민족·국가적 배경

아제르바이잔

19 명

해당 인물

나리만 나자프 오글루 나리마노프

Нариман Наджаф оглы Нариманов
국가원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70–1925 ○ 심장마비

계몽 문학에서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수장으로

1906년 교사 대회에서 석유왕 타기예프가 장학금을 들먹이며 입을 막으려 하자, 나리마노프는 즉석에서 장학금을 포기하며 말했다. "비열한 금속 때문에 침묵하지 않겠다. 동지들이 차르의 압제에서 해방되려 피를 흘리는 이때에."

교사이자 의사, 작가였던 나리마노프는 바쿠에 공공 독서실을 열고 아제르바이잔 사실주의 문학의 초기 작품들을 남겼다. 1905년 훔메트에 합류해 혁명운동에 뛰어들었고, 1920년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정부를 이끈 뒤 소련 중앙집행위원회 공동의장이 되었다. 민족해방과 사회주의를 결합하려 했지만 중앙집권적 민족정책과 충돌했으며, 1925년 사망 후 크렘린 벽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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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보르찰리현 키질-아질리 마을 교사
  • 1891–1902바쿠 사립 김나지움 교사, '나리마노프 독서실' 설립·운영 (1894)
  • 1895–1899희곡 「무지」(1895), 소설 「바하두르와 소나」(1896), 비극 「나디르 샤」(1899) 발표, 고골의 「검찰관」 번역·공연 (1896)
  • 1905무슬림 사회민주주의 조직 '훔메트' 가입
  • 1908노보로시스크 대학 의학부 졸업, 의사 면허 취득
  • 1909–1914체포되어 아스트라한으로 5년 유배, 그곳에서 의사·연극인·민중대학 평의회 의장으로 활동
  • 1917바쿠 볼셰비키 위원회 위원, 신문 「훔메트」 편집자
  • 1918바쿠 인민위원회 도시경제 담당 인민위원
  • 1919러시아 SFSR 외무인민위원부 근동부장
  • 1920–1922아제르바이잔 혁명위원회 의장 겸 인민위원회의 의장, 외무인민위원 겸임 (1920–1921)
  • 1922자카프카스 SFSR 연방평의회 의장 (3월~12월), 제노바 국제회의 소비에트 대표단 참가
  • 1922–1925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연방 중앙집행위원회 의장 — 소비에트 연방의 공식 국가원수 중 1인
  • 1923–1925러시아 공산당(볼셰비키) 중앙위원회 위원 후보

브세볼로드 니콜라예비치 메르쿨로프

Всеволод Николаевич Меркулов
국가보안 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3 ✕ 처형

카틴 명령에 첫 번째로 이름을 올린 NKGB 수장, 필명으로 희곡을 쓴 사람

베리야 체포 뒤 흐루쇼프에게 쓴 편지에서 그는 적었다. “어떻게 남의 저작에 자기 서명을 올릴 수 있는가. 표절도 아니고 그 이상이다.” 문학적 명예에 선을 그은 그 손은 폴란드인 이만여 명의 사형 명단에는 선을 긋지 않았다.

베리야 측근 가운데 가장 교육받은 사람이자 십 년간 그의 실무를 대신한 손이었다. 1921년 그루지야 체카에서 베리야를 만났고, 1938년 12월 NKVD의 이인자가 되었다. 1940년 3월 정치국이 폴란드인 포로 21,857명을 심리도 기소도 없이 처결할 트로이카를 지정했을 때 결정문 첫머리에 적힌 이름이 그였다. 트로이카는 피고를 부르지도, 기소장을 만들지도 않고 명단만 처리했다. 1943년 독일이 카틴 무덤을 발견하자 이를 독일 소행으로 돌릴 부르덴코 위원회의 예비조사를 지휘했다. 집행한 자가 부인까지 조직한 셈이다. 두 차례 국가보안인민위원을 지냈고, 브세볼로드 로크라는 필명으로 희곡을 썼다. 1953년 12월 베리야와 함께 총살됐고 복권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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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1–1931그루지야 체카·GPU 경제부와 정보국
  • 1931–1934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제1서기(베리야)의 보좌관
  • 1934–1937자캅카스 지방위원회 소비에트무역부장, 이어 특별부장
  • 1937–1938그루지야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수송부장
  • 1938NKVD 국가보안총국 부국장
  • 1938–1941내무 제1부인민위원 겸 국가보안총국장
  • 1941국가보안인민위원(NKGB 1차)
  • 1941–1943내무 제1부인민위원
  • 1943–1946국가보안인민위원, 1946년부터 국가보안장관(MGB)
  • 1947–1950대외 소비에트재산총국장
  • 1950–1953국가통제장관
  • 1953체포, 재판과 처형

미르 자파르 아바소비치 바기로프

Мир Аббасович Джафар Багиров
정부 수반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5–1956 ✕ 처형

아제르바이잔의 20년 통치자, 스탈린의 캅카스 대리인

재판에서 사형 선고를 받고 한 말: "내가 국민 앞에 지은 죄는 너무 커서, 총살도 교수형도 부족하다. 나는 사지를 찢겨 조각조각 갈기갈기 찢겨야 한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제1서기(1933~1953)로 20년간 스탈린 시대 공화국을 통치했다. 대숙청을 지휘하는 한편 공업화와 바쿠 개발을 주도했으며, 베리야 실각 직후 몰락해 1956년 총살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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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7볼셰비키당 입당 (1917년 3월 또는 1918년 — 기록 충돌), 쿠바 혁명위원회 부의장
  • 1918–1920러시아 내전: 연대장, 아제르바이잔 사단 군사위원, 혁명군사재판소장
  • 1921–1927아제르바이잔 SSR 체카·GPU·OGPU 의장, 내무인민위원
  • 1929–1930아제르바이잔 SSR GPU·OGPU 의장 (재임)
  • 1932–1933아제르바이잔 SSR 인민위원회 의장
  • 1933–195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20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겸임 (1950년까지)
  • 1953CPSU 중앙위 상임위원 후보 (3~7월), 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의장
  • 1954–19561954년 3월 체포, 1956년 4월 사형 선고, 5월 26일 바쿠에서 총살 집행

보리스 리보비치 반니코프

Борис Львович Ваннико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제르바이잔 1897–1962 ○ 자연사

탄약과 원자력 행정을 맡은 베리야의 생산 관리자

«스탈린 동지, 당신은 적들에게 갇히셨지만, 나는 우리 편에게 갇혔습니다.»

바쿠 유전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난 유대인 기술자 출신으로, 툴라 병기공장 책임자를 거쳐 1939년 무기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쟁 직전 체포·고문당했으나 독일 침공 후 스탈린이 소환해 탄약인민위원으로 임명했고, 종전까지 포탄 생산을 4배로 끌어올렸다. 전후에는 쿠르차토프와 함께 제1총국을 이끌며 소련 원자폭탄 계획의 행정·공업 기반을 총괄했고, 수소폭탄 개발까지 관장했다. 세 차례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은 몇 안 되는 인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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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0s방위산업과 병기 생산 행정에서 성장
  • 1941체포 직후 전쟁 발발로 석방되어 탄약 생산에 복귀
  • 1941–1945탄약인민위원, 포탄·탄약 대량생산 체계 지휘
  • 1945–1953제1총국에서 원자폭탄 계획 행정 담당
  • 1953 이후베리야 몰락 뒤에도 원자력 생산 행정 경험으로 생존

올가 그리고리예브나 샤투놉스카야

Ольга Григорьевна Шатуновская
작가·예술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1–1990 ○ 자연사

스탈린의 범죄를 끝까지 추적한 흐루쇼프의 수석 조사관

「니키타 세르게예비치, 당신은 제가 인민의 적이 아님을 알고 계십니다.」 — 유형지에서 흐루쇼프에게 보낸 단 한 줄의 편지, 1954년

1916년 15세로 입당한 구볼셰비키. 흐루쇼프 시기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으로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학살이 스탈린의 조작임을 64권으로 입증했다. 콜리마 8년을 견디고 복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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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15세로 RSDLP(b) 입당
  • 1918바쿠 코뮌에서 샤우먄 비서; 터키군에 사형 선고, 극적 사면
  • 1918–20자캅카스 지하운동, 레닌에게 밀서 전달
  • 1920–37바쿠·브랸스크·모스크바 당 간부, 모스크바 시당 조직부장, 중앙통제위원회 위원
  • 1937–46체포, 8년형 — 콜리마 수용소
  • 1949–54재체포, 무기한 유형 — 크라스노야르스크
  • 1956–62KPK 위원, 시베르니크 위원회 수석 조사관 — 키로프 암살·모스크바 재판·카틴 조작 규명
  • 1962스탈린의 오흐란카 협력 의혹 공개 요구, 흐루쇼프의 거부로 은퇴

이반 표도로비치 테보샨

Иван Фёдорович Тевосян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2–1958 ○ 자연사

스탈린 공업화의 금속 관료

1930년, 28세 나이에 철금속 부문 책임자로 임명되자 오르조니키제에게 '공장에서 일하게 해달라'고 요청했다. 책상보다 용광로를 택한 이 결정이 그를 소련 최고의 금속 전문가로 만들었다.

슈샤 출신 아르메니아인으로, 광산아카데미 졸업 후 엘렉트로스탈 공장에서 강철 생산을 익혔다. 특수강 트레스트 관리자로 두각을 드러내 방위공업·조선 인민위원부를 거쳐 1940년 철금속 인민위원이 되었다. 전시에는 남부·중부 금속공장을 우랄 너머로 대피시키고 탱크·항공기·탄약용 특수강 생산을 지휘해 1943년 사회주의노동영웅 칭호를 받았다. 전후 부수상 겸 철금속장관으로 재건을 이끌며 소련 원자력 계획의 우라늄 공급도 관리했다. 1938년 독일 연수 이력으로 '독일 스파이' 의심을 받았으나 스탈린의 개인적 개입으로 살아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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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s–1930s금속공업과 중공업 행정에서 성장
  • 1939–1940조선공업 인민위원으로 군수 생산 기반 관리
  • 1940–1953철금속·조선·수송기계 분야를 오가며 전시 생산 관리
  • 1949–1956철금속공업 장관, 전후 중공업 재건에 관여
  • 1956–1958주일 대사로 이동, 생산 관료에서 외교직으로 전환

레프 다비도비치 란다우

Лев Давидович Ландау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제르바이잔 1908–1968 ○ 자연사

'란다우 학교'를 세우고 양자유체 역학을 개척한 소련 이론물리학의 거장

그는 물리학자를 성취도에 따라 로그 등급으로 분류하곤 했다. 1급은 보어, 하이젠베르크, 디랙. 아인슈타인은 0.5급이었다. 자신은 한때 2.5급에 두었다가, 나중에 1.5급으로 올렸다.

소련 이론물리학자. 엄격한 이론최소과목으로 제자를 선발하는 '란다우 학교'를 세웠고, 초유동체·페르미 액체 이론으로 응집물질물리학을 개척했다. 리프시츠와의 《이론물리학 강좌》는 세계적 교과서로 자리잡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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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2–1937우크라이나 물리기술연구소(UFTI) 이론부장 · 하르코프 대학 교수
  • 1937–1968모스크바 물리문제연구소(IFPAN) 이론부장
  • 1943–1947모스크바 국립대학교 저온물리학 교수
  • 1945–1953소련 원자력 프로젝트 참여 · 스탈린상 3회 수상
  • 1946소련 과학아카데미 정회원(академик) 선출
  • 1962노벨 물리학상 수상 '응집물질 이론, 특히 액체 헬륨의 선구적 연구'

니콜라이 콘스탄티노비치 바이바코프

Николай Константинович Байбаков
중앙계획 기관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1–2008 ○ 자연사

장기 정체기의 고스플란 의장

함께 일했던 이들이 배신하고 나를 '인민의 적'으로 몰아가려 했다. 그 더러운 수사를 피해 붉은 군대로 도망쳤다.

바쿠 유전 지대에서 성장한 석유 기술자로, 30대에 소련 석유산업을 이끌며 '바이바코프 공법'으로 불리는 고압 시멘트 주입 기술을 개발했다. 전시에는 코카서스 유전 방어의 극적인 임무를 수행했고, 전후에는 로마슈키노 유전 개발을 주도하며 소련의 산유 대국화에 기여했다. 1965년부터 20년간 고스플란 의장으로 코시긴 개혁 이후의 중앙계획경제를 상징했으며, 브레즈네프 시대 계획 관료제의 핵심 축으로서 고르바초프 초기까지 버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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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s석유산업 인민위원/장관으로 전시 에너지 공급을 관리
  • 1942독일 진격기 코카서스 유전 파괴 대비와 석유 생산 이전 임무 수행
  • 1955–1957고스플란 의장으로 처음 중앙계획을 지휘
  • 1965–1985국가계획위원회 의장, 코시긴 개혁 이후 장기 계획경제 운영
  • 1985 이후고르바초프 초기 교체, 장기 정체기 계획관료의 상징으로 남음

사비트 아타예비치 오루제프

Сабит Атаевич Оруджев
중공업 · 군수공업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2–1981 ○ 자연사

바쿠 유전에서 시작해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3년, 우렌고이 예정지의 맨땅에 내린 오루제프가 말했다. "나는 표트르 대제가 아니지만 그의 말을 빌리겠소. 여기에 도시가 세워질 것이오." 이 한마디에서 오늘날 '러시아의 가스 수도' 노비 우렌고이가 시작되었다.

바쿠 노동자 가정 출신으로 소련 가스 산업을 세계 최대로 키운 아제르바이잔인 공학자. 1972년 가스공업부 장관에 취임해 서시베리아 우렌고이·메드베지예 초거대 가스전을 개발하고 통합가스공급시스템(ЕСГ)을 구축했으며, 이 시스템은 오늘날까지 러시아 가스 산업의 골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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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6–1939오르조니키제네프티 트러스트 기계공, 작업반장
  • 1939–1946아즈네프티 계열 트러스트 관리자·트러스트장
  • 1946–1949크라스노다르네프티 주임기사, 아즈네프테라즈베드카 청장
  • 1949–1955소련 석유공업부 해양·서부지역 총국장
  • 1955–1957소련 석유공업부 차관
  • 1957–1959아제르바이잔 SSR 인민경제회의 의장·각료회의 부의장
  • 1965–1972소련 석유채취공업부 제1차관
  • 1972–1981소련 가스공업부 장관

케림 알리예비치 케리모프

Керим Алиевич Керимов
과학 · 원자력 · 우주 개발 소련 아제르바이잔 1917–2003 ○ 자연사

오랫동안 이름이 숨겨진 유인우주비행 관리자

1961년 4월 12일, 가가린은 인류 최초 우주비행을 앞두고 편안히 잠들었다. 침대 센서로 이를 확인하던 케리모프는, 로켓에 오를 남자보다 더 긴장된 밤을 보냈다.

제2차 세계대전 중 카추샤 로켓을 검수하고 독일에서 V-2 로켓 정보를 수집하며 경력을 시작했다. 스푸트니크 1호와 보스토크 계획의 국가위원회 위원을 거쳐, 1966년부터 1991년까지 25년간 국가위원회 의장으로서 소련의 모든 유인우주선 발사를 승인했다. 살류트, 소유스-아폴로, 미르까지 소련 유인우주비행 전성기의 관문을 지킨 행정가였으나 페레스트로이카 이전까지 그의 존재는 철저히 비밀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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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6–1991국가위원회 의장 · 유인우주비행

헤이다르 아리르자 오글루 알리예프

Heydər Əlirza oğlu Əliyev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23–2003 ○ 자연사

KGB에서 크렘린까지 오른 아제르바이잔의 실용주의자

KGB 제1부의장 표도르 보브코프가 "3년 동안 무엇을 해냈습니까?"라고 묻자 알리예프는 이렇게 답했다. "제가 장담할 수 있는 것은 단 하나,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에서는 뇌물을 받지 않는다는 것입니다."

소련 국가보안기관에서 28년간 복무한 아제르바이잔인으로, KGB 의장을 거쳐 1969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브레즈네프 시기 동안 공화국 경제를 급성장시키고 포도·석유·면화 생산을 대폭 확대했으며, 1982년에는 비슬라브인으로서는 드물게 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겸 정치국 정위원에 올랐다. 1993년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대통령으로 취임하여 '세기의 계약'으로 불리는 대규모 카스피해 석유 개발 협정을 체결하고, 취약한 신생국을 안정시켜 건국의 아버지로 평가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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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4–1967아제르바이잔 SSR 국가보안위원회(KGB) 요원·간부, 방첩부장·부의장 역임
  • 1967–1969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산하 KGB 의장 (소장)
  • 1969–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6–1982CPSU 중앙위원회 정치국 후보위원 → 정위원 (1982)
  • 1982–1987소련 각료회의 제1부의장 (기계·경공업·운송·문화·교육 담당)
  • 1993–200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제3대 대통령

압두라흐만 할릴 오글루 베지로프

Əbdürrəhman Xəlil oğlu Vəzirov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0–2022 ○ 실각 · 자연사

고르바초프가 카라바흐 위기에 투입했으나 검은 1월 속에 도망친 마지막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25일 밤 베지로프가 전화를 걸어 '재앙이 다가오고 있다, 모스크바에 도움을 요청해야 한다'고 말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 회고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8~1990)로, 나고르노카라바흐 분쟁이 고조되던 시기에 고르바초프에 의해 임명되었다. 카라바흐 출신이었고 10년 이상 외교관으로 해외에 체류해 현지 정치 부패와 무관했으나, 오히려 그 공백 탓에 아제르바이잔 내 권력 집단이나 거리 정치 어느 쪽도 장악하지 못했다. 1990년 1월 바쿠에서 소련군이 민간인을 향해 발포한 검은 1월 사태 직전 상황을 완전히 상실하고 모스크바로 떠났으며, 이후 중앙정부와 헤이다르 알리예프 양쪽으로부터 비난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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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4–1956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제2서기
  • 1956–1959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59–1970전연방 콤소몰 중앙위원회 서기
  • 1970–1976키로바바트 시당위 제1서기, 이후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공업부장
  • 1976–1979주캘커타 소련 총영사
  • 1979–1985주네팔 소련 대사
  • 1985–1988주파키스탄 소련 대사, 아프간 철수 협상 참여
  • 1988–1990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캄란 마메드 오글루 바기로프

Kamran Məmməd oğlu Bağırov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아제르바이잔 1933–2000 ○ 사임 · 자연사

알리예프의 후계자였으나 위기 앞에서 무너진 아제르바이잔 당 서기

나고르노카라바흐와 숨가이트에서 일어난 사건들과 관련하여, 나는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는 것을 인정합니다.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1982~1988)로,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모스크바로 승진한 후 그 후임으로 임명되었다. 개인적으로 청렴했으나 정치적으로 무기력한 지도자였으며, 1988년 2월 나고르노카라바흐 자치주 소비에트의 아르메니아 이관 결의와 숨가이트 포그롬이 잇따르자 사태를 수습하지 못했다. 고르바초프의 불신 속에 5월 사임하면서 '도덕적으로 공화국 당 조직을 이끌 자격이 없다'고 말했고, 이후 공직에서 완전히 물러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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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9바쿠 가스 사무소 정비공
  • 1957아제르바이잔 공과대학 졸업, 조교·전임강사·건축학부 부학장
  • 1968–197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건설·공공주택부 부부장
  • 1971–1974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도시경제부장
  • 1974–1978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78–1982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서기
  • 1982–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90–1992아제르바이잔 국가산업안전·광산감독위원회 의장
민족문제 · 연방 관리 소련 아제르바이잔계 1934–1993 ○ 자연사

위기 속에서 공화국 권한을 주장한 소비에트 정치가

“공화국의 동의 없이 계엄을 선포하고 군대를 투입했다.”

엘미라 카파로바는 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공화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교육·외무 행정을 거쳐 공화국 최고소비에트의 의장이 되었다. 1990년 1월 바쿠에 계엄을 선포하고 소련군을 투입한 조치에 맞서, 자신이 모스크바에 있는 동안 결정이 내려졌다고 밝히며 공화국 주권 침해를 공개적으로 항의했다. 이 드문 제도적 반발은 소비에트 연방의 민족문제가 공화국 제도와 대중운동, 연방 권력의 충돌로 폭발한 순간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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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8아제르바이잔 국립대학교 졸업, 문헌학 연구
  • 1966–197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71바쿠 시당위원회 이념 담당 서기
  • 1980–1983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교육부 장관
  • 1983–1987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외무부 장관
  • 1987–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 최고소비에트 상임위원회 의장
  • 1990–1992아제르바이잔 최고소비에트 의장

아불파즈 가디르굴루 오글루 엘치베이

Əbülfəz Qədirqulu oğlu Elçibəy
사회주의권 개혁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38–2000 ○ 자연사

범투르크주의를 내건 아제르바이잔 최초의 민선 대통령

1992년 앙카라를 방문한 자리에서 "나는 무스타파 케말 아타튀르크의 병사입니다"라고 말했다.

아제르바이잔의 독립운동 지도자이자 소련 해체 후 첫 민선 대통령. 아랍어 문헌학자로 출발해 1970년대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1년 6개월을 복역했으며, 1989년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을 이끌며 민족주의 세력의 구심점이 되었다. 1990년 1월 13일 국방위원회를 조직해 바쿠의 반아르메니아 포그롬과 '검은 1월'로 이어지는 민족위기의 한복판에 섰고, 1992년 대통령에 당선되어 구소련 공화국 중 최초의 반공산주의 민선 지도자가 되었다. 임기 내내 나고르노카라바흐 전쟁과 경제난에 시달리다 1993년 6월 러시아가 배후에 있던 군사 쿠데타로 축출되었고, 헤이다르 알리예프가 권력을 승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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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57바쿠 국립대학교 동양학부 아랍어문학과 졸업
  • 1963–1964이집트에서 통역사로 근무
  • 1969–1974바쿠 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반소비에트 활동으로 체포(1975), 1년 6개월 복역
  • 1976–1992아제르바이잔 과학아카데미 필사본연구소 연구원
  • 1989–1992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의장
  • 1990.01국방위원회 조직, 의장 취임 (바쿠)
  • 1992–1993아제르바이잔 공화국 대통령
  • 1997–2000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당 당수 (야당)

푸아트 엔베르 오글루 무사예프

Fuad Ənvər oğlu Musayev
당 서기국 · 조직인사 소련 아제르바이잔인 1938–2017 ○ 신부전으로 사망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바쿠로 가는 버스를 막아 폭력을 숨가이트로 돌린 인물

“나는 이것이 포그롬이라는 것을 깨달았다. 이 정착지들에서 도시로 통하는 모든 도로를 봉쇄하라고 명령했다. 명령은 실행됐다. 버스들은 숨가이트로 향했다.”

소련 및 아제르바이잔의 당·국가 관료로, 건설 분야에서 경력을 쌓아 1983년 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가 되었다. 1988년 2월 아르메니아에서 쫓겨난 아제르바이잔인 난민들이 버스로 바쿠에 몰려들자 시내 진입로를 봉쇄했고, 이 조치는 바쿠의 폭력적 충돌을 막았으나 버스 행렬이 숨가이트로 방향을 돌리게 만들었다. 소련 해체 후에는 독립 아제르바이잔의 첫 축구협회 회장(1992~2003)을 지내며 아제르바이잔 축구의 UEFA·FIFA 가입을 이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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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5–1977아제르바이잔 SSR 농촌건설부 제1차관
  • 1977–1981아제르바이잔 SSR 국가계획위원회 제1부위원장
  • 1981아제르바이잔 SSR 각료회의 부의장
  • 1981–1983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건설 담당 서기
  • 1983–1988바쿠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0소련 산업안전·광산감독 국가위원회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산업 담당 서기
  • 1992–2003아제르바이잔 축구협회 연합(AFFA) 회장

아야즈 니야지 오글루 무탈리보프

Ајаз Нијази оғлу Мүтәллибов

연방 재편과 독립 사이에 선 마지막 소비에트 지도자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에서 신연방조약을 지지했다.

아야즈 무탈리보프는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의 관료에서 공화국의 마지막 공산당 지도자이자 초대 대통령으로 올라선 정치가였다. 1991년 노보오가료보 9+1 회의에서 그는 공화국의 주권을 보장하는 새로운 연방을 지지하며, 연방은 공화국을 위해 존재해야 한다는 관점을 내세웠다. 자치공화국의 지위와 권한을 둘러싼 협상에도 적극 참여했지만, 카라바흐 전쟁과 국내 권력투쟁 속에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92년 축출된 뒤 모스크바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가 2012년 귀국했고 2022년 바쿠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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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64–1977바쿠 냉장고 공장장, 바쿠 전기생활용품 생산회사 총괄
  • 1977–1979바쿠 나리마노프구 당위원회 제2서기
  • 1979–1982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지방산업장관
  • 1982–1989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국가계획위원장 겸 각료회의 부의장
  • 1989–1990아제르바이잔 소비에트공화국 각료회의 의장
  • 1990–1991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원회 제1서기, 소비에트 아제르바이잔 대통령
  • 1991–1992아제르바이잔 초대 대통령
  • 1992–2012축출 뒤 모스크바 망명, 2012년 귀국

에티바르 살리다르 오글루 마메도프

Etibar Səlidar oğlu Məmmədov
사회주의권 지도자 아제르바이잔 아제르바이잔 1955– ○ 자연사 (생존)

프리마코프에게 저항을 예고한 인민전선 부의장

폴랴니치코는 그에게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자정에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고 말했다. 마메도프는 "저항할 것"이라고 답했다.

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의 부의장으로서 민족독립운동의 선봉에 섰고, 1990년 1월 19일 예브게니 프리마코프와 빅토르 폴랴니치코를 만나 바쿠 진입을 경고받았다. 그날 밤 폴랴니치코로부터 "어떤 대가를 치르더라도 군대가 들어갈 것"이라는 통보를 받고 저항을 예고했으며, 이후 크렘린의 바쿠 유혈 진압에 대한 핵심 증언자가 되었다. 이후 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을 창당해 1998년 대선에서 2위를 차지했고, 독립 아제르바이잔에서 장기간 야당 지도자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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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8–1988바쿠국립대학교 역사학 강사
  • 1988–1991아제르바이잔 인민전선 부의장 · 이사회 위원
  • 1990.01–11레포르토보 교도소 수감 (검은 1월 관련 체포)
  • 1990–2000아제르바이잔 최고 소비에트 · 국민의회 의원
  • 1991국가방위평의회 위원 · 「국가독립에 관한 헌법」 공동 기초
  • 1992–2004아제르바이잔 민족독립당(NIPA) 창당자 겸 의장
  • 1998, 2003대통령 선거 출마 (1998년 2위, 11.6% 득표)

자한기르 뫼브숨 오글르 무슬림자데

Cahangir Mövsüm oğlu Müslümzadə
사회주의권 지도자 소련 아제르바이잔 1945– ↓ 1988년 해임·제명

깃발을 들고 군중 선두에 선 숨가이트 마지막 당 책임자

깃발을 손에 쥔 채 흥분한 군중의 선두에 선 그의 모습이 촬영되어 모스크바 당 중앙으로 보내졌다.

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제1서기를 거쳐 숨가이트 시당위 제1서기가 된 인물로, 1988년 2월 숨가이트 포그롬 당시 군중을 진정시키려 했으나 오히려 아제르바이잔 SSR 깃발을 들고 선두에 서는 장면이 포착되었다. 무슬림자데는 나중에 군중을 아르메니아인 거주 구역에서 바다 쪽으로 유도하려 했다고 주장했지만, 그 행렬의 후미가 흩어져 아르메니아인 주택가로 번져갔다. 사건 직후 모든 직위에서 해임되고 당에서 제명되어, 포그롬의 희생양이자 실패한 당 간부의 상징으로 남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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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71–1974아제르바이잔 SSR 통신부 출판부 지도원, 콤소몰 26바쿠 코미사르 구위원회 비서
  • 1974–1978아제르바이잔 콤소몰 중앙위 조직부장, 청년단체위원회 의장, 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중앙위 조직-당무부 지도원
  • 1978–1985아제르바이잔 레닌 콤소몰 중앙위원회 제1서기
  • 1985–1988아제르바이잔 공산당 숨가이트 시당위원회 제1서기
  • 1989–1991아제르바이잔 합작기업 및 국제연합 협회 부회장
  • 1991아제르바이잔 공화국 최고회의 인민대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