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제정과 노동운동의 재기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의 끝에서 황제가 된 루이 보나파르트는 18년 동안 보통선거와 경찰, 철도와 대로로 어떻게 프랑스를 다스렸고, 1848년 6월에 짓밟힌 노동운동은 그 아래서 어떻게 다시 일어나 1871년 코뮌의 주역들을 길러 냈는가?
1852년 12월 2일 국민투표로 나폴레옹 3세가 된 루이 보나파르트는 보통선거를 남긴 채 의회와 언론을 묶고, 쿠데타 반대자와 과거 정치범을 유형지로 보내는 권위주의 제정을 세웠다. 국제적 호황 속에 철도와 투자은행이 자랐고, 오스만은 파리를 대로와 공원의 도시로 다시 지으며 가난한 주민을 동쪽과 교외로 밀어냈다. 크림과 이탈리아에서 이긴 제정은 멕시코에서 실패했고, 가톨릭과 보호무역 공업가를 잃은 1860년대에는 의회 권한을 넓히고 1864년 파업을 허용하며 1868년 언론·집회를 풀었다. 그 틈에 톨랭의 「60인 선언」과 국제노동자협회 프랑스 지부, 바를랭의 파업과 협동조합, 생트펠라지에서 자란 블랑키파, 로슈포르와 강베타의 급진 공화파가 자랐다. 1869년 총선에서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다수가 공화파를 찍었고, 군대는 라리카마리와 오뱅의 파업 광부들에게 총을 쏘았다. 1870년 5월 국민투표로 힘을 되찾은 듯했던 제정은 엠스 전보를 계기로 7월 프로이센에 전쟁을 선포했고, 9월 스당의 패배와 함께 무너졌다.
국민투표로 세운 황제: 권위주의 제정 (1852~1859)
1851년 12월 2일 쿠데타 뒤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는 의회가 제한했던 남성 보통선거를 되살리고, 12월 21~22일 국민투표에서 찬성 748만 1,231표 대 반대 64만 7,292표로 쿠데타를 추인받았다. 1852년 1월 14일 헌법은 대통령에게 10년 임기와 모든 집행권, 법률 발의권을 주었고, 각료는 대통령에게만 책임을 졌다. 9월부터 지방을 돌며 그는 「제국은 곧 평화」라고 약속했고, 11월 7일 원로원 결의와 11월 21~22일 국민투표(찬성 782만 4,129표, 반대 25만 3,149표)를 거쳐 1852년 12월 2일 「프랑스인의 황제 나폴레옹 3세」가 되었다. 쿠데타 기념일이자 나폴레옹 1세의 대관식과 아우스터리츠 전투의 날이었다. 1 2
보통선거는 남았지만 정치는 사라졌다. 보통선거로 뽑는 입법원은 법안을 낼 수도, 의장을 뽑을 수도, 예산을 항목별로 심의할 수도 없었고 토론도 공개되지 않았다. 도지사들은 치안판사부터 도로 인부까지 행정 전체를 「관선 후보」의 당선에 동원했고, 선거구는 도시의 자유주의 표를 농촌 인구 속에 묻도록 그어졌다. 신문은 보증금을 맡겨야 했고 당국의 「경고」를 받으면 정간·폐간되었다. 1852년 첫 총선에서 관선 후보는 520만 표, 반대파는 80만 표를 얻었고, 당선된 공화파 3명은 황제에 대한 충성 선서를 거부해 의석에 앉지 않았다. 1 2
쿠데타에 맞선 저항의 대가도 컸다. 처음에 2만 6,884명이 체포되었고, 도지사·장군·법관으로 꾸린 「혼합위원회」가 2만 1천 명에게 형을 내려 9,530명을 알제리로, 239명을 카옌의 도형장으로 보냈다. 빅토르 위고를 포함한 의원 66명은 추방되었다. 위고는 망명지에서 『소인 나폴레옹』과 『징벌』로 황제를 공격했다. 1857년 총선에서 관선 후보는 유효표의 85%를 얻었고, 공화파 당선자들은 선서를 거부해 의석을 비웠다. 1858년 보궐선거로 들어온 쥘 파브르, 에르네스트 피카르, 에농, 다리몽, 에밀 올리비에 「5인」만이 선서하고 의회에 앉은 공화파 반대파였다. 3 1 2
1858년 1월 14일 이탈리아 민족주의자 펠리체 오르시니가 오페라 극장 앞에서 황제 부부의 마차에 폭탄을 던져 8~12명이 죽고 150명 넘게 다쳤다. 제정은 이를 구실로 조였다. 에스피나스 장군이 내무·치안 장관이 되어 도마다 「가장 위험한 자들」을 정해진 할당만큼 잡아들이라고 지시했고, 2월 「일반 치안법」(「혐의자법」)은 1848년 6월, 1849년 6월, 1851년 12월로 형을 받았던 사람을 재판 없이 구금하거나 알제리로 보낼 수 있게 했다. 입법원은 221 대 24로 가결했고 원로원에서는 마크마옹 혼자 반대했다. 약 450명이 감옥이나 알제리로 보내졌고, 대부분은 1859년 8월 이탈리아 전쟁 승리를 기념한 일반 사면으로 풀려났다. 위고와 에드가르 키네는 사면을 거부했다. 4 5 6 1
철도, 은행, 오스만의 파리
제2제정은 1817~1847년과 1873~1896년의 두 불황 사이에 낀 국제적 호황기와 거의 겹쳤다. 생시몽주의에 영향받은 국가 주도 정책 아래 철도는 1851년 3,500km에서 1870년 2만km 가까이로 늘어 대부분의 도시를 이었고, 페레르 형제의 크레디 모빌리에와 크레디 퐁시에가 철도·가스·승합마차 회사에 돈을 댔다. 1860년 1월 23일 미셸 슈발리에와 리처드 코브던이 비밀리에 협상한 영불 통상조약은 관세를 크게 낮춰 보호무역에 기대던 공업가들의 반발을 샀다. 1855년과 1867년 파리 만국박람회, 그중 1867년 박람회에는 1천만 명이 다녀갔다. 1 2 7
1853년 6월 22일 센 도지사가 된 조르주외젠 오스만은 황제에게서 파리를 「바람이 통하게 하고, 하나로 잇고, 아름답게 하라」는 임무를 받았다. 1830~1848년 일곱 번의 봉기가 일어난 생탕투안 문밖, 시청 주변, 생트주느비에브 언덕의 좁은 골목을 넓은 대로가 갈랐다. 오스만은 회고록에서 세바스토폴 대로 공사를 「폭동과 바리케이드의 동네를 끝에서 끝까지 도려낸 것」이라고 만족스럽게 적었다. 1860년 1월 1일 파리는 벨빌·몽마르트르·라빌레트·샤론 등 성벽 안쪽 교외를 합쳐 12개 구에서 20개 구로 커졌고, 인구는 단숨에 160만 명이 되었다. 8 1
공사는 건물 1만 9,730채, 주거 12만 호를 헐고 3만 4천 채, 21만 5,300호를 새로 지었다. 그러나 비용은 17년 동안 25억 프랑으로 불어났고, 집세는 시기 전체에 걸쳐 300% 올랐으며, 가난한 주민은 도심에서 밀려났다. 동쪽에 노동자, 서쪽에 부자가 모이는 분화는 오스만 이전부터 진행되었다는 반론도 있지만, 1871년 코뮌의 거점이 될 벨빌과 몽마르트르는 바로 이렇게 새로 합쳐진 노동자 구역이었다. 엥겔스는 1872년 『주택 문제』에서 「오스만」을 노동자 구역에 대로를 뚫어 바리케이드전을 어렵게 하고 정부에 기대는 보나파르트파 건설 노동자층을 만들며 도시를 사치의 도시로 바꾸는 방식, 그리고 문제를 해결하는 대신 다른 곳으로 옮기기만 하는 부르주아적 해법의 이름으로 썼다. 8 1 9
반대파는 오스만의 장부를 공격했다. 1867년 쥘 페리는 「오스만의 환상적인 회계」라는 글로 오스만이 의회 승인 없이 발행한 공사 채권을 꼬집었고, 회계법원이 그것을 정식 부채로 판정하자 1868년 4월 18일 법으로 파리 재정은 입법원의 감독을 받게 되었다. 1869년 총선에서 파리의 반대파 후보는 23만 4천 표, 정부 쪽 후보는 7만 7천 표를 얻었다. 새 총리 에밀 올리비에의 요구에 황제는 1870년 1월 5일 사임을 거부한 오스만을 해임했다. 8 1



「제국은 곧 평화」: 크림, 이탈리아, 멕시코
평화를 약속한 제국은 곧 전쟁에 나섰다. 영국·오스만 제국과 함께 러시아에 맞선 크림 전쟁(1853~1856)에서 프랑스군은 11개월에 걸친 세바스토폴 포위 끝에 1855년 9월 말라코프 보루를 함락했고, 1856년 3월 30일 파리 조약은 러시아의 흑해 함대 보유를 금지했다. 프랑스 쪽 사망자는 9만 5,615명이었다. 같은 해 황태자가 태어나 왕조는 이어질 것처럼 보였다. 10 2
오르시니 사건 뒤 나폴레옹 3세는 1858년 7월 플롱비에르에서 사르데냐 총리 카보우르와 비밀리에 만나, 오스트리아를 이탈리아에서 몰아내는 것을 돕는 대가로 사보이아와 니스를 받기로 했다. 1859년 전쟁에서 프랑스·사르데냐군은 6월 4일 마젠타와 6월 24일 솔페리노에서 이겼고, 7월 빌라프랑카 휴전으로 오스트리아는 롬바르디아를 프랑스에 넘겼고 프랑스는 이를 사르데냐에 주었다. 1860년 3월 24일 토리노 조약으로 사보이아와 니스가 프랑스에 넘어왔다. 그러나 이탈리아 통일이 교황의 세속 권력을 위협하자 제정의 가장 든든한 지지층이던 가톨릭 세력이 등을 돌렸다. 11 2
해외 영토도 크게 늘었다. 1861~1863년 코친차이나 정복, 1863년 캄보디아 보호령, 그리고 뉴칼레도니아 지배가 이때 이루어졌다. 뉴칼레도니아는 뒤에 코뮌 가담자들이 유형을 가는 곳이 된다. 가장 큰 모험은 멕시코였다. 1862년 1월 상륙한 프랑스군은 5월 5일 푸에블라에서 패해 1년을 지체했지만 결국 수도를 차지했고, 오스트리아 황제 프란츠 요제프 1세의 동생 막시밀리안을 멕시코 황제로 앉혔다. 남북전쟁을 끝낸 미국이 철수를 요구하고 프로이센의 위협이 커지자 1866년부터 프랑스군은 철수했고, 막시밀리안은 1867년 6월 19일 공화파에게 총살되었다. 2 12

자유주의 제정으로: 1860년대의 양보와 노동자 정책
가톨릭과 보호무역 공업가를 잃은 황제는 다른 지지층을 찾았다. 1860년 11월 24일 칙령과 1861년의 원로원 결의로 의회는 황제의 연설에 답하는 교서권을 되찾았고, 의사록이 공개되었으며, 예산은 항목별로 심의되었다. 1863년 5월 31일 총선에서 반대파는 195만 4천 표와 32석(공화파 17, 티에르를 포함한 무소속 15)을 얻었고, 대도시는 대부분 반대파를 뽑았다. 티에르는 의회에서 「필요한 자유」를 요구했다. 황제는 내무장관 페르시니를 물리고 외젠 루에르를 사실상의 총리, 「부황제」로 세웠다. 1 2
나폴레옹 3세는 노동자에게도 손을 내밀었다. 1862년 정부는 런던 만국박람회에 노동자 대표단 약 550명을 보냈고, 청동 조각공 앙리 톨랭 등은 그곳에서 영국 노동조합을 만났다. 사회주의자 알베르 토마는 뒤에 「노동계급이 황제에게 넘어갔다면 카이사르식 사회주의가 실현되고 공화국의 길은 막혔을 것이다. 1862년만큼 그 위험이 컸던 적은 없다」고 썼다. 톨랭은 1864년 2월 17일 보궐선거에 나서며 노동자 60명이 서명한 「60인 선언」을 발표했다. 선언은 법에 쓰인 평등이 현실에는 없다고 지적하고, 노동자가 공화파와 별도로 자기 대표를 내야 한다며, 고용주의 말을 임금 분쟁에서 우선하는 민법 제1781조의 폐지, 단결 금지법 폐지, 노동조합 설립 등 일곱 가지를 요구했다. 1 13 14 15
황제는 단결권 요구를 받아들였다. 에밀 올리비에가 준비한 법안은 입법원에서 221 대 36, 원로원에서 74 대 13으로 통과되어 1864년 5월 25일 공포되었다. 「올리비에 법」은 1791년 르샤플리에 법 이래의 단결죄를 없애 평화적인 파업을 처음으로 허용했지만, 폭력이나 「노동의 자유」 침해는 여전히 처벌했고 노동조합 자체는 금지된 채였다. 노동조합 회의소는 1868년 3월 30일에야 묵인되었고, 정식 합법화는 1884년이었다. 1869년 국참사원은 황제가 거듭 요구한 노동자 수첩 폐지안을 거부했다. 16 1
1867년 1월 황제는 「유익한 개혁」을 약속해 교서권을 정부 질의권으로 바꾸었다. 1868년 5월 11일 언론법은 사전 허가와 경고 제도를 없앴고, 6월 6일 법은 정치·종교를 다루지 않는 공개 집회의 사전 허가를 없앴다. 반정부 신문이 쏟아졌다. 앙리 로슈포르가 1868년 5월 창간한 신문 《라 랑테른》은 「제국 연감에 따르면 프랑스에는 3,600만 신민이 있다. 불만의 씨앗은 빼고」라는 첫 호 사설로 10만 부가 팔렸다. 샤를 들레클뤼즈의 《르 레베유》는 1851년 쿠데타 때 바리케이드에서 죽은 의원 알퐁스 보댕의 기념비 모금을 벌였고, 이 일로 열린 재판에서 젊은 변호사 레옹 강베타가 제정의 정통성 자체를 공격하는 변론으로 이름을 얻었다. 1 17 18

제1인터내셔널과 프랑스 노동운동
1862년 런던 박람회와 1863년 7월 폴란드 봉기 연대 집회에서 맺어진 영국·프랑스 노동자들의 관계는 1864년 9월 28일 런던 세인트마틴스 홀 집회로 이어졌다. 노동자 약 2천 명이 모인 이 자리는 영국 노동조합 지도자 조지 오저와 프랑스의 톨랭이 함께 연 것이었고, 집회는 런던에 중앙위원회(뒤의 총평의회)를 둔 국제노동자협회를 세우기로 만장일치로 결의했다. 위원회에 들어간 카를 마르크스가 「창립 선언」과 임시 규약을 썼다. 선언은 1848년 혁명이 실패한 뒤 대륙의 노동자 조직과 신문이 모두 「폭력의 쇠주먹」에 짓밟혔다고 돌아보고, 「정치권력을 쟁취하는 것이 노동계급의 큰 의무가 되었다」고 결론지었다. 규약 전문은 노동계급의 해방은 노동계급 스스로 쟁취해야 한다고 선언했다. 19 15 20
1865년 1월 파리 그라빌리에 거리에 사무소가 열렸다. 프랑스 지부를 이끈 톨랭과 동료들은 상호주의자, 곧 프루동주의자였다. 이들은 무상 신용과 생산자 협동조합으로 해방을 이루려 했고, 파업과 노동조합, 정치 행동을 경계했다. 1866년 제네바 첫 대회에 파리는 톨랭이 이끄는 대의원 11명(카멜리나, 말롱, 바를랭 등)을 보냈다. 상호주의자들의 의견서는 정치에 거리를 두고 「파업, 1848년의 집산주의 결사, 공교육, 여성 노동」을 비판했는데, 제본공 외젠 바를랭은 대다수 대의원에 맞서 여성의 노동권을 옹호했다. 대회는 노동조합의 중요성과 8시간 노동일을 결의했다. 1867년 2월 인터내셔널은 카멜리나가 이끈 청동공 파업을 도와 이겼고, 1867년 로잔 대회는 노동자의 사회적 해방이 정치적 해방과 함께 가야 한다고 선언했다. 14 19 15 1 21
1867년 말부터 정부는 인터내셔널을 막기 시작했다. 1868년 2월 첫 기소로 톨랭의 파리 위원회가 물러났고, 바를랭과 브누아 말롱이 이끄는 새 지도부가 들어서면서 프랑스 지부는 상호주의를 넘어 집산주의와 노동조합 운동, 「정치 혁명」으로 나아갔다. 1868년 브뤼셀 대회는 광산·철도·토지를 사회의 공동 소유로 하자고 결의했다. 1868년부터 1870년까지 세 차례 인터내셔널 재판이 열렸고, 한 재판에서는 15명이 「20인이 넘는 금지된 결사」를 만든 죄로 징역 3개월과 벌금 100프랑을 받았다. 바를랭은 투옥되면서도 1864~1865년 제본공 파업을 이끌었고, 1868년 회원 8천 명의 협동 식당 「라 마르미트」를 세웠으며, 1869년 11월 14일 파리 노동자 단체 연합회를 만들고 리옹·르크뢰조·릴에 지부를 세웠다. 15 1 19 21 22
1869년 프랑스에서는 파업 72건에 4만 600명이 참가했다. 군대는 파업 현장에 총을 쏘았다. 6월 16일 생테티엔 근처 라리카마리에서는 임금 인상, 인터내셔널이 내건 8시간 노동, 단일 공제기금을 요구하며 파업하던 광부들을 연행하던 군대가 가로막은 가족들에게 발포해 생후 17개월 아기를 포함한 민간인 14명이 죽었다. 10월 8일 아베롱의 오뱅에서는 파리-오를레앙 회사 광부들에게 군대가 발포해 14명이 죽고 22명이 다쳤다. 1870년 1월 르크뢰조의 슈네데르 공장에서는 노동자 공제기금을 직접 관리하려던 위원회 위원장 아돌프 아시가 해고되자 파업이 일어났고, 말롱은 로슈포르의 신문에 이 파업을 보도했다. 에밀 졸라는 뒤에 『제르미날』을 쓰며 「제정 말기를 피로 물들인 파업, 특히 오뱅과 라리카마리」를 자료로 삼았다고 적었다. 23 24 25 22

블랑키파의 부활과 제정 말기의 위기 (1869~1870)
1859년 사면으로 풀려난 루이 오귀스트 블랑키는 1861년 6월 다시 체포되어 4년형을 받고 생트펠라지 감옥에 갇혔다. 그곳에서 그는 귀스타브 트리동, 에밀 외드, 라울 리고, 그리고 훗날의 총리 조르주 클레망소 같은 젊은 급진파의 스승이 되었고, 이들이 1860년대 말 블랑키파의 핵심이 되었다. 1865년 8월 동지들의 도움으로 감옥 병원을 빠져나가 브뤼셀로 망명한 블랑키는 1866년 『무장 봉기 교본』을 썼다. 6월 봉기의 실패와 강화된 진압 무기, 오스만이 바꿔 놓은 파리의 지형을 따져, 군대처럼 조직되고 참모부의 지휘를 받는 봉기를 구상한 책이다. 그사이 파리에는 블랑키파가 분파 단위로 조직되었다. 26 27 1
1869년 5월 24일과 6월 7일 총선은 15년 만에 처음으로 거리 충돌을 불렀다. 정부 쪽은 460만 표, 반대파는 330만 표를 얻고 대도시를 휩쓸었으며, 노동자들은 처음으로 다수가 공화파 후보를 찍었다. 레옹 강베타는 파리 벨빌 선거인들이 내건 「벨빌 강령」을 받아들여 완전한 언론 자유, 교회와 국가의 분리, 소득세, 공무원 선거, 상비군 폐지를 약속하고 당선되었다. 파리에서 떨어진 에밀 올리비에는 바르에서 당선되었고, 앙리 로슈포르는 11월 강베타가 비운 파리 의석을 보궐선거로 차지했다. 9월 8일 원로원 결의로 입법원은 법안 발의권과 제한 없는 질의권을 얻었고, 1870년 1월 2일 「제3당」의 올리비에가 이끄는 내각이 섰다. 1 28 29 30 17
1870년 1월 10일 파리 오퇴유에서 황제의 사촌 피에르 보나파르트가 결투 문제로 찾아온 로슈포르 계열 신문 《라 마르세예즈》의 기자 빅토르 누아르를 권총으로 쏘아 죽였다. 1월 12일 뇌이에서 열린 장례에는 약 10만 명이 모였고, 바를랭, 루이즈 미셸, 장바티스트 미예르 같은 뒷날의 코뮌 투사들이 함께했다. 귀스타브 플루랑스는 시신을 파리로 옮겨 봉기를 일으키자고 했고, 블랑키도 봉기를 시도했으나, 인터내셔널 쪽은 서두르다 혁명을 망칠 수 있다고 보았고 샤를 들레클뤼즈도 자제를 호소했다. 정부는 로슈포르의 면책특권을 풀어 2월 7일 그를 체포했고, 그는 징역 6개월을 받았다. 31 27 17
올리비에의 권유로 황제는 의원내각제를 담은 4월 20일 원로원 결의를 국민투표에 부쳤다. 공화파는 반대나 기권을 호소했고, 투표 직전 정부는 황제 암살 음모를 구실로 파리·리옹·루앙·마르세유·브레스트 등지의 인터내셔널 간부들을 체포했다. 4월 30일에는 「인터내셔널을 이루는 모든 개인」의 체포 명령이 내려졌다. 5월 8일 투표에서 찬성 735만 142표, 반대 153만 8,825표가 나왔다. 파리가 속한 센 도와 부슈뒤론 도만 반대가 많았고, 파리·마르세유·리옹·보르도·툴루즈 같은 대도시가 반대 쪽에 섰다. 강베타는 「제국은 어느 때보다 강하다」고 인정했다. 마르크스는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들이 이 투표를 「안으로는 전제, 밖으로는 전쟁」에 대한 찬성이라고 경고했고 모든 공업 중심지에서 노동계급이 반대표를 던졌다고 썼다. 28 1 32

엠스 전보와 「가벼운 마음」의 전쟁 (1870년 7~9월)
1866년 7월 3일 쾨니히그레츠(사도바)에서 프로이센이 오스트리아를 이기고 북독일 연방을 세우자 프랑스에서는 「사도바의 복수」라는 말이 퍼졌다. 프로이센 인구는 약 2,400만 명으로 늘었지만 여전히 프랑스의 3,800만 명보다 적었다. 1867년 룩셈부르크 위기는 제정의 외교를 웃음거리로 만들었고, 징병의 불평등을 없애려던 군사 개혁안 「니엘 법」은 의회에서 크게 고쳐져 쓸모없어졌다. 1870년 초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가의 레오폴트가 에스파냐 왕위 후보로 나섰다가 프랑스의 항의로 7월 11일 물러났지만, 외무장관 아제노르 드 그라몽은 대사 베네데티를 시켜 다시는 호엔촐레른 가 후보를 허락하지 않겠다는 보증을 빌헬름 1세에게 요구했다. 33 1
7월 13일 바트엠스의 산책로에서 빌헬름 1세는 베네데티의 요구를 정중히 거절했다. 수행원 하인리히 아베켄이 보낸 보고 전보를 받은 오토 폰 비스마르크는 왕의 화해적인 표현을 빼고 요구와 거절만 남긴 보도문을 그날 저녁 언론과 각국 공관에 돌렸다. 7월 15일 정부가 입법원에 전쟁을 알렸을 때 올리비에는 5억 프랑의 전비를 얻으며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의 책임을 진다고 말했다. 황후 외제니는 「전쟁이 없으면 내 아들은 결코 황제가 되지 못한다」고 말했다고 전한다. 7월 19일 프랑스는 프로이센에 선전포고했다. 마르크스는 7월 23일 인터내셔널 총평의회의 첫 번째 담화에서 이 전쟁을 「1851년 12월 쿠데타의 개정판」이라 불렀다. 33 34 1 28 32
인터내셔널은 전쟁에 반대했다. 파리 지부는 7월 12일 《르 레베유》에 「모든 나라의 노동자에게」 보내는 선언을 실어 「패권이나 왕조를 위한 전쟁은 노동자에게 범죄적인 부조리일 뿐」이라고 했고, 뇌이의 노동자들은 이 전쟁이 「오로지 왕조의 전쟁」이라고 선언했다. 독일 쪽에서도 7월 16일 브라운슈바이크 노동자 대회와 작센 노동자 5만 명을 대표한 켐니츠 대의원 회의가 같은 뜻을 밝혔고, 아우구스트 베벨과 빌헬름 리프크네히트는 첫 전쟁 공채 표결에 기권했다. 마르크스는 「전쟁의 결말이 어떻든 제2제정의 조종은 이미 파리에서 울렸다. 제정은 시작될 때처럼 패러디로 끝날 것」이라고 썼다. 32 15 19
전쟁은 6주 만에 제정을 끝냈다. 8월 첫 패전들로 올리비에 내각이 무너졌고, 블랑키는 8월 14일 쥘 발레스 등 100명 남짓을 이끌고 라빌레트의 소방대 병영을 습격해 무기를 얻으려 했으나 민중이 따르지 않아 해산했다. 붙잡힌 에밀 외드는 사형을 선고받았다가 스당의 패배로 목숨을 건졌다. 9월 초 나폴레옹 3세는 스당에서 포로가 되었고, 9월 4일 파리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이후의 포위와 1871년 3월 18일은 「파리 코뮌」 사건에서 이어진다. 27 26 35 2 28
평가: 보나파르티즘의 완성과 1871년으로 이어진 것들
마르크스는 1869년 『루이 보나파르트의 브뤼메르 18일』 재판 서문에서 같은 사건을 다룬 두 책을 비교했다. 위고의 『소인 나폴레옹』은 쿠데타를 한 개인의 폭력으로만 보아 오히려 그를 세계사에 유례없는 주도권을 가진 큰 인물로 만들었고, 프루동의 『쿠데타』는 역사의 필연으로 설명하다가 주인공을 변호하는 데 이르렀다. 마르크스 자신은 「프랑스의 계급투쟁이 어떻게 그로테스크한 범인(凡人)이 영웅 역할을 할 수 있는 상황과 관계를 만들어 냈는지」를 보였다고 썼다. 그는 당시 독일에서 유행하던 「카이사르주의」라는 비유도 물리쳤다. 고대 로마의 계급투쟁은 노예를 수동적 받침대로 둔 특권적 소수 사이의 싸움이었기 때문이다. 책 끝의 예언, 황제의 외투가 루이 보나파르트의 어깨에 걸치는 날 방돔 원주 위 나폴레옹 동상이 무너지리라는 말은 1869년의 마르크스에게는 나폴레옹 전설을 허문 프랑스의 역사 연구와 풍자로 이미 이루어진 것이었다. 1871년 5월 16일 코뮌은 원주를 실제로 쓰러뜨렸다. 36 37
1871년 『프랑스 내전』에서 마르크스는 제2제정을 쿠데타를 출생증명서로, 보통선거를 재가로, 칼을 홀로 삼은 체제라고 불렀다. 제정은 자본과 노동의 싸움에 직접 끼지 않은 농민 대중에 기대고, 노동계급과 유산계급을 함께 구하며, 국가적 영광의 환상으로 모든 계급을 묶겠다고 공언했다. 그러나 실제로 그것은 「부르주아지가 이미 나라를 다스릴 능력을 잃었고 노동계급은 아직 그 능력을 얻지 못한 시기에 가능한 유일한 통치 형태」였다. 그 아래서 산업과 상업은 거대하게 팽창했고 금융 투기가 판쳤으며, 대중의 빈곤은 사치와 나란히 놓였다. 마르크스는 이 국가권력을 부르주아 사회가 노동을 자본에 예속시키는 수단으로 바꾼 「마지막 형태」로 보았고, 「제정의 정반대가 코뮌이었다」고 썼다. 38
역사가들의 평가는 오락가락했다. 1930~1940년대에는 제2제정을 파시즘의 선구로 깎아내렸고, 20세기 후반에는 근대화 체제로 다시 보는 견해가 나왔다. 대외 정책은 실패로 평가되지만, 철도망과 파리 개조, 1858년 이후의 자유화 같은 국내 업적은 더 후하게 평가된다. 모리스 아귈롱은 경제·문화사로 보면 이 시기가 「번영하고 찬란한 시기」였다고 했고, 노동자의 실질 구매력도 실제로 올랐다. 그러나 노동자를 제정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카이사르식 사회주의」는 1869년 총선에서 노동자들이 공화파를 찍으면서 실패로 드러났다. 2 1
1871년의 주역들은 대부분 이 18년 동안 만들어졌다. 코뮌 평의회 의원의 약 3분의 1이 인터내셔널 회원이었고, 바를랭, 말롱, 레오 프랑켈이 그 대표였다. 생트펠라지에서 블랑키에게 배운 리고는 코뮌의 경찰을 맡았고, 블랑키파는 경찰·사법·군사의 요직을 차지했다. 1864년 법이 허용한 파업과 노동자 단체 연합회, 1868년 법이 연 공개 집회와 신문이 그 조직의 틀이었다. 오스만이 합친 벨빌과 몽마르트르는 코뮌의 거점이 되었고, 제정이 차지한 뉴칼레도니아는 코뮌 가담자들의 유형지가 되었다. 거꾸로 상호주의를 이끌던 톨랭은 1871년 2월 국민의회 의원이 된 뒤 코뮌을 거부해 4월 12일 인터내셔널 파리 연합회에서 제명되었다. 제정의 공화파 반대파였던 강베타와 쥘 파브르는 1870년 9월 국민방위정부를 이끌었고, 1851년 쿠데타 반대로 추방되었던 티에르는 코뮌을 진압한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19 26 39 14 2 40 41 3 42
결과
제2제정은 1870년 9월 4일 파리의 공화국 선포로 끝났다. 2만km 가까운 철도망과 오스만의 파리, 그리고 국민투표로 정당성을 얻는 통치 방식이 남았고, 노동자를 제정 편으로 끌어들이려던 「카이사르식 사회주의」는 실패했다. 1864년 파업 허용과 1868년 언론·집회 완화 아래 자란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 노동자 단체 연합회, 블랑키파와 급진 공화파는 1870~1871년 포위된 파리의 주역이 되었고, 코뮌 평의회 의원의 약 3분의 1이 인터내셔널 회원이었다. 마르크스는 제2제정을 부르주아지가 통치 능력을 잃고 노동계급은 아직 얻지 못한 시기의 유일한 통치 형태로 보았고, 그 정반대가 코뮌이라고 썼다.
연표와 지도
- 11852.12.02제2제정 선포
11월 국민투표(찬성 782만 표)를 거쳐 루이 나폴레옹 보나파르트가 나폴레옹 3세로 즉위했다.
- 1853.06.22오스만, 센 도지사 취임
황제는 그에게 파리를 「바람이 통하게 하고, 하나로 잇고, 아름답게 하라」고 지시했다.
- 1855.09세바스토폴 함락
크림 전쟁에서 프랑스군이 말라코프 보루를 점령해 11개월의 포위를 끝냈다.
- 1856.03.30파리 조약
크림 전쟁이 끝나고 러시아는 흑해에 함대를 둘 수 없게 되었다.
- 21858.01.14오르시니의 황제 암살 시도
오페라 극장 앞에서 폭탄이 터져 8~12명이 죽었고, 이를 구실로 일반 치안법이 만들어졌다.
- 31859.06.24솔페리노 전투
프랑스·사르데냐군이 오스트리아군을 이겼고, 7월 빌라프랑카 휴전으로 전쟁이 끝났다.
- 41860.01.01파리 교외 합병
벨빌·몽마르트르·라빌레트 등을 합쳐 파리가 20개 구, 인구 160만 명이 되었다.
- 1860.01.23영불 통상조약
코브던과 슈발리에가 비밀리에 협상한 조약으로 관세가 크게 낮아졌다.
- 1862.05.05푸에블라 패전
멕시코에 상륙한 프랑스군이 푸에블라에서 패해 수도 진군이 1년 늦어졌다.
- 1863.05.311863년 총선
반대파가 195만 표와 32석을 얻고 대도시를 차지했다.
- 1864.02.17「60인 선언」
앙리 톨랭이 쓰고 노동자 60명이 서명해 노동자 독자 후보를 내세웠다.
- 1864.05.25올리비에 법
단결죄가 없어져 평화적인 파업이 처음으로 허용되었다.
- 51864.09.28국제노동자협회 창립
런던 세인트마틴스 홀 집회에서 창립이 결의되었고, 마르크스가 창립 선언과 임시 규약을 썼다.
- 61865.08블랑키, 탈옥해 브뤼셀로
생트펠라지에서 젊은 급진파를 가르친 블랑키가 감옥 병원을 빠져나가 망명했다.
- 71866.09인터내셔널 제네바 대회
파리 대의원 11명이 참석했고, 대회는 노동조합과 8시간 노동일을 결의했다.
- 1867.06.19막시밀리안 총살
프랑스군이 떠난 뒤 멕시코 황제 막시밀리안이 공화파에게 총살되었다.
- 1868.05.11언론법과 《라 랑테른》
사전 허가와 경고 제도가 없어졌고, 로슈포르의 《라 랑테른》이 10만 부가 팔렸다.
- 1868.06.06공개 집회법
정치·종교를 다루지 않는 공개 집회의 사전 허가가 없어졌다.
- 1869.05.24–
06.07 1869년 총선반대파가 330만 표를 얻었고, 노동자 다수가 처음으로 공화파를 찍었다.
- 81869.06.16라리카마리 발포
파업 광부 연행을 막던 가족들에게 군대가 총을 쏘아 민간인 14명이 죽었다.
- 91869.10.08오뱅 발포
파업 중인 광부들에게 군대가 발포해 14명이 죽었다.
- 101870.01.12빅토르 누아르의 장례
피에르 보나파르트에게 살해된 기자의 장례에 약 10만 명이 모였다.
- 111870.01르크뢰조 파업
공제기금 자치를 요구한 아돌프 아시의 해고로 슈네데르 공장에서 파업이 일어났다.
- 1870.05.08마지막 국민투표
찬성 735만 표, 반대 154만 표로 자유주의 헌법이 추인되었지만 대도시는 반대했다.
- 121870.07.13엠스 전보
비스마르크가 왕의 화해적 표현을 빼고 요구와 거절만 남긴 보도문을 냈다.
- 1870.07.19프로이센에 선전포고
올리비에는 「가벼운 마음으로」 전쟁의 책임을 진다고 했고, 인터내셔널은 왕조 전쟁이라며 반대했다.
- 1870.08.14라빌레트 습격
블랑키가 100명 남짓을 이끌고 소방대 병영을 습격했으나 민중이 따르지 않았다.
- 131870.09.04스당 패배와 공화국 선포
황제가 스당에서 포로가 된 뒤 파리에서 공화국이 선포되었다.
관련 인물 29명
제2제정 정부와 보나파르트파5명
집행 · 지휘3
공화파·자유주의 반대파8명
참여8
1851년 쿠데타 때 추방되었다가 1863년 의회로 돌아와 「필요한 자유」를 요구했다.
「5인」의 공화파 의원쥘 파브르1809–18801858년 선서하고 의회에 앉은 공화파 5인의 한 사람이었고, 1870년 9월 국민방위정부를 이끌었다.
급진 공화파 변호사·의원레옹 강베타1838–1882보댕 기념비 재판의 변론으로 이름을 얻었고, 1869년 「벨빌 강령」을 내걸고 당선되었다.
공화파 의원쥘 페리1832–18931867년 「오스만의 환상적인 회계」로 오스만의 공사 채권을 공격했다.
망명 작가빅토르 위고1802–1885쿠데타 뒤 추방되어 『소인 나폴레옹』과 『징벌』로 황제를 공격했고, 1859년 사면을 거부했다.
《르 레베유》 발행인샤를 들레클뤼즈1809–1871보댕 기념비 모금으로 재판을 받았고, 빅토르 누아르 장례 때 자제를 호소했다.
《라 랑테른》·《라 마르세예즈》 발행인, 의원앙리 로슈포르1831–19131868년 《라 랑테른》으로 제정을 조롱했고, 1869년 의원이 되었다가 1870년 2월 투옥되었다.
블랑키에게 배운 젊은 급진파조르주 클레망소1841–1929생트펠라지 감옥에서 블랑키를 스승으로 둔 젊은 급진파의 한 사람이었다.
노동운동, 인터내셔널, 블랑키파9명
지도부3
참여6
창립 선언과 규약을 썼고, 1870년 7월 첫 번째 담화에서 전쟁을 「1851년 쿠데타의 개정판」이라 불렀다.
블랑키파 청년라울 리고1846–1871생트펠라지에서 블랑키에게 배웠고, 뒤에 코뮌의 경찰을 맡았다.
혁명가귀스타브 플루랑스1838–1871빅토르 누아르의 시신을 파리로 옮겨 봉기를 일으키자고 주장했다.
교사, 뒷날의 코뮌 투사루이즈 미셸1830–1905빅토르 누아르의 장례에 함께한 뒷날의 코뮌 투사들 가운데 있었다.
언론인쥘 발레스1832–18851870년 8월 14일 블랑키의 라빌레트 습격에 함께했다.
인터내셔널 회원프랑켈 레오1844–1896코뮌 평의회에 들어간 인터내셔널 회원의 대표적인 한 사람이었다.
진영 밖
참여3
목격 · 기록4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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