프랑스 극동원정군의 마지막 사령관으로 디엔비엔푸 요새화를 결정해 1954년 패배를 맞은 장군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프랑스군을 투입하고 요새화를 명령한 나바르는 1954년 3월 시작된 포위전에서 철수를 명하지 않았으며, 5월 요새가 함락되어 프랑스의 협상 입지가 무너졌다.
1차·2차 세계대전을 치른 프랑스 육군 장군으로, 1953년 5월 살랑의 뒤를 이어 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이 되었다. 부임 직후 본국 정부에 이 전쟁은 이길 수 없고 기대할 수 있는 최선은 교착이라고 보고했다. 도시와 주요 도로를 지키며 베트민을 협상으로 몰아넣는다는 「나바르 계획」에 따라, 라오스로 가는 베트민의 길목을 막으려 1953년 11월 디엔비엔푸에 낙하산 부대를 내려 요새를 세웠다. 1954년 5월 요새가 함락되면서 프랑스의 패배가 결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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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6–1918생시르 사관학교에 입학하고 제1차 세계대전 전선에서 기병 소대장으로 복무했다.
- 1942–1945독일에 맞선 활동으로 소환되자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 저항운동에 참여했고, 프랑스 해방전에서 제1군 기갑연대를 지휘했다.
- 1945–1953준장이 되어 독일에서 복무했으며 제5기갑사단장과 알퐁스 쥐앵 원수 참모장을 지냈다. 1948~1949년에는 알제리에서 사단을 지휘했다.
- 1953–1954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사령관으로서 디엔비엔푸 전투를 지휘했으며, 요새 함락 뒤 교체되었다.
- 1956육군에서 퇴역하고 인도차이나 전쟁에 관한 저서 《인도차이나의 고통》을 출간했다.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으로 동독 정부의 전신을 이끌고 경제 정책을 맡은 공산주의자
슈투트가르트 근교 포이어바흐에서 태어나 보슈 공장의 금속 프레스공으로 일했고, 스파르타쿠스단과 독립사회민주당을 거쳐 1919년 공산당에 들어갔다. 1920년대 공산당 농업 정책을 이끌었다. 나치 집권 뒤 투옥되었다가 소련으로 망명했고, 스페인 내전에서 제11국제여단을 지휘했다. 프랑스에서 억류되어 1942년 게슈타포에 넘겨졌고, 마우트하우젠 수용소에서 해방을 맞았다. 1948년 3월 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이 되어 화폐개혁과 경제계획을 이끌었다. 동독 정치국원과 부총리, 국가계획위원회 위원장을 지냈고, 1953년 7월 정치국에서 울브리히트 교체를 권했으나 자리를 지켰다. 기계공업장관과 대외무역장관을 지내다 1961년 심장마비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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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9독일 공산당 입당
- 1923공산당 중앙위원회 농업부장
- 1937–1938제11국제여단 지휘
- 1943–1945마우트하우젠 수용소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위원장
- 1950–1961사회주의통일당 정치국원, 부총리
- 1955–1961대외무역·독일내무역 장관
전후 폴란드 국가기구를 이끈 공산주의자
1956년 3월 비에루트의 장례식에서 “비에루트는 죽었지만 단결된 우리 당은 살아 있다”고 말했다. 같은 달 제6차 전원회의는 오하프를 제1서기로 선출했고, 고무우카가 제1서기가 된 것은 1956년 10월 제8차 전원회의였다.
제철 노동자 집안에서 태어나 1923년 폴란드 공산당에 입당한 폴란드의 공산주의 정치인이자 사단장급 장군이다. 1925년과 1936년 두 차례 체포되어 감옥에서 보냈고, 1939년 이후 소련에서 폴란드 애국자 동맹과 폴란드 노동자당 창립에 참여했으며 소련 편성 폴란드군의 정치장교를 맡았다. 전후 실레지아 주지사와 각료회의 부의장을 거쳐 1952년 11월 20일 국가평의회 의장에 임명되어 죽을 때까지 재임했고, 주지사 시절에는 소련의 인력·설비 반출 중단을 추진했다. 1956년 3월 제6차 전원회의에서 제1서기 후보로 거론되었으나 오하프가 선출되었고, 이후 당내 강경파인 나톨린 계열로 분류되었다. 1964년 8월 7일 암으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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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1939폴란드 공산당 활동가, 투옥
- 1943–1945소련 편성 폴란드군 정치장교, 정치교육 담당 부사령관
- 1944–1948폴란드 노동자당 정치국 위원
- 1945–1948실레지아-돔브로바 주지사
- 1948–1954폴란드 통일노동자당 중앙위원회 서기, 정치국 위원
- 1949–1952각료회의 부의장
- 1952–1964폴란드 국가평의회 의장
1953년 6월 16일 정부 청사 앞에서 파업 노동자들 앞에 나섰던 동독 중공업 장관
헤센 라우터바흐의 구리 세공인 아들로 열일곱에 광부가 되었고, 1차 세계대전에 나가 1918년 병사평의회에 들었다. 1920년 독립사회민주당, 1922년 공산당에 들어가 작센 지구당 정치 책임자와 제국의회 의원이 되었다. 1933년 체포되어 감옥과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등 강제수용소에서 나치 시대를 버텼다. 전후 작센 경제·계획장관을 거쳐 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이 되었고, 동독에서 공업장관과 중공업장관을 지냈다. 1953년 6월 16일 각료의 집 앞 군중 속에 들어가 책상 위에서 연설했으나 야유에 묻혔다. 1958년 울브리히트에게 「일탈적 태도」로 몰려 직책에서 밀려난 뒤 작가로 살았고, 1975년 동베를린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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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독일 공산당 입당
- 1932–1933제국의회 의원
- 1933–1945투옥, 작센하우젠·플로센뷔르크 강제수용소 수감
- 1948–1949독일경제위원회 부위원장
- 1949–1955공업장관, 중공업장관
- 1958「일탈적 태도」로 직책에서 밀려남
티토와 결별한 당내 스탈린 지지자
1948년 4월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그는 티토의 대소련 답신에 반대했다.
스레텐 주요비치는 세르비아계 유고슬라비아 공산주의자이자 노동운동 조직가로, 제1차 세계대전과 유고슬라비아 인민해방전쟁을 거쳤다. 그는 전쟁기 파르티잔 봉기를 조직하고 최고사령부에서 활동했으며, 해방 뒤 재무장관을 맡았다. 1948년 티토와 스탈린의 충돌에서 그는 소비에트 노선을 지지한 유일한 반대자로 중앙위원회 회의에 나섰고, 그 선택으로 당과 공직에서 축출되어 구금되었다. 1950년 자기비판 뒤 석방되고 훗날 당에 복귀했지만, 그의 경력은 혁명적 국제주의와 유고슬라비아의 자율성 사이의 균열을 드러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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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1924귀국 후 노동운동·노동조합 활동
- 1924–1933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입당, 당 조직 활동
- 1938–1940유고슬라비아 공산당 중앙위원
- 1941–1944세르비아 파르티잔 최고사령부·참모 활동
- 1945–1947유고슬라비아 연방 재무장관
- 1948티토·스탈린 분열에서 인포르비로 노선 지지
- 1948–1950가택연금과 수감, 자기비판 뒤 석방
- 1950–1971당 복귀, 《보르바》·경제연구기관 간부
레지스탕스 의장에서 마셜 플랜의 설계자까지, 몰로토프에게 유럽 분열이 소련 탓이라고 응수한 외무장관
1947년 7월 2일 파리 3국 회담 마지막 세션, 몰로토프가 마셜 플랜을 '유럽을 둘로 가르는 음모'라고 비난하자 비도는 '유럽을 분열시키는 것은 바로 소련의 행동'이라고 조용히 응수했고, 이튿날 베빈과 함께 16개국 초청장을 발송했다.
1943년 장 물랭 체포 후 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직을 이어받아 프랑스 레지스탕스를 이끌었고, 해방 후 기독교민주주의 정당 인민공화운동(MRP)을 창당했다. 외무장관으로서 1947년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의 '유럽 분열' 비난에 맞서 소련의 행동이야말로 유럽을 가르고 있다고 정면 반박했고, 소련 이탈 후 영국과 함께 서유럽 16개국을 규합해 마셜 플랜 수용을 주도했다. 1946년과 1949년 두 차례 총리를 지냈으며 디엔비엔푸 포위 당시 미국에 원자폭탄 지원을 요청할 만큼 식민지 전쟁에 매달렸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하며 1962년 비밀리에 '제2의 CNR'을 조직했다가 면책특권을 박탈당하고 브라질로 망명, 1968년 사면으로 귀국했으나 영향력은 회복하지 못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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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899프랑스 알리에주 물랭 출생
- 1925역사·지리 교수자격시험 수석 합격, 교사로 재직하며 기독교민주주의 언론 활동
- 1943–1944국민저항위원회(CNR) 의장, 장 물랭 후임으로 레지스탕스 통합 지도
- 1944–1946드골 임시정부 외무장관, 샌프란시스코 UN 창설회의 프랑스 수석대표
- 1947외무장관, 파리 3국 회담에서 몰로토프와 대치하며 마셜 플랜 수용 주도
- 1946임시정부 주석
- 1949–1950제4공화국 수상
- 1954외무장관, 디엔비엔푸 전투 위기 관리
- 1962–1968알제리 독립 반대로 면책특권 박탈, 브라질 망명, 1968년 사면 귀국
인도차이나 전쟁의 프랑스군 사령관이자 OAS 지도자였다.
살랑은 1952~1953년 인도차이나에서 프랑스군을 지휘한 뒤 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를 맡았다. 알제리 독립에 반대해 1961년 4월 장군들의 쿠데타에 가담하고, 실패 뒤 지하로 들어가 프랑스령 알제리의 유지를 주장하는 비밀 무장조직 OAS를 창설·지휘했다. OAS는 알제리와 프랑스에서 테러와 폭력을 벌였다. 1962년 체포되어 종신 구금형을 받았으며, 1968년 사면·복권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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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2–1953인도차이나 프랑스군 총사령관
- 1958–1960알제리 주재 프랑스 정부 대표
- 1961–19624월 쿠데타 가담, 이후 OAS 지도자
- 1962체포되어 종신 구금형 선고
- 1968사면·복권
기업 권력에서 국제질서의 설계자로 이동한 외교가
얄타 회담 의정서에는 미국 대표로 ‘E. R. 스테티니우스 주니어’의 서명이 남았다.
에드워드 스테티니우스는 대기업 경영과 국가 동원 행정을 거쳐 제2차 세계대전 말 미국 외교의 중심에 선 정치가였다. 무기대여 원조를 관리하며 동맹국의 전쟁 수행을 뒷받침했고, 얄타에서 프랭클린 루스벨트와 함께 전후 유럽과 국제기구의 틀을 협의했다. 그는 얄타 의정서에 미국 대표로 서명한 뒤 유엔 창설회의를 이끌었지만, 소련과의 긴장을 유엔을 통한 협력으로 풀려 한 구상은 트루먼 행정부와 충돌했다. 이 경력은 기업과 국가의 전시 동원이 전후 다자주의로 이어지는 동시에 냉전의 문턱에서 제약받은 과정을 보여 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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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제너럴 모터스 입사, 존 리 프랫의 보좌역
- 1931제너럴 모터스 공공·산업관계 담당 부사장
- 1934–1938US스틸 이사, 1938년 이사회 의장
- 1939–1941전쟁자원위원회와 생산우선순위 기관에서 전시 동원 담당
- 1941–1943무기대여 원조 행정관
- 1943–1944미국 국무부 차관
- 1944–1945미국 국무장관, 얄타 회담 미국 대표
- 1945–1946초대 미국 유엔대사
조선공산당 재건의 주역, 남조선로동당 당수
1927년 신의주 법정에서 광인을 가장해 자신의 배설물을 먹는 극단적 연기로 병보석을 얻어내고, 곧 모스크바로 탈출했다.
일제강점기부터 해방정국까지 조선공산주의운동을 이끈 최고지도자. 조선공산당을 재건하고 남조선로동당을 이끌었으나, 월북 후 김일성에게 밀려 한국전쟁 패전의 책임으로 숙청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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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고려공산당 이르쿠츠크파 입당, 상하이에서 활동
- 1922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원동인민대표대회 참석
- 1925조선공산당 창당 참여, 고려공산청년회 책임비서
- 1928–1930모스크바 국제레닌학교 수학; 전연방공산당(볼셰비키) 입당
- 1931–1940코민테른 동양비서부 활동; 상하이·국내 지하운동 지도
- 1945조선공산당 재건, 당수 겸 서기장 취임
- 1946–1949남조선로동당 창당, 부위원장(사실상 당수)
- 1948–1953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수상 겸 초대 외무상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의 쿠바 미사일 배치를 추궁한 두 번의 대선 후보
1962년 10월 25일 유엔 안보리에서 소련 대표 발레리안 조린에게 "통역을 기다리지 마십시오. 예입니까, 아니오입니까?"라고 몰아붙였고, 그가 답변을 거부하자 "지옥이 얼어붙을 때까지 답변을 기다리겠습니다"라고 말한 뒤 미사일 사진을 공개했다.
애들레이 유잉 스티븐슨 2세(1900~1965)는 미국의 정치가이자 외교관으로, 일리노이 주의 정치 명가 출신이며 1952년과 1956년 민주당 대통령 후보로 나서 드와이트 아이젠하워에게 두 번 패했다. 일리노이 주지사(1949~1953년, 관행에 따라 31대 또는 33대로 계산)로는 주 경찰 인사에서 정치적 고려를 없애고 실적제를 도입했으며, 적색 공포기에 공직자의 충성서약을 요구하는 법안에 거부권을 행사했다. 1949년 앨저 히스의 인품 증인으로 선서 진술을 했고, 이는 1952년 선거에서 매카시와 닉슨이 그를 공산주의에 무르다며 공격하는 데 쓰였다. 1961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유엔 대사로 재임했으며, 1965년 7월 14일 런던에서 심장마비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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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0–1944해군장관실 수석 법률보좌관
- 1945국무장관 특별보좌관 · 유엔 준비위원회 미국 부대표
- 1948–1953제31대 일리노이 주지사
- 1952민주당 대통령 후보
- 1956민주당 대통령 후보 (재지명)
- 1961–1965유엔 주재 미국 대사
국가폭력에 맞선 변호사
그는 당국이 노동자들을 ‘훌리건’으로 갈라 부르는 논리를 거부하고, 국가의 폭력이 폭발의 조건을 만들었다고 법정에서 지적했다.
스타니스와프 헤이모프스키는 전후 폴란드에서 정치적 피고인과 사회적 약자를 변호한 법률가였다. 1956년 포즈난 노동자 봉기 뒤 그는 참가자들의 변호를 맡아, 사건을 단순한 범죄가 아니라 국가 정책과 보안기관의 폭력이 낳은 사회적 충돌로 심리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그의 변론은 강압 수사와 당국의 ‘훌리건’ 낙인을 법정에서 다투며 노동자들의 존엄과 법적 권리를 지켰다. 이후 그는 감시와 언론 공세, 거액의 벌금, 변호사 업무 정지로 보복을 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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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00쿠를란트 리바우에서 출생
- 1924바르샤바대학교 법학 졸업
- 1928–1930포즈난 지방법원 검사로 근무한 뒤 변호사 등록
- 1946최고국가재판소에서 아르투르 그라이저 변호
- 1956포즈난 6월 참가자 예지 스로카와 로만 불친스키 변호
- 1959폴란드 보안기관의 집중 감시 대상이 됨
- 1961변호사 업무 정지와 재정적 탄압을 받음
- 1969포즈난에서 사망
만주 항일투쟁을 이끌고 조선인민군 초대 총사령관을 지낸 국가원수
1955년 12월 박헌영 간첩 사건 재판장을 맡은 최용건은 박헌영에게 사형을 선고했으며, 마오쩌둥과 저우언라이의 선처 요청을 거절했다.
운남군관학교와 황푸군관학교에서 군사훈련을 받은 뒤 만주에서 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과 제7군장으로 항일무장투쟁을 지휘했으며, 김일성·김책과 함께 만주파 트로이카를 형성했다. 1945년 귀국 후 조만식의 조선민주당을 공산주의 노선으로 전환시키는 데 결정적 역할을 했고, 1948년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수립과 함께 초대 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으로 취임해 한국전쟁 당시 인민군의 최고위 현장 사령관을 지냈다. 1957년부터 1972년까지 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으로서 명목상 국가원수를 역임하며 김일성 체제의 대외적 얼굴로 활약했다. 1976년 사망 시 국장이 집행되었고, 애국렬사릉에 안장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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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3–1924운남군관학교 졸업
- 1925–1927황푸군관학교 교관
- 1936–1940동북항일연군 제2로군 참모장·제7군장
- 1942–1945소련 극동군 제88국제여단 부참모장
- 1946–1955조선민주당 중앙위원회 위원장
- 1948–1957민족보위상 겸 조선인민군 총사령관
- 1957–1972최고인민회의 상임위원장
- 1972–1974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부주석
중립 외교를 국가 전략으로 만든 장기 집권 대통령
1975년 헬싱키에서 35개국 정상과 대표를 맞이하며 분단된 유럽의 협상 무대를 열었다.
우르호 케코넨은 전후 핀란드의 국가 운영과 대외관계를 규정한 정치가로, 1956년부터 1981년까지 대통령을 지냈다. 그는 소련과의 긴장을 관리하면서도 핀란드의 서방 경제·정치적 연결을 유지하는 중립 외교를 발전시켰다. 1972년 11월 디폴리 예비협의를 핀란드에 유치하고 미국과 캐나다를 포함한 유럽안보협력회의의 틀을 다듬은 일은 그 외교의 절정이었다. 그의 통치는 안정과 국제적 중개의 성과를 남겼지만, 대통령 권한과 동방관계에 의존한 정치가 민주적 경쟁을 좁혔다는 논쟁도 낳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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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1932중앙탐정경찰청 법률가
- 1936–1937법무부 장관
- 1937–1939내무부 장관
- 1950–1953핀란드 총리
- 1954–1956핀란드 총리
- 1956–1981핀란드 대통령
- 1972–1975유럽안보협력회의 핀란드 개최와 중재
나치와 공산당 모두에 맞서다 1950년 조작된 반역 재판으로 교수형에 처해진 체코의 여성 정치가
여성 권리 운동가이자 반나치 저항 활동가였던 호라코바는 전후 의원으로 활동하다 1948년 사임했다. 1949년 체포되어 조작된 반역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1950년 교수형에 처해졌다.
프라하 출신의 법률가로, 전간기 여성 권리 운동에 앞장섰다. 독일 점령기 지하 저항 운동에 참여했다가 1940년 게슈타포에 체포되어 테레진과 독일의 감옥을 거쳤고, 1945년 4월 미군에 의해 풀려났다. 전후 국민사회당 의원이 되었고 1947년 여성 잡지 『블라스타』를 창간했다. 1948년 2월 쿠데타 직후 항의의 뜻으로 의원직을 내놓았지만 망명하지 않고 프라하에서 활동을 이어 갔다. 1949년 9월 체포되어 고문을 동반한 신문 끝에 음모·반역 혐의로 사형을 선고받았고, 1950년 6월 27일 판크라츠 감옥에서 교수형에 처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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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6프라하 시의회 복지부서 책임자가 되고 체코슬로바키아 국민사회당에 가입했다.
- 1945독일 점령기 저항 활동으로 수감된 뒤 연합군에 의해 석방되어 프라하로 돌아왔고, 국민사회당에 재가입해 국회의원이 되었다.
- 19482월 공산당 장악 뒤 의원직에서 사임했다.
- 19499월 27일 불법 정치 모임과 관련해 체포되었다.
- 1950반역·간첩 혐의 재판에서 사형을 선고받고 6월 27일 교수형에 처해졌다.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서기장으로 1948년 2월 쿠데타를 조직하고 인민민주주의 체제를 구축한 실무 책임자
1947년 9월 코민포름 회의에서 슬란스키는 모스크바의 권력 장악 지령을 받고 프라하로 돌아왔다. '국제 무대에서처럼 국내 전선에서도 공세로 전환했다' — 1948년 2월 쿠데타의 서막이었다.
1929년 KSČ 중앙위원·정치국원이 된 후 고트발트의 최측근으로 부상했다. 대전 중 모스크바에서 체코슬로바키아 방송을 이끌고 1944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에 참가했다. 1945~1951년 서기장으로서 당 기구를 장악해 1948년 2월 쿠데타의 실무를 지휘, 체코슬로바키아를 소비에트형 인민민주주의 국가로 전환시켰다. 1951년 체포되어 1952년 반국가 음모·트로츠키주의·티토주의·시오니즘 혐의로 사형당했으며, 이 재판은 동구권 숙청 중 가장 뚜렷한 반유대주의 성격을 띠었다. 1963년 사법 복권, 1968년 당적 회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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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KSČ) 입당
- 1924KSČ 기관지 《루데 프라보》 편집자
- 1927–1928KSČ 오스트라바 지역당 서기
- 1928–1929KSČ 클라드노 지역당 서기
- 1929KSČ 중앙위원·정치국원 선출
- 1935–1938체코슬로바키아 국회의원
- 1939–1945모스크바 망명, 체코슬로바키아 라디오 방송 주필, 슬로바키아 민족봉기 참가
- 1945–1951KSČ 중앙위원회 서기장
- 1948인민민병대 사령관 겸직, 2월 쿠데타 실무 지휘
- 1951체코슬로바키아 부총리
망명 사회민주당 간부로 돌아와 슈마허의 뒤를 이어 서독 사회민주당을 이끈 야당 지도자
마그데부르크에서 벽돌공의 아들로 태어나 1918년 사회민주당에 들어갔고, 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을 이끌었다. 1933년 5월 당 집행부와 함께 프라하로 망명해 망명 사회민주당(소파데)을 꾸렸고, 파리와 리스본을 거쳐 런던에서 전쟁을 보냈다. 1946년 2월 귀국해 하노버의 슈마허 사무소에서 일했고, 그해 부의장이 되어 당 조직과 국제 관계를 맡았다. 1952년 슈마허가 죽자 당 의장, 원내대표, 야당 지도자가 되었다. 1953년과 1957년 총리 후보로 아데나워에게 졌고, 1959년 마르크스주의와 결별한 고데스베르크 강령을 뒷받침했다. 1963년 본에서 죽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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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18사회민주당 입당
- 1928사회주의 노동자 청년단 의장
- 1933프라하로 망명, 망명 사회민주당 집행부
- 1946사회민주당 부의장
- 1952–1963사회민주당 의장, 연방의회 야당 지도자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남베트남 초대 대통령이 되었다가 1963년 쿠데타 때 살해된 정치가
1955년 바오다이를 축출하고 남베트남 대통령이 된 응오딘지엠은 가족을 정권 요직에 기용하고 반대파를 투옥·처형했다. 1963년 불교도 시위가 확산하자 미국은 지원을 거두었고, 군부 쿠데타로 살해되었다.
후에의 가톨릭 관료 집안에서 태어나 식민지 관리를 지낸 반공 민족주의자였다. 1954년 6월 제네바 회의 도중 바오다이가 베트남국 총리로 임명했다. 미국의 지원을 받아 1955년 국민투표로 바오다이를 몰아내고 남베트남(베트남 공화국)의 초대 대통령이 되었으며, 제네바 협정이 약속한 1956년 통일 선거는 치러지지 않았다. 가족 중심의 권위주의 통치와 불교도 탄압으로 반발을 샀고, 1963년 미국 중앙정보국이 지지한 쿠데타 때 붙잡혀 살해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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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3바오다이 황제 정부에서 내무장관을 지냈으나 프랑스가 개혁을 거부하자 사임했다.
- 1954–1955바오다이의 요청으로 베트남국 총리를 지냈다.
- 1955–1963정부가 통제한 국민투표에서 바오다이를 축출한 뒤 베트남공화국(남베트남) 대통령으로 통치했다. 1956년 전국 자유선거를 규정한 제네바 협정을 이행하지 않았다.
소련의 위성에서 반자율적 공산주의 국가로 루마니아를 전환시킨 초대 공산당 지도자
1947년 12월 30일 아침, 게오르기우데지와 페트루 그로자가 군대에 포위된 왕궁으로 찾아와 퇴위 문서에 서명할 것을 강요했다. 거부할 경우 유혈사태가 발생할 것이라고 통보받았다고 미하이 국왕은 망명 후 증언했다.
루마니아 최초의 공산주의 지도자로, 1947년부터 사망할 때까지 국가를 통치했다. 철도 노동자 출신으로 1933년 그리비차 철도 파업을 이끌어 투옥되었고, 수감 중 당내 '감옥파'의 수장으로 부상했다. 스탈린 사후 니키타 흐루쇼프의 탈스탈린화에 저항하며 1958년 소련군 철수를 관철시켰고, 중공업화와 서방과의 무역 확대를 통해 바르샤바 조약 내에서 루마니아의 반자율적 지위를 개척했다. 그의 독자노선은 후임 니콜라에 차우셰스쿠에게로 이어졌으나, 집권 기간 내내 세쿠리타테를 통한 국내 탄압을 유지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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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30루마니아 공산당 입당
- 1933그리비차 철도 파업 주도, 체포·투옥
- 1936당 중앙위원회 위원, 감옥파 수장
- 1944탈옥, 루마니아 공산당 총서기
- 1947미하이 국왕 퇴위 강요, 인민공화국 선포
- 1952–1955루마니아 총리
- 1955–1965루마니아 노동자당 제1서기
- 1961–1965국가평의회 의장(국가원수)
망명정부와 스탈린 사이에서 현실을 협상한 농민정치가
1944년 7월 모스크바에서 그는 바르샤바 봉기가 이미 시작됐다는 소식을 들었다.
스타니스와프 미코와이치크는 폴란드 농민운동에서 성장한 정치가로, 전쟁과 망명 속에서 농민의 대표성과 폴란드 국가의 주권을 함께 지키려 했다. 1943년부터 1944년까지 런던 망명정부를 이끌며 카틴 학살과 동부 국경, 전후 정부 구성을 둘러싸고 소련과 연합국에 맞섰다. 바르샤바 봉기 때 그는 국내 지하운동의 행동과 망명정부의 외교를 연결하려 했지만, 군사적 현실과 스탈린 및 서방의 협상력 앞에서 선택지는 좁아졌다. 전후 귀국해 폴란드 농민당을 이끌었으나 1947년 부정선거와 탄압 뒤 다시 망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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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0폴란드군 자원병으로 폴란드-소련 전쟁에 참전
- 1929–1935폴란드 의회 세임 의원
- 1937–1939인민당 대표
- 1941–1943런던 망명정부 부총리 겸 내무장관
- 1943–1944폴란드 망명정부 총리
- 1945–1947국가통일임시정부 부총리 겸 농업장관
- 1945–1947폴란드 인민당 대표
선거와 군부 사이에서 권력을 전환한 쿠바 지배자
1959년 1월 1일, 반군이 수도로 진격하자 바티스타는 대통령직을 버리고 쿠바를 떠났다.
풀헨시오 바티스타는 가난한 농촌 출신의 군인·정치가로, 1933년 하사관 반란 뒤 쿠바 정치를 좌우했다. 1940년에는 새 헌법 아래 대통령으로 선출되어 사회개혁과 연합국 지원을 추진했지만, 1952년 선거 패배가 예상되자 쿠데타로 권력을 되찾았다. 그의 두 번째 통치는 헌정과 정치적 자유를 억압하고 미국 자본 및 하바나의 조직범죄와 결탁한 권위주의 정권이었으며, 불평등과 탄압은 무장 저항을 키웠다. 1959년 쿠바 혁명으로 축출된 그의 망명은 이후 미·쿠바 대립이 심화되는 출발점 가운데 하나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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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쿠바 육군 사병
- 1923–1933농촌경비대 속기사 하사
- 1933–1940쿠바 육군 참모총장, 실권자
- 1940–1944쿠바 헌정 대통령
- 1948–1952쿠바 상원의원
- 1952–1959쿠바 대통령, 군사독재자
- 1959–1973망명 생활, 포르투갈·스페인
공산주의 시대 교회의 자율성을 지킨 대주교
1953년 체포될 때 그는 묵주와 성무일도서만 챙겼다.
스테판 비신스키는 폴란드 가톨릭교회의 수장이자 사회적 권위를 지닌 종교 지도자로, 공산주의 체제 아래에서 교회와 민족 정체성의 자율성을 지켰다. 그는 국가와의 공개 대립만이 아니라 1950년 협정과 이후의 협상을 통해 신자 공동체와 교회 제도의 활동 공간을 보존하려 했다. 1953년 체포되어 1956년까지 억류되었지만, 석방 뒤에는 교회의 장기적 조직력과 도덕적 권위를 재건했고, 기에레크 시기에는 국가와 공존하면서도 독립된 사회 세력으로 남았다. 1980년 연대노조가 출범하자 정부와 파업 노동자 모두에게 책임 있는 행동을 촉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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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4사제 서품, 전주교구에서 사목 시작
- 1929루블린 가톨릭대학교에서 교회법 박사 학위 취득
- 1931–1939전주 신학교 교수, 가톨릭 사회교리와 사회학 강의
- 1946–1948루블린 주교
- 1948–1981그니에즈노와 바르샤바 대주교, 폴란드 수석주교
- 1953–1956공산주의 당국에 의해 억류
- 1953추기경 서임
- 2021바르샤바에서 복자품에 오름
중립파를 이끈 라오스의 마지막 왕실 총리
1975년 11월, 왕정의 마지막 총리가 이복동생 수파누봉과 함께 국왕 사왕 밧타나를 찾아가 퇴위를 권했다.
라오스 왕실 출신의 정치가로, 중립파를 이끌며 우파와 파테트라오 사이에서 여러 차례 연립정부를 이끈 총리였다. 왕정의 마지막 총리로서 1974년부터 제3차 연립정부 수반을 맡았다. 1975년 11월 수파누봉과 함께 루앙프라방으로 날아가 국왕 사왕 밧타나의 퇴위를 설득했고, 12월 전국인민대표대회 개막 직후 사임했다. 공화국 수립 뒤 새 정부의 고문으로 남아 1984년 비엔티안에서 사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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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45라오이사라 임시정부 공공사업 장관
- 1951–1954총리
- 1956–1958총리 (민족화해·연립 내각)
- 1960국민의회 의장·총리
- 1962삼왕자 합의로 민족통일정부 총리
- 1974–1975제3차 연립정부 총리
- 1975사임, 새 정부 고문
개혁의 순간마다 검열과 권력에 맞선 시인
1968년 9월 침공을 비판하며 그는 프라하에 들어온 첫 전차와 마지막 전차를 비교해 말했다.
야로슬라프 세이페르트는 체코슬로바키아의 시인이자 기자로, 프라하의 노동계급 문화와 아방가르드 시를 연결한 작가였다. 그는 1929년 공산당의 관료화와 스탈린주의적 전환에 항의해 당을 떠났지만 좌파적 사회 감각을 버리지 않았다. 1948년 이후 작가 탄압을 조사한 위원회를 이끌었고, 1968년 작가대회에서 검열 폐지와 문화적 개방을 뒷받침했으며, 침공 뒤에도 공개적으로 저항했다. 1984년 노벨 문학상을 받았지만 정상화 체제에서는 작품과 공적 발언이 제한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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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1첫 시집 『눈물의 도시』 출간, 체코슬로바키아 공산당 입당
- 1922–1929데베치실 창립에 참여, 공산주의 언론과 아방가르드 잡지 편집
- 1929「일곱 작가 선언」 서명 뒤 공산당에서 제명
- 1930–1948사회민주주의·노동조합 언론에서 기자와 문화 편집자로 활동
- 1949–1956언론을 떠나 전업 작가가 되었고, 출판 제한을 겪음
- 1956작가대회에서 불편한 작가들에 대한 문화정책을 비판
- 1968–1970체코슬로바키아 작가연맹 의장, 뒤이어 체코 작가연맹 의장
- 1984노벨 문학상 수상
핵시대의 군사 전략가
쿠바 미사일 위기 때 그는 군사 선택지를 설명한 뒤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맥스웰 테일러는 제2차 세계대전의 공수부대 지휘관에서 냉전기의 미국 군사·외교 정책가로 변모한 장교였다. 그는 핵무기에 과도하게 의존한 아이젠하워 행정부의 ‘뉴 룩’을 비판하고 재래식 전력과 유연한 대응을 강조했다. 케네디의 신임을 얻어 합동참모본부 의장과 대통령 군사대표를 지냈으며, 쿠바 미사일 위기에서 EXCOMM에 참여해 군사 선택지를 제시하는 동시에 대통령의 봉쇄 결정을 군에 전달했다. 이후 베트남 개입 확대를 지지하며 냉전 군사주의의 가능성과 한계를 함께 드러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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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22미 육군 공병 소위
- 1942–1945제82공수사단 포병 지휘관, 제101공수사단장
- 1949–1951서베를린 주둔 연합군 사령관
- 1953–1955제8군 사령관, 육군참모차장
- 1955–1959미 육군참모총장
- 1961–1962대통령 군사대표
- 1962–1964합동참모본부 의장, EXCOMM 위원
- 1964–1965주베트남 미국 대사