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월 혁명
누가 차르 체제를 무너뜨렸고, 이중권력은 왜 10월로 이어졌는가?
1917년 2월 혁명은 페트로그라드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에 빵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시작한 파업에서 출발했다. 파업은 며칠 만에 총파업으로 번졌고, 발포 명령을 받은 수비대 병사들이 노동자 편으로 돌아서면서 차르 체제는 무너졌다. 그 결과는 단순한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중권력이었다. 공식 권한은 임시정부가 가졌지만, 노동자와 병사의 실질적 충성은 소비에트에 있었다.
제국은 이미 무너지고 있었다: 1917년 3월 8일 전야
2월 혁명이 시작된 1917년 3월 8일(구력 2월 23일) 아침, 페트로그라드에는 혁명 지도부도, 사전 계획도, 뚜렷한 신호도 없었다. 그럼에도 제국은 이미 여러 겹의 붕괴를 겪고 있었다.
전쟁은 3년 차에 접어들어 러시아군의 사상자는 약 915만 명(전사 170만, 부상 495만, 실종·포로 250만)에 달했고, 탈영률은 월 3만 4천 명에 이르렀다. 1916년 여름 브루실로프 공세는 처음에는 오스트리아-헝가리 전선을 돌파했으나 100만 명의 추가 손실을 남기고 교착되었다. 사기가 바닥난 병사들 사이에서는 "사령부가 배신했다"는 이야기가 일상이었고, 차르가 1915년 여름 친히 최고사령관을 맡은 것은 전쟁의 패배와 왕조의 운명을 한 몸에 묶는 결정이었다.
수도에서는 빵이 사라지고 있었다. 역사가 세르게이 네페도프의 연구에 따르면, 1916년 가을부터 시작된 인플레이션 속에서 정부가 곡물 고정가격제를 도입하자 농민과 지주는 가치가 떨어지는 지폐 대가로 곡물을 팔기를 거부했다. 페트로그라드의 밀가루 재고는 급감했고, 1917년 1월 말 리티흐 농업장관은 제빵소에 공급되는 밀가루를 하루 3만 5천 푸드(약 573톤)로 제한했다. 이는 1인당 하루 1파운드(409g)의 빵에 해당하는 양이었다. 배급제가 없었기에 빵은 불균등하게 분배되었고, 줄 선 사람 상당수는 몇 시간을 기다려도 빵을 얻지 못했다. 이른바 '흐보스티'(꼬리)라 불린 빵 줄은 밤부터 시작되었다. 2월 초 첫 번째 식량 공황이 시의회의 임시 방출로 진정되었으나, 이것이 도시의 곡물 비축량을 더욱 고갈시켰고, 2월 18일 공급이 다시 줄어들자 두 번째 공황이 터져 나왔다. 그 사이 1,200대 이상의 기관차가 혹한에 파열된 파이프로 멈춰 섰고, 5,700대의 화차가 폭설로 길에 묶였다. 독일과 터키의 해상 봉쇄로 수입은 사실상 막혔다.
정치 권력은 붕괴하고 있었다. 니콜라이 2세가 전선에 머무는 동안 알렉산드라 황후와 그리고리 라스푸틴이 사실상의 섭정을 행사했다. 1915년 9월부터 1917년 2월까지 17개월 동안 러시아는 총리 4명, 내무장관 5명, 전쟁장관 3명, 외무장관 3명을 갈아치웠다. 이른바 '미니스테르스카야 체하르다'(장관 도약)는 유능한 행정가들을 밀어냈을 뿐 아니라, 누구도 직무를 숙지할 만큼 오래 자리에 머물지 못하게 했다. 1916년 12월 라스푸틴이 귀족들의 손에 살해된 것은 지배계급 내부에서조차 황실이 독이 되었다는 인식이 퍼졌음을 보여주었다. 1917년 1월에 임명된 마지막 총리 니콜라이 골리친은 자신이 총리직을 맡을 준비가 전혀 안 되어 있다며 임명을 사양하려 했다. 진보블록으로 불린 두마 내 온건파(밀류코프의 입헌민주당에서부터 10월당까지)는 '국민의 신임을 받는 내각'을 요구했으나 차르는 묵살했다. 두마 의장 로댠코가 "지체는 죽음과 같다"고 전보로 경고한 것은 혁명 이틀 전인 2월 26일이었다.
바로 그 아래에서는 노동자들이 움직이고 있었다. 전쟁으로 페트로그라드의 산업 노동자는 62% 증가했고, 1916년 한 해에만 수도에서 정치파업 330건(참가자 37만 7천 명), 경제파업 354건이 발생했다. 비보르크 구의 금속 노동자들(러시아 산업 노동자의 1%에 불과했으나)은 전국 정치파업의 45.7%를 주도했다. 1917년 1월 9일 '피의 일요일' 기념 파업에는 페트로그라드 산업 노동자의 3분의 1 이상이 참가했고, 2월 14일 두마 개원일에 맞춰 8만 5천 명이 파업에 들어갔다. 혁명 정당들은 수백 명의 활동가만을 가진 채 지하에 묻혀 있었으나, 노동자들의 자발적 동원은 이미 정당의 조직력을 넘어서 있었다.
수비대 15만~20만 명은 혁명을 진압할 마지막 수단이었지만, 이 병력 역시 믿을 수 없었다. 전쟁이 길어지면서 정예 부대는 전선으로 빠져나갔고, 수도의 병영은 훈련도 사기도 낮은 후방 예비병과 신병으로 채워졌다. 이들은 전선으로 가기보다 페트로그라드의 노동자 구역에서 생활했고, 노동자들의 불만을 매일 듣고 목격했다. 차르와 장군들이 믿었던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 충성심이었다.
이 모든 요소(전쟁의 소진, 빵의 부재, 정치의 공백, 노동자의 조직화, 수비대의 불안)가 하나의 불쏘시개로 겹쳐진 상태에서, 1917년 3월 8일 아침 비보르크 구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세계 여성의 날을 맞아 거리로 나왔다.
빵과 총검: 혁명의 첫 나흘
1917년 2월 23일(구력) 아침,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공장을 나와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세계 여성의 날이었지만, 그날 아침 이들을 움직인 것은 기념일이 아니라 굶주림이었다. "빵!"이라는 외침이었다.
페트로그라드의 식량 사정은 1917년 1월부터 급격히 악화되고 있었다. 수도에는 월간 약 127만 6천 푸드의 밀가루가 필요했으나, 12월 공급량은 60만 6천 푸드로 반 토막 났고, 1월에도 73만 1천 푸드에 그쳤다. 1월 15일 142만 6천 푸드였던 밀가루 재고는 2월 15일 71만 4천 푸드로 줄었고, 2월 25일에는 46만 푸드(혹은 30만 푸드)까지 떨어졌다. 2월 13일 아나톨리 발크 시장은 일일 밀가루 반입량이 기준치 6만 푸드의 12분의 1인 5천 푸드에 불과하다고 총리에게 보고했다. 알렉산드르 리티흐 농업장관은 5,700량의 화차가 눈 속에 묻혀 멈춰 섰다고 해명했으나, 같은 눈보라가 닥친 1916년 초에는 6만 량이 멈춰도 아무도 거리로 나서지 않았다. 차이는 재고였다. 비축분이 바닥난 상태에서는 작은 차질도 재앙이었다.
비보르크 구의 방직 공장들, 즉 토르실롭스카야 방직 공장, 스타리 파르비아이넨 포탄 공장, 노비 파르비아이넨 공장에서 여성 노동자들이 기계를 멈추고 이웃 공장으로 달려가 남성 노동자들에게 "나와라!"고 외쳤다. 돌과 눈덩이를 창문에 던지고, 작업장 안으로 밀고 들어가 파업 동참을 요구했다. 당시 현장에 있던 볼셰비키 활동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조차 회의적이었다. 그는 2월 25일 동료들에게 "노동자들에게 빵 1파운드만 주면 운동은 사그라질 것"이라고 말했다. 이 발언은 당시 어느 혁명 정당도 이 파업을 혁명의 시작으로 보지 않았음을 증언한다.
그러나 운동은 사그라지지 않았다. 23일 하루에만 128,000명이 50개 공장에서 파업했고, 다음 날인 24일에는 214,000명(224개 사업장), 25일에는 305,000명(421개 사업장)으로 불어났다. 구호도 바뀌었다. "빵!"에서 "전쟁을 끝내라!", "독재를 타도하라!", "공화국 만세!"로. 2월 24일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는 혁명 연사들이 알렉산드르 3세 기마상 위에 올라가 연설했고, 누군가 "하마"(이 우람하고 우스꽝스러운 전제정치의 상징에 붙은 민중의 별명)라는 낙서를 남겼다. 경찰은 속수무책이었다.
코사크 기병대는 군중을 해산하라는 명령을 받았으나, 대부분 나이 어린 예비역들로 구성되어 있었고 군중 통제용 채찍조차 지급되지 않았다. 군중에게 다가갔다가 멈추고 물러서는 일이 반복되었다. 23-24일 이틀 동안 경찰관 28명이 구타당했고, 발크 시장은 24일 정오에 세르게이 하발로프 군관구 사령관에게 "경찰은 군중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습니다"라고 보고했다. 이때부터 질서 유지의 책임은 군대에 넘어갔다.
25일 저녁, 모길료프의 참수부(스타프카)에 있던 니콜라이 2세는 하발로프로부터 "수도의 소요"를 보고받고 "내일까지 반드시 진압하라"는 전문을 보냈다. 하발로프는 다음 날인 26일 도심을 봉쇄하고 네바 강의 다리를 올렸다. 그러나 시위대는 영하 5도의 얼어붙은 강을 걸어서 건넜다.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는 볼린스키 연대 예비대대 소속 중대가 군중을 향해 발포해 40명이 숨지고 40명이 부상당했다. 네프스키 대로와 사도바야 거리 모퉁이, 리곱스카야 거리 등지에서도 총격이 이어졌다. 오호란카(비밀경찰)의 보고서는 이렇게 기록했다: "군중은 공중을 향한 예비 사격에는 웃음을 터뜨렸다. 실탄을 군중 한가운데 쏘아야만 비로소 흩어졌으나, 대부분 주변 건물 안으로 숨었다가 사격이 멈추면 다시 거리로 나왔다."
바로 그날 저녁, 시위 진압에 동원되었던 파블롭스키 연대 예비대대 제4중대가 봉기했다. 카잔 성당 부근에서 같은 연대의 다른 중대가 시위대와 충돌했다는 소식을 듣고 막사를 뛰쳐나와 기마경찰에 총격을 가했다. 이 반란은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에 의해 진압되었고, 무장 해제된 병사들은 체포되었다. 그러나 이는 단지 경고였다. 같은 날 밤,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 발포했던 볼린스키 연대 교습대의 사병들은 막사에서 서로에게 물었다: 내일도 쏴야 하는가?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 상사는 대답했다: 아니, 이제 그만이다. 아침이 오면 모든 것이 바뀌어 있었다.
총검이 돌아서다: 수비대 반란에서 명령 제1호까지
2월 27일(구력) 새벽, 볼린스키 연대 교습대의 병사들이 결정을 내렸다. 전날 즈나멘스카야 광장에서 40명을 사살한 바로 그 부대였다. 하사관 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가 동료들에게 말했다. "아버지, 어머니, 자매들이 빵을 구걸하고 있다. 우리가 그들을 쏴야 하느냐?" 병사들은 발포 명령을 거부했고, 중대장 라슈케비치 대위가 막사에 나타나자 그 자리에서 사살했다. 사슬은 한 번에 끊어졌다. 볼린스키 교습대가 막사를 뛰쳐나와 인근의 프레오브라젠스키 연대와 리투아니아 연대를 "들어 올렸다." 오후가 되기 전에 모스크바 연대, 파블롭스키 연대, 공병대대가 차례로 합류했다. 저녁 무렵에는 약 6만 7천 명의 병사가 노동자 편에 섰고, 하발로프 장군 휘하에 남은 충성 병력은 2천 명에 불과했다.
병사들이 노동자와 합류한 데는 구조적 이유가 있었다.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16만 명은 대부분 전선으로 보내지길 기다리는 예비군이었다. 2만 명을 수용할 막사에 12배를 밀어넣었고, 1천 명이 넘는 중대도 있었다. 이들은 신병이거나 40대의 재소집된 가장들이었으며, 자신들을 "총을 든 농민"으로 여겼다. 2월 26일의 발포 명령은 이들에게 돌이킬 수 없는 심리적 균열을 일으켰다. 지휘관들은 막사를 떠나 숨어버렸고, 병사들은 장교 없는 상태에서 스스로 행동을 결정해야 했다. 무기고가 열리고, 구치소 문이 부서졌으며, 크레스티 교도소에서는 멘셰비키 노동그룹 지도자 쿠즈마 그보즈데프 등 정치범 2천 명이 풀려났다.
바로 이 혼란 속에서 이중권력의 제도적 틀이 세워졌다. 2월 27일 오후, 타브리다 궁에서는 두 개의 권력이 동시에 탄생했다. 한쪽에서는 두마 의원들이 '수도 질서 회복을 위한 임시위원회'를 구성했고, 다른 쪽에서는 석방된 그보즈데프 등이 주축이 되어 페트로그라드 노동자 대표 소비에트의 임시집행위원회를 결성했다. 두마 임시위원회 의장 미하일 로댠코는 보리스 엥겔하르트 대령이 기초한 명령을 통해 병사들을 막사로 복귀시키고 장교들에게 지휘권을 반환하라고 지시했다. 이 명령은 병사들 사이에 공포를 불러일으켰다. 막사로 돌아가는 것은 구체제 장교들의 손에 다시 맡겨지는 것을 의미했고, 그 장교들은 바로 전날 병사들에게 발포 명령을 내린 자들이었다.
이에 대한 응답이 명령 제1호였다. 3월 1일(구력), 노동자 소비에트와 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합동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의 병사 분과에서 격렬한 논의가 벌어졌다. 니콜라이 소콜로프(무소속 사회민주주의자 변호사이자 집행위원회 서기)와 병사 대표 세묜 클리반스키('막심'이라는 가명의 멘셰비키)가 병사들의 요구를 조문화했다. 3월 2일(구력) 『이즈베스티야』에 게재된 이 명령은 모든 부대에 병사위원회를 선출할 것, 정치적 행동에서 부대는 소비에트에 복종할 것, 두마 군사위원회의 명령은 소비에트 결정과 충돌하지 않을 때만 집행할 것, 모든 무기는 병사위원회의 통제 아래 둘 것, 그리고 비번 시에는 모든 시민과 동등한 권리를 가질 것 등을 규정했다. 장교 호칭에서 '각하'가 사라지고 '제독 각하' 대신 '제독 씨'가 되었으며, 병사에게 하대말을 쓰는 것이 금지되었다.
흔히 오해되듯 이 명령이 장교 선출을 명시한 것은 아니었다. 선출 대상은 소비에트 대표와 병사위원회 위원이었다. 그러나 5항은 결정적이었다. 무기가 장교의 통제가 아닌 위원회의 통제 아래 놓이면서, 페트로그라드의 실질적 무장력은 소비에트에 복종하게 되었다. 군사적 강제력이라는 국가권력의 궁극적 토대가 이 한 문장으로 이전된 것이다. 트로츠키는 이를 "2월 혁명의 유일하게 가치 있는 문서"라고 평했고, 반대편에서 데니킨 장군은 "군대 붕괴의 첫 번째이자 주요한 충격"이라고 불렀다. 두 평가 모두 같은 현실을 다른 각도에서 본 것이다.
집행위원회의 멘셰비키·에스에르 지도부는 명령의 폭발력을 곧 깨닫고 3월 6일(구력) 명령 제2호로 이를 페트로그라드 수비대에만 적용된다고 '해명'했으나 소용없었다. 이미 900만 부가 인쇄되어 전선까지 퍼져나간 뒤였다. 명령 제1호는 이중권력을 헌법적 관념에서 물리적 현실로 바꾸어놓은 문서였다.
왕관은 땅에 떨어졌다: 퇴위에서 이중권력까지
3월 15일(구력 3월 2일) 오후 3시, 니콜라이 2세는 프스코프의 북부전선 사령부 열차 안에서 퇴위 선언에 서명했다. 300년 로마노프 왕조의 종말은 군주와 의회의 대결이 아니라, 최고사령부가 차르를 집단적으로 포기하면서 이루어졌다.
퇴위 전날 밤, 북부전선 사령관 니콜라이 루즈스키 장군은 니콜라이 2세와 몇 시간에 걸친 대화 끝에 '의회에 책임지는 내각' 구성에 대한 동의를 얻어냈다. 그러나 3월 15일 새벽 루즈스키가 두마 의장 미하일 로댠코와 직통 회선으로 연결되었을 때, 로댠코의 대답은 냉혹했다: "그것으로는 부족합니다. 왕조 문제가 정면으로 제기되었습니다." 참모총장 미하일 알렉세예프는 이 대화록을 모든 전선 사령관들에게 긴급 발송하며 퇴위 찬성 의견을 요청했다. 대공 니콜라이 니콜라예비치, 알렉세이 브루실로프, 알렉세이 예베르트: 전원이 퇴위를 권고했다. 루즈스키가 이 전보 묶음을 차르 앞에 내려놓았을 때, 니콜라이 2세는 "나를 모두 배신했다, 니콜라샤마저"라고 말했다.
차르는 당초 아들 알렉세이에게 양위하려 했으나, 주치의 표도로프에게 황태자의 혈우병이 불치임을 확인받고는 아들과 자신 모두를 위해 퇴위하기로 했다. 동생 미하일 알렉산드로비치 대공에게 "러시아 제국의 왕위를 계승"하도록 한 것이다. 이날 밤 두마 대표 알렉산드르 구치코프와 바실리 슐긴이 프스코프에 도착했을 때, 니콜라이는 이미 문서를 준비해 놓고 있었다. 슐긴의 기록에 따르면 "차르는 완전히 평온했고, 마치 편대를 인계하는 것처럼" 행동했다.
다음 날 아침, 페트로그라드에서 상황은 다시 한 번 뒤집혔다. 미하일 대공은 밀류코프 등으로부터 왕관 수락을 강하게 권유받았으나,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나는 당신의 생명을 보장할 수 없다"고 경고했다. 몇 시간의 논의 끝에 미하일은 왕위 수락을 보류하고, 제헌의회가 보통선거로 소집되어 정체를 결정할 때까지 임시정부에 복종할 것을 국민에게 요청하는 선언에 서명했다. 니콜라이 2세는 이 소식을 듣고 일기에 "신이시여, 누가 그에게 그런 쓰레기에 서명하라고 등을 떠밀었는지"라고 적었다.
같은 날 임시정부 구성이 발표되었다. 수반은 젬스트보 연합회장 게오르기 리보프 공, 외무장관은 입헌민주당의 파벨 밀류코프, 육해군장관은 구치코프였다. 그리고 유일한 사회주의자 각료로 케렌스키가 법무장관에 들어갔다. 케렌스키의 입각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결정을 정면으로 위반한 것이었다. 소비에트는 '부르주아 정부의 책임을 사회주의자가 나눠 가질 수 없다'며 각료 진입을 거부하기로 결의했지만, 케렌스키는 개인 자격으로 참여한 뒤 사후 승인을 받아냈다.
소비에트는 임시정부에 조건부 지지를 선언했다: "신생 권력이 그 의무를 수행하고 구체제와 단호히 싸우는 한도 내에서." 이 한 문장에 이중권력의 본질이 응축되어 있었다. 정부는 공식 권한을 가졌지만 소비에트가 통제하는 군대·철도·전신 없이는 아무것도 집행할 수 없었다. 구치코프가 알렉세예프에게 보낸 3월 22일 전보는 이를 적나라하게 드러낸다: "임시정부는 실질적 권력을 갖고 있지 않으며, 그 명령은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허용하는 범위에서만 집행됩니다."
3월 한 달 동안 혁명은 전국으로 퍼져나갔다. 8시간 노동제가 공장위원회의 압력으로 사실상 도입되었고, 지방에서는 소비에트가 정부 위원보다 우선하는 권력을 행사하기 시작했다. 크론시타트에서는 5월에 이미 소비에트가 유일한 권력임을 선언했다. 볼셰비키는 이 시기 소수파였다. 4월 초까지 당의 노선은 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와 뱌체슬라프 몰로토프가 이끄는 러시아국이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반대 입장을 취했으나, 스탈린과 레프 카메네프가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프라우다』를 장악한 뒤로는 임시정부에 대한 '압력' 노선으로 선회했고, 이는 '혁명적 수호주의'에 근접한 것이었다.
4월 16일 밤, 레닌이 핀란드 역에 도착했을 때 이중권력은 이미 제도화되어 있었지만 그 정치적 의미는 아직 결정되지 않은 채였다. 레닌은 장갑차 위에서 한 첫 연설에서 이 체제 자체를 문제 삼았다: 임시정부는 자본가의 정부이며, 진정한 권력은 소비에트에 있다는 것, 그리고 사회주의 혁명만이 전쟁과 토지 문제를 해결할 수 있다는 주장이었다. 환영 나온 당원들조차 그 연설을 예상하지 못했고, 다음 날 발표된 4월 테제는 당내에서 격렬한 논쟁을 촉발시켰다. 2월이 만든 이중권력은 이제 새로운 종류의 대립을 품기 시작했다.
레닌의 외로운 도전, 밀류코프의 선물: 4월 테제에서 연립정부까지
레닌이 1917년 4월 4일(구력) 타브리다 궁에서 「현 혁명에서 프롤레타리아트의 임무에 관하여」라는 제목으로 발표한 테제는 청중을 경악시켰다. 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지지 거부, 부르주아 혁명 단계는 이미 완료되었으며 프롤레타리아트와 빈농에게 권력을 이양해야 한다는 주장, 그리고 즉각적인 사회주의 혁명으로의 이행. 이 모든 것은 당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다수파는 물론 볼셰비키 지도부 내에서도 상식 밖의 발언이었다. 멘셰비키인 니콜라이 수하노프는 이 연설을 듣고 "아무도 소비에트를 국가권력 기관으로, 그것도 유일하고 영속적인 기관으로 생각해 본 적이 없었다"고 기록했다.
당내 저항은 즉각적이고 강력했다. 4월 8일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표결에서 레닌의 테제는 13 대 2로 부결되었고, 기권 1표였다. 레닌의 복귀 전까지 당의 실질적 지도자였던 레프 카메네프는 4월 8일자 『프라우다』에 「우리의 의견 차이」를 기고해 테제가 "부르주아-민주주의 혁명이 완료되었다는 인식에서 출발하며, 이 혁명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즉시 전환시키려 한다"고 비판했다. 카메네프는 이런 노선을 따르면 당이 "혁명적 프롤레타리아 대중의 당으로 남지 못하고 공산주의 선전가 집단으로 전락할 것"이라고 경고했다. 게오르기 플레하노프는 더 거칠게 "레닌의 테제는 섬망"이라고 평했다. 페트로그라드로 돌아온 이오시프 스탈린조차 처음에는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표명했고, 레닌의 귀환 후에야 테제 지지로 돌아섰다.
그러나 레닌은 물러서지 않았다. 비보르크·나르바·바실리옙스키 등 노동자 밀집 구역의 구당 조직들을 차례로 설득했고, 4월 14일 개막한 페트로그라드 전시당협의회에서 테제는 다수의 지지를 얻었다. 레닌이 "끈기 있게 설명하라"고 반복해 강조한 것은 우연이 아니었다. 그는 대중이 스스로의 경험을 통해 임시정부의 본질을 깨닫기 전에는 권력 장악을 시도해서는 안 된다고 보았다. 이 노선은 4월 24일부터 29일까지 열린 제7차 전러시아당협의회(4월 협의회)에서 133명의 정식 대의원이 참석한 가운데 최종 승인되었다.
바로 그 무렵, 임시정부는 레닌의 주장을 스스로 입증하는 실수를 저질렀다. 4월 18일 파벨 밀류코프 외무장관은 연합국에 보낸 각서에서 러시아가 "세계 전쟁을 결정적 승리까지 수행하겠다"는 입장을 재확인했고, 이는 3월 27일 선언에서 약속했던 "무병합·무배상의 평화"를 정면으로 배반하는 것이었다. 각서의 전문이 4월 20일 아침 신문에 실리자 페트로그라드는 들끓었다.
가장 먼저 움직인 것은 병사들이었다. 4월 20일 오전, 핀란드 연대 예비대대 병사들이 "정복 정책 타도!"라고 적힌 깃발을 들고 마린스키 궁으로 행진했고, 곧 모스크바 연대, 제180연대, 제2발트함대 승무원 일부가 합류했다. 1만 5천 명이 넘는 무장 병사들이 임시정부 청사를 포위하고 밀류코프의 사임을 요구했다. 이날 오후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미하일 스코벨레프와 아브람 고츠를 급파해 병사들을 설득했고, 라브르 코르닐로프 사령관은 미하일롭스크 포병학교에 대포를 배치하라고 명령했으나 장교와 사병들이 이를 거부했다.
이튿날인 4월 21일에는 노동자들이 대거 합류했다. 비보르크 구 노동자들의 주도로 약 10만 명이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라는 구호를 들고 거리로 나왔다. 일부 볼셰비키 페트로그라드 위원회 위원들은 "임시정부 타도!"라는 구호를 내걸었으나,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이를 시기상조의 모험주의로 규탄했다. 이날 정부 지지파와 반대파 사이에 무력 충돌이 벌어졌고, 2월 혁명 이후 처음으로 거리에서 피가 흘렀다.
소비에트 집행위원회는 사태를 진정시키기 위해 필사적이었다. 4월 21일 밤, 니콜라이 치헤이제와 이라클리 체레텔리는 정부 각료들과 마라톤 회의를 벌여 각서에 대한 "해명"을 발표하기로 합의했고, 집행위는 34 대 19로 "사건은 종결되었다"는 결의안을 통과시켰다. 2천 명 이상의 대의원이 모인 소비에트 총회도 이를 압도적으로 승인했다. 집행위는 이틀간 모든 거리 집회를 금지했고, 대중은 분노에도 불구하고 소비에트의 명령에 복종했다. 수하노프는 이 장면을 두고 "인민의 소비에트가 5분 만에, 단순한 거수로 반인민 정부를 제거할 수 있었다면, 같은 소비에트가 같은 5분 만에 인민의 폭풍을 잠재운 광경은 더욱 인상적이었다"고 썼다.
위기의 결과는 역설적이었다. 밀류코프와 알렉산드르 구치코프는 사임했으나, 소비에트 지도부는 정부를 제거하는 대신 정부에 들어갔다. 5월 5일(구력) 제1차 연립정부가 출범해 빅토르 체르노프가 농업장관, 이라클리 체레텔리가 체신장관,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전쟁장관이 되었다. 사회주의자들은 이제 전쟁 수행의 책임을 나눠 지게 되었다. 볼셰비키만이 연립정부 참여를 거부한 유일한 주요 사회주의 정당으로 남았고, 바로 이 지점에서 반전·반정부 세력의 유일한 대안으로서 그들의 급성장이 시작되었다.
대회는 다수를 가졌고, 거리는 볼셰비키를 가졌다: 제1차 소비에트 대회와 6월 시위
1917년 6월 16일(구력 3일) 페트로그라드의 제1사관생도군단 건물에 2,000만 소비에트 선거인을 대표하는 822명의 투표권 대의원이 모였다. 당파를 밝힌 777명 중 사회혁명당 285명, 멘셰비키 248명, 볼셰비키 105명이었다. 볼셰비키는 대회의 8분의 1에 불과했고, 멘셰비키-에스에르 연합은 4분의 3을 움직일 수 있었다. 트로츠키는 이 대회를 두고 "3월에는 사회주의자로 등록했다가 6월에는 혁명에 지친 사람들"로 채워져 있었다고 썼다. 그러나 당파 구성은 이미 수도 대중의 기분을 반영하지 못하고 있었다. 대회 개막 당일, 페트로그라드 공장위원회 회의는 압도적 다수로 "오직 소비에트 정부만이 나라를 구할 수 있다"는 결의를 채택했다. 비보르크 구의회 선거에서는 볼셰비키가 37석을 얻어 멘셰비키-에스에르 블록의 22석을 두 배 가까이 앞질렀다.
개회 첫날, 볼셰비키는 임박한 공세 문제를 의제로 올리자고 요구했으나 압도적 다수로 부결되었다. 공세 준비는 이미 진행 중이었고, 다수파는 그 책임을 공개적으로 논의하는 것을 원하지 않았다.
대회의 핵심 인물은 이라클리 체레텔리였다. 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온 멘셰비키 지도자이자 연립정부의 체신장관이었던 그는 대회 내내 소비에트 다수파의 입장, 곧 혁명적 수호주의를 가장 날카롭게 대변했다. 그는 "이 결정적 순간에 인민의 대의에 유용할 수 있는 어떤 사회 세력도 저울에서 빼서는 안 된다"며 부르주아지와의 연립을 정당화했다. 6월 4일 연설에서 체레텔리는 "러시아에는 '권력을 우리 손에 넘겨라, 물러가라, 우리가 자리를 차지하겠다'고 말할 정당은 없다"고 선언했다. 레닌이 자리에서 외쳤다. "그런 당이 있다!" 에스에르-멘셰비키 쪽에서는 웃음이 터졌다. 레닌은 웃음을 뚫고 말을 이었다. "믿음을 주십시오, 우리가 우리의 강령을 드리겠습니다." 소비에트가 부르주아 정부와 나란히 존재할 수 없다는 것, 연립은 끝없는 마찰과 혼란을 낳을 뿐이라는 것, 50~100명의 백만장자를 체포하고 노동자 통제를 도입하라는 것, 이것이 그 강령이었다.
케렌스키는 볼셰비키에 격렬히 응수했다. "당신들은 유치한 처방을 권한다, '체포하라, 죽여라, 파괴하라.' 당신들은 사회주의자인가, 구체제의 경찰인가?" 연립정부 지지는 543 대 126으로 통과되었다. 8시간 노동제는 '다양한 계층의 이해를 조화시키기 어렵다'는 이유로 부결되었고, 민족자결권은 미래의 제헌의회로 미루어졌다.
6월 21일, 볼셰비키는 23일에 평화 시위를 열겠다고 발표했다. 구호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인의 자본가 장관 타도"였다. 대회 다수파는 이를 '군사 음모'로 규정하고 3일간 모든 시위를 금지했다. 체레텔리는 더 나아가 "볼셰비키의 무장을 해제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수하노프가 지적했듯 그것은 "볼셰비키를 따르는 프롤레타리아트의 무장 해제"를 의미했다. 의장 니콜라이 치헤이제는 "조치가 취해지지 않으면 내일은 치명적일 것"이라고 비장하게 선언했다. 대회는 500명이 넘는 대의원을 조를 나누어 공장과 병영에 급파했다.
그 밤은 소비에트 지도부에게 혹독한 교훈이 되었다. 대의원들은 적대적이거나 냉담한 반응을 받고 돌아왔다. 한 보고는 "대중은 볼셰비키로 가득 차 있다"고, 다른 보고는 "그들은 프라우다만 믿는다"고 전했다.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은 프라우다가 볼셰비키 중앙위원회의 시위 취소 결정을 확인한 뒤에야 대회의 금지 선언을 붙였다.
볼셰비키는 시위를 취소했다. 스탈린은 "병사들 사이의 동요는 사실이지만 노동자들 사이에는 그런 확실한 기분이 없다"며 신중론을 폈다. 레닌은 취소 결정을 설명하면서 "오늘 체레텔리는 역사적이고 히스테리컬한 연설을 했다. 오늘 혁명은 발전의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고 썼다. 볼셰비키 기층에서는 항의가 일었다. 일부 당원들은 당원증을 찢었다.
대회 다수파는 볼셰비키의 굴복에 고무되어 역습에 나섰다가 곧 위험을 감지했다. 볼셰비키의 무장 해제는 불가능했고, 금지령이 오히려 대중의 분노를 샀다. 그 타협의 산물이 7월 1일(구력 6월 18일) 대회 주최 시위였다. "혁명적 민주주의의 단결"을 과시하겠다는 것이 취지였다. 공식 구호는 모호했다: "보통평화", "민주공화국", "즉각적인 제헌의회 소집".
결과는 참담했다. 마르스 광장에서 약 40만에서 50만 명이 행진했지만, 행렬은 거의 예외 없이 볼셰비키 구호를 외쳤다. "10인의 자본가 장관 타도!", "공세 반대!",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대회의 공식 깃발은 볼셰비키 깃발의 바다에 묻혔다. 고리키의 『노바야 지즌』은 이날이 "페트로그라드 프롤레타리아트 사이에서 볼셰비키즘의 완전한 승리를 드러냈다"고 썼다. 라비노비치는 "볼셰비키 깃발과 플래카드의 바다는 대회의 공식 구호에 의해 이따금 깨질 뿐이었다"고 기록했다. 모스크바, 키예프, 하리코프, 민스크 등지에서도 비슷한 시위가 벌어졌다. 트로츠키는 이렇게 정리했다. "대중은 볼셰비키가 세력이 되었음을 보았고, 망설이던 자들은 그쪽으로 끌려갔다."
바로 그날, 케렌스키의 갈리치아 공세가 시작되었다. 사흘 뒤 대회는 별도 결의로 공세를 지지했다. 2주 뒤 공세는 붕괴했고, 7월 사태의 도화선이 타올랐다.
거리는 무장했고, 정부는 거짓말로 응수했다: 7월 사태에서 라즐리프까지
7월 사태는 위로부터도 아래로부터도 계획된 것이 아니었다. 방아쇠를 당긴 것은 페트로그라드 제1기관총연대의 병사들이었다. 6월 말 임시정부가 연대의 병력을 전선으로 분할 배치하기로 결정하자, 11,340명의 이 거대한 연대는 준동하기 시작했다. 7월 3일(구력) 아침, 연대 막사에서 열린 집회에서 아나키스트 이오시프 블레이흐만은 "조직은 거리가 해 줄 것이다"라며 무장행진을 촉구했다. 볼셰비키 연사들이 자제를 호소했지만 병사들은 "당을 떠나더라도 연대의 결정을 따르겠다"고 답했다. 저녁이 되자 무장한 병사들은 거리로 쏟아져 나왔고, 푸틸로프 공장 노동자들과 크론시타트 수병들이 합류했다.
볼셰비키 중앙위원회는 오후 4시 회의에서 봉기에 반대한다는 결정을 내렸다. 페트로그라드는 러시아 전체가 아니며, 전선의 병사들은 아직 볼셰비키 편이 아니었다. 그러나 거리의 움직임을 막을 수 없다는 것이 분명해지자, 중앙위원회는 밤 11시 40분경 결정을 뒤집고 "평화적이나 무장한 시위"를 지도하기로 했다. 레닌은 핀란드에 있다가 급히 소환되었다. 다음 날 레닌은 크셰신스카야 저택 발코니에서 군중에게 짧게 연설했지만, 이것이 10월 혁명 전 그의 마지막 공개 연설이 되었고, 권력 장악을 선언하지는 않았다.
7월 4일, 수만 명이 타브리다 궁전 앞에 모여 소비에트가 권력을 잡으라고 외쳤다. 에스에르 지도자 빅토르 체르노프가 군중을 달래려다 붙잡혀 "권력을 잡으란 말이야, 이 개자식아, 갖다 바칠 때!"라는 고함을 들었다. 트로츠키가 군중 속으로 뛰어들어 그를 구출했다. 그러나 오후 들어 정부 충성 부대의 발포가 시작되었고, 네프스키 대로와 리테이니 대로에서 유혈 충돌이 벌어졌다. 사상자는 수백 명에 달했다.
결정적 전환은 무력이 아니라 문서 한 장에서 왔다. 7월 4일 밤, 법무장관 파벨 페레베르제프는 레닌이 독일 총참모부의 지시와 자금을 받고 움직인다는 내용의 자료를 언론에 넘겼다. 증거의 핵심은 독일군 포로수용소에서 이중간첩으로 일하던 예르몰렌코라는 전직 비밀경찰의 진술과 스톡홀름의 의심스러운 상인 부르시테인의 증언이었다. 전 차르 비밀경찰 책임자 글로바초프조차 "그런 증거는 우리 수중에 없었다"고 증언할 만큼 빈약한 자료였지만, 신문 《지보예 슬로보》는 7월 5일 "레닌, 가네츠키와 회사: 간첩들"이라는 제목으로 터뜨렸다. 전 볼셰비키 그리고리 알렉신스키가 정치적 얼굴을 제공했다.
파장은 즉각적이었다. 7월 5일 아침, 정부군은 프라우다 편집국과 인쇄소를 파괴했다. 갓 찍힌 신문은 모이카 강에 버려졌다. 특별수사위원회가 구성되었고, 레닌·지노비예프·카메네프·루나차르스키·콜론타이·라스콜니코프 등에 대한 체포령이 내려졌다. 플레하노프의 《예딘스트보》는 "러시아 국가의 수도 거리에서 벌어진 소요는 분명히 외부의 적이 러시아를 분쇄하기 위해 짠 계획의 일부"라고 썼다. 약 800명의 볼셰비키 당원이 체포되었고, 적위대는 무장 해제되었다.
볼셰비키 지도부 사이에서는 레닌이 법정에 서서 트로츠키가 1905년에 그랬듯 검찰을 피고석으로 만들어야 한다는 의견도 있었다. 그러나 스탈린이 "유리창까지 가기도 전에 죽는다"고 반대했다. 결국 레닌은 7월 9일 지노비예프와 함께 다섯 곳의 은신처를 거친 끝에 라즐리프 인근 노동자 예멜랴노프의 건초 헛간으로 피신했다. 그곳에서 레닌은 《국가와 혁명》 집필을 시작했고, "혁명의 평화적 발전에 대한 모든 희망은 사라졌다"고 결론지었다.
트로츠키는 달랐다. 아직 공식적으로 볼셰비키 당원이 아니었음에도, 그는 당국에 스스로 체포를 요구하며 연대를 표시했고 크레스티 감옥에 수감되었다. 이중권력은 사실상 종료되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는 살아 있었지만, 멘셰비키-에스에르 지도부는 볼셰비키를 "잘못된 길을 가고 있지만 정직한 투사들"이라고 부르며 변호하는 것 외에는 아무것도 막을 수 없었다. 케렌스키는 7월 8일 총리가 되었고, 임시정부는 우경화했다. 그러나 7월의 탄압은 볼셰비키를 지하로 몰아넣었을 뿐 파괴하지는 못했다. 분노한 노동자와 병사들은 기억하고 있었다.
혁명을 구한다는 이름으로: 케렌스키 정부의 모순
7월 21일(구력 7월 8일) 알렉산드르 케렌스키가 총리에 취임했다. 리보프 공이 물러난 자리는 상징 이상이었다. 2월 혁명이 낳은 첫 정부 수반이 스스로 내려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케렌스키는 전쟁장관과 해군장관을 겸임했고, 내각 구성에 필요한 권한을 한 몸에 쥐었다. 겉으로 보기에는 강력한 정부의 탄생이었으나, 그 기초는 붕괴 직전의 정국을 모면하기 위한 급조된 것이었다.
7월 24일(구력) 제2차 연립정부 명단이 발표되었다. 총리 겸 전쟁해군장관 케렌스키, 부총리 겸 재무장관 니콜라이 네크라소프(급진민주당), 내무장관 니콜라이 압크센티예프(에스에르), 노동장관 마트베이 스코벨레프(멘셰비키), 식량장관 알렉세이 페셰호노프(인민사회주의자), 법무장관 알렉산드르 자루드니(인민사회주의자) 등 17명 중 10명이 사회주의자였다. 그러나 수적으로 사회주의자가 다수였다고 해서 정부의 성격이 좌측으로 기울었다고 보는 것은 착시다. 카데트당은 연립에 참여하는 대가로 세 가지 조건을 내걸었고 케렌스키가 이를 받아들였다: 전선에서의 사형제 회복, 공개 집회 제한, 병사위원회 권한 축소. 2월 혁명 이후 소비에트 원칙 위에 세워졌던 정부는, 이제 카데트의 요구 위에 서게 되었다.
사형제 회복은 이 정부의 본질을 가장 극명하게 드러낸 사건이다. 3월 12일 임시정부가 가장 먼저 한 일 중 하나가 사형제 폐지였고, 그 포고에 서명한 법무장관이 바로 케렌스키였다. 석 달 반이 지나 7월 12일, 이번에는 총리 겸 전쟁장관으로서 전선에서의 사형제 회복 포고에 서명했다. 타르노폴 참사(7월 6일 독일군의 반격으로 남서전선이 붕괴한 사건) 직후 라브르 코르닐로프 장군은 도망치는 병사들에게 기관총 사격을 가하라는 명령을 이미 내린 상태였다. 케렌스키는 코르닐로프의 무단 처형을 추인하듯 사형제를 복원했고, 7월 31일에는 코르닐로프를 최고사령관에 임명했다. SR 출신 총리가 제정 시대에도 제한적이었던 총살형을 혁명의 이름으로 부활시킨 것이다.
이 역설은 케렌스키 개인의 문제가 아니라 그가 선 자리의 문제였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중앙집행위원회는 7월 9일 '혁명의 구제 정부'에 무제한적 권한을 부여하는 결의안을 253대 47로 통과시켰다. 표도르 단은 "러시아는 군사독재의 위협을 받고 있다. 우리는 군사독재자의 손에서 총검을 빼앗아야 한다"고 주장했다. 하지만 볼셰비키를 탄압하는 정부의 손에 쥔 총검이 반혁명의 총검과 무엇이 다른지, 그 질문에는 스스로 답할 수 없었다. 마르토프가 볼셰비키 지도자들의 체포를 규탄하자, 체레텔리는 "레닌을 상대하는 편이 마르토프를 상대하는 것보다 낫다. 전자에게는 무엇을 해야 할지 알지만, 후자에게는 손이 묶인다"고 답했다. 멘셰비키 내무장관이 옛 당 동지에게 던진 이 말은, 정부가 좌파를 억압함으로써만 우파를 길들일 수 있다는 치명적인 착각을 압축한다.
케렌스키 정부는 출범 첫 주에 과거의 자신과 단절했다. 그가 법무장관 시절 폐지한 것은 사형제만이 아니었다. 5월에 서명했던 '병사의 권리 선언'도 사실상 폐기되었고, 병사위원회의 권한은 전투 부대에서 대폭 제한되었다. 군대는 전쟁을 계속해야 했고, 토지 개혁은 제헌의회 소집 이후로 다시 미루어졌으며, 공장위원회와 소비에트의 실질적 권한은 조금씩 깎여나갔다. 이 정부는 2월 혁명의 근본 과제들, 즉 평화와 토지와 제헌의회 중 그 어느 것도 해결할 의지도 능력도 없었다. 그렇게 만들어진 진공 속에서 코르닐로프는 '국가의 구원자'로 부상했고, 그가 일으킨 반란은 결국 케렌스키 자신을 집어삼켰다.
2월이 결정한 것, 2월이 결정하지 못한 것: 혁명의 유산과 역사가들의 논쟁
2월 혁명이 결정한 것은 단 하나, 차르 체제의 종말이었다. 300년 로마노프 왕조는 8일 만에 무너졌고, 러시아는 명목상 공화국이 되었다. 그러나 그 공화국을 누가 통치하는지, 토지는 누구에게 가는지, 전쟁을 계속할 것인지는 전혀 결정되지 않았다. 그리하여 2월의 결과는 정권 교체가 아니라 이중권력, 즉 임시정부와 소비에트, 부르주아와 프롤레타리아트, 전쟁 지속파와 평화파라는 모순된 구조의 출현이었다. 이 구조는 어느 한 쪽이 양보하지 않는 한 붕괴할 수밖에 없는 것이었고, 10월은 그 붕괴의 최종 형태였다.
그러나 이 '자연스러운 귀결'이라는 서사에는 중요한 논쟁이 숨어 있다. 소비에트 역사학은 2월을 '부르주아 민주주의 혁명'으로, 10월을 사회주의 혁명으로 배치해 필연적 단계론을 구성했다. 자유주의 역사학은 2월의 민주주의적 가능성에 주목하며, 러시아가 1차 세계대전이라는 외부 충격만 아니었으면 입헌군주제나 의회민주주의로 진화할 수 있었다고 주장했다. 리처드 파이프스가 이 흐름의 대표적인 목소리다.
그러나 1970년대 이후 수정주의 역사학은 양쪽 모두에 균열을 냈다. 에두아르트 부르잘로프, 하세가와 쓰요시, 마이클 멜란콘은 소비에트 역사학이 숨겨온 현장의 사회주의자들, 즉 비보르크 구의 바실리 카유로프와 그의 동지들, 여성 노동자들 사이에서 조직한 볼셰비키 활동가들을 복원했다. 윌리엄 체임벌린이 1935년에 '가장 무지도자적이고 자발적이며 익명적인 혁명'이라고 정식화한 것은, 알고 보면 혁명에 뒤늦게 합류한 멘셰비키와 에스에르 지도부가 자신들의 부재를 정당화하기 위해 만든 서사였고, 나중에 소비에트 공식사가 레닌, 트로츠키, 스탈린의 부재를 설명하기 위해 빌려온 것이었다.
그러나 멜란콘의 '사회주의적 행위주체성' 테제도 2월의 자발성을 전면 부정하는 것은 아니다. 2월 23일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당 간부의 만류를 무시하고 파업에 나선 순간, 26일 파블롭스키 연대의 병사들이 상부의 명령 없이 막사를 뛰쳐나온 순간, 이것들은 어느 당도 계획하지 않은 움직임이었다. 토니 클리프가 지적했듯, 문제는 자발성이 아니라 봉기의 에너지를 누가 정치적으로 포섭하느냐였다. 2월에는 멘셰비키와 에스에르가 그 에너지를 임시정부로 흘려보냈고, 10월에는 볼셰비키가 소비에트 권력으로 집중시켰다.
오늘날 연구자들이 대체로 동의하는 지점은 이렇다. 2월은 전쟁 피로, 식량 위기, 엘리트의 이탈이라는 구조적 조건 없이는 불가능했으나, 그 조건들을 정치적 전복으로 전환시킨 것은 현장의 조직된 노동자와 사회주의 활동가들이었다. 이중권력은 우연한 타협이 아니라 2월의 사회적 힘의 균형이 낳은 구조적 결과였으며, 임시정부가 전쟁과 토지 문제에서 교착할수록 그 균형은 왼쪽으로 기울었다. 2월이 10월을 필연적으로 만들었다고 말할 수는 없지만, 2월의 미해결 과제들이 10월의 지지 기반을 구축한 것은 분명하다. 차르는 떠났고, 무기는 노동자와 병사에게 있었으며, 정부는 아직 그 사실을 받아들이지 못하고 있었다.
결과
임시정부는 전쟁을 끝내지도, 농민에게 토지를 주지도, 제헌의회를 서둘러 소집하지도 않았다. 4월·6월·7월의 연이은 위기는 이 거부가 낳은 것이었고, 7월 사태 이후의 탄압은 문제를 해결하지 못한 채 대중과 정부의 거리만 벌렸다. 소비에트에 이미 조직된 인민 권력이 존재하는 상황에서, 2월이 남긴 미해결 과제들은 10월 혁명의 조건이 되었다.
연표
- 1917.03.08세계 여성의 날, 여성 노동자들이 불을 붙이다
세계 여성의 날(구력 2월 23일), 페트로그라드 비보르크 구의 여성 방직 노동자들이 빵과 전쟁 종식을 요구하며 파업에 나섰고, 인근 공장의 남성 노동자들을 거리로 불러냈다. 혁명의 첫 불꽃을 당긴 것은 어느 당 지도부의 지시가 아니라 여성 노동자들 자신이었다.
- 1917.03.09–11총파업과 발포 명령
파업은 이틀 만에 30만 명 규모의 총파업으로 번졌고, 니콜라이 2세는 전선에서 '내일까지 소요를 진압하라'고 명령했다. 3월 11일(구력 2월 26일) 즈나멘스카야 광장 등지에서 군대가 군중에게 발포해 수십 명이 죽었으나, 학살은 시위를 멈추기는커녕 병사들의 동요를 불렀다.
- 1917.03.12수비대의 반란과 소비에트의 탄생
볼린스키 연대 병사들이 발포 명령을 거부하고 봉기하자 페트로그라드 수비대 전체가 차례로 노동자 편에 섰고, 무기고와 감옥이 열렸다. 같은 날 타브리다 궁에서 페트로그라드 노동자·병사 대표 소비에트가 결성되었고, 국가두마 임시위원회도 나란히 들어섰다.
- 1917.03.14명령 제1호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가 명령 제1호를 발표해 모든 부대에 병사위원회를 세우고, 무기를 위원회의 통제 아래 두며, 소비에트의 결정과 어긋나지 않는 한에서만 두마 위원회의 명령을 따르도록 했다. 수도의 무장력은 사실상 소비에트에 복종하게 되었고, 이중권력의 실체가 여기서 드러났다.
- 1917.03.15니콜라이 2세 퇴위, 이중권력의 시작
군 수뇌부마저 퇴위를 권고하자 니콜라이 2세는 3월 15일(구력 3월 2일) 자신과 아들의 제위를 포기했고, 300년 로마노프 지배가 끝났다. 리보프 공을 수반으로 한 임시정부가 들어섰지만, 그 권력은 소비에트의 동의 위에서만 움직일 수 있었다.
- 1917.04.16레닌의 귀환
레닌이 봉인열차로 스위스 망명에서 돌아와 핀란드 역에 도착했고, 장갑차 위에서 '사회주의 혁명 만세'를 외치며 환영 군중에게 연설했다. 임시정부를 지지하던 당시의 통념에 대한 정면 도전이었다.
- 1917.04.174월 테제
레닌은 임시정부에 대한 일체의 지지 거부,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 전쟁 종식과 토지 국유화를 담은 4월 테제를 제시했다. 카메네프가 프라우다 지상에서 공개 반론을 펼 만큼 당내에서도 충격이었으나, 4월 말 당협의회에서 테제는 볼셰비키의 노선이 되었다.
- 1917.05.03–044월 위기
밀류코프 외무장관이 연합국에 '승리할 때까지 전쟁을 계속한다'고 약속한 각서가 알려지자 노동자와 병사 수만 명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밀류코프와 구치코프는 물러났고, 5월 18일 케렌스키를 전쟁장관으로 한 제1차 연립정부가 구성되어 사회주의자 장관들이 전쟁 수행의 책임을 나눠 지게 되었다.
- 1917.06.16제1차 전러시아 소비에트 대회
에스에르와 멘셰비키가 다수를 이룬 대회는 연립정부 지지를 재확인했다. '러시아에 단독으로 권력을 잡겠다는 정당은 없다'는 발언에 레닌이 '그런 당이 있다'고 답한 것은 이 대회에서였다.
- 1917.07.016월 시위와 케렌스키 공세
구력 6월 18일, 소비에트 지도부가 소집한 페트로그라드 대시위에서 약 40만 명이 행진했으나 깃발의 압도적 다수는 '모든 권력을 소비에트로', '10인의 자본가 장관 타도' 같은 볼셰비키 구호였다. 같은 날 시작된 갈리치아 공세는 곧 참패로 끝나 연립정부의 권위를 결정적으로 깎아내렸다.
- 1917.07.16–177월 사태
제1기관총연대 병사, 크론시타트 수병, 공장 노동자 수십만 명이 무장한 채 거리로 나와 소비에트 권력을 요구했다. 봉기가 시기상조라고 본 볼셰비키 지도부는 시위를 평화적으로 이끌려 했으나, 정부에 충성하는 부대의 발포로 수백 명의 사상자가 났고 운동은 진압되었다.
- 1917.07.19탄압, 당은 지하로
프라우다 편집국이 파괴되고 레닌이 '독일 간첩'이라는 조작된 혐의가 대대적으로 유포되었다. 레닌은 지노비예프와 함께 라즐리프의 오두막으로 피신했고, 트로츠키·카메네프·루나차르스키 등이 체포되었다.
- 1917.07.21케렌스키 정부
리보프가 물러나고 케렌스키가 총리가 되어 제2차 연립정부를 이끌었다. 그러나 전쟁은 계속되었고 토지는 여전히 농민에게 주어지지 않았으며, 2월이 제기한 과제들은 코르닐로프 반란과 10월을 향해 미해결인 채 남았다.
관련 인물 55명
지도부13
4월에 귀환해 임시정부 불신임과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을 당의 노선으로 세웠고, 7월 사태 뒤 라즐리프로 피신했다.
2월의 볼셰비키 지도자알렉산드르 실랴프니코프1885–19372월의 나날에 페트로그라드에서 당 러시아국을 이끌며 파업과 수비대 반란의 한복판에서 활동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초대 의장, 이중권력의 멘셰비키 기둥니콜라이 치헤이제1864–19262월 27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임시집행위원회 의장으로 선출되어 노동자·병사 대의원 소비에트를 조직했고, 6월 VTsIK 의장까지 겸하며 혁명적 수호주의 노선으로 이중권력 체제를 이끌었다. 임시정부 입각은 거부했으나 소비에트를 통한 임시정부 지지로 혁명의 방향을 틀었다.
멘셰비키 OK 의장·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파벨 악셀로트1850–19285월 9일 봉인열차로 귀국해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이 되었고, 멘셰비키 조직위원회(OK) 의장으로 선출되어 임시정부 조건부 지지 노선을 주도했다. 8월 초 스톡홀름-치머발트 회의 준비차 출국한 뒤 다시 돌아오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 혁명적 수호주의 설계이라클리 체레텔리1881–1959두마 임시위원회 위원이자 임시정부의 입헌민주당 지도자파벨 밀류코프1859–19432월 27일 국가두마 임시위원회 위원으로 선출되어, 각료회의 활동 종료 후 임시위원회가 수도의 권력을 장악하도록 주도했다. 초대 임시정부에서 외무장관으로 입각했으며, 혁명 후에도 입헌군주제를 옹호했으나 다수의 지지를 얻지 못했다.
임시정부 수반게오르기 리보프1861–1925국가두마 의장 · 퇴위 협상미하일 로댠코1859–1924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볼셰비키 분파 의장미하일 라셰비치1884–1928「명령 제1호」 초안을 주도한 소비에트 집행위 서기니콜라이 소콜로프1870–1928변호사 출신으로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 서기로 활동하며 병사부 회의를 주재해 「명령 제1호」를 기초했다.
차르의 퇴위를 강요한 북부전선 사령관니콜라이 루즈스키1854–1918프스코프 사령부에서 니콜라이 2세에게 밤늦게 퇴위를 압박하고, 모든 전선 사령관들의 만장일치 전보를 전달하여 차르의 의지를 꺾었다.
비보르크 구 볼셰비키 지도자바실리 카유로프1876–1936비보르크 구 볼셰비키 조직자로서 여성의 날 시위를 주도했고, 2월 27일에는 무기고를 습격한 무장 분견대를 지휘했다.
볼린스키 연대 훈련중대 선임하사티모페이 키르피치니코프1892–1917/191826일 진압 명령을 거부하게 한 뒤 27일 연대 반란을 이끌었다.
참여31
4월 테제를 즉각 지지한 몇 안 되는 지도자였고, 병사와 여성 노동자들 속에서 연설하며 혁명의 심화를 주장했다.
교육·조직 활동가나데즈다 크룹스카야1869–1939레닌과 함께 봉인열차로 귀환해 비보르크 구에서 교육 사업과 청년 조직 활동을 맡았다.
프라우다 편집자이오시프 스탈린1878–1953시베리아 유형에서 돌아와 프라우다 편집에 참여했고, 4월 당협의회를 거치며 레닌의 노선으로 옮겨 갔다.
당내 온건파레프 카메네프1883–1936귀환 직후 임시정부에 대한 조건부 지지를 주장하며 4월 테제에 공개 반론을 폈고, 7월 사태 뒤 체포되었다.
레닌의 동행자그리고리 지노비예프1883–1936봉인열차로 함께 귀환했고, 7월 사태 뒤 레닌과 함께 라즐리프로 피신했다.
당 조직가야코프 스베르들로프1885–1919유형에서 돌아와 당 서기국을 꾸리며 급성장하는 볼셰비키 조직을 하나로 묶어 냈다.
소비에트 권력의 연설가레프 트로츠키1879–19405월에 귀환해 메즈라이온치를 이끌며 소비에트 권력을 주장했고, 7월 사태 뒤 체포되었다.
메즈라이온치 연설가아나톨리 루나차르스키1875–1933메즈라이온치의 대중 연설가로 활동했고, 7월 사태 뒤 트로츠키와 함께 체포되었다.
멘셰비키 국제주의자율리 마르토프1873–1923멘셰비키 국제주의파를 이끌며 연립정부 참여와 전쟁 지속에 일관되게 반대했다.
방위주의 원로게오르기 플레하노프1856–1918오랜 망명에서 돌아와 전쟁 수행 지속을 옹호했고, 4월 테제를 망상이라 부르며 배격했다.
임시정부의 얼굴알렉산드르 케렌스키1881–1970소비에트와 임시정부 사이를 오가며 법무장관과 전쟁장관을 거쳐 7월에 총리가 되었으나, 전쟁도 토지 문제도 풀지 못했다.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이즈베스티야』 창간자니콜라이 수하노프1882–19402월 27일 '사회주의 문학 그룹' 대표로 소비에트 집행위원에 선출되어 『이즈베스티야』 제1호 발행을 조직했고, 두마 임시위원회와의 협상에 참여했다. 임시정부 구성과 전쟁 문제에서 소비에트 다수파 입장을 지지했다.
수도의 볼셰비키뱌체슬라프 몰로토프1890–19862월 당시 페트로그라드에 있던 소수의 볼셰비키 지도자로 『프라우다』를 이끌었다.
여성의 날 조직가콘코르디야 사모일로바1876–1921여성의 날 운동을 세운 볼셰비키로, 2월 혁명은 그 여성의 날 시위에서 시작됐다.
좌파 SR 지도자마리야 스피리도노바1884–19412월 뒤 유형에서 돌아와 좌파 사회혁명당을 이끈 농민 대변자였다.
2월 혁명 참가,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의원니콜라이 우글라노프1886–1937『프라우다』 편집위원·중앙위원회 국 위원마리야 울리야노바1878–19372월 혁명 후 RSDLP(b) 중앙위원회 국에 보선되어 『프라우다』 편집에 합류했고, 제6차 대회 대의원으로 활동했다.
임시정부 육군해군장관 · 퇴위 접수알렉산드르 구치코프1862–1936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표도르 단1871–1947차르 퇴위의 군사적 중개자미하일 알렉세예프1857–1918스타프카 참모총장으로서 전 전선 사령관들의 퇴위 권고 전보를 니콜라이 2세에게 전달해 퇴위 결단을 이끌어냈다.
크론시타트 소비에트 부의장표도르 라스콜니코프1892–19397월 4일 크론시타트 수병 수천 명을 페트로그라드로 이끌고 와 볼셰비키 본부 앞에서 집결했으며, 사태 후 체포되어 크레스티에 수감되었다.
크론시타트 볼셰비키 조직가세묜 로샬1896–1917라스콜니코프와 함께 크론시타트 수병들의 7월 봉기를 조직했고, 사태 후 스스로 당국에 출두해 크레스티에 수감되었다.
명령 제1호의 초안 작성자세묜 클리반스키1879 – 1944 이후멘셰비키 소속 병사 대표로서 3월 1일 병사부 회의에서 명령 제1호의 핵심 조항을 작성했으며, 실제로는 일반 병사가 아닌 급진적 지식인이었다.
군중 진정을 위해 파견된 멘셰비키 지도자미하일 스코벨레프1885–19381917년 4월 20일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회의 지시로 아브람 고츠와 함께 마린스키 궁을 포위한 군인들을 진정시키기 위해 파견되었으며, 이후 제1차 연립정부 노동장관을 지냈다.
4월 위기 진정을 이끈 소비에트 지도자아브람 고츠1882–1940스코벨레프와 함께 1917년 4월 20일 마리인스키 궁전 앞에서 시위 중이던 병사들을 설득하여 막사로 돌려보냈다.
2월 거리 행동을 주도한 비보르크 볼셰비키이반 추구린1883–1947카유로프의 가까운 동지이자 1905년 니즈니노브고로드 전투 분견대 베테랑으로, 2월 혁명 당시 거리 행동을 이끈 핵심 그룹의 일원이었다.
7월 3일 연설자이오시프 블레이흐만1868–1921기관총연대에서 무장 봉기를 촉구하는 연설로 7월 위기의 도화선이 되었다.
사형 부활을 밀어붙인 위원막심 필로넨코1885–1960케렌스키의 전선 위원으로서 코르닐로프, 사빈코프와 함께 1917년 7월의 탄압 전환을 주도했다.
4월 21일 시위의 선동자세르게이 바그다체프1887–1949임시정부 타도 구호를 내걸고 시위를 주도했으며, 레닌이 모험주의로 비판했다.
멘셰비키 대표미하일 리베르1880–19376월 10일 시위 위기 후 볼셰비키에 대한 무자비한 조치를 요구했다.
북부전선 위원블라디미르 보이트인스키1885–19606월 공세 준비를 맡고, 병사들의 전의 부족을 케렌스키에게 보고했다.
반대 · 저항4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으로 4월 시위의 무력 진압을 시도했고, 7월 이후 최고사령관이 되어 반혁명 세력의 구심이 되었다.
진압을 지휘한 페트로그라드 군관구 사령관세르게이 하발로프1858–1929하발로프는 2월 26일 시위대를 향해 발포를 명령했으며, 그의 우유부단함은 수비대의 반란에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민간 통제권을 군에 넘긴 시장알렉산드르 발크1866–19572월 24일 하발로프에게 경찰이 '움직임을 멈출 수 없다'고 보고했으며, 이후 군에 통제권을 넘겼다.
레닌 독일 스파이 혐의를 제기한 정치가그리고리 알렉신스키1879–19677월 5일 《살아 있는 말》에 레닌이 독일 스파이라는 혐의를 서명해 발표했다.
대상 · 피해4
군대와 수도를 모두 잃은 채 3월 15일 퇴위해 300년 로마노프 지배를 끝냈다.
제국 최후의 내무장관알렉산드르 프로토포포프1866–19182월 28일 밤 타브리다 궁전에 자진 출두하여 혁명 측에 체포되었고, 이로써 제국 내무부는 실질적으로 해체되었다.
빵 위기를 촉발한 마지막 차르 농업장관알렉산드르 리티흐1868–19301916년 12월 곡물 강제 징발을 시행하고 페트로그라드의 하루 밀가루 공급량을 35,000 푸드로 제한하여 빵 위기를 폭발시켰다.
제국의 마지막 총리니콜라이 골리친1850–19251917년 1월에 임명된 러시아 제국의 마지막 총리로, 자신의 무능함을 이유로 사임을 간청했으며 혁명 직전 정부의 무력화를 그대로 드러냈다.
관련 용어
출처: Leon Trotsky, The History of the Russian Revolution (1930), https://www.marxists.org/archive/trotsky/1930/hrr/V. I. Lenin, The Tasks of the Proletariat in the Present Revolution (April Theses, 1917), https://www.marxists.org/archive/lenin/works/1917/apr/04.htmTsuyoshi Hasegawa, The February Revolution: Petrograd, 1917 (University of Washington Press, 1981)Alexander Rabinowitch, Prelude to Revolution: The Petrograd Bolsheviks and the July 1917 Uprising (Indiana University Press, 1968)Rex A. Wade, The Russian Revolution, 1917 (Cambridge University Press, 2000)S. A. Smith, Red Petrograd: Revolution in the Factories, 1917–1918 (Cambridge University Press, 1983)Stephen Kotkin, Stalin, vol. 1: Paradoxes of Power, 1878–1928 (Penguin, 201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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