갈림길마다 방향을 바꾼 조타수
1917년 4월 3일 밤, 핀란드역. 망명에서 돌아온 레닌은 장갑차 위에 올라 「사랑하는 동지들, 군인·수병·노동자들이여!」라고 외쳤다. 사회주의 혁명 만세로 끝맺은 그 순간, 당의 방향은 완전히 바뀌었다.
1917년 4월에는 모두가 미쳤다던 테제로 당을 뒤집었고, 10월에는 봉기를 밀어붙였으며, 1918년 브레스트에서는 회의실에서 가장 신중한 후퇴파였고, 1921년에는 네프로 다시 후퇴했다. 확신과 유연함의 그 결합은 복제되지 못했다. 1922년부터 뇌졸중이 그를 삼켰고, 마지막 구술은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옮기라는 경고였다. 경고는 봉인되었다.
경력 연표
- 1895–1900체포, 시베리아 유형
- 1900–05이스크라, 『무엇을 할 것인가』, 볼셰비키 분파 형성
- 1902《무엇을 할 것인가?》 출간
- 1909《유물론과 경험비판론》 출간
- 1914–17치머발트 좌파, 「제국주의 전쟁을 내전으로」
- 1916《제국주의, 자본주의의 최고 단계》 집필·출간
- 1917.4귀국, 4월 테제
- 1917.10봉기 관철, 인민위원회의 의장
- 1918–21브레스트 강화, 내전, 전시공산주의
- 1918《국가와 혁명》 출간(1917년 집필)
- 1921네프로의 후퇴
- 1922–24뇌졸중, 「대회에 보내는 편지」 구술
관련 역사 사건
- 1905–19071905년 혁명볼셰비키 지도자망명지에서 무장봉기를 주장하다 11월에 귀국해 소비에트를 새 혁명 권력의 맹아로 파악했으며, 훗날 1905년을 1917년의 「총연습」이라 불렀다.
- 1917.02–072월 혁명4월 테제의 저자4월에 귀환해 임시정부 불신임과 모든 권력의 소비에트 이양을 당의 노선으로 세웠고, 7월 사태 뒤 라즐리프로 피신했다.
- 1917.10–1918.0110월 혁명봉기의 설계자·정부 수반은신처에서 봉기를 촉구하는 서한으로 당을 움직였고, 대회에서 평화·토지 법령을 보고했으며 소브나르콤 의장이 되었다.
- 1918–1922내전과 열강의 개입전쟁 지도부브레스트 강화를 관철해 혁명의 생존을 확보하고, 노농국방회의를 통해 전쟁 수행 전체를 총괄했다.
- 1919–1921소비에트-폴란드 전쟁진격 계속을 결정한 지도자 · 뒤에 「총검에 의한 정찰」로 자평
- 1922.12소련의 결성연방 원칙의 설계자자치화안을 물리치고 대등한 공화국들의 연방을 관철했으며, 마지막 구술에서 대러시아 국수주의와 싸웠다.
- 1921–1928신경제정책(네프)네프의 설계자제10차 당대회에서 현물세로의 전환을 관철했고, 만년의 저작에서 협동조합을 통한 사회주의의 길을 제시했다.
- 1923–1927레닌 사후 권력투쟁과 좌익 반대파병상에서 후계 구도를 구술한 당의 창시자2차 뇌졸중(1922.12)부터 3차 뇌졸중(1923.3)까지 「당대회에 보내는 편지」, 「민족문제에 관하여」, 최후 논문 5편을 구술. 이후 권력투쟁의 중심 텍스트가 되었다.
「대회에 보내는 편지」 — 죽어가며 남긴 경고
1922년 12월부터 1923년 1월까지, 뇌졸중으로 몸이 마비되고 말을 잃어가면서도 레닌은 비서에게 짧은 구술을 이어갔다. 나중에 「레닌의 유언」으로 알려질 이 메모들의 핵심은 스탈린을 서기장에서 옮기라는 것이었다.
「스탈린 동지는 서기장이 된 이후 무한한 권력을 손에 집중시켰다. 그가 언제나 충분히 신중하게 이 권력을 사용할 수 있을지 확신할 수 없다.」 그리고 1923년 1월 4일, 마지막 추신: 「스탈린은 너무 무례하다. 이 결함은 서기장 자리에서는 용납될 수 없다. 따라서 동지들에게 스탈린을 이 자리에서 옮길 방법을 강구할 것을 제안한다.」
그러나 이 편지는 제13차 당대회에서 카메네프와 지노비예프의 주도로 봉인되었다. 대의원들은 일부만 읽었고, 공개되지 않았다. 스탈린은 남았다. 레닌이 가장 두려워한 일(스탈린이 무한한 권력을 휘두르는 일)이 그가 죽은 지 5년 만에 현실이 되었다.
『무엇을 할 것인가』 — 전위당의 청사진
1901년 말부터 1902년 초까지, 레닌은 뮌헨 망명 중에 『무엇을 할 것인가? 우리 운동의 절박한 문제들』을 집필했다. 제목은 니콜라이 체르니솁스키의 1863년 소설에서 따온 것으로, 레닌은 그 소설이 자신을 포함한 수백 명을 혁명가로 바꾸었다고 말했다. 이 팸플릿은 당시 러시아 사회민주당 내에서 세력을 얻고 있던 '경제주의'(노동자 투쟁을 임금·노동시간 등 경제적 요구에 국한하고 정치투쟁을 부차적인 것으로 여기는 조류)에 대한 전면적 공격이었다.
레닌의 핵심 논지는 단호했다. 노동계급은 자생적으로는 '노동조합적 의식'밖에 획득할 수 없으며, 사회주의적 계급의식은 '외부로부터' 주입되어야 한다는 것이다. "모든 나라의 역사는 노동계급이 오로지 자기 자신의 힘으로는 노동조합 의식밖에 발전시킬 수 없음을 보여준다." 따라서 혁명적 사회민주주의 의식을 노동자들에게 전달할 전업혁명가들로 구성된 전위당이 필요했다. 레닌은 중앙집권적인 전국신문을 '집단적 선동가, 집단적 선전가, 집단적 조직자'로 삼아 분산된 서클들을 하나의 당으로 통합할 계획을 제시했다.
『무엇을 할 것인가』는 즉각적인 효과를 발휘했다. 이 팸플릿이 제시한 당 조직 원칙은 1903년 러시아사회민주노동당 제2차 대회에서 볼셰비키와 멘셰비키의 분열을 촉발한 핵심 쟁점이 되었다. "우리에게 혁명가의 조직을 다오 — 그러면 우리가 러시아를 뒤집어 놓을 것이다!"라는 마지막 구절은 전위당 개념의 상징이 되었다. 후대의 논쟁(레닌이 노동자 계급을 불신했는지, 아니면 정통 마르크스주의의 연장선에 있었는지)은 20세기 공산주의 운동 전체를 관통하는 질문으로 남았다.
네프, 패배를 인정한 전략적 후퇴
1921년 봄, 내전과 전시공산주의가 남긴 생산 붕괴와 농촌의 불만이 소비에트 국가를 위기로 몰았다. 레닌은 제10차 당대회에서 잉여곡물 징발을 현물세로 바꾸고 농민이 남은 생산물을 시장에서 처분하도록 허용하는 신경제정책(네프)을 제안했다. 이는 소규모 사기업과 사적 거래를 제한적으로 되살리는 대신 대공업·은행·대외무역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는 혼합경제였다.
레닌은 네프를 사회주의로 가는 직선적 전환이 아니라 국가가 경제의 ‘지휘고지’를 장악한 채 시장을 이용하는 장기적 이행으로 설명했다. 그는 1921년 10월 보고에서 전시의 직접적인 공산주의 생산·분배 구상이 잘못되었으며 네프는 경제 전선에서 당한 심각한 패배 뒤의 ‘전략적 후퇴’라고 명시했다. 따라서 네프는 원칙의 포기가 아니라 농민 다수 사회에서 생산력을 회복하고 도시와 농촌의 결합을 다시 세우려는 조건부 전술이었다.
정책은 생산과 화폐를 회복시켰지만, 네프맨과 부농의 성장, 실업, 당 내부의 계급적 긴장을 함께 낳았다. 레닌이 병으로 정치에서 물러난 뒤에도 이 긴장은 남았고, 1928년 이후 스탈린의 급속한 공업화와 집단화가 네프를 폐기하면서 다른 경로의 사회주의 건설이 시작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