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시아 외환위기와 한국의 IMF 사태
「동아시아의 기적」으로 칭찬받던 나라들은 왜 1997년 태국 바트화 붕괴를 시작으로 잇달아 외환 위기에 빠졌나? 한국은 왜 1997년 11월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했고, IMF 합의는 고금리·긴축·개방·해고 제한 완화로 무엇을 바꾸었나? 노사정 대타협과 정리해고제, 대우 해체와 외국 자본 유입은 일하는 사람들과 재벌을 어떻게 바꾸었으며,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러시아는 어떤 다른 길을 걸었나? 정실 자본주의론, 금융 공황론,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론과 마르크스주의는 이 위기를 각각 어떻게 설명하나?
1990년대 초 자본 시장을 연 동아시아 나라들은 달러에 통화를 묶은 채 외국의 단기 자금을 대거 들여왔다. 미국 금리 인상과 엔 하락(「역플라자」)으로 수출 경쟁력이 떨어지자 1997년 7월 2일 태국이 바트화 고정 환율을 포기했고, 위기는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필리핀·홍콩으로 번졌다. 한국에서는 한보·기아 등 재벌의 연쇄 부도와 종금사의 단기 외채 차입이 겹쳐 외환보유고가 바닥나, 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요청하고 12월 3일 550억 달러가 넘는 지원과 함께 고금리·재정 긴축·금융 구조조정·시장 개방·해고 제한 완화를 받아들였다. 12월 대선에서 당선된 김대중의 정부는 금 모으기 운동 속에 노사정 대타협으로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도입하고 은행과 재벌을 정리했다. 인도네시아에서는 수하르토가 무너지고, 말레이시아는 자본 통제로 다른 길을 갔으며, 1998년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과 LTCM 구제가 위기의 꼬리를 이루었다.
「동아시아의 기적」은 어떤 구조 위에 서 있었나? {south-korea} {thailand}
제2차 세계대전 뒤 많은 개발도상국은 수입하던 공산품을 국내에서 만들어 내는 수입대체 공업화로 출발했다. 라틴아메리카 나라들이 대체로 이 길을 이어 간 것과 달리, 타이완과 한국은 1950~1960년대부터 발전의 방향을 바깥으로 돌려 수출이 성장을 이끄는 전략을 택했다. 정부는 수출 산업에 보조금과 싼 자금을 몰아주고 통화 가치를 낮게 유지했으며, 홍콩·싱가포르와 함께 이 네 경제는 「아시아의 네 마리 호랑이」로 불렸다. 한국에서는 1961년 군사 쿠데타로 집권한 박정희 정권이 1962년부터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시작했고, 1970년부터 1996년까지 연평균 8.4%씩 성장해 1인당 국민소득 1만 달러를 넘었다. 1 2 3 4
1980년대 말에서 1990년대 초에는 동남아시아로 고성장이 퍼졌다. 태국은 1985~1996년 연평균 9% 넘게 성장해 당시 세계에서 가장 빠른 나라였고,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도 8~12%의 성장률을 기록했다. 국제통화기금(IMF)과 세계은행은 이를 「아시아의 경제 기적」이라 칭찬했다. 이 기간 동아시아와 동남아시아는 세계 생산의 4분의 1을 차지했지만 1990년대 세계 성장의 절반, 세계 설비 투자의 거의 3분의 2를 차지했다. 위기 직전까지 이 나라들은 물가가 낮고 재정이 흑자이거나 적자가 작았으며, IMF와 세계은행은 1997년 9월까지도 한국 정부를 포함한 이 지역 정부들을 칭찬했다. 5 6
한국의 고성장을 떠받친 것은 정부와 재벌의 결합이었다. 재벌은 계열사끼리 자금을 대 주고 내부 거래로 손실을 메울 수 있었기 때문에 쉽게 돈을 빌렸고, 1997년 이전에 겉으로 드러나지 않은 막대한 부채가 쌓였다. 1996년 한국 제조업의 자기자본 대비 부채 비율은 317.1%로 전년보다 30.3%포인트 올랐는데, 이는 미국(1995년 159.7%)의 거의 두 배, 타이완(85.7%)의 거의 네 배였다. 정부 주도의 경제 운영은 정경유착과 자원 배분의 비효율, 계층·산업·지역 사이의 불균형을 낳았다는 비판도 받았다. 7 8 4
1990년대의 자본 자유화와 OECD 가입은 무엇을 바꾸었나? {south-korea}
1990년대에 한국은 자본·금융 시장을 열었다. 김영삼 정부는 1993년 11월 금리 2단계 자유화를 발표했고, 1993년 12월 우루과이 라운드 협상을 타결해 상품·금융·건설·유통·서비스 시장의 문을 외국에 열었다. 1995년 1월에는 「세계화」를 내걸고 세계화추진위원회를 출범시켰고, 같은 해 세계무역기구(WTO)에 가입했으며, 1996년 12월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다. 수출은 1995년 처음 1천억 달러를 넘었지만, 무역 적자가 커지고 성장이 둔해져 1996년 성장률은 7%를 밑돌았다. 9 10 11
OECD 가입에 따른 금융 자유화로 한국의 기업과 은행은 장기 국내 사업에 쓸 돈을 대량의 달러 표시 단기 부채로 끌어왔다. 1994년 단자회사들이 한꺼번에 종합금융회사(종금사)로 전환되면서 종금사는 30개로 늘었는데, 이들은 이자가 싼 3개월짜리 단기 외채를 들여와 대기업에 5년짜리 고금리 장기 대출을 해 주었다. 1996년 이후에는 9%가 넘던 지급준비율도 1~5% 수준으로 크게 낮아졌다. 1997년 말 한국의 대외 부채는 2천억 달러가 넘었고, 그 가운데 58.8%가 1년 안에 갚아야 하는 단기 부채였다. 12 13 14 8
동남아시아에서도 같은 흐름이 있었다. 태국은 1992년 자본 자유화 조치로 외국 자본이 쏟아져 들어왔지만, 그 돈의 많은 부분은 산업이 아니라 부동산과 주식 시장으로 흘러가 땅값과 주가를 끌어올렸다. 인도네시아·말레이시아·한국·태국·필리핀 다섯 나라로 들어온 민간 자본은 1994년 410억 달러에서 1996년 930억 달러로 늘었다. 1990년대 중반 태국·인도네시아·한국은 큰 민간 경상수지 적자를 안고 있었고, 고정 환율은 외국 빚을 더 끌어오게 만들어 금융 부문과 기업을 지나친 환율 위험에 노출시켰다. 4 15 5
달러 고정 환율과 「역플라자」는 어떻게 위기의 조건을 만들었나? {usa} {japan}
태국 바트화는 1달러 25바트에 고정되어 있었고, 다른 동남아시아 통화도 사실상 달러에 묶여 있었다. 국제경제학의 「불가능한 삼위일체」에 따르면 한 나라가 고정 환율, 자유로운 자본 이동, 독자적인 통화 정책을 동시에 가질 수는 없다. 자본 시장을 연 채 환율을 고정한 나라는 외국 자본이 빠져나갈 때 금리를 올리거나 외환보유고를 쏟아붓는 것 말고는 버틸 수단이 없었다. 높은 단기 금리는 그동안 투기성 단기 자금, 곧 「핫머니」를 끌어들이는 역할을 했다. 5 16
1990년대 중반 바깥 환경이 바뀌었다. 미국 경제가 1990년대 초의 불황에서 회복하자 앨런 그린스펀의 연방준비제도는 인플레이션을 막으려 금리를 올렸고, 이것이 미국 채권을 더 매력적으로 만들며 달러 가치를 끌어올렸다.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치솟았던 엔은 이 시기에 거꾸로 떨어졌고, 중국 위안화도 평가 절하되었으며, 반도체 가격이 급락했다. 달러에 묶인 동남아시아 통화도 함께 올라 수출품이 비싸졌고, 이 지역의 수출 증가는 1996년 봄 크게 둔해지며 경상수지가 나빠졌다. 5
마르크스주의 경제사가 로버트 브레너의 분석을 소개한 월든 벨로는 이 엔 하락을 「역플라자 합의」라고 불렀다. 클린턴 행정부가 1990년대 중반 일본의 수출 주도 회복을 돕기 위해 엔에 대한 달러 상승을 허용했는데, 플라자 합의가 일본과 독일이 미국 제조업을 구해 준 작전이었다면 이 역전은 미국이 일본을 구해 준 작전이었다는 것이다. 벨로에 따르면 역플라자 합의는 일본 경제를 되살리지는 못한 채, 상승하는 달러에 통화를 묶어 둔 동북아시아와 동남아시아 경제의 경쟁력을 무너뜨리는 데 핵심적인 역할을 했다. 그리고 이 경제들이 1997~1998년 무너지자 세계적인 과잉 생산 위기는 더 깊어졌다. 17
태국 바트화의 붕괴는 어떻게 아시아 전역으로 번졌나? {thailand} {indonesia} {malaysia}
태국에서는 성장이 꺾인 1996년부터 부동산 거품이 꺼지기 시작했다. 1997년 5월 14~15일 바트화가 대규모 투기 공격을 받았고, 차왈릿 용짜이윳 총리는 6월 30일 평가 절하는 없다고 말했다. 그러나 고정 환율을 지킬 외환보유고가 모자랐던 태국 정부는 1997년 7월 2일 바트화를 변동 환율로 돌렸다. 바트화는 가치의 절반 넘게 잃어 1998년 1월 1달러 56바트까지 떨어졌고, 태국 증시는 75% 하락했으며, 최대 금융회사 파이낸스 원이 무너졌다. IMF는 8월 11일 파산법 정비 등을 조건으로 170억 달러가 넘는 구제금융을 내놓았다. 5 4
위기는 곧 이웃 나라로 번졌다. 필리핀은 하룻밤 금리를 15%에서 32%로 올렸지만 페소는 1달러 26페소에서 46.50페소로 떨어졌다. 말레이시아에서는 하룻밤 금리가 40% 넘게 뛰었고, 쿠알라룸푸르 증시는 1,200 위에서 600 아래로, 링깃은 2.50에서 4.57 아래로 떨어졌다. 인도네시아는 환율 변동 폭을 8%에서 12%로 넓혔다가 8월 14일 루피아를 완전히 변동시켰고, IMF는 11월 5일 첫 단계로 약 101억 달러, 다른 지원과 합쳐 약 230억 달러의 지원과 함께 16개 은행 폐쇄를 발표했다. 루피아는 1달러 2,600에서 1998년 1월 14,000 넘게까지 떨어졌다. 5 18
10월 20~23일에는 홍콩 항셍 지수가 23% 떨어졌다. 홍콩 금융관리국은 달러에 묶인 홍콩 달러를 지키려고 하룻밤 금리를 8%에서 23%로, 한때 280%까지 올렸다. 말레이시아 총리 마하티르 모하맛은 조지 소로스를 비롯한 외환 투기꾼들이 말레이시아 경제를 망쳤다고 비난했고, 아세안 외무장관들은 7월 25일 공동 선언으로 우려를 표했다. 1997년 3분기 아시아에 대한 은행 대출은 오히려 사상 최대였는데, 이는 위기가 특별한 예고 없이 터졌음을 보여 준다. 10월 23일의 홍콩 증시 폭락과 S&P의 신용등급 하향 뒤 한국의 대외 자금 사정은 급격히 나빠졌다. 5 6 19
한국은 왜 1997년 11월에 무너졌나?
한국의 위기는 동남아시아보다 먼저 재벌의 연쇄 부도로 시작되었다. 1997년 1월 1996년 말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고, 정태수 회장이 구속된 수사 과정에서 김영삼 대통령의 차남 김현철이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이어 삼미·진로 같은 대기업이 쓰러졌고, 7월 15일에는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 처리가 유예되었다. 김영삼 정부와 여당의 정경유착 속에 한보와 기아에 내준 무리한 대출은 각각 5조 원과 10조 원의 부실 채권이 되었다. 대기업의 연쇄 부도는 외부 차입으로 특정 산업에 지나치게 투자한 데다 장기 불황으로 수익성이 떨어진 결과였고, 1997년 9월 말 금융기관 부실채권은 32조 원으로 국내총생산의 7%에 이르렀다. 10 20 14 4
1월에는 노동계의 저항도 폭발했다. 집권 신한국당이 1996년 12월 정리해고 도입을 담은 노동법 개정안을 날치기로 통과시키자 민주노총과 한국노총이 총파업으로 맞섰고, 이는 1987년 7~9월 대중 파업 이후 계급 투쟁의 첫 큰 사건이자 첫 정치 파업이었다. 김영삼 대통령은 1월 7일 연두 기자회견에서 노동법 개정을 반드시 시행하겠다고 했다가 거센 비난을 받았다. 파업에 밀린 정부와 여당은 법을 다시 고치면서 정리해고 시행을 2년 미루는 조항을 넣었다. 1998년 3월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잡지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에 실린 한국 노동운동 분석은 위기의 뿌리를 수출 주도 경제의 이윤율 위기로 보았다. 1996년 상장 기업의 순이익은 전년보다 55% 줄었고, 산업 위기와 금융 위기가 겹친 「복합 불황」이 은행을 약하게 만들었다는 것이다. 21 10 8 22
10월 말 이후 외국 금융기관들은 한국 은행들의 단기 외채를 연장해 주지 않기 시작했다. 약 1천억 달러에 이르는 단기 외채의 만기 연장이 어려워지자, 공식 외환보유고는 국내 은행 해외 지점의 단기 부채를 갚는 데 대거 쓰이며 급감했다. 김영삼 대통령은 11월 10일 강경식 경제부총리의 전화를 받기 전까지 외환 위기의 심각성에 관심을 두지 않았다고 한다. 11월 18일 외환 거래가 막히자, 19일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고 임창열이 후임이 되었으며 환율 변동 폭 제한이 사실상 풀렸다. 11월 21일 임창열 부총리는 IMF 수석 부총재 스탠리 피셔와 만난 뒤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11월 24일 증시는 7.2% 폭락했고, 12월 18일 쓸 수 있는 외환보유고는 39억 달러까지 떨어졌다. 19 14 9 5
12월 3일의 IMF 합의는 무엇을 요구했나? {south-korea}
1997년 12월 3일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는 미셸 캉드쉬 IMF 총재 앞으로 보낸 의향서에 서명했다. 의향서는 위기의 원인을 「정부 개입의 유산이 비효율적인 금융 부문과 부채가 지나치게 많은 기업 부문을 남겼다」고 설명했다. IMF 이사회는 12월 4일 한국에 3년 동안 155억 SDR(약 210억 달러)의 대기성 차관을 승인했는데, 이는 한국 쿼터의 1,939%였다. 세계은행 100억 달러와 아시아개발은행 40억 달러, 미국·일본 등이 약속한 200억 달러 넘는 2선 지원을 합치면 전체 지원은 550억~580억 달러에 이르렀다. 19 23 5
조건은 IMF 대출 조건의 전형을 따랐다. 의향서는 시장 금리를 「충분히 오르도록 허용하겠다」고 약속했고, 정부는 국내총생산의 약 1.5%에 해당하는 재정 긴축으로 금융 구조조정 비용을 메우기로 했다. 12월 2일 이미 9개 종합금융회사가 영업 정지되었고, 부실 금융기관 정리와 국제 기준에 맞춘 건전성 감독 강화가 약속되었다. 외국인의 주식 보유 한도는 1997년 말까지 26%에서 50%로, 1998년 말까지 55%로 높이기로 했으며, 실제로는 곧 100%까지 풀렸다. 합의는 또 「인수합병과 기업 구조조정에 따른 해고 제한을 완화해 노동시장의 유연성을 높이고」 인력 파견 업체를 허용한다고 밝혔다. 이런 처방의 일반적 성격은 IMF와 구조조정 프로그램 용어에서 다룬다. 19 23 5
IMF는 고금리가 통화를 안정시킨다고 보았다. 수석 부총재 스탠리 피셔와 캉드쉬 총재는 자본이 빠져나가는 나라에서 금리를 올려야 투자자를 붙잡을 수 있다고 주장했다. 그러나 합의 뒤에도 원화는 계속 떨어졌다. 무디스는 11월 28일 한국의 신용등급을 A1에서 A3로, 12월 11일 다시 투자 부적격인 B2로 낮췄고, 원화는 12월 11일 1달러 1,700원, 23일 2,000원을 넘었으며, 12일에는 동서증권이 무너졌다. 위기 전 1달러 800원 안팎이던 원화는 결국 절반 넘게 가치를 잃었다. 5 9
김대중 정부는 위기를 어떻게 넘겨받았나?
IMF 합의 2주 뒤인 1997년 12월 18일 제15대 대통령 선거가 치러졌다. 여당 한나라당은 외환 위기와 국가 부도 위기의 책임을 지고 졌고, 야당 후보 김대중이 40.3%를 얻어 당선되었다. 집권 보수 세력이 이회창(38.7%)과 이인제(19.2%)로 갈라진 덕에 39만 표 차로 이긴, 역대 가장 근소한 승리였고 이로써 정권이 교체되었다. 당선자는 임기를 마치는 정부·여당과 협력해 그동안 막혀 있던 개혁 법안을 통과시켰고, 특히 새로 만든 금융감독위원회에 큰 권한을 주어 위기에 빠진 재벌을 정부가 통제할 수 있게 했다. 대우 계열사 경영인 출신의 전 재무부 관료 이헌재가 1998년 금융감독위원회 초대 위원장이 되었다. 14 24 25
위기 극복의 상징으로 기억되는 것은 금 모으기 운동이다. 1997년 11월 20일 새마을부녀회 중앙연합회가 1907년 국채보상운동을 잇는다며 「애국가락지 모으기 운동」을 선포했고, 정부는 이를 바람직한 민간 활동으로 평가했다. 1998년 1월 5일 KBS 금 모으기 캠페인이 시작되면서 운동은 헌납이 아니라, 내놓은 금을 수출한 뒤 그 달러 값을 나중에 원화로 돌려받는 방식으로 바뀌었다. 3월 공식 종료까지 351만 명이 참여해 약 227톤(1월에만 165톤), 당시 시세로 21억 7천만 달러어치의 금이 모였다. 그러나 이 금액은 한국이 IMF에서 빌린 195억 달러의 9분의 1 정도였다. 26 14
김대중 정부는 취임 한 달 만에 IMF와의 합의로 214억 달러를 들여왔고, 금융·기업·노동·공공의 「4대 부문 개혁」을 내걸었다. 대통령은 재벌 총수들과 경영 투명성과 구조조정을 위한 5개항에 합의했고, 노사정 협의로 근로기준법을 고쳐 정리해고제와 근로자 파견제를 도입했으며, 외국인 투자 자유지역을 만들고 외국인 진입 규제를 풀었다. 한국어 위키백과는 이 개혁을 신자유주의 경제 정책으로 요약한다. 영국의 마르크스주의 잡지에 실린 1998년 3월의 분석은 당선자가 노사정위원회를 통한 「국민 합의」로 재벌 구조 개혁과 노조의 대량 해고 수용을 맞바꾸려 한다고 보았다. 27 11 8
노사정 대타협은 어떻게 정리해고제를 만들었나?
1998년 1월 15일 노동계·재계·정부 대표가 참여하는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위원장 한광옥이 이끈 위원회는 2월 5일부터 6일 아침까지 밤샘 협상 끝에 「경제위기 극복을 위한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핵심은 1997년 법에 있던 정리해고 2년 유예 조항을 지우고, 사업의 양도·인수·합병 등 긴박한 경영상의 이유가 있을 때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에 따라 정리해고를 할 수 있게 한 것이었다. 근로자 파견제도 도입하기로 해, 전문 업무는 허용 업무를 열거하고 단순 업무는 금지 업무를 뺀 모두를 허용하기로 했다. 그 대가로 노조의 정치 활동 합법화, 1999년 7월부터 교원 노조 허용이 약속되었고, 실업 대책 재원은 5조 원으로 늘리기로 했다. 28 22
이 합의로 근로기준법에 「경영상 이유에 의한 해고」 조항이 들어갔다. 지금의 근로기준법 제24조는 그 골격을 이어받아 「사용자가 경영상 이유에 의하여 근로자를 해고하려면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어야 한다. 이 경우 경영 악화를 방지하기 위한 사업의 양도·인수·합병은 긴박한 경영상의 필요가 있는 것으로 본다」고 정하고, 해고 회피 노력, 합리적이고 공정한 기준, 노동조합과의 사전 협의를 요건으로 둔다. 같은 2월 국회는 파견근로자보호법을 새로 만들었다. 파견법의 입법 취지는 「기업의 인력관리의 신축성 제고」였고, 파견제는 7월부터 시행되었다. 언론은 정리해고와 파견제를 대표적인 노동시장 유연화 조치로 꼽았다. 29 30 31
노동계 안에서 합의는 거센 반발을 불렀다. 민주노총 위원장 배석범은 정리해고를 받아들이는 대신 공무원과 교원의 노조 결성권을 얻어 냈지만, 민주노총 대의원대회는 구조조정과 정리해고를 인정한 그를 불신임했다. 새 위원장 이용갑은 노동자의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결정에 찬성할 수 없다며 노사정위원회 불참을 선언했고, 이후 협의는 정부·한국노총·한국경영자총협회만으로 이어졌다. 한편 민주노총은 김대중 정부 아래 1999년 합법 조직이 되었고, 교원 노조 허용은 전국교직원노동조합의 합법화로 이어졌다. 21
일하는 사람들은 무엇을 겪었나?
1998년 한국 경제는 3분기 성장률이 -8.7%까지 떨어졌고, 하루 평균 부도 기업 수는 1997년 말 128개에 이르렀다. 실업자는 178만 명까지 늘었고 실업률은 1999년 2월 8.9%로 정점에 올랐다. 1998년 명목 임금은 1.5% 안팎 오르는 데 그친 반면 환율 상승과 세율 인상으로 물가는 거의 7% 올라 실질 임금이 줄었고, 소비는 마이너스로 돌아섰다. 위기 뒤 한국 사회에서는 평생 직장이라는 관념이 사라지고 명예퇴직으로 수많은 중산층 가정이 무너졌다. 홍콩·일본·한국에서 이 위기로 1만 400명이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는 추산도 있다. 14 27 5
정리해고제가 처음 큰 시험을 받은 곳은 현대자동차였다. 회사가 1,538명에게 고용 조정을 통보한 가운데 노조는 5월 27일부터 여섯 차례 파업을 벌였고, 39일 동안의 장기 파업으로 이어졌다. 과거처럼 경찰을 투입하는 대신 정부와 여당이 중재에 나섰고, 8월 24일 노사는 277명을 경영상 해고하고 나머지 1,261명은 1년 6개월 무급 휴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했다. 회사 집계로 파업의 생산 손실은 9,056억 원, 협력업체 손실을 합하면 1조 6,414억 원이었고, 부품 협력업체 300여 곳이 이미 부도를 냈다. 정리해고가 중재에 밀려 15% 남짓한 수준으로 줄자, 재계에서는 「경제논리가 정치논리에 압도됐다」는 불만이 터져 나왔다. 32 33
위기는 비정규직이 늘어나는 출발점이 되었다. 파견제 합법화 직전인 1997년 말 이미 3,573개 파견 업체가 전체 임금 노동자의 1.7%인 22만 5천 명을 파견하고 있었고, 그 임금은 정규직의 79%였다. 기업들은 해고하기 어려운 정규직을 최소화하고 필요한 기간에만 인력을 쓸 수 있게 되었다. 한국노동연구원 부원장 이원덕은 기업들이 정리해고와 파견제 법제화로 정규직 비중을 낮추면서 1997년 법 개정 때 들어온 선택적 근로시간제·재량근로제 등 다른 유연화 조치도 쓸 수 있게 되었다고 말했다. 그 뒤의 전개는 비정규직 용어에서 다룬다. 31
은행과 재벌은 어떻게 정리되었고, 대우는 왜 무너졌나?
금융 구조조정은 빠르고 거칠었다. 1998년 6월 29일 정부는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 다섯 곳을 퇴출시켜 국민·주택·신한·한미·하나은행에 넘겼고, 8월 11일에는 생명보험사 네 곳이 영업 정지되었다. 2003년 6월까지 부실 금융기관 787곳이 문을 닫거나 합병되었고, 정부는 64조 원에 이르는 공적 자금을 들여 부실 금융사와 기업을 정리했다. 금리는 30%대까지 치솟았다가 1998년 10월 이후 한 자릿수로 내려왔다. 외국인 투자 한도가 사라지면서 외국 자본이 투자한 금융기관이 빠르게 늘었고, 뉴브리지 캐피털의 제일은행 인수가 대표적인 사례였다. 14 5 27
재벌 체제도 크게 흔들렸다. 위기 동안 30대 재벌 가운데 11개가 무너졌고, 남은 재벌은 사업 분야를 좁혔다. 위기 전 일곱 곳이던 큰 자동차 회사는 두 곳만 온전히 남았다. 재계 2위까지 올랐던 대우그룹은 1993년 「세계 경영」을 내걸고 외형을 넓혔고, 위기 속에서도 쌍용자동차를 인수하는 등 정부의 구조조정 요구에 소극적이었다. 1999년 3월 부채 비율이 400%를 훌쩍 넘었고, 대우전자와 삼성자동차를 맞바꾸는 「빅딜」과 GM과의 협상이 모두 실패하자 대우 계열사 12곳은 8월 26일 채권단 관리의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대우는 1999년 11월 1일 약 5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이 선언되었다. 회장 김우중은 베트남으로 달아났다가 2005년 돌아와 체포되었고, 41조 원 분식회계 주도 등의 혐의로 기소되어 2006년 사기·횡령죄로 징역 10년을 선고받았다. 7 34 35
회복은 빨랐다. 성장률은 1999년 1분기 플러스로 돌아서 3분기 13.8%에 이르렀고, 1997년 12월 18일 39억 달러였던 외환보유고는 2000년 5월 800억 달러에 가까워졌다. 1999년 국가 신용등급은 투자 적격으로 회복되었다. 김대중 대통령은 2000년 12월 4일 IMF 위기에서 완전히 벗어났다고 선언했고, 한국은 2001년 8월 23일 IMF 차입금 195억 달러를 예정보다 3년 앞당겨 모두 갚아 IMF 관리 체제를 끝냈다. 그러나 실업자는 1999년 말까지 100만 명대에 머물렀고, 내수를 살리려던 신용카드 정책, 비정규직 문제, 청년 실업이 뒤를 이었다. 재벌 주식의 외국인 지분은 크게 늘어 2025년 삼성전자의 외국인 지분은 73%였다. 14 27 7
인도네시아의 수하르토는 왜 무너지고, 말레이시아는 왜 다른 길을 갔나? {indonesia}
인도네시아에서 위기는 정권 붕괴로 이어졌다. 수하르토는 1997년 10월부터 이듬해 4월까지 430억 달러의 유동성 지원을 받는 대가로 IMF와 세 차례 의향서를 맺었고, IMF 권고에 따라 1998년 2월 금리를 연 70%까지 올려 경기 위축을 더 키웠다. 그가 존스홉킨스 대학의 스티브 행키가 제안한 대로 통화위원회를 세우려 하자, 빌 클린턴 미국 대통령과 캉드쉬 IMF 총재는 그 생각을 버리지 않으면 430억 달러 지원을 포기해야 한다고 통보했다. 수하르토의 가족과 측근이 IMF 개혁의 가장 엄격한 요구를 피해 간다는 의혹도 신뢰를 무너뜨렸다. 1998년 인도네시아 국내총생산은 13.5% 줄었다. 36 37 5
1998년 5월 정부가 연료 가격을 70% 올리자 메단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트리삭티 대학 총격 사건 등을 계기로 학생 시위는 정부와 화교 공동체를 겨냥한 폭동으로 번져 자카르타·메단·수라카르타를 휩쓸었다. 수하르토는 1998년 5월 21일 사임해 32년의 「신질서」 독재를 끝냈고, 부통령 B. J. 하비비가 대통령직을 이어 받아 「개혁(레포르마시)」 시대가 시작되었다. 37
말레이시아는 IMF가 제안한 지원을 거절했다. 처음에는 IMF의 권고대로 정부 지출을 줄이고 금리를 올렸지만 경제는 더 나빠졌고, 1998년 국내총생산은 6.2% 줄었다. 마하티르 총리는 1998년 9월 IMF의 권고를 거슬러 링깃을 1달러 3.80링깃에 고정하고, 해외의 링깃 거래를 금지하고, 포트폴리오 투자의 유출을 제한하는 자본 통제를 실시했다. 이 조치는 위기의 피해를 막는 데 효과가 있었다는 평가를 받았고, IMF의 1999년 제4조 협의 보고서도 처음에는 회의적으로 보았던 자본 통제와 고정 환율이 기대보다 좋은 결과를 냈다고 인정했다. 다만 같은 해 마하티르가 부총리 안와르 이브라힘을 해임하면서 「레포르마시」 운동이 일어나 그의 권위주의가 비판받았다. 38 39 5
위기는 왜 러시아와 월스트리트까지 번졌나? {russia}
아시아 위기로 원유와 비철 금속 수요와 가격이 떨어지자 원자재 수출에 기대던 러시아의 외환보유고가 큰 타격을 받았다. 러시아는 높은 고정 환율, 체첸 전쟁 비용과 만성적인 재정 적자에 시달리고 있었고, 1998년 6월 단기 국채(GKO) 금리를 150%까지 올리며 버텼다. 7월 13일 IMF와 세계은행이 226억 달러의 지원을 승인했지만, 8월 17일 러시아 정부와 중앙은행은 루블을 평가 절하하고 부채 상환을 중단했다. 40 5
러시아의 채무 불이행은 미국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LTCM)를 쓰러뜨렸다. 1994년 살로몬 브러더스 출신 존 메리웨더가 세우고, 1997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은 마이런 숄스와 로버트 머튼이 이사로 있던 이 회사는 1998년 초 자기 자본 47억 달러로 1,245억 달러를 빌려 부채 비율이 25 대 1을 넘었고, 명목 1조 2,500억 달러의 파생상품을 갖고 있었다. 아시아와 러시아 위기로 넉 달이 안 되어 46억 달러를 잃자, 연방준비제도는 이 회사의 붕괴가 금융 체계 전체를 흔들 것을 우려해 나섰다. 9월 23일 금융기관 14곳이 연준의 감독 아래 36억 5천만 달러의 자본을 넣기로 합의했다. 연준이 직접 돈을 넣지는 않았지만, 일부 관찰자들은 중앙은행이 금융 체계를 떠받치겠다는 뜻을 보여 금융기관들이 위험을 더 지게 만드는 도덕적 해이를 낳을 수 있다고 우려했다. 이 우려는 뒷날 「대마불사」로 불리는 문제였고, 위기는 그 뒤 브라질과 아르헨티나로 이어졌다. 41 5
이 위기는 누구의 잘못이었나? 정실 자본주의론, 금융 공황론,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론, 한국 좌파의 해석 {south-korea}
첫째 해석은 아시아 경제 자체의 결함을 원인으로 본다. 폴 크루그먼은 1998년 문제가 「암묵적인 정부 보증이 있다고 여겨지지만 사실상 규제받지 않아 심각한 도덕적 해이에 노출된」 금융 중개 기관에서 시작되었다고 썼다. 이 기관들의 위험한 대출이 상품이 아니라 자산 가격의 인플레이션을 낳았고, 정부가 더는 보증하지 않을 것이 드러나자 거품이 꺼졌다는 것이다. 그는 이 맥락에서 「정실 자본주의」라는 말을 썼다. IMF의 한국 의향서가 위기를 「정부 개입의 유산」으로 설명한 것도 같은 시각이었고, 이 진단은 금융 자유화와 재벌·노동시장 개혁이라는 처방으로 이어졌다. 42 19
둘째 해석은 위기를 금융 공황으로 본다. 스티븐 라델렛과 제프리 삭스는 1998년 논문에서 「금융의 역사는 채권자가 쓰는 것 같다」며, 대출 계약에는 늘 두 당사자가 있는데도 위기가 나면 채무자만 비난받는다고 지적했다. 삭스와 조지프 스티글리츠는 위기의 속도가 갑작스러운 위험 충격에 따른 고전적인 예금 인출 사태와 같다고 보았고, 삭스는 「IMF가 불을 끄는 대신 극장 안에서 불이야 하고 외쳤다」고 말했다. 예금 보험도 없이 은행을 닫게 해 예금 인출을 부추기고, 수요와 유동성을 줄여 건실한 기업까지 쓰러뜨렸다는 것이다. 세계은행 수석 경제학자였던 스티글리츠는 2002년 『세계화와 그 불만』에서 IMF가 금융 규제 없이 너무 이른 자본 시장 자유화를 밀어붙여 단기 투기 자본의 유입을 부르고, 위기가 나자 재정 긴축과 고금리를 강요해 파산을 퍼뜨렸다고 비판했다. 43 5 6 44 45
셋째 해석은 처방 뒤의 이해관계를 묻는다. 로버트 웨이드와 프랭크 베네로소는 1998년 『뉴 레프트 리뷰』에 실은 「아시아 위기: 고부채 모델 대 월스트리트-재무부-IMF 복합체」에서, 1980년대 라틴아메리카와 달리 동아시아의 부채는 대부분 민간 부채였고 위기 직전까지 거시 지표도 건전했다고 지적했다. 이들은 IMF의 해법이 외채를 갚을 능력을 되살리는 국내 긴축과 금융 부문의 추가 자유화를 포함한 급진적 제도 변화라고 정리하고, 위기를 지불 능력보다 유동성의 위기로 보는 IMF 비판자들의 견해를 소개하며 브레턴우즈 회의만큼 중요한 국제 논쟁이 필요하다고 주장했다. 제목은 동아시아의 고부채 발전 모델과 미국 금융·재무부·IMF가 얽힌 이해관계를 맞세운 것이었다. 경제학자 자그디시 바그와티도 같은 해 자유로운 자본 이동의 이익은 증명된 적이 없다며, 그 신화를 만든 세력을 아이젠하워의 「군산 복합체」에 빗대 「월스트리트-재무부 복합체」라 불렀다. 스티글리츠는 IMF의 스탠리 피셔와 재무장관 로버트 루빈이 퇴임 뒤 모두 시티그룹으로 옮긴 일을 지적했다. 6 15 44
넷째로 한국과 세계의 좌파는 위기를 자본주의의 위기와 신자유주의 구조조정의 기회로 읽었다. 『인터내셔널 소셜리즘』의 1998년 분석은 세계적인 중화학공업 과잉 생산과 한국 자본의 경쟁력 하락이 수출 주도 경제의 이윤율 위기를 낳았고, 산업 위기와 금융 위기가 겹친 「복합 불황」이 IMF 구제금융으로 이어졌다고 보았다. 이 글은 1997년 1월 총파업이 노동자들이 대량 해고에 맞설 수 있음을 보여 주었다고 평가하며, 노조 지도부가 「고통 분담」을 핑계로 투쟁을 피하고 김대중 당선자가 재벌 개혁과 대량 해고를 맞바꾸려 한다고 비판했다. 브레너와 벨로는 역플라자 합의로 무너진 동아시아가 세계적 과잉 생산 위기를 더 깊게 했다고 보았다. 이 해석들에서 IMF 사태는 정리해고와 비정규직 확대로 노동 시장의 힘의 균형을 바꾼 계기로 기억된다. 8 17 11
결과
한국 경제는 1998년 마이너스 성장과 실업률 8.9%(1999년 2월)를 겪은 뒤 1999년 빠르게 회복했고, 2001년 8월 23일 IMF 차입금을 모두 갚았다. 그러나 30대 재벌 가운데 11개와 금융기관 787곳이 사라졌고, 대우는 1999년 파산했으며, 외국 자본이 은행과 대기업 주식을 크게 사들였다. 정리해고와 파견제가 자리 잡으면서 평생 직장의 관념이 사라지고 비정규직이 늘었다. 인도네시아는 1998년 국내총생산이 13.5% 줄고 수하르토 독재가 끝났으며, 말레이시아의 자본 통제는 IMF도 뒤에 효과를 인정했다. 위기 뒤 아시아 나라들은 외환보유고를 크게 쌓았고, IMF의 고금리·긴축 처방과 성급한 자본 자유화는 국제적인 논쟁거리가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96.12한국의 OECD 가입
한국이 아시아에서 일본에 이어 두 번째로 경제협력개발기구(OECD) 회원국이 되었다. 가입에 따른 금융 자유화로 기업과 은행의 달러 표시 단기 부채가 크게 늘었다.
- 21997.01한보철강 부도와 노동법 총파업
1996년 말 재계 14위였던 한보그룹의 한보철강이 부도를 냈다. 같은 달 날치기 통과된 노동법 개정에 맞선 총파업이 전국에서 벌어졌다.
- 31997.07.02태국 바트화 변동 환율 전환
외환보유고가 바닥난 태국 정부가 1달러 25바트의 고정 환율을 포기하고 바트화를 변동 환율로 돌렸다. 바트화는 이후 가치의 절반 넘게 잃었다.
- 41997.07.15기아그룹 부도 유예
재계 8위 기아그룹의 부도 처리가 유예되었다.
- 51997.08.14인도네시아 루피아 자유 변동
인도네시아가 환율 변동 폭을 넓혀 버티다가 루피아를 완전한 변동 환율로 돌렸다.
- 61997.10.23홍콩 증시 폭락
항셍 지수가 10월 20~23일 23% 떨어졌고, 홍콩 금융관리국은 달러 고정 환율을 지키려 하룻밤 금리를 한때 280%까지 올렸다. 뒤이어 한국의 대외 자금 사정이 급격히 나빠졌다.
- 71997.11.19임창열 경제부총리 취임
전날 외환 거래가 막힌 가운데 강경식 부총리가 경질되고 임창열이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이 되었다. 원화의 하루 변동 폭 제한도 사실상 풀렸다.
- 81997.11.21한국, IMF에 구제금융 요청
임창열 부총리가 IMF 수석 부총재 스탠리 피셔를 만난 뒤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했다.
- 91997.12.02종금사 9곳 영업 정지
정부가 부실이 심한 종합금융회사 9곳의 영업을 정지시켰다.
- 101997.12.03IMF 의향서 서명
임창열 부총리와 이경식 한국은행 총재가 고금리·재정 긴축·금융 구조조정·시장 개방·해고 제한 완화를 담은 의향서에 서명했다.
- 111997.12.04IMF 이사회 승인
IMF 이사회가 한국에 155억 SDR(약 210억 달러)의 3년 대기성 차관을 승인했다. 세계은행·아시아개발은행과 여러 나라의 2선 지원을 합치면 550억 달러가 넘었다.
- 121997.12.18김대중 대통령 당선
제15대 대통령 선거에서 야당의 김대중이 40.3%를 얻어 당선되었다. 같은 날 쓸 수 있는 외환보유고는 39억 달러로 바닥을 쳤다.
- 131998.01.05KBS 금 모으기 캠페인
KBS가 금 모으기 캠페인을 시작했다. 3월까지 351만 명이 약 227톤의 금을 내놓았다.
- 141998.01.15노사정위원회 출범
노동계·재계·정부 대표가 참여하는 제1기 노사정위원회가 출범했다.
- 151998.02.06노사정 대타협
노사정위원회가 정리해고의 2년 유예 조항을 지우고 근로자 파견제를 도입하는 대신 노조 정치 활동과 교원 노조를 허용하는 사회협약에 합의했다.
- 161998.05.21수하르토 사임
연료 가격 인상과 폭동, 학생 시위 끝에 인도네시아 대통령 수하르토가 32년 만에 물러나고 B. J. 하비비가 뒤를 이었다.
- 171998.06.295개 은행 퇴출
정부가 대동·동남·동화·경기·충청은행을 퇴출시키고 다른 은행에 넘겼다.
- 181998.08.17러시아 채무 불이행
러시아 정부와 중앙은행이 루블을 평가 절하하고 부채 상환을 중단했다.
- 191998.08.24현대자동차 노사 합의
39일 파업 끝에 현대자동차 노사가 277명을 경영상 해고하고 1,261명을 1년 6개월 무급 휴직으로 돌리는 데 합의했다.
- 201998.09말레이시아 자본 통제
마하티르 정부가 링깃을 1달러 3.80링깃에 고정하고 해외 링깃 거래를 금지하는 자본 통제를 실시했다.
- 211998.09.23LTCM 구제
금융기관 14곳이 연방준비제도의 감독 아래 헤지펀드 롱텀캐피털매니지먼트에 36억 5천만 달러를 넣기로 합의했다.
- 221999.08.26대우 워크아웃
대우그룹 12개 계열사가 채권단 관리의 워크아웃에 들어갔다.
- 231999.11.01대우 파산
대우가 약 500억 달러의 부채를 안고 파산이 선언되었고, 회장과 사장단이 물러났다.
- 242001.08.23IMF 차입금 상환
한국이 IMF 차입금 195억 달러를 예정보다 3년 앞당겨 모두 갚고 IMF 관리 체제를 끝냈다.
관련 인물 13명
지도부4
「세계화」를 내걸고 금융·자본 시장을 열고 OECD에 가입했으며, 임기 말 외환위기 속에 IMF 구제금융을 받아들였다.
한국 대통령(1998~2003)김대중1924–20091997년 12월 외환위기 속에 당선되어 IMF 합의 아래 4대 부문 개혁과 노사정 대타협을 이끌고 정리해고제와 파견제를 도입했다.
태국 총리차왈릿 용짜이윳1932–1997년 6월 30일 평가 절하는 없다고 했으나 7월 2일 정부가 바트화를 변동 환율로 돌렸고, 위기 속에 11월 물러났다.
말레이시아 총리마하티르 모하맛1925–IMF 지원을 거절하고 외환 투기꾼을 비난했으며, 1998년 9월 링깃을 1달러 3.80링깃에 고정하고 자본 통제를 실시했다.
집행 · 지휘5
1997년 기아 사태와 금융개혁법안 처리에 실패했고, 외환 거래가 막힌 다음 날인 11월 19일 경질되었다.
부총리 겸 재정경제원 장관임창열1944–11월 21일 IMF에 구제금융을 공식 요청하고 12월 3일 의향서에 서명하며 협상을 이끌었다.
IMF 총재미셸 캉드쉬1933–태국·인도네시아·한국 구제금융에 고금리·긴축·구조 개혁을 조건으로 걸었고, 클린턴과 함께 수하르토에게 통화위원회 구상을 버리라고 압박했다.
금융감독위원회 위원장이헌재1944–1998년 신설된 금융감독위원회의 초대 위원장으로 은행·재벌 구조조정을 밀어붙였다.
말레이시아 부총리 겸 재무장관안와르 이브라힘1947–위기 초기 IMF 처방대로 정부 지출을 줄이고 금리를 올렸으나, 마하티르와 갈라져 1998년 9월 해임되었고 이것이 「레포르마시」 운동을 불렀다.
참여2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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