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재판에서 진술은 몇 마디에 그쳤고, 그중 하나는 "나를 망친 것은 스탈린에 대한 나의 믿음이었다"였다고 전해진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공화국을 통치했다. 체카·GPU·OGPU 의장과 내무인민위원을 지낸 인물로, 대숙청기에 공화국 당·국가 간부와 지식인에 대한 대량 탄압을 주도했고 베리야 실각 후 몰락해 1956년 5월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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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5월 총살 집행 (5월 26일설과 5월 7일설이 엇갈림)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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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1992년 11월 앙카라를 방문해 아느트카비르에서 아타튀르크의 묘를 참배하고 방명록에 그를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로 적었다.
1938년 6월 24일 나흐치반 칼라키에서 태어나 2000년 8월 22일 앙카라에서 사망한 아제르바이잔의 정치인. 바쿠 국립대학교에서 아랍어문헌학을 전공했고 1969년 역사학 후보 학위를 받았다. 1970년대부터 투르크주의자·반공산주의자로 알려졌고 1975년 1월 국가보안위원회에 체포되어 1976년 7월까지 카라다흐 채석장에서 노동했다. 1989년 인민전선의 창립자이자 의장으로 1990년 1월 국방위원회를 조직했고,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진 위기의 중심 인물이었다. 1992년 6월 대통령에 당선되었으나 1993년 6월 카라바흐 전선의 패배와 후세이노프의 반란 속에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승계했다. 1997년 바쿠로 돌아와 야당을 이끌었다.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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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