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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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국 혁명과 인민공화국의 인물들

프랑스 혁명과 나폴레옹 시대의 인물들

그 밖의 세계 인물들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

Friedrich Wilhelm II
왕정·왕당파 프로이센 독일 (프로이센) 1744–1797 ○ 재위 중 포츠담에서 사망

필니츠 선언에 서명하고 대프랑스 원정에 나선 프로이센 왕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에 서명했고, 1792년 여름 브라운슈바이크 공작이 이끄는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1786년 숙부 프리드리히 2세를 이어 프로이센 왕이 되었다. 국내에서는 선왕의 계몽 통치에서 물러나 검열과 종교 통제를 강화했다. 프랑스 혁명에 대응해 오스트리아와의 오랜 대립을 접고,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선언을 냈으며 1792년 2월 정식 동맹을 맺었다.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으나 재정 부족에 묶였고, 조정은 폴란드 분할에 더 관심을 두었다. 1795년 바젤에서 프랑스와 단독 강화를 맺었고 1797년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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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86숙부 프리드리히 2세가 죽자 프로이센 왕으로 즉위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레오폴트 2세와 함께 프랑스 왕을 지지하는 선언을 냈다.
  • 1792–17932월 오스트리아와 정식 동맹을 맺고, 1792년과 1793년 대프랑스 원정에 직접 참가했다.
  • 1793–1795제2·3차 폴란드 분할로 영토를 얻었고, 1795년 4월 바젤 조약으로 프랑스와 단독 강화했다.
  • 179711월 16일 포츠담에서 사망했다.

레오폴트 2세

Leopold II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 (합스부르크 군주국) 오스트리아 1747–1792 ○ 재위 중 빈에서 병사

필니츠 선언에 서명한 신성 로마 황제

1791년 8월 27일 프로이센 왕과 함께 필니츠 선언에 서명해, 다른 열강이 동참하면 프랑스 왕을 돕기 위해 함께 행동하겠다고 밝혔다.

마리아 테레지아의 아들이자 마리 앙투아네트의 오빠다. 1765년부터 토스카나 대공으로 개혁 정치를 폈고, 1786년 그곳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1790년 형 요제프 2세를 이어 황제가 되었다. 1791년 8월 필니츠에서 프리드리히 빌헬름 2세와 함께, 다른 열강이 모두 함께할 때에만 프랑스에 개입하겠다는 조건부 선언을 냈다. 러시아와 영국이 움직이지 않으리라는 것을 알았기에 형식적 선언이었다는 평가가 있지만, 선언은 프랑스 혁명 운동의 급진화에 영향을 주었다. 프랑스가 선전포고하기 직전인 1792년 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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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765–1790토스카나 대공(레오폴도 1세)으로 행정·재정 개혁을 추진했다.
  • 1786토스카나에서 사형과 고문을 폐지했다.
  • 1790형 요제프 2세가 죽자 오스트리아 대공이 되었고, 10월 프랑크푸르트에서 황제로 대관했다.
  • 17918월 필니츠에서 프로이센 왕과 만나 프랑스 개입 용의를 밝힌 선언에 공동 서명했다.
  • 17923월 1일 빈에서 폐렴으로 사망했고, 아들 프란츠 2세가 뒤를 이었다.

빌헬름 2세

Wilhelm II.
독일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독일 독일 1859–1941 → 망명지에서 사망

7월 위기에 오스트리아를 지원하고 1918년 퇴위해 망명한 마지막 독일 황제

프로이센 왕세자와 영국 빅토리아 여왕의 맏딸 사이에서 태어나 1888년 황제가 되었고, 1890년 비스마르크를 해임했다. 1900년 의화단 진압군에게 훈족처럼 싸우라고 연설했고, 함대 증강과 모로코 개입으로 독일을 고립시켰다. 1914년 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군사 지원을 보장했다. 전쟁 중에는 결정을 최고사령부에 넘겨 힌덴부르크와 루덴도르프의 군사독재가 섰다. 1918년 11월 9일 퇴위가 발표되자 네덜란드로 망명했고, 네덜란드는 베르사유 조약이 정한 그의 인도를 거부했다. 1941년 도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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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8독일 황제·프로이센 국왕 즉위
  • 1890비스마르크 해임, 「신노선」
  • 19147월 위기 때 오스트리아-헝가리에 지원 보장
  • 191811월 9일 퇴위 발표, 네덜란드 망명

프란츠 페르디난트

Franz Ferdinand
오스트리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 오스트리아 1863–1914 ✕ 사라예보에서 암살

1914년 사라예보에서 암살되어 1차 세계대전의 직접 계기가 된 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그라츠에서 프란츠 요제프 황제의 동생 카를 루트비히 대공의 맏아들로 태어났다. 1889년 루돌프 황태자가 자살하고 1896년 아버지가 죽자 황위 계승자가 되었다. 조피 호테크와의 귀천상혼은 자녀의 계승권을 포기한 뒤에야 허락되었다. 군에 큰 영향력을 행사했고 1913년 전군 총감이 되었다. 성직주의와 반민주주의, 반헝가리주의를 신념으로 삼았으며, 제국 안 슬라브 민족들의 자치 확대를 주장하는 한편 세르비아에 대해서는 러시아와의 충돌을 경계해 신중론을 폈다. 1914년 6월 28일 사라예보에서 아내와 함께 가브릴로 프린치프에게 암살되었고, 이 사건이 7월 위기와 전쟁으로 이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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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오스트리아-헝가리 황위 계승자
  • 1900조피 호테크와 귀천상혼
  • 1913전군 총감
  • 1914.06.28사라예보에서 암살

보그드 칸

Богд хаан
왕정·왕당파 몽골 몽골 (티베트인) 1869–1924 ○ 자연사

티베트 출신 환생 라마로 즉위한 마지막 몽골 대칸

제후들은 그를 두려워했고, 민중은 그를 사랑했다.

티베트 라싸 출신의 제8대 젭춘담바 쿠툭투로, 달라이 라마·판첸 라마 다음가는 몽골 불교의 최고 환생 성직자였다. 1911년 청이 무너지자 몽골 귀족들이 그를 '보그드 칸'으로 즉위시켜 신정 국가를 세웠다. 1919년 중국이 자치를 폐지하며 권력을 잃었다가 1921년 인민혁명 뒤 제한군주로 복위했고, 1924년 5월 후두암으로 죽어 몽골의 군주제를 끝냈다. 17세기 말 이후 처음이자 마지막인 외몽골의 대칸으로, 격동 속에서 종교적 카리스마로 몽골인들을 묶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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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우르가(이흐 후레) 도착, 몽골 불교 수장으로 승인
  • 191112월 29일 보그드 칸으로 즉위
  • 1919중국의 자치 폐지로 권력 상실
  • 1921인민혁명 후 제한군주로 복위
  • 1924후두암으로 사망, 군주제 종식

빅토리오 에마누엘레 3세

Vittorio Emanuele III

파시즘과 왕정의 책임 사이에 선 군주

1943년 7월 25일, 그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체포하게 한 뒤 바돌리오를 새 정부 수반으로 임명했다.

이탈리아 국왕으로서 자유주의 헌정의 쇠퇴, 파시스트 국가의 성립과 제2차 세계대전을 겪었다. 그는 무솔리니의 권력 장악과 식민 전쟁, 인종법, 참전을 승인해 왕정의 책임을 키웠지만, 1943년 7월 무솔리니를 해임하고 피에트로 바돌리오를 임명해 체제 전환의 헌정 통로를 열었다. 그러나 9월 휴전 뒤 로마를 떠난 그의 선택은 군과 국가를 혼란에 빠뜨렸고, 전후 왕정의 정당성을 회복하지 못한 채 1946년 퇴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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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89이탈리아 육군 장교로 복무 시작
  • 1900이탈리아 국왕 즉위
  • 1915제1차 세계대전 참전 국왕
  • 1922무솔리니에게 정부 구성을 위임
  • 1936에티오피아 황제 선포
  • 1940추축국 편으로 제2차 세계대전 참전
  • 1943무솔리니 해임, 바돌리오 정부 임명
  • 1946퇴위하고 이집트로 망명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Joseph August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마지막 원수로, 1919년 8월 잠시 헝가리 섭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대공

헝가리의 얼추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팔라틴) 분가에서 태어났다. 1890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과 군, 집단군을 지휘했고,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10월 27일 카를 황제가 그를 헝가리의 전권 대리인(호모 레기우스)으로 삼았으나 과꽃 혁명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1919년 8월 카를을 대신하는 섭정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어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협상국이 합스부르크가의 국가원수를 인정하지 않아 8월 23일 물러났다. 호르티 시대에는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44년 헝가리를 떠났고 1962년 서독의 라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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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임관
  • 1914–1918군단·군·집단군 사령관
  • 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원수, 헝가리 호모 레기우스
  • 1919헝가리 섭정
  • 1927상원 의원
  • 1936–1944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

사이드 알림 칸

Said Olimxon
반혁명 세력 부하라 에미르국 우즈베크인 (망기트 왕조) 1880–1944 → 망명지에서 사망

1920년 붉은 군대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한 부하라 에미르국의 마지막 에미르

1880년 부하라에서 에미르 압둘아하드 칸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니콜라이 사관학교에서 3년간 통치와 군사를 배웠고, 돌아와 나사프와 카르마나의 총독을 지냈다. 1911년 망기트 왕조의 12대이자 마지막 에미르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뇌물과 자의적 징세를 금하는 개혁을 내걸었으나 곧 전통파의 손을 들었고, 1917년 이후 청년부하라인 등 개혁파를 탄압했다. 1918년 3월 콜레소프가 이끈 볼셰비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1920년 8월 말 부하라 작전 중 두샨베를 거쳐 카불로 달아났다. 망명지에서 영국과 손잡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바스마치를 지원했다고도 하며, 1944년 카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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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러시아 정부로부터 부하라 왕세자로 확인받음
  • 1911–1920부하라 에미르
  • 1920–1944아프가니스탄 망명

카를 1세

Karl I.
오스트리아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오스트리아-헝가리 1887–1922 → 망명지에서 사망

헝가리 국왕 카를 4세로서 1921년 두 차례 왕위 회복을 시도한 마지막 합스부르크 황제

1916년 11월 큰할아버지 프란츠 요제프의 뒤를 이어 오스트리아 황제(카를 1세)이자 헝가리 국왕(카를 4세)이 되었다. 연합국과 비밀 평화 교섭을 벌였으나 실패했고, 1918년 가을 제국은 해체되었다. 11월 11일 오스트리아에서, 13일 헝가리에서 국정 참여를 포기한다고 선언했으나 퇴위라는 말은 쓰지 않았다. 1919년 스위스로 망명한 뒤 1921년 3월과 10월 두 차례 헝가리 왕위 회복을 시도했으나 섭정 호르티의 반대로 실패했다. 두 번째 시도 뒤 체포되어 포르투갈령 마데이라섬으로 유배되었고 1922년 그곳에서 호흡부전으로 죽었다. 2004년 가톨릭교회에서 복자로 선포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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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6오스트리아 황제 · 헝가리 국왕 즉위
  • 1918국정 참여 포기 선언
  • 1919스위스 망명
  • 1921두 차례 헝가리 왕위 회복 시도
  • 1921–1922마데이라섬 유배, 사망
  • 2004복자 선포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

Pavle Karađorđević

전쟁을 피하려다 추축국의 압박에 밀린 섭정

1941년 3월 25일 삼국동맹 가입 이틀 뒤 군부 쿠데타로 섭정직에서 쫓겨났다.

파블레 카라조르제비치는 알렉산다르 1세 암살 뒤 미성년 페타르 2세를 대신해 유고슬라비아 왕국을 통치한 섭정공이었다. 그는 중앙집권 체제의 유산을 완화하고 크로아티아 민족운동과 타협하려 했으며, 1939년 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으로 크로아티아 바노비나를 성립시켰다. 그러나 유럽 전쟁이 확대되고 영국과 프랑스의 실질적 보장이 약해지자 중립을 지키려던 외교는 독일 압력에 대한 양보로 기울었고, 1941년 삼국동맹 가입은 군부 쿠데타와 그의 실각을 불렀다. 그는 전후 망명 생활을 하다 1976년 사망했고, 2011년 세르비아 법원에서 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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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상트페테르부르크 출생
  • 1912–1921옥스퍼드 크라이스트처치에서 수학, 제1차 세계대전 복무
  • 1929베오그라드 현대미술관 설립과 후원
  • 1934–1939유고슬라비아 섭정평의회 의장
  • 1939츠베트코비치-마체크 협정과 크로아티아 바노비나 추진
  • 1941삼국동맹 가입 뒤 군부 쿠데타로 실각

히로히토

裕仁
일본 국가기관 왕정·왕당파 일본 일본 1901–1989 ○ 자연사

제국의 전쟁과 전후 전환을 통과한 천황

“참기 어려운 것을 참고 견디라”, 1945년 항복 조서의 구절

히로히토는 1926년부터 1989년까지 재위한 일본의 제124대 천황으로, 제국 헌법의 군주와 전후 헌법의 상징천황을 모두 경험했다. 그는 일본의 대외 침략과 태평양전쟁을 승인한 국가 체제의 정점에 있었으며, 전쟁 수행과 전쟁범죄에 대한 책임의 범위는 지금도 논쟁적이다. 1945년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원폭 투하, 소련의 대일 참전 뒤 교착된 최고전쟁지도회의에 개입해 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을 했다. 전후에는 천황의 신격화를 부정하고 상징적 국가원수로 남았으며, 해양생물학 연구도 계속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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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도쿄에서 출생
  • 1916황태자로 책봉
  • 1921–1926섭정
  • 1926–1945일본 제124대 천황, 제국 헌법상 대권 행사
  • 1941대미·대영·대 네덜란드 개전 결정 승인
  • 1945포츠담 선언 수락을 결정하고 항복 방송
  • 1947–1989일본국 헌법상 상징천황
  • 1989도쿄에서 사망

푸이

溥仪
청 왕조 왕정·왕당파 중국 중국 1906–1967 ↓ 퇴위 1912 · 자연사

청의 마지막 황제이자 만주국의 꼭두각시 황제, 인민공화국의 「개조된」 시민

일곱 살도 되기 전에 청의 마지막 황제가 되어 1911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하고 1917년 한 차례 복위했다. 이후 만주국의 집정과 황제를 거쳐 1945년 소련군에 사로잡힌 뒤, 1959년 사면되어 개조의 모범으로 제시되었다.

세 살에 청의 선통제로 즉위해 1912년 신해혁명으로 퇴위했다. 자금성에 머물다 1924년 쫓겨나 톈진의 일본 조계로 갔고, 1932년 일본이 세운 만주국의 집정, 1934년부터 황제가 되었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억류된 뒤 1950년 중국에 송환되어 푸순 전범관리소에서 개조 교육을 받았고 1959년 특사로 풀려났다. 베이징 식물원 정원사와 정협 위원으로 살다 문화대혁명 초기인 1967년 병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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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8–1912청 선통제
  • 1934–1945만주국 황제
  • 1950–1959푸순 전범관리소 수감

미하이 1세

Mihai I
루마니아 왕정·왕당파 루마니아 루마니아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 1921–2017 ↓ 퇴위 강요 후 망명

1944년 8월 23일 안토네스쿠를 체포해 루마니아를 연합국 편으로 돌리고, 1947년 총구 앞에서 퇴위한 마지막 국왕

1947년 12월 30일 아침, 병력이 둘러싼 왕궁에서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는 퇴위 문서를 내밀었다. 거부하면 유혈사태가 벌어지고 구금 중인 학생 1천 명이 총살될 것이라는 협박을 받았다고 미하이는 망명 뒤 증언했다. 그날 오후 의회는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호엔촐레른지크마링겐 왕가의 카롤 왕세자와 그리스의 엘레니 사이에서 태어나, 아버지가 왕위 계승을 포기한 탓에 1927년 여섯 살에 섭정 아래 국왕이 되었고 1930년 카롤 2세가 귀국해 왕위를 되찾자 왕세자로 내려왔다. 1940년 9월 안토네스쿠가 카롤 2세를 퇴위시키자 열여덟 살에 다시 왕위에 올랐지만 실권은 안토네스쿠의 독재와 추축국 동맹에 있었다. 1944년 8월 23일 붉은 군대가 국경을 넘은 뒤 그는 궁정 쿠데타로 안토네스쿠를 체포하고 연합국과 휴전해 루마니아를 대독 전선으로 돌렸고, 이 공으로 소련의 승리훈장을 받은 극소수의 외국인이 되었다. 그러나 1945년 3월 비신스키의 압박으로 그로자 정부를 임명해야 했고, 그해 8월부터 법령 서명을 거부하는 「국왕 파업」으로 맞섰으나 1946년 조작 선거와 1947년 마니우 재판을 막지 못했다. 1947년 12월 30일 그로자와 게오르기우데지가 강요한 퇴위 문서에 서명했고 같은 날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었다. 1948년 국적을 박탈당한 채 영국과 스위스에서 시험 비행사와 증권 중개인으로 살았으며, 1992년 부활절의 첫 귀국 때 부쿠레슈티에 백만 명이 모였다. 1997년 국적을 되찾았고 2017년 스위스에서 죽어 쿠르테아데아르제시의 왕가 묘지에 국장으로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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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7–1930섭정 아래 첫 재위
  • 1930–1940왕세자
  • 1940안토네스쿠의 카롤 2세 퇴위로 재즉위
  • 19448월 23일 궁정 쿠데타, 안토네스쿠 체포·연합국 편 전환
  • 1945소련 승리훈장 수훈, 그로자 정부 임명 강요
  • 1945–1946「국왕 파업」, 법령 서명 거부
  • 194712월 30일 퇴위 강요, 망명
  • 1948국적 박탈
  • 1992첫 귀국 방문
  • 1997국적 회복

페타르 2세

Petar II Karađorđević

망명 속에서 왕정의 정통성을 지킨 마지막 국왕

1941년 3월 27일, 두산 시모비치가 그에게 말한 순간이었다. "폐하, 이제부터 완전한 주권을 행사하십니다."

페타르 2세는 아버지 알렉산다르 1세의 암살 뒤 어린 나이에 왕위에 오른 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마지막 국왕이다. 1941년 3월 27일 쿠데타로 섭정 체제가 무너지고 즉시 성년으로 선포되었지만, 곧 추축국 침공으로 런던의 망명정부를 이끌어야 했다. 그의 왕권은 점령에 맞선 국가적 연속성을 상징했으나, 망명정부의 분열과 파르티잔의 군사적·정치적 승리 속에서 실제 통치 기반을 잃었다. 1945년 왕정이 폐지된 뒤에도 귀환하지 못한 그는 전후 유고슬라비아의 정통성을 둘러싼 미해결 긴장을 남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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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34국왕 즉위, 섭정 아래
  • 1934–1941유고슬라비아 왕국의 명목상 국왕
  • 1941.03.27쿠데타 뒤 성년 국왕으로 선포
  • 1941.04–06추축국 침공 뒤 정부와 함께 망명
  • 1941–1945런던 유고슬라비아 왕정 망명정부의 국가원수
  • 1944.09유고슬라비아 군인들에게 티토 합류를 호소
  • 1945왕정 폐지로 폐위
  • 1945–1970미국에서 망명 생활
  • 1970미국 덴버에서 사망