쿠르스크 전투
스탈린그라드 이후 독일은 왜 쿠르스크 돌출부를 잘라 내려 했고 그 공세를 몇 달이나 미뤘으며, 미리 계획을 알았던 소련은 왜 먼저 치지 않고 방어를 택했나? 성채 작전은 어떻게 일주일 만에 멈췄고, 뒤이은 반격은 어떻게 동부전선의 주도권을 영구히 바꾸었으며, 프로호롭카와 사상자 수에 관한 서술은 왜 지금도 엇갈리나?
1943년 봄 제3차 하리코프 전투 뒤 쿠르스크를 가운데 둔 소련군 돌출부가 독일군 전선 안으로 튀어나왔다. 히틀러는 남북에서 돌출부의 밑동을 잘라 소련군을 포위하는 성채 작전을 명령했지만, 신형 판터와 티거를 기다리며 개시를 7월 5일까지 미뤘다. 루시 첩보망과 케언크로스 등을 통해 계획을 알게 된 소련은 주코프의 제안에 따라 먼저 방어하기로 하고, 깊이 300킬로미터에 이르는 방어대와 스텝 전선군 예비대를 마련했다. 북면에서 모델의 제9군은 포니리와 올호바트카에서 8~12킬로미터 만에 멈췄고, 남면의 만슈타인 부대는 35킬로미터를 나아갔으나 7월 12일 프로호롭카에서 제5근위전차군에 막혔다. 같은 날 소련의 쿠투조프 작전이 오룔 돌출부를 쳤고, 시칠리아 상륙까지 겹치자 히틀러는 공세를 멈췄다. 소련군은 8월 5일 오룔과 벨고로드, 23일 하리코프를 해방했다.

스탈린그라드 이후: 쿠르스크 돌출부의 형성
1943년 2월 2일 스탈린그라드에서 독일 제6군이 항복하자 붉은 군대는 남부 전선 전체로 공세를 넓혔다. 1월에 시작된 「별」 작전과 「질주」 작전으로 소련군은 하리코프와 벨고로드, 쿠르스크를 되찾았고, 쿠르스크는 2월 8일, 로스토프는 2월 14일 해방되었다. 독일 B집단군과 돈 집단군 사이에는 폭 160~300킬로미터의 틈이 벌어져, 캅카스에 있던 A집단군까지 돈강 남쪽에 갇힐 위험에 놓였다. 브랸스크·서부 전선군과 새로 만든 중부 전선군은 브랸스크와 스몰렌스크 사이에서 중부집단군을 포위하는 공세까지 준비하고 있었다. 2월의 독일군 남부 전선은 전략적 위기였다. 1 2
남부집단군 사령관 에리히 폰 만슈타인은 히틀러에게서 반격의 재량을 얻어 냈다. 프랑스에서 막 돌아온 친위대 기갑군단과 캅카스에서 빠져나온 기갑 부대를 모은 그는 2월 19일부터 21일에 걸쳐 헤르만 호트의 제4기갑군을 앞세워 소련 기동 부대의 측면을 쳤다. 너무 멀리 나아가 있던 소련군 선봉은 포위되어 무너졌고, 독일군은 3월 15일 하리코프를, 18일 벨고로드를 다시 차지했다. 이 제3차 하리코프 전투에서 소련군은 약 9만 명의 사상자를 냈다. 하리코프 시가전은 친위대 기갑군단에도 약 4,300명의 사상자를 남겼다. 1 2
3월 중순 봄의 해빙기(라스푸티차)가 길을 진창으로 만들고 양쪽 군대가 모두 지치면서 작전이 멈췄다. 그 결과 쿠르스크 시를 가운데 두고 남북 250킬로미터, 동서 160킬로미터에 이르는 소련군 돌출부가 독일군 점령지 안으로 튀어나왔다. 북쪽에는 독일군이 쥔 오룔 돌출부가, 남쪽에는 벨고로드·하리코프 지역이 있었다. 이 지형은 양쪽 모두에게 기회였다. 독일군에게는 돌출부의 밑동을 남북에서 잘라 그 안의 소련군을 포위할 수 있는 모양이었고, 소련군에게는 오룔과 하리코프의 독일군을 옆에서 칠 수 있는 발판이었다. 1 3
성채 작전: 계획과 거듭된 연기
바르바로사 작전 이래의 손실로 독일 육군은 정원보다 47만 명이 부족했고 보병과 포병이 특히 모자랐다. 1943년에 공세를 벌이려면 그 부담을 기갑 사단이 져야 했다. 만슈타인은 3월 10일 해빙기가 끝나자마자 돌출부를 빠르게 잘라 내자는 안을 냈고, 히틀러는 3월 13일 작전 명령 제5호로 쿠르스크 공세를 포함한 여러 공세를 승인했다. 그러나 중부집단군 사령관 귄터 폰 클루게는 병력이 약하다며 북쪽에서 곧바로 공격하자는 만슈타인의 제안을 거절했고, 4월 중순 공세는 미뤄졌다. 4월 15일 히틀러는 육군 참모총장 쿠르트 차이츨러가 초안을 쓴 작전 명령 제6호로 「성채」 작전을 5월 3일 무렵 시작하라고 명령했다. 1 4
계획은 이중 포위였다. 북쪽에서는 중부집단군의 발터 모델이 지휘하는 제9군이 돌출부 북면을 뚫고 남쪽으로 내려오고, 남쪽에서는 남부집단군의 호트 제4기갑군과 베르너 켐프의 켐프 분견군이 북쪽으로 올라가 쿠르스크 동쪽에서 만나 소련군 5개 군을 가두는 것이었다. 남부의 주공은 파울 하우서의 친위대 제2기갑군단이 맡았다. 그러나 4월 27일 모델은 히틀러를 찾아가 정찰 정보를 내보이며, 소련군이 돌출부 어깨에 강력한 진지를 쌓고 있고 준비가 길어질수록 작전의 명분이 사라진다고 경고했다. 그는 작전을 아예 포기하고 소련의 공세를 기다려 격파하거나 계획을 근본적으로 고치라고 권했다. 4월 중순까지 작전에 긍정적이던 만슈타인도 5월에는 같은 우려를 품었다. 1 5
5월 4일 뮌헨 회의에서 의견은 갈렸다. 만슈타인은 조기 공격을 주장하며 보병 2개 사단을 더 달라고 했고, 클루게는 연기에 강하게 반대하며 모델의 정보를 깎아내렸다. 군수장관 알베르트 슈페어는 기갑 부대를 다시 채우기 어렵다고 보고했고, 하인츠 구데리안 장군은 공격이 무의미하다고 했다. 5월 10일 구데리안이 「쿠르스크가 어디 있는지 아는 사람이나 있겠습니까」라고 묻자 히틀러는 「생각만 하면 속이 뒤집힌다」고 답했다. 그런데도 히틀러는 작전을 버리지 않았다. 그는 신형 판터 전차와 페르디난트 구축전차, 더 많은 티거 전차를 기다리며 개시일을 6월 12일, 20일, 7월 3일로 거듭 미루다가 7월 1일 7월 5일 개시를 발표했다. 6월에는 국방군 총사령부의 알프레트 요들이 선전 부서에 이 작전을 제한적 반격으로 그리라고 지시할 만큼 비관이 커져 있었다. 1 6
석 달의 공백 동안 독일군은 돌격 부대를 훈련시키고 기갑 사단을 보충했다. 공세에 나선 병력은 약 77만 7천 명, 전차와 돌격포 2,451대(동부전선 독일 기갑 전력의 70퍼센트), 야포와 박격포 7,417문이었고, 쿠르스크 전투는 동부전선 독일군 병력의 70퍼센트 이상을 빨아들였다. 그러나 보병 사단은 크게 부족했다. 공세를 늦춘 원인이던 판터 200대는 출발 엿새 전에야 전선에 도착해, 지형 정찰도 부대 단위 무선 훈련도 하지 못했고 변속기 결함까지 안고 있었다. 7월 5일 아침까지 16대가 고장으로 빠져 184대만 남았다. 1 6


소련의 선택: 정보와 종심 방어
소련 지도부는 독일군의 계획을 일찍 알았다. 스위스에서 독일 망명자 루돌프 뢰슬러가 운영한 「루시」 첩보망은 러도 샨도르의 소련 군 정보망을 통해 오룔과 하리코프의 독일군 집결과 쿠르스크 공세 계획을 모스크바에 보냈다. 소련은 영국 블레츨리 파크의 정부 암호학교에서 일하던 자국 첩자 존 케언크로스가 몰래 빼낸 독일 고위 암호 해독문으로 이를 확인했다. 러시아 측 서술에 따르면 케언크로스는 4월 말 남부 공세를 준비하던 독일 장군의 전문을 넘겼고, 그 안에는 공세의 시기와 병력, 신형 장비, 비행장 위치가 들어 있었다. 다만 루시의 정보원이 누구였는지는 지금도 분명하지 않다. 영국이 일부러 루시를 통로로 썼다는 주장도 있지만, 영국 정보기관의 공식 역사가 해리 힌즐리는 이를 부정했다. 7 1 8 9
스탈린과 일부 지휘관은 해빙기가 끝나는 대로 먼저 치고 싶어 했다. 그러나 최고사령관 대리 게오르기 주코프는 4월 8일 스탈린과 스타프카에 보낸 편지에서, 독일군이 오룔과 벨고로드에서 기갑 사단 13~15개로 쿠르스크를 칠 것이니 먼저 공격하지 말고 적을 방어선에 부딪혀 지치게 한 뒤 예비대로 총반격하자고 했다. 4월 12일 스탈린과 주코프, 참모총장 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 참모차장 알렉세이 안토노프가 모인 스타프카 회의가 이 방침을 받아들였다. 돌출부 북면은 콘스탄틴 로코솝스키의 중부 전선군이, 남면은 니콜라이 바투틴의 보로네시 전선군이 지키고, 그 뒤에 이반 코네프의 스텝 전선군이 예비로 섰다. 주코프와 바실렙스키는 스타프카 대표로 전선군들의 행동을 조정했다. 1 8
4월 말부터 7월 초까지 두 전선군은 각각 세 겹의 주방어대를 쌓았고, 민간인 30만 명 이상이 동원되었다. 지뢰밭, 철조망, 대전차호, 참호, 땅에 묻은 전차와 기관총 진지가 그물처럼 얽혔다. 주방어대 셋의 깊이가 약 40킬로미터, 뒤의 예비 방어대까지 합치면 양쪽 각각 130~150킬로미터였고, 스텝 전선군의 방어선까지 더하면 거의 300킬로미터에 이르렀다. 공병은 대전차 지뢰 50만 3,993개와 대인 지뢰 43만 9,348개를 묻었는데, 1킬로미터당 밀도가 모스크바 방어 때의 여섯 배였다. 보병은 참호 위로 전차를 지나가게 하는 훈련으로 전차 공포를 이겨 냈다. 소련군은 가짜 비행장과 거짓 무선, 야간 이동으로 병력을 감췄고, 독일군은 6월 중순 소련 전차 전력을 1,500대로 크게 낮춰 보았다. 1
독일군 후방에서는 빨치산이 철도와 통신을 끊었다. 6월 한 달 동안 중부집단군 뒤의 빨치산은 기관차 298대와 화차 1,222량, 다리 44개를 파괴했고, 쿠르스크 방면에서만 철도 공격이 1,092건 있었다. 예비대를 빼고도 소련군은 돌출부에 병력 약 130만 명, 전차 3,600대, 야포 2만 문, 항공기 2,792대를 모았다. 이는 붉은 군대 전체 병력의 26퍼센트, 항공기의 35퍼센트, 전차의 46퍼센트였다. 스텝 전선군까지 더한 소련군은 약 191만 명이었다. 주력 전차는 T-34였지만 3분의 1은 경전차였고, 76.2밀리미터 포를 단 T-34로는 티거와 판터의 정면 장갑을 뚫기 어려웠다. 1

북부 전선: 모델의 제9군과 포니리
전투는 7월 4일 저녁 남면에서 독일 보병이 관측 고지를 빼앗으며 시작되었다. 북쪽 중부 전선군 사령부에는 공격 임박 보고가 들어왔고, 7월 5일 새벽 2시쯤 주코프는 선제 포격을 명령했다. 포격은 독일군을 다소 늦추었지만 일정 자체를 흐트러뜨리지는 못했다. 같은 날 아침 소련 공군은 독일 비행장을 기습했으나 실패해, 7월 5일 하루에 176대를 잃었다. 루프트바페의 손실은 26대였다. 이날은 격추된 항공기 수로 항공전 역사상 가장 비싼 하루로 꼽힌다. 독일군은 새벽 5시쯤 포격을 시작했고, 북면에서 80분, 남면에서 50분 동안 이어진 포격 뒤 지상군이 나아갔다. 1
모델은 기갑 사단을 돌파 뒤의 전과 확대에 아끼려고 첫 공격을 돌격포와 중전차를 붙인 보병 사단으로 했다. 제9군은 5시 30분 9개 보병 사단과 1개 기갑 사단으로 소련 제13군과 제70군을 쳤다. 첫날 제47기갑군단은 약 10킬로미터를 들어갔고 제41기갑군단은 도로와 철도를 쥔 제2방어대의 요새 마을 포니리에 닿았지만, 그 대가로 1,287명이 죽거나 실종되고 5,921명이 다쳤다. 지뢰는 특히 무거운 페르디난트를 괴롭혀, 전투에 나선 45대 가운데 12대를 빼고는 오후 5시 전에 지뢰로 멈춰 섰다. 이튿날 로코솝스키의 반격도 협조가 맞지 않아 제16전차군단 약 200대만 나섰고, 티거 대대에 69대를 잃었다. 1
7월 7일부터 10일까지 모델은 포니리와 높은 지대에 자리한 올호바트카에 힘을 모았고, 로코솝스키는 다른 구역에서 병력을 빼 와 맞섰다. 포니리는 집집마다 싸우는 시가전 속에 여러 차례 주인이 바뀌어 병사들에게 「작은 스탈린그라드」라 불렸고, 제9군 전투일지는 이를 「새로운 형태의 기동 소모전」이라 적었다. 7월 10일 제2·4·20기갑사단의 전차와 돌격포 약 300대가 루프트바페의 지원을 받아 올호바트카를 쳤지만 뚫지 못했다. 공격 정면은 첫날 45킬로미터에서 8~9일에는 2킬로미터로 좁아졌고, 7월 9일 클루게와 모델의 회의는 제9군이 돌파할 힘이 없다고 결론지었다. 북면에서 독일군이 가장 깊이 들어간 거리는 8~12킬로미터였다. 1
하늘의 싸움도 양쪽의 처지를 보여 주었다. 스탈린그라드 이후 북아프리카로 전력을 빼앗기고 연합군 폭격에 맞서 전투기를 본국으로 돌린 루프트바페는 6월 말 전체 항공기의 38.7퍼센트만 동부에 남겨 두고 있었다. 그래서 적 비행장 공격을 포기하고 지상군 직접 지원에 집중했고, 37밀리미터 기관포를 단 슈투카와 Hs 129 같은 대전차 공격기를 내보냈다. 루프트바페는 남면에서 7월 10~11일까지 제공권을 쥐었고 성채 작전 동안 2만 7,221회 출격에 193대를 잃었지만, 연료가 모자라 며칠 넘게 고강도 작전을 이어 갈 수 없었다. 북면 하늘은 7월 7일부터 소련 공군 쪽으로 기울었고, 야크-9와 라-5 전투기, 대량의 일류신 공격기와 예비 기체를 갖춘 소련 공군은 손실을 바로 메웠다. 1

남부 전선과 프로호롭카
남면의 주공은 호트의 제4기갑군이었다. 독일군 가운데 가장 강한 사단들을 모은 이 군은 「한 독일 지휘관 아래 모인 가장 강력한 타격 부대」라 불렸고, 7월 5일 새벽 50분 동안 폴란드 전역과 프랑스 전역을 합친 것보다 많은 포탄을 쏘았다. 서쪽의 제48기갑군단에서는 판터를 받은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이 지뢰밭에 걸려 판터 36대가 움직이지 못했고, 동쪽의 친위대 제2기갑군단은 티거 42대를 앞세운 전차와 돌격포 494대로 소련 제6근위군의 첫 방어대를 오전 9시까지 뚫었다. 그러나 그 오른쪽을 엄호해야 할 켐프 분견군은 도네츠강을 건너는 데서부터 막혀, 첫날 가장 멀리 간 제7기갑사단도 10킬로미터에 그쳤다. 1
6일 저녁까지 보로네시 전선군은 예비대를 거의 다 써 버렸고, 오보얀 방향의 제48기갑군단 앞에는 제2방어대만 남았다. 스타프카는 전략 예비인 스텝 전선군에서 제5근위군과 파벨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을 바투틴에게 넘겼다. 코네프는 예비대를 조각조각 먼저 쓰는 데 반대했지만 스탈린의 전화 한 통에 입을 다물었다. 7월 8일 바투틴이 명령한 전차 약 600대의 반격은 협조가 맞지 않아 차례로 무너졌고, 숲에 숨어 있던 제2근위전차군단은 30밀리미터 기관포를 단 독일 지상공격기에 걸려 최소 50대를 잃었다. 공중 공격만으로 공격 중인 전차 부대가 패한 첫 사례였다. 그래도 반격은 그날 하루 친위대 기갑군단의 진격을 묶어 두었다. 1
7월 9일 독일군 선두가 프숄강에 닿았고, 호트는 친위대 기갑군단의 방향을 북쪽 오보얀에서 북동쪽 프로호롭카로 돌렸다. 이 방향 전환이 막판의 즉흥이었는지(글랜츠와 하우스), 5월부터 계획된 것이었는지(스티븐 뉴턴)는 지금도 논쟁거리다. 7월 11일 밤 켐프의 제6기갑사단이 도네츠강의 다리를 빼앗아 남쪽에서도 프로호롭카로 다가왔다. 7월 12일 아침 8시 30분 로트미스트로프는 「강철, 강철, 강철」이라는 무전으로 공격을 명령했다. 제18·29전차군단의 전차들이 공수부대원을 태운 채 프로호롭카 서쪽 비탈을 내려와 친위대 제1기갑사단과 부딪쳤고, 북쪽에서는 친위대 제3기갑사단이 지뢰밭과 숨겨진 대전차포 사이에서 전차의 절반을 잃었다. 날이 저물 무렵 소련군은 출발선으로 물러났지만 독일군도 프로호롭카를 차지하지 못했다. 1 10
프로호롭카의 손실은 지금도 엇갈린다. 7월 17일 제5근위전차군 사령부 문서는 7월 12~16일 동안 전차와 자주포 334대를 회수 불능으로 잃고 212대가 수리 중이며 7,607명의 사상자가 났다고 적었다. 러시아 역사가 발레리 자물린은 7월 12일 하루 3,563명의 인명 손실과 전차·자주포 340대의 파손·파괴를, 글랜츠와 하우스는 최소 400대 손실을 추산한다. 반면 전장을 쥐고 있던 친위대 제2기갑군단은 대부분의 손상 차량을 회수해, 7월 12일 영구 손실은 많아야 3대였고 손상·파괴는 60~80대로 추산된다. 독일군은 전술적으로 많은 소련 전차를 부쉈으나 프로호롭카를 넘어 마지막 요새화 방어대를 뚫지는 못했다. 10


성채 작전의 중단과 소련의 반격
프로호롭카 전투가 벌어진 12일, 북쪽에서는 소련의 쿠투조프 작전이 시작되었다. 마르키안 포포프의 브랸스크 전선군이 오룔 돌출부 동면을, 바실리 소콜롭스키의 서부 전선군이 북면을 쳤고, 서부 전선군의 선봉은 이반 바그라먄의 제11근위군이었다. 첫날 제11근위군은 약 23킬로미터를 나아가 모델의 제9군 뒤를 위협했고, 독일군은 쿠르스크로 보내려던 기갑 사단들을 돌려야 했다. 모델은 제2기갑군까지 넘겨받아 오룔 일대의 독일군 전체를 지휘하게 되었고, 제9군은 7월 18일 원래 출발선으로 되돌아갔다. 1 11
이틀 전인 7월 10일에는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해 있었다. 히틀러는 12일 저녁 클루게와 만슈타인을 동프로이센 사령부로 불렀고, 13일 회의에서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대한 추가 상륙에 대비해 공세를 멈추겠다고 했다. 클루게는 반겼지만 만슈타인은 소련 기동 예비대를 완전히 쳐부수기 전에는 놓아서는 안 된다고 버텼다. 히틀러는 남쪽에서만 공격을 잠시 더 허락했으나, 7월 14일 시작한 롤란트 작전도 17일 중단되었다. 친위대 기갑군단은 철수 명령을 받았고 「라이프슈탄다르테」 사단은 이탈리아로, 나머지 두 사단은 남쪽의 새 소련 공세 쪽으로 옮겨 갔다. 만슈타인은 회고록 『잃어버린 승리』에서 히틀러가 승리 직전에 작전을 멈췄다고 비판했지만, 소련 예비대는 그가 안 것보다 훨씬 컸다. 1 12 8
오룔 돌출부의 독일군은 히틀러의 후퇴 금지령에도 밀려났다. 소련군은 7월 29일 볼호프를, 8월 5일 오룔을 해방했고, 8월 18일에는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선까지 나아갔다. 남쪽에서는 프로호롭카에서 크게 다친 보로네시 전선군이 재정비를 마친 뒤 8월 3일 스텝 전선군과 함께 루먄체프 작전을 시작했다. 미하일 카투코프의 제1전차군과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이 돌파구를 넓혔고, 8월 5일 벨고로드가 해방되었다. 그날 저녁 모스크바에서는 오룔과 벨고로드의 해방을 기리는 이 전쟁 첫 축포가 울렸다. 소련군은 독일 친위대 기갑 사단들의 반격에 한때 막혔으나 8월 23일 하리코프를 되찾았고, 하리코프는 이후 다시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11 13 14 8
루먄체프 작전은 스타프카가 1943년의 주 공세로 준비한 작전이었다. 소련군은 보로네시·스텝 전선군에 약 114만 4천 명, 전차 2,418대, 포 1만 3,633문을 모았고, 맞선 독일군은 약 21만 명에 전차와 돌격포 237대였다. 공세에 앞서 7월 17일 남서·남부 전선군이 도네츠강과 미우스강 너머 돈바스로 견제 공격을 벌이자, 만슈타인은 친위대 제2기갑군단과 제24기갑군단을 남쪽으로 돌렸다. 이 견제는 의도대로 독일 예비대를 흩어 놓았고, 성채 작전에서 가장 큰 타격을 받았던 제5·6근위군이 다시 돌파의 선봉에 섰다. 오룔과 하리코프를 잃은 독일군은 우크라이나에서 드네프르강 뒤로 물러났고, 가을의 키예프 전투로 가는 길이 열렸다. 13

평가
쿠르스크는 독일의 대규모 공세가 돌파에 이르기 전에 처음으로 멈춘 전투였고, 독일군이 동부전선에서 벌인 마지막 전략 공세였다. 붉은 군대는 이 전투 뒤의 반격으로 처음 여름 공세에 성공했고, 이후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도권을 놓지 않았다. 구데리안은 「성채 작전의 실패로 우리는 결정적 패배를 당했다. 이제 동부전선에 조용한 날은 없을 것이다」라고 썼고, 만슈타인도 이 작전을 동부전선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라 불렀다. 소련 역사학은 쿠르스크와 뒤이은 드네프르 도하로 「근본적 전환」이 완성되었다고 본다. 다만 스탈린그라드와 쿠르스크 가운데 어느 쪽이 진짜 전환점인지에 대한 판단은 연구자마다 다르다. 1 8
사상자 수는 쿠르스크만큼 큰 차이를 보이는 전투가 드물다. 소련 문서고에 근거한 그리고리 크리보셰예프는 독일 공세 기간 소련군 손실을 17만 7,877명, 쿠투조프·루먄체프 두 반격의 손실을 68만 5,456명으로 집계했다. 독일 문서를 검토한 카를하인츠 프리저는 성채 작전 중 독일군 사상자를 5만 4,182명, 세 작전을 합쳐 약 17만 명으로 계산했다. 그러나 독일 역사가 로만 퇴펠은 소련 공식 손실이 40퍼센트 낮게 잡혔다며 약 120만 명을 제시했고, 독일 쪽 보고 역시 수리 중 차량을 손실에서 빼는 방식 때문에 실제보다 적다는 비판이 있다. 전차 손실 비율은 독일군에 크게 유리했지만, 소련은 더 큰 산업 능력과 인력으로 이를 메웠다. 1
「역사상 최대의 전차전」이라는 프로호롭카의 이미지도 다시 검토되었다. 양쪽 전차 1,200~1,500대, 때로는 2,000대가 맞붙었다는 서술은 소련의 과장된 정보 판단과 전후 회고에서 나왔다. 로트미스트로프는 독일군이 이날 전차 350~400대를 잃었다고 썼고, 보로네시 전선군 군사위원 니키타 흐루쇼프는 7월 24일 이 전투에 관한 보고서를 스탈린에게 직접 올렸다. 두 나라 문서를 대조하면 프로호롭카 주변에 투입된 기갑 차량은 약 910대였다. 쿠르스크 전체는 전쟁사 최대 규모의 전투로 꼽히지만, 프로호롭카에 관한 전후 서술은 독일군의 손실을 실제보다 몇 배나 부풀렸다. 10 15 8
시칠리아 상륙이 성채 작전을 끝냈다는 설명도 따져 볼 필요가 있다. 만슈타인의 회고는 히틀러가 이탈리아 때문에 승리 직전의 공세를 멈췄다고 하지만, 국방군 총사령부 전투일지에 남은 7월 13일 회의 기록을 보면 히틀러는 이탈리아 상황이 분명해질 때까지 작전을 「일시 중지」하겠다고 했고 클루게는 이에 전적으로 동의했다. 북면의 제9군은 이미 멈춰 있었고, 이탈리아로 실제로 떠난 것은 친위대 사단 하나뿐이었다. 만슈타인이 남쪽에서 공격을 이어 가려던 계획을 접게 만든 것은 7월 17일 시작된 소련의 미우스강·도네츠강 공세였다. 시칠리아는 독일의 결정을 앞당겼지만, 공세를 멈춘 근본 원인은 쿠르스크의 소련 방어와 예비대였다. 8 1
쿠르스크는 두 진영의 지휘 방식도 드러냈다. 공격의 장소와 계획, 시기를 정한 것은 히틀러였지만 그는 패배의 책임을 참모본부에 돌렸고 군사 문제에 대한 간섭을 늘려 갔다. 반대로 스탈린은 주코프의 방어 우선안을 받아들인 뒤 지휘관들의 판단을 믿고 작전 계획에서 한 걸음 물러났다. 그러나 소련 지휘부 안에도 아쉬움은 있었다. 로코솝스키는 오룔에서 적을 포위하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다고 불평했고, 주코프에 따르면 스탈린은 「적을 우리 땅에서 빨리 몰아내는 것이 먼저이고 포위는 그들이 약해진 뒤에 하겠다」고 했다. 같은 해 8월 미국 합동참모본부는 시칠리아에서 독일군 2개 사단이 영미군과 맞서는 동안 러시아 전선이 약 200개 사단을 붙잡고 있다고 평가했다. 2차 세계대전 전투의 80퍼센트 이상이 동부전선에서 벌어졌다는 평가가 나오는 것도 이 때문이다. 1 11 8 3
전투에 나선 사람들의 기록도 남았다. 쿠르스크에서 붉은 군대 장병 239명이 소련 영웅 칭호를 받았는데, 그 가운데 위생병이던 마리야 보로비첸코와 지나이다 마레세바 두 여성 근위 상사는 전사한 뒤 칭호를 받았다. 종군기자 바실리 그로스만은 모스크바와 스탈린그라드에 이어 쿠르스크 전투를 기록했다. 쿠르스크 주민과 30만 명이 넘는 민간인은 몇 달 동안 참호와 대전차호를 팠고, 벨고로드·쿠르스크·오룔은 뒤에 러시아의 첫 「군사적 영광의 도시」가 되었다. 1 16 8
결과
쿠르스크는 독일의 대규모 공세가 돌파 전에 멈춘 첫 전투이자 동부전선에서 독일이 벌인 마지막 전략 공세였다. 붉은 군대는 이어진 반격으로 첫 여름 공세에 성공해 전쟁이 끝날 때까지 주도권을 쥐었고, 독일군은 드네프르강 뒤로 물러났다. 소련의 손실은 독일보다 훨씬 컸고 그 수치는 지금도 크게 엇갈리지만, 소련은 더 큰 산업과 인력으로 이를 메웠다. 연합국 쪽에서도 이 무렵 러시아 전선이 독일군 약 200개 사단을 붙잡고 있다는 평가가 나왔고, 전쟁의 무게중심이 동부전선에 있다는 인식은 제2전선 논의에도 영향을 주었다.
연표와 지도
- 11943.02.08쿠르스크 해방
스탈린그라드 승리 뒤 남부 전선 전체로 공세를 넓힌 붉은 군대가 쿠르스크를 되찾았다.
- 21943.03.15독일군의 하리코프 재점령
만슈타인의 반격(제3차 하리코프 전투)으로 친위대 기갑군단이 나흘 시가전 끝에 하리코프를 되찾았고, 사흘 뒤 벨고로드도 넘어가 쿠르스크 돌출부가 생겼다.
- 1943.03.13작전 명령 제5호
히틀러가 쿠르스크 돌출부 공격을 포함한 여러 공세를 승인했으나, 클루게의 거절과 해빙기로 4월 중순 연기되었다.
- 1943.04.08주코프의 방어 우선안
주코프가 스탈린과 스타프카에 먼저 공격하지 말고 적을 방어선에서 지치게 한 뒤 총반격하자는 편지를 보냈다.
- 1943.04.12스타프카 회의
스탈린, 주코프, 바실렙스키, 안토노프가 모여 쿠르스크에서 먼저 방어하고 뒤에 반격하기로 결정했다.
- 1943.04.15작전 명령 제6호
차이츨러가 초안을 쓴 명령으로 히틀러가 성채 작전을 5월 3일 무렵 시작하라고 지시했다.
- 1943.04.27모델의 경고
모델이 히틀러에게 소련군의 강력한 진지를 보여 주며 작전을 포기하거나 근본적으로 고치라고 권했다.
- 1943.05.04뮌헨 회의
만슈타인·클루게·슈페어·구데리안의 의견이 갈린 채 결정 없이 끝났고, 사흘 뒤 개시일이 6월 12일로 미뤄졌다.
- 1943.07.01개시일 발표
신형 전차를 기다리며 개시일을 거듭 미룬 히틀러가 7월 5일 개시를 발표했다.
- 31943.07.05성채 작전 개시
새벽 주코프의 선제 포격 뒤 독일군이 남북에서 공격했다. 이날 소련 공군은 176대, 루프트바페는 26대를 잃었다.
- 41943.07.07포니리 공방
제9군이 포니리를 반쯤 차지했으나 집집마다 싸우는 공방 속에 마을의 주인이 여러 번 바뀌었다.
- 51943.07.08바투틴의 반격
약 600대의 소련 전차 반격이 협조 부족으로 차례로 무너졌으나 친위대 기갑군단의 진격을 하루 묶어 두었다.
- 61943.07.10올호바트카 공격 실패
전차와 돌격포 약 300대의 공격도 막히면서 북면의 독일군 진격이 완전히 멈췄다.
- 1943.07.10연합군의 시칠리아 상륙
영미 연합군이 시칠리아에 상륙해 이탈리아와 남프랑스에 대한 추가 상륙의 위협이 생겼다.
- 71943.07.12프로호롭카 전투
로트미스트로프의 제5근위전차군이 친위대 제2기갑군단을 공격했다. 소련군은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지만 독일군의 돌파를 막았다.
- 81943.07.12쿠투조프 작전 개시
서부·브랸스크 전선군이 오룔 돌출부를 공격해 모델의 제9군 뒤를 위협했다.
- 1943.07.13히틀러의 중단 결정
클루게와 만슈타인을 부른 회의에서 히틀러가 성채 작전 중지를 밝혔고, 남쪽에서만 공격을 잠시 더 허락했다.
- 1943.07.17롤란트 작전 중단
친위대 기갑군단이 철수 명령을 받았다. 같은 날 소련 남서·남부 전선군이 도네츠강과 미우스강에서 견제 공세를 시작했다.
- 91943.07.18제9군의 원위치 복귀
오룔 돌출부가 위협받자 제9군이 7월 5일의 출발선으로 물러났다.
- 101943.07.29볼호프 해방
쿠투조프 작전의 소련군이 오룔 북쪽의 볼호프를 해방했다.
- 111943.08.03루먄체프 작전 개시
보로네시·스텝 전선군이 남부집단군 북익을 상대로 1943년의 주 공세를 시작했다.
- 121943.08.05오룔·벨고로드 해방과 첫 축포
두 도시가 해방되었고, 그날 저녁 모스크바에서 이 전쟁의 첫 축포가 울렸다.
- 131943.08.18하겐 선 도달
소련군이 브랸스크 동쪽의 하겐 선까지 나아가 오룔 돌출부가 사라졌다.
- 141943.08.23하리코프 해방
치열한 싸움 끝에 소련군이 하리코프를 되찾았고, 하리코프는 이후 다시 주인이 바뀌지 않았다.
관련 인물 31명
소련 (붉은 군대)15명
집행 · 지휘10
4월 8일 편지로 방어 후 반격을 제안했고, 스타프카 대표로 북쪽 전선군들을 조정하며 7월 5일 새벽 선제 포격을 명령했다.
참모총장·스타프카 대표알렉산드르 바실렙스키1895–19771943년 여름 전략 계획을 직접 짰고, 스타프카 대표로 주코프와 함께 전선군들의 행동을 조정했다.
중부 전선군 사령관콘스탄틴 로코솝스키1896–1968돌출부 북면을 지키며 포니리와 올호바트카에서 모델의 제9군을 막았다. 오룔에서 적을 포위하지 못하고 밀어내기만 했다고 아쉬워했다.
보로네시 전선군 사령관니콜라이 바투틴1901–1944돌출부 남면을 지켰고, 7월 8일 약 600대의 전차로 반격을 명령했다. 8월에는 루먄체프 작전을 이끌었다.
스텝 전선군 사령관이반 코네프1897–1973전략 예비대를 이끌었고, 예비대를 조각조각 먼저 쓰는 데 반대했으나 스탈린의 전화로 물러섰다. 8월 하리코프 해방에 참여했다.
제5근위전차군 사령관파벨 로트미스트로프1901–19827월 12일 「강철, 강철, 강철」 무전으로 프로호롭카 공격을 명령했다. 전후 회고에서 독일군 손실을 크게 부풀렸다.
제1전차군 사령관미하일 카투코프1900–1976루먄체프 작전에서 하리코프를 서쪽으로 감싸는 바깥 포위선을 맡았다.
브랸스크 전선군 사령관마르키안 포포프1902–1969쿠투조프 작전에서 오룔 돌출부의 동면을 공격했다.
서부 전선군 사령관바실리 소콜롭스키1897–1968쿠투조프 작전에서 오룔 돌출부의 북면을 공격했다.
제11근위군 사령관이반 바그라먄1897–1982쿠투조프 작전 첫날 약 23킬로미터를 돌파해 제9군의 뒤를 위협했다.
참여3
독일 (국방군·무장친위대)13명
지도부3
집행 · 지휘7
성채 작전의 초기 계획과 작전 명령 제6호 초안을 썼고, 여러 장군의 반대에도 히틀러를 설득했다.
제9군 사령관발터 모델1891–19454월 27일 작전 포기나 근본 수정을 권했고, 북면 공격을 지휘했으나 포니리와 올호바트카에서 막혔다. 쿠투조프 작전 때 오룔 일대의 독일군 전체를 맡았다.
제4기갑군 사령관헤르만 호트1885–1971남면 주공을 이끌었고, 친위대 기갑군단의 방향을 오보얀에서 프로호롭카로 돌렸다.
켐프 분견군 사령관베르너 켐프1886–1964제4기갑군의 오른쪽을 엄호해야 했으나 도네츠강 도하부터 막혀, 7월 11일 밤에야 돌파했다.
친위대 제2기갑군단장파울 하우서1880–1972라이프슈탄다르테·다스 라이히·토텐코프 3개 사단으로 남면 주공의 선봉을 맡아 프로호롭카까지 나아갔다.
제48기갑군단장오토 폰 크노벨스도르프1886–1966제4기갑군의 왼쪽에서 그로스도이칠란트 사단과 신형 판터 대대를 거느리고 오보얀 방면으로 공격했다.
라우스 군단장(켐프 분견군)에르하르트 라우스1889–1956켐프 분견군의 오른쪽 날개로 도네츠강을 건너 마슬로보 프리스타니를 점령하며 소련군 제1방어선을 뚫었다.
진영 밖
참여2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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