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41.06–1944.11

독일 점령하의 발트 3국: 6월 봉기에서 홀로코스트와 1944년 퇴각까지

소련 지배에서 「해방」을 기대한 발트 3국에서 어떻게 3년 사이에 유대인 공동체가 거의 모두 학살되었고, 독일 점령은 왜 독립 회복이 아니라 소련의 재점령으로 끝났는가?

1941년 6월 독일의 소련 침공과 함께 리투아니아에서는 6월 봉기와 임시정부, 에스토니아에서는 숲의 형제들의 「여름 전쟁」이 일어났지만, 독일은 독립을 인정하지 않고 세 나라를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에 넣었다. 슈탈레커의 특수작전집단 A와 예거의 특무부대 3, 예켈른의 부대는 리투아니아·라트비아의 경찰대대와 아라이스 특공대 같은 현지 협력자와 함께 카우나스 포그롬, 제9요새, 포나리, 룸불라에서 유대인을 총살했고, 대부분의 희생자는 1941년 말 이전에 죽었다. 1943년 남은 게토가 해체되었고, 독일은 무장친위대 군단으로 발트인을 동원했지만 리투아니아인은 이를 보이콧했다. 1944년 나르바와 탄넨베르크선의 방어 끝에 붉은군대가 발트 3국을 되찾았고, 독립 회복을 꾀한 티에프 정부는 나흘 만에 무너졌으며 수만 명이 서방으로 피난했다.

6월 봉기와 「여름 전쟁」 (1941년 6–8월)

1941년 6월 22일 새벽 독일군 북부집단군과 중부집단군이 소비에트 리투아니아로 밀고 들어왔다. 불과 한 주 전 약 1만 7,000명이 시베리아로 강제 이송된 일은 봉기에 대한 지지와 독일군에 대한 호감을 키운 가장 큰 계기였다. 1940년 가을 베를린에서 카지스 시키르파가 세운 리투아니아 행동주의 전선은 이날 준비해 온 봉기를 일으켰고, 6월 23일 아침 카우나스 방송국에서 레오나스 프라푸올레니스가 독립 선언과 임시정부 각료 명단을 읽었다. 봉기군은 독일군이 오기 전에 카우나스와 빌뉴스를 장악했고, 한 주 만에 리투아니아 전역에서 붉은군대가 물러났다. 1990년 이후 역사가들은 망명 사회가 9만 명 이상이라고 부풀린 참가자를 1만 6,000~2만 명, 사상자를 약 600명으로 고쳐 잡았다. 퇴각하던 내무인민위원부는 라이니아이·프라비에니슈케스 등지에서 수감자들을 학살했다. 1 2

베를린에서 가택연금된 시키르파 대신 유오자스 암브라제비추스가 총리 대행을 맡은 임시정부는 6주 동안 국유화된 토지와 기업을 되돌리는 법령 등 100여 개를 냈다. 독일은 정부를 승인하지 않았지만 무력으로 해산하지도 않았고, 7월 17일 민정 기구를 세운 뒤 신문과 방송에 법령을 싣지 못하게 하는 식으로 권한을 빼앗았다. 정부는 꼭두각시가 되기를 거부하고 독일의 권한 찬탈에 항의하는 문서에 서명한 뒤 8월 5일 스스로 해산했고, 행동주의 전선도 9월에 금지되었다. 그러나 이 정부는 8월 1일의 「유대인 지위 규정」 같은 반유대 법령으로 비판받으며, 정부가 만든 국민노동방위대대(TDA)는 곧 독일 특무부대에 동원되어 카우나스 요새에서 유대인을 총살했다. 1 3 2

라트비아 점령은 7월 10일 끝났다. 독일군이 가장 늦게 닿은 에스토니아에서는 7월 3일 이오시프 스탈린이 초토화를 지시한 뒤 소련 섬멸대대가 마을을 불태우고 주민을 죽였고, 숲으로 들어간 「숲의 형제들」이 이들과 싸웠다. 숲의 형제들의 규모는 문헌에 따라 약 1만 2,000명에서 5만 명까지로 적힌다. 7월 3일 킬링기뇌메에서 처음 조직된 향토방위대(오마카이트세)는 쿠르크 소령의 지휘로 2주 동안의 전투 끝에 소련군을 타르투에서 몰아냈고, 에스토니아·독일군은 8월 17일 나르바, 8월 28일 탈린을 점령했다. 마지막 헌법상 총리였던 위리 울루오츠는 7월 29일 독일군에 독립 정부 수립을 청했다가 거절당했고, 자치행정을 맡아 달라는 제안도 거부했다. 독일군은 무장 집단을 해산시키고 에스토니아 국기를 독일 국기로 바꾸었다. 4 5 6 7 8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와 「자치행정」

1941년 7월 17일 히틀러의 포고로 동부 점령지 장관에 레발(탈린) 태생의 발트 독일인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임명되었고, 그 아래 발트 3국과 벨라루스 서부를 묶은 오스트란트 국가판무관부가 세워졌다. 7월 25일 국가판무관에 임명된 힌리히 로제는 슐레스비히홀슈타인 대관구장 자리를 유지한 채 리가와 킬을 오갔다. 판무관부는 에스토니아(총판무관 카를지크문트 리츠만), 라트비아(오토하인리히 드레흐슬러), 리투아니아(테오도어 아드리안 폰 렌텔른), 백루테니아(빌헬름 쿠베)의 네 총관구로 나뉘었다. 그러나 군사와 치안은 국방군과 친위대가, 노동력과 경제는 다른 중앙 기관이 쥐었고, 친위대는 민정이 들어서기 전의 공백기에 치안 권한을 먼저 차지했다. 9 10 11

나치의 동부 종합 계획에서 발트 지역은 독일화된 보호령을 거쳐 독일에 합쳐질 땅이었다. 로젠베르크는 1941년 4월 「인종적으로 적합한」 주민의 독일화, 게르만인 식민, 바람직하지 않은 주민의 추방을 구상했고, 에스토니아인은 이미 50% 독일화된 「가장 게르만적인」 민족이라 보았다. 계획에는 에스토니아인과 라트비아인의 절반을 「제거」하는 내용이 들어 있었고, 에스토니아를 「파이푸스란트」, 라트비아를 「뒤나란트」로 부르자는 제안도 나왔다. 로제는 1941년 11월 15일 소련 국가·당 재산을 몰수했고, 판무관부는 소련이 국유화한 농지와 작은 기업을 옛 주인에게 돌려주었지만 유대인 재산은 몰수했다. 5 9 4

독일은 각국에 현지인 자치기구를 두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930년대 파시스트 성향의 해방전쟁참전자동맹(밥스)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독일로 건너갔던 햘마르 매에가 독일군과 함께 돌아와 「에스토니아 자치행정」의 수장이 되었고, 라트비아에서는 독일계 혈통이 절반인 장군 오스카르스 단케르스, 리투아니아에서는 첫째 총고문 페트라스 쿠빌리우나스가 비슷한 역할을 맡았다. 에스토니아의 국제 조사위원회는 자치행정이 독일 정책의 틀 안에서 상당한 자율을 누렸다고 보았다. 리투아니아의 총고문들은 독일이 인기 없는 결정의 책임을 떠넘기는 거수기에 가까웠고, 독일 정책에 항의한 네 명은 슈투트호프 수용소로 보내졌다. 그래도 리투아니아인 하급 관리들은 무장친위대 사단 편성과 독일 강제노동 할당을 방해하기도 했다. 5 9 12 2 13 14 15

「자기 정화」: 학살의 시작 (1941년 6–7월)

친위대 보안경찰·정보부(SD)의 특수작전집단 가운데 발터 슈탈레커가 이끈 A집단이 북부집단군을 따라 발트 3국에 들어왔다. 첫 학살은 6월 22일 국경 마을 가르그주다이에서 유대인 약 200명을 쏜 것이었다. 슈탈레커는 6월 25일 카우나스에 와서 반유대 연설을 했고, 리투아니아인들이 선뜻 나서지 않자 알기르다스 클리마이티스의 부대에 포그롬을 시켰다. 6월 25~29일의 카우나스 포그롬에서 27일 리에투키스 차고에서는 수십 명의 유대인 남성이 군중 앞에서 쇠막대에 맞아 죽었다. 희생자 수는 슈탈레커의 보고(카우나스 3,800명, 주변 1,200명)부터 1,500~3,800명까지 문헌마다 다르고, 슈탈레커의 수치는 부풀려졌다는 의심을 받는다. 그는 10월 15일 보고에서 「해방된 주민이 스스로」 공산주의자와 유대인이라는 적에게 가장 가혹한 조치를 한 것처럼 보이게 했고 독일의 지시는 밖에서 알아챌 수 없었다고 썼다. 16 17 18 19

라트비아에서는 6월 23~24일 밤 그로비냐 묘지에서 첫 살해가 있었다. 7월 1일 슈탈레커를 만난 전직 경찰 빅토르스 아라이스는 대학생 단체와 극우 「뇌성십자」 출신을 모아 이른바 아라이스 특공대를 꾸렸고, 슈탈레커는 이 부대에 자발적으로 보이는 포그롬을 일으키라고 지시했다. 7월 4일 리가의 회당들이 불탔고 안에 갇힌 유대인들이 산 채로 타 죽었다. 이날은 오늘날 라트비아의 홀로코스트 추모일이다. 7월 리가 비케르니에키 숲에서 약 4,000명이 살해되었고, 리에파야와 다우가프필스, 레제크네의 유대인들도 독일 친위대 정보부(SD)와 라트비아 자위대·보조경찰의 손에 죽었다. 나치는 현지인에게 학살 책임을 돌리려 했으나 슈탈레커 스스로 라트비아에서는 「자기 정화」 선동이 실패했다고 인정했다. 20 21 22

에스토니아에서는 마르틴 잔트베르거의 특수부대 1a가 향토방위대와 현지 경찰의 도움을 받아 7월부터 유대인과 로마인, 공산주의자로 지목된 사람들을 잡아 죽였다. 1939년 약 4,500명이던 에스토니아 유대인은 대부분 소련 지배기와 전쟁 초기에 나라를 떠났고, 남은 950~1,000명(잔트베르거 921명, 슈탈레커 963명 등)은 거의 모두 1941년 말까지 살해되었다. 전쟁을 국내에서 살아남은 에스토니아 유대인은 12명이 채 안 된다. 1942년 1월 반제 회의에서 에스토니아는 이미 「유대인 없는 땅」으로 보고되었다. 점령 당국은 이와 별도로 공산주의자나 그 동조자라는 이유로 에스토니아인 약 6,000명과 러시아인 약 1,000명을 죽였다. 23 5 24 6

제9요새, 포나리, 룸불라 (1941년 7–12월)

리투아니아에서는 다른 점령지처럼 권리 박탈과 게토 수용을 거쳐 수용소로 보내는 단계 없이, 전쟁 첫날부터 유대인을 집 근처 구덩이에서 총살했다. 카를 예거의 특무부대 3과 요아힘 하만의 기동 살해대가 리투아니아 경찰대대와 함께 시골 마을을 돌았고, 8월 말까지 시골의 유대인 대부분이 살해되었다. 카우나스 근교 제9요새에서는 10월 28일 게토 광장에서 9,200여 명(어린이 약 4,300명)을 골라 이튿날 총살한 「대작전」 등으로, 문헌에 따라 3만 명 이상(현장 추모비)에서 4만 5,000~5만 명이 살해되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따르면 카우나스 게토에 갇혔던 약 3만 명 가운데 전쟁에서 살아남은 이는 약 2,500명이다. 2 25 26 27 28 29

빌뉴스 근교 포나리(파네리아이)에서는 7월 2일 특무부대 9가 도착하면서 총살이 시작되었고, 대부분의 사격은 리투아니아인 자원자로 이루어진 「특수소대」가 맡았다. 소련이 기름 탱크 자리로 파 둔 커다란 구덩이 여섯 개가 무덤이 되었다. 1941년 말까지 포나리에서 살해된 유대인 수는 2만 1,700명(스나이더)부터 3만 3,500명(아라드), 약 4만 명(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까지 추정이 엇갈린다. 1944년까지 포나리의 희생자는 7만~10만 명으로 추정되며, 그 가운데 유대인이 약 7만 명이고 나머지는 폴란드인과 소련군 포로 등이었다. 1943년부터 나치는 시신을 파내 태우는 작업으로 흔적을 지우려 했다. 30 31 32

리가에서는 10월 말 약 3만 명의 유대인이 게토에 갇혔다. 로제는 유대인의 재산을 빼앗고 게토에 가두어 노동력으로 쓰려 했고, 슈탈레커는 이에 항의하며 절멸을 계속하라고 요구했다. 로제는 11월 15일 경제적 고려와 상관없이 모든 유대인을 죽이라는 것인지 로젠베르크에게 물었다. 독일·오스트리아 유대인을 리가로 보낼 자리를 마련하려고, 하인리히 힘러는 우크라이나에서 학살을 지휘한 프리드리히 예켈른을 불러 「로제에게 이것이 나의 명령이며 총통의 뜻이라고 전하라」고 지시했다. 11월 30일과 12월 8일 리가 남쪽 룸불라 숲에서 리가 게토의 라트비아 유대인 약 2만 4,000명과 베를린에서 막 실려 온 유대인 약 1,000명, 모두 약 2만 5,000명이 총살되었다. 베를린 유대인을 죽이지 말라는 힘러의 전화는 그들이 이미 살해된 뒤에야 왔다. 사격은 예켈른의 독일인 대원들이 했고, 아라이스 특공대는 행렬을 구덩이로 몰았다. 20 22 33 21

예거는 1941년 12월 1일 7월 2일 이후 자기 부대 관할에서 13만 7,346명을 처형했다는 9쪽짜리 보고서를 썼고, 1942년 2월 슈탈레커에게 유대인 13만 6,421명을 포함한 13만 8,272명으로 숫자를 고쳐 보고했다. 보고서는 빌뉴스·카우나스·샤울레이 게토의 약 3만 4,500명을 빼면 리투아니아에 유대인이 없다고 결론지었지만, 다른 부대의 학살은 넣지 않았다. 슈탈레커는 1941년 겨울까지 A집단이 유대인 24만 9,420명을 죽였다고 보고했다.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에 따르면 독소전 첫 아홉 달 동안 특수작전집단은 5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총살하는 데 관여했고, 그 대다수가 유대인이었다. 29 18 19

게토와 수용소, 그리고 저항 (1941–1944)

1941년 말 리투아니아에 살아남은 약 4만~4만 3,000명의 유대인은 빌뉴스, 카우나스, 샤울레이, 슈벤치오니스 게토와 노동수용소에 갇혀 독일 군수에 동원되었다. 카우나스 게토는 빌리얌폴레의 낡은 주거지에 약 2만 9,000명을 몰아넣었고, 의사 엘하난 엘케스가 이끈 유대인 평의회는 군용 비행장 공사 등에 노동자를 보내며 생산성이 학살을 막아 주기를 바랐다. 빌뉴스 게토의 지도자 야코프 겐스는 극장을 열었고, 1943년 1월까지 공연 111회에 표 3만 4,804장이 팔렸다. 리가에서는 룸불라에서 살아남은 4,000~5,000명이 「작은 게토」에 갇혔고, 나머지 구역에는 독일·오스트리아·보헤미아에서 실려 온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들어갔다. 1942년부터 1943년 봄까지는 대량 학살이 멈춘 「게토 안정기」였다. 25 2 28 27 34 33

1943년 6월 21일 힘러가 동부의 남은 게토를 모두 없애라고 명령했다. 빌뉴스 게토는 9월 23~24일 해체되어 주민들이 에스토니아의 노동수용소로 보내지거나 포나리에서 총살되었고, 노약자는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영어 위키백과는 트레블링카, 미국 홀로코스트 기념관은 소비보르). 카우나스와 샤울레이 게토는 강제수용소로 바뀌었다. 리가 교외에는 1943년 3월 카이저발트 수용소가 세워져 최대 1만 2,000명을 가두었고, 에스토니아에는 1943년 8월부터 바이바라를 중심으로 22개의 수용소가 세워져 약 2만 명의 유대인이 셰일유 채굴 등에 끌려갔다. 1942년 9월에는 체코와 베를린에서 온 유대인 1,700여 명이 도착하자마자 칼레비리바 모래언덕에서 총살되었다. 리가 근처 살라스필스 수용소에서는 2,000~3,000명이 열악한 환경으로 죽었다. 34 32 2 35 36 23 37

빌뉴스 게토에서는 1942년 1월 21일 「우리는 도살장의 양처럼 가지 않을 것이다」라는 아바 코브네르의 구호 아래 공산주의자와 좌우파 시온주의자가 연합 파르티잔 조직(FPO)을 세웠다. 1943년 지도자 이츠하크 비텐베르크가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게토 해체 때 대원들은 봉기 대신 숲으로 빠져나가 파르티잔이 되었다. 카우나스 게토에서도 약 500명이 탈출해 남동부 숲의 유대인·소련 파르티잔에 합류했다. 시신을 태우는 일에 동원된 수감자들은 1943년 말 제9요새에서 64명이, 1944년 4월 19일 포나리에서는 숟가락으로 판 굴로 80명이 탈출했고, 포나리 탈출자 가운데 살아남은 11명의 증언이 학살을 알렸다. 38 34 32 28 26 30

협력과 구조

발트 3국의 홀로코스트는 현지인의 대규모 참여로 규정된다. 리투아니아에서는 26개 경찰대대 1만 2,000~1만 3,000명 가운데 10개 대대가 독일 특무부대와 함께 약 7만 8,000명을 처형한 것으로 추정되며, 독일 보안경찰 밑의 리투아니아 보안경찰과 「특수소대」가 체포와 총살을 도왔다. 라트비아의 아라이스 특공대는 학살기 300~500명(전성기 1,500명)으로 약 2만 6,000명의 유대인을 죽였다. 에스토니아 향토방위대 약 4만 명 가운데 1,000~1,200명이 유대인과 로마인을 잡아들이고 수용소를 지키거나 학살에 직접 가담했고, 에스토니아 경찰대대는 리가와 빌뉴스, 벨라루스의 학살에도 나섰다. 역사가들은 유대인을 공산주의와 동일시하며 소련 지배의 책임을 돌린 선전, 오래된 반유대주의, 재산에 대한 탐욕 등을 원인으로 꼽지만 그 이유는 지금도 논쟁 중이다. 2 16 21 7 23

희생자 수는 범위로만 말할 수 있다. 독일 침공 당시 리투아니아의 유대인 약 20만 8,000~21만 명 가운데 19만~19만 5,000명이 살해되어 95% 이상이 죽었고, 역사가들의 추정은 16만 5,000명에서 25만 4,000명까지 벌어진다. 라트비아에서는 전쟁 전 약 9만 3,000명 가운데 약 7만 명(아라드는 7만 3,000~7만 4,000명)이 살해되었고, 독일 점령기 라트비아에서 살해된 사람은 유대인과 로마인 약 2,000명을 포함해 약 9만 명이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남아 있던 유대인 950~1,000명 외에 다른 나라에서 끌려온 유대인 약 1만 명이 살해되었다. 오스트란트 전체에서 특수작전집단과 질서경찰, 현지 보조경찰은 유대인 등 100만 명이 넘는 사람을 죽였다. 16 20 4 23 9

목숨을 걸고 유대인을 숨긴 사람들도 있었다. 이스라엘은 2017년까지 리투아니아인 891명을 「열방의 의인」으로 인정했고, 리투아니아의 폴란드계 주민도 많이 도왔다. 리가 항구의 하역 노동자였던 자니스 립케는 루프트바페 창고의 하청 일을 하며 게토와 수용소에서 유대인 노동자를 빼내 아내 요한나와 함께 집 마당에 판 은신처 등에 숨겼고, 그렇게 살린 사람은 문헌에 따라 40~55명이다. 빌뉴스에서는 국방군 소령 카를 플라게가 자동차 수리 작업장의 유대인 노동자들을 보호했다. 이와 별개로 카우나스 주재 일본 부영사 스기하라 지우네는 통과 비자를 발급해 약 6,000명의 유대인이 유럽을 빠져나가도록 도왔다. 에스토니아에서는 우쿠 마싱 부부 등 세 명이 의인으로 인정되었다. 16 39 40 4 34 5

군단·보이콧·파르티잔 (1942–1944)

병력이 모자라게 된 독일은 발트인을 무장친위대에 끌어들였다. 1942년 8월 28일 「에스토니아 군단」 창설이 발표되었고, 1943년 3월의 강제 동원으로 5,300명이 군단에, 6,800명이 국방군 지원 부대에 들어갔다. 동원을 피해 수천 명이 핀란드로 건너가 핀란드군 제200보병연대가 되었다. 라트비아에서는 힘러의 요청을 받은 히틀러의 명령으로 1943년 2월 「라트비아 군단」이 만들어졌다. 1919~1924년생부터 시작된 징집은 점점 넓어졌고, 1944년 7월 군단 병력은 8만 7,550명이었으나 자원자는 약 15%에 그쳤다. 군단원 다수는 소련보다 독일을 「덜 나쁜 쪽」으로 보고 독립 라트비아를 바랐다. 41 5 42

리투아니아인은 1943년 무장친위대 동원을 보이콧해 300명도 응하지 않았다. 독일은 보복으로 지식인 46명을 슈투트호프로 보내고 3월 리투아니아의 모든 대학을 닫았다. 1944년 2월 포빌라스 플레하비추스 장군 휘하의 「리투아니아 향토방위군」이 리투아니아 안에서만 활동할 민족 부대로 기대를 모으며 만들어졌지만, 5월 독일이 직접 지휘하고 국외로 보내려 하자 장군은 부대 해산을 명령했다. 독일은 지휘부를 체포하고 86명을 파네리아이에서 처형했으며 1,089명을 수용소로 보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944년 2월 7일 울루오츠가 라디오로 1904~1923년생 남성에게 징집에 응하라고 호소했고, 3만 8,000명이 등록소로 몰려들었다. 그는 붉은군대의 재점령을 막아 내면 연합국이 독립을 지지해 주리라 기대했다. 15 2 5 8

소련 파르티잔은 주로 라트비아 동부의 라트갈레와 빌뉴스 지방에서 활동했다. 1942년 11월 모스크바에 리투아니아 공산당 제1서기 안타나스 스니에치쿠스가 이끄는 리투아니아 파르티잔 운동 본부가 세워졌고, 라트비아 파르티잔은 1943년부터 아르투르스 스프로기스 아래 모스크바 본부에 직속되었다. 에스토니아에서는 1944년까지도 소련 파르티잔이 234명뿐이었고 모두 낙하산으로 들어온 내무인민위원부·붉은군대 요원이었다. 1943년 초 독일의 「겨울 마법 작전」은 라트비아 동부 국경 지대에서 마을 99곳을 불태우고 주민 6,000명을 강제노동에 끌고 가며 3,600명을 쏘았고, 아라이스 특공대가 여기에 앞장섰다. 리투아니아 남동부에서는 소련 파르티잔과 폴란드 국내군이 충돌했고, 독일 편 리투아니아 부대와 국내군 사이의 보복으로 1944년 6월 글리티슈케스와 두빙갸이에서 민간인 학살이 벌어졌다. 43 2 4 21

나르바에서 쿠를란트까지: 1944년의 퇴각

1944년 1월 레닌그라드 봉쇄가 풀리자 레오니트 고보로프의 레닌그라드 전선군이 2월 에스토니아 국경의 나르바강에 이르렀다. 독일 「나르바 분견군」은 북부집단군 사령관 발터 모델 아래 다른 나라 의용병과 에스토니아 징집병으로 반년 동안 교두보를 지켰고, 7월 26일 나르바를 내주고 16km 서쪽 시니매에드 언덕의 탄넨베르크 방어선으로 물러났다. 7월 25일부터 8월 10일까지의 전투에서 2만 2,250명의 독일군(보병의 약 절반이 에스토니아 사단)이 13만 6,830명의 소련군을 막아 냈고, 에스토니아 역사가 마르트 라르는 소련군 사상자를 약 17만 명으로 추산한다. 에스토니아를 빨리 되찾으려던 스탈린의 목표는 이루어지지 않았다. 5 4 44) 45 46

남쪽에서는 6월 22일 시작된 바그라티온 작전이 독일 중부집단군을 무너뜨렸다. 소련군은 7월 시가전 끝에 빌뉴스를, 8월 1일 카우나스를 되찾았고, 7월 말에는 리가만 해안에 닿아 북부집단군을 잠시 고립시켰다. 퇴각하던 독일군은 7월 초 카우나스 강제수용소를 비우고 수감자를 슈투트호프와 다하우로 보냈으며, 숨은 유대인을 찾아내려 게토 터를 폭파했다. 9월 14일부터 11월 24일까지의 발트 공세에서 이반 바그라먄의 제1발트 전선군 등이 진격해 10월 13일 리가를 점령했고, 10월 9일 클라이페다 근처에서 바다에 닿아 북부집단군을 쿠를란트반도에 가두었다. 국가판무관 로제는 8월 13일 허가 없이 리가를 떠났다가 해임되었다. 4 25 27 47 48 11

9월 4일 핀란드가 전쟁에서 빠지자 독일은 에스토니아 본토를 포기하는 「아스터 작전」에 들어갔다. 9월 18일 울루오츠는 오토 티에프를 총리 대행으로 하는 정부를 세웠고, 티에프는 법적 연속성에 바탕을 둔 독립 회복을 선언했다. 에스토니아 군인들은 탈린 톰페아의 정부 청사를 장악했고 9월 20일 피크헤르만 탑에 에스토니아 국기를 올렸지만, 9월 22일 붉은군대가 탈린에 들어와 소련 국기로 바꾸어 달았다. 클루가 수용소에서는 이 무렵인 9월 19~22일 남은 수감자 약 2,000명이 총살되어 불태워졌고, 2,400명 가운데 85명만 살아남았다. 독일군은 11월 23일 사아레마섬 쇠르베반도에서 마지막으로 물러났다. 쿠를란트의 독일군은 1945년 5월 항복할 때까지 버텼다. 5 49 50 8 51 48

붉은군대가 다가오자 대규모 피난이 이어졌다. 에스토니아어로 「대탈출」이라 불리는 피난에서 1944년 에스토니아를 떠난 사람은 약 8만 명이었고 그 가운데 6~9%가 도중에 죽었다. 약 4만 명은 배나 육로로 독일로, 약 3만 명은 작은 배로 발트해를 건너 스웨덴으로 갔다. 피난은 9월 19~23일에 절정에 이르렀고, 9월 22일 소련 비행기의 어뢰에 맞은 병원선 모에로가 가라앉아 1,237명이 죽었다. 라트비아에서도 약 15만 명이 서방으로 망명했다. 첫 소련 점령의 기억이 이들을 떠나게 했고, 남은 사람들에게는 재점령과 숲의 형제들의 저항, 새로운 이송이 기다리고 있었다. 46 4

결과

리투아니아에서는 독일 침공 당시 유대인의 95% 이상인 19만~19만 5,000명이, 라트비아에서는 약 7만 명(아라드는 7만 3,000~7만 4,000명)이, 에스토니아에서는 남아 있던 950~1,000명 거의 전부와 끌려온 외국 유대인 약 1만 명이 살해되었다. 리투아니아의 비율은 유럽에서 가장 높은 축에 든다. 1944년 말 쿠를란트를 뺀 발트 3국은 다시 소련 지배 아래 들어갔다.

연표와 지도

리가 탈린 나르바 클루가 룸불라 카우나스 빌뉴스 포나리(파네리아이) 8 탈린 7 시니매에드 9 클루가 3 리가 5 룸불라 1 가르그주다이 4 제9요새 2 카우나스 6 포나리(파네리아이)
  1. 11941.06.22독일소련리투아니아
    독소전 개전과 첫 학살

    독일군이 리투아니아로 들어왔고 가르그주다이에서 유대인 약 200명이 총살되었다.

  2. 21941.06.23리투아니아
    리투아니아 독립 선언

    6월 봉기 중 카우나스 방송이 독립 선언과 임시정부 명단을 내보냈다.

  3. 1941.06.25리투아니아독일
    카우나스 포그롬

    슈탈레커의 부추김 속에 29일까지 유대인 수천 명이 살해되었다.

  4. 31941.07.04라트비아독일
    리가 회당 방화

    아라이스 특공대가 회당에 갇힌 유대인들을 불태워 죽였다.

  5. 1941.07.17독일
    오스트란트 수립 포고

    히틀러가 로젠베르크를 동부 점령지 장관으로 하는 민정을 포고했다.

  6. 1941.07.29에스토니아독일
    울루오츠의 요청 거부

    독일이 에스토니아 독립 정부 수립 요청을 거절했다.

  7. 1941.08.05리투아니아
    임시정부 해산

    리투아니아 임시정부가 독일의 권한 찬탈에 항의하고 해산했다.

  8. 1941.08.28에스토니아독일소련
    탈린 함락

    에스토니아·독일군이 탈린을 점령했다.

  9. 41941.10.29리투아니아독일
    제9요새 「대작전」

    카우나스 게토에서 골라낸 9,200여 명이 제9요새에서 총살되었다.

  10. 51941.11.30라트비아독일
    룸불라 학살

    12월 8일까지 리가 게토의 유대인 등 약 2만 5,000명이 총살되었다.

  11. 1941.12.01리투아니아독일
    예거 보고서

    특무부대 3이 13만 7,346명을 처형했다고 집계했다.

  12. 1942.01.21리투아니아
    연합 파르티잔 조직

    빌뉴스 게토에서 유대인 저항 조직이 결성되었다.

  13. 1942.08.28에스토니아독일
    에스토니아 군단

    무장친위대 에스토니아 군단 창설이 발표되었다.

  14. 1943.02라트비아독일
    라트비아 군단

    히틀러의 명령으로 라트비아 군단이 창설되었다.

  15. 1943.03리투아니아독일
    리투아니아의 보이콧

    무장친위대 동원이 보이콧되자 독일이 대학을 닫고 지식인을 이송했다.

  16. 61943.09.23리투아니아독일
    빌뉴스 게토 해체

    주민들이 에스토니아 수용소와 포나리, 절멸수용소로 보내졌다.

  17. 1944.02.07에스토니아
    울루오츠의 징집 호소

    라디오 호소 뒤 3만 8,000명이 징집에 응했다.

  18. 71944.07.26에스토니아독일소련
    탄넨베르크선

    나르바를 내준 독일군이 시니매에드 언덕에서 8월 10일까지 버텼다.

  19. 1944.08.01소련리투아니아독일
    카우나스 탈환

    7월의 빌뉴스에 이어 소련군이 카우나스를 되찾았다.

  20. 81944.09.18에스토니아소련
    티에프 정부

    울루오츠가 티에프 정부를 세웠으나 22일 붉은군대가 탈린에 들어왔다.

  21. 91944.09.19에스토니아독일
    클루가 학살

    22일까지 수감자 약 2,000명이 총살되었다.

  22. 1944.10.13소련라트비아독일
    리가 점령

    발트 공세 중 소련군이 리가를 점령했고 북부집단군은 쿠를란트에 갇혔다.

  23. 1944.11.23에스토니아독일소련
    쇠르베 철수

    독일군이 에스토니아의 마지막 거점에서 물러났다.

관련 인물 18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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