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헌의회는 1946년 1월 11일 개회해 같은 날 인민공화국을 선포했고, 3월 16일 인민의회로 전환되었다. 다른 기록은 선출 1월 10·12일(저신뢰 계보), 퇴임 7월 31일로 적는다.
알바니아의 의사·정치인. 1887년 2월 5일 오스만 제국 지로카스트라에서 태어나 이스탄불에서 의학을 공부했고, 1924년 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되고 판 놀리의 6월 혁명을 지지했으며, 1925년 망명지에서 반조구 KONARE를 함께 세웠다.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점령정부 국가평의회에 참여했다가 이를 실책으로 여기고 민족해방운동에 합류해 1944년 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이 되었다. 1946년 제헌의회 의장이 되었고 인민의회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1953년까지 공식 국가수반을 지냈으나, 실제 권력은 노동당 제1서기 엔베르 호자에게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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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4–1920알바니아어 위키백과에 따르면 1914년 지로카스트라 대대과 블로러에서 근무하고 빈에 파견되었으며, 1915~1918년 발시 시의, 1920년 티라나 병원 의사
1923–1924두러스 시의사
1924조구 암살 시도로 2주간 수감, 판 놀리의 6월 혁명 지지 후 망명, 궐석 재판에서 사형 선고
1925–1932반조구 KONARE 공동 창립에 참여, 제네바에서 기관지 《리리아 콤베타레》 운영(1926년부터 주필)
1933–1939그리스 잔테에서 정치 망명, 1939년 이탈리아 침공 후 귀국
1940–1943점령정부 국가평의회 위원(1944년 1월 13일까지 명부에 남음), 1943년 8월 전선 합류; 이후 민족해방운동 참여
1943.09민족해방 총평의회 상임위원회 의장
1944.05페르메트 회의에서 반파시즘 민족해방평의회 의장(외교 담당)
1944.10–1946호자 의장의 민족해방 반파시즘 위원회에서 외무장관(사료에 따라 1946년 2월 9일 또는 3월 22일까지)
1946–1954지로카스트라 대의원(1945년 12월 2일·1950년 5월 28일 선거)
1946.01–1953제헌의회 의장, 인민의회 전환 후 상임간부회 의장으로 공식 국가수반(영어 위키백과는 제헌의회 의장, ShtetiWeb은 1월 12일 선출·7월 31일까지로 기록)
1952–1953동생 베심 니샤니가 인민정부에 대한 선전 혐의로 체포되고(1952년 10월 1일 체포·8개월 예심구금) 부인과 결별; 1953년 우익지 보도는 부인의 강제퇴거·가택연금과 니샤니의 사실상 포로 상태를 전함
1953.07공식적으로는 7월 24일 건강을 이유로 사임을 요청하고 8월 1일 하지 레시가 후임했으며, 호자가 강제로 사임시켰다는 기록도 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자유선거 없는 전독일 정부 구상을 거부하고 서방의 선거 절차를 내세웠다.
존 포스터 덜레스는 변호사 출신의 미국 외교가로, 전후 국제질서를 동맹과 군사적 억지의 틀로 재편하려 했다. 그는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국무장관으로서 대소 봉쇄를 넘어 공산주의 세력의 후퇴를 압박하는 노선을 폈고, NATO를 중심으로 서방의 결속을 강화했다. 1954년 베를린 회의에서 그는 몰로토프의 집단안보 구상과 전독일 정부 제안에 맞서 자유선거를 거친 통일을 주장했으며, 그해 서독의 NATO 가입을 관철해 유럽 분단의 제도화를 선택했다. 이 노선은 서방 진영의 안정과 미국의 영향력을 넓혔지만, 이란·과테말라 정권 전복 지원과 핵 위협을 포함한 개입주의라는 책임도 남겼다.
바이에른 함멜부르크의 제본공 출신으로 가톨릭 노동조합 운동을 이끌었고, 중앙당 소속으로 1933년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나치에 맞선 저항운동에 가담해 1938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었고, 1944년 7월 20일 암살 기도 뒤 숨어 지냈다. 전후 소련 점령지구에서 기독교민주연합을 함께 세우고 레머와 함께 대표를 맡았으며, 기독교 사회주의자로서 주요 산업의 국유화를 주장했다. 공산당을 비판한 끝에 1947년 12월 레머와 함께 소련 군정청에 의해 대표직에서 물러났고, 서베를린으로 옮겼다. 아데나워의 서방 통합에 맞서 중립 통일 독일을 바랐고, 1949~1957년 전독일문제 장관을 지냈다. 1961년 베를린에서 죽었다.
에른스트 로이터는 사회민주주의와 공산주의를 오가며 20세기 유럽의 격변을 직접 겪은 독일 정치가였다. 나치의 박해와 터키 망명을 거친 뒤 베를린으로 돌아와 도시 행정과 사회민주주의를 결합한 지도력을 보여 주었다. 베를린 봉쇄 때 그는 서베를린 시민의 결의를 국제사회에 호소했고, 분단된 도시를 자유와 자치의 상징으로 만들었다. 그의 경력은 혁명적 급진주의에서 민주적 지방정치로 이동한 한 세대의 긴장도 드러낸다.
1956년 11월 1일 기자회견에서 소련의 재침공 가능성을 묻자 "그런 비극은 인간적으로 불가능하다…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이다"라고 답했다.
개혁교회 목사에서 독립소지주당 창립자·지도자로 헝가리 전후 민주화의 얼굴이 된 정치인. 1945년 총선 승리로 총리에 오르고 이듬해 공화국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나, 공산당의 살라미 전술로 1948년 사위의 조작된 반역 혐의를 빌미로 사임당하고 8년간 연금되었다. 1956년 10월 너지 임레의 혁명 정부에 합류해 11월 1일 바르샤바조약 탈퇴와 중립 선언에 동참했고, 봉기 진압 후 6년형을 받았다. 1989년 대법원이 형을 무효화하며 복권되었다.
「오랜 세월 전 우리는 운명과의 약속을 맺었고, 이제 그 서약을 실현할 시간이 왔습니다. 한밤중, 세계가 잠든 그 시간에 인도는 생명과 자유를 향해 깨어날 것입니다.」(1947년 8월 14일 독립 전야 연설)
인도 독립운동의 최고 지도자 중 한 사람으로, 1947년 독립과 함께 초대 총리에 취임하여 1964년 사망할 때까지 인도를 이끌었다. 의회민주주의와 세속주의, 계획경제를 인도 국가의 기초로 삼았으며, 대외적으로는 냉전의 두 진영 어디에도 속하지 않는 비동맹 노선을 개척했다. 1954년 티토와의 공동성명에서 '비동맹'을 국제정치 용어로 처음 규정했고, 1956년 브리유니 선언과 1961년 베오그라드 회의를 통해 비동맹운동의 제도적 기틀을 마련했다. 1962년 중·인도 국경전쟁의 패배로 국내적 위신이 흔들렸으나, 사후에도 인도 공화국의 설계자로 추앙받았다.
1946년 6월 1일, 호찌민이 프랑스에서 협상 중일 때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일방 선포해 베트남민주공화국과의 충돌을 격화했다.
브레스트 출신의 해군 장교로 1차 대전 뒤 카르멜회 수도사가 되었다가, 2차 대전 때 해군으로 돌아와 드골의 자유 프랑스 해군을 이끌었다. 1945년 10월 31일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부임해 식민 행정의 복구를 맡았다. 1946년 베트민 지도부가 프랑스에서 협상하는 동안, 3월 6일 호–생트니 협정을 어기고 코친차이나 자치 공화국을 세워 사실상 전쟁을 시작하게 했다. 하이퐁 포격 등 강경책을 이끌다 1947년 소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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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20카르멜회에 입회해 수도사가 되었다.
1940드골 휘하 자유 프랑스군에 합류했다.
1945드골에 의해 인도차이나 고등판무관으로 지명되었고, 10월 31일 현지에 도착했다.
19466월 1일 코친차이나 임시정부를 선포했다. 11월 랑선과 하이퐁의 무력 장악을 지지했다.
해방 뒤 첫 총리를 지내고 1948년 2월 공산당 편에 서서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친 친소 사회민주주의자
1948년 2월 공산당 쿠데타 때 사회민주당 지도부에서 공산당과의 통합을 추진해, 그해 말 두 당의 합병으로 당을 일당 지배 체제에 편입시켰다.
올로모우츠 출신의 외교관으로 네덜란드·루마니아·미국·스위스·오스트리아 대사를 거쳐 전쟁 중 모스크바 주재 망명정부 대사를 지내며 소련과 가까워졌다. 1945년 4월 코시체 정부의 총리가 되어 1946년 6월까지 민족전선 정부를 이끌었다. 사회민주당 지도자로서 공산당과의 긴밀한 협력을 주장했고, 1948년 2월 비공산당 장관들이 사임할 때 자리를 지키며 공개적으로 공산당을 지지했다. 쿠데타 뒤 사회민주당을 공산당에 합쳤고 공산 정권에서 고위직을 지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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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45–1946코시체 정부와 해방 후 체코슬로바키아 정부의 총리를 지냈다.
1946–1947체코 사회민주당 의장을 지냈다. 1947년 11월 공산당에 지나치게 복종한다는 당내 비판으로 지도자 자리에서 밀려났다.
각료회의가 해임 철회를 의결했지만, 노세크는 이를 무시하고 프라하 경찰 간부 8명을 공산당원으로 교체했다.
광부 출신으로 18세에 사회민주당에 입당했고, 1921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창립에 참여했다. 나치 점령 후 영국으로 망명하여 런던 망명정부 국가평의회 부의장을 지냈으며, 1945년 귀국 후 내무장관에 임명되어 경찰과 보안기구를 공산당 세력으로 재편했다. 1948년 2월 13일 비공산당 경찰 간부 8명을 해임함으로써 내각 위기를 유발했고, 이는 비공산당 장관 12명의 사직과 고트발트의 정권 장악으로 이어졌다.
스탈린이 가장 신뢰한 동구권 대리인, 폴란드 스탈린주의 체제의 설계자이자 오데르-나이세 국경의 수호자
1947년 2월 5일, 무신론자 공산주의자 비에루트는 세임에서 대통령 선서를 마치며 전통적인 종교문구를 덧붙였다: '신이여 나를 도우소서(Tak mi dopomóż Bóg).'
코민테른 비밀학교 출신의 폴란드 공산주의자. 1943년 소련 신임 아래 폴란드 노동자당 지도부에 합류, 국가민족평의회 의장(1944–47), 대통령(1947–52), 통일노동자당 서기장(1948–56), 총리(1952–54)를 지냈다. 포츠담에서 오데르-나이세 국경선을 관철했고, 6개년 계획으로 중공업화·집단농장화와 사회주의 리얼리즘 문화정책을 추진하며 바르샤바 재건을 주도했다. 공안부(UB)를 통한 무장반대파 진압과 가톨릭교회와의 대립을 감독했으며, 1956년 흐루쇼프 비밀연설 직후 모스크바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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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912폴란드 사회당–좌파(PPS-레비차) 입당
1918폴란드 공산당(KPRP/KPP) 입당, 활동 중단 후 1921년부터 다시 당원으로 활동
1925–1930코민테른 비밀학교(1925–26)와 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1927년 11월부터 1930년까지) 수학, 코민테른 교관
1933–1938사나치아 정권에 체포(1933년 12월), 7년형 선고; 1938년 12월 사면
1943폴란드 노동자당(PPR) 서기국 합류(11월 23일), 국가민족평의회(KRN) 의장 선출(12월 31일)
1947–1952폴란드 공화국 대통령(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선출로 종료)
1948–1956폴란드 통일노동자당(PZPR) 서기장, 1954년 3월 17일부터 제1서기
1952–1954폴란드 인민공화국 총리(1952년 11월 20일–1954년 3월 18일)
1916–1921루블린 식료품 협동조합 간부, 노동자 협동조합 연합 좌파 조직; 1921년 바르샤바 주택협동조합 공동창립
1927–1933폴란드 공산당 중앙기술부 책임자, 오스트리아·체코슬로바키아·불가리아에서 코민테른 특수임무 수행
1944–1949PPR 정치국 비공개 위원(1944년 8월부터); 1949년 2월 24일부터 당 중앙위 정치국 안전위원회 위원장으로 탄압기구 감독
1940년 10월 30일 석방되어 11월 6일 모스크바에 도착한 라코시는 다음 날 붉은광장 열병식에서 레닌 묘단 위 스탈린 곁에 섰다.
헝가리 공산당 서기장(1945–1948)과 노동자당(MDP) 서기장·제1서기(1948–1956)로 1948년부터 1956년까지 헝가리를 지배했다. 1925년 체포되어 1926년 8.5년형과 1935년 종신형을 받고 15년 넘게 복역한 뒤 1940년 11월 모스크바에 도착했다. 1945년 귀국 뒤 '살라미 전술'로 민주 정당들을 해체하고 사회민주당을 강제 합병해 일당 지배를 세웠으며, 대량 투옥과 강제노동수용소, 러이크 재판의 책임을 졌다. 1953년 총리직을 너지 임레에게 넘긴 뒤에도 개혁을 방해하다 1956년 7월 18일 해임되었고, 1962년 제명 뒤 크라스노다르·토크마크·아르자마스를 거쳐 1971년 2월 5일 고리키에서 사망했다.
베를린의 공구공 출신으로 1910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8~1933년 프로이센 주의회 의원을 지냈다. 나치 시기 저항 단체에 가담해 두 차례 투옥되었다. 전후 사회민주당과 공산당의 강제 합당을 지지해 사회주의통일당 중앙위원이 되었고, 1949년 10월 동독 초대 법무장관이 되었다. 글라도프 일당 재판에서 사형이 가능하도록 성인 형법을 위법하게 적용하게 했다. 1953년 6월 30일 《노이에스 도이칠란트》 인터뷰에서 6월 17일 파업 참가자를 혐의만으로 처벌하지 않겠다고 밝혔다가 「국가와 당의 적」으로 몰려 해임·제명·체포되었고, 징역 8년을 선고받았다. 1956년 석방·사면되고 1958년 복당했으며, 1973년 죽었다.
그는 1936년 국제연맹 연단에서 '신과 역사는 여러분의 심판을 기억할 것입니다'라고 말했다.
솔로몬 왕조의 후예인 하일레 셀라시에 1세는 에티오피아를 근대화하고 국제연맹 연설로 반파시즘의 상징이 된 20세기의 군주였다. 섭정 시절부터 개혁을 이끌어 1931년 헌법과 노예제 폐지를 단행했고, 이탈리아로부터의 망명을 거쳐 1941년 영국군과 함께 귀환해 제정을 회복했다. 그러나 북부의 리스트·구울트 토지와 남부의 토지수여제를 그대로 둔 채 귀족·교회와 타협한 근대화는 농민의 소작 굴레를 풀지 못했고, 1972년 웰로 기근으로 민심이 이탈했다. 1974년 9월 데르그에 폐위된 그는 이듬해 3월 자신의 토지제도를 폐지한 국유화가 내려진 직후인 8월, 군부의 명령으로 목졸려 죽었다.
에드워드 알몬드는 두 차례 세계대전과 한국전쟁을 거친 미국 육군 장성으로, 공격적 지휘관이라는 명성과 인종주의적 편견이 함께 남아 있다. 제2차 세계대전에는 흑인 병사들로 구성된 제92보병사단을 지휘했으며, 사단의 전투 성과를 병사들의 인종적 능력 탓으로 돌려 군의 흑인 전투부대 운용에 반대했다. 한국전쟁에서는 더글러스 맥아더의 참모총장으로서 인천상륙 뒤 창설된 X군단을 지휘했고, 인천과 서울 탈환에 기여했다. 그러나 동북부 진격에서 병력을 넓게 분산하고 중국군의 규모를 과소평가해 X군단의 위기를 키웠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로 티토의 유고슬라비아는 소련 진영에서 축출되었으나, 이는 소련의 지도력에 도전한 사회주의 국가가 독자 노선을 걸을 수 있음을 보여 주었고, 그 충돌은 이데올로기 분쟁인 동시에 발칸을 둘러싼 지정학적 투쟁이기도 했다.
크로아티아계 아버지 프라뇨 브로즈와 슬로베니아계 어머니 마리야 사이에서 쿠므로베츠에서 태어났고, 스스로는 아버지와 이웃들처럼 크로아티아인으로 정체화했다. 제1차 세계대전 중 오스트리아-헝가리 제국군 병사로 복무하다 부상당해 러시아군의 포로가 되었고, 1920년 옴스크에서 공산당에 입당한 뒤 1939년 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서기장이 되었다. 1941년 파르티잔 총사령관이 되어 제2차 세계대전 내내 민족해방투쟁을 지도했고, 전후에는 1980년 사망할 때까지 유고슬라비아 연방을 이끌었다. 1948년 코민포름 결별 이후 스탈린주의자로 지목된 수만 명이 골리 오토크 같은 강제노동수용소에 수용되어 수백 명이 죽었다.
불가리아 농민동맹(BZNS) 지도자로, 제1차 세계대전 뒤 프랑스에서 법률을 공부하고 1929년 귀국해 언론인으로 활동했다. 1943년 조국전선을 공동 창설했으나 1945년 공산당의 권력 독점에 맞서 야당을 이끌었고, 1946년 대국민의회 선거에서 야당 연합 101석을 얻었다. 1947년 6월 의회에서 체포되어 8월 쿠데타 음모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고, 평화조약 발효 여드레 뒤인 9월 23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겔젠키르헨에서 헌병 하사의 아들로 태어나 교사가 되었고, 1920년 카프 폭동 때 루르 적군을 지휘했다. 소련 군사정보국(GRU) 요원과 코민테른 군사고문으로 중국 광저우 봉기 등에 관여했고, 스페인 내전에서는 「고메스」라는 이름으로 국제여단을 이끌었다. 1947년 귀국해 사회주의통일당에 들어갔고, 1950년 초대 국가보안부 장관과 정치국원이 되어 슈타지를 키웠다. 1953년 6월 봉기 뒤 헤른슈타트를 제1서기로 세우자고 제안했으나, 울브리히트가 흐루쇼프의 지지를 얻자 7월 장관직과 모든 직위를 잃고 당에서 제명되었다. 번역가로 지내다 1958년 동베를린에서 죽었고, 1990년 뒤에 복권되었다.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자 루마니아 공산당 「모스크바파」의 수장, 1952년 게오르기우데지의 숙청으로 몰락하다
1952년 5월 26일과 27일에 열린 중앙위원회 전원회의에서 게오르기우데지는 파우케르·루카·제오르제스쿠를 「반당 분파」로 규탄하고 파우케르를 정치국에서 제거했다. 데지가 모스크바에서 스탈린의 재가를 받아 온 뒤였고, 슬란스키 재판으로 동유럽 전역에 유대인 공산주의자 숙청의 바람이 불던 때였다.
바슬루이 지방의 정통파 유대인 가정에서 하나 라빈손으로 태어나 히브리어 교사로 일하다 1915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1921년 루마니아 공산당 창당에 참여했다. 1935년 체포되어 이듬해 크라이오바 재판에서 10년형을 받았으며, 1941년 소련과의 죄수 교환으로 모스크바에 건너가 코민테른 밑에서 망명 루마니아 공산주의자들을 이끌었다. 1944년 귀국해 정치국원·중앙위 서기가 되었고, 1947년 11월 외무장관에 올라 세계 최초의 여성 외무장관이 되었다. 바실레 루카·테오하리 제오르제스쿠와 함께 이른바 「모스크바파」를 이루어 감옥파의 게오르기우데지와 당권을 다투었으나, 1952년 5월 스탈린의 재가를 얻은 데지에 의해 「우편향」과 「좌편향」을 동시에 범했다는 죄목으로 정치국에서 쫓겨나고 7월 외무장관에서도 해임되었다. 1953년 2월 체포되었지만 스탈린 사후 풀려나 재판 없이 당적을 잃었고, 정치 출판사에서 번역 일을 하며 여생을 보냈다. 미국 『타임』이 1948년 「세계에서 가장 힘센 여성」으로 표지에 올린 인물이지만, 로버트 레비의 연구는 그가 강제 집단화에 제동을 걸고 유대인의 이스라엘 이주를 허용해 데지보다 온건한 노선을 걸었음을 보여 준다.
1945년 북이탈리아 항복 협상은 전쟁을 앞당겼지만, 소련 대표와 이탈리아 파르티잔을 배제한 채 진행됐다.
앨런 덜레스는 미국의 외교관·변호사이자 정보기관 지도자로, 제2차 세계대전의 비밀협상과 냉전의 은밀한 개입을 하나의 경력으로 연결했다. OSS 베른 지국장으로 독일군의 북이탈리아 항복을 협상한 작전 선라이즈를 추진했지만, 그 과정은 소련과의 연합 전선 및 이탈리아 파르티잔의 전후 주권 문제를 낳았다. 뒤이어 CIA를 이끌며 이란과 과테말라의 정권 전복, 쿠바 피그스만 침공 같은 비밀공작을 감독해 미국 정보국가의 범위와 책임을 확대했다. 실패한 쿠바 침공 뒤 사임하면서도, 그의 유산은 정보 수집과 제국적 개입이 결합한 냉전 정치의 전형으로 남았다.
부르크에서 사회민주당원 노동자의 아들로 태어나 무두장이로 일했고, 1차 세계대전에 반대해 사회민주당을 떠났다.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공산당에 들어갔고 마그데부르크·동프로이센 지구 지도자를 지냈다. 1933년 체포되었다가 탈옥해 망명했고, 소련에서 자유독일 국민위원회에 참여했다. 1945년 아커만 그룹과 함께 돌아와 1946년까지 작센 공산당 제1서기를 지냈다. 1948년부터 죽을 때까지 사회주의통일당 중앙당통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당 규율을 맡았고 정치국원·인민의회 부의장을 지냈다. 1953년 봉기 뒤 정치국 다수가 울브리히트를 내치려 할 때 호네커와 함께 그의 편에 섰다. 1971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1961년 6월 15일 기자회견에서 "아무도 장벽을 세울 생각이 없습니다"라고 공언했으나, 두 달 뒤인 8월 13일 그의 명령으로 베를린 장벽 건설이 시작되었다.
1893년 라이프치히의 재단사 가정에서 태어나 가구 목수로 훈련받았고, 1912년 사민당에 입당한 뒤 1919년 스파르타쿠스단을 거쳐 1920년 독일공산당(KPD)에 들어갔으며, 1923년 중앙위원, 1928~1933년 라이히스타크 의원이었다. 나치 집권 후 소련으로 망명해 코민테른에서 일했고, 1945년 4월 30일 '울브리히트 그룹'을 이끌고 귀국해 1946년 강제 합병으로 사회주의통일당(SED)을 창당하는 데 핵심 역할을 했다. 1950년 SED 제1서기가 되어 동독을 통치하며 1961년 베를린 장벽 건설을 명령하고 1963년 신경제체계 개혁을 추진했으나, 1971년 5월 3일 실각해 호네커에게 자리를 넘겼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