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71.08.15–1980

1970년대 위기: 닉슨 쇼크, 석유 파동, 스태그플레이션

1971년 미국이 달러의 금 태환을 멈추고 1973년 산유국이 석유 값을 네 배로 올린 뒤, 왜 물가와 실업이 함께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이 찾아왔나? 산유국이 번 달러는 어디로 갔고, 영국·제3세계·사회주의권은 이 위기를 어떻게 겪었으며, 이 위기는 왜 케인스주의의 퇴장과 신자유주의의 등장으로 이어졌나?

1971년 8월 닉슨이 달러의 금 태환을 멈추면서 브레턴우즈의 고정환율 체제가 무너졌다. 1973년 10월 제4차 중동전쟁 중 석유수출국기구(OPEC)는 석유 값을 일방적으로 올렸고 아랍 산유국은 이스라엘 지원국에 금수를 걸어, 원유 값은 1년 만에 네 배가 되었다. 1974~1975년 선진국은 전후 첫 동시 불황에 빠졌고, 물가와 실업이 함께 오르는 스태그플레이션은 수요 관리로 경기를 다스린다는 케인스주의의 믿음을 흔들었다. 산유국이 번 페트로달러는 미국 국채와 서방 은행을 거쳐 개발도상국과 동유럽에 대출되었다. 제3세계는 신국제경제질서를 요구했고, 영국은 1976년 IMF 차관을 받아 지출을 줄였으며, 소련은 석유 수입으로 곡물을 샀다. 1979년 이란 혁명으로 두 번째 석유 파동이 오자 미국 연준은 통화 긴축으로 돌아섰다.

미국1971년 8월 15일 닉슨은 무엇을 발표했나?

1971년 8월 15일 일요일 밤, 미국 대통령 리처드 닉슨은 텔레비전 연설에서 「새 경제 정책」을 발표했다. 그는 전쟁 없는 번영을 위해 세 전선에서 행동해야 한다며, 일자리를 늘리고, 생활비 상승을 멈추고, 「국제 화폐 투기꾼들의 공격」에서 달러를 지켜야 한다고 말했다. 조치는 세 가지였다. 첫째, 재무장관 존 코널리에게 달러를 금이나 다른 준비 자산으로 바꾸어 주는 일을 「일시적으로」 멈추라고 지시했다. 이것이 「금 창구」를 닫은 금태환 정지다. 둘째, 미국 안의 모든 물가와 임금을 90일 동안 동결했다. 셋째, 미국으로 들어오는 과세 수입품에 10%의 추가 관세를 매겼다. 이 묶음을 흔히 「닉슨 쇼크」라 부른다. 금 창구가 왜 버틸 수 없게 되었는지, 그리고 1971년 12월의 스미소니언 협정과 1973년 변동 환율로의 이행은 브레턴우즈 체제의 성립과 붕괴에서 다루고, 여기서는 이 발표가 연 1970년대의 위기를 따라간다. 1 2 3 4

임금·물가 동결은 미국 정부가 한국전쟁 이후 처음으로 꺼낸 통제였다. 근거는 1970년 경제안정법이었다. 90일 동결이 1단계였고, 1971년 10월 22일 닉슨은 임금위원회와 물가위원회를 만들어 2단계 통제를 맡겼다. 전체 목표는 재무장관 코널리가 의장을 맡은 생활비위원회가 정했다. 통제는 단계를 바꾸어 가며 1974년까지 이어졌다. 그러나 미국 연방준비제도의 역사 기록은 이 통제가 물가 상승을 잠시 늦추었을 뿐 식량과 에너지를 중심으로 품귀를 키웠다고 평가한다. 닉슨은 1971년 8월 석유 가격에도 상한을 씌웠는데, 수요가 늘고 국내 생산이 줄던 때여서 싼 값이 소비를 부추기고 수입 석유에 대한 의존을 더 키웠다. 2 5 6 7

코널리는 미국이 인플레이션을 수출한다고 걱정하는 유럽 재무장관들에게 달러는 「우리 통화지만 당신들의 문제」라고 말해 이름을 남겼다. 국내에서 발표는 정치적으로 크게 성공했다. 미국인들은 정부가 폭리 업자와 외국 탓인 통화 위기에서 자신들을 구해 준다고 믿었다. 다우존스 지수는 8월 16일 33포인트 올라 당시 하루 최대 상승을 기록했고, 『뉴욕 타임스』 사설은 대통령의 대담함에 「주저 없이 박수를 보낸다」고 썼다. 닉슨은 1972년 대선에서 압승했다. 연방준비제도 의장 아서 번스는 금 창구 닫기에 반대했지만 대통령의 새 계획을 전적으로 지지하겠다고 약속했고, 통제가 시행되는 동안 연방준비제도는 통화량을 늘렸다. 번스는 일기에 닉슨이 언론에 대한 증오를 쏟아내며 모든 경제 소식을 낙관적으로 꾸미라고 다그쳤다고 적었다. 닉슨 쇼크는 정치적으로는 성공, 경제적으로는 1973~1975년 불황과 스태그플레이션, 불안정한 변동 환율을 부른 실패로 흔히 평가된다. 8 2 9

이란석유수출국기구는 어떻게 석유 값을 손에 넣었나? {saudi-arabia} {venezuela}

2차 세계대전 뒤 세계 석유 시장은 「일곱 자매」라 불린 영미 다국적 석유회사들이 지배했다. 산유국 안의 석유 사업은 이 회사들이 모두 운영했고, 산유국 정부가 받는 세금과 사용료는 회사들이 내건 「고시 가격」을 기준으로 계산되었다. 1959년 2월 회사들이 베네수엘라와 중동 원유의 고시 가격을 일방적으로 10% 내리자, 몇 주 뒤 카이로의 제1차 아랍 석유 회의에서 사우디아라비아의 압둘라 타리키와 베네수엘라의 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가 만나 회사들이 가격을 바꾸기 전에 산유국과 협의하라고 요구했다. 1960년 8월 회사들이 다시 중동 원유 가격을 깎자, 다음 달 바그다드 회의에서 이란·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 다섯 나라가 석유수출국기구(OPEC)를 세웠다. 미국은 강하게 반대했다. 10

처음 10년 동안 OPEC은 별 힘이 없다는 평을 들었다. 산유국과 회사는 이윤을 반씩 나누었고, 한 회원국이 너무 많이 요구하면 회사들은 그 나라의 생산을 줄이고 다른 곳에서 늘리면 그만이었다. 균형은 1970년 무렵 바뀌었다. 리비아가 1970년 옥시덴털사와 58 대 42의 분배를 얻어 내자 다른 회원국도 같은 요구를 했고, 1971년 2월 14일 테헤란 협정과 4월 2일 트리폴리 협정이 고시 가격과 산유국의 몫을 올렸다. 석유 시장이 빡빡해지자 국유화의 위험도 줄어, 리비아·알제리·이라크·나이지리아·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에서 국유화의 물결이 일었다. 1970년대 초 OPEC 회원국은 세계 석유 생산의 절반 넘게를 차지했다. 10 7

소비국 쪽에서도 조건이 바뀌고 있었다. 미국의 석유 생산은 1970년 정점을 찍었고, 1969~1972년 석유 수입은 52% 늘었다. 1960년대 내내 원유 값은 배럴당 1.80달러에 머물러 인플레이션을 감안하면 해마다 싸졌다. 이 값싼 석유가 1945년 이후 서방의 긴 번영을 떠받쳤다. 닉슨 쇼크는 산유국에 직접 타격이었다. 석유 값이 달러로 매겨졌기 때문에 달러가 금에서 떨어져 나와 가치가 떨어지자 산유국의 실질 수입도 줄었다. OPEC은 1971년 9월 공동 성명에서 앞으로 석유 값을 일정량의 금으로 매기겠다고 밝혔지만 가격 조정은 더뎠다. 브레턴우즈 체제가 금 1온스를 35달러로 묶어 두던 시절이 끝나자 금값은 1970년대 말 온스당 455달러까지 올랐다. 그래서 1973~1974년의 큰 인상은 금 같은 상품으로 따지면 산유국의 수입을 대체로 예전 수준으로 되돌린 것이기도 했다. 7 11

사우디아라비아1973년 10월 석유는 어떻게 무기가 되었나? {egypt} {israel}

1973년 10월 6일 이집트와 시리아가 1967년 이스라엘에 빼앗긴 시나이 반도와 골란 고원을 되찾으려 기습 공격을 시작했다(욤 키푸르 전쟁, 제4차 중동 전쟁). 사우디아라비아 국왕 파이살은 이집트를 돕기 위해 필요하면 「석유 무기」를 쓰겠다고 했다. 10월 16일 쿠웨이트시티의 OPEC 회의는 원유 값을 배럴당 3.01달러에서 5.12달러로 올린다고 발표했고, 이튿날 아랍석유수출국기구(OAPEC)의 아랍 산유국들은 생산을 5% 줄이고 이스라엘의 동맹국에 금수를 경고했다. OAPEC은 OPEC의 아랍 회원국에 이집트·시리아가 더해진 별도 기구다. 사우디 석유장관 아흐마드 자키 야마니는 당시 국왕이 미국에 전쟁에서 빠질 기회를 주려 했다고 회고했다. 10월 19일 닉슨이 의회에 이스라엘 긴급 군사 원조 22억 달러를 요청하자, 그날 밤 파이살은 야마니를 불러 미국에 대한 전면 금수를 받아쓰게 했다. 리비아가 먼저 금수를 선언했고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산유국이 이튿날 뒤따랐다. 금수 대상은 미국과 네덜란드에서 포르투갈·로디지아·남아프리카로 넓어졌고, 아랍 산유국의 감산 폭은 결국 25%에 이르렀다. 7 12 10 11

값은 금수 대상국이 아닌 곳에서도 뛰었다. 11월까지 중동에서 서방으로 가는 석유 수출이 60~70% 줄었고, 금수에 동참하지 않은 이란·베네수엘라·나이지리아 등은 생산을 늘려 비싸게 팔았다. 12월 16일 이란 국영 석유회사의 경매에서는 배럴당 17달러의 입찰이 나왔고, 12월 말 OPEC 회의는 배럴당 11.65달러로 다시 올렸다. 이 인상을 밀어붙인 것은 파이살이 아니라 이란의 샤였다. 원유 값은 1973년 금수 전 배럴당 3달러 안팎에서 1974년 1월 12달러 가까이로 네 배가 되었다. 소비국의 일상이 바뀌었다. 미국에서는 휘발유 값이 1년 사이 43% 올랐고 주유소 앞에 긴 줄이 섰으며, 영국·서독·이탈리아·스위스·노르웨이는 일요일 운전을 금지했다. 석유의 90%를 중동에서 들여오던 일본은 주요 산업의 석유·전력 사용을 20% 줄이라고 명령했다. 석유를 모두 수입하던 영국에서는 석탄 광부와 철도 노동자의 쟁의가 겹치자 에드워드 히스 정부가 1974년 1월 1일부터 기업의 전기 사용을 주 사흘로 묶는 「주 3일 근무제」를 시행했다. 7 11 13

헨리 키신저는 11월 리야드로 날아가 파이살에게 금수를 풀어 달라고 했지만 거절당했다. 국방장관 제임스 슐레진저는 사우디아라비아 등의 유전을 점령하자고 제안했고, 키신저는 11월 21일 금수가 풀리지 않으면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공개 경고했다. 사우디는 추가 감산과 유전 방화로 맞섰고, 미국은 군사 개입을 접고 이스라엘군 철수 협상으로 방향을 틀었다. 1974년 1월 18일 이집트-이스라엘 1차 병력 분리 협정이 맺어졌고, 이스라엘과 시리아 사이의 협상 전망이 서자 아랍 산유국들은 1974년 3월 17일 리비아를 빼고 금수 해제를 발표했다. 금수는 이스라엘을 1949년 휴전선 뒤로 물리지 못했다는 점에서 실패였다는 것이 많은 연구자의 판단이지만, 대니얼 예긴은 금수가 「국제 경제를 다시 짰다」고 보았다. 미국은 11월 7일 에너지 자립을 내건 「독립 계획」을 발표했고, 전략 석유 비축과 고속도로 시속 55마일 제한, 국제에너지기구 설립이 뒤따랐다. 7 14 10

미국석유 값으로 번 달러는 어디로 흘러갔나? {saudi-arabia}

석유 수출국이 벌어들였지만 제 나라 안에서 다 쓰지 못하는 달러를 「페트로달러」라 부른다. 1973년 석유 위기 중에 생긴 말이다. 1974~1981년 OPEC 회원국의 경상수지 흑자는 모두 4,500억 달러에 이르렀고, 그 90%가 페르시아만 아랍 국가와 리비아에 쌓였다. 에르네스트 만델은 1974년 한 해 산유국의 수입을 750억 달러로 어림했다. 이 돈은 사라지지 않았다. 석유를 사는 나라들은 큰 경상수지 적자를 냈고, 산유국의 흑자는 서방의 자본시장을 거쳐 그 적자를 메우는 데로 다시 흘렀다. 이 「페트로달러 환류」가 돌아가려면 석유 수입국이 자본 통제를 풀어야 했고, 서방 자본시장은 이때부터 급격히 커졌다. 15 16 7

그 흐름의 한 축은 미국과 사우디아라비아의 거래였다. 금수가 풀리고 석 달 뒤인 1974년 여름 두 나라는 경제·군사 협력을 넓히는 포괄 협정을 맺었다. 1975 회계연도에만 전투기 60대를 포함한 20억 달러어치 무기 계약이 이어졌고, 협정의 핵심은 사우디가 석유 값을 달러로 매기고 수십억 달러를 미국 재무부 채권에 넣는 것이었다. 흔히 이 거래는 금 태환이 끝난 뒤 달러 수요가 줄 것을 걱정한 닉슨과 키신저가 사우디 유전의 군사적 보호와 달러 결제를 맞바꾼 것으로 설명된다. 1945년부터 이어진 두 나라의 교환 관계는 석유-안보 거래 항목에서 다룬다. 달러 석유 결제가 미국 패권의 숨은 동력이라는 「페트로달러 전쟁」론도 있지만, 비판자들은 그것이 달러 수요에 보태는 몫이 아주 작다고 본다. 17 15

다른 축은 은행이었다. 수십억 페트로달러가 미국·유럽·스위스·영국의 대형 상업은행에 예금되었고, 이 과정에서 미국 규제 밖의 달러 시장인 유로달러 시장이 크게 자랐다. 불황 속에 기업 투자가 덜 매력적이 되자 은행들은 이 돈의 상당 부분을 브라질·아르헨티나 같은 라틴아메리카와 튀르키예 등 개발도상국 정부에 직접 빌려주었다. 석유 값이 오른 뒤 이 나라들은 석유와 기계를 수입할 달러가 모자랐기 때문이다. IMF는 1974~1976년 산유국의 돈으로 「석유 기금」을 열어 이탈리아·영국과 수십 개 개발도상국에 빌려주었다. IMF는 석유 수입국인 개발도상국 100개국의 외채가 1973~1977년 150% 늘었다고 추산했고, 총재 요하네스 비테베인은 1974년 국제 통화 체제가 「1930년대 이래 가장 어려운 시기」를 맞았다고 말했다. 이 빚이 1980년대에 어떻게 되었는지는 제3세계 외채위기와 구조조정에서 다룬다. 15

만델은 1974년 10월 이 흐름에서 「새로운 아랍·이란 금융자본」의 탄생을 읽었다. 그가 든 예는 이란의 샤가 서독 크루프 그룹 주식 25%를 산 일, 쿠웨이트 투자회사들이 미국·영국의 부동산과 해운 회사를 사들인 일, 사우디 국영 기업이 다국적 컨소시엄과 제철 공장을 짓는 일이었다. 그는 중동에서 원유 1배럴을 뽑는 비용이 10~12센트를 넘지 않는데 판매 가격은 11.65달러라며, 잉여가치의 분배가 한때 석유 회사 90 대 산유국 10에서 75 대 25, 50 대 50을 거쳐 이제 20 대 80으로 뒤집혔다고 계산했다. 그가 보기에 산유국의 정치적 동기와 관계없이 이란·나이지리아·베네수엘라의 지배층까지 한데 묶은 것은 세계적으로 뽑아낸 잉여가치를 제국주의 부르주아지에게서 일부 반식민지 나라의 부르주아지 쪽으로 크게 재분배할 기회였다. 16

물가와 실업은 왜 함께 올랐나?

석유 금수는 1945년에 시작된 서방의 긴 번영을 끝내고 세계 경제를 대공황 이후 가장 가파른 수축으로 밀어 넣었다. 미국의 불황은 1973년 11월부터 1975년 3월까지 이어졌고, 노동통계국은 일자리 230만 개가 사라졌다고 추산했다. 당시로서는 전후 최대였다. 영국의 국내총생산은 3.9% 줄었고, 서독은 1975년 전후 최대의 감소를 겪었다. 1973~1974년 주식시장 붕괴로 훗날 G7이 되는 나라들의 주가 지수는 명목으로 34% 이상, 실질로 43% 이상 떨어졌고, 미국 주식시장은 1993년 8월에야 1973년 수준을 되찾았다. 만델은 1974년 말 이 불황을 「모든 제국주의 강대국을 동시에 친 전후 최초의 전반적 불황」이라 불렀다. 1948~1968년에는 나라마다 경기 순환이 어긋나 한 나라의 불황을 다른 나라로의 수출이 메웠지만, 이번에는 그럴 곳이 없었다는 것이다. 7 18 19 20

이 불황이 앞선 불황들과 다른 점은 물가가 내리지 않고 오히려 뛰었다는 것이다. 「스태그플레이션」은 정체(stagnation)와 인플레이션(inflation)을 합친 말로, 높은 물가 상승과 정체한 성장, 높은 실업이 함께 나타나는 상태다. 전후 경제학은 실업과 물가가 반대로 움직인다고 보았다. 수요가 많으면 기업이 사람을 더 뽑고 값을 올리며, 수요가 적으면 실업이 늘고 값이 안정된다는 것이다. 이 관계를 그린 것이 필립스 곡선이고, 1960년대 정책 당국은 물가를 조금 더 올리는 대가로 실업을 영구히 낮출 수 있다고 믿었다. 그러나 미국에서 1964년 물가 상승률 1%·실업률 5%였던 경제는 10년 뒤 물가 12% 이상·실업 7% 이상이 되었고, 1980년 여름에는 물가 14.5%·실업 7.5% 이상이었다. 둘이 함께 오르자 정책은 딜레마에 빠졌다. 실업과 싸우면 물가가 더 오르고, 물가와 싸우면 실업이 더 늘었다. 21 6

연방준비제도 의장 번스는 1974년 석유 공급과 값의 조작이 「가장 나쁜 때」에 왔다고 했다. 1973년 중반 이미 공업 원자재 도매가격이 연 10% 넘게 오르고 설비는 거의 완전 가동 중이었기 때문이다. 당시 정책 당국자들의 지배적인 생각은 임금이나 원자재 같은 투입 비용이 올라 생기는 「비용 인상」 인플레이션은 통화 정책으로 다스릴 수 없다는 것이었다. 1971년 연방공개시장위원회에 나온 한 경제학자는 계속되는 비용 상승을 「거시경제 수단으로 다룰 수 없는 구조적 문제」로 보아야 한다고 했다. 서방 중앙은행들은 석유 충격 뒤 성장을 위해 금리를 크게 내렸는데, 지금은 이것이 충격을 더 깊고 길게 만들었다고 보는 견해가 있다. 밀턴 프리드먼과 에드먼드 펠프스는 1960년대 말 이미 사람들이 인플레이션을 예상하게 되면 필립스 곡선이 위로 이동한다고 경고했고, 이 비판은 1970년대에 통화주의와 공급 중시 경제학이 떠오르는 발판이 되었다. 11 7 21 6

영국영국에서 케인스주의 수요 관리는 왜 신뢰를 잃었나?

케인스주의의 처방은 경기가 나쁠 때 정부 지출과 감세, 금리 인하로 총수요를 늘려 실업을 줄이는 것이다. 영국은 1970년대에 그 한계를 가장 극적으로 겪은 나라다. 1972년 보수당 재무장관 앤서니 바버의 확장 예산이 짧은 「바버 붐」을 낳았지만, 곧 임금과 물가가 서로를 밀어 올리는 악순환과 높은 인플레이션, 통화 가치 하락이 뒤따랐다. 석유를 전부 수입하던 영국은 값이 오른 석유 대신 자급하던 석탄에 기대야 했고, 이것이 석탄 광부 노조에 큰 협상력을 주었다. 히스 정부의 임금 인상 제안을 거부한 광부들의 쟁의 속에 1974년 2월 총선에서 보수당이 졌고, 돌아온 해럴드 윌슨의 노동당 정부는 광부 임금을 35% 올려 쟁의를 끝냈다. 노동당은 노동조합이 자발적으로 임금 인상을 자제하는 대신 정부가 생활비를 억제하고 사회 지출을 늘리는 「사회 협약」을 내걸었고, 재무장관 데니스 힐리의 첫 예산은 식품 보조금과 연금을 늘렸다. 그래도 1975년 물가 상승률은 25%에 가까웠다. 22 7 18 23 24

1976년 4월 5일 제임스 캘러헌이 윌슨의 뒤를 이어 총리가 되었을 때 파운드는 외환시장에서 계속 압박을 받아 6월에 달러 대비 최저치를 찍었다. 힐리는 파운드 가치를 지키려고 IMF에 39억 달러를 빌려 달라고 했다. 당시 IMF에 요청된 대출로는 가장 컸다. IMF는 대가로 공공 지출의 대폭 삭감을 요구했고, 내각은 갈라졌다. 토니 벤이 이끄는 당내 좌파는 보호무역을 담은 「대안 경제 전략」을 내놓았으나 내각은 이를 거부했다. 정부는 협상 끝에 삭감 폭을 첫해 50억 파운드에서 15억 파운드로, 이후 두 해 동안 해마다 10억 파운드로 줄였고, 대출은 1976년 12월 15일 의회에 발표되었다. 실제로는 대출의 절반만 쓰였고 1979년 5월까지 모두 갚았다. 힐리는 훗날 재무부가 공공 부문 차입 필요액을 크게 부풀려 추정한 것이 대출을 청해야 했던 주된 이유였다고 말했다. 노동당 안에서는 부유세를 제안하던 「힐리 1기」에서 임금 통제의 「힐리 2기」로 넘어간 것을 배신으로 여기는 이들이 있었다. 22 23 24

그해 노동당 전당대회에서 캘러헌은 이렇게 말했다. 「우리는 감세와 정부 지출 확대로 불황에서 빠져나오고 고용을 늘릴 수 있다고 생각했습니다. 솔직히 말씀드리건대 그런 선택지는 더 이상 없습니다. 그것이 있었다 해도 전쟁 뒤 매번 경제에 더 큰 인플레이션을 주사하고 그다음 더 높은 실업을 낳는 식으로만 작동했습니다.」 전후 모든 정부가 완전고용을 우선해 왔기 때문에, 이 연설은 전후 합의의 바탕이던 케인스주의를 부정하고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앞세운 통화주의의 예고로 읽혀 왔다. 다만 캘러헌은 실업을 키울 더 큰 지출 삭감을 거부했으므로 온전한 통화주의자는 아니었다. 4년 동안 그럭저럭 통하던 임금 억제는 1978년 정부가 임금 인상을 5% 이내로 묶으려 하자 무너졌고, 1978~1979년 겨울 노동조합들은 대규모 파업(「불만의 겨울」)으로 더 높은 임금을 얻어 냈다. 1979년 5월 총선에서 마거릿 대처의 보수당이 이겼고, 케인스주의는 1970년대 말부터 신자유주의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었다. 23 25 22

멕시코제3세계는 무엇을 요구했나? {algeria}

석유 값 인상은 원자재를 파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하나의 본보기로 보였다. 1974년 4월 유엔 제6차 특별총회에서 알제리 대통령 우아리 부메디엔은 이렇게 말했다. 「OPEC의 행동은 원자재 가격이 우리 나라들에 얼마나 중요한지, 생산국이 가격 통제의 지렛대를 쥐는 것이 얼마나 절실한지, 그리고 원자재 생산국의 연합이 얼마나 큰 가능성을 지녔는지를 보여 준 첫 사례이자 가장 구체적이고 극적인 사례입니다. 개발도상국은 이 행동을 본보기이자 희망의 원천으로 보아야 합니다.」 1974년 5월 1일 유엔 총회는 「신국제경제질서 수립에 관한 선언」과 행동 계획을 채택했다. 선언은 지금의 국제 경제 질서가 대부분의 개발도상국이 독립 국가로 존재하지도 않던 때에 세워져 불평등을 굳힌다고 했다. 세계 인구의 70%가 사는 개발도상국이 세계 소득의 30%만 차지한다는 것이었다. 논의의 중심은 1964년 생긴 유엔무역개발회의(UNCTAD)와 77그룹, 비동맹 운동이었다. 10 26

신국제경제질서(NIEO)가 내건 원칙은 모든 국가의 주권 평등과 내정 불간섭, 각국이 천연자원과 경제 활동에 대해 갖는 완전한 주권과 다국적 기업 규제, 개발도상국이 수출하는 원자재 가격과 선진국이 수출하는 상품 가격 사이의 정당하고 공평한 관계, 공업화를 위한 자금과 기술 이전이었다. 개혁 요구로는 원자재 국제 상품 협정과 가격 안정 공동 기금을 포함한 무역 규칙의 재편, 그리고 미국 등 체제를 만든 나라들에 유리했던 브레턴우즈 통화 체제의 개혁이 들어갔다. 원조 대신 무역을 바란다는 것이었다. 1974년 12월 12일 유엔 총회는 찬성 115, 반대 6, 기권 10으로 「국가의 경제적 권리·의무 헌장」을 채택했다. 이 헌장은 1972년 멕시코 대통령 루이스 에체베리아가 칠레 산티아고의 제3차 UNCTAD에서 처음 제안한 것이다. 산유국 쪽에서도 1976년 1월 다른 개발도상국을 돕는 OPEC 특별기금이 출범했다. 26 27 10

그러나 석유를 사는 가난한 나라들에게 1970년대는 오히려 혹독했다. 만델은 1974년 말, 인도·방글라데시·파키스탄과 동·적도 아프리카 대부분이 「한국전쟁 호황」의 끝 이후 가장 잔혹한 운명을 겪고 있다며, 1973년 이 나라들의 식량·비료 수입 비용이 50억 달러 늘어 석유 수입 비용 증가(12억 달러)보다 컸다고 지적했다. 산유국 지도자들은 거창한 약속을 내놓았다. 이란의 샤는 1990년대까지 이란을 선진국으로 만들 「위대한 문명」 계획을, 베네수엘라의 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는 「위대한 베네수엘라」 계획을 발표했다. 미국 정부는 NIEO를 거의 곧바로 거부했다. 경제학자 해리 존슨은 그것이 중앙계획과 독점력으로 선진국의 소득과 부를 뜯어내려 한다고 비판했고, 1981년 칸쿤 남북 정상회의에서 로널드 레이건은 민간 투자와 자유 시장이 발전에 이르는 가장 확실한 길이라고 말했다. 1980년대 외채위기 속에 NIEO는 실현되기 어려워졌고, 그 자리를 워싱턴 컨센서스가 차지했다. 1989년 발효한 원자재 공동 기금처럼 일부만 남았다. 20 7 26

한국도 두 차례의 석유 파동을 크게 겪었다. 1973년 3.5%였던 물가 상승률은 1974년 24.8%로 뛰었고, 성장률은 12.3%에서 7.4%로 떨어졌으며, 무역수지 적자는 10억 달러에서 24억 달러로 늘었다. 산업 구조가 경공업에서 에너지를 많이 쓰는 중화학공업으로 옮겨 가던 때여서 충격이 더 컸고, 경제는 1976년에야 정상을 되찾았다. 1979년의 2차 파동 때는 석유 의존도가 더 높아진 상태였다. 10·26 사건과 1980년의 정치 혼란이 겹쳐 1980년 실질 성장률은 경제개발 이후 처음으로 마이너스(-2.1%)를 기록했고 물가 상승률은 28.7%에 이르렀다. 총외채는 1979년 203억 달러에서 1985년 468억 달러로 불어나 한국은 세계 5대 채무국이 되었다. 28 29

루마니아사회주의권에게 석유 값 폭등은 무엇이었나? {soviet} {poland}

세계 최대 산유국의 하나였던 소련에게 석유 값 폭등은 뜻밖의 수입이었다. 원유 값이 1973~1974년 네 배로 오르고 1979~1981년 다시 오르자 에너지 부문은 소련 경제의 주된 동력이 되어 여러 약점을 덮었다. 알렉세이 코시긴 총리가 석유·가스 생산 책임자에게 「빵 사정이 나쁘다. 계획보다 300만 톤을 더 내놓으라」고 했다는 일화가 남아 있다. 훗날 예고르 가이다르는 석유 수출로 번 외화가 커지던 식량 공급 위기를 멈추고, 설비와 소비재 수입을 늘리고, 군비 경쟁과 미국과의 핵 균형을 위한 재정 기반을 마련하고, 아프가니스탄 전쟁 같은 모험적인 대외 정책을 가능하게 했다고 썼다. 연구자들은 같은 돈이 개혁의 필요를 가렸다고도 본다. 1971년 멈춘 코시긴의 개혁은 더 온건한 2차 개혁으로 이어졌지만 석유 수출에 기댄 성장 때문에 중단되었고, 1979년의 개혁도 이미 높은 유가에 「중독」된 경제에서 실패했다는 것이다. 이 시기의 경제 둔화는 정체기 항목이 다룬다. 30 31

동유럽 동맹국들의 사정은 달랐다. 석유 위기 뒤 소련은 경제상호원조회의(코메콘) 안의 에너지 공급 가격을 올렸고, 동맹국의 수요를 다 채우지 못하자 동유럽 정부들은 오르는 세계 시장 가격으로 중동 석유를 사야 했다. 이는 이들의 국제수지를 무너뜨리고 다른 경제적 약점을 키웠다. 높은 유가는 1974~1981년 소련이 동맹국 경제를 떠받칠 수 있게 했지만, 1980년대 석유 과잉으로 이 수입이 사라진 것은 1989년 블록 붕괴의 한 원인이 되었다. 동유럽 몇 나라는 바로 이 시기에 페트로달러로 넘치던 서방 은행에서 돈을 빌렸다. 폴란드의 에드바르트 기에레크는 주로 미국과 서독에서 빌린 돈으로 공업을 현대화하고 소비재를 수입하는 계획을 세웠고, 외채는 1980년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루마니아도 1970년대 외국 차관으로 성장했다가 외채가 110억~120억 달러로 정점에 이르렀다. 그 뒤의 일은 1980~1981년 폴란드 경제위기와 루마니아의 외채 상환과 긴축 항목에서 다룬다. 7 15 32 33

1970년대 위기의 원인을 어떻게 설명하나?

오늘날 주류 경제학과 중앙은행들은 이 시기를 주로 통화 정책의 실패로 설명한다. 연방준비제도의 역사 기록은 1965년부터 1982년까지의 「대인플레이션」의 근원이 통화량을 지나치게 늘린 연준의 정책이었다는 데에는 이견이 거의 없다고 쓴다. 동기는 필립스 곡선을 믿고 완전고용을 좇은 것이었고, 수단은 달러를 금에 묶어 두던 마지막 고리인 브레턴우즈 체제가 무너진 것이었으며, 기회는 베트남 전쟁과 「위대한 사회」 지출이 낳은 재정 불균형, 두 차례의 에너지 위기, 그리고 잠재 성장력을 높게, 완전고용 실업률을 낮게 잘못 추정한 자료였다는 것이다. 이 설명에서 석유 금수는 여러 요인의 하나일 뿐이며, 번스 자신도 1979년 인플레이션의 원인으로 베트남 전쟁의 느슨한 재정, 1971년과 1973년의 달러 절하, 1972~1973년 세계 호황, 1974~1975년 흉작과 식량 값 폭등, 유가 폭등과 생산성 둔화를 함께 꼽았다. 6 11

케인스주의 쪽은 총수요와 총공급을 나누어 본다. 통화·재정 정책은 수요의 흔들림을 다스릴 수 있지만 석유 값 급등 같은 공급 충격에는 별 쓸모가 없고, 불리한 공급 충격은 그 자체로 스태그플레이션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프리드먼과 펠프스의 기대 인플레이션 비판은 처음엔 초기 케인스주의를 겨눈 것이었지만 점차 받아들여져 새케인스주의 모형에 들어갔다. 정치경제학자 조너선 닛잔과 심숀 비클러는 이와 달리 스태그플레이션을 지배적 기업이 경쟁자보다 값을 더 빨리 올려 상대적 이윤을 키우는 「차등 축적」의 한 국면으로 설명하기도 한다. 21

마르크스주의 쪽에서 1970년대 초 가장 먼저 나온 설명은 「이윤 압박」론이다. 옥스퍼드 경제학자 앤드루 글린과 밥 서트클리프는 1972년 『영국 자본주의, 노동자, 그리고 이윤 압박』에서 영국 기업의 이윤율이 떨어지고 있음을 보였다. 이 계열의 이론에 따르면 축적이 이어져 노동 수요가 늘면 임금이 오르고, 임금이 「너무 높이」 오르면 이윤율이 떨어져 불황이 온다. 1960년대 말의 노동 쟁의가 그 배경이었다. 이탈리아에서는 남부에서 오던 노동 이주가 줄어 북부가 거의 완전고용에 이르자 노동자들이 지렛대를 쥐게 되었고, 1969~1970년 「뜨거운 가을」이라 불린 대파업이 북부 공업 지대를 휩쓸었다. 영국 광부들의 1974년 쟁의도 같은 흐름에서 읽혔다. 글린은 1970년대 트로츠키주의 「밀리턴트」 경향의 회원이었고, 뒤에 전국광부노조의 자문을 맡았다. 34 35 36 20

에르네스트 만델은 위기를 더 긴 흐름에 놓았다. 그는 1974~1975년 불황이 「고전적인 과잉생산 공황」이며, 「석유 족장」이나 노동조합에 책임을 돌리는 것은 이데올로기적이라고 했다. 영국·미국·서독의 통계를 들어 이윤율 하락이 1973년 10월 전쟁 뒤의 유가 인상보다 훨씬 앞섰고, 유가 인상이 제국주의 나라 인플레이션에 보탠 것은 2%를 넘지 않는다고 주장했다. 영국 통계는 글린과 서트클리프에게서 가져왔다. 만델은 1972년 『후기 자본주의』와 1978년 케임브리지 강연에서 자본주의가 20~25년씩 성장이 빠른 국면과 느린 국면을 오가는 「장기 파동」을 겪는다고 보았다. 전쟁과 재건, 파시즘과 전쟁이 높인 착취율, 「3차 산업혁명」이 떠받친 전후의 긴 확장은 자본의 유기적 구성이 높아지고 긴 완전고용 속에 잉여가치율이 정체하거나 떨어지면서 바닥났다는 것이다. 다만 그는 콘드라티예프처럼 회복이 저절로 온다고 보지 않고, 국가 정책과 계급 투쟁의 결과에 달렸다고 했다. 이 설명은 이윤율 저하 경향의 법칙에 기댄다. 20 37 38 39

로버트 브레너는 임금보다 경쟁에서 원인을 찾았다. 그는 1973년 이후의 「장기 침체」가 1960년대 말부터 투자 수익률이 깊고 오래 떨어진 데서 왔고, 그 뒤 실질임금 상승이 크게 꺾였는데도 이윤율이 회복되지 않았다는 점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가 꼽은 주된 원인은 세계 제조업의 지속적인 과잉 설비다. 서독과 일본, 뒤이어 동아시아 신흥공업국과 중국이 차례로 세계 시장에 들어와 기존 생산국이 만들던 같은 물건을 더 싸게 만들자 업종마다 공급이 수요를 넘어 값과 이윤이 떨어졌다. 이윤이 눌린 기업들은 업종을 떠나지 않고 신기술 투자로 버텼고, 이것이 과잉 설비를 더 키웠다는 것이다. 40

미국1979년의 두 번째 석유 파동은 어떻게 1970년대를 끝냈나? {iran}

두 번째 충격은 이란에서 왔다. 1978년 11월 이란 국영 정유 공장 노동자 3만 7천 명이 파업해 하루 600만 배럴이던 생산이 150만 배럴로 줄었다. 1979년 1월 16일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나라를 떠났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새 지도자가 되었다. 이란의 생산 감소는 1979년 1월까지 하루 480만 배럴, 당시 세계 생산의 7%에 이르렀지만, 사우디아라비아 등이 증산해 세계 공급 감소는 4% 남짓에 그쳤다. 그런데도 원유 값은 그 뒤 12개월 사이 두 배 넘게 올라 배럴당 39.50달러가 되었다. 공급 차질이 더 큰 차질에 대한 공포와 투기적 사재기를 불렀고, 호황 속 수요도 강했기 때문이다. 미국에서는 다시 주유소에 줄이 섰다. 지미 카터 대통령은 1979년 4월 5일 국내 석유 가격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기 시작했고, 7월 15일 「신뢰의 위기」 연설에서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다. 1980년 이란-이라크 전쟁이 터지자 세계 생산은 다시 7% 줄었다. 41 42

이번에는 미국의 통화 당국이 다르게 반응했다. 연준은 1978년 연방기금금리를 6.9%에서 10%로 올렸지만, 오늘날 역사가들은 이를 이미 굳어진 인플레이션을 막기에는 소심하고 모자랐다고 본다. 카터 정부는 1979년 8월 뉴욕 연방준비은행 총재 폴 볼커를 연준 의장에 앉혔다. 그가 취임할 때 전년 대비 물가 상승률은 11%를 넘었다. 1979년 10월 연방공개시장위원회는 금리 대신 지급준비금 증가율을 정책 목표로 삼겠다고 발표했다. 완전고용보다 인플레이션과의 싸움을 앞세운 이 전환과 그것이 부른 고금리, 불황은 볼커 쇼크에서 다룬다. 이 고금리와 1980년대의 석유 과잉이 겹치며 1970년대에 페트로달러를 빌린 나라들은 외채위기로 들어섰다. OPEC의 세계 시장 점유율도 1979년 약 50%에서 1985년 30% 아래로 떨어졌고, 1980년대 중반 석유 값은 배럴당 10달러 아래로 내려갔다. 42 6 10 7

결과

1979년 10월 볼커의 연준이 통화량 목표로 돌아서고 1979~1980년 영국과 미국에서 대처와 레이건이 집권하면서, 완전고용을 앞세운 전후 케인스주의 정책은 물가 안정과 시장 자유화를 앞세운 신자유주의에 주류의 자리를 내주었다. 석유 파동은 에너지 절약과 비OPEC 유전 개발을 낳아 1980년대 유가 폭락으로 되돌아왔다. 1970년대에 쌓인 페트로달러 대출은 금리가 치솟자 1982년 제3세계 외채위기로 터졌고, 석유 수입으로 버티던 소련 경제와 서방 빚에 기댄 폴란드·루마니아는 1980년대에 더 깊은 곤경에 빠졌다. 신국제경제질서 요구는 1980년대 외채위기 속에 힘을 잃었다.

연표와 지도

워싱턴 모스크바 바르샤바 런던 빈 뉴욕 캠프데이비드 알제 테헤란 바그다드 카이로 쿠웨이트시티 리야드 8 런던 11 런던 12 런던 9 뉴욕 10 뉴욕 3 캠프데이비드 4 워싱턴 15 워싱턴 16 워싱턴 17 워싱턴 2 테헤란 13 테헤란 14 테헤란 1 바그다드 5 카이로 6 쿠웨이트시티 7 리야드
  1. 11960.09.14이라크이란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
    석유수출국기구 창설

    이란·이라크·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베네수엘라 대표가 바그다드 회의에서 석유 회사들의 일방적 가격 인하에 맞서 석유수출국기구를 세웠다.

  2. 21971.02.14이란
    테헤란 가격 협정

    페르시아만 산유국과 석유 회사들이 테헤란 협정에 서명해 원유 공시 가격을 올리고, 금 대비 달러 가치 하락에 대비하는 조항을 넣었다.

  3. 31971.08.15미국
    닉슨의 신경제정책

    리처드 닉슨 대통령이 대국민 연설에서 달러의 금 태환을 중지하고, 임금·물가를 90일 동결하며, 수입품에 10% 추가 관세를 매긴다고 발표했다.

  4. 41971.12미국
    스미스소니언 협정

    10개국 그룹이 워싱턴 스미스소니언 협회에서 금값을 온스당 38달러로 올려 달러를 7.9% 평가절하하고 다른 통화를 절상하기로 합의했다.

  5. 51973.10.06이집트시리아이스라엘
    제4차 중동전쟁 발발

    이집트와 시리아가 욤 키푸르에 이스라엘 진지를 공격해 전쟁이 시작되었다.

  6. 61973.10.16쿠웨이트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라크
    산유국의 일방적 가격 인상

    사우디아라비아·이란·이라크·아부다비·쿠웨이트·카타르가 쿠웨이트 회의에서 공시 가격을 17% 올린 배럴당 3.65달러로 정하고 감산을 발표했다.

  7. 71973.10.20사우디아라비아미국리비아
    사우디아라비아의 대미 금수

    닉슨이 이스라엘에 22억 달러 긴급 원조를 요청하자 전날 리비아에 이어 사우디아라비아와 다른 아랍 산유국들이 미국에 대한 석유 금수를 선언했다.

  8. 1973.12이란사우디아라비아
    배럴당 11.65달러

    OPEC이 회의에서 원유 값을 배럴당 5달러에서 11.65달러로 올린다고 발표했다.

  9. 81974.01.01–03.07영국
    영국의 주 3일 노동

    에드워드 히스 정부가 탄광 노동자의 초과근무 거부로 석탄이 모자라자 상업용 전력 소비를 주 3일로 제한하기 시작했다.

  10. 1974.03.17사우디아라비아미국
    대미 금수 해제

    리비아를 뺀 아랍 석유장관들이 미국에 대한 금수를 끝낸다고 발표했다.

  11. 91974.05.01알제리미국
    신국제경제질서 선언

    유엔 총회 제6차 특별총회가 「신국제경제질서 수립에 관한 선언」과 행동 계획을 채택했다.

  12. 101974.12.12멕시코미국
    국가의 경제적 권리·의무 헌장

    유엔 총회가 각국이 자국 천연자원과 외국인 투자를 다스릴 권리를 담은 헌장을 찬성 115, 반대 6, 기권 10으로 채택했다.

  13. 111976.04.05영국
    캘러헌 총리 취임

    해럴드 윌슨이 물러나고 제임스 캘러헌이 영국 총리가 되었다. 파운드는 계속 외환시장의 압박을 받았다.

  14. 121976.12.15영국
    영국의 IMF 차관 발표

    데니스 힐리 재무장관이 지출 삭감을 조건으로 한 IMF의 39억 달러 차관을 의회에 발표했다.

  15. 131978.11이란
    이란 석유 노동자 파업

    이란 국영 정유 공장 노동자 3만 7천 명이 파업해 하루 600만 배럴이던 생산이 150만 배럴로 줄었다.

  16. 141979.01.16이란
    샤의 출국

    샤 모하마드 레자 팔라비가 이란을 떠났고, 아야톨라 호메이니가 새 지도자가 되었다.

  17. 151979.04.05미국
    카터의 석유 가격 통제 해제

    지미 카터 대통령이 국내 석유 가격 통제를 단계적으로 풀기 시작했다.

  18. 161979.07.15미국
    「신뢰의 위기」 연설

    카터가 텔레비전 연설에서 미국이 신뢰의 위기에 빠졌다고 말하며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다.

  19. 171979.10.06미국
    연준의 통화량 목표 전환

    연방준비제도 의장 폴 볼커가 금리 대신 지급준비금과 통화량을 조절 목표로 삼는 새 방식을 발표했다.

관련 인물 21명

참여13

미국 국무장관헨리 키신저1923–2023

1973년 11월 리야드에서 파이살 국왕에게 금수 해제를 요청했다가 거절당했고, 금수가 풀리지 않으면 「대응 조치」를 취하겠다고 경고했다.

영국 총리제임스 캘러헌1912–2005

1976년 총리가 되어 IMF 차관을 받아들였고, 노동당 대회에서 불황에서 지출로 빠져나올 수 있다는 생각을 버리겠다고 말했다.

미국 대통령지미 카터1924–2024

1979년 2차 석유 파동 때 국내 석유 가격 통제를 풀기 시작하고 「신뢰의 위기」 연설로 에너지 절약을 호소했다.

소련 각료회의 의장알렉세이 코시긴1904–1980

석유 수출이 곡물 수입을 떠받치던 시기에 석유·가스 생산 책임자에게 빵 사정이 나쁘니 계획 외 생산을 늘려 달라고 했다.

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제1서기에드바르트 기에레크1913–2001

1970년대 미국과 서독에서 빌린 돈으로 공업을 현대화하고 소비재를 수입했고, 외채가 1980년 230억 달러에 이르렀다.

이란의 샤모하마드 레자 팔라비1919–1980

1973년 12월 OPEC의 유가 인상을 가장 강하게 밀어붙였고, 석유 수입으로 서독 크루프 지분을 사며 「위대한 문명」을 약속했다. 1979년 1월 16일 혁명 속에 이란을 떠났다.

이란 혁명 지도자루홀라 호메이니1900–1989

1979년 샤가 떠난 뒤 이란의 새 지도자가 되었고, 혁명 속 이란 석유 생산의 급감이 2차 석유 파동을 불렀다.

이집트 대통령안와르 사다트1918–1981

1973년 10월 6일 시리아와 함께 시나이와 골란을 되찾으려 이스라엘을 기습해 제4차 중동전쟁을 일으켰고, 아랍 산유국은 이 전쟁을 계기로 석유 무기를 꺼냈다.

사우디아라비아 석유 책임자압둘라 타리키1919–1997

1959년 카이로 아랍 석유 회의에서 페레스 알폰소와 함께 석유회사들에 산유국과 먼저 협의하라고 요구했고, 이듬해 OPEC을 함께 세웠다.

베네수엘라 광산·탄화수소부 장관후안 파블로 페레스 알폰소1903–1979

1959년 카이로에서 타리키와 함께 산유국과의 사전 협의를 요구했고, 1960년 OPEC 창설을 이끌었다.

알제리 대통령우아리 부메디엔1932–1978

1974년 4월 유엔 제6차 특별총회에서 OPEC의 행동을 원자재 가격과 생산국 단결의 힘을 보여 준 첫 사례로 내세웠다.

멕시코 대통령루이스 에체베리아1922–2022

1972년 칠레 산티아고의 제3차 UNCTAD에서 「국가의 경제적 권리와 의무 헌장」을 처음 제안했고, 헌장은 1974년 12월 유엔 총회에서 채택되었다.

베네수엘라 대통령카를로스 안드레스 페레스1922–2010

오일 붐 속에 「위대한 베네수엘라」 계획을 발표하고 석유 수입으로 공공 지출을 크게 늘렸다.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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