 손에 집중시킨 것은 국가 트러스트화의 방법을 쓴 자본가들이 아니라 사회혁명의 방법을 쓴 프롤레타리아트였다. 이 짧은 분석만으로도 자본주의적 에타티슴을 소비에트 체제와 동일시하려는 시도가 얼마나 터무니없는지 알 수 있다. 앞의 것은 반동적이고 뒤의 것은 진보적이다.
관료층은 지배계급인가?
계급은 사회의 경제 체계 안에서 차지하는 자리, 무엇보다 생산수단에 대한 관계로 특징지어진다. 문명사회에서 소유 관계는 법률로 고정된다. 토지, 공업 생산수단, 운송과 교환 수단의 국유화가 대외 무역의 독점과 함께 소련 사회 체제의 토대를 이룬다. 프롤레타리아 혁명이 놓은 이 관계가, 우리가 보기에 프롤레타리아 국가로서 소련의 본성을 기본적으로 규정한다.
중개하고 조정하는 기능, 사회적 서열을 유지하려는 관심, 국가기구를 사적 목적에 이용한다는 점에서 소련 관료층은 다른 모든 관료층, 특히 파시스트 관료층과 닮았다. 그러나 거기에는 매우 큰 차이도 있다. 소비에트 체제 말고 어떤 체제에서도 관료층이 지배계급으로부터 이 정도의 독립성에 이른 적은 없다. 부르주아 사회에서 관료층은 자기 행정부를 날마다 통제할 수단을 셀 수 없이 지닌, 재산 있고 교육받은 계급의 이익을 대표한다. 반면 소련 관료층은 가난과 무지에서 겨우 벗어나고 있으며 지배와 명령의 전통이 없는 계급 위로 올라섰다. 파시스트들이 여물통에 다가가자 대부르주아들과 공동 이익, 우정, 혼인 따위의 끈으로 결합하는 데 비해, 소련 관료층은 곁에 국내 부르주아지가 없는 채로 부르주아 풍속을 받아들인다. 이런 뜻에서 그것이 관료층 이상의 무언가라는 것을 인정하지 않을 수 없다. 그것은 소련 사회에서 온전한 의미에서 유일하게 특권을 누리며 명령하는 계층이다.
그에 못지않게 중요한 차이가 또 있다. 소련 관료층은 프롤레타리아트를 정치적으로 수탈했는데, 그것은 자기 방법으로 프롤레타리아트의 사회적 성과를 지키기 위해서였다. 그러나 가장 중요한 생산수단이 국가의 손에 집중된 나라에서 관료층이 정치권력을 전유했다는 사실 자체가 관료층과 국민의 부 사이에 새로운, 일찍이 없던 상호관계를 만들어 낸다. 생산수단은 국가에 속한다. 그러나 국가는 말하자면 관료층에 “속한다”. 이 아주 새로운 관계가 근로자들의 저항을 받든 받지 않든 굳어지고 규범이 되고 합법화된다면, 그것은 결국 프롤레타리아 혁명의 사회적 성과를 완전히 청산하는 데 이를 것이다. 그러나 지금 그것을 말하는 것은 아무리 적게 말해도 시기상조다. 프롤레타리아트는 아직 마지막 말을 하지 않았다. 관료층은 아직 자기 지배를 위해 특수한 소유 형태라는 사회적 받침대를 만들지 못했다. 관료층은 자기 권력과 소득의 원천인 국가 소유를 지킬 수밖에 없다. 그 활동의 이런 측면에서 관료층은 여전히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도구로 남아 있다.
소련 관료층을 “국가 자본가” 계급으로 그리려는 시도는 처음부터 비판을 견디지 못한다. 관료층에게는 주식도 채권도 없다. 관료층은 자기에게 고유한 특수한 소유 관계와 상관없이 행정 위계의 질서에 따라 모집되고 보충되고 갱신된다. 개별 관리는 국가기구를 이용할 자기 권리를 상속으로 물려줄 수 없다. 관료층은 남용의 방식으로 특권을 누린다. 관료층은 자기 소득을 숨긴다. 관료층은 특수한 사회 집단으로서 자기가 아예 존재하지 않는 척한다. 관료층이 국민소득의 엄청난 몫을 전유하는 것은 사회적 기생의 성격을 띤다. 이 모든 것 때문에 소련의 명령하는 계층은 권력이 아무리 완전하고 아첨의 연막이 아무리 짙어도 극도로 모순되고 애매하며 떳떳하지 못한 처지에 놓인다.
부르주아 사회는 그 길에서 사회적 토대를 바꾸지 않은 채 수많은 정치 체제와 관료 카스트를 갈아 치웠다. 부르주아 사회는 자기 생산 방법의 우월함으로 농노제와 길드 관계의 복고에서 스스로를 지켰다. 국가권력은 자본주의 발전을 도울 수도 막을 수도 있었지만, 대체로 사적 소유와 경쟁을 토대로 한 생산력은 저절로 굴러갔다. 이와 달리 사회주의 혁명에서 나온 소유 관계는 그 담지자인 새 국가와 떼려야 뗄 수 없이 결합되어 있다. 사회주의적 경향이 소부르주아적 경향을 누르는 것은 경제의 자동성이 아니라(거기까지는 아직 멀다) 독재의 정치적 조치로 보장된다. 그러므로 경제의 성격은 전적으로 국가권력의 성격에 달려 있다.
소비에트 체제가 무너지면 계획경제도 불가피하게 무너지고, 그와 함께 국가 소유도 폐지될 것이다. 트러스트 사이의, 그리고 트러스트 안의 공장 사이의 강제적 연결은 무너질 것이다. 가장 잘나가는 기업들은 서둘러 독자적인 길로 나서려 할 것이다. 그들은 주식회사로 바뀌거나, 예컨대 노동자가 이윤에 참여하는 것 같은 다른 과도적 소유 형태를 찾을 수 있을 것이다. 동시에, 그리고 더 쉽게 콜호스가 무너질 것이다. 그러므로 지금의 관료 독재가 새로운 사회주의 권력으로 대체되지 않은 채 몰락한다면, 그것은 경제와 문화의 파국적인 쇠퇴 속에서 자본주의적 관계로 돌아가는 것을 뜻할 것이다.
그러나 계획경제를 유지하고 발전시키는 데 사회주의 권력이 아직 절대적으로 필요하다면, 지금의 소비에트 권력은 누구에게 기대고 있으며 그 정책의 사회주의적 성격은 얼마나 보장되어 있는가 하는 문제가 그만큼 더 중요해진다. 1922년 3월 제11차 당대회에서 레닌은 당과 작별하듯이 지휘층을 향해 이렇게 말했다. “역사는 온갖 종류의 변신을 안다. 신념, 헌신, 그 밖의 훌륭한 정신적 자질에 기대는 것은 정치에서 전혀 진지한 일이 아니다.” 존재가 의식을 규정한다. 지난 15년 사이 권력은 그 사상보다 사회적 구성을 더 깊이 바꾸었다. 관료층은 소련 사회의 모든 계층 가운데 자기 사회문제를 가장 잘 해결했고 지금 있는 그대로에 아주 만족하므로, 자기 정책의 사회주의적 방향을 보증하는 주관적 보장을 더는 아무것도 내놓지 않는다. 관료층이 계속 국가 소유를 지키는 것은 오직 프롤레타리아트를 두려워하는 한에서다. 이 구원의 두려움을 키우고 지탱하는 것은 비합법 볼셰비키-레닌주의자 당이다. 이 당은 테르미도르 관료층에 속속들이 스며든 부르주아 반동에 맞서는 사회주의적 경향의 가장 의식적인 표현이다. 의식적인 정치 세력으로서 관료층은 혁명을 배반했다. 그러나 다행히도 승리한 혁명은 강령과 깃발만도, 정치 제도만도 아니며 사회관계의 체계이기도 하다. 혁명을 배반하는 것으로는 모자란다. 혁명을 뒤엎기까지 해야 한다. 10월 혁명은 지배층에게 배반당했지만 아직 뒤엎어지지 않았다. 혁명은 큰 저항력을 지니고 있으며, 그 힘은 확립된 소유 관계, 프롤레타리아트의 살아 있는 힘, 그 가장 뛰어난 분자들의 의식, 세계 자본주의의 출구 없는 처지, 세계 혁명의 필연성과 겹친다.
소련의 성격 문제는 아직 역사가 결정하지 않았다
지금의 소련의 성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해 미래의 가설적 변형 두 가지를 끌어와 보자. 소련 관료층이 옛 볼셰비즘의 모든 자질을 지니면서 동시에 최근 시기의 세계적 경험으로 풍부해진 혁명 정당에게 타도되었다고 상상해 보자. 그런 정당은 노동조합과 소비에트의 민주주의를 되살리는 데서 시작할 것이다. 그 정당은 소비에트 정당들의 자유를 되살릴 수 있고 또 되살려야 할 것이다. 대중과 함께, 대중의 선두에 서서 그 정당은 국가기구를 가차 없이 숙청할 것이다. 관등과 훈장, 온갖 특권을 없애고, 노동 보수의 불평등을 경제와 국가기구에 꼭 필요한 정도로 제한할 것이다. 청년들에게 스스로 생각하고 배우고 비판하고 자라날 기회를 줄 것이다. 노동자와 농민 대중의 이익과 의지에 맞게 국민소득의 분배를 깊이 바꿀 것이다. 그러나 소유 관계에 관해서라면 새 권력은 혁명적 조치에 기댈 필요가 없을 것이다. 새 권력은 계획경제의 경험을 이어받아 더 발전시킬 것이다. 정치혁명, 곧 관료층의 타도 뒤에 프롤레타리아트는 경제에서 아주 중요한 개혁을 여럿 해야 하겠지만, 새로운 사회혁명을 할 필요는 없을 것이다.
거꾸로 지배하는 소련 카스트를 부르주아 정당이 타도한다면, 그 정당은 지금의 관료, 행정가, 기술자, 지배인, 당 서기, 특권적 상층 일반 가운데서 기꺼이 봉사할 하인을 적잖이 찾아낼 것이다. 물론 이 경우에도 국가기구의 숙청이 필요하겠지만, 부르주아 복고는 혁명 정당보다 아마 더 적은 사람을 숙청하면 될 것이다. 그러나 새 권력의 주된 과제는 생산수단에 대한 사적 소유의 회복일 것이다. 무엇보다 약한 콜호스에서 튼튼한 농장주가 떨어져 나오고, 강한 콜호스가 부르주아 유형의 생산협동조합, 곧 농업 주식회사로 바뀔 조건을 만드는 일이 필요할 것이다. 공업 분야에서 탈국유화는 경공업과 식품공업 기업에서 시작될 것이다. 계획 원리는 과도기 동안 국가권력과 개별 “조합”, 곧 소련의 산업 지휘관들, 그 옛 소유자인 망명자들, 외국 자본가들 가운데서 나올 잠재적 소유자들 사이의 일련의 타협으로 바뀔 것이다. 소련 관료층이 부르주아 복고를 위해 많은 것을 준비해 놓았는데도, 소유 형태와 경제 방법의 영역에서 새 체제는 개혁이 아니라 사회적 변혁을 해야 할 것이다.
그러나 혁명 정당도 반혁명 정당도 권력을 잡지 못한다고 가정해 보자. 관료층이 여전히 국가의 선두에 남는다. 이 조건에서도 사회관계는 굳어 버리지 않을 것이다. 관료층이 사회주의적 평등을 위해 평화롭게 자발적으로 자기 자신을 포기하리라고 기대할 수도 결코 없다. 지금 그런 조작의 너무나 뻔한 불편함에도 관등과 훈장을 도입할 수 있다고 여겼다면, 그다음 단계에서 관료층은 불가피하게 소유 관계에서 자기 받침대를 찾아야 할 것이다. 대관료에게는 지배적인 소유 형태가 무엇이든 필요한 소득만 보장해 주면 상관없다고 반박할 수도 있다. 이 추론은 관료의 권리가 불안정하다는 점만이 아니라 자손의 운명이라는 문제도 무시한다. 최근의 가족 숭배는 하늘에서 떨어진 것이 아니다. 특권은 자식에게 물려줄 수 없다면 값이 절반밖에 안 된다. 그러나 유언의 권리는 소유의 권리와 떼어 놓을 수 없다. 트러스트의 지배인인 것으로는 모자라고, 지분 소유자가 되어야 한다. 이 결정적인 영역에서 관료층이 이긴다면 그것은 관료층이 새로운 유산계급으로 바뀌는 것을 뜻할 것이다. 거꾸로 프롤레타리아트가 관료층에게 이긴다면 사회주의 혁명의 부활이 보장될 것이다. 그러므로 셋째 변형은 우리를 처음 두 변형으로, 단순하고 명료하게 하려고 우리가 출발점으로 삼았던 두 변형으로 되돌려 보낸다.
소비에트 체제를 과도적이라거나 중간적이라고 부르는 것은 자본주의(“국가자본주의”를 포함해)든 사회주의든 완결된 사회적 범주를 거부한다는 뜻이다. 그러나 이 규정은 그 자체로 전혀 충분하지 않을 뿐 아니라, 지금의 소비에트 체제에서는 사회주의로의 이행만 가능하다는 잘못된 관념을 불러일으킬 수도 있다. 실제로는 자본주의로의 후퇴도 충분히 가능하다. 더 완전한 규정은 어쩔 수 없이 복잡하고 무거운 성격을 띨 것이다.
소련은 자본주의와 사회주의 사이에 있는 모순적인 중간 사회로서, 거기서는 a) 생산력이 아직 국가 소유에 사회주의적 성격을 부여하기에는 턱없이 부족하다. b) 궁핍이 낳은 본원적 축적의 충동이 계획경제의 셀 수 없는 틈으로 터져 나온다. c) 부르주아적 성격을 유지하는 분배 규범이 사회의 새로운 분화의 바탕에 놓여 있다. d) 경제 성장은 근로자의 처지를 천천히 개선하면서 특권층의 빠른 형성을 돕는다. e) 사회적 적대를 이용해 관료층은 통제받지 않고 사회주의와 무관한 카스트로 바뀌었다. f) 지배 정당에게 배반당한 사회적 변혁은 아직 소유 관계와 근로자의 의식 속에 살아 있다. g) 쌓인 모순이 더 발전하면 사회주의로 이어질 수도, 자본주의로 되돌아갈 수도 있다. h) 자본주의로 가는 길에서 반혁명은 노동자의 저항을 꺾어야 할 것이다. i) 사회주의로 가는 길에서 노동자는 관료층을 타도해야 할 것이다. 궁극적으로 문제는 국내와 세계 무대 양쪽에서 살아 있는 사회 세력의 투쟁으로 결판날 것이다.
교조주의자들은 이런 선택적인 규정에 틀림없이 만족하지 않을 것이다. 그들은 “예면 예, 아니면 아니오” 하는 단정적인 공식을 원할 것이다. 사회 현상이 언제나 완결된 성격을 띤다면 사회학의 문제는 분명 더 단순할 것이다. 그러나 논리적 완결성을 좇느라 오늘 이미 도식을 깨뜨리고 내일은 도식을 완전히 뒤엎을 수 있는 요소들을 현실에서 지워 버리는 것만큼 위험한 일은 없다. 우리는 분석하면서, 선례가 없고 비슷한 예도 모르는 역동적인 사회구성체에 폭력을 가하는 일을 무엇보다 경계한다. 학문의 과제는 정치의 과제와 마찬가지로 완결되지 않은 과정에 완결된 정의를 내리는 데 있지 않고, 그 과정의 모든 단계를 추적하고, 그 진보적 경향과 반동적 경향을 가려내고, 그 상호작용을 드러내고, 가능한 발전의 변형들을 내다보며, 그 예견 속에서 행동의 받침대를 찾는 데 있다.
제11장 소련은 어디로 가는가?
위기의 체제로서의 보나파르티즘
우리가 적당한 곳에서 독자를 대신해 제기한 질문, 곧 지배 그룹이 헤아릴 수 없는 오류를 저지르면서도 어떻게 무제한의 권력을 손에 집중할 수 있었는가, 달리 말해 테르미도르파의 사상적 빈곤과 그들의 물질적 위력 사이의 모순을 어떻게 설명할 것인가 하는 질문에는 이제 훨씬 더 구체적이고 단정적으로 답할 수 있다. 소련 사회는 조화롭지 않다. 한 계급이나 계층에게 악덕인 것이 다른 계급이나 계층에게는 미덕이 된다. 사회주의적 사회 형태의 관점에서 보면 관료층의 정책은 모순과 불합리로 사람을 놀라게 하지만, 새로운 지휘층의 위력을 굳힌다는 관점에서 보면 같은 정책이 매우 일관된 것으로 드러난다.
쿨라크에 대한 국가의 지원(1923~1928년)은 사회주의의 미래에 치명적인 위험을 품고 있었다. 그 대신 소부르주아지의 도움으로 관료층은 프롤레타리아 전위의 손발을 묶고 볼셰비키 반대파를 짓밟을 수 있었다. 사회주의의 관점에서 “오류”였던 것이 관료층의 관점에서는 순전한 이득이었다. 쿨라크가 관료층 자신을 직접 위협하기 시작하자 관료층은 무기를 그에게 돌렸다. 중농에게까지 번진 쿨라크에 대한 허둥지둥한 보복은 경제에 외적의 침입 못지않은 대가를 치르게 했다. 그러나 관료층은 자기 진지를 지켜 냈다. 어제의 동맹자를 분쇄하자마자 관료층은 온 힘을 다해 새 귀족을 키우기 시작했다. 사회주의를 허무는 것인가? 물론이다. 그 대신 지휘하는 카스트는 강해진다. 소련 관료층은 전반적 정책 분야에서 지도자들이 저지른 가장 조잡한 오류에도, 그 대가로 지도자들이 자기 특권을 지키는 데 무조건 충성을 보인다면 기꺼이 눈을 감는다는 점에서 모든 지배계급과 닮았다. 새로운 주인들의 기분이 불안할수록, 그들이 새로 얻은 권리를 아주 조금이라도 위협하는 것에 대한 무자비함을 그만큼 더 높이 평가한다. 벼락출세자들의 카스트는 이런 관점에서 자기 지도자를 고른다. 여기에 스탈린 성공의 비밀이 있다.
그러나 관료층의 위력과 독립성의 성장에는 끝이 없지 않다. 원수들보다, 심지어 총서기들보다 강한 역사적 요인이 있다. 정확한 회계 없이는 경제의 합리화를 생각할 수 없다. 회계는 관료층의 전횡과 화해할 수 없다. 안정된 루블, 곧 “지도자들”에게서 독립된 루블을 되살리려는 근심이 관료층에게 강요되는 것은, 절대군주정이 그 시절 부르주아 시장의 발전과 양립할 수 없게 되었듯이, 관료층의 전제가 나라 생산력의 발전과 점점 더 모순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화폐 계산은 국민소득의 분배를 둘러싼 여러 계층의 투쟁을 더 공공연하게 만들지 않을 수 없다. 배급표 시절에는 거의 아무래도 좋던 임금 단가 문제가 이제 노동자에게 결정적인 의미를 띠며, 그와 함께 노동조합 문제도 그렇게 된다. 노동조합 관리를 위에서 임명하는 일은 점점 더 큰 반발에 부딪힐 것이다. 그뿐이 아니다. 성과급 아래서 노동자는 공장 경영이 제대로 짜이는 데 직접 이해관계를 갖는다. 스타하노프 노동자들은 생산 조직의 결함을 점점 더 크게 불평한다. 지배인과 기술자 따위의 임명에서 관료적 전제는 점점 더 견딜 수 없게 된다. 협동조합과 국영 상업은 전보다 훨씬 더 소비자에게 의존하게 된다. 콜호스와 개별 콜호스원은 국가와의 셈을 숫자의 언어로 옮기는 법을 배운다. 그들은 흔히 지방 관료 도당과 가깝다는 것이 유일한 장점인, 위에서 임명된 지도자를 고분고분 참으려 하지 않을 것이다. 끝으로 루블은 가장 은밀한 영역, 곧 관료층의 합법적이고 불법적인 소득에 빛을 비출 것을 약속한다. 이리하여 정치적으로 질식한 나라에서 화폐 유통은 반대 세력을 동원하는 중요한 지렛대가 되며, “계몽” 절대주의가 저물기 시작함을 예고한다.
공업의 성장과 농업을 국가 계획의 영역에 끌어들인 일이 지도의 과제를 엄청나게 복잡하게 만들고 질의 문제를 맨 앞에 내세우는 동안, 관료주의는 창조적 주도성과 책임감을 죽인다. 그것 없이는 질적 진보가 없고 있을 수도 없다. 관료주의의 상처는 대공업에서는 그리 뚜렷하지 않을지 모르지만, 그 대신 협동조합과 함께 경공업과 식품공업, 콜호스, 소공업, 곧 주민과 가장 가까운 모든 경제 부문을 갉아먹는다.
소련 관료층의 진보적 역할은 자본주의 기술의 가장 중요한 요소들을 소련에 옮겨 오는 시기와 겹친다. 혁명이 놓은 토대 위에서 빌려 오고 흉내 내고 옮겨 심고 접붙이는 막일이 이루어졌다. 기술이나 학문이나 예술 분야에서 무슨 새로운 말을 한다는 것은 아직 이야기조차 되지 않았다. 서방의 완성된 본보기를 따라 거대한 공장을 짓는 일은, 사실 비용이 세 배로 들기는 하지만, 관료적 명령으로도 할 수 있다. 그러나 갈수록 경제는 질의 문제에 부딪히며, 질은 그림자처럼 관료층에게서 빠져나간다. 소련의 생산물에는 무관심이라는 잿빛 낙인이 찍혀 있는 듯하다. 국유화된 경제의 조건에서 질은 생산자와 소비자의 민주주의, 비판과 주도의 자유, 곧 공포와 거짓과 아첨의 전체주의 체제와 양립할 수 없는 조건을 전제한다.
질의 문제 뒤에는 자립적인 기술적, 문화적 창조라는 개념으로 묶을 수 있는 더 복잡하고 거대한 과제들이 버티고 있다. 고대의 한 철학자는 싸움이 만물의 아버지라고 말했다. 사상의 자유로운 충돌이 불가능한 곳에서는 새로운 가치의 창조도 없다. 사실 혁명적 독재는 그 본질상 자유의 혹독한 제한을 뜻한다. 그러나 바로 그 때문에 혁명의 시대는 결코 문화적 창조에 직접 유리하지 않았다. 혁명의 시대는 창조를 위해 무대를 치워 주었을 뿐이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는 독재이기를 그칠수록 인간의 재능에 더 넓은 자리를 열어 준다. 사회주의 문화는 국가가 사멸하는 만큼만 꽃필 것이다. 이 단순하고 굽힐 수 없는 역사 법칙 속에 소련의 지금 정치 체제에 대한 사형 선고가 들어 있다. 소비에트 민주주의는 추상적 정치의 요구가 아니며, 도덕의 요구는 더더욱 아니다. 그것은 나라의 생사가 걸린 문제가 되었다.
새 국가에 사회의 이익 말고 다른 이익이 없다면 강제 기능의 사멸은 점차 고통 없이 진행될 것이다. 그러나 국가는 형체 없는 것이 아니다. 특수한 기능이 특수한 기관을 만들어 냈다. 전체로서의 관료층은 기능 자체보다 그 기능이 자기에게 가져다주는 공물에 더 마음을 쓴다. 지휘하는 카스트는 강제 기관을 강화하고 영속화하려 한다. 자기 권력과 소득을 지키려고 관료층은 아무것도 아무도 아끼지 않는다. 발전의 흐름이 관료층에 불리하게 흐를수록 관료층은 인민의 선진 분자에게 그만큼 더 무자비해진다. 가톨릭교회처럼 관료층은 저물어 가는 시기에 무오류의 교리를 내세웠지만, 그 대신 단번에 로마 교황은 꿈도 꿀 수 없는 높이에 그것을 올려놓았다.
점점 더 집요해지는 스탈린의 신격화는 아무리 희화적이라 해도 이 체제의 필수 요소다. 관료층에게는 손댈 수 없는 최고 중재자, 황제까지는 아니더라도 제1통령이 필요하며, 관료층은 자기 지배욕에 가장 잘 맞는 자를 어깨 위로 들어 올린다. 서방의 문필 아마추어들이 그토록 감탄하는 지도자의 “성격의 힘”은 실제로는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무엇이든 할 준비가 된 카스트의 집단적 압력의 결과다. 그들은 저마다 자기 자리에서 “국가는 곧 나다”라고 여긴다. 스탈린에게서 누구나 어렵지 않게 자기 자신을 발견한다. 스탈린도 그들 하나하나에게서 자기 정신의 한 조각을 발견한다. 스탈린은 관료층의 인격화다. 바로 여기에 그의 정치적 개성이 있다.
카이사르주의, 또는 그 부르주아적 형태인 보나파르티즘은 두 진영의 날카로운 투쟁이 국가권력을 국민 위로 들어 올려, 겉으로는 계급으로부터 완전한 독립을, 실제로는 특권층을 지키는 데 필요한 자유만을 보장해 주는 역사의 순간에 무대에 등장한다. 정치적으로 원자화된 사회 위로 우뚝 솟아 경찰과 장교단에 기대며 자기 위에 어떤 통제도 허락하지 않는 스탈린 체제는, 역사에서 아직 본 적 없는 새로운 유형의 보나파르티즘의 명백한 변종이다. 카이사르주의는 내부 투쟁으로 흔들리던 노예제 사회의 조건에서 생겨났다. 보나파르티즘은 자본주의 체제가 위기 시기에 쓰는 정치 도구의 하나다. 스탈린주의는 같은 체계의 한 변종이지만, 조직되고 무장한 소비에트 귀족층과 무장하지 않은 근로 대중 사이의 적대로 찢긴 노동자 국가의 토대 위에 서 있다.
역사가 증언하듯 보나파르티즘은 보통선거권, 심지어 비밀선거권과도 아주 잘 어울린다. 보나파르티즘의 민주적 의례는 국민투표다. 이따금 시민들에게 지도자에 찬성하느냐 반대하느냐 하는 질문이 던져지고, 투표하는 사람은 관자놀이에 권총 총구를 느낀다. 지금 보면 시골 아마추어 같은 나폴레옹 3세 이래로 이 기술은 놀랍도록 발전했다. 국민투표의 토대 위에 보나파르티즘을 세우는 소련의 새 헌법은 이 체계의 진정한 완성이다.
궁극적으로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은 세계 혁명이 늦어진 덕분에 생겨났다. 그러나 같은 원인이 자본주의 나라들에서는 파시즘을 낳았다. 우리는 얼핏 뜻밖이지만 실제로는 움직일 수 없는 결론에 이른다. 전능한 관료층이 소비에트 민주주의를 억압한 것도, 파시즘이 부르주아 민주주의를 분쇄한 것도 같은 원인, 곧 세계 프롤레타리아트가 역사가 자기 앞에 내놓은 과제를 해결하는 데 늑장을 부린 데서 비롯되었다. 스탈린주의와 파시즘은 사회적 토대가 깊이 다른데도 대칭적인 현상이다. 여러 특징에서 둘은 끔찍할 만큼 닮았다. 유럽에서 혁명 운동이 승리한다면 파시즘만이 아니라 소비에트 보나파르티즘도 곧바로 흔들릴 것이다. 국제 혁명에 등을 돌리는 스탈린 관료층은 나름대로 옳다. 관료층은 자기 보존의 목소리에 따를 뿐이다.
“계급의 적”에 대한 관료층의 투쟁
소비에트 체제의 첫날부터 관료층에 대한 평형추 구실을 한 것은 당이었다. 관료층이 국가를 관리했다면 당은 관료층을 통제했다. 불평등이 필요의 한계를 넘지 않도록 날카롭게 지켜보면서, 당은 늘 관료층과 때로는 공공연하고 때로는 위장된 투쟁을 벌이는 상태에 있었다. 스탈린 분파의 역사적 역할은 당을 당 자신의 기구에 종속시키고 그 기구를 국가기구와 합쳐 버림으로써 이 이원성을 없앤 데 있다. 지금의 전체주의 체제는 이렇게 만들어졌다. 스탈린의 승리가 보장된 것은 바로 그가 관료층에게 이 적지 않은 봉사를 해 주었기 때문이다.
투쟁의 첫 10년 동안 좌익반대파는 사상적으로 당을 얻는 길에서 당에 맞서 권력을 얻는 길로 넘어가지 않았다. 그 구호는 혁명이 아니라 개혁이었다. 그러나 관료층은 이미 그때 민주적 개혁에서 자기를 지키기 위해서라면 어떤 변혁이라도 할 준비가 되어 있었다. 투쟁이 특히 날카로운 단계에 들어선 1927년, 스탈린은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반대파를 향해 “이 간부들은 내전으로만 끌어내릴 수 있다”고 말했다. 스탈린의 말에서는 위협이던 것이 유럽 프롤레타리아트의 잇따른 패배 덕분에 역사적 사실이 되었다. 개혁의 길은 혁명의 길로 바뀌었다.
당과 소비에트 조직에 대한 끊임없는 숙청은 대중의 불만이 분명한 정치적 표현을 찾지 못하게 막는 것을 과제로 삼는다. 그러나 탄압은 생각을 죽이지 못하고 지하로 몰아넣을 뿐이다. 공산주의자든 비당원이든 넓은 층의 사람들이 두 가지 견해 체계를 지니고 있다. 공식적인 것과 비밀스러운 것이다. 염탐과 밀고가 사회관계를 속속들이 갉아먹는다. 관료층은 언제나 자기 반대자를 사회주의의 적으로 그린다. 이제 관행이 된 사법 조작을 통해 관료층은 자기가 고른 아무 범죄나 그들에게 덮어씌운다. 총살의 최후통첩을 들이대고 관료층은 약한 사람들에게서 자기가 불러 준 자백을 짜내고, 그 증언을 가장 꿋꿋한 적들에 대한 기소의 근거로 삼는다.
1936년 6월 5일자 『프라우다』는 “세계에서 가장 민주적인” 헌법을 논평하면서, 계급이 철폐되었는데도 “사회주의에 계급적으로 적대적인 세력이 자기 패배와 화해했다… 고 생각하는 것은 용서할 수 없을 만큼 어리석고 범죄적인 일일 것이다. 투쟁은 계속된다”고 가르친다. 그러면 이 “계급적으로 적대적인 세력”은 누구인가? 대답은 이렇다. “반혁명 그룹들의 잔당, 온갖 색깔의 백위군, 특히 트로츠키-지노비예프파…” (트로츠키파와 지노비예프파의) “간첩 및 테러 활동”을 빠짐없이 들먹인 뒤, 스탈린의 기관지는 약속한다. “우리는 앞으로도 단호한 손으로 인민의 적들, 트로츠키파 독사와 복수의 여신들을, 그들이 아무리 교묘하게 위장하더라도 쳐부수고 섬멸할 것이다.” 소련 신문에서 날마다 되풀이되는 이런 위협은 게페우의 일에 곁들여지는 반주에 지나지 않는다.
1918년부터 당원이었고 내전에 참가했으며 나중에 소련 농학자가 되어 우익반대파에 가담했다가 1936년 유형지에서 국외로 탈출한 페트로프라는 사람이, 지금 망명자들의 자유주의 신문에서 이른바 트로츠키파를 이렇게 묘사한다. “좌파라고?.. 심리적으로는 마지막 혁명가들이다. 진짜배기, 불타는 사람들이다. 잿빛 장사치 근성도 없고 타협도 없다. 사람들은 훌륭하다. 그러나 생각은 백치 같다… 세계의 불길이니 하는 헛소리…” “생각”의 문제는 제쳐 두자. 우파 반대자가 좌파에게 내린 도덕적, 정치적 평가는 그 자체로 많은 것을 말해 준다. 게페우의 대령과 장군들이… 제국주의의 이익을 위한 반혁명 활동으로 재판에 넘기는 것이 바로 이 “마지막 혁명가들, 진짜배기, 불타는 사람들”이다.
볼셰비키 반대파에 대한 관료층의 히스테리 섞인 증오는 부르주아 출신자에 대한 제한의 철폐와 나란히 놓고 볼 때 특히 뚜렷한 정치적 의미를 띤다. 공직과 노동과 교육에 관한 화해적인 법령들은, 새 질서가 흔들림 없다는 것이 분명해질수록 예전 지배계급의 저항이 잦아든다는 생각에서 나온다. 몰로토프는 1936년 1월 중앙집행위원회 회기에서 “이제 이런 제한은 필요 없다”고 설명했다. 그런데 동시에 가장 악랄한 “계급의 적”은 지노비예프와 카메네프 같은 레닌의 가장 가까운 동료들을 비롯해 평생 사회주의를 위해 싸운 사람들 가운데서 모집된다는 것이 드러난다. 『프라우다』의 말에 따르면 부르주아지와 달리 “트로츠키파”는 “계급 없는 사회주의 사회의 윤곽이 뚜렷이 드러날수록” 더욱 절망에 빠진다. 새로운 관계를 낡은 공식으로 가려야 할 필요에서 생겨난 이 철학의 망상적 성격은 물론 사회적 적대의 실제 이동을 감추지 못한다. 한편으로 “귀족층”의 형성은 부르주아지의 가장 야심 찬 자손들에게 넓은 출세의 기회를 열어 준다. 그들에게 동등한 권리를 주는 데 위험이 없다. 다른 한편으로 같은 현상이 대중, 특히 노동자 청년들의 날카롭고 극히 위험한 불만을 낳는다. 그래서 “복수의 여신들과 독사들”에 대한 섬멸전이 벌어지는 것이다.
예전에 부르주아지의 특권을 되살리려던 자들을 내리치던 독재의 칼은 지금 관료층의 특권에 맞서 일어서는 자들을 겨눈다. 타격은 프롤레타리아트의 계급의 적이 아니라 프롤레타리아 전위에 떨어진다. 기능이 근본적으로 바뀐 데 맞추어, 한때 특별히 헌신적이고 자기희생적인 볼셰비키 가운데서 모집되던 정치경찰은 지금 관료층 가운데 가장 타락한 부분이 되었다.
혁명가들을 박해하는 데 테르미도르파는 자기에게 과거를 일깨우고 미래를 두려워하게 만드는 사람들에 대한 모든 증오를 쏟아붓는다. 감옥, 시베리아와 중앙아시아의 외진 구석, 늘어나는 강제수용소에 볼셰비키당의 정수, 가장 꿋꿋하고 충실한 사람들이 갇혀 있다. 격리 감옥과 시베리아에서도 반대파 사람들은 가택수색과 우편 봉쇄와 굶주림에 계속 시달린다. 유형지에서 아내들은 강제로 남편에게서 떼어지는데, 목적은 단 하나, 등뼈를 꺾고 참회를 짜내는 것이다. 그러나 참회한 사람들도 구원받지 못한다. 처음 의심이 들거나 밀고가 들어오면 그들은 두 배의 벌을 받는다. 유형자를 돕는 일은 가족이 하는 것이라도 범죄로 박해받는다. 서로 돕는 것은 음모로 처벌받는다.
이런 조건에서 자기를 지킬 유일한 수단은 단식 투쟁이다. 게페우는 그에 강제 급식으로 답하거나, 죽을 자유를 준다. 지난 몇 해 동안 러시아인과 외국인 반대파 수백 명이 총살당하거나 단식으로 죽거나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12년 동안 권력은 반대파를 최종적으로 뿌리 뽑았다고 수십 번 세상에 알렸다. 그러나 1935년 마지막 몇 달과 1936년 상반기의 “숙청” 동안 다시 수십만 명의 당원이 제명되었고, 그 가운데 수만 명이 “트로츠키파”였다. 가장 활동적인 사람들은 곧바로 체포되어 감옥과 강제수용소로 흩어졌다. 나머지에 대해 스탈린은 『프라우다』를 통해 지방 기관들에게 그들에게 일자리를 주지 말라고 공공연히 지시했다. 국가가 유일한 고용주인 나라에서 이 조치는 서서히 굶겨 죽이는 것을 뜻한다. 일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옛 원칙이, 복종하지 않는 자는 먹지도 말라는 새 원칙으로 바뀌었다. 보나파르티즘의 시대가 열린 1923년부터 정확히 몇 명의 볼셰비키가 제명되고 체포되고 섬멸되었는지는 스탈린 정치경찰의 문서고를 펼칠 때 알게 될 것이다. 몇 명이 지하에 남아 있는지는 관료층의 붕괴가 시작될 때 드러날 것이다.
당원 200만 명의 당에서 2만~3만 명의 반대파가 무슨 의미를 지닐 수 있는가? 이런 문제에서 숫자를 덩그러니 견주는 것은 아무것도 말해 주지 않는다. 달아오른 정치 분위기에서는 한 연대에 혁명가 열 명이면 그 연대를 인민 편으로 끌어오기에 충분하다. 참모부가 수가 적은 지하 서클, 심지어 외톨이 개인까지 죽도록 두려워하는 것은 괜한 일이 아니다. 스탈린 관료층에 속속들이 스며든 이 반동적인 참모부의 공포가 그 박해의 광포한 성격과 독 묻은 중상을 설명해 준다.
소련에서 탄압의 모든 단계를 거친 빅토르 세르주는 혁명에 대한 충성과 혁명의 무덤 파는 자들에 대한 적의 때문에 고문당하는 사람들의 충격적인 소식을 서유럽에 가져왔다. 그는 이렇게 쓴다. “나는 조금도 과장하지 않는다. 나는 낱말 하나하나를 저울질하며, 그 하나하나를 비극적인 증거와 이름으로 뒷받침할 수 있다. 대부분 말없는 희생자와 항의자의 무리 가운데서, 한 영웅적인 소수가 누구보다 내게 가깝다. 그들은 그 활력과 통찰과 금욕적인 꿋꿋함과 위대한 시대의 볼셰비즘에 대한 헌신 때문에 소중하다. 이 첫 시간의 공산주의자들, 레닌과 트로츠키의 동지들, 소비에트가 존재하던 시절 소비에트 공화국을 세운 사람들 수천 명이 체제의 내부 부패에 사회주의의 원칙을 맞세우고, 할 수 있는 만큼(그리고 그들이 할 수 있는 것은 모든 희생을 받아들이는 것이다) 노동계급의 권리를 지킨다… 나는 거기 갇혀 있는 사람들의 소식을 여러분에게 가져온다. 그들은 혁명 위에 새로운 새벽이 밝는 것을 보지 못하게 되더라도, 필요한 만큼, 끝까지 버틸 것이다… 서방의 혁명가들은 그들에게 기댈 수 있다. 불꽃은 감옥에서만이라도 지켜질 것이다. 그들도 여러분에게 기대고 있다. 세계의 노동자 민주주의를 지키기 위해, 프롤레타리아 독재의 해방적 얼굴을 되살리기 위해, 언젠가 소련에 그 도덕적 위대함과 노동자들의 신뢰를 되돌려 주기 위해, 여러분은, 우리는 그들을 지켜야 한다…”
새로운 혁명의 불가피성
국가의 사멸을 논하면서 레닌은 공동생활의 규칙을 지키는 습관이 강제의 필요를 모두 없앨 수 있다고 썼다. “분노를 일으키고 항의와 봉기를 불러일으키며 진압의 필요를 만들어 내는 것이 아무것도 없다면” 말이다. 이 “없다면”에 모든 핵심이 있다. 소련의 지금 체제는 걸음마다 항의를 불러일으키며, 그 항의는 억눌려 있는 만큼 더 뜨겁다. 관료층은 강제 기구일 뿐 아니라 끊임없는 도발의 원천이다. 탐욕스럽고 거짓되고 냉소적인 지배자 카스트가 존재한다는 것 자체가 숨은 분노를 낳지 않을 수 없다. 노동자의 물질적 처지가 나아진다고 해서 그들이 권력과 화해하는 것은 아니다. 오히려 그것은 그들의 존엄을 높이고 그들의 생각을 정치 일반의 문제로 해방함으로써 관료층과의 공공연한 충돌을 준비한다.
갈아 치울 수 없는 “지도자들”은 “학습”, “기술 습득”, “문화적 자기 교육”, 그 밖의 훌륭한 것들이 필요하다고 되풀이하기를 좋아한다. 그러나 지배층 자신은 무지하고 교양이 모자라며, 무엇 하나 진지하게 배우지 않고, 신의가 없으며 사람을 거칠게 대한다. 그런 만큼 사회생활의 모든 분야를 후견하고, 협동조합 가게만이 아니라 음악 작곡까지 지휘하겠다는 그들의 요구는 더욱 견딜 수 없다. 소련 주민은 찬탈자 카스트에 대한 굴욕적인 종속에서 벗어나지 않고는 더 높은 문화 단계로 올라설 수 없다.
관리가 노동자 국가를 먹어 치울 것인가, 아니면 노동계급이 관리를 처리할 것인가? 소련의 운명이 그 해결에 달린 문제는 지금 이렇게 서 있다. 소련 노동자의 압도적 다수는 이미 지금도 관료층에 적대적이며, 농민 대중은 건강한 평민의 증오로 관료층을 미워한다. 농민과 달리 노동자들이 공공연한 투쟁의 길에 거의 나서지 않아 항의하는 농촌을 방황과 무력함에 내버려 두었다면, 그것은 탄압 때문만이 아니다. 노동자들은 관료층을 뒤엎으면 자본주의 복고를 위해 마당을 치워 주게 될까 봐 두려워했다. 국가와 계급의 상호관계는 저속한 “민주주의자”들이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복잡하다. 계획경제가 없다면 소련은 수십 년 뒤로 내던져질 것이다. 이런 뜻에서 관료층은 계속 필요한 기능을 수행하고 있다. 그러나 관료층은 그 기능을, 혁명의 성과를 완전히 쓸어 버릴 수 있는 체계 전체의 폭발을 준비하는 방식으로 수행한다. 노동자들은 현실주의자다. 지배 카스트에 대해, 적어도 자기들과 가장 가까운 그 아래층에 대해 조금도 스스로를 속이지 않으면서, 노동자들은 당분간 그 카스트에게서 자기 성과 일부의 파수꾼을 본다. 다른 가능성이 보이는 즉시 노동자들은 정직하지 못하고 뻔뻔하며 믿을 수 없는 이 파수꾼을 반드시 쫓아낼 것이다. 그러려면 서방이나 동방에서 혁명의 틈이 열려야 한다.
눈에 보이는 정치 투쟁이 그친 것을 크렘린의 벗과 대리인들은 체제의 “안정”으로 그린다. 실제로 그것은 인민의 불만이 깊숙이 몰려 들어간 상태에서 관료층이 일시적으로 안정된 것을 뜻할 뿐이다. 젊은 세대는 계몽보다 절대주의가 훨씬 더 많은 “계몽 절대주의”의 멍에를 특히 아프게 느낀다. 살아 있는 생각의 작은 번득임에도 점점 더 불길하게 곤두서는 관료층의 경계심도, “지도자”의 모습을 한 자비로운 섭리에 바치는 견딜 수 없이 팽팽한 찬양도, 똑같이 국가와 사회 사이의 커져 가는 괴리를 드러낸다. 내부 모순은 점점 더 짙어지며 국가의 벽을 밀어붙이고 출구를 찾고 있으며, 반드시 그것을 찾아낼 것이다.
나라의 정세를 올바르게 평가하는 데에는 권력의 대표자들에 대한 적지 않은 테러 행위가 아주 큰 의미를 지닌다. 가장 떠들썩했던 것은 능란하고 파렴치한 레닌그라드의 독재자이자 자기 동업 집단의 전형적인 대표자였던 키로프의 암살이었다. 테러 행위는 그 자체로는 보나파르트 과두 집단을 뒤엎을 능력이 가장 없다. 개별 관료는 권총을 두려워하지만, 관료층 전체는 테러를 이용해 자기 폭력을 정당화하고 내친김에 자기 정치적 반대자들을 암살 사건에 엮어 넣는 데 적잖이 성공한다(지노비예프, 카메네프 등의 사건). 개인 테러는 참을성 없거나 절망한 외톨이들의 무기이며, 그들은 대개 관료층 자신의 젊은 세대에 속한다. 그러나 차르 시절과 마찬가지로 정치적 암살은 폭풍 전야의 분위기를 알리는 틀림없는 징후이며, 공공연한 정치 위기가 닥쳐올 것을 예고한다.
새 헌법을 도입함으로써 관료층은 자기 스스로 위험을 느끼고 예방 조치를 취하고 있음을 보여 준다. 그러나 관료 독재가 “자유주의적” 개혁에서 구원을 찾다가 오히려 자기를 약하게 만든 일은 이미 여러 번 있었다. 보나파르티즘을 드러냄과 동시에 새 헌법은 그것과 싸울 반합법적 엄호물을 만들어 낸다. 선거에서 벌어지는 관료 도당들의 경쟁은 더 넓은 정치 투쟁의 시작이 될 수 있다. “일을 잘못하는 권력 기관”을 겨눈 채찍은 보나파르티즘을 겨눈 채찍으로 바뀔 수 있다. 모든 증언이 일치하는 바, 앞으로의 발전은 문화적으로 성장한 인민의 힘과 관료 과두 집단 사이의 충돌로 불가피하게 이어질 것이다. 위기에서 빠져나갈 평화적인 출구는 없다. 어떤 악마도 아직 자기 발톱을 자발적으로 깎은 적이 없다. 소련 관료층은 싸우지 않고는 자기 진지를 내주지 않을 것이다. 발전은 분명 혁명의 길로 향하고 있다.
인민 대중이 힘차게 밀어붙이고, 그런 조건에서 불가피하게 정부 기구가 분열한다면, 지배자들의 저항은 지금 보이는 것보다 훨씬 약할 수도 있다. 그러나 이에 관해서는 추측만 할 수 있을 뿐이다. 어쨌든 관료층은 혁명의 힘으로만 끌어내릴 수 있으며, 언제나 그렇듯 공세가 대담하고 단호할수록 희생은 그만큼 적을 것이다. 그 공세를 준비하고 유리한 역사적 상황에서 대중의 선두에 서는 것, 여기에 제4인터내셔널 소련 지부의 과제가 있다. 오늘 그것은 아직 약하고 지하로 내몰려 있다. 그러나 당이 비합법으로 존재한다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존재의 고된 형태일 뿐이다. 탄압은 무대에서 퇴장하는 계급에게는 충분히 효과가 있을 수 있다. 1917~1923년의 혁명적 독재가 그것을 충분히 증명했다. 그러나 소련에 앞으로의 발전이 예정되어 있다면, 혁명적 전위에 대한 폭력은 수명을 다한 카스트를 구하지 못할 것이다.
관료층이 자기 자신에 맞서 준비하고 있는 혁명은 1917년 10월 혁명 같은 사회혁명이 아닐 것이다. 이번에는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바꾸는 것, 한 소유 형태를 다른 소유 형태로 대체하는 것이 문제가 아니다. 역사는 과거에도 봉건 체제를 부르주아 체제로 대체한 사회혁명만이 아니라, 사회의 경제적 토대를 건드리지 않은 채 낡은 지배 상층을 쓸어 낸 정치혁명도 알고 있었다(1830년과 1848년 프랑스, 1917년 2월 러시아 등). 보나파르트 카스트의 타도는 물론 깊은 사회적 결과를 낳겠지만, 그 자체로는 정치적 변혁의 테두리 안에 들어간다.
노동자 혁명에서 나온 국가는 역사상 처음으로 존재한다. 그 국가가 거쳐야 할 단계들은 어디에도 적혀 있지 않다. 사실 소련의 이론가와 건설자들은 속속들이 투명하고 유연한 소비에트 체계가, 사회의 경제적, 문화적 진화의 단계에 맞추어 국가가 평화롭게 탈바꿈하고 녹아들고 사멸하게 해 주기를 바랐다. 그러나 삶은 이번에도 이론이 셈한 것보다 복잡했다. 뒤처진 나라의 프롤레타리아트가 첫 사회주의 혁명을 해낼 운명이었다. 모든 정황으로 보아 프롤레타리아트는 이 역사적 특권의 값을 관료적 절대주의에 맞서는 두 번째, 보충적 혁명으로 치러야 할 것이다. 새 혁명의 강령은 그것이 터지는 시점, 그때까지 나라가 이른 수준, 그리고 매우 크게는 국제 정세에 달려 있다. 이미 지금 분명한 강령의 기본 요소들은 소비에트 체제의 모순을 분석한 데서 객관적으로 나오는 결론으로서 이 책 곳곳에 제시되어 있다.
문제는 한 지배 도당을 다른 도당으로 바꾸는 것이 아니라, 경제를 관리하고 문화를 지도하는 방법 자체를 바꾸는 것이다. 관료적 전횡은 소비에트 민주주의에 자리를 내주어야 한다. 비판의 권리와 실질적인 선거의 자유를 되살리는 것은 나라가 더 발전하기 위한 필수 조건이다. 이것은 볼셰비키당을 비롯한 소비에트 정당들의 자유를 되살리고 노동조합을 부활시키는 것을 전제한다. 경제에 옮겨진 민주주의는 근로자의 이익에 맞게 계획을 근본적으로 재검토하는 것을 뜻한다. 경제 문제를 자유롭게 토론하면 관료적 오류와 갈지자걸음이 낳는 간접비가 줄어들 것이다. 값비싼 장난감들, 곧 소비에트 궁전, 새 극장, 전시용 지하철은 노동자 주택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부르주아적 분배 규범”은 엄격한 필요의 한계 안으로 들어가, 사회의 부가 늘어나는 만큼 사회주의적 평등에 자리를 내줄 것이다. 관등은 즉시 폐지되고, 훈장이라는 장신구는 도가니에 들어갈 것이다. 청년들은 자유롭게 숨 쉬고, 비판하고, 실수하고, 성숙할 기회를 얻을 것이다. 학문과 예술은 족쇄에서 풀려날 것이다. 끝으로 대외 정책은 혁명적 국제주의의 전통으로 돌아갈 것이다.
그 어느 때보다도 지금 10월 혁명의 운명은 유럽과 세계 전체의 운명과 묶여 있다. 소련의 문제는 지금 이베리아반도에서, 프랑스에서, 벨기에에서 결판나고 있다. 이 책이 인쇄되어 나올 무렵에는, 마드리드 성벽 아래서 내전이 벌어지는 오늘보다 정세가 아마 비할 데 없이 분명해져 있을 것이다. 소련 관료층이 “인민전선”이라는 배신적 정책을 통해 스페인과 프랑스에서 반동의 승리를 보장하는 데 성공한다면(코민테른은 그 방향으로 할 수 있는 모든 일을 하고 있다), 소련은 파멸의 벼랑 끝에 서게 될 것이고, 관료층에 맞선 노동자의 봉기보다는 오히려 부르주아 반혁명이 일정에 오를 것이다. 그러나 개량주의 지도자들과 “공산주의” 지도자들의 합동 사보타주에도 불구하고 서유럽 프롤레타리아트가 권력으로 가는 길을 연다면, 소련의 역사에도 새로운 장이 열릴 것이다. 유럽에서 혁명이 거두는 첫 승리는 전류처럼 소련 대중을 관통해 그들을 일으켜 세우고, 독립의 정신을 북돋우고, 1905년과 1917년의 전통을 일깨우고, 보나파르트 관료층의 진지를 허물 것이며, 10월 혁명이 제3인터내셔널에 지녔던 것 못지않은 의미를 제4인터내셔널에 지닐 것이다. 오직 이 길에서만 첫 노동자 국가는 사회주의의 미래를 위해 구원될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