파리 코뮌의 노동·교환위원회 대표로 노동 법령을 추진하고, 뒤에 헝가리 노동자당을 세운 금세공인
1871년 5월 1일 코뮌 공안위원회 창설에 찬성했으나, 15일에는 이 위원회를 비판하는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부다 근교 오부다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나 금세공인이 되었고, 독일을 거쳐 1867년 파리에 와 국제노동자협회 독일어권 지부에서 활동했다. 1870년 인터내셔널 재판에서 유죄를 받았다. 1871년 코뮌 의원으로 뽑힌 유일한 외국인으로 노동·교환위원회를 이끌며 제빵 야간 노동 금지와 버려진 작업장 법령을 추진했고, 코뮌 공안위원회에 반대한 소수파에 섰다. 피의 주간에 부상을 입고 런던으로 탈출해 인터내셔널 총평의회 위원이 되었다. 1876년 헝가리로 돌아가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을 세웠으며, 말년을 파리에서 보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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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0국제노동자협회 활동으로 체포·수감되었다가 제정 붕괴 뒤 석방되어 파리 연방평의회 활동을 재개했다.
1871파리 코뮌 제13구 의원으로 선출되고 노동·교환 대표를 맡아 제빵공 야간노동 금지령과 버려진 작업장 조사·협동조합 운영안을 추진했다. 5월 1일 공안위원회 설치에 찬성했으나, 15일 소수파 선언에 서명했다.
1871–1872피의 주간 바리케이드에서 두 차례 부상당하고 탈출한 뒤 런던으로 가 국제노동자협회 총평의회에 선출되었다.
1878–1880헝가리 노동자당 창당대회에 참여했고, 1880년 헝가리 전국노동자당 창립에 관여했다.
프랑스 마르크스주의 정당을 세운 원로로, 1914년 「신성 연합」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4년 전쟁 발발 뒤 게드는 사회주의자의 반전 노선에서 이탈해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들어갔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에서 그는 사회주의 투쟁 외의 별도 반전 행동을 거부했지만, 전쟁기 정부 참여는 그 선택을 현실 정치로 옮겼다.
파리코뮌을 지지했다가 망명한 언론인으로, 1880년 마르크스와 함께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하며 프랑스 마르크스주의의 대표가 되었다. 개혁주의자 조레스와 오랫동안 맞섰고, 1905년 통합 사회당(SFIO) 창당에 참여했다. 1907년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는 계급투쟁이 전쟁을 없앨 것이라며 특별한 반전 행동이 필요 없다고 주장했다. 1914년 8월 조국이 위협받는다고 보고 무임소 장관으로 입각해 1916년까지 「신성 연합」 정부에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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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카를 마르크스와 프랑스 노동자당 강령을 작성했다. 강령은 그해 11월 당 창립 대회에서 채택되었다.
1907제2인터내셔널 슈투트가르트 대회에서 프랑스 소수파를 대표해 사회주의 투쟁 외의 특별한 반전 조치를 거부하는 결의안을 냈다.
1914–1916전쟁 발발 뒤 무임소 장관으로 프랑스 정부에 참여해 1916년까지 재임했다.
제2제정기 블랑키주의자로 활동하며 공화주의·무신론 신문에 글을 쓰고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1870년 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업무를 맡았고, 1871년 3월 코뮌 봉기 후 경찰청장이 됐다. 코뮌 평의원과 코뮌 보안위원회 위원장을 지냈으며, 4월 말 검사로 임명돼 인질 정책 집행과 반대파 체포에 관여했다. 피의 주간에 구금 중이던 변호사 귀스타브 쇼데를 처형하게 했고, 1871년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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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0년대블랑키주의·공화주의 운동에 참여하고 신문에 기고했다. 정치 활동으로 여러 차례 투옥됐다.
18709월 공화정 선포 뒤 파리 경찰청에서 정치 담당 관리로 일했다.
18713월 20일 파리 경찰청장에 임명됐고, 26일 코뮌 평의원으로 선출됐다. 공안위원회를 거쳐 4월 말 코뮌 검사로 임명됐다.
1871피의 주간에 귀스타브 쇼데 처형을 명령했다. 5월 24일 베르사유 정부군에 붙잡혀 재판 없이 총살됐다.
레닌은 메링을 두고 '마르크스주의자가 되길 원할 뿐 아니라, 되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 평했다.
독일 마르크스주의 역사학·문예비평·철학을 대표하는 이론가로, 1891년 SPD에 입당하여 『노이에 차이트』의 주요 필자가 되었고 카우츠키·룩셈부르크와 함께 당내 좌파의 이론적 기둥을 이뤘다. 1916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공동 창립하고 1919년 KPD 창당을 주도했으며, 마르크스의 고전적 전기 『카를 마르크스, 그의 생애』(1918)와 마르크스주의 역사학의 기념비 『독일 사회민주주의사』(1898)를 남겼다. 프로이센 신화를 해체한 『레싱 전설』(1893)로 엥겔스의 극찬을 받았고, 네오칸트주의와 니체의 영향력에 맞서 사적 유물론을 문화 영역에까지 적용했다. 룩셈부르크·리프크네히트 피살 2주 만에 급환으로 사망했으며, 베를린 사회주의자 묘역에 안장되어 있다.
영국 해군에 맞설 대양함대를 건설해 건함 경쟁을 부르고 무제한 잠수함전을 주장한 독일 제독
브란덴부르크주 퀴스트린에서 법률가의 아들로 태어났다. 1897~1916년 제국해군청 장관으로 작은 제국 해군을 영국 해군을 위협할 세계적 해군으로 키웠다. 「위험 이론」에 따른 1898~1912년 함대법으로 독일 해군은 세계 2위가 되었지만, 값비싼 건함 경쟁을 부르고 영국을 프랑스 쪽으로 더 가깝게 밀었다. 그는 해군력이 사회민주당에 대한 「진정제」가 되리라 보았다. 전쟁 중 대양함대가 영국의 해상 봉쇄를 깨지 못하자 무제한 잠수함전을 거세게 주장했고, 1916년 3월 사임했다. 1917년 협상에 의한 강화에 반대하는 극우 조국당을 함께 세워 의장이 되었고, 전후 독일국가인민당 의원을 지냈다. 1930년 죽었다.
이손초강의 정면 공격을 되풀이하고 가혹한 군기로 다스리다 카포레토 패전 뒤 해임된 참모총장
피에몬테에서 장군의 아들로 태어나 포병 장교가 되었고, 엄격한 군기와 공세 교리로 이름이 났다. 1914~1917년 이탈리아군 참모총장으로 이손초강을 따라 공세를 거듭했다. 고리치아 점령 같은 성과도 있었으나 「소모전만이 전쟁을 끝낸다」며 큰 희생을 감수했다. 장교 217명을 해임하고 후퇴한 부대의 장교를 즉결 처형하게 했으며, 그의 휘하에서 약 750명이 처형되어 1차 세계대전 군대 가운데 가장 많았다. 1917년 10월 카포레토에서 독일-오스트리아군에 대패해 27만 5천 명이 포로가 되었고, 11월 7일 해임되었다. 1924년 무솔리니 정권 아래 원수가 되었고 1928년 죽었다.
트로츠키 회고: 「악셀로트 집안에는 소박함과 진심 어린 동지적 참여의 분위기가 지배하고 있었다.」
나로드니키로 출발해 1883년 플레하노프·자술리치와 함께 러시아 최초의 마르크스주의 조직 「노동해방단」을 창립했다. 1900년 『이스크라』 편집위원, 1903년 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로서 대중적 노동자 정당을 주장하며 레닌의 전위당을 비판했다. 1917년 페트로그라드 소비에트 집행위원을 지냈으나 10월 혁명에 반대, 이후 망명하여 생을 마칠 때까지 제2인터내셔널에서 활동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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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1874키예프 대학 차이콥스키 서클에서 나로드니키 활동; 「민중 속으로」 참가
1876–1879「토지와 자유」 → 분열 후 「검은 재분할」 지도부
1881–1883망명 중 마르크스주의로 전향; 독일 사민당 지도부와 교류
1883제네바에서 플레하노프·자술리치 등과 「노동해방단」 공동 창립
1900–1903『이스크라』 및 『자랴』 편집위원
1903–1905RSDLP 분열 후 멘셰비키 핵심 이론가; 레닌의 전위당이 자코뱅주의로 변질될 위험을 최초로 경고
1906–1914제2인터내셔널 활동; 청산주의 전술 정당화; 비엔나 회의 OK 해외서기국 선출
"흔히 '사회주의의 최종 목표'라고 불리는 것에 나는 지극히 적은 관심을 가지고 있다. 이 목표가 무엇이든 나에게는 아무것도 아니며, 운동이 전부다." — 비판자들에 대한 답변 (1899)
독일 사민당의 이론가이자 정치인.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이자 『사회민주주의자』 편집장으로 마르크스주의 정통파로 출발했으나, 1899년 『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을 통해 자본주의 붕괴론·계급양극화·혁명 필연성을 반박하는 수정주의를 제창했다. "목표는 아무것도 아니고 운동이 전부다"라는 명제로 사민주의의 개혁적·의회주의적 전환의 토대를 놓았으며, 이는 혁명적 사회주의와 진화적 사회민주주의의 분기점이 되었다. 세계대전 중 반전 입장으로 USPD 창립에 참여했고, 바이마르 공화국에서 의회민주주의를 수호하다 나치 집권 6주 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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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72사회민주노동당(SDAP, 아이제나흐파) 입당; 1875년 고타 통합대회 대의원
1881–1890망명지 취리히·런던에서 『사회민주주의자(Der Sozialdemokrat)』 편집장; 엥겔스와 긴밀히 협력
1891카우츠키와 함께 에르푸르트 강령 기초; 1895년 엥겔스의 문학적 유언집행자로 지명됨
1899『사회주의의 전제조건들』 출간 — 수정주의 논쟁 촉발, 국제 사회주의 운동 분열의 기점
1902–1928제국의회 의원(브레슬라우-서부, 후일 포츠담 II) — 조세·통상·헌법 문제 주력
1915–1917전쟁 차관 반대파로 전환; 하제·카우츠키와 평화 선언 발표, USPD 공동 창립
1918–1928바이마르 공화국 재무부 차관보 역임, 의회민주주의 수호 활동; 1932년 사망
옐리자베타 쿠셰레바로 태어나 결혼 뒤 토마노프스카야라는 이름을 썼다. 제1인터내셔널 제네바 지부에서 활동하고 1870년 런던에서 마르크스와 만났다. 1871년 파리 코뮌의 대표로 파리에 가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을 조직했다. 코뮌 진압 때 바리케이드 전투에 참여해 부상당했고, 러시아로 돌아간 뒤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해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살았다. 사망 시기는 확인되지 않으며 1916년 이후, 1918년 이전일 가능성이 제기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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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67미하일 토마노프스키와 결혼해 상속 재산을 얻고 혁명 단체들에 자금을 지원했다.
1868–1869제네바에서 러시아어 잡지 《나로드노예 델로》를 재정 지원·공동 편집하고 제1인터내셔널의 러시아 지부 창설에 참여했다.
1870제네바 지부의 사절로 런던에 가 카를 마르크스와 교류했다.
1871파리 코뮌기 여성연합을 창설하고 여성 노동자의 협동 작업장과 노동권을 추진했다.
1871–1877코뮌 패배 뒤 러시아로 돌아갔다. 이반 다비도프스키와 결혼하고 그를 따라 시베리아 유형지로 갔다.
1918년 1월 오스트리아 하층부와 빈의 파업 노동자들에게 복귀를 촉구했다. 10월 30일 독일오스트리아 임시 국민의회에서 외무장관으로 선출되어 협상국과의 적대 행위 종식을 감독했고, 11월 11일 사망했다.
프라하의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난 의사로, 빈 노동자들의 참상을 보고 사회주의로 돌아서 1889년 하인펠트 대회에서 오스트리아 사회민주노동당을 통합해 세웠다. 다민족 제국 안에서 당을 「작은 인터내셔널」로 이끌었다. 1914년 7월 브뤼셀 사무국 회의에서 「전쟁은 이미 우리 곁에 있다」며 당의 무력함을 고백했고, 개인적 의구심에도 정부의 전쟁을 지지했다. 1918년 10월 공화국 과도정부의 외무장관이 되었으나 11월 11일 공화국 선포 하루 전에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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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0년대오스트리아 사회민주주의의 분열된 세력을 통합하는 데 앞장섰다.
1889사회주의 신문 《아르바이터차이퉁》을 창간했다.
1914제2인터내셔널 긴급 회의에서 전쟁을 막을 수 없다고 밝혔고, 오스트리아-헝가리의 참전과 당 지도부의 친전 입장을 옹호했다.
1918년 법정 최후진술에서 "하층 계급이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안에 있고, 범죄자가 존재하는 한 나는 그 일부이며, 감옥에 갇힌 영혼이 있는 한 나는 자유롭지 않다"고 선언했다.
미국 사회주의의 가장 상징적인 인물로, 산업별 노동조합주의의 선구자였다. 미국철도연합(ARU)을 이끌어 1894년 풀먼 파업을 조직하고 투옥 중 마르크스주의를 수용했으며, 미국 사회당(1901)과 IWW(1905) 창립에 참여했다. 다섯 차례 대선에 출마해 1912년 90만 표(6.0%)를 얻었고, 1차 대전 반대 연설로 수감된 1920년에도 91만 표를 득표해 미국 사회주의 선거운동의 정점을 찍었다.
광부 출신으로 영국 노동당을 세우고, 반전 총파업을 주장하며 제1차 세계대전에 끝까지 반대한 사회주의자
1892년 광부 출신으로 하원에 진출한 뒤, 하디는 독립노동당과 노동당의 초기 지도자로 노동자 정치 조직을 이끌었다. 제1차 세계대전이 시작되자 반전 운동에 나섰다.
스코틀랜드의 가난한 집안에서 태어나 열 살 무렵부터 탄광에서 일했고, 광부 노조 조직가를 거쳐 1892년 노동자 출신 첫 하원 의원이 되었다. 1893년 독립노동당을 세우고 1906년 노동당의 첫 의회 지도자가 되었으며, 여성 참정권과 인도 자치를 지지했다. 1910년 코펜하겐 대회에서 전쟁을 막기 위한 군수 산업 총파업안을 제안했다. 1914년 7월 브뤼셀 사무국 회의에 참석했고, 전쟁 내내 반대하다 1915년 숨졌다.
1891년 8월, 정치 집회가 금지된 상황에서 블라고예프는 발칸 산맥 부즐루자 봉우리에 20여 명의 사회주의자들을 비밀리에 모아 불가리아 최초의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페테르부르크 대학 유학 중이던 1883년 러시아 최초의 맑스주의 서클 '러시아 사회민주당'을 결성하고 불법신문 『라보치』를 발행했으며, 체포·추방 후 불가리아로 돌아와 1891년 부즐루자 대회에서 불가리아 사회민주당을 창립했다. 1903년 개량주의 '광역파'와 결별하고 혁명적 '협소파(테스냐키)'를 이끌었으며, 25년간 이론지 『노보 브레메』를 편집하고 『자본론』을 불가리아어로 번역했다. 발칸전쟁과 제1차 세계대전에 반대하고 발칸 연방을 주장했으며, 10월 혁명 후 볼셰비키 편에 서서 1919년 당을 불가리아 공산당으로 재편하고 초대 지도자가 되었다. 레닌의 노농동맹론을 끝내 수용하지 않은 독자적 혁명가로, 불가리아 맑스주의의 이론적 토대를 세운 사상가이기도 했다.
코레즈의 튈에서 프랑스인 아버지와 영국인 개신교도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나 포병 장교가 되었고, 의화단 진압에도 참전했다. 1916년 5월 베르됭에서 페탱의 뒤를 이어 제2군 사령관이 되어 반격을 이끌었으나, 병사들의 목숨을 낭비했다는 비난을 받았다. 1916년 12월 서부전선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고, 1917년 4월 16일 슈맹 데 담에서 결정적 돌파를 장담하며 니벨 공세를 열었다. 예상한 1만 명과 달리 열흘 만에 13만 4천 명의 사상자를 내고도 공격을 이어 갔으나 돌파에 실패했다. 프랑스군 절반가량이 항명에 휩싸였고, 5월 15일 페탱에게 자리를 넘겼다. 북아프리카 사령관으로 밀려났고 1924년 죽었다.
「공화국의 포도주 통 속에 사회혁명의 포도주를 준비하십시오!」 — 1905년 5월 1일, 마로생의 포도 재배 협동조합을 방문한 자리에서
장 조레스는 프랑스 사회주의 통합의 중심 인물로, 1902년 프랑스 사회당을 이끌고 1905년 쥘 게드의 혁명적 사회당과 통합해 노동자 인터내셔널 프랑스 지부(SFIO)를 출범시켰다. 1904년 창간한 《뤼마니테》를 통해 개혁적 사회민주주의를 주창했고, 드레퓌스 사건에서는 반유대주의와 군국주의에 맞서 공화국의 양심을 대변했다. 마르크스주의 계급 분석에 기초한 《프랑스 혁명의 사회주의적 역사》(1900~1903)를 저술해 프랑스 혁명사학에 깊은 흔적을 남겼다. 1914년 7월, 독일 사민당과의 국제적 총파업으로 세계대전을 막으려 했으나 개전 사흘 전 민족주의자 라울 비용의 총탄에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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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5타른주 공화파 의원으로 국민의회 진출
1892–1893카르모 광부 총파업 지지, 독립 사회당 의원으로 재선
1898–1902드레퓌스 사건에서 진보 진영의 양심으로 활동,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 편집
센에우아즈의 보니에르쉬르센에서 태어나 법학 박사가 되어 변호사로 일했고, 언론인으로 《라 프티트 레퓌블리크》를 이끌었다. 블랑키주의 경향의 중앙혁명위원회에 들어가 그 후신 정당들을 거쳐 1905년 SFIO에 합류했다. 1893년부터 죽을 때까지 파리 18구의 노동자 지역에서 사회주의 의원으로 당선되었다. 1911년 평화주의 소책자 『왕을 세우라, 아니면 평화를 맺으라』를 썼지만, 1914년 8월 비비아니의 신성 연합 정부에 공공사업부 장관으로 들어가 브리앙 내각에서 1916년 12월까지 자리를 지켰다. 1920년 투르 대회에서 제3인터내셔널 가입에 반대표를 던졌다. 1922년 샤모니에서 뇌출혈로 죽었다.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어 1차 세계대전의 직접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그라츠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고 1896년 아버지가 죽자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조피 호테크와의 귀천상혼은 자녀의 계승권을 포기한 뒤에야 허락되었다. 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913년 전군 총감이 되었다. 성직주의와 반민주주의, 반헝가리주의를 신념으로 삼았으며, 제국 안 슬라브 민족들의 자치 확대를 주장하는 한편 세르비아에 대해서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경계해 신중론을 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함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었고, 이 사건이 7월 위기와 전쟁으로 이어졌다.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의장으로 제2인터내셔널을 이끌다 1914년 벨기에 전시 정부에 입각한 사회주의자
1919년 파리강화회의에서 노동 조항, 특히 8시간 노동일을 지지하는 조항이 조약에 포함되도록 했다. 1925년 벨기에 외무장관으로 로카르노 조약 협상에 참여했다.
벨기에 노동당의 지도자이자 법학자로, 1900년부터 국제사회주의사무국 의장을 맡아 제2인터내셔널의 얼굴이 되었다. 1914년 8월 독일이 중립국 벨기에를 침공하자 국무장관으로 입각해 조국 방위를 지지했고, 치머발트 운동에 맞서 사무국을 지키려 했다. 전후 법무장관과 외무장관을 지내며 1925년 로카르노 조약에 서명했고, 1923년 노동사회주의 인터내셔널 의장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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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889벨기에 노동자당에 가입해 지도자가 되었다.
1894사회당 의원으로 의회에 진출했다.
1914국무장관으로 임명되어 전시 내각에서 일했다.
1919–1920파리강화회의 조약 협상에서 노동 관련 조항, 8시간 노동일을 지지하는 조항을 포함시키는 데 기여했다.
1917년 12월, 레닌은 파르부스의 귀국 요청을 거부하며 답했다: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
마르크스주의 이론가이자 독일 사민당(SPD)의 저널리스트로, 1904~1905년 레프 트로츠키와 함께 '영구혁명론'을 공동 발전시켰다. 제1차 세계대전 중 독일 정부 자금으로 러시아 혁명 조직망을 구축했으며, 1917년 4월 레닌의 '봉인열차' 귀환을 주선하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다. 볼셰비키 집권 후 레닌은 '혁명의 대의는 더러운 손이 만져서는 안 된다'며 그의 귀국을 거부했고, 파르부스는 독일에 남아 바이마르 공화국 초기 지도자들의 고문이 되었다. 혁명적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현실정치 사이에서 자신의 원칙을 상품화했다는 비판을 받는, 20세기 사회주의 운동에서 가장 논란적인 인물 중 하나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