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9.05.04–1985.09.22

신자유주의 전환: 볼커 쇼크, 대처, 레이건

1979~1981년 미국 연준과 영국·미국 정부는 왜 완전고용 대신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을 첫째 목표로 삼았나? 볼커의 고금리, 대처의 긴축과 민영화, 레이건의 감세와 노조 대응은 누구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게 했고, 같은 시기 반대 길을 택한 미테랑의 프랑스는 왜 돌아섰으며, 이 전환은 어떻게 해석되나?

1970년대 스태그플레이션으로 케인스주의 수요 관리가 신뢰를 잃자, 하이에크와 프리드먼이 이끈 시장 자유주의와 통화주의가 힘을 얻었다. 1979년 5월 영국에서 마거릿 대처가 집권했고, 10월 미국 연준 의장 폴 볼커는 금리 대신 통화량을 조절 목표로 삼아 연방기금금리를 20%까지 올렸다. 미국과 영국은 1980~1982년 깊은 불황과 대량 실업을 겪었고, 금리 충격은 제3세계 외채위기로 번졌다. 대처 정부는 불황 속에 세금을 올리고 공공 주택과 국영 기업을 팔았으며, 1984~1985년 광부 파업을 꺾었다. 1981년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은 소득세를 크게 낮추고 항공관제사 1만 1천여 명을 해고했으며, 국방비를 늘려 재정 적자와 강한 달러를 낳았다. 같은 시기 프랑스의 미테랑은 국유화와 수요 확대를 시도했다가 1983년 긴축으로 돌아섰다.

1970년대 말 왜 케인스주의 대신 다른 처방이 힘을 얻었나?

2차 세계대전 뒤 서방 정부들은 경기가 나빠지면 재정 지출을 늘리고 금리를 낮춰 수요를 떠받치는 케인스주의 정책을 썼다. 1960~1970년대 경제학자와 정책 담당자들은 물가가 조금 더 오르는 것을 감수하면 실업을 낮출 수 있다고 믿었고, 이 맞바꿈을 필립스 곡선이라 불렀다. 그러나 1970년대 중반에는 물가와 실업이 함께 올랐다. 이것이 스태그플레이션이다. 미국 연준은 실업이 늘면 돈을 풀고 물가가 오르면 죄는 「멈춤과 출발」을 되풀이했고, 1979년 6월 미국 물가 상승률은 11%에 이르렀다. 닉슨 쇼크와 석유 파동 뒤 기존의 케인스주의 설명이 이 모순된 현상을 풀지 못하자, 정치권에서 통화주의가 인기를 얻었다. 1 2 3

대안의 뿌리는 그보다 훨씬 오래되었다. 오스트리아 출신 경제학자 프리드리히 하이에크는 1944년 『노예의 길』에서 정부가 중앙 계획으로 경제적 결정을 통제하면 필연적으로 폭정에 이른다고 경고했고, 1947년 4월 10일 스위스 몽펠르랭 산자락에서 열린 회의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키려는 학자들을 모아 몽펠르랭 학회를 세웠다. 이 학회는 시장 경제와 열린 사회를 내세우며 정부가 맡던 많은 기능을 민간이 대신할 방법을 찾았다. 1975년 영국 보수당 대표가 된 마거릿 대처는 하이에크의 『자유의 헌정』을 탁자에 내리치며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라고 말했다고 전해진다. 하이에크는 대처 말고도 키스 조지프, 나이절 로슨, 제프리 하우 같은 보수당 정치인에게 영향을 주었다. 이 학회와 그 앞선 1938년 리프먼 콜로키움이 신자유주의라는 이름의 출발점이라는 이야기는 신자유주의 항목에서 다룬다. 4 5 6

시카고 대학의 밀턴 프리드먼은 케인스주의의 가장 영향력 있는 반대자였다. 그는 안나 슈워츠와 함께 쓴 『미국 화폐사』(1963)에서 대공황이 투자 부족이 아니라 중앙은행이 통화량을 크게 줄인 「대수축」 때문이었다고 주장했고, 「인플레이션은 언제 어디서나 화폐적 현상」이라는 말을 남겼다. 그래서 그는 중앙은행이 그때그때 판단으로 경기를 조절하지 말고, 경제 성장률만큼 통화량을 해마다 일정하게 늘리는 규칙을 따라야 한다고 보았다. 이 생각의 묶음이 통화주의다. 그는 실업을 「자연 실업률」 아래로 억지로 낮추면 인플레이션이 가속될 뿐이라며 필립스 곡선의 맞바꿈이 장기에는 성립하지 않는다고 주장했고, 그 결과로 스태그플레이션을 예견했다. 프리드먼은 1976년 노벨 경제학상을 받았고, 뒤에 레이건과 대처의 자문역을 맡았다. 2 7 8

이 처방이 처음 국가 정책으로 시험된 곳은 칠레였다. 1973년 쿠데타로 아옌데 정부를 무너뜨린 피노체트 군사정권 아래에서 경제가 심각한 위기에 빠지자, 프리드먼은 1975년 3월 아널드 하버거와 함께 칠레에 가서 일주일 동안 강연하고 피노체트를 만났다. 그는 4월 21일 피노체트에게 보낸 편지에서 인플레이션을 끝낼 길은 통화량 증가율을 크게 줄이는 것뿐이고, 한 달에 10~20%씩 물가가 오르는 칠레에서는 점진주의가 불가능하니 「충격 요법」을 써야 한다고 썼다. 시카고 대학 출신 세르히오 데 카스트로가 1975년 재무장관이 되었고, 정권의 경제 요직을 맡은 이들은 「시카고 보이스」라 불렸다. 그들의 시장 자유화 정책은 뒤에 레이건과 대처 정부에도 영향을 주었다. 쿠데타까지의 경위는 칠레 인민연합 정부 사건에서, 칠레 실험의 결과와 평가는 신자유주의 항목에서 다룬다. 7 9 10

미국1979년 10월 6일 볼커는 무엇을 바꾸었나?

1979년 여름 지미 카터 대통령은 내각을 개편하면서 연준 의장 윌리엄 밀러를 재무장관으로 옮기고, 7월 25일 뉴욕 연준 총재 폴 볼커를 후임 의장으로 지명했다. 볼커는 8월 6일 취임했다. 당시 물가는 연율 9% 안팎으로 오르고 있었고, 달러는 1976년 말 이후 주요 통화에 대해 12% 가치를 잃었다. 볼커는 상원 인준 청문회에서 인플레이션과 싸우는 것을 최우선으로 삼겠다고 약속했다. 그는 앞선 10년 동안 연준이 물가 안정을 중시하지 않는다는 것을 보여 주었기 때문에,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이 계속될 것이라 기대하게 되었고 그 기대가 물가를 더 끌어올린다고 보았다. 11 12 1

1979년 10월 6일 토요일 저녁, 볼커는 그날 예정에 없이 열린 연방공개시장위원회(FOMC) 회의 결과를 이례적인 기자회견에서 발표했다. 그때까지 연준은 은행들이 하룻밤 동안 서로 돈을 빌려주는 금리인 연방기금금리를 좁은 범위에 붙들어 두는 방식으로 통화를 조절했다. 이제부터는 금리 대신 은행 체계에 공급하는 지급준비금의 양을 조절해 통화량 증가를 직접 억누르겠다는 것이었다. 은행이 대출의 바탕으로 쓰는 준비금을 줄이면 돈을 빌리기 어려워지고, 그 대가로 금리는 시장에서 크게 오르내리게 된다. 볼커는 기자들에게 이 방식으로 「더 짧은 시간에 통화량 증가를 더 확실히 통제할 수 있다」고 말하면서, 「다른 면은 하루하루의 시장 금리가 최근보다 더 넓은 범위에서 오르내릴 것」이라고 덧붙였다. 12 13 2

볼커가 금리 대신 통화량을 겨냥한 데는 두 가지 이유가 있었다. 물가가 빠르게 오를 때는 겉으로 높아 보이는 명목 금리도 물가 상승을 빼고 나면 실질 금리가 낮을 수 있어, 어느 금리가 충분히 긴축적인지 알기 어려웠다. 또 통화량 목표는 연준이 이번에는 진지하다는 신호를 대중에게 보내는 수단이었다. 첫 시도는 흔들렸다. 1980년 3월 카터 행정부가 신용 통제를 도입하자 경기가 급격히 꺾였고, 실업이 늘자 연준은 다시 고삐를 늦췄다. 1980년 말과 1981년 초 연준은 다시 통화를 죄어 연방기금금리를 20% 가까이 올렸고, 1981년 6월 금리는 정점인 20%에, 은행의 우대 금리는 21.5%에 이르렀다. 이번에는 볼커가 물러서지 않았다. 그는 1981년 「우리는 통화와 신용의 증가를 억제하기로 진로를 정했고, 그것을 고수할 것」이라고 말했다. 이 금리 충격과 통화량 목표의 묶음을 흔히 볼커 쇼크라 부른다. 1 11 12

미국이중 침체는 누구에게 얼마나 무거웠나?

미국 경기는 두 번 꺾였다. 1980년 1월부터 7월까지 짧은 침체가 있었고, 1981년 7월부터 1982년 11월까지 훨씬 깊은 침체가 이어졌다. 두 번 모두 인플레이션을 잡으려는 긴축 통화 정책이 방아쇠였다. 1982년 11~12월 전국 실업률은 10.8%로 대공황 이후 가장 높았다. 빚을 내야 굴러가는 업종이 먼저 무너졌다. 1982년 재화 생산 부문은 전체 고용의 30%였지만 일자리 감소의 90%를 떠안았고, 연말 주택 건설과 자동차 산업의 실업률은 각각 22%와 24%였다. 미시간주 플린트의 실업률은 23.4%, 일리노이주 로크퍼드는 25%에 이르렀다. 14 1

볼커의 연준은 그 역사상 가장 거센 정치적 공격과 항의를 받았다. 빚진 농민들이 트랙터를 몰고 워싱턴의 연준 건물 앞 거리를 막았고, 집을 짓지 못하게 된 건설업자들은 각목 조각을, 팔지 못한 차를 떠안은 자동차 판매상들은 차 열쇠를 넣은 관을 연준에 보냈다. 의회에서는 양당 모두 연준을 공격했다. 보수파 의원 조지 핸슨은 1981년 청문회에서 「우리는 소상공인을, 미국의 중산층을, 아메리칸 드림을 파괴하고 있다」고 외쳤고, 헨리 곤잘레스 의원은 볼커를 탄핵하는 법안을 내겠다고 위협했다. 볼커는 지금 장기 인플레이션 기대를 꺾지 못하면 「훨씬 더 긴 기간 더 심각한 경제 상황」이 올 것이라며 버텼다. 11 12 1

1982년 10월 물가 상승률이 5%로 떨어지자 연준은 연방기금금리를 9%로 내렸고, 실업률은 1982년 말 정점에서 1년 뒤 8%로 빠르게 내려왔다. 1980년 3월 14.8%로 정점을 찍은 물가 상승률은 1983년 3% 아래로 떨어졌고, 1970년대의 두 자릿수 물가는 다시 오지 않았다. 그러나 고금리는 금융 체계에 상처를 남겼다. 1980년 예금기관 규제완화법과 1982년 간-세인트저메인법이 은행과 저축대부조합의 규제를 풀어 준 직후 금리가 치솟자, 저축대부조합은 1981~1982년 큰 손실을 냈고 1980~1983년 118곳이 무너졌다. 1984년에는 미국 7위 은행 컨티넨털 일리노이가 파산 위기에 몰려 45억 달러 구제를 받았다. 이 금융 자유화의 흐름은 금융 자유화 항목에서 이어진다. 1 11 14

충격은 미국에 머물지 않았다. 미국과 다른 선진국이 함께 금리를 올리면서 서방 7개국(G7)은 모두 1980년에 잠깐, 1981~1982년에 길게 두 번 꺾이는 「이중 침체」를 겪었고, 세계은행은 이를 「1982년 세계 불황」이라 불렀다. 캐나다 중앙은행 금리는 1981년 8월 21%까지 올랐다. 볼커 쇼크는 유럽통화제도(EMS)에도 큰 혼란을 불러 유럽에서 거센 비판을 받았다. 가장 무거운 짐은 1970년대에 변동금리로 돈을 빌린 개발도상국이 졌다. 미국과 유럽의 금리가 오르자 이자와 원금 상환액이 1975년 120억 달러에서 1982년 660억 달러로 불어났고, 1982년 8월 멕시코 재무장관 헤수스 실바 에르소그는 더는 빚을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그 뒤의 외채위기와 구조조정은 제3세계 외채위기 사건에서 다룬다. 14 11 15

영국대처 정부는 인플레이션과 어떻게 싸웠나?

영국에서는 1978~1979년 겨울 공공 부문 노동자들이 잇달아 파업한 「불만의 겨울」 직후인 1979년 5월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제임스 캘러헌의 노동당을 이겼고, 대처는 5월 4일 총리가 되었다. 당시 물가 상승률은 10% 안팎, 실업자는 약 150만 명으로 1974년의 100만, 1964년의 30만 남짓보다 크게 늘어 있었다. 대처에게 「사회주의」는 비효율적 산업에 대한 정부 지원, 징벌적 세금, 노동시장 규제, 가격 통제처럼 자유 경제의 작동을 방해하는 모든 것이었다. 새 정부에서는 완전고용 대신 인플레이션을 잡는 것이 경제 정책의 첫째 목표가 되었다. 다만 노동당의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도 이미 공공 지출을 줄이고 정부가 가진 BP 주식을 파는 등 통화주의 정책 일부를 받아들인 상태였다. 14 16 6

재무장관 제프리 하우는 금리를 올려 통화량 증가를 늦추고, 소득세 대신 간접세를 늘려 부가가치세를 15%로 크게 올렸다. 1979년 10월에는 외환 통제를 없애 자본이 자유롭게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했다. 1980년 예산과 함께 발표된 「중기 재정 전략」(MTFS)은 앞으로 몇 해 동안의 통화량 증가율 목표를 줄여 나가는 계획이었고, 재무부 금융담당 차관 나이절 로슨이 이 문서의 발표를 추진했다. 긴축 재정·통화에 북해 석유 수입이 겹쳐 파운드 가치가 오르자 영국 상품은 수출 시장에서 비싸지고 수입품은 싸졌다. 그 결과 공장과 조선소, 탄광이 줄줄이 문을 닫았고, 실업자는 1980년 가을 200만 명을 넘었다. 16 17 18 6 14

정치평론가들은 에드워드 히스 정부처럼 대처도 「유턴」할 것이라 점쳤지만, 대처는 1980년 보수당 대회에서 「돌고 싶으면 당신들이나 도시라. 이 여자는 돌아서지 않는다」고 받아쳤다. 1981년 3월 10일 하우의 예산은 그 말을 확인했다. 지난 12개월 동안 실업자가 100만 명 가까이 늘고 물가가 15%로 오르던 불황 한가운데에서, 예산은 소득세 공제를 물가에 맞춰 올리지 않고 휘발유·담배·술의 세금을 올려 순세금을 40억 파운드 늘렸다. 야당 대표 마이클 풋은 「실업자 300만 명을 만드는 예산」이라고 했다. 3월 말 경제학자 364명은 이 정책이 「경제 이론에도 근거에도 바탕이 없다」며 영국의 「사회적·정치적 안정」을 위협한다는 성명을 대처와 하우에게 보냈다. 하우는 적자를 줄이고 인플레이션을 잡아야 장기 금리가 내려 경제가 되살아난다고 주장했다. 16 19 17

인플레이션은 1980년 22%로 정점을 찍은 뒤 1982년 초 10% 아래로, 1983년 봄 4%로 떨어졌다. 그 대가는 실업이었다. 1979~1981년 불황에서 제조업 일자리가 200만 개 넘게 사라졌고, 1983년 제조업 생산은 1978년보다 30% 줄었다. 실업자는 1982년 1월 300만 명을 넘어 1987년 초까지 그 수준에 머물렀고, 북아일랜드는 20%, 스코틀랜드와 잉글랜드 북부 상당 지역은 15%를 넘었다. 1981년 4월 런던 브릭스턴과 7월 리버풀 톡스테스 등지에서 흑인 청년과 경찰이 충돌한 폭동이 일어났는데, 경찰의 차별적 검문과 함께 도심의 빈곤과 대량 실업이 원인으로 꼽혔다. 한편 정부는 통화량 목표를 잇달아 넘기자 1982년 목표치를 위로 고쳤다. 이를 두고 대처 정부가 엄밀한 의미의 통화주의를 일찍 버렸다는 평가가 나온다. 14 16 20 6

영국국가가 가진 집과 기업은 어떻게 팔렸나?

대처 정부의 가장 큰 정책 가운데 하나는 지방정부가 지어 세를 주던 공공 주택(카운슬 하우스)의 세입자에게 집을 크게 깎은 값에 살 권리를 준 「구매권」(Right to Buy)이었다. 대처는 이것이 「재산을 가진 민주주의」를 만든다고 보았고, 1980년 주택법으로 제도화했다. 1997년까지 170만 채 넘게 팔렸고, 자가 보유율은 1979년 55%에서 2003년 71%까지 올랐다. 집을 산 사람들은 보수당에 투표할 가능성이 커졌다. 그러나 판매 대금으로 새 공공 주택을 짓는 몫은 1980년대 말로 갈수록 줄었고, 공공 임대 주택은 1979년 650만 채 가까이에서 2017년 200만 채 안팎으로 줄었다. 비판자들은 이 제도가 저소득층의 주택난을 키웠다고 본다. 16 21

민영화는 작게 시작했다. 정부는 먼저 작은 국영 기업인 국영화물회사를 노동자들에게 팔아 좋은 반응을 얻었고, 1983년 총선 압승 뒤 대담해져 브리티시 텔레콤을 시작으로 1940년대 말부터 국가가 소유하던 큰 공익 기업 대부분을 팔았다. 에너지장관과 재무장관을 지낸 나이절 로슨은 가스·전기 민영화의 길을 닦고 브리티시 에어웨이스, 브리티시 텔레콤, 브리티시 가스의 매각에 힘을 보탰다. 많은 사람이 주식을 샀지만 곧 팔아 차익을 남겼기 때문에 개인의 주식 보유 비중은 늘지 않았다. 지지자들은 주식 보유 확대와 공공 주택 매각을 「대중 자본주의」라 불렀고, 좌파의 한 비판자는 민영화를 「역사상 가장 큰 선거 뇌물」이라 했다. 1986년 10월 27일에는 런던 증권거래소의 규칙을 한꺼번에 바꾼 「빅뱅」으로 금융시장이 자유화되었다. 16 18 22

브리티시 텔레콤 민영화는 신자유주의의 이정표로 꼽히며 다른 나라들이 공기업을 파는 본보기가 되었다. 민영화는 대처리즘과 같은 말처럼 쓰이게 되었고 뒤의 토니 블레어 노동당 정부도 이어 갔다. 다만 대처가 복지국가 자체를 버린 것은 아니었다. 전기 작가 찰스 무어는 대처가 의료·사회정책·교육에서 전시에 놓인 복지국가의 토대를 부정한 적이 없고, 제도의 남용과 관료제, 노조의 투쟁성, 「의존 문화」를 겨냥했다고 쓴다. 실업 급여가 불어난 탓에 국민소득 대비 정부 지출은 1987년에야 1979년 수준 아래로 내려갔고, 1980년대 대부분 평균 세 부담은 1979년보다 높았다. 16 6

영국1984~1985년 광부 파업은 왜 분수령이 되었나?

대처 정부는 1970년대 히스 정부처럼 한 번에 큰 법을 만드는 대신 노조의 힘을 단계적으로 줄였다. 다른 사업장의 분쟁을 돕는 연대 파업을 불법으로 만들고, 파업 전에 조합원 투표를 거치게 하고, 조합원만 고용하는 「클로즈드 숍」을 없앴다. 가장 큰 상대는 1972년과 1974년 파업으로 히스 정부를 꺾은 전국광부노조(NUM)였다. 국영 석탄공사(NCB)는 국유 산업 가운데 가장 많은 보조금을 받았고, 1984년 채산성 없는 탄광에 들어가는 비용은 연 10억 파운드에 이르렀다. 대처는 대결을 예상하고 미리 준비했다. 최소 6개월 치 석탄을 비축하고, 일부 발전소를 중유로 돌리고, 다른 지역 경찰을 이동시켜 「비행 피켓」을 막을 수 있는 체계를 갖추었다. 1983년에는 브리티시 스틸의 인력을 2년 만에 절반으로 줄인 이언 맥그리거를 석탄공사 사장에 앉혔다. 16 23 24

1984년 3월 6일 석탄공사는 보조금을 줄이기 위해 탄광 20곳을 닫고 일자리 2만 개를 없애겠다고 발표했고, 같은 날 요크셔 코턴우드 탄광의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면서 파업이 시작되었다. 1981년 70% 가까운 득표로 노조 위원장에 뽑힌 아서 스카길은 정부가 70곳 넘는 탄광을 닫으려 한다고 주장했다. 정부는 부인했지만, 2014년 공개된 내각 문서에는 맥그리거가 3년 동안 75곳을 닫기를 원했다는 내용이 있다. 노조는 전국 파업 투표를 하지 않고 지역별 파업을 공식 파업으로 인정하는 방식을 택했다. 이 때문에 노팅엄셔를 중심으로 광부의 5분의 1 넘게 처음부터 일을 계속했고, 다른 큰 노조들도 공식 지원을 꺼렸다. 23 25

파업은 경찰과 피켓 사이의 격렬한 충돌로 얼룩졌다. 1984년 6월 18일 로더럼 근처 오그리브 코크스 공장에서는 광부 약 5천 명과 같은 수의 경찰이 맞섰고, 기마경찰이 곤봉을 들고 돌진해 피켓 51명과 경찰 72명이 다쳤다. 폭동죄로 기소된 피켓들의 재판은 경찰 증거를 믿을 수 없다는 판단으로 무너졌다. 파업 기간 1만 1,291명이 체포되었고, 기소 없이도 9천 명 넘는 광부가 해고되었다. 광부의 아내와 여성들은 「탄광 폐쇄에 맞선 여성들」을 꾸려 모금과 공동 부엌을 운영했다. 1984년 9월 잉글랜드·웨일스 법원은 전국 투표가 없었다는 이유로 파업을 불법으로 판결했고, 겨울이 지나도록 정전은 일어나지 않았다. 생활고에 지친 광부들이 하나둘 일터로 돌아갔고, 노조 지도부는 1985년 3월 3일 아무 합의 없이 파업을 끝냈다. 잃어버린 노동일은 2,600만 일이 넘어 1926년 총파업 이후 가장 컸다. 23 26 16

패배는 영국 노동운동 전체를 오랫동안 위축시켰다. 1985년 파업 건수는 급감했고, 1986년 루퍼트 머독의 신문사 인쇄 노동자들이 벌인 와핑 분쟁도 다시 노조의 패배로 끝났다. 1983년 175곳이던 탄광은 계속 문을 닫아 1994년 남은 산업이 민영화되었고, 2015년 마지막 심부 탄광이 닫혔다. 1994년 유럽연합 조사는 사우스요크셔의 그라임소프를 영국에서 가장 가난한 마을로 꼽았다. 역사가들의 평가는 갈린다. 많은 이들은 전국 투표 대신 비행 피켓에 기댄 스카길의 전술이 결정적 실수였다고 보지만, 국립 석탄광업 박물관이 펴낸 책에서 데이비드 존 더글러스는 파업을 시작한 것은 스카길이 아니라 1981년 지역 투표 결과를 근거로 내세운 요크셔 지부였다고 지적한다. 대처리즘 연구에서는 이 결과가 노동에 대한 자본의 힘을 되살리는 데 기여했다고 평가한다. 23 16 6

미국레이건은 세금과 노조, 재정을 어떻게 바꾸었나?

1981년 1월 20일 취임한 로널드 레이건은 취임 연설에서 「지금의 위기에서 정부는 우리 문제의 해결책이 아니라 정부가 바로 문제」라고 말했다. 그는 1월 28일 남아 있던 국내 석유 가격 통제를 풀었다. 그의 경제 정책인 레이거노믹스의 기둥은 국방비 증액, 정부 지출 증가 억제, 연방 소득세와 자본이득세 인하, 규제 완화, 인플레이션을 잡기 위한 통화 긴축이었다. 다만 항공·트럭·철도·은행 규제 완화는 카터 정부에서 이미 시작되었고, 레이건 정부의 경제자문위원 윌리엄 니스카넨은 규제 완화가 레이건의 의제에서 「가장 낮은 순위」였다고 썼다. 27 3

레이건은 감세를 최우선 과제로 삼았다. 공화당의 잭 켐프 하원의원과 윌리엄 로스 상원의원이 카터 시절 통과시키지 못한 감세안을, 남부 보수파 민주당 의원들의 지지를 얻어 1981년 8월 4일 의회에서 통과시켰고, 레이건은 8월 13일 경제회복조세법에 서명했다. 최고 소득세율은 70%에서 50%로, 최저 세율은 14%에서 11%로 내려갔고, 물가가 올라 저절로 높은 세율 구간으로 밀려 올라가는 일을 막기 위해 세율 구간을 물가에 연동했다. 이 감세를 뒷받침한 생각이 공급 중시 경제학이다. 정부가 수요를 늘리는 대신 세금과 규제를 줄여 일하고 투자할 유인을 키우면 공급이 늘어 성장한다는 주장이다. 그 상징이 아서 래퍼가 1974년 식당 냅킨에 그렸다는 래퍼 곡선으로, 세율이 너무 높으면 세율을 낮출 때 오히려 세수가 늘 수 있다는 그림이다. 경선 상대였던 조지 H. W. 부시는 이를 「부두 경제학」이라 비꼬았다. 28 3 29 30

같은 달 레이건은 노동자들에게 잊히지 않을 선례를 남겼다. 1981년 8월 3일 오전 연방 항공관제사 노조(PATCO)가 주 32시간 노동과 임금 인상을 요구하며 파업에 들어갔다. 연방 공무원의 파업은 법으로 금지되어 있었다. 레이건은 그날 기자들 앞에서 관제사들이 입사 때 쓴 파업 불참 서약을 읽고,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일자리를 잃은 것」이라고 말했다. 1만 3천 명 가까운 관제사 가운데 1,300명만 돌아왔고, 정부는 8월 5일 복귀하지 않은 1만 1,345명을 해고하고 평생 연방 공무원이 될 수 없게 했다. 노조는 10월 22일 법적 지위를 잃었다. 그 뒤 펠프스 도지, 호멜 같은 대기업들이 파업 노동자를 대체 인력으로 갈아 치우기 시작했고, 1970년 380건이 넘던 대형 파업과 직장 폐쇄는 1980년 200건 아래로, 1999년 17건으로 줄었다. 볼커는 이 파업을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에서 「분수령」이었다고 말했다. 31 32

감세와 국방비 증액이 겹치자 재정 적자가 커졌다. 국방비는 1980년 국내총생산의 4.9%에서 1988년 5.8%로 늘었고, 연방 적자는 1983년 GDP의 6%로 정점에 이르렀다. 레이건은 1982년 9월 조세형평재정책임법으로 기업 감세의 상당 부분을 되돌려 1981년 감세의 3분의 1을 취소했다. 그래도 공공 부채는 임기 중 세 배 가까이 늘었고, 미국은 세계 최대 채권국에서 최대 채무국이 되었다. 연준의 긴축과 정부의 확장 재정이 함께 장기 금리를 끌어올려 외국 자본을 끌어들였고, 달러는 1980~1985년 엔·마르크·프랑·파운드에 대해 약 50% 올랐다. 재정 적자와 경상수지 적자는 1981년부터 1990년대 초까지 함께 움직여 「쌍둥이 적자」라 불렸고, 의회에서 보호무역 법안이 거론되자 1985년 9월 22일 다섯 나라는 플라자 합의로 달러를 끌어내리기로 했다. 3 33 34 35

프랑스미테랑의 프랑스는 왜 반대 방향으로 갔다가 돌아섰나?

같은 시기 프랑스는 정반대 길을 시도했다. 1981년 5월 10일 프랑수아 미테랑이 제5공화국 첫 사회당 대통령으로 뽑혔고, 23년 만에 좌파 정부가 들어섰다. 피에르 모루아 총리의 정부는 사회당·공산당·좌파급진당의 1972년 공동강령과 「프랑스를 위한 110개 제안」에 따라 주요 기업을 국유화하고, 최저임금(SMIC)을 10% 올리고, 주 39시간 노동과 연 5주 휴가, 부유세를 도입하고, 60세 퇴직권과 사회 급여를 늘렸다. 수요를 떠받쳐 경기를 살리려는 케인스주의 처방이었다. 그러나 확장 재정은 프랑스 은행의 긴축 통화 정책과 어긋났고, 실업은 계속 늘었다. 36 37

바깥 사정이 이 길을 막았다. 볼커 쇼크로 달러가 거칠게 오르내리자 유럽통화제도 안에서 강한 마르크와 길더가 올라가고 프랑·리라·벨기에 프랑 같은 약한 통화가 따라가지 못해, 1981~1983년 유럽통화제도는 출범 이래 가장 심한 위기를 겪었다. 프랑은 1981년 10월, 1982년 6월, 1983년 3월 세 차례 평가절하되었다. 재무장관 자크 들로르는 1982년 2월 재정 적자를 GDP의 3%, 공공 부채를 25% 안에 묶는 상한을 정했고, 1982년 6월 첫 긴축 계획이 나왔다. 정부 안에서는 프랑을 유럽통화제도에서 빼내 독자 노선을 가자는 주장이 매달 올라왔지만, 미테랑은 프랑스를 유럽공동체에서 고립시키지 않으려 했다. 1983년 3월 그는 유럽통화제도에 남기로 하고 두 번째 긴축 계획을 택했다. 이것이 「긴축으로의 전환」(tournant de la rigueur)이다. 37 36

전환과 함께 유럽통화제도 탈퇴를 가장 강하게 주장한 장피에르 슈벤망과 미셸 조베르가 정부를 떠났고, 정부는 탄광과 제철소를 닫고 푸조-탈보의 구조조정을 부추겼다. 1983년 이후 미테랑 정부에서는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이 최우선이 되었고, 1984~1986년과 1988~1990년 잠깐의 경기 부양을 빼면 통화·재정 긴축이 기본 노선이 되었다. 다만 OECD 평균과 비교하면 프랑스의 재정 정책은 여전히 상대적으로 확장적이었다. 미테랑은 국유화 계획을 접고 긴축과 시장 자유화로 방향을 틀었다. 미테랑 정부는 유럽통화제도 안에서 경쟁력을 지키려면 인플레이션부터 잡아야 한다고 보았다. 같은 시기 통화가 약한 벨기에와 이탈리아도 비슷한 긴축으로 돌아섰다. 들로르는 1985년 유럽연합 집행위원장이 되어 단일 시장과 유로를 설계했다. 37 36 38

이 전환을 어떻게 해석하나?

지지자들은 인플레이션을 꺾은 것을 첫째 성과로 꼽는다. 미국 연준의 역사 기록은 볼커와 후임자들이 물가 안정을 굳게 지킨 덕분에 1970년대의 두 자릿수 물가가 돌아오지 않았다고 쓴다. 레이건 시기 민간 부문의 시간당 생산성은 연 1.9% 늘어 앞선 8년의 1.3%보다 높았고, 영국에서도 1980년대 생산성 증가가 다른 선진국보다 크게 나아졌다. 자유지상주의 연구소인 케이토 연구소는 10개 경제 지표 가운데 8개에서 레이건 시기가 앞뒤 시기보다 나았다고 평가했고, 프리드먼은 레이거노믹스가 낮은 한계 세율, 적은 규제, 지출 억제, 인플레이션 없는 통화라는 네 원칙에서 「좋은 진전」을 이루었다고 말했다. 영국 노동당의 토니 블레어도 훗날 영국에는 대처 시기의 산업·경제 개혁이 필요했다고 썼다. 1 3 16 6

케인스주의 쪽 비판자들은 비용과 설명을 문제 삼는다. 364명의 경제학자가 1981년 영국 예산을 반대했고, 하우의 예산이 결국 효과가 있었다고 보는 쪽에서도 지나쳤다는 평가가 나왔다. 폴 크루그먼은 레이건 시기의 회복이 경기 순환과 볼커의 통화 정책 덕분이었고, 국방비를 늘린 레이건의 적자 재정이 오히려 케인스주의 경기 부양에 가까웠다고 주장했다. 레이건의 경제자문위원장을 지낸 마틴 펠드스타인조차 감세가 세수를 늘린다는 래퍼 곡선 주장을 「공급 중시론 과장의 극치」라 불렀다. 불평등도 커졌다. 미국 상위 1%의 세전 소득 몫은 1979년 9.0%에서 1986년 13.8%로 늘었고, 생산직 노동자의 실질 시간당 임금은 레이건 임기 내내 1973년부터 이어진 하락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19 17 3

마르크스주의 쪽에서는 이 전환을 계급 관계의 변화로 읽는다. 데이비드 하비는 1978~1980년을 세계 사회경제사의 혁명적 전환점으로 보고, 노조의 힘을 꺾을 권한을 받은 대처와 노동의 힘을 억누르고 산업을 탈규제하고 금융의 힘을 풀어 준 레이건을 그 진앙으로 꼽는다. 그는 신자유주의를 기업 자본가 계급이 경제 엘리트의 계급 권력을 늘리려는 「계급 프로젝트」라 부른다. 제라르 뒤메닐과 도미니크 레비도 상층 계급의 권력·소득·부를 되찾고 늘리는 것이 신자유주의의 일차 목표라고 본다. 영국의 문화이론가 스튜어트 홀은 1979년 《마르크시즘 투데이》의 글 「거대한 우경화 쇼」에서 「대처리즘」이라는 말을 널리 퍼뜨렸고, 정치학자 앤드루 갬블은 대처리즘을 「자유 경제와 강한 국가」로 요약했다. 이 해석들과 칠레·라틴아메리카의 경험은 신자유주의 항목이 자세히 다룬다. 39 10 40 6

프랑스 조절학파는 1970년대 프랑스의 스태그플레이션 속에서 생겨났다. 미셸 아글리에타와 로베르 부아예 같은 이들은 자본주의가 생산과 분배를 안정시키는 「축적 체제」와 그것을 떠받치는 법·제도·규범인 「조절 양식」의 짝으로 한동안 안정되다가, 그 짝이 더는 맞지 않으면 위기에 빠져 새 규칙을 찾는다고 본다. 이 틀에서 전후 황금기를 지탱한 포드주의, 곧 대량생산과 생산성에 맞춘 임금 상승, 완전고용의 결합은 1970년대에 위기에 빠졌고, 1980년대에는 경직되고 수익성이 떨어진 포드주의 생산에 대한 대응으로 「포스트포드주의」라 불리는 유연한 생산 방식이 나타났다. 이 틀에서 1980년대의 전환은 위기에 빠진 포드주의 체제를 대신할 새 규칙과 규범을 찾는 과정으로 읽힌다. 포드주의 항목이 이 흐름을 더 다룬다. 41 42

결과

인플레이션은 미국에서 1983년 3% 아래로, 영국에서 4%로 떨어졌고 1970년대의 두 자릿수 물가는 돌아오지 않았다. 그 대신 완전고용은 경제 정책의 첫째 목표 자리에서 내려왔고, 영국의 제조업과 탄광 지역, 미국의 공업 지대는 오랜 실업과 쇠퇴를 겪었으며, 영국과 미국의 노동조합은 크게 약해졌다. 민영화, 감세, 규제 완화, 물가 안정을 앞세운 독립 중앙은행은 뒤의 영국 노동당과 여러 나라 정부가 이어받는 표준이 되었고, 같은 처방은 외채위기에 빠진 개발도상국에 구조조정과 워싱턴 컨센서스로 강요되었다. 강한 달러와 쌍둥이 적자는 1985년 플라자 합의로 조정되었다.

연표와 지도

워싱턴 코턴우드 탄광 오그리브 런던 브릭스턴 파리 몽펠르랭 뉴욕 멕시코시티 산티아고 21 코턴우드 탄광 23 코턴우드 탄광 22 오그리브 3 런던 6 런던 9 런던 10 런던 11 브릭스턴 12 파리 17 파리 20 파리 1 몽펠르랭 24 뉴욕 4 워싱턴 5 워싱턴 7 워싱턴 8 워싱턴 13 워싱턴 14 워싱턴 15 워싱턴 16 워싱턴 19 워싱턴 18 멕시코시티 2 산티아고
  1. 11947.04.10스위스
    몽펠르랭 학회 창립

    프리드리히 하이에크가 스위스 몽펠르랭 산자락에서 연 회의에서 고전적 자유주의를 지키려는 학자들이 몽펠르랭 학회를 세웠다.

  2. 21975.04.21칠레
    프리드먼이 피노체트에게 보낸 편지

    3월 칠레를 방문한 밀턴 프리드먼이 피노체트에게 편지를 보내, 통화량 증가를 크게 줄이고 정부 지출을 깎는 「충격 요법」을 권했다.

  3. 31979.05.04영국
    대처 총리 취임

    총선에서 보수당이 노동당을 이기고, 마거릿 대처가 영국 총리가 되었다.

  4. 41979.08.06미국
    볼커의 연준 의장 취임

    카터 대통령이 7월 지명한 폴 볼커가 연방준비제도 의장에 취임했다.

  5. 51979.10.06미국
    연준의 통화량 목표 전환

    볼커가 토요일 저녁 기자회견에서 연준이 연방기금금리 대신 은행 지급준비금의 양을 조절해 통화량을 억제한다고 발표했다.

  6. 61979.10영국
    영국의 외환 통제 폐지

    대처 정부가 외환 통제를 없애 자본이 자유롭게 외국으로 나갈 수 있게 했다.

  7. 71980.03미국
    카터의 신용 통제

    카터 행정부가 신용 통제를 도입하자 미국 경기가 급격히 꺾였다.

  8. 81981.01.20미국
    레이건 취임

    로널드 레이건이 미국 대통령에 취임하며 「정부가 바로 문제」라고 말했다.

  9. 91981.03.10영국
    하우의 1981년 예산

    제프리 하우 재무장관이 불황 속에서 세금을 40억 파운드 늘리는 예산을 하원에 제출했다.

  10. 101981.03영국
    경제학자 364명의 성명

    경제학자 364명이 1981년 예산에 「경제 이론에도 근거에도 바탕이 없다」는 비판 성명을 대처와 하우에게 보냈다.

  11. 111981.04영국
    브릭스턴 폭동

    런던 브릭스턴에서 흑인 청년들과 경찰이 충돌했고, 7월에는 리버풀 톡스테스 등지로 폭동이 번졌다.

  12. 121981.05.10프랑스
    미테랑 당선

    프랑수아 미테랑이 제5공화국 첫 사회당 대통령으로 뽑혔다.

  13. 131981.06미국
    연방기금금리 20%

    연방기금금리가 정점인 20%에 이르렀고, 은행 우대 금리는 21.5%까지 올랐다.

  14. 141981.08.03미국
    항공관제사 파업

    항공관제사 노조(PATCO)가 파업에 들어갔고, 레이건은 48시간 안에 복귀하지 않으면 해고한다고 경고했다.

  15. 151981.08.05미국
    관제사 1만 1,345명 해고

    레이건 행정부가 복귀하지 않은 관제사 1만 1,345명을 해고하고 평생 연방 공무원 임용을 금지했다.

  16. 161981.08.13미국
    경제회복조세법 서명

    레이건이 최고 소득세율을 70%에서 50%로 낮추는 경제회복조세법에 서명했다.

  17. 171982.06프랑스
    프랑스 첫 긴축 계획

    프랑이 다시 평가절하되었고, 모루아 정부가 첫 긴축 계획을 내놓았다.

  18. 181982.08멕시코
    멕시코의 지급 불능 선언

    멕시코 재무장관 헤수스 실바 에르소그가 멕시코가 더는 외채를 갚을 수 없다고 선언했다.

  19. 191982.10미국
    연준의 금리 인하

    물가 상승률이 5%로 떨어지자 연준이 연방기금금리를 9%로 내렸다.

  20. 201983.03프랑스
    긴축으로의 전환

    프랑이 세 번째로 평가절하되었고, 미테랑이 유럽통화제도에 남기로 하고 두 번째 긴축 계획을 택했다.

  21. 211984.03.06영국
    탄광 폐쇄 발표와 파업

    석탄공사가 탄광 20곳 폐쇄를 발표했고, 요크셔 코턴우드 탄광 노동자들이 일을 멈추면서 광부 파업이 시작되었다.

  22. 221984.06.18영국
    오그리브 충돌

    오그리브 코크스 공장에서 피켓 약 5천 명과 경찰이 충돌해 피켓 51명과 경찰 72명이 다쳤다.

  23. 231985.03.03영국
    광부 파업 종료

    전국광부노조가 아무 합의 없이 파업을 끝냈다.

  24. 241985.09.22미국일본독일프랑스영국
    플라자 합의

    미국·일본·서독·프랑스·영국의 재무장관과 중앙은행 총재가 뉴욕 플라자 호텔에서 달러를 끌어내리기로 합의했다.

관련 인물 18명

참여9

미국 대통령지미 카터1924–2024

1979년 7월 볼커를 연준 의장에 지명했고, 1980년 3월 신용 통제를 도입했다.

통화주의 경제학자밀턴 프리드먼1912–2006

통화주의를 세웠고, 1975년 칠레에서 피노체트에게 「충격 요법」을 권했으며, 레이건의 경제정책자문위원회 위원과 대처의 자문역을 맡았다.

경제학자·철학자프리드리히 하이에크1899–1992

1947년 몽펠르랭 학회를 세웠고, 대처가 「이것이 우리가 믿는 것」이라며 그의 『자유의 헌정』을 내보였다.

칠레 군사정권 수반아우구스토 피노체트1915–2006

1975년 프리드먼을 만났고, 시카고 대학 출신 경제학자들에게 경제 요직을 맡겼다.

프랑스 대통령프랑수아 미테랑1916–1996

1981년 국유화와 최저임금 인상으로 수요를 늘리는 정책을 폈다가, 1983년 3월 유럽통화제도에 남기로 하고 긴축으로 돌아섰다.

프랑스 총리피에르 모루아1928–2013

1981~1984년 총리로 케인스주의 경기 부양을 이끌었고, 1982년 6월과 1983년 3월 긴축 계획을 시행했다.

영국 총리제임스 캘러헌1912–2005

불만의 겨울 직후인 1979년 총선에서 대처의 보수당에 졌다.

영국 재무장관 (노동당)데니스 힐리1917–2015

대처 이전에 이미 공공 지출을 줄이고 정부의 BP 주식을 파는 등 통화주의 정책 일부를 받아들였다.

백악관 비서실장·재무장관제임스 베이커1930–

1984년 7월 볼커에게 대선 전에 금리를 올리지 말라고 했고, 1985년 재무장관으로 플라자 합의를 이끌었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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