추축국 점령하의 유럽: 협력과 저항
1939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추축국은 유럽 각지를 어떤 방식으로 다스리고 수탈했으며, 점령지의 사람들은 누가 왜 협력하고 누가 어떻게 저항했는가?
1941~1942년 절정기에 추축국은 유럽 대륙 인구의 절반 이상을 다스렸다. 지배 방식은 병합, 폴란드 총독부, 국가판무관부, 군정, 크비슬링·네디치·파벨리치·비시 정부 같은 협력 정권으로 제각각이었지만, 어디서나 점령은 수탈이었다. 「기아 계획」과 그리스의 대기근, 약 1,200만 명의 강제노동, 그리고 점령된 폴란드의 절멸수용소와 동유럽 곳곳의 대량 총살로 유대인 약 600만 명이 살해된 홀로코스트가 점령 체제 아래 이루어졌고, 협력 정부와 현지 행정, 무장친위대의 외국인 약 50만 명이 그 집행에 가담했다. 저항은 지하 신문과 파업에서 게릴라전과 봉기까지 이어졌고, 1941년 6월 이후 공산당이 이끄는 운동과 망명정부 계열 운동이 나란히, 때로는 서로 맞서며 커졌다. 점령군은 인질 처형 비율과 「밤과 안개 명령」, 리디체·크라구예바츠·오라두르 같은 학살로 보복했다. 1944~1945년 파리·바르샤바·슬로바키아·프라하의 봉기와 함께 점령은 끝났고, 해방된 나라들은 협력자 청산에 들어갔다.
점령의 지도: 병합, 총독부, 판무관부, 군정
1941~1942년 절정기에 독일과 이탈리아를 비롯한 추축국은 유럽 대륙 인구의 절반 이상을 직접 통치, 민정 점령, 군사 점령, 괴뢰국가를 통해 다스렸다. 지배 방식은 하나가 아니었다. 오스트리아·주데텐란트·메멜·폴란드 일부·오이펜말메디는 법으로 제국에 편입되었고, 룩셈부르크·알자스·로렌·하부 슈타이어마르크·상부 크라인·비아위스토크 지구는 「민정장관」 아래 국제법상 선언 없이 사실상 병합되었다. 보헤미아·모라비아 보호령과 폴란드 총독부는 반(半)자치 지역이면서도 제국의 일부로 여겨졌다. 1 2
폴란드는 그 모든 방식의 실험장이었다. 1939년 10월 8일과 12일 히틀러의 포고로 서부 폴란드가 독일에 병합되었고, 나머지 땅에는 10월 26일 한스 프랑크를 총독으로 하는 총독부가 세워졌다. 1940년 10월 2일 히틀러와 프랑크의 회동을 적은 마르틴 보어만의 메모는 총독부를 「폴란드인 보호구역, 거대한 폴란드인 노동수용소」라 부르고 폴란드 지식인은 모두 죽여야 한다고 적었다. 1941년 3월 프랑크는 히틀러가 이 지역을 15~20년 안에 「순수한 독일 땅」으로 만들기로 했다고 부하들에게 전했다. 3) 4
네덜란드와 노르웨이에는 민간인 국가판무관이 들어섰다. 네덜란드의 판무관은 오스트리아 마지막 총리였던 아르투어 자이스잉크바르트였다. 서·북유럽의 판무관부는 기존 행정 구조를 유지하며 「대게르만 제국」으로의 편입을 준비하는 과도 단계로 구상되었다. 반면 독소전 개전 직후 알프레트 로젠베르크가 제안한 동부의 판무관부, 곧 발트 3국과 벨라루스의 오스트란트와 1941년 8월 20일 에리히 코흐가 맡은 우크라이나는 독일인 정착을 위한 「생존공간」과 자원 수탈의 땅으로서 새 통치 구조를 받았다. 오스트란트의 사정은 「독일 점령하의 발트 3국」 항목이 다룬다. 5 6 7
그 밖의 땅은 군정이나 현지 협력 정권 아래 놓였다. 벨기에와 북프랑스는 1940~1944년 군정 아래 있었다. 세르비아에서는 독일 군사령관이 최고 권한을 쥐었고, 밀란 네디치의 「구국정부」는 국제법상 지위도 독일이 준 것 이상의 권한도 없는 독일 통치의 도구였다. 1941년 4월 10일에는 안테 파벨리치의 파시스트 조직 우스타샤가 다스리는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히틀러와 무솔리니의 후원으로 세워졌다. 그리스는 독일·이탈리아·불가리아의 점령 구역으로 나뉘었고 아테네와 테살로니키 같은 요지는 독일이 차지했다. 이탈리아는 1940년 6월부터 프랑스 남동부 일부를 점령했고, 1942년 11월 독일이 비시 정부의 자유지대를 점령할 때 점령 구역을 크게 넓혔다. 프랑스의 경우는 「프랑스 침공과 비시 정부」 항목에서 이어진다. 5 8 9 10 11
수탈: 굶주림과 강제노동
점령은 무엇보다 수탈이었다. 1941년 5월 2일 독소전을 준비하는 독일 차관 회의에서 처음 정식화된 「기아 계획」은 헤르베르트 바케가 설계한 것으로, 소련 점령지의 식량을 거두어 독일군과 독일 본국에 돌리고 그 결과 동유럽에서 3,100만~4,500만 명이 굶어 죽는 인위적 기근을 의도했다. 계획은 부분적으로만 실행되었지만 수백만 명을 죽였다. 동유럽에 독일인을 정착시키고 슬라브인 등 원주민을 학살·추방하려던 「동부 종합계획」도 전쟁 중 부분적으로 실행되었다. 12 13
그리스에서 독일과 이탈리아는 서·북유럽에서 쓰던 「합리적」 착취 대신 약탈을 택했다. 헤르만 괴링은 1942년 8월 6일 점령지 판무관과 군사령관들에게 보낸 편지에서 「당신 관할의 사람들이 굶어 죽는다 해도 나는 조금도 개의치 않는다. 독일인이 굶지 않는 한 그들은 죽게 내버려 두라」고 썼다. 징발과 연합국의 해상봉쇄, 침공으로 망가진 기반시설과 암시장이 겹쳐 1941~1942년 겨울 대기근이 닥쳤고, 독일군 기록으로 1941년 12월 아테네에서만 하루 300명이 죽었다(적십자 추산 400명). 1942년 2월 봉쇄가 풀리고 스웨덴 배가 캐나다 밀을 실어 오면서 사망률이 내려갔지만, 점령기 그리스의 기아·영양실조 사망은 약 30만 명으로 추산된다. 14)
노동력도 거두어 갔다. 독일은 스무 나라 가까이에서 약 1,200만 명을 끌고 갔고 그 3분의 2가 중·동유럽 출신이었다. 1944년 늦여름 독일 기록에는 외국인 민간 노동자와 전쟁포로 760만 명이 올라 있었는데, 대부분 강제로 데려온 이들로 독일 전체 노동력의 4분의 1에 이르렀다. 「OST」 표지를 달고 철조망 친 수용소에서 감시받으며 산 소련·폴란드 출신 「동방 노동자」는 280만~300만 명이었고, 총독부 출신 폴란드인 노동자는 옷에 「P」 표지를 달아야 했다. 15
서유럽에서는 협력 정부가 동원을 맡았다. 비시 정부의 피에르 라발은 1942년 6월 22일 노동자 세 명이 독일로 가면 프랑스 포로 한 명을 돌려받는다는 「교대(relève)」를 발표했다. 자원자가 모자라자 라발이 서명한 1943년 2월 16일 법은 20세 이상 남성 전부를 강제노동징용(STO)의 대상으로 삼았다. 1942년 6월부터 1944년 7월까지 프랑스 노동자 60만~65만 명이 독일로 보내졌고, 프랑스는 소련과 폴란드 다음가는 강제노동 공급지가 되었다. 16
협력의 여러 얼굴
「협력(collaboration)」이 적과의 반역적 협조라는 오늘날의 뜻을 얻은 것은 1940년 10월 24일 몽투아르에서 필리프 페탱이 히틀러를 만난 뒤였다. 독일이 전쟁에 이겼다고 믿은 페탱은 독일과의 「협력」을 받아들인다고 프랑스인들에게 알렸다. 역사가 스탠리 호프먼은 협력을 필요를 마지못해 인정한 「비자발적」 협력과 그 필요를 이용하려 한 「자발적」 협력으로 나누었고, 반공이나 이념 때문에 히틀러 독일과의 더 강한 협력을 원한 파시스트와 나치 동조자를 따로 「협력주의자(collaborationnistes)」라 불렀다. 17
노르웨이의 비드쿤 크비슬링은 1940년 4월 9일 독일 침공이 진행되던 중 라디오 방송으로 권력을 잡으려 했으나, 독일이 합법 정부를 통해 점령을 정당화하려 했기에 실패했다. 1942년 2월 1일 그는 독일이 승인한 정부의 총리가 되었고, 그의 성은 전쟁이 끝나기도 전에 여러 북유럽 언어에서 「협력자」·「반역자」의 동의어가 되었다. 협력은 군복으로도 이어졌다. 전쟁 말까지 무장친위대에 복무한 외국인은 압력을 받거나 징집된 이들을 포함해 약 50만 명이었고, 자원·강압·징집이 뒤섞여 만들어진 이 부대들과 친위대 경찰 부대 가운데 여럿이 동유럽과 발칸에서 전쟁범죄에 연루되었다. 18 19
홀로코스트의 집행도 협력 정부와 현지 행정에 달려 있었다. 불가리아 정부는 자국이 점령한 그리스와 유고슬라비아 땅의 유대인 1만 1,000명을 넘겨 트레블링카에서 죽게 했지만, 국내 저명인사와 단체들의 반대로 전쟁 전 영토의 유대인 이송은 허락하지 않았다. 헝가리 정부는 1944년 3월 독일이 헝가리를 점령할 때까지 약 84만 6,000명의 유대인 대부분을 넘기지 않았다. 그러나 3월부터 7월 9일까지 43만 4,000명이 기차에 실려 대부분 아우슈비츠로 보내져 도착 즉시 살해되었다. 그 과정은 「독일 점령하의 헝가리」 항목에 있다. 20
점령지의 홀로코스트
1941년부터 1945년까지 나치 독일과 그 협력자들은 독일 점령하 유럽에서 유대인 약 600만 명, 유럽 유대인의 약 3분의 2를 조직적으로 살해했다. 살인은 주로 동유럽 곳곳의 대량 총살과, 점령된 폴란드 땅의 절멸수용소 아우슈비츠비르케나우·트레블링카·베우제츠·소비보르·헤움노·마이다네크의 가스실에서 이루어졌다. 첫 절멸수용소인 헤움노는 병합된 바르텔란트에서 1941년 12월 가스 트럭으로 가동을 시작했고, 1942년 1월 20일 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반제 회의 뒤 유럽의 모든 유대인을 죽이는 「최종 해결」이 실행에 들어갔다. 20
폴란드에서는 유대인 학살과 함께 폴란드 사회의 지도층 제거가 진행되었다. 전쟁 전에 이미 만들어 둔 수배 명부는 「독일에 비우호적인」 폴란드 엘리트와 지식인 6만 1,000여 명을 올려 두었고, 성직자·공무원·의사·교사·언론인 수만 명이 처형되거나 수용소로 보내졌다. 대학 교수와 교사, 사제를 겨냥한 「AB 작전」, 크라쿠프 교수들을 체포한 「크라쿠프 특별작전」이 그 예다. 총독부 지역의 1939년 인구 가운데 400만 명이 1944년 말 소련군이 들어올 때까지 목숨을 잃었고, 그 가운데 200만 명에 이르는 유대인이 있었다. 3) 4
구출의 길이 열린 곳도 있었다. 덴마크에서는 독일 외교관 게오르크 페르디난트 두크비츠가 1943년 9월 28일 체포 계획을 사회민주당에 흘렸고, 저항운동과 시민들이 유대인 8,000명 가운데 7,500명을 바다 건너 중립국 스웨덴으로 피신시켰다. 이송된 464명을 위한 덴마크의 개입까지 더해 덴마크 유대인의 99%가 살아남았다. 폴란드에서는 1942년 9월 유대인 지원 비밀조직 「제고타」가 세워져, 전쟁에서 살아남은 폴란드 유대인의 절반, 5만 명이 넘는 이들을 어떤 식으로든 도왔다. 이탈리아 점령하의 남프랑스로도 비시 프랑스의 박해를 피해 유대인 수천 명이 옮겨 갔다. 21 22 11
저항: 누가, 어떻게
저항은 비협조와 선전에서 추락한 조종사 숨기기, 도시 탈환을 위한 전투까지 여러 형태를 띠었다. 무장 저항에는 배급표와 신분증을 빼앗는 습격, 암살, 봉기, 게릴라전이 있었고, 비무장 저항에는 사보타주, 파업과 시위, 첩보, 지하 신문, BBC 방송 몰래 듣기, 강제노동과 이송을 피하는 사람 숨기기, 연합군 병사 탈출로, 문서 위조가 있었다. 조직된 저항에 참여한 사람은 소수였다. 서유럽에서는 인구의 1~3%로 추정되고, 점령이 훨씬 가혹했던 동유럽에서는 비율이 높아 폴란드는 10~15%에 이르렀다. 수동적 비협조는 훨씬 흔했다. 22
저항운동은 정치적으로 크게 두 갈래였다. 하나는 거의 모든 나라에 있던 국제주의적이고 대개 공산당이 이끄는 반파시스트 저항이었고, 다른 하나는 나치 독일과 공산주의 모두에 맞선 민족주의 단체들이었다. 폴란드에서는 1939년 11월 17일 망명정부의 브와디스와프 시코르스키 장군의 명령으로 무장투쟁연맹이 세워져 1942년 2월 14일 국내군이 되었고, 1944년 여름 약 40만 명으로 유럽 최대의 저항 조직이 되었다. 유고슬라비아에서는 드라자 미하일로비치의 체트니크와 요시프 브로즈 티토의 파르티잔이, 그리스에서는 공산당이 이끄는 민족해방전선(EAM)과 다른 조직들이 따로 싸웠다. 그 경과는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전쟁」과 「그리스 저항과 12월 사건」 항목에 있다. 22 23
공산당의 저항은 1941년 6월을 경계로 달라졌다. 프랑스 공산당은 처음에 이 전쟁을 제국주의 열강 사이의 싸움으로 본 소련의 공식 견해를 따라 중립을 지켰다가, 독일이 소련을 침공한 뒤 무장 저항으로 돌아섰다. 샤를 티용이 군사 부문을 맡은 의용유격대(FTP)가 그 무장 조직이었다. 다만 그 전에도 공산당이 앞장선 저항은 있었다. 1941년 2월 25일 비합법 네덜란드 공산당은 암스테르담 유대인 구역의 체포와 포그롬에 맞서 총파업을 조직했고, 이튿날까지 30만 명이 참여했다. 6월 이후에는 1941년 7월 7일 세르비아와 13일 몬테네그로에서 공산당이 시작한 봉기가 일어났고, 그해 가을 세르비아 서부의 「우지체 공화국」은 점령된 유럽에서 처음 해방된 땅이 되었다. 그리스의 그리스인민해방군(ELAS)은 1942년 6월 7일 첫 작전을 벌였다. 24 25 22
저항운동은 연합국의 지원에 크게 기댔다. 영국은 1940년 7월 22일 점령지에서 저항의 기운을 키우고 반격 때 공개 투쟁에 나설 세력을 준비하려고 특수작전집행부(SOE)를 세웠다. 소련 파르티잔이나 프랑스 레지스탕스 같은 큰 조직도 1943년 말까지는 독일군 작전을 크게 방해하지 못했다고 평가되며, 그 군사적 효과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군사사가 에번 모즐리는 저항이 연합국의 전략 목표에 크게 이바지하지 못했다고 보는 반면, 예르겐 해스트루프는 저항이 특히 심리 면에서 전쟁의 흐름에 결정적인 영향을 주었다고 본다. 22
절멸에 맞선 유대인의 저항도 있었다. 1943년 4월 19일 바르샤바 게토는 게토를 한 구역씩 파괴하라는 친위대 경찰 사령관 위르겐 슈트로프의 항복 요구를 거부하고 봉기했다. 싸움은 5월 16일까지 이어졌고, 슈트로프는 유대인 최소 5만 6,065명을 죽이거나 붙잡았으며 독일 측 사상자는 사망 16명을 포함한 110명이라고 보고했다. 같은 해 소비보르, 이듬해 아우슈비츠에서도 수감자 봉기가 일어났다. 26 22
보복의 논리
점령군은 저항을 집단 처벌로 다스렸다. 1941년 9월 16일 국방군 최고사령부는 빌헬름 카이텔이 서명한 히틀러의 명령을 내려, 점령지의 모든 공격을 「공산주의자의 소행」으로 보고 독일군 한 명이 죽으면 인질 100명, 다치면 50명을 쏘게 했다. 세르비아에서는 같은 방침이 이미 1941년 4월 28일부터 시행되고 있었다. 10월 21일 크라구예바츠에서 독일군은 고등학생 144명을 포함해 2,778~2,794명의 세르비아인 남성과 소년을 총살했다. 이 비율은 1943년 2월 절반으로 줄었다가 그해 안에 폐지되었다. 27
1941년 12월 7일 히틀러는 점령지의 정치 활동가와 저항 「협력자」를 가두거나 처형하거나 제국의 「밤과 안개」 속으로 사라지게 하라는 「밤과 안개 명령」을 내렸고, 카이텔은 이를 곧바로 시행 지침으로 내려보냈다. 1942년 5월 27일 프라하에서 망명 체코슬로바키아군의 얀 쿠비시와 요제프 가브치크가 보헤미아·모라비아 부보호관 하이드리히를 습격해 죽음에 이르게 하자, 6월 10일 리디체 마을의 15세 이상 남성 173명이 모두 총살되었다. 이 보복으로 죽은 체코인은 1만 5,000명이 넘었다. 28 22 29
파르티잔 토벌은 마을 전체를 겨냥했다. 1943년 12월 13일 국방군 제117엽병사단은 주변 산악의 그리스 저항군을 포위하는 작전 중에 칼라브리타의 남성 주민을 거의 모두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노르망디 상륙 나흘 뒤인 1944년 6월 10일에는 같은 날 두 곳에서 학살이 일어났다. 프랑스 오라두르쉬르글란에서는 무장친위대 중대가 여성과 어린이를 포함한 주민 642명을 죽였고, 그리스 디스토모에서는 파르티잔의 습격에 대한 보복으로 친위대가 남녀노소 228명을 죽였다. 30 31 32
해방과 청산, 1944~1945년
연합군이 다가오자 저항운동은 봉기로 해방에 직접 참여하려 했다. 파리에서는 몇 주에 걸친 파업 끝에 1944년 8월 19일 레지스탕스의 군사 조직인 프랑스 국내군(FFI)이 독일 수비대에 맞서 봉기했다. 임시정부 수반 샤를 드골은 연합군 군정과, 앙리 롤탕기 대령이 이끄는 공산당 계열 의용유격대의 통제되지 않는 봉기를 모두 앞지르려 파리 해방을 서둘렀다. 8월 25일 디트리히 폰 콜티츠가 독일 수비대를 항복시켰고, 같은 날 파리에 들어온 드골은 해방을 프랑스 인민의 공으로 돌렸다. 그 경과는 「프랑스 레지스탕스와 해방」 항목에 있다. 33
모든 봉기가 성공하지는 않았다. 폴란드 국내군은 「폭풍 작전」의 하나로 8월 1일 바르샤바에서 봉기했으나 10월 2일 진압되었고, 1943년 7월부터 국내군을 지휘한 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는 독일군에 항복했다(「바르샤바 봉기」). 슬로바키아에서는 8월 29일 독일군의 진주에 맞서 군 일부가 요제프 티소의 협력 정권과 독일에 대항해 봉기했고, 중심지 반스카비스트리차는 10월 27일 함락되었다. 불가리아에서는 9월 9일 공산당이 이끈 조국전선이 친추축 정부를 무너뜨렸고, 1945년 5월 5일에는 연합군이 다가오는 가운데 프라하에서 봉기가 일어났다. 22 23 34
해방 뒤에는 청산이 따랐다. 프랑스에서는 레지스탕스와 군중이 밀고자·지방 관리·민병대원으로 의심받은 이들을 9,000~1만 명 즉결 처형했고, 「수평적 협력」을 했다는 여성 약 2만 명의 머리를 공개적으로 깎았다. 드골의 임시정부가 세운 특별법원은 1944~1951년 사형 6,763건(궐석 3,910건)을 선고했고, 출석 사형수 2,853명 가운데 약 73%가 감형되어 피에르 라발을 포함한 791명이 처형되었다. 5만 명 가까이는 새로 만든 「국민 모욕죄」로 공민권을 잃었다. 페탱은 사형을 선고받았으나 드골이 종신형으로 감형했다. 크비슬링은 1945년 10월 24일 총살되었고, 한스 프랑크는 뉘른베르크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아 1946년 10월 16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35 18 4
1945년 독일이 패하자 약 1,100만 명의 외국인이 「난민(DP)」으로 풀려났고, 그 대부분이 강제노동자와 전쟁포로였다. 소련으로 520만 명, 폴란드로 160만 명, 프랑스로 150만 명, 이탈리아로 90만 명이 돌아갔다. 점령의 경험과 저항의 분열은 전후 유럽 각국의 정치를 갈랐고, 동유럽에서 그것이 어떻게 이어졌는지는 「동유럽 인민민주주의 정권의 수립」 항목이 다룬다. 15
결과
1945년 점령이 끝났을 때 약 1,100만 명의 강제노동자·전쟁포로가 난민으로 남았고, 유럽 유대인의 3분의 2가 살해된 뒤였다. 프랑스의 즉결 처형과 특별법원, 크비슬링과 한스 프랑크의 처형처럼 각국은 협력자를 처벌했지만, 그 범위와 방식은 나라마다 달랐다. 저항운동 안의 분열은 해방 뒤에도 이어졌다. 그리스에서는 1944년 12월 아테네 시가전으로, 유고슬라비아와 알바니아에서는 공산당 파르티잔의 집권으로, 폴란드에서는 국내군과 소련이 후원한 정부의 대립으로 나타났다. 저항의 기억은 전후 프랑스·이탈리아 공산당의 정치적 위신과 동유럽 새 정권의 정통성 주장의 바탕이 되었다.
연표와 지도
- 11939.10.26폴란드 총독부
서부 폴란드를 병합한 독일이 나머지 땅에 한스 프랑크의 총독부를 세웠다.
- 1940.04.09크비슬링의 방송 쿠데타
독일의 노르웨이 침공 중 크비슬링이 라디오로 권력을 잡으려다 실패했다.
- 1940.07.22특수작전집행부 창설
영국이 점령지 저항을 키우고 지원할 특수작전집행부를 세웠다.
- 1940.10.24몽투아르 회담
페탱이 히틀러를 만난 뒤 독일과의 「협력」을 받아들인다고 알렸다.
- 21941.02.252월 파업
네덜란드 공산당이 유대인 체포에 맞선 총파업을 조직해 30만 명이 참여했다.
- 1941.04.10크로아티아 독립국
점령된 유고슬라비아에 우스타샤의 크로아티아 독립국이 세워졌다.
- 1941.05.02기아 계획
독일 차관 회의가 소련 점령지의 식량 수탈과 인위적 기근을 계획했다.
- 1941.07.07세르비아 봉기
공산당이 시작한 봉기가 세르비아에서, 13일에는 몬테네그로에서 일어났다.
- 31941.10.21크라구예바츠 학살
인질 처형 비율에 따라 독일군이 약 2,800명을 총살했다.
- 1941.12.07밤과 안개 명령
점령지의 저항 혐의자를 흔적 없이 사라지게 하라는 히틀러의 명령이 내려졌다.
- 1942.01.20반제 회의
하이드리히가 주재한 회의 뒤 유럽 유대인 전부를 죽이는 「최종 해결」이 실행되었다.
- 41942.06.10리디체 학살
하이드리히 습격의 보복으로 리디체의 남성 173명이 총살되었다.
- 1943.02.16강제노동징용법
비시 정부가 20세 이상 남성 전부를 독일 노동 징용 대상으로 삼았다.
- 1943.04.19바르샤바 게토 봉기
게토가 항복을 거부하고 5월 16일까지 싸웠다.
- 1943.10덴마크 유대인 구출
유대인 8,000명 가운데 7,500명이 바다 건너 스웨덴으로 피신했다.
- 51943.12.13칼라브리타 학살
독일군이 칼라브리타의 남성 주민을 거의 모두 죽이고 마을을 불태웠다.
- 61944.06.10오라두르와 디스토모
같은 날 프랑스에서 642명, 그리스에서 228명이 친위대에 학살되었다.
- 71944.08.19파리 봉기
프랑스 국내군이 봉기했고 25일 독일 수비대가 항복했다.
- 81944.08.29슬로바키아 민족봉기
독일군 진주에 맞선 봉기가 10월 27일 반스카비스트리차 함락으로 꺾였다.
- 1945.05.05프라하 봉기
연합군이 다가오는 가운데 체코 저항운동이 프라하에서 봉기했다.
관련 인물 18명
점령국과 협력 정권10명
지도부2
집행 · 지휘6
1942년 8월 점령지 지휘관들에게 「독일인이 굶지 않는 한 그들은 죽게 내버려 두라」고 썼다.
친위대 전국지도자하인리히 힘러1900–1945바르텔란트의 첫 절멸수용소 헤움노 설치를 승인했다.
국가보안본부장, 보헤미아·모라비아 부보호관라인하르트 하이드리히1904–1942반제 회의를 주재했고, 1942년 프라하에서 습격당해 숨지자 리디체 학살이 뒤따랐다.
동부 점령지 장관알프레트 로젠베르크1893–1946소련 점령지를 여러 국가판무관부로 나누어 다스리자고 제안했다.
국방군 최고사령부 총장빌헬름 카이텔1882–1946인질 100 대 50의 처형 명령에 서명하고 「밤과 안개 명령」을 시행 지침으로 내려보냈다.
파리 군정사령관디트리히 폰 콜티츠1894–19661944년 8월 25일 파리의 독일 수비대를 항복시켰다.
저항운동과 망명정부8명
지도부8
1939년 11월 무장투쟁연맹을 세우게 했고, 이 조직이 국내군이 되었다.
국내군 사령관타데우시 부르코모로프스키1895–19661943년 7월부터 국내군을 지휘했고 바르샤바 봉기가 진압되자 항복했다.
프랑스 임시정부 수반샤를 드골1890–1970파리 해방을 서둘러 8월 25일 입성했고, 그의 임시정부가 협력자 재판을 제도화했다.
의용유격대 군사 책임자샤를 티용1897–1993프랑스 공산당의 무장 조직 의용유격대의 군사 부문을 맡았다.
프랑스 국내군 파리 지역 사령관앙리 롤탕기1908–20021944년 8월 18일 총파업과 총동원을 호소해 파리 봉기를 일으켰다.
유고슬라비아 파르티잔 총사령관요시프 브로즈 티토1892–1980파르티잔 최고사령부를 이끌고 네레트바 전투에서 본대를 빼냈으며, 1944년 그를 노린 드바르 공수 습격의 표적이 되었다.
체트니크 지도자드라자 미하일로비치1893–1946세르비아의 체트니크를 이끌었고, 1944년 미국의 추락 조종사 구출 작전을 도왔다.
그리스인민해방군(ELAS)을 일으킨 공산당원아리스 벨루히오티스1905–19451942년 2월 민족해방전선의 승인을 받아 무장 저항을 준비했고, 이것이 ELAS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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