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17.03–1920.10

핀란드 독립과 내전

1917년 12월 독립을 선언한 핀란드는 왜 한 달 만에 적위대와 자위대의 내전에 빠졌고, 소비에트 러시아와 독일은 이 전쟁에서 어떤 역할을 했으며, 동쪽 국경은 1920년 타르투 조약으로 어떻게 정리되었나?

러시아 혁명 속에 자치를 되찾고 1917년 12월 독립을 선언한 핀란드는 1918년 1월 남부의 적색 핀란드와 북부의 백색 핀란드로 갈라졌다. 소비에트 러시아가 적위대를 거들었으나 만네르헤임의 백군과 독일 발트해 사단이 탐페레·헬싱키·비푸리를 차례로 차지했고, 전쟁 뒤의 처형과 수용소는 3만여 명의 희생 가운데 큰 몫을 차지했다. 독일 왕을 세우려던 계획은 독일의 패전으로 접혔고, 공화국은 동카렐리야 원정을 거쳐 1920년 소비에트 러시아와 타르투 조약을 맺었다.

핀란드러시아대공국에서 독립으로: 1917년

1809년부터 러시아 제국의 대공국이던 핀란드는 자체 예산과 화폐 마르카를 가진 자치국이었지만, 1899년 러시아화 정책이 시작된 뒤 차르는 1908~1917년 의회를 거듭 해산하고 상원 구성을 마음대로 정했다. 그래도 1906년 개혁으로 여성까지 포함한 보통선거의 단원제 의회가 생겼고, 사회민주당은 인구 대비로 세계 어느 사회주의 정당보다 큰 대중정당이 되었다. 2월 혁명으로 니콜라이 2세가 물러나자 러시아 임시정부는 3월 15일 선언으로 1809~1899년의 자치를 되돌려 주었다. 1916년 선거에서 절대다수를 얻은 사회민주당의 오스카리 토코이가 3월 사회민주당원 6명과 비사회주의자 6명으로 상원을 꾸렸다. 세계 최초의 사회민주주의자 정부 수반이었다. 그러나 권력은 거리로 내려갔다. 러시아 남부의 곡물 수입이 끊기며 식량난과 실업, 물가 상승이 겹쳤고, 8시간 노동제와 임금 인상을 요구하는 파업이 공장과 농촌을 휩쓸었다. 7월 의회는 사회민주당과 농민동맹 등의 찬성으로 「권력법」을 통과시켜, 외교와 군사를 뺀 입법권 전부가 의회에 있으며 의회는 스스로만 해산할 수 있다고 정했다. 볼셰비키 이바르 스밀가가 이끈 핀란드 소비에트 지역위원회는 의회가 공격받으면 지키겠다고 약속했다. 하지만 7월 사태를 넘긴 러시아 임시정부는 권력법을 인정하지 않았고, 핀란드 보수파의 협력 속에 의회를 해산하고 러시아 병력을 더 보냈다. 1 2 3

10월 1~2일 새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은 표는 늘었지만 절대다수를 잃었고 비사회주의 정당들이 과반을 차지했다. 이 패배는 노동운동을 급진화했다. 11월 7일 볼셰비키가 페트로그라드에서 권력을 잡자, 핀란드 의회는 농민동맹 지도자 산테리 알키오의 타협안에 따라 11월 15일 권력법을 근거로 최고권력을 넘겨받고 8시간 노동제와 지방선거 보통선거권을 비준했다. 같은 날 소비에트 정부는 완전한 분리를 포함한 러시아 여러 민족의 자결권을 선언했다. 사회민주당은 11월 1일 「우리는 요구한다」 강령을 내 7월 해산 이전으로의 복귀, 자위대 해산, 제헌의회 선거를 요구했고, 받아들여지지 않자 11월 14~19일 총파업에 들어갔다. 파업 지도부는 16일 근소한 차로 혁명을 결의했다가 실행할 활동가가 모자라 같은 날 취소했다. 이 무렵 레닌과 스탈린은 핀란드 사회민주당에 권력을 잡으라고 재촉했고,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민족인민위원 이오시프 스탈린은 11월 14일 헬싱키의 사회민주당 대회에 직접 나와 연설했다. 그러나 다수는 의회주의를 선호하는 온건파였고, 볼셰비키는 이들을 「마지못한 혁명가」라 불렀다. 파업 중 핀란드 적위대가 남부에서 정적 몇 명을 처형하고 첫 무력 충돌이 일어나 34명이 죽었다. 11월 27일 페르 에빈드 스빈후부드의 순수 비사회주의 상원이 임명되었다. 핀란드를 러시아에서 떼어 내고 자위대를 강화하는 것이 그의 목표였다. 4 1 2 5

스빈후부드의 상원은 12월 4일 독립선언문과 공화국 정부 형태 법안을 의회에 냈고, 의회는 12월 6일 선언을 채택했다. 사회민주당은 상원안에 반대하고 별도의 주권 선언안을 냈지만 두 진영 모두 독립 자체는 지지했다. 보수파는 좌파를 억누르고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줄이려고 분리를 서둘렀고, 사회주의자들은 보수파 아래의 주권을 의심하면서도 민족주의적 노동자들의 지지를 잃을까 두려워했다. 독립은 러시아의 승인을 받아야 완성되었다. 7월에는 러시아 지도부와의 협상을 꺼렸던 사회주의자들도 이번에는 두 차례 대표단을 페트로그라드에 보내 레닌에게 승인을 청했다. 브레스트-리토프스크에서 독일의 압박을 받던 블라디미르 레닌은 볼셰비키가 러시아 중심부는 지킬 수 있어도 북서쪽 구석의 핀란드 같은 주변부는 내주어야 한다고 계산했다. 12월 31일 밤 스빈후부드 대표단은 스몰니에서 소브나르콤의 독립 승인 결정을 받았고, 레닌은 처음에 쑥스러워하며 사양하다가 복도로 나와 스빈후부드와 악수했다. 이 결정은 1918년 1월 4일 전러시아 중앙집행위원회의 승인을 받았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핀란드 밖에서 처음으로 핀란드 독립을 인정한 정부였다. 내전이 시작될 무렵에는 독일, 스웨덴, 프랑스, 오스트리아-헝가리 등도 승인했지만, 영국과 미국은 핀란드와 독일의 관계를 지켜보며 승인을 미루었다. 영어 출처는 볼셰비키가 언젠가 핀란드에도 공산주의 혁명이 일어나 다시 하나가 되기를 기대했다고 설명한다. 2 1 6 7

핀란드두 무장 집단: 적위대와 자위대

2월 혁명은 핀란드의 경찰을 해체했고, 그 공백 속에서 좌우가 저마다 치안 조직을 만들었다. 처음에는 지역 단위의 거의 비무장 조직이었지만, 의회가 해산되고 강한 정부도 국군도 없던 1917년 말 점점 준군사 조직이 되었다. 오른쪽에서는 보수적 학자, 기업가, 대지주, 독립 활동가들이 자위대(수오옐루스쿤타)를 조직했고, 뒤에 이 조직이 백위대로 불렸다. 자위대는 1917년 8월 31일 149개에서 9월 말 251개, 10월 말 315개, 11월 말 380개, 1918년 1월 26일 408개로 늘었다. 9월에는 포르보 근처 삭산니에미 영지에 200명 규모의 기병 학교가 세워졌다. 1915~1917년 독일에서 훈련받은 핀란드 의용병 약 1,900명의 예거 대대도 있었다. 그 선발대와 독일 무기가 10~11월 화물선과 독일 잠수함 UC-57로 들어왔고, 연말까지 예거 약 50명이 돌아왔다. 왼쪽에서는 사회민주당 지부와 노동조합을 통해 노동자 질서대가 모집되었고, 그 일부가 1905~1906년 전통을 이은 적위대였다. 10월 20일 선거 패배 직후 노동운동이 부대 확충을 선언하자 질서대는 10월 말 100~150개, 11월 말 342개, 1918년 1월 26일 375개로 불어났다. 그러나 헬싱키 최대 부대조차 군용 소총이 20~30자루뿐이었다. 두 무장 집단의 공존은 사회를 이중권력 상태로 갈라놓았고, 총파업 때 둘은 결정적으로 갈라섰다. 1 8

러시아 제국군도 여전히 핀란드에 있었다. 1918년 1월 약 5만 명의 옛 차르 군대가 주둔했는데, 병사들은 사기를 잃고 전쟁에 지쳤으며 혁명으로 풀려난 땅을 원하는 농민 출신이었다. 대부분은 3월 말까지 러시아로 돌아갔다. 1월 초 적위대 총사령관 알리 알토넨은 무기를 사러 페트로그라드로 갔다. 그는 그곳에서 술에 빠져 한동안 행방을 알 수 없었고 적위대 참모부는 13일 그의 자리를 서둘러 채우기로 했지만, 같은 날 알토넨은 소총 1만 자루와 대포 10문이 몇 주 안에 들어온다고 알려 왔다. 같은 무렵 자위대는 독일에서 소총 6만 자루를 받을 준비를 하고 있었다. 1월 9~21일 남부와 남동부에서 첫 국지전이 벌어졌는데, 대부분 무기 경쟁과 비푸리 장악을 둘러싼 싸움이었다. 루매키의 타벳티역에서는 자위대가 소총 200자루를 빼앗았다. 1월 12일 의회는 스빈후부드 상원에 국가 질서를 세울 권한을 주었고, 15일 옛 러시아 제국군 장군 카를 구스타프 에밀 만네르헤임이 자위대 총사령관에 임명되었다. 상원은 자위대를 핀란드의 백군으로 지정했다. 만네르헤임은 서해안의 바사-세이내요키 일대에 사령부를 두고 25일 교전 명령을 내렸으며, 21~28일 남포흐얀마의 러시아 수비대를 무장해제해 무기를 손에 넣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북부의 러시아 수비대는 거의 저항하지 않았다. 1 9 8 5

핀란드1918년 1월 27~28일: 둘로 갈린 핀란드

적위대는 백군의 우위를 인정하지 않고 독자적 군사 권력을 세웠다. 알토넨은 헬싱키에 사령부를 차리고 볼셰비키 본부 스몰니를 본떠 「스몰나」라 불렀다. 1월 26일 혁명 명령이 내려졌고 헬싱키 노동자회관 탑에 봉기의 신호인 붉은 등이 켜졌다. 헬싱키 적위대와 비푸리-탐페레 철도변의 일부 부대는 23~26일 이미 움직여 요충지를 지키고 페트로그라드에서 오는 볼셰비키 무기 열차를 호위했고, 27일 밤 대규모 동원이 시작되었다. 그 열차를 빼앗으려던 백군과 적위대가 27일 카렐리야 지협의 캐매래에서 맞붙어 핀란드인 20~30명이 죽었다. 28일 적위대가 헬싱키를 장악했다. 같은 날 사회민주당원들이 정부에 맞서 혁명 정부인 핀란드 인민대표위원회를 세웠고, 의장은 사회민주당 의장이자 1917년 의회 의장이던 쿨레르보 만네르였다. 에드바르드 귈링은 재정을, 오토 빌레 쿠시넨은 교육을, 오스카리 토코이는 식량 공급을 맡았다. 군사 경험 없는 노동조합 지도자 에로 하팔라이넨이 이날 알토넨을 대신해 적위대 총사령관이 되면서 위원회에도 들어갔다. 인민대표위원회는 노동자 중앙평의회의 감독을 받았고, 지역에서는 노동자 평의회가 옛 지방 당국을 대신해 치안과 식량 배급, 공장 관리를 맡았다. 그러나 옛 행정의 고위·중간 관리들이 협력을 거부해, 새 관리를 하급 직원 가운데서 뽑아 가르쳐야 했다. 1 10 9 11 12 13

적색 핀란드의 지도부는 레닌의 프롤레타리아 독재와 다른 길을 그렸다. 쿠시넨이 2월 23일 내놓은 헌법 초안은 스위스와 미국 헌법, 프랑스 혁명의 영향을 받아 권력을 의회에 모으고 정부의 몫은 줄였다. 복수정당제와 집회·언론·출판의 자유, 폭넓은 국민투표를 담았고, 노동운동의 권위를 지키려고 인민에게 「영구 혁명」의 권리를 주었으며, 사유재산권의 상당 부분은 국가와 지방행정으로 넘기려 했다. 프롤레타리아 독재라는 개념은 초안에 없었다. 그러나 초안은 끝내 확정되지 못했고, 혁명과 내전 속에서 태어난 정권의 실제 정책에서는 정치 테러를 포함한 폭력이 두드러졌다. 사회주의자들 스스로도 혁명으로 얻은 권력이 민주주의에 진정한 기회를 줄 수 있는지 물어야 했다. 1917년 7월까지 의회에서 누리던 힘을 되찾는 것이 1월 혁명의 주된 목표 가운데 하나였기 때문이다. 영토 문제에서도 적색 핀란드는 민족주의를 버리지 않았다. 다수는 중립적인 독립 핀란드를 원했고, 일부는 러시아령 카렐리야의 아우누스와 비에나, 그리고 페차모를 핀란드에 합치자고 요구했다. 수는 적지만 적위대 안에서 영향력이 컸던 핀란드 볼셰비키만이 러시아와의 합병을 지지했다. 백색 진영의 확장론자들도 같은 땅을 노렸으니, 「대핀란드」는 좌우가 함께 품은 꿈이었다. 10 1

백색 핀란드의 정부는 스빈후부드의 상원이었다. 상원은 1월 29일부터 5월 3일까지 서해안의 바사를 수도로 삼아 「바사 상원」이라 불렸다. 스빈후부드 자신은 헬싱키에 숨어 독일과 스웨덴에 개입을 청하다가 3월 베를린과 스톡홀름을 거쳐 바사로 건너갔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와 퀴외스티 칼리오 등 일부 정치인은 독일군이 올 때까지 헬싱키에 숨어 지냈다. 1월 28일부터 2월 3일 사이에 남부를 동서로 가로지르는 전선이 굳어졌고, 3월 백군의 총공세 전까지 크게 바뀌지 않았다. 적위대는 그 남쪽, 거의 모든 큰 도시와 공업 중심지, 그리고 소작농이 가장 많은 대농장 지대를 차지했다. 백군은 중소 자영농이 많고 소작농의 처지가 상대적으로 나은 북쪽 농업 지대를 차지했다. 전선 너머에는 서로의 고립 거점이 있었는데, 백색 지역 안의 공업 도시 바르카우스, 쿠오피오, 오울루와 적색 지역 안의 포르보 등이었다. 양쪽 핀란드 병력은 각각 7만~9만 명, 소총 약 10만 자루, 기관총 300~400정이었다. 적위대는 처음에 임금을 받는 자원병이 중심이었고 여성 2,600명이 있었으며, 백군은 징집병이 주력에 자원병이 1만 1천~1만 5천 명이었다. 도시와 농촌의 노동자가 적위대의 다수였고, 땅을 가진 농민과 교육받은 계층이 백군의 뼈대였다. 2월 백군이 징집을 시작하자 노동운동 지지자 3만 명은 나타나지 않았다. 양쪽 모두 14~17세 소년병을 썼다. 1 10 6 5

핀란드러시아소련소비에트 러시아와 적색 핀란드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은 무기와 일부 병사였지만, 병사의 규모는 흔히 생각하는 것보다 작았다. 적색 러시아 병사 4,000~5,000명이 핀란드 적위대를 도왔으나, 100~1,000명 단위의 소부대로 나뉘어 실제 전선에서 싸운 것은 약 3,000명이었다. 러시아 장교들의 태도도 갈렸다. 미하일 스베치니코프는 2월 서부 핀란드에서 적위대를 지휘했고 콘스탄틴 예레메예프는 카렐리야 지협의 소비에트 부대를 이끌었지만, 혁명에 의심을 품은 다른 장교들은 오히려 만네르헤임과 협력해 러시아 수비대의 무장해제를 도왔다. 만네르헤임은 1월 30일 핀란드의 러시아 병사들에게 백군은 러시아와 싸우는 것이 아니라 핀란드 적위대와 그들을 돕는 소비에트 부대를 무찌르려는 것이라고 선언했다. 그러면서도 백군의 선전은 이 전쟁을 러시아 볼셰비키에 맞선 방어전쟁으로 그리고 적 가운데 핀란드인의 몫을 작게 보이게 했다. 더 중요한 것은 무기였다. 2월 초 유카 라흐야가 지휘한 열차가 알토넨이 볼셰비키에게서 사들인 소총 1만 5천 자루와 기관총, 대포, 탄약 200만 발을 싣고 페트로그라드에서 도착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레닌은 1월 13일에 이미 군사 지원을 약속했다. 적위대는 비행기도 썼지만 핀란드인 조종사가 없어 대부분 러시아인 조종사에 기대었고, 지휘와 연료, 정비가 부실해 효과는 작았다. 1 8 5

3월 1일 페트로그라드에서 인민대표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이 조약을 맺었다. 소비에트 쪽에서는 레닌과 스탈린이, 핀란드 쪽에서는 에드바르드 귈링과 오스카리 토코이가 서명했다.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라는 국호는 이 조약에만 나온다. 인민대표위원회는 그때까지 「핀란드 공화국」이라는 이름을 써 왔는데, 협상 중 레닌이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을 덧붙이자고 했고, 위원회는 뒤에 국호는 핀란드인이 정해야 했다며 자기 대표들을 탓했다. 협상을 주도한 귈링은 이를 통해 핀란드에서 러시아의 영향력을 줄이고 백색 핀란드와 평화 협상을 할 길을 열려 했다. 협상은 두 사회주의 정부 사이에서도 국제 사회주의보다 민족주의가 앞섰음을 보여 주었다. 적색 핀란드와 소비에트 러시아의 경계를 두고 큰 다툼이 벌어졌고, 핀란드 측은 페차모를 얻었지만 아우누스와 비에나 문제는 열린 채 남았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혁명 전 민족자결을 강조했던 레닌은 권력을 잡은 뒤 연방주의로 기울었고 핀란드도 결국 러시아에 합쳐지기를 바랐다. 그러나 조약의 의미는 이틀 뒤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이 맺어지면서 빠르게 사라졌다. 두 불안정한 사회주의 국가는 저마다의 내전에 매달려 있었고, 적색 핀란드의 운명은 결국 러시아와 독일 사이의 힘의 정치로 결정되었다. 10 12 3 1

독일이 2월 18일 러시아 공격을 재개하자 핀란드에서 싸우는 소비에트 병사의 수는 눈에 띄게 줄었다. 3월 3일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은 러시아군의 핀란드 철수를 요구했고, 볼셰비키의 지원은 무기와 보급으로 제한되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독일 외무부가 3월 30일 페트로그라드의 적위대가 여전히 무리 지어 핀란드로 간다고 항의하자, 레닌은 4월 1일 인민대표위원회를 돕는 병력의 공식 파견을 금지했다. 소비에트 부대는 그래도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길목인 카렐리야 지협에서 2~4월 라우투 전투를 치르며 수도의 접근로를 지켰다. 헬싱키의 발트함대도 떠났다. 함대는 2월 레닌의 명령으로 탈린에서 헬싱키로 옮겨 와 있었는데, 독일군이 오기 전 쇄빙선의 도움으로 얼음을 헤치고 4월 22일까지 모두 크론시타트와 페트로그라드로 빠져나갔다. 이 함정들은 뒤에 페트로그라드 방어에서 큰 역할을 했다. 헬싱키 전투 때 시내에 남아 있던 친적색 러시아 부대는 조약에 따라 싸우지 않았다. 5월 11일에는 독일의 요구에 따라 헬싱키에 남은 옛 러시아 신민 약 2,100명이 추방되었다. 영어 출처는 볼셰비키가 브레스트에서 핀란드 내전에 개입하지 않기로 하면서 핀란드 공산주의자들이 앞서 약속받은 지원을 잃었다고 평가한다. 러시아의 철수는 적색 핀란드의 운명을 사실상 독일의 손에 넘겼다. 1 5 14 15 13

핀란드탐페레 전투

2월부터 3월 초까지 적위대는 전선 곳곳에서 총공세를 벌였으나 숙련된 지휘관이 없어 대부분 성과를 내지 못했다. 현장 지휘관을 병사들이 투표로 뽑는 경우가 많았고 훈련과 규율도 모자랐다. 3월 20일 하팔라이넨은 잇단 패배 끝에 총사령관에서 물러났고, 에이노 라흐야·아돌프 타이미·에베르트 엘로란타의 볼셰비키 3인 지도부가 뒤를 이었다. 백군에는 두 가지 이점이 있었다. 하나는 만네르헤임과 스웨덴 의용 장교 84명, 옛 차르 군대의 핀란드인 장교들로 된 전문 지휘부였고, 다른 하나는 2월 25일 대부분 바사에 도착한 예거 1,450명이었다. 동부전선에서 단련된 예거들은 2월 말부터 징집 연대 6개를 급히 훈련했다. 사회주의 성향이 강하다고 여겨진 예거 450명은 독일에 남겨졌다. 만네르헤임은 공업 도시 탐페레와 카렐리야의 중심 도시 비푸리 가운데 어디를 먼저 칠지 저울질하다가, 비푸리 공략은 너무 위험하다고 보고 무장한 적위대 약 1만 5천 명이 지키는 노동자의 도시 탐페레를 골랐다. 3월 16일 그는 탐페레 북동쪽 65킬로미터 랭겔매키에서 적위대 방어선의 오른쪽 측면을 뚫는 주공을 시작했고, 북서쪽 전선에서도 동시에 공격했다. 일부 적위대는 무너져 달아났지만 끝까지 버틴 부대도 있었다. 백군은 24일 렘팰래에서 남쪽 연결을, 25일 서쪽 연결을 끊어 탐페레를 포위했다. 스웨덴 의용병 1,000명의 스웨덴 여단도 이 싸움에 가담했다. 1 16

탐페레 전투는 백군 1만 6천 명과 적위대 1만 4천 명이 맞선 핀란드 최초의 대규모 시가전이었다. 시가지를 둘러싼 싸움은 부활절 직전인 3월 28일 칼레반캉가스 묘지에서 시작되었고, 이날은 뒤에 「피의 성목요일」로 불렸다. 백군은 일부 부대가 50퍼센트 넘는 손실을 입고도 결정적 승리를 거두지 못해 부대와 작전을 다시 짜야 했다. 4월 3일 새벽 집중 포격 뒤 백군이 시 중심으로 들어가 집집마다, 거리마다 싸우며 나아갔고, 그날 밤 탐메르코스키 급류의 동쪽 기슭에 닿았다. 헬싱키-탐페레 철도를 따라 밖에서 포위를 풀려던 적위대의 시도는 모두 실패했다. 에이노 라흐야가 이끈 3,500명의 렘팰래 반격도 그 가운데 하나였다. 적위대는 4~5일 시 서부를 잃었고, 탐페레 시청이 마지막 거점의 하나였다. 전투는 4월 6일 퓌니키와 피스팔라 지구의 적위대가 항복하며 끝났다. 수세에 몰린 적위대가 오히려 더 강하게 싸운 탓에 만네르헤임은 비푸리에 쓰려고 아껴 둔 정예 예거 부대까지 투입해야 했다. 적색에도 탐페레의 후고 살멜라 같은 유능한 지역 지휘관이 있었지만 전세를 바꾸지는 못했다. 마지막 날 밤 알토넨은 한 부대를 이끌고 포위를 뚫어 얼어붙은 내시얘르비 호수를 건너 빠져나갔다. 1 16 9

탐페레 전투는 내전에서 가장 피비린내 나는 싸움이었다. 백군은 700~900명을 잃었고, 그 가운데 예거 50명은 예거 대대가 1918년 전쟁의 단일 전투에서 입은 가장 큰 손실이었다. 적위대는 1,000~1,500명이 죽고 1만 1천~1만 2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민간인 71명이 주로 포격으로 죽었고, 목조 건물이 많던 시 동부는 완전히 파괴되었다. 백군은 항복한 적위대를 곧바로 처형하기 시작했다. 영어 출처에 따르면 전투 뒤 적위대 1,000명과 러시아인 200명이 처형되었고, 러시아인 희생자는 대부분 병사였다. 백군은 포로를 쏘지 않는다는 만네르헤임 명의의 전단을 뿌렸지만, 한 부대는 내신린나 궁 마당에서 항복한 적위대 20명을 총살했다. 포로들은 시 동쪽 칼레바 지구의 수용소로 보내졌고, 그 뒤 다섯 달 동안 1,228명이 처형과 질병, 굶주림으로 죽었다. 일부 출처에 따르면 칼레반캉가스 묘지의 공동묘지에 적위대 2,751명이 묻혀 있고, 그 가운데 1,208명이 전사자다. 탐페레 함락 뒤 포로가 너무 많아져 그때까지처럼 붙잡은 적위대를 대부분 쏘아 죽이는 일은 계속할 수 없게 되었고, 이곳에 내전의 첫 대형 수용소가 세워졌다. 탐페레의 패배는 적색 핀란드 붕괴의 시작이었다. 4월 8일 인민대표위원회는 헬싱키를 떠나 비푸리로 옮겼고, 10일 적색 진영은 행정 전체를 개편해 쿨레르보 만네르에게 총사령관 자리와 독재 권한을 맡겼다. 1 16 17 10 13

핀란드독일독일의 개입: 한코에서 비푸리까지

독일은 처음부터 핀란드를 노린 것은 아니었다. 핀란드 독립 활동가들은 2월 혁명 뒤 독일에 거듭 도움을 청했지만, 서부전선의 압박을 받던 독일은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휴전과 강화 협상을 해치고 싶지 않았다. 사정이 바뀐 것은 1918년 2월 10일 레프 트로츠키가 독일 안에서 혁명이 일어나기를 기대하며 브레스트 협상을 깨면서였다. 독일 지도부는 13일 보복으로 핀란드에도 부대를 보내기로 했고, 러시아의 서쪽 이웃들에게서 「도움 요청」을 받는 형식을 취했다. 베를린의 백색 핀란드 대표들은 14일 그 요청을 냈다. 만네르헤임은 독일 무기는 원했지만 독일군의 실제 개입에는 반대했다. 그는 예거들의 능력과 러시아군의 사기 저하를 믿었다. 그러나 바사 상원은 독일의 군사·정치 지원에 기대었고, 처음에 독일의 도움을 꺼리던 사회자유주의자들도 전쟁이 길어지자 생각을 바꾸었다. 3월 7일 독일과 백색 핀란드가 맺은 협정은 핀란드를 독일의 세력권에 묶었다. 독일의 전쟁 지도자 에리히 루덴도르프는 비푸리-나르바 방면에서 페트로그라드를 계속 위협하고 핀란드에 독일 주도의 군주정을 세우려 했다. 핀란드 상원은 개입 비용을 모두 대고 국민에게 독일군에 식량과 숙소를 내주라고 촉구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빌헬름 2세는 3월 7~8일 독일이 핀란드의 이익을 위해 브레스트 조약에 서명한 소비에트 정부와 싸우지는 않을 것이며, 핀란드가 국경 밖으로 전쟁을 넓히면 지원하지 않겠다고 답했다. 1 18 19

3월 5일 독일 해군 전대가 올란드 제도에 상륙했다. 2월 중순부터 이 섬들을 점령하고 있던 스웨덴 원정대는 5월에 떠났다. 4월 3일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지휘하는 약 1만 명의 발트해 사단이 헬싱키 서쪽 한코에 저항 없이 상륙했다. 러시아 수병들은 그 직전 한코항에서 잠수함 네 척을 자침시켰다. 7일에는 오토 폰 브란덴슈타인 대령의 3,000명 부대가 헬싱키 동쪽 로비사를 차지했다. 러시아어 출처는 핀란드에 들어온 독일군을 모두 1만 4천~1만 5천 명으로 본다. 4월 12일 새벽 독일군 2,000~3,000명이 북서쪽에서 헬싱키를 공격했고, 후고 모이러 중장의 함대는 항구를 막고 남부 시가를 포격하며 해병을 상륙시켰다. 적위대 약 7,000명이 노동자회관, 헬싱키역, 스몰나, 상원 궁 일대에서 버텼지만 정예 부대는 다른 전선에 있었다. 숨어 있던 헬싱키 백위대도 독일군을 따라 싸움에 나섰다. 13일 독일군은 노동자 지구까지 밀고 들어갔고, 노동자회관을 포격해 핀란드 혁명의 붉은 등을 껐다. 오후 2시쯤 칼리오 지구의 교회 탑에 백기가 올랐다. 독일군 60명, 적위대 300~400명, 백위대 23명이 죽었고 적위대 약 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독일군은 14일 시내에서 승전 행진을 벌였다. 독일군은 이어 휘빙캐와 리이히매키를 거쳐 26일 해메엔린나를 차지했다. 휘빙캐에서는 전투 뒤 적어도 150명의 적위대가 백군에게 처형되었다. 1 18 20 15 14 5

4월 19일 브란덴슈타인 부대가 라흐티를 점령해 서부와 동부의 적위대를 갈라놓았다. 22일부터 5월 1일까지 수천 명의 서부 적위대와 적색 피란민이 러시아로 가려고 라흐티 일대를 뚫으려 했으나 막혔다. 적위대 600명과 독일군 80명이 죽었고, 라흐티 안팎에서 3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여자와 아이가 섞인 긴 피란 행렬은 백군의 공격으로 큰 피해를 입었다. 적색에게 그 길은 「눈물의 길」이었고, 백군에게는 동쪽으로 늘어선 적의 행렬이 승리의 장면이었다. 그사이 백군은 비푸리로 눈을 돌렸다. 백군 1만 8,500명이 적위대 1만 5천 명을 상대했고, 4월 20~26일 카렐리야 지협에서 페트로그라드로 가는 연결을 끊은 뒤 27일 밤 예거 포병의 집중 포격으로 총공격을 시작했다. 29일 새벽 적위대의 상징적 최후 거점 파테린매키가 함락되었다. 백군 400명과 적위대 500~600명이 죽고 1만 2천~1만 5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인민대표위원회는 이미 배로 페트로그라드로 떠난 뒤였다. 지도부의 도피는 많은 적위대원을 분노하게 했다. 하팔라이넨과 귈링은 비푸리에 남아 방어를 조직하다가 5월 모터보트로 페트로그라드에 빠져나갔다. 코우볼라와 코트카 사이의 마지막 거점들은 5월 5일까지 무너졌고, 백군이 카렐리야 지협의 러시아 해안포대 이노 요새를 러시아군에게서 넘겨받은 15일 전쟁은 끝났다. 백색 핀란드는 16일 헬싱키에서 만네르헤임을 앞세운 대규모 승전 행진을 벌였다. 1 21 22 11 5

핀란드테러와 수용소

양쪽 모두 처형으로 정치 폭력을 썼고, 핀란드에서는 이를 백색 테러와 적색 테러라 부른다. 테러에는 지휘부가 계획한 전쟁의 일부라는 측면과 지역의 사적 살인과 보복이라는 측면이 함께 있었다. 적색 테러의 적어도 3분의 1, 백색 테러의 대부분은 중앙의 지휘를 받았다. 2월 백군 최고 지휘부는 점령지 확보 부서를 두고 전시 사법 지침을 내렸는데, 뒷날 「현장 사살 선언」으로 불린 이 지침은 야전 지휘관에게 사실상 누구든 처형할 권한을 주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만네르헤임은 2월 25일 「합법적 군대에 무장 저항하는」 자와 「군의 허락 없이 무기를 지닌」 자를 현장에서 사살하라고 명령했다. 덜 조직된 적위대 최고 지도부가 적색 테러를 승인한 명령은 발견되지 않았다. 처형의 상당수는 15~20세 대원 10~80명과 권한이 절대적인 성인 지휘관으로 된 기병 「비행 순찰대」가 저질렀다. 적위대는 정치인, 대지주, 기업가, 경찰, 공무원, 교사와 백위대원 같은 영향력 있는 백색 인사를 처형했고, 루터교 목사 10명과 온건 사회주의자 90명도 죽였다. 처형은 적위대가 권력을 다지던 2월에 가장 많았고, 영역을 넓히지 못한 3월에 줄었다가 핀란드를 떠나려던 4월에 다시 늘었다. 적색 테러의 두 중심은 토이알라와 코우볼라로, 2~4월 이곳에서 300~350명이 처형되었다. 비푸리 전투 중에는 술에 취한 적위대 무리가 비푸리 감옥에 들어가 백위대 포로 30명을 죽였다. 1 5 23

백색 테러는 3월 총공세와 함께 본격화해 계속 늘었고 전쟁 막바지에 절정에 이르렀다. 4월 말에서 5월 초 사이에는 하루 200명의 적위대가 총살되었다. 적위대와 당 지도자, 사회주의 국회의원, 지방 적색 행정가, 노동자가 대상이었고, 핀란드 적위대를 도운 러시아 병사들에게 특히 가혹했다. 비푸리 함락 때인 4월 28~29일 백군 바사·카야니 연대는 러시아인으로 여겨진 주민을 아넨크로네 요새와 비푸리성 마당, 거리 곳곳에서 학살했다. 희생자 추정은 50여 명부터 500~600명까지 엇갈리고, 라르스 베스테를룬드는 360~420명으로 본다. 그 가운데 37명은 폴란드인 병사, 우크라이나인, 에스토니아인, 유대인, 타타르인 같은 다른 민족이었다. 대부분은 적위대와 관계가 없었고, 백군을 해방자로 맞은 사람도 많았다. 만네르헤임은 5월 2일 소식을 듣고 조사와 처벌을 지시했고, 이튿날 루돌프 발덴은 무고한 폴란드인·우크라이나인·러시아인에 대한 폭력을 막으라는 전보를 보냈지만, 아무도 기소되지 않았다. 전체 규모는 출처마다 조금씩 다르다. 영어 출처는 적색 테러 희생자를 약 1,500명, 백색 테러 희생자를 약 9,000명으로 보고, 핀란드 전쟁 희생자 데이터베이스를 인용한 다른 영어 출처는 약 1,600명과 8,100명으로 적는다. 백색 희생자는 정확히 기록되었지만 전투 직후 처형된 적위대의 수는 분명하지 않다. 1 23 24

5월 15일 전쟁이 끝났을 때 백군과 독일군이 붙잡은 적위대와 가족은 약 8만 명이었다. 영어 출처에 따라 여성은 4,700~5,000명, 아이는 1,500명이었고, 러시아인도 약 8,000명이었다. 이들은 60여 개 소규모 수용소에서 두 달 사이 13개 주요 수용소로 옮겨졌다. 수오멘린나, 해메엔린나, 라흐티의 헨날라, 리이히매키, 탐미사리, 탐페레, 비푸리가 대표적이었다. 상원은 각자의 역할을 조사할 때까지 포로를 가두어 두기로 했다. 내전으로 농업이 무너진 데다 중앙 보급 체계가 없었고 8월 말까지는 가족의 차입도 금지되었다. 6월 2,900명, 7월 5,000명, 8월 2,200명, 9월 1,000명이 굶주림과 영양실조에 따른 질병, 스페인 독감으로 죽었다. 탐미사리 수용소에서는 여름 동안 하루 평균 30명이 죽어 사망률이 34퍼센트에 이르렀고, 다른 수용소는 5~20퍼센트였다. 수용소 사망자는 약 1만 2,500명(스페인 독감 3,000~4,000명 포함), 처형까지 넣으면 1만 2천~1만 4천 명으로 추산되며, 석방 직후 숨진 600명은 따로 집계된다. 여성 포로에 대한 성폭력은 오랫동안 금기였다. 에스토니아 출신 한스 칼름은 헨날라 수용소에서만 500명 넘게 처형했고, 그 가운데 적어도 200명이 여성이었다. 라흐티 근처에서 붙잡힌 알리 알토넨도 5월 헨날라에서 칼름에게 총살되어 1,000명 넘는 적위대의 공동묘지에 묻혔다. 수용소에 갇힌 아이 1,482명 가운데 104명이 죽었다. 1 17 9

5월 29일 반역 재판소 법이 제정되어 145개 하급 법원과 최고 반역 재판소가 7만 6천 건 남짓을 심리했다. 6만 8천 명이 주로 반역죄로 유죄 판결을 받았고, 3만 9천 명은 가석방되었으며 나머지의 평균 형기는 2~4년이었다. 사형 선고 555건 가운데 113건이 집행되었다. 재판은 승자의 적대적 분위기 속에서 공정성의 기준에 미치지 못했고, 무고한 사람이 갇힌 사례도 드러났다. 그 이전에 이미 5,000명 넘는 항복자가 현지 군사재판의 결정으로 처형되었다. 탐미사리 수용소의 수석 의사 로베르트 티게르스테트는 8월 비밀 보고서에 차르 시대 러시아에서도 볼 수 없던 사망률이라고 썼고, 사회민주당원들이 이를 스웨덴 언론에 흘려 북유럽과 영국으로 퍼졌다. 부호 햘마르 린데르는 수오멘린나를 둘러본 뒤 「적색 광기가 백색 테러로 바뀌었다」고 신문에 썼다가 적색 동조자로 몰려 나라를 떠나야 했다. 9월 수용소 관리가 군에서 정부 기관으로 넘어가며 약 4만 명이 가석방되었고, 10월 1만 명이 더 사면되었다. 영어 출처는 스빈후부드가 그해 가을 적색 포로 3만 6천 명을 사면했다고도 적는다. 1919년 말 4,000명이 남았고, 1920년 1월 3,000명이 사면되면서 옛 적색 4만 명이 시민권을 되찾았다. 마지막 50명은 1927년 배이뇌 탄네르의 사회민주당 정부가 사면했고, 핀란드 정부는 1973년에야 옛 포로 1만 1,600명에게 보상금을 지급했다. 1 17 6

핀란드독일왕국 계획에서 공화국으로

바사 상원은 5월 4일 헬싱키로 돌아왔지만 수도는 독일군의 통제 아래 있었다. 백색 핀란드는 사실상 독일 제국의 보호국이 되었고, 백군 병참감 한네스 이그나티우스는 폰 데어 골츠를 「핀란드의 진짜 섭정」이라 불렀다. 적색과 백색 사이에는 휴전도 강화 협상도 없었고, 내전을 끝내는 공식 강화 조약은 끝내 맺어지지 않았다. 5월 18일 스빈후부드가 국가 수호자, 곧 섭정이 되었고, 27일 그가 상원 의장에서 물러나자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보수·군주파 상원을 꾸려 독일군의 잔류를 요청했다. 만네르헤임은 독일의 핀란드 지배와, 볼셰비키를 몰아내고 러시아령 카렐리야를 차지하려는 자신의 페트로그라드 공격 계획을 두고 상원과 부딪쳐 5월 25일 사령관직을 내놓았다. 독일은 레닌과 맺은 조약 때문에 이 계획에 반대했다. 의회는 사회민주당 의원이 거의 빠진 「잔부 의회」가 되었다. 내전 전 200석 가운데 92석을 가졌던 사회민주당에서 남은 의원은 손에 꼽을 정도였다. 군주파는 이 의회에서 1772년 스웨덴 정부 형태법이 여전히 유효하며 왕위가 비어 있을 뿐이라고 주장했고, 공화파는 그 법이 2월 혁명으로 효력을 잃었고 1917년 11월 15일 의회가 차르의 권한을 넘겨받았으며 12월 6일 공화국이 채택되었다고 맞섰다. 공화파가 새 군주제 헌법의 통과를 막자, 군주파는 1772년 법을 근거로 의회의 헌법 개정 없이 국왕을 뽑기로 했다. 1 25 6 20

10월 9일 의회는 독일의 압력 속에 빌헬름 2세의 처남인 헤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을 핀란드 국왕으로 뽑았다. 스빈후부드는 베를린까지 가서 황제의 아들 오스카르 공을 왕으로 청하기도 했는데, 그에게 군주제는 이념이라기보다 독일의 지원을 얻는 수단이었다. 한 의원은 「핀란드와 카렐리야의 왕」이라는 칭호까지 제안했다. 그러나 11월 9일 독일 황제가 퇴위하고 11일 정전협정이 맺어지자 사정이 뒤집혔다. 연합국은 독일과의 동맹을 버려야 핀란드 독립을 승인하겠다고 알렸다. 스스로 군주파였던 라우리 잉만 총리의 정부는 서방의 경고를 받고 프리드리히 카를에게 왕관을 포기해 달라고 청했고, 한 번도 핀란드에 오지 않은 그는 12월 14일 왕위를 포기했다. 폰 데어 골츠와 사단은 12월 16일 헬싱키를 떠났다. 스빈후부드가 물러나고 만네르헤임이 섭정이 되었다. 만네르헤임은 6월 스웨덴으로 가서 연합국 외교관들을 만나며 정부의 친독 정책에 반대해 왔고, 10월에는 정부의 부탁으로 영국과 프랑스를 찾아 승인을 얻으려 했다. 섭정이 된 그는 영국과 미국의 승인을 받아냈고, 두 나라는 1919년 5월 6~7일 핀란드의 주권을 인정했다. 서방 강국들은 혁명 운동에서 대중을 떼어 내기 위해 전후 유럽에 민주공화국이 서기를 요구하고 있었다. 핀란드는 독일 제국의 군주제 보호국에서 독립 공화국으로 방향을 틀었다. 25 1 6 7

1918년 12월 17~28일 처음으로 보통선거에 따른 지방선거가 치러졌고, 1919년 3월 3일 내전 뒤 첫 자유 총선이 열렸다. 좌파와 사회주의자도 투표할 수 있었던 이 선거에서 공화파 정당들이 의석의 4분의 3을 얻었다. 사회민주당은 1918년 12월 25일 내전 뒤 첫 공식 당대회에서 의회주의를 다짐하고 볼셰비즘과 공산주의를 거부했다. 새 헌법의 설계자는 카를로 유호 스톨베리였다. 1917년 헌법위원회 의장을 맡은 그는 1918년 내내 군주파의 입헌군주제 대신 공화정을 지지하며 초안을 고쳐 썼고, 그의 안은 1919년 7월 17일 정부 형태법으로 공포되었다. 군주파였던 섭정 만네르헤임도 이 공화국 헌법을 재가했다. 7월 25일 의회에서 치러진 첫 대통령 선거에서 사회민주당, 농민동맹, 국민진보당의 지지를 받은 스톨베리가 143표 대 50표로 만네르헤임을 눌렀다. 만네르헤임은 국민연합당과 스웨덴인민당의 표만 얻었다. 스톨베리는 노동자와 가난한 핀란드인의 물질적 처지를 개선하자는 온건 자유주의 개혁가였다. 대통령으로서 그는 우파와 백군 퇴역 군인, 고위 장교들의 거센 비판을 무릅쓰고 적색 포로 대부분을 사면했고, 단체협약에서 노조에 사용자단체와 대등한 권한을 주는 법과 옛 소작농과 땅 없는 농민에게 대지주의 땅을 나누는 칼리오 법에 서명했다. 옛 적색도 민주공화국을 받아들이게 하려는 개혁이었다. 1 25 26 27 7

핀란드러시아에스토니아동쪽의 원정: 헤이모소다트와 페트로그라드 문제

바사 상원의 대외 목표는 적위대를 꺾고 볼셰비키의 영향력을 없애는 데 그치지 않았다. 핀란드어계 사람들이 사는 동카렐리야로 영토를 넓히는 것도 목표였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만네르헤임은 2월 23일 안트레아역에서 레닌의 마지막 병사가 핀란드와 백해 카렐리야에서 쫓겨나기 전에는 칼을 칼집에 넣지 않겠다고 맹세했다. 동카렐리야는 스웨덴 제국에도 핀란드 대공국에도 속한 적이 없었다. 핀란드에서 「헤이모소다트(동족 전쟁)」라 부르는 1918~1922년의 원정과 봉기에는 역사가 아포 로셀리우스에 따르면 약 1만 명의 핀란드 의용병이 참여했다. 첫 시도는 1918년 3월의 비에나 원정이었다. 쿠르트 마르티 발레니우스의 예거 부대는 쿠사모에서 국경을 넘었으나 핀란드 적위대와의 싸움에 묶였고, 징집병들이 국경 밖 작전에 반발해 물러났다. 카를 빌헬름 말름의 의용병 약 350명은 4월 백해 연안의 켐까지 갔다가 우흐투아로 물러나 마을마다 주민을 설득했다. 주민은 분리 독립파와 자치파, 소수의 핀란드 합병파로 갈렸고, 대다수에게는 식량 같은 당장의 문제가 더 중요했다. 영국은 독일과 그 동맹 핀란드가 백해와 무르만스크 철도에 닿는 것을 막으려고 무르만스크에 상륙했고, 적색 핀란드인 1,400명 대대와 「카렐리야 연대」를 철도 방어에 썼다. 오스카리 토코이는 영국이 조직한 이 「무르만스크 군단」의 정치 고문이 되었다. 비에나의 핀란드 부대는 8~9월 패배 끝에 10월 2일 철수했다. 5월에는 의용병 약 200명의 페차모 원정도 영국 순양함 코크런호의 부대에 막혀 실패했다. 28 29 30 19 3

1918년 여름 동카렐리야 곳곳에서 핀란드 편입 청원이 들어왔고, 특히 투표로 편입을 결의한 레폴라가 적극적이었다. 핀란드군은 가을 레폴라를 점령했고, 러시아어 출처는 그 날짜를 10월 15일로 적는다. 1919년 1월에는 작은 의용대가 포라얘르비를 점령했다가 볼셰비키군에 곧 밀려났다. 2월 만네르헤임은 서방 열강과 러시아 백군에게 물질적·정신적 지원이 있으면 핀란드가 페트로그라드의 볼셰비키를 공격하겠다고 밝혔고, 같은 무렵 아우누스(올로네츠 카렐리야) 원정이 준비되었다. 지휘관 군나르 폰 헤르첸은 카렐리야 주민이 함께 싸운다면 의용병 1,000명으로 충분하다고 보았다. 원정대 1,000명은 4월 21일 밤 국경을 넘어 로데이노예폴레, 페트로자보츠크, 무르만스크 철도를 노렸고, 23일 올로네츠를 차지해 한때 페트로자보츠크를 위협했다. 그러나 병력은 모자랐고 카렐리야인 자원자는 적었다. 의용병 2,000명을 새로 모집하고 지휘관도 아르네 시흐보로 바꾸었지만, 6월 20일 파보 탈벨라의 연대가 페트로자보츠크를 공격했다가 붉은 군대와 핀란드 적위대에 패했다. 6월 26일 페트로그라드 적색 장교학교의 핀란드인 600여 명이 라도가 호수를 건너 비텔레에 상륙해 핀란드군의 배후를 치자 원정대는 큰 손실을 입고 물러났다. 남은 성과는 6월 포라얘르비가 핀란드 편입을 선언하고 정규군이 이를 점령한 것뿐이었다. 같은 7월 카렐리야 지협 남쪽에서는 잉그리아 핀란드인 피란민이 북잉그리아(키르야살로) 공화국을 선포했지만, 30제곱킬로미터 남짓한 땅에 머물렀다. 31 29 19 32

핀란드 의용병은 바다 건너 에스토니아로도 갔다. 마르틴 에크스트룀이 이끈 제1핀란드 의용군단에 이어, 한스 칼름이 모집한 「북방의 아들들(포흐얀 포야트)」 2,213명과 관리 400명이 1919년 1월 12일 핀란드만을 건넜다. 위원회가 정한 상한은 1,000명이었지만 칼름은 이를 무시했다. 이들은 1월 31일 파주 전투에 투입되었고, 2월에는 국경을 넘어 라트비아의 마리엔부르크까지 진격했다. 에스토니아 쪽의 전쟁은 발트 독립전쟁 사건에서 다룬다. 정작 페트로그라드로는 끝내 가지 않았다. 만네르헤임은 핀란드 백군의 승리를 러시아 전체의 반볼셰비키 투쟁의 일부로 보았지만, 진격의 조건으로 권위 있는 러시아 정부가 핀란드 독립을 승인해야 한다고 했다. 알렉산드르 콜차크는 6월 4일 연합국에 보낸 전보에서 핀란드 독립을 사실상으로만 인정하고 법적 승인은 장래의 제헌의회에 맡기겠다고 답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만네르헤임은 6월 18일 핀란드에 와 있던 니콜라이 유데니치와 비밀 협정을 맺었지만 실제 결과로 이어지지 않았다. 대통령 선거를 앞두고 사회민주당 언론은 콜차크 정부의 모호한 태도를 들어 만네르헤임과 「백색 러시아」의 친분이 독립을 위협한다고 공격했다. 스톨베리는 소비에트 러시아와의 강화를 지지했고, 7월 선거에서 이겼다. 10월 유데니치의 북서군이 페트로그라드 앞까지 갔을 때 만네르헤임은 백군이 지면 그 책임이 핀란드에 있을 것이라고 썼지만, 그는 이미 공직에서 물러나 있었다. 33 28 34 35 27

핀란드소련1920년 타르투 조약과 그 뒤

1920년 동쪽의 사정은 크게 바뀌었다. 연합군이 1919년 가을 북러시아에서 철수하고 백군이 무너지자, 우흐투아에서 백해 카렐리야의 독립을 결의한 카렐리야 임시정부는 5월 붉은 군대에 쫓겨 핀란드로 달아났다. 6월 8일 페트로자보츠크에서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주인 카렐리야 노동 코뮌이 세워졌다. 그 구상에는 에드바르드 귈링이 있었다. 스톡홀름에서 핀란드 공산당 사무국을 이끌던 그는 5월 레닌의 초청으로 모스크바에 가서 카렐리야 자치 공화국의 가능성을 보고했다. 북쪽에서는 1월 예브게니 밀레르가 끊긴 전신선을 다시 이어 달라고 요청한 것을 명분으로 발레니우스의 원정대가 다시 페차모로 들어갔으나, 3월 22일 소비에트군의 상륙 공세에 밀려 노르웨이 쪽으로 물러났다. 7월 붉은 군대는 동카렐리야 대부분에서 핀란드군을 밀어냈고, 핀란드군은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만 남았다. 6월 타르투에서 시작된 협상에서 핀란드 대표단은 유호 쿠스티 파시키비가 이끌었고 배이뇌 탄네르, 배이뇌 보이온마, 루돌프 발덴 등이 참여했다. 소비에트 대표단에는 플라톤 케르젠체프 등이 있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외무장관 루돌프 홀스티는 라도가 호수에서 오네가 호수를 거쳐 백해에 이르는 선을 원했지만, 파시키비는 주민 스스로 원하는 땅만 합쳐야 한다고 보았다. 핀란드는 동카렐리야 주민투표를 제안했으나 소비에트의 반대로 거두어들였다. 36 12 30 37 38

거의 다섯 달의 협상 끝에 10월 14일 타르투의 에스토니아 학생회 건물에서 조약이 서명되었다. 국경은 옛 핀란드 대공국과 러시아 제국의 경계를 따랐다. 핀란드는 북극해의 얼지 않는 항구가 있는 페차모를 얻었다. 1864년 알렉산드르 2세가 카렐리야 지협의 땅과 맞바꾸어 핀란드에 주기로 약속했던 곳이다. 그 대신 핀란드는 비에나 원정과 아우누스 원정 뒤 합병해 점령했던 레폴라와 포라얘르비를 돌려주고 1921년 2월 14일까지 군대를 빼기로 했으며, 북잉그리아도 러시아에 넘겼다. 이 대가로 소비에트 측은 동카렐리야의 문화적 자치를 약속했다. 소비에트는 라도가 호수의 핀란드 항구에서 네바강을 거쳐 핀란드만으로 가는 핀란드 상선의 자유 항행을 보장했고, 핀란드는 페차모를 거쳐 노르웨이로 가는 육상 통과를 보장했다. 핀란드는 크론시타트 맞은편 이노 요새의 무장을 풀고 핀란드만의 바깥 섬들을 비무장화하기로 했다. 러시아어 출처에 따르면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 중앙집행위원회가 10월 23일, 핀란드 의회가 12월 1일 조약을 승인했고, 스톨베리 대통령이 12월 11일 비준했다. 비준서는 12월 31일 모스크바에서 교환되었다. 이 조약은 같은 해 2월 에스토니아가 같은 도시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와 맺은 타르투 조약과는 별개다. 핀란드 의회의 민족주의 우파는 대핀란드의 꿈을 버린 조약을 수치스럽다고 했지만, 파시키비는 뒷날 이 국경이 영구히 유지되기에는 핀란드에 지나치게 좋았다고 인정했다. 38 30 31 36 37

조약 뒤에도 동쪽 국경은 조용하지 않았다. 핀란드 외무부가 레폴라와 포라얘르비 주민의 무장을 막으라고 지시하자, 레폴라의 젊은 경찰서장 보비 시벤은 1921년 1월 12일 핀란드가 동카렐리야인을 「배신」했다는 유서를 남기고 자살했다. 약속된 자치가 제대로 이행되지 않고 식량난이 겹치자 1921년 가을 동카렐리야 분리주의자들이 봉기했고, 약 550명의 핀란드 의용병이 주로 장교와 분대장으로 가담했다. 핀란드 정부는 공식 개입은 거부했지만 의용병의 월경을 막지 않았고, 소비에트 측은 이를 정부의 군사 개입으로 보았다. 붉은 군대 약 2만 명이 반격해 1922년 2월까지 봉기를 진압했고, 동카렐리야 피란민 약 3만 명이 핀란드로 건너왔다. 러시아에서는 1918~1920년의 원정과 1921~1922년의 충돌을 소련-핀란드 전쟁의 하나로 보지만, 핀란드 역사학은 이 원정들을 러시아와의 전쟁으로 치지 않는다. 카렐리야 노동 코뮌은 1923년 카렐리야 자치 소비에트 사회주의 공화국이 되었고, 귈링은 1935년까지 그 인민위원회의 의장으로 핀란드어 중심의 정책을 폈다. 핀란드인이 소수인 지역에서 북미와 핀란드의 이주자를 불러들인 이 정책은 1930년대 「민족주의적 쇼비니즘」으로 비난받았고, 귈링은 1935년 물러나 1938년 처형되었다. 에로 하팔라이넨도 1937년 페트로자보츠크에서 총살되었다. 타르투가 그은 국경은 1939년 소련이 겨울전쟁을 일으켜 조약을 깨뜨릴 때까지 유지되었다. 36 12 11 38

이 전쟁은 이름부터가 해석이다. 전쟁 중에는 양쪽 모두 「독립전쟁(바파우소타)」이라는 말을 썼다. 적색에게는 자본주의로부터의 해방, 백색에게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영향으로부터의 자유라는 뜻이었다. 적색과 그 지지자들은 「계급전쟁」과 「혁명」을, 백색은 「적색 반란」을 썼으며, 패전 뒤 재건된 사회민주당은 점점 「내전」이라는 말을 썼다. 2008년 일간지 아물레흐티의 조사에서 응답자 1,005명은 「내전」 29퍼센트, 「시민전쟁」 25퍼센트, 「계급전쟁」 13퍼센트, 「독립전쟁」 11퍼센트, 「적색 반란」 5퍼센트를 골랐다. 영어 출처는 인구 약 300만 가운데 3만 5천~3만 8천 명이 죽고 고아 약 1만 5천 명이 생겼다고 보며, 죽음의 대부분은 전장이 아니라 수용소와 테러에서 나왔다. 사회는 「두 나라의 시민」으로 갈렸고, 백군은 「도살자(라흐타리)」로, 적색은 「적색 러시아인(푸니키)」으로 불렸다. 1950년대까지 주류 문학은 승자의 관점을 따랐고, 적색의 이야기는 1959~1962년 배이뇌 린나의 3부작 『북극성 아래에서』 이후에야 널리 쓰였다. 화해는 느리게 왔다. 퀴외스티 칼리오는 1918년 5월 5일 니발라 연설에서 적색과 백색으로 나뉘지 않은 민족을 다시 세우자고 호소했고, 배이뇌 보이온마는 1919년 이 나라가 전쟁으로 거의 모든 것을 잃었다고 탄식했다. 영어 출처는 적색의 패배와 백색 목표 대부분의 좌절, 독일과 러시아의 동시 약화가 핀란드식 타협의 바탕이 되었다고 본다. 반면 망명 지도자들은 1918년 8월 29일 모스크바에서 핀란드 공산당을 세웠고, 수용소의 고통은 핀란드 안의 공산주의 지지를 키웠다. 1 17

결과

백군이 1918년 5월 승리하고 적위대 지도부는 소비에트 러시아로 망명해 핀란드 공산당을 세웠다. 1919년 공화국 헌법이 채택되었고, 1920년 10월 14일 타르투 조약으로 핀란드는 페차모를 얻고 동카렐리야의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서 물러났다.

연표와 지도

헬싱키 바사 탐페레 라흐티 비푸리 한코 타르투 5 우흐투아 13 레폴라 4 바사 16 페트로자보츠크 6 탐페레 9 라흐티 14 올로네츠 10 비푸리 1 헬싱키 2 헬싱키 3 헬싱키 8 헬싱키 11 헬싱키 15 헬싱키 12 탐미사리 7 한코
  1. 1917.03.15핀란드러시아
    러시아 임시정부의 자치 회복 선언

    2월 혁명 뒤 러시아 임시정부가 1809~1899년의 핀란드 자치를 되돌려 주었다. 이달 오스카리 토코이의 상원이 꾸려졌다.

  2. 1917.10.01–10.02핀란드
    핀란드 의회 선거

    7월 의회 해산 뒤 치러진 선거에서 사회민주당이 절대다수를 잃었다.

  3. 11917.11.14–11.19핀란드
    총파업

    사회민주당이 「우리는 요구한다」 강령을 내걸고 총파업을 벌였다. 15일 의회는 최고권력을 넘겨받았고, 파업 중 충돌로 34명이 죽었다.

  4. 21917.12.06핀란드
    독립선언

    의회가 스빈후부드 상원이 낸 독립선언을 채택했다.

  5. 1917.12.31핀란드소련
    소브나르콤의 독립 승인

    레닌이 스몰니에서 스빈후부드 대표단에게 독립 승인 결정을 건넸다. 소비에트 러시아는 핀란드 밖에서 처음으로 독립을 승인한 정부였다.

  6. 31918.01.27–01.28핀란드
    내전 시작과 인민대표위원회

    헬싱키 노동자회관에 붉은 등이 켜지고 적위대가 수도를 장악했다. 28일 쿨레르보 만네르를 의장으로 인민대표위원회가 세워졌다.

  7. 41918.01.29핀란드
    바사 상원

    스빈후부드의 상원이 바사를 수도로 삼았다. 만네르헤임의 백군은 남포흐얀마의 러시아 수비대를 무장해제해 무기를 얻었다.

  8. 1918.03.01핀란드소련
    적색 핀란드-소비에트 러시아 조약

    인민대표위원회와 소브나르콤이 페트로그라드에서 조약을 맺었다. 「핀란드 사회주의 노동자 공화국」이라는 이름은 이 조약에만 나온다.

  9. 1918.03.03러시아독일핀란드
    브레스트-리토프스크 조약

    러시아는 핀란드에서 군대를 빼야 했고, 볼셰비키의 지원은 무기와 보급으로 줄었다.

  10. 51918.03.15핀란드러시아
    비에나 원정

    만네르헤임이 동카렐리야로 향하는 원정을 승인했다. 의용대는 백해 연안의 켐까지 갔지만 10월 철수했다.

  11. 61918.03.28–04.06핀란드
    탐페레 전투

    내전 최대의 시가전에서 백군이 탐페레를 함락했다. 적위대 1만 1천~1만 2천 명이 포로가 되었다.

  12. 71918.04.03독일핀란드
    발트해 사단의 한코 상륙

    뤼디거 폰 데어 골츠가 지휘하는 독일군 약 1만 명이 저항 없이 상륙했다.

  13. 81918.04.12–04.13독일핀란드
    헬싱키 전투

    독일군이 헬싱키를 점령했다. 칼리오 지구의 교회 탑에 백기가 올랐고 적위대 약 7,000명이 포로가 되었다.

  14. 91918.04.19–05.01독일핀란드
    라흐티 전투

    브란덴슈타인 부대가 라흐티를 점령해 적위대를 동서로 갈랐다. 동쪽으로 피하던 적색 3만 명이 포로가 되었다.

  15. 101918.04.29핀란드
    비푸리 함락과 학살

    백군이 적위대의 마지막 큰 거점을 함락했다. 함락 중과 직후 러시아인으로 여겨진 주민 약 360~420명이 학살되었다.

  16. 111918.05.16핀란드
    헬싱키 승전 행진

    전날 이노 요새를 넘겨받아 전쟁을 끝낸 백군이 만네르헤임을 앞세워 행진했다.

  17. 121918.06–09핀란드
    수용소의 대량 사망

    굶주림과 질병, 스페인 독감으로 넉 달 동안 1만 명 넘는 포로가 죽었다. 탐미사리 수용소의 사망률은 34퍼센트였다.

  18. 1918.10.09핀란드독일
    독일 왕자의 국왕 선출

    잔부 의회가 헤센의 프리드리히 카를 공을 핀란드 국왕으로 뽑았다. 그는 12월 14일 왕위를 포기했다.

  19. 131918.10.15핀란드러시아
    레폴라 점령

    핀란드 편입을 결의한 동카렐리야의 레폴라를 핀란드군이 점령했다(러시아어 출처의 날짜).

  20. 1918.12.12–12.16핀란드독일
    만네르헤임 섭정과 독일군 철수

    스빈후부드가 물러나고 만네르헤임이 섭정이 되었다. 폰 데어 골츠의 사단은 16일 헬싱키를 떠났다.

  21. 1919.01.12핀란드에스토니아
    핀란드 의용병의 에스토니아 상륙

    한스 칼름의 「북방의 아들들」 2,213명이 핀란드만을 건너 에스토니아 독립전쟁에 뛰어들었다.

  22. 141919.04.21핀란드러시아
    아우누스 원정

    의용병 1,000명이 동카렐리야로 들어가 23일 올로네츠를 차지했지만 6월 말 물러났다.

  23. 151919.07.17–07.25핀란드
    공화국 헌법과 스톨베리 대통령

    17일 정부 형태법이 공포되었고, 25일 의회는 스톨베리를 143표 대 50표로 초대 대통령에 뽑았다.

  24. 161920.06.08소련핀란드
    카렐리야 노동 코뮌 수립

    페트로자보츠크에 러시아 소비에트 연방 사회주의 공화국의 자치주가 세워졌다. 에드바르드 귈링이 그 구상을 제안했다.

  25. 1920.10.14핀란드소련
    핀란드-소비에트 러시아 타르투 조약

    핀란드는 페차모를 얻고 레폴라와 포라얘르비에서 철수하기로 했으며, 소비에트 측은 동카렐리야의 문화적 자치를 약속했다.

관련 인물 25명

적색 핀란드·적위대7명

관련 용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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