참고 문헌
독일군의 도시 말살 지시 — 「페테르부르크 시의 장래」 지령(1941)과 힘러의 바르샤바 파괴 명령 회고(1944)
레닌그라드 포위망이 닫힌 직후인 1941년 9월 22일 지령 「페테르부르크 시의 장래」 제1~3항(도시를 지표면에서 없애고 항복 제의는 거부한다)과, 같은 번호를 단 9월 29일 해군전쟁지휘부 명령 가운데 주민의 생존과 식량 문제를 「우리가 풀 수도 없고 풀어서도 안 된다」고 못 박은 뉘른베르크 기소장 인용 부분(문서 C-124). 여기에 1944년 9월 21일 힘러가 군관구 사령관들 앞에서 바르샤바 봉기 소식을 듣고 히틀러에게 한 말과 「모든 가구를 불태우고 폭파하라」는 자신의 명령을 회고한 연설 발췌를 더했다. 세 편 모두 저본이 전하는 발췌만 옮겼다.
전문 읽기 → 헌법·법령·명령총통 지령 제41호 (1942)
1942년 하계 공세의 명령서. 겨울 전투가 끝나는 대로 「소련에 남은 살아 있는 전력을 최종적으로 섬멸하고」 가장 중요한 군수 원천을 빼앗기 위해 남부 전선에 병력을 집중해 돈강 서쪽의 적을 포위 섬멸하고 캅카스 유전으로 나아가되, 스탈린그라드에는 「도달하거나 적어도 중포의 사정거리에 두라」고 명한다. 이 지령의 실행이 스탈린그라드로 이어진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몰로토프의 워싱턴 회담 기록 두 건
1942년 5월 30일과 6월 1일 백악관 회의의 크로스 통역 기록. 「독일군 40개 사단을 돌려세울 수 있는가」라는 몰로토프의 단도직입의 질문과, 「올해 제2전선의 형성을 기대한다」는 루스벨트의 답, 그리고 그 약속을 배와 톤수로 되짚는 6월 1일의 흥정까지.
전문 읽기 → 헌법·법령·명령「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와 최고사령부 문서 — 명령 제227호, 지령 제170703호, 항복 최후통첩, 명령 제20호 (1942~1945)
후퇴를 금지하고 형벌부대와 차단분견대를 제도화한 1942년 7월의 명령 제227호 「한 걸음도 물러서지 마라」, 레닌그라드 봉쇄를 돌파한 「이스크라」 작전의 12월 지령 제170703호, 포위된 파울루스의 제6군에 항복 조건을 제시한 1943년 1월 8일의 최후통첩, 그리고 베를린 시가전 한가운데서 승리를 예고하고 네 도시를 처음 「영웅도시」라 부른 1945년 5월 1일의 명령 제20호. 스탈린그라드 위기에서 베를린 함락까지 소련 최고사령부의 문서 네 건.
전문 읽기 → 조약·협정이탈리아 항복 문서 세 건 (1943~1945)
1943년 9월 3일 카시빌레에서 서명된 12개조의 「짧은 휴전」, 9월 29일 몰타 앞바다 넬슨함에서 바돌리오와 아이젠하워가 서명한 44개조의 항복 문서(「긴 휴전」), 그리고 1945년 4월 29일 카세르타에서 독일군 남서부 총사령관의 대리인이 서명한 지역 항복 문서와 육·해·공 부록. 이탈리아의 전쟁 이탈에서 이탈리아 전선의 종전까지를 잇는 세 문서의 영어 정본을 옮겼다.
전문 읽기 → 조약·협정연합국 문서집 — 테헤란 군사 결론, 아이젠하워의 디데이 문서, 얄타 선언, 포츠담 의정서 (1943~1945)
제2전선에 날짜와 구조를 준 1943년 12월 테헤란 군사 결론, 상륙 당일의 양면인 아이젠하워의 일일명령과 실패 성명 초안(1944), 그리고 해방된 유럽의 정부 형태와 자유선거를 약속한 1945년 2월 얄타 「해방된 유럽에 관한 선언」. 그리고 독일 점령·배상·폴란드 국경·독일인 이송을 스물한 개 절로 정한 1945년 8월 포츠담 의정서. 제2전선에서 전후 처리까지 연합국 문서 네 건이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행복한 날들』 — 레지스탕스 행동 강령
국민저항위원회가 1944년 3월 15일 만장일치로 채택한 공동 강령의 전문. 점령자에 맞선 즉각 행동 계획과, 국유화·사회보장·노동권을 담은 해방 후 조치들을 함께 옮겼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오버로드 작전 — 연합군 최고사령부 문서 두 건: 전략공군 폭격 지령(1944년 4월 17일)과 아이젠하워의 상륙 이틀째 전황 보고 SCAF 48(6월 8일)
노르망디 상륙 준비 기간에 미 전략공군과 영국 폭격기사령부를 최고사령관 아래 두고 독일 전투기 전력의 소모와 철도망 파괴를 두 임무로 정한 4월 17일 지령(이른바 「수송 계획」의 근거 문서), 그리고 상륙 이틀째인 6월 8일 아이젠하워가 램지 제독과 구축함으로 해안을 둘러본 뒤 연합참모본부에 보낸 첫 종합 보고 전문 SCAF 48. 오마하 해안의 예상 밖 저항, DD 전차의 침몰, 험한 날씨로 하루 뒤처진 하역, 바이외 점령 소식이 담겨 있다. 전문의 절차어는 문장부호와 단락으로 되돌렸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바르샤바 봉기 1944 — 소련·영국·미국 사이의 외교 문서 열다섯 건
봉기 두 달 동안 소련이 서방 연합국과 주고받은 문서 열다섯 건. 폴란드 측 정보를 「과장」이라 답한 스탈린의 8월 5일 전문, 미군 셔틀 폭격기의 소련 기지 착륙을 두고 오간 해리먼·클라크 커의 서한과 몰로토프의 8월 16일 거절, 봉기를 「무모하고 끔찍한 모험」이라 규정한 스탈린의 전문, 영국 전시내각의 9월 5일 호소와 소련 정부의 9월 9일 회답, 스탈린과 두 대사의 9월 23일 회담 기록, 보급 투하 중지를 건의한 10월 2일 참모본부 각서. 러시아 국방부 문서집 『러시아 문서고: 대조국전쟁』 제14권(3-1) 수록본.
전문 읽기 → 조약·협정바르키자 협정 (1945)
1944년 12월 아테네 시가전(데켐브리아나)을 끝낸 그리스 정부와 민족해방전선(EAM)의 협정. 자유의 회복, 계엄 해제, 정치범 사면, 인질 석방, 국민군 창설, ELAS 무장 해제, 공직·치안 기관 숙정, 국민투표와 선거의 아홉 조로 이루어지며, 제3조 사면의 범위와 제6조 무장 해제가 이후 그리스 내전의 화약이 되었다. 미 국무부의 영역을 옮겼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이탈리아 총봉기 1945 — CLNAI 문서 세 건: 「항복이냐 파멸이냐!」 포고, 봉기 지침 제1호, 페르티니의 총파업 호소
북이탈리아 민족해방위원회와 자유의용군단 사령부가 4월 19일 나치·파시스트 병력에 내건 최후통첩 「항복이냐 파멸이냐!」, 봉기 파업이 선포되면 노동자가 자기 공장으로 모여 설비를 지키고 그곳에서 부대를 편성하라고 정한 4월 21일 봉기 지침 제1호, 그리고 4월 25일 밀라노 자유 라디오로 총파업을 선포한 산드로 페르티니의 호소. 1945년 4월 북이탈리아 총봉기를 지휘한 문서 세 건을 이탈리아어 원문에서 옮겼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당 중앙위원회 문화 결정 3건(1946~1948)
즈다놉시나의 뼈대를 이룬 당 중앙위원회 결정 세 건의 전문 번역. 잡지 《즈베즈다》와 《레닌그라드》에 관한 결정(1946-08-14)은 조셴코와 아흐마토바를 지목하고 잡지 하나를 폐간했고, 영화 《위대한 삶》에 관한 결정(1946-09-04)은 2부를 금지하며 《이반 뇌제》 2편을 함께 단죄했으며, 오페라 《위대한 우정》에 관한 결정(1948-02-10)은 쇼스타코비치·프로코피예프·하차투랸을 형식주의로 지목했다. 오페라 결정은 1958년에, 잡지 결정은 1988년에 당 스스로 오류로 시정·취소했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영화 《이반 뇌제》에 관한 크렘린 대담(1947)
1946년 9월 당 중앙위원회 결정으로 《이반 뇌제》 2편이 개봉 금지된 뒤, 예이젠시테인과 주연 체르카소프가 스탈린에게 보낸 편지에 대한 답으로 1947년 2월 26일 밤 크렘린에서 이루어진 대담의 기록이다. 스탈린·몰로토프·즈다노프가 오프리치니나와 이반 뇌제의 역사적 평가, 역사 영화의 양식론, 《봄》과 《글린카》 등 당대 소련 영화를 이야기하고, 끝에 영화를 고쳐 완성할 가능성을 열어 준다. 두 예술가의 구술을 B.N. 아가포프가 받아 적은 기록으로, 개작은 예이젠시테인의 죽음으로 실현되지 못했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마셜 플랜의 두 각서 (1947)
마셜의 하버드 연설 직전 국무부 안에서 나온 두 문서. 케넌이 이끈 정책기획실의 첫 권고(5월 23일)는 유럽인이 스스로 계획을 세우고 미국은 그것을 돕는다는 원칙과 「공산주의가 아니라 경제적 탈진과 싸운다」는 규정을 세웠고, 클레이턴 차관의 「유럽의 위기」(5월 27일)는 유럽 경제의 붕괴 속도를 수지 표로 보이며 연 60~70억 달러의 3년 무상 원조를 요구했다. 마셜 플랜의 골격이 된 원자료다.
전문 읽기 → 정보·수사 기록CIA ORE 29-48 「독일에서 소련이 취할 수 있는 향후 행동 계획」 (1948)
베를린 봉쇄 두 달 전인 1948년 4월 28일 CIA 보고평가국이 낸 판단. 3월의 연합국 관리이사회 이탈과 베를린 교통 방해를 「이미 시작된 프로그램」의 첫 단계로 읽고, 인민회의를 통한 동독 정부 수립, 관리이사회 폐기, 서방의 베를린 철수 강요, 소련군의 「보호」 아래 독일군 창설, 서독의 「재통합」 압박이라는 단계론을 내놓으면서, 각 단계가 「군사력 없이도」 실행될 수 있다고 본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코민포름 결의 「유고슬라비아 공산당의 상황에 관하여」와 스탈린의 고트발트 전보 (1948)
유고슬라비아공산당이 스스로를 「형제 당들의 가족 밖에」 세웠다고 선언한 1948년 6월 28일 부쿠레슈티 코민포름 결의와, 보름 뒤 스탈린이 고트발트에게 그 결의의 목적은 티토를 당장 무너뜨리는 것이 아니라 고립시키는 것이라고 설명한 전보(전집 수록 발췌). 티토-스탈린 결별의 공개된 규탄과 내부의 계산.
전문 읽기 → 조약·협정북대서양 조약
1949년 워싱턴에서 열두 나라가 서명한 NATO 창설 조약 전문. 위협 시 협의를 정한 제4조, 한 나라에 대한 무력 공격을 전체에 대한 공격으로 간주하되 각국이 「필요하다고 판단하는 행동」을 취한다고 한 제5조, 이사회를 세운 제9조, 그리고 NATO가 단 각주 세 개까지.
전문 읽기 → 헌법·법령·명령독일의 두 헌법 (1949)
분단을 국법으로 굳힌 두 문서. 5월 23일 본에서 공포된 서독 기본법 146개조는 「통일이 이루어지는 날까지」의 잠정 질서를 자처하며 인간의 존엄에서 시작하고, 10월 7일 인민평의회가 채택한 독일민주공화국 헌법 144개조는 「독일은 불가분의 민주공화국」이라 선언하며 노동권과 국유화, 인민회의 우위를 적는다. 같은 해 같은 나라에서 나온 두 국가의 기초 문서를 나란히 옮겼다.
전문 읽기 → 헌법·법령·명령1953년의 베리야 — 3월 사면령과 12월 재판 문서
스탈린 사후 3주 만에 베리야가 주도해 100만 명 넘는 수감자를 풀되 정치범은 남긴 1953년 3월 27일 사면령과, 석 달 뒤 체포된 그 베리야를 「외국 첩자」로 단죄한 12월의 최고재판소 특별재판소 공보와 사형 집행 확인서. 사면의 주도자가 같은 해 처형되기까지의 아홉 달.
전문 읽기 → 조약·협정바르샤바 조약
여덟 나라의 우호·협력·상호원조 조약 전문. NATO 제5조를 본뜬 제4조의 상호원조, 통합사령부와 정치협상위원회, 그리고 전유럽 집단안보조약이 서면 효력을 잃는다는 제11조까지.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포스펠로프 위원회 보고서 (1956)
흐루쇼프 비밀보고 보름 전 간부회에 제출된 70쪽의 조사 보고. 1935~1940년 반소 활동 혐의 체포 1,920,635명·총살 688,503명이라는 첫 집계, 「쿨라크 작전」의 할당과 「민족 작전」의 국적별 통계, 앨범 절차와 트로이카의 재판 외 처형, 고문을 허가한 1939년 스탈린의 전보, 그리고 포스티셰프·코시오르·에이헤·루주타크·추바리 등 제17차 당대회 중앙위원 사건을 심문 기록과 편지로 하나씩 연다. 비밀보고가 통계와 사례를 거의 그대로 가져다 쓴 원자료.
전문 읽기 → 저작·연설흐루쇼프 비밀보고 「개인숭배와 그 결과에 대하여」
1956년 2월 25일 소련공산당 제20차 대회 비공개 회의에서 흐루쇼프가 한 보고의 전문 한국어 번역. 레닌이 「대회에 보내는 편지」에서 스탈린의 경질을 제안한 대목에서 시작해 키로프 살해 이후의 대량 탄압, 1937~38년 중앙위원 다수의 처형, 고문으로 받아낸 자백, 전쟁 초기의 오판, 민족 강제이주, 유고슬라비아와의 단절, 「레닌그라드 사건」과 「의사들의 사건」, 개인숭배의 형성을 차례로 다룬다. 예이헤·루주타크·케드로프가 감옥에서 보낸 편지를 그 자리에서 읽은 대목이 보고의 중심이다. 1989년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통보』 게재본을 저본으로 삼았고, 그 편집부 주석 66개를 별도 절로 함께 옮겼다.
전문 읽기 → 정보·수사 기록CIA 일일 정보 보고의 포즈난 봉기 (1956)
1956년 6월 28일 포즈난 노동자 봉기 이튿날과 그 다음 날 CIA가 대통령과 각료에게 올린 《Current Intelligence Bulletin》의 포즈난 항목. 첫날은 임금·식량 항의가 소련 국기를 끌어내리는 정치 시위로 번진 경위와 전차 투입을 보고하고, 둘째 날은 사망 38명·부상 270명이라는 정권 발표를 1953년 동독 봉기와 견주며 봉기가 「자유화의 속도」를 늦출 것이라고 판단한다.
전문 읽기 → 정당·정부 문서「개인숭배와 그 결과의 극복에 관하여」 — 소련공산당 중앙위원회 결정 (1956)
흐루쇼프 비밀보고 넉 달 뒤 당 중앙위원회가 공개적으로 낸 첫 공식 입장. 소련에서 비밀보고가 공표되지 않은 1989년까지 시민과 외국 공산당이 읽을 수 있었던 탈스탈린화의 공식 텍스트다. 개인숭배를 스탈린 개인의 특성과 객관적 조건의 산물로 설명하되 「사회 체제의 본질」은 바뀌지 않았다고 못박고, 톨리아티와 「부르주아 이데올로그」의 비판을 반박하며 스탈린 비판의 허용 경계를 그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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