marxisme occidental / Westlicher Marxismus · 1923–

서구 마르크스주의

Western Marxism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제1차 세계대전 뒤 혁명이 실패한 서유럽·중부 유럽에서 형성된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흐름으로, 마르크스 사상의 철학적·문화적 측면을 앞세워 정통 마르크스주의와 마르크스-레닌주의의 경제주의적·결정론적 해석에 맞선 이론가들을 느슨하게 묶는 이름이다. 1923년 루카치 죄르지의 『역사와 계급의식』과 카를 코르슈의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이 출발점이며, 안토니오 그람시, 프랑크푸르트 학파, 사르트르, 알튀세르 등이 이 흐름에 든다. 메를로퐁티가 1955년 이 말을 퍼뜨렸고, 페리 앤더슨은 1976년 정치적 실천과의 구조적 분리, 철학·방법론·문화로의 이동, 대학 강단으로의 후퇴를 그 특징으로 정리했다.

상세

명칭과 범위

'서구 마르크스주의'라는 말의 첫 용례는 1923년 코민테른이 루카치와 코르슈의 저작을 공격한 논쟁으로 거슬러 올라가며, 1930년에는 코르슈 자신이 코민테른에 반대하는 자신과 동료들을 '서구 공산주의자'라고 불렀다. 이 표현을 널리 퍼뜨린 사람은 모리스 메를로퐁티로, 1955년 『변증법의 모험』 제2장의 제목이 「'서구' 마르크스주의」였다. 페리 앤더슨이 1976년 이 흐름을 하나의 이론적 전통으로 묶어 분석하면서 용어가 자리를 잡았다. 지리적 이름이지만 서방의 마르크스주의자 모두를 가리키지는 않으며, 대체로 소련 바깥의 비공식 마르크스주의 사상을 뜻한다. 앤더슨에 따르면 마르크스주의 이론의 무게중심도 1920년 이전의 독일·폴란드·오스트리아·러시아에서 독일·프랑스·이탈리아로 옮겨 갔다.

패배 속에서 나온 철학

배경은 1917년 10월 혁명 이후 1918~1923년 독일·헝가리·이탈리아에서 혁명 운동이 꺾인 경험이다. 첫 세대 이론가들은 정치 지도자였다. 루카치는 1919년 헝가리 평의회 공화국에서 문화 담당 인민위원 대리를 지냈고, 코르슈는 1923년 튀링겐의 공산당 참여 정부에서 법무장관이었으며, 그람시는 이탈리아 공산당 창당 지도자였다. 혁명이 실패하자 루카치는 망명과 정치적 침묵으로, 코르슈는 독일 공산당 제명으로, 그람시는 무솔리니 정권의 투옥으로 정치 활동이 끊겼다. 1923년의 『역사와 계급의식』은 엥겔스의 자연변증법과 레닌의 반영론을 거부하고 '총체성의 관점'을 마르크스주의 방법의 본질로 내세우며 물화 개념을 제시했다. 같은 해 코르슈의 『마르크스주의와 철학』은 제2인터내셔널의 정통 마르크스주의가 경직된 실증과학으로 굳었다고 비판했다. 두 책은 1924년 코민테른 제5차 대회에서 그리고리 지노비예프에게 규탄받았고, 소련 철학자 아브람 데보린도 『역사와 계급의식』을 공격했다. 그람시는 1929~1935년 옥중에서 쓴 『옥중수고』에서 지배계급이 국가의 강제력만이 아니라 시민사회의 제도를 통해 얻어 낸 동의로 지배를 유지한다는 헤게모니론과, 서구에서는 러시아식 기동전이 아니라 긴 '진지전'이 필요하다는 전략론을 폈다.

프랑크푸르트에서 파리와 로마로

1924년 펠릭스 바일의 노력으로 세워진 프랑크푸르트 사회연구소는 1930년대 막스 호르크하이머가 소장을 맡은 뒤 노동운동 실증 연구에서 '사회철학'과 '문화비판'으로 방향을 틀었고, 그 '비판 이론'은 제2차 세계대전 뒤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주된 언어가 되었다. 1933년 나치 집권 뒤 미국으로 망명한 호르크하이머와 아도르노는 1947년 『계몽의 변증법』에서 이성을 통한 해방의 기획이 새로운 지배로 뒤집혔다고 진단했다. 헤르베르트 마르쿠제는 『에로스와 문명』(1955)과 『일차원적 인간』(1964)으로 1960년대 신좌파에 큰 영향을 주었다. 전후 프랑스에서는 장폴 사르트르가 『변증법적 이성 비판』(1960)으로 실존주의와 마르크스주의의 종합을 꾀했고, 1956년 헝가리 봉기가 진압된 뒤 앙리 르페브르 등이 잡지 『아르귀망』을 중심으로 마르크스주의적 인간주의의 스탈린주의 비판을 펼쳤다. 1960년대 중반 루이 알튀세르는 『마르크스를 위하여』와 『'자본'을 읽자』(1965)에서 '인식론적 단절'과 이론적 반인간주의를 내세워 인간주의적 마르크스주의에 맞섰다. 이탈리아에서는 갈바노 델라 볼페와 루초 콜레티가 그람시의 역사주의와 헤겔적 전통을 비판했다.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헤겔적·인간주의적 흐름에서 출발했지만 뒤에는 구조주의 마르크스주의처럼 강하게 반인간주의적인 갈래까지 품게 되었다.

공통 특징과 이웃 조류와의 차이

앤더슨은 이 흐름을 마르크스·엥겔스에서 카우츠키·레닌·룩셈부르크·트로츠키로 이어지는 '고전 마르크스주의'와 대비했다. 고전 전통의 이론가들은 노동계급 조직의 지도자나 활동가였고 자본주의 경제의 운동 법칙과 국가·혁명 전략을 다뤘다. 반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후속 세대는 거의 모두 대학에 몸담은 학자였고, 인식론과 방법론, 문화적 상부구조, 특히 예술과 미학에 힘을 쏟았다. 앤더슨은 난해한 문체와 공통의 잠재적 비관주의도 특징으로 꼽았다. 같은 반스탈린주의 흐름이라도 아이작 도이처·에르네스트 만델로 이어진 트로츠키주의 전통은 정치와 경제에 집중하고 국제주의 조직 건설을 붙든 '정반대 극'으로 놓인다. 평의회 공산주의와도 겹치지만 같지 않다. 안톤 판네쿠크와 헤르만 호르터의 네덜란드 좌파 공산주의는 서구 부르주아지의 힘이 문화적 헤게모니에 기댄다고 보고 노동계급의 의식을 강조해 서구 마르크스주의의 정치적 선구가 되었지만, 그 자체는 레닌주의 정당을 거부한 정치 노선이었다. 루카치와 그람시는 정치 실천에서는 공산주의 운동과 레닌주의에 충실했다. 1970~1980년대 이탈리아·스페인·프랑스 공산당의 유로코뮤니즘이 소련의 영향을 거부한 정당의 노선이었다면, 서구 마르크스주의는 정당 노선이 아니라 이론가들의 지적 전통이다. 스탈린주의와의 관계도 모호해서, 그것을 온전히 받아들인 적도 적극적으로 맞서 싸운 적도 없다는 평가가 있다.

평가와 그 뒤

1950년대 말 루카치는 프랑크푸르트 학파를 비관주의와 혁명 정치로부터의 거리 때문에 비판하면서, 이들이 심연 가장자리에 선 안락한 '그랜드 호텔 어비스'에 머문다고 꼬집었다. 앤더슨은 1968년 5월 프랑스에서 시작된 학생·노동자 봉기가 반세기 만에 서구에서 마르크스주의 이론과 대중 혁명 실천의 재결합 가능성을 다시 열었다고 보았고, 그런 재결합은 바로 그 분리 위에 서 있던 서구 마르크스주의 전통의 소멸을 뜻한다고 결론지었다. 러셀 저코비는 반대로 이 전통의 철학적 전환을 정통 마르크스주의를 재검토하는 데 필요한 진전으로 평가했다. 위르겐 하버마스는 프랑크푸르트 학파 '2세대'를 대표하며 『의사소통행위이론』(1981)으로 비판 이론의 토대를 새로 세우려 했다. 1970~1980년대에는 미셸 푸코와 장프랑수아 리오타르 같은 후기구조주의자들이 이 전통의 중심 개념인 '총체성'을 공격했고, 많은 옛 서구 마르크스주의자가 그 개념을 버리고 차이와 우연성으로 관심을 옮겼다.

관련 인물

관련 역사 사건

출처

  1. 위키백과 (영문)
  2. fr.wikipedia.org
  3. de.wikipedia.org
  4. 위키백과 (영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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