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련 우주 계획
40년 전까지 말과 쟁기로 밭을 갈던 나라는 어떻게 인류를 우주로 먼저 보냈는가?
1957년 스푸트니크 1호에서 1965년 레오노프의 우주 유영까지, 소련은 최초의 인공위성, 최초의 유인 비행, 최초의 여성 우주인, 최초의 우주 유영이라는 우주 시대의 첫 관문들을 모두 먼저 통과했다. 치올콥스키가 남긴 이론, 코롤료프의 OKB-1 설계국, 그리고 무상 대중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집중시킨 자원이 이 도약을 떠받쳤다. 그것은 한 세대 전까지 농업국이었던 나라가 이룬 세계사적 성취였다.
말과 쟁기의 나라, 로켓을 꿈꾸다
20세기 초 러시아 제국은 숫자로 보면 우주 비행의 산실이 될 수 없는 나라였다. 1897년 전 러시아 인구조사에 따르면 글을 읽고 셈을 할 수 있는 사람은 전체 인구 1억 2,560만 명 중 21퍼센트, 농촌에서는 19.7퍼센트에 불과했다. 9개 대학의 학생 수는 1만 4천 명 남짓, 전국의 중등교육기관 900곳에서 공부하는 학생은 22만 4천 명이었다. 인구의 3퍼센트만이 어떤 형태로든 학교에 다녔고, 나머지 97퍼센트(대다수 농민)는 나무 쟁기로 밭을 갈며 19세기 이전의 삶을 살았다. 니콜라이 2세의 재위 기간 내내 초등교육은 확장되고 있었으나, 인구 증가 속도를 따라잡지 못했다. 1914년이 되어서도 학령기 아동의 절반만이 학교에 다녔다.
그러나 이 나라에는 또 다른 러시아가 있었다. 1881년 3월, 황제 알렉산드르 2세 암살의 주폭탄 기술자였던 27세의 니콜라이 키발치치는 사형 집행을 기다리며 페트로파블롭스크 요새 감방에서 유인 로켓 비행체의 설계도를 그렸다. 화약을 연속적으로 연소실에 공급해 추진력을 얻고, 김벌 방식으로 엔진 방향을 조정하는 이 구상은 인류 최초의 로켓 추진 유인 비행체 설계였다. 경찰부는 그의 원고를 '쓸데없는 잡담'이라는 메모와 함께 봉투에 넣어 봉인했고, 1917년 볼셰비키 연구자들이 기록보관소에서 발견하기까지 36년 동안 빛을 보지 못했다.
한 세대 뒤, 랴잔주 이젭스코예 마을의 가난한 산림 관리인 아들로 태어난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열 살 때 성홍열로 청력을 거의 완전히 상실했다. 학교에 다닐 수 없었던 그는 모스크바 체르트코프 공공도서관에서 3년 동안 독학으로 수학과 물리학을 익혔다. 이 도서관의 사서는 우주 철학자 니콜라이 표도로프였고, 그의 '우주적 불멸' 사상은 훗날 치올콥스키의 우주 비행 철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879년 교사 자격시험에 합격한 치올콥스키는 보로프스크와 칼루가의 지방 학교에서 수학과 물리를 가르치며, 월급 대부분을 실험 재료와 책에 쏟아부었다. 1897년 그는 칼루가의 자택 아파트에 러시아 최초의 풍동을 자비로 건설하고, 구, 원통, 원뿔, 평판의 항력 계수를 측정했다. 이 성과는 모스크바대학의 니콜라이 주콥스키(근대 공기역학의 창시자로 1902년 러시아 최초의 대학 풍동을, 1904년 유럽 최초의 공기역학 연구소를 세운 인물)로 이어졌다.
1903년 5월, 치올콥스키는 상트페테르부르크의 과학 잡지 《나우치노예 오보즈레니예》에 「반작용 장치에 의한 우주 공간의 탐구」를 발표했다. 이 논문에서 그는 오늘날 '치올콥스키 방정식'으로 불리는 로켓의 기본 공식을 유도하고, 지구 궤도 진입에 필요한 수평 속도가 초속 8,000미터임을 계산했으며, 액체 산소와 액체 수소를 추진제로 하는 다단 로켓의 원리를 제시했다. 라이트 형제의 첫 동력 비행보다 몇 달 앞선 이 논문은 당시 거의 아무런 주목을 받지 못했다. 칼루가의 한 지방 교사가 쓴 글이었기 때문이 아니라, 비행 자체를 공상으로 여기던 시대였기 때문이다. 그래도 러시아에는 이미, 문자도 모르는 농민의 나라 깊숙한 곳에서 인류가 별에 닿을 길을 수학적으로 증명한 사람이 있었다.
독학 교사의 방정식, 국가가 알아보기까지
1903년 칼루가의 귀머거리 수학 교사 콘스탄틴 치올콥스키는 잡지 『과학평론』에 「반작용 장치에 의한 우주 공간의 탐구」를 발표했다. 로켓 방정식, 액체수소-액체산소 추진제, 다단 로켓의 원리: 이 모든 것이 5월호에 실렸지만 아무도 주목하지 않았다. 10세에 성홍열로 청력을 거의 잃은 치올콥스키는 모스크바 도서관에서 혼자 수학과 물리를 공부한 뒤 칼루가의 학교들에서 40년 가까이 산수를 가르친 독학자였다. 그의 논문은 전문 학술지가 아니라 대중 과학 잡지에 실렸고, 제국 과학원은 그를 진지하게 대하지 않았다. 1914년 니콜라이 주콥스키와 블라디미르 베트친킨은 그의 금속 비행선 계획이 무가치하다는 최종 결론을 내렸다.
치올콥스키를 구한 것은 국제적 인정이 아니라 정치적 단절이었다. 혁명 후 소비에트 정부는 1918년 그를 사회주의 아카데미 회원으로 선출했고, 1921년 평생 연금을 부여해 63세의 교사가 교단을 떠나 연구에 전념할 수 있게 했다. 1919년 체카에 잘못 체포되어 루뱐카에 2주간 수감됐으나 오해로 풀려났다. 진짜 전환점은 1923년 독일의 헤르만 오베르트가 『행성 간 공간으로의 로켓』을 출판한 직후였다. 국제적 반향에 대응해 소비에트 언론은 치올콥스키를 진정한 선구자로 부각시켰다: 짜르 체제가 무시한 독학자가 노동자 국가에서 마침내 인정받았다는 서사였다. 그의 저작은 대량 출판됐고, 1932년 75세 생일에는 노동적기훈장과 600루블 연금, 모스크바 콜론니 홀에서의 국가 경축 행사가 이어졌다. 1935년 9월 13일, 위암으로 죽어가며 스탈린에게 모든 저작을 볼셰비키 당에 바친다는 편지를 썼을 때, 그는 이미 한 세대의 기술자들에게 우주 비행이 공상이 아니라 계산 가능한 과제임을 확신시킨 뒤였다.
바로 그 세대를 이끈 사람이 세르게이 코롤료프였다. 1931년, 24세의 항공기 설계사는 모스크바의 오소아비아힘 산하에 반작용추진연구그룹(ГИРД)을 공동 창립했다. 발트 독일계 엔지니어 프리드리히 찬데르, 미하일 티혼라보프와 함께였다. ГИРД 직원들은 급여 없이(스스로 "일은 하고 돈은 안 받는 기술자들의 그룹"이라 불렀다) 사도보-스파스카야 거리 지하실에서 일했다. 1933년 8월 17일, 나하비노 발사장에서 ГИРД-09이 점화됐다: 고체 휘발유와 액체산소를 쓰는 하이브리드 로켓으로, 18초간 400미터를 비행한 소련 최초의 액체추진제 로켓 발사였다. 11월 25일에는 찬데르가 설계한 순수 액체연료 ГИРД-Х가 80미터까지 올랐다. 그해 말 투하쳅스키 원수의 후원 아래 ГИРД는 레닌그라드의 가스역학연구소(ГДЛ)와 합병되어 반작용과학연구소(РНИИ)로 재편됐고, 코롤료프는 부소장이 됐다.
РНИИ 안에는 상충하는 비전이 공존했다. 발렌틴 글루시코 같은 ГДЛ 출신들은 로켓을 단계적 개량이 필요한 추진 장치로 보았고, 코롤료프는 유인 비행체의 심장으로 보았다. 이 긴장은 억압이 연구소를 삼켰을 때 치명적이었다. 1937년 이반 클레이묘노프 소장이 체포되고, 이어 게오르기 랑게마크가 체포됐다. 둘 다 고문 아래에서 РНИИ 내부의 '반혁명 트로츠키주의 조직'에 대해 자백했고, 코롤료프의 이름을 댔다. 1938년 6월 27일 코롤료프는 체포됐다. 수사관들은 5주간의 독방 감금 중에 턱뼈 두 곳을 부러뜨렸고, 아내의 체포와 딸의 고아원 송치를 협박했다. 그는 자백했다.
1938년 9월 25일, 코롤료프는 스탈린, 몰로토프, 카가노비치, 보로실로프의 승인을 받은 '제1범주'(총살 명단)에 295번으로 올랐다. 이틀 뒤 군사대학은 10년 노동교화소형을 선고했다. 총살이 아닌 10년형이 내려진 이유는 오늘날까지도 문서로 확인되지 않는다. 콜리마의 말댜크 금광으로 보내진 코롤료프는 괴혈병으로 이가 모두 빠졌고, 전직 모스크바 항공공장장이던 수감자 미하일 우사초프가 그를 위생병으로 구해내지 않았으면 죽었을 것이다. 어머니의 청원과 비행사 미하일 그로모프, 발렌티나 그리조두보바의 개입으로 1939년 6월 소련 대법원이 원심을 파기했다. 12월 말 코롤료프는 콜리마에서 모스크바로 송환됐다. 그가 타지 못한 마가단발 증기선 인디기르카가 동해에서 침몰해 745명이 사망했다.
1940년 재판에서 특별회의는 8년형을 선고했으나 이번에는 수용 장소가 달랐다: 모스크바의 ЦКБ-29, 일명 '투폴레프 샤라시카', 수감된 기술자들이 NKVD 경비 아래에서 첨단 군사 설계를 수행하던 비밀 설계국이었다. 코롤료프는 안드레이 투폴레프 아래에서 Pe-2 폭격기 개발에 참여하면서 무선 유도 항공 어뢰와 로켓 요격기 초안을 독자적으로 추진했다. 1942년 카잔의 ОКБ-16으로 이송되어 항공기용 로켓 보조 이륙 장치를 개발했고, 1943년 초 로켓 유닛 그룹의 수석 설계사가 됐다. 1944년 7월 27일, 스탈린의 개인적 지시로 전과가 말소된 채 조기 석방됐으나 명예회복은 아니었다. 완전한 복권까지 13년이 더 걸렸다. 카잔에서 1년을 더 일한 뒤, 1945년 9월 코롤료프는 베를린으로 향했다: 독일의 V-2를 연구하는 팀에 합류하기 위해서였다.
V-2 복제에서 세계 최초의 ICBM까지, 11년
1946년 8월, 코롤료프가 NII-88 제3설계국장으로 임명되었을 때 소련의 로켓 기술 자산은 독일 V-2의 잔해와 소련 영내로 강제 이주된 독일 기술자 200여 명이 전부였다. 첫 임무는 V-2를 소련의 재료와 공정으로 복제해 R-1을 만드는 것이었다. 코롤료프는 이를 시간 낭비로 여겼다. 그는 곧바로 개량형 R-2로 건너뛰자고 주장했지만, 드미트리 우스티노프 군수상은 복제부터 시작하라고 눌렀다.
코롤료프가 이 무렵 만들어낸 가장 중요한 제도는 수석설계자회의였다. 엔진의 발렌틴 글루시코, 유도제어의 니콜라이 필류긴, 무선 통신의 미하일 랴잔스키, 자이로스코프의 빅토르 쿠즈네초프, 발사대의 블라디미르 바르민 등 관련 설계국의 수장들을 한 테이블에 앉혀 관료적 계통을 우회하는 비공식 조정 기구였다. 이 회의는 뒤에 소련 우주 계획 전체의 사실상 최고 기술 사령부가 됐다.
1949년 12월, 3,000km 사정거리의 R-3 로켓 설계를 놓고 과학기술회의(NTS)에서 중대한 대결이 벌어졌다. 셀리게르 호수의 고로도믈랴 섬에서 격리 근무 중이던 헬무트 그뢰트루프의 독일 팀이 제출한 G-4 안이 코롤료프의 R-3보다 우수하다는 평가가 내려진 것이다. 코롤료프는 이 결정에 완강히 저항했고, 결국 판정은 번복되었다. 그러나 이 경험은 그가 이후 독일식 공기역학 설계와 엔진 해법을 전면적으로 받아들이는 계기가 됐다.
1953년 2월, 정부는 사거리 7,000~8,000km의 2단 대륙간탄도미사일 개발을 정식 발주했다. 같은 해 10월, 세미팔라틴스크 핵실험 결과가 모든 설계 전제를 뒤엎었다. 소련의 열핵탄두는 예상보다 훨씬 무거웠다. 뱌체슬라프 말리셰프 부총리는 탄두 중량을 3톤에서 5.5톤으로 올리라고 지시했다. 기존 설계로는 사거리가 5,500km밖에 나오지 않아 미국 본토에 닿지 않았다.
1954년 1월, 코롤료프는 수석설계자회의를 소집했다. 여기서 R-7의 핵심 설계가 결정됐다. 미하일 티혼라보프가 1947년부터 연구해 온 '패킷 방식'(중앙의 긴 코어 주위에 4개의 원뿔형 부스터를 묶고 전부 지상에서 점화)이 채택됐다. 이는 공중 점화의 기술적 난제를 우회하면서도 초대형 탑재물을 실을 수 있는 해법이었다. 1954년 5월 20일, 각료회의와 당 중앙위의 공동 결정으로 R-7(8K71) 개발이 국가 최우선 과제로 확정됐다.
글루시코의 엔진 개발은 순탄치 않았다. 원래 계획된 단일 챔버 RD-105/RD-106은 연소 불안정 문제로 좌초됐고, 대신 4개의 소형 챔버를 묶은 RD-107(부스터용)과 RD-108(코어용)이 채택됐다. 전체 로켓이 지상에서 점화할 때 20개의 주연소실과 16개의 버니어(자세제어) 엔진이 동시에 작동해야 하는 복잡한 구성이었다. 게다가 글루시코는 자세제어용 버니어 엔진 납품을 거부해, 코롤료프는 OKB-1 내부에서 세묜 코스베르크의 팀을 동원해 자체 개발해야 했다.
1957년 5월 15일, 첫 R-7(기체번호 5L)이 바이코누르에서 발사됐다. 98초 만에 부스터의 연료 누출로 화재가 발생해 추락했다. 6월 10~11일에는 기체번호 6L이 세 차례 점화 시도 끝에 한 번도 이륙하지 못했다. 7월 12일, 7L이 발사 33초 만에 공중 분해됐다. 세 번의 실패였다.
8월 21일, 네 번째 시험에서 8L이 마침내 6,314km를 비행해 캄차카의 쿠라 시험장까지 도달했다. 탄두는 대기권 재진입 중 고도 10km에서 파괴됐지만, 활성 구간 비행은 완전히 성공했다. 8월 27일 타스 통신은 "소련에서 초장거리 다단 탄도미사일이 개발됐다"고 발표했다. 서방은 이 발표를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R-7은 무기로서의 수명은 짧았다. 액체산소를 산화제로 써서 30일 이상 대기할 수 없었고, 발사 준비에 10시간이 걸렸으며, 거대한 발사대는 적의 선제 공격에 무방비였다. 그러나 미국의 초기 ICBM보다 압도적으로 큰 탑재 능력 덕분에, 정확히 7주 뒤 이 로켓은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을 궤도에 올리게 된다.
시간을 앞지르다: 가장 단순한 위성과 가장 짧은 비행
1956년 말, 코롤료프는 계산을 했다. 오브옉트 D라고 이름 붙인 당초의 과학위성은 1.0~1.4톤에 200~300kg의 측정 장비를 실을 예정이었지만, 연구소들이 장비를 제때 납품하지 못하고 있었다. 1956년 9월 14일, 켈디시는 과학아카데미 간부회에서 산업계의 태업을 공개 질책하며 "우리 위성이 미국보다 먼저 날아갔으면 한다"고 말했지만, 진척은 더뎠다. 그 사이 미국은 1955년 7월 이미 인공위성 발사 계획을 발표했고, 1956년 9월 미 육군의 목성-C 로켓이 궤도 도달에 필요한 속도를 거의 시험한 것이 코롤료프 쪽에도 포착됐다. 코롤료프는 오브옉트 D를 포기하고 대신 무게 83.6kg, 구형에 무선 송신기만 실은 PS-1(프로스테이쉬 스푸트니크, '가장 단순한 위성')을 먼저 쏘기로 결심했다. 1957년 2월 15일 각료회의가 이를 승인했고, R-7의 시험발사가 최소 두 번 성공하는 조건이 붙었다.
R-7은 첫 다섯 차례 발사 중 네 번이 실패했다. 1957년 8월 21일 여섯 번째 시험에서야 더미 탄두가 캄차카까지 날아갔다. 코롤료프는 R-7 국가위원회에 PS-1 발사를 설득했지만 격론이 벌어졌다. 두 번째 회의에서 그가 "중앙위원회 간부회에 물어볼까요?"라고 하자 위원회는 물러섰다. 한 달 남짓 만에 위성이 제작되었고, 코롤료프는 작업장 벽을 새로 칠하게 하고 가공 중인 구체를 벨벳 천 위에 올려 작업자들이 경외심을 갖게 했다.
10월 4일 발사도 아슬아슬했다. R-7의 연료 조절기가 발사 16초 만에 고장나 연료가 과소비되면서 엔진이 예정보다 1초 빨리 꺼졌고, 이 때문에 위성은 목표 고도보다 약 500km 낮은 궤도에 올랐다. 그래도 궤도에 오르자, 지구 어디서나 아마추어 무선사들이 20.005MHz와 40.002MHz에서 수신할 수 있는 '삑-삑-삑' 신호가 울려 퍼졌다. 흥미롭게도 『프라우다』는 10월 5일자 1면 우측 하단에 몇 단락짜리 타스 통신을 조촐히 실었을 뿐이었고, 세계 반응을 확인한 다음 날부터 1면 전체를 할애했다. 흐루쇼프조차 처음에는 '코롤료프의 또 다른 로켓 발사'쯤으로 여겼다고 라우셴바흐는 회고했다.
충격을 깨달은 흐루쇼프는 즉시 코롤료프에게 명령을 내렸다: 11월 7일 혁명 40주년까지 두 번째 위성을 쏘라는 것이었다. 시간은 겨우 한 달. PS-2 자체는 이미 제작된 똑같은 구체였지만, 생명체를 태운다는 조건이 문제였다. OKB-1은 기존의 고고도 로켓용 개 탑재 컨테이너를 R-7 상단에 급히 장착했고, 별도의 도면도 품질검사도 없이 엔지니어들이 직접 작업자에게 스케치를 넘기며 제작했다. 모스크바 거리의 떠돌이 개 라이카가 선정됐고, 귀환 계획은 애초에 없었다.
11월 3일 발사 후 원뿔 보호 덮개는 분리됐지만, 위성은 코어 단에서 분리되지 않았다. 이 때문에 단열재 일부가 벗겨지고 온도조절계가 작동불능이 되면서 선내 온도가 급상승했다. 라이카의 맥박은 발사 직후 분당 240회까지 치솟았고, 무중량 상태에서 3시간 만에 102회로 내려갔다. 그러나 5~7시간 뒤 생체 신호는 끊겼다. 소련 당국은 이후 45년간 라이카가 수일간 생존했다고, 혹은 안락사됐다고 엇갈리는 주장을 내놓았으나, 2002년 휴스턴 세계우주회의에서 드미트리 말라셴코프가 "그 짧은 시간 안에 신뢰할 수 있는 온도 조절 시스템을 만드는 것은 사실상 불가능했다"며 라이카가 과열로 네 바퀴째 비행 중 사망했음을 공개했다. 스푸트니크 2호의 총 궤도 중량은 7.79톤으로, 스푸트니크 1호의 83.6kg에 비해 압도적이었고, 미국이 한 달 뒤 발사하려던 뱅가드 위성의 1.47kg에 비하면 상상하기 어려운 규모였다.
달을 향해 쏘아올린 세 발의 신호, 그리고 지구를 떠날 첫 인간
1958년 3월, 소련 각료회의는 달 충돌선과 달 뒷면 촬영선이라는 두 계열의 우주선 개발을 승인했다. 스푸트니크의 충격이 채 가시지 않은 시점에서 흐루쇼프는 코롤료프에게 또 하나의 세계 최초를 요구했고, 코롤료프는 이 정치적 요구를 OKB-1의 자원 확보로 전환했다. 같은 달 미국도 파이어니어 계획을 발표했지만, 1958년 소련의 첫 세 차례 달 발사는 모두 R-7 로켓 이상으로 실패했다.
1959년 1월 2일 발사된 루나 1호는 인류 최초로 지구-달 계를 벗어난 물체가 됐다. 하지만 그것은 실패의 성공이었다. 상단 로켓이 예정보다 길게 연소해 탐사선은 달을 약 6,000km 빗나갔고, 소련은 의도한 근접 통과였다고 발표했다. 6월의 또 한 번의 실패 뒤, 9월 12일 발사된 루나 2호는 마침내 달 표면에 도달했다. 소련은 영국 조드럴뱅크 천문대에 사전 통보해 서방 과학자들이 직접 신호 소멸을 확인하게 함으로써 '붉은 거짓말'이라는 의심을 잠재웠다. 루나 2호의 충돌 지점은 12년 뒤 아폴로 15호 착륙지에서 260km 떨어진 곳이었다. 그로부터 한 달도 지나지 않은 10월 4일, 스푸트니크 1호 2주년에 발사된 루나 3호는 사상 최초로 달 뒷면 사진 29장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했다. 필름은 기내에서 현상, 스캔되었고, 이 필름이 소련 영공에 추락한 미국 CIA 정찰기구에서 회수한 것이라는 사실은 냉전 종식 후에야 밝혀졌다.
이 달 탐사의 연속이 세계의 이목을 붙잡는 사이, 코롤료프의 OKB-1에서는 완전히 다른 경주가 진행 중이었다. 1959년 1월 이미 유인 비행 준비가 시작됐고, 1960년 1월 콘스탄틴 베르시닌 공군 총사령관이 우주비행사 훈련소 설립을 승인했다. 카마닌이 지휘한 선발 과정은 전투기 조종사 200여 명을 걸러 20명의 제1차 우주비행사 분견대를 만들었다. 그중에서도 6명의 '선발대'가 가려졌고, 1961년 1월 최종 시험 결과 가가린, 티토프, 넬류보프가 최상위권으로 평가됐다.
그러나 유인 비행으로 가는 길은 순탄치 않았다. 1960년 5월부터 12월까지 발사된 보스토크 1K 시험선 5기 중 완전한 성공은 벨카와 스트렐카를 태운 8월의 1회뿐이었다. 10월 24일에는 네델린 참사로 100명 이상이 사망했고, 12월의 코라블-스푸트니크 3호는 귀환 궤도 오류로 자폭했다. 그런데도 코롤료프는 12월 유인 발사라는 당초 목표를 밀어붙였다. 미국이 1961년 1월에 준궤도 유인 비행을 할 수 있다는 정보가 결정적이었다.
1961년 3월, 개를 태운 두 차례의 무인 보스토크 3KA 시험 비행이 성공하자 국가위원회는 유인 발사를 승인했다. 4월 8일, 루드네프 위원장과 카마닌이 참석한 국가위원회는 가가린을 주탑승자, 티토프를 예비로 확정했다. 카마닌은 일기에 "티토프를 선택하지 못하게 하는 유일한 이유는 좀 더 강한 사람을 1일 비행용으로 남겨둬야 한다는 점"이라고 썼다. 코롤료프는 해치 밀폐 불량이라는 발사 직전의 고장마저 직접 감독해 해결했다. 4월 12일 오전 9시 7분, 가가린은 "포예할리!"를 외치며 이륙했다. 108분 뒤, 한 인간이 처음으로 우주에서 지구를 보았다. 소련은 달을 맞히고, 달을 촬영하고, 마침내 인간을 궤도에 올리는 데 성공했다. 이 모든 것이 불과 27개월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여성 우주인은 왜 한 명이었나: 선발 정치와 마지막 보스토크
티토프가 1961년 8월 하루 동안 궤도에 머무는 데 성공한 직후, 카마닌은 미국 매체에서 여성 조종사들이 '머큐리 13'이라는 이름으로 우주 비행 훈련을 받고 있다는 기사를 읽었다. 그는 일기에 이렇게 적었다: "최초의 여성 우주인이 미국인이 되도록 내버려둘 수 없다. 이것은 소비에트 여성들의 애국심에 대한 모욕이 될 것이다." 카마닌은 베르시닌 공군 원수와 코롤료프, 켈디시에게 여성 우주 비행을 제안했고, 1961년 12월 중앙위원회는 60명의 추가 우주비행사 모집을 승인했으며 그중 5명은 여성이어야 한다고 명시했다.
후보 조건은 30세 미만, 170cm 이하, 70kg 이하의 낙하산 선수였다. 소련에는 여성 시험비행사가 없었기 때문에 낙하산이 유일한 관련 자격이었다. 보스토크는 착륙 시 조종사가 캡슐 밖으로 사출되어 낙하산으로 내려오게 설계되어 있었기 때문이다. DOSAAF는 400명 이상의 지원자 명단을 넘겼고, 58명이 1차 심사를 통과했으며, 카마닌이 23명으로 압축했고, 1962년 2월 16일 5명이 최종 선발됐다. 방직공장 노동자이자 콤소몰 서기인 발렌티나 테레시코바, 국가대표 낙하산 선수인 이리나 솔로비요바, 모스크바 항공대 출신의 수학자 발렌티나 포노마료바, 모스크바 무선기술연구소 직원 타티야나 쿠즈네초바, 농촌 교사 잔나 요르키나였다. 이들은 1962년 3월 12일 스타시티에 입소했다.
원래 계획은 두 대의 보스토크에 두 명의 여성을 태워 연속 발사하는 것이었다. 이것은 1962년 8월 안드리얀 니콜라예프(보스토크 3호)와 파벨 포포비치(보스토크 4호)가 하루 간격으로 발사되어 궤도상 6.5km 접근과 직접 무선 교신을 성공시킨 쌍둥이 비행을 모델로 한 것이었다. 니콜라예프는 거의 4일 동안 64회 궤도를 돌며 3일 이상의 비행이 인체에 무리가 없다는 증거를 처음으로 제시했다.
그러나 1962년 말에서 1963년 초 사이 상황이 바뀌었다. 보스토크 우주선은 단 두 대(7호기와 8호기)만 남아 있었고 군부의 추가 생산 거부로 재고는 더 이상 없었다. 여기에 코롤료프와 카마닌은 서로 다른 우선순위를 갖고 있었다. 코롤료프는 남은 두 대를 모두 남성 조종사에게 주어 6~8일 임무로 의학적·군사적 데이터를 확보하고 싶어 했다. 카마닌은 두 여성 동시 발사라는 선전적 쾌거를 끝까지 밀었다. 이 교착 상태는 1963년 1월까지 이어졌고, 결국 타협안이 나왔다. 한 명의 남성(발레리 비콥스키)이 5일 임무를, 한 명의 여성이 3일 이내의 임무를 수행하는 것이었다.
최종 후보 선정은 과학적 기준보다 정치적·선전적 판단에 의해 이루어졌다. 가장 뛰어난 자격을 갖춘 후보는 포노마료바였다. 모스크바 항공대학을 졸업하고 320시간의 비행 경력을 가진 그녀는 켈디시의 강력한 지지를 받았고 기말시험에서 최고점을 받았다. 솔로비요바는 900회의 낙하산 점프를 기록한 국가대표 선수로 신체 능력이 가장 뛰어났다. 그러나 카마닌은 포노마료바를 '오만하고 이기적'이라 평했고, 솔로비요바는 내성적이라는 이유로 배제했다. 테레시코바는 대학 학위도, 비행 경력도 없었고 낙하산 점프는 126회에 불과했지만, 그에게 '치마 입은 가가린'으로 읽혔다. 전사한 트랙터 운전사의 딸이자 직물공장 노동자 출신이라는 이력은 소비에트 체제의 이상적 표상 그 자체였다. 코롤료프가 포노마료바에게 직접 한 말은 더 실용적인 계산을 드러낸다: "우리에겐 노동계급 출신 여성이 필요하다." 역사가 아시프 시디키는 또 다른 가능성을 제기한다. 코롤료프는 후속 보스호트 계획에서 필요한 우주 비행술을 갖춘 포노마료바와 솔로비요바를 더 복잡한 다인승 비행을 위해 아껴두고, 가장 숙련도가 낮은 테레시코바를 단기 선전 비행에 먼저 소모하려 했을 수 있다는 것이다.
흐루쇼프가 테레시코바의 사진을 직접 보고 최종 결정을 내렸다. 1963년 5월 21일 국가위원회는 그녀를 보스토크 6호의 조종사로 공식 지명했다. 6월 14일 비콥스키의 보스토크 5호가 먼저 발사됐고, 이틀 뒤인 6월 16일 테레시코바가 궤도에 올랐다. 그녀가 탄 보스토크 6호는 마지막 보스토크 3KA 우주선이었다. 이 비행으로 보스토크 계획은 종료되었고, 우주선은 보스호트 계획으로 넘어갔다. 여성 우주인 부대는 1969년 해산되었으며, 다음 소비에트 여성이 우주로 간 것은 19년 뒤인 1982년이었다.
공기가 없는 곳에서 걷기: 보스호트 2호의 26시간
보스호트 2호는 코롤료프가 미국의 제미니 계획을 앞지르기 위해 급조한 임무였다. 소유스가 완성될 때까지 우주 경쟁의 선두를 유지하려던 OKB-1은, 보스토크를 개조한 3인승 보스호트 1호를 띄운 지 5개월 만에 선외 활동(EVA)용으로 선체를 다시 설계했다. 1964년 4월 13일, 정부는 EVA용 3KD 우주선 다섯 대의 제작을 승인했다. 원래 개를 태운 무인 시험을 먼저 할 계획이었으나 시간이 없었다.
선실 전체를 감압하지 않고 우주 유영을 가능하게 한 것은 '볼가' 팽창식 에어록이었다. 기내 항법 장비가 진공관식이라 진공에 노출될 수 없었기 때문이다. 토밀리노 제918공장의 보리스 미하일로프 팀이 9개월 만에 설계·제작·시험했다. 접혔을 때 길이 74cm, 궤도에서 40개 공기 골조로 팽창하면 길이 2.5m·내경 1m의 통로가 됐다. 우주복 '베르쿠트'는 보스토크용을 개조해 45분용 산소 배낭과 5.35m 테더를 더했으며, 진공 팽창에 대비한 감압 모드를 갖추고 있었다.
1965년 2월 22일, 무인 시험기 코스모스 57호가 발사됐다. 에어록 전개는 성공했지만 두 지상국의 중복 명령이 제동로켓 점화 신호로 잘못 해석돼 자폭했다. 시험은 실패했지만 코롤료프는 유인 발사를 강행했다. 3주 후인 3월 18일 오전 10시, 파벨 벨랴예프 사령관과 알렉세이 레오노프 조종사가 탑승한 보스호트 2호가 바이코누르에서 발사됐다. 90분 후 두 번째 궤도에서 레오노프는 볼가 에어록을 통해 우주로 나갔다. 벨랴예프가 "인간이 우주 공간으로 나왔다! 자유 유영 중이다!"라고 무선으로 알렸다. 5.35m 테더에 매달린 채 다섯 번 우주선에서 멀어졌다 돌아왔다.
12분 9초의 유영을 마치고 귀환하려는 순간, 베르쿠트 우주복이 진공에서 크게 부풀어 팔다리를 구부릴 수 없게 됐다. 직경 1m의 에어록으로 도저히 들어갈 수 없었다. 레오노프는 지상에 알리지 않고 감압 밸브를 열어 압력을 0.40기압에서 0.27기압으로 낮췄다. 안전 한계 아래로 내려간 압력 속에서 간신히 에어록 안으로 기어들어갔다. 절차와 달리 머리부터 들어간 탓에, 좁은 통로에서 몸을 뒤집어 해치를 닫아야 했다. 체온은 20분 만에 1.8°C 올랐고, 우주복 안은 땀이 발목까지 찼다.
귀환 후에도 위기는 계속됐다. 해치가 열 변형으로 완전히 닫히지 않아 선실 산소 분압이 정상의 2배를 넘으며 폭발 직전까지 이르렀다. 발렌틴 본다렌코와 아폴로 1호 승무원을 죽인 것과 똑같은 상황이었다. 7시간 후 압력 조절 밸브가 작동해 간신히 정상화됐다. 에어록 사출로 자동 자세 제어가 망가졌고 자동 착륙 시스템마저 고장나, 두 사람은 18번째 궤도에서 수동으로 착륙을 시도해야 했다. 좌석이 제어반과 90도 어긋나 있어 벨트를 풀고 몸을 비틀어 조종했고, 46초 지연으로 착륙 지점은 예정지에서 386km 벗어나 페름 북쪽 타이가 한가운데가 됐다.
기온은 영하 5°C, 해치는 폭발 볼트에 날아가 열려 있었다. 늑대와 곰이 우글대는 3월의 숲에서 두 사람은 낙하산 줄과 선체 내장재를 뜯어 몸을 감싼 채 첫날밤을 버텼다. 헬기가 이들을 발견했지만 숲이 빽빽해 착륙할 수 없었고, 스키 구조대가 도착한 것은 다음 날이었다. 레오노프와 벨랴예프는 발사 사흘째에야 숲을 빠져나왔다. 소련은 우주 유영이라는 최초 기록을 얻었지만, 그 대가는 선전 문구 너머에 놓인 채 남았다.
신화가 된 성취, 성취가 가린 것: 무엇이 남고 무엇이 무너졌는가
1966년 1월, 코롤료프가 대장 수술 중 심장마비로 세상을 떠났을 때 소련 시민은 신문 1면에 실린 「총설계사 세르게이 파블로비치 코롤료프의 부고」를 읽기 전까지 그 이름을 본 적이 없었다. 이름 없는 영웅이 사라지자 계획은 분열했다. 코롤료프가 생전에 밀어붙이던 유인 달 착륙 계획은 그의 후임 미신에게 넘어갔으나, 대형 1단 엔진을 확보하지 못한 N-1 로켓은 1969년에서 1972년 사이 네 번 발사되어 네 번 모두 폭발했다. 글루시코가 등유 연료를 고집한 코롤료프의 설계에 맞는 엔진 제작을 거부하고 하이드라진 계열 추진제를 고집했기 때문이다. 1969년 7월 아폴로 11호가 달에 착륙했을 때 소련 텔레비전은 어린이 영화를 틀고 있었다. 코롤료프의 대리인이던 체르토크는 노트에 이렇게 적었다: "우리는 왜 거짓말을 하고 있는가."
소련 우주 계획이 정착시킨 것은 적지 않다. R-7 로켓의 직계 후손인 소유스 발사체는 21세기까지 1,900회 이상 발사된 인류 역사상 가장 신뢰성 높은 우주 로켓이며, 오늘날까지 유일하게 유인 우주선을 궤도로 보내는 러시아의 수단이다. 보스토크에서 소유스로 이어지는 설계 계보는 국제우주정거장의 수송 체계로 살아 있고, 1957년부터 1965년까지 쌓은 생체·재료·궤도역학 데이터는 이후 모든 유인 우주 계획의 기초가 됐다. 코롤료프가 '가장 단순한 위성'이라 불렀던 스푸트니크 1호의 성공은 그 자체로 전 세계의 과학교육 투자를 폭발시켰다: 미국은 1958년 국가방위교육법을 제정했고, 독립 직후의 인도와 가나 같은 나라들도 우주 연구 기관을 세우기 시작했다.
그러나 정착되지 않은 것도 그만큼 크다. 달 경쟁에서의 패배는 단순한 기록 싸움이 아니었다. 비밀주의는 내부 비판을 질식시켰고, 코롤료프의 OKB-1, 첼로메이의 OKB-52, 글루시코의 OKB-456으로 갈라진 설계국 간 경쟁은 자원을 분산시켰다. 1960년 10월 R-16 발사대 폭발로 네델린 원수를 포함해 100명 이상이 사망했을 때 이 사실은 수십 년간 은폐됐다. 소유스 1호(1967년)의 낙하산 고장으로 코마로프가 사망했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실패를 공식 기록에서 지웠기에 교훈은 조직에 축적되지 못했고, 같은 유형의 사고가 반복됐다.
역사가들 사이에서 가장 첨예한 논쟁은 두 가지다. 첫째, 소련 우주 계획을 무엇으로 평가할 것인가 하는 물음이다. NASA 사료를 최초로 종합한 아시프 싯디키는 작은 이정표들(최초의 달 충돌, 최초의 뒷면 촬영, 최초의 연착륙, 최초의 달 궤도 진입)에서는 소련이 거의 모든 기준에서 앞섰지만 큰 하나를 미국이 가져갔기에 잊혔다고 썼다. 제니퍼 프로스트는 더 나아가 종합적 우주 비행 능력으로 보면 소련이 "완승"했다고 주장한다. 반면 월터 맥두걸 같은 연구자는 투명한 민간 기구와 비밀 군사 기구라는 제도적 차이가 장기적으로 미국에 유리하게 작용했다고 본다.
둘째, 1991년 이후 열린 기록이 무엇을 바꾸었는가 하는 논쟁이다. 소련 시절 공식 서사는 '완벽한 임무를 수행한 흠 없는 우주비행사'를 반복했지만, 글라스노스트와 소련 붕괴 이후 개인 일기와 기밀이 해제된 문서들이 쏟아지면서 이 단일 서사는 산산조각났다. 그러나 슬라바 게로비치의 분석이 보여주듯, 그 자리에 들어선 것은 객관적 역사가 아니라 설계국별로 갈라진 '사유화된 기억'이었다: 코롤료프 진영의 회고록은 글루시코와 첼로메이를 패배의 원흉으로 지목하고, 그들의 진영은 다시 코롤료프를 무자비한 정치 술사로 그렸다. '반대 기억'은 새로운 공식 서사가 되었을 뿐이다. 오늘날 러시아에서 가가린의 비행은 위대한 조국전쟁 승리에 이어 국민의 두 번째 자랑으로 꼽히며, 국가는 '역사 왜곡 대응 위원회'까지 만들어 소련 우주 신화를 재발행하고 있다. 게로비치의 결론처럼: "기억하기 위해서 우리는 우리의 기억을 창조해야 한다. 그리고 우리는 우리 문화의 신화와 상징으로 그것을 창조한다."
쟁점으로 남은 것: 달 경쟁은 졌는가, 시작도 못 했는가
1960년대 소련 우주 계획을 둘러싼 역사학계의 논쟁은 단순한 '누가 이겼는가'의 문제가 아니다. 이 논쟁이 학계에서 살아 있는 이유는 그것이 체제 비교의 시금석이기 때문이다.
확정된 사실부터 정리하자. 첫째, 소련의 달 유인 착륙 계획은 실패했다. N-1 초중량 로켓은 네 차례 시험 발사에서 모두 폭발했고, 1974년 프로그램은 공식 취소됐다. 둘째, 그럼에도 1957년부터 1965년까지 축적된 기술적 유산은 살아남았다. R-7 계열 로켓은 소유스-2로, 보스토크의 후계인 소유스 우주선은 오늘날까지 국제우주정거장의 핵심 수송 수단이다. 최초의 우주정거장, 최초의 금성 착륙, 최초의 달 무인 탐사차는 모두 소련이 먼저 해낸 일이다.
쟁점은 여기에 있다. 소련은 처음부터 달 경쟁에 진지하게 임했는가, 아니면 초기 성공에 취해 미국이 경주를 선언한 뒤에야 뒤늦게 뛰어들었는가? 시디키(Asif Siddiqi, 2000)는 소련 지도부가 1964년 8월이 되어서야, 즉 미국이 아폴로 계획을 선언한 지 3년이 지난 뒤에야 유인 달 착륙을 공식 목표로 채택했다는 문서 기록을 제시한다. 이에 대해 체르토크(Boris Chertok)의 회고록은 코롤료프가 1961년 케네디의 선언 직후부터 N-1 구상을 브레즈네프에게 제출했다고 반박하며, 정치적 결단의 지연이 기술적 준비 부족으로 잘못 서술된 사례라고 주장한다.
또 다른 쟁점은 코롤료프의 죽음이 결정적이었는가의 문제다. 미신, 카마닌, 체르토크는 모두 코롤료프가 살아 있었으면 N-1의 첫 비행 전 지상 시험 부족과 같은 문제를 권위로 돌파했을 것이라고 증언했다. 반면 글루시코는 N-1이 '근본적인 기체역학적 오류'를 안고 있어 코롤료프가 살아도 성공할 수 없었다고 주장했다. 에릭슨(Andrew Erickson, 2018)은 한 걸음 더 나가, 설계국 간의 예산 쟁탈전, 28개 부처 500여 조직에 흩어진 조달 체계, 1단 로켓을 지상 시험할 시험대 하나 마련하지 못한 자원 부족 등 구조적 요인이 어느 한 개인의 생사보다 컸다고 분석한다.
가장 근본적인 논쟁은 설계국 경쟁 체제 자체에 대한 평가다. NASA가 단일한 관리 구조 아래 시스템 관리 기법으로 아폴로를 통합한 반면, 소련은 코롤료프, 얀겔, 첼로메이, 글루시코가 각자 독자적인 로켓과 우주선을 경쟁적으로 제안하는 분산형 체제였다. 이 체제는 1950년대 후반 빠른 혁신을 낳았지만, 달 착륙이라는 단일한 거대 목표 앞에서는 중복 투자와 내분을 초래했다. 그러나 일부 연구자는 이 경쟁 체제가 장기적으로는 더 지속 가능했다고 반론한다. 코롤료프의 실패 뒤 첼로메이의 알마즈 군사정거장이, 그 뒤 글루시코의 미르와 에네르기야-부란이 그 자리를 메웠기 때문이다.
요컨대 소련 우주 계획의 초기 10년은 한 나라가 이룰 수 있는 과학기술적 도약의 정점을 보여줬고, 동시에 국가 주도 거대 프로젝트의 제도적 취약성을 미리 보여줬다. 무엇이 결정적이었는지에 대한 합의가 없는 것은, 저마다 다른 것을 '결정적'으로 보기 때문이다. 기술사가에게는 N-1의 엔진 배열이, 제도사가에게는 설계국 간 조정 실패가, 정치사가에게는 1964년까지 내려지지 않은 공식 결정이 각각 핵심 변수로 보인다. 이 평행선은 우주 경쟁이 체제 대결의 대리전이었던 만큼, 그 평가 또한 연구자의 입장에서 완전히 자유로울 수 없다는 현실을 반영한다.
결과
가가린은 식민 지배에서 갓 벗어난 나라들을 포함해 전 세계가 환영한 상징이 됐고, 소련의 성취는 각국의 과학 교육과 우주 개발을 자극했다. R-7 계열 발사체와 보스토크에서 이어진 소유스는 오늘날까지 사람을 궤도로 실어 나른다. 총설계사 코롤료프의 이름은 보안을 이유로 생전에 공개되지 않았고, 1966년 그가 죽은 뒤에야 나라는 우주 계획을 이끈 사람이 누구였는지 알게 됐다.
연표
- 1903치올콥스키, 우주 비행의 방정식을 내놓다
칼루가의 독학 교사 콘스탄틴 치올콥스키가 「반작용 장치에 의한 우주 공간의 탐구」에서 로켓 방정식과 액체 연료, 다단 로켓의 원리를 제시했다. 혁명 뒤 소비에트 정부는 무명이던 그의 연구를 지원했고, 그의 이론은 한 세대의 기술자들에게 우주 비행을 실현 가능한 과제로 만들었다.
- 1938–1944코롤료프의 체포와 복귀
대숙청기인 1938년, 로켓 연구자 세르게이 코롤료프는 근거 없는 혐의로 체포되어 콜리마 금광을 거쳐 수감 설계국(샤라시카)에서 일했다. 1944년 석방된 그는 로켓 개발의 중심으로 복귀했고, 부당했던 유죄 판결은 1957년 완전 복권으로 바로잡혔다.
- 1946.08코롤료프, 장거리 로켓 총설계사가 되다
전후 소련은 로켓 개발을 국가 최우선 과제로 삼아 모스크바 근교의 NII-88 연구소에 인력과 자원을 집중했고, 코롤료프가 장거리 탄도로켓 총설계사로 임명됐다. 그의 설계국은 1956년 독립해 OKB-1이 됐다.
- 1957.08.21R-7, 세계 최초의 대륙간탄도로켓
바이코누르에서 발사된 R-7이 처음으로 완전한 비행에 성공했다. 군사적 필요에서 태어난 이 로켓은 곧바로 우주 발사체로 쓰일 만큼 강력했고, 그 개량형은 오늘날까지 사람과 위성을 궤도로 실어 나른다.
- 1957.10.04스푸트니크 1호, 우주 시대의 개막
인류 최초의 인공위성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지구 어디서나 아마추어 수신기로 들을 수 있던 그 신호음은, 40년 전까지 말과 쟁기로 밭을 갈던 나라에서 무상 기술교육과 계획경제가 길러 낸 과학 역량의 선언이었다.
- 1957.11.03스푸트니크 2호와 라이카
모스크바의 떠돌이 개 라이카를 태운 스푸트니크 2호가 생명체의 궤도 비행을 처음으로 시험했다. 귀환 수단은 없었고, 라이카가 발사 몇 시간 뒤 과열로 죽었다는 사실은 2002년에야 공개됐다. 이 비행의 생체 데이터는 유인 비행 준비의 출발점이 됐다.
- 1959루나 계획, 달에 닿다
루나 1호는 달을 스쳐 지나 태양 궤도에 진입한 최초의 인공 물체가 됐고, 루나 2호는 인류가 만든 물체로는 처음으로 달 표면에 도달했다. 루나 3호는 인류가 한 번도 본 적 없던 달의 뒷면을 촬영해 지구로 전송했다.
- 1961.04.12보스토크 1호, 가가린
유리 가가린이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한 바퀴 돌아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됐다. 스몰렌스크 농촌의 노동자 가정에서 태어나 직업기술학교와 무상 교육을 거쳐 조종사가 된 그의 이력은 체제가 내세운 약속 그 자체였다. 발사 순간 그가 외친 말은 '포예할리!(갑시다!)'였다.
- 1961.08.06티토프, 하루 동안의 궤도 비행
게르만 티토프가 보스토크 2호로 지구를 17바퀴 도는 25시간의 비행을 수행해 인간이 장시간 우주에 머물 수 있음을 입증했다. 당시 25세였던 그는 지금까지도 최연소 우주 비행 기록을 갖고 있다.
- 1963.06.16테레시코바, 우주로 간 최초의 여성
방직공장 노동자이자 아마추어 낙하산 선수 출신의 발렌티나 테레시코바가 보스토크 6호로 지구를 48바퀴 돌았다. 미국이 첫 여성 우주인을 보낸 것은 그로부터 20년 뒤의 일이었다.
- 1965.03.18레오노프, 최초의 우주 유영
알렉세이 레오노프가 보스호트 2호에서 12분간 인류 최초의 우주 유영을 수행했다. 팽창한 우주복 탓에 귀환이 위태로웠던 순간과 예정 지점을 벗어난 착륙까지, 이 비행은 초기 우주 개발의 대담함과 위험을 함께 보여 주었다.
관련 인물 55명
지도부15
OKB-1을 이끌며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를 설계·지휘했고, 1938년의 부당한 체포와 수감을 딛고 우주 계획의 중심이 됐다.
수석 이론가므스티슬라프 켈디시1911–1978수학자로서 궤도 계산과 우주 계획 수립을 이끌어 익명 시절 언론에서 우주비행의 수석 이론가로 불렸다.
정치적 후원자니키타 흐루쇼프1894–1971당 제1서기로서 우주 계획에 최우선의 자원과 정치적 지원을 부여하고 그 성취를 사회주의의 성취로 세계에 내세웠다.
이론적 창시자콘스탄틴 치올콥스키1857–19351903년에 발표한 로켓 방정식과 다단계 로켓·궤도 정거장·우주 식민지 구상은 소련 우주 계획 전체의 지적 토대가 되었다. 그가 죽은 지 22년 후 스푸트니크 1호가 발사되었고, 코롤료프는 치올콥스키의 저작을 직접 연구하며 OKB-1의 설계를 이끌었다.
R-7 시험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바실리 랴비코프1907–19741957년 8월 30일, 랴비코프는 R-7 시험발사 국가위원회 위원장으로서 코롤료프가 달 궤도 계산 자료를 발표한 회의를 주재했다. 이 자리에서 위성 발사용 3단 R-7 로켓 개발이 결정되었고, 두 달 뒤 스푸트니크 1호가 궤도에 올랐다.
우주비행사 훈련 책임자니콜라이 카마닌1908–19821960년부터 1971년까지 제1세대 우주비행사들을 모집·훈련시켰으며, 보스토크 1호 탑승자로 가가린을 추천한 심사위원장이었다. 소련 공군의 유인우주비행 군사총괄로서 코롤료프 사후 수동조종권을 둘러싸고 미신과 대립했다.
전략로켓군 초대 총사령관 · R-7의 군사적 발주자미트로판 네델린1902–19601955년부터 국방차관으로서 특수무장·로켓기술을 총괄하며 코롤료프에게 대륙간탄도미사일 R-7 개발을 군사적으로 발주했고, 1959년 신설된 전략로켓군(RVSN)의 초대 총사령관으로서 R-7의 전력화를 주도했다. 이 로켓은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운반체가 되어 소련이 초기 우주 경쟁에서 앞서는 발판이 되었다.
가가린 비행 국가위원회 위원장콘스탄틴 루드네프1911–1980국가국방기술위원회(GKOT) 의장으로서 1961년 4월 12일 유리 가가린의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승인한 국가위원회를 주재했으며, 이 공로로 1961년 6월 17일 비공개 포고령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루나 9호·루노호트 수석설계자게오르기 바바킨1914–1971발사 국가위원회 의장게오르기 튤린1914–1990위성통신·항법 수석설계자미하일 레셰트뇨프1924–1996엔진 총설계자니콜라이 쿠즈네초프 (엔진 설계자)1911–1995유도·항법 수석설계자니콜라이 필류긴1908–1982로켓산업 장관표트르 고레미킨1902–1976자이로스코프 수석설계자빅토르 쿠즈네초프1913–1991참여35
1961년 4월 12일 보스토크 1호로 지구를 돌아 인류 최초의 우주인이 됐고, 식민지에서 갓 독립한 나라들을 포함한 전 세계의 상징이 됐다.
우주 개발 관리자케림 케리모프1917–2003국방부와 우주산업 부처에서 우주 계획의 관리와 감독을 맡았고, 뒤에 유인 비행 국가위원회 위원장이 됐다.
방위산업 총괄드미트리 우스티노프1908–1984군수산업을 총괄하는 지도자로서 로켓·우주 개발에 자원을 배정하고 설계국들 사이의 조율을 맡았다.
우주산업 장관세르게이 아파나시예프1918–20011965년 신설된 일반기계제작부의 초대 장관으로 로켓·우주 산업 전체를 통합 관리했다.
당 감독자레오니트 브레즈네프1906–19821950년대 후반 당 중앙위원회 서기로 방위·우주 산업을 감독하며 초기 발사들을 지원했다.
주엔진 설계자발렌틴 글루시코1908–1989OKB-456 수석설계자로서 R-7 로켓의 RD-107/108 엔진을 개발해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1호(가가린)의 발사를 가능하게 했다. 그의 엔진은 이후 소련 우주발사의 표준이 됐다.
제1부수석설계자바실리 미신1917–2001OKB-1 제1부수석설계자로서 코롤료프의 가장 가까운 기술적 협력자였으며, R-7, 스푸트니크, 보스토크 등 초기 우주 계획의 모든 주요 프로젝트에 깊이 관여했다. R-5 개발 공로로 1956년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발사대 수석설계자블라디미르 바르민1909–1993GSKB 스페츠마시 수석설계자이자 코롤료프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서 R-7 발사대를 설계해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1호(가가린) 발사의 지상 기반이 되었다. 이후 프로톤, 에네르기야-부란 발사대와 달·금성 토양채취 장치까지 소련 우주 계획의 지상 인프라 전체를 책임졌다.
전략로켓 설계자미하일 얀겔1911–1971저장성 추진제 로켓으로 전략로켓군의 척추를 만든 설계자였다.
경쟁 설계국의 설계자블라디미르 첼로메이1914–1984흐루쇼프의 후원 아래 독자적 미사일·우주 설계국을 이끈 설계자였다.
첫 여성 우주인, 보스토크 6호 비행발렌티나 테레슈코바1937–코롤료프의 대리인, 스푸트니크 제어 시스템 설계보리스 체르토크1912–2011무선유도·원격측정 수석설계자미하일 랴잔스키1909–1987NII-885 수석설계자이자 코롤료프 '6인 수석설계자회의' 일원으로서 스푸트니크 1호의 무선송신기, 보스토크·소유스·달·금성·화성 탐사선의 무선유도·원격측정·추적 시스템을 설계했다. 1957년 2월 15일 코롤료프와 PS 위성 무선송신기 사양에 관한 합의서에 서명했다.
패킷 로켓 이론가 · 제9설계국장미하일 티혼라보프1900–19741948년 패킷 로켓으로 궤도 도달이 가능함을 수학적으로 입증했고, 1956년 OKB-1 제9설계국장으로서 스푸트니크·보스토크·루나·행성 탐사선 설계를 총괄했다. 1957년 스푸트니크 1호 성공으로 레닌상을, 1961년 가가린 비행으로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전자 시스템 공급자발레리 칼미코프1908–1974라디오공업 장관으로서 보스토크 1호의 통신·유도·원격측정 장비를 총괄했으며, 가가린 비행의 전자 시스템 공로로 1961년 6월 17일 비공개 포고령에 의해 사회주의노동영웅을 받았다.
상단 엔진 수석설계자세묜 코스베르크1903–1965OKB-154(현 KБХА) 수석설계자로서 루나 1·2·3호의 탈출속도를 실현한 RD-0105와 가가린의 보스토크를 궤도에 올린 RD-0109를 각각 9개월 만에 개발했다. 코롤료프와 1958년 2월 첫 만남을 가진 뒤 그의 설계국은 R-7·소유즈·프로톤 계열 상단 엔진의 독점 공급처가 되었다.
당 감독자이반 세르빈1910–1981CPSU 중앙위 방위산업부장(1958~1981)으로서 우주 계획의 당적 감독을 관장했고, 군수공업위원회(VPK)와 국가부처간위원회 위원으로서 유인 우주비행·달 탐사·행성 탐사선 개발의 조정과 자원 배분을 통제했다.
R-7 로켓 양산 책임자빅토르 리트비노프1910–1983쿠이비셰프 제1항공공장(현 프로그레스 로켓우주센터) 공장장으로서 R-7 로켓의 연속 생산을 조직했다. 이 로켓은 스푸트니크 1호와 유리 가가린의 보스토크 1호를 궤도에 올렸다. 이 공로로 1960년 두 번째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고, 1965년 로켓·우주 산업을 총괄하는 일반기계제작부 차관이 되었다.
엔진 설계자알렉세이 이사예프1908–1971우주비행사알렉세이 레오노프1934–2019제어 시스템 개발자보리스 라우셴바흐1915–2001우주비행사게르만 티토프1935–2000보스호트 2호 사령관파벨 벨랴예프1925–1970유도체계 엔지니어세르게이 흐루쇼프1935–2020우주비행사블라디미르 코마로프 (우주비행사)1927–1967가가린의 두 번째 예비 우주비행사그리고리 넬류보프1934–1966그는 선발대 6인 중 세 번째 순위로, 1961년 4월 국가위원회 결정에 따라 가가린-티토프-넬류보프 순으로 최종 순위가 정해졌으며, 보스토크 1호의 백업의 백업 역할을 맡았다.
첫 동시 유인 비행의 보스토크 4호 조종사파벨 포포비치1930–2009니콜라예프의 보스토크 3호 발사 하루 뒤에 보스토크 4호를 조종했으며, 두 우주선은 6.5 km까지 접근했다.
보스호트 2호의 볼가 에어록 수석 설계자보리스 미하일로프1964년 중반 9개월 만에 볼가 팽창식 에어록을 설계, 제작, 시험하여 레오노프의 우주유영을 기술적으로 가능하게 했다.
R-7의 개념적 선조 설계자헬무트 그뢰트루프1916–19811946년 소련으로 강제 이주된 독일 로켓 전문가로서, 고로도믈랴 섬에서 R-7의 선행 개념인 G-4/G-5를 설계했고, 이후 코롤료프가 독일식 공기역학 설계를 채택하는 데 영향을 미쳤다.
보스토크 5호 파일럿이자 단독 비행 지구력 기록 보유자이리나 솔로비요바1937–테레슈코바 이틀 전 발사되어 5일간 단독 비행하며 당시 지구력 기록을 세웠다. 원래 여성 두 명이 발사될 계획이었으나 한 명의 여성과 비콥스키로 구성이 변경되었다.
보스토크 3호 조종사안드리얀 니콜라예프1929–20041962년 8월 보스토크 3호로 64바퀴, 약 4일간의 첫 다중일수 우주비행을 완수하여 3일 이상의 체공 가능성을 입증했다.
보스토크 5호 조종사발레리 비콥스키1934–2019여성 우주인 2명을 발사한다는 원래 계획이 변경되면서 테레시코바보다 이틀 먼저 발사되어 5일간의 단독 비행 내구 기록을 세웠다.
R-7 설계를 주도한 설계부문 책임자세르게이 크류코프1918–2005R-7의 전반적 형상과 패킷 배치를 결정한 핵심 엔지니어였다.
RNII 초대 소장이반 클레이묘노프1899–19381933년부터 1937년까지 RNII를 이끌었으며, 1938년 체포되어 처형되었다.
스푸트니크 1호 조립과 시험 책임자올레그 이바놉스키1922–2014호먀코프의 부관으로서 PS-1 생산을 서두르고, 코롤료프의 박물관 일화를 증언했다.
관련 용어
출처: K. E. Tsiolkovsky, Issledovanie mirovykh prostranstv reaktivnymi priborami (The Exploration of Outer Space by Means of Reaction Devices, 1903)Asif A. Siddiqi, Challenge to Apollo: The Soviet Union and the Space Race, 1945–1974 (NASA SP-2000-4408, 2000)Boris Chertok, Rockets and People, 4 vols. (NASA SP-4110, 2005–2011)James Harford, Korolev: How One Man Masterminded the Soviet Drive to Beat America to the Moon (1997)Andrew L. Jenks, The Cosmonaut Who Couldn't Stop Smiling: The Life and Legend of Yuri Gagarin (2012)Slava Gerovitch, Soviet Space Mythologies: Public Images, Private Memories, and the Making of a Cultural Identity (2015)자료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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