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물 사전: 혁명과 소련의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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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적
출신 배경
시대

호르티 미클로시

Horthy Miklós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68–1957 ○ 망명지에서 사망

평의회 공화국 붕괴 뒤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1944년까지 헝가리를 다스린 섭정

1920년 섭정이 된 호르티는 반유대주의 법률을 시행한 헝가리를 나치 독일과 동맹시켜 소련 침공에 가담시켰다. 1944년 독일 점령 뒤 유대인 43만 7천 명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고, 10월 휴전 시도 뒤 권좌에서 쫓겨났다.

오스트리아-헝가리 해군 장교로 1918년 해군 총사령관에 올랐다. 1919년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지자 반혁명 국민군을 이끌고 부다페스트에 들어갔고, 1920년 3월 의회가 그를 섭정으로 선출했다. 민족 보수주의와 반유대주의를 내건 통치 아래 공산당과 화살십자당을 금지하고 트리아농 조약의 영토 회복을 추구했다. 나치 독일과 손잡고 1941년 6월 소련 침공에 가담했으며, 1944년 3월 독일의 점령 뒤 43만 7천 명의 유대인이 아우슈비츠로 이송되었다. 1944년 10월 소련과의 휴전을 발표했다가 독일군에게 퇴위를 강요당해 권력이 화살십자당으로 넘어갔다. 전후 포르투갈로 망명해 1957년 에스토릴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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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20의회가 호르티를 헝가리 왕국의 섭정으로 선출했다.
  • 1940헝가리가 추축 동맹에 가입했다. 호르티 정권은 반유대주의 법률과 강제노동 제도를 운영했다.
  • 1941헝가리가 추축국의 소련 침공에 가담했고, 정부는 유대인 2만 명 이상을 점령지 갈리치아로 강제 이송했다.
  • 1944독일 점령 뒤 헝가리 당국은 5월부터 7월까지 유대인 약 43만 7천 명을 이송했다. 호르티는 7월 이송 중단을 명령하고 10월 소련과 휴전을 선언했으나 독일에 구금되고 퇴위를 강요당했다.

막스 호프만

Max Hoffmann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 1869–1927 ○ 뇌졸중

브레스트-리토프스크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은 독일 동부전선 참모장

"장군은 여러 차례 토론이 진행되던 탁자 위에 자신의 군화를 올려놓았다": 이 협상에서 호프만의 군화만이 유일한 현실이라고 쓴 트로츠키

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에서 독일 제8군 참모장으로서 타넨베르크와 마수리안 호수 전투의 작전을 입안한 탁월한 전략 참모였다. 1917년 말부터 동부전선 총참모장으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를 주도했으며, 1918년 1월 18일 소비에트 대표단 앞에 지도를 펼쳐 놓고 폴란드·발트 3국·우크라이나의 분리를 요구하는 영토 조항을 제시했다. 트로츠키의 '전쟁도 평화도 아닌' 선언 이후 파우스트슐라크 작전으로 무저항 진격을 지휘해 굴욕적인 최종 조약을 강요했으며, 협상 테이블에 군화를 올려놓는 무례함으로 혁명적 외교와 제국 군사력의 비대칭을 신체화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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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9–1914독일 참모본부 러시아과에서 근무, 러일전쟁 때 일본군 참관
  • 1914–1916제8군·제9군·오버오스트 작전참모, 타넨베르크·마수리안 호수 전투 입안
  • 1916–1918동부전선 총참모장 (소장), 브레스트-리토프스크 강화 협상에서 독일 측 실무 주도
  • 1918.02–03파우스트슐라크 작전 지휘, 소비에트 러시아에 최종 조약 강요
  • 1919–1920폴란드 국경 여단장, 이후 퇴역
  • 1920–1927반소비에트 연합군 개입을 주장하는 호프만 계획 추진, 회고록 집필

이오아니스 메탁사스

Ιωάννης Μεταξάς
그리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그리스 그리스인 1871–1941 ○ 자연사

왕정과 반공을 앞세운 8월 4일 독재자

“그렇다면 전쟁이다.”

그리스의 군인 출신 정치가로, 왕정과 반의회주의를 결합한 권위주의적 국가 질서를 추구했다. 1936년 국왕 게오르기오스 2세의 지지로 의회를 정지하고 8월 4일 체제를 세워 정당과 파업을 금지하고 좌파를 탄압했다. 동시에 국가 개입과 청년 조직을 통해 사회를 동원하려 했으며, 그의 체제는 파시즘과 권위주의적 보수 독재의 성격을 함께 지닌 것으로 논쟁되어 왔다. 1940년 이탈리아의 최후통첩을 거부해 전쟁을 이끌었지만, 1941년 독일 침공을 보지 못하고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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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그리스 육군 공병 소위
  • 1899–1903베를린 전쟁대학 유학
  • 1910–1912육군장관 겸 총리 엘레프테리오스 베니젤로스의 부관
  • 1912–1913발칸 전쟁 작전참모 및 런던 회의 군사고문
  • 1922–1936자유사상당 창당 및 국회의원
  • 1926–1928알렉산드로스 자이미스 내각 교통장관
  • 1932–1933파나기스 찰다리스 내무장관
  • 1936–1941그리스 총리, 8월 4일 체제 지도자
반혁명 세력 라트비아 라트비아 1871–1942 ○ 사망

1919년 친독 라트비아 정부를 이끈 목사이자 작가

"민족의 운명을 가르는 것은 영리한 연설이나 조약이 아니라 힘이다"는 1924년 반역 재판 석상에서 남긴 말이다.

라트비아 문학의 대표적 소설가이자 루터교 목사로 1919년 5월 리예파야 쿠데타 뒤 폰 데어 골츠가 뒷받침한 친독 정부의 수반이 되었다. 체시스 전투 뒤 정권이 무너져 독일로 피했고 1924년 귀국해 국가반역죄로 추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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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1899도르파트(타르투) 대학 신학부 수학
  • 1903–1906체시스에서 잡지 《아우스트룸스》 편집·발행
  • 1906–1918마티시·칼스나바·비에탈바 교구 루터교 목사
  • 1917라트비아 농민연합 창립 참여, 이사
  • 1919.05–06친독 임시정부 수반(총리)
  • 1924국가반역죄 유죄 판결, 대통령 사면 뒤 추방
  • 1926–1930동프로이센 알트슈타트 독일 교구 목사

카로이 줄러

Károlyi Gyula

1919년 세게드 반혁명 정부를 세우고 1931~1932년 헝가리 총리를 지낸 보수 귀족

니르바크터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났고, 카로이 미하이의 사촌이다. 상원 의원이 되었고 1906~1910년 아라드 주지사를 지냈다. 1919년 5월 평의회 공화국에 맞서 아라드에서 반혁명 정부를 세웠으나 루마니아군에 억류되었고, 풀려난 뒤 5월 30일 프랑스군이 점령한 세게드에서 정부를 다시 꾸렸다. 이때 호르티 미클로시에게 국방장관으로서 국민군을 세워 달라고 청했고, 두 사람은 평생의 벗이 되었다. 1930~1931년 베틀렌 정부의 외무장관을 거쳐 1931년 8월 총리가 되었고, 비어토르바지 고가교 폭파 뒤 계엄을 선포해 공산주의자를 가두었다. 1932년 9월 사임했고, 1939년 제2차 유대인법에 항의해 모든 직위에서 물러났다. 1947년 부다페스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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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6–1910아라드 주지사
  • 1919아라드·세게드 반혁명 정부 총리
  • 1930–1931베틀렌 정부 외무장관
  • 1931–1932헝가리 총리

피에트로 바돌리오

Pietro Badoglio

파시즘에 봉사하다 전환을 이끈 원수

1943년 9월 8일 휴전이 발표됐을 때, 바돌리오 정부는 로마를 떠나 연합군의 보호를 찾아 남쪽으로 향했다.

피에트로 바돌리오는 이탈리아 왕국의 군인이자 식민지 전쟁의 지휘관으로, 리비아와 에티오피아에서 제국의 폭력을 집행했다. 그는 무솔리니 체제의 핵심 군사 관료였지만, 1940년 그리스 전역의 실패 뒤 사임하고 왕실의 정권 교체에 참여했다. 1943년 무솔리니 축출 뒤 총리가 되어 연합국과 휴전협정을 체결했으나, 발표와 군 지휘를 제대로 준비하지 못해 독일군의 무장해제와 이탈리아 국가의 붕괴를 막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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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이탈리아 왕립군 포병 장교로 임관
  • 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몬테 사보티노 점령을 지휘
  • 1925–1940이탈리아군 참모총장
  • 1929–1933리비아 총독, 저항 진압과 강제수용 정책을 지휘
  • 1935–1936에티오피아 침공군 사령관, 아디스아바바 점령
  • 1943–1944무솔리니 축출 뒤 이탈리아 왕국 총리, 연합국과 휴전 체결
  • 1944총리직 사임 후 정계에서 물러남

요제프 아우구스트 대공

Joseph August von Österreich

오스트리아-헝가리군 마지막 원수로, 1919년 8월 잠시 헝가리 섭정을 자처한 합스부르크 대공

헝가리의 얼추트에서 합스부르크-로트링겐 가문의 헝가리(팔라틴) 분가에서 태어났다. 1890년 군에 들어가 제1차 세계대전에서 군단과 군, 집단군을 지휘했고, 1918년 10월 24일 오스트리아-헝가리군의 마지막 원수가 되었다. 10월 27일 카를 황제가 그를 헝가리의 전권 대리인(호모 레기우스)으로 삼았으나 과꽃 혁명으로 계획이 무산되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1919년 8월 카를을 대신하는 섭정으로서 국가원수가 되어 프리드리히 이슈트반을 총리로 임명했지만, 협상국이 합스부르크가의 국가원수를 인정하지 않아 8월 23일 물러났다. 호르티 시대에는 1936~1944년 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을 지냈다. 1944년 헝가리를 떠났고 1962년 서독의 라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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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0임관
  • 1914–1918군단·군·집단군 사령관
  • 1918오스트리아-헝가리군 원수, 헝가리 호모 레기우스
  • 1919헝가리 섭정
  • 1927상원 의원
  • 1936–1944헝가리 과학아카데미 원장

파울로 페트로비치 스코로파츠키

Павло Петрович Скоропадський

독일 점령 하 우크라이나국의 마지막 헤트만

1918년 4월 29일 키예프에서 전우크라이나 지주대회가 만장일치로 '헤트만 만세!'를 외치며 파울로 스코로파츠키를 우크라이나의 헤트만으로 추대했다.

코사크 헤트만 가문의 후예이자 제정 러시아 군단장으로 1차 세계대전을 치른 귀족 장군. 1918년 4월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이후 우크라이나를 점령한 독일군의 후원으로 쿠데타를 일으켜 중앙라다의 사회주의 정권을 무너뜨리고 우크라이나국의 헤트만으로 즉위했다. 8개월간의 집권기 동안 우크라이나 과학아카데미와 국립대학을 세우고 외교 관계를 수립했으나, 대지주 중심의 토지 정책과 독일 점령군의 곡물 강제 징발이 농민의 광범한 저항을 불렀다. 1918년 11월 독일 패전과 함께 페틀류라가 이끈 반헤트만 봉기에 밀려 퇴위했고, 이후 독일에서 망명 생활을 하며 나치 협력을 거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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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근위 기병연대 장교 임관
  • 1904–1905러일전쟁에서 코사크 부대 지휘, 훈장 수훈
  • 1912소장 승진, 니콜라이 2세의 시종무관
  • 1914–1916제1차 세계대전에서 기병사단 지휘, 중장 승진
  • 1917제34군단장, 우크라이나화하여 제1우크라이나군단으로 개편
  • 1917.10자유코사크 총사령관(오타만)으로 선출
  • 1918.04–12우크라이나국 헤트만
  • 1919–1945독일 망명, 헤트만 운동 지도

프랑수아 코티

François Coty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4–1934 ○ 병사

향수 재벌의 돈으로 극우 동맹과 대중지를 함께 사들인 후원자

1928년 그는 한 부에 10상팀짜리 일간지를 창간해 발행 부수를 백만 부 가까이 끌어올렸다. 신문은 손해를 봤지만 그것이 목적이 아니었다. 값이 싼 만큼 널리 읽혔고, 그 지면에서 자란 언어가 1934년 2월 광장에 나온 대열들의 언어가 되었다

코르시카 출신으로 향수 산업에서 당대 유럽 최대의 재산을 쌓은 실업가. 1922년 《르 피가로》를 사들이고 1928년에는 값싼 대중지 《라미 뒤 푀플》을 창간해 반공과 반유대, 반의회 선동의 무기로 삼았다. 조르주 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을 지원했고 1933년에는 연대 프랑스를 직접 만들어 자금을 댔다. 그의 이력은 1930년대 프랑스 극우 동맹의 물음, 곧 누가 이 조직들의 비용을 댔는가에 대한 대답의 큰 몫이다. 1934년 2월 6일 광장에는 그가 세운 조직이 대열로 나와 있었고, 그는 그해 7월 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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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4–1904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생, 파리에서 향수 사업 시작
  • 1905–1920향수 산업에서 당대 최대급 재산 축적
  • 1922《르 피가로》 인수
  • 1925–1928발루아의 파소와 초기 불의 십자단에 자금 지원
  • 1928대중지 《라미 뒤 푀플》 창간
  • 1933연대 프랑스 창설과 자금 지원
  • 1934.07이혼 소송과 재정 파탄 끝에 사망

베틀렌 이슈트반

Bethlen István

1921~1931년 총리로서 제한 선거와 국제연맹 차관으로 호르티 체제를 안정시킨 트란실바니아 귀족

트란실바니아의 오랜 귀족 가문 출신으로 1901년 자유주의자로 의회에 들어갔다. 1919년 세게드의 반혁명 세력에 합류했고, 1921년 4월 카를 왕의 첫 복귀 시도 뒤 총리가 되었다. 통일당을 세우고 1922년 선거법으로 농촌에 공개투표를 되살려 집권당의 승리를 굳혔으며, 사회민주당과 협정을 맺고 국제연맹 가입과 차관으로 경제를 안정시켰다. 1931년 대공황 속에 물러났고, 1941년 소련과의 전쟁에 반대했다. 1945년 소련군에 체포되어 1946년 모스크바의 감옥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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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자유주의자로 의회 진출
  • 1919세게드 반혁명 세력 합류
  • 1921–1931총리
  • 1921베틀렌–페이에르 협정
  • 1922통일당 창당 · 선거법 개정
  • 1924국제연맹 차관
  • 1945–1946소련에 체포, 모스크바에서 옥사
영국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영국 영국 (영국계·미국계 혼혈) 1874–1965 ○ 뇌졸중

백분율 합의로 유럽을 스탈린과 나눈 영국의 전시 총리

1944년 10월 모스크바 회담에 대한 처칠의 회고록 서술이다. "나는 반쪽짜리 종이에 백분율을 적어 스탈린에게 밀어 보냈다. 스탈린은 푸른 연필로 체크 표시를 해 돌려보냈다." 소련 당국은 1958년 이를 부인했다.

영국의 정치가·군인·저술가. 1874년 블레넘 궁에서 영국인 아버지와 미국인 어머니 사이에서 태어났다. 인도·수단·보어전쟁에서 복무한 뒤 1900년 의회에 입성했고, 자유당 정부에서 통상장관·내무장관·해군장관을 지냈으나 갈리폴리 원정 실패로 물러났다. 1924~1929년 재무장관을 지냈고, 1940년 5월 총리가 되어 제2차 세계대전을 이끌었다. 1945년 선거에서 패한 뒤 야당 당수가 되어 1946년 '철의 장막'을 경고했으며, 1951~1955년 다시 총리를 지냈다. 1953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고 1965년 사망했다. 제국주의자이자 반공주의자였으며 인도 자치에 반대한 인물로서 평가가 갈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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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40–1945연합내각 총리 (제1차)
  • 1951–1955총리 (제2차)
  • 1945–1951야당 당수
  • 1939–1940해군장관
  • 1924–1929재무장관
  • 1911–1915해군장관
  • 1910–1911내무장관
  • 1908–1910통상장관
  • 1921–1922식민지부 장관
  • 1919–1921육군·공군 장관
  • 1917–1919군수장관

프로너이 팔

Prónay Pál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4–1947/1948 ○ 수용소에서 사망

1919~1921년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장교 부대를 이끈 반혁명 준군사 지휘관

노그라드주 롬하니의 오랜 귀족 가문에서 태어난 직업 장교로, 1919년 세게드에서 호르티의 경호대를 맡고 첫 장교 부대를 만들었다. 그의 부대는 공산당원·사회민주당원·농민·유대인을 고문하고 살해해 헝가리 백색테러에서 가장 잔혹한 부대로 꼽힌다. 1921년 갈취 혐의로 유죄 판결을 받아 지휘권을 잃었고 카를 왕의 두 번째 복귀 시도에 가담했으며, 부대는 1922년 1월 해산되었다. 1930년대에 파시스트 대중운동을 꾸미다 실패했고, 1944년 10월 다시 유대인을 사냥하는 부대를 꾸렸다. 1945년 소련군에 붙잡혀 수용소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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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9호르티 경호대장, 첫 장교 부대 창설
  • 1919–1921헝가리 백색테러 부대 지휘
  • 1921갈취죄 유죄, 카를 왕 복귀 시도 가담
  • 1922부대 해산
  • 1932선동죄로 징역 6개월
  • 1945소련군에 체포

이승만

이승만

무력 북진통일을 주장하고 정전협정 서명을 거부한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1950년 7월 트루먼에게 보낸 편지에서: '공세로 전환, 힘겨운 적진을 뚫고 승리의 북진을 시작할 수 있도록 매일 기도합니다.'

이승만은 조선 말기 독립협회 활동으로 투옥되었다가 석방 후 미국에서 정치학 박사학위를 받은 독립운동가로, 1919년 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 1948년 대한민국 제1대 대통령으로 당선되어 반공을 국시로 삼고 국가보안법 제정 등 강력한 반공 체제를 구축했으며, 38도선 이북으로의 무력 북진통일을 공개적으로 주장했다. 한국전쟁 중에도 정전을 거부하고 1953년 반공 포로 2만 7천 명을 일방적으로 석방해 휴전 교섭을 흔들었으며, 정전협정 서명을 끝내 거부했다. 1960년 3·15 부정선거와 4·19혁명으로 하야한 뒤 하와이에서 망명 생활을 하다 객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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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1898독립협회·협성회 활동, 《매일신문》 주필
  • 1899–1904한성감옥 투옥, 옥중 《독립정신》 집필
  • 1905–1910도미, 프린스턴대 정치학 박사
  • 1919–1925대한민국 임시정부 초대 대통령
  • 1948제헌국회의장, 대한민국 초대 대통령 당선
  • 1948–1960대한민국 제1·2·3대 대통령, 발췌개헌과 사사오입 개헌으로 장기집권
  • 1960–19654·19혁명으로 하야, 하와이 망명

빌헬름 리터 폰 레프

Wilhelm Josef Franz Ritter von Leeb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인 1876–1956 ○ 자연사

레닌그라드 봉쇄를 지휘한 독일 국방군 원수

그는 1941년 9월 레닌그라드가 곧 함락될 것이라 확신했지만, 도시는 항복하지 않았다.

빌헬름 리터 폰 레프는 독일 국방군 원수로, 제2차 세계대전의 주요 작전 지휘관이었다. 1941년 북부집단군을 이끌고 발트해 연안에서 레닌그라드로 진격해 도시의 육상 봉쇄를 완성했으며, 그 지휘 아래 민간인에 대한 범죄와 유대인 학살 협력이 이루어졌다. 그는 바르바로사 작전의 범죄 명령을 전달한 책임으로 전후 뉘른베르크 최고지휘부 재판에서 유죄 판결을 받았지만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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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5바이에른군 입대
  • 1914–1918제1차 세계대전 동부전선 및 세르비아 전역 복무
  • 1930–1933제7사단 사령관
  • 1939–1941C집단군 사령관
  • 1941.06–1942.01북부집단군 사령관, 레닌그라드 공격과 봉쇄 지휘
  • 1948최고지휘부 재판 유죄 판결, 복역 기간 만료로 석방

에리히 레더

Erich Raeder
독일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독일 독일계 1876–1960 ○ 전범 유죄, 1955년 석방

대양함대 구상을 끝까지 밀어붙인 나치 독일 해군 지휘관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 구상에서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이 독일 해군의 근본적 약점으로 드러났다.

에리히 레더는 제정 독일 해군에서 경력을 쌓아 바이마르 공화국 해군과 나치 독일의 해군을 이끈 제독이다. 그는 전함 중심의 대양함대와 통상파괴전을 결합한 구상을 추진했지만, 제2차 세계대전이 시작될 때 독일 해군은 영국 해군과 맞설 준비가 되어 있지 않았다. 1940년 작전명 바다사자에 대해서는 영국 해협의 제해권과 상륙 수송의 취약성을 들어 회의적이었고, 해군력의 한계는 계획의 실행 가능성을 제약했다. 전후 뉘른베르크 국제군사재판에서 공모, 평화에 반한 죄, 전쟁범죄로 유죄 판결을 받아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며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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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4제정 독일 해군 입대
  • 1912–1918고위 해군참모, 제1차 세계대전 참전
  • 1928–1935국가해군 해군지휘부장
  • 1935–1939전쟁해군 총사령관, 상급제독
  • 1939–1943대제독, 전쟁해군 총사령관
  • 1943총사령관직 사임 및 퇴역
  • 1946–1955뉘른베르크 재판 유죄, 종신형 복역

레하르 언털

Lehár Antal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76–1962 ○ 빈에서 사망

서헝가리에서 반혁명 부대를 이끌고 1921년 카를 왕의 두 차례 복귀 시도에 가담한 왕정주의 장군

쇼프론에서 태어나 빈의 사관학교와 육군대학을 나온 직업 장교로, 작곡가 레하르 페렌츠의 동생이다. 제1차 세계대전의 공으로 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기사십자장과 남작 작위를 받았다. 평의회 공화국 시기 그라츠에서 약 2,000명의 부대를 모았고, 1919년 8월 서헝가리 군 사령관이 되어 공산당원과 사회민주당원에 대한 보복을 벌였다. 왕정주의자로서 1921년 3월 카를 왕 곁에 섰고, 10월 두 번째 시도에서는 국방장관으로 지명되었으나 실패한 뒤 체코슬로바키아를 거쳐 독일로 도피했다. 이후 베를린과 빈에서 살며 형의 유산을 관리하다 1962년 빈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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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3빈 사관학교 졸업
  • 1918마리아 테레지아 군사 훈장, 남작
  • 1919그라츠에서 부대 모집, 서헝가리 군 사령관
  • 1921카를 왕의 두 차례 복귀 시도
  • 1921독일로 도피

게오르기 스테파노비치 흐루스탈료프-노사리

Георгий Степанович Носарь

1905년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의 초대 의장으로 선출된 무소속 노동 변호사

흐루스탈료프는 당과 대중이라는 이중의 빛으로 빛났지만, 그 빛은 모두 반사된, 타인의 것이었다.

무소속 노동 변호사로 1905년 혁명의 중심에서 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으로 선출되었다. 무소속이라는 점이 노동자 대표로 추대되는 데 유리하게 작용했으나, 실질적 지도력은 트로츠키와 파르부스 같은 사민당 좌파가 장악했다. 1907년 시베리아 유형지에서 탈출해 망명 생활을 하다 제1차 세계대전 발발 후 귀국했고, 1918년에는 고향 페레야슬라프에서 볼셰비키에 맞서는 자칭 '페레야슬라프 공화국'을 이끌다 이듬해 혁명위원회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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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0–11페테르부르크 소비에트 초대 의장, 14일 만장일치 선출
  • 1905.11–1906체포, 시베리아 유형 선고
  • 1907시베리아 탈출, 런던 당대회 참석 후 망명
  • 1909–1914RSDLP 탈당, 파리에서 신디칼리즘·출판 활동
  • 1915–1917귀국 후 체포, 3년 카토르가 선고; 2월 혁명으로 석방
  • 1918–1919페레야슬라프 공화국 지도자, 반볼셰비키 활동

아라키 사다오

荒木貞夫
일본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일본 일본인 1877–1966 ○ 전범 유죄 · 1955년 석방

황도파의 군국주의 지도자

1932년 5·15 사건으로 이누카이 총리가 해군 청년 장교들에게 암살되자, 육군대신 아라키는 이들을 '억누를 수 없는 애국자'라고 부르며 칭송했다.

아라키 사다오는 일본 제국 육군의 장군이자 황도파의 대표적 지도자로, 천황 중심의 국가 개조와 대외 팽창을 결합한 군국주의를 주장했다. 1931년 만주사변 뒤 육군대신이 되어 관동군의 기정사실을 정부의 정책으로 굳히는 데 기여했고, 소련 극동을 겨냥한 북진론도 지지했다. 그러나 그가 후원한 청년 장교 세력은 통제에서 벗어나 2·26 사건으로 폭발했고, 사건 뒤 현역에서 물러났다. 전후 극동국제군사재판에서 종신형을 선고받았으나 1955년 석방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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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7육군사관학교 졸업, 임관
  • 1907육군대학 수석 졸업
  • 1915–1918러시아군 종군무관, 시베리아 출병 참가
  • 1924–1925헌병사령관
  • 1928–1930육군대학 교장
  • 1931–1934육군대신, 관동군의 만주 점령과 만주국 승인을 추진
  • 1938–1939문부대신, 황도교육과 전시 동원 추진
  • 1946–1955극동국제군사재판 유죄 판결, 복역 후 석방

파벨 베르몬트-아발로프

Павел Бермондт-Авалов

독일 자유군단을 이끌고 리가를 공격한 서러시아 의용군 사령관

유데니치의 나르바 합류 명령을 거부한 그는 1919년 10월 '러시아 국가권력의 대표자'를 자처하며 리가로 진격했다.

「아발로프 공」을 자칭한 러시아 기병 장교로 1919년 철수를 거부한 독일 자유군단 수만 명을 서러시아 의용군으로 묶어 10월 리가를 공격했다가 격퇴되었다. 망명 뒤 베를린에서 러시아 파시스트 조직을 이끌었고 1973년 뉴욕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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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1군악장으로 제1아르군 연대 입대
  • 1904–1905러일전쟁 참전, 성 게오르기 십자훈장 수훈
  • 1918키예프 주둔 남군 징병·방첩 책임자
  • 1919.04잘츠베델 포로수용소에서 의용 분견대 편성
  • 1919.07미타바에서 그라프 켈레르 부대 결성
  • 1919.09서러시아 의용군 총사령관 자처, 10월 리가 진격
  • 1925회고록「볼셰비즘과의 투쟁」간행
  • 1933러시아 민족사회주의 운동(론트) 창설

장 시아프

Jean Chiappe
프랑스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프랑스 프랑스 1878–1940 ✕ 격추사

좌파에 엄격하고 동맹에 관대했던 파리 경찰청장, 그 해임이 2월 6일의 도화선이 되다

「그렇다면 나는 거리에 있게 되겠군요」, 해임을 통보하는 달라디에와의 전화에서, 1934년 2월 3일. 우파 신문은 이 말을 거리로 나가겠다는 예고로 읽었고, 시아프는 실직을 뜻했을 뿐이라고 했다

코르시카 아자시오 출신의 경찰 관료로 1927년부터 1934년까지 파리 경찰청장을 지냈다. 좌파 시위에는 엄격하고 극우 동맹의 가두 행동에는 관대하다는 평이 따라다녔으며, 우파 신문과 참전군인 조직 사이에서 인기가 높았다. 1934년 2월 3일 에두아르 달라디에 총리가 그를 자리에서 물러나게 하자 우파는 공화국이 자기 편 경찰을 쳐낸 사건으로 받아들였고, 사흘 뒤 콩코르드 광장에서 폭동이 일어났다. 해임된 뒤에도 파리에서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았고, 1940년 비시 정권이 레반트 고등판무관으로 임명해 부임하던 길에 지중해 상공에서 비행기가 격추되어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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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78코르시카 아자시오에서 출생
  • 1900년대–1926경찰 행정의 요직을 거치며 승진
  • 1927–1934파리 경찰청장
  • 1934.02.03달라디에가 해임, 모로코 총감 제안을 거부
  • 1935–1940파리 우파 정치의 중심 인물로 남음
  • 1940.11비시의 레반트 고등판무관 임명, 부임 길에 격추되어 사망

시몬 바실리요비치 페틀류라

Симон Васильович Петлюра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을 이끌었으나 유대인 학살의 책임 논쟁에 휩싸인 독립운동가

러시아의 운명에서 우크라이나의 운명을 떼어놓지 말아야 합니다. 러시아가 패배하면 그 재앙은 우크라이나에도 미칠 것입니다.

폴타바 출신의 사회민주주의 언론인으로, 1917년 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를 시작으로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 군 총사령관과 집정내각(디렉토리야) 수반을 지냈다. 볼셰비키·백군·폴란드 사이에서 독립을 수호하려 싸웠으나 1920년 패퇴 후 폴란드, 이어 파리로 망명했다. 그의 군대 휘하에서 약 5만 명의 유대인이 학살되었으며, 페틀류라가 이를 막지 못했는지 의도적으로 방치했는지는 오늘날까지 논쟁의 대상이다. 1926년 파리에서 유대인 아나키스트 숄롬 슈바르츠바르트에게 암살당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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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0–1917우크라이나 혁명당(RUP)·우크라이나 사회민주노동당(USDRP) 활동, 언론인으로 우크라이나 민족운동 주도
  • 1917.05–12중앙라다 군사사무총서기, 우크라이나 군 편성 주도
  • 1918.01–03하이다마키 코쉬 지휘관, 키예프 아르세날 봉기 진압
  • 1918.11–1919.02우크라이나 집정내각(디렉토리야) 군사총책
  • 1919.02–1920.12집정내각 수반 겸 우크라이나 인민공화국군 총사령관
  • 1920.04폴란드와 바르샤바 조약 체결, 대볼셰비키 동맹
  • 1924–1926파리 망명정부에서 주간지 『트리주브(Тризуб)』 발행

텔레키 팔

Teleki Pál

「붉은 지도」를 만든 지리학자로 두 차례 총리를 지내고 1941년 독일군 통과에 항의하듯 자살한 정치인

부다페스트에서 태어난 트란실바니아 귀족 가문 출신의 지리학자로, 대학 교수이자 학술원 회원, 헝가리 스카우트 연맹 수장이었다. 1918~1919년 1910년 인구조사에 바탕한 민족 분포도 「붉은 지도」를 만들었다. 1920년 외무장관으로 트리아농 조약 조인을 지켜보았고, 7월 총리가 되어 누메루스 클라우수스법 시기의 정부를 이끌다 1921년 4월 물러났다. 1939년 다시 총리가 되어 제2차 유대인법의 전문을 쓰고 제3차 유대인법을 준비했다. 1941년 4월 3일 독일군의 유고슬라비아 침공 통과가 확실해지자 자살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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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18–1919「붉은 지도」 작성
  • 1920외무장관, 트리아농 조약 조인
  • 1920–1921총리
  • 1938교육장관
  • 1939–1941총리
  • 1941자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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Said Olimxon
반혁명 세력 부하라 에미르국 우즈베크인 (망기트 왕조) 1880–1944 → 망명지에서 사망

1920년 붉은 군대에 쫓겨 아프가니스탄으로 망명한 부하라 에미르국의 마지막 에미르

1880년 부하라에서 에미르 압둘아하드 칸의 아들로 태어나 열세 살에 상트페테르부르크로 보내져 니콜라이 사관학교에서 3년간 통치와 군사를 배웠고, 돌아와 나사프와 카르마나의 총독을 지냈다. 1911년 망기트 왕조의 12대이자 마지막 에미르가 되었다. 즉위 초에는 뇌물과 자의적 징세를 금하는 개혁을 내걸었으나 곧 전통파의 손을 들었고, 1917년 이후 청년부하라인 등 개혁파를 탄압했다. 1918년 3월 콜레소프가 이끈 볼셰비키의 공격을 물리쳤지만, 1920년 8월 말 부하라 작전 중 두샨베를 거쳐 카불로 달아났다. 망명지에서 영국과 손잡고 권력을 되찾으려 했고 바스마치를 지원했다고도 하며, 1944년 카불에서 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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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896러시아 정부로부터 부하라 왕세자로 확인받음
  • 1911–1920부하라 에미르
  • 1920–1944아프가니스탄 망명

할레르 이슈트반

Haller István
헝가리 국가기관 반혁명 세력 헝가리 헝가리 1880–1964 부다페스트에서 사망

1920년 종교·교육장관으로서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한 기독교사회주의 정치인

메죄페트리에서 태어나 서트마르 신학교를 4년 다니다 나와 기자가 되었고, 기독교사회주의 신문 『이거즈 소』와 일간지 『우이 러프』를 편집했으며 1908~1918년 가톨릭 인민연맹 사무총장을 지냈다. 평의회 공화국이 무너진 뒤 프리드리히 정부의 선전장관을 거쳐 1919년 11월부터 1920년 12월까지 종교·교육장관을 지냈다. 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을 준비해 국민의회에 제출했으며, 이 법은 20세기 유럽 최초의 반유대법으로 흔히 일컬어진다. 1920년 기독교민족연합당 대표가 되었으나 곧 의석을 잃었고, 1945년 체포될 무렵에는 직물상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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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 1905–1909『이거즈 소』·『우이 러프』 편집
  • 1908–1918가톨릭 인민연맹 사무총장
  • 1919프리드리히 정부 선전장관
  • 1919–1920종교·교육장관
  • 1920누메루스 클라우수스 법안 제출
  • 1945체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