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921–1924

몽골 혁명과 인민공화국 수립

독립 회복 운동은 어떻게 군주제를 거쳐 인민공화국으로 전환됐는가?

1921년 혁명 이후 몽골은 제한된 군주제에서 인민공화국으로 이동했다. 소련과의 관계 강화는 독립국가의 제도 형성과 국내 권력투쟁에 함께 작용했다.

1911년 이후의 자치와 외부 세력

청 왕조가 붕괴하던 1911년 외몽골은 독립을 선언하고 보그드 칸을 군주로 추대했다. 그러나 국제적으로 승인된 지위와 실제 자치는 일치하지 않았다. 1915년 캬흐타 협정은 중국의 종주권 아래 자치를 규정했고, 러시아 혁명 이후 힘의 공백 속에서 중국군이 1919년 자치를 철회했다. 몽골 혁명의 출발점에는 사회개혁뿐 아니라 외부 군대의 지배를 벗어나려는 국가적 요구가 있었다. 근거 1

1921년의 군사·정치적 전환

1921년 초 운게른슈테른베르크의 백군은 중국군을 수도에서 몰아내고 보그드 칸을 복위시켰지만 폭력적 군정을 펼쳤다. 몽골 혁명가들은 조직을 결집하고 소비에트 러시아의 지원을 요청했다. 수흐바타르가 이끄는 병력과 적군의 연합 작전은 그해 여름 수도를 장악했고, 7월 인민정부가 수립됐다. 소련의 지원은 외부 세력을 물리치는 수단인 동시에 새 정부의 대외 의존을 형성하는 조건이었다. 근거 1

1921년 정부는 곧바로 군주제를 폐지하지 않았다. 보그드 칸을 제한된 권한의 군주로 남기고 보도 등이 정부를 운영하는 타협이 이루어졌다. 이는 불교와 군주제의 권위가 큰 사회에서 혁명세력이 새로운 통치기반을 넓혀야 했기 때문이다. 국가의 독립, 종교적 정통성, 사회혁명의 속도는 처음부터 같은 방향으로 정리된 문제가 아니었다. 근거 1 · 근거 2

지도부의 갈등과 공화국 헌법

대소 관계와 군주제의 권한을 둘러싼 갈등 속에서 보도는 1922년 반혁명 혐의로 처형됐고, 1924년에는 당 지도자 단잔도 숙청됐다. 혁명 내부의 이견이 형사 처벌로 처리되면서 정치적 선택의 폭은 좁아졌다. 수흐바타르는 1923년 사망했으므로, 이후 수십 년을 지배한 초이발산의 권력이나 1930년대 숙청을 모두 그가 주도한 것으로 볼 수 없다. 근거 2

보그드 칸이 1924년 사망한 뒤 군주제를 유지할 기반은 약해졌다. 같은 해 11월 26일 제1차 대후랄이 헌법을 채택하고 몽골 인민공화국을 선포했다. 수도는 울란바토르로 개칭됐다. 헌법과 의회는 국가 운영의 새 틀을 제공했지만 실제 정치에서는 당과 대소 관계가 큰 비중을 차지했다. 일부 오래된 영문 개설서의 11월 25일 표기 대신, 몽골 의회가 확인하는 11월 26일을 기준으로 삼는다. 근거 3 · 근거 2

목축사회에서 국가경제를 만들다

당시 몽골은 공장 노동자가 다수를 이루는 산업사회가 아니라 목축과 사원·귀족의 경제적 권위가 중요한 사회였다. 초기 정부는 세금과 행정을 정비하고 협동조합·무역기구·은행을 통해 경제적 권한을 확보하려 했다. 1924년 설립된 몽골·소련 합작은행과 이후 화폐개혁은 국가가 거래와 재정을 조직하는 기반이 됐다. 소련과의 무역은 외국 상인에 대한 의존을 바꾸었지만 새로운 의존관계도 만들었다. 근거 4

건국과 이후 급진화의 구분

1920년대 중반에는 사적 가축 소유와 사원의 영향력이 여전히 컸다. 1928년 이후 급속한 재산 몰수와 목축 집단화가 추진되면서 가축 손실·식량난·반란이 발생했고, 1932년에는 정책 후퇴가 이루어졌다. 이는 공화국 선포만으로 사회주의 경제가 완성된 것이 아님을 보여준다. 독립의 제도화라는 성과, 외부 의존, 강압적 개혁의 비용을 서로 다른 차원에서 살펴야 이 시기의 역사적 의미가 드러난다. 근거 4 · 근거 5

왕좌가 빈 뒤, 환생을 찾지 않기로 하다

보그드 칸은 1924년 5월 20일, 부인 돈도그둘람이 죽은 지 1년 만에 54세로 숨졌다. 1911년 스스로 칸에 오른 그를 1921년 혁명정부는 살려 두었지만, 그 살려 둠은 이미 왕을 무해한 상징으로 눌러 놓은 것이었다. 실권은 1922년 보도를 처형한 당과 인민정부 쪽에 있었고, 칸의 이름은 정부 문서의 국가원수 자리를 채우는 데 그쳤다. 그렇기에 그의 죽음은 제도상의 비극이 아니라 빈 자리였다. 문제는 그 자리가 단순한 왕좌가 아니라, 제브춘담바 후툭투 곧 몽골 불교의 최고 활불(活佛)의 환생 자리였다는 점이다. 티베트에서 태어나 달라이 라마와 판첸 라마 다음가는 위계를 지닌 제8대 환생자로서, 보그드 칸은 칸이기 이전에 그 자체로 교회의 정점이었다. 전통대로라면 그의 사망은 곧 제9대 환생자를 찾는 절차를 열었어야 했다. 인민정부는 그 절차를 열지 않았다. 열지 않았을 뿐 아니라 방해했다. 당과 정부는 새로운 환생은 없을 것이라고 선언했고, 뒤이어 같은 해에 이미 환생설이 몽골 안에 떠돌았다는 기록이 있다. 정부가 이 문을 닫은 것은 왕 한 사람을 없애는 것보다 훨씬 무거운 결정이었다. 그것은 왕조의 단절이 아니라, 그 왕조를 지탱해 온 종교적 정당성 자체를 더 이상 묻지 않기로 한 선택이었다. 8월의 제3차 당 대회는 이 방향을 제도로 굳혔다. 대회에서 재무 관료 출신의 당 창립 멤버 솔린 단잔이 ‘부르주아 경향’이라는 죄목으로 처형되었고, 소련과의 긴밀한 우호, ‘압박계급 요소’의 속청, 레닌주의적 ‘비자본주의 발전의 길’이 강령으로 채택됐다. 단잔의 처형은 왕의 죽음과 한 조를 이뤘다. 군주제가 사람이 죽어 끝났다면, 그 군주제를 제한군주제로 타협시켰던 당내의 온건·민족주의 흐름은 단잔의 처형으로 함께 정리된 것이다. 그해 11월 8일부터 26일까지 열린 대후랄은 첫 헌법을 채택하고 국호를 몽골 인민공화국으로, 수도를 울란바토르 곧 ‘붉은 영웅’으로 고쳤다. 새 헌법은 왕의 인장(印章)을 정부가 접수한다고 명시했는데, 이는 왕이 남긴 유일한 실물 권력의 증표가 이제 교회가 아니라 국가의 손에 들어갔음을 말해 준다. 환생 금지는 이때 바로 법률로 못 박힌 것은 아니었다. 1926년 제3차 대후랄이 환생 탐색을 불허하는 특별 결의를 채택했고, 최종 금지는 1928년 제7차 당 대회와 제5차 대후랄에 이르러서야 확정되었다. 그러나 방향은 왕이 숨진 그해에 이미 정해져 있었다. 국교의 정점을 채울 새 활불을 찾지 않기로 한 결정과, 빈 왕좌를 헌법이라는 종이로 대체하기로 한 결정은 같은 움직임의 두 면이었다.

돗자리 하나로 짠 국가 기구, 그리고 ‘자본주의를 건너뛰는’ 헌법

1924년 11월 26일 대후랄이 채택한 첫 헌법의 본문은, 불과 몇 달 전에 벌어진 당내 결판의 문면이었다. 그해 8월 4일부터 31일까지 열린 제3차 당 대회는 몽골이 ‘자본주의 발전 단계를 건너뛰어’ 공산주의로 나아간다는 노선을 채택했다. 이 ‘비자본주의 발전’은 단잔이 반대했던 바로 그 문제였다. 그는 마르크스주의를 문자 그대로 읽어 사회가 단계를 거쳐야 한다고 주장했고, 그래서 린치노와 담바도르지에게 ‘자본주의 대표자’로 몰려 8월 말 처형됐다. 그렇게 대회가 끝나자 남은 과제는 이 결정을 조문으로 옮기는 일이었다. 10월 24일 총리 체렌도르지를 위원장으로 하는 헌법기초위원회가 꾸려졌고, 초안 작성에서 핵심 역할은 부랴트 출신 혁명가 린치노가 맡았다. 그는 몽골어와 러시아어를 모두 구사하며 그간 당 문서 대부분을 번역하고 직접 집필해 온 인물이었다.

헌법이 설계한 국가 기구는 소비에트 체제를 유목사회의 자리에 맞춰 옮긴 것이었다. 최고 권력 기관은 일 년에 한 번 소집되는 대후랄(대인민회의)이었고, 그 소집 사이의 권력은 대후랄이 선출하는 30인 규모의 소후랄(소인민회의)이 가졌다. 소후랄 안에는 5인으로 된 상임기관(간부회)이 있었고, 그 의장이 사실상의 국가원수였다. 집행은 각료회의가 맡았고, 지방에는 군·읍 단위 후랄(회의)을 두었다. 같은 문서는 신권군주제를 폐기하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으며, 봉건 귀족의 토지 보유를 국유화하여 귀족 지배의 법적 근거를 없앴다. 수도 흐레는 같은 날 ‘붉은 영웅’이라는 뜻의 울란바토르로 개칭됐다. 사흘 뒤인 11월 29일 소후랄 첫 회기가 열려 정부를 구성했다.

헌법이 쓴 권력은 겉으로는 여러 겹의 회의 체계였지만, 실질은 당이었다. 선거는 간접적이었고, 30인 소후랄 의원 가운데 각료 12인을 포함한 대부분이 몽골인민혁명당 소속이었다. 헌법 조문이 정한 ‘인민의 권력’과, 문서 초안을 조정하고 대회에서 반대자를 처형까지 몰아간 소련·코민테른의 손길은 종이 위에서는 서로 다른 층이었다. 그 차이는 헌법 채택 직후부터 몽골 정치의 구조가 되었다.

러시아몽골이웃의 작은 공화국: 우랑하이에서 탄누투바로

몽골 북서쪽 사얀산맥과 탄누올라산맥 사이의 투바(우랑하이)도 1911년 청이 무너진 뒤 같은 길을 걸었다. 독립을 선포한 이 지역은 중국의 재통합 시도에 맞서 러시아의 보호를 구했고, 1914년 4월 17일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 우랑하이 지방이 되었다. 러시아 내전은 이 땅을 여러 번 주인이 바뀌게 했다. 1918년 3월 소비에트가 지방을 장악했으나 7월 표트르 볼로고츠키의 시베리아 임시정부에 밀려났고, 그해 가을 중국군이, 이어 마그사르자브가 이끈 몽골군이 남부와 서부를 차지했다. 1919년 봄 반러시아 소요가 시베리아 정부를 몰아낸 뒤 여름에는 표트르 셰틴킨과 알렉산드르 크랍첸코의 파르티잔이 들어왔지만, 9월 콜차크군을 쫓아 대부분 떠났다. 1919년 중반부터 1921년 초까지 중국과 몽골이 이 지역을 점령했다. 볼셰비키는 1920년 12월 수도 헴벨디르를, 1921년 3월까지 투바 전역을 장악했고, 1921년 몽골 혁명이 시작되자 몽골군도 물러났다.

1921년 8월 13~16일 수그바지에서 모든 코주운의 대표 약 300명(그 가운데 200명 넘게가 목민)이 모인 전투바 제헌 후랄이 열렸고, 소비에트 러시아 대표단도 참석했다. 8월 14일 탄누투바 인민공화국이 선포되어 새로 만든 투바 인민혁명당이 집권했고, 후랄 의장 부얀바드르기가 첫 국가 수반이 되었다. 22개 조의 첫 헌법은 신앙의 자유를 보장하면서도 국제 문제에서는 「소비에트 러시아의 보호 아래」 행동한다고 적었다. 1923년 1월 소비에트-투바 국경이 정해지고 붉은 군대가 철수했으며, 1924년 9월 두 번째 대후랄은 비자본주의적 발전의 길과 투바 인민혁명당의 일당 지배를 헌법에 담았다. 투바를 국가로 승인한 나라는 소련(1924)과 몽골(1926)뿐이었고, 1926년 수도는 크질(「붉은」)로 이름을 바꾸었다. 몽골과 함께 「자본주의를 건너뛰는」 위성국의 길을 걸은 투바는 1929년 소련이 뒷받침한 정변과 숙청을 거쳐, 1944년 10월 러시아 사회주의 연방 소비에트 공화국에 편입되었다.

누가 혁명을 시작했는가, 그리고 무엇이 남았는가

1924년 헌법으로 몽골은 골격을 갖춘 별도 국가가 되었고, 그 사실 자체는 뒤집히지 않았다. 하지만 이 기간이 정말로 끝낸 것은 국가의 형식이지, 국가의 위치가 아니었다. 국제적으로 몽골은 여전히 중국의 일부로 간주되었고, 독립에 대한 국제적 승인은 1945년 국민투표가 지나서야 얻어졌다. 국내에서도 비자본주의 발전노선이 무엇을 뜻하는지는 제도보다 빨리 앞서 나갔다. 목축사회에서 국가경제를 어떻게 만들지, 라마교 사원과 귀족의 질서를 무엇으로 대체할지, 그리고 소련과의 관계에서 몽골이 스스로 결정할 수 있는 폭이 얼마인지, 이 세 가지는 건국 당시에 답이 나지 않았고 이후 수십 년의 분쟁거리로 남았다.

가장 오래 논쟁된 문제는 혁명의 출발 자체다. 후지코 이소노가 1976년 정리한 대로, 그때까지 대다수 역사가는 1921년 혁명을 소비에트 러시아가 일으켜 수동적인 몽골인에게 강요한 것으로 보았다. 이 판단은 연구가 러시아와 중국 측 자료에 거의 전적으로 의존했기 때문이었다. 이소노는 울란바토르에서 출판된 몽골어 자료들, 특히 초이발산 등이 쓴 삼인사(三人史)와 470명이 넘는 빨치산의 구술 기록을 들어, 혁명이 순전히 몽골의 내부 사정에서 비롯되었다고 반박했다. 동시에 그는 몽골인이 소련의 지원 없이는 결코 성공할 수 없었음을 인정한다. 타협의 여지 없는 두 판단 사이에서 오늘날 러시아 사학계는, 예컨대 에두아르드 바투나예프의 2021년 정리처럼, 내부의 독립 운동과 코민테른의 동방 진출, 소련의 국경 안보라는 세 요인이 겹친 다요인적 현상으로 절충하고 있다.

몽골 자신의 서사도 다시 쓰이는 중이다. 소련기 역사학은 수흐바타르를 ‘몽골의 레닌’으로 신격화하며 1921년을 정통성의 원점으로 삼았지만, 1990년 이후 몽골에서는 그 ‘인민혁명’이라는 공식 서사를 재검토하는 작업이 이어졌다. 이 절의 마지막 문장은 그래서 단정이 아니라 물음이다. 혁명이 지운 것은 군주제였지만, 남긴 것은 국가의 독립, 혁명의 주체, 발전의 길이라는 세 겹의 미완이었다.

결과

1921년 혁명정부와 1924년 공화국 수립은 몽골의 별도 국가기구를 강화하고 귀족·종교적 지배질서를 바꾸는 길을 열었다. 동시에 소련·코민테른의 영향과 당내 숙청이 커졌다. 목축 집단화와 1930년대 대규모 탄압은 뒤에 일어난 정책 전환으로, 건국 직후의 경제·사회와 구분해야 한다.

연표와 지도

울란바토르 4 크질(헴벨디르) 3 몽골 인민군·붉은 군대 · 캬흐타 → 우르가 1 우르가 2 우르가 7 울란바토르 5 우르가 6 보그드 칸 궁전 몽골 인민군·붉은 군대3
  1. 11911몽골러시아소련
    독립 선언과 보그드 칸 정부

    청의 붕괴 속에 별도 국가와 군주제를 선포했다.

  2. 1914.04.17러시아
    우랑하이 보호령

    청이 무너진 뒤 독립을 선포한 투바가 러시아 제국의 보호령 우랑하이 지방이 되었다.

  3. 21919몽골러시아소련
    중국군의 자치 철회

    외부 군사 지배가 혁명세력 결집의 배경이 됐다.

  4. 31921.07몽골러시아소련
    인민정부 수립

    몽골군과 적군의 승리 뒤 제한군주제 정부가 출범했다.

  5. 41921.08.14소련
    탄누투바 인민공화국 선포

    전투바 제헌 후랄이 독립을 선포하고 투바 인민혁명당이 집권했다. 첫 헌법은 대외 관계에서 소비에트 러시아의 보호를 받는다고 적었다.

  6. 51922몽골러시아소련
    보도 처형

    혁명 내부의 갈등이 숙청으로 이어졌다.

  7. 61924.05몽골러시아소련
    보그드 칸 사망

    군주제에서 공화제로의 전환이 본격화됐다.

  8. 71924.11.26몽골러시아소련
    헌법 채택과 인민공화국

    대후랄이 첫 헌법을 채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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